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자랑이 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했던 아담 해와
천지 만물을 지은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천지 만물과 천사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자랑의 실체로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만물 앞에 서면 만물은 아담 해와에게 경배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지어 놓은 피조의 동산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깨어졌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 앞에 자랑이 되어야 했던 만물의 가치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었고, 무형세계의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인간이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랑의 뜻으로서 하나님 대신 만물 앞에 나타나 화동의 중심으로서의 영광을 받아야 할 인간의 위치가 근본적으로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타락 이후 6천년이 경과한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찾아온 표준은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하고, 형상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대신하고, 천륜의 행사를 대신한 전체의 대표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 이후 4천년 만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하고, 외적 형상을 대신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이념으로 세웠던 '자랑의 기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수행해야 했던 본래의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일대에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어느 부분 부분 또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형상을 대신한 자녀로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책임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실체로 나타나 먼저 만물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으며, 천천만 성도들 앞에 자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기뻐하며 영광을 누리려던 것을 복귀하는 한 날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중심존재인 예수님을 세워놓고 역사하며 섭리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게 했고, 그 가운데 당신 앞에 세워질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칭송하고, 하나님이 자랑하고자 했던 그 기준에서 감사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했다면 이토록 오랜 6천년 동안의 역사적인 서러움은 남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1-29, 56.5.16)
하나님의 자랑으로 세워진 믿음의 왕 예수님
하나님의 자랑으로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보여지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이 자랑하고 있던 것과는 판이했습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를 대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이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하던 것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뜻을 받들면서 싸우시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랑하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랑할 수 있었던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 앞에서 자기들이 그때까지 세워 나오던 민족적인 자랑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에 처했습니다. 자기들의 자랑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자랑하기 위한 새로운 자랑을 가지고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온유 겸손히 엎드렸던들 십자가의 어려운 관문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십자가의 도리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구원되었다는 말은 있어도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되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축복하여 십자가에 속죄의 권한이 있음을 믿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에 속죄의 권한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영적인 속죄가 가능하지만,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실천하였더라면 영․육 아울러 구속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타락했고 4천년 동안 섭리역사가 연장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연장된 4천년 역사를 가로막기 위해 사탄 앞에 세운 하나의 중심은 믿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이 땅에 나타나셨습니다. 4천년 역사가 흘러오는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없었던 온 만민들 앞에 예수님은 믿음의 왕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자랑하실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노라 하였지만, 그러한 믿음으로써는 하나님의 천륜의 심정을 통한 상하의 내적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또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믿고 그들이 따라가던 것을 통해서는 하나님 속에 사무쳐 있는 사랑의 원칙을 알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성도들이 걸어 나오던 그 역사적인 믿음의 과정 전체를 도맡아서 혈혈단신으로 모든 사탄의 역사를 끊어놓으려 했습니다. 4천년의 믿음을 총결산하는 입장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의 중심형으로, 믿음의 주인공으로 왔다 가셨습니다.
이 하나의 기준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는데, 선포하신 말씀은 구약 말씀 그대로가 아니었습니다. 구약 신앙을 가지고 믿은 것이 아닙니다. 선지선열들이 말씀하고 예언했던 그 한계권 내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믿고 나온 구약성경의 말씀권 내에서의 메시아의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 없는, 그때까지의 역사상에 없는 믿음, 그때까지 나타나지 아니한 새로운 믿음, 세계의 어떤 환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믿음을 가진 믿음의 대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표자, 믿음의 왕으로서 구약성경에 없던 새로운 말씀을 발표했습니다. 그 말씀은 신약의 말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어떤 한계 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의 4천년 역사와 예수님의 30여 생애와 영원한 미래에까지 미치는 그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억조창생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반대하는 자리에 있더라도 '나는 그 뜻 하나만을 붙들겠나이다.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하는 것을 나는 믿겠나이다' 할 수 있는 믿음의 기준이 세워져야 예수님이 만민의 구세주, 믿음의 왕으로 설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믿음은 인간들이 4천년 동안 믿어온 차원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일대를 거쳐 먼 후대, 즉 영원까지 미치는 믿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고 그 당시에 나타나지 못했던 사랑과 선을 나타낼 수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에 없는 믿음의 왕이었고,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1-31, 56.5.16)
사탄을 이긴 승리의 왕 예수님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수 천년 동안 사탄과 싸워 나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승리의 왕으로 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자랑한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조들이 이 땅에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메시아를 보내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사탄과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탄을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4천년 동안 사탄과 싸웠지만 사탄을 점령하지 못했고,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써 비로소 사탄을 점령하고 굴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사랑의 원칙을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켰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는 데는 사랑의 원칙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 앞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한 외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30여 평생의 생활을 보면 어느 한 부분 효자의 생활이 아닌 부분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생활은 밤이건 낮이건 어떤 시간도 떼어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 위에 너 하나밖에 없구나' 할 정도로 효자의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오로지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자기의 육신은 무시되더라도 만민의 구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마음밖에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여! 저 하나가 사라져서 당신이 4천년 동안 찾아오신 사랑의 대신 존재, 당신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그 사랑의 대가를 돌려 드릴 수 있는 효자가 되겠습니다' 하는 이 하나의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렇다 할 수 없었습니다. 천지의 중심으로 맺어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연된 부자관계라는 천륜의 힘은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산상의 외로운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알았고, 4천년 동안 고대하신 아버지의 사랑의 심정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이 변치 않는 이상,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서의 자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독생자로,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화신체로 온 피조만물 앞에 자랑했습니다. 사탄세계 앞에 자랑했습니다.
오늘날까지의 6천년 역사상에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사람이 많습니다. 사탄 품안에서의 효자 효녀는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면 역사상의 모든 사탄권내의 효자 효녀들을 합한 이상의 가치와 실적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수 있고, 천상 천하에 유일하게 천륜을 대신한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예수님이 수많은 군중을 바라볼 때 어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가치와 그들의 가치 사이에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늠름하게 하늘 앞에 그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사랑으로 맺어진 부자의 관계에서 나오는 힘에 의해 사탄까지 망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권내의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동조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기준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나타나는 거기에는 원수들 앞에서 철옹성과 같은 방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심삼고 모이는 곳곳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년 동안 선조들이 승리한 것과 패한 것 모두를 합하여 자신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쟁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6천년 동안 사탄과 투쟁해 나왔는데, 어찌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4천년 동안 많은 선지자들이 승리한 것을 전부 합한 가치 이상의 승리의 실적을 거둘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의 선조들이 어떻게 사탄을 대해 승리할 수 있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 땅 위의 성도들에게 염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사탄을 굴복시킬 것이 아니라 오늘날 전체의 성도들이 모두 사탄을 굴복시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여 평생 승리의 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승리하지 못할 말은 피했습니다. 승리할 수 없는 말은 피했습니다. 예수님이 패할 수 있고, 사탄이 접근해 올 수 있는 말은 피했다는 것입니다. 남 보기에는 한 사람의 동네 총각이었지만 일단 전체를 책임지고 나셨기 때문에 그의 말이나 행동이나 소망은 전체를 승리의 기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말과 행동과 소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수고하시며 다져 놓은 승리의 발판 위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이런 은사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승리하여 이뤄 놓으신 승리의 발판 위에 서서 어떻게 하면 더 높이 올라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이 여러분을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음을 알고 하늘에 올라갈 때까지 승리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을 느껴서 하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승리하셨지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연고로 영적으로만 승리의 기대를 닦으셨습니다. 그래서 2천년의 역사를 종결해야 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기대 위에 서서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여 승리의 터전을 이루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우리에게는 영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주는 신약성경의 차원을 넘어서 실체적인 구원을 완성시켜 주는 새로운 말씀을 하늘이 이 땅에 선포하게 되면 사탄이 이를 반박할 것인데, 이때 반드시 사탄과 싸워 이겨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1-34, 56.5.16)
예수님은 전체의 뜻을 책임진 왕자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조건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가? 예수님은 '책임을 지는 왕자'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요셉의 집에서 목수의 일을 했지만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요셉의 가정에서 목수의 일을 도우면서 가족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 부모를 도와주는 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것만이 생활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큰 뜻을 마음에 품은 동시에 작은 일에까지도 책임을 다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전부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완수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책임을 이 땅 위에 완수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30년 생애는 영원 불변의 실적, 책임을 다한 실적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놓은 생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믿음의 복음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생애도 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일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인 면에서도 책임을 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역사 해온 뜻에 대해서도 홀로 책임을 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책임을 대신하여 나선 이가 이 땅 위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으로 책임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홀로 전체의 뜻을 책임지는 것에 대해 외로워한 반면 더 큰 책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루하루의 생활은 전체적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한 발판을 놓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 준비시대와 3년 실천시대, 3일간의 완성시대까지 예수님은 사탄을 굴복시키는 것과 그 토대 위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 드리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임을 절감하며 산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순간에도 이 책임을 잊어버린 일이 없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산정에 나갈 때에도, 온 만민이 비방하고 사탄이 조롱하는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맡은 바의 천륜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책임완수의 일념을 갖고 십자가의 고비를 넘었기 때문에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재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활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어서도 흩어진 제자들을 염려했고, 무덤의 3일간에도 이 제자들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후에도 갈릴리 해변가로 제자들을 찾아다니셨던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책임감이 없었던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록 어려운 자리에서 배척한 제자들이지만, 예수님은 부활 후에 먼저 갈릴리로 찾아가셔서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의 고개를 넘을 때 변하지 않는 제자들로 세워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인격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의 제자들과 그 이후의 수많은 성도들, 2천년이 경과한 오늘날 우리들까지도 책임지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전체를 구원하는 것이므로 예수님은 전 인류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잘 사는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책임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생사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지만 이 이상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자들은 까딱 잘못하면 생사가 왔다갔다 하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칼날과 같은 아슬아슬한 선상에 서 있는 사람들을 모두 오른편으로 끌어내는 책임을 예수님은 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옛날에 30여 평생을 지낼 때도 그랬고, 죽음의 길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랬으며, 어느 때 어느 시기에도 한결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지 못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책임과 사명, 이 한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1-37, 56.5.16)
전체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우리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 오늘날 우리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을 모시려면 예수님께 책임을 지우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를 책임지셨고, 당대의 인류를 책임지셨고,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인류를 책임져 나오셨는데, 우리 자신들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께 책임을 지우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스스로 '아바 아버지여 2천년 동안 책임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려움을 알겠나이다' 하면서 오늘도 우리를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책임을 지고 계신 예수님을 원통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잘것 없는 우리들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 앞에 머리 숙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부르면서도 뼈가 녹는 듯한 심정, 살이 녹는 듯한 심정을 느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비로소 4천년의 뜻을 책임지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너 하나만이 내가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구나'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모든 책임의 보따리를 뒤집어 쓸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워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체의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책임하는 그 일이 어렵다면 '어려운 그 일을 나에게 지워 주시옵소서' 라고 할 수 있는 심정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나타나 '염원하시는 그 심정을 저를 통하여 나타내시옵소서' '저를 통하여 보여 주시옵소서'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끝날에 남아질 무리입니다. 이런 무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2천년 동안 인류를 위해 책임을 져 나오시던 그 목적을 어디에서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역사에 대한 책임과 현실에 대한 책임과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하던 그 책임을 우리에게 지워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하늘 앞에 책임을 돌릴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4천년 동안 안타까워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땅 위에서 책임의 왕으로서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감당해 나오시던 예수 그리스도 대신 그 책임을 지고 싸우겠나이다. 원수 사탄과 수천만 인간들이 환영하지 않더라도 제가 대신 책임지고 싸우겠나이다'라고 기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나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와야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의 동산에서 쉬실 수 있습니다.
끝날에 들려오는 것은, '내 생명의 호소를 들을 자가 누군고?'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을 물려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호소를 들어줄 사람이 누구인가! 하늘은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서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쉬지 못하시고 아직까지 기도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께 무슨 잘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할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오늘 우리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천년 동안 수고하고 계신 예수님을 위해서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생명을 끊어서라도 책임을 완수하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생명의 책임이 이 땅위에 남아 있습니다. 이 생명의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때가 재림시대입니다. 이 생명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재림시대는 시작됩니다. 그는 역사적인 생명의 책임과 미래적인 생명의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기에 여러분도 최후의 싸움에서 그와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1-39, 56.5.16)
예수님을 내세워 자랑했어야 할 인류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결정체(結晶體)요, 사랑과 심정의 화신체(化身體)였습니다. 또 그의 말씀과 사정과 소망과 심정은 하나님의 전체 속성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대신하고 자랑할 수 있는 한 존재로 세웠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이라는 긴긴 세월을 참아 나온 끝에 예수님을 자신의 대신자로, 자랑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보냈는데, 그러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자기를 한번도 자랑한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한번도 자랑해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들어 자랑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셨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가정과 교단과 민족과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4천년 동안 고대하던 자랑의 결실체로 오셨기 때문에 자신을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 앞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수만 군중 앞에 자기를 세워 자랑할 발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을 세울 때에는 하늘땅의 모든 피조만물 앞에 자랑하고 사탄 앞에까지 자랑하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 사람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고 하나의 가정도 하나의 교단도 하나의 민족도 세계도 그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을 배반한 종족의 후손인 우리는 하늘 앞에 위신과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무리입니다. 역사적 죄과를 저지른 우리 인간은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하고, 그런 환경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사람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교단과,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민족을 만나지 못한 것이 하늘의 무한한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그를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세웠을 때 '황공하옵니다' 하고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그 세우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변명하기보다 '나를 세우기 위해 수고하신 아버지의 소원이 이렇게 될 줄이야?'라고 탄식하며 하늘 앞에 머리를 숙였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러한 심정을 가졌던 예수님을 자랑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개인과 가정과 민족과 세계 앞에 세우고 싶었던 자랑의 한날을 이루어 그를 모셔야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지금까지 바라는 소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조하고 인류를 세워 자랑하고 싶었던 그 본연의 심정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자랑해야 할 예수님, 영광의 모습으로 자랑해야 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처참한 모습이 되었던 억울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형틀을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걸어가던 예수님의 마음, 민족을 대하여, 하늘땅을 대하여, 사탄을 대하여 품으신 그 원한의 심정을 해원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의 가슴에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하늘 뜻에 대한 간곡한 심정이 사무쳐야 됩니다. (5-248, 59.2.8)
예수님을 자랑해야 할 우리
심정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류의 소망의 결실체로 오셨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늘과 끊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오셨던 참아버지를 원한의 자리에 몰아넣은 것이 우리의 선조들이었고, 사탄이 저지른 행사였으니,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그 선조들의 죄를 청산 짓고, 사탄을 심판하고 싶은 불타오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의 혈육에는 악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하늘이여! 저를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함을 칠 수 있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됩니다.
자랑의 동산이 슬픔의 골고다로 변하다니 이 웬 말입니까?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랑할 줄만 알았지, 하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을 자랑하지 못하고, 하늘을 대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산 제단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던 예수님의 심정을 자랑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땅에서 찾으려던 하나의 사람과 하나의 가정과 하나의 민족을 붙들어서 하늘의 뜻을 이루려 했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우리가 최후에 해야 할 것은 역사적으로 저지른 모든 죄를 청산하고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여 하늘이 그렇게 찾고 있던 하나의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러한 가정과 종족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선민이 나타나야 하고 그러한 천민(天民)이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의 사정이 아무리 억울하고 어떠한 곡절이 맺혀 있더라도 그것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이 여러분에게서 솟구쳐 올라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상봉한 바울은 그날부터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면목이 없는 자신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위해 살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겠다는 심정에 사로잡혀 '죽으나 사나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게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새로운 터전이 여기서부터 닦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그의 심정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사정과 소원을 자랑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이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찾고 있던 신부를 자랑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찾고 있던 가정, 민족, 국가, 세계를 자랑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를 드러내어 자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자 하는 우리들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가로막고, 나를 찢고, 나를 핍박하는 십자가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하며 가는 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가는 걸음입니다. 이것은 무한히 슬픈 일입니다.
실체 예수님을 자랑해야 되는데 골고다의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이 인간 앞에 남아진 연고로 그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여러분 자신들은 자랑의 조건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무한히 고통당했다는 이 하나의 자랑의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의 심정이나 예수님의 심정을 지닌, 온 만상에 대하여 자랑의 조건을 갖춘 하늘의 아들딸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런 세계를 알고 감정으로는 그러한 사실을 느낀다 할지라도, 실제로 여러분이 활동하는 생활권내에서 자랑의 조건을 갖추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장 13절)'고 한 것과 같은 기준을 갖고 나서야만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 자랑할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세워 자랑할 수 있습니다. (5-250, 59.2.8)
자랑이 된 예수님과 우리의 사명
하나님은 사랑하는 예수님을 세워서, 믿음의 예수님을 통하여, 혹은 진리의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들을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믿음의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승리하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그렇소이다',책임지고 계신 예수님을 본받으라 할 때, '예, 그렇소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어느 한 때, 어느 한 시간도 쉬시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쉬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랑으로 세웠던 이런 조건들을 여러분들이 대신 맡아야 됩니다. 그리고 영계에 가신 예수님의 자랑의 조건을 이 땅 위에서 이루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먼저는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믿는 것을 자랑해야 되고, 다음엔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자랑해야 됩니다. 책임지지 못하는 세상에서 책임지는 것을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도 보잘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인간들이 사탄과 싸워야 할 때, '아바 아버지여, 이 세계 만 인간이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게 힘을 주시옵소서. 온 인류가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체의 적을 맞아 혼자 싸워서 승리해 가지고 '아버지여, 기뻐하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계의 모든 책임을 지고 나가는 모습을 하나님에게 보여 드리고 억천만 인간, 혹은 천천만 성도들과 피조세계 앞에 책임지고 나가는 중심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하여 땅을 대한 하나님의 원한을 해원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펼 수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랑이 영계의 예수님을 통하여 땅 위의 우리에게 미치고, 땅 위의 우리를 통하여 만물세계에도 그 자랑이 미쳐야 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창조이념, 인간을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 만물 앞에 자랑하려고 했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인간과 만물이 하나님에게 감사 경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전체적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1-41, 56.5.16)
하나님과 예수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내가 되자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모습을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로 불쌍한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길에서도 하나님 앞에 자랑해야 되겠다는 심정을 갖고 가신 예수님의 생애를 바라보며, 오늘날 우리들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서 열매맺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신부를 세워 그 열매를 맺고자 2천년 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이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들은 예수님의 신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존재, 예수님이 자랑하고 싶은 존재, 나아가 여러분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어린양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당연히 자식을 자랑하려 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있는 전후 좌우 상하의 모든 것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자신의 주위에 속한 모든 것을 자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전체의 주인인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 자랑의 조건으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끝날에 처한 우리는 자신을 냉정히 비판해야 됩니다.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 있습니까? 하늘은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며, 예수님은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며, 나는 누구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합니까? 하늘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예수님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고, 온 만물을 내세워 나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버지께서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모습, 아버지의 심정을 대신한 자랑스런 모습이 여기 있사오니 이 몸을 내세워 사탄 앞에 자랑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랑의 마음과 생명의 권한과 본연의 성품을 갖추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내가 되면 하나님과 나 사이의 모든 것을 피조 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만 인간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삼위신 앞에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탄까지도 '옳소이다. 당신이 세우신 하늘의 아들딸이요, 그들은 하늘이 자랑할 만하오니 그들을 내세워 영원히 당신의 영광을 누리시옵소서'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존재가 나타나기를 열망하며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그 소원의 한날, 자랑의 한날을 찾아 죽음의 고개도, 슬픔의 고개도, 억울함의 고개도, 피의 고개도 넘으며 찾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었던 본연의 심정을 통해야 되겠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대해 '내가 이 세계를 다 잃더라도 너 하나를 찾으면 만족하도다'할 수 있는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그 사무쳤던 원한을 해원하는 동시에 소원과 이상을 성취해야 참다운 사랑의 중심과 하나될 수 있고,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이 우리를 영원히 자랑할 수 있고, 우리들 또한 하나님을 영원히 자랑할 수 있으며, 하늘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우리를 자랑의 조건으로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에 서야 되겠습니다. (5-252, 5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