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문선명 선생은 어떤 교육을 받아왔나 (아버님의 교육철학)

무지... | 20180620092235

7. 문선명 선생은 어떤 교육을 받아왔나

 

차례

○문선명 선생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나·268

○탐구심 강했던 어린 시절·272

○남다른 투지와 뛰어난 예지력·279

○유별난 동정심과 이웃사랑·283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진 인생관·287

○문선명 선생은 어떤 교육을 받았나·295

○인생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수와의 영적 만남·305

○문선명 선생이 하늘로부터 받은 교육·311

○문선명 선생은 가정교육을 어떻게 했을까·314

 

 

문선명 선생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나

 

선생님이 태어난 1920년대의 한국은 3년 흉년이 들고 해서 지극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또한 3·1운동을 중심삼고 일본에 대해 반기를 들고 새로운 투쟁이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에 선생님이 태어났습니다. 선생님 일가가 독립만세 사건을 중심삼고 시련을 겪던 그 터전 위에서 선생님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태어난 1920년은 일제 식민 치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강대국에 짓밟히는 약소민족의 고통과 슬픔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선생님이 청소년 시절에는 비참한 전쟁과 죄악의 세계를 구원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가문에는 배고픈 사람은 절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말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손님이 찾아올 때는 절대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풍이 있습니다. 그래서 팔도강산의 숱한 사람들에게 밥을 먹여 보냈습니다. 왜정 때 일본 사람이 착취하면서 못살게 되자 만주로 피난을 갔습니다. 우리 집이 길가에 있기 때문에 팔도의 수많은 사람이 들러서 밥을 먹고 갔습니다. 어머니가 매일 삼사십 명씩 밥을 해먹이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그러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 했습니다.

 

우리 집이 국도 옆에 있었습니다. “아무 동네 문씨 할아버지 집에 가보라”고 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사랑방에 한 30명이 모여들었던 적도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대단한 성격인데도 시아버지를 모시고 일생 동안 밥 하고 땀 흘리면서도 불평 한마디 안 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3형제분이 있었는데 막내 할아버지(문윤국·文潤國) 되는 분은 목사였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전국 책임자들과 내적인 계획을 해왔습니다. 그러다가 오산학교 직원과 교회 신도, 오산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때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당함으로써 옥고의 생활을 2년 동안 했습니다. 옥고에서 풀려 나왔어도 편안하게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일생 동안 타향살이를 하였습니다. 일경의 박해로 피신 다니다가 강원도 정선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문경유·文慶裕)로 말하면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어디서 바쁘게 빚을 얻어 왔을 경우, 그 빚을 갚는다고 약속한 날에 이자까지 갚아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수행하는 데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400페이지 되는 찬송가를 암송하기 때문에 교회에 갈 때 안 가져갑니다. “아버지, 왜 안 가져가요?”하고 물으면 “그것 가지고 다니면 귀찮은데 뭘 가지고 다녀? 잃어버리고 그럴 텐데 놓고 다니지!”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찬송을 불러요?” 하면 “어떻게 부르다니? 남이 부를 때 따라 하면 되고, 모를 땐 내 앞에 선 사람 것을 보고 부르면 되지” 하면서 찬송가를 머리에 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어머니(김경계·金慶繼)는 여장부입니다, 여장부. 대 한량입니다. 한량이라는 말은 좀 나쁘지만 말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닮았어요. 앞뒤가 두리둥실하거든요. 납작하지 않습니다. 옆으로 쓱 보면 말입니다. 어머니는 힘이 장사였습니다.

 

선생님 자신, 또 지금까지 선생님의 가정이 생활해 나온 것을 쭉 되돌아보면 하나님은 어느 한 때에는 축복을 해주시지만 모질고 무자비하십니다. 선생님의 가정은 증조부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에 와서 탕감을 받았습니다. 축복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축복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을 받았습니다. 열 개만한 축복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만큼 탕감을 받아야 됩니다. 어떤 것을 지탱시키고, 그 씨를 남기기 위해서는 탕감을 받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가정을 위한 씨가 아니라 종족을 위한 씨를 남기려면 그 가정에 축복 이상의 시련을 사탄이 퍼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선생님 가정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산이 탕진되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뜻을 찾아 나올 때까지 배후에는 3대에 해당하는 탕감의 인연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아버지 대에서도 탕감을 받았고, 내 대에서 형님까지 탕감을 받았습니다.

 

탐구심 강했던 어린 시절

 

고향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교육의 재료를 80퍼센트 이상 공급하는 곳이기 때문에 인간은 고향과 인연을 끊어 버릴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태어난 고향 , 옛날에 내가 자라던 그 뜰, 내가 놀던 그 동네에서 그것들을 실제 교재로 삼아 교육하고 싶습니다. 그 산하에서 뛰놀던 그때 그 시절을, 여러분이 죽기 전에 직접 선생님을 통해서 설명을 듣게 될 때에 선생님의 역사를 확실히 아는 여러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 정주 , 선생님이 태어나 자란 그곳에 가서 선생님이 어릴 때 마시던 물을 마셔 보고, 선생님이 뛰놀던 동산에 올라가 거닐어 보고, 여러분의 아들딸이 그 자리에서 거룩한 찬양의 소리를 높여 하나님 앞에 축배를 드리게 될 때, 선생님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지 못했고 선생님을 받들지 못했던 것을 해원성사하고 탕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태어난 고향 , 그 동네에서 그것들을 실제 교재로 삼아 교육하고 싶습니다. 그 산하에서 그때 그 시절을 여러분이 생전에 직접 선생님을 통해서 설명을 듣게 될 때 선생님의 역사를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차피 이 스승의 고향 산천을 찾아가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고향 산하의 모든 동식물, 자연계는 내적인 인간, 풍요함을 키우는 데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의 산천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산을 보고서는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일까? 저 산에 뭐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였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곳을 가 보았습니다. 그래서 한 이십 리 안팎에 있는 것을 훤히 알았습니다.

 

어린 시절 활동 범위가 크고 넓었습니다. 정주 일대에 거의 안 가 본 데가 없습니다. 높은 산꼭대기에는 모두 다녔습니다. 그 너머까지도 가 봐야 했어요. 그래야 아침 햇빛에 보이는 저 속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 머리에 들어옵니다. 그런 모든 곳이 선생님이 신앙적인 정서를 길렀던 고향 산천입니다. 고향 물이요, 고향 나무요, 고향 땅이요, 고향 봄바람이요, 지난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어렸을 산에 다니면서 꽃이라는 꽃은 직접 만져 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르는 꽃이 없어요. 자연을 너무 좋아하여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해가 지도록 어울려 돌아다니다가 피곤해서 자다 보니 밤 12시 되어 어머니 아버지가 와서 데리고 갈 때가 많았어요. 자연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우리 집에 가면 밤나무가 있어요. 2백 년 된 밤나무인데 그렇게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내가 원숭이 띠라서 그런지 나무에 잘 올라 다녔습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조그만 나무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 그걸로 톡톡 밤송이를 따면 참 재미가 있었습니다.

 

산에 보이는 모든 , 그 휘하에 날아다니는 모든 새는 다 내가 감정하고서야 날아다니게 합니다. 처음 보는 예쁜 철새가 오게 되면, 요놈의 새가 수놈은 어떻게 생겼고, 암놈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이 알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그걸 알 수 있는 책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철새를 찾아가 연구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을 밥을 안 먹고 기다립니다.

 

한번은 까치가 알을 낳는데 매일같이 그것이 궁금한 겁니다. 그것을 확실히 알기까지 밤잠을 못 잡니다. 저녁에 올라가 보고 또 새벽부터 까치가 나오기 전에 쓱 올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오르내리니까 까치와 친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죽겠다고 깍깍거리며 야단을 치더니 매일같이 올라와도 지장이 없으니까 그저 가만히 있습니다. 그래서 새끼에게 무엇을 잡아 먹이고 무엇을 하는가를 전부 관찰했습니다.

 

선생님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곤충을 많이 잡아 보았습니다. 안 잡아 본 곤충이 없을 정도입니다. 또 안 잡아 온 동물, 짐승이 없습니다. 호랑이는 잡아 보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살쾡이로부터 너구리, 토끼, 다 잡아 보았습니다. 흥미진진합니다. 그것들이 혼자 사는 줄 알았는데 다 짝이 있었습니다. 전부 쌍쌍입니다.

 

눈이 오면 몇십 되는 동산을 밤에 지팡이 끌고 다니면서 족제비 사냥을 하고 낮에는 토끼 사냥을 많이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동네 개라도 짖게 해서 따라오게 한 뒤 한 고개를 넘어 “야 저 뒤에 가서 몽둥이로 후려갈겨라” 해서 개몰이를 했습니다.

 

바다를 배우기 위해 방학 같은 때에 매일같이 바다로 나갑니다. 구정물 냄새 나는 못에서 감탕밭이나 게 구멍 등 별의별 곳을 다 뒤진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낚시질하는 거지요. 뱀장어 같은 것을 잡는 데는 선생님이 챔피언입니다.

 

손님이 오든지 해서 뱀장어 찜이 먹고 싶다 하면 30, 한 시간이면 됩니다. 선생님이 뛰기도 잘 뛰거든요. 시오리 길을 달려 어느 못에 가서 한 15분이면 뱀장어 댓 마리씩 잡아옵니다.

 

우리가 양봉도 많이 했지만 아카시아 꿀은 맛있습니다. 이 아카시아 꽃에 벌이 앉아서 머리를 처박고 먹을 때는 앞뒷발을 버티고 꽁무니는 아래에다 받치고 빨아댑니다. 그럴 때 핀셋으로 꽁무니를 잡아당기면 꽁무니가 떨어지더라도 안 놓습니다. 얼마나 지독해요? 몸뚱이가 떨어지도록 당기는 녀석도 지독하지만 그 맛을 알고 못 놓는 게 더 지독하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야! 이거 나도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모르고는 살아요. 동네에서 할아버지가 죽었으면 무슨 병으로 죽었느냐고 물어봅니다. 왜 죽었는지 몰라서 궁금하면 반드시 장사 지내고 있는 데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느냐고…. 그러니 동네 일을 훤하게 아는 것입니다.

 

만사에 흥미진진해했습니다. 어느 동네에 가서 똥 푸는 할아버지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남들은 다 냄새가 나서 코를 막는데, ‘할아버지 코는 어떻게 생겼기에 냄새를 못 맡을까? 할아버지 코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게 궁금합니다. 그래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사과나 참외를 주더라도 어머니에게 “이 참외 어디서 났습니까?” 하고 여쭈어 봅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어디서 나긴 어디서 나? 형님이 사왔지” 하십니다. 그러면 “어느 밭에서 사왔어요? 밭에서 살 때 할머니가 땄어요, 아저씨가 땄어요, 아니면 형님 뻘 되는 사람이 땄어요, 누나 뻘 되는 사람이 땄어요?” 하고 또 여쭤 보는 겁니다. 그거 아주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학창시절 나의 질문에 대답을 도망간 선생님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물리학에 나오는 공식이나 정의를 누가 내렸소? 나 못 믿겠소. 내가 알게끔 설명해 주시오” 하고 질문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내가 전부 검증하기 전에는 믿지를 않았어요. 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 공식을 가르쳐 주면 그것을 중심삼고 학교 선생을 몰아칩니다. 누가 이렇게 공식을 만들었느냐는 거예요. 내가 만들기 전에 만들어서 기분 나빠하는 거예요. 내가 만들어야 할 텐데…. 그러니 들추고 헤치고, 파고 또 파는 놀음을 했습니다.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시험 전날 공부한 것이 틀림없이 적중합니다. 선생님이 강의한 것 가운데 시험에 나올 확률이 가장 높은 것, 두 번째로 높은 것, 세 번째로 높은 것을 쭉 빼서 보고 그 외에는 안 봅니다. 그것만 동그라미 칩니다. ‘내가 테스트하면 이렇게 할 것이다’ 하고 심리적으로 분석해서 준비하면 틀림없이 70퍼센트 이상 맞는다는 것입니다. 1, 2, 3, 4, 5, 6… 하는 선생님의 암호가 있어요. 보통사람은 봐도 모릅니다. 시험 때는 한 장에 숫자만 ‘딱 딱 딱’ 해서 적어 놓으면 자면서 쓰더라도 70점 이상 받습니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서 머리에 남지 않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것이 보통이지요.

 

씨름을 하더라도 져요. 축구 같은 것도 잘 합니다. 이런 체격을 하고 있어도 빠릅니다. 젊었을 때에는 철봉도 하고 말입니다, 여러 가지 운동으로 단련을 해 두었습니다. 지금도 남들이 모르는 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선생님이 개발했어요.

 

6개월 동안 골방에 들어가서 ‘기역 니은’부터 발음 연습을 다시 했습니다. 발음을 전부 파악할 때까지 훈련을 했어요. 그래서 말이 빨라졌습니다. 말투도 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옛날 청소년 시절에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내가 하숙하던 집주인이 당시 차를 운전하는 등 잘사는 강원도 어느 집안 맏아들입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운전사라면 아주 난 사람입니다. 그 양반은 팔도강산 안 돌아다닌 데가 없었어요. 민요라면 모르는 게 없었고, 레코드판 수백 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 아줌마를 내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 작전을 했습니다. 매일같이 저녁에는 밥상을 들어다 주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무슨 심부름을 시키면 해주고,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겁니다. 이렇게 작전계획대로 했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며칠 이내에 홀딱 반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사위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삶아 놓은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그리하여 그 레코드판을 우리에게 다 갖다 줍니다. 몇 장씩 갖다 놓고…. 주인이 와서 봐도 탄로가 안 납니다. 판을 다 듣고 나서는 매번 바꿔 몇 장씩 가져다가 전부 듣는 것입니다. “나는 며칠 이내에 다 듣는다”고 작정하고 24시간 내내 틀어 놓고 지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 좋은 점이 있습니다. 효자는 어머니의 등을 두드려 드리면서 노래합니다. 청춘 남녀들이 서로 좋아하는 심정을 노래하면 그 경지에 들어갑니다. 복귀를 책임지고 선두에 서서 가는 사람으로서 소원성취를 어떻게든 해내야 될 것 아닙니까? 이것이 전부 다 도()입니다. 도의 경지라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은 압니다. 이렇게 해서 밤을 새우는 것입니다. 잘 때는 아예 조그맣게 틀어 놓고 이불을 쓰고 듣습니다. 내가 이렇게 극성맞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든지 하면 누구한테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씨름 챔피언이었습니다. 뜀뛰기라든가, 무슨 운동이든 못 하는 게 없어요. 복싱까지 했으니까요. 못된 사람이 ‘떡’ 하면, ‘훅’ 굴리면 굴러갑니다. 그런 훈련까지 했습니다. 그건 왜 그랬느냐? 싸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혁명을 해야 되겠다, 세상을 한 번 바로잡고 천리(天理)에 부합되는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보겠다는 소신을 가진 이상 거기에는 몸이 건강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투지와 뛰어난 예지력

 

선생님은 울기 시작하면 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별명이 뭐냐 하면 ‘하루울이’입니다. 하루종일 울고 나야 그치기 때문에 하루울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다 나와서 구경하라는 거예요.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해서는 자던 사람들까지 깨게끔 울었지 가만히 ‘쟁쟁’ 울지 않았습니다. 큰일난 것처럼 계속 울었어요. 그래, 목이 붓고 쉬게 되어서 나중에는 목소리가 안 나올 정도였어요. 그리고 가만히 앉아 우는 것이 아닙니다. 훌떡훌떡 뛰면서 상처가 나 살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게 했습니다. 그만하면 선생님이 어떤 성격이라는 것을 알겠지요?

 

양보 합니다. 뼈가 부러져도 양보 안 해요. 죽어도 양보를 안 한다는 거예요. 철이 들기 전 10대 전이지요. 어머니가 뻔히 잘못했는데도 자식에 대해 충고하면 “아니야!” 하는 것입니다. 나보고 일방통행 안 된다고 하면 맞서 싸웠습니다. 대단했지요. 한번은 얼마나 맞았는지 내가 기절하여 나가자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항복을 안 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도 그랬어요. 할아버지도 나한테 충고를 들었습니다. 손자를 가르치겠다고 담뱃대를 들고 뭐라고 하기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훈시하는데 담뱃대 들고 훈시할 수 있어요? 그게 이 가문의 전통이오?” 하고 들이쏘니까 할아버지가 별수 있어요? 조그만 손자를 우습게 알았다가 “네 말이 맞다. 치워야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벌써 열 두 살 때부터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을 다 내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내가 싸워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 넉 달 잠을 못 잔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까지 항복하기 전에 그 집을 그냥 놔두지 않았어요. 악착같은 사나이입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절대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져 본 적이 없어요. 무엇이든지 해서 꼭 이기지 질 것은 생각도 안 합니다.

 

오산 작은 , 그놈은 한번 결심하면 한다고 했습니다. 집에 불을 지른다면 불을 지르고, 도끼로 기둥을 자른다면 기둥도 자르는 것입니다. 소를 죽인다면 죽이는 것입니다. 한다 하면 다 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서면 굴복 안 하고는 안 돼요.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3대가 와서 굴복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내가 여덟 한번 맞고 일가를 굴복시킨 사람입니다. 불을 놓는다면 불 놓는 거예요. 얼마나 지독한 사람인지 몰라요. 눈을 보십시오. 두더지 눈 같은 게 하늘이 보이겠어요?

 

한번은 어떤 녀석이 코피를 터뜨리고 도망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집 문전에서 30일 동안 기다려 끝내는 그의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또 떡까지 한 시루 받아 왔습니다.

 

옛날에 딱지치기를 잘했습니다. 딱지치는 것 알아요? 또 돈치기, 돈을 벽에 쳐서 멀리 가게 하는 것하고, 구멍을 파 놓고 때려 넣는 거 챔피언입니다.

 

젊어서는 또래와 팔씨름해서 적이 없고, 씨름을 해서 진 적이 없습니다. 나보다 세 살 더 먹은 녀석이 우리 동네에 있었는데, 이 녀석과 씨름해서 내가 한번 진 적이 있어요. 지고 나서 6개월 동안…. 시골에서 산 사람들은 알 겁니다. 아카시아 나무가 봄철 되면 물이 올라 껍질을 벗기면 소나무 껍질 벗겨지듯이 벗겨져요. 그래서 봄철에 물이 오를 때 그저 자꾸 휘면 껍질이 떨어지는데 그걸 쭉 벗겨… 이게 질깁니다. 이 아카시아 나무하고 씨름하는 겁니다. “이놈의 자식! 너를 내가 깔고 앉기 전에는 밥을 안 먹는다!” 이래 가지고 6개월 이내에 그를 타고 앉고서야 잠을 잤지, 그러기 전에는 밥 먹을 것도 잊어버리고 잠잘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지독한 사람입니다.

 

옛날 살도 됐을 동네 이십 안팎에 있는 아이들은 졸개였어요. “야, 어느 날 너희 부락에 간다” 해서 아이들을 다 모아 가서 패싸움을 하고 말입니다, 그런 놀음도 했습니다. 매를 맞아 분해서 울면서 우두머리가 누구라고 나한테 보고를 하면 “그래?” 하고 밤잠을 안 자고 혼자 갑니다. 가서 불러냅니다. “이 자식, 너 누구 어떻게 때렸지? 몇 대 때렸지? 이놈의 자식” 하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내가 어렸을 오늘 온다 하면 비가 왔어요. 일주일 이내에 이 동네에서 사람 하나 죽는다, 저 윗동네에서 할머니 하나 죽겠다 하면 죽었어요. 그런 일화가 많아요.

 

벌써 달라요. 동네에 척 앉아서 “오늘 저 윗동네 누구 집 아무개 할아버지 편하지 않겠는데, 병나겠는데” 하면 틀림없어요. 다 알고 있습니다. 여덟 살 때부터 동네방네 선봐 주는 챔피언이었습니다. 사진 두 장을 보고 “이 양반 결혼하면 나빠” 하면 틀림없어요. 전부 다 왱가당뎅가당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가 있습니다.

 

유별난 동정심과 이웃사랑

 

철이 들고 나서는 새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우물을 주었습니다. 내가 정성을 들여 샘물을 파고 “새야, 너는 여기에 와서 물을 먹어야 돼” 하면 와서 먹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먹을 것을 갖다 주면 그걸 먹고, 내가 왔다갔다하는 것을 보더라도 날아가지 않습니다.

 

고기는 안에서는 사는 알고 한번은 물구덩이를 파서 잡아넣었어요. 하루 밤을 자고 나니 다 죽어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정성들여서 널 살려 주려고 하는데 왜 죽었노?”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선생님이 정적인 사람입니다. 고기보고도 “야, 네 엄마가 울겠구나”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잡는 것을 제일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를 내세워 내가 사랑하는 개를 잡는 것이었어요. 내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그 개를 매달아 잡고 있잖아요? 자기 목이 걸린 줄 모르고 그저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 매달린 개를 붙들고 통곡을 했어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개는 믿을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선생님은 겨울에 떨고 지나가는 거지를 보고서는 밥을 먹고 잠을 사람입니다. 그런 성격을 가졌어요. 엄마 아빠한테 그 거지를 안방에 데려다가 잘 먹여 보내자고…. 그런 바탕이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바탕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동네에서 밥을 굶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밤잠을 잡니다.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고 어머니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도 “너는 뭐 동네 사람까지 전부 다 먹여 살릴래?” 합니다. 그럴 때에는 어머니 아버지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다가도 주었습니다.

 

우리 집은 수백 통의 양봉을 했습니다. 시골에는 기름이 없어서 불을 못 켜는 집이 있거든요. 그래서 초(밀랍)를 짓이겨서 일일이 배급을 줍니다. 당시에 돈으로 얼마 하는지는 내가 철부지였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요. 그래서 결국 아버지한테 혼쭐이 났습니다.

 

동네의 가난한 친구들은 조밥이나 보리밥을 가지고 와서 먹습니다. 나는 그걸 보고 내 밥을 그냥 못 먹습니다. 바꿔 먹으면 먹었지요. 또 친구들의 부모가 아픈데도 병원에 갈 돈이 없을 때에는 선생님이 어머니 아버지한테 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병원에 가게 돈을 내라고 합니다. 돈을 내지 않을 때는 “나 돈 쓸 데가 있어 어떤 어떤 물건을 갖다 팔 테니 그런 줄 아십시오”라고 선포하는 겁니다.

 

선생님은 돈이 있으면 전부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일본을 사랑하는 조건을 세우자’ 생각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커다란 삼목(杉木)을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운 적도 있습니다.

 

왜정 때에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고학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너희들 배고프지? 우리 집에 오라”고 합니다. 식권이 나오면 한 달 먹을 것을 다 모아서 “먹어라, 먹어라. 마음껏 먹어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3일 되면 다 없어져 버립니다.

 

학교에 다니기 어려운 학생을 졸업시키기 위해서 동안 학교를 그만두고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노릇까지 했습니다.

 

패거리들이 약한 자를 괴롭힐 때에는, 그들을 모두 단독으로 해치웁니다. ()을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맞을 때의 그 기분, 이것은 모두 인생철학에서 필요한 문제입니다.

 

선생님도 피를 토하며 사경을 번이나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함께 일하던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의리를 위해 생명을 걸고 나 혼자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죽인다고 위협해도 말을 안 했습니다.

 

각목으로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할 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약속을 했으면 자기가 망하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고문을 당한 후 하루 밤만 지나면 그날은 슬픈 날인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아집니다.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마음과 이념은 가두지 못합니다. 나를 치라는 것입니다. 나를 치게 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걸어 나온 길과 하나님이 닦아 나오신 길과 연결됩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칠 테면 쳐라! 내가 너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아! 잘 맞았다.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인류를 대신해 맞았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 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 자리를 지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다진 인생관

 

학창시절에 전국을 다녀 데가 없습니다. 트럭 운전사가 안 태워 줘도 그래도 올라탑니다. 운전석에 못 타면 짐칸에라도 올라탑니다. 트럭을 타고 가서 그 다음날 저녁에 내리면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면 “그래” 합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한바탕 얘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에 홀딱 넘어가 대신 돈을 꺼내서 자기가 지불합니다. 또 논에서 일하는 자기 남편을 위해 밥을 해서 광주리에 이고 가는 아주머니를 길가에 세워 놓고 이야기를 해서 그 밥을 다 대접받은 사람입니다.

 

길을 나서서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 이름난 목사들을 다 만나 봤습니다. 익었나, 설익었나 다 알아봤습니다. 누가 몇 점 짜리이고, 누구는 몇 점 짜리인지 이미 점을 치고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모릅니다. 겉으로 봐서는 그냥 텁수룩하니 지나가는 길손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속살을 다 빼어 이미 하늘 보고서에 기록하고 나섰습니다.

 

선생님은 먼저 지하교회를 편답했습니다. 일본에 신사참배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해방 3년 전부터, 그러니까 스물 세 살부터 지하교회 편답을 시작한 것입니다.

 

내가 뜨개질을 잘합니다. 스웨터 같은 것도 혼자 다 만들어 입었어요. 버선 같은 것도 잘 만들었습니다. 팬티나 베잠방이 같은 것도 혼자 잘 만들었어요. 여자 없이 혼자 살겠다고 모든 것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일생 동안 독신생활 하더라도 이 뜻을 필생의 사업으로 작정하고 나선 사람이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쁜 모자를 떠서 쓸 수 있습니다. 장갑을 떠도 참 빨리 떴습니다.

 

여자 옷을 입고 서울 장안을 다녀 데가 없습니다. 남자 녀석들을 전부 다 골려 먹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암행어사가 돼야 해요. 세상을 조사하려면 샅샅이 해야 돼요. 그런 역사가 많습니다.

 

청소년 때에는 얼마나 극장에 보고 싶었던지. 우리 같은 사람이 영화를 보게 되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를 수 있는 기질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난 절대 안 갑니다. 선생님이 그래서 “그거 뭐 본래부터 안 가는 것보다 자꾸 매일 같이 가자”고 해서 하루에 영화를 다섯 번까지 봤습니다. 그곳에 안 가면 될 것이 아니라 제일 많이 가 보면서, 제일 상극이 될 수 있는 체험을 하고는 안 가는 것입니다. 그거 체험도 못 하고 안 가면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다섯 번씩 다니다가 딱 끊어 버렸습니다. “이놈의 자식들아, 안 간다”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로 3가 같은 데는 유곽이 있었습니다. 그걸 내가 조사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왜 예쁜 여자들이 저 놀음을 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저게 만약에 자기 누이라면 어떡할 거야? 자기 딸이라면 어떡할 거야? 아버지가 되어서, 오빠가 되어서 어떡할 거야?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런 젊은 여자들을 대해 밤을 새워서 얘기해 주던 생각이 납니다.

 

흑석동에 있을 시내에 들어오려면 전차비가 5전이었어요. 5전을 주면 전차 타고 시내에 갑니다. 그렇지만 시내까지 걸어갔어요. 화신까지 45분이면 갔습니다. 빨리 걷는 사람이지요. 보통사람은 한 시간 반 걸립니다. 여름날 학생복을 입고 땀을 흘리면서 걸어다녔어요. 그 돈은 불쌍한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고 싶고, 여러분에게 복지를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지금 민족을 대신해서 주노니 이것을 받아 부디 복의 씨가 되시오” 했습니다.

 

노량진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학교까지 5전이면 전차를 타는데 전차를 타지 않고 그 5전을 넣어 가지고 걸어오다가 내리는 곳쯤에서 적선하고, 갈 때는 노량진에서 적선하고 그렇게 하면서 다녔어요. 그러고 다니면서 “내가 큰소리할 때까지 잘 자라라. 죽지 말고 나와 더불어 크자”고 하면서 나무를 치고 다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플라타너스가 다 없어졌습니다.

 

고향에서 보내온 학비를 가지고 학교로 올라가던 도중 길가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를 만나, 그 환자에게 돈을 주고 입원시켜서 치료해 돌려보낸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금을 내지 못해 독촉받던 생각, 그 때 친구들이 동정해 준 일들은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런 한때의 일이 선생님의 일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압니다.

 

하얼빈 위에 하일라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공부할 때부터 만주전업이라고 하는 전기회사에 취직해서 살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가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소련 말을 배우고 중국 말을 배우고 몽골 말을 배우려고 그랬습니다. 아시아에서의 대륙기지를 앞으로 요리할 것을 생각하고 말을 배우기 위해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3년 동안을 계획했습니다.

 

만주 안동현에 만주전업이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 지점에 가려고 가만 보니까 정세가 편안하지가 않아요. 만주에 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동에 취직해서 받은 모든 것을 반환하려고 갔습니다. 사표까지 첨부하고 비용을 다 가지고 안동에 가서 지점장을 만나 청산지었습니다.

 

선생님도 옛날에는 직장에 가더라도 제일 일찍 가고 제일 늦게까지 일했습니다. 그런 훈련을 했습니다. 일등 안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제일 귀한 자리에 나가고 인계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뜻을 대해서도 새벽같이 일어나고 일생을 이러는 사람이 주인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일본 동경에 가면 긴자(銀座)라는 번화가가 있습니다. 그 거리는 선남선녀들이 아주 잘 차려 입고 다니는, 일본에서 제일 번화한 곳인데, 선생님이 학생복을 벗어 던지고 전신주를 실은 짐수레를 끌고 가면서 ‘너 이 녀석들 길을 내주나, 안 내주나 보자’는 생각을 하고 일한 적이 있습니다.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는 ‘바지’라고 하는 석탄 싣고 다니는 통통선이 있습니다. 120톤 되는 석탄을 세 사람이 도맡아서 하면 밤 한 시까지 일을 끝내야 합니다. 남들은 사흘 걸리는 일을 한 시까지 끝냈습니다.

 

휴일에는 가와사키에 있는 회사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는 유산 탱크가 있는데, 노동자가 그 유산 탱크 속에 들어가 정화하기 위해 원료를 내려보냅니다. 그 장치는 몇 년간 쓰면 못 쓰게 되어 버립니다. 유산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교환하기 위하여 탱크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는 15분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곳에서 싸우면서 일했습니다.

 

일본 유학시절 선생님은 빈민굴에서부터 사창굴에 이르기까지 곳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할 조용하고 장엄한 곳이나 깊은 산과 같은 곳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됩니다. 조용한 곳에서만 공부가 된다는 것은 선생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공장의 몇 백만 마력의 모터나 엔진이 돌아가는 곳에서도 공부합니다. 그런 일을 잘 합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뒤에는 언제나 형사들이 따라다녔습니다. 내가 한국에 나오면 그들이 미리 전화해서 아무개가 지금 한국 어디에 간다고 연락합니다. 선생님이 정거장 개찰구를 나오면 원치 않는 사람들이 와서 인사합니다.

 

학생이었지만 요주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은 선생님을 잘 모릅니다. 한국이 일본 정권 하에 있었을 때, 선생님은 몇 번이나 유치장에 끌려갔습니다. 도쿄(東京)에 있을 때에는 한 달에 한 번은 경찰서에 불려 갔습니다. 그 경찰서는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거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식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식권으로 “몇 그릇이나 먹을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먹어 보자” 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다카다노바바를 쭉 내려가면 절이 있는데, 거기서부터 식당이 쭉 늘어서 있어요. 선생님은 닭고기 계란덮밥을 일곱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일곱 그릇 먹고 나서는 목이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배가 고픈 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자신의 배 만을 채우고 있으면 자신으로부터 민족이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자기에게서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배가 고파서 먹고 싶지만, 그 이상으로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이며, 선생님의 신조였습니다.

 

4년 동안 2식 주의(二食主義)를 실행하십시오. 선생님은 30세까지, 고등학교 시절부터 2식 주의를 실천했습니다. 세 끼를 안 먹고 살았어요. 그래서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밥 한 끼를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건 거룩한 일입니다.

 

선생님은 옷가게에서 옷들을 입었습니다. 그 옷을 보면 반들반들 윤이 납니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는 포마드라든가 무엇인가를 바릅니다. 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불면 머리카락이 날리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릅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봄날이나 여름날에도 바르지 않았습니다. 또 걸을 때에는 밑에서부터 45도 이상 위를 보지 않았습니다.

 

천명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나이가 어찌 뻔뻔스럽게 갖출 것을 갖추어 대로를 활보하며 다닐 있느냐 하면서 나왔습니다. 천리의 공법 앞에 치러야 할 대가를 청산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벌거벗고 이불 속으로 몰래 들어오는 것을 여러 당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일본 여성들 앞에 죄를 안 지었습니다.

 

자기의 성욕을 컨트롤해야 됩니다. 미인들 틈에 들어가더라도 생식기가 일어나서는 안 돼요. 컨트롤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뿌리가 깊다는 걸 알고 그 뿌리에 여러분들이 접을 붙여서 자라야 푸른 동산에서 선생님 같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학생 때에도 감옥 출입을 보통으로 사람입니다. 또 일본 경찰의 고문대에서 뱃심도 부려 본 사람입니다. 그들의 고문은 아주 지독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그때처럼 고문하면 옷에 똥을 싸면서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사지에 죽은 피가 돌만큼, 또 피가 몇 사발 쏟아질 만큼 매도 많이 맞아 봤습니다. 왜정시대에는 군화 발에 배를 얻어맞는 고문도 당했습니다. 두 녀석은 좌우에서 손을 잡고, 또 두 녀석은 위에서 밟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뱃가죽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변소에 가서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 보세요. 그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선생님이 왜정 일본 천황의 모가지를 떼겠다고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각목을 갖다 여기에 놓고 고문을 받는 것입니다. 왜정 때는 군대에서 신는 가죽구두가 있었습니다. 징을 박아 짜박짜박하는 가죽구두로 밟습니다.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한번은 열네 시간 취조를 당하고 고문을 당하여 20미터를 기어서 가지 못할 만큼 되었고, 몇 번씩 죽었다 깨어나는 과정이 반복 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나는 20대에 하나님 앞에 이 민족을 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일본 국민이 천황을 위하는 마음보다 내가 삼천만을 대신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망한다고 믿었습니다. 일본이 선을 먼저 쳤으니까 그들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선명 선생은 어떤 교육을 받았나

 

내가 글방 다닐 때는 하루에 장만 떼면 됩니다. 그래서 30분내에 다 떼는 것입니다. 딱 정신집중해서 하면 30분에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훈장 앞에서 외우면 됩니다. 30분만하면 다 외우는데, 하루 종일 ‘공자 왈 맹자 왈’ 하고 앉아 있어요. 그렇게 다 해 놓고는 훈장님이 낮잠 잘 때 나는 산으로 돌아다녔습니다.

 

옛날에 글방 다닐 거기에 훈장이 대개 논어나 맹자 같은 장을 강의 받아서 다음날 아침에 반드시 강을 바치게 됩니다. 못 바치면 달초(撻楚·회초리로 종아리를 치는 것)를 받게 됩니다. 하여튼 내가 달초 받던 생각이 나요.

 

옛날에도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었습니다. 서울에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학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때로 말하면 소학교입니다. 국가가 인정하는 그러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전 단계로 학원이 있었어요. 그 학원에 가서 공부해서 편입시험을 쳐야 되었어요. 그 학원을 가기 위해서 사촌동생을 충동질해서 혁명을 했습니다.

 

4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 아버지는 글방에 훈료(訓料), 학비 같은 것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땐 훈료라고 했어요. 그 월사금(月謝金)을 다 냈는데 1년도 안 돼 도망치려니 어머니 아버지부터 설득해야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하고 할아버지까지 설득한 것입니다. 사촌까지 설득했어요. 남들은 비행기 날리고 있는데 ‘공자 왈, 맹자 왈’ 해 가지고 안 되겠다는 겁니다. 전부 내가 개척했습니다.

 

선생님은 욕심이 많습니다. 내가 살아생전에 박사학위 세 개 이상 안 하면 죽는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박사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요즘에는 서로가 무슨 명예박사인지, 진짜 박사학위를 주겠다는 데가 너무 많습니다.

 

학원에서 공부한 그때로 말하면 보통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오산소학교, 여기도 오산학교가 있지요? 그때는 오산보통학교지요. 그 학교의 3학년에 편입시험을 쳐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일년 공부하는데 열심히 안 할 수 없지요. 결사적으로 했더니 성적이 좋아서 5학년으로 월반을 허락받은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이십리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8킬로미터를 매일같이 걸어 다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쯤에 사는 애들은 내가 딱 그 시간에 지나가니까, 그때 나오면 절대 지각 안 합니다. 다 과학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쭉 고개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참 길을 빨리 걷습니다. 8킬로미터를 한 시간 이내, 45분에 갑니다. 그러면 뒤에서 따라오기가 바쁘지요.

 

오산소학교에서는 일본 말을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 원수의 자리에서 투쟁한 대표적 사람인 이승훈 씨가 세운 학교이고 그런 학교의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일본 말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적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적에 대해 세밀히 몰라서는 적과 싸우더라도 대비책을 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공립보통학교인 정주보통학교에 편입시험을 쳐 4학년에 들어갔습니다. 그래, 거기 들어가서 일본 말을 유창하게 배워서 졸업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신앙길이라든가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어려운 모든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가게 되면 전부 일본 말을 배워야 합니다. ‘가타카나’ ‘히라가나’를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하루 저녁에 다 외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벼락같이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의 모든 책을 보름 만에 다 외워 버렸어요. 그리고 나니까 귀가 트였습니다.

 

번째 그린 그림이 학교에 붙었습니다. 배우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측정해서 그리는 것입니다. 3등분해서 따라 들어가는 거예요. 저 그림이 저 평원에 몇 등분 안에 들어가 있구나 하고 딱 잡아냅니다. 센터를 중심삼고 측정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도화지가 센터를 중심삼고 3배에 점만 치게 되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적에 공책을 때에는 줄이 쳐진 부분부터 쓰는 것이 아니라 꼭대기부터 썼습니다. 어떤 때는 한 장에 두 번씩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공책 한 권에 더 쓸 수 있습니다. 물건을 아껴 써야 됩니다.

 

선생님은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교장 선생의 행동을 보고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훈련을 끊이지 않고 했습니다. 지금도 기도할 때는 그런 것을 중심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호롱불을 알아요? 호롱불 아래에서 공부하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두 시, 세 시, 밤을 새워 공부하게 되면 엄마 아빠는 “야! 잠자라. 몸이 너무 약해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늘 그랬어요. 그때 내가 친구 삼았던 것이 밤벌레들이었어요. 여름철엔 밤벌레를 친구로 했습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정주보통학교 졸업식 일입니다. 많은 학부형들과 전체 선생들이 축하하기 위해 모였고 정주읍 유지들이 축하하기 위해 다 모였습니다. 그 졸업식에서는 교장의 훈시가 있었고 그 다음에 손님의 축사가 있었는데, 그 다음에 내가 자원해 단상에 올라가서 일본에 대해 반박하던 사실이 잊혀 지지 않아요. 그런 걸 보면 소년시대의 기질이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식장에서 대웅변을 했습니다. 경찰서장 군수를 앞에 놓고 ‘일본놈들, 보따리 싸 가지고 가라!’ 하면서 성토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 때부터 그렇게 하고 나서 경찰서장한테 붙들려 가서 담판한 사람입니다. “이러이러한 내용이 옳지 못한 데 이런 경우에 가만 있겠느냐?” 이래서 그때부터 낙인이 찍혔습니다.

 

서울에 처음 오니까 환경이 너무 달랐습니다. 정주는 시골이지요. 그런 환경에서 살다가 도시로 들어오니 180도가 달라요. 또 얼마나 서울의 범위가 넓은 지 모릅니다. 거기에 박자를 맞추면서 지내던 모든 사실들이 생각납니다.

 

중학교 시절, 청소를 내가 다 했습니다. 전 학교를 내가 선두에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학교를 대신해서 내가 청소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남이 도와주는 거 싫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7년 동안 자취생활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한 게 아닙니다. 여자들을 알아보려고 그런 것입니다. 절대 더운물 가지고는 자취생활을 안 합니다. 찬물, 그저 두레박으로 찬물을 퍼서 합니다. 그러면 손이 짝짝 붙어요. 이래서 쌀도 씻고 하는 놀음을 많이 해봤어요.

 

습관이 되어 많은 반찬이 필요 없습니다. 언제나 간편하고 맛있고 실용적인 것 하나면 됩니다. 언제나 일식일찬입니다. 맛있는 반찬 한 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나라도 없는 주제에 밥을 세끼 씩이나 찾아 먹을 자격이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밥이 그리운 생활을 참 많이 했습니다. 밥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민족을 그리워하는 길을 갔습니다. “밥보다 민족을 더 사랑해야지, 나라를 더 사랑해야지” 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으면서 점심을 안 먹었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생일날 금식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자기 개인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가정적 승리의 기준도 못 넘고, 민족·국가·세계의 승리의 기준도 못 넘은 게 생일 놀이를 해요? 생일 놀이를 어떻게 하겠어요? 춤을 출 수 있어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하늘 앞에 책임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런 것을 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한강을 건너가다 보면 중지도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한강 물을 보고 탄식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너는 천년 만년 흐르건만 얼마나 붉은 마음을 가지고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흐르느냐? 생명줄이 될 수 있는 것이 물인데, 이 비옥한 삼천리 강산을 단장할 수 있는 샘, 어머니 젖과 같은 한강수가 돼야 할 텐데…. 너는 못 하더라도 나는 할거야” 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때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리를 걸어다니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어린애들을 소망의 상대로 여기고 유년 주일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던 지도요원이었어요.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어요. 그 아이들이 선생님한테 미쳤습니다. 학교에도 안 가고 선생님 뒤를 따라다니려고 했어요.

 

나는 예수교 박재봉 목사라든가, 이호빈 목사라든가 하는 사람들의 배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배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지금까지 내 입으로 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과는 인연이 있어서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백만큼의 인연을 중심삼고 만나게 해주었는데 그것을 오십쯤의 인연으로 끌어내리면 끌어내린 사람이 책임져야 합니다. 일단 그 밭에 심어 놓은 것은 그 밭에서 거두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날은 노트 30, 한 권 분량의 일기를 썼습니다. 그때 심정의 모든 비장한 사실을 쓴 그 일기가 왜정 때에 사건이 벌어지면서 자료가 됐습니다. 그 기록 가운데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서 사건 연루자가 되어 줄 연행을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때부터 일기를 안 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첩도 안 가지고 다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 머리 속에 기억합니다.

 

일기를 손으로 불태우면서 눈물을 흘렸어요. ‘내가 앞으로 이런 길을 가게 될 때 필요한 역사적 자료가, 도탄 중에 신음하는 젊은이들에게 해방의 길을 비춰 줘야 할 기록이 여기 있는데 이걸 태운다’고 하면서 목이 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문 선생은 청춘 시절에 배고픔을 극복하고 민족 구도와 세계 구도와 하나님의 구도를 위해서 노력하던 사람입니다.

 

일본에 —그 때는 경부선 열차 히카리()호가 있었어요— 서울역에서 그 열차를 타면서 “내가 갔다 올 때는 패자의 졸렬한 사나이로 흘러갈 것이 아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붉은 마음을 품고 가는 사나이의 길은 하늘이 보호한다. 내가 돌아올 때는 너는 희망에 벅차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 “내가 일본에 가서 배워 올 것이 뭐냐? 이 나라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2세들이 희망찬 전진적 출세를 할 수 있는 길을, 자주적 독립국가를 세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닦아 주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용산역을 떠나 한강 다리를 지나면서 난간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것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고아와 같은 민족을 두고 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외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면서 갔습니다. 일본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나를 보고는 “청년,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나요? 그러한 슬픔은 누구나 당하는 것이 아니겠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슬픔은 오직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왔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던 194141일 새벽 2시 부산 부두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던 일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떠나지만 너를 더욱 더 사랑하고, 너를 위하여 더 많은 눈물을 흘려 주마”고 약속했습니다.

 

원수의 나라에 가서 딛는 시간부터 눈물까지 거두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내가 갈 길을 정해요. 내가 일본의 명승지를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어요. 나라 없는 백성이 그런 간판 붙은 데는 안 간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전기와 과학을 공부했습니다. 내 갈 길을 알았거든요. 내가 과학 공부를 하면서 벌써 전기 방면에 손을 댄 것은… 큰일을 하려면 수학적 계산이 빨라야 합니다. 감정력(鑑定力)이 빨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보이지 않는 것을 관리하는 것이니 종교와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상세계에서는 전기 현상이 발견됩니다. 운동하는 모든 것에서 말입니다.

 

선생님이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시내를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다녀 보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장차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학자들은 어떻고, 노동자들은 어떻고 실제 조사하기 위해 선생님은 뒷골목 거리를 많이 다녔습니다. 밀사를 보내고, 다녀왔습니다. 동경 역에 내릴 적부터 싸워 온 것입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내가 다니던 길입니다. “넌 알 것이다, 한민족이 가는 길을”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애국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요. 길을 건너가나 오나, 나무를 바라보나 “이 만물, 원수의 땅에 있는 만물, 너는 하늘에 속할 것이거늘 나를 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녔습니다.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 졸업했습니다.

 

동경역에 나가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발이 떨어집니다. 그 배를 탔으면 가는 거지요. 하늘이 벌써 선생님을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뒤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전보를 쳐서 못 간다는 연락도 하지 않고 동무들과 등산을 갔어요. 그때가 가을이었거든요. 후지산으로 갔습니다. 내가 등산을 가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갔어요. 일주일 있다가 돌아왔으니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고향에서는 큰일났던 것입니다. 아들이 그 배를 타고, 아무 날 몇 시에 온다는데 안 왔으니 큰일이 났거든요. 야단이 벌어졌어요.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경찰서에 이틀간이나 들락날락했습니다.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서 정주읍까지는 이십 리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이십 리 길을 맨발로 뛰고, 부산까지 기차를 타고 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아들이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나와 부산 수산경찰서까지 가서 확인을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다 보니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곪아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을 떠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지금은 일본 천황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여 민족의 한을 풀지 못하고 가지만, 앞으로는 너희 나라 백성, 너희 나라 청년들에게 명령하고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20년 만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청년 남녀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이 한 500명이 모였는데 그들이 모두 부잣집 자녀들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일본 천황도 필요 없고, 통일교회와 문 선생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명령하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느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한 고민, 그리고 예수와의 영적 만남

 

소년시대부터 인생의 여러 가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디서부터 왔을까?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죽은 후에 우리의 생명은 그대로 계속되는 것일까?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신가, 혹은 무력한 존재이신가?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왜 인류세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가? 이 지구상에는 왜 수많은 고통이 존재하는가?

 

과거사를 돌아볼 , 이것이 추억의 한 말이 될는지 모르지만 그때에는 참 심각했어요. 자기 생애의 미래를 걸어 놓고 어떻게 갈 것이냐 하는 문제를 담판하는 시기였습니다. 이것이 인간만의 결정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 결정적 노정을 취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앙 길에서 고심하던 모든 추억이 생생합니다.

 

선생님은 16세 때에 비상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부활절 아침 오랜 시간 눈물어린 기도 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생님에게 나타나셔서 많은 계시와 교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심오하고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인류 때문에 하나님께서 슬퍼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지상에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역할을 해 달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어렸을 체험한 사실을 말로써 표현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홀연히 펼쳐졌고, 선생님은 자유로이 그 영적인 세계에 있는 성자들과 통신할 수 있었습니다. 북한 땅 고요한 산중에서 선생님은 여러 번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때에 계시된 진리의 내용이 지금 통일원리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예수님을 보았을 , 웃으면서 “아이구. 좋아!” 해요? 그런 예수님을 만나 봤어요? 선생님도 못 만나 봤습니다. 언제나 심각하고 침울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하늘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내가 길을 나설 때는 나이가 여러분보다 어릴 때입니다. 스무 살 전에, 그때에 이 길을 출발했습니다. 그때는 천진난만한 시대였습니다. 좋은 그 무엇이 있으면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고, 또 동네에 색다른 것이 있으면 그것을 알아보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마음이 아주 강한 때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하늘의 뜻을 알고 천적인 대명을 받들고 나서는 그날부터 엄청나고 사명을 이룰 있는 자신이 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받들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할 스스로의 책임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길을 나설 때는 청년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을 때는 그 큰 책임을 어떻게 다 해내느냐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였습니다. 나는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목적하는 길로 가겠다고 하는 힘이 누구보다도 강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려운 길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품고 가는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은 지금 당장의 행복을 위해 미래를 꿈같이 버리는 사람입니다. 선생님도 옛날에 젊었을 때 그런 생각을 했겠나요, 안 했겠나요? 청춘 시대는 한 번밖에 없는데…. 어떤 길을 택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택해야 할 길을 택했습니다. 높은 차원에 비례해 그 인격의 가치라든가 인간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 나를 선택하여 서품(敍品)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께 직접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러한 사명이 나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에 숱한 사연을 남기면서 지금까지 역사의 고비 길을 넘고 넘어 해결 짓지 못한 문전까지 하나님이 찾아왔습니다. 레버런 문이 소년일 때 문전까지 찾아오셔서 통고했는데, 그때가 이 뜻을 알고 출발한 때였습니다.

 

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누구 말을 듣고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한테 감동받아서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누가 전도해서 이 길을 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 동기의 출발점이 어디냐? 하나님입니다.

 

내가 길을 나설 때에도 “하나님 있습니까?” 하고 끝까지 캐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확실히 알고 출발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서 하나님의 소원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 내가 필요합니까?” 하고 여쭈어서 내가 필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필요합니까?” 하고 따졌습니다.

 

10대를 지나고 20대를 향하면서 신앙 노정에서 여러 가지 고민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에 가 봐야겠다. 일본을 거쳐 미국을 갔다 와야겠다. 현지에 가서 약소민족이 서러움을 당하고 핍박받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체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는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되느냐? 하나님의 내정으로부터 사정, 하나님이 가야 할 목적지까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중심삼고 기독교 성경으로부터 모든 경서들을 탐구해 봤어요.

 

선생님이 초라한 입장에서 하나님을 있게 되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였습니다. 여하튼 그 후로부터 9년 동안 선생님은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여러 차례 영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이 놀랄 만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고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진리 안에서 영광스러운 새로운 문화의 서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받은 이 계시는 오늘날 ‘원리’라고 부르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이 원리를 땅끝까지 전파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기도할 때는 등이 구부러지고 무릎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로 해야 합니다. 선생님의 무릎에는 옛날 기도하면서 생긴 굳은살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기도는 마룻바닥에서 해야 됩니다.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선생님은 기도하면서 몇 번이나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인생의 길을 해결 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눈이 붉어져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햇빛을 못 볼 정도였어요. 그런 놀음을 하면서 이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창 때는 18시간 17시간, 보통 12시간 기도했습니다, 엎드려서. 점심을 안 먹어요.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못 살아요. 사방이 꽉 막혀 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기도를 해야 하늘 구멍이 보입니다. 그런 시련 과정을 거쳐 원리를 찾아낸 것입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는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을 위해서 공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 사무친 경지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땅이라면 하루에 천 번도 왔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땅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선생님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괜히 그렇게 정이 가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에 동삼(冬三)에 솜바지저고리를 전부 다 눈물로 적실 때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생각해 보십시오. 칼을 꽂아 놓고 담판기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선생이 하늘로부터 받은 교육

 

내가 수난 길을 걸을 , 하나님이 나 이상 수고하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한마디의 불평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중된 십자가가 앞을 가로막는 일이 천만 번 있더라도, 그 이상으로 수고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수난의 길도 평탄한 길처럼 넘을 수 있었고 시련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르는 여러분 앞에 내가 힘의 모체는 되지 못할지 언정, 여러분의 힘을 깎아 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이 하늘의 도리임을 알고, 하늘로부터 교육을 받은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수고하시고 나를 위로하시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 앞에 위로와 힘의 모체가 되기 위해서 밤낮으로 책임을 다하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성교회 다니던 습관적인 그런 관념을 가지고는 통일교회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시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아요. 통일교회를 믿고 자기 이익이나 보겠다는 사람은 여기 드나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것은 나라에 이익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상입니다. 문 선생 사랑하는 것을 내가 원치 않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좋아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의 교육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 자신이 그런 훈련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교육받고 살아 나온 것은. 요즈음에는 내가 어느 정도의 고개를 넘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누울 때는 반드시 오른쪽으로 눕는다든가 왼쪽으로 눕는다든가 해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처럼 꼬부리고 잠을 잤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다리를 구부리고 자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서는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일하신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감정적으로 다른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생활권 내에서 지내왔습니다.

 

삼천만 민족의 비소(誹笑)가 크면 클수록 그 슬픔이 삼천만 이상의 자리에 섰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나와 인연을 맺고 나를 버리지 않는 아버지의 자리에서 삼천만의 심정 이상의 심정으로서 대하시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는 감옥에 들어가서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쇠사슬에 매여 끌려가며 뭇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때도 “오냐, 비난 비소해라. 내가 교육이 안 되어 있어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배웠습니다.

 

나는 돈이 있어도 좋은 집을 짓거나 일신의 행락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민족을 위해 돈 쓸 곳이 있으면 빚을 지고서라도 쓴다는 신념을 갖고 나왔습니다. 왜냐? 세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사랑했다는 조건을 남겨야 할 사명을 짊어진 통일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지도자가 생활 가운데서 그러한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여러분을 교육할 수 있는 교재를 남길 수 없습니다. 그 교재를 남겨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 슬퍼도 슬픈 표정을 지을 수 없고, 억울해도 억울함을 나타낼 수 없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개척자의 사명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선생님의 노정은 여러분들이 필생을 통해서 세워 가야 전통의 족보가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은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합니다.

 

문선명 선생은 가정교육을 어떻게 했을까

 

최초의 7년간 어머니를 키우는 시기였습니다. 천적인 가문이나 가법에 의한 교육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날이 샌 다음에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지만 잘 때에는 계속적으로 그것을 위해 기도합니다. 어머니는 모르겠지만 그와 같이 하여, 타락의 결과 잃어버렸던 딸의 기준과 그 상대기준과 하나님 앞에 참부모의 기준, 이 셋을 실체에서 복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누구든지 가야 할 길입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많은 자식을 거느려야 하는 어머니에게 자식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는 된다고 교육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키울 때는 눈물이 나오고 괴로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물이 나오려 하고 괴롭더라도 자식이 엄마 아빠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할 때는 씻은 듯이 괴로웠던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오냐’ 하면서 어제 날 기뻐하던 엄마 아빠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지 못하면 자식을 교육할 자격이 없습니다.

 

선생님이 어머니를 교육하는 것도 그것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남편이 되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가 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고 인류가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어머니가 되라는 것입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가 찾아오더라도 그 사람 이상의 실적을 갖추지 못했을 때는 그를 부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종교활동을 위해 내가 대한민국에서 돈을 제일 많이 씁니다. 굶으면서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여러분 기분 좋아요, 나빠요? 선생님이 굶으면서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기분 좋아요? 선생님이 굶다가 죽어도 좋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선생님을 협조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것은 다 세계적입니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죽어가는 것도 몰랐습니다. 이번에 성진이가 일본에 갈 때도 “그 나라에 가서 다른 것은 하지 마라. 이것 이것을 하라. 너는 일본 국민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네가 잘해서 아버지 위신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갔을 때 가장 중요한 첫째 문제는 대 교회 문제이고, 둘째는 대국가 문제이며, 셋째는 선생님의 아들이라는 문제이며, 넷째는 남녀 문제인데, 이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 영광을 위해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육은 그렇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정말 나를 사랑한 분이었습니다. 내 앞에 와서는 언제나 눈치만 봅니다. 조금만 실수해도 용서가 없거든요. 조여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으로 볼 때는 불효 중의 불효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천법과 천도를 아는 가치적인 어머니를 보고자 하는데 그 꼴이 뭐냐는 것입니다. 용서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공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어머니라 할지라도 모르는 한 아녀자로서, 한 여자로서 충고하는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아이구, 어머니 나 살려줘요. 어떻게 해주세요” 하는 이런 사람이 효자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했다면 오늘날 통일교회 문 선생이 이렇게는 못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는 3시대의 여성상을 대표한 하나의 열매로서 오늘 내 목전에 나타난 거룩한 존재이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반대입니다. 딸로서 키우는 것입니다. 딸로 키운 다음에 아내로 키워 어머니로 교육해 어머니 이름을 찾아 세우는 것입니다. 반대지요? 선생님 연령으로 보면 어머니는 딸 같은 나이지요? 어머니가 딸 같지 아내 같고 어머니 같다고 하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연령이 웬만하면 덮어놓고 ‘어머니’라고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에게 쓰는 말이 엄마입니다, 엄마, 아무개 엄마라고 하지 않아요. 엄마라고 해요. 그것이 제일 어려운 문제입니다. 알겠어요?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 아내를 찾을 때 “아무개 엄마” 하고 찾잖아요? 선생님은 ‘엄마’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책임진 여러분들이여, 아내를 사랑한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머니를 보고 교육하는 게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앞에 빚을 지지 말고, 하늘 앞에 빚을 지우게 되면 우리 아들딸들이 부모를 대해 원수시하지 못할 거다. 불효하려야 못 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하늘 앞에 빚지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육입니다. 빚을 지는 날에는 자식이 들이칩니다. 자식이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빚을 지지 않고 하늘 앞에 빚을 지우는 날에는 자식도 그 앞에 굴복합니다. 천도를 따라가야 할 인간이기 때문에 그 앞에는 사탄도 못 나서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천사장들이 아담가정의 울타리가 되어 키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장을 기르기에 선생님은 지금까지 고달팠습니다. 역적 천사장이 아니라 하늘의 충신 천사장으로 길러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 천 번 만 번 목숨을 바쳐 죽더라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교육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나왔습니다.

 

선생님 가정하고 여러분 가정하고 하나되게 해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36가정인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선생님에게서 전통을 이어받았으니 여러분과 믿음의 아들딸과 효진님을 비롯한 선생님 아들딸에게 교육하는 것입니다. 교육해야 됩니다. 울타리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걸 확실하게 알아야겠습니다.

 

아직까지 자녀들을 대해서 내가 교육을 해봤어요. 붙들고 밤을 새워 가면서 내정이 통하는 교육을 못 해봤어요. 그렇지만 통일교회 교인들은 몇백 번이고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저 아들딸들은 내가 죽더라도, 지그재그로 엇갈리는 길을 가더라도 반드시 바른 길을 찾아 들어온다고 나는 철석같이 믿습니다. ? 하늘 대도의 길이기 때문에. 아무리 빗물이 산골짜기에 고여 흐르더라도 큰 강을 통해서 대해를 찾아들게 마련입니다.

 

철부지였을 때는 줄기, 지류와 같아서 아버지는 남쪽으로 흐르는데 북쪽으로 흐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때가 되어서 일생 행로를 걸어가다 보면, 강을 따라 대해로 가게 될 때는 정상적인 코스를 따라 대해에 들어와 아버지의 모든 대도를 이어받을 수 있는 때가 온다고 하는 것을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지요.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성진이가 7년 만에 아버지라고 찾아왔을 때 “네가 성진이구나” 하며 내 손을 내밀어서 손목을 잡아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돼지도 개도 자기 새끼가 있으면 품는 법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목석보다 못한 남자, 무정한 남자, 정이 없는 남자…. 그 어머니가 나를 대해서 인사하기를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소? 남모르는 이 길, 몰이해의 길을 가기에, 뜻을 위해서 그렇게 수난 길을 가기에 얼마나 힘들었소? 그동안 내게 고생스러웠던 그 일들은 고생이 아니었소. 나를 핍박하는 사람도 없고, 나의 길을 가로막는 사람도 없었소. 그렇지만 당신은 핍박하는 사람도 많고 가로막는 사람도 많은데 죽지 않고 몰려 쫓겨나지 않고 살아왔으니 감사할 뿐이오” 이렇게 인사를 먼저 하고 난 후에 그 어머니 입으로 아들에게 “훌륭한 아버지, 내가 가르쳐 준, 교육하던 이상의 아버지가 왔다. 인사해라”고 할 수 있는 아내를 바랐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들의 모습을 바랐던 것입니다.

 

내가 통일교회 교인들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고, 통일교회의 앞날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충고도 하고 교육도 했지만, 우리 아들딸을 대해서는 눈물이 뭐야? 한 시간도 깊이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못 가졌던 내 자신이 부모의 입장에서는 안되었지만, 큰 것을 위해서 충성하고 더 큰 것을 위해 가라고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에서는 그 길을 못 가면서 가르친다면 그건 가짜입니다. 천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축복받은 가정들이 어디로 가느냐? 가정으로 가는 사람은 흘러갑니다. 선생님도 결혼한 것은, 결혼한 목적은 가정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내가 어머니를 교육하고 있지만, 가정을 위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천주복귀의 사명을 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그 일을 위해서 맹세하고, 눈물을 흘리면 그 일을 붙안고 눈물 흘리며 가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탕감노정에서, 앞으로의 역사 앞에서 부모로서 남겨 줘야 할 선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의 가정을 중심삼은 생활철학입니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선생님도 집에서 어머니 대해 교육을 합니다. 어머니를 교육할 때, 아무리 성이 났더라도 30분 이내에, 3분 이내에 그걸 용서해 줄 수 있는 정신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훈계하는 경우에 아기들이 볼 때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나도 그런 것입니다. 아기들이 척 들어오면 아무리 누가 뭐래도 “그거 언제 그랬나” 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면으로 아주 훈련을 많이 쌓았습니다. 잠깐이라도 한번 교육하는 것입니다. 그게 필요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면 마이너스가 많은 것입니다. 그늘진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 벌써 잊어버리면, 내가 “다 끝났다” 하게 되면 다시는….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 가정에서 하루에 되어지는 일이, 더욱이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주위 사방이 엉클어진 인연 가운데 살기 때문에 이것이 매일의 시간권 내에서 변화무쌍하다는 겁니다. 이 가운데서 보조를 맞추어 지고 가야 할 책임이 주부면 주부에게도 있고 남편이면 남편에게도 있는데, 부인이 그저 이렇게 얼굴을 쥐고 해서는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손해입니다.

 

선생님은 어머니한테 “절대 복종해야 돼. 해와 대신으로 선 당신은 무슨 한, 어떤 괴로움이 있더라도 괴롭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괴로우면 혀를 깨물어, 입술을 깨물어!” 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뒤에 바싹 붙어서 따라와라! 한발짝만 벗어나도 당한다” 하는 것이 선생님의 교육입니다. “어차피 나는 세계의 십자가를 지고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터로 나가는 남자다. 그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해와, 어머니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선생님의 아들딸 3명을 제물로 바치더라도 선생님의 아들딸을 먼저 사랑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접목될 수 없습니다. 모든 아이들의 주체가 선생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렇게 교육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선생님과 똑같이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철저한 사상, 뜻을 대한 사상을 아들딸 앞에 교육해야 됩니다. 생사의 경계선을 넘어가더라도 자신의 결의는 변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