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참된 자녀의 도리(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4 장 참된 자녀의 도리)

무지... | 20180429080557

6. 참된 자녀의 도리
              
새로운 한날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책임
     
하나님은 무한히 불쌍한 분입니다. 죄악의 자식을 품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거북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죄악된 아들딸들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와서 찢기고 상처받고 몰리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통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갈기갈기 찢겨 상처가 났습니다. 민족이 쓰러지고 새로운 민족이 이루어지는 그때마다,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도 제외됨이 없이 하나님의 심정의 곡절이 스며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심정을 가진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결탁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한히 슬펐던 하나님을 알고, 무한히 고통스러웠던 하나님을 알고, 무한히 분하고 억울했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느냐? 인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슬픈 하나님임을 알고 그런 하나님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아버님이여, 당신의 슬픔을 제게 지워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안 지워주면 빼앗아서라도 져야 합니다.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지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님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아버님의 억울함이 내 억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딸이 몇 명이나 되느냐? 전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고 편안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적입니다. 할 것 다 해야 천국 가고, 할 것 다 해야 복을 받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 천국 가려 하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강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을 인계받는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왕자였습니다. 죽음을 홀로 인계받은 왕자였기에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쓰러졌지만 부활의 권한으로 다시 살아남으로써 사망권을 지배할 수 있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숨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이 몇 번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물, 피, 감정에는 예수님의 모든 오관의 감정이 어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울어본 자, 고통받은 자, 간장이 녹아본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그런 습관적인 신앙 갖고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신앙은 그런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마음과 몸을 합하여 하나님이 진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는 사람이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은 사탄이 우습게 알지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하는 사람은 사탄이 제일 무서워합니다. '하나님, 제가 억울함을 당하지요' 할 때 사탄은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 성도에게는 반드시 환란이 옵니다. 하나님이 참아나온 고비고비의 곡절을 비롯하여 억울함과 배반과 배척과 몰림과 죽음과 역사상의 피어린 모든 흔적이 우리를 휩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일편단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이 심정을 누가 지배하겠습니까? 아버지와 나와의 심정적인 인연을 누가 끊겠습니까? 사탄의 권세가? 어림도 없습니다. 사망의 권한도 어림없습니다. 이 심정을 무엇이 지배할소냐! 이것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최후의 심판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만 하나님과 인류가 찾고 있는 새로운 한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슬픔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더불어 심정적으로 결탁된 이 마음을 누가 점령할소냐. 사탄세계의 사망권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피의 곡절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그 무엇도 다 오너라. 세기말적인 공포나 7년 대환란아 전부 다 한꺼번에 몰아쳐와라. 난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런 것 가지고 날 점령하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 심정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승리의 기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세계에서 이러한 뜻을 위하여 싸워오신 아버지시여! 이 사망세계에서 어느 한날 이러한 아들딸을 만나 위로받으셨습니까? 위로를 받지 못하신 아버지시여! 오늘 제가 위로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날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세계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위로해드리는 아들딸이 돼야 한다
     
하나님의 슬픔은 뭐냐? 진짜 하나님이 6천년간 슬퍼한 것을 알았느냐? 얼마나 하나님이 아픔을 느끼고 나오셨느냐? 사랑의 세계가 한번 틀어져 버리면 천년 만년 잊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니냐? 시일이 가면 갈수록, 반대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느냐?
원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일시에 자기 족속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참소하고,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얼마나 상처가 심했겠느냐? 그 슬픔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찾아나온 것은 오늘날 나 하나를 위해서입니다. 나 하나의 해방을 위해서 역사의 수난길을 걸어나왔고 현재의 수난길을 거치며 일편단심 미래의 소원을 품고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그 슬픔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사랑해봤느냐?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 그 권위와 위치를 생각할 때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아내가 대통령에 대해서 '저 대통령을 내가 남편같이 사랑한다' 할 때 그 대통령은 일방적이라 기분 나쁠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거늘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타락한 인간은 역적의 피를 받았습니다. 역적의 후예입니다. 역적의 피를 받은 것을 극복해야 하는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내용을 가졌느냐?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 것이냐? 개인을 위해서 흘렸고, 가정을 위해서 흘렸고, 종족․민족․국가․세계로 발전시킬 때까지 기반을 닦아나오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원하였던 것은 모든 것의 대표자인 하나의 완전한 남자요, 완전한 여자입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신랑 신부라는 말을 여기에 귀결시켰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의 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상 되는 아들과 해와 이상 되는 딸을 찾기 위해서 눈물지었습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수난길을 걸어나온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이 소원하던 아들이 이렇고 딸이 이렇지 않느냐고, 세상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그러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길을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아버지!' 하며 자신을 망각한 자리에서 옷깃을 붙들고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날에는, 하나님도 진짜 그를 붙안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건 진짜 이 땅 위에 나라를 가졌던 주권자가 나라가 망해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입니다.
     
     
참된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수난길을 가야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린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천주가 망한 것과 같습니다. 개인 아들딸이 망하고, 자기 가정이 망하고, 자기 국가가 망하고, 세계가 망하고, 천지가 망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래서 망명객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망명자입니다.
그 나라의 망명객, 즉 쫓겨난 군왕은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치고 백성을 끌고 가는 자와 하나되기를 원하겠느냐, 데모하는 걸 원하겠느냐? 목이 잘려나가더라도 하나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흘려나왔습니다. 아무리 피를 흘리더라도 한탄하지 말고, 피를 흘리더라도 선전하라, 그런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4백년 압박시대에도 망명객의 입장에 있는 하나님이 악한 세계의 주권에 대항하는 그날들은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자극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반대하고 나서면 나설수록, 투쟁하면 투쟁할수록 그것은 내일의 소망을 촉구시켜 주는 자극적인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순교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위로하면서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응당 가야 될 길로 갑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욕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는 요렇게 죽기 때문에, 나는 요렇게 하나님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나를 천국 보내주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고 아버지의 아들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죽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 역사와 반대로 나가면 하나님 앞에 배척받습니다.
복귀시대에는 하나님이 피땀을 흘리며 수고할 때가 있지만, 언제나 수고와 희생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는 내쫓기고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 인간을 구해주었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을 위한 수난길을 인간이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위하여 가는 아버지의 짐을 대신 져야 합니다. 그래야 효자입니다. 군왕이 가고 있는 수난길을 책임져야 충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우리 아들딸 복 주소' 이렇게 기도하는 데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기도하면 뒤로 돌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종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는 복이 필요없습니다. 복은 세계 사람에게 주시고, 저에게는 사망을 주시옵소서. 죽을 자리를 주시옵소서' 이게 참된 아들딸이 갈 길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고,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딸 잘살게 해 달라고 하고, 자기 아들딸 사랑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기도를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북한에서 공산당한테 살해당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분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 영계를 통해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는 희생해왔습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전통을 따라나오기 위해서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나라를 생각하고,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해봤느냐? 슬픈 하나님을 얼마나 위로해봤느냐? 머리를 들고 엉덩이를 젓고 다니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눈을 깜박깜박하며 옆으로 빠지고 뒤로 빼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슬픔을 떠안기 위해서 민족의 한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나라에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길을 위해서 선발대로서 죽음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당당한 각오가 돼 있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부자(父子)의 관계였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6천년 동안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부자관계를 맺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요 조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위신과 체면까지 세워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완전히 맺어야 되는 것은 천륜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어떤 한 분이 이 일을 먼저 완수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분을 만나 하나님을 부모로 모셔놓고 하나님의 서러움을 우리의 서러움으로,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하나님의 억울함을 우리의 억울함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무치게 호소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맺어지지 않았고, 천륜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입장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과 내용을 알아야 하고, 사탄의 진상을 확실히 밝혀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 예약만으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는 필요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아버지의 뜻을 위하고, 뼈살이 녹아나는 고통 속에서도 참고 승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위신과 체면을 세워드리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고개를 넘은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까지도 능히 넘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6천년 동안 하나님의 천국이념을 배반해나온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누구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려하는 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친의 사랑이 제일 큰 줄 알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깊으며,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의 사랑보다도 깊고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아버지의 서러움을 제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체휼하는 참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소유한다면 그 천국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가 책임지고 풀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사실에 대해 분개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을 괴롭혀 온 사탄에 대해 분개심을 품었고, 4천년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도 넘어가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뜻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들까지 끌고 가서 역사와 현실을 새롭게 한 후 '아버지여, 제가 당신의 고통을 책임지고 있사오니 염려 마시옵고 섭리의 고통을 푸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천상과 천하를 통하여 느끼는 고통까지도 함께 느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담당해 나오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골고다의 죽음길로 내몰 때, 예수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을 품은 하나님에 대하여 도리어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붙들고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도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천국을 이루어나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나가는 길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울려본 사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울려본 때가 있습니까? '오냐, 내가 갔던 길을 네가 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오냐, 서러운 나를 찾아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아무개야?' 하고 통곡하던 아버지를 붙들고 몸부림친 적이 있고, '아무개야!' 하고 울던 예수님의 손길을 붙든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조롱받고 배척받던 사람들이 천국세계의 왕자가 될 수 있고 공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다 잃어버리더라도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그리워하며 생활을 해명하고, 교회를 해명하고, 사회를 해명하는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자기가 지옥 가겠다 해도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갑니다. 
우리는 감히 아버지를 부르는 것조차 황공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황공스러워야 합니다. '아버지, 감히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른 말이 필요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하여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님!' 할 때 거기에서 우주의 소유권이 결정되어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죽는 한이 있고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겨주고 싶은 말은, 민족을 넘고 인류를 넘고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고대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주와 지옥권까지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역사 속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를 붙들고 싸우던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발판으로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과 망동이 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역사의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시대의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미래의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저의 뜻입니다. 핏줄을 잊지 못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제 아버지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나와 더불어 살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 사탄이 웬말이냐? '이놈, 사탄아! 너는 이 천지간에 발붙일 곳이 없다'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심정의 주인공, '사탄아, 악의 세력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라' 하며 호령할 때에 사탄이 머리를 숙이며 '옳소이다. 영원무궁토록 그대가 말하는 것이 옳소이다' 하고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을 하나님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심정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을 당했으되 심정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사탄의 침범을 받았으나 심정의 세계는 침범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신부라는 명사를 주고 심정세계의 충절을 갖춘 신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신부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주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대 선지자들이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고, 직계의 아들딸로 세우기 위해서,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하늘 땅이 수고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선조들 앞에, 수많은 영인들 앞에, 사탄 앞에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로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 아들딸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개야, 너는 내 아들딸이다' 하면 하나님은 싫어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 것은 하늘나라의 이념을 품고 계신 아버지 앞에는 가소로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 아들딸이요, 내 나라 백성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와 더불어, 가정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국가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살지 못한 그 아버지가 이제는 거꾸로 세계로부터 오늘의 나까지 찾아오기에 얼마나 수고했겠는가? 찾아와서는 나를 데리고 가야만 됩니다. 찾아오기에도 힘들었거니와 끌고 가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역사의 종말까지 몰아넣어서 데려가기 위해 오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의 내가 아니요, 내 가정은 이 나라의 가정이 아니요, 이 사회와 나라, 피조세계는 타락세계의 것이 아님을 표방하였던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설 수 있는 신랑 신부, 하나님을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왕자․왕녀가 되는 길
     
천자(天子)라는 말을 들어봤느냐? 이런 말은 처음 들을 것입니다. 성인이 제일 높은 줄 알았더니 성인도 천자가 못 됐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산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영원불변한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천자가 못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될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될 수 있는, 즉 천자가 될 수 있는 그런 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세계해방이라는 말만 하지 않고 지옥까지도 해방해야 되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랑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옥에 간 모든 영인들까지 해방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생애를 통해서, 이 짧은 생애에 모든 힘을 집약시켜서, 나의 있는 정성을 다 모아서 나라와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인류, 나아가서 영계에 있는 영인들까지 해방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단시일에 세계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효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뭐냐? 사랑의 정도(正道)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충신이 되라고 하느냐? 성인의 길을 따라서 천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성인의 길을 가라고 하느냐? 성인의 길을 넘어서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제일 좋기 때문입니다. 왜 제일 좋으냐?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홀로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과 능력을 지닌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리 창조주가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분과 동등한 자리에 나갑니다. 나라의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내가 아무리 못생기고 모자란다 하더라도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그 아내도 대통령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권위를 갖습니다.
그러니 자기 생애노정에서 천도를 바로 세우고, 이 세계 인류 앞에 표상이 되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해 천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랑의 그 예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려니 나와 가까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모든 것을 투입하며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이 땅에 평화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을 빼놓은 평화의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상대적인 말입니다. 둘이 화(和)해서 평(平)이 되는 것이지, 독평(獨平)이 아닙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상대와 동등한 자리에서 서로 좋아해야 행복합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빼놓고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이야말로 무한정한 자유입니다. 독재자라도 사랑을 가지고 채찍질을 하는 독재자가 되면 그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참사랑이 깃들면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눈물 한번 흘리고 나면 피곤이 풀립니다. 배고픈 것도 모릅니다. 잠자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사춘기의 처녀 총각들은 만나면 밤을 새워 가며 속삭거립니다. 참사랑에 접하면 그 이상입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해 완성기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졌습니다. 인간이 모양은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꽃을 피우지 못했으니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무슨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꽃 향기가 어떻고, 그 사랑의 결실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많은 하나님도 재창조역사 과정을 거쳐서 이것을 수리하려니 인간들을 이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 완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루한 역사를 연장시켜 나오면서도, 인류를 패망 가운데 몰아넣으면서도 이 원칙을 따라오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8-262, 60-37, 2-222, 7-44, 67-166,    112-289, 80-268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