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사랑이야기 - 제 2권 사랑 원론편 - 제 1장 하나님의 사랑)

무지... | 20180508071745

7. 하늘이 주관하는 세계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은 최고의 목적
  
행복이나 만족, 혹은 즐거움을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전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없으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기쁨이나 행복은 상대적인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고받는 자리에서만 행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자로서 혼자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생활이 그렇듯이 하나님도 기쁨의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짓게 된 것은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남에게 주었으면 그도 나에게 돌려주는 이런 주고받는 데서 모든 인연과 관계가 성립됩니다. 인연이 있어야 관계가 맺어지고, 그 관계를 통해서 색다른 진전이 이루어집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사람은 만족을 느끼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은 이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 이상은 무엇이냐? 물론 보고 좋아하는 것도 있겠고, 같이 살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그 최고의 목적은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보되 사랑을 통해서 보고, 살되 사랑을 중심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사랑의 자극과 사랑의 만족을 친히 대상을 통해서 맛보기 위해서 만물을 지었습니다. (59-293)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절대 대상
  
우리는 오관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오관은 우리만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다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오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면에서, 혹은 종적인 면에서 반드시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오관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오관이 나에게만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 되는 하나님과 관계맺게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모든 직감, 혹은 직관까지도 나만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대이념을 이어받아 관계를 맺어 서로서로 행복할 수 있는 내적 인연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기 때문에 그 주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상대는 인간 외에 또 다른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일정한 양의 물을 담으려면 그만한 양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그 무한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사랑을 가진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입장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도 남음이 있는 입장에서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지은 만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로 지어졌기 때문에 만물 가운데서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한하고 지고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인간에게 임하게 될 때, 인간은 모순되고 상충되는 자리에서 주고받게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원히 그 깊은 사랑까지도 무한히 받고, 또 무한히 돌려줄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라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도 그러한 사랑의 주체 되는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상대적인 입장이 될 때, 비로소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행복한 자리는 혼자 기뻐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이 다 기뻐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거기에 관계되어 있는 환경까지 기쁨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 전체는 행복한 환경으로 화합니다. 그러한 행복한 환경이 연결되어 인간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지은 온 피조세계가 일원화되어야 이상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나 결국 같은 사랑의 인연 가운데 있게 됩니다.
태양 빛을 받는 세계는 밝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세계도 밝은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하나님이 이상 하던 지상천국이요, 이것을 연결한 것이 천상천국입니다. (59-294)
  
  
좋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간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는 언제나 주는 것이 있으면 돌려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일방적이어서는 관계가 계속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주고받아야 합니다. 주고받는 데 있어서 그것이 넓으면 넓을수록, 혹은 굵으면 굵을수록 행복을 잴 수 있는 기준이 됩니다. 그러므로 잘 주고 잘 받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점점점 차원을 높여 갈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됩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생활에서도 통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내용까지도 연결됩니다. 나와 상대가 일체 되는 자리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크고 넓고 높을수록 그는 내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친구면 친구일 것이고, 혹은 가정이면 가정일 것입니다. 그 기간이 오래면 오래일수록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남아집니다. 그것이 일시에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확대돼 무한한 행복의 경지에까지 연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이 일시적으로 좋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것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가정이 잘되면 일시적으로 잘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영원히 잘되기를 바랍니다. 그 부모가 잘되면 자녀도 역시 잘되기를 바라고, 그 후손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연결되어 나라가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도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행복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연결되어 유형세계뿐만 아니라 무형세계, 영원한 세계에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은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59-296)
  
  
천운은 상대적인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존재세계에서 상대적인 인연을 갖지 않은 것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천운은 상대적인 인연을 옹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존재세계의 철칙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공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비중에 해당하는 우주적인 반대의 힘이 작용합니다. 열만한 상대를 갖추었다면 거기에 열만한 천운이 옹호합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운행합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상대세계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 반대되든가 결함이 생길 때, 천운은 그 분량만큼의 반대 입장에서 몰아냅니다.
이렇듯 사랑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를 두고 보면, 그 남자 여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비로소 그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 기쁨의 대상이 됩니다. 완전히 사랑으로 주고받게 되면 이상적인 부부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주의 힘은 그들을 보호하고 옹호하지만 그 사랑이 결여되면 반드시 결여된 분량만큼 반대로 몰아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살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죽으면 슬프게 되는데, 왜 슬프냐? 왜 가슴이 아프고,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을 느끼느냐? 자기가 고통을 느끼려고 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자신이 그 사람을 슬픈 동기나 요인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거나 스스로 어떠한 자극적인 내용을 추구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그렇게 느껴집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이 우주의 원칙이 완전한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된 것을 옹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탈되면 천운이 반작용으로 몰아내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공법에 불합격자가 되면 같은 자리에 존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 원칙을 옹호하기 위해서 천운은 반대의 작용으로 몰아냅니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이상적 기준을 성립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슬픔은 우주의 힘이 자신을 몰아낼 때 느껴집니다.
부자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과 부모가 완전히 사랑으로 주고받는 자리, 부부가 사랑으로 완전히 주고받는 자리에서 이상이 벌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남자가 존재하는 것은 남자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여자도 여자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남자가 남자만 위해서 있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59-297)
  
  
사랑이란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부모는 자식을 '부모는 이래야 된다'는 어떠한 고착된 관념을 가지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에서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기를 부정하는, 즉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는 부모의 권한을 가지고 언제나 당당한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권한을 망각한 자리에서, 그 이상의 자리에서 자식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그러한 사랑으로 자식을 대합니다.
부모에게 있는 사랑은 부모 자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위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라고 부모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상대를 위해서 있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은 자식인 자기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위해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자기 이상 존중하는 데에서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상대를 위해 태어났다는 말과 통합니다. (59-298)
  
  
이상 일체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
  
나는 사랑의 이상 자리를 추구하는 자리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태어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면 사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태어난 목적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말은 주체적 존재로서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이념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은 적이 있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인 동시에 절대자입니다. 그러면 절대자가 자기의 권한과 더불어 지니고 있는 속성을 찾으려 할 때 그가 가진 모든 권한, 가치, 대상을 추구하는 사랑, 이런 것을 인간에게 완전히 주어 본 적이 있느냐? 만일 그랬다면 사랑을 주고받는 그 자리는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사람' 하면 남녀를 말합니다. 그 남녀가 하나되어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그 모양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의 모양과 여자의 모양이 뒤범벅이 되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된다는 것은 이상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일신이라는 것은 이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이란 뭐냐? 행복입니다. 행복은 뭐냐? 기쁨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이상실현은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된다는 것은 사랑을 중심으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지, 그 상대권을 중심으로 일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이상의 일체라는 말을 합니다. 이상의 일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은 얼굴이 다른 남자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외모가 잘나고 못난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상 일체라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 없는,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된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에게 우리 인간이 둘도 없는 상대자라면 절대자인 하나님이 완전히 기쁠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 되는 인간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59-299)
  
  
절대자 하나님 앞에는 상대도 절대적이다
  
타락이라는 것은 탈락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미완성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기준에서 어떤 이상적인 완성을 이룬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결여된 자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대해 '아이구! 사랑하고 싶다' 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작가가 1백 퍼센트 완전한 작품을 구상하고 만들었는데 90퍼센트밖에 안 되는 작품이 나왔다면 10퍼센트의 미련이 남습니다. 그것을 더해야만 완성한 기준에서 '아이고 기쁘다!' 하며 그야말로 행복하고 만족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90퍼센트 완성했다면 90퍼센트에 해당하는 사랑은 할 수 있지만 1백 퍼센트의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99퍼센트라 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엔 1백 퍼센트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최고의 자리, 인간 완성을 중심한 그 자리, 완전한 주체가 '이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하는 자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느냐? 주체로서 그러한 대상을 맞아야 합니다.
본래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을 가졌는데, 그 소원을 이룰 수 없게 된 환경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1백이 되기를 바랐는데 90밖에 안 되었다 할 때는 기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학교 다닐 때 '나는 시험을 치르면 틀림없이 1백점 맞는다. 맹세코 1백점 맞는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1백점을 못 맞고 99점, 혹은 99.999점을 맞았다면 그걸 자랑할 수 있느냐? 1백점과 같은 수준이지만 손을 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자일수록 절대적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해 그야말로 좋아서 만면에 희색을 띠고 자기를 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으로 '이 자리야말로 행복의 자리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이 이 사람이 있음으로써 빛난다. 기분 좋다'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이 있었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었느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59-300)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나타났다면
  
그러면 타락하지 않고 완성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겠느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이 최고의 감성으로 표현한 그 자리를 넘어선 미(美)의 상징체였을 것입니다.
자기 내정의 그리움이 자극적인 미로 나타났을 때,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기뻤을 것이고 찬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한 가지를 가지고도 자기 사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고, 자기 기쁨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물건은 죽을 때까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기념물이 됩니다. 손수건 하나도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본연의 인간을 대해 '이는 내 전체의 창조이념을 걸고 사랑의 마음을 표시하고, 기쁨의 표시를 해도 끝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코를 보나 귀를 보나 얼굴을 보나, 뒤를 보나 앞을 보나, 전신의 어떠한 부분을 보더라도 그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찬양할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권에 동화되어 '사랑이 어떻더냐?' 할 때, '이렇게 행복한 것이다'라고 증거할 수 있는 실체대상으로서 우리 인간의 사지백체는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선 인간에게는 불행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손을 바라보고 기뻐하면 그 기쁨을 내가 느낄 수 있으니 이 손은 아름다운 손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거울에 비치는 내 몸은 하나님이 완전히 취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1백 퍼센트의 합격품으로 등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자극할 수 있는 소망의 지체라고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어떻겠느냐? 그런 자기 자신을 보고 얼마나 만족하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아내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얼굴이지' 하면서 그 얼굴의 존귀함과 가치성이 배가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이상인 사랑의 실체가 이 우주 창조 이후에 나타났다면 얼마나 이상적이었겠습니까? 성경의 시편이나 아가서에서 사랑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기쁨의 심정으로 시편과 같은 노래를 하고 아가서와 같은 사랑의 기록을 남겼다면 얼마나 멋졌겠습니까? 그것이 인간 사랑의 표준이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정서생활의 전통이 되고 역사가 되었으면 오늘날 인간은 불행하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59-301)
  
  
하나님의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
  
이런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는 어떠한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 세계에서의 권력은 사랑을 보다 강하게, 보다 빛나게, 보다 폭넓게, 보다 높게 뒷받침하고 밀어주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행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나 모든 것은 사랑이 가는 길 앞에 즐거움이 되도록 뒷받침해주는 힘이 될 뿐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가진 절대적인 모든 권한이 깃들어 있습니다. 영원성과 무한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길을 제한하고 막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입체적인 자극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일체화시키기 위한 요소로 작용할 뿐이지, 방해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행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 인간조상 가운데 남자 대표로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남자는 자랑할 만합니다. 또 남자는 그런 사랑을 못 받았지만 여자로서 그러한 사랑을 받은 대표자가 있다면 그 여자도 자랑할 만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랑은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맹세했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고독하게 살더라도 사랑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내정적인 심정의 인연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 완성한 이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느끼는 자극은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합니다. 그 사랑의 자극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시작이 전통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전통은 역사를 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는 힘의 주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59-303)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루게 한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를 바랍니다. 그런 세계가 되려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주관하느냐? 사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과 얼마만한 거리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느냐? 우리가 사랑으로 일체화된 경지에서 병자를 붙들고 기도를 하면 병이 낫습니다.
죽어 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 이상의 마음으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같이합니다. 사랑 이상을 들고 나오는 상대의 요구에 대해서는 언제나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 상대해주는 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러한 심정적인 경지에 들어가 붙들고 기도하면 안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아내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것을 바라보는 남편의 그 애절한 심정 이상의 심정을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내가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람의 생명 이상의 자극을 가지고 사랑의 마음으로 위할 수 있는 동기를 어떻게 갖느냐? 그렇게만 되면 말 한마디에 병도 나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사랑의 인연으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런 경지가 되면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같이하니 병이 낫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의 운명을 놓고 그 나라의 모든 충신들이 아파하는 이상 염려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면, 그 사람의 기도는 그 나라의 운을 좌우합니다. 이렇듯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사랑으로 고차적인 진전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종교인들은 이 세상의 비종교인들이 갖지 못한 새로운 입체적인 감정의 세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생명을 버리더라도 그 절개와 전통을 남기려고 하는 것이 순교의 길입니다. (59-323)
  
  
하나님이 복을 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러면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현실에 고착된 생활을 하면서 신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비로소 사랑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사랑 어린 손으로 안아주고, 사랑 어린 마음으로 그러한 사람과 함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24시간 우리와 같이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이루어 그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타고난 생애 최대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를 통해서 이룰 가능성이 있다면 저를 세워주시옵소서. 천만 배의 수난길을 가더라도 가겠사오니 저를 세워주시옵소서.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평화로운 하나님을 보고 싶다. 종족을 치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천하를 주관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 하나님의 주관권에서 그야말로 이상이요 만족이요 행복의 최고 절정에서 살 수 있는 세계를,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관하는 그 세계를 보고 싶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볼 수 없겠거든,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고 하며 그 책임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천신만고 수고의 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옥을 면하게 하여 천국이 아닌 제2차적인 세계에라도 틀림없이 데려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못 되면 그런 사람을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볼 수도 없다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불쌍한 분이기 때문에 나라도 그 길을 가겠다는, 어떤 조건이라도 세우겠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는 그래도 하늘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거기에서 하늘의 주관권, 하늘의 이상권이 연결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그러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로 왔지만 사랑을 못 받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원한의 구렁텅이를 메워드리고, 그 이상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지 않고 신부를 맞아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못 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 살아야 되겠다.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치리하면서 사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위해서 살아야 되겠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내 일생의 소원이다. 지상천국, 사랑의 세계를 이루어 자랑하고, 모든 동물이나 미물까지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주관주, 만물의 주인공을 보고 싶다'고 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것을 소망으로 삼고 보고 싶어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 길이 신앙길입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이 세계가 하나님의 주관권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의 길을 닦자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권으로 가기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 희생해야 합니다.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된 효자가 나오고, 생명을 바치고 나서야 참된 충신이 나옵니다. 아무리 70년 80년 고생을 했다 하더라도 생명을 바친 젊은 충신보다는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그러한 희생이 없었기에 하나님이 배가의 희생을 치러 왔습니다. 우리가 자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모실 수 있는 이상적인 이 주관권을 확대하는 것이 하나님 세계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통일교인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 민족이 가려 가야 할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안고 기도해야 되고, 민족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해주고, 하나님의 주관권의 환경과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으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만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가 됩니다. (5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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