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와 나(사랑이야기 - 제 2 권 사랑 원론편 - 제 4장 사랑의 이상)

무지... | 20180525074917

제 4 장 사랑의 이상
  
1. 너와 나
 
행복․평화․이상의 기원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떠한 곳에서 찾아지느냐? '나와 너' 사이에서 행복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기원입니다. 그리고 평화도 '나와 너' 사이에서 시작되고, 이상도 '나와 너' 사이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 사이에서 이상적인 환경이 완전히 설정되지 못하면 참된 이상․행복․평화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 자체를 생각해 볼 때, 마음이 '나'라면 몸은 '너'와 같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기준을 갖춘 자리에서 완전히 즐기고,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기틀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려면 마음과 몸 같은 '너와 나'의 이 상대적 관계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평화와 행복을 지탱할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녀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가진 내 개체 가운데 주체성을 설정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문제가 지극히 중요합니다. 만약 그러한 주체적인 동기를 몸 마음을 통해서 나에게서 설정하지 못하면 영원한 행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종적인 세계를 대해 나는 땅 위의 한 축이지만 상대적 세계로 보면, 내가 남자라면 아내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너와 나' 사이의 주체적인 불변의 한 기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행복한 부부다, 평화스러운 부부다, 이상적인 부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기틀이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역사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현시대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미래를 대신한 수많은 가정 앞에 주체적인 하나의 통일의 기원이 되어 '우리 둘이 행복하다. 우리 둘이 이상적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이상은 변하지 않고 영원성을 가져야 합니다. 행복과 평화도 영원성을 지녀야 합니다. (86-96)
'너와 나'의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남편 앞에 부인이 '나'라 하면 남편은 '너'고, 남편이 '나'라 하면 아내는 '너'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태어났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살고, '너와 나'의 관계에서 죽습니다. 어떤 특정한 나라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가든지 그렇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좋은 것은 어디 가든지 통하지 않는 곳이 없고, 어디 가든지 거기에 호응하지 않은 곳이 없다 하게 될 때 이는 이상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86-103)
이것을 생각해 볼 때에, 부부로서의 불변의 주체성을 어떻게 지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둘 사이가 행복의 기틀이 되지 못하는 한 그 행복은 오래 못 가서 왼쪽으로 굴러 떨어지든가 오른쪽으로 굴러 떨어지든가, 그렇지 않으면 탈락되든가 하는 운명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남녀가 부부를 이루어서 '너와 나' 사이에 불변의 통일을 갖춘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에서 행복을 노래하게 될 때, 그 행복은 영원합니다. 또 이상적인 내용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 둘이 변치 않는 주체적인 그 무엇을 갖게 될 때 영원한 이상이 설정됩니다. (86-96)
  
  
종적 기준과 일치되는 사람이 마음이 곧은 사람
  
평화(平和)는 수평(平)이 되어서 화(和)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평화는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이것은 상하관계에서나 좌우관계에서나 전부가 화해서 기쁠 수 있고, 모든 것이 기울어지지 않고 원만해야 됩니다. 그래야 평화입니다. 또 평화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상(理想)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상은 뭐냐? 그것이 돌아야 합니다. 평면으로만 도는 것이 아니라 입체성을 띠고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입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은 이상적인 인간이다' 할 때, 이 이상적 인간은 미래에 대한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즉 현실이란 평면적인 생활도 있지만 미래가 있어야 그 생활이 구형(球形)을 갖추게 됩니다. 이상은 평면으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인간 자체도 반드시 이상적인 창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평면적이고 종적인 인간과 주고받을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마음은 종적 기준입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은 수직선임을 말합니다. 그러니 종적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벌써 그 자체가 수직의 입장이라는 걸 어느누구든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직이라 말하지 수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곧다' 할 때, 이 말은 무엇을 중심하고 하는 말이냐? 수평을 중심하고 하는 말입니다. 본래 곧다는 말을 성립시킬 수 있는 선위조건이 무엇이냐? 수평이라는 개념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이 수평에 90각도라는 내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곧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90도면 수직이 그어집니다.
그러면 수평은 뭐냐? 하나님은 천지를 지을 때 무엇부터 지었겠느냐? 수평선을 긋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엔 각도를 잡았을 것입니다. 수평 각도를 잡을 때는 사방을 반드시 생각해야 됩니다. 사방 일주는 360도가 그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기준을 중심하고 반드시 각도를 잡는데, 0도가 있습니다. 그 0도 되는 점이 뭐냐? 그것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수직이 있을 수도 없고 각도가 있을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영점(零點)입니다.
이것은 또 뭐냐 하면 수직점입니다. 그 수직점은 어떤 점이냐? 이 점은 모든 것의 중심점입니다. 그래야 각도가 맞지, 360도의 중심점이 안 돼서는 360도가 전부 틀어져 나갑니다. 그러면서 고정입니다. 역사가 변천하고 사회환경이 변하더라도 이 각도의 계수(係數)에서 이것은 역사성과 환경성을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 하면 반드시 90도라는 관념 밑에서 말합니다.
'양심이 곧다' 하는 말은 수평을 기준으로 해서 하는 말입니다. 이 수평은 사회의 기준, 기조(基調)입니다. 우리의 선조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생활, 보편적인 생활은 수평을 그립니다. 그 사람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무엇을 놓고 말하는 것이냐? 지금까지 사회의 제도라든가 법을 중심으로 해서 바로 수직의 입장에 있느냐를 놓고 말합니다. 수직의 입장에 있으면 옳다고 합니다.
사회적인 수평기준은 그 나라 국민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수평을 중심하고 생활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그 사회제도가 수평이 된 거기에 수직적인 양심성(良心性)을 지닌 사람을 '바르다'고 합니다. (86-98)
  
  
사방성을 갖춘 존재가 이상적인 존재
  
하나님이 천지를 지을 때, 하나님이 수직의 입장이므로 수평을 먼저 그렸습니다. 그러면 수직에서 절대 필요한 것이 뭐냐? 수평과는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수직 하면 벌써 수평을 내재적인 관념으로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또 수평 하게 되면 수평만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니라 수직을 내재적인 관념으로 인정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수직적인 존재기 때문에 인간은 수평, 횡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이고, 인간의 사랑은 횡적인 사랑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부부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수평적인 존재입니다. 눈도 수평입니다. 코도 수평입니다. 이것이 조금만 찌그러져도 기분 나쁩니다. 얼굴도 그렇습니다. 귀도 수평인 것이 좋습니다. 완전 수평은 짧아도 좋지만, 완전 수직은 길수록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것이나 긴 것이나 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러니 형(型)에 있어서는 별것 없습니다. 크다고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관계의 횡선(橫線) 종선(縱線)은 크나 작으나 동등한 가치를 지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격의 평등 가치론도 설정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람은 마음과 몸이 하나돼야 합니다. 마음이 '나'라면 몸은 '너'입니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 관계를 말합니다. 완전히 수평이 된 사람은, 완전히 수직이 된 양심적인 사람은 주고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고받아서 원형(圓形)을 그려야 합니다. 이것이 만사(萬事)에 치우치지 않게끔 멋지게 돌아야 합니다. 이게 바로만 돌아서는 안 됩니다. 왼쪽으로 돌아가도 멋지고, 바른쪽으로 돌아가도 멋져야 됩니다. 이럴 수 있으면 이상적입니다. 이상적이라는 것은 한쪽 눈으로 봐도 '아 좋다!' 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도 좋고, 저렇게 해도 좋은 상태입니다.
'이상적'이 되려면 사방성(四方性)을 갖추어야 합니다. 일방통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방통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갔다 돌아오지 못하지만, 로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로터리를 좋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이상적인 남자, 이상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사람의 얼굴 가운데 제일 이상적인 것이 뭐냐? 그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얼굴 가운데 움직이는 것이 뭐냐? 눈입니다. 그 다음에 입입니다. 그래서 눈이 잘생기고 혀가 잘 도는 사람을 우리는 한몫 한다고 합니다. 벌써 눈이 잘 도는 사람은 재치가 있습니다. 또 혀가 잘 도는 사람은 말을 잘합니다. (86-100)
   
모든 만상이 둥글게 되어 있는 이유
  
우리 눈은 둥글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눈을 깜박깜박 하는 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습니다. 만일 눈이 사각형으로 돼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눈이 둥글게 되어 있어서 무엇을 볼 때 피곤하지 않습니다. 자극이 없어서 피곤하지 않습니다. 둥근 것은 자극이 없습니다. 둥근 것을 만지면 촉감은 있지만 거기에 또 다른 자극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각(角)이 있으면 소모시키는 자극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만상(萬象)은 원형운동을 합니다. 운동을 하는데 자극이 있으면 걸립니다. 둘이 주고받는 데 있어서 뿔이 나 있고 침(針)이 나 있으면 '아이구, 좋다!' 하며 쓸어줄 때 찔립니다. 사람의 얼굴이 왜 둥글게 생겼느냐? 쓸어줘도 기분 나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궁둥이가 왜 둥글게 생겼느냐? 마찬가지입니다. 쓸어줘도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는 요런 모양이 되고 싶다' 할 때, 그것이 어떤 모양이라는 느낌이 드느냐 하면, 둥근 모양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달도 둥그렇습니다. 그래서 초생달보다는 보름달을 좋아합니다. 초생달은 비정(非情)의 달입니다. 반면에 둥그런 보름달은, 이런 말은 없지만 희정(喜情)의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하, 좋다!' 할 때 입을 어떻게 벌리느냐? '하 할 때 입을 크고 둥그렇게 벌립니다. 이렇듯 좋은 것은 둥그렇습니다. 기쁨은 둥근 데서 나옵니다. 발성도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하하하' 하지, 입을 오므리고 '후후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원형을 닮아서 운동하게 마련이고, 원형을 닮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이상적인 존재성에 가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원형은 '너와 나'의 조화의 기원을 의미하기 때문에 눈도 그런 이상적 형태를 닮으려니 둥그렇게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입도 모양은 일자형이지만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이 이는 뾰족합니다. 이가 둥글면 음식을 씹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둥근 모양을 닮았습니다. 어느누구든지 이의 가장자리가 면도칼로 싹 자른 듯이 일정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 둥글게 돼 있습니다.
이 코도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날이 섰지만 둥그렇게 돼 있습니다. 코가 무등산처럼 두둑하게 생긴 그런 코는 복코입니다. 그렇다고 코가 뾰족한 사람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둥글수록 좋습니다. 얼굴도 납작한 것보다 둥글수록 좋습니다. 얼굴도 반듯한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원형이 아닌 얼굴은 한번 보면 다음에는 싫어집니다. 그렇지만 원형은 보면 볼수록 보고 싶고 친근감이 갑니다.
왜 그러냐? 일광(日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는데, 달라짐에 따라서 그것이 언제나 미를 갖춥니다. 이것이 납작하면 저녁이나 아침이나 마찬가지지만, 원형이기 때문에 각도에 따라서 묘미가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둥글게 생겼는데, 그것은 이상적인 형을 갖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으로써 보다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상적인 형태, 즉 원형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콧구멍도 둥그렇고, 귓구멍도 둥그렇고, 목구멍도 둥그렇습니다. 목구멍은 뭘 먹지 않을 때에는 붙어 있어서 납작하지만 원형을 닮았습니다. 내장까지 전부 원형을 닮았습니다. 손가락도 길기는 하지만 원형을 닮았습니다. 왜 그렇게 생겼느냐? 천지의 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너와 나'의 이상을 그리는 이런 입장에서만 모든 작용이나 행복, 희망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형을 닮아 있습니다. 그것이 천지창조의 이치입니다. (86-104)
  
  
사랑은 성숙기에 상대를 통해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은 둥근 분일 것이냐, 평평한 분일 것이냐? 하나님은 둥근 인격자, 원만한 인격자입니다. 둥글기는 하지만 공기를 안 넣은 공같이 납작해서는 안 됩니다. 공에 공기를 팽팽하게 불어넣으면 원만(圓滿)하게 됩니다. 타락한 인간인 우리는 원만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언제나 보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면에서나 내형적인 면에서나 원만합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아닙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님도 원만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살, 열 살 때까지도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열 다섯 살, 열 여섯 살, 사춘기가 되어서야 사랑이라는 게 나옵니다. 그 사랑은 혼자 있을 때는 나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나옵니다.
사람에게 사랑이 있지만 상대가 있어야 사랑이 벌떡거리고 나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혼자서는 작용을 못 합니다. 상대적 요인이 안 돼 있기 때문에 작용을 안 합니다. 우주의 모든 만상은 절대 손해나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남자라는 존재 앞에는 보기 싫은 여자라도 있어야 합니다. 남자 앞에 보기 싫은 여자라도 있어야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숙기에 나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대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못 합니다.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때와 사람이 태어난 때는 다릅니다. (86-106)
  
  
'너와 나'가 이상적인 관계를 이루려면
  
만일 하나님이 '나'라 하면 '너'는 인간입니다. 어떠한 인간이냐? 타락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나와 같은 인간인데 타락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모양은 마찬가지입니다. 웃는 모양도 마찬가지인데 내용면에서 타락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그저 땅만 바라보고 삽니다. 뭘 찾을까 하고 45도 이하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렇지만 타락하지 않은 사람은 45도 이상 올려다보고 삽니다. 그렇다고 45도 이상만 보겠다고 눈을 올려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위 45도와 아래 45도를 수평으로 맞춰 '너와 나'의 관계가 하나되어서 바라봅니다. 인격자는 그렇게 바라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앞으로 하늘만 보아서도 안 되고 땅만 보아서도 안 됩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은 공짜 돈이 어디에 떨어져 있지나 않나, 금덩이가 있지나 않나 하며 땅만 보고 살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반대로 하늘만 바라보고 삽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구름 타고 와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이 조화된 수평선상의 길로 와야 합니다. 나를 중심하고 보면, 예수님이나 오시는 주님은 뭐냐? '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중심하고 보면 인간은 '너'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종적으로 만나야 되느냐, 수평으로 만나야 되느냐? 어떻게 만나야 되느냐? 수평으로 만나야 됩니다. 역전이라든가 부두에 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수평으로 만납니다. 종평(縱平)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전부 다 수평으로 만나게 돼 있습니다.
이상(理想)은 수평선상에서 이루어집니다. 수평선상 외에는 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옥 하면 수평 밑이고, 천국은 수평 위입니다. 수평선상에서 기반을 닦아야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닦지 못하면 올라갈 수 없습니다.
'너와 나'라는 말은 좋은 말입니다. 나를 중심하고 친구할 때는 무슨 사이냐? '너와 나' 사이입니다. 언제는 좋다가 언제는 나쁘면 '너와 나'는 좋은 말이 아니라 나쁜 말입니다. 좋다는 것이 일시적인 형편에 따라서 변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친구와 '너와 나'라는 관계가 돼 있다고 할 때, 그 친구가 아침에는 좋았는데 저녁에 나쁠 수 있느냐? 나쁠 수 없습니다. 절대적입니다. 그러면 이상적입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너와 나'의 관계가 영원히 수평을 이루든가 수직선상에 놓이든가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는 입장에 있게 될 때는, 이상이 이루어지고 이상의 판도가 형성됩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부부를 이루었다면 '너와 나'의 상응관계가 영원해야 합니다. 처음에 좋았다면 끝에도 좋아야 합니다. 시종일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혼이 나쁜 것입니다. (86-108)
  
  
완전한 주체 앞에는 완전한 대상이 생긴다
  
그러면 돈을 쓰는데 나를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너를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너를 위해서, 즉 남을 위해서 쓰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남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교회도 통일교회를 위해 고생한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욕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을 쓰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쓴다, 나를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차원에서 쓴다 생각하고 써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종교는 어때야 하느냐? 통일교회는 종교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와 하나되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와도 하나돼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되는 운동을 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왜 망하지 않느냐? 남을 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종단은 아무리 핍박을 받더라도 망하지 않고 발전합니다.
천운(天運)도 이상을 바라고 이상의 세계를 찾아 나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또 이상을 주관하는 주체자 하나님도 그러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너와 나의 행복을 찾아서 너와 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가는 사람은 반드시 상대가 설정되게 마련입니다. 천지 이치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만 되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천지 이치입니다.
완전한 것은 없어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원리가 완전한 원리라면, 그것은 과학세계에 영원히 존속합니다. 그걸 지지하는 상대자가 반드시 나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다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생겨나게 돼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통일교회가 완전한 플러스가 될 때는, 덮여 있는 나뭇잎과 같은 그런 시시한 것들은 다 물러가고 진짜가 거기에서 소생하여 통일교회와 합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통일교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마이너스에서부터 자꾸 커 갑니다. 이리하여 이들이 하나되어 하나의 원형을 그리고, 이게 다시 커져서 더 큰 원형을 그려서 구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체가 나쁠 때는 상대 자체도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라면 이 세계에 완전한 마이너스적 인간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게 우주의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적인 세계, 이상적인 세계, 창조이상적인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작용을 하기 때문에, 본래 천지를 그런 작용을 중심하고 지었기 때문에 이 원칙은 영원 불변하므로 완전한 플러스가 있을 때에는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만약 완전한 플러스가 있는데도 상대 되는 마이너스를 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 주위의 모든 존재들이 협력해서 옹호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가 파괴돼 버리기 때문에 그 마이너스를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는 맞고 핍박받으면서도 발전합니다. 종교는 왜 핍박받으며 발전하느냐? 종교가 완전한 플러스인 하나님의 섭리의 뜻 가운데 섰으니 완전한 마이너스가 되어 새로운 플러스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치면 칠수록 새로운 마이너스가 나와서 이 플러스 되는 종교를 보호하고 구하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이 원칙은 우리가 사는 동네나 국가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괜히 까닭없이 선한 사람을 쳤다가는 골탕 먹습니다. 통일교회가 선한 길을 가는데 이런 통일교회를 치면 골탕 먹게 마련입니다. 결국 친 사람의 복을 그냥 그대로 인수하게 됩니다. (86-111)
  
  
상대기준이 일치돼야 행복해진다
  
나라가 '나'라 할 때 세계는 '너'입니다. 그런데 '너'의 기점은 한 나라입니다. 상대적 기원은 한 점입니다. 한 점에서 시작합니다.
이 관계는 우주와 연결됩니다. 땅, 온 지구성이 내 것이다 할 때, 네 것은 무엇이냐? 지구성이 우리 집이다 할 때, 네 집은 누구 집이냐? 네 집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관계가 반드시 성립돼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말했지만, 상대성원리에 의하면 상대적 여건이 없고서는 이상이 있을 수 없고, 진보나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에서는 어떻게 진화했다고 보느냐? 아메바에서 진화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너'가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나'만 있으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너와 내'가 좋을 수 있는 내용을 중심하고 발전합니다. '너와 나'사이의 상관관계에서 이상적인 주고받음에 의해 보다 차원 높은 발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너와 내가 좋을 수 있는 이상은 어디에서 오느냐? 이것은 보다 차원 높은 가치를 발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가치는 어디에서 오느냐? 보다 낮은 차원의 '너와 나' 사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은 데서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이것으로 다 해결됩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일하느냐? 나를 위해서 일하느냐, 너를 위해서 일하느냐? 너를 위해서 일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좋으냐? 남을 위해서 일하는 게 좋습니다. 그 기준은 통일교회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우주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기준이 조성돼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저쪽에서 상대기준을 이루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돼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리의 조상, 그 원리원칙의 근본이, 그 원인이, 동기의 존재가 그렇기 때문에 결과적 입장의 사람은 동기의 내용을 떠나서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디까지나 인생살이는 수십억 년, 수십억 대를 가더라도 그 인생살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살이는 본래 원인에서부터 가게 되어 있는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나옵니다. 그 원인에 일치하게 될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6-114)
  
  
상대를 위해 투입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하나님이 상대존재를 창조했는데, 창조할 때 본래 하나님이 힘을 대량 투입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좋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좋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좋게 하기 위해서 투입해서 만들었습니다. 먼저 투입해서 이상상대 창조라는 표제 하에 모든 천지만물을 지어 나갔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상 실현의 과정을 거쳐 나오고 있습니다.
이상상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상적으로 투입해야 합니다. 이상적으로 투입하지 않고는 이상적인 상대가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왜 남을 위해서 이렇게 투입하느냐? 남을 위해주는 것은 이상 존재를 재창조하기 위해서, 이상 존재를 재출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남을 위해서 투입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무엇이 찾아지느냐? 나만이 아니라 너라는 상대가 찾아집니다. 즉 내가 남을 위해서 1백 퍼센트 투입하면 투입할수록 나에게 이상상대가 형성됩니다. 이상상대가 형성되어야만 영원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자기의 인연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다 선하고, 보다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왜 믿느냐? 내가 좋기 위해서 믿느냐, 통일교회를 좋게 하기 위해서 믿느냐? 또 통일교회는 무엇 때문에 나와서 이러느냐? 통일교인들을 좋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통일교인들은 통일교회를 위해서, 통일교회는 통일교인들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렇게 되면 돌아갑니다. 돌아가면 이상이 벌어집니다. 운동할 때도 이렇게 직선으로 가다가 홱 도는 것이 쉬우냐, 원형으로 서서히 도는 것이 쉬우냐? 원형으로 돌기가 쉽습니다.
하나님도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일하느냐?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일하느냐? 이상 실현을 위해서 일합니다. 이상 실현은 1백 퍼센트 참을 투입해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실된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서 변천하는 역사지만 변하지 않는 진실성을 투입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이상적 상대가 어느 땐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또 통일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상상대를 이루기 위해서, 이상상대권을 상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같이 지치지 않고 변하지 않고 계속 투입하면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상을 그려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행이 뭐냐? 주려야 줄 수 없고, 받으려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줄 수 있고, 밤이나 낮이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86-116)
  
  
보다 큰 범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랑이 이상적인 사랑
  
그러면 이상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그 세계는 '너와 나' 사이에서 세계 만민을 대해 '너'라는 관념을 가지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동서남북 사방 360도를 중심으로 내가 핵점(核点), 중심이라면 나를 중심한 원형은 얼마든지 좋다 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에서는 방향에 따라 차이가 없어야 합니다. 동쪽과 서쪽이 차이가 있으면 이상적이 아닙니다. 또 남쪽과 차이가 있어도 안 됩니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내 친척을 사랑하는 것과 내 민족을 사랑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크냐? 민족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다. 또 내 나라를 사랑하는 것과 세계를 사랑하는 것 중에 어떤 게 더 크냐?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 더 큽니다. 이건 클수록 좋습니다. 클수록 범위가 넓어지기 때문에 좋습니다. 돈으로 말하면 클수록 점점 돈이 많아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세계적 인격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처녀들은 세계적 인격자한테 시집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범위가 크면 클수록 좋기 때문에 세계적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결혼하는 데도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사람과 결혼하는 것보다 외국인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국 사람 가운데서도 흑인과 해야 됩니다. 꼭대기만 좋아하는 것은 이상적이 아닙니다. 아래를 더 좋아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세계의 흑인 중에서도 불구자를 맞아 '나는 이상적으로 살 수 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 아가씨들은 '대한민국 사람, 우리 나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후보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농부나 막노동을 하는 사람과 결혼하더라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하는 여자라면, 어떤 사람한테 시집가더라도 남자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차이에 따라 더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 일생은 불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86-118)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