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하여 존재하는 세계
사랑․이상․행복은 홀로 이룰 수 없다
예로부터 인류는 영원하면서 참되고 변치 않는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를 그려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시대는 불신의 세상이요, 혼란한 시대입니다. 이런 가운데 인간이 소망하는 요건들을 찾아서 성사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해봤지만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이 시대에 우리 인간으로서 이것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인간을 넘어서 영원 불변의 참된 어떤 절대자를 찾아 그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분이 참된 사랑, 참된 이상, 참된 평화, 참된 행복을 염원한다면, 그분을 통해서만 이것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런 분이 계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왕이요, 이상의 왕이요, 평화와 행복의 왕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이와 같이 인류가 추구하던 이상적 요건을 성사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제시하는 내용을 우리가 알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우리가 생각해 보더라도,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는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이 절대자로 계신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이 바라는 사랑과 이상과 행복과 평화도 홀로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반드시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그러면 이 피조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성사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행복과 하나님의 평화를 완결지을 수 있는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혼자 사랑해서 무엇 하며, 하나님 혼자서 이상을 찾으면 뭘 하며, 하나님 혼자서 평화롭고 행복해서 뭘 하겠습니까? 상대 되는 인간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요건들을 성사시킬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75-315)
하나님과 인간은 대상적 존재가 더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우리가 젊은 시절에 자기 대상을 선택하게 될 때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원하느냐,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원하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누구나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미남 미녀가 결혼을 해서 첫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그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자기 멋대로 생긴 그런 아기라 하더라도 그 아기를 바라보면서 '이 아기는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보다 더 잘생겼다'고 하면 그 부모는 입이 귀 밑까지 벌어지면서 기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인간이 이렇게 돼 있느냐? 사람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결과적인 존재가 그러하다면 원인적인 존재가 반드시 그러한 내용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하나님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랍니까, 못하기를 바랍니까' 하고 질문한다면, 하나님도 역시 대상적인 존재가 자기보다 더 훌륭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도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을 통해 볼 때,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인간 자신은 본래 하나님보다도 높아지기를 바라고, 하나님보다도 가치 있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신학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은 대등(對等)한 자리에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창조주 앞에 사랑의 실현, 평화의 실현, 이상의 실현, 행복의 실현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볼 때, 본연의 인간은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고 더 높을 수 있는 대상의 자격을 지닌 존재요, 자녀의 가치를 지닌 자격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이 이제부터 하나님 앞에 대상으로 서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녔고, 보다 높은 자녀의 가치를 지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영원하다면 우리 인간도 잠깐 있다가 없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속세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한때 있다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떨어져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영원하고 유일하고 절대적인 이상 하나님의 대상인 우리 인간 자체도 영원하고 절대적이요, 유일한 가치의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가장 이론적인 결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를 믿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이상적 요건을 중심으로 하여 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대상의 가치를 지닌 존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하다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영생한다는 말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75-316)
이상적 존재의 기원은 위하여 사는 데 있다
그렇다면 지혜의 왕이고 전체의 중심인 하나님이 참된 사랑과 참된 이상과 참된 행복과 참된 평화의 기원을 주체와 대상 중 어디에 두겠느냐?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는데, 주체를 위하는 길과 대상을 위하는 길, 이 두 길 가운데 하나님은 도대체 이상의 요건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이 창조주인 하나님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참된 사랑, 참된 이상, 참된 행복, 참된 평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 대상이 주체를 위하는 데에 그 이상적 기원을 둘 것이냐 아니면 주체가 대상을 위하는 데에 그 기원을 둘 것이냐? 하나님이 그 이상적 기원을 주체 되는 자기를 위하는 데에 세운다면, 하나님이 그럼과 동시에 모든 사람도 자기가 어떠한 대상 앞에 주체의 입장에 있으면 자기를 위하라는 입장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될 수 있는 길이 막힙니다. 분립되고 맙니다.
하나가 될 수 있고 평화의 기원이 될 수 있는 그 길은 어디에 있느냐?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참된 인간은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참된 사랑은 위하는 데서부터, 참된 이상도, 참된 평화도, 참된 행복도 위하는 자리를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근본 원칙이었습니다.
참된 부모는 어떤 사람이냐? 자식을 위해서 태어났고, 자식을 위해서 살고, 자식을 위해서 죽는 부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참된 부모의 사랑이 성립되는 것이요, 참된 자식 앞에 이상적인 부모로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식 앞에 평화의 중심이 되는 것이요,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 반면에 참된 효도는 어디에 기준을 세울 것이냐? 그 반대의 입장입니다. 부모를 위해서 태어나고, 부모를 위해서 살고, 부모를 위해서 목숨을 다하는 사람이 참된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부모 앞에 이상적인 자녀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녀요, 행복과 평화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공식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위해서 존재하는 데서만 이와 같은 이상적인 요건, 즉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참된 평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75-318)
우주 창조의 원칙과 인간 행복의 기원
그러면 참된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 태어나기를 아내를 위해서 태어났고, 살기를 아내를 위해서 살고, 죽기를 아내를 위해서 죽는다는 남편이 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을 과연 참된 사랑의 주인이요, 참된 이상의 남편이요, 참된 평화와 행복의 주체로서의 남편임에 틀림없다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식을 대한민국에 적용해서 볼 때, 대한민국의 참된 애국자는 어떤 사람이냐? 나라를 위해서 태어났고, 나라를 위해서 살고, 나라를 위해서 어려운 환경도 개의치 않고 위로는 군왕을 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위하여 묵묵히 생명을 바친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범위를 세계로 넓혀서, 역사노정에서 성인 중에 누가 제일 위대한 성인이냐? 이 공식을 적용해서 볼 때, 그분은 누구보다 인류를 위해 산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를 위해 왔고 인류를 위해서 죽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응당 미워해야 할 원수, 자기 생명을 빼앗는 원수를 위하여서까지 기도해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역사에 없는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우주창조의 원칙이요 인간 행복의 기원은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왜 태어났느냐? 많은 사람들은 남자는 이러이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이런 나 자신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남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습니다. 본래 남자가 태어난 본의가 어디에 있느냐?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상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자는 어깨가 넓고 여자는 아래가 넓게 되어 있습니다. 지하철이 만원일 때 비좁은 의자에 앉더라도 위가 넓고 아래가 넓은 남자 여자가 앉으면 딱 들어맞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보더라도 서로가 위할 수 있는 상대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또 여자도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도 태어나기를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것을 천지창조의 대주재(大主宰) 되는 하나님이 창조의 원칙으로 세웠기 때문에, 그 원칙을 따라서 가지 않고는 선하고 참되고 행복한 세계, 혹은 사랑과 이상과 평화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75-319)
종교의 가르침은 본연의 세계 법도에 맞춘 것
선생님은 영적 체험, 즉 영계에 대한 내용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시는 본연의 세계,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 또는 극락이라는 곳의 구조가 무엇을 기준으로 돼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만이 들어가는 곳이요, 위해서 나고, 위해서 살고,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우리 본향(本鄕)의 이상적 구조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그 세계로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 역사과정에 수많은 종교를 세워서 훈련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왜 종교인은 온유겸손해야 되며 희생해야 되느냐? 본향의 법도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본향에 돌아갈 때를 대비해서 그 본향에 알맞게끔 지상생활 과정에서 훈련시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보다 차원 높은 희생을 강조하고 봉사를 강조합니다. 그 세계에 일치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이러한 내용을 제시하는 자체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하나님이 섭리해 나온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방대한 성경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은 단 두 마디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다 맞아떨어집니다.
예수님은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역설적인 말을 한 것도 결국 본연의 세계의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에 일치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75-320)
타락이란 자기를 중심한 데서 비롯한다
성경의 내용을 살펴볼 때, 타락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었을 때, 주체인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지 못하고 자기를 주체로 생각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즉 자기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 타락의 원인입니다. 모시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입장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존재한다는 입장에 섬으로써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해와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타락시켰습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타락시켰느냐?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위하여 존재한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들었던 입장에서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죄악세계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런 악의 자리에서 우리 선조가 그와 같은 결과를 자아냈습니다. 그러한 선조의 후손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 자기부터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락이 가져다준 결과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은 그냥 놓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선한 세계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한 세계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운동을 역사를 통해서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면 인류역사에서 그와 같은 실적의 기대를 남긴 사실을 우리가 발견했을 때, 하나님은 역사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72-18)
하나님이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을 세운 이유
그러면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그 몇 가지 요건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본심을 헤아려 볼 때, 어떤 분이 자기를 위하여 진정으로 생명을 다한 그런 신세를 진 사실이 있다면, 우리 본심(本心)은 그걸 갚는 데 있어서 50퍼센트는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50퍼센트만 갚으라고 하느냐, 1백 퍼센트 이상 갚으라고 하느냐? 이렇게 물으면 우리 본심은 확실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1백 퍼센트 이상 갚으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A라는 사람 앞에 B라는 사람이 1백 퍼센트의 신세를 끼쳤다면, B는 그걸 갚는데 1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A는 1백 퍼센트 이상으로 돌려준 B에 대해서 그보다 더 높여서 갚아주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 주고받는 도수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됩니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주고 끌어주는 이런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이 되는 하나님이 위하라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원칙을 알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의 개념이 성립됨과 동시에 영원히 발전하고 영원히 번창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전진하고 발전합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발전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어야만 행복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예를 들어, 어느 가정에 열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서 제일 꼬마 동생이 나머지 식구를 위해서, 누구보다도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산다면, 나이 어린 동생이지만 부모도 그를 내세우게 되고 형제도 그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날이 가면 갈수록 가정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 동생은 자동적으로 그 집안의 중심존재로 등장합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한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서 만우주의 중심존재로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은 그런 사람은 아무리 나이 어린 동생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작은 아들일지라도 그는 틀림없이 그 가계(家系)에서 중심 자리에 나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위하면 위할수록 위해서 사는 거기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존재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은 하나님이 중심존재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에서는 이상적 통일, 완전 통일을 성사(成事)시킬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남한테 주관받는 것을 죽어도 못 참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나 식자층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위해서 존재하는 그분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영계의 조직을 보면, 천지의 대주재 되는 하나님은 우주 만유의 존재 가운데 위해서 존재하는 중심존재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 앞에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천년 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러한 이상적 통일권이 이런 자리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한다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은, 사람들은 '사랑은 내 사랑이다. 이상은 내 이상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상도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사랑과 이상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느냐? 오로지 대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대상이 없어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면 위하는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75-321)
종교 통일도 위하여 존재하는 원칙을 갖게 될 때 가능
이러한 원칙을 생각해 볼 때에,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데서만 진정한 사랑을 충족시킬 수 있고, 진정한 행복, 진정한 평화, 진정한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 원칙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느 사회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성립됩니다.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이름은 엄청난 이름입니다. 도대체 통일은 가능한 것일까?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될 것인가?
기독교만 하더라도 이제까지 4백 개 이상의 교파로 나누어져서 싸워 나왔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자체는 이미 붕괴 단계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단계에서 통일교회가 뭐냐며 문 아무개의 머리가 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기독교의 통일이 그렇게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위하여 존재한다'는 철칙을 가진 교파라면, 그리고 그 교파 이상으로 모든 교파가 노력한다면, 거기에서는 반드시 하나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교(異敎)라 하더라도 그 종교가 주장하는 그 정신 이상으로 노력한다면 그 종교까지 하나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체 되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므로 그런 분의 상대적인 위치를 지켜 나가면 자연히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수십년 동안 한국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개인과 가정 혹은 수많은 종교, 혹은 국가 주권으로부터 배척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변명한 일이 없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키면서도 그 보상을 바라거나 변명을 하지 않는 하나님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그분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묵묵히 가야 합니다. 그리고 갈 길이 바쁘기 때문에 시끄러운 주위 환경에 대해 개의(介意)할 만한 시간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살아 나왔고 일해 나왔습니다. (72-21)
보다 위하는 사람일수록 주인이 된다
통일교회는 그렇게 얻어맞고 그렇게 짓밟혔어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는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미국에 가서 큰소리를 친 것도 그러한 내용이었습니다. 개인주의는 멸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이 아무리 세계를 지도한다 하더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미국 국민 이상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운동을 하는 종교단체가 생긴다면, 미국은 그 종교에 의해서 지배되고 말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기 때문에, 진실로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한다면 모든 것은 주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는 단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에서 할 수 있었던 그 이상으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이 태어났다면, 그 사람에 의해서 세계는, 그리고 하나님의 세계는 본질적인 길을 세워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 통일교회가 일본에서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본을 구하고 세계를 구한다고 외치고 있을 것입니다. 일본만을 위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진정으로 아시아를 위하여 대동아전쟁을 일으켰다면 그런 비참한 결과는 자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진정으로 아시아를 위했다면 오늘날 일본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틀림없이 아시아의 맹주(盟主)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우주의 원칙을 생각해야 합니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나 혹은 친구간, 혹은 회사의 사장과 부하 직원과의 관계에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반드시 번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고, 크게 번창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연히 중심자가 되는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영원히 주관을 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주관받고자 하는 사회와 나라, 국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가 마음이 잘 통해서 사랑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통해야만 국민을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국민이 된다면 그런 국민이 사는 나라야말로 이상적인 나라일 것입니다. (72-23)
위하여 존재한다는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돼야
흔히 세상에서는 '아! 인생은 무상(無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인생관의 확립, 국가관의 확립, 세계관의 확립, 더 나아가서는 우주관의 확립, 신관(神觀)의 확립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계통적 단계의 질서를 어디에다 둘 것이며, 그 차원적 계열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 일생을 두고 볼 때, 가장 가치 있는 인생관은 내가 전인류를 위해 있고, 전세계를 위해 있고, 국가를 위해 있고, 사회를 위해 있고, 가정을 위해 있고, 남편을 위해 있고, 아내를 위해 있고, 자녀를 위해 있다는 인생관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이상의 인생관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의 결론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철칙입니다. 그러한 사람에 의해서 가정이 구함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정은 씨족을 위해서, 씨족은 또 민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봉사해야 됩니다.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구함을 받게 됩니다. 민족은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봉사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또 그 나라를 중심으로 거기에서 머무르면 안 됩니다. 그 나라를 넘어서서 희생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국의 하나님입니다. 세계를 하나의 가정으로서, 하나의 나라로서 세우고 싶어합니다. 따라서 나라를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살려야 된다는 사상이 생겨나지 않으면 세계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초민족적인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소련은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제패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중국과의 관계가 결렬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해서 세계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미국을 제일로 하는 세계제패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을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살려야 합니다. 그러한 나라가 되면, 국토가 없어지고 국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그러한 일을 했다는 문화권이 남아지면 그 문화권은 세계를 제패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현실의 아시아에 있어서도 공산주의라는 세계 조직체제를 막아내기 위하여 자기 나라를 희생시키고 하나로 뭉치는 운동이 벌어진다면 이 아시아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륙을 넘어 육대주가 하나되면 세계는 망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가정은 씨족을 위하여, 씨족은 민족을 위하여, 민족은 국가를 위하여, 국가는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위하여 사는 남자 여자가 되지 않으면 우주의 주체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나라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를 지도할 수 있고, 세계를 위하여 사는 성인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세계 역사를 치리(治理)합니다. 따라서 종교를 중심으로 문화권을 성립시킨 것도 그러한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칙은 한마디로 말해서 '위하여 존재한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우주(宇宙) 본원(本源)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 위에서만 행복과 평화와 이상과 사랑이 구해질 수 있습니다. (75-324)
위하여 사는 데서만 천국 실현이 가능해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악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종교인이라도 그가 천국갈 것이냐, 지옥갈 것이냐를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느냐? 자기를 위해서 살아 온 생애가 많으면 지옥행입니다. 남을 위해서 산 생애가 자기를 위해서 산 생애보다 1퍼센트라도 많으면 그는 지옥을 넘어서 천국을 향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를 위해서 산 비율이 높을 때에는 지옥에 갑니다.
선생님은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 이 나라를 위해서 이바지해 왔습니다. 각자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이바지해 왔지만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전국민이 각 분야에서 이러한 사상으로 혁명을 하는 날에는 아무리 대한민국이 비참하더라도 희망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그러하고, 사회에서 그러하고, 위정자나 단체의 지도자로부터 이 민족이 이런 사상을 갖추는 날에는 이 민족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이 민족은 반드시 아시아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이상적 체제를 하나의 공식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겠느냐? 결론적으로 말하면,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살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살며, 그 부부는 자식을 위해서 살고 자식은 부모를 위해서 살고, 그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살고, 그 종족은 민족을 위해서 살고, 그 민족은 나라를 위해서 살고, 그 나라는 세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가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세계 만민을 자녀로 삼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주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국가나 단일민족권의 탈을 벗지 못한 그런 종교는 하나님의 전체 뜻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계를 구하는 것이 주목적인데, 세계는 어떻게 돼야 구원받느냐? 그 원칙은 간단합니다. 가정은 종족을 위해 있고, 종족은 민족을 위해 있고, 민족은 국가를 위해 있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 있고,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 있으면 됩니다. 세계를 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 온 우주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세계가 하나님을 위하는 자리에 선다면 하나님은 세계를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나라를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민족을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종족을 위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가정을 위하는 자리에 섭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내 것은 아내의 것이요, 그 부부의 것은 가정의 것이요, 가정의 것은 종족의 것이요, 종족의 것은 민족의 것이요, 민족의 것은 국가의 것이요, 국가의 것은 세계의 것이라는 관념을 가진 그 세계는 결국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냐? 내 것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나아가야만 인간의 욕망을 최고로 달성한 자리에 서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계 제일이 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만유의 중심인 하나님의 것이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그런 영광의 자리에 인간이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짓는다면, 위해서 사는 데서만 가정천국 실현이 가능하고, 국가천국 실현이 가능하고, 세계천국 실현이 가능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인류와 더불어 행복하고 이상적인 동산이라고 하며 춤을 추고 노래할 수 있는 세계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종교가 목적으로 하는 천국이요, 그 천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곳이 바로 지상천국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 원칙을 가지고 가정과 직장에서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보다 흐뭇한 내일의 소망을 가지게 될 것이고, 내일의 개척자로서 중심적인 책임을 당당히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국가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적 국가는 어떻게 돼야 되느냐? 자기 나라를 위해서 있으라고 하는 나라는 나쁜 나라로 지탄받아 온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재 전세계 국가 중에서 세계를 위해서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공산주의는 망해 가고 있습니다. 1957년을 정점으로 해서 공산주의가 갈라진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소련을 위주로 한 공산주의가 슬라브 단일민족을 중심으로 세계제패를 꿈꾸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민족만을 위하는 공산주의가 됐기 때문에 망하고 있습니다.
미국도 민주주의의 주도국가 자리에서 몰락해 가고 있는 실상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세계를 위하는 민주국가가 돼야 할 텐데 세계를 버리고 자국만을 위하려고 하는 미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퇴 일로에 선 미국은 자체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한국에서도 하나의 국가관 확립을 제창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 한국만을 위주한 국가관을 확립하면 그것은 역사의 한 시대와 더불어 흘러가고 맙니다. 소련 공산당이 그랬고, 미국 자체가 그러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렇게 나라는 작고 소수의 민족이지만 세계를 위하는 민족사상을 가졌다면, 나라의 형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21세기나 25세기 혹은 30세기에 가서는 한국은 기필코 세계를 지도할 것입니다.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참된 국가는 어떠한 국가냐? 세계를 위하는 국가입니다. 또 참된 세계는 세계만을 위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 자체는 결과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동기의 기원이 되는 하나님의 관점과 일치될 수 있는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를 위하는 내용의 사상을 가지고서는 세계를 지도하고 해결해 나갈 수 없습니다. (75-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