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사랑이야기 - 제 2 권 사랑 원론편 - 제 4장 사랑의 이상)

무지... | 20180526100823

2.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산다


종교는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종은 '마루 종(宗)' 자고, '교'는 '가르칠 교(敎)' 자입니다. 이 '종(宗)'은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집으로 말하면 대들보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데에 대들보가 없으면 안 됩니다. 대들보가 없으면 공간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은 반드시 대들보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마루, 맨 꼭대기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에서 가르치는 '마루 되는 것'은 뭐냐? 종교는 사람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뜻을 이루려고, 사람이 사는 생활적인 관계를 이루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신, 가장 높고 가장 귀한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교회,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나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물론 인간 자체만으로 갈 수 있는 일상 생활목표도 있지만, 제일의 목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남자 여자 둘이 만나는데,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그냥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합하라' 하면 안 됩니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중심으로 하고 도느냐? 하나님의 지식이나 힘을 중심하고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하고 돕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돕니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중심으로 중앙점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중심이 돼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상대적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 중심의 핵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머무를 수 있는, 하나님이 떠날 수 없는 그 하나의 중심 핵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고착돼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동할 수 없습니다. 이동하게 되면 중앙점을 잃어버립니다. 탈선하는 동시에 하나님 자체가 고착할 수 있는 자리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 자리를 상실하게 되면 이상적인 안착점, 혹은 안식점은 우주 어디에 가더라도 없습니다. 그 점은 둘이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141-12)
  
  
하나되고 확산되는 것이 인간생활의 공식
  
그러면 남자 여자가 비로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냐? 동쪽의 끝도 아니요, 서쪽의 끝도 아니요, 남쪽의 끝도 아닙니다. 그곳은 남자 여자가 합하는 하나의 중앙점인데, 중앙점은 남자의 자리도 아니요, 여자의 자리도 아닙니다. 서로가 자리를 엇바꿔 가면서 너와 내가 하나됨을 자랑할 수 있고, 하나됨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조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가 가정의 기반을 닦았다면 그 가정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입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사랑의 큰 말뚝에 닻줄을 달아 맨 배와 같습니다. 사랑의 큰 말뚝에 매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떠돌더라도 그 배는 그 말뚝을 중심으로 돌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는 행복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누가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적인 남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걸 파괴할 수 없습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돌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된 자리에서 또 확대해 나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중심을 찾아 하나님과 화합해 나오게 될 때 비로소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인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그리워하고 인격을 그리워할 수 있는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으로서 독자적인 사랑을 갖춘 하나님을 대신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인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차원 높여 가면서 살아 가는 것이 인간의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회를 느껴야 되고, 사회를 느끼고 체험하면서 국가를 체험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체험하고, 세계를 체험하면서 영계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의 자기 중심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한 중심을 중심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점을 중심으로 원형이 확대되는 거와 같이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로 가야 합니다. 또 아무리 세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다시 어디를 찾아가야 되느냐?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환고향해야 됩니다.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계로 가서 돌아 들어올 때는, 바깥쪽으로 갔으면 돌아올 때는 안쪽으로 돌아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구형의 세계를 향해서 내 자신이 횡적으로 반경을 그려서 또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의 모델, 즉 공식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하나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가정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과 화합한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확산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확산해야 하느냐? 사랑은 컸다 작았다 하는 그런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호흡할 때 내쉬는 것과 들이마시는 것이 차이가 있다면 불원한 장래에 이 존재세계에서 사라집니다. 내쉬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그 박자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선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되어야 하고, 하나되어서는 반드시 확산해야 됩니다. 확산해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되느냐? 소모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리워집니다.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이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중심점을 통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그 중심의 사랑과 중심의 인격에 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또 하나되어 다른 의미에서, 더 큰 의미에서 '아!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이러하니 더 큰 곳을 향해서 가야 되겠다' 이렇게 되어 확산돼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계무대에 나가 성공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하더라도 성공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141-14)
  
  
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고향이 별거 아닙니다. 고향에 가도 별거 없습니다. 고향의 생활환경을 보면 자기가 외지에 나가서 성공한 그 환경보다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정적이었던 자신의 과거가 살아 있습니다. 정을 중심으로 살던 옛날의 그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타향살이와 고향살이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정서적인 내용입니다. 정서적인 내용이 다릅니다. 타향에서 아무리 잘살더라도 고향의 깊은 사랑의 내적인 인연을 중심으로 관계가 맺어지면 다릅니다. 환경적인 여건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가면 벌써 사람이 다릅니다. 또 여기 한국과는 환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환경이 반대입니다. 한국에서는 오라고 할 때는 손등을 위로 해서 손짓을 하는데 미국에서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손짓 합니다. 전부가 반대입니다. 자는 것도 동양 사람은 반듯이 누워 자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엎드려 잡니다. 많은 부분이 반대입니다.
왜 그렇게 반대로 되어 있느냐? 그래야 모든 것이 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돌아서 합할 수 있는 상대적 위치를 취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만나야 되겠기에 생활문화가 다릅니다. 동서양의 출발 기준이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르고, 문화배경이 다르지만 심정을 중심으로 한 역사과정은 반드시 돌아가서 합쳐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깊은 심정적 기준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면 갈수록 어디로 가고 싶으냐? 중앙선을 넘어 점점점 세상 끝에 가면 갈수록 세상 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난 돌아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디에 가서 죽고 싶어하느냐 하면,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합니다. 외지에 나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고향에서 잘먹고 잘살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정서적인 내용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 어머니에게 사랑받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옛날 남편 또는 아내를 만났던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사랑을 중심으로 엮어진 자연환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것은 귀합니다.
선생님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덟 살 무렵에 외가에 갔을 때, 외할머니가 삶아주던 고구마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고구마는 본래 일본에서 들어온 것인데, 넝쿨 밑 땅속에 열매가 맺힙니다. 외가집에 가니까 외할머니가 '아이쿠, 우리 손주 왔구나!' 하면서 고구마를 캐다가 삶아주는데 참 맛있었습니다. 둘이 먹다가 어떻고 어떻다 하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맛있었습니다. 한 소쿠리 삶아주던 것을 먹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으므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그냥 먹기에 바빴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가든지 색다른 걸 먹게 될 때는 그 고구마 먹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첫맛을 들인 것, 그 첫것이 귀합니다.
사람이 첫정을 느낄 때가 언제냐?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랄 때의 여러 가지 사연을 첫정으로 느낍니다.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납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나느냐? 정을 중심으로 살아납니다. 이게 귀합니다. 지식을 중심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적인 것을 강하게 느낄 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인 관계에서 맺어진 사건이나 인연은 잊을 수 없습니다.
고향에 가면 옛날의 정서적인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은 늙었지만 옛날에는 이랬구만. 철이 없을 때는 이렇게 지냈고, 결혼을 해서 아기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됐구만'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 모든 것이 그리워집니다. 고향에 돌아와 손자를 보면 그 손자가 자기를 대신하는 것같이, 즉 '과거에 당신이 이랬소'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혹은 둘이 좋아하는 부부를 보면 '옛날에 우리가 좋아 지내던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보여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옛날의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맞춰질 때는 주체적인, 정서적인 배경이 딱 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정서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이런 인연이 나를 중심으로 가정 전체, 마을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이 성공하여 금의환향해 봐야 거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어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와 봐야 어머니 아버지 다 떠났고, 형님 누나도 다 떠나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금의환향해서 그 모든 것을 고향 땅에 심어 놓고 싶어합니다.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서 복잡하게 살아 왔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한 사연은 많지만 그 사연은 전부 흘러갑니다.
조국이 좋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선생님이 조국을 찾아오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어디로 가고 싶으냐? 조국이지만 김포공항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중심지 서울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울을 지나 평안북도 정주의 산과 바다가 있는 내 고향 집, 그곳을 찾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41-17)
  
  
정서적인 느낌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정서적인 그 느낌을 어디에서 느낄 수 있느냐?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정서적인 것을 느낍니까? 혼자서는 못 느낍니다. 새라도 보고, 혹은 꽃이라도 봐야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꽃을 보고 벌이나 나비가 날아와서 꽃 속에 있는 꿀을 빨아먹는 것을 볼 때 정서가 일어납니다. 꽃만 봐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상대적인 무엇이 있어서 작동이 벌어져야 비로소 정서가 유발됩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정서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정서가 발동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창조주고 우리 인간은 속된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이 관계맺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데, 원숭이와 사람이 틀린 것이 40여 가지나 됩니다. 그런데도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너희 할아버지는 원숭이같이 생겼다' 하면 듣기 좋습니까? '저기 저 녀석 생기기는 잘생겼는데, 빨리 뛰는 게 원숭이 같다' 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선생님이 원숭이 띠지만, 원숭이를 닮았다고 하면 기분 좋지 않습니다.
싫든 좋든 '저 녀석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어'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은 것이 자연 이치입니다. 다른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닮은 소성을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으면 그 기준에 비례하여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141-20)
  
  
남자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 할 때,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상대적 관계에서 비례적인 기준에 의해서 정서의 양이 결정됩니다.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남자 여자가 둘이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모체를 중심으로, 횡적인 주체의 핵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안개 낀 날 가로등을 보면 둥그렇게 달무리 모양으로 보입니다. 왜 달무리 모양으로 둥그렇게 보이느냐? 빛은 전부 직선으로 같아야 할 텐데 왜 그렇게 되느냐? 어떤 매개체를 중심으로 얼마만큼 가게 되면 반드시 각도가 달라집니다. 수증기에 빛을 비추면 반사되는데, 반사될 때 각도가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달무리같이 보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뭘 말하느냐? 그 빛 자체도 반드시 구형의 형태를 갖춰서 작용하려고 합니다. 상대가 있으면 반드시 방향을 전개시키려고 합니다. 전개시키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이상적인 곳을 향해서 들어갑니다. 그러한 작용을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남자 여자 둘이 만나서 손바닥을 대고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 나 좋아?' 해서 좋다고 하면 손바닥을 대고 맞추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뭘 가지고 맞추느냐? 손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상대편 뒤로 가려고 하지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똑같으면 큰일납니다. 여자가 작으니까 손을 대면 벌써 돌아갑니다. 그러면 몸이 기울어집니다. 움직일 때에는 손이 아래로 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손을 대면 몸이 벌써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동작하기에 편리한 방향을 결정하고 들어갑니다.
여자는 손을 올려서 잡게 되어 있지 내려서 잡게 안 되어 있습니다. 남자 여자가 껴안을 때, 여자는 손이 수평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남자는 절대 수평선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돌겠다는 것입니다. 춤출 때 가만히 서서 춤추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하나되었다, 행복하다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 가치 있는 것이 뭐냐? 우주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으로 둘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어 돌 때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통일원리에 나오는 개성진리체라는 말은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개성진리체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몸 마음이 하나되면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된 그 자리를 중심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게 돼 있지, 하나님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안 돼 가지고는 인간과 하나되게끔 안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남편이 필요하고 아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되어야 색시가 필요하고 신랑이 필요하지, 자기 몸 마음이 하나 안 돼 있으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른 데 두고 다니면 상대가 싫어합니다.
사람은 두 마음이 있습니다. 그 두 마음이 뭐냐 하면 하나는 몸의 마음, 하나는 마음의 마음입니다. 세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안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한 마음 가진 남자야' 할 수는 있습니다. 한 마음 가진 남자면 위대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 가진 남자야' 할 때는 '저것 저것!' 그럽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두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된 자리를 통해서 갑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 이상이 있지 둘로 갈라진 자리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완성적 인격의 주체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으로 사랑의 인격으로 하나되기 위해서 우리도 그걸 닮아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그 법도에서 수직적 하나님과 90각도의 평형으로 남자 여자가 합하여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141-21)
  
  
남자와 여자는 상대적으로 되어 있다
  
이 방대한 우주도 반드시 주고받는 작용을 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고, 그 외에 8개의 행성이 태양을 돌면서 태양계를 형성하여 하나의 구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려고 했느냐? 하나님과 제일 닮은 사람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를 말하는데, 남자는 내려다보려고 하고 여자는 올려다보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의 몸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여자의 인격을 내려다봅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 두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적 관계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성 호르몬과 남성 호르몬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적인 무엇을 바랍니다. 또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이 자기 마음에 맞아야 상대가 되지, 맞지 않으면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건 합하지 않고 서로 반발합니다.
그러니 부부끼리 사는 것을 가만히 보면, 큰 남자가 큰 여자를 데리고 사는 법이 없습니다. 서양의 어디를 가 봐도 그렇습니다. 반비례적입니다. 가끔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보면 자연법도에 따라 큰 남자는 작은 여자와 삽니다. 그렇게 상대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뚱뚱한 남자는 홀쭉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나중에 며느리를 얻든가 사위를 얻을 때, 남자가 뚱뚱한데 여자가 더 뚱뚱할 때는 그건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더라도 두 뚱뚱이가 싸우게 되면 박자가 안 맞습니다. 하나님도 짓궂은 데가 있어서 싸우는 모습도 보고 싶을 것입니다. 두 뚱뚱이가 붙들고 뒹굴고 하는 그 꼴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동정할 수 없습니다. '실컷 싸워라, 또 싸워라. 이놈들, 누가 지나 보자' 이럴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야 됩니다. 둘이 싸우게 될 때, 남자가 뚱뚱하고 여자는 홀쭉하니 여자가 밑에 깔리게 된다면 하나님이 이걸 보고 '이놈의 자식, 왜 그래?' 하고 여자를 동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동정받을 수 있는 우리라야 정서적인 유발점이 있습니다. 뚱뚱이끼리 싸우게 되면 '이 쌍것들, 잘들 해봐라' 그럴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에도 돌을 때리는 소리와 같은 파괴음이 필요합니다. 기분 나쁜 소리지만 그런 파괴음이 음악에 필요합니다. 돌끼리 마주쳐서 나오는 제일 듣기 싫은 소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깊은 골짜기, 얼마나 깊은지 조그만 돌 하나밖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골짜기도 필요합니다. 깊고 높은 산에 참새도 앉을 수 없는 뾰족한 돌 봉우리도 필요합니다. 그걸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할 때, 조화의 폭이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음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 상대적 관계의 자리에서는 참 멋집니다.
그래서 '좋다' '나쁘다' 하는 말은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 말이냐? 하나의 핵이라든가 중앙점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기분 좋은 사람한테 '무엇 때문에 기분 좋아?' 하면 대답을 못 합니다. 막연합니다. '좋기는 좋은데…' 하고 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정서적입니다. (141-23)
  
  
조화를 이루려면 상대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행복한 하나님이냐?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없다면 아무리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하나님일지라도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고양이라도 품고 '내가 고양이를 잘 만들었구나. 내가 귀를 이렇게 만들 때 기분이 참 좋았지. 이 발톱도 쥐를 잡아먹으라고 이렇게 만들었지. 허허허, 기분 좋다!' 하면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 좋다는 말은 정서적인 동기가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정서적인 동기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상대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는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 똑같은 또 하나의 하나님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똑같은 하나님이 밥을 먹을 때 같이 밥 먹고, 손질하게 되면 같이 손질하고, 또 일어서게 되면 같이 일어서고, 따라다니면서 이렇게 억천만년 똑같이 행동하게 되면 살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하루도 안 가서 눈이 뒤집어질 것입니다. 또 말을 하게 되면 며칠이나 할 것 같습니까? 며칠 안 가서 죽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나 상대적이어야 합니다. 높다고 언제나 높을 수 없습니다. 높기만 하면 그건 없어집니다. 내려와야만 소유할 수 있는 면적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으로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것보다는 꼬불꼬불하게라도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남자 여자가 만났다 하더라도 남자 모두, 여자 모두는 본래 사랑의 뿌리인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그 뿌리에 인연을 맺어야 할 존재입니다. 뿌리가 없는 풀을 부평초라고 하는데, 뿌리가 없는 것은 언제나 안심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불안합니다. 부평초라 하더라도 뿌리가 있으면 아무리 태풍이 불고 물결이 인다 하더라도 갈 수 있는 데만큼 가다가는 되돌아옵니다. 그걸 범위로 해서 빙빙빙 돕니다. 그것이 한 곳으로만 가게 되면 뿌리가 한 곳으로 치우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 때는 동풍도 불고, 서풍, 남풍, 북풍도 부는데 왜 이렇게 불어야 되느냐? 사람들은 바람이 제멋대로 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동풍이 불었으면 서풍이 불어야 곧바로 섭니다. 동풍이 불 때 며칠만 계속 불게 되면 뿌리가 동풍에 넘어지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바람을 받는 쪽 뿌리가 길어야 됩니다. 이걸 그냥 두면 이 풀이 서쪽으로 기울어져서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풍이 불어야 합니다. 서풍이 불면 동풍과 서풍의 조화 속에 뿌리가 곧게 됩니다. 또 남풍이 불면 북풍이 불어야 합니다. 전부 다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의 중심점을 세우기 위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고기압이 되었으면 저기압으로 되지 말라고 해도 됩니다. 여자가 다 성숙했으면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해도 눈을 감고라도 찾아갑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꽉차게 되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내려가야 됩니다. 더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골짜기를 메워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자연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만한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어 나를 중심으로, 내 일족을 중심으로 잘살겠다' 하고 살면 오래 안 가서 그 욕심에 치여 죽습니다.
선생님도 부자라면 부자입니다. 사람들이 선생님보고 부자라고 합니다. 돈은 많지만 선생님 지갑에는 한푼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돈을 한푼도 보지 못하고 수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쓰느냐? 선생님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깍정이입니다. 역사적인 시대가 온다는 말을 하면서 아내 생일이 되었는데도 선물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선물은 무슨 선물이야?' 하는 식입니다. 선물이 아무리 좋더라도 거짓된 마음으로 다이아몬드 선물을 해주는 것보다는 진정한 마음으로 '선물을 못 해줘서 미안합니다' 하는 한마디가 더 귀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그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선물은 안 해줘도 좋습니다. 생일에 깊은 사랑의 마음으로 '한 살을 더 먹는구만. 우리의 갈 길이 바쁘다' 하면서 하늘 앞에 효도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이 되면 하나님이 보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둘이 선물을 주고받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보고 시기할 것입니다. '이것들, 나에게 먼저 인사도 안 하고 이게 뭐야!' 이럴 것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선생님은 귀한 것이 생기면 쌓아 두었다가 남 줄 것을 생각합니다. 우리 아들딸을 위해 잘 쓰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10년 전에 없어졌다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10년 전의 것인데 쓰지 않아 지금에 와서는 못 쓰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10년 전에 내가 이걸 잃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렇게 되었구만' 합니다. 그렇지만 후회는 안 합니다. 나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살다 보니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사람을 위하고 세계 사람에게 주고 싶은 나의 심정에 하나님까지도 반하게 된다면, 천지의 모든 물건은 내 궁둥이를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따라옵니다. 차 버려도 따라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다 내 영토가 됩니다. (141-26)
  
  
정서적인 인격에 따라 훌륭함이 결정된다
  
그러면 모든 정서적 기원이 어디냐? 정서적인 내용이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새도 어미라면 새끼를 사랑할 줄 압니다. 이걸 인간이 가르쳐준 게 아닙니다. 어디에서 그렇게 배웠느냐? 새끼를 보호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힙니다.
동물은 수놈과 암놈이 때가 되면 사랑이 발동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때가 되면 누가 먼저 발동하느냐? 암놈이 먼저 발동을 합니다. 암놈은 발동을 하면 눈이 뒤집어지고 입술이 붓는 등 모든 부분이 붓습니다. 소를 예로 들어 말하면, 암소가 울면 벌써 수놈은 암놈 우는 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들을 때는 암놈 소리나 수놈 소리나 같은 것 같은데, 수놈은 암소가 우는 걸 벌써 압니다. 어디에서 그 소리가 들리면 벌써 그곳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전부 다 그렇게 좋아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여자 혼자 사는 것도 불행한 것입니다.
그 암놈은 처음 만나는 수놈에 대해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한 손님을 만나는 것 이상, 가장 가까운 무엇을 만나는 것 이상 좋아합니다. 처음 만난 수놈이 뭐가 그렇게 반가운지 너무 좋아합니다.
누가 그렇게 가까우라고 가르쳐주었느냐? 자기 어머니가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자기 어머니도 몰라봅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고 뭣이고 다 버리고 혼자 가서 그러고 있습니다. 그게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때에 따라서 컸다가 작아지고 작아졌다가 커지면서 발전하는 자연의 이치에 박자를 맞추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합니다. 그 박자에 놀아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도 자기 할머니에 대해서는 별수 없습니다. 할머니가 도와 달라고 하면 도와줘야 합니다. 자기 집안의 종가댁 할아버지는 세도가 당당하지만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너와 내가 같은 박자에 놀아나기 때문입니다. 높고 훌륭하다는 것도 전부 사랑을 중심으로 돌게 마련입니다.
선생님이 일반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 정서적인 세계에 박자를 맞추는 것은 누구보다도 폭이 넓고 깊고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역사의 사정을 알고, 세계의 모든 사정을 통하고, 미래 인간의 사정은 이럴 것이다 하는 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그려 갑니다. 그런 면이 다르지 다른 면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학식이 높은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돈 많은 것도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 사람이 갖추고 있는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가 문제입니다.
그러한 큰 인격을 갖춘 분을 남편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여자라면 너나할것없이 다 합니다. 그분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크고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못생긴 부인이지만 정서적인 터전의 닻줄을 매놓은 그 인연을 따라서 좋아하려고 합니다. 다 그렇게 돼 있습니다. (141-35)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부자관계
  
그러한 정서적인 면을 추구하는 인간은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상이라는 줄기를 통해서 가지를 거쳐 잎까지 되어 있습니다. 이 잎에는 줄기도 있고, 가지도 있고, 뿌리도 있습니다.
요즘은 식물을 세포로 번식시키는 시대입니다. 이 세포 하나를 따내서 유리관 같은 데 넣고 배양하면 자랍니다. 그런데 이 세포 하나에서 꽃이 나옵니다. 꽃이 나오는데, 그 색깔은 어디에서 보급받았는지 씨를 뿌려서 피운 꽃과 같은 색깔이 나옵니다. 또 그 세포 안에는 줄기 인자도 있고 뿌리 인자도 있습니다. 그래서 뿌리도 나오고 줄기도 나옵니다.
우리 인간 자체는 누구를 닮았느냐? 조상을 닮았습니다. 인간의 맨 위 조상은 누구냐? 우리 인간은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제2의 존재입니다. 제1의 존재, 즉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존재입니다. 어떠한 근원에서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근원 자체가 뿌리가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 근원에 연결된 관계의 결실체로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은 원인적인 뿌리와 통할 수 있는 소질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세포가 자기 조상을 닮은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머니가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어머니가 있었으면, 어머니의 실체가 있었으면 창조가 필요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데 아버지격 주체로 존재합니다. 그러니 어머니격 존재가 필요해서 그 어머니격 존재를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만을 상대로 해서는 자극을 못 느낍니다. 마음 자체만으로는 마음 자체가 아무리 자극을 해도 무형의 실체로는 느끼지 못합니다. 감동이 없습니다. 같은 것이니까, 같아서 도니까 자극이 안 옵니다. 그러나 서로 상충된 것끼리 만나면 자극이 있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합하면 폭발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상대적 거리가 있는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필요해서 플러스로서 마이너스적인 상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것, 외적인 것의 두 성품이 있는데 플러스격 상대형으로 아담을, 마이너스격 상대형으로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 둘을 지어서 하나님은 어디에 가 있으려고 했느냐 하면, 아담 속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아담 속에 들어가서 해와와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해와는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부인이요, 외적으로는 아담의 부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자기와 자기 부인을 실체화시킨 것이 우리 인류시조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세계를 통하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면 마음에서 '오냐' 하고 대답합니다. 그런 체험을 해보았습니까? 그런 경지에 못 갔으니 그렇지, 마음에 물어 보면 다 답이 나옵니다.
관상을 봐주는 관상쟁이나 영통한다는 무술가(巫術家)들은 저급한 영이 마음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가지고 그 노릇을 합니다. 그걸 들을 수 있는 본연의 성품이 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저변으로 내려가지만, 자꾸 떨어져 내려가지만 본성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관계할 때는 작용하면 할수록 승화됩니다.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내려가는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누구냐? 아담은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몸으로 만들었습니다. 무형의 실체로는 실체 자극의 세계를 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무형으로 되어 있으면 다른 것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아담의 마음에 들어가 아담이 성숙하기를 바랐고, 해와의 마음에 들어가 해와가 성숙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성숙하기를 바라던 그때에 아담 해와가 타락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뿌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역사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뿌리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걸 몰랐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하고 기도하면 '부자의 관계다' 그럽니다. 부자의 관계는 뭐냐? 그걸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풀어서 맞춰야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통인들이 그 세계를 몰랐습니다.
역사 이래 비로소 선생님이 이걸 체계화했습니다. 현시대와 더불어 미래의 세계까지 풀어서 사람이 되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명주실 꾸러미가 제멋대로 엉클어진 것과 같은 것을 풀어야 합니다. 푸는 길은 둘이 아닙니다. 단 하나입니다. 절대 한 길입니다. 이 한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절대 인간의 저끄러진 역사상의 모든 죄상을 풀고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본 고향에 가지 못합니다. (141-37)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