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제 2권 사랑 원론편
제 1장 하나님의 사랑
소 목차
1.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궁
2.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왕궁
3. 하나님은 사랑을 어떻게 하셨을까
4. 하나님과 인간에게 제일 귀한 것
5. 사랑을 중심한 본연의 인생길
6. 우리의 자랑
7.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1.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궁
하나님의 뜻과 인간 완성의 표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 있습니다. 동으로 가는 것인지, 서로 가는 것인지, 남으로 가는 것인지, 북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중앙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확실치 않고서는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창조이상을 완성하는 것이 뭐냐?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사위기대 완성이 뭐냐? 사랑이상 완성인데, 가정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사랑이상 완성입니다. 그 완성은 나만으로는 안 됩니다. 남자가 완성하려면 남자만으로는 안 되고, 여자가 완성하려면 여자만으로는 안 됩니다. 혼자서 제아무리 내가 완성했다. 나는 세계 어디에 가도 당당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본래 남자로 태어났고 여자로 태어났다고 하는 그 자체는 남자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고, 여자만으로는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들이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되는 데는 어떻게 하나되느냐? 꽁꽁 매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사랑으로 부부로서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 남자 여자는 완성합니다. 그 완성의 내용이 뭐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완성의 표준으로 세웠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완성돼 있느냐? 이렇게 물으면 이상하지만, 하나님은 완성돼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절대자이므로 완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분별적 입장에서는, 개체적 입장에서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상을 두고 말하면 하나님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을 못 하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냐?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그 관계는 어떤 관계냐? 돈 거래를 중심으로 한 관계도 아니고, 사업을 중심으로 한 관계도 아니고, 지식이라든가 권력구조에 있어서의 주종관계도 아닙니다. 그 관계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 관계입니다. (136-103)
창조의 출발은 기쁨으로부터
인류는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느냐? 하나님의 기쁜 마음에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창조의 출발은 기쁨으로부터입니다. 본래의 발원지가 기쁨입니다. 그러면 기쁨은 어디서 생기느냐? 목적의 성취라든가 소원성취로 인해서 생깁니다. 그것 없이는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으로써 하나님이 영원을 두고 자극받을 수 있고, 그것으로써 영원히 빛날 수 있고, 영원히 품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물질도 사람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창조한 세계기 때문에, 기쁨을 목적으로 한 그 결과는 반드시 사랑으로 종결됩니다. 다시 말하면 존재와 창조의 발원은 사랑의 목적을 이루어 펼치는 데 있습니다.
이런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중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본마음의 바탕, 이것이 바로 심정입니다. 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가치를 논하려면 이 사랑을 붙들고 논해야 합니다.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 여건이 갖추어진 가운데서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쁨은 하나님의 심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하여 그 목적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인간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심정이 보이는 인간의 심정에 현현합니다. 그런 심정을 지닌 인간이 횡적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 가정을 이루라고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생육하고 번식하여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했습니다. (27-28)
창조이상 완성은 인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창조이상 완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창조이상 완성은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이상 완성이기 때문에 창조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물의 중심은 인간입니다.
창조물의 중심이 인간인데, 인간이 어떻게 되는 것이 창조이상 완성이냐? 물론 인간 하면 아담 해와, 남자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의 완성에서부터 창조이상 완성이 시작됩니다. 그 남자 여자가 완성한다는 것은 남자는 동으로 가고 여자는 서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갈라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성은 갈라졌던 사람들이 합하고, 헤어졌던 사람이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완성된 것은 언제나 표준으로 남습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 완성의 표준은 뭐냐? 하나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흔히 세상에서는 돈이라고 생각하는데, 돈을 중심으로 하나된다는 말이냐? 남자 여자는 돈을 갖다 놓으면 싸우기가 쉽지 하나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지식을 가지고 논하게 될 때, 지식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역시 싸우기 쉽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라도 더 알면 나는 당신보다 하나를 더 안다. 내가 높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힘을 놓고 말할 때, 힘도 균형이 잡혀야 싸우지 않지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남자 여자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봐도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이상이 인간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완성할 수 있는 그 하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는 일방향성의 사랑이 아니라 사방성을 갖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완전히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음이 있어야 합니다. 품는 데는 아담 해와 둘만으로 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만으로 사랑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동기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된 자리에서 품는 데는 이 인간세계와 우주를 품음과 동시에 하나님까지 품어야 합니다. (149-9)
웃음의 역사가 출발할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 창조이상을 완성해서 뭘 하자는 것이냐?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적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혼자서 아, 나 혼자 있으니 기쁘다 이러겠느냐? 아닙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절대자라 하더라도 혼자만으로는 기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다가 혼자서 웃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 외의 존재와는 관계없고 나에게만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하하 하고 웃을 때의 기쁨은 천지가 거기에 박자를 맞춰 웃을 수 있고 동화될 수 있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자기 내에서 혼자 느끼는 기쁨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가씨들이 꿈 생각을 하면서 좋아서 깔깔거리는 것과 같은 그런 기쁨이어서는 안 됩니다. 표현적이요, 능동적이요, 포괄적인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한된 것이 아니라 무한권까지 미칠 수 있는 기쁨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웃는데, 무엇을 중심으로 웃어야 하느냐? 배고플 때에는 빈대떡 하나 놓고도 웃을 수 있습니다. 남자 여자가 웃는 데 있어서 최고의 것은 사랑을 놓고 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웃음은 참된 남자와 여자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웃고 또 웃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신랑 신부의 웃음은 세상 최고의 멜로디로 들립니다. 하나님 귀에 최고의 멜로디로 들리는 것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진정으로 좋아서 기뻐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주고받으면서 서로가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최고의 꽃이요 멜로디입니다. (149-11)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꼼짝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꼼짝못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 하나님을 꽁꽁 묶어도 하나님이 싫어하지 않고 더 묶으라고 할 수 있는 비결이 뭐냐? 그런 비결이 있다면, 사람은 욕심이 많기 때문에 그 비결대로 해서 하나님을 자기 혼자만의 하나님으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꽁꽁 묶어 자기 안방에다 갖다 놔도 하나님이 천년 만년 떠나고 싶지 않고 좋다 할 수 있게 만드는 무슨 비법이 있다면, 인간은 그 비법을 다 쓰고 싶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꽁꽁 묶는다면 무엇으로 묶어야 하느냐? 참된 사랑의 끈으로 꽁꽁 묶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의 줄로 묶는다면 하나님도 완전히 꽁꽁 묶어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며, 지식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속성권 내에서 무엇이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있노? 하겠지만, 하나님 자신이 사랑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사랑만은 하나님 자신도 마음대로 못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내 마음이 있고 몸이 있어서 아이구, 좋다! 내 사랑이야 이러면 미친 녀석입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풀잎 하나라도 보면서 웃고 이야기하면 미친 녀석이 아닙니다. 그런 대상을 놓고 그렇게 하면 미친 녀석이 아니지만, 그런 대상이 없이 그렇게 한다면 미친 녀석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지극히 작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사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람과 사랑이라는 글자는 비슷합니다. 사람은 네모고 사랑은 동그라미입니다. 동그라미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동그라미를 좋아하고, 또 잘 그립니다. (149-13)
하나님도 사랑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부부가 살면서 아들딸을 많이 낳게 되면 잘생긴 아들딸도 있고, 못생긴 아들딸도 있습니다. 알록달록하게 낳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잘생긴 아기를 대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쟤는 누굴 닮았소? 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누구 닮긴 누굴 닮아요? 나 닮았지요라고 하고, 아버지도 나 닮았지요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 인간은 자기를 닮은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기 닮은 것을 좋아하느냐? 아들딸이 자기 사랑의 대상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도 사랑을 좋아하는 분이므로 만물보다도 자기 닮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제일 좋아하니 만물지중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나는 하나님 닮았다 하더라도 불경스러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아담 해와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되어야 하느냐?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가 참된 사랑으로 하나됨과 동시에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을 원합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남자가 아무리 내 사랑, 내 사랑 해도 대상이 없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없으면 천년 만년 그 이상을 아무리 노래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별수없이 사랑의 대상을 찾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의 주체인 동시에 영생의 주체기 때문에 그 대상인 인간도 영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영생한다는 논리적 근거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생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느냐? 돈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권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지식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진리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영생이 시작합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버지 앞에 갈 수 없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랑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니… 해야 되는데 사랑이 빠졌습니다. 이것을 앞으로 성경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오, 불경스러운지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에게 물어 보면 그렇고 말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을 좋아합니다. 사랑 중에서도 참사랑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완성은 영원한 생명의 주체 되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대상으로 설 수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 관계를 맺어, 비로소 어느누구도 가할 수 없고 뺄 수 없는 완전한 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상실현입니다. (145-15)
우리가 제일 좋다 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이것밖에 없다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인간이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를 창조한 절대적인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절대적인 하나님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제일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절대 원하는 것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혼자서 아무리 사랑, 사랑, 사랑… 하고 몇억년을 하더라도 사랑을 가질 수 없습니다. (135-153)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은 오로지 사랑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은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분이요, 절대적인 분이요, 창조주요, 신성 자체로서 지고(至高)한 분이고, 피조물은 속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고지선(至高至善)한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속된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개념으로 볼 때는 하나님과 인간이 인격적으로 같습니다. 심정적 내용이 같아야 사랑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을 갖춘 사람과 하나님의 성품이 같아야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닮는 데는 무엇을 통해 닮느냐? 혈통을 통해서 닮습니다. 그 혈통을 통해 인연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인연되었다는 말입니다.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은 무형의 절대적 주체로서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성성상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분성적 실체(分性的實體)로 아담과 해와를 만들어 놓고, 이들이 장성하여 사랑으로 횡적으로 연결될 때 종적인 입장에서 중심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 말은 아담 해와가 성장해서 성숙하게 되면 하나님의 남성 성품은 아담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여성 성품은 해와의 마음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의 마음속에 임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인류 앞에 내적인 아버지를 모신 실체 아버지의 자리에 서야 하고, 또 해와는 내적인 어머니를 모신 실체 어머니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종적인 기준에서 횡적 기반으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인 아담 해와를 연결시키는 것은 오로지 사랑입니다.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등한 상대적인 내용을 갖춘 완성한 사람 둘이 합칠 때는 하나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나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은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담 해와가 성숙하여 결혼하는 그 순간은 종적인 사랑의 일치와 더불어 외적으로 하나님의 몸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됨과 동시에, 내적인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임재해서 사랑으로 안팎이 완전히 하나되는 때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상 하던 핵심내용입니다. 이 사랑의 기점을 중심으로 모든 인류는 태어나고 발전합니다. (138-246)
하나님이 찾는 참사랑의 상대자
그러면 하나님이 참사랑을 찾는다면 어떤 존재를 통해서 찾느냐? 참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참사람이냐? 참사랑을 가진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참사람이라고 해서 눈이 하나 더 달리고 코가 하나 더 달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사람 가운데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 때문에 그 참사람은 남자도 닮고 여자도 닮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는 동쪽 끝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 끝으로 갑니다. 그 끝에서 가운데로 향해 와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만나면 언제 만나느냐? 한 살 된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서로 좋아서 하나되겠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언제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되어 남자 여자가 하나될 수 있느냐? 성장해서 성숙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남자 여자가 사랑하려고 하느냐? 하나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려고 합니다. 남자 여자가 왜 하나되어야 하느냐? 남자 여자가 하나되려고 하는 것은 남자도 하나님의 반을 닮고 여자도 하나님의 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남자 여자가 떨어진 데서는 절대 찾을 수 없습니다. 남자 여자가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뚫고 나와서 남자 등에 타야 되고, 남자는 여자를 뚫고 나와서 여자 등에 타야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초점이 맞습니다. 눈은 둘이기 때문에 초점이 맞아야 하나로 보입니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 여자가 사랑의 눈의 초점이 맞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이 그 가운데에 내려올 수 있습니다.
의학박사에게 왜 심장이 왼편에 있느냐고 물으면, 답변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남자는 왼편에 서고 여자는 바른편에 서기 때문에, 심장을 연결시키는 것은 남자가 해야 되므로 심장이 왼편에 있다고 원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남자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바른쪽에 서지만 하나님 쪽에서 보면 왼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안는다면 남자는 왼손으로 안고, 여자는 바른손으로 안습니다. 이렇게 해서 플러스 마이너스 운동이 벌어집니다. 우주가 돌아갑니다. 도는 데도, 남자가 먼저 돌아가게 되고 여자는 따라서 돌아가게끔 되어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135-154)
하나님은 어디에 임재할 것이냐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자 남자의 것이자 여자의 것입니다. 여자의 하나님의 것이자 남자의 것입니다.
남자 여자가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평면적이기 때문에 평면적인 결합을 절대시하기 위함이요, 종적인 결합을 절대시하기 위함입니다. 남자 여자가 있을 때, 하나님은 누구에게 먼저 오겠느냐? 남자에게 먼저 온다고 하면 여자들이 안 된다고 야단할 것이고, 또 여자에게 먼저 온다고 하면 남자들이 야단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므로 남자 여자 둘이 딱 하나되었을 때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본래의 사랑이상 기준이 출발한다는 이론의 근거를 세울 수 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영원한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을 남자 여자의 사랑 가운데에 두자는 것이 이론적입니다. 남자가 갖는 것도 싫고, 여자가 갖는 것도 싫다는 것입니다. 가운데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을 핵으로 하여남녀의 사랑이 결합하는 곳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궁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여자들이 오늘 밤은 이 남자, 내일 밤은 저 남자와 요사스러운 사랑을 찾아서 즐기고 있습니다. 오로지 쾌락을 위해서 그러고 있습니다. 이런 패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칙을 중심으로 사랑의 윤리체제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느냐? 절대적인 남자가 절대적인 여자를 찾아 절대적인 하나의 사랑을 이루면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135-157)
2.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의 왕궁
존재세계에 최대의 신비가 무엇이냐
이 존재세계에서 최대의 신비가 무엇이냐? 인간세계에는 남자 여자가 있고, 동물세계에는 수놈 암놈이 있고, 식물세계의 꽃에도 암술 수술이 있고, 광물세계에도 플러스 이온과 마이너스 이온이 있습니다. 이 존재세계가 이렇게 암수의 쌍쌍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무엇 때문에 남자 여자, 수컷 암컷, 수술 암술, 플러스 이온 마이너스 이온으로 생겨났느냐? 이것은 뭔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문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은 왜 태어났느냐? 사람 하면 남자 여자인데, 이 남자 여자는 왜 태어났느냐? 아마 대다수의 여자들은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여자도 자기가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 어떠한 연유로 태어난 결과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 동기를 모를 뿐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남자 여자의 동기는 부모입니다. 또 부모의 동기는 뭐냐? 이렇게 해서 끝까지 올라가면 나중에는 부모의 동기는 부모로부터 시작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기의 동기를 찾아 들어가면, 부모 부모 부모, 이렇게 올라가서 맨 나중에 창조주가 있든 무엇이 있든 있을 텐데, 그분도 결국 부모의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219-12)
하나님은 인류의 부모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는데,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냐? 부모의 부모입니다. 즉 동기가 되는 분입니다. 결과는 동기로 연유되었기 때문에 그 동기와 결과는 상충되지 않습니다. 진리는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합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 진리입니다. 결과가 참일 때에는 근원도 참이고, 근원이 참일 때에는 결과도 참이어야 된다는 논리는 과학계에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뭐냐? 본래부터 진리라고 인정받은 과학은 없습니다. 가설을 세워서 이러니까 이렇다 하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것이 가설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 가설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실험이니 실험을 통해서 맞춰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설이 맞았다면 그 결론도 그렇다 해서 진리가 됩니다.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고, 그 내용이 원인과 결과를 벗어날 수 없는 관계성을 지니게 될 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 참이 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원인이고 인간은 결과적 존재이므로 인간 조상을 보고 원인 되는 하나님도 이렇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느냐? 원인이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조상으로 엮어졌으면 하나님도 아버지 어머니의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귀납적인 논리에 의해서 자연히 나옵니다. (219-13)
하나님은 사랑의 왕 중 왕
하나님도 혼자서는 불쌍합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가 죽고 할머니 혼자 남게 되면 할머니 자신은 불쌍하다고 말합니다. 자기 아들이 대통령이 되고, 자기 딸이 대통령 부인이 됐다 하더라도 자기의 상대가 없으면 불쌍한 것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지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외로울 때는 책을 읽고 위안받자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의 상대가 없을 때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왕 중 왕인데, 무슨 왕이 되고 싶어하느냐? 나는 돈의 왕이 되고 싶다!고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돈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 나는 지식의 왕이 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전지전능한 분이므로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지식의 왕입니다. 이 무한한 세계의 진리를 창조한 주인이기 때문에, 이 모든 진리의 지식 내용은 지구성을 꽉 채우고도 남을 책으로 해설하더라도 다 하지 못할 만큼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지식의 주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이 필요없습니다
오늘날 젊은 사람들은 권력을 좋아합니다. 누가 출세하고, 누가 국회의원이 되고,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권력의 왕입니다. 이 우주 이상의 것을 지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권력도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왕 중 왕이 되고 싶어합니다. 창조주가 이 땅에 대해 바라는 것은 사랑의 왕입니다. 아무리 잘난 존재라도 사랑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설정되기 때문에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혼자서는 자극과 충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상대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왕이기 때문에 모든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남편 사랑도 갖고 있고, 부모 사랑도 갖고 있고, 형제 사랑도 갖고 있고, 부부 사랑도 갖고 있습니다. (219-14)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자
기독교에서는 아담 해와를 인간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볼 때,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상대자로 지어졌습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하고 모든 것을 갖춘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상대가 없으면 불행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우주를 짓게 된 동기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상대로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왕 중 왕의 상대자가 되어서 사랑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입니다.
동양사상에 천지부모라는 말이 있습니다. 땅의 부모 되는 존재가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 해와인데, 이는 결과적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늘 부모는 원인적 존재인데 종적인 부모입니다. 이 둘이 합해야 합니다. 그 합하는 날이 아담 해와의 결혼식 날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체 되는 부모고,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사랑의 상대자로 지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으면 상대 되는 부모입니다.
땅은 여자를 상징하고, 하늘은 남자를 상징합니다. 왜 땅은 여자를 상징하고, 하늘은 남자를 상징하느냐? 남자는 주체고 여자는 대상이기 때문에 여자는 받는 입장입니다. 비는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옵니다. 내려오니까 땅은 받아야 합니다. 받아서 샘물로 솟습니다. 샘물은 올라옵니다.
여자에게 왜 시집가느냐고 물어 보면, 사랑받기 위해서 간다고 하지 사랑하기 위해서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랑하기 위해서 장가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천지 이치는 주체 되는 분은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219-18)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의 보금자리
하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랑의 주인이고, 사랑의 스승이고, 사랑의 부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부모의 자리에서 부모의 사랑을 주고 싶다 할 것입니다. 그게 제일 귀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없는 고아들을 불쌍하다고 합니다. 왜 불쌍하다고 합니까?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스승의 사랑을 주고 싶고, 주인의 사랑을 주고 싶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의 주인, 사랑의 스승, 사랑의 부모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은 우리 인간 조상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여자의 주인은 남자고, 남자의 주인은 여자인데, 주인이 주인답지 못하면 깨집니다. 이 세 가지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도 나도 하나님같이 사랑의 부모가 되고 싶어 나도 하나님같이 사랑의 스승이 되고 싶어 나도 하나님같이 사랑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같이 하나되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도 자신들의 아들딸을 찾아야 합니다. 천지 이치는 아들딸에서부터입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찾아야 앞으로 상대이상이 나오고 부모이상이 나옵니다. 아들딸이 태어나 자라서 철이 들면 결혼합니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부모가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선조가 없으면 슬프고, 부모가 없으면 슬프고, 부부를 못 이루면 슬프고, 또 자녀가 없으면 슬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로부터 부부, 부모, 할아버지 할머니의 길은 사랑으로 접해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어린아이 사랑의 주체가 되고, 남자 여자 사랑의 주체가 되고, 남편 아내 사랑의 주체가 되고, 아버지 어머니 사랑의 주체가 되고,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의 주체가 됩니다. 이와 같은 단위의 가정을 볼 때, 가정은 최고의 사랑을 갖춘 자리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사랑으로 완성했다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맏아들 맏딸이 되니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보금자리가 됩니다.
이 맏아들 맏딸이 커서 뭐가 되느냐? 아담 해와의 자리는 자녀들 사랑의 보금자리요, 부부들 사랑의 보금자리요, 부모들 사랑의 보금자리요, 할아버지 할머니들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그게 이 우주가 생겨난 이후 처음 나타나는 하늘나라 땅나라의 최고 왕궁 자리입니다. 그와 동시에 최고의 참부모로서 출발할 수 있는 사랑의 부모의 원천이 됩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왕자 왕녀입니다. 영원한 참사랑을 중심으로 한 왕자 왕녀입니다. 그 사랑은 열을 투입해서 움직이면 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219-21)
인간의 사랑의 왕궁이 어디냐
그러면 사랑은 어떻게 완성하느냐? 결혼을 해서 남자 여자가 어떻게 하나되느냐?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되는 곳은 도대체 어디냐? 그곳은 생식기입니다. 그러므로 생식기는 사랑의 왕궁입니다. 본궁입니다. 본궁은 무엇이냐? 왕이 사는 곳입니다. 왕이 처음 태어나 사는 집을 본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생기기 시작한 기대가 되는 곳이 남녀의 생식기입니다. 그곳이 곧 사랑의 본궁입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球體)로 보면 우현 좌현, 전현 후현, 상현 하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도 절반, 남자도 절반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를 점령하고, 여자는 남자를 점령합니다. 무엇을 중심하고 점령하느냐? 사랑을 중심하고 점령합니다. 사랑 자체를 가짐으로써 두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것은 자기의 구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는 절반이고 미완성이기 때문에 혼자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플러스만으로는 완성을 이룰 수 없고, 마이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성을 이루지 못하면 영존이 성립하지 못합니다. 우주가 보호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자 남자 그 자체가 우주의 보호를 받고,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권을 가져야 됩니다. 모두 일치해야 합니다. 상대관계는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생명이나 피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 남자 그 자체도 생명을 갖고 있고 피를 갖고 있지만, 그 생명과 피가 자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 여자를 끌어당기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생명이 약동하고 피도 끓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삼위일체가 되어 직접 접촉하고 부딪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도 연결되고 피도 이어집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피가 있는 곳에는 참부모의 생명이 동반해 있고, 부모의 생명이 있는 곳에는 자동적으로 참부모의 사랑이 스며 있습니다. 이것은 자를 수 없습니다.
여자의 피, 생명 자체만으로는 안 됩니다. 남자의 피와 교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자의 생명과 교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자의 피, 남자의 생명과 교차하는 것은 무엇으로 하느냐? 사랑으로 합니다. 사랑은 피를 솟구치게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생명과 모든 것을 움직이기 시작하여 그 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 생명, 혈통이 둘러싸고 있는 그 본향지(本鄕地)는 도대체 어디냐? 그곳은 존재세계의 가장 중요한 기관입니다. 거기는 사랑이 시작되는 곳이요, 사랑의 본궁이요, 생명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어머니가 임신하는 것은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되는 곳은 거기밖에 없습니다. 키스라든가 껴안는 것도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남녀가 키스하고 포옹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 경지에 빠져 버립니다. (224-128)
가정은 참사랑의 왕궁
원래 가정은 참사랑의 왕궁입니다. 거룩한 참사랑 왕궁입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왔다 갔던 선조들의 왕권을 대신한 왕이요 왕비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하나님 왕권을 중심으로 연결된 모든 선한 참사랑의 중심입니다. 영계로부터 파송받은 하나님 대신 할아버지 왕이요 할머니 왕비입니다. 과거를 대표한 열매입니다.
그 다음에 부모는 세계 60억 인류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를 대표한 왕과 여왕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미래세계의 왕자 왕녀를 대표합니다. 이러한 전통을 빛내는 것이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과거를 대신한 왕과 같이, 어머니 아버지를 세계 인류를 대표한 왕과 같이, 아들딸을 미래를 대신한 왕자 왕녀와 같이 대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정이 되면 가정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전부 다 사랑으로 하나되었기 때문에 손자가 나는 이 가정을 대표한 사람이오 하고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형제를 대표해 집안에서 발표하게 될 때는 모두 어린 하나님과 같이, 어린 대왕마마와 같이 위해줍니다. 반드시 하나가 됩니다.
결론은 참사랑은 최고로 가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참사랑만 끌고 가면 하나님도 따라오고, 세계도 따라오고, 다 따라옵니다. 참사랑의 자리에 서면 모든 것이 다 따라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참사랑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참사랑에는 절대 복종합니다. 참사랑은 하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참사랑은 언제나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왜 참사랑을 강조하느냐? 남자 여자가 타락하지 않고 본래의 사랑을 가졌으면, 하나님까지도 절대 복종합니다. 참사랑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 사랑의 권위 앞에는 천하가 다 절대 복종합니다. (219-22)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한다
하나님과 사람은 90각도, 즉 수직으로 접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은 속도로 말하면 제일 빠릅니다. 전기와 태양빛과 참사랑의 속도를 비교하면 어느 게 빠르겠습니까? 참사랑의 속도가 제일 빠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이 한번 발동을 시작하면 잡을 자가 없습니다.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사랑의 불이 붙어 있을 때는 잡을 자가 없습니다. 나라가 잡아도 치고 나갑니다.
그러면 사랑이 왜 빠르냐? 직단거리를 통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장애물이 있으면 가로막힙니다. 전파도 산이 있으면 못 갑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산이 있어도 산을 뚫고 통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횡(橫)으로부터 시작했겠느냐, 종(縱)으로부터 시작했겠느냐? 종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천지가 먼저고 나중이 부모입니다. 하늘땅이 종입니다.
그러면 제일 빠르게 직단거리로 통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91도의 자리도 아니고, 89도의 자리도 아닙니다. 바로 수평에 90도가 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영원히 하나입니다. 91도는 3백60도를 중심으로 볼 때 여럿이 될 수 있지만, 직단거리의 센터가 되는 90도 자리는 영원히 하나입니다. 그걸 중심 축으로 하여 왕권을 가진 아담가정에서 시작하여 옮겨져야 하늘나라의 왕족이 생겨납니다. (219-30)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번식의 터전
하나님은 왜 사람을 창조했느냐? 종에서는 번식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종적인 기준은 한 점밖에 없기 때문에 번식할 수 있는 터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90도를 중심으로 맞이할 수 있는 제일 큰 자리에 지었습니다. 그 자리가 완전히 원형을 이룰 수 있는 중앙선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인류 시조와 하나님이 만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하고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아시대, 소년시대, 청소년시대와 사춘기를 거쳐서 배워 나갑니다. 아기 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엄마, 이게 뭐예요? 아빠, 이게 뭐예요? 이렇게 물으면서 알아 갑니다. 그래서 남자는 남자에 대해서 전부 알고 보니까 세상만사가 쌍쌍제도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 동물세계도 쌍쌍이 있고, 곤충세계도 쌍쌍이 있고, 아이구, 전부가 그렇구만! 꽃도 그렇고, 광물도 그렇구나 이렇게 전부 다 배우는 것입니다.
해와도 내가 만나야 할 것은 오빠 같은 아담이로구만! 나를 떼어놓고 자기 혼자 동산 어디로 뛰어다니고, 헤엄치고 별의별 짓 다 하고 다녀서 내가 따라다니면서 많이 울었지. 제까짓 게 뭔데 저러냐고 했는데, 그게 아니구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아담도 저 여동생 정말 답답해! 이리 가자 해도 앵앵거리며 기다려 달라고 하는 걸 싫다고 이리로 왔지만, 결국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고거다 이렇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는 고거라고 했지만 좀더 지나면 조금 달라져서 그거라고 합니다. 더 지나면 저거, 그 다음에는 여자 동생 이렇게 달리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만나서 눈을 보니 신비롭고, 코를 보니 만지고 싶고, 입을 보니 만지고 싶고, 얼굴을 보니 껴안아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거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머리를 만져도 전기가 통하고, 어디를 만져도 전기가 통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다른 힘이 둘을 끌고 다닙니다. 옛날같이 앵앵앵! 우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 붙들고 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너와 만나자! 이렇게 됩니다. 만나기는 어디에서 만나느냐? 동과 서로 갈라져 있는데, 만날 때는 어디에 가서 만나느냐? 공평해야 돼! 오빠 열 발짝, 나 열 발짝 가야 돼! 나는 작으니까 열두 발짝을 가야지! 그런 조정을 할 것입니다. 만날 때는 여기는 중앙이 아니야. 중앙에 가서 만나야 돼. 중심에 가서 만나야 돼 하면서 중심을 찾습니다. 그러다 어디로 가느냐? 종적인 선, 수직에 가서 맞부딪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압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쭈욱 내려옵니다.
신비로운 자리에서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고 기도하면 이놈아! 여기 있다! 하고 자기 마음속에서 답변합니다. 속 깊은 곳에서 답변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집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 몸이 성전 된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 몸은 성전(聖殿), 즉 하나님의 전(殿)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두 실체로 벌려 놨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쭈욱 다시 내려와서 이들과 접하면 하나님은 핵(核)이 됩니다. 하나님은 종적인 핵입니다. 하나님은 핵이 되고 아담 해와는 부체(副體), 즉 꺼풀 몸이 되어 이들이 사랑으로 일체를 이룹니다. 어떤 사랑으로 하나되느냐? 영원한 참사랑으로 하나됩니다. 영원한 사랑에 의해 생겨난 생명은 자동으로 영생하고, 영원한 생명의 결탁으로 이어진 핏줄은 어느 누가 점령할 수 없습니다. 영원히 종손 왕궁권입니다. (219-31)
하나님의 왕자 왕녀가 되고 싶어하는 인간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이 찾는 참사랑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없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의해 타락했느냐? 어떤 물질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에 의해서도, 권력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사랑의 상대로 지은 존재를 추방할 수 있는 논리는 없습니다.
개인에서 참사랑을 잃어버렸고, 가정에서 참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기원에서 하늘나라의 왕손권을 잃어버렸고, 하늘나라의 인류 제1 조상인 참부모, 하늘나라의 백성을 낳을 수 있는 부모, 하늘나라의 왕이 될 수 있는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세계를 사랑으로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물 중에서 최고의 신비로운 존재가 남자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 여자가 괴물단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세계를 망치고, 이 세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남자 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청춘 남녀들, 봄철에 꽃 핀다고 자기도 한번 피어 보겠다고, 나비가 난다고 자기도 날아 보겠다고 사랑길을 찾아가는 자연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똥개처럼 냄새 피우고 다니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그게 참사랑입니까?
우리 인간 조상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이들부터 하늘나라 왕궁의 자리에서, 하늘나라 참부모의 자리에서, 하늘나라 왕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품겨 주체 된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 앞에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대상이 되었다면 영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는 왜 태어났느냐? 참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영원히 붙들고 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입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담과 해와였습니다.
아무리 늦가을에 말린 박주가리, 무 오가리같이 쪼그라질 대로 쪼그라진 여자라 하더라도 당신은 뭐가 되고 싶소? 하고 물어 보면, 뭐가 되고 싶긴 뭐가 되고 싶어? 세계를 움직이는 대통령 부인이 되고 싶지 그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라면 당신은 하나님에게 청혼을 하고 싶소, 안 하고 싶소? 하고 물으면 물어 볼 게 뭐 있소? 하고도 남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자들은 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나 뭐가 되고 싶어? 하고 물어 보면 천지의 대주인 되신 하나님의 왕자가 되고 싶다! 하거나 하나님의 왕녀가 되고 싶다!고 대답합니다. 그걸 바라지 않는 남자 여자는 없습니다. (219-24)
제1대 황족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 가정
하나님의 왕자 왕녀가 되면 또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왕이 되고 싶고 왕비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태상왕마마 대비마마, 왕손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게 소원입니다. 그런 왕손의 절대적 사랑권에서 영존할 수 있는 영생의 보화가 되어야 할 인간이 따라지 중에 따라지가 되었습니다.
하늘나라 땅나라 제1대조의 왕손, 왕, 태상왕마마가 될 것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의 가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은 아담 해와라는 장손 장녀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난 독생자 예수님 가운데서 누가 더 귀하냐? 하나님이 지은 하나님의 장손 장녀인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뜻을 이루었다면 그 아담 해와가 귀하겠습니까,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서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사생아라고 규탄받으며 고아처럼 자란 예수님이 귀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손으로 지은 아담 해와가 귀합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오는 것은 몇천년 후입니다.
하늘나라 땅나라 황족의 장손권에 속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바라는 것을 1백 퍼센트 이루고도 남습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가려고 합니다.
그 자리는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가정입니다. 지상에 왕궁의 주류 조상이 생겨나서 그것이 천년 만년 가려면 장손이 계보를 이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왕손으로 퍼져야 합니다. (219-25)
3. 하나님은 사랑을 어떻게 하셨을까
무형의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통일원리에서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해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부부를 이루었다면,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있고 그 다음에는 아담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담 아버지는 참된 하나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은 왜 천지를 창조했느냐? 아담과 하나님은 별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이 뭡니까?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전(殿)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 수 있는 집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오늘날의 교회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있는 책임자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해서 하나님의 마음과 아담의 마음이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된 마음과 몸이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통일원리에서는 하나님을 이성성상의 주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형의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내적 남성격 성품을 보이게 실체로 전개해서 상대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담이고, 하나님의 내적인 여성격 성품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것이 해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내성적인 모든 것을 투입해서 실체화시킨 것이 인간의 몸입니다.
인간의 몸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해와도 자랐습니다. 그렇게 자라서 몸과 마음이 어느 때 하나되느냐? 그런데 우리 몸과 마음은 싸우고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어도 몸과 마음이 싸우겠습니까? 전능한 하나님이 이렇게 불완전하게 사람을 만들 리가 없습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우리 몸과 마음은 완전히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이 가는 데 몸이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기로 말하면 사람의 마음은 플러스와 같고, 몸은 마이너스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화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143-80)
하나님이 최고로 좋아하는 것은 사랑
그러면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과 몸이 하나될 수 있느냐? 그것은 지식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몸이 원하는 것은 우주 최고의 것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주 최고의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최고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지식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최고로 생각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오늘날의 속된 사랑이 아닙니다. 우주 전체가 따라다닐 수 있는 사랑, 우주 전체가 그리워서 하나되고 싶어하는 주체적 소성을 가진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모두가 가서 하나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혼자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사랑은 혼자 찾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 속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지만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대해서 아, 내 몸이 참 곱다! 아, 예쁘다!고 하면 미친 사람입니다.
사랑은 혼자 있을 때도 있지만, 사랑의 작용은 상대가 있기 전에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은 혼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사랑의 기쁨을 느낄 수 없고, 사랑의 충동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우주를 짓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상대로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창조하고 나서 그 우주의 주인으로 아담 해와를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상대적 자리에 대표적으로 세워진 상대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의 대상자로 세워진 아담과 해와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마찬가지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은 갈라질 수 없습니다. 지금은 타락했기 때문에 갈라져 있지만, 본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몸에게 몸아, 너는 무엇과 하나되고 싶어? 하고 묻는다면, 몸은 대답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랑과 하나되고 싶소라고 할 것입니다. 또 마음에게 야 마음아, 너는 무엇과 하나되고 싶어? 하고 물으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사랑과 하나되고 싶다고 답할 것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답이 다르지 않고 같습니다. 몸과 마음은 우리 둘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절대적으로 하나되기를 바란다고 답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143-81)
자연을 통한 아담 해와의 성장
이러한 몸과 마음을 가진 아담 해와가 성숙하면 서로 저 아담은 내 오빠가 아니구나 이러고, 저 해와는 내 누이동생이 아니구나. 우리는 서로 형제가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가르쳐주었습니다. 곤충계나 동물세계를 보고 아하! 전부가 쌍쌍이네! 수놈이 있고 암놈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전부 자연을 통해서 배웁니다. 아하, 저렇게 수놈과 암놈은 좋아하는구나. 서로 좋아하면서 노래하네. 곤충도 노래하고, 짐승도 노래하네. 전부 쌍쌍으로 지내면서 새끼를 낳고 키우고 우주와 화동하는 놀음을 하는구나 이렇게 배워 나갑니다. 어렸을 때는 몰랐지만 일곱, 여덟, 아홉, 열 살, 이렇게 성장하게 되면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143-83)
비둘기가 구구구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봄철이 되면 비둘기가 구구구 하는 것은 뭐냐? 사랑 노래입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전부 인간을 가르치는 교재들입니다.
모든 새나 동물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을 중심으로 화동합니다. 꽃과 나비는 극과 극이지만 서로 화합니다. 이것은 천지 조화입니다. 우주의 극과 극이 사랑을 중심으로 화동이 벌어집니다. 철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에 있던 새가 북쪽으로 날아가고 북쪽에 있던 새가 남쪽으로 날아가서, 지역을 넘나들면서 사랑을 이룹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영원히 돕니다.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랑을 하나님이 지은 박물관의 교재를 통해서 배웁니다.
인간과 하나님이 좋다고 사랑하게 되면 천하의 모든 만물들은 거기에 박자를 맞춰서 화동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면 천사세계도 좋아하고, 이 모든 피조세계가 좋아서 박수를 보내고 찬양을 보냅니다. 노래할 줄 아는 새는 노래를 부르며 찬양하고, 아름다운 꽃은 향기를 풍기며 찬양합니다.
최고 사랑의 주인공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향취의 분위기를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 이 피조세계입니다. 보기에 흉측스러운 두꺼비도 사랑을 할 때는 욱욱욱 합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다리를 척척 치고 뒷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사랑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근사합니까? 그것은 최고의 예술입니다.
예술은 정서적인 배후가 깊이 개재되어 있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천년 전의 것을 몇천 년 후에 봐도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낄 때 명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림 한 폭을 볼 때도 그런 감동이나 자극을 느낄 때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 뭐겠느냐? 인간입니다. 또 인간 가운데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던 이상적 사랑의 주체 앞에 대상적인 사랑의 미를 갖추어 서면 하나님이 눈물을 글썽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녹아서 미궁으로 쏙 끌려들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어떻겠습니까?
따뜻한 봄이 되면,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벌레들도 눈으로 보고 그런지 냄새를 맡고 그런지는 모르지만 암놈 수놈이 사랑을 합니다. 그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암놈이 있으면 수놈이 있어서 서로 사랑할 줄 압니다. 그걸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모르지만 사랑을 해서 새끼를 칠 줄 압니다. 그게 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한 사랑의 박물관입니다. (142-274)
아담 해와가 사랑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해
아담 해와가 자연을 통해 생활하다가 15, 16세가 되면, 해와가 아이고, 저거 오빠가 아니고 내가 사랑해야 하는 상대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해와는 옛날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지만 성장해서는 아담과 오빠처럼 가까이 지내면서 만져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아담이 자기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풍선 모양으로 붕- 뜬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담이 혼자 돌아다니고 그러니까 해와는 아담 저거 내게 필요할까?라고 생각했고, 또 아담도 해와가 어디 가나 귀찮게 따라다니려고 하니까 아이구, 귀찮다.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때가 되니까 보는 눈이 달라지고 감정이 달라졌습니다. 없으면 서로 찾게 됩니다. 자기를 쥐어박던 아담이 없으면 해와가 아이고, 어디에 갔나? 하면서 찾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요즘 처녀들은 아무리 얌전하게 생겼어도 같은 또래의 남자 셋이 걸어오면 어떤 녀석이 내 마음에 드나? 이러면서 왼쪽 녀석은 이래서 마음에 아주 안 들고, 가운데 녀석은 조금 마음에 들고, 오른쪽 녀석은 이러이러 해서 내 마음에 쏙 든다 하고 생각합니다.
아담 해와도 그렇게 자랐습니다. 자라서 눈이 맞았습니다. 해와도 아담을 바라볼 때 좋고, 아담도 해와를 볼 때 좋아서 아이고 좋아라, 아이고 좋아라 했습니다. 그렇게 눈이 맞았습니다. 눈이 맞으면 손을 만져 보고 싶고 그럽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성숙해서 자연히 너 아니면 안 되겠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야, 이놈들아! 큰일난다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슬렁슬렁 와서 허허허! 아주 익을 때가 됐구만! 하면서 아담 속에 들어가고 해와 속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면 어디에나 계실 수 있습니다. (143-84)
아담 해와를 통해서 사랑하려는 하나님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의 남성격 몸이요, 해와는 하나님의 여성격 몸입니다. 이렇게 실체적으로 하나님을 둘로 갈라놨으니 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갈라져서는 살 수 없으므로 합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합하느냐? 사랑으로 합해야 합니다.
구름이 많이 끼어 잔뜩 흐릴 때 양전기 음전기가 합해서 뿌지직 꽈르릉 하면서 천둥 번개가 칩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자연의, 우주의 결혼식입니다. 그렇게 아담 해와에게 다 보여주었습니다. 땅과 하늘이 공중에서 만나 부딪침으로써 천둥 번개가 꽈르릉 치면서 멋지게 결혼식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無)로 돌아갑니다. 수억 볼트의 전기가 한번 번쩍 소리를 내고는 무로 돌아갑니다.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모였다가 꽈르릉 하고 폭발하는 힘에 의해서 가장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돌아갔으니 또 찾아옵니다. 찾아오는데 지치지 않고 찾아올 수 있는 길은 어떤 길이냐? 사랑의 길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헤어졌으니 또 찾자 해서 플러스 전기가 생겨나고 마이너스 전기가 생겨납니다. 그렇게 해서 하늘에서 플러스 전기가 생겨나면 땅에서 마이너스 전기가 생겨나 부딪치고 또 헤어졌다가 만나서 부딪치고 하면서 우주가 움직여 나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었는데 뭘 하자고 지었느냐?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타락했고,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의 갈 길을 못 찾고 있으며, 본향길도 다 망각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뭘 하자고 사람을 지었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이 아담 해와를 통해서 사랑을 하려고 지었습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울겠습니까,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합니다. 왜 기뻐하느냐? 자기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몸을 아담과 해와로 갈라놓았는데, 그 갈라졌던 것이 합쳐지기 때문입니다. 극과 극이 갈라졌다가 합쳐지면 폭발합니다. 그 폭발적인 충동을 느낄 때 하나님도 사랑에 취합니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불경스러운 게 아닙니다. 사랑에는 불경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꾸로 서도 좋고, 거꾸로 박혀도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랑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거꾸로 박혔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로 서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므로 손가락 하나로 버티고 거꾸로 서서도 춤을 출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여자 앞에 제일 좋은 것이 무엇이냐? 남자입니다. 아무리 잘나고 천하가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라 하더라도 그 여자 앞에 사랑할 수 있는 남자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집에 들어가더라도 쓸쓸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비단 이부자리에서 자더라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남자만 있으면 누더기 이불을 깔고 자더라도 구수합니다. (143-85)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 수 있는 지성소
아담 해와는 때가 되기 전에는 서로 쓰다듬어줘도 투덜투덜하고,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니까 아담 해와가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 눈이 맞아 쓰다듬어주고 손을 잡아주면 기분이 좋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는 가운데 그렇게 둘이 사랑을 했다면 그것은 아담 해와의 사랑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핏줄이 누구의 핏줄이 되었겠습니까? 누구의 핏줄을 받아 태어났겠습니까? 하나님의 핏줄을 받아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우리 몸과 마음이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몸과 마음이 싸우겠습니까? 하나님의 몸과 마음은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몸과 마음은 자체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돌고 있습니다. 내적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맥박은 1분에 72번 정도 뜁니다. 내 가슴에서 그렇게 뛰고 있는데, 그 맥박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걸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으로 갈라져서 상극적인 면에 있다가 화합하려는 사랑의 힘에 부딪치게 될 때에는 강한 충격, 강한 작용이 일어납니다. 개구리에게 전기를 통하면 쫙 늘어집니다. 이렇듯 하나님도 사랑의 자극을 받으면 아이쿠! 하고 뒹굴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는 할머니에게 할아버지가 나이 먹을수록 더 밉습디까, 더 귀하고 좋습디까?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늙을수록 귀중하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느냐?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합니다. 늙으면 늙을수록 냄새나고 추할 텐데 더 귀하고 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랑이 추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나쁜 게 아닙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속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지성소에 계시려고 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우리 인간의 생식기가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그 지성소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것 중에서 제일 복잡하고, 제일 자극적이고, 제일 신경이 예민한 것이 무엇이냐? 여자들의 가슴입니까?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접촉 부분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번갯불이 접촉할 때는 피뢰침 끄트머리에 접촉합니다. 사람의 모든 신경의 끄트머리가 어디냐?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단 한 가지 다른 기관입니다. 그것 한 가지가 다르기 때문에 여자고 남자입니다. 그것이 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다 잘 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생식기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 생식기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할 수 있는 지성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놀라자빠질 것입니다. 원래 지성소는 완성한 아담 해와를 상징합니다. 두 석판이나 만나와 메추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아담과 해와를 상징합니다.
성경의 비밀 얘기는 아담과 해와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도 아담 해와고, 성경의 두 감람나무도 아담 해와를 말하고,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아담 해와를 말합니다. 아담 해와의 비밀적인 사랑을 암시적으로 그렇게 기록해 놓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성숙해서 부부를 이루었다면 만사는 다 끝납니다. 거기서부터 천국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착륙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착륙한 기반 위에서 천국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써 그 기반이 없어졌습니다. (143-90)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첫사랑을 이루었다면
그러면 타락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가 완전히 성숙되기를 바랐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밤송이와 마찬가지입니다. 6월이나 7월쯤이면 밤송이의 크기는 수확할 때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것을 까 보면 알이 없습니다. 밤알의 형은 다 있는데, 먹을 수 있는 알이 아직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직전의 때가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알이 안 생겼습니다.
성숙해야 알이 생기므로 하나님은 알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성숙하면 우주의 중심이 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우주의 중심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 18세 이상으로 자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성숙한 사람으로 만든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의 법도에 따라 어린아이로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가 성장해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사랑했더라면 오늘날 인류는 비참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종교도 필요없습니다. 종교도 필요도 없고 구세주도 필요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필요도 없고, 예수님이 올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 기반 위에 서 있는데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사랑 이상 귀한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만 갖게 되면 우주는 내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자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것이자 여자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가진 그 사랑의 기관은 남자의 것이요, 남자가 갖고 있는 그 사랑의 기관은 여자의 것입니다. 네 몸이 내 몸이고, 내 몸이 네 몸이라는 말이 그래서 성립됩니다. 그렇게 엇바뀌어 있습니다. 남자에게 있다고 해서 남자가 주인이 아니요, 여자에게 있다고 해서 여자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함부로 썼다가는 큰일납니다. 그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연애를 못 하게 합니다. 첫정을 자기 남편에게 주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첫사랑이 귀합니다. 첫사랑은 하나님이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첫사랑의 다리를 타고 지옥과 천국을 연결합니다. 이렇게 되면 지옥이 없어집니다. (143-92)
하나님의 사랑의 왕국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왕자와 왕녀였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므로 보이는 세계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또 무형으로는 자극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실체로 전개시켜 자극을 느끼면서 형태세계의 왕 노릇을 하기 위해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창세기에 아담이 이름을 짓는 대로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모르는데 어떻게 이름을 지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 속에 들어가서 지도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아버지고, 아담은 실체 인류의 조상입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이 있고 보이는 몸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아담의 내적인 아버지의 자리에 들어가고, 보이는 아담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과 같이 되어서 하나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나가 되느냐? 사랑이 아니고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제일 귀한 것을 중심으로 하나되려고 합니다. 남자 여자도 제일 귀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되려고 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담 해와 자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을 이루어 영계에 가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무형입니다. 영계에 가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하나된 아담 해와를 통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을 그렇게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만들었느냐? 피조세계가 체(體)를 갖고 있으니 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주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체를 가진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체를 가진 아버지가 됨으로써 보이지 않는 무형과 유형이 하나됩니다. 그것은 우주가 하나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체를 입기 위해서 아담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 체를 입는 것은 무엇이 결정하느냐?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런 체를 갖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담 해와가 하늘나라 왕궁의 왕좌에 오르게 되어 그 왕과 왕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셔서 지상세계와 무형세계를 통치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왕국은 어떤 왕국이냐? 사랑의 왕국입니다. 사랑으로만 영과 육이 합하게 되어 있지, 다른 것 가지고는 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타락은 뭐냐? 사랑을 중심으로 왕과 왕후가 되려고 즉위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때가 되기 전에 천사장이 해와를 겁탈한 것이 타락입니다. 해와를 유인해서 품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실체 부인이 되어야 할 해와를 침범했습니다. 그것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천사장을 지을 때 1년이나 10년 살다가 죽게 지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지었습니다. 영원을 표준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도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살게 지었습니다. 그러한 창조원칙이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도 그 원칙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일 부정하게 되면 하나님 자신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그대로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전부 다시 수리해야 합니다.
악마인 천사장과 해와가 첫사랑의 관계를 맺었는데, 그 흠을 지울 수 있느냐? 지울 수 없습니다. 지울 수 있더라도 사탄을 사랑했다는 인식이 남아진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탄세계를 사랑한 그 이상으로 하늘을 사랑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143-93)
하나님의 사랑의 왕국을 찾아가려면
인류 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오늘날 인간은 누구의 피를 받았느냐? 원래는 하나님의 피를 받아서 이상적인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탄생해야 했으나 악마의 피를 받았습니다. 악마의 피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악마 나라의 포로병과 같은 사람의 피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 본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핏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본성을 갖고 있지만 악마의 피를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하나될 수 없습니다. 마음은 하늘편에 속해 있습니다. 몸은 악마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의 혈통적 인연을 못 받았지만, 본성에 통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소성은 남아 있습니다.
원래 마음은 플러스고 몸은 마이너스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잘못된 사랑으로 몸을 주관했기 때문에 몸이 또 다른 플러스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플러스가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의 상충이 벌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나와서 이 몸을 때려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고행을 해야 되고, 금식을 해야 되고, 탕감길을 가야 된다고 합니다. 몸을 때려잡기 위해서는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피눈물이 눈에서도 나와야 되고, 코에서도 나와야 되고, 귀에서도 나와야 됩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그런데 몸이 원하는 대로 하면 안 됩니다. 몸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해서 나타난 예수님을 보고 주여! 하면서 가까이 하려 할 때 예수님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혈통을 가진 그 누구와도 동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을 찾아가겠다면 고행의 길을 가야 합니다. 몸이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절대 반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 몸이 원하는 것을 부정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없습니다. 고아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가면 사탄세계의 그냥 그대로의 물건입니다.
그러니 사탄세계의 인식을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와 제일 가까운 사람을 원수처럼 쳐야 합니다. 기절초풍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하늘나라를 찾아가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제일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그러면 사탄세계의 어머니 아버지와 떨어져서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종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종의 종에서부터 천대를 받아야 합니다. 천대받는 그 자리에서 하늘을 부여안고, 하늘을 사랑하기 위해 몸에 속한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종의 종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해서 종의 자리에 올라가고, 또 양자나 서자의 취급을 받더라도, 별의별 업신여김을 받더라도 항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길입니다. (143-95)
4. 하나님과 인간에게 제일 귀한 것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고, 물질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언제 어디서든 만들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나 금이나 돈은 하나님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지식도 하나님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대왕입니다. 그 다음에 권력도 필요 없습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제일 좋아하는 돈이니 지식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은 하나도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게 뭐냐? 선생님에게 필요한 게 무엇이겠습니까? 남자로서 필요한 게 뭡니까? 남자에게 제일 귀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여자입니다. 남자에게 절대적으로 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왜 여자가 필요하냐? 사랑 때문에 여자가 필요합니다.
선생님이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지만 혼자서는 그 사랑을 못 느낍니다. 상대가 나타나야 자극을 받아 강한 작용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남자가 왜 태어났습니까? 남자가 태어난 것은 남자 때문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기가 여자입니다. 그리고 여자도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것은 뭘 하자는 것이냐? 사랑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 여자 둘이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태어난 것입니다. 이렇듯 여자 남자가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고 할 때, 기분이 좋습니다. 남자가 없으면, 여자가 없으면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게 누구를 닮아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갖고 있지만 혼자서는 사랑을 못 느끼니 사랑의 상대가 필요해서 우주를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아하고, 하나님이 좋아함으로써 모든 피조세계가 전부 파트너가 되어서 춤추고 노래하고 야단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세계는 쌍쌍제도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급의 존재들은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원소들은 큰 것에 흡수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말을 하는데,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흡수돼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칩니다.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붙들고 늘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내가 먼저 갖게 되면 하나님이 나한테 끌려 다닙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왜 사랑이 필요하냐? 이 둘이 완전한 참사랑을 이루면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을 점령합니다. 그래 가지고 뭘 하자는 것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욕망이 없습니다. (210-158)
생명이 귀하냐, 사랑이 귀하냐
그러한 인간의 욕망을 두고 볼때,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이 뭐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명이 제일 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을 초월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이 귀하냐, 사랑이 귀하냐? 어떤 게 귀합니까? 청춘 남녀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생명을 던지고라도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힘은 생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이 생명을 컨트롤할 수 있지, 생명이 사랑을 컨트롤할 수 없습니다. (142-36)
이런 것을 놓고 볼 때,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이것은 근본문제입니다. 나는 어떻게 태어났느냐? 부모의 생명을 이어받기 전에, 내 생명이 싹트기 전에 부모의 사랑의 터전 위에 내 생명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사랑을 함으로써 내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치 있다는 것, 내가 귀하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부모의 생명을 이어받아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의 사랑의 동참자이기 때문에 귀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모의 사랑에 동참했습니다.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생명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할 때 사랑이 먼저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인간 조상을 아담 해와라고 합니다. 그 아담 해와는 생명체가 먼저 나왔느냐, 그렇지 않으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태어났느냐? 우리 인간은 아무리 봐야 제일 원인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결과적 존재입니다.
결과는 원인을 통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우리 인간도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또한 원인 되는 하나님은 누구를 닮았느냐? 결국 결과인 인간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을 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던 보통의 공식적인 창조과정을 통해 지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중심으로 해서 지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왜 창조했겠습니까? 언제나 가질 수 있고, 언제나 만들 수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그분이 만물을 지어서 뭘 하겠습니까?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현대신학은 하나님은 거룩한 분, 우리 피조물은 속된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이게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했느냐 하는 근본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뭐가 필요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했겠습니까? 돈이 필요해서, 다이아몬드가 필요해서 지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보석을 좋아합니다. 그것들은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다이아몬드는 굳기에 있어서 어떤 것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굳기에 있어서는 절대적입니다.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황금도 빛에 있어서는 역사를 초월합니다. 시대와 환경을 초월해 있습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또 진주의 조화된 빛깔은 어떤 것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더라도 그 우아한 조화의 빛깔은 변치 않습니다. 그 빛깔은 무엇이 점령할 수 없습니다. 어떤 힘을 가지고서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변하지 않는 것을 보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간은 그런 것을 좋아하느냐? 변치 않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은 조석변(朝夕變)입니다. 인심은 조석변이라 하는데, 왜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느냐? 이런 것을 볼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타락했다는 논리가 가능합니다. (142-105)
하나님이 바라는 인격자는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인격자는 어떤 사람이냐?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인격자냐?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을 가르쳐주는 스승이 최고의 인격자냐?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지식이나 돈, 권력이 아닙니다. 이것들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도 변합니다.
의사들이 어떤 병에는 무슨 약이 좋다고 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약이 나쁘다고 합니다. 자꾸 변합니다. 그러니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돈도 믿을 수 없고, 권력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다 변하기 때문에 믿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니 인격자는 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라는 인격자는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은 돈이 필요없습니다. 지식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왕, 지혜의 왕이므로 지식이 필요없습니다. 권력도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필요한 게 뭐냐? 하나님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과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 상충되지 않고, 하나의 공통점에 귀결될 때에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은 나에게도 절대로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는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뭣이냐 하면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언제나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제나 가질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보급할 수 있고, 언제든지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이구 전지전능한 하나님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럴지 모릅니다. 이만하면 선생님도 훌륭하다면 훌륭합니다. 돈도 있다면 누구보다도 있고, 지식도 있다면 누구보다도 있고, 권력도 있다면 누구보다도 있습니다. 세계 사람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는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 혼자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사랑입니다. (142-107)
남자에게 절대 필요한 것과 여자에게 절대 필요한 것
우리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되어 있는데, 남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뭐고 여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뭐냐?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으나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전지전능하지만, 사랑만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사랑의 본질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있긴 있지만 나 혼자서 내 사랑, 좋다 그러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상대를 통하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미녀라도 사랑은 혼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남자에게 절대 필요한 게 뭐냐?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몰랐습니다. 남자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권력이나 돈, 지식이라고 생각했지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남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아무리 세계에 이름이 난 남자라도 혼자 산다면 그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불쌍하다고 합니다. 선생님도 아내가 없으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미인이라도 혼자 살면 불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가 태어난 것은 여자 때문입니다. 남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게 아니라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천리(天理)입니다. 천칙(天則)입니다. 남자는 여자라는 가냘픈 존재 때문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었는데, 누구 때문에 지었습니까? 해와 때문에 지었습니다. 또 해와를 지을 때도 아담이 혼자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해서 지었습니다. 그리고 해와를 짓고 나서는 지극히 선한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아담을 지은 것도, 해와를 지은 것도 서로를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는 존재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의 질서와 사회의 질서, 남자와 여자의 생활질서를 근본에서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본이 틀렸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틀려 나갑니다. 그러니 출발을 바로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태어난 것은 절대적으로 여자 때문이고, 여자가 태어난 것도 절대적으로 남자 때문입니다. 여자가 여자 때문에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이 두둑한 것은 자녀를 위해서입니다. 궁둥이가 큰 것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잘 낳기 위해서입니다. 여자 때문에 그렇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또 남자는 어깨가 크고 넓은데, 왜 그렇게 생겼느냐? 일을 하자면 힘이 세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를 먹여 살리고, 집안의 주인 노릇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자 남자 둘이 앉더라도 사각형으로 딱 맞게 되어 있습니다. 남자는 어깨가 크고 여자는 궁둥이가 크니 딱 맞습니다. 조화의 법도를 가르치기 위해서 이렇게 지었습니다. 이런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인데, 근본적으로 확실히 몰랐습니다.
남자는 절대적으로 여자 때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를 위해 살아야 되고, 여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기 때문에 싫든 좋든 남자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하느냐? 무엇 때문에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하느냐? 남자 여자는 서로를 위해서 태어났는데, 그렇게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 틀림없이 사랑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남자 여자가 태어나 서로를 위하는 것은 사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원칙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남자보다 귀하고 여자보다 귀합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142-109)
하나님과 인간에게 제일 귀한 것
하나님은 지혜의 왕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볼 때, 여자의 사랑 주인은 남자고 남자의 사랑 주인은 여자입니다. 엇바뀌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남자가 갖고 있는 그 유별난 것, 생식기의 주인은 남자가 아닙니다. 그것의 주인은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남자들은 그것의 주인을 모르고 도둑질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갖고 있는 것은 여자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여자가 주인입니다. 또 여자가 갖고 있는 것도 남자의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언제 이루어지느냐? 성숙해야 합니다. 17, 18세로 성숙해야만 사랑의 자극이 옵니다. 그때까지는 금물입니다. 주인이 없습니다. 주인이 없을 때는 훗날 주인을 찾아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온갖 준비를 다 해야 합니다. 결혼은 무엇이냐? 서로 주인을 엇바꿔 만나는 예식이 결혼식입니다.
인간세계에서 제일 귀한 것이 뭐냐?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 가면, 자기가 갖고 있는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라든가 전부를 팔아서라도 죽어 가는 남편을 살려야 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은 돈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권력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귀하다는 지식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나라를 주고도,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천하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을 망각한 인간은 비참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고 하나님이 절대 필요로 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아무리 전지전능한 절대자 하나님이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을 이루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상대가 우리 인간입니다.
사랑은 위대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이 시골의 순박한 처녀와 사랑의 관계를 가졌다면, 다시 말해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면 지식이 있고 없고가 문제 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인연을 맺었다면 그 순박한 시골 처녀는 대통령 옆에 앉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동등한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집니다. 이런 사실이 위대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은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식물계나 동물계를 보면 전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랑에 대한 교육을 하기 위해 자연계를 박물관과 같이 지었습니다. 그래서 만물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만물지중 유인최귀; 萬物之衆 惟人最貴)라고 했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만이 귀하다는 말은 무엇을 중심하고 하는 말이냐? 이웃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세계를 망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만이 귀하다는 것은 천주를 창조한 창조주 앞에 사람만이 오직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절대적인 주체자 앞에 단 하나의 상대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귀합니다. 또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귀하지, 사람을 통해서 사랑을 찾을 수 없다면 귀하지 않습니다. (142-111)
하나님의 사랑의 축은 하나
아담 해와가 성숙하는 과정을 보면, 그들은 평면적으로는 동과 서의 입장입니다. 동과 서의 입장에서 그들이 점점 자라 철이 들어 가면서 자기들 서로를 보고 배웁니다. 그리고 만물세계를 보고 아, 쌍쌍이 저렇게 다 새끼를 치는구나 하면서 배웁니다. 철이 듦으로써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사랑의 인연을 맺기 전에 누구와 먼저 사랑을 해야 되느냐? 아담 해와 자기 둘이 사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축에 횡적인 남자 여자의 사랑을 90도로 딱 접붙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축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 우주의 축은 어떤 주의도 아니요, 사상도 아닙니다. 권력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사랑의 축입니다. 아담 해와가 사랑하는 그 순간에 절대자의 사랑의 축이 하늘로부터 땅 위에 꽂혀야 영생할 수 있는 생명이 출발합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직계 아버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이 어디에 박혔느냐? 그 사랑의 축이 어긋났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완전히 사랑의 일체 기준을 못 가졌습니다. 내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몸과 마음이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역사시대에 어떤 위인이나 성인도 역사를 대표해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통일됐다고 주장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도 내 마음의 법과 몸의 법이 항상 싸우니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접붙였다면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되었다면 그건 하나님의 핏줄에 엉킨 몸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살더라도 원리적입니다. 한 나무의 열매는 전부 같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고 선한 행동을 하니 하나님과 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타락한 사람과는 핏줄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몸과 마음을 하나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길을 찾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과 몸이 하나 안 되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4백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오관의 모든 세포를 한 골수로 전부 집결시켜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의 힘은 어느 힘보다 자극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길을 다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영(靈)과 육(肉)이, 마음의 사람과 몸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1백 퍼센트 하나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마음의 세포와 몸의 세포가 사랑에 의해 완전히 하나되면 공명하게 됩니다. 음차(音叉)는 한쪽을 때리면 다른 한쪽도 같은 소리를 냅니다. 공명체가 됩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공명체가 되어야 하는데, 타락으로 인해 고장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살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바로 가르쳐주는 곳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세계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자유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유세계가 망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으면 방지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의 길을 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야 할 길, 가정적으로 가야 할 길이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의 길은 같은 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민족이든, 어떤 나라든 그 길은 같은 길입니다. 방향이 틀리지 않습니다. 개인이 가는 사랑의 길이나 가정이 가는 사랑의 길이나 수가 많을 뿐이지 같습니다. 초점은 전부 다 똑같은 한 길입니다. 그것이 무슨 길이냐? 하나님의 사랑의 길입니다. (142-115)
사랑 때문에 나고 살고 돌아가도록 창조된 인간
우리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이 근원이 되어 태어났습니다. 본연의 부모 사랑을 근거로 해서 우주와 연결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의 길에서 태어났습니다. 비록 타락했을망정 그 근원은 남아 있습니다. 선을 추구하고, 보다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그 기준이 남아 있기 때문에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또한 새로이 발전할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사람은 왜 태어났느냐? 남자와 여자는 왜 태어났느냐? 서로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서로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변치 않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변치 않는 사랑의 길은 인간끼리는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한 사람에게는 환란과 핍박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40여 년 동안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세계문제를 다 극복하고 나왔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의 길은 누가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 남녀간의 사랑의 길도 못 막는데, 인간의 근본 되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가는 그 사랑의 길은 더더욱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기를 변치 않는 사랑의 길을 따라 살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부모의 사랑의 동참자입니다. 그래서 복중에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태어나서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사랑 속에서 자랍니다. 그 다음엔 철이 들어 남자 여자가 만나 부부 사랑의 길을 찾아갑니다. 사랑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자라서 차원 높은 부부의 사랑을 통해 자녀의 사랑을 갖습니다.
자녀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이요, 그것을 체휼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녀는 어머니 아버지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이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 시조를 지어 놓고 기뻐했던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못 낳은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세상 인간을 사랑했다는 자리에 서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왜 슬프냐? 하나님이 세워 놓은 천리의 중심인 사랑의 이상을 찾아가는 길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슬픕니다. 이런 모든 것이 원인 없이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 때문에 태어났고, 여자는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왜 같이 살아야 되느냐 하면, 사랑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가 하나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되기 위해서 동과 서에서 중앙점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여자나 남자나 다 욕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귀한 사랑이 전부 아담한테 가게 되면 해와가 불평할 것이고, 또 해와한테 하나님의 귀한 사랑이 가게 되면 아담이 불평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똑같이 받기 위해 중앙점을 찾아옵니다. 그러니 수평선을 중심으로 90도 되는 중앙점에서 둘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촉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천지가 다 완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인간이 이와 같은 도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혼자서는 못 받습니다. 남자 여자가 생명 이상의 사랑으로 완전히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생명 이상입니다. 생명보다 앞선 게 사랑입니다. 생명 이상의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우리가 왜 결혼을 하느냐? 왜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결혼을 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을 축으로 해서 돌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결혼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142-118)
우리 인간이 가야 할 목적지
이 우주 가운데서, 인생역사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은 멋지게 지어진 예술회관과 같은 집이 아닙니다. 이 지구촌이 아닙니다. 아무리 지구촌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해도 사랑의 안식처를 못 가지면 불행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참사랑이 가장 귀합니다. 그러면 그 참사랑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인간의 고민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역사를 걸고 추구해 나온 길이 무엇이냐 하면, 참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사랑은 참남자와 참여자를 만나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축과 함께 돌면 돌수록 반경이 커지고, 반경이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밀착됩니다. 아무리 큰 우주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관계된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된 자리에서만 상속이 가능합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부모의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보다 위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보다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 상속자가 됩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성된 사람으로서 완성된 사랑을 갖춘 부부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하나님과 대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유를 내 소유로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통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면 상속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은 그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부모로부터 사랑에 의해 태어나 사랑의 품에서 성숙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 대신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늙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느냐? 세상에서 부모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느끼고, 세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느껴서 하나의 열매가 됩니다. 식물의 열매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무의 모든 진액을 흡수한 열매와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입니다.
그러니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한한 가치의 기준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과 하나되는 거기에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완성이 벌어집니다. 그런 곳이 인간이 가야 할 이상세계요 천국입니다. 그런 열매들이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개인이 들어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중심하고 결실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소유권을 상속받은 대등한 가치에 있는 대상의 자격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이 천국입니다. (142-121)
5. 사랑을 중심한 본연의 인생길
우리 인간 생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인간은 본연의 인간이 살아야 할 기준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통일교회는 통일원리를 통해서 창조이상이 어떻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사람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아담과 해와가 완전히 하나되어 종횡의 사랑이상권을 이루어 그 기준 위에서 생명의 뿌리를 박은 사람입니다.
우리 인간 생명의 뿌리는 어디에 있느냐? 타락하지 않은 선한 부모에게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선한 부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면서 그 이성성상을 전개하여 우주를 짓고 인간을 지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남성 성품을 전개시킨 것이요, 해와는 하나님의 여성 성품을 전개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한 분이니까 그렇게 말하겠지만, 그 한 분에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라는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이치는 상대적 관계를 갖지 않고는 작용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작용이 없으면 존재의 기원이 되는 힘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은 하나님의 남성 성품을 실체로 전개한 표시체입니다. 해와도 하나님의 여성 성품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표시체입니다. 즉 하나님의 내적 성품을 드러낸 존재가 아담과 해와입니다. 드러냈다는 것은 실체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드러나지 않은 동기를 드러냈다는 말입니다. 그 드러나지 않은 동기는 무엇이냐? 그것을 우리는 무형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뿌리인 하나님에서 남자와 여자로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중심으로 다시 합하느냐? 통일원리에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분립되었던 것이 무엇으로 합하느냐? 사랑으로 합합니다.
우리는 숨을 쉬고 있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작용입니다. 숨을 쉬는 데도 반드시 갈라지는 동기가 있으며, 그 동기에서부터 뻗어나갔으니 그 동기를 닮아 작용을 연속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걷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걸음 걷는 그 동기를 반복해서 먼 길을 갑니다. 우리 인생도 아침에 일어나 먹고 활동하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반복하면서 일년을 거쳐갑니다. 일년 일년을 거쳐 십년이 되고, 또 십년을 연장시켜서 일생의 길을 갑니다.
그러면 분립해서 전개된 아담 해와는 무엇으로 합하게 되느냐? 또 무엇으로 근원적인 존재와 가깝게 될 수 있느냐? 가깝게 할 수 있는 힘의 작용이 무엇이냐? 이것은 다른 힘이 아닙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분립된 성품을 완전히 조화 통일시킵니다. (140-123)
몸과 마음을 분립시킨 동기가 뭐냐
아담 해와도 몸과 마음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안이 되고, 몸이 밖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개체가 안팎으로 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된 남성과 여성이 또다시 주체 대상 관계에서 횡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자도 안팎으로 하나되고, 남자도 안팎으로 하나되어 그 남성과 여성이 비로소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되는 데는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사랑으로 하나됩니다. 본래 타락이 없었다면 몸과 마음이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도의적인 어떤 관념이나 생각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힘으로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과 마음을 분립시킨 동기는 사랑을 구체화(球體化)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을 구형화시키기 위해서, 사방으로 적용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점에 정착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에 활용될 수 있는 환경권을 만들기 위해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부모를 생각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 마음이 가는, 그 마음 줄기의 방향성이 무엇이냐? 마음은 부모의 사랑, 혹은 형제의 사랑, 나라를 생각하는 사랑, 세계를 생각하는 사랑, 그리고 하늘땅을 생각하는 사랑을 연결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전후․좌우․상하관계의 사랑을 연결하려고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자리는 북쪽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또한 남쪽에도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중앙에 가까이 서려고 합니다. 중앙 가까이에 서려고 하는 것은 중앙에 본래의 사랑, 종적인 우주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도 인간이 완성해야 인간과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적 사랑의 길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분신화시킨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과 중심적 사랑의 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140-125)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도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합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못 이룹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통해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내 자신이 사랑의 본질을 갖고 있지만 그 사랑이 사랑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플러스가 작용하려면 마이너스가 있어야 합니다. 마이너스가 없으면 아무리 플러스가 작용하려고 해도 절대 작용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마이너스가 영원히 나타나지 않으면 자연히 플러스도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반드시 상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의 생리적 기관도 엇바꿔 가지고 있습니다. 그 생리적 주인이 자기에게 있다고 해서 자기가 주인이 아닙니다. 여자가 갖고 있는 것은 남자가 주인입니다. 또 남자가 갖고 있는 것도 여자가 주인입니다. 그 생리적 기관의 중심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기관을 엇바꿔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가 우쭐대며 남자라고 자랑하고 다니지만, 그 남자의 중요한 사랑의 기관은 남자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이 모르고 있습니다. 주인은 다른 데 있는데 남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주인같이 행세하니, 그것이 오늘날 인륜 도덕을 파탄시키는 악마의 행동으로 결실되고 있습니다.
남자 여자가 왜 결혼하느냐? 요즘 미국에는 동성연애자들이 많아지고 있고, 또 혼자 살아야 된다. 사랑하는 것은 동물과 같은데 무슨 가치가 있느냐? 하면서 사랑의 몰가치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은 한때 향락의 표시지, 거기에 무슨 내적인 인연이 있겠느냐? 나와 너와 영원한 관계의 내용이 없다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남자 여자의 사랑의 기관을 엇바꿔서 맡겼습니다. 남자의 귀한 사랑의 기관은 남자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귀한 사랑의 기관은 여자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맡겼습니다. 서로 엇바꿔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여자는 남자를 찾아가야 하고, 남자는 여자를 찾아가야 하느냐? 그것은 자기 주인을 찾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못 만나면 안 됩니다. 못 만나면 천지이치에 부합되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이 우주는 주체 대상의 관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완전한 플러스 완전한 마이너스가 하나되었을 때는 이 우주가 옹호합니다. 그걸 침범할 때는 반발합니다. 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는 스스로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140-126)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창조해낸다
우리가 알다시피 플러스와 플러스는 반발합니다. 그러나 플러스 마이너스는 어떻게 되느냐? 이 녀석들아, 절대 합하면 안 돼!라고 누가 명령하더라도 너는 근본과 거리가 먼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근본은 그렇지 않아 하면서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가라사대 플러스 마이너스야, 하나되면 안 돼! 한다면 저를 짓기 전에 벌써 플러스 마이너스는 합한 것으로 있었소. 그런데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하나되면 안 된다고 하면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명령해도 듣지 않습니다. 그걸 듣게끔 파탄시켜 놓는다면 천지가 분산돼 버립니다. 원소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설사 완전한 마이너스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완전한 플러스가 없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완전한 플러스 입장에 있는 하나님 자체도 마이너스가 없게 될 때는 없어져야 된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마이너스를 창조해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해와를 아담의 갈비뼈를 빼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해와는 아담의 본을 떠서 만들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연히 생겨나기 때문에 아담이 완전한 플러스라면 완전한 마이너스인 해와는 아담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이게 천지이치입니다. 이렇게 알고 보면 하나님은 참 과학자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남자를 지은 것은 그 완전한 남자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플러스는 완전한 플러스를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마이너스를 위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마이너스인 여자를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근원적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체자라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대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인 절대적 주체자라면 완전한 마이너스의 대상을 창조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플러스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마이너스를 만들어 냅니다. 완전한 인격자는 가만히 있더라도 그 환경의 모든 양심적인 존재들이 그 주변에 모여서 그를 닮으려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체자 앞에 대상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모든 존재물, 모든 원소세계, 모든 물질세계는 움직입니다.
왜 그러느냐?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올라가서 뭘 할 것이냐? 모든 원소들은 한 단계 올라가면 높은 단계의 보다 원만하고 보다 이상적인 가치를 실현하게 됩니다. (140-128)
인간은 무엇에 취해서 살아 가야 하느냐
우리는 자극적인 영화를 좋아합니다. 더 재미있고 더 자극적인 것에는 가지 말라고 해도 자꾸 마음이 끌립니다.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에는 모든 것이 모입니다. 그러니 우주의 중심적인 변화무쌍한 자극적인 모체가 있다면 그 모체 앞에는 모든 만물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소들도 전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작용을 하면서 높은 것과 합하려고 합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주 창조가 가능했습니다. 그 높은 데에서의 자극적인 길이 뭐냐? 그것은 주고받음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길입니다. 거기에서 자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소면 원소 자체들로서 운동하고 있다는 자극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래서 더 차원 높은 데로 가려고 합니다. 그 자극은 모든 것을 완전 동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개구리에 전기를 통하게 하면 네 발을 떡 벌리고 눈은 반쯤 감고 쭉 늘어져 죽듯이 하나님도 그런 모양으로 취해서 아뜩하게 할 수 있는 그런 힘입니다. 하나님도 아뜩하길 바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으니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취해서 멍하고, 동서남북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취합니다. 술에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취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술이라는 말이 나와서 안됐지만, 그 취한 맛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취해서 살아 가야 하느냐? 술에 취하면 자꾸 보급해야 됩니다. 자연적이 아닙니다. 춘하추동은 자연적이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자연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보급로를 통해서 공급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급될 수 있는 길만 끊어지면 그만입니다. 슬프게 됩니다. 슬프게 되었다가는 올라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연히 보급되는 이 춘하추동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봄이 갔더라도 또 찾아옵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히 사랑의 길은 찾아옵니다. 누가 오지 말라고 해도 옵니다. 그리고 빨리 오라고 해도 빨리 오지 않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의 길이여, 빨리 와라고 아무리 큰소리로 외친다 해도 완전한 사랑의 길은 자기 때가 되어야 옵니다. 오기는 오는데 자기 때에 맞춰서 옵니다. 막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때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때를 맞출 줄 모르고 제멋대로 사랑하는 마구잡이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게 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게 따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담 해와가 때를 맞춘 사람이 되면 그때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중앙에 와서 사랑의 주체가 됩니다. (140-130)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의 운동법칙
아담 해와가 성숙하면 보이지 않지만 사랑의 주관을 받습니다. 그리고 종적인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이 내려와서 횡적인 입장의 양쪽 끝에 있는 아담 해와의 중앙에 와서 섭니다. 그렇게 종적 주체인 하나님이 횡적인 자리의 핵으로 있게 되면 아담 해와는 마이너스이므로 플러스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됩니다.
그런 다음에는 종적인 핵인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제자리에서 올라갔다내려갔다 하는 작용을 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게 되면 가만히 있으면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붙들고 키스를 할 때에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입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비비고 빙빙 돌면서 요동합니다.
종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평형적으로 불이 타 몇천 도 되는 핵의 자리가 되어야 하나님이 내려와 부딪칩니다. 몇천 도 되는 힘을 강한 하나님의 사랑이 일시에 잡아당기니 굉장한 속도로 부딪치고, 부딪치면 자연히 아이쿠머니야! 하고 번개가 치면서 하나님이 뛰쳐 올라가고, 그 다음에 아담 해와는 달라붙습니다. 붙었다가는 또 아이쿠, 이거 뜨거워 못 견디겠다 이러면서 폭발작용을 합니다.
흐린 날 땅과 보이지 않는 공기가 결혼합니다. 먼저 약혼식을 하고, 그 다음에는 결혼식을 하고 아, 됐다. 좋다! 그럽니다. 검은 구름이 끌고 다니는 가운데서 조화가 벌어집니다. 무슨 조화가 벌어지느냐? 양전기가 생겨나면 땅에 음전기가 생겨서 만나는 조화입니다. 높은 데 올라가자. 높은 데 올라가자 하면서 높은 데 올라가서 만나 벼락을 칩니다. 그게 양전기 음전기가 키스하는 소리입니다. 번갯불은 양전기와 음전기의 사랑의 빛입니다.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공기와 땅이 그렇듯이 우주 꼭대기에 있는 하나님 플러스와 땅 위에 있는 인간 마이너스가 합하면 우르릉 꽝! 합니다.
높고 낮은 상반된 위치에 있지만 돌아야 합니다. 돌기 위해서는 중심이 있어야 합니다. 중심 수평선이 있어야 합니다. 고저를 가늠해 균형을 취할 수 있는 선이 수평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수평선에 선 것이 남자 여자의 사랑입니다. 남자 여자가 끝과 끝에서 중앙으로 모입니다. 아이고, 내 주인이 저기 있구나 하면서 모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갈 때, 무엇이 꿈틀거리며 찾아가느냐? 사랑의 머리를 꿈틀거리며 찾아갑니다. 그렇게 만나서 하나되면, 그 하나된 사랑의 씨가 뭐냐? 사랑하고 남은 부산물이 뭐냐? 자녀입니다. 사랑하고 남은 부산물이 자녀입니다. 쓰레기 부산물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난 그 부산물이 나입니다.
요즘에 난(蘭)을 번식할 때 어떻게 번식하느냐? 난은 본래 뿌리로 번식합니다. 그런데 뿌리로 번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난에서 세포를 채취해서 배양하여 번식시킵니다. 세포로 번식시킵니다. 병 같은 데에다 세포를 넣어 세포가 자랄 수 있는 영양소를 주어 배양합니다. 조그만 병 하나에 몇십만 개의 세포를 배양하는데, 그 세포 하나에서 빨간 난이면 빨간 난이 나옵니다. 앞으로 전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식물도 그렇게 될 것이고, 사람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포 하나에 나 같은 사람 몇만 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세포 하나에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이가 있고, 모든 조화통이 들어가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놨습니까? 창조의 근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눈과 코의 위치가 바뀌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그냥 그대로 틀림없이 된다는 것입니다. (140-131)
하나님과 나는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은 사랑이 그리워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플러스 사랑을 가지고 완전한 마이너스를 찾아 들어오니 자동적으로 창조원칙에 의해 인간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플러스적 하나님이 귀한 동시에 마이너스적 하나님도 귀합니다. 하나님이 제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주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주인의 자리를 하나님 속에 박아 놓은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 박아 놓았습니다. 왜 대상 속에 박아 놓았느냐? 대상 속에 박아 놓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 불경스러운 놈들아, 그럴 수 있어?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어? 하다가도 아, 그렇지 그렇지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봐서 알 수 있느냐? 자식을 보고 압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때문입니다. 계란은 무엇을 닮았습니까? 모양은 둥글지만 어미 닭을 닮았습니다. 둥근 계란 안에 어미의 새끼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미는 그 계란 안의 새끼를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닮은 것이 자식이지만, 자식을 닮은 것이 부모입니다. 이 말은 자식은 부모를 닮았고, 부모는 자식을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나를 닮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나와 아주 가깝습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나와 멀고 먼 하나님이지만, 통일교회 하나님은 아주 가깝습니다. 얼마나 가까우냐? 손이 닿아서 하나님 궁둥이까지 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젖가슴도 만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깝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하나님이 좋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하고 정성들여 부르면 맨 처음에는 저 천상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나중에는 자기 마음에서 대답합니다. 하나님! 하고 부르면 자기 마음에서 왜, 이 녀석아! 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면 자기 속사람이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데 있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기 위해 인간을 지었으므로 하나님과 인간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플러스인 하나님 앞에 마이너스가 못 됨으로써 하나님이 인간세계와 접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눈은 누구를 닮았느냐?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이렇게 죽 올라가서 결국 종지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입니다. 그 종지 아버지가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면 그 종지 아버지인 하나님을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통일교인들은 일주일 금식을 합니다. 일주일째 되는 날 밤 열두 시를 알리는 땡- 소리가 들리면 그 이상 기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밤 열두 시를 10분 남았다, 5분 남았다 하면서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그 이상 돼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밥을 그리워하는 이상의 간절한 기준에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릴 때 잠 자고 싶은 마음 이상의 간절한 자리에 가야 하나님과 접촉하고 관계맺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의식주 권내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맺을 수 없습니다. (140-134)
축복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본래 축복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과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 가운데서 사랑의 뿌리가 형성됩니다.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이 하나되어 우주 사랑의 핵의 뿌리를 받아 인간인 우리가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뿌리를 내릴 때부터 기쁨입니다. 생명인 사랑의 핵의 뿌리를 내릴 때부터 기쁨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어머니 아버지의 모든 세포는 사랑에 둥실둥실 화해 완전히 몸과 마음이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자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여자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전후 관계가 맞아 횡적으로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천지의 중심 되는 하나님과 하나되었을 것입니다. 연결되고 연결되다 보면, 높이 쌓고 쌓고 쌓다 보면 피라미드와 같이 됩니다. 그리고 연결되고 연결되면 서로서로 운동해야 됩니다.
운동하게 되면 모난 것은 전부 깎이고 둥글둥글하게 됩니다. 운동하기 때문에 둥글둥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주는 전부 둥글둥글하게 생겼습니다. 왜 그러냐?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둥글둥글한 하나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벌의 세계를 살펴보면 일벌이 있고 여왕벌이 있습니다. 남왕벌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여왕벌입니다. 모든 일벌들이 먹을 것, 즉 꿀을 준비하는 것은 여왕벌을 먹이기 위해서입니다. 수펄은 여왕벌이 태어나서 산란 능력을 가질 때 딱 한 번 필요합니다. 그리고 교미가 끝나면 수펄들은 몇 마리만 놔두고 일벌들이 다 죽여 버립니다. 일벌들이 죽여서 물어다가 내버립니다. 여왕벌은 밤낮으로 자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계속 알을 낳습니다. 알을 낳는 게 여왕벌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인류 조상의 사랑 덩어리가 여왕벌의 핵처럼 되어 있으면 우주는 그것을 따라다닐 것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크냐? 우주 공간은 어디를 이동하더라도, 천년 만년 달려가도 부딪치지 않게끔 하나님이 질서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서로 부딪쳐서 옥살박살 나게끔 안 되어 있습니다. 무한히 달려도 좋습니다.
남극이 있고, 북극이 있고, 동극이 있고, 서극이 있어 동서남북 사방이 북극에 가서 부딪치려고 하면 북극 자체의 힘에 의해서 부딪치기 전에 밀어냅니다. 너 안 돼. 직선으로는 안 돼. 동쪽으로 가, 서쪽으로 가, 남쪽으로 가 하면서 밀어내게 되어 있습니다. 질서적입니다. 이렇게 해서 보호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년 만년 살고지고입니다. (140-136)
일생노정은 제1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정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 가고 싶어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가 태어난 고향, 혹은 내가 태어난 고향은 제2의 고향입니다. 제1의 고향이 아니라 제2의 고향입니다. 제1의 고향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렇듯 제2의 고향에도 가고 싶은데, 제1 고향에는 얼마나 가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제1 고향은 제2의 고향에 가듯이 해서는 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제1 고향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 인간은 욕심이 큽니다. 우주보다 더 큽니다. 조화의 법칙에 응할 수 있게끔 위대한 최고 사랑의 이상으로 하나되어 천년 만년 살 수 있는 무한한 행복권을 지니는 것이 사랑의 길입니다. 그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제1의 고향을 찾아가려면 제2 고향인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제일 큰 사랑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이게 자연이치입니다.
욕심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 왜 욕심이 그렇게 크게 생겨났느냐? 그냥 그대로 운동하는 이 법칙의 도리를 따른다면 컸다가 더 클 수 있는데, 그렇게 되어서는 존재의 중심에 설 수 없습니다. 컸다가 작을 수 있고, 작았다가 클 수 있어야 중앙의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높고 낮은 데의 중심이 중앙에 있고, 좌우의 중심이 중앙에 있고, 전후의 중심이 중앙에 있습니다. 높기만 해서는 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걷는 데도 다리를 들고만 있으면 걸을 수가 없습니다. 내려와야 합니다. 내려오더라도 크게 내려와야 합니다. 구형의 모든 것이 그렇게 구르면서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 욕망이 있다는 것은 무한히 큰 것이 내 자체에 압축되어서 무한히 확대해야 할 본성적인 인연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무한히 큰 것을 품으려고 합니다.
그 무한히 큰 것이 뭐냐 하면 고향입니다. 본연의 고향입니다. 제1 고향에서 떨어져 제2 고향으로 돌아가 제2 고향을 통해 제1 고향에 맞춰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품겨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매부 좋고 누이 좋고 그럴 수 있습니다. 매부 나쁘고 누이 나쁜 것은 매부 집이 나쁘고 누이 집이 나쁜 것입니다. 매부 나라까지 나쁘고 누이 나라까지 나빠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주의 핵과 연결될 수 있는데, 이것이 나쁘다 할 때는 우주의 서러움을 동반할 수 있는 막대한 피해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슬픔 중에서 뭣이 제일 슬프냐? 무엇이 제일 깊은 슬픔이냐? 좋다면 무엇이 제일 좋은 기쁨이겠느냐?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금덩이나 돈을 가지면 밤잠을 못 잡니다. 강도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리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합니다. 황금덩이나 돈을 벌었더라도 그것을 갖다가 보관할 데가 없습니다. 철궤에 갖다 넣어 놓아도 안심이 안 됩니다. 어디에 넣어 놓더라도 안심이 안 됩니다. 자기 몸 가운데 보관할 수만 있다면 자기 몸 가운데 보관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이 뭐냐? 누구나 원하는 것, 천년 전에도 원했고, 만년 후에도 원하는 것, 하나님도 눈이 빠지게 원하는 것, 하나님도 놓을 수 없는 것, 그게 뭐겠느냐? 돈이겠느냐, 다이아몬드겠느냐, 금이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만은 하나님 혼자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하나님 속에다 꼭꼭 다져두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디를 찾아가야 하느냐? 사랑의 고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이 그립거들랑 고향을 찾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생노정은 제2 고향에서 태어나 어디로 가느냐? 제1 고향을 찾아갑니다. 제1 고향이 큰 플러스니 나는 큰 마이너스가 되어 돌아가서 딱 합해야 됩니다. (140-138)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자극적인 것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욕망을 무엇 때문에 주었느냐? 도둑질하라고 준 게 아닙니다. 독재자가 되라고 준 게 아닙니다. 위대한 사랑 때문에 주었습니다. 그 욕심은 너무나 달고, 맛있고, 재미가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 가끔 70세 넘은 할아버지가 재취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 그 70이 넘은 할아버지가 재취한다고 싱글벙글 좋아서 어쩔줄 모릅니다. 늙었는데도 좋아서 어쩔줄 모릅니다. 그런 데서는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려고 합니다. 사람은 욕심이 있습니다. 아주 큰 욕심을 우리 가운데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에 퍼져 나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욕심을 압축 공기처럼 폭발되게끔 해놓았습니다.
그 욕심은 사랑에 부딪히면 폭발합니다. 그런데 부딪힐 때는 직선으로 부딪히지 않습니다. 직선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형운동을 합니다. 이렇게 부딪히면 하나님이 사랑에 딱 낍니다. 공중에서 하나님이 딱 끼게 되면 아이고, 야단났구나! 반발하면서 땅에 돌아와 마이너스와 합하게 됩니다. 땅에서 마이너스와 하나되면, 또 끼어서 아이쿠, 야단났다 하면서 올라갑니다. 이렇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게 됩니다. 그렇게 둥둥둥 돌아다니며 우주를 여행합니다.
사랑은 생각으로도 좋고, 모양으로도 좋고, 맛으로도 좋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그렇습니까? 대한민국 땅만한 다이아몬드가 그렇습니까? 생각으로는 대한민국 땅만한 다이아몬드가 좋다고 하더라도 세포는 잠을 잡니다. 그러나 마음과 몸이 갈라져서 행동하지만, 사랑이 싹터 올 때는 눈이 기관총이 되어 빠바바바방 하고, 세포도 기관총이 되어서 빠바바방 합니다. 4백조 개의 세포가 한 방씩만 쏘더라도 4백조 개나 되는 총알이 한꺼번에 나갑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기관총은 아주 멋집니다. 이 사랑의 기관총을 쏘면 우주는 옥살박살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합니다. 사랑에 의해서 부활합니다. 이것은 말만 들어도 근사합니다. 사랑의 춤을 출 때는 그렇습니다. 사랑은 앉아서 똥을 누더라도 좋습니다. 사랑이 개재될 때는 그 냄새가 구수합니다. (140-141)
사랑을 중심으로 평등과 행복이 있어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사랑한다 할 때, 할머니가 다 늙어서 무슨 사랑을 한다고 해! 어서 죽기나 하지 그렇게 말합니까? 그걸 보는 늙은 할머니는 옛날에 사랑하던 그 사랑의 맛에 취해 다 잊어버립니다.
늘그막 사랑은 넙적한 사랑입니다. 둥근 사랑이 아니고 넙적한 사랑입니다. 둥글었다가 넙적해지고, 넙적했다가 둥그래져야 합니다. 그래야 저나라에 가서도 박자가 맞습니다. 다 평등입니다.
그래서 사랑에서만 평등할 수 있습니다. 남자 여자 평등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빼놓고는 남녀 평등이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수염이 나는데 여자는 안 납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가 주먹으로 한번 치면 나자빠집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가 쳐도 나자빠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등입니까? 말하는 것도 여자는 앵앵앵 하고, 남자는 우와와 합니다. 그게 평등입니까? 웃는 것도 여자는 헤헤헤 하고, 남자는 하하하 하는데 평등입니까?
평등이란 말은 사랑을 빼놓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평등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심으로 하지 않은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행복은 뭐냐?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대개 행복이 뭐긴 뭐야? 행복이 행복이지라고 말합니다. 행복이 뭐냐? 사랑의 저 끄트머리 열매라고 해도 맞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뒤옆이라고 해도 맞고, 사랑의 앞옆, 사랑의 꼭대기라고 해도 맞고, 사랑의 발이라고 해도 맞습니다. 사랑은 하나기 때문에, 둥글기 때문에 다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빼놓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자가 아무리 미인이라고 해도 혼자 앉아서 거울을 바라보며 아이고, 나 행복해. 잘생겼구만. 거울님, 나 사랑하지요? 그럽니까? 거울보고 사랑해 달라고 그럽니까? 거울님, 내게 입 맞춰요 그럽니까? 아무리 미인이라도 평등적 사랑의 내용을 가진 남자가 있어야 조화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멋진 인간 본연의 길이 있었는데 그 본연의 길에서 타락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한꺼번에 엉클어져 있는 본질의 뿌리를 보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인간이 사탄 사랑의 본원지가 됐습니다. 이 원통한 사실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140-142)
6. 우리의 자랑
우리 인간에게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자랑하려고 합니다.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본성의 마음입니다. 미국 사람이라면 미국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가는 것을 갖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자랑할 수 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은 누구나 다 좋아하고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하늘이면 하늘, 땅이면 땅 어디서나 다 원하는 것을 가져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을 자랑한다는 것은 미국을 자랑하는 것이지 세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미국을 제외한 그 외의 세계에서는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우주 앞에는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미국 자체는 미국 국민만을 위하는 기준에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을 넘어 세계를 위하는 내용의 자랑이라면 그것은 미국의 자랑도 되지만 세계의 자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어느 누구나 갖고 있고, 어디에나 적용되며, 높으나 낮으나 모두 바랄 수 있는 것이지, 자랑할 것은 못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나를 자랑한다 할 때,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자랑해야 하느냐?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터전이 무엇이냐? 이 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물의 사지백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영계나 온 우주가 바라보고 기준을 삼으려고 하고 표준 하려고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몸이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과 몸을 비교할 때 몸이 마음을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느냐, 마음이 몸을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느냐? 아무리 자랑할 것이 있더라도 변하는 것이나 있다가 없어지는 일시적인 것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자랑할 수 있으려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변치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가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인가가 전체의 기준이 돼 있어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전체가 그걸 원할 수 있는 기준이 돼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과 인연이 돼 있어야 자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과 상관관계, 연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런 기준이 되는 것은 몸이겠느냐, 마음이겠느냐? 이것은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람에게는 마음, 즉 양심이 있습니다.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 말을 하다가도 양심적이냐를 생각합니다. 이 마음은 어디에나 통합니다. 과거에도 통하고, 현재에도 통하고, 미래에도 통하고 영원합니다.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가 되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더 좋은 주체 앞에 대상이 되려고 합니다. 때로는 주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중심이 되려고 하고, 때로는 절대 중심 앞에 상대가 되려고 합니다. 마음은 그런 관계성을 언제나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혼자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전부 나누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자기 혼자만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사람에게 나눠주고 같이 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은 어느 나라, 어떠한 역사시대에서도 환영하게 마련입니다. 통하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을 자랑해야 하느냐? 마음을 가진 것을 자랑해야 됩니다. (162-38)
인간의 마음과 몸은 어디로부터 왔느냐
그러면 마음은 어디에서 왔느냐? 자랑할 수 있는 마음의 근원, 마음의 조상은 어디냐? 마음을 자랑하려면 아버지의 마음, 할아버지의 마음을 따라서 맨 근원적인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무엇을 자랑하려고 하느냐? 조상들 중에서 제일 멋진 분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 조상 가운데 제일 위대하고 제일 큰 분은 누구냐? 제일 자랑할 수 있는 근원 되는 분은 누구냐? 물론 우리 조상들이지만 결국 하나님에 귀결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원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려고 하는 대상의 위치에 있는 나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맨 근본 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 마음은 어디로 가느냐? 그 근본 된 존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곳에 연결됩니다. 이렇게 볼 때, 참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참된 신이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의 마음을 잡아당기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이지 않는 마음을 중심으로 이 우주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된 대표의 자리에 자기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조상도 하나고, 아무리 넓더라도 반드시 하나의 관계에 의해서 연결된 연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상호관계 속에서 떨어져 나가 자기에 대해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 자랑하려고 합니다.
마음은 맨 근본 된 하나님에게서 나왔는데 몸은 어디에서 왔느냐? 오관을 가지고 먹고 살고, 생리적 작용이라든가 생활하는 모든 것이 같은데, 이 몸은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을 따져 보면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들어가게 되고, 맨 나중에는 하나님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보이느냐? 몸은 보이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몸은 어머니 아버지, 인류 최초의 조상에게서 나왔습니다. 남자나 여자에게 당신 어디에서 왔소? 하고 물으면 우리 조상에게서 왔소 합니다. 조상에는 반드시 남자 여자,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어 있습니다. (162-40)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자랑할 수 있는 것
그러면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좋아할 수 있는 공통적인 분모가 무엇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나는 아버지에게서 왔다 하겠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와 관계되어 있는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만 주장하는 여자는 나는 할머니밖에 필요없다 하는 사람이고, 남자만 주장하는 남자는 난 할아버지밖에 필요없다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몸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해서 우리가 태어나게 되었느냐? 할아버지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냐? 서로가 세계에서 제일 자랑하고 싶을 만큼 제일 좋았던 것은 무엇이냐? 여자에게는 남자요, 남자에게는 여자입니다. 물론 남자는 남자를 자랑한다 하더라도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랑합니다. 그 다음에 그들이 하나돼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여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자랑하지 못한다면 아주 불행합니다. 여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자기보다 남자를 더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변하지 않는 공통성을 갖고 관계맺을 수 있고,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남자 여자가 서로 자랑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야, 이것 좋구나!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전체가 좋다 할 수 있고, 변치 않는 공통성을 지니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고 몸이 있습니다. 마음은 하늘과 연결되고 몸은 조상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 조상은 무엇으로 연결되느냐?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참사랑입니다. 그 참사랑은 뭐냐? 안팎이 같은 사랑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같고, 현재와 미래가 같습니다. 참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남자도 자랑하고, 여자도 자랑하고, 하나님도 자랑합니다.
사람은 아주 이해타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아이구, 나에게서 시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으니 좋지 않다 이럴 수 있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서 시작하면 난 싫다 하고, 여자도 남자에게서 시작하면 난 싫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남자, 여자 모두에게서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동기를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려니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3자회담을 해서 뿌리와 가까운 데다 갖다 놓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뿌리와 가까운 데다 사랑을 갖다 놓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더라도 이 사랑을 마음대로 못 가져갑니다. 아무리 여자가 조잘거려도 못 가져갑니다. 남자가 아무리 변덕이 많아도 못 가져갑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랑을 갖고 있으면 그 사랑 앞에는 하나님도 절대 복종합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못 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이 아담 해와에게 적용된다고 하지만 수천 대 뒤에 있는 남자 여자에게도 적용되느냐? 수천 대 뒤에 우리가 어떻게 아담 해와 자리에까지 갈 수 있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몸은 불가능하지만 마음은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순식간에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순식간에 미국에 갔다 올 수 있습니다. 전파보다 빠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수신장치입니다. 방송국에서 보내는 전파를 듣거나 볼 수 있는 수신장치인 라디오나 텔레비전과 같은 것이 마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방송국이라면, 그 방송국에서 보내는 것을 수신할 수 있는 수신장치는 마음입니다. (162-41)
자기가 귀하냐, 상대가 귀하냐
우리 인간에게는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무한한 하나님을 대신해서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고, 마음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모두가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부부라면 부부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여야 합니다. 그 말은 과거에도 하나되어 있어야 하고, 현재도 하나되어 있어야 하고, 미래에도 하나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부가 두 마음을 가졌다면 사탄세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입니다.
아내의 마음은 어떠한 남편을 사랑하려고 하느냐? 우주를 대표하고, 나라를 대표하고, 전체를 대표한 남편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돈을 대표하는 남편, 혹은 권력을 대표하는 남편, 지식을 대표하는 남편을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식이나 권력, 돈은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네가 지식이 있으니까 사랑한다 권력이 있으니까 사랑한다 돈이 있으니까 사랑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 공통적이 아니고 편파적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여자들 중에는 돈 잘 버는 남편을 사랑한다는 여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여자는 망합니다. 그런 사랑은 이 세계에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방해만 됩니다. 이 인류세계의 이상적 사랑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해야 하느냐? 먼저는 내가 마음을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마음은 가졌지만 몸이 없으면 사랑을 잡아둘 수 없고 사랑을 성립시킬 수 없기 때문에 몸을 가진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 몸을 가졌고 여자는 여자 몸을 가졌는데, 어떤 몸을 자랑할 것이냐? 남자는 남자의 몸을 자랑하려고 하고 여자는 여자의 몸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여자 몸을 아무리 혼자 자랑하더라도 하나님과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우주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남자가 남자 몸만을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 몸만을 사랑해서는 사랑의 세계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귀하냐, 상대가 귀하냐? 여자가 아무리 잘나고, 화장을 꽃과 같이 하고, 비단옷과 다이아몬드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남자가 없는 데서는 허깨비입니다. 남자도 아무리 똑똑하고 부족한 것 없이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여자가 없는 데서는 허깨비입니다. 그러니 남자가 남자 자기를 아무리 자랑하고 여자가 여자 자기를 아무리 자랑하더라도 그건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자기 상대가 있어서 같이 다니는 것은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하나돼 있는 그 자리에서는 하나님이 내가 제일이다. 대상 입장에 있는 아담 해와는 필요없다 이럴 수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하나님도 자신을 부정하고 아담 해와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 찬양합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대상권을 이루어 사랑이 움트면, 우주 앞에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세계는 물론이요 보이는 세계까지 자랑하고, 사람도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자랑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서야
하나님도 내 것이고 아담도 내 것이다, 해와도 내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자에게는 여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요, 여자에게는 남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세계의 모든 황금과 지식과 권력을 하늘땅까지 쌓아놓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여자가 이것으로만 좋아하겠습니까, 이걸 다 타고 넘어 남자를 더 좋아하겠습니까? 그 세 가지를 전부 버리고 남자를 찾아갈 것입니다. 만약 어떤 독재자가 나와서 60억 인류를 남자와 여자 절반으로 갈라 놓고, 여자는 남자를 못 찾아가게 하고 남자는 여자를 못 찾아가게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커집니다. 그 이상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자들이 매일 시위를 하겠습니까, 남자들이 매일 시위를 하겠습니까? 남자보다도 여자들이 매일 까악까악 까마귀 울듯이 시위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은 세상인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야, 내 앞에 남자 여자가 섞여 있는데, 난 다 필요없다 하면 안 됩니다. 그 남자가, 그 여자가 정말 귀하다는 것을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저렇게 남자가 귀하구나, 저렇게 여자가 귀하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62-44)
남자와 여자의 완성은 사랑을 찾지 않으면 안 돼
우리 인간은 돈을 갖고 좋아하다가 죽는 것보다도, 권력을 갖고 행사하다가 죽는 것보다도, 지식을 갖고 자랑하다가 죽는 것보다도 못살고 아무렇게나 살더라도 사랑하다가 죽는 것을 원합니다.
왜 그러냐? 사랑을 통해야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을 가지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님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귀합니다. 사랑하면 인류와 통하고, 사랑하면 하나님과 통하고, 과거․현재․미래와 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환영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도 역시 사랑 때문에 움직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한테 절대 필요한 것은 남자입니다. 그 남자는 잘난 남자입니다. 사랑의 안경을 끼고 있으면 좋지 않은 것이 없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못생겨도 멋있습니다. 음식도 그렇습니다. 잘생기고 고운 것은 그 안이 나쁘지만, 못생긴 것은 그 안이 좋습니다. 이렇게 모두 상대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인은 박복하고 변하기를 잘하지만, 호박처럼 못생긴 여자는 내적으로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양심도 아름답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여자가 세상을 지배하더라도 여자의 완성은 사랑을 찾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가장 귀중한 진리입니다. 진리가 다른 게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의 안테나가 있습니다. 남자에게도 사랑의 안테나가 있고, 여자에게도 사랑의 안테나가 있습니다. 마음도 마음이지만 이 몸의 안테나는 뭐냐? 안테나에는 플러스 마이너스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몸의 안테나가 인간의 생식기입니다. 그건 지성소입니다. 그러니 보호해야 합니다. 남자도 여자도 그 안테나를 절대 다른 사람이 만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결혼을 하는데, 왜 하느냐? 인간은 상대적인 안테나를 가졌기 때문에 상대를 찾아가야 그 안테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통하지 않으면 그 안테나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남자도 역시 여자를 통하지 않으면 그 안테나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서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높은 것을 상징하고, 여자는 깊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양적이고 여자는 음적입니다.
그러니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크면 클수록 남자를 찾아가고, 남자도 아무것도 모르지만 크면 클수록 여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 둘이 품으면 돌게 됩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돌게 되면 높은 데도 갈 수 있고 낮은 데도 갈 수 있고, 동에도 갈 수 있고 서에도 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아니고는 평등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의 색깔이 없이는 평등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162-46)
우주의 근본 진리
그러면 여자는 누구 때문에 태어났느냐? 여자 때문에 태어났느냐, 남자 때문에 태어났느냐? 남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남자도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여기에서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위하는 데에는 하나되고 자기의 소유권을 확대하는 천리의 원칙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못생겼다 하더라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여자의 마음을 자꾸 캐 들어가 보면, 그 마음 가운데서 참된 남자가 나옵니다. 그 남자가 자기 남편입니다. 그 참된 남자와 하나된 마음을 캐 보면 하나님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남자를 갖지 못한 아내는 참된 하나님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여자라도 참된 남자를 남편으로 삼지 못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떠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잘난 남자라도 그 남자의 불타는 마음속에는 아내가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랑을 찾아가느냐? 하나님에, 근본에 접촉하기 위해서 사랑의 길을 찾아갑니다. 내가 근본에서 나왔으니 이 길을 통하지 않으면 근본으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랑의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혼자서는 못 돌아가기 때문에, 상대와 연결하지 않고는 돌아갈 길이 없기 때문에 남자에게 여자가 있고 여자에게 남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사랑의 대상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그러니 부부가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찾아오고, 싸우면 싸울수록 하나님이 떠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그 자리는 온 우주가 옹호하고 보호합니다. 잘살려고 하지 않고 잘되려고 하지 않더라도 우주가 보호하고, 전부 다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근본 진리입니다. (162-48)
사랑 없이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똑바른 마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똑바른 몸을 자랑해야 합니다. 왜 몸을 자랑해야 하느냐? 몸이 없으면 사랑을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랑하고 몸을 자랑하고, 그 다음에는 뭘 자랑해야 하느냐? 자기 상대를 자랑해야 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자랑해야 하고, 여자는 남자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첫째는 하나님을 자랑해야 되고, 둘째는 마음을 자랑해야 되고, 셋째는 몸을 자랑해야 되고, 넷째는 사랑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가 사랑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도 사랑 없이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찾으려니 아담 해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 없이는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돼야 개인완성이 벌어집니다. 그 다음에 가정 하게 되면 아들딸이 나옵니다. 자녀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가정이 이루어집니다. 부모가 왜 필요하냐? 사랑 때문입니다. 자녀가 왜 필요하냐? 사랑 때문입니다. 부모는 위로부터 사랑을 이어받으려니 필요하고, 자식은 사랑을 전달하려니 필요합니다.
부모가 없으면 왜 슬프냐? 사랑을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에 슬픈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과거․현재․미래를 연결할 수 있는 종적 기반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친족, 씨족을 중심으로 국가와 세계로, 점점 더 큰 데로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자 여자에게 우주가 들어갑니다. 이런 작용을 합니다. 이런 작용을 무엇이 해주느냐?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종횡무진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남자라도 남자 혼자서는 안 됩니다. 여자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 여자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가 돌아갑니다. 남자 여자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역사가 돌아가고 올라갔다내려갔다 합니다. 사랑의 힘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그 집안을 관찰할 때에 세밀한 것까지 전부 다 관찰합니다. 높은 자리, 큰 자리에 있다고 해서 그 중앙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그래야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중심으로 화합하게 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입니다. (162-50)
이상적인 아내와 이상적인 남편이란 어떤 사람이냐
남자의 보물은 남자 자신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의 보물은 여자가 갖고 있고, 여자의 보물은 남자가 갖고 있습니다. 엇바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생식기는 여자의 것이 아니라 남자의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전부 자기가 갖고 있는 생리적 오관이 자기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고 단지 관리인일 뿐입니다. 관리인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주인은 남자고, 남자의 주인은 여자입니다.
결혼은 무엇이냐? 남자 여자가 서로 주인을 찾기 위한 것이 결혼입니다. 대기 중에서 음전기와 양전기가 서로 찾아다니다가 만나면 벼락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결혼하는 것은 남자 얼굴보다는 주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은 자기 주인을 찾기 위해서이므로 반드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아내, 이상적인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 이상적인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이상적인 남편은 아내가 원하는 것을 전부 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든 원하는 것을 다 해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편이 좋은 데로 간다면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대로 전부 해줘도 되지만, 나쁜 데로 간다면 죽을 각오를 하고 말려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 말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이 원하는 것을 하나에서 백까지, 좋은 의미에서 언제든지 거기에 순응하고 협조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개인에서 출발하여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세계 끝까지 가야 합니다. 남자 여자가 그렇게 되었다고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종적 관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에서 가정으로 벌어지고, 종족으로 벌어지고, 민족으로 벌어지고, 세계로 벌어지면서 퍼져 나갑니다. 몇 대에 걸쳐서 점점점 넓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을 많이 갖는 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아들딸을 많이 가져야 그 종족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은 가정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필요합니다. 가정이 없으면 우주와 박자를 맞출 수 없습니다. 사회와도 박자를 맞출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아내를 자랑하고 아들딸을 자랑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아내를 자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 남편을 자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아들딸을 자랑해야 됩니다. 그럴 때는 태양님이 옳소! 하고, 별님 달님이 옳소! 하고, 모든 주변이 옳소! 그렇고 말고! 합니다. 아들딸과 남편 아내 자랑하는 소리를 듣고 만물들은 좋습니다 하고 전부 쾡창쾡창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달 밝은 가을 날 밤에 조용한 동산에 올라가 보십시오. 모든 곤충들이 관현악을 연주합니다. 삑 하면 짹, 찍 하면 짹, 전부 다 박자를 맞춥니다. 이것은 곤충 한 마리가 장단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가 장단을 맞춰 관현악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그렇게 올라갔다내려갔다 합니다. 들어왔다나갔다 합니다. 또 커졌다작아졌다 합니다. 그게 이치입니다. 그러면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한 자리에서 전부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기를 좋아하는데, 거기에 가면 무슨 운동을 좋아하느냐? 올라갔다내려갔다 하면서 돌아가는 운동이나 밀었다젖혔다 하는 운동을 좋아합니다. 모든 면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런 운동을 하면서 흥분하는 것입니다. (187-75)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을 통해서 보면, 우리 한 개인은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도 갖고 있고, 종족․민족․국가․세계를 갖고 있고, 하늘땅을 전부 갖고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볼 때 내 개인은 사랑을 중심으로 전체 남자의 세계와 여자의 세계, 혹은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를 대표한 자입니다. 그걸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묶어집니다. (162-51)
앞으로는 결혼과 가정을 자랑해야
남자 여자끼리는 횡적 사랑밖에 안 되기 때문에 종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참된 사랑으로 하나님과 선생님을 중심으로 미래 후손들의 소망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참된 사랑의 부부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모를 통해서 결혼해야 합니다. 부모를 통해서 결혼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종적 사랑의 관계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 종적 사랑의 관계를 참부모가 나타나서 세계적으로 묶어줘야 됩니다.
그러므로 오색인종이 참부모를 찾아 세워야 미래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 결혼도 그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결혼과 가정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이상 원할 게 없습니다. 누구나 여기에 가담해야 합니다. 그래서 1천 쌍이 합하면 1천 가정이 되고, 1만 쌍이 합하면 1만 가정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종족이 되고 민족이 되고 국가가 됩니다. 이 원칙에 의해서 가정에서부터 종족․민족․국가․세계가 형성됩니다.
그러니 첫째는 하나님을 자랑하고, 둘째는 마음을 자랑하고, 그 다음에는 몸을 자랑하고, 그 다음에는 사랑을 자랑하고, 또 그 다음에는 가정을 자랑해야 됩니다. 세계에 이 이상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가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정이 필요한 것은 가정에서 종횡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이 없으면 안 되고, 부모가 없으면 안 됩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부모가 필요하고, 자식이 필요하고, 부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영계에 가나 어디에 가나 다 통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불합격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죽으면 그 아내가 우는 것도 거기에 불합격되기 때문이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가 우는 것도 거기에 불합격되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이 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불합격되기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 불합격된 것은 우주의 힘이 내몰기 때문에 그 내모는 힘에 의해서 슬픈 것입니다. (162-51)
사랑의 전통을 실천하는 통일교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위해서 살라는 원칙을 세운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남자 여자가 위해서 사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사는 것도 사랑 때문이며,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사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보면 미국 사람은 전부 불합격입니다. 1백 퍼센트 불합격입니다. 미국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까, 불행한 가정입니까? 불행한 가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전부 파괴하는 와중에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그러한 전통을 만들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전통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정을 중심으로 우리는 첫째 사상적인 면에서 자랑하고, 둘째 전통적인 면에서, 셋째 실천적인 면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사상에는 개인적인 사상과 세계적인 사상이 전부 연결돼야 합니다. 다르면 안 됩니다.
그것은 뭐냐? 사랑을 중심으로 결합된 전통입니다. 사상적으로 개인과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 전부는 그 원칙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깨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게 이상적입니다. 이 사상을 가지고는 통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개인도 통하고, 가정도 통하고, 우주도 통하고, 다 통합니다. 과거․현재․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중심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진리에 입각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상으로 하나님까지 해방해야 합니다. 이 사랑의 사상은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 종교 완성, 철학 완성, 이상국가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의 전통입니다. 개인의 전통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몸과 마음이 같은 입장에서 그런 전통을 받아 가정기준부터 세계기준까지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왔다갔다하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전통입니다. 원인에서 출발했으면 반드시 결과를 통해서 원인으로 돌아가는 운동을 합니다. 순환하는 전통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전통과 사상을 가지고 뭘 하느냐?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권에서 24시간을 전부 희생해야 합니다. 기뻐하면서 그렇게 하려고 해야 합니다. 눈을 뜨면 그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런 사상과 전통을 세우기 위해 봐야 합니다. 손을 놀리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전통과 사상을 완성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사랑을 중심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혼자 가더라도 하나님을 대신한 사상적 대표자요, 하나님의 전통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싫어할 수 없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그러므로 위해 사는 데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상대를 못 찾으면 사랑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위해야 됩니다. 이상적 기준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 상대, 가정 상대, 종족 상대, 국가 상대, 세계 상대가 필요합니다. (162-55)
7.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은 최고의 목적
행복이나 만족, 혹은 즐거움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전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없으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기쁨이나 행복은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고받는 자리에서만 행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로서 혼자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생활이 그렇듯이 하나님도 기쁨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짓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그도 나에게 돌려주는 이런 주고받는 데서 모든 인연과 관계가 성립됩니다. 인연이 있어야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를 통해서 색다른 진전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사람은 만족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은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이상은 무엇이냐? 물론 보고 좋아하는 것도 있겠고, 같이 살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그 최고의 목적은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보되 사랑을 통해서 보고, 살되 사랑을 중심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극과 사랑의 만족을 친히 대상을 통해서 맛보기 위해서 만물을 지었습니다. (59-293)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절대 대상
우리는 오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오관은 우리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다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오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면에서, 혹은 종적인 면에서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오관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오관이 나에게만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되는 하나님과 관계맺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직감, 혹은 직관까지도 나만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이념을 이어받아 관계를 맺어 서로서로 행복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기 때문에 그 주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상대는 인간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정한 양의 물을 담으려면 그만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 무한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입장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입장에서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지은 만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졌기 때문에 만물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인간은 모순되고 상충되는 자리에서 주고받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그 깊은 사랑까지도 무한히 받고, 또 무한히 돌려줄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라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그러한 사랑의 주체 되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이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행복한 자리는 혼자 기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다 기뻐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 관계되어 있는 환경까지 기쁨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 전체는 행복한 환경으로 화합니다. 그러한 행복한 환경이 연결되어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지은 온 피조세계가 일원화되어야 이상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나 결국 같은 사랑의 인연 가운데 있게 됩니다.
태양 빛을 받는 세계는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세계도 밝은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나님이 이상 하던 지상천국이요, 이것을 연결한 것이 천상천국입니다. (59-294)
좋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는 언제나 주는 것이 있으면 돌려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일방적이어서는 관계가 계속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고받아야 합니다.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것이 넓으면 넓을수록, 혹은 굵으면 굵을수록 행복을 잴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잘 주고 잘 받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점점점 차원을 높여 갈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생활에서도 통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내용까지도 연결됩니다. 나와 상대가 일체 되는 자리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크고 넓고 높을수록 그는 내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친구면 친구일 것이고, 혹은 가정이면 가정일 것입니다. 그 기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남아집니다. 그것이 일시에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대돼 무한한 행복의 경지에까지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정이 잘되면 일시적으로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영원히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 부모가 잘되면 자녀도 역시 잘되기를 바라고, 그 후손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연결되어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도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행복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유형세계뿐만 아니라 무형세계, 영원한 세계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59-296)
천운은 상대적인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세계에서 상대적인 인연을 갖지 않은 것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운은 상대적인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세계의 철칙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비중에 해당하는 우주적인 반대의 힘이 작용합니다. 열만한 상대를 갖추었다면 거기에 열만한 천운이 옹호합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운행합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상대세계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반대되든가 결함이 생길 때, 천운은 그 분량만큼의 반대 입장에서 몰아냅니다.
이렇듯 사랑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를 두고 보면, 그 남자 여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비로소 그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완전히 사랑으로 주고받게 되면 이상적인 부부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주의 힘은 그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지만 그 사랑이 결여되면 반드시 결여된 분량만큼 반대로 몰아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슬프게 되는데, 왜 슬프냐? 왜 가슴이 아프고,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느냐? 자기가 고통을 느끼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자신이 그 사람을 슬픈 동기나 요인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거나 스스로 어떠한 자극적인 내용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이 우주의 원칙이 완전한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된 것을 옹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탈되면 천운이 반작용으로 몰아내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공법에 불합격자가 되면 같은 자리에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서 천운은 반대의 작용으로 몰아냅니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이상적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슬픔은 우주의 힘이 자신을 몰아낼 때 느껴집니다.
부자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완전히 사랑으로 주고받는 자리, 부부가 사랑으로 완전히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남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여자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남자가 남자만 위해서 있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59-297)
사랑이란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부모는 이래야 된다는 어떠한 고착된 관념을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는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을 망각한 자리에서, 그 이상의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그러한 사랑으로 자식을 대합니다.
부모에게 있는 사랑은 부모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라고 부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대를 위해서 있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인 자기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이상 존중하는 데에서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말과 통합니다. (59-298)
이상 일체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
나는 사랑의 이상 자리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면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태어난 목적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주체적 존재로서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이념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적이 있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인 동시에 절대자입니다. 그러면 절대자가 자기의 권한과 더불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찾으려 할 때 그가 가진 모든 권한, 가치, 대상을 추구하는 사랑, 이런 것을 인간에게 완전히 주어 본 적이 있느냐? 만일 그랬다면 사랑을 주고받는 그 자리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사람 하면 남녀를 말합니다. 그 남녀가 하나되어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그 모양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모양과 여자의 모양이 뒤범벅이 되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이상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일신이라는 것은 이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이란 뭐냐? 행복입니다. 행복은 뭐냐? 기쁨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이상실현은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된다는 것은 사랑을 중심으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지, 그 상대권을 중심으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이상의 일체라는 말을 합니다. 이상의 일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얼굴이 다른 남자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외모가 잘나고 못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상 일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없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에게 우리 인간이 둘도 없는 상대자라면 절대자인 하나님이 완전히 기쁠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 되는 인간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59-299)
절대자 하나님 앞에는 상대도 절대적이다
타락이라는 것은 탈락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미완성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을 이룬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결여된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대해 아이구! 사랑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작가가 1백 퍼센트 완전한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었는데 90퍼센트밖에 안 되는 작품이 나왔다면 10퍼센트의 미련이 남습니다. 그것을 더해야만 완성한 기준에서 아이고 기쁘다! 하며 그야말로 행복하고 만족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90퍼센트 완성했다면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랑은 할 수 있지만 1백 퍼센트의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99퍼센트라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1백 퍼센트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 인간 완성을 중심한 그 자리, 완전한 주체가 이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 주체로서 그러한 대상을 맞아야 합니다.
본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졌는데, 그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된 환경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백이 되기를 바랐는데 90밖에 안 되었다 할 때는 기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학교 다닐 때 나는 시험을 치르면 틀림없이 1백점 맞는다. 맹세코 1백점 맞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1백점을 못 맞고 99점, 혹은 99.999점을 맞았다면 그걸 자랑할 수 있느냐? 1백점과 같은 수준이지만 손을 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자일수록 절대적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그야말로 좋아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기를 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으로 이 자리야말로 행복의 자리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이 이 사람이 있음으로써 빛난다. 기분 좋다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었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었느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59-300)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나타났다면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겠느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최고의 감성으로 표현한 그 자리를 넘어선 미(美)의 상징체였을 것입니다.
자기 내정의 그리움이 자극적인 미로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을 것이고 찬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가지를 가지고도 자기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 기쁨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물건은 죽을 때까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념물이 됩니다. 손수건 하나도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본연의 인간을 대해 이는 내 전체의 창조이념을 걸고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고, 기쁨의 표시를 해도 끝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코를 보나 귀를 보나 얼굴을 보나, 뒤를 보나 앞을 보나, 전신의 어떠한 부분을 보더라도 그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권에 동화되어 사랑이 어떻더냐? 할 때,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라고 증거할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 우리 인간의 사지백체는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인간에게는 불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바라보고 기뻐하면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있으니 이 손은 아름다운 손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거울에 비치는 내 몸은 하나님이 완전히 취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1백 퍼센트의 합격품으로 등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자극할 수 있는 소망의 지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겠느냐? 그런 자기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얼굴이지 하면서 그 얼굴의 존귀함과 가치성이 배가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이 우주 창조 이후에 나타났다면 얼마나 이상적이었겠습니까? 성경의 시편이나 아가서에서 사랑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심정으로 시편과 같은 노래를 하고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기록을 남겼다면 얼마나 멋졌겠습니까? 그것이 인간 사랑의 표준이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정서생활의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오늘날 인간은 불행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59-301)
하나님의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는 어떠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에서의 권력은 사랑을 보다 강하게, 보다 빛나게, 보다 폭넓게, 보다 높게 뒷받침하고 밀어주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행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나 모든 것은 사랑이 가는 길 앞에 즐거움이 되도록 뒷받침해주는 힘이 될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가진 절대적인 모든 권한이 깃들어 있습니다. 영원성과 무한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길을 제한하고 막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입체적인 자극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일체화시키기 위한 요소로 작용할 뿐이지, 방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조상 가운데 남자 대표로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남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또 남자는 그런 사랑을 못 받았지만 여자로서 그러한 사랑을 받은 대표자가 있다면 그 여자도 자랑할 만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맹세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고독하게 살더라도 사랑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완성한 이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느끼는 자극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그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작이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전통은 역사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의 주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59-303)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루게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를 바랍니다. 그런 세계가 되려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주관하느냐?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과 얼마만한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느냐? 우리가 사랑으로 일체화된 경지에서 병자를 붙들고 기도를 하면 병이 낫습니다.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의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같이합니다. 사랑 이상을 들고 나오는 상대의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상대해주는 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인 경지에 들어가 붙들고 기도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내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그 애절한 심정 이상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내가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의 생명 이상의 자극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위할 수 있는 동기를 어떻게 갖느냐? 그렇게만 되면 말 한마디에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인연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런 경지가 되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하니 병이 낫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놓고 그 나라의 모든 충신들이 아파하는 이상 염려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 나라의 운을 좌우합니다. 이렇듯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사랑으로 고차적인 진전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종교인들은 이 세상의 비종교인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입체적인 감정의 세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생명을 버리더라도 그 절개와 전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순교의 길입니다. (59-323)
하나님이 복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현실에 고착된 생활을 하면서 신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사랑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 어린 손으로 안아주고, 사랑 어린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과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이루어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타고난 생애 최대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를 통해서 이룰 가능성이 있다면 저를 세워주시옵소서. 천만 배의 수난길을 가더라도 가겠사오니 저를 세워주시옵소서.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평화로운 하나님을 보고 싶다. 종족을 치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천하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나님의 주관권에서 그야말로 이상이요 만족이요 행복의 최고 절정에서 살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관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볼 수 없겠거든,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하며 그 책임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천신만고 수고의 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옥을 면하게 하여 천국이 아닌 제2차적인 세계에라도 틀림없이 데려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못 되면 그런 사람을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볼 수도 없다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불쌍한 분이기 때문에 나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어떤 조건이라도 세우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그래도 하늘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거기에서 하늘의 주관권, 하늘의 이상권이 연결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그러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 왔지만 사랑을 못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원한의 구렁텅이를 메워드리고, 그 이상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지 않고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못 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치리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내 일생의 소원이다. 지상천국,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자랑하고, 모든 동물이나 미물까지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주관주, 만물의 주인공을 보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삼고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이 세계가 하나님의 주관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길을 닦자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 희생해야 합니다.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된 효자가 나오고,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된 충신이 나옵니다. 아무리 70년 80년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생명을 바친 젊은 충신보다는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그러한 희생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배가의 희생을 치러 왔습니다. 우리가 자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모실 수 있는 이상적인 이 주관권을 확대하는 것이 하나님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통일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민족이 가려 가야 할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안고 기도해야 되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주고, 하나님의 주관권의 환경과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만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가 됩니다. (59-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