말씀선집 제6권 9편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요한복음 3:1-15 1959년 6월 7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있는 천국 입니다. 새로운 나와, 그 새로운 내가 살 수 있는 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과 우리가 처한 현실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이 동경하면서 찾아 나온 이상세계가 어디냐 하면, 그것이 이제 말하였던 천국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잘 살고 복된 자리에 처하기를 바라는 자는 많으나 '잘 살았다'. 하고 '복 받았다'. 고 하는 사람은 심히도 적은 것입니다. 그런사정을 놓고 볼 때,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 천국생활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생활형태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계선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천국을 향해 찾아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찾아가서 살아야 할 입장인 우리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이념을 찾고 있고 우리의 몸도 더 좋은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않는 생활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늘도 어려움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생의 생애노정에서도 역시 우리는 소망의 세계를 흠모하는 환경권 내에서 탄식과 원망을 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 자신을 끌고 끌며 넘고 넘어 소망의동산, 이념의 동산, 행복의 세계는 어느 때에 이루어 놓고 살게 될 것인가,또는 어느 때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중심삼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중의 문제요, 인류가 다시 제창하여 해결해야 할 난문제 중의 난문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라 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세계에서 끊어 버리고 살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동산에서 태어났느냐
참된 이념을 가져야 할 인간이 참된 이념을 갖지 못하였고, 행복된 환경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행복의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앞에 내 심정에 스며드는 행복의 전체 요소를 가지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이 이상 불쌍한 것이없고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이 4천년 역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4천년 역사에 왔다 갔던 선열들의 전체 책임을 짊어지고, 또 4천년 역사노정의 인간들이 품었던 모든 이념과 소망을 짊어지고, 행복과 천국의 이념을 짊어지고 왔다 할진대는, 그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친구 중의 친구요, 중심 중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활 전체의 중심이요, 소망이나 이념, 더 나아가서는 생사의 중심까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행복이라는 한 명사를 남기고 갔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불행한 사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다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천국 이념권 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노아를 택함도 그러한 것이요, 아브라함을 택함도 그러한 것이며, 모세를 택함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놓고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시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모든 해원을 성취코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또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오던 택한 이스라엘 선민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또 선민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살고 있던 세계의 인류 역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때 있던 만물, 즉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연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이든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고? 4천년 역사노정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개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소개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행복의 동산이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역사적인 새로운 존재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모습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하나의 실체요, 선조들이 싸워 나오면서 찾고자 하던 소망의 존재였다는 것을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오신 것은 역사노정을 헤아려 보면, 과거의 수많은 주의 주장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변천해 나왔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여 서로 선후를 노리고 있는 이런 판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싸움판에서 새로운 한 방향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명력을 가진 어떤 존재물이라도, 오늘 이 시간도 움직이는 동시에 또 오늘 이후 영원한 미래에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주체가 되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생명을 가진 것은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활도 같이하고 싶고, 생사까지 같이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념권 내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으신 만물을 대하여 자기 정열을 다 기울여 사랑과 정적인 인연을 갖고 만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심정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이념은 어디에서 끝이 날 것인고? 인간과 인간이 개재된 곳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직접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역사적인 종말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무어
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돼 있던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을 다 청산해버리는 것입니다. 이 간접적인 조건을 청산해 버리면 인류와 하나님이 직접 부딪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6천년의 섭리역사와 나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냐?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이 옹호하고 사탄이 지배하던 권내에서 움직이던 이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은 새로운 나로서 다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나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오늘날까지 6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의 형태를 갖춘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밀어낼 수 있는 이념을 내가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역군으로서 나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6천년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주장 또는 인간이 찾고 있는 이념적인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갖지 않는 한, 새로운 내가 될 수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가정만이라도 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이념을 실천시킬 수 있는 완전한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다 깨뜨려진다는 걸 알아
야겠습니다
끝날은 어떤 때인가
오늘날 인간들은 20세기 문명을 이루어 놓고 세계를 자유로이 움직일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의 위력은 이 세계를 움직이기에는 지극히 약한 자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념도 지극히 몰락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적인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질적인 면에서도 세계형을 갖추어 나오고 있으되, 내적인 생명력에 있어서는 지극히 미약한 것이 20세기 문명인들입니다. 이념에 사무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시대, 더 나아가서는 참다운 인간의 사랑의 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역사는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뭇 인간들을 대하여 말씀으로 예고하였습니다. 끝날에는 사랑이 다 식어 버릴 것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늘을 배척하고 하늘을 배반할것을 말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다 수고와 고통의 길에서 쓰러질 것을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위력이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문제되지 않을 테지만 끝날에는 고통에 지칠 것이요, 하늘을 배반할 것이요, 사랑의 심정이 갈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세상을 없애 버리고 말 하늘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이념으로써 찾아오실 하늘이기 때문에, 그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올 것이뇨? 생명의 위력을 갖고 올 것이요, 또 이념의 권한을 갖고 올 것이요, 사랑의 원천을 갖고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그분을 기독교에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헤아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념세계는 온 피조만물이 안식할 수 있고 깃들 수 있는 이념, 만물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와 머무르고 싶어할 수 있는 그런 이념과 심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예요.
또 어떠한 정적인 심정이 우러나온다 할진대는 온 만상이 그 심정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심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한 정적인 경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벌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파괴의 섭리로 종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섭리하셨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 앞에 새로운 생명의 동산, 새로운 이념의 동산, 새로운 사랑의 동산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면 오늘날 이 끝날을 맞이하는 내 한 자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이 문제를 해결지으려면 우리를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를 붙들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는 하늘이 사랑하는 택한 선민을 통해서 하신 역사였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품기 위한 역사였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대해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어차피 역사적으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했다고 변명하고 스스로 세워 놓은 무엇이 있다할지라도 내 한 자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타락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권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되어야 할 생애요, 부정되어야 할생활이요, 부정되어야 할 죽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과 천국을 분별하시고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문을 개방하여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할진대는, 부정당할 수있는 이념을 갖고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사랑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때 누구를 찾아오셨던고?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천신만고 끝에 선민이라고 세워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을 찾아오셨고 그 가운데에서 택해 세운 유대교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민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십자가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셨느뇨? 하늘을 대신해 나타나셨지만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품고 역사노정을 걸을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나올 줄은 알았으되 심정을 따라나오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정은 받들고 나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오직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타났고, 섭리의 배후에서 움직이신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정은 4천년 역사를 총합한 실체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교인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생명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이념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심정을 거치지 않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이념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느 때 다시 오실 것인고? 지상에서 한 때를 사시다가 가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시게 될 때에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세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과 심정으로 엉킨 새로운 역사 와 민족을 건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겠다는 명사를 남긴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명사, 이 말은 무한히도 슬픈 뜻을 가진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영광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말로 알기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슬퍼하고 난 후에 다시 소망으로 바라야 할 그런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있다 할진대 그분을 받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한, 6천년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하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것인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모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은 모세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의 2천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그것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만 하늘의 심정세계에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의 신앙자세
더 나아가서는 2천년 전의 유대교인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원한을 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분함이 있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 선민인 그들을 버리고 가면 하늘의 발판이 끊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천적인 그 심정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 자신이 그들을 원망하며 버리고 가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의 역사가 전부다 끊어지고 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분하게 가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분을 품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어야 할 예수님이 죽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니 예수님도 슬펐고 하늘도 슬펐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요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죽이니 그날은 천지가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사셨는가
예수님은 인간 역사노정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으나 사는 것은 불쌍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사셨던고? 예수 자신을 위해서 사신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몰림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이념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열렬한 사랑의 위력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다 펼쳐 보지 못하고사신 분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사셨느뇨?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살다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산 실체를 가지고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
것이 예수님 이후 2천년의 역사노정입니다. 그분의 30여년의 생애는 누구를 위한 생애였던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사신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과타락한 인류를 위한 생애였다는 거예요.
우리는 어떤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새로이 탄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 스며드는 생명의 위력을, 생명의 감촉을 느낀 바가 있었습니까? 이것만이 전인류가 찾아야 할 하나의 이념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것만이 최후에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혹은 새로운 역사를 창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가신 걸음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예수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성신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으니, 하늘이여! 삼위신이여! 이제 땅은 제가붙들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송영이 되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느뇨? 나실 때도 마굿간에서 나셨고, 사실 때도 몰리고 천대받으면서 사셨고, 죽으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의 길 을 통과한 그 심정을 느껴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신도들 앞에 놓인 과제인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슬픈 역사노정이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고, 심판의 때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천적인 생명을 느끼고, 천적인 이념을 품고, 천적인 심정의 충격을 받았다 할진대 그 생명, 그 느낌, 그 이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물론 여러분에게 하늘의 소망을 인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목적 입니다.
하늘의 근심과 예수님의 근심이 이 민족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 민족 앞에 남겨진 그 모든 근심을 맡고 예수님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어떤 싸움의 실적을 갖고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만 비로소 여러분들은 실체를 가지고 부활 단계에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부활했기 때문에 오늘날 지상에서도 그렇게 살아 가지고 부활했다 하는 자리를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되겠습니다.
부활의 과정
새로운 나, 부활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변명할 수 있고, 네 생명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이념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사랑과 심정을 책임지겠다. 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침범해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 하는 기준이 있으면 쳐도 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수많은 사탄들이 쳤다 할지라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적인 권한, 이념적인 권한, 사랑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심중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갖고 대신해서 움직였던 예수님의 실체는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지금 땅 위에는 하늘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혈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갖추고자 하는 민족이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어 억천만대 연면히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혈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것을 사탄이 점거하여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양자입니다, 양자. 혈통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직계의 자녀가 되려면, 직계의 형태를 갖추어야, 즉 천적인 생명의 위력, 생명의 감촉, 생명의 이념, 생명을 지닌 사랑의 충격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는, 새로운 나로서의 천국 백성이 될 수 없고, 새로운 천국의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인데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생명을 찾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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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 있는 천국
요한복음 3:1-15 1959년 6월 7일(日), 전 본부교회.
<말 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 하는 제목은 새로운 나와, 그가 살 수있는 천국 입니다. 새로운 나와, 그 새로운 내가 살 수 있는 천국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과 우리가 처한 현실
땅 위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그 마음에 천국을 소유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 인간이 동경하면서 찾아 나온 이상세계가 어디냐 하면, 그것이 이제 말하였던 천국임이 틀림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잘 살고 복된 자리에 처하기를 바라는 자는 많으나 잘 살았다. 하고 복 받았다. 고 하는 사람은 심히도 적은 것입니다. 그런사정을 놓고 볼 때,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생활이 천국생활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생활형태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계선에 서 있는 내 한 자체는 천국을 향해 찾아가야 할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찾아가서 살아야 할 입장인 우리 자신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더 좋은 이념을 찾고 있고 우리의 몸도 더 좋은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역사 이래에 이것이 최고 좋은 것이요, 이곳이 인간의 본심을 통할 수 있는 곳이라고 장담하고 제시할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생활방식,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조직은 아직까지 인류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바라는 소망의 세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않는 생활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처지에서 오늘도 어려움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생의 생애노정에서도 역시 우리는 소망의 세계를 흠모하는 환경권 내에서 탄식과 원망을 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환경에 처해 있는 나 자신을 끌고 끌며 넘고 넘어 소망의동산, 이념의 동산, 행복의 세계는 어느 때에 이루어 놓고 살게 될 것인가,또는 어느 때에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중심삼고 살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 중의 문제요, 인류가 다시 제창하여 해결해야 할 난문제 중의 난문제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런 문제를 방관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실현되기 어려운 문제라 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세계에서 끊어 버리고 살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우리는 행복의 동산에서 태어났느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땅 위에 한 생애를 갖고 태어난 것이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우리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인간들 중에는 현실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참다운 생애냐 참답지못한 생애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우리는
이 땅 위에 태어나서 살다가 어차피 육신을 벗고 가야 할, 죽어가야 할 입장에 처하여 있습니다. 우리 한 개체들은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죽음이 참된 죽음이고 또 자신이 참다운 곳에서 죽느냐,그렇지 못한 곳에서 죽느냐, 이러한 문제가 여러분과 직접 관계되어 있고,여러분의 생애를 통하여 인연되어 있습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어야할 이런 권내에 우리는 처하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가 부모의 혈육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를 자랑하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지만, 참다운 부모의 심정을 가진 자가 있다면 낳아 놓은자식을 바라보고 탄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난 순간 그 아이가 행복의 보금자리에 누웠다고 해서 고고의 음성을 울리는 그의 일생이 행복스러울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한, 그 낳아 놓은 부모 자신도 역시 기쁨의 심정을 체휼하기 전에 슬픈 심정을 체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탄생이 행복의 동산에서 나지 못한 것을 인정할진대는, 그가 나서사는 생활도 그러할 것이고, 그가 살다가 가는 죽음의 고개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런 권내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임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너는 참다운 생을 고대한 때가 있었느냐, 너는 참다운 생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최후에 맞이할 죽음을 승리적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신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아니오. 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개인 개인들이며 이런 모든 인간들은 타락권 내에처해 있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상적인 마음의 세계에 처해 있는 것이아니고 비정상적인 세계, 비정상적인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살아 나가는 생활 전체, 즉 태어난 그날부터 죽는 그때까지, 어느 누구든지 행복이라는 명사를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바라는 행복이니 이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오늘날 여러분과 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는 내가 되지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스스로 소망의 실체를 이룬 심정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소망을이룬 가운데서 기뻐할 것인데, 오늘의 나는 그런 기쁨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이념적인 실체를 이루었더라면 만상을 대하여 나를 따르라고 자기를 세워 당당히 호령할 수 있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나는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였습니다.
참된 이념을 가져야 할 인간이 참된 이념을 갖지 못하였고, 행복된 환경에서 살아야 할 인간이 행복의 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유와 평화를 노래하고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 앞에 내 심정에 스며드는 행복의 전체 요소를 가지고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인간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볼 때, 우리는 이 이상 불쌍한 것이없고 이 이상 슬픈 일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그런 연고로 이러한 자리에 예수님이 4천년 역사의 모든 짐을 짊어지고,4천년 역사에 왔다 갔던 선열들의 전체 책임을 짊어지고, 또 4천년 역사노정의 인간들이 품었던 모든 이념과 소망을 짊어지고, 행복과 천국의 이념을 짊어지고 왔다 할진대는, 그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마음 세계에서 친구 중의 친구요, 중심 중의 중심이요, 우리의 생활 전체의 중심이요, 소망이나 이념, 더 나아가서는 생사의 중심까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행복이라는 한 명사를 남기고 갔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런 탄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불행한 사망권 내에 머물러 있는 인간들을, 다시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천국 이념권 내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4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섭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그러면 이 섭리를 성취시키려면 먼저 어떠한 작전을 갖고 나와야 되느냐? 하나의 사람을 세워 거룩히 성별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 그대로는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없기에, 하늘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인간과 인연을 맺기 위해 선민을 택하여 나오셨습니다. 이 선민 가운데에서도 선민을 택하여 나오신 섭리의 역사노정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노아를 택함도 그러한 것이요, 아브라함을 택함도 그러한 것이며, 모세를 택함도 역시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놓고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시고,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모든 해원을 성취코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계셨고, 또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오던 택한 이스라엘 선민도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또 선민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살고 있던 세계의 인류 역시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 때 있던 만물, 즉 천상으로부터 지상에 연하여 존재하고 있는 어떠한 피조물이든지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될 입장에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없으면 모르거니와 하늘이 있다 할진대는, 하나의 실체인 인간이 바라는 이념의 중심, 혹은 행복한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는 , 반드시 어떤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섭리의 철칙일 것입니다.
공식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문제를 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사적인 원한을 박차고 인류의 심정에 소개할 수 있는 하나의 원칙적인 기준이 서지 않는다면, 하늘의 어떠한 행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고, 하늘의 어떠한 이념과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의 행복을 대신할 수 있으며, 하늘나라 전체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그러한 심정을 품고 그러한 이념을 받들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하늘과 실체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행복의 동산, 선의 동산을 건설하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섭리하여 동안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는가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고? 4천년 역사노정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기쁨을 소개할 수 없었으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기쁨이 소개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행복의 동산이 건설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이 역사적인 새로운 존재였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한 모습은 선조들이 소망하던 하나의 실체요, 선조들이 싸워 나오면서 찾고자 하던 소망의 존재였다는 것을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 한 자체는 선조들의 소망을 다시 부활시킨 존재요, 또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던 땅을 대신한 소망의 존재요, 또 하나님이 심중으로 동경해 마지 않던 천국이념을 인간 세상에 이루어 놓기 위하여 보내셨던 하나님 대신의 존재요, 또 인간 앞에 있어서는 행복의 동산을 건설할수 있는 우리의 대신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알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셨으되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이 못 되었고, 새로운 세계의 백성을 못 가지셨고, 새로운 세계의 생활을 개척해 놓지 못하셨고, 새로운 세계의 사회와 새로운 세계의 국가를 건설해 놓지 못하고 가셨다는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타락한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고자 하시던 실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의 형태로서 나타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이라든가 환경이라든가 나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중을 그냥 그대로 통할 수 없는 환경이요 사회요 나라요 세계인 연고로, 하늘은 이 세계를 대하여 심판의 명사를 걸고 바라보고 계시다는 걸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늘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뇨? 새로운 것을 고대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앞에 나타나게 될 때,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고 자랑하는 바리새교인들 앞에 나타나게 될 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주장하고 너희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것만 가지고는안 된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천적인 새로운 실체로서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우주관을 갖고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나를 통해야 된다는 것을 명시하시기 위하여, 그런 입장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나서서 싸우신 것이 그의 3년 공생애노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예수님 앞에 나타난 수많은 무리, 이런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제자들을 대해, 예수님은 다시 한번 새로운 무리가 되기를 바라고, 새로운 제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가 새로운 심정, 새로운 이념, 새로운 생명, 새로운 행복을
소개하였다거나 이것들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믿고 따른 사람은 적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 가지고 자기가 품었던 새로운 이념, 새로운 주의, 새로운 생활방식, 새로운 세계 형태, 이것을 다 말씀하시지 못하고 가셨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심정을 품고 허덕이는 예수님 앞에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유대의 관원이요 택한 사람들을 지도한다는 스승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다시 나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종말기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때에 이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하늘은 보고 있습니다. 하늘이 이 죄악 세상을 어느한 때에 심판하여 청산지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끝날을 두려워하면서 신앙노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끝날은 어떤 때이뇨? 옛것을 청산해 버리고 새것을 주장하여 나오는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오신 것은 역사노정을 헤아려 보면, 과거의 수많은 주의 주장은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변천해 나왔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 민주와 공산이 대결하여 서로 선후를 노리고 있는 이런 판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반드시 이 싸움판에서 새로운 한 방향을 다시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하늘은 우리 인간에 대하여 새로운 제2의 자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은 오늘의 내가 아닌 좀더 새로운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양심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와 같은 생
활을 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와 같은 사회, 이와 같은 세계 실정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양심 작용이 있음으로써 내 마음과 내 모든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즉 심중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며 심중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그리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종결짓기 위하여 오셨는데,무엇을 갖고 오셨는고?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갖고 오신 동시에 새로운 사랑을 갖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정을 통해야 할 천륜의 어떠한 운세가 있다면, 그 운세와 연합할 수 있고 같이 움직여 나갈 수 있는 생명의 약동을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존재, 천지의 이념적인 일체의 존재물을 움직여낼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인 이념의 심정을 느끼고 있습니까? 이 모든 만
상을 품고 그 심정으로 녹여낼 수 있는 어떤 사랑의 심정을 체휼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만일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명력을 가진 어떤 존재물이라도, 오늘 이 시간도 움직이는 동시에 또 오늘 이후 영원한 미래에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생명의 주체가 되시는 분인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생명을 가진 것은 어떤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하고 싶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생활도 같이하고 싶고, 생사까지 같이하고 싶은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념권 내에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세계에서 주체적인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지으신 만물을 대하여 자기 정열을 다 기울여 사랑과 정적인 인연을 갖고 만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심정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념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이념은 어디에서 끝이 날 것인고? 인간과 인간이 개재된 곳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이 직접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서 끝납니다. 역사적인 종말기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은 무어
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개재돼 있던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을 다 청산해버리는 것입니다. 이 간접적인 조건을 청산해 버리면 인류와 하나님이 직접 부딪칠 수 있는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일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은 계시나마나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이런 목표를 중심삼고 섭리하시지 않는다 할진대는, 오늘날 기독교에 있어서 심판이라는 명사가 없어야 할 것인데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 것을 보니, 이러한 목적을 중심삼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틀림없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천년의 섭리역사와 나
우리는 타락한 연고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생명의 주체 되시는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이념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요, 사랑의 주인공을 잃어버린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생명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더 나은 우주적인 이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정은 더 고차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타락 이후 인간들이 찾아 나오는 생명력, 인간들이 찾아 나오는 이념,타락한 인간들의 정을 중심삼고 엉클어진 그 사랑이란 것은 타락 역사의출발로 말미암은 것이지, 하나님의 이념이 이루어진 동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6천년의 역사적인 모든 것을 미련없이 밀어낼 수있는 생명력이 필요한 때가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생명력, 6천년 동안 내 힘과 생명의 가치를 자랑하였던 그 모든 것을 다밀어낼 수 있는 생명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6천년 역사는 어떤 역사냐? 생명력을 지닌 인간으로 회복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6천년 동안 사탄이 옹호하고 사탄이 지배하던 권내에서 움직이던 이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 우리들은 새로운 나로서 다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가 새로운 나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오늘날까지 6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나의 형태를 갖춘 어떠한 주의나 사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밀어낼 수 있는 이념을 내가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역군으로서 나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가 없다는 거예요. 6천년 역사를 거부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지금까지의 어떤 주의 주장 또는 인간이 찾고 있는 이념적인 모든 것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갖지 않는 한, 새로운 내가 될 수없다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가정만이라도 정으로 얼크러질 수 있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이 이념을 실천시킬 수 있는 완전한 발판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끝날에 가서는 다 깨뜨려진다는 걸 알아
야겠습니다
끝날은 어떤 때인가
오늘날 인간들은 20세기 문명을 이루어 놓고 세계를 자유로이 움직일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생명의 위력은 이 세계를 움직이기에는 지극히 약한 자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이념도 지극히 몰락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느끼고 있는 정적인 심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물질적인 면에서도 세계형을 갖추어 나오고 있으되, 내적인 생명력에 있어서는 지극히 미약한 것이 20세기 문명인들입니다. 이념에 사무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 시대, 더 나아가서는 참다운 인간의 사랑의 심정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역사는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을 찾아봐도 부부지간이나 부자지간에 있어서 하늘앞에 자랑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찾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부간도 그렇고, 동기간도 그렇고, 친구간도 역시 의리와 인륜의 법도는 물론 정적인 기준까지 다 끝을 바라보고 있는 이 때입니다. 하늘이 그것들을 전부 다 깨뜨려 부수려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 끝날인 오늘날은 이 혼란된 세상을 수습할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이 필요한 때이며 이념적인 권한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한 때가 왔습니다. 이제 생명의 위력을 가진 사랑이 결탁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전체가 단결할 수 있는 , 이러한 형태의 움직임이 필요한 때가 왔
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뭇 인간들을 대하여 말씀으로 예고하였습니다. 끝날에는 사랑이 다 식어 버릴 것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늘을 배척하고 하늘을 배반할것을 말했습니다. 그때는 모두가 다 수고와 고통의 길에서 쓰러질 것을 말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위력이 있다면 어떠한 고통도 문제되지 않을 테지만 끝날에는 고통에 지칠 것이요, 하늘을 배반할 것이요, 사랑의 심정이 갈라질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 때가 끝날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오실 것이뇨? 세상을 없애 버리고 말 하늘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이념으로써 찾아오실 하늘이기 때문에, 그 하늘은 무엇을 갖고 다시 올 것이뇨? 생명의 위력을 갖고 올 것이요, 또 이념의 권한을 갖고 올 것이요, 사랑의 원천을 갖고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그분을 기독교에서는 주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역사노정을 엮어오고 또 걸어온 우리들에게는 내가 즐길수 있었던 어떠한 생명의 감촉보다도 더 강하고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생명의 감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감촉되는 한 자리는 영원한 안식의 자리요, 그 자리는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인 것입니다.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세 제자는 그 변화산상에서 계속 있기를 바랐습니다. 여러분도 이것이 나의 영원한 복지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니, 시작과 끝의 한계를 볼수 없는 그런 경지에서 살 수 있는 심정을 가져보고, 또 그런 체험을 해보았습니까? 온 천지만물이 머리 숙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갖고 나타나게 될 때 그는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헤아리고 그가 바라보는 이념세계는 온 피조만물이 안식할 수 있고 깃들 수 있는 이념, 만물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도 거기에 와 머무르고 싶어할 수 있는 그런 이념과 심정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야 될 거예요.
또 어떠한 정적인 심정이 우러나온다 할진대는 온 만상이 그 심정과 더불어 화동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 심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그러한 정적인 경지가 있다는 거예요. 이러한 내용이 오늘날 인류역사 종말시대에 벌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파괴의 섭리로 종결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섭리하셨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 앞에 새로운 생명의 동산, 새로운 이념의 동산, 새로운 사랑의 동산이 반드시 찾아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끝날을 맞이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러면 오늘날 이 끝날을 맞이하는 내 한 자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고? 이 문제를 해결지으려면 우리를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오셨던 메시아를 붙들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지금까지 역사적인 인연을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섭리역사는 하늘이 사랑하는 택한 선민을 통해서 하신 역사였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품기 위한 역사였던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6천년 역사를 밀어낼 수 있는 생명의 위력을 가지려면, 6천년 역사를 움직여 나오던 천적인 내용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오셨다 가신 예수님께서도 역사적인 하늘의 심정을 통하여 4천년 역사를 밀어냈습니다. 4천년 역사의 모든 것을 청산한 토대 위에 새로운 동산을 건설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심정을 붙들고 역사를 청산하지 않으면안 될 것이요, 그의 심정을 붙들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의 그 심정을 붙들고, 당시에 어떠한 새로운 이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고대했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를 대해서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어차피 역사적으로 부정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잘했다고 변명하고 스스로 세워 놓은 무엇이 있다할지라도 내 한 자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타락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권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정되어야 할 생애요, 부정되어야 할생활이요, 부정되어야 할 죽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 같으나 정상적이 아닙니다. 비정상적인 생애를 살았고, 비정상적인 생활을 했고, 비정상적으로 죽었으되,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은 어떤 곳이냐? 정상적으로 나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고, 정상적으로 죽는 사람만이 가는 곳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지옥과 천국을 분별하시고 지옥의 문을 닫고 천국의문을 개방하여 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할진대는, 부정당할 수있는 이념을 갖고 오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생명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부정당할 수 있는 사랑을 갖고 오시지 않았습니다.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때 누구를 찾아오셨던고?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천신만고 끝에 선민이라고 세워 놓았던 이스라엘 백성, 그 백성을 찾아오셨고 그 가운데에서 택해 세운 유대교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민의 종교인 유대교에 있어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십자가에 달려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예수님이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것이 예수님이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가치와 십자가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 땅에 오셨으며 누구를 위하여 오셨느뇨? 하늘을 대신해 나타나셨지만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역사적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정을 품고 역사노정을 걸을 수 있는 인간들을 만들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나올 줄은 알았으되 심정을 따라나오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받들어 나왔으나
하나님의 심정은 받들고 나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예수님은 오직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나타났고, 섭리의 배후에서 움직이신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심정은 4천년 역사를 총합한 실체의 심정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그 때의 이스라엘 백성과 유대교인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찾아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생명을 붙드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이념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나오는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심정을 거치지 않는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이념이 있을 수 없고, 심정을 통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심정에 있어서는 4천만 역사의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그 심정은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심정을 통해 나오는 것은 생명력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천적인 심정을 대신한 그 자체는 역사적인 생명의 실체였고, 역사적인 소망과 이념의 실체였으며, 역사적인 사랑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한 분을 이스라엘 민족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보다도 더 중히 여겨야 하고, 유대교단보다도 중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듯 중요한 예수님을 그때의 유대교인들 은 잡아죽였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민족적인 심정을
가질 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섭리적인 심정을 가질수 있고, 예수님 한 분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념과 우주 전체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을 그 때의 유대교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몰랐기에 예수를 잡아죽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믿어야 할 것은 죽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생명을 갖추었고,새로운 사랑의 심정을 갖추었던 실체인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어디로 갔는고? 이 세상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가 버렸으니, 죽여 버렸으니, 가고 말았으니 이 땅에는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느 때 다시 오실 것인고? 지상에서 한 때를 사시다가 가셨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시게 될 때에 새로운 형태의 이념을 세워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명과 심정으로 엉킨 새로운 역사 와 민족을 건설하여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기 때문에 다시 오겠다는 명사를 남긴 것입니다.
다시 오신다는 명사, 이 말은 무한히도 슬픈 뜻을 가진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말을 영광의 말로 알고 있습니다. 영광의 말로 알기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에 대하여 슬퍼하고 난 후에 다시 소망으로 바라야 할 그런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이제 새로운 나를 찾아오시는 분이 있다 할진대 그분을 받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분은 새로운 나를 찾아오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 2천년 역사가 경과한, 6천년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하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것인고?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브라함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모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은 모세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신 이후의 2천년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충절을 본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알파요 오메가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그것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싸우는 무리가 되어야만 하늘의 심정세계에서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의 신앙자세
어떤 효자 효녀가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일 것인가? 생활적인 면에서 즐거워하는 부모를 대한다고 해서 즐거워하는 사람이 효자 효녀가 아닐 것입니다.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파란곡절의 과거노정을 그 마음에 느끼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진실로 효자요 효녀일 것이로되, 즐거움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은 부모 앞에 불효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상정이라고 할진대는, 천륜을 대해야 할 미래의 섭리의 뜻 앞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던고? 4천년 역사와 바꿀 수 있는 새로운 부활의 실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역사노정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분, 하늘땅에 대신해서 새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그때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녹음 중단으로 중략)
예수님이 사두개 교인을 위해 오셨고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다는것을 제사장이나 교법사들이 알았던들, 유대교 교인들이 그에게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어서 가시옵소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다 막아 버렸으니, 30여년의 생애를 살다 가신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 오셔서 불쌍하게 사시다가 불쌍하게 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죄일 뿐, 하나님의 죄도 아니요, 예수님의 죄도 아닌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통하여 보내마 약속하셨던 그 메시아의 실체가 누우신 곳이 말구유였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말구유가 웬 말이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을 좋다고들 축하하고 있지만 가슴 아픈 일입니다. 통곡, 통곡, 통곡해도 그칠 수 없을정도로 슬픈 날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오시기를 고대한 그 정성에 사무쳐 있는 사람, 그 지성이 천성에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 있었던들 오시는 메시아를 그렇게 모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를 맞아 준비를 한 사람이 있었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한 시대에 있어서, 2천년 이전의 선조들, 다시 말해 6천년 전부터 4천년까지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조들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원망은 무슨 원망이냐? 오신 메시아를 박대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한 선조들의 처사에 대하여 원망을 품어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2천년 전의 유대교인과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원한을 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분함이 있었다고 하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분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교인들을 대하여 분한 마음이 있었지만, 그 선민인 그들을 버리고 가면 하늘의 발판이 끊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천적인 그 심정을 생각하여 보게 될 때, 자신이 그들을 원망하며 버리고 가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하신 하늘의 역사가 전부다 끊어지고 만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자기 죽음에 있어서는 민족적인 서러움이 있으되 역사적인 인연이 끊기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원수에 대하여 복을 빌지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기뻐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을 사랑해서 복을 빈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서 복
을 빈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데 있어서 사무쳤던 그 심정에 염려를 가중시킬까봐 인류를 위해 복을 빌었던 예수라는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우리들은 분하게 가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분을 품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지금까지 인간들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어야 할 예수님이 죽는 자리까지 나가게 되니 예수님도 슬펐고 하늘도 슬펐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요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이신데, 그 예수님을 죽이니 그날은 천지가 캄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사셨는가
예수님은 인간 역사노정에서는 처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이 땅 위에 태어나셨으나 사는 것은 불쌍하게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사셨던고? 예수 자신을 위해서 사신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몰림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생명과 이념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열렬한 사랑의 위력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다 펼쳐 보지 못하고사신 분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사셨느뇨?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살다 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산 실체를 가지고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고해 나오신 것입니다. 이
것이 예수님 이후 2천년의 역사노정입니다. 그분의 30여년의 생애는 누구를 위한 생애였던가?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사신 생애가 아니라, 하나님과타락한 인류를 위한 생애였다는 거예요.
또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애쓰셨느뇨? 하나님께서도 지금까지 자신을 위하여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타락하여 죽어진 이 백성들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애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날은 어떤 때뇨?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못하셨으니 그예수님께 자신을 세워 살 수 있는 한 때를 인류가 부여해 드려야 됩니다.지금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움직이지 못하셨으니, 그 하나님께 자신을 위하여 움직일 수 있는 한 때를 세워 드려야 됩니다. 그러한 때가 끝날입니다.
오늘 이 때까지 하나님은 타락의 혈통을 받은 인간, 죽은 인간들을 살리시려고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도 2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자기를 위하여 사시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어진 인간들을 붙안고 다시 살려 주기 위하여 새로운 날을 회복하시는 섭리를 6천년동안 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각오를 해야 되겠는가? 새로이 탄생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 스며드는 생명의 위력을, 생명의 감촉을 느낀 바가 있었습니까? 이것만이 전인류가 찾아야 할 하나의 이념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것만이 최후에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혹은 새로운 역사를 창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있다 할진대 여러분은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생활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이 가신 걸음을 다시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땅을 바라보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근심이 스며있고 하나님이 이루어야 할 수고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이여! 그모든 것을 저에게 맡기시옵고 안식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슬퍼하시니 하나님도 슬퍼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 하나님도 죽음의 고통을 느끼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신 예수님을 우리들이 믿고 있는 한, 여러분이 부활하여 끝날의 심판대를 넘어서 가지고 부활하신 주를 다시 모실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이 있다 하여도, 여러분의 마음은 영광의 세계를 흠모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천국 주권을 회복하고,하나님 앞에 영광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안위시키고 만민을 안식시켜야 할분이었으되, 한 때도 그런 말, 그런 심정을 가지고 즐거워해 보지 못하셨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사시다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의 심정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하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예수님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고, 성신이 아직까지 이 땅을 붙들고 있으니, 하늘이여! 삼위신이여! 이제 땅은 제가붙들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송영이 되려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떠했느뇨? 나실 때도 마굿간에서 나셨고, 사실 때도 몰리고 천대받으면서 사셨고, 죽으실 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십자가의 길 을 통과한 그 심정을 느껴야 할 것이 오늘날 통일신도들 앞에 놓인 과제인 것입니다.
영광이 있다면 내가 영광을 노래하기 전에 주님이 아버지 앞에 노래하고 아버지께서 만민 앞에 노래하셔야 됩니다. 그런 후에 내가 영광을 노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만민 앞에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하려면 먼저 이 땅이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먼저 하
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을 안식시켜 드려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창조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고, 예수님에게도 구주로서의 위신이 설 수 있도록 해 드려야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신은 일개 족속과 제한된 어느 민족 앞에 세우는 것이 목적이아닙니다. 하늘과 땅, 천상과 지상의 모든 존재물,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 지옥에 가 있는 영인들까지도, 심지어 사탄까지도 당신은 하늘의 아들이라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슬픈 역사노정이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고, 심판의 때가 아직까지 당도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천적인 생명을 느끼고, 천적인 이념을 품고, 천적인 심정의 충격을 받았다 할진대 그 생명, 그 느낌, 그 이념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물론 여러분에게 하늘의 소망을 인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목적 입니다.
하늘의 근심과 예수님의 근심이 이 민족 앞에 있으니, 우리에게는 이 민족 앞에 남겨진 그 모든 근심을 맡고 예수님을 해방시키고 하나님을 안식시킬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마음을 중심삼고 여러분들이 어떤 싸움의 실적을 갖고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만 비로소 여러분들은 실체를 가지고 부활 단계에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후 부활했기 때문에 오늘날 지상에서도 그렇게 살아 가지고 부활했다 하는 자리를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우리들은 새로운 나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야 되겠습니다.
부활의 과정
하나님의 역사는 새로운 개인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가정을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민족을 찾으셔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으셔야하고, 더 나아가서는 천국을 찾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자체로서 그의 인격적인 가치, 천적인 인격의 기준을 이 땅 위에 세워 놓고 가지 못하신 연고로, 지상에 오셨다 가실 때에 신랑 신부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천적인 개체를 세우시어 가정을 찾고, 그 가정을 표준삼아 민족을 찾고, 그 민족을 표준삼아 국가를 찾고, 그 국가를 표준삼아 세계를 찾고, 더 나아가서 하늘땅을 복귀하여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나, 부활된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거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내가 너를 위하여 변명할 수 있고, 네 생명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이념을 책임질 수 있고, 네 사랑과 심정을 책임지겠다. 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침범해도 하나님께서 책임지겠다 하는 기준이 있으면 쳐도 또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수많은 사탄들이 쳤다 할지라도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명적인 권한, 이념적인 권한, 사랑적인 권한이 하나님의 심중과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심정을 갖고 대신해서 움직였던 예수님의 실체는 부활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런 심정을 갖고 있으면 내 생명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이념의 위력을 누가 침범하며, 내 정적인 위력을 누가 침범하겠습니까? 하늘과 더불어 있다 하면, 사탄에게 천만 번 맞더라도 또 천만번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살아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갖고 심판대 앞에 나서야만이, 새로운 기준을 가진 새로운 나로서 하늘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고, 천국 백성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천국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고. 오늘날 우리가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서는역사적인 모든 것이 전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끝날이 되면 나 자신이 죽어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날이 오기 전에 사탄세계
에서 죽어져 가지고 먼저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권한을 밟고 올라서서 부활의 영광을 느낄 수 있어야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심정을 품고 땅 위에 어떠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늠름하게 하늘의 생명과 하늘의 이념과 하늘의 심정을 품고 그것을 녹여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고대하던 제2의 나의 모습, 새로운나의 모습,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의 자격을 갖춘 모습, 새로운 시대에 합
당한 모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
지금 땅 위에는 하늘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혈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념을 갖추고자 하는 민족이 없어요.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어 억천만대 연면히 하나님과 더불어 남아질 수 있는 혈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오늘날까지 역사적인 모든 것을 사탄이 점거하여 나왔기 때문에 인간은 양자입니다, 양자. 혈통이 달라요. 그렇기 때문에 양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어 직계의 자녀가 되려면, 직계의 형태를 갖추어야, 즉 천적인 생명의 위력, 생명의 감촉, 생명의 이념, 생명을 지닌 사랑의 충격을 받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다 할진대는, 새로운 나로서의 천국 백성이 될 수 없고, 새로운 천국의 자녀를 가질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요, 인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인데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여러분은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새로운 생명을 찾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시대에 남아질 수 있는 무리가 못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