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랑의 본질
사랑은 반드시 종횡의 내용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이 있는데, 종적인 사랑은 반드시 횡적인 사랑을 창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이런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종횡으로 집약되어 이루어졌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이는 종적인 사랑이지만 종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사랑이 깃들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귀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가 그릇될까봐 생활을 통해서 자녀의 길잡이가 되려는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듯 종횡의 요소를 책임진 것이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의 귀한 것을 그냥 그대로 자식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냥 그대로 주어서 횡적으로 넓히려고 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그렇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왜 그러하냐? 상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는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간에는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원형을 그립니다. 주체는 종적이요 대상은 횡적인 고로 이것이 90각도가 되어 원형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반드시 종횡의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횡 가운데 무엇이 먼저 출발하느냐? 종이 먼저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랑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심을 분석해 보면 종횡의 사랑의 본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횡적인 아들딸 앞에 나타납니다. 그 아들딸이 종적인 기준으로 넓힐 뿐만 아니라 횡적으로도 넓혀 나감으로써, 거기에서 만유의 존재가 종적인 환경을 중심으로 횡적인 환경으로 넓어지게 되고, 세계와 천주까지 넓혀 나갑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세계를 지배하겠다, 혹은 무엇을 갖겠다, 무엇을 하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종횡의 사랑의 인연이 자신의 본질적인 마음 바탕에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적인 욕구에 의해 우리 욕망이 충족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4-215)
사랑이란 순수하고 변치 않는 것
이상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하는 말이냐? 돈이냐, 권력이냐, 세력이냐?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있었고, 천사가 있었고, 만물이 있었습니다.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때와 그때 중에 어느 때가 좋으냐?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외적으로 모든 것이 좋고 편리합니다. 아담 해와가 음식을 먹을 때 식탁에 앉아서 먹었겠습니까? 요즘에 식사할 때 지켜야 할 규범이 많은데, 그때 무슨 식사 예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에 그렇게 한다면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는 '그 옛날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자'고 복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에덴동산에는 돈도, 권력도, 문화도, 무슨 법도 없었습니다. 있다면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만나면 언제나 좋아하는 것만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가 필요하고, 아담 해와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서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만약 떼어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떼어놓게 되면 하나되고 싶은 힘이 솟았을 것입니다. 어떤 힘도 제재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솟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침범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뭐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때 만약 아담이 해와한테 가서 얼굴에 무엇이 묻고 손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도 '당신을 사랑한다' 한다면 해와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이고! 먼저 세수하고 몸을 닦고 와야 사랑하지'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을 했겠습니까? 또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이 좋아요'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한 모든 더러운 것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요즈음 유치원생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은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학교에 올 때, 옷을 잘 차려입고 와야 좋아하지, 나이가 많은데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오면 싫어합니다. 잘 차려입고 온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아들이 사랑하고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 크다고 볼 수 있느냐? 그건 하나의 조건에 불과합니다. 보기에는 아무리 남루하고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행복해서 아들딸과 부둥켜안고 좋아하는 것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103-294)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
그러면 그 사랑의 본질이 뭐냐? 남편이 진짜 나를 사랑하는지를 물어 보기 좋아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한테 '아, 나는 정성껏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 진짜 나를 사랑하오?' 하고 물을 때, 남편이 '아! 사랑하고 말고'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얼마만큼 사랑하오?' 했을 때, '요만큼 사랑한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감싸안을 만큼 나타내면 싫어합니다. 몇천년이라고 하는 것보다 표현할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하고 '콱' 하고 시늉이라도 하며 '사랑한다' 하면 좋아합니다. 그게 뭐냐? 품고 품고 품고 품고,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까지, 절대권에 연결될 때까지 사랑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형용사는 사랑이라는 말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이라는 말도 사랑에만 맞지, 절대적인 생명이라고 해도 실감이 안 납니다.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할 때 실감이 납니다. '영원한 사랑, 무한한 사랑'이라고 해야 실감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최고의 이념, 으뜸가는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부를 다 갖다 붙여도 조금도 모순이나 상충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만이 멋집니다. 그런 사랑이 영원한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까? 인간은 1백년 정도밖에 못 사는데 어떻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합니까? 남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1백년 정도밖에 못 살고, 여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1백년 정도밖에 못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한 사랑입니까? 자기들을 중심으로 영원한 사랑이라고 해야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원이고 절대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거기에 하나님이 개재해야 영원이고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사랑권 내에서는 몽땅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더라도 자기를 위해 있다는 주장이 남아 있는 데는 완전한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라는 관념, 즉 자기를 생각하는 무엇이 있다 할 때는 아직까지 미급한 사랑입니다. '나는 너만을 위해서 있다. 언제나 너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를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나서 나를 생각하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의 원칙에 합격자가 될 수 있지만, '내가 너에게 주었으니까, 너를 사랑했으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 된다' 하는 사람은 이상적인 사랑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때, '내가 너에게 아무 날 고무신을 사주었고, 옷을 사주었고, 너를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 그 가치는 몇억 몇천 몇백 몇십 원이다' 하면서 장부에 적어 놓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세상의 어떤 왕궁의 왕자 왕녀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정성을 다해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으니 미안하다' 하면서 해줍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는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나 하며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과 통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60-82)
참사랑이란 자기 보다 나은 상대를 만드는 것
그러면 참사랑이 뭐냐? 결혼할 때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랍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옛날서부터 지금까지, 억천 년이 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라는 것은 공통적인 진리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 하나님 닮아서 그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한테 물어 보기를 '당신도 당신의 사랑의 상대가 당신보다 잘나기를 바라고, 당신의 아들딸이 당신보다 잘나기를 바랍니까?'라고 할 때 '너희들과 같다'라고 할 것입니다.
1백 퍼센트의 하나님이 1백 퍼센트 하나님 자체를 투입해서 상대를 만들면 자기만한 상대밖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이상 될 수 있는 상대를 만드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1백 퍼센트를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고 또 투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힘은 입력보다도 출력이 크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위인이나 성인들이 그 시대에는 핍박받았는데, 왜 후대에 가서는 높아지느냐? 점점점 힘이 강하기 때문에 높아집니다. 투입하고 투입해서 진공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다른 쪽은 고기압권이 되어 자동적인 순환운동이 벌어집니다. 영원히 순환합니다. 자꾸 없어지니까 고기압권이 생기고 순환운동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은 자기 생명 이상을 투입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남편은 자기 아내를 생명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부모, 참된 자녀, 참된 애국자, 참된 성인, 참된 하나님, 참된 하나님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210-160)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것
어떤 부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죽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살아생전에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고, 남편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 했다' 하며 서러워한다면 그것은 동정이 갑니다. 그렇지만 남편에 대해서 불평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생전에 이 이상 더 사랑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랑했다' 하는 것하고, '생전에 내가 좀더 사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사랑이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랑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그를 위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다했다고 한다면 끝입니다. 사랑의 길은 상대를 위하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다했다 하는 것보다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인들이 '나는 통일교회에서 할 것 다 했으니까, 나를 사랑해줘야지'하는 사람은 끝입니다. 다했더라도 '더 해야 할 텐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아들한테 그 돈을 내라고 합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그걸 갚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달라고 하기 전에 할 것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아무리 다했다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 못 했으니 이제라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면 고맙겠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또 선생님이 큰소리할 수 있는 때가 점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좋아하고 자랑하기보다는 하늘 앞에 더 자랑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이루어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48-296)
사랑의 본질은 위하는 것
가정은 사랑의 기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종과 횡을 연결하는 센터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센터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평면적인 세계 인류를 대표한 센터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에서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고, 아들딸은 인류를 대신한 존재입니다.
그 사랑이 가는 본질적 성격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위하려고 하는 데서 사랑이 번식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랑은 전부 소모되지만 위하는 사랑은 번식됩니다. 그러니까 위해서 사랑하려는 데는 번식이 벌어져 자꾸 확장되지만 자기를 위하려는 사랑에서는 자꾸 축소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본질은 위하려고 할 때는 커지지만 자기를 위하라고 할 때는 점점점 더 작아집니다.
왜 위해야 하느냐? 사랑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사랑의 유대를 확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냐? 나를 위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또 좋은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아내도 남편을 위하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여자나 남자나 서로 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심으로 자꾸 위하라고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요, 남을 위해서 자꾸 하겠다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현실 생활에서도 틀림없는 정의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위하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하는 자리가 제일 안전한 존재기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한 존재기반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위해서 살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냐?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주적인 본질을 중심으로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기 때문에 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모의 사랑이 그 본질에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식을 대해 항상 주려고 합니다. 그 자식이 받지 않더라도, 아무리 불한당 같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옛날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갖고 나타나서 사랑을 하게 되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놈의 자식아,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했는데, 과부의 몸으로 늙어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몰라? 이 망할 자식아!' 하며 세 번만 한다면 그 자식은 보따리를 쌀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내 사랑이 부족하여서 그렇다. 모든 것은 내가 너를 더 사랑하지 못한 탓이다' 하면서, 그 자식의 뼛골이 녹아나도록 눈물을 흘리며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나서게 될 때에 그 자식은 돌아섭니다. 더 큰 사랑은 약한 사랑을 전부 소화 통합시킬 수 있는 주동성이 있습니다. (48-182)
참사랑이란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
참사랑이란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어떤 부모냐? 투입하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부모입니다. '내가 대학에 보냈으니까, 내가 늙으면 봉양해야 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것을 수첩에 기록해 계산서를 미리 준비하는 부모는 거짓 부모입니다. 그런 부모는 이상적인 효자를 대할 수 없습니다. (239-62)
그러면 참사랑의 성질은 뭐냐? 사랑하고 잊어버리고 또 사랑하려고 하는 곳에, 생명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는 곳에 참사랑이 거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한꺼번에 전부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왜 잊어버려야 되느냐? 더 주려고 하니까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전부 노트에다 치부해서 받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젖줄, 생명을 나눠주면서도 좋아합니다. 타락한 어머니의 심정도 그런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어머니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는 사람 가운데는 참사랑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참사랑은 어떤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느냐? 우리 인간의 사랑은 사탄세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탄 사랑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 생명 이상의 자리에서부터 참사랑이 시작합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이 가진 사랑입니다. 참사랑을 가진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해나오면서 천대받고 핍박받았지만, 세계를 다 쓸어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구원해 나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벌써 세계를 다 쓸어 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핍박받고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구원섭리를 해나왔습니다. 자기 자식이 살인을 해서 교수대에 나가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사랑은 주고도 잊어버리고 또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자기 생명까지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참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참사랑 앞에는 사탄도 굴복합니다. (207-56)
참사랑이란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것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한테서 왔습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님한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 아들딸이 하나님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나을 수 있는 아들딸, 나을 수 있는 사랑의 상대를 지으려면 자기 이상의 것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천 배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만 배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투입할 수 있는 개념이 없게 될 때는 그 이상의 상대는 나오지 않습니다.하나님의 기준이 1백이라면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상대를 짓게 될 때, 1백 이상을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천년을 살았어도 또 주고 싶은 마음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자기 상대를 지을 때, 모든 것을 투입하고도 또 투입하고 싶어하는 논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상 투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사랑은 자기 생명까지도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221-305)
참사랑을 위해서는 생명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지식, 돈, 권력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버리고, 힘을 버리고, 지식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된 생명을 찾을 수 있고, 이 참된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사랑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을 점령하게 되면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207-56)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데서 영생의 논리가 벌어져
그리고 참된 사랑은 자기보다 사랑의 상대가 더 잘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도 그걸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소성 이상을 투입해야 합니다. 1백만큼의 소성 가운데 1백만큼만 투입하게 된다면 자기만한 것밖에는 안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자기 이상 천배 만배를 그려 가면서 투입할 수 있는 자주력을 가진 분입니다. 투입하고는 잊어버립니다.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또다시 투입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무한히 투입하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생겨납니다. 투입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올라갑니다. 순환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구형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은 내 소유로 할 수 있고, 천상세계 사랑의 소유권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속권이 있고 동거권과 동참권이 있기 때문에 그 활동무대는 내 것입니다.
대기가 1백 퍼센트 절대 저기압권이 되면 자동적으로 절대 고기압권이 생겨서 순환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참 지혜의 왕입니다. 왜 투입하고 잊어버리느냐? 그래야 투입하고도 또 투입할 수 있습니다. 자동적 순환원리를 통해서 영원한 회전운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영생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투입하고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데서 영생이 벌어집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내적인 부모, 종적인 아버지를 닮은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내적인 나, 종적인 나, 수직적인 나입니다. 몸은 부모의 혈육을 받고 나왔으니 횡적인 나입니다. 종횡의 합덕을 이룬, 창조주와 피조물을 총합한 우주상을 소유하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그 행복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더 큰 것이 나옵니다. 위하는 사랑에서만 수가 불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싸우는 사랑에서는 망국지종이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위하는 사랑에서는 천지의 모든 정수(精髓)를 뺀 하나님 같은 지혜의 왕자 왕녀가 태어납니다. (204-106)
사랑의 실현은 혼자 못 해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는 전능한 분인데, 단 한 가지 사랑은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권에서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하게 되면 피가 끓습니다. 그리고 떨리는데, 왜 떨리느냐? 섞이기 위해서입니다. 동서남북이 섞어지고 아래 위가 섞어져서 하나되어 모든 것이 사랑의 불꽃 튀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를 위해 완전 투입하고, 여자를 위해 완전 투입합니다. 생명과 재산을 다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또 투입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히 그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논리를 어디에서 찾느냐?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상을 안 세웠으면 하나님은 고독 단신이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사랑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역사 이래 그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심각하고도 기막힌 자리에, 절대적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누가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연의 바라던 그냥 그대로의 아들딸을 회생시켜, 꿈꾸던 소원의 이상형태를 재현시켜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천리만리 이동하면서 더 빛나게 단장하고 더 아름답게 표시하려고 합니다. 만우주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가지 각색의 대우주는 너를 위해서 단장하는 장식품이다. 네가 사랑의 주체적 입장에서 상대를 대하면 너를 자극시켜 잠재해 있던 본성의 성품을 폭발시킴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게끔 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을 지었습니다.
이 우주는 얼마나 크냐? 2백20억 광년 정도 됩니다. 빛은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진행하는데, 이것은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속도입니다. 이런 속도의 빛이 1년 동안에 가는 거리가 1광년입니다. 그런 빛이 가는 데 2백20억 년 걸릴 정도로 큰 우주입니다.이런 대우주를 하나님이 주관하는데, 사랑의 힘으로 주관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빠른 것은 없습니다. (204-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