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혈통복귀섭리와 예수님의 탄생(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무지... | 20180607070030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1. 혈통복귀섭리와 예수님의 탄생
인간 타락의 실상은 무엇인가 복귀라는 것은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데는 에덴 동산에서 인류 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의 기준을 능가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타락의 실상은 무엇이냐?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는 성경의 말씀은 비사(比辭)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나온 것이 참으로 용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타락이라는 그런 맹목적인 신앙 기준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20세기 문명을 창건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배후에서 많이 협조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확실치 못한 것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무지에서는 완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선악과가 무엇이냐? 선악과가 그냥 과일입니까? 성경에는 알쏭달쏭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왜 하필 하체를 가렸느냐? 부끄러우니까 가렸습니다. 그러면 왜 부끄러우냐? 오늘날 우리가 타락한 사회의 관습적인 관념을 가지고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럽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부끄럽다면 왜 하체만 부끄러우냐는 것입니다. 부끄럽다면 눈은 부끄럽지 않고, 코는 부끄럽지 않고, 귀는 부끄럽지 않고, 머리는 부끄럽지 않고, 손발은 부끄럽지 않느냐? 또 성경에 보면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은 잘못 태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무엇을 통해서 태어나느냐? 선악과를 통해서 태어나느냐? 아닙니다. 사랑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을 통해서 태어나기는 태어났는데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고 만 우주에 자랑하고 선포할 수 있는 기쁨의 사랑을 통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슬퍼하고, 사탄이 지극히 좋아하는 사랑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도 잘못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사랑을 통해 태어남으로써 돌감람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그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의 참된 사랑의 가지에 접을 붙여야 합니다. 수 천년 자란 돌감람나무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고 정성을 들여서 참감람나무를 접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22-243, 69.5.4) 혈통을 바꾸는 섭리를 해 온 하나님 인간은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태어난 것을 전부다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출발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출발을 뒤집어 박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 땅에서 다시 참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잘못 태어난 것은 잘못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잘못되지 않은 사랑을 했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잘 태어났을 것입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잘못된 사랑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가 무엇이냐? 왜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냐? 그것은 탕감법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고장이 나면 고장난 부분을 수리해야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애들도 순수하고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모든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인류의 조상은 처음에 심을 때 잘못 심었습니다. 무엇을 잘못 심었느냐? 선악과나무를 잘못 심은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의 씨를 잘못 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릇된 사랑으로 잘못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사랑으로 잘못 심었으니 끝날에는 반드시 그릇된 사랑의 결실이 세계적으로 거두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어느 때 타락했느냐? 청소년기에 타락했습니다. 청소년기에 거짓된 사랑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거두어져야 할 때가 와야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가장 큰 사회문제가 청소년의 윤리입니다. 왜 젊은 녀석들이 자기들 멋대로 타락의 행동을 하느냐? 그것은 아담 해와가 그렇게 뿌려 놓은 씨가 열매를 맺어서 이제 거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그렇게 심어 놓은 것을 인과법칙에 의해 그냥 그대로 결과를 맺어서 해결 짓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는 거짓 사랑을 통해서 태어났기에 전부 거짓 아들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 아들이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참된 아들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아들을 보내자마자 이 세상을 대번에 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혈통을 통해야 됩니다. 사탄의 혈통을 받아서 번식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끊고, 그것을 밟고,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새로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서 그 혈통을 바꿔치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22-244, 69.5.4) 타락으로 사탄의 주관을 받게 된 인간 아담 한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창조주로서 원리적으로 그를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느냐?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아담이 안 끌려가려야 안 끌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본래 창조원칙을 두고 볼 때,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면 반드시 그 상대의 주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주관권내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동네에서 한 총각이 부잣집 맏딸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비록 그 총각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더벅머리 총각이라 할지라도 그 부잣집 맏딸은 그 총각에게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총각이 한마디만 선포해 놓으면 아무리 부잣집 맏딸이라고 해도 꼼짝없이 주관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법도는 주관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창조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탄이 먼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아담 해와가 공식적으로 사탄의 주관권내에 들어감으로써 사탄이 아담 해와는 내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원리적인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은 창조한 주인의 입장으로서 아담 해와를 완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는데, 사탄이 옆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어 아담 해와를 완전히 주관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아담 해와를 놓고 둘이 서로 자기가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면 반드시 주관받게 되어 있는 것이 원리인데, 이 원리를 세워 놓은 하나님 자신이 원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비법적으로 개입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쳐서 없애버린다면 하나님 자신이 세운 사랑의 원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부터 벌어져 나왔습니다. 사랑을 먼저 한 사람이 상대를 주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도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누가 먼저 했느냐? 천사장과 해와가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와와 아담이 인연을 맺었습니다. 창조원리를 중심삼고 볼 때는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 사랑을 중심삼고는 사탄이 주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22-246, 69.5.4) 가인 아벨 분립섭리를 한 목적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는 구원역사, 즉 복귀섭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타락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22-242, 69.5.4) 사랑의 법도가 거꾸로 되었으니 이것을 원리원칙대로 회복해야 됩니다. 그러자면 아담을 하나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놓아야 되는데 아담을 직접 가르면 죽어 버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담의 아들들을 통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아담의 아들들은 사랑의 열매이니만큼 하나님도 주관할 수 있고 사탄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을 각각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번 사랑은 천사장과 해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장자인 가인을 그 사랑의 표시체로 사탄편에 세우고, 둘째 번 사랑은 해와와 아담의 사랑이기 때문에 차자인 아벨을 그 사랑의 표시체로 하나님편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패는 하나님이나 사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사탄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타락한 장본인은 인간이므로 그 인간 자신에게 싸움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구원섭리가 이루어지느냐 못 이루어지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가정에서부터 구원섭리를 시작하셨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사장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아들 앞에 완전히 순종굴복해야 됩니다. 그런데 종인 천사장이 아들인 아담한테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이 거꿀잡이가 되었습니다. 천사장이 아담 해와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즉 주관성이 전도(顚倒)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하나님편에 있던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원리적인 주관권을 가지고 해와와 천사장을 주관하여 천리의 원칙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됨으로써 창조원리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는 사탄이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늘편으로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주관 받아야 할 천사장이 거꾸로 아담을 주관했기 때문에 반대로 주관 받는 자리에 들어가 원래의 기준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탄편에 세워진 가인이 하나님편에 세워진 아벨에게 역으로 굴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굴복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첫 번째 섭리의 흔적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일반 기독교에서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고, 가인은 곡식의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하나님편에 세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대할 수 있었고, 가인은 사탄편에 세워졌기에 직접 대할 수 없었습니다. (22-247, 69.5.4) 구원섭리란 곧 장자권 혈통복귀섭리다 타락하기 전으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근본적으로 입장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 천사장은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꿀잡이가 된 그 기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로부터 주관을 받아야 했던 천사장이 거꾸로 아담 해와를 주관함으로써 주관성이 전도되었던 것을 바로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난 장자는 사탄편에 세우고 나중에 난 차자는 하늘편에 세워서 잘못 난 것을 바로 고치기 위해 나중에 난 것을 먼저 난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해 나온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인간과 예수님을 놓고 보면, 타락한 세상의 인간은 전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니 결국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 입장, 즉 가인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째 번 아담, 즉 후아담으로 태어난 아벨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먼저 장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주관의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동생도 자동적으로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빼앗아 나오는 역사를 했습니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팥죽으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는데, 그런 간사한 사기꾼 같은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3대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장본인이 되었느냐? 그래야만 탕감복귀가 되기 때문입니다. 형이 그르쳐 놓았으니 동생이 그렇게 해서 복귀해야 됩니다. 성경 66권이 전부 이러한 내용으로 얼크러져 있는 것도 모르고 '눈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덮어놓고 믿어서 천국에 갈 것 같으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이런 놀음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못나서 이 놀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헤치고 또 헤치고, 깨치고 또 깨치고, 알아보고 또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고의 기원부터 다릅니다. 이것을 해명해 가지고 근본을 시정하지 않고는 인류 구원섭리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를 물리치고 차자가 장자의 권한을 빼앗아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이것을 이루려고 했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아담을 침범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한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연장된 것입니다. 왜 절대자인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구원섭리를 이루지 못해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은 무력하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이 꼼짝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하나님도 딱 걸려드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법을 제정해서 국민들 앞에 공포해 놓은 다음에는 그 자신도 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편인 가인이 하늘편인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본래는 아벨이 가인을 순종 굴복시켜서 사탄을 사람 앞에 굴복시킨 자리에 세워 놓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탄편인 가인이 하나님편의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이 아담을 타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뜻은 지금까지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것입니다. (22-248, 69.5.4)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중심한 복귀섭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되풀이한 것이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을 중심한 복귀섭리입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팥죽을 가지고 약속으로 빼앗고, 그 다음에는 실체로 빼앗아 온 것입니다. 하란에서의 21년간의 생활은 그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생 야곱을 형 에서는 환영해야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환영을 받는 데는 그냥 환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천사장을 굴복시킴으로써 인류의 조상 아담이 천사장에게 굴복당한 것을 탕감복귀 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천사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천국 못 갑니다. 이렇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천사와 싸워 천사를 굴복시켰다는 기준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탄을 굴복시켰다는 권한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못 돌아갑니다. 사탄뿐만 아니라 영계에 있는 수많은 천사들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탄이 왜 무서우냐? 본래 사탄은 천사장이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천사는 우리의 종입니다. 그런데 종이 왜 무서우냐 하면 원리원칙에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잣집의 아들이라 해도 죄를 짓고서 쫓겨나게 되면 종보다도 못한 입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사탄에게 굴복당했던 것을 탕감하여 어느 한 때 다시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런 내용이 성경에 없다면 성경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성경이 못 됩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천사와 싸워 이기고 천사로부터 축복을 받음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왜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까? 하고 많은 뼈 가운데에서 왜 하필이면 환도뼈를 쳤느냐? 그것은 환도뼈를 잘못 써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을 잘못해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맹세를 할 때는 환도뼈에 손을 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사랑을 잘못함으로써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것과 같은 입장에 다시는 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아담이 그릇된 사랑을 해서 타락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빨갱이니 좌익이니 하는데, 좌익이란 왼쪽편으로 사탄편을 말합니다. 또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직고해야 됩니다. 이런 내용을 말하려면 한정이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따로 태어나서 싸웠지만 야곱 때에 와서는 쌍둥이로 태어나서 싸웠습니다. 싸움의 형태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인 아벨 때에는 따로따로 태어난 형제들을 중심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에서와 야곱 때에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들을 중심으로 복귀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느냐?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쌍둥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태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왜 쌍둥이로 태어났느냐? 사탄편 아들이 하나님편 아들을 쓰러뜨렸는데 결국 먼저 태어난 장자의 자리를 차자가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은 형과 동생으로 따로 따로 태어났는데 서로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쌍둥이는 단 몇 분간의 차이밖에 안 납니다. 하나님은 형과 동생의 거리를 그만큼 단축시킨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데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태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쌍둥이를 통하여 역사하느냐? 가인도 아담의 아들이요, 아벨도 아담의 아들인데 그들이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져 두 갈래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뱃속에 집어넣어 싸우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동생이 승리하여 장자의 입장으로 이 땅에 나와서 전부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려면 결국은 뱃속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한 단계씩 점점 내려가 뱃속까지 찾아 들어가서 거기에서 이겼다는 기준을 찾아 세우지 않고서는 장자 복귀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역사는 뱃속으로 몰아넣는 역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 아벨 때보다 에서 야곱 때는 달라졌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래서 사탄편인 형을 하나님편인 동생이 굴복시키면 자동적으로 복귀됩니다. (22-150, 69.2.2)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을 때 만약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형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천사를 영적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에 영적 세계의 수많은 선조들도 야곱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영적으로 승리한 터전 위에 선 야곱을 에서가 환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갈 수 있는 기준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환영함으로써 야곱이 에서의 장자 기업을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때려 죽였지만 에서는 그런 원수와 같은 입장의 야곱을 때려 죽이지 않고 환영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역사가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끼리 싸움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근원이 연장되어 나오던 역사에 야곱과 에서가 화목하여 하나됨으로써 새로운 페이지가 장식되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22-253, 69.5.4) 베레스와 세라를 중심한 복중복귀섭리의 결과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서 자란 뒤에 싸웠고 야곱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태어나기 이전에 복중에서부터 싸워 이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다말의 역사가 나옵니다. 다말이 유다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잉태했습니다. 여기서 다말이란 여인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창부의 행세를 하여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잉태를 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왜 그렇게 해야만 되었는가? 그것은 혈통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서 새로운 씨를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으면 복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러한 유다지파를 통해서 태어나야 했느냐? 유다지파의 조상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다입니다. 이 유다의 장손은 다말을 통해서 태어난 베레스인데, 왜 예수님이 다말을 통해서 낳은 그 장손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나야 했느냐? '왜 그러긴 왜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태어나게 했으니 그렇게 태어났지' 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대답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비법적(非法的)인 입장에서 다말을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난 것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그렇게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베레스와 세라가 다말의 복중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성경 창세기 38장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산모가 만삭이 되어 산파가 와서 기다리는데 복중에서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형이 먼저 나오는 것을 밀치고 동생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처럼 밀치고 나왔다고 해서 베레스란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복중에서 형 세라를 밀치고 동생 베레스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거기서 하늘의 역사는 실체 복귀의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베레스가 세라를 복중에서 굴복시켜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복중에까지 닦아 놓았습니다. 성경이 참 재미있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이 말하기 좋으라고 그렇게 되어 있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이 땅 위에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이 거기에서 닦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혈통은 타락인간들과는 다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 패자의 조상이 되었지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승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중에서 승리한 기반을 못 가진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인과 아벨의 입장이 아니라, 복중에서부터 형을 굴복시킨 역사가 벌어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야곱의 아들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야곱과 그 아들들 2대를 중심삼고 복중복귀 역사를 해서 하늘편 아들이 먼저 장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다음에 태어난 동생은 그 형에게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복종하고 자동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터전이 닦였으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는 비로소 이 땅에 발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핏줄, 즉 혈통을 바꾸는 역사입니다. (22-253, 69.5.4) 성경의 비법적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태복음을 보면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4대 음녀가 나옵니다. 성경상으로 보면 그들은 전부 음녀입니다. 왜 성경에, 그것도 마태복음의 맨 첫머리에 그런 사람들을 기록해 놓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악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데, 말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 그렇게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다말과 유다의 지파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어찌하여 그러한 음녀가 어머니의 입장에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왔느냐? 솔로몬왕의 탄생도 그렇습니다.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서 관계를 맺은 비법적인 행동을 통해서 솔로몬왕이 태어났습니다. 이런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물어 보면, 목사나 신학박사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있느냐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무지를 전부 잘라 버리고 뭉개 버려야 할 것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선생님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박사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 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22-255, 69.5.4) 원죄와 상관없으신 예수님 복중에서부터 승리한 터전 위에 선의 혈통을 중심삼고 선조들의 그러한 전통을 이어 충성을 다한 이스라엘 민족의 여인들의 정성어린 계대를 이어, 2천년 후에 마리아에 이르렀습니다. 마리아가 다말을 중심삼고 복중복귀에 승리한 혈통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비로소 예수님을 잉태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복중에 아기가 잉태되면 벌써 사탄이 참소합니다. 그러면서 '이 자리는 나의 자리요, 여기에 잉태되는 사람은 모두 그릇된 사랑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전부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 다말의 복중에서 하늘편인 베레스가 승리한 혈통적인 기반 위에서 마리아의 복중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복중에 잉태되었을 적부터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일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태어난 근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중에서부터 사탄과 싸워 승리한 기반 위에서 사탄을 굴복시켜 장자의 기준을 세우고 예수님은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도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2천년만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2천년만에 태어나셨는가? 복귀는 가인 아벨의 복귀, 즉 형제 복귀인데, 사탄세계의 국가들이 먼저 태어난 가인형의 나라입니다. 이 가인형의 나라들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벨 나라가 새로 생겨나야 합니다. 이 아벨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2천년 동안 길러서 하나의 아벨적인 나라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수많은 가인적 국가들을 굴복시키려 하였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아도 되는 입장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게 되었느냐?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고들 말하지만, 그런 시시한 얘기는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않고는 구원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놓고 볼 때, 그는 마리아의 복중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지만,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전부 걷어치운 입장에서 잉태되어 탄생했기 때문에 사탄이 참소할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다는 것은 원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 죄라고 하는데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게 죄입니다. 원수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원리원칙에, 법도에 어긋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 걸려듭니다. 예수님은 태어나기를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벗어난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없는 분입니다. 사탄의 주관권내에서 사탄과 접하는 것이 원죄인데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 조건뿐만 아니라 모든 조건을 넘어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원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꿔치는 역사를 해왔습니다. 에서와 야곱 때 바꿔치고 또 야곱의 아들 베레스 때 바꿔치고 안팎으로 바꿔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다는 뜻인데, 단순히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천지에 엉클어진 모든 사연을 풀기 위한 열쇠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태어나되 원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22-256, 6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