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희생과 사랑과 은혜
복 중에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사람들은 대개 누구 집을 가면 눈치를 봅니다. 그렇게 눈치를 보는 것이 좋습니까, 어떻습니까? 음식을 먹을 경우 더 먹고 싶으면 누가 볼 테면 보라며 더 먹는 것이 좋습니다. 무사통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무사통과는 사랑이 없으면 안 됩니다. 사랑이 없어서는 무사통과 환경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아들딸들이 어머니 아버지 앞에서 자려고 할 때에 '어머니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고 잡니까? 무사통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봉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통 '그 여자 시집가기 전에 그렇게도 고생하더니 참 시집을 잘 갔어'라고 말할 때, 그 여자가 어떤 남자를 만났을 때 시집을 잘 갔다고 하겠습니까? 여자를 밤이나 낮이나 무조건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났을 때 시집 잘 갔다고 합니다. 언제든지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했소' 하면서 전부 자기가 책임을 지고 색시를 사랑하는 그런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시집을 잘 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신랑이라면, 그 신랑은 장가를 잘 간 것입니까, 잘못 간 것입니까? 잘 간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까, 안 바랍니까?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면 누가 좋아합니까? 아들딸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서로 좋아 지내면 그 좋아 지내는 것이 아들딸에게 좋습니다. 아들딸의 환경이 좋아집니다. 그 아들딸이 볼 때 그야말로 멋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중에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 봉사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얼굴을 보나 마음을 보나 유순한 처녀라 할지라도, 한 번 꼭 찔러 보고 두 번 찔러 보고 세 번 찔러 보고 네 번까지 꼬집어 보면 대개는 토라집니다.
그 유순한 처녀라도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사랑을 하게 되면 바라보고 비교하다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절망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세상에 불쌍하게 태어난 존재구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절망하게 됩니다. '여자가 남자의 노리개야, 부속품이야? 부속품이라도 움직이는 데 박자를 맞추어 움직여줘야 부속품 역할을 하지, 이게 뭐야?' 이렇게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라집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남편한테 '당신이 뭐야? 무슨 남자의 사랑이 그래? 사랑을 더 많이 해주어야지. 당신이 남자니까 더 사랑해줘야지' 이러면 그 남편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자기를 중심한 사랑은 끝장이 납니다. 그렇지만 새신랑이 새신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하면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할 때 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43-308)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참된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남편 앞에는 색시요, 색시 앞에는 남편입니다.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 남입니다. 그것이 천지 이치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기 때문에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나이다'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남을 위하게 될 때에만 사랑의 본연의 소재지에서 사랑이 영원히 움직이고 꿈틀거립니다.
자기 자신이 사랑의 소재지라면 희생하는 것은 소모입니다. 그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체가 사랑의 소재지라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자기 자체의 소모에 불과합니다. 상대가 사랑의 소재지기 때문에 그 사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당당해서는 안 됩니다. 온유겸손하고 높여주고 희생봉사하는 데서만 사랑이 옮겨올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는 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이라고 하려면 상대를 완전히 점령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내 사랑이 안 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나는 이렇게 잘났기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가 본래부터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오' 이렇게 큰소리를 친다면 처음 한두 번은 잘 들어주겠지만, 밥 먹듯이 자꾸 그러면 한번 복수하고 싶어지고,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겠습니까? 그 사랑이 자기에게 있습니까? 나라에 있습니다. 세계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냐? 세계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를 위해서 봉사해야 됩니다. 모두가 봉사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희생하려고 하는 그 사람 앞에 먼저 사랑의 인연이 맺어질 것입니다. (43-311)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행복의 소재지는 사랑이고,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 상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답지 못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0세 된 할머니라 해도 자기 사랑하는 남편의 생명을 단 사흘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하더라도 고마워할 수 있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그 부부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합니다.
선생님은 한 번도 '잘 먹고 잘 살아라.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서 말이나 돼지처럼 살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나타나면 '또 고생하라는 타령이 나올 것 같구만. 두고 보자. 내가 점친 것이 백발백중일 거라'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백발백중입니다. 백발백중인 것이 참입니다. 늙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젊은이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참이 아닙니다. 가짜는 이렇게저렇게, 왔다갔다 합니다. 사랑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참은 영원한 것입니다. 행복이란 그렇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하시면 반드시 고생하라는 말씀부터 하시는데,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렇게 고생을 시키려고 하시느냐?'고 할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생시키는 것이 잘한 일입니다.
고생을 시키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고생을 시키면 망합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 고생시키면 흥합니다. 남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 수고했을 때는 그 수고의 대가로 반드시 받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그 사람의 사랑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선생님을 좋아합니다. 이 사람들이 고생을 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살면 '언제 알았더냐' 하고 꿈도 안 꿉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대하는 것이 도리어 이들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고, 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그리고 통일교인들은 대부분 몽시나 기도 중에 선생님을 만나 봅니다. 이것이 사고입니다. 왜 그러냐? 이것은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몽시로는 언제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선생님이 가까운 오빠처럼 나타나서 손을 붙잡고 꽃동산에서 활개를 펴고 힘차게 뛰어다닙니다. 선생님은 원수가 아닙니다. 선생님은 통일교인들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존중합니다. (43-314)
제일 높은 자리로 점핑할 수 있는 길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네에서 손가락질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마을, 저 고을에서 '아, 저사람!' 하고 손가락질받기를 원하겠습니까? 그러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은 그 나라의 여자 축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습니까? 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더욱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통일교인들도 선생님이 멋지기를 원하지 꾀죄죄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가는 곳마다 그곳 사람들 모두가 선생님을 위해주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나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이냐? 동네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함으로써 그 동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동네가 자기를 위하게 되면, 이것은 한 리(里)면 리의 보고거리가 되어 점차로 점프하게 됩니다.
한 면(面)에 열 개 리(里)가 있다면 그 보고거리가 열 개의 리에서 드러났다 할 때는 그것이 운을 타는 것입니다. 운을 타고 그 보고거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리에서 삥 돌고 쭉 드러나면 면장 꼭대기까지 올라갑니다. 면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면장에까지 올라가 면장이 이장들을 불러놓고 각 리의 특별한 사연이 무엇이냐고 해서 그 일을 보고받으면, 그것이 일등이 되는 것입니다. 면장이 '아하, 우리 면에도 이런 특별한 예가 있구나!' 하게 되어 그 면장 가슴속에 딱 일등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군에서 면장회의가 있을 때, 그 면장이 군수에게 그것을 보고하면 군수가 '이것이 수많은 면 가운데서 제일이다. 야! 그거 훌륭하구만' 하면 또 한 번 점프해서 군수의 꼭대기를 타게 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라로 갑니다. 작은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로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세계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하나님 앞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 갑니다. 참의 행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가는 데 있어서 연락병이 누구냐? 통일교인입니다. 군 꼭대기를 타고서 우리 군에 있는 아무 동네의 아무개가 제일이라는 깃발을 갖다 줍니다. 올림픽대회 같은 큰 대회의 개막식 때에는 성화를 점화합니다. 그렇게 성화를 들고 뛰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군수가 그 깃발을 들고서 도지사 앞에 갑니다. 도에는 수많은 군이 있는데 그 군의 보고 가운데서 또 일등을 했다고 합시다. 사람을 죽이는 보고는 한 번으로 끝나지만 사람을 살리는 보고는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그렇게 되면 또 한 번 점프합니다.
이렇게 한 번 뛰고, 두 번 뛰고, 세 번 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장관에게로, 대통령에게로 돈도 안 들이고 행차하게 됩니다. 받들어 모셔가는 것입니다. 나랏님한테 바칠 것은 모셔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중앙에까지 올라와 장관이 '특출하고 특별한 보고거리가 있으면 보고하시오' 할 때 이것이 보고되어 일등을 하면 그것이 어디로 가느냐? 대통령에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대통령은 이것을 외국에 가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국가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선한 사람이, 이와 같은 사건이, 이와 같은 공적이 있을소냐' 하고 자랑해서 거기에서 일등을 하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위에서 관리하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일 낮은 자리에서 출발해서 곧바로 직행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가고 싶겠습니까, 안 가고 싶겠습니까? 가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을 것입니다. 그걸 원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일이 무슨 일이냐? 리에서 일등한 내용을 면민 앞에 제시할 때 면민이 '옳소', 군민 앞에 제시할 때 군민도 '옳소', 도민도 '옳소', 전국민도 '옳소', 하나님 앞에 제시할 때 하나님도 '옳다' 하는 날에는 만세의 영광이 그에게 같이하는 것입니다. (43-316)
희생적인 사랑의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다
통일교인들은 리를 대표해서 살고, 면을 대표해서 살고, 군을 대표해서 살고, 도를 대표해서 살고,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자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4천만 민족을 대표한 기수요, 60억 인류를 대표한 기수다' 하는 자세를 갖고 정성을 들여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 그 자리에서 얼렁뚱땅 적당히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생명을 걸고 해야 됩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상 큰 사랑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성립됩니다. 그런 일은 남을 위하여 희생적인 사랑을 갖지 않은 길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희생적인 사랑 앞에는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참된 자리를 잡아서 열매만 맺는 날에는 날아갑니다. 끝도 없이 날아갑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을 그런 자리에서 연마시키고, 그런 자리에서 공신을 만들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수고하고 고생하여 희생적인 사랑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주의요, 하나님주의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제일 나쁜 사람으로 죽었지만, 그분의 행적은 하늘나라까지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능하냐? 자기의 생명을 바쳐 희생하는 길만이,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을 준비해 놓는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통일교인들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마운 일이요,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입니다. (43-316)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열매 맺느냐
사랑의 근거지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서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 세계 복판에서 열매 맺습니다. 세계 복판에서 열매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돼야 하느냐? 나라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도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군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면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리의 복판에서 열매 맺어야 되고, 마지막으로 가정과 내 자체에서 열매 맺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탕감을 거쳐야만 가정으로, 가정의 탕감을 거쳐야만 종족으로, 종족의 탕감을 거쳐야만 민족으로, 민족의 탕감을 거쳐야만 국가로, 국가의 탕감을 거쳐야만 세계로, 이렇게 발전해 나갑니다.
따라서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뿌리기 위하여 생명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쳐 나가야 하는 것이 심정세계를 창건해야 하는 우리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만국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일대, 이대, 삼대, 십대, 천대, 만대를 거친 후라도 아무런 싸움 없이 세상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완전히 세계를 정복하는 끝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길을 개척하는 걸음을 걸어 나왔습니다. 이 길을 중심하고 시범을 보인 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걸어온 노정입니다. 그것이 틀렸느냐, 맞았느냐?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망하지 않고 흥해 나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문화권을 중심으로 전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이 자리에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 전통적 사상입니다. 그 전통적 사상을 선생님이 더욱더 꽃피우고 빛내야 합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가정을 부정하는 길을 갔지만, 오늘날 통일교회는 가정을 이루어 세계를 사랑하는 길을 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가정 전체가 나라를 사랑했다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은 역사상에 처음 나타났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개인구원을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고 희생의 길을 갔지만, 통일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가정을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의 자리에 서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편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지에 설 수 있습니다. (43-319)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체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의 소재지는 희생 봉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고스란히 꽃피우고 향기를 내며 열매를 거둘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랑의 터전을 이루는 곳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그래서 사위기대의 사랑을 말합니다.
참사랑은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서로가 희생하는 전통을 갖추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지는 법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연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들딸은 자기 부모에게 절대로 불효할 수 없습니다. 또 남편은 아내를 대해, 아내는 남편을 대해 ��당신은 나를 위한다��는 입장에서 서로가 더 위해주고 더 희생하는 자리가 넓어질 때 그 가정에는 복이 찾아옵니다. 그러한 가정이 하나님이 찾아오는 복지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복을 받되 가정만의 복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복을 받되 나라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복을 받되 세계를 돕고 나서 복받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정이 천국 가정입니다. 자기 가정만을 위한 복받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복받는 때가 지나가면 망합니다. 그러나 복을 받되 나라를 업고 가정의 복을 받게 되면 내가 가정의 복을 다 누렸더라도 나라의 복을 또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업고 가정의 복을 맞아들이면, 내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또 세계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올라가서 내 생명을 희생시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 하면, 다 망하더라도 나는 나중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받을 수 있고 축복받을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일대에 수고한 터전에서 복받기를 바라는 가정은 진짜 복받는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사람들은 선한 조상을 갖기를 원합니다. 복이 선대(先代)로부터 상속되어 내려오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존중시하고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계는 백년 동안에, 일생 기간에 완전히 복귀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숱한 몇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의 때를 찾아 나오고 있지만, 복은 아직까지 안 찾아왔습니다. 세계적인 복의 시대는 아직까지 오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하나되어 하늘땅이 화동하고 하늘땅이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천지의 때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때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43-323)
큰 은혜는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요구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가적인 복을 아직까지 맞지 못했습니다. 그 국가적인 복을 맞기 위해서는 남북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소원은 남북한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하나되어야만 비로소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한에 살고 있지만 남한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축복을 받고, 모든 민족들에게 추대를 받고, 민족의 전통을 세워주는 가정이 되겠다고 하면서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되느냐?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이 통일된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아무리 복을 받은 가정이라 하더라도 나라가 비운에 사로잡힐 때에는 그 나라의 주권과 더불어 그 가정도 거기에 휩쓸리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가정은 아무리 망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망하는 운세권으로 말려들어갑니다.
가정과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가정보다 나라가 더 귀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세계가 망하는 운세로 말려들어갈 때는 그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면 큰 은혜란 무엇이냐? 은혜가 찾아오는데 십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십년 은혜요, 백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백년 은혜요, 천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천년 은혜요, 만년 만에 찾아오는 것은 만년 은혜입니다. 십년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만년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만년 은혜를 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려면 만년 동안 희생하겠다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그 길을 어떻게 가겠습니까? 만년 동안 가기 위해서는 만년 동안 갈 것을 남겨야 됩니다. 만년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돈을 남기면 그것이 만년 역사의 전통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한 것은 억천만년 갑니다. 그렇게 사랑한 것은 억천만년 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의 사랑은 그 나라가 존재할 때까지 억천만년이라도 남아집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때에 가서는 나라만을 사랑한 애국자는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인은 남아집니다. 성인의 사랑은 세계적이기 때문에 성인은 남아집니다. 성인들은 나라의 배척을 받으면서 고독단신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그 당대(當代)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후대(後代)를 위하여 살아간 사람들입니다. 성인은 내적인 인연과 전통적인 생애와 자각의 실적을 남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 살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서 산 성인의 희생적인 사랑의 도리는 세계에 남아집니다. 그러기에 성인 중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최고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인연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전통을 만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통일원리가 이렇다고 말만 남겨놓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말에 따라 실천하겠습니까? 실천을 해야 됩니다.
자식을 사랑할 때도 뼛골에 사무치도록 깊이 사랑하여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공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이 이러하니 이렇게 가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고,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는 내연의 터전을 상속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만년 갈 수 있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후손에게 만년, 만대까지 이것을 상속해주어야 합니다. 영계에서 누가 그 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느냐 하면 상속해준 사람이 복을 받아서 자기 후손에게 나누어줍니다. 즉 만년 복받게 해준 선각자요 주인인 그 조상이 복을 전부 받아서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후손들이 복을 받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나눠 받습니다. 결국 그것은 누구의 뜻이냐?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뭐냐? 큰 은혜라는 것은, 큰 복이라는 것은 반드시 거기에 비례하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큰 복을 받기 원하거든, 천년의 복을 받기 원하거든 천년 동안 그 복이 지탱할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복이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런 걸 알아야 됩니다.
큰 복은 자기 개인의 공적을 의지해서는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한 선조들이 남긴 복을 물려받기 위해, 세계적인 선한 선조들 가운데 자기 조상이 없다면 세계적인 선조와 같은 형의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리를 가르침받는 것입니다. 성인의 도리를 교육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계받습니다. 그것을 인계받으면 그분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내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43-325)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냐
옛날 성인들은 개인적인 수난시대에 죽어 갔습니다. 그 개인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 가정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종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민족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국가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되고, 세계적인 수난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계적인 시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수난의 과정에서 누가 희생의 대가를 치를 것이냐? 기독교를 보게 될 때, 기독교가 예수님과 선조로부터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치러야 할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느냐? 예수님이 그러한 것을 심어놓고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대가를 치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죽음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고 살고 해서 살아 남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가정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종족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나왔습니다. 나라가 망하면서도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그러면 남아 나오면서 받을 수 있는 그 은사의 터전은 뭐냐?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에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은사의 터전입니다. 그 은사의 터전을 아무 공 없이 맞을 수 있느냐? 반드시 내정적인 심정을 중심으로 탕감의 과정을 거쳐서 정성들여 점핑해 타고 넘겠다는 불변의 자세와 그런 과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뭐냐?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 사랑, 그 사랑을 중심으로 점핑해야 합니다.
자기 리(里)만을 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점핑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리를 위해서 일하더라도 세계를 대표해서 일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통일교회의 가르침은 절대사상입니다.
그러니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는 몇천만 대(代)의 수많은 인류가 찾아 나오던 최후 결실의 은사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한 개인의 공적과 수고만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못 받습니다.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심정을 전부 본받아야 합니다.
심정은 하나입니다. 심정은 여기에서도 통하고 저기에서도 통합니다. 아담에서 출발한 부모의 심정, 부부의 심정, 자녀의 심정을 원칙으로 해서 이 시대에도 넓은 범위에서 전체를 걸고 싸워 승리의 터전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그러한 책임자를 만나 그 책임자의 명령을 받아서 거기서부터 뿌리를 잡아 가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면 통일교인들의 뿌리는 얼마나 깊으냐? 6천년 이상 됩니다. 우리가 남아지기까지 하나님과 선조들이 수많은 곡절을 거치고 수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현재의 나 한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치른 대가를 총합하면,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가를 치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은사를 받았는데 통일교회를 한 십년쯤 믿은 자격을 내세워서 '나는 당당하다' 할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10년 15년 믿었다는 사람들이 '선생님도 우리가 아니면 뜻을 못 이루지'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평을 할 단계가 아닙니다.
억천만년 만에 처음 나타난 한 번밖에 없는 은사를 받아 억천만년 수난의 고비를 거치면서 수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러 온 터전이 열매맺을 수 있는 자리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한 번밖에 없는 이 시대에 인연이 되어 이렇게 통일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10년 동안 통일교회를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10년 동안 산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이걸 이어받기 위해서는 천년의 한을 품은 심정을 가지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현재에 세우기 위해서는 내 한 몸이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면서 마음으로도 넘고 행동으로도 넘어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도 세우지 않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도둑놈입니다. 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소유를 탐하는 자리에서 도적의 길이 생겨나고 강도의 길이 생겨납니다. 이 자리는 지극히 두려운 자리입니다. (43-327)
은사를 맞기 위해서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통일가에서 맞을 수 있는 은사는 억천만세에 남아질 은사요, 역사상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은사입니다. 그러한 은사를 맞으려니 얼마나 희생을 해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냐!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대가를 치러야 될 것이냐!
이 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상적이요 망상적인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희생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맺어져 오고 그 인연이 상속됩니다. 그러니 통일가 전체가 합하여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희생하고 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내 일신이 객사의 몸이 되어 독수리밥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뼈는 변하지 않는다는 각오로, 예수님의 살은 여기저기 찢겼더라도 뼈는 꺾이지 않았던 것과 같이 나도 그런 결과를 남기면 한이 없겠다는 심정으로 나가야 합니다.
천년 만년의 역사과정을 거쳐서 찾아온 하늘의 은사를, 비록 초라한 몸이지만 어떻게 내 손길을 통하고, 내 발걸음을 통하고, 내 간절한 울부짖음과 간절한 요구와 간절한 행동을 통하여 이 세상에 남길 것이냐? 비록 내 일대에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식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부디 내가 이룬 전통을 상속받아 내가 바라는 나라를 기필코 이루어야 된다'고 유언하고 가야만 이것이 천년의 유업으로, 만년 복귀의 터전으로 남아질 것입니다.
선생님이 통일교인들 앞에서 노력하는 것은 이들에게 빚을 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빚을 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고생하는 자리에 세워놓고 선생님이 편하려고 한다면 이 단체는 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고생시키고 책임을 안 진다면 그 하나님은 망합니다. 하나님을 더 고생시킬 수 있는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고생을 하는 데 있어서 그 고생을 보람 있는 고생으로 여기고 기꺼이 고생할 수 있도록 하는 곳이 통일교회이기 때문에, 고생으로 신음하는 하나님을 고생으로 탕감해서 해방시켜 드릴 수 있는 길이 여기에서 성립됩니다. 고생은 고생으로 탕감해야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고생할 때 하나님이 '애야, 이제 그만 해라. 너 하나를 놓고 내가 백 번 죽어도 좋다' 하고 치켜주실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천하가 뒤집어질 것입니다.
고생길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하여 더 고생하겠다는 마음으로,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힘없는 다리를 끌고 지친 몸을 이끌고 절규하는 심정으로 나서게 될 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은 뿌리를 깊이 내릴 것이고, 민족을 넘어 세계가 연결될 수 있는 천운의 노정은 나를 통하여 파동 치고 세계로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흡사 방송국에서 내보낸 전파가 파장을 이루어서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런 맥박의 동기가 되고 생사의 기원을 좌우할 수 있는 절대적인 자리에서 이런 사명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놀라운 일입니다. (43-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