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예수님은 우주적인 혁명의 주인공
인간이 새로움의 실체로 완성되기를 바랐던 하나님
새것이 창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것은 하나의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어진 모든 물건 즉, 미물인 곤충으로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볼 때, 보다 더 새롭고 보다 더 나은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하고 최후로 사람까지 창조했습니다. 사람을 창조함으로써 보다 높은 하나님의 내적인 성상과 외적인 형상을 완결 짓고, 영원히 자랑할 수 있는 새롭고도 변치 않는 실체를 갖추기를 바랐던 것이 창조주의 이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이 즐길 수 있는 영원한 새로움의 실체로서, 만물 만상을 대신하고 어떠한 피조물과 비교해 보아도 '이는 과연 아름답고 과연 좋다' 할 수 있는 하나의 모습으로 지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지어 놓은 것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아담 해와였습니다.
하나님의 본연의 선하심과 내적인 영광을 실제 생활을 통하여 드러내야 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 인하여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을 대신하여 새로운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자리에 머물게 된 것이 인간의 타락입니다.
인간이 타락했을 망정 하나님의 뜻은 불변의 뜻으로서 기필코 완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창조주로서의 위신을 지킬 수 없으며 권한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세워가려는 것이 복귀의 역사요,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늘이 이러한 입장에서 우주의 만물 만상을 대하게 될 때, 하늘과 땅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고 피조물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귀한 존재, 하나님 내부에 감추어져 있는 전체의 성상을 새롭게 드러낼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새로움의 실체가 주인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 있는 날은 언제일 것인가? 이런 감격적이고도 충격적인 한 날을 맞기 위해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이 하나의 목적을 세워 놓고 복귀섭리를 거치면서 끊임없는 수고로 역사해 나오고 계십니다.
창세 이후부터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모두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지금까지 없었던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될 새로운 우주적인 존재를 찾게 되는 그 날이 어느 때에나 올 것인고, 하며 그 한 날, 그 한 존재를 애타게 고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 만물이 같이 즐기고 기뻐하며 화동할 수 있는 창조이상세계를 이미 다 설계해 놓고 계시며, 이상적인 생활면까지도 이미 다 구상해 놓고 계십니다. 내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진 하늘과 외적인 상징으로 이루어진 땅이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을 중심삼고 하늘과 땅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이런 하나의 기준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수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뜻은 무엇인가?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깨뜨려버릴지라도 놓을 수 없는 단 하나의 뜻이 있다면, 그것은 완성인간입니다. 인간이 완성될 때까지는 원리적인 창조의 법도를 거쳐서 진리의 실체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함으로써 비원리적인 실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되 그의 내적인 성품과 외적인 형이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를 대신한 분신체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인간의 형은 갖추고 있으되 창조이상의 형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간에게 창조이상의 형을 다시 주입시키고 계십니다. 새로운 하나의 실증체(實證體)를 찾기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1-227, 56.11.11)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
하나의 중심되는 본체, 소망의 존재로서 오셨던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때까지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고했습니다. 창조 이후 비로소 화동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만물 만상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잃어버린 선의 기준을 찾기 위하여 수고한 하나님은 4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사탄의 참소하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민족적인 발판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이 민족적인 발판은 하나님과 만물을 대신하고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세운 예수님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소원의 푯대되는 존재로 대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반대하는 타락의 역사를 다시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만우주를 새로움의 세계로 다시 이루어 놓기 위해 보낸 예수 그리스도를 전체의 주인공으로 모셔야 할 유대백성들이 모시지 못함으로써 전체의 주인공된 사명을 가진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서러움은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천년 동안 줄곧 모세를 통해 내려 준 율법과 야곱에게 내린 언약이 자기들의 이상을 이루어 줄 수 있고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맨 밑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끌어올리는 역사를 했습니다. 소생적 구약역사를 거쳐 나온 후에는 장성적인 신약시대를 거쳐서 완성급까지 나아가는 천지 창조의 원칙적인 순로를 다시 거쳐 나가는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 율법보다 더 높은 새로운 말씀이요, 종래의 것보다 더 높은 새로운 가치와 인연 맺기 위한 말씀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라시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의 전체적인 창조이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땅을 대신하여 우주적인 사명을 완수하려고 끊임없이 혁명적인 과정을 거쳐 찾아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서 우주적인 뜻의 길을 가게 될 때에는 타락 인간을 본연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있었고, 그 과정에는 무수한 싸움의 곡절과 혁명적인 과정이 있었습니다. (1-229, 56.11.11)
우주적인 혁명을 제시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심정을 잃어버리고 양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생활의 목표를 잃어버린 몸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한꺼번에 다 안 됩니다. 악한 것은 떼어버려야 합니다. 양심이 하늘 편에, 선한 세계에 제일 가깝기 때문에 양심이 문제가 되지 몸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몸을 치는 것입니다. 밥을 먹는 것이 다 뭐야! 원수의 배통을 이겨야 합니다. 몸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사탄을 안식시키는 것입니다. 이 몸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인 이 몸을 대해 보복할 자신을 가진 자라야만, 그런 자신을 갖고 승리한 자라야만 하늘의 정병이 될 수 있습니다. 크나큰 선의 이념을 중심삼고 몸의 정욕이나 식욕 등 욕망의 일체를 자유 자재로 주관할 수 있는 사나이나 여인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끝날이 되면 누구의 명령을 받지 않고도 세상 만사를 다 잊어버리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런 심정적인 혁명이 벌어지지 않는 한 천국백성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 아들이니 처자니 무엇이니 무엇이니 하던 모든 것은 꿈과 같은 것입니다. '아이고 내 사랑하는 아들딸, 아이고 내 사랑하는 남편 아내, 아이고 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하는 것들이 다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입니까? 사탄을 근거로 하여 인연된 것들입니다.
대심판이 무엇이냐? 사탄세계의 무대를 쳐 갈기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와 심정의 인연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부모와 자식을 배반하게 하는 사조(思潮)로 흘러갑니다. 암만 붙들고 앉아 있어도 갈라 세웁니다. 형제와 형제가 싸우게 만들고 부부가 서로 싸우게 만듭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것을 세워야 합니다. 하늘의 심정을 다시 접붙여 주려니 그런 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했습니다.
이런 원칙적인 관(觀)으로 볼 때, 과연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냐? 사랑의 구주입니다, 사랑의 구주. 고마운 일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이러한 부르짖음이 없었던들, 오늘날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세상의 부모를 버리면 하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낳아 준 부모가 진짜 부모예요? 나를 지으시고 생명까지 불어넣어 주신 부모가 진짜 부모입니다. 사랑하는 육신의 부모 대신 하늘의 부모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세상 것과 합동작전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은 원수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외치고 나설 때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나 혹은 처자나 시어머니나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과연 메시아입니다. 성경 66권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자기 자식 이상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됩니다.
천국 갈 수 있느냐? 천국 갈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이냐?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몸보다도 성신을 더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마음은 몸의 신랑이고, 심정은 마음의 신랑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의 주인입니다. 또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입니다. 성신은 신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적인 형이 예수님이요, 몸적인 형이 성신입니다. 천지를 대신하고 심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마음적인 형인 예수님과 몸적인 형인 성신이 역사(役事)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세계를 찾아나가는 중심입니다. 신랑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이냐? 신랑입니다. 우주가 생겨난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혁명을 제시하기 위해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10-99, 60.7.17)
예수님의 소망과 유대민족의 불신
혁명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은 어느 정도의 소망이냐? 오늘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에서 가지는 그런 소망이 아닙니다. 세계를 넘어 무한대의 하나님나라까지 연결될 수 있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예수님의 소망인 동시에 예수님과 하나된 하나님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백성 앞에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과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대표한 실증체로서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느냐? 예수님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없었던 새로운 진리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부르짖었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의 진리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민족과 모든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진리라고 주장했을지 모르지만, 실제 그러한 진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과 땅을 다시 비춰줄 수 있는 진리를 갖추어 나타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그 말씀은 그 시대, 그 세계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적인 것이요, 새롭고도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이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고대하던 유대백성들이 알았다면 여태까지의 자기들의 생활을 버리고 이 진리를 갖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야 할 유대민족이 이루어야 할 한날을 깨뜨려 놨으니 우리가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맺힌 것을 풀어줘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들지 못함으로써 희생이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민족을 세워 놓고 그 민족 가운데서 하나의 중심을 세워 그 중심으로 하여금 우주적인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나타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30여 년간에 걸쳐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셔야 할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인류는 말씀의 실체를 찾는 그 순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대신하여 이 땅 위에 전파하려 하셨던 우주적인 새로운 진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말씀은 예수님 당시에 민족적인 말씀으로, 또 세계적인 말씀으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말씀으로 나타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그 당시에 이 땅을 구원할 수 있는 중심의 말씀으로 나타났다면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따르는 개인이 있고, 따르는 민족이 있고, 따르는 세계가 있었던들 하나님의 뜻을 책임진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뜻을 다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그러한 개인과 민족과 세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대신해야 할 사랑하는 제자들, 사랑하는 가정, 사랑하는 교단, 사랑하는 국가가 예수님과 하나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어야 했는데, 자기들의 교단적인 차원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가지고 예수님을 대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끝날의 성도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부끄러운 우리 자신에게 우주적인 존재가 되기를 소망하시며 우주적인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한 개인으로 오셨으나 그는 평범한 개인이 아니요, 천하만상의 피조물 전체를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온 피조세계의 창조원리적인 전체의 진리를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1-237, 56.11.11)
예수님의 말씀은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
역사과정을 거쳐 결실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선조들이 지나온 전체의 역사와 생활을 초월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베푸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당시 유대백성을 대하여 하시던 말씀과 그가 나타내신 모든 것은 자기 일신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대해야 하는 타락권내의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 상충적인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할 때, 이 말씀이 민족 앞에 나타나면 민족을 혁명할 수 있는 말씀이 될 것이요, 개인에게 나타나면 개인을 혁명할 수 있는 말씀이 될 것이요, 세계 가운데 나타나면 세계를 혁명할 수 있는 말씀, 또한 하늘땅을 새로이 혁명할 수 있는 말씀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그때의 유대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그때까지 믿어왔던 모든 율법주의 앞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은 완성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우주적인 신앙관이 들어 있는 말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말씀의 뜻을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말씀은 그 시대에는 우주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우주적인 혁명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치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못하다. 또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치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볼 때 하나님이 창조이상으로 바라던 우주적인 하나의 완성체를 이룰 때까지 진리를 찾아 나가는 데는 우주적인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것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우주적인 사랑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했기 때문에 천사장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이상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의 문을 꿰뚫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다시 이 사랑의 문을 뚫으려면 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라' 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님 자신이 사랑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사탄권내에 붙들려 있는 힘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붙들어 인간들을 하나님과 본연의 사랑을 주고받는 자리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언적인 혁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혁명을 일으키셨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하여 천적인 사랑의 혁명을 일으키셨습니다. 이것은 개인 대 개인의 사랑은 물론이요, 가정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인 진리를 대신한 사랑이었습니다. 우주를 대신한 사랑의 혁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혹은 국가를 중심삼은 사랑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의 나라를 사랑한다든가 혹은 자기의 가정을 사랑한다든가 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국가 이상, 국가권을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망은 한 민족, 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 자기를 중심삼은 민족이나 국가적인 차원의 사랑이 아니고 세계를 넘어서 하늘땅까지 연결되는 사랑입니다. (1-234, 56.11.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가정이나 국가 앞에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니 우주적인 사랑의 주인공 되시고 신랑 되신 예수님은 가정적인 핍박과 국가적인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하늘땅의 억조 창생들,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모든 피조물이 예수님을 기원으로 하여 비로소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을 맺게 해주는 책임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개척하여 찾아 세운 사랑은 세상적인 사랑과는 정반대 되는 사랑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기껏해야 나라를 위하는 사랑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주적인 사랑입니다. 즉 개인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고, 세계를 넘어 하늘에까지 사무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양면을 갖추는 사랑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개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탄까지도 위해 주는 사랑입니다. 사탄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이 표준을 걸어 놓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우주적인 사랑의 기준을 이 땅에 찾아 세워야 합니다. 우리들이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우리의 후손을 통해서라도 이 기준을 세워 놓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며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30절)'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실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억울함도 다 잊어버리고 하늘 뜻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자기의 일신을 통하여 우주적인 생명을 다시 찾는 일이 저끄러지려고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아픔도 잊어버리고, 자기의 억울함도 잊어버리고 온갖 고난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신만이 살려는 생애가 아니라 민족과 나라는 물론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생애였습니다. (1-236, 56.11.11)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예수님은 이런 가치적인 존재로 오셨지만 가치의 주인공, 우주의 주인공이 못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이런 우주적인 가치의 목적을 달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우리 자신들은 예수님의 심령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진리와 만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신령역사를 거칠 때 무한한 은혜가 내려오면 그것을 개인적인 은사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시일이 지나 환경적인 은사, 교단적인 은사를 거쳐 세계적인 은사로까지 뻗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사가 내리면 개인적인 생각에서 자신만의 은사로 여기면 안 됩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은혜를 받고 개인적인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리를 얻었다면, 그것을 내 것으로 소화시켜서 그 진리를 세계에까지 책임지고 전파시켜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이 세계와 더불어 나간다면, 그것은 나의 은사가 되는 동시에 하늘땅의 은사가 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신앙 관념이 여러분 하나를 구원하려는, 개인적인 구원관념에 머문다면 거기에서 끝나고 맙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넘치는 은사가 개인적인 것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옛날 유대백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얻은 바 진리가 나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개인을 통하고 가정을 통하고 사회를 통하고 세계를 통하여 하늘의 섭리사에 미치는 소망의 중심을 갖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은사를 통하여 부활과 중생의 역사를 하도록 합니다. 개인적이고 민족적이고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구원을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개인적인 구원과 민족적인 구원과 세계적인 구원과 우주적인 구원이 남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버지 앞에 감사할 때도 개인적인 감사뿐만 아니라 가정적․사회적․국가적․세계적인 차원에서의 감사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회개할 때도 개인적인 회개로부터 가정적인 회개, 국가적인 회개, 세계적인 회개를 해야 하며 하늘땅을 놓고 회개하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개인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가정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사회와 국가적인 구원관념을 넘고 세계적인 구원관념을 넘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탕감이 시작됩니다.
유대백성들이 민족적인 구원관념과 함께 세계적인 구원관념까지 가졌다면 예수님은 이 유대백성을 통해서 세계인류를 구원하셨을 것입니다. (1-233, 56.11.11)
각성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
오늘날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찾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고,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활시키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크신 은사를 받고 큰 책임을 지고 있는 민족이나 그렇지 않은 민족이나 똑같습니다. 이 땅 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남아 있고, 땅 위에 없었던 새로운 우주적인 참진리와 사랑과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우주적인 진리와 우주적인 사랑과 우주적인 생명은 여러분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수고하신 분으로서 불쌍하다면 예수님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계를 대신한 말씀이었습니다. 땅 위에 뿌려졌어야 할 진리의 말씀이요, 땅 위에 받아들여졌어야 할 하늘의 말씀이었으며, 땅 위에 심어졌어야 할 우주적인 생명의 말씀이었는데 땅 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예수님은 부정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당시의 백성들이 믿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수고해 왔는데, 이 하나님의 수고를 덜어드릴 수 있는 생명의 주인공, 진리의 주인공이 이 땅에 오신다면 땅 위의 모든 양심적인 사람은 그를 사모할 것입니다. 땅 위에 도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생명의 길을 찾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더불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소망하는 기준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개인적인 사랑의 기준, 개인주의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옛날 유대교인들도 이런 마음을 갖고 살았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예수님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늘땅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념적인 말씀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체화할 수 있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끝날인 오늘날, 여러분은 각성해야 됩니다. 새로운 진리와 생명과 사랑을 가지고 민족을 구하고 세계를 구하고 하늘땅의 6천년의 원한을 해원해 드려야겠습니다. (1-237, 56.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