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선생말씀선집 - 제6권 3.신앙자의 태도

만리향 | 20180804183337

말씀선집 제6권 3편


                                       신앙자의 태도

                        히브리서 11:1-32                                 1959329(), 전 본부교회


 <말 씀> 이 시간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신앙자의 태도 입니다. 신앙자의 태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의 본질세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믿는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이 나라를 소망삼아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본 일도 없고 간 일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그럴것이라 믿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 연고로 신앙의 본질이 현실의 모든 조건과 타당성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크고 무한한 하늘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념의 동산으로 존재하여, 나라는 존재와 상반적인 관계를 갖고 언제나 나의 이념을 재촉해야만 거기에서 신앙의 길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느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진정한 신앙자의 생활

 

  이런 심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마음이 몸을 재촉하여 사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한 경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되는 생활의 일편 일편을 체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감촉과 이러한 충격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이념을 실제 생활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힘의 충격으로 주위에서 휩쓸려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까지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반을 닦아야, 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하여 진정한 신앙자로 인정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신앙의 길을 늠름히 넘어가려면


 여러분도 알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圈內)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제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 16백년 동안 하늘을 저버렸던 인류 앞에 다시금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택하여 천추의 한을 푸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노아였기에, 노아는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을 붙들고 120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늘이 세워주고 불러주고 명령하였던 그 인연이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앎이 크면 클수록 하늘과의 인연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뜻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을 더 깊이 느꼈던고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배척했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생활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심인물들의 마음가짐과 생활

 

  그의 동족들, 그의 친근자 등 모든 사람이 배반하였는데 오로지 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할 수 없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졌던 원인은 무엇이? 그래도 자기를 찾아주신 하늘의 인연이 자기의 형제를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고, 자기의 친척을 저버리는 것보다도 더 크고, 자기의 일생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허락하신 그 뜻 앞에 불쌍한 사정이 미쳐지면 머리를 숙이고 눈물로써 그 인연에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은 모세에게 있어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스러운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하여, 선조들의 뼛골을 통하여 자기의 피 살에 뻗혀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그것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애급의 모든 문화를 통달하고 원수 나라의 모든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내적으로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적인 인연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의 서글픔을 알지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에요. 자유로운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민의 후손이 되었다는 그 인연에 사무치게 될 때에, 그는 바로 궁중을 적대시하고 애급 백성을 원수삼아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의 역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인연의 요소를 다시 갖추기 위하여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느낀 것과 각오

 

  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어온 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자기 자신은 하늘땅을 대신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장한 자리에서 느껴진 그 인연의 충격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성상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땅의 성상이, 만민을 바라볼 때 만민의 성상이 자기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픔에 연한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시고 애통함을 가지시고 가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한히 영광된 선한 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자탄할 수밖에 없는 무한히 슬픈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두 교차점에 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앙자의 바른 태도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고 이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분이었음을 역사 이래로 신앙자들 가운데에서 아는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게 될 때, 예수님의 그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감돌고 여러분 자체를 휩쓸어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면, 이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시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존재의식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를 맞을 수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북받치고 사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 알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인적(人的)인 인연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무슨 뜻이었던고? 하늘의 슬픔을 탕감하는 노정에서 자기 일신의 죽음을 통해 어느 한계까지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중까지 연결되어 들어가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처참한 죽음의 길이 남게되지만, 영적인 구원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죽는 것 정도는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거예요.

 

  참된 신앙의 길

 

  이러한 느낌이 여러분의 마음에 용솟음친다면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늘땅을 소유한 자요, 비록 동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땅이 동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길은 인연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길이요, 하늘과의 인연의 탑을 쌓아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하늘땅의 수많은 존재들의 슬픔이 여러분의 슬픔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하늘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서 낙망할래야 낙망할 수 없을 것이요, 탄식할래야 탄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진 모든 것이 선생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 나의 모든 것을 여러분 것으로서 맺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것으로서 남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생각

 

  내가 알건대 여러분이 나를 따르고자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하려고 하지만 그 정성 그 모심을 받기를 주저하고 있는 스승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이 땅 위에서 그런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하셨고, 내가 먼저 아버지 앞에 기쁜 마음으로써 성심을 기울여 매일 매일 경배드리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늘을 대하지 못하는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여러분의 성심을 거부한 때도 많았고, 하늘 앞에 울부짖는 애달픈 심정을 알지 못하게 잘라버리는 것 같은 입장을 취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어떠한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연의 세계의 원한을 생각하고 현실세계의 만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니 그럴래야 아니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바라볼적마다 거기에 싹터 있는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진 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무시할 수 없고 여러분도 역시 나를 무시할 수 없어요. 여러분 끼리끼리는 눈물과 슬픔의 6천년 역사를 거쳐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늘은 하늘의 식구를 고대하였고,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민족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는 민족이 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민족을 바라는 가정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도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는 개인이 되지 않으면 그 개인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

 

    어느 민족도 주권이 없게 되면 오고 가는 사람이 농락하고,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비웃을 수 있지만, 주권이 서는 그날부터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지나갈 수 없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상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못 되어있습니다. 늘 주권이 있는 하늘 백성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백성을 거느릴 수 있는 주권을 갖지 못하면 그 민족은 당하고 저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늘의 섭리를 보게 될 때에,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파를 위주하여 나갈 때가 아닙니다. 선민주의적인 사상을 넘어서 천민주의적인 사상을 하늘의 사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백성 된 위신과 절개를 가지고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역사적인 인연과 인간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을 중심하여 단결할 수 있는 제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단이 나타나지 않는 한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연의 역사를 바라보면, 하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라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이 인연, 이 상대적인 인연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주시하고 있고 역사적인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인연의 심정을 느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순간, 그 자아의 의식이 돌아오게 될 때, 그 나는 오늘의 나로되 이 땅 위에 한정된 나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의 이념권 내에서 보장하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늘은 완성한 자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제가 알진대는 참된 신앙자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의 은사도 오늘의 기쁨의 인연이 미쳐진 은사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인계받은 은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안심하고 명령할 수 있으려면

 

  오늘 나에게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 앞에 먼저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은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진리를 통하여, 어떠한 사정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맺혀진 인연을 통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바를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고 마음에 맹세한 바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결심, 그 맹세, 그 심정에 느껴진 충격을 그날로 종결지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종결지어야 하고 역사와 더불어 해결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은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고로 결심한 그 결심이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며, 혹은 맹세하였던 그 맹세도 역사의 해결점과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책임적인 사명을 느끼는 자가 있어야만이 하늘은 안심하고 명령하실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본연의 인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우리

 

  여러분을 만난 시간이 짧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은사 받은 것이 1개월,2개월, 혹은 1, 2, 3, 4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도 여러분이 그 기간만큼 은혜 받은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이 6천년이나 되었소이다.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러나오면 여러분들은 하늘 대하여 황공할 것입니다. 천만번죽어 마땅할 이 한 일신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는 하늘이 하셨는데 기뻐하기는 내가 하는 이런 사악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인연에서 살고, 본연의 인연에서 울고, 본연의 인연에서 죽는 무리, 그 무리가 역사의 주인이요, 시대의 주인이요, 미래의개척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자들을 모으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세우기 위하여 인연맺는 역사를포기하지 않고 섭리해 나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대하는 인간

 

    역사 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 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신앙자의 제일 표준이 되는 본연의 나

 

     지금까지 하던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면 탄식과 자포자기와 자멸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체를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신앙자에 제일 가까운 표준은 그 소망의 나를 찾아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한 날 그 나를 상봉할 것이냐 하는 심정에 사무쳐 있다 할진대 하늘을 바라볼 줄 알 것이요, 그 나를 찾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은 다시 올 소망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고 나온 것입니다. 역사 행로의 발자취가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땅 위에서 내가 식구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식구를 찾아가 권고하는 이 모든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신랑 되신 주인공을 맞기위한 그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하나의 단장물이요 하나의 장식물인 것을 알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세계는 멀고 무한한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존재라는 마음을 갖고 하늘에 사무쳐 호소하는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아 주실 것이고 소망으로 찾아온 나를 환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여러분의 영적인 체험 시간이요, 영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와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사무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마음이 없는 자는 아버지 앞에 세워질 제2의 자아를 찾을 수 없고 나아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앙을 하는데 참을성이 필요한 이유

 

  그 다음에는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참아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역사노정은 참음의 노정이 었음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민족을 대해 나오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더라도 참으시며 눈물을 흘리신 길이요, 참으시며 피를 흘리신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랑하는 독생자를 원수들이 농락하고, 죽음의 제물로 사라지게 할지라도 하늘은 참아 나오셨습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은 뜻을 세우시고 선열들을 대하여 시대 시대 또는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말할 수 없이 무지무지한 싸움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참아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참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전체의 마음을 다 합하여 참고도 남음이있는 여유의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참으시던 심정의 기준을 넘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은 해원의 기준을 세워심판을 재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끝날에 7년 대환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그리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종말에는 택한 자도 미혹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끝날에는 이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얻는다고 하셨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참음의 종착지

 

   참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요, 참으신 그분이 나와 영원히 같이 살 나의 아버지며, 참으신 그분이 내가 모실 신랑이라고 여러분은 마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린 자가 있다 합시다. 그를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참음의 자리에서 늠름하고, 참음의 자리에서 태연자약할 수 있어야 합니. 하늘 앞에 참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자가 오늘의 이 혼란된 역사에, 참음의 역사 과정에서 행복스러워하는 자보다도 귀한 자인 것을 느낄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오늘의 이 혼란된 시대를 넘어갈 줄 모르는 자는 하늘에 대해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참된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우리의 걸음은 그 소망의 이념을 위하여 행차할 준비를 하고 출발한 하늘의 정병이거늘, 그 발걸음은 앞밖에 모르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뒤에서 소리가 난다고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원수의 소리입니다. 옆에서 다정하게 군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노리는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나가는 환경에는 참다운 친구가 없습니다.

 

   참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의 스승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집안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 참의 고향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나라를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소망의 이념을 귀일점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중심하여 환경적인 어두움과 싸워 그인연을 자랑해야 되겠고 갈급한 심정으로 소망이 이루어지길 고대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런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며 주위의 환경을 해치고 나갈 때에 비로소 하늘의 역사는 가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의 결정선에서 최후의 한 발짝을 내디뎌 그 선을 끊어야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망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날을 맞을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 소유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서 인연맺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길을 가야 할 천적인 조건이 남아 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인 운명을 앞에 놓고 가고 있는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복잡한 유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망을 찾아 나가야합니다.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마음에 품고 소망의 나 한 자체를 고대하면서 이것을 찾아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이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가고 또 나아가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참음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 머리로 고이고, 참음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자의 태도를 지닌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하늘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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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자의 태도

                        히브리서 11:1-32                                 1959329(), 전 본부교회


 <말 씀> 이 시간에 드리려 하는 말씀의 제목은 신앙자의 태도 입니다. 신앙자의 태도 이러한 제목을 가지고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앙의 본질세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믿는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이 나라를 소망삼아 걸어나온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고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그 나라를 본 일도 없고 간 일도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서 그럴것이라 믿고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 연고로 신앙의 본질이 현실의 모든 조건과 타당성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크고 무한한 하늘이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이념의 동산으로 존재하여, 나라는 존재와 상반적인 관계를 갖고 언제나 나의 이념을 재촉해야만 거기에서 신앙의 길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느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는 꿈으로나 상상으로나 또는 어떠한 지혜로운 추측으로써도 이렇다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세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무한한 세계인 것이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선과 행복과 사랑과 이념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가 바라는 신앙의 나라, 우리가 살고 싶어하는 신앙의 천국입니다. 그 세계의 본질을 통해 신앙하는 사람을 땅을 중심삼고 보면 불쌍하다면 지극히 불쌍한 것이요, 외롭다면 지극히 외로운 것이요, 처량하다면 지극히 처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서도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고 그 심정권 내에서 미쳐지는 충격과 자극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땅 위의 어떠한 핍박이나 고통이나 죽음의 길이 가로막더라도, 그 사람이 가는 길을 막을래야 막을 수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먼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진정한 신앙자의 생활

 

  이런 심정이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 마음이 몸을 재촉하여 사지를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한 경지를 향하여 걸어 나가게되는 생활의 일편 일편을 체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속세에 살고 있는 신앙자의 생활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감촉과 이러한 충격의 생활을 할 수 있고 멀리 있는 이념을 실제 생활의 힘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나아가 그 힘의 충격으로 주위에서 휩쓸려 들어오는 사망의 물결까지 밀어낼 수 있는 심적 기반을 닦아야, 늘이 그러한 사람을 대하여 진정한 신앙자로 인정하리라고 저는 보고 있습

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어떠한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될 때에, 기에서 자아의 인식을 통해 느껴지는 것이 어떤 주의나 사상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보다도 더 크고, 그것이 심적 혹은 육적, 또는 생활 환경의 핵심적인 빛의 가치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결정적인 입장에서 승리의 일로를 거쳐 나가는 놀음이 신앙생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핍박이 가중되어 왔, 슬픔이 가중되어 왔으며, 십자가의 길, 혹은 죽음의 길이 가중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노정을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이러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적인 신앙노정을 배반해서는 안 될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바른 신앙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신앙의 길을 늠름히 넘어가려면

 

  이런 신앙의 길을 가면서 어려움의 길, 핍박의 길, 죽음의 길을 늠름하게 넘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느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 한자체가 생겨난 것도 자신이 생겨나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나라에 태어나고 싶어서, 이러한 나라의 백성으로 이러한 부자유스런

환경에 태어나고 싶은 의식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수 없는 어떤 움직임에 휩쓸려서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러한 일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 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될 때에, 이 나라는 존재는 나 스스로 자랑할 나가 아니라 나에게는 역사를 들어, 전체를 들어 혹은 미래를 들어 이념적인 권내(圈內)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망각해서는 안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이 이런 신념과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할진대, 여러분의 신앙길에는 오늘날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일이 벌어지게되고, 슬픈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어려운 일이 미쳐지게 되고, 억울한 죽음까지 부딪치게 되며, 천륜의 인연을 저버리는 신앙자의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되고, 하늘을 배반하기 쉬운 입장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념에 대한 사무친 심정을 지녀야되겠고 내 생활을 이 이념에 의해 관찰해야 되겠습니다. 무한한 신앙세계의 이념과 인연을 맺으면서 자신은 우주적인 인연을 빛내기 위한 하나의제물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이념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런 느낌이 심중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이 땅 위에 감히 여러분을 침범하거나 굴복시킬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인연을 많이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야곱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고 시작된 그 민족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선민의식이 유대민족사를 만들어 왔고, 복귀섭리역사를 계승시켜 새로운 복지동산을 건설하는 노정에 있어서 소망의터전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비단 그 민족뿐이 아니라민족을 거느렸던 민족의 지도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이후 16백년 동안 하늘을 저버렸던 인류 앞에 다시금 새로운 약속의 인연을 맺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노아를 찾아 세웠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잘 것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을 택하여 천추의 한을 푸시려는

하늘의 심정을 안 노아였기에, 노아는 하늘의 뜻, 하늘의 명령을 붙들고 120년 동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는 하늘이 세워주고 불러주고 명령하였던 그 인연이 귀중함을 알게 될 때, 그 앎이 크면 클수록 하늘과의 인연이 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자신을 불러주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뜻이 얼마나 컸었던가 하는 것을 더 깊이 느꼈던고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배척했지만 노아는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드는 생활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중심인물들의 마음가짐과 생활

 

  그의 동족들, 그의 친근자 등 모든 사람이 배반하였는데 오로지 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배반할 수 없다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졌던 원인은 무엇이? 그래도 자기를 찾아주신 하늘의 인연이 자기의 형제를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고, 자기의 친척을 저버리는 것보다도 더 크고, 자기의 일생을 저버리는 것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허락하신 그 뜻 앞에 불쌍한 사정이 미쳐지면 머리를 숙이고 눈물로써 그 인연에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무한한 세계를 그리워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노아뿐만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은 모세에게 있어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자유스러운 환경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하여, 선조들의 뼛골을 통하여 자기의 피 살에 뻗혀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그것을 다 버렸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애급의 모든 문화를 통달하고 원수 나라의 모든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내적으로 이스라엘 선민의 역사적인 인연을 알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입니다. 민족이 민족의 서글픔을 알지못하는 것을 슬퍼했을 것이에요. 자유로운 환경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선민의 후손이 되었다는 그 인연에 사무치게 될 때에, 그는 바로 궁중을 적대시하고 애급 백성을 원수삼아 나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바로 궁중을 뒤로 하고 하늘과 인연이 있는 무리인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뜻을 알고 있는 모세는 이런 심정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으되, 그 뜻을 모르는 유대 백성은 그러한 모세를 알아보지 못한 연고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슬픔과 탄식이 사무치게 된 것을 우리들은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민족을 찾아 주었던 모세는 민족조차 자기를 저버리자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러한 길을 걸을지라도 하늘의 선민된 절개와 지조를 지니고 그 몸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가 품은 신념을 그 누구에게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바로의 학정 하에서 신음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며 눈물을 뿌렸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잠들어 있고 무지한 가운데 있을 망정 눈을들어 축복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자지 못하며 심정의 피기름을 짜면서 민족을 위하여 기도했고, 민족을 대한 서글픈 심정을 갖고 하늘 앞에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한 모세였기에 그 시대의 주인

적인 책임을 질만하였고 하늘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이러한 인연의 역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인연의 요소를 다시 갖추기 위하여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모세를 내세웠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느낀 것과 각오

 

  그뿐만 아니라 그 외의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걸어온 걸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타락한 아담의 모든 실수를 그 몸에 담당하고, 하늘의 슬픔과 만민의 슬픔과 온 만상의 슬픔을 그 몸에 지니고, 하늘의 탄식과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모든 흑암의 조건들을 홀로 담당하고 이것을 타파시키기 위하여 오셨던 제2의 인류 조상인 예수 그

리스도를 우리들이 회상해 봅시다.

  예수님은 땅 위에 어떤 분으로 오셨던고? 그는 4천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범죄로 인한 두려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죄로 말미암은 슬픔을 감촉하지 아니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선의 감촉과 선의 심정에 사무쳐서 지으셨던 본연의 아담 해와를 그 마음으로 동경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의 참된 선의 조상이 되어야 할 아담 해와의 모습을 대신 복귀하기 위한

역사적인 인연과 하나님의 창조의 이념을 대신하여 왔다고 하는 신념이 사회의 어떠한 환경보다도, 살아가는 자기의 어떤 심적 동향(動向)보다도 컸다는 것을 우리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외로움이 있다고 하면, 그 외로움은 하늘과 인연되어있는 외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외로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외로움을 헤아리게 될 때에 자기의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 또한 그 자신이 어떤 소망이나 이념에 사무칠 적마다 인류 앞에 그 소망과 이념을 소개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을 이루어 드려야 하고 선조들이 타락으로 저끄린 모든 죄상을 탕감해야 할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진 자기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는 타락한 아담을 원망하기에 앞서, 타락한 후손을 원망하기에 앞서, 나아가서는 천사장을 원망하기에 앞서 그 원망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한걸음 더 나아가 창세 이후 4천년의 서러운 복귀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가 아버지요 아들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자기 자체인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요, 자기 자신은 하늘땅을 대신한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장한 자리에서 느껴진 그 인연의 충격으로 하늘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성상이, 땅을 바라보게 될 때에 땅의 성상이, 만민을 바라볼 때 만민의 성상이 자기와 영원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깨닫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그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무엇이었던가? 기쁜 인연이 아니라 슬픈 인연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기쁨의 인연을 갖추고 영원한 이념의 동산을 건설하여 하늘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의 일체의 조건이 아버지의 기쁨의 조건을 자극시켜 드리고 그 기쁨의 심정을 노래해야 했으나, 기쁨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슬픔의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면 느낄수록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자기 선조들이 맺은 인연이 기쁨의 인연이 아니고 슬픔의 인연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슬픈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슬플 적마다 각오하였고, 어려울 적마다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륜의 기쁨의 제단을 갖추어 서지 못하는 민족과 유대교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슬픔은 컸습니다. 교단을 알고 보니 안 만큼 슬프고, 민족을 알고 보니 민족을 안 만큼 슬프고, 자기의 종족, 자기의 사정을 안 만큼 슬펐습니다. 이렇게 알면 알수록 그 앎이 기쁨의 조건이 되지 못하고 슬픔의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에 연한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그 심정에는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시고 애통함을 가지시고 가셨음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의 마음은 무한히 영광된 선한 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였으나 그가 살고 있는 현실은 자탄할 수밖에 없는 무한히 슬픈 세계였습니다. 이렇게 두 교차점에 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신앙자의 바른 태도

 

  그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이시고 이 신앙을 세우기 위하여 생애를 바친 분이었음을 역사 이래로 신앙자들 가운데에서 아는자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자가 이 땅 위에 없더란 말입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게 될 때, 예수님의 그 서러움에 하염없이 울 수 있는 마음이 여러분의 생활 속에 감돌고 여러분 자체를 휩쓸어 움직이는 느낌이 없다면, 이는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신앙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불쌍한 이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에 이 민족의 운명에 대해 슬퍼할 줄 알고, 하늘을 찾아나가는 교단들이 산산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에, 여러분은 자신과 뗄래야 뗄 수없는 인연을 가진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면서 예수와 같은 마음으로 역사를 대신하여, 현시대를 대신하여, 미래의 후손을 대신하여 슬퍼할 줄 알아

야만, 여러분의 후손에게 이스라엘에 허락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 인연의 조건이라도 지상에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른 신앙자의 태도는 자기라는 것을 다 없애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야 하늘과 기쁨의 인연을 맺고 사라지는 그시간에 아버지여,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습니다. 할 수 있고, 지금까지 맺어왔던 슬픔과 원한의 인연을 종결짓고 기쁨으로 얽힌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순간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소유할 것이 영원한 나라요, 이러한 자들이 살 곳이 하늘나라요, 이러한 자를 찾기 위한 것이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온 여러분들을 보면 불쌍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찾아 들어올 때에는 그 무엇인지 모르게 인연이 맺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발길을 돌리려 해도 무엇인지 미련을 가지게하는 인연이 여러분들을 끌고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룩된 아니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 나로 말미암은 인연이 아니라면 누구로 말미암은 인연이었던고? 피눈물의 역사를 해원하기 위해 세운 선조들의 공적의 터전이 우리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러한 감촉이 심중에 느껴질 때마다 자기 존재의식조차 잊어버리고, 쓰러지면서라도 하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폭발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최후에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고개를 넘어 기쁨의 세계와 인연될 때에 비로소 주를 맞을 수있는 자격자가 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무엇인지 모르게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북받치고 사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도 알 수 없는 역사적인 한의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알 수 없는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인적(人的)인 인연이 오늘의 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 그러면 여기에서 하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뇨? 땅 위에서 슬픈 인연을 다 탕감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여! 늘의 슬픈 인연을 제가 다 탕감하겠사오니 슬픔으로 인연된 역사의 주인이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슬픈 인연의 세계에서 남아지고 그 세계

에서 하늘이 요구하는 모습이 되고 민족이 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할 수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 할진대는 수많은 십자가가 오늘 우리의 마음에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님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심은 무슨 뜻이었던고? 하늘의 슬픔을 탕감하는 노정에서 자기 일신의 죽음을 통해 어느 한계까지만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게 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하나님의 심중까지 연결되어 들어가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처참한 죽음의 길이 남게되지만, 영적인 구원의 터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자기의 죽는 것 정도는 늠름히 넘어설 수 있었다는 거예요.

 

  참된 신앙의 길

 

  이러한 느낌이 여러분의 마음에 용솟음친다면 비록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늘땅을 소유한 자요, 비록 동지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땅이 동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의 길은 인연의 역사를 이어나가는 길이요, 하늘과의 인연의 탑을 쌓아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껴야만 되겠습니다.

  세상의 친구도 사귀었다가 헤어지게 될 때에는 서운해 하고 슬퍼하거늘, 하물며 하늘을 중심삼고 나가던 인연의 노정이 끊어지는 그 순간은 어떠하겠습니까? 역사적인 슬픔의 순간이요, 천지의 슬픔의 순간이요, 인류와 천상의 슬픔의 순간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를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가도 가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래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배웠듯이 오늘날 우리 개체가 선 위치는 하늘땅과 저나라에 있는 영인들의 한까지 해원성사해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사적인 운명의 제단에 놓여 있는 여러분입니다. 이렇게 제물된 자신의 입장이 슬프다면 무한히 슬플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영인들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의 슬픔, 제물을 바라보고 있는 하늘땅의 수많은 존재들의 슬픔이 여러분의 슬픔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러분은 하늘을 향하여 나가는 노정에서 낙망할래야 낙망할 수 없을 것이요, 탄식할래야 탄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느껴지는 이러한 감촉, 내 마음에 인연되어진 이 충격이 어떠한 영원한 이념까지 인연맺기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필코 이러한 이념을 성취시켜 그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영이 있다 할진대 그 영이 즐겨 살 수 있는 그 세계까지 우리가 건설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땅 위에서 인연된 그 폭과 높이로 말미암아 그 세계를 소유할 수 있는 권한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이렇게 움직이거나 저렇게 움직이면서도, 혹은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죄인이란 심정을 금할래야 금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하늘을 찾아 나가는 신앙자의 길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0년을 이 길을 걷고 있는 저 역시 각오하고 이 길을 나서게 될 때 하늘이여! 제가 하늘을 찾아가고자 하오니, 오늘 하늘과 약속한 이 인연을 죽는 그 시간까지 저버리지 말게 하시옵소서. 하늘이 없어지고 땅이 없어지고 이 몸이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인연에 따라 살고 그 인연에 따라 죽을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라고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고, 십자가가 부딪치고, 핍박이 가중되는 그런 순간 순간 마다 하늘과 약속했던 자신을 그리워하며, 그런 환경에서도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머리 숙여 자기의 미급함과 자기의 불완전함과 자기의 무기력함을 탄식하면서 하늘을 붙들고 울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을 찾아가는 자의 발걸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가진 모든 것이 선생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 나의 모든 것을 여러분 것으로서 맺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것으로서 남기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심정을 통하여 인연되어 있는 민족인 것을, 종족인 것을, 개인인 것을 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말하는

신이 거짓 되지 아니하고, 내가 바라는 이념이 거짓 되지 않는다 할진대, 여러분이 하늘의 뜻을 부정한 만큼 심판의 조건에 걸리지 않겠는가 염려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심정을 가지셨기에 죽어도 가야 했고 살아도 가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자리에 계셨기에 만민이 동정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의 생각

 

  내가 알건대 여러분이 나를 따르고자 하고 스승으로 모시고 정성을 다하려고 하지만 그 정성 그 모심을 받기를 주저하고 있는 스승인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이 땅 위에서 그런 한 날을 맞이하지 못하셨고, 내가 먼저 아버지 앞에 기쁜 마음으로써 성심을 기울

여 매일 매일 경배드리지 못하고 모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쁨으로 하늘을 대하지 못하는 자신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여러분의 성심을 거부한 때도 많았고, 하늘 앞에 울부짖는 애달픈 심정을 알지 못하게 잘라버리는 것 같은 입장을 취할 때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나의 어떠한 욕망을 취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인연의 세계의 원한을 생각하고 현실세계의 만상을 바라보게 될 때에 아니 그럴래야 아니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모양 저런 모양을 바라볼적마다 거기에 싹터 있는 하늘의 슬픔을 염려하는 심정을 가진 자들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만나서 좋아하였다면 좋아한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슬픔이 있다 할진대는 그 슬픔이 오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수 없이 큰 기쁨이요, 땅 위에 슬픔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인 것입니다. 이러한 땅의 슬픔을 해원하고 아버지의 슬픔을 위로할 줄 알며, 땅의 기쁨을 노래하여 아버지의 심정에 묻혔던 기쁨을 드러낼줄 아는 주인공들이 어느 날에야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인고?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주인공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을 무시할 수 없고 여러분도 역시 나를 무시할 수 없어요. 여러분 끼리끼리는 눈물과 슬픔의 6천년 역사를 거쳐 만난 사람들입니다.

  하늘은 하늘의 식구를 고대하였고,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민족을 고대하였고,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늘의 나라를 고대하는 민족이 되지 않으면 그 민족은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민족을 바라는 가정이 되지 않으면 그 가정도 사라질 것이요, 하늘의 가정을 고대하는 개인이 되지 않으면 그 개인도 간 곳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

 

  하나님의 아들딸로 결정될 수 있는 자리

 

  나를 넘고 가정과 민족을 넘어 국가적인 하나의 기준을 세워 놓고 그이념권 내에서 슬픔을 탕감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국가 형태의 이념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 슬픈 인연을 넘은 국가를 소망하여 나오신 아버지를 위안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의 아들딸로 결정될 것이요,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하늘과의 인연이 회복될 것이며, 그런 자리에서 비로소 기쁨의 역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느 민족도 주권이 없게 되면 오고 가는 사람이 농락하고, 지나가는 사람까지도 비웃을 수 있지만, 주권이 서는 그날부터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지나갈 수 없고, 마음대로 농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지상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못 되어있습니다. 늘 주권이 있는 하늘 백성이 못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 백성을 거느릴 수 있는 주권을 갖지 못하면 그 민족은 당하고 저버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60만 대중을 중심삼고 애급에 천국의 주권을 회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주권의 나라를 소망하60만 대중을 인연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광야로 내몰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었던고? 이런 저런 핍박을 받고 죽음의 고개를 거쳐서라도 하늘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하나의 주권국가를 세워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망이 물결쳐 들어오는 광야로 이스라엘 민족을 내몰았던 하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어떤 민족이든지 국가 형태를 갖추어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주권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고 유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늘의 섭리를 보게 될 때에,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교파를 위주하여 나갈 때가 아닙니다. 선민주의적인 사상을 넘어서 천민주의적인 사상을 하늘의 사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백성 된 위신과 절개를 가지고 천적(天的)인 인연과 지적(地的)인 인연과 역사적인 인연과 인간적인 인연을 맺고, 하늘을 중심하여 단결할 수 있는 제

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단이 나타나지 않는 한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한다는 것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는 수많은 원수들이 살았던 역사적인 인연이 있고,농락당했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인연이 사무쳐 있고, 사탄으로 인해 하늘이 슬퍼하였던 뼈저린 역사의 인연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 비록 만나는 것은 일개인이요, 대하는 것은 한낱 인간이지만, 하늘의 인연과 하늘의 사정이 얼크러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 이면에는 우주사적인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이나 하늘이 주권을 찾아 헤맸고, 하나의 주의를 찾아 헤맸, 하나의 인연을 찾아 헤맸고, 참다운 심정을 갖춘 동지를 찾아 헤맸습니다. 모든 것은 출발에서부터 종결까지 이런 역사적인 인연을 거부할 수없으며, 이런 통합적인 인연의 역사 과정을 상속하고 상봉하며 살아 나가는 신앙생활이라 할진대, 아무리 동지에게 결핍됨이 있고, 아무리 식구에게 부족함이 있고, 아무리 식구가 여러분에게 자극을 준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늘과 인연맺기를 바라는 마음 이상의 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이 인연을 저버릴 때 느끼는 슬픔 이상 큰 슬픔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충신이라 하고, 가정과 친척을 위하여 자기 일신을 저버리고 효성을 다하는 사람을 효자라 하고, 가정을 붙들고 자기 일신을 돌보지 않고 제물 삼아 산 여성을 열녀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연의 역사를 바라보면, 하늘은 신랑이요 우리는 신부라는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통하여 바라보는 이 인연, 이 상대적인 인연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주시하고 있고 역사적인 울부짖음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인연의 심정을 느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순간, 그 자아의 의식이 돌아오게 될 때, 그 나는 오늘의 나로되 이 땅 위에 한정된 나가 아니요 영원한 세계의 이념권 내에서 보장하는 나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늘은 완성한 자라고 명명할 것입니다. 제가 알진대는 참된 신앙자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연의 심정을 느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바의 은사도 오늘의 기쁨의 인연이 미쳐진 은사가 아니라 역사적인 인연을 인계받은 은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안심하고 명령할 수 있으려면

 

  오늘 나에게 하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그 마음 앞에 먼저 머리 숙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은 나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진리를 통하여, 어떠한 사정을 통하여, 하늘과 땅에 맺혀진 인연을 통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마음에 느껴지는 것을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마음에 결심한 바를 소중히 생각해야 되겠고 마음에 맹세한 바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 결심, 그 맹세, 그 심정에 느껴진 충격을 그날로 종결지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종결지어야 하고 역사와 더불어 해결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의 은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연을 갖고 있는 고로 결심한 그 결심이 역사와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며, 혹은 맹세하였던 그 맹세도 역사의 해결점과 더불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책임적인 사명을 느끼는 자가 있어야만이 하늘은 안심하고 명령하실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에 사무쳐 있다 하나 지금까지 하늘의 인연을 하루에도 몇 번씩 저버리는 마음을 지닌 사특한 인간을 대하는 하늘의 슬픔은 얼마나 크겠습니까하늘은 이러한 인간을 걸어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야겠습니다.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연이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인연입니다. 천국에 간다 하더라도 벗어날 수 없고 지옥에 가서도 벗어날 수없는 인연입니다. 그러기에 지옥에 가서 고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연의 인연 가운데서 살아야 할 우리

 

  여러분을 만난 시간이 짧다 하더라도, 하늘 앞에 은사 받은 것이 1개월,2개월, 혹은 1, 2, 3, 4년의 역사를 갖고 있어도 여러분이 그 기간만큼 은혜 받은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하늘의 은혜를 받은 것이 6천년이나 되었소이다. 할 수 있는 감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

한 마음이 우러나오면 여러분들은 하늘 대하여 황공할 것입니다. 천만번죽어 마땅할 이 한 일신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는 하늘이 하셨는데 기뻐하기는 내가 하는 이런 사악한 여러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인연에서 살고, 본연의 인연에서 울고, 본연의 인연에서 죽는 무리, 그 무리가 역사의 주인이요, 시대의 주인이요, 미래의개척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이러한 자들을 모으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부르기 위하여, 이러한 자들을 세우기 위하여 인연맺는 역사를포기하지 않고 섭리해 나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심판이 있다 할진대 이 인연을 저버린 자 이상 두려운 심판을 받을 자가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여기에있는 이 건물을 생각하는 자도 아니요, 세상의 어떤 진리를 믿는 자도 아니요, 여기에 모여 있는 이 무리를 생각하는 자도 아닙니다. 이것을 넘어 하나님과 인연 지어진 통일교회를 인식할 줄 알고, 그런 통일교회의 진리

에 자복할 줄 알고 그런 인연으로 모인 통일교회 식구의 감정을 통할 줄아는 사람이 바로 통일교회 식구입니다. 더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

 

  하나님이 고대하는 인간

 

  그 다음 신앙자의 태도는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고대하는 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인연을 갖고 있는 연고로 고대하지 않을래야 고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무엇을 고대하느뇨? 신앙자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신앙자가 되기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실천하는 자가 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나라를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이라는 명사를 걸어 놓고 고대하고 있으나 그러한 단계를 넘어서 생활적인 신앙을 해야 되겠습니다. 즉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식구,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백성, 하늘과 같이 생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즐길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영광

을 돌려드릴 수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은 이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역사 과정의 수많은 우리 선조들 앞에 신앙이라는 명사를 세워 놓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해 고대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 자리에서 싸우고 있는 신앙자로서의 그 자체가 아니라 끝날까지 남아져 아버지와 같이 살 수있는 사람을 고대하셨던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고대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대하신 것은 신앙을 위하여 기꺼이 사라져 갈 수 있는 나, 신앙을 위하여 죽었다가 부활할수 있는 나, 사망권을 벗어나 생명권 내에서 부활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살 수 있는, 그런 나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늘이 고대하던 나, 그 나를 그리워할 줄 알고, 그 나를 찾기 위하여, 그 나를 만나기 위하여 허덕이는 여러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여기에 서 있지만 여러분은 하늘이 고대하는 그 나가 아닌 것을 잘 알 것입니다. 하늘이 찾고 있는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하늘과의 인연이 있다 할진대 본연의 나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자신의 생활 표준으로 세워져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찾는 때에는, 그 나를 자랑하고 나의 가치를 노래하면서 그런 나를 찾던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나를 고대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심정을 잃어버린다 할진대는 신앙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앙자의 제일 표준이 되는 본연의 나

 

  사람은 자기를 중심삼고 시작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해결짓고, 자기를 중심삼고 비판하여 나가는 길이 제일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은 하늘이 찾고 있는 상대적인 나를 추구하는 것보다도 상대적인 나의가치를 추구하는 그 마음에 더()하여 직접적 인연을 가진 자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나를 찾기 위하여 울고 싸우고 하는 충격이 나에게서 시작하여 나 자신을 격동시켜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격동된 나와 소망의 내가 인연을 맺는 느낌을 가져야만 어려운 신앙의 행로를 무난히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이 따르고 있는 이 선생은 오늘의 인간을 대해 무한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처한 인연을 내적으로 무한히 저주하고 싶은 일면 소망하는 그 나를 대해서는 노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와 같은 마음을 시간 시간을 통하여, 생애를 통하여 느낄 줄알아야 하겠습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나 교회관계에 있어서나 어떠한 환경과 처지도 개의치 아니하고 그런 나를 찾아가는 걸음이거늘, 그 일을 내어이 저버릴 수 있으며, 내 어이 더디 할 수 있으며, 내 어이 주저하고 바라볼 수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그와 같은 노정에

서 후퇴하는 자라면 바라던 그 나를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그 시간서부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던대로의 생활을 계속하면 탄식과 자포자기와 자멸적인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고, 능력하고 무기력한 자체를 탄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신앙자에 제일 가까운 표준은 그 소망의 나를 찾아 고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어느 한 날 그 나를 상봉할 것이냐 하는 심정에 사무쳐 있다 할진대 하늘을 바라볼 줄 알 것이요, 그 나를 찾기 위해 싸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려면

 

  하나님께서 창조이념을 세워 놓으시고 바라셨던 한 자체의 모습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소망의 모습으로는 나타났으되 실질적인 모습으로서는 나타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6천년 역사노정을 참고 싸워 나오실 수 있었느냐 하면, 소망의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이, 소망하는 인간을 고대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강하신 연고로, 이리가도 저리 가도 언젠가는 그 실체적인 모습과 상봉할 날이 있을 것을 아시는 연고로 하늘은 지금까지 참아 나오고 계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은사를 갖추었으나 그날을 자랑하지 못하고 다시 오마. 하는 소망의 그날을 세워 놓으시고 가셨습니다. 그 이후 다시 오마 하신 한 날을 그리면서 2천년 동안 싸워 오고 계십니다. 늘도 이렇게 가거늘 땅 위에 있는 오늘의 우리도 그런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이 땅에 지어 놓으신 본성의 모습, 그 나를 세워 주기 위한 하늘의 수고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아는 무리가 되어야 하겠고, 하늘의 체면과 위신을 염려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소망의 그날을 노래하면서 나아갈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즉 영광으로 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날 나는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때 나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이것을 찾는 날까지 어떤 일이 생길지라도 가겠다는 그러한 결의와 맹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했다 할진대는 오늘날까지의 신앙생활이 오히려 나를 유린하는  생활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 이후 2천년 역사 과정을 거쳐오면서 하늘은 다시 올 소망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참고 나온 것입니다. 역사 행로의 발자취가 그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땅 위에서 내가 식구를 위해 봉사하고, 내가 식구를 찾아가 권고하는 이 모든 것은 당연지사인 것입니다. 신랑 되신 주인공을 맞기위한 그날을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은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하나의 단장물이요 하나의 장식물인 것을 알고, 그것을 감사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아버지 앞에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세계는 멀고 무한한세계입니다. 그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존재라는 마음을 갖고 하늘에 사무쳐 호소하는 자리에 나가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찾

아 주실 것이고 소망으로 찾아온 나를 환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이 여러분의 영적인 체험 시간이요, 영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와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사무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마음이 없는 자는 아버지 앞에 세워질 제2의 자아를 찾을 수 없고 나아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앙을 하는데 참을성이 필요한 이유

 

  그 다음에는 참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참아 오셨습니다. 에덴에서 죄를 지은 그날부터 이날까지의 역사노정은 참음의 노정이 었음을 부정할 자는 없을 것입니다. 민족을 대해 나오신 하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더라도 참으시며 눈물을 흘리신 길이요, 참으시며 피를 흘리

신 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나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랑하는 독생자를 원수들이 농락하고, 죽음의 제물로 사라지게 할지라도 하늘은 참아 나오셨습니다.

  또 하늘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은 오랜 역사를 거쳐오면서 세계 어떤 민족 앞에 나타날 때도 유린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몰리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 민족의 하나님이요 그 백성의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참아 나오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지 못하여 타락한 인간이 되었던 연고로 참는 자가 승리의 한 날을 세울 때까지는 하나님도 참지 않을래야 참지 않을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참지 못하고 뜻을 어겼으니 참는 한 자체를 찾기 전에는 하나님의 심정이 해원될 수 없습니다. 즉 참아서 하나님의 심정을 해원해 드리고, 참아서 민족을 해원하고 우주를 해원하여 행복의 한 날을 소망하고, 싸움의 길, 핍박의 길, 음의 길에서도 남아지는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국가를 만나시기 전까지는 참아 나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없고 심판의 행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6천년 동안 참아 나오시며 분한 마음이 사무쳐 있으시되, 심판의 권한이 있으시되 심판하지 못하고 참으시는 아버지의 서글픔과 아버지의 비통함과 아버지의 원통함이 있는 고로 참는 것으로 출발하고 참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에는 심판이라는 명사가 있는데 그 심판은 무엇이뇨? 하늘이 참아 오신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한 때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한 때를 고대하며 참아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통하여 풀 수 있습니다. 심판의 권한을 갖고 심판대에 나서서 원수를 심판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6천년을 참으신 하나님의 그 참으심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노정에서 참으신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고 또 인계받아 아버님! 참으시던 심정을 풀어 놓으시고 나로 말미암아 해원성사 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지고 나서는 자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6천년 동안 하늘은 뜻을 세우시고

선열들을 대하여 시대 시대 또는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말할 수 없이 무지무지한 싸움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참아 나오셨습니다. 이렇게 참아 나오시던 하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전체의 마음을 다 합하여 참고도 남음이있는 여유의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참으시던 심정의 기준을 넘을 수 없고 그로 말미암은 해원의 기준을 세워심판을 재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은 끝날에 7년 대환난이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그리고 성도들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이 종말에는 택한 자도 미혹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끝날에는 이 환난 가운데서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을얻는다고 하셨음을 여러분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참음의 종착지

 

  그러면 그 참음의 종착지는 어디인고? 인내의 종착점은 어디인고? 여러분은 그 종착점을 더듬어서 헤매어 봤습니까? 그곳이 아담가정이었습니까?거기도 아니었습니다. 노아가정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역대 선지자들이었습니까? 거기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내 한 자체에도 역시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이 한 사회에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 있고, 내 이후 후손에게도 참음의 역사가 남아지려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에, 나는 참음의 왕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어 아버지 앞에 나타나야겠습니다. 6천년을 참아 나오신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늘 앞에 나가겠다는 생각이라도 하는 자들이 땅 위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참음이 있다 하지만 그 참음이 역사적인 참음의 종착점과는 먼 거리에 있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인연된 사람들이 지쳐서 못 가겠다. 고 합니다. 통일교회는 좋지만 어려워서 못 가겠. 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자일 거

예요. 땅을 두고 보면 행복한 자일지 모르나 하늘을 두고 보면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가기가 어렵습니다. 가는 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보고 울고, 느끼고 울고, 싸우면서 우는 눈물의 길입니다. 눈물이그칠 시간이 이때인 줄 알았더니 아닙니다. 눈물이 더 연속되어야 하는,

즉 더 참음의 눈물을 고대하시는 하늘의 심정이 있는 것을 알고 하늘이 처량한 모습들인 우리를 기다리는 것을 알게 될 때, 내가 참았다는 그 사실도 하늘 앞에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해방 이후 오늘까지 나왔으나 아직까지 내 참음의 한계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또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끝나기를 바라는 그 시간서부터 자기를 살필 것이며, 그 시간서부터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느껴봐야 되는것입니다.

 

  참으신 아버지, 그 아버지가 내 아버지요, 참으신 그분이 나와 영원히 같이 살 나의 아버지며, 참으신 그분이 내가 모실 신랑이라고 여러분은 마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서 기뻐하고 영광을 누린 자가 있다 합시다. 그를 바라보고 부러워하는 것보다는 참음의 자리에서 늠름하고, 참음의 자리에서 태연자약할 수 있어야 합니. 하늘 앞에 참음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 자가 오늘의 이 혼란된 역사에, 참음의 역사 과정에서 행복스러워하는 자보다도 귀한 자인 것을 느낄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한 심정으로 오늘의 이 혼란된 시대를 넘어갈 줄 모르는 자는 하늘에 대해 배반자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에게 물질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을 참아야 되겠습니다. 지식으로 인한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에 대한 심적인 고통이 있습니까? 이것도 참아야 되겠습니다. 참음의 6천년 역사를 배반하는 그런 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참고 참고 또 참아야겠습니다.망하는 줄 알았더니 남아진 것이 하늘의 역사요, 쓰러지는 줄 알았더니 소생해 나온 것이 하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육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민족의 혼이 꺾어지려 할 때, 민족 정신이 흐려지려 할 때 다시 민족을 새로운 소망으로 이끌어 줄 수 있었던 터전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음의 길도, 죽음의 길도, 어떠한 고통의 자리도, 가혹한 창칼도 참았던 그 터전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족 정신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하늘의 전통적인, 천적인 정신을 이어받을 자 그 누구뇨? 참음의 제단을 높이 받드는 자입니다. 참음의 제단을 받들고 하늘을 향하여 고대하고 있는 무리가 그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가공적이고 공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인 감정, 실제적인 촉감에서 느껴져야 하겠습니다. 그 느껴지는 것은 내가 참을 약속하고 맹세하였던 것과는 문제가 되지 않는 다고 비웃을 수 있고 그런 여유가 여러분의 뱃심으로부터 그 세포까지 움직여져야 합니다. 그런 충격이 없다 할진대 남아진 고난의 도수를 어떻게 채울 것인고? 민족이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세계가 넘어야 할 고난의 고개를 어떻게 넘어갈것인가? 하늘이 넘어가야 할 이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고난의 성을 쌓고 죽음의 성을 쌓으면서 참는 과정을 거친 후 복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할진대는 하나님의 참으심도 어느 한 날에 끝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오늘 우리들은 신앙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늘의 이념을 찾아 나간다고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일의 생명을 노래하고, 내일의 소망을 찾고, 내일의 희망을 기준삼고, 내일의 나라와 내일의 백성, 내일의 민족, 내일의 가정, 내일의 나를 찾아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길인데 그 내일의 나와는 아직까지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 나는 오늘에 있지 않습니. 여기서 찾다가는 전부 다 낙망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도 있지 않습니. 여러분은 먼저 걸을 바의 고난의 길을 다 걸어야 되겠고, 고대할 바의 간절한 심정의 기준을 높여야 되겠습니다. 세울 바의 인류 역사가 남아 있는 한 이것을 청산하기 전에는 그날이 되어지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걸음은 그 소망의 이념을 위하여 행차할 준비를 하고 출발한 하늘의 정병이거늘, 그 발걸음은 앞밖에 모르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뒤에서 소리가 난다고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원수의 소리입니다. 옆에서 다정하게 군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을 노리는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나가는 환경에는 참다운 친구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나아가는 데 있어서는 참다운 지도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참다운 진리를 찾고 여러분이 참지도자를 찾는 자리에서만이 참다운 하늘의 지도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짓 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아무리 참된 자라도 거짓 된 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 과정에는 아무리 참다운 생명의 인연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거짓 된 생명의 인연으로 나타나야 했던 곡절이 있었습니다. 참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의 스승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집안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 참의 고향을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참의 나라를 찾되 여러분의 마음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소망의 이념을 귀일점으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중심하여 환경적인 어두움과 싸워 그인연을 자랑해야 되겠고 갈급한 심정으로 소망이 이루어지길 고대하여야 되겠습니다. 이런 참된 자신의 모습을 자랑하며 주위의 환경을 해치고 나갈 때에 비로소 하늘의 역사는 가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최후의 승리의 결정선에서 최후의 한 발짝을 내디뎌 그 선을 끊어야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망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날을 맞을 것입니다.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 소유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이념을 여러분 것으로서 인연맺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길을 가야 할 천적인 조건이 남아 있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인 운명을 앞에 놓고 가고 있는 우리들은 단단한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런 견지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가서 반성해 보십시오. 나는 과연 신앙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습니까? 소망의 마음을 세워 나오기 위한 신앙이었습니까? 그것을 바라던 나였습니까? 묵은 믿음을 갖고 다 될 줄 알고 모든 것을 해결짓고자 하면 그 길을 못 갑니다.

  바른 신앙의 태도를 지니고 가야 할 우리인 연고로 이제 우리에게 사망의 위력이 부딪혀 온다 할지라도 그 사망의 힘을 청산하고도 남음이 있어야겠습니다. 남아지는 흔적이 있어야겠습니다. 내 정열도 그렇고, 내 충성도 그렇고, 내 노력도 그렇고, 내 참는데도 그렇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이

남아지는 분야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상속의 제1기준이 된다는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이 복잡한 유형을 거쳐 나가기 위해서는 그 소망을 찾아 나가야합니다.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과 미래적인 인연을 마음에 품고 소망의 나 한 자체를 고대하면서 이것을 찾아 나가야겠습니다. 이것을 찾아 나가는 데는 무한한 원수들이 가로막을 것이나 이들과 싸우고 또 싸워야겠고, 나가고 또 나아가며 부딪치고 또 부딪쳐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참음의 제단을 내 어깨로 고이고, 발로 고이고, 손으로 고이고, 몸으로 고이, 머리로 고이고, 참음의 고개를 넘기를 각오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다운 신앙자의 태도를 지닌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과 하늘의 진리를 찾아 나가는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