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4 장 참된 자녀의 도리

참사랑 | 20180108200849


     사랑이야기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제 4 장 참된 자녀의 도리
    
    
1. 하나님에 대한 체휼
     
       
얼마나 하늘과 더불어 살려고 했느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그 생활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또는 내가 얼마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느냐, 혹은 생활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생애노정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타락권에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하루 24시간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도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 24시간, 자기가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한 언제나 생각합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이상의 것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식을 생각합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도 부모의 심정은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의 주체인 하나님은 인류를 자녀로서 바라보고 있는 한 그 자녀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24시간 우리를 염려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나 오나 어떠한 행로에 서 있더라도, 또는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자리에는 나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시선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시선이 깃들어 있고, 내가 내미는 손길에는 하나님의 동정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느끼는, 감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주체 대상 관계에서 일체적이다 하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악한 자리에 나가려야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해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그런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하려고 했느냐? 우리의 생활을 분석하면 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된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찾아온 하나님이 부모의 사랑을 가진 주체적인 분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염려했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염려할까봐 내 생활을 절제하고, 하나님이 고통을 느낄까봐 내 환경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을 위주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했느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가해를 당하는 환경에 있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가해를 당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이 악한 환경일수록 악이 승리하게 하는 것보다도 선한 하나님 앞에 굴복하도록 만들어나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활의 터전을 우리 생활에서 확정짓지 않고서 하나님을 체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우리 생명의 요인
    
󰡐사랑󰡑 하면 막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부모가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또 부부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봤자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얼마만큼 크다고 설명해도 자녀를 낳아 길러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주체나 대상권에서, 그와 나와의 행동의 일치점을 갖출 수 있는 데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데에서, 그의 바람이 내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에서, 그의 일체가 내 일체로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상대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하면 막연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에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그 기도하는 시간 이상의 환경권을 내 생활권에 연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인데, 세계의 수많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그러한 내정적인 면을 생각뿐만 아니라 실천생활에서 넓혀나가야 비로소 체휼을 하게 됩니다. 막연히 기도한다 해서 체휼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폐단이 무엇이냐? 기도나 집회를 할 때에는 그런 것을 느끼지만 생활에서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그 환경에서 하나님이 항상 같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아를 어떻게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우리 생명의 요인입니다.
    
    
입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라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닙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를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고,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으며, 내 모든 감각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입니다.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서 아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세포로 느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서 체휼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떠한 환경에서 인식되느냐 할 때,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정성들이는 그 시간에 인연이 맺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습화된 죄악의 생활권에서 살기 때문에 선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정성을 다 들이면 몸과 마음이 통일될 수 있는 접촉점이 가까워지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죄악권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듣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여보󰡑 하는 데도 그 울리는 음파의 전달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더불어 있다는 입장에서 말을 하고, 듣는 데도 역시 그런 면을 들을 수 있는 체휼적인 입장이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면, 날아가는 새 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빛도 자기에게는 무한한 그 무엇을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것을 자기가 환경에서 체휼해야 합니다.
종교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체휼에서부터 시작합습니다. 종교의 인식은 어떠한 관념적인 지식 논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체험을 갖지 못하는 신앙은 장구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갖지 못한 신앙은 자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환경에 따라서 치우치게 됩니다.
내가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이 나만의 외로움이냐? 외로운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외로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내가 외롭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외로워하는 것을 느낀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쁠 때도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내가 기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 느낌이 나를 지배합니다. 산에 가나, 들에 가나, 집에 가나, 도시에 가나, 직장에 가나, 혼자 밀실에 있으나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그 느낌은 언제나 자기 마음과 같이합니다.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오늘날 󰡐신학(神學)󰡑은 신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배워서 아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알아 가지고는 심정을 모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저 사람이구만. 내가 보니까 눈은 어떻게 생기고, 코는 어떻게 생기고, 뭐가 어떻게 생겼구만󰡑 하고 봐서 아는 것으로는 선생님을 모릅니다. 선생님을 알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같이 살아봐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살아보면 그 가외의 것은 다 드러납니다. 사는데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합니다.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랑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슬퍼할 때에 나도 슬퍼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기뻐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 천리만리 떨어져 있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자식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지식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 또다시 제2 대상을 상대세계에서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과 극을 넘어서서 편재(遍在)합니다. 어디든지 자식이 있는 곳이면 같이할 수 있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사랑을 통하는 데는 무소부재입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아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전능한 권한은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해서 뭘 하고 싶었느냐? 교육해서 머리만 크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려줘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이 살려고 한 것입니다. 살면서 뭘 하자는 것이냐? 울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입니다. 좋아하려니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끼고, 불어오는 태풍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며, 흐르는 물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 수난길을 극복해나오면서 흘린 땀과 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태양을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 자연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도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전개해 놓은 것이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실감하느냐? 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화폭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올 때,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내가 백만큼 줬으니 너는 나에게 백 하나만큼 줘야 한다󰡑 이렇게 바라고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주고 나서 부끄러워하는 사랑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왔다 갔던 수많은 왕자 왕녀가 입던 옷보다 더 좋은 옷을 해주고 싶은데 못 해줘서 미안하다󰡑 하면서 그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모는 아들딸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습니다. 거기에 취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습니다. 한바퀴만 돌아서는 취하지 않습니다. 몇 바퀴 돌아가야 중심을 잃고 취합니다. 취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우리가 󰡐밥󰡑 하게 되면 무엇이 중요하냐?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됐습니다. 타락이 뭐냐?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된 것이 악입니다.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되고, 먼저 되어야 할 것이 나중 되고 나중 되어야 할 것이 먼저 됐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돼야 할 것이 주체가 되고 주체가 돼야 할 것이 상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체냐 할 때, 󰡐하나님이 주체다󰡑 하는 절대적인 관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 하면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대상으로 선 󰡐나󰡑입니다. 그 대상으로서의 󰡐나󰡑가 주체 앞에 일치화되지 못할 때 대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것이 원리관입니다. 내 눈도 주체로서의 눈이 아닙니다. 입이나 팔다리도 주체로서의 입과 팔다리가 아닙니다. 내 전체는 대상으로서의 󰡐나󰡑입니다. 주체가 없으면 내 생명도 없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없습니다. 인심 좋은 동네에 들어가 산다 하더라도 혼자 살면 누구든지 와서 건드립니다. 그게 자동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쥐 못 잡는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벌이를 못 하는 남편이라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 필요하고,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효의 길은 어떤 길이냐? 자기의 주체의식이 발발하면 효자의 길은 깨집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뭐야?󰡑 이렇게 될 때는 또 다른 주체의식이 발동됩니다. 󰡐내가 낳아 달라고 해서 낳았나? 자기들이 좋아서 낳았지󰡑 이렇게 되면 마지막입니다. 그건 둘 다 깨져나갑니다. 효는 주체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나는 대상이다󰡑 이렇게 되어야 효입니다.
충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충신이 󰡐군왕이면 군왕이지, 군왕이면 다야? 알기는 내가 군왕보다 더 많이 알지. 그의 눈과 내 눈이 뭐가 달라? 다 마찬가지야. 그 몸보다 내 몸이 더 나으면 나았지󰡑 이렇게 되면 충신의 길은 다 깨져나갑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엇갈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체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체휼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면 언제나 대상입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닌 법이 없습니다.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가면 아내도 죽을 운명에 부닥칩니다.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너 죽을 자리에 잘 들어갔다. 나 보따리 싼다󰡑 하는 아내는 죽어야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잘 들어갔다. 장가 한 번 더 가겠구만󰡑 하는 남편은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위하는 대상이나 위하는 주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위하는 주체는 있는데 위하는 대상이 없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위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 주체가 없어도 반드시 그 주체는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완전한 대상이 나오면 주체는 자연히 형성된다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완전한 대상은 생겨나는 것이 천지이치입니다. 또 완전한 대상이 나오면 주체는 자연히 형성됩니다. 왜냐? 불완전한 권내일수록 완전한 것이 나오면 가지 말라고 해도 완전한 것을 반드시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따라가느냐?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구든지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그런 주체를 만나게 되면 본심은 압니다.
그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도 어떤 사람을 보면 공연히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 뭘 달라는 것도 없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선조로부터 자기와는 상충적인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손이면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지남철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지남철의 주체라면 인간은 작은 지남철 가루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은 끌려갑니다. 󰡐나는 끌려간다󰡑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을 나설 때나 시장에 갈 때 자기라는 관념을 벗어나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다󰡑 하는 관념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조그마한 지남철이므로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강한 지남철이 작용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근처로 가면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상점을 가더라도 자기 마음이 끌리는 데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자의적이거나 고의적이거나 간에 이러한 생활습관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게 될 때, 말을 배우는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 하느냐, 모르고 󰡐아버지󰡑 하느냐? 습관화되다 보니 󰡐아, 이렇게 되면 아버지구나!󰡑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그 추상명사 같은 것도 어떻게 알아서 납득하는지 신기합니다. 그것을 설명해서 알려주려면 백과사전이 모두 동원되어야 할 텐데도 아무것도 없이 그런 말들을 잘 배웁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래야 합니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세부적인 분야를 많이 대해 나가야 합니다. 많이 대하면 자연히 습관성에 의해서 알게 마련입니다. 설명에 앞서 자연히 자기 해명권이 벌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나는 조그만 지남철과 같은 철분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어떠해야 되느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주체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욕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어머니만 생각합니다. 일체의 모든 생명이, 감각기관이라든지 의식기관이 전부 어머니에게 동원되어 있습니다. 젖을 먹기 위해서도 어머니, 젖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 어머니 외에는 모릅니다. 그런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혼자 잘 때도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 손을 쓱 보면 손에서 빛이 나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그런 경지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무한히 깊은 사랑권에 잠기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생활은 체휼적 감정의 체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나님이 전부 해줘야 믿지,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부 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찾아가야 할 복귀의 행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귀 행로의 거리를 무엇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행동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마음밖에 없습니다. 행동으로 하려면 6천년을 닦아나와야 합니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본성을 통해서 직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가깝게 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화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주체로 모시고 살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을 귀하게 느낍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수습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수건 하나 가지고도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서 생활할지라도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주도적인 힘을 얻게 됨을 우리는 이 세계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내가 파탄시킬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멸시할 수 있느냐? 환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어지고, 이것이 발전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뭐냐?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할 때, 그 아버지라는 말은 뼛골이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뼛골이 울려 골수가 반응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세상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그 아버지가 얼마나 수고했느냐? 수천년 동안 인류를 찾아 헤매면서 수고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 나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세계를 동원하고, 역사를 동원하고, 우주를 동원해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합니다. 그래서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의 손이 잡힙니다. 그렇게 됩니다. 꿈 같은 사실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이러한 표현적 권에서 체휼적 감정을 체득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그러한 체휼의 감도가 그 사람의 신앙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무엇을 하게 되면,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합니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되면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인간을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신의(信義)라는 것은 말로써 󰡐그렇지, 틀림없지󰡑 하고 다짐하면 성립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의라는 것은 󰡐그렇지󰡑 하고 다짐할 수 없습니다. 다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벌써 그 이상의 자리에 선 하나님의 신의는 이미 결정되어 모든 문제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야!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외면적인 환경과 현재 자기의 입장을 화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생활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나는 부자관계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는 심정을 체득해서 그것을 비로소 내면으로부터 외면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전체 앞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생활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58-283, 59-65
  

  
2.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할 인간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과 본성의 작용
    
인간 본연의 가치는 방대하고도 고차적입니다. 이러한 본연의 가치기준을 가져야 할 인간인데도 타락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야 영영 맺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도 설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창조의 능력을 대행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낳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아들딸을 낳지만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딸이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얼마나 기뻐하였느냐? 이 세상에서는 천사장급 사랑의 핏줄을 받은 아들딸을 낳고도 그 아들딸 때문에 󰡐아이고, 나 죽는다󰡑 하며 생명을 바치는 부모도 있습니다.
만일 천사장급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돼 아들딸을 사랑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나눠지려야 나눠질 수 없습니다. 나눠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습니다. 이런 고귀한 인간이 돼야 할 것인데, 타락으로 내적인 모든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대행할 수 있는 입장이 돼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들딸을 지어놓고 그들을 보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그들과 완전히 하나되어 이상을 그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이 하나되어 평면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거기에서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종적으로 묶어지고, 아담과 해와, 그 자녀가 횡적으로 묶어집니다. 이것이 이상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은 주체고 우리는 그 대상이었으므로 타락했을망정 그와 같은 본성의 기준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 본성의 기준을 통해 본연의 주체적인 이상권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작용은 양심작용보다 강해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 인간을 그곳으로 가라고 재촉하고 강제로 몰고 있습니다. 그런 힘이 우리 양심의 배후에 있기 때문에 타락했을망정 그곳을 향해 가라고 재촉합니다.
지남철을 보면 플러스 극(N극)과 마이너스 극(S극)이 있습니다. 그 극 사이에 종이 같은 방해물질이 있으면 그것을 뚫고 작용합니다. 그리고 방해물질이 점점 두꺼워지면 작용이 점점 둔해지다가 나중에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용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작용을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본연의 주체적인 이상권 사이에 그 무엇이 끼었습니다. 이게 다 막혀 버린 것 같지만 양심은 그곳을 향해서 언제나 작용합니다. 이것을 열어제치면 강하게 작용합니다. 그 사이의 방해물질을 하나하나 빼 버리면 점점 강해집니다. 그것을 완전히 빼 버렸다 할 때는, 배우지 않더라도 다 압니다.
하나님과 안팎으로 하나된 자리에 있으면 배우지 않고도 박물군자(博物君子)가 됩니다. 연구해서 아는 것보다도 자동적으로 압니다. 천지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영계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인생살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들을 배우지 않더라도 다 아는 것입니다. 모든 곤충도 태어나면 살겠다고 먹을 것을 찾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 배워서 아느냐? 대하면 척 알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타락했을망정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어서 본성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작용하는 이 사이에는 지금까지 쌓여온 더러운 것들이 덮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빼 버리면 점점점 작용이 강해집니다. 완전히 빼 버렸다 하는 날에는 확 터집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을 지금까지 인간들이 추구해나왔습니다.
    
    
꽉 막혀 있는 인간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됐느냐? 못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이 없느냐? 아직까지 꽉 막혀 있습니다. 막혀 있는데 개인적으로 막혀 있고, 가정적으로 막혀 있고, 종족적으로 막혀 있고, 민족적으로 막혀 있고, 국가적으로 막혀 있고, 세계적으로 막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계까지 막혀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막혀 있느냐? 악한 개인들이 세계적으로 담을 치고 있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악한 가정들이 세계적으로 꽉 막고 있습니다. 또한 악한 종족, 악한 민족, 악한 국가들이 세계적으로 󰡐이 길로 못 간다󰡑 하고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타락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정적인 포위망을 어떻게 뚫느냐? 그것은 대포를 쏘아도 안 뚫립니다. 원자포를 쏘아도 안 뚫립니다. 그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보이지 않는 영적 원수입니다. 그 원수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인류를 유린해나온 괴수
    
본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 자리에 서야 하는데,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 사탄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인간의 아버지와 같은 입장에 있지만 사탄은 인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날에는 본성이 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성이 발동하게 되면 하나님 앞으로 가지 사탄에게로 안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악마는 인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 시조 아담 해와를 거짓 사랑으로 유린했으며, 6천년 동안 인류를 짓밟아나왔습니다. 이렇게 인류를 유린해나오는 괴수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리 약한 여자라도 칼을 품고 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의 공주나 왕자가 있는데, 그 나라가 난시(亂時)를 당해 머슴살이하는 사람한테 맡겨져서 그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고 합시다. 이 머슴이 그들을 공주요 왕자로 모시면 별 문제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도리어 심부름시키고 돈벌이시키면서 종과 같이 이용해 먹는다면 나중에 왕이 어떻게 하겠느냐? 당장에 그 머슴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보다 더합니다. 인간을 종으로 부려먹는 것까지는 좋은데 죽이기 일쑤입니다. 말만 안 들어도 유린합니다. 그러한 입장에 있는 인류의 원수가 있습니다. 그런 원수가 있는데도 우리는 지금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가치가 무한한데, 그 가치를 일시에 파탄시킨 것이 누구냐?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악마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탄 마귀를 퇴치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잘라야 되고, 가정적으로 잘라야 되고, 국가적으로 잘라야 되고, 세계적으로 잘라야 됩니다. 또한 영계의 악령 세계까지 전부 다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해방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의 기원을 찾으려면
    
그러면 지금까지 종교가 해나오는 것은 무엇이냐? 종교는 무엇을 해나오고 있느냐? 내 개인의 해방을 위해서 싸워나왔습니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의 싸움도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천년 동안 몸과 마음의 싸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고해나왔지만 아직까지 평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남자 여자가 합하면 부부가 되고, 그 부부로 인해 가정을 이루고, 가정의 수가 많아져 종족과 민족을 이루고, 민족을 거쳐 국가를 이루고, 국가를 거쳐 인류를 이룹니다. 그런 인간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에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미치광이입니다.
행복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세계를 넘어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넘어가도 행복의 터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야 이놈들아, 세계로 가지 말고 뒤로 돌아서라󰡑고 가르칩니다. 통일의 기원은 세계 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인을 두고 볼 때,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걸 보면 목적이 둘입니다. 하나는 몸이 가고자 하는 길이요, 하나는 마음이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그 둘이 다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하나되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 두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유물론자들이 말하는 변증법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서로 상충이 벌어졌다. 서로 싸운다. 그러면서 발전한다󰡑 이런 이론이 나왔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야 할 텐데,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두 목적권에 떨어졌습니다. 본래는 하나의 목적권에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의 목적권을 자기가 추구해가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가게 돼 있는데도 타락했기 때문에 강제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인 인생살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합니다. 고해가 뭐냐? 본래 타락하지 않았으면 희해(喜海) 아니면 희천(喜天)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평화의 기원지, 혹은 행복의 기틀이 어디에 있느냐? 앞날에 있는 줄 안다면 그건 잘못 알았습니다. 앞날에는 안 옵니다. 올 수 없습니다. 왜냐? 몸과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는 내 자신이 하나의 가정을 이루면 그때는 네 개의 목적을 가진 네 사람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그리고 식구가 넷이면 여덟 개의 목적을 가진 여덟 사람이 싸우게 되고, 1백 식구면 2백개의 목적이, 1억 사람이면 2억개의 목적이, 또 35억 사람이면 70억개의 목적을 가진 70억 사람이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국가를 형성하고 세계를 형성했다면 절대 이상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상의 기원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은 󰡐야, 어서 가자. 빨리빨리 그 세계로 가자!󰡑 이렇게 내몰지 않습니다. 이 세계가 악한 세계이니만큼 그곳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여기를 탈출하라. 세계를 버려라. 세계가 반대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라. 나라가 반대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라. 민족이 반대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라. 종족이 반대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라. 가정이 반대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라. 산중 수도해라. 고독단신의 자리를 찾아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의 길을 지도하는 방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세계에 의해 점령당해 해방을 바라고 참의 길을 모색해가는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그냥 그대로 품고 가라고 가르쳐준다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그것을 전부 부정하라. 전부 끊어라󰡑고 가르쳐줘야 진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가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는 길은 세상을 긍정하는 자리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부정하는 자리에서부터 찾아나가야 합니다.
    
    
인간 본연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자리
    
오늘날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그냥 그대로 믿고 가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나라가, 세계가 그냥 그대로 손에 손 잡고 그럴 수 있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포위된 이 현실세계에서 하나님은 참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태어났던 그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라. 타락하기 전 그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라󰡑 혹은 󰡐마음과 몸이 갈라지기 이전의 자리에 들어가라. 그러지 않고 합하는 자리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마음과 몸이 갈라지기 이전의 자리로 들어가지 않고는 합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자리요, 인간 본연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라고 하는 그 자리는 이 세상을 긍정하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냥 그대로 통과시키는 세계가 아닙니다.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에서 되돌아서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가 가는 길에는 핍박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동적인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탄세계에서 개인이 종교인이 되려고 할 때, 그 주위 사람들이 목을 자르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정이 반대하게 마련이요, 사회가 반대하게 마련이요, 국가가 반대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반대하더라도 국가가 환영하면 그것은 남아집니다. 민족이 반대하더라도 주권국가의 군왕이 지지하면 그것은 남아집니다. 만일 군왕이 절대적으로 그것을 시인하는 날에는 김씨면 김씨 문중이 반대하더라도 남아질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왕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지 않으면 전부 역적으로 몰아 목을 잘랐습니다. 칠족을 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권자가 지지하면 백성이 반대하더라도 남아질 수 있습니다. 또 민족이 환영하게 되면 종족이 반대하더라도 살아남고, 가정이 반대하더라도 친척이 옹호하면 살아남습니다. 아무리 개인이 반대하더라도 가정이 옹호하면 가정에서 살아남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희생당한 종교인들은 왜 살아남지 못했느냐? 종교를 협조해줄 수 있는 가정도 없고, 사회도 없고, 나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라 없는 백성입니다. 나라가 있었더라면 종족이 반대하는 자리에 서더라도 그 나라권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고, 피를 흘리는 제물의 길을 걸어온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권자가 있고 나라만 있다면 󰡐야 이놈들아, 이것이 옳은 것이다󰡑 하면 󰡐예- 이󰡑 하는데, 나라가 없기 때문에 핍박받고 피를 흘려 나왔습니다. 그러니 종교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의 신세입니다.
종교인에게는 나라가 없고 국민이 없습니다. 교회와 교인은 있었지만 나라가 없고 국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종교가 교회와 교인을 형성해서 세계 국민을 형성해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민족을 초월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세계 국민을 형성해야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종교 중에 어떠한 종교가 최고의 종교인가
    
그러면 종교 중에 어떠한 종교가 일등 종교냐?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종교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나빠하는 종교는 있으나마나하니 사탄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반드시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 자기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해서 악한 세계와 싸워 이겨나오는 아들딸,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는 종교가 제일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믿고 승리해 나오는 사람, 하나님이 홀딱 반할 수 있는 그런 아들딸이 된다면 그 종교는 하나님이 좋아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그 종교는 개인을 위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그런 종교는 어떤 종교냐? 종교의 본질은 타락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므로 타락하지 않은 이상(理想)의 것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타락하지 않은 이상의 자리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주체이기 때문에 상대적 인간을 지어놓고, 그 인간 앞에 하나님은 아버지요 우리 인간은 자녀로서 부자의 관계를 맺는 자리가 이상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 세계적인 대종교의 종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타락하지 않은 이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야 되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가져야 되고,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후 말할 수 없이 기뻐하던 그런 이상적인 기쁨의 생활을 갖고 와야 합니다. 또한 세계의 평화를 갖고 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종교는 그런 내용을 가진 종교여야 합니다. 그러면 종주 중에서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이 누구냐? 그 사람을 찾음으로써 종교 중의 참된 종교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적 종교 가운데는 불교, 유교, 회교, 그리고 기독교가 있습니다. 불교를 보면 물론 신이 있다고 말하지만 범신론을 말합니다. 󰡐만유의 존재는 전부 신이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우주의 중심이 되는 절대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유교를 보면, 유교에서 말하는 천(天)은 막연합니다.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하늘은 어떤 하늘이냐?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교는 종교의 본질에 어긋납니다. 한 손에는 코란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칼을 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본질에 어긋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떠냐? 기독교가 왜 세계적인 종교가 됐느냐?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독생자다. 인류역사 가운데 처음 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만 두고 보더라도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를 설파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인간과 상봉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를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자기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과정의 누구보다도 나은 성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0절에 예수님은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했습니다. 또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했느냐? 동등한 자리를 설파했습니다. 인간 최고의 욕망을 두고 볼 때, 상하관계에서는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동위급을 허락했기 때문에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속에는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곧 하나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이상을 이룬 권위를 갖추어 하나님 앞에 선 사랑받는 아들이 된 것이요, 하나님과 일체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인간의 가치를 복귀한 분입니다.
    
    
통일교회는 무엇 하자는 교회인가
    
그러면 대관절 통일교회란 무엇이냐? 통일교회에서 주장하는 통일 방안을 어디서부터 실현할 것이냐? 개인에서부터 하여 그것을 가정에 그대로 적용하고, 가정에 적용한 것을 사회에 적용하고, 사회에 적용한 것을 민족에 적용하고, 민족에 적용한 것을 나라에 적용하고, 나라에 적용한 것을 세계에 적용하는 사상을 가진 곳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는 하나님이 타락하여 고장난 인간을 수리하기 위하여 만든 수리공장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사는 4대 종교문화권을 중심으로 나왔는데, 그 4대 종교는 종합적으로 수리하는 공장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수리하는 공장의 사명을 해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는 종합적으로 수리하는 종합수리공장이 나와야 합니다. 그 종합수리공장의 사명을 하자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러면 종합수리를 하는데 개인만 수리하느냐? 개인도 수리해야 되고, 가정도 수리해야 되고, 종족도 수리해야 되고, 민족도 수리해야 되고, 나라도 수리해야 되고, 세계도 수리해야 됩니다. 전체를 수리하기 위한 사명을 갖고 나온 수리공장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완전히 수리된 개인은 사탄세계에 집어던져도 사탄에게 물려가지 않고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가정적으로도 망하는 패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정이 됩니다. 그러니 자식을 낳더라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낳습니다.
그래서 그런 씨족들이 합해서 민족을 형성하고, 민족들이 합해서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들이 합해서 세계를 형성하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통일교회 사상을 완전히 갖게 되면, 아무렇게나 내버려둬도 사탄세계와는 상관없이 당당히 서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아들딸을 낳더라도 사탄이 침범할 수 없고, 그 아들딸을 중심으로 김씨면 김씨 문중을 만들더라도 사탄이 상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종족을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종족들이 합하면 그러한 민족이 됩니다. 이처럼 영원히 망하지 않는 민족을 만들고, 영원히 망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통일교회 사상입니다.
세계 안의 나라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왜냐? 사탄세계는 천사장이 타락해서 된 세계지만, 본래 아담은 천사장의 주인이기 때문에 사탄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나라의 권위를 찾아야만 본연의 그 나라 기준이 복귀됩니다. 그리하여 복귀된 그 나라 기준 앞에 비로소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영원한 절대자 하나님의 관리권에 들어오게 되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중심으로 절대적인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을 중심으로 비로소 평등한 행복의 세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주류 사상입니다.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는 방대한 가치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는 잡다한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통일사상이라는 체계적인 체제를 거치지 않고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20세기 후반의 문제의 집단이요, 문제의 종단입니다. 그리고 통일사상은 문제의 사상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까지도 문제시하는 종교로 등장한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56-131~231
   

 
3.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자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과 하나님
    
우리가 창조본연의 동산, 즉 에덴 동산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연상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필하고 축복하였던 아담 해와가 연상됩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으로 죄 없는 본연의 우리 조상들이 연상되는 동시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됩니다.
그러한 본연의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만물과 더불어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동산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롭게 찾아가서 의논할 수 있는 동산입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위하여 지은 모든 피조만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의 동산이요,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는 기쁨의 동산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길이길이 같이 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창조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조 만물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모든 피조 만물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동산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동산이요, 창조주를 모셔놓고 그 창조주의 기쁨을 내가 같이 느낄 수 있는 동산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우리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까지 전달해줄 수 있는 동산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모셔놓고 살아야 할 인간이요, 하나님을 모시고 즐거워해야 할 만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심정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였는가? 하나님은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만물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지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이란 명사가 필요없는 일체적인 이념권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이 불가분의 일체성을 갖추어서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하늘을 대해 변함없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일체적인 입장에서 영원히 믿어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또 인간에게 영원한 당신의 생명을 주입시켜 영생불사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세워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하나가 되어 온 피조만상이 화동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터, 에덴 동산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의 흔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릴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동산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인간은 우리를 지은 아버지를, 우리를 주관해야 할 주인공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아와 같은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를 느낄 수 있는 자
    
천지 창조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참된 자기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인간, 참된 선의 부모로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해 닷새 동안 모든 만물을 지어놓았습니다. 이 주인공을 지어놓고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느냐?
우리는 삼라만상을 매일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심정, 혹은 같은 감정으로 삼라만상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무한한 내적 심정의 인연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초목뿐만 아니라 들에서 뛰놀고 있는 짐승이나 곤충들도 무심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를 대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는 것을 알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짓던 하나님의 은사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포기의 풀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타락한 인간이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에서 하나님과 친구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풀 가운데서도 어떠한 풀을 제일 좋아할까, 꽃 가운데서도 어떤 꽃을 사랑할까, 나무 가운데서도 어떤 나무를 더욱 사랑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어진 존재들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제일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흠모하고, 하나님의 이념을 고대하고, 하나님의 복귀의 동산을 바라보는 참된 마음을 가졌다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의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나,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고등동물에까지 미쳐지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인연을 통해서 기쁨을 체득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정력을 기울여 곤충을 만들었다 할 때, 하나님이 기울인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그 곤충을 사랑한다면 곤충을 만든 하나님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세계를 찾아들어갈 수 있는 길
    
그러면 타락 인간은 어떻게 해야 이 대우주 이념권에 잠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들어갈 수 있느냐?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시인이 자연을 보고 시 한 구절을 지었다고 할 때, 독자가 그 한 구절의 시 속에서 시인이 바라보던 자연환경을 그릴 수 있고, 그 시인의 감정까지도 공감하게 된다면 그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화가가 찍어 놓은 점 하나에서 그 작가의 사람됨과 심정과 감정의 세계와 그의 이념을 헤아리게 되면 그 작품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평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상(像)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상 가운데 담겨 있는 내적인 상(相)이 모든 가치의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하만상을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대 창조이상세계의 존재물은 모두 하나의 사랑을 목적으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온 정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엿새 동안에 지었지만 그 하나 하나의 존재물, 예를 들면 첫째 날이나 둘째 날에 지음받은 존재물에도 엿새 이후에 벌어질 대우주의 창조이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심정을 뿌리로 하여 지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던 것들을 골동품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깁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모래알이 떨어져 있다 할 때, 그 모래알 하나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귀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보다 더 높은 창조주의 손길을 거쳐서 생긴 심정의 결실체입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물인 것을 알고 모래알 하나라도 우주와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인연되어 있습니다. 인연이란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맺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대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심정 밖에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이는 위대한 시인입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주적인 심정을 느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우주적인 시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대해 너무나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천하만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조그만 모래알 하나에도 우주의 이치가 들어 있고, 하나의 원자에도 무궁무진한 우주의 조화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복합적인 힘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분자를 지나 원자, 원자를 지나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과 목적을 갖추고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쳐 나왔고, 반드시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를 맺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하나님!󰡑 할 수 있는 심정으로 자기의 가치와 동등하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도인입니다. 그렇게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예술가입니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천지 만상을 보고 하나님의 각양각색의 사랑과 심정의 묘미를 발견하고, 그것들과 친구가 되어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만우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을 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어놓고 󰡐보기에 선한지라󰡑 하였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언제 느끼느냐?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낍니다. 지은 만물에 하나님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기에 창조된 만물을 놓고 하나님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요구하는 도의 표준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한 번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회상해 봅시다. 본래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것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소망하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고, 만물을 지은 하나님의 창조의 감정이 스며들기를 바랐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만물을 대할 때마다 신비감을 느낍니다. 그때 정열이 최고조로 불타 올라 시를 쓰면 놀라운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대우주의 심정을 지닌 인간으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목표대로 성숙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였습니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성숙하면 할수록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대할 때 각각 서로를 대우주 전체의 실체로 감각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감정세계에 하나님도 들어가고 만물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인간이 성숙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부부가 되어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화하고 만우주와 심정적으로 화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을 지음으로써 모든 소망의 목적이 완결되었다󰡑 하는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날 천지는 이 꼴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스러운 경지, 도의 길을 찾아들어가면 그런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호흡하는 공기 속에서도, 뛰는 맥박에서도 천주의 감정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자기의 손을 보고도 웃을 수 있고 무한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그런 경지에 갔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만물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기도하라. 도(道)의 길을 가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라. 나서서 올라오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지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요구하는 도의 표준입니다.
우리는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과 심정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그러고 있느냐? 󰡐하나님!󰡑 하고 부르는 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화하여 사랑할 수 있고,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존재가치를 1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져 있느냐? 그 세계가 심정의 세계요, 사랑의 세계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세계는 이치의 세계입니다.
최후에는 어떤 이치로도 해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심정세계, 설명은 못 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논리로써 해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도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탄식하고 허덕이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길을 거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은 도의 길을 갑니다. 세상에 믿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어서 가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행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사회생활에서 낙오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입니다. 버림받은 무리지만 버림받은 무리들에 의해 역사는 지금까지 수습되어나왔습니다. 오늘날의 문명 또한 배척받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발전되어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만물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줄 손수건을 만든다면, 어떻게 만드느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손수건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으로 옮겨질 때, 부모의 사랑과 심정도 함께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지어주었는데도 그 아들딸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고 하면 그들은 부모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지어준 손수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지닌 실존물로, 당시뿐만 아니라 후손만대에까지 영원히 당신의 심정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물로 하나님은 이 만물을 지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꽃을 보며 무슨 요소로 되어 있는가 하며 성분을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보다 꽃을 보며 웃고 즐기는 사람을 더 귀하게 봅니다. 과학은 분석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무엇에 대해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합니다. 느낌입니다. 그러기에 예술은 과학보다 앞섭니다.
산이나 들에 가서 풀 한 포기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은 무슨 풀인데 무슨 씨로 생겨났고, 무슨 원소가 부합되어 이렇게 되었다󰡑 하는 것과 󰡐야,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며 심정으로 대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귀하겠느냐? 심정을 갖고 대할 때는 일대 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하는 것입니다. 분석적으로 대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입장,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곤충이나 새, 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지는 그런 내적인 감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과 정의로써, 즉 과학적인 논리로 그것을 해명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예술적으로 그 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힘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늘을 주관할 수 있고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온 천주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것이 인간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고 저주하겠느냐? 그 이상 더 좋아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 놓인 인간이기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결정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인간은 이 사랑의 감정을 무한세계까지 인연지을 수 있는 중심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고,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는 것보다도 풀 한 포기를 보고도 그것을 지을 때의 아버지의 손길과 지은 다음에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을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더 그리워서 눈물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는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보고 이상주의자니 하면서 돌았다고 합니다. 육감을 갖고 이상세계를 느끼는 사람을 보고 돌았다고 합니다. 돌아도 목적을 위해서 돌면 됩니다. 춤추는 것은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춤추는 것을 보고는 돌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는 것이라면 그 이상 도는 것이 없는데도 좋다고 합니다. 기쁠 수 있는 환경을 중심삼고는 돌았다는 비난을 받고 쫓겨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어떠해도 좋습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그 만물에 대해서 아버지의 그림자와 같이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만물은 아버지의 심정의 그림자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정력을 다 기울여 지은 것이요,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 지어진 것이니 아버지의 대신자와 같이 귀하고 가치있게 여기며 사랑해주기를 만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이 탄식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의 왕, 혹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훌륭하다는 물건에 비할소냐. 골동품에 비할소냐. 어떤 유명한 부인이 입고 있는 호화로운 옷에 비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연세계 앞에 자신도 모르게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볼 때,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에 비할소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훌륭하겠느냐󰡑 하며, 하나님이 심정을 기울여 지은 만물을 붙들고 무엇보다도 귀하게 느끼는 자가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러한 자리까지 내몹니다.
    
    
탄식하는 만물의 한을 해원해주어야 할 인간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제일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지은 만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6천년 전 그것들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의 손길을 체휼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도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외로웠느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지에서 우리는 만물을 대하여 󰡐면목이 없구나. 본연의 인간 조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하면서 영원히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얼마나 고대했느냐? 고대하던 일차적인 소망은 깨지고 한스러운 타락의 후손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탄식권내에서 다시 제2의 인간조상을 맞기 위한 역사노정을 거쳐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물을 놓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가문의 보물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고 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었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주고, 그것을 붙들고 눈물짓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갈수록 만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풍부해집니다. 도통(道通)이란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심정을 통해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오늘날 사람이 만든 물건은 1백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순수한 이 풀 한 포기를 무엇보다도 가치있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떠한 향기보다도 공기의 맛이 더 좋습니다. 사람이 공기의 맛을 알고, 햇빛의 맛을 알고, 물의 맛을 알면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살면 누구나 건강체가 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심정과 더불어 영원한 존재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니 밥 한술을 먹을 때도 󰡐감사합니다. 황공합니다. 타락의 후손 앞에 이것이 웬일입니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맛이 있다, 없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 좋다, 나쁘다, 지위가 높다, 낮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는 길
    
하나님의 심정권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달라면 무한히 줄 수 있고, 놀자면 무한히 놀아줄 수 있고, 가자면 무한히 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견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잃은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하는 우주관적인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천적인 이념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하나님과 인연맺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의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자.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하여 사는 자가 되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결혼하면 어떤 아들딸이 나오겠느냐? 그런 심정의 아들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무엇을 바랐느냐? 그들이 서로 사모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만물을 대신한 아담 해와, 하나님을 대신한 아담 해와, 천상천하를 대신한 아담 해와로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담 해와가 우주 전체 이상의 가치를 완성한 모습으로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나서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도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의 세계는 혼자 가야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대적인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갔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올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아야 할 신부 된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어떤 내적인 심정적 가치를 갖추며, 어디서부터 심정의 문제를 수습해야 하느냐? 기도만 하면 되느냐?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생활에서부터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한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농사를 짓더라도 풀 한 포기를 자기 부인이나 아들딸과 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이 향하는 곳에 생명이 따르게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히 생명이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는 생명의 요소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비료를 주지 않아도 농사가 잘될 때가 옵니다.
호미에 파인 흙덩이로부터 손에 쥐어지는 곡식의 한 알까지도 눈물이 어리어 친구와 같이 대하고 귀여워하고 잘 자라거라 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움직임이 왕성하게 되어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게 됩니다.
한 나라에 쇠운(衰運)이 들려면 그 나라의 만물에서부터 쇠운이 듭니다. 한 집안에 쇠운이 드는가 안 드는가 하는 것은 그 집의 아들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정의 양, 심정에 어리고 느껴지는 양이 점점 작아지는 집은 얼마 못 갑니다. 몇 대 못가겠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그러면 앞으로 복받을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냐? 심정의 인연을 생활의 감정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대우주의 이념과 관계를 맺고 눈물짓는 날에는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풀 한 포기를 대하더라 심정으로 대하고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의 인연을 통한 구원의 길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죄악의 후손이지만, 타락하기 전 본연의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지음받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하다는 심정으로 우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분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왜 타락한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났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저를 인간의 조상으로 지으셨더라면 아담처럼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해와처럼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심정을 저에게 허락하실 수 없겠습니까? 아담 해와를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시던 내용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의 내용을 저에게 나타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타락의 후손 중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도 문을 두드려야 열리고 찾아야 찾아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먼저 땅을 주관하는 만왕의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슬픈 자의 왕이 되려 하였고, 우는 자와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의 왕이 되려 하였고, 지상에서 사탄세계를 정복하는 개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의 신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결과적인 명사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정의 승리자요, 심정을 갖고 슬픈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우신 분이요, 고통받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고통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을 갖고 죽은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인 인연을 맺지 않으면 구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이 대우주에 심정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구원역사이니, 그 구원역사의 노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재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만물을 재료로 삼고, 인류를 재료로 삼고, 영계의 천천만 성도를 재료로 삼아 내가 움직이면 만물이 어느 정도 움직이고, 인류가 어느 정도 움직이고, 천상의 천천만 성도가 어느 정도 움직이느냐에 따라, 내가 땅 위에서 부르짖는 것이 이 우주에 어느 범위까지 심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느냐에 따라 천상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의 슬픔은 하늘에 반영되었고 만우주에 반영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냐? 심정의 구주입니다.
    
    
천국을 찾아가는 길
    
 우리는 이 대우주권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심정이 자리를 잡는 날에는 만물도 안식하고, 하나님도 안식합니다. 그러한 심정을 어디서부터 찾을 것이냐? 일상생활에서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좋은 데 구경하고 오는 사람은 죽을 상이 되어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벙실벙실 웃으며 옵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생활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을 한다 할지라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붙들고 슬퍼했지만, 오냐, 나는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그리워했더냐󰡑 하면서 일을 하면 싫증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음악가는 예술적으로 살다가 예술적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데는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적인 형태는 아무리 잘 갖추었다 할지라도 속이 썩은 자는 사람 취급을 못받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움직여낼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은 어디를 가도, 물가에 가거나 산에 가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찬 바위 위에 누워 잠자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냐!󰡑 해야 합니다. 노동판에 가서 일한다 하더라도 옛날에는 어땠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내 심정은 아무도 못 빼앗아간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땅 위의 악하다는 요소, 슬프다는 요소, 어떠한 사탄의 요소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백성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심정을 찾아 헤매는 개척의 선봉자로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타락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반대 역사가 벌어집니다. 한 발짝 나가면 찌릅니다. 두 발짝 나가도 찌릅니다. 우리는 이 찔림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행로입니다.
타락권에 있는 한 우리는 이 심정을 중심삼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자라야만 민족 앞에 설 수 있고, 세계 앞에 설 수 있고, 또 천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기 전에는 안 됩니다. 빨갛게 화장하고 반질반질하게 해서 돌아다녀도 안 됩니다. 좋은 것 먹고 고운 것 입어도 안 됩니다.
자신은 먹지 못했지만 먹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하고, 자신은 입지 못했으면서도 못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은 집이 없으면서도 고루거각(高樓巨閣)에 사는 사람을 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승리했다는 기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옥을 정복한 후에 갈 수 있습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지옥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세속적인 만족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세상이 즐기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간단합니다. 지옥 가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의 행복한 자리를 찾아가고, 천국 가기를 원하거든 이 세상의 불행한 자리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위인들은 전부 그 시대로부터 배척받은 분들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4-64, 6-327, 9-160
 

   
4. 참된 도의 길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뭘 할 것이냐? 완성한 사랑에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에 접한 다음에는 뭘 할 것이냐? 자신이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의 자리에 가고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가려야 갈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부모의 품에 있고,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으로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합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의 표준이란 어디에서 나오느냐?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인격완성이 됩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때에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와 같은 때에 맺어져야 합니다. 도의 생활에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면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한계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계선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무한한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확고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춘기 소녀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이고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볼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볼 때도 자연이 호흡하면서 나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서 도리어 슬픔 가운데에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 그런 심정으로 무한한 인연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외롭지 않는 무한한 인연이 봄절기같이 나타납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입니다.
    
    
정서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우리는 영적으로 봄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동산에서 사방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과 밝게 핀 꽃에 싸인 분위기에 품겨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기분을 느낍니다. 한계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갈 때, 거기에서 생명과 인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완성의 자리를 절대적인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굳은 신념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하고 나아가게 될 때, 제2의 주체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장 보람된 것입니다.
그 자리는 지식이나 인식을 통해서, 혹은 외적인 관념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못 찾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런 눈을 보게 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요인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각권에서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할 수 있는 동기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정서적인 것입니다.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보다 가치있는 심정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에서 혼자라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친구가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와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습니다.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하늘 끝까지, 무한정의 세계에까지 영원히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이뤄집니다. 그러지 않고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 가정을 보더라도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입장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일방적인 입장에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또 모래로 말하면 한 알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전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나려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변혁이 일어납니다. 무한한 분립이 벌어집니다. 원래 분립은 발전하기 위해서 일어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로 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가야 할 생애의 추구점
    
우리가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추구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압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져 들어옵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갖춰져야만 가능합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들어와야 영속적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 본연의 인연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가면서 지금까지 추구해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이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가 죽음을 맞는 순간이라 해도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 땅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나이가 많아도 나이 많다는 인식을 안 하고 삽니다. 물론 어느누구나 마음은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1백 살까지 살기가 힘들긴 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마음은 청춘입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웠던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합니다. 부부로 맺어졌던 그날을 생각하며 죽을 때까지 그대와 나는 하나라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늙었다고 해서 상대를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으로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서로의 생애를 감싸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마나한 부부입니다. 꽃으로 예를 들면, 동백꽃이면 동백꽃은 변할 수 없습니다. 동백꽃으로서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다는 것은 뭐냐?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오르는 근본적인 사랑, 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합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정성을 들이면 그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라면 누가 효자라고 하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부모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선을 추구하고,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의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죽음의 교차로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심정의 요인, 즉 사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갈 때는 그냥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게 되면 번식이 이뤄집니다. 거기에 절대적인 능력의 영이 개재하지 않고서는 번식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 즉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식이 생겨납니다. 자식은 어떤 때에 생겨나야 되느냐? 생리적인 모든 감정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서 생겨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선하고 좋은 아들딸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세계는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라와 세계를 사랑하는 심정이 내면적으로 일치된 자리에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이 생리적인 일치점과 내면적인 심정의 일치점을 중심으로 태어나는 아들딸들은 천운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보면 그 부모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사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증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열남 열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충신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또 효자가 되기 위해서는 효자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야 합니다. 은연중에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런 인연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선조들의 선한 천품을 받고 나와야 합니다. 충신과 효자는 자기 일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대의 선조들과 인연된 내용을 중심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심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맺을 수 있는 길
    
이 우주는 무한한 힘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람이 안 부는 것 같아도 바람은 항상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대기가 이동하지 않고 딱 정지해 있는 날이 없습니다. 각각의 분야 분야에 보충하는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 없는 고요한 날이라도 문을 열면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곳이든 공기가 채워져 있으면 거기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작용합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조그만 모양들이 자꾸자꾸 모여 우주적인 큰 태풍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우주도 어떤 한 방향을 갖추어서 움직입니다. 이렇게 우주가 움직여나가는 것도 하나의 작은 끝을 중심하고 움직여 나갑니다. 이런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리적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의 한계선을 넘어서 무한한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한계선이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생리작용에 의한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을 가지면 역사(役事)가 벌어집니다.
이런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는 자리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의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아들딸 자리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위나 며느리보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합니다. 며느리는 쫓겨나면 갈 데가 없습니다. 쫓겨나면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해와는 딸로서 쫓겨났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갈 데가 없는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갈 데가 없어도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며느리가 쫓겨났다면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갑니다. 또 사위가 타락해서 쫓겨났다면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위를 찾아오는 법이 있다면 사탄은 하나님이 사위를 찾아갈 때 󰡐나에게도 오십시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딸을 찾아갈 때는 사탄이 그렇게 주장할 도리가 없습니다.
나라의 역적이 되어 죽게 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의 어머니는 국법을 어겨서라도 아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나라에 반역을 해서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살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가능한 권이 어디냐? 그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곳은 세상의 법이 치지 못합니다. 그것이 뭐냐? 부자 관계의 사랑의 법도입니다. 부자 관계의 사랑, 본래 사랑을 하는 그 내연의 사연은 국법이라든가 세상의 법으로는 통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어한다고 했는데,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가겠느냐?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가 나자빠지면 어떡하느냐? 또 가겠느냐? 또 가다가 또 나자빠지면? 백번 천번 나자빠지면 어떡하느냐? 그래도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6천년을 통과하더라도 갈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리는 대관절 어떤 자리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상속받을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예수님이 다 가르쳐줬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가르쳐줬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죽는 데는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뭐냐? 살기 위해서냐? 사는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 저 밑창에 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 가서 죽어야 되느냐?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사랑 완성의 경지
    
지금까지 우리는 진짜 사랑하는 마음을 얼마나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껴봤느냐?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랑은 그림자 같은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 말고 주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워하다가도 또 그리운 사랑, 죽자 살자 좋아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또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끝이 없습니다. 부딪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고 계속 파고들어가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들어가 절충되었다면 영원한 한날을 중심으로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다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인격의 귀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사람은 말을 잘해서 좋다거나, 그 사람의 눈이 비둘기 눈 같아서 좋다거나 하는 감정을 초월합니다. 어디를 보아도 싫은 것이 없습니다.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은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 다 친구입니다.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중심으로 자녀 입장에서 기도하면 대번에 압니다. 이 모든 느낌이 영적인 안테나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아버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느껴봤습니까? 아들딸을 사랑하며 그렇게 고이 키워준다는 느낌을 느껴보았습니까? 그런 것을 느끼는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인연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입체성과 신비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좋다는 것입니다. 꽃을 바라보면 꽃을 따라 아름다워지는 것 같고, 꽃 향기를 맡으면 모든 생리적인 감정이 동요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언제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연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도의 세계에서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빛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게 빛을 발하면 잘나지 않은 사람, 즉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부를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런 미남이 어떻게 저렇게 못생긴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남자 눈에는 그 여자가 최고의 미인으로 보입니다. 첫사랑의 인연을 가진 사람, 첫사랑을 자기에게 1백퍼센트 부어준 그 사람 이상의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기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 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뭐냐? 어떻게 완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지내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를 하려고 원리를 중심으로 글을 적어놓고 보면 틀림없이 잘 씌어 있지만, 이것을 해서 뭘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원리는 전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 입장에 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전도하기 위해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 수준 높은 것을 체험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봄절기면 봄절기 기분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권을 초월합니다. 6․25동란 때 진짜 고생했던 사람은 지금 그때 얘기를 하더라도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이라면 그럴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늙어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 경지는 겸손을 초월한 경지입니다. 인간의 한계적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길
    
심정은 모든 것의 모체입니다. 그 심정의 기원이 무엇이냐? 심정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갖추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비출 수 있는 반사경이 됩니다. 제2의 주체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반사경에 반사된 빛은 직접 비치는 빛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면서 그리워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하나님도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내 모습이 되었느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아들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신세입니다. 부모를 찾아가려야 찾아갈 수 없는 황막한 천지 가운데 있는, 몸을 둘 곳이 없는 인간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어디엔가 부딪쳐 죽어 버려야 할 입장에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6천년 전 잃어버렸던 아들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종교가 통일교회입니다. 이것은 적당히 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백날 천날 해도 안 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자식이 낯선 넓은 시장 같은 데 가서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돈을 갖고 있다면 그 돈을 생각하겠습니까? 엄마가 사준 것에 대한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관심을 다른 데에 두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장이 떠들썩하도록 소리를 질러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정 급하면 사람을 다치게 하여 소문을 내서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찾다 찾다 못 찾고 화가 나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소문이 나게 해서 부모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나쁜 길을 통해서라도 부모를 찾으려는 마음으로 인해 죄를 범할 때는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안팎을 보완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벌어집니다.
정말 부모를 잃어버렸다면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부모를 찾기 위해 소리 중에 제일 큰소리로 불러도 보고, 또 몸으로 바위를 들이받아 만신창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세상을 전부 공(空)으로 돌려 버릴 수 있는 자신이 한번 되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찾을 길이 있다면 한번 부딪쳐보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자리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정서적인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 있을 때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리느냐?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제일 기쁘게 춤출 수 있고, 제일 기쁘게 노래할 수 있고, 제일 즐거워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돈이 많은 자리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자리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천년 만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자리, 사랑하는 부부가 원수로 인하여 부부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격파하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 가정이 원수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완전히 해방되어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이상 기쁜 자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복귀된 심정의 세계는 아들이 6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 환호하는, 아버지가 그 아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 이상 기쁜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전인류의 이상적인 터전이 되고 누룩과 같은 기반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고자 하느냐? 임금과 백성 사이와 같은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일 가까운 자리. 아버지와 아들딸의 자리에서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의 심정 기준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과 상대관계를 맺고 있느냐, 종적으로 어느 정도 일치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준을 중심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개인완성, 그다음에 부부완성, 그리고 선의 자녀 번식을 통한 사위기대 완성을 목표로 하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종적 기준을 중심으로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사랑, 딸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인연으로 완전한 종적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요, 또 그것을 중심으로 완전한 횡적 기준이 세워집니다. 90도를 중심으로 3백60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정적 관계를 중심으로 상하 관계, 전후 관계, 좌우 관계가 설정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3-71, 34-151, 33-125

   

 
5.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길
     
       
하나님과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리란
    
우리는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고아입니다. 땅 위에서 아무리 잘사는 가정환경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볼 때는 고아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잃어버린 자요, 참형제를 잃어버린 자요, 참부부, 참자녀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이니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를 돌고 또 돌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쳐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개의치 않고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찾다가 안 되니 죽음 길을 갔습니다. 본연의 부모와 상봉하는 한날을 고대하는 우리는 그것이 그리워서 몇 시간이나 울어보았느냐?
이제 전세계 기독교인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딸보다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그립다,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다, 손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무쳐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만나 몸 마음을 다 드리고 품에 안기어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맞는 것이 우리의 최고 소망입니다.
상봉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말씀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워하는 자리, 오직 그리워하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리워서 미쳐보았느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눈이 물커질이만큼 그리워해봤느냐? 선생님은 하나님이 그리워서 일주일 이상 밤을 새우면서 기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아침이 되어 햇빛이 비쳐오면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움에 사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습니다. 가치 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해결하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담판짓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높은 분이요, 모든 것의 주체 되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사랑의 주체요, 이상으로 말하면 이상의 주체요, 모든 존재의 기원이 되는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막연하나마 그런 생각을 갖고 그분을 보고 싶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다, 그분과 더불어 같이 먹고 같이 살고 싶다는 그리움에 꽉 차 미쳐야 합니다.
그래야 되는데 눈은 눈대로, 손은 손대로 전부 다 따로따로 갈라져서 󰡐아,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일체가 돼야 합니다.
심정적인 인연으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입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타락할 때보다도 고차적인 심정적인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못 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 힘을 갖기 위해서는 눈이 뭉그러지고, 목이 메이도록 울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울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만큼 사무치게 그리워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데도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다른 먼 나라로 떠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런 기준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연맺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였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울어봐야
    
인간의 욕망이 무엇이냐?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보석이 있으면 마음이 갑니다. 남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자들은 보석을 좋아합니다. 여자들이 보석을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하느냐? 남편보다 더 좋아하느냐? 보석을 좋아하지만 남편보다는 덜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보물보다 낫습니다. 사람이 보물보다 낫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하냐? 사람보다 못하겠느냐?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밖에 없는 분이라는 뜻이므로 사람보다 낫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인들은 사람을 무시하고, 물질을 무시하고 하나님만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목까지도 내놓습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을 내놓고 죽을 길을 거쳐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찾아온 그 사람도 고생했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기다린 사람도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하하󰡑 하고 웃느냐, 와락 붙들고 󰡐엉엉엉󰡑 우느냐? 와락 붙들고 󰡐엉엉엉󰡑 웁니다. 울 때는 흐린 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나오듯 반짝 우는 것이 아니라 콧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침이 나오도록 웁니다. 울다 보면 눈물, 콧물, 침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서너 방울 똑똑 흘리며 󰡐아이고 당신을 사랑해요󰡑 하면 좋겠느냐,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엉엉엉󰡑 울면서 눈물, 콧물, 침이 국수발 늘어지듯 축 늘어질 때까지 우는 것이 좋겠느냐? 어떤 것을 원하느냐?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렇게 교회에 와서나 집에서나 하나님이 보고 싶어서 󰡐엉엉엉󰡑 울어봐야 합니다. 눈물, 콧물, 침을 흘리면서 목이 메이도록 울어봐야 합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그저 아들 친구만 와도 눈물을 주루룩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부모를 가진 아들은 죽었지만 행복합니다.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부모가 있는 것을 볼 때, 죽었지만 행복한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행복한 자리에서 죽은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불행합니다.
    
    
역사를 초월해서 상봉할 수 있는 자리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 끼리끼리, 부자지간에 어떠한 연유로 인해 서로 갈라졌다가 장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는 것을 영화 같은 데서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50세가 넘어서 아들을 만났다 하게 되면, 그 부모는 아들을 만남과 동시에 󰡐야, 이 녀석아! 지금까지 내 생각 한 번도 안 했어?󰡑 이러느냐, 아니면 󰡐야, 너하고 나하고 어디 한번 역사를 말해보자󰡑 이러느냐? 역사를 초월합니다.
역사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뭐냐? 심정입니다. 자기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심정입니다. 아버지인 줄 알게 되면 과거야 어쨌든 체면불구하고 자식은 󰡐아버지󰡑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야, 아무개야!󰡑 하며 와락 부둥켜안습니다. 󰡐야, 조금 생각해보자. 내가 너를 찾기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렸기 때문에 너도 한번 흘리고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 초월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지식도 아니요, 사연도 아니요, 사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힘만이 역사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자, 토론해보자. 사연을 이야기해보자󰡑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내 아버지다󰡑라고 생각하는 여기서부터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의 인연이 지상의 기대에서 재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제 자신이 이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또한 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세계 또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20대의 젊은 청년 앞에 역사적 섭리를 통한 부모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일생 동안 자기 때문에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희생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그런 사연을 알게 될 때는, 그 뻔뻔스럽던 얼굴은 땅을 향하여 숙이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던 목석 같은 그 자식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집니다. 그 심정을 알고 부모의 무덤을 찾아가는 그 길은 천년사의 인연을 회생시킬 수 있는 심정부활의 길입니다. 무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그 자리는 천지에 효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싹틔울 수 있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심정이 교차되는 자리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심정의 친구가 되어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은 생활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외로운 것은 그러한 내정적인 사정과 심정을 누구와도 논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그런 아들을 만나게 되면 그 외로운 환경을 잊어버립니다.
천지창조는 불안과 공포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희열과 만족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심정적인 유대를 맺게 되면, 그곳이 아무리 사탄의 소굴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기뻐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시간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마음에 솟구쳐 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는 사람, 세포를 통해 은혜의 흥취를 느끼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혹은 사탄의 총칼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평화를 느낍니다.
심정이 교차되는 자리는 죽음을 넘어 희열이 창조되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리는 사망권을 넘어 승리와 행복의 터전이 시작되므로 기쁨으로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기쁨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그는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이요, 그의 권한은 반드시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내정적 깊은 심정의 인연을 느꼈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심정적 기반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 소망의 역사가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상봉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면 하나님을 상봉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을 대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죄를 지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아버지를 부르고 참부모님을 부르면서 󰡐저는 이러이렇게 싸워나왔고, 이러이러한 예물을 가졌왔나이다. 저를 찾기 위하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며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땅 위에 오면 나를 중심으로 천국이 이루어져서 세상이 전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소원, 내 기대, 내 소망은 다 버려야 합니다. 만난 그날부터 주님이 명하는 대로, 분부하는 대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제가 이 길을 찾아나오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었는데,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자녀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는 마음을 뼈살에 사무치게 갖고 위로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6천년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신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셨습니까? 그 마음을 이 자식은 아나이다󰡑 해야 합니다.
먼저 칭찬받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찾아갈 때는 묵묵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 직후에 예수님 앞에 나타날 때 예수님은 묵묵했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붙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이 청산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역사적인 허물입니다. 그것을 청산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걸어 󰡐아담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노아가정은 이러이러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모세를 거쳐 역대 선지선열들이 이러 이러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가셨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죄 때문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만나는 그날에 역사에 있었던 허물을 다시 한 번 알아야 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버리지 않고 찾아주시고 불러주시니 그 은사 황공 망극하옵니다󰡑 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내 아들아!󰡑 하면서 맞아줍니다. 이렇게 되어야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선의 가정을 향하여, 천국 가정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와 상봉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엇을 바랄 것이냐? 예수님 혹은 하나님에게는 역대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6천년 동안 혈투전을 거쳐온 역사의 피어린 자국은 나 때문이요, 우리 민족 때문이요, 내 식구 때문이오니,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하고 용서를 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했고, 타락은 어떻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 중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왜 안 받았느냐? 무엇 때문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택하였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은 왜 나왔느냐? 야곱은 어찌하여 간교한 행동으로 에서의 장자기업을 빼앗았으며, 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한 70식구가 애급으로 들어갔느냐? 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백년 동안 고생했으며, 모세를 세워 왜 가나안 복귀를 했느냐? 왜 이스라엘 선민권을, 주권을 세우기 위하여 싸웠느냐? 왜 예수님은 와서 죽으셨고, 왜 다시 오셔야 되느냐?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와 시대적인 범죄, 그리고 미래적인 범죄상을 낱낱이 직고해야 합니다. 끝날은 직고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만 직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죄만을 직고해서는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역사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시대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미래의 죄상을 직고하면서 이것들과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연후에 미래 새 나라의 새 주인공으로 천주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을 찾아나온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려는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 식구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고 있는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므로 그 아버지는 이렇다󰡑고 만민이 마음으로 심정으로 몸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끝날에 심판은 무엇을 갖고 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기반으로 한 탕감복귀의 조건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을 몰랐기에 그가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은 붙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말씀의 실체인 예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말씀을 접하여 아무리 실천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행동하여도 실체와는 관계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와 더불어 잘못된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회개는 무슨 회개냐? 아담가정으로부터 6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그 시대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신 섭리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그 모든 죄상을 오늘 내가 책임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래적인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인 죄상을 청산하려는 하나님이 나를 찾는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과 인연맺어 자신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합니다.
또 시대적인 하나님이니 시대적인 죄상을 청산지어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죄를 모두 청산하고 미래의 새로운 하나의 기준을 세워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그곳이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는 천국입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아들딸을 중심으로 하늘 가정을 형성하고 싶어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하늘 가정의 아들딸로서 인정되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살다 가면 천국입니다.
    
    
앞으로는 새 것만을 추구해야
    
지금 시대는 골동품을 찾는 시대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찾아들어가기 때문입니다. 6천년 전에 인간 조상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그 맨 처음의 골동품과 같은 것을 찾아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골동품시대를 끊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시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새 것이 나오면 때려잡아먹고 삼켜 버리니 망할 세상입니다. 소망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상 하는 세계는 새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새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때가 되면, 6천년 묵은 역사를 다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글픈 역사의 장을 뒤적뒤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이상세계와 새로운 소망에 취해 살아야 합니다.
로마문명은 희랍문명의 재판(再版)이었습니다. 고대문명을 연구하여 고대정신을 다시 끌어냄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현실과 부합시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소망의 기준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는 옛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고 하나님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으니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새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과거를 붙드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이상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맙니다. 과거 유대교가 과거를 붙들다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그것만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로운 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가늠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청산하고 미래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의 하나님의 가정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님을 세워놓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대해 형님이라 하는 말도 듣기 싫어했습니다. 왜 요셉의 아들들이 예수님에게 형님이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노정을 거친 후에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심정, 마음, 몸, 행동, 말을 통한 후에야 형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는 말도 하나님은 싫어했습니다. 마리아도 그런 과정을 다 통한 후에라야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혈족의 모든 것을 생각만 해도 하나님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인연맺은 것만을 요구합니다.
    
    
하늘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자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슬픈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자기의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서 지금까지 나온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운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까지 다 나타내는 자들은 전부 심판받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의 하나님에게 차마 자기의 고통을 놓고 기도할 수 없어 혼자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십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수고를 감당하겠사오니 제게 맡겨주시옵소서󰡑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복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은사가 많은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천상에 가보면 선생님 말이 허언망언(虛言妄言)이 아닙니다. 저나라는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천적인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높여주겠다고 해도 󰡐황공하옵니다. 못 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네 번 거절하는 세계입니다. 치켜세워 달라고 하기 전에 󰡐저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는 세계입니다.
세계는 잠들어 있습니다. 권력 다툼, 세력 다툼 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역자, 그런 교단은 망합니다. 이제는 높아져도 도망가려고 하고, 위해주려 해도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외부의 핍박을 받고 몰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서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그렇고, 아버지가 걸으신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하물며 불충한 죄인은 어떻겠습니까? 당연지사입니다. 󰡐이 몸에 고통과 서러움이 가해져서 민족의 고통과 서러움을 감할 수 있고, 세계의 고통과 서러움을 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서러움을 감할 수 있다면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은 사탄이 데려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동경하면서, 하나님의 식구의 인연을 동경하면서 나를 잊어버리고 하늘 부모를 흠모하는 마음을 가진 무리를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러한 무리가 있다면 아무리 핍박이 가중된다 할지라도, 어떤 비참한 일이 닥쳐오더라도 그 무리는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땅을 붙들고 피눈물로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죄에 대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60억 인류를 위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청년 남녀, 그러한 식구, 그러한 종족을 그리워합니다. 대한민국에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난다면 대한민국은 소망이 있고,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7-259, 50-258, 49-255, 61-9, 28-100
 

   
6. 참된 자녀의 도리
     
         
새로운 한날을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책임
    
하나님은 무한히 불쌍한 분입니다. 죄악의 자식을 품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거북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죄악된 아들딸들이 살고 있는 이 땅 위에 와서 찢기고 상처받고 몰리는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통곡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갈기갈기 찢겨 상처가 났습니다. 민족이 쓰러지고 새로운 민족이 이루어지는 그때마다, 역사의 어느 한 페이지도 제외됨이 없이 하나님의 심정의 곡절이 스며 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역사노정에서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심정을 가진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결탁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한히 슬펐던 하나님을 알고, 무한히 고통스러웠던 하나님을 알고, 무한히 분하고 억울했던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느냐? 인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슬픈 하나님임을 알고 그런 하나님을 위로해드리기 위해 󰡐아버님이여, 당신의 슬픔을 제게 지워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안 지워주면 빼앗아서라도 져야 합니다. 빼앗아서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지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님의 고통이 내 고통이요, 아버님의 억울함이 내 억울함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딸이 몇 명이나 되느냐? 전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고, 예수님을 믿고 편안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역적입니다. 할 것 다 해야 천국 가고, 할 것 다 해야 복을 받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 천국 가려 하고 복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강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슬픔을 인계받는 왕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왕자였습니다. 죽음을 홀로 인계받은 왕자였기에 구세주가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쓰러졌지만 부활의 권한으로 다시 살아남으로써 사망권을 지배할 수 있는 왕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숨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이 몇 번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물, 피, 감정에는 예수님의 모든 오관의 감정이 어려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울어본 자, 고통받은 자, 간장이 녹아본 그런 사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의 그런 습관적인 신앙 갖고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 신앙은 그런 신앙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마음과 몸을 합하여 하나님이 진 십자가를 대신 지겠다는 사람이 사탄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는 사람은 사탄이 우습게 알지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하는 사람은 사탄이 제일 무서워합니다. 󰡐하나님, 제가 억울함을 당하지요󰡑 할 때 사탄은 도망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 성도에게는 반드시 환란이 옵니다. 하나님이 참아나온 고비고비의 곡절을 비롯하여 억울함과 배반과 배척과 몰림과 죽음과 역사상의 피어린 모든 흔적이 우리를 휩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일편단심,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이 심정을 누가 지배하겠습니까? 아버지와 나와의 심정적인 인연을 누가 끊겠습니까? 사탄의 권세가? 어림도 없습니다. 사망의 권한도 어림없습니다. 이 심정을 무엇이 지배할소냐! 이것을 찾아가는 노정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최후의 심판대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만 하나님과 인류가 찾고 있는 새로운 한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끝나지 않는 한 슬픔의 역사는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더불어 심정적으로 결탁된 이 마음을 누가 점령할소냐. 사탄세계의 사망권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피의 곡절아 오너라. 사탄세계의 그 무엇도 다 오너라. 세기말적인 공포나 7년 대환란아 전부 다 한꺼번에 몰아쳐와라. 난 점령당하지 않는다. 그런 것 가지고 날 점령하지 못한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 심정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승리의 기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세계에서 이러한 뜻을 위하여 싸워오신 아버지시여! 이 사망세계에서 어느 한날 이러한 아들딸을 만나 위로받으셨습니까? 위로를 받지 못하신 아버지시여! 오늘 제가 위로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날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세계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당당한 자격자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위로해드리는 아들딸이 돼야 한다
    
하나님의 슬픔은 뭐냐? 진짜 하나님이 6천년간 슬퍼한 것을 알았느냐? 얼마나 하나님이 아픔을 느끼고 나오셨느냐? 사랑의 세계가 한번 틀어져 버리면 천년 만년 잊을 수 없었을 것이 아니냐? 시일이 가면 갈수록, 반대의 세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얼마나 충격적이었겠느냐?
원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을 일시에 자기 족속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참소하고,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얼마나 상처가 심했겠느냐? 그 슬픔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찾아나온 것은 오늘날 나 하나를 위해서입니다. 나 하나의 해방을 위해서 역사의 수난길을 걸어나왔고 현재의 수난길을 거치며 일편단심 미래의 소원을 품고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그 슬픔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사랑해봤느냐? 우리가 사랑한다는 말, 그 권위와 위치를 생각할 때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아내가 대통령에 대해서 󰡐저 대통령을 내가 남편같이 사랑한다󰡑 할 때 그 대통령은 일방적이라 기분 나쁠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거늘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우리 타락한 인간은 역적의 피를 받았습니다. 역적의 후예입니다. 역적의 피를 받은 것을 극복해야 하는 우리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내용을 가졌느냐?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 것이냐? 개인을 위해서 흘렸고, 가정을 위해서 흘렸고, 종족․민족․국가․세계로 발전시킬 때까지 기반을 닦아나오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소원하였던 것은 모든 것의 대표자인 하나의 완전한 남자요, 완전한 여자입니다. 예수님은 고맙게도 신랑 신부라는 말을 여기에 귀결시켰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승리의 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상 되는 아들과 해와 이상 되는 딸을 찾기 위해서 눈물지었습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수난길을 걸어나온 하나님 앞에, 내가 망하더라도 그러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다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이 소원하던 아들이 이렇고 딸이 이렇지 않느냐고, 세상은 모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그러한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길을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불쌍한 아버지!󰡑 하며 자신을 망각한 자리에서 옷깃을 붙들고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날에는, 하나님도 진짜 그를 붙안고 운다는 것입니다. 그건 진짜 이 땅 위에 나라를 가졌던 주권자가 나라가 망해서 느끼는 슬픔 이상의 슬픔입니다.
    
    
참된 아들딸이라면 하나님을 위해 수난길을 가야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린 것은 나라뿐만 아니라 천주가 망한 것과 같습니다. 개인 아들딸이 망하고, 자기 가정이 망하고, 자기 국가가 망하고, 세계가 망하고, 천지가 망해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래서 망명객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망명자입니다.
그 나라의 망명객, 즉 쫓겨난 군왕은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치고 백성을 끌고 가는 자와 하나되기를 원하겠느냐, 데모하는 걸 원하겠느냐? 목이 잘려나가더라도 하나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순교의 피를 흘려나왔습니다. 아무리 피를 흘리더라도 한탄하지 말고, 피를 흘리더라도 선전하라, 그런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제국의 4백년 압박시대에도 망명객의 입장에 있는 하나님이 악한 세계의 주권에 대항하는 그날들은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소원성취를 자극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반대하고 나서면 나설수록, 투쟁하면 투쟁할수록 그것은 내일의 소망을 촉구시켜 주는 자극적인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순교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위로하면서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응당 가야 될 길로 갑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느냐? 욕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는 요렇게 죽기 때문에, 나는 요렇게 하나님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나를 천국 보내주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이루고 아버지의 아들딸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나는 죽습니다󰡑 해야 합니다. 그 역사와 반대로 나가면 하나님 앞에 배척받습니다.
복귀시대에는 하나님이 피땀을 흘리며 수고할 때가 있지만, 언제나 수고와 희생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책임지고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자리에서는 내쫓기고 죽을 자리에 들어가서도 인간을 구해주었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을 위한 수난길을 인간이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위하여 가는 아버지의 짐을 대신 져야 합니다. 그래야 효자입니다. 군왕이 가고 있는 수난길을 책임져야 충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여, 우리 아들딸 복 주소󰡑 이렇게 기도하는 데는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렇게 기도하면 뒤로 돌아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종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는 복이 필요없습니다. 복은 세계 사람에게 주시고, 저에게는 사망을 주시옵소서. 죽을 자리를 주시옵소서󰡑 이게 참된 아들딸이 갈 길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고, 세계를 위해서 희생하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 아들딸 잘살게 해 달라고 하고, 자기 아들딸 사랑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그런 기도를 안 했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 아버지가 북한에서 공산당한테 살해당했으리라 짐작하지만, 그분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 영계를 통해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는 희생해왔습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전통을 따라나오기 위해서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나라를 생각하고,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해봤느냐? 슬픈 하나님을 얼마나 위로해봤느냐? 머리를 들고 엉덩이를 젓고 다니면서 자기 이익을 위해 눈을 깜박깜박하며 옆으로 빠지고 뒤로 빼는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슬픔을 떠안기 위해서 민족의 한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 나라에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길을 위해서 선발대로서 죽음을 당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당당한 각오가 돼 있느냐? 그게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
    
원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부자(父子)의 관계였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6천년 동안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슬퍼했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한 부자관계를 맺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인간을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요 조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위신과 체면까지 세워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완전히 맺어야 되는 것은 천륜입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어떤 한 분이 이 일을 먼저 완수하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분을 만나 하나님을 부모로 모셔놓고 하나님의 서러움을 우리의 서러움으로,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하나님의 억울함을 우리의 억울함으로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무치게 호소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맺어지지 않았고, 천륜의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입장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과 내용을 알아야 하고, 사탄의 진상을 확실히 밝혀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 예약만으로 맺어지는 부자의 관계는 필요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아버지의 뜻을 위하고, 뼈살이 녹아나는 고통 속에서도 참고 승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부자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아버지의 위신과 체면을 세워드리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고개를 넘은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까지도 능히 넘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6천년 동안 하나님의 천국이념을 배반해나온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누구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염려하는 분입니다. 세상에서는 육친의 사랑이 제일 큰 줄 알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고 깊으며,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의 사랑보다도 깊고 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어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고, 󰡐아버지의 서러움을 제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체휼하는 참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을 소유한다면 그 천국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가 책임지고 풀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통당하는 사실에 대해 분개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동안 하나님을 괴롭혀 온 사탄에 대해 분개심을 품었고, 4천년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도 넘어가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뜻길을 걸어가지 않는 사람들까지 끌고 가서 역사와 현실을 새롭게 한 후 󰡐아버지여, 제가 당신의 고통을 책임지고 있사오니 염려 마시옵고 섭리의 고통을 푸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천상과 천하를 통하여 느끼는 고통까지도 함께 느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동안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담당해 나오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예수님을 골고다의 죽음길로 내몰 때, 예수님은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을 품은 하나님에 대하여 도리어 자신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아버지를 붙들고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도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천국을 이루어나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나가는 길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울려본 사실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울려본 때가 있습니까? 󰡐오냐, 내가 갔던 길을 네가 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오냐, 서러운 나를 찾아오기에 얼마나 허덕였느냐, 아무개야?󰡑 하고 통곡하던 아버지를 붙들고 몸부림친 적이 있고, 󰡐아무개야!󰡑 하고 울던 예수님의 손길을 붙든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조롱받고 배척받던 사람들이 천국세계의 왕자가 될 수 있고 공주가 될 수 있습니다. 다 잃어버리더라도 아버지의 뜻과 아버지의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것을 그리워하며 생활을 해명하고, 교회를 해명하고, 사회를 해명하는 사람이 된다면 아무리 자기가 지옥 가겠다 해도 하나님은 지옥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끌어갑니다.
우리는 감히 아버지를 부르는 것조차 황공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말을 하는 것조차 황공스러워야 합니다. 󰡐아버지, 감히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다른 말이 필요없습니다. 마음과 몸이 동하여 사무친 심정으로 󰡐아버님!󰡑 할 때 거기에서 우주의 소유권이 결정되어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죽는 한이 있고 사라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겨주고 싶은 말은, 민족을 넘고 인류를 넘고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람을 고대하면서 죽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천주와 지옥권까지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역사 속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자랑해야 되겠습니다. 이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를 붙들고 싸우던 아버지를 소개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발판으로 아버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과 망동이 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통하여 역사의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시대의 아버지를, 심정을 통하여 미래의 아버지를 높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이렇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뜻이 저의 뜻입니다. 핏줄을 잊지 못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저희를 찾아오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제 아버지입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나와 더불어 살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원수 사탄이 웬말이냐? 󰡐이놈, 사탄아! 너는 이 천지간에 발붙일 곳이 없다󰡑 하고 호령할 수 있는 심정의 주인공, 󰡐사탄아, 악의 세력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아라󰡑 하며 호령할 때에 사탄이 머리를 숙이며 󰡐옳소이다. 영원무궁토록 그대가 말하는 것이 옳소이다󰡑 하고 인정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주인공을 하나님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심정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죽음을 당했으되 심정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사탄의 침범을 받았으나 심정의 세계는 침범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신부라는 명사를 주고 심정세계의 충절을 갖춘 신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신부의 마음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주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역대 선지자들이 이러한 뜻을 세우기 위해 수고하고, 직계의 아들딸로 세우기 위해서, 부자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하늘 땅이 수고한 것에 대해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나아가 선조들 앞에, 수많은 영인들 앞에, 사탄 앞에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이 땅을 지킬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로부터 󰡐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그 아들딸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아무개야, 너는 내 아들딸이다󰡑 하면 하나님은 싫어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말도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 것은 하늘나라의 이념을 품고 계신 아버지 앞에는 가소로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는 내 아들딸이요, 내 나라 백성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와 더불어, 가정과 더불어, 사회와 더불어, 국가와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살지 못한 그 아버지가 이제는 거꾸로 세계로부터 오늘의 나까지 찾아오기에 얼마나 수고했겠는가? 찾아와서는 나를 데리고 가야만 됩니다. 찾아오기에도 힘들었거니와 끌고 가기에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역사의 종말까지 몰아넣어서 데려가기 위해 오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의 내가 아니요, 내 가정은 이 나라의 가정이 아니요, 이 사회와 나라, 피조세계는 타락세계의 것이 아님을 표방하였던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설 수 있는 신랑 신부, 하나님을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의 왕자․왕녀가 되는 길
    
천자(天子)라는 말을 들어봤느냐? 이런 말은 처음 들을 것입니다. 성인이 제일 높은 줄 알았더니 성인도 천자가 못 됐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산다. 너는 내 아들이다. 영원불변한 내 아들아󰡑 할 수 있는 천자가 못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될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될 수 있는, 즉 천자가 될 수 있는 그런 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세계해방이라는 말만 하지 않고 지옥까지도 해방해야 되겠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랑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옥에 간 모든 영인들까지 해방시키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생애를 통해서, 이 짧은 생애에 모든 힘을 집약시켜서, 나의 있는 정성을 다 모아서 나라와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인류, 나아가서 영계에 있는 영인들까지 해방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단시일에 세계적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효자가 되라고 하는 것은 뭐냐? 사랑의 정도(正道)를 통해서 하늘나라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충신이 되라고 하느냐? 성인의 길을 따라서 천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성인의 길을 가라고 하느냐? 성인의 길을 넘어서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나라의 왕자 왕녀가 제일 좋기 때문입니다. 왜 제일 좋으냐?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홀로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이 소유한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과 능력을 지닌 것이 사랑입니다. 아무리 창조주가 능력이 많다 하더라도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분과 동등한 자리에 나갑니다. 나라의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내가 아무리 못생기고 모자란다 하더라도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그 아내도 대통령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권위를 갖습니다.
그러니 자기 생애노정에서 천도를 바로 세우고, 이 세계 인류 앞에 표상이 되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해 천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랑의 그 예법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려니 나와 가까운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모든 것을 투입하며 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이 땅에 평화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랑을 빼놓은 평화의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는 상대적인 말입니다. 둘이 화(和)해서 평(平)이 되는 것이지, 독평(獨平)이 아닙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혼자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상대와 동등한 자리에서 서로 좋아해야 행복합니다.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빼놓고 자유가 있습니까? 사랑이야말로 무한정한 자유입니다. 독재자라도 사랑을 가지고 채찍질을 하는 독재자가 되면 그건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참사랑이 깃들면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아무리 고단하더라도 눈물 한번 흘리고 나면 피곤이 풀립니다. 배고픈 것도 모릅니다. 잠자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사춘기의 처녀 총각들은 만나면 밤을 새워 가며 속삭거립니다. 참사랑에 접하면 그 이상입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해 완성기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졌습니다. 인간이 모양은 갖추었지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에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꽃을 피우지 못했으니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무슨 열매? 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꽃 향기가 어떻고, 그 사랑의 결실이 어떻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이 많은 하나님도 재창조역사 과정을 거쳐서 이것을 수리하려니 인간들을 이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 완성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루한 역사를 연장시켜 나오면서도, 인류를 패망 가운데 몰아넣으면서도 이 원칙을 따라오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8-262, 60-37, 2-222, 7-44, 67-166,    112-289, 80-268
 

   
7.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랑의 길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딸이 되려면
    
통일교회 원리에서는 우리 인간의 소원은 개인을 완성하고 상대를 완성하여 선을 번식하는 것이라고 제시합니다. 개인을 완성한 다음에는 상대를 찾아야 되고, 그다음에는 자녀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사위기대 완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은 사위기대 완성󰡑이라는 결론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본래 아담이 완성하고 해와가 완성하여 부부를 이루면 그 부부를 중심으로 사랑이 성립됩니다. 그다음에는 그 부부의 사랑에서 아들딸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사랑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형제의 사랑권에 있다가 점점점 개인으로 완성하여 부부를 이룬 다음 부부의 사랑을 중심삼고 부모의 사랑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이렇게 우리 개인은 형제의 사랑에서 부부의 사랑으로 자녀를 낳아 부모의 사랑까지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앞에 완전한 아들딸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 인간은 사랑을 하나의 기점으로 하여 어디에 가더라도 이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터전이 되고 우리의 생활기반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하나의 닻으로 해서 일생을 살다가 본연의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 앞으로, 즉 본연의 부모 앞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성경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우리가 서로서로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면 하나님이 같이하겠다는 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중심으로 아담 해와가 형제로서 자라 부부가 되어 자녀까지 완성했다면 더 이상 어디로 갈 데가 없습니다. 이 이상의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와 같은 자리로 나아감으로써 아담 해와가 비로소 완성하여 완성한 부부로서 아들딸을 낳아 완성한 부모로서 아들딸을 사랑했다 하는 자리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이 전체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창조의 모든 사랑이 여기에서 출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냐? 형제의 사랑, 부부의 사랑, 부모의 사랑의 중심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하나만 결여되어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셋이 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형제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자라면 자기에게 동생이나 형 누나가 없으면 동생이나 형 누나를 갖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마음입니다. 왜 그렇게 갖고 싶어하느냐? 천지원칙이 그러한 내용으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을 내가 땅 위에서 완결지음으로써 내가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 그런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는 것
    
그러면 남자 여자는 뭘 할 것이냐? 󰡐남자로 태어났으니 세상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나라의 대통령이 되면 되지󰡑 이렇게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자 아이는 커서 장가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여자 아이는 뭘 할 거냐 할 때 커서 시집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우리 남자 여자들의 공통적인 욕망입니다.
남자 여자가 모여 있을 때 어디로 가겠느냐고 하면, 남자는 남자가 있는 자리로 가겠다고 하지 않고 여자한테로 가겠다고 합니다. 또 여자는 여자가 있는 자리에 가겠다고 하지 않고 남자한테 가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참사람이라면 예수님도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는 덜 됐기 때문에 왔다갔다하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일방적으로 그럽니다. 그러니 참사람입니다.
이걸 볼 때 예수님도 신부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도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까요, 웃음이 나올까요? 나이 많은 처녀 총각들은 결혼 얘기만 하면 눈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그저 좋아합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 얘기를 하면 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걸 보면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결혼해야 된다는 것이 절대적인 요건입니다. 이러한 부부의 사랑을 완성해야 할 운명적인 창조원칙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아가려고 하느냐? 이걸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왜 그러냐고 하면 󰡐왜 그러기는 왜 그래? 그러니까 그렇지󰡑 지금까지는 이랬습니다. 왜 그런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와 같은 참된 사랑으로 부부가 하나되면 입체적이고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되면 그 사랑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내가 벗어나려고 해도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간다고 가는데 그 자리에 있습니다. 만일 그 자리를 떠난다고 하면 내 생명을 자르는 것이 도리어 편하고 내가 없어지는 것이 편하지, 그 사랑의 길에서는 절대적으로 못 떠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떼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떼낸다고 떨어집니까? 남자와 여자가 하나됐을 때는 그 남자를 잡아당기면 하나된 그 여자가 따라옵니다. 여자를 잡아당기더라도 남자가 끌려가게 돼 있습니다. 여자가 끌려가면 남자는 놓을 수가 없어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놓지 않으니 끌려갑니다. 그런 부부는 영원한 부부입니다. 남자가 왔다갔다하고 여자가 왔다갔다하지 않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대개 󰡐결혼이라는 것은 인생살이의 하나의 방편이다󰡑 이럽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런 가정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 있는데, 안 갈 수 있습니까? 이 길을 안 가면 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떠납니다. 하나님이 떠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파탄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나라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있으면 세계를 망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세계 전체의 분야까지 같은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망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부부가 나오면 하나님이 보장하는 참된 자녀가 나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가 되어서 아들딸을 낳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자녀를 갖는 것이 가장 큰 행복
    
만일 그렇게 태어난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 사이에 내려와서 같이 그 아들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아담 해와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서 낳았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의 사랑이 횡적인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종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종횡의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아들딸이니 아담 해와도 그 아들딸을 사랑하고, 하나님도 그 아들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하나님, 어디에 계시고 싶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자녀가 있는 곳에 있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님, 그러지 말고 다른 데 가셔서 사십시오!󰡑 해도 갈 데가 없습니다.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이 완성되는 데에 영원히 동거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은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남자라면 󰡐나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형제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내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녀가 있어서 행복하다. 이것이 나의 자랑이다. 이 이상 큰 자랑이 없고, 이 이상 큰 행복이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형제가 있다면, 그 형제를 잡아당기면 거기에 부모가 끌려오고, 다른 형제가 끌려오고, 자녀가 끌려오고, 전부 다 끌려옵니다. 그러한 가정이 이상적인 가정입니다. 이상적인 가정은 인간끼리 합한 사랑만이 아니라 입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 부부, 자녀의 사랑으로 연결된 가정입니다. 이런 데서만 이상적인 사랑의 가정이 성립됩니다. 그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없으면 뭘 하겠습니까?󰡑 하면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기준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사랑의 기준을 찾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행복한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형제를 가진 걸 자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남편 아내를 가진 걸 자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녀를 가진 걸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3대 사랑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이혼하면 좋습니까? 아버지가 하나였는데 이혼하면 다른 아버지가 생겨 아버지가 둘이 되니까 좋습니까? 아닙니다. 왜냐? 절대적으로 하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 가운데 이복 형제가 좋습니까, 진짜 형제가 좋습니까? 진짜 형제가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혈통이 연결된 참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복 형제를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할 수도 없거니와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도 그렇지만, 의붓자식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뭐냐? 이와 같은 내용이 완전히 하나로 연결돼야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깨뜨리는 것 이상 큰 죄는 없다
    
그래서 이 사랑을 헤쳐 버리고 깨뜨려 버리는 것은 죄 중의 죄입니다. 최악(最惡)이라는 말입니다, 최고의 악. 이 최악이라는 게 뭐냐? 지금까지 우리는 이걸 몰랐습니다.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것하고 이 사랑을 파탄시키는 것하고 어떤 것이 더 큰 죄냐? 사랑을 파탄시키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큰 죄지, 자식을 내버리고 이혼하는 것이 죄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원수 중에서 제일 지독하고 제일 미운 원수는 사랑을 파탄시킨 원수입니다. 한 가정을 중심으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부부끼리 사랑할 수 없게 깨뜨려 버린 악마 이상의 악마가 없습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결혼관은 이 원칙에서 성립됐습니다.
요즘 결혼한 남자 여자들은 괜찮은 사람을 보면 자기 남편, 자기 아내가 그 사람보다 못하면 기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이러한 원칙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되었다가 이혼하는 것처럼 무섭고 악한 것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죽으면 죽었지 이혼은 안 됩니다. 아들딸이 갈라질 수 없고, 형제가 갈라질 수 없습니다.
남자는 미인을 볼 때 󰡐저 여자 겁탈하고 싶다󰡑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를 보면 그 여자가 자기보다 어리면 자기 누이동생과 같이 사랑하고, 나이가 많으면 누나와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히 형제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앞으로 이상적인 부부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통일교회는 뭘 해야 되느냐? 통일교회는 형제가 아닌 남남끼리 모였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형제와 같이 사랑하자는 운동을 합니다.
인류 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첫째는 형제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는 부부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셋째는 자녀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해보지 못했으니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다시 재현시켜서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워 놓고서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있어야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 부모를 중심으로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참사랑의 부부를 이룰 수 있는 길, 참자녀를 얻을 수 있는 길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돼야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천지가 벌어지기 때문에 하늘나라와 통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먼저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면, 형제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부부의 사랑을 깨뜨려놓고 자녀의 사랑을 깨뜨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재창조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이것을 재현시켜서, 이것을 탕감복귀해서, 이것을 못 했기 때문에 했다 하는 조건을 세워서 천국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회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
    
그래서 통일교회는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천주․하나님까지 8수를 복귀하기 위한 길을 갑니다. 국가의 경우 주권자는 달라집니다. 주권자가 달라지더라도 복귀의 길은 변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 다음에는 세계, 그다음에는 천주, 그래서 하나님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7단계를 거쳐야 됩니다. 이렇게 단계로 보면 일곱 단계이고, 수로 하면 여덟 수입니다. 이 8수는 재출발 수입니다. 7수를 넘어서 8수에 이르면 재출발합니다. 왜 재출발이냐? 하나님을 찾았으니 하나님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재출발입니다.
개인을 놓고 볼 때 가정이 없으면 개인도 없습니다. 또한 가정을 놓고 볼 때 종족이 없으면 가정도 없습니다. 종족을 놓고 볼 때 민족이 없으면 종족도 없습니다. 이것이 서로 상대가 되어서 발전해 나갑니다. 그래서 원형을 그리는데 종선과 횡선을 완전히 일치시켜서 그려야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한 횡적인 사랑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종적인 사랑이 상대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하나되어 원형을 그리는 그런 운동이 벌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사랑을 가지고 원형을 그리면 제멋대로 그려집니다. 완전한 원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상적인 인간의 사랑이 합해져야 그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원형이 이루어진 개인으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까지 이와 같은 본연의 형태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중심한 사랑이 인간세계에서 어디를 통해서도 갈 수 있습니다. 또 반대로 하더라도 가정․종족․민족․국가 어디를 통해서도 갈 수 있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길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가 됩니다.
자기 가정을 사랑하듯이 종족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나가게 되면 이상적인 세계는 자연히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 어디에 가든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 자기 아버지와 같이, 자기 형님과 같이, 혹은 나이가 어린 사람을 보면 동생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가정의 일원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심정을 초민족적으로 언제든지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환경의 세계가 바로 지상천국입니다.
우리는 지금 타락권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타락권을 벗어날 때까지는 불가피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중적인 십자가의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공식노정을 선생님도 지금까지 걸어나왔습니다. 개인을 중심으로, 가정을 중심으로, 종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민족을 편성하면서 이와 같은 형태의 기준을 전부 다 갖추어서 점점 세계적인 판도를 형성해 나왔습니다. 이런 판도를 이룰 때까지는 지역으로 이동하였지만 완전히 다 이룬 다음에는 한 민족, 한 나라, 한 하나님을 중심으로 전부 다 연결됩니다.
이 하나의 중심 형(型)은 어디에나 통합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은 영국에 가도 내가 살 수 있는 나라요, 내 집이요, 내 민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가더라도 내 고향 같고, 내가 살 수 있는 나라 같고, 내 민족 같습니다. 그곳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나라요, 아담의 땅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부모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딸이니 부모의 것은 내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고 아버지의 나라가 내 나라라고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하나의 사랑과 연결되어 있으면 뗄 수 없으니 그자 나요 나자 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고 세계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랑을 끌어오면 다른 것이 다 따라오니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을 중심으로 자녀의 사랑을 내 스스로 확정했다는 신념을 가질 때는 세계는 내 것이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재현시키기 위해 나온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참부모의 사랑, 참자녀의 사랑, 참부부의 사랑을 재현시켜서, 탕감복귀해서 세계적 중심으로 점프해 들어가자는 운동을 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82-195~220
  

  
8. 참아버님의 참아들딸이 되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최고의 목적은 무엇이냐? 무엇을 원하느냐? 지금까지 기나긴 서러운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도 인류를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나오는 내용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너는 내 친아들딸이다󰡑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지금까지 싸워왔습니다.
하나님의 선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모든 만물이 화동하는 가운데 만물의 주인 자격을 갖추어 하나님 앞에 󰡐나의 아버지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해야 할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그런 가치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 이후 본연의 아들딸이 나와 󰡐아버지!󰡑 하고 부르는 그 한마디를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입장에 있어야 하나님을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가? 참아버지와 참아들은 혈통의 인연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갈라놓아도 갈라질 수 없는 인연, 자연히 하나될 수 있는 피살을 통한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과 우리는 혈통적인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고 있는 그 아버지는 죄악의 입장에서 불릴 수 있는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나 선의 이상 동산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이상 동산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동시에 기쁨에 도취하여 살 수 있는 동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동(動)하면 만물이 동하고, 인간이 정(靜)하면 만물이 정하게 되어, 인간과 만물이 동하고 정하는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도 동하고 정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상대적인 관계를 초월하여 일체가 될 수 있는 이상 동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와 같이 당신과 하나되기를 바랐고, 하나된 가운데서 놀라운 사랑을 중심으로 기쁨에 취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그러한 세계를 창조해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이것이 자기들의 원한이 된 동시에 천륜의 원한이 되었고, 타락 이후 지금까지 그 원한에 원한을 가중시키는 슬픈 역사를 엮어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을 대하여 섭리하는 최대의 희망은 무엇이냐? 그것은 타락의 부모를 갖고 있는 인류를 다시 하나님편에 세워 놓고 󰡐나는 그대들의 영원한 아버지고, 그대들은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날을 맞이하는 것이 타락 인간의 소망이요, 천륜을 이끄는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과 탄식의 원인
    
오늘 내 한 자체를 반성하고 천륜 앞에 자신을 세워놓고 생각해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화동한 일이 없었음을 느낄 것입니다. 또 아버지 앞에 참된 아들딸로서 󰡐아버지여!󰡑라고 할 수 있고 하늘의 주관을 받는 본연의 생활을 해야 했었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느 한때, 어느 한 시간이든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시여!󰡑라고 부르면서 자신을 변화시키고 아버지의 심정을 유발시켜서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새로이 부자의 관계를 맺는 입장에까지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것을 인간에게 체휼시키고 인간과 부자의 관계를 맺기 위해 수고하고 있는 아버지인 것을 마음으로나 생활에서 느껴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최후 소망으로 남아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 우리가 세움받는 것도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이뤄질 것인가? 그것은 창조의 이념인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통해서이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땅 위에서 어느 정도 실천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생활권에서 실천한 정도에 따라 자기들이 찾을 수 있는 가치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땅을 대하여 서러워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이 땅을 대하여 탄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은 사탄 때문에 서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밉다고 해서 서러워하고, 죄인들이 많다고 해서 탄식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서러워하고 탄식하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직까지 인간을 대해 󰡐내 사랑하는 아들딸이로다󰡑라고 말할 수 없고, 그 아들딸로부터 󰡐내 아버지여󰡑라는 말을 듣지 못한 데 있습니다. 환영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갖지 못한 것이 하나님이 서러워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한은 무엇이냐?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믿어주지 않고 인간이 받들어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인간이 책임 다하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천륜을 세워드려야 하고, 영광의 하늘나라를 이루어드려야 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선의 이상을 이 우주에 실현시켜드려야 합니다.
하나님 혼자서는 아무리 뜻을 이루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또 사탄도 선의 입장에 서려야 설 수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해주지 않는 한 영원히 악의 입장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설 수도 있고, 사탄편에 서서 하나님과 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나 사탄보다 인간이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또 사람이 아니면 사탄의 계략도 허사가 됩니다. 이와 같이 뜻의 성취나 죄의 성립이 하나님이나 사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놓고 천륜의 뜻과 선의 이상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이념을 무조건 믿고 그것을 이루어야 할 인간이 어떻게 가는가를 지켜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서러움과 고충이 사무쳐 있습니다.
    
    
내가 부르고 있는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참아버지도 있고, 거짓 아버지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불러야 하는 본연의 참아버지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요, 이상의 중심이며, 행복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침범해 들어오는 악을 끊어 버리고 마음놓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면 천국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어차피 필연적으로 본연의 참아버지를 찾아나아가야 할 운명길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어떤 가치의 내용을 가지고 아버지라고 부르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부르고 있는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 하는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참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아버지는 6천년 동안 쉬지 못하고 싸워나온 아버지요, 섭리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수없이 어려운 고개를 참고 넘으면서 오늘의 나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수고한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땅 위에 살고 있는 어떤 인간이 느낄 수 없는 서러움과 슬픔을 느끼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진심에서 우러나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서러움과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비통함이 그 사람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심정이 교류되고, 천륜의 대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일신을 넘어설 때 비로소 하나님과 우리는 생명을 중심으로 영원한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 가운데는 남의 아버지도 있고, 의붓아버지도 있으며, 참아버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그 아버지가 참아버지가 아니고 남의 아버지나 의붓아버지 입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아닙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복귀의 조건을 넘어서 하나님을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한날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6천년 동안이나 소원해오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땅을 대하여 수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땅을 위해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고개를 넘으며 싸워나왔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아버지 앞에 원수 입장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회복해야 할 우리
    
현재의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심정적으로, 또 사실적으로 영원한 인연이 맺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을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것을 느끼면서 참아들딸의 입장에서 󰡐아버지여!󰡑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소망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인간이 참아들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인류의 소망이요, 모든 만물의 소원이며,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참아들딸로서 복귀의 운명을 타개해나가야 되겠는데, 여기서 우리가 단 하나 바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랄 것이 있다면 오로지 참아들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이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 민족은 살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우주적인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불쌍한 민족을 대표하고 우주를 대표하여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사정과 서러움이 이 땅에 사무쳐 있고, 하나님의 슬픔이 이 땅에 차고 넘치도록 남아 있다는 것을 느껴서 아버지의 입장에서 복귀의 제단을 쌓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입장을 복귀해야 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고, 아버지의 사정을 염려하면서 진정으로 심정이 교류되는 가운데서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업을 맡아 언제까지라도 아버지의 대신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 이를 위해 자신을 아버지 앞에 다 내어놓고 새로운 사명을 인계받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라도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마음속에 떠올라야 하고, 아버지의 고통과 근심 전체를 다 책임지지는 못할지라도 아버지를 마음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구원해줄 이 누구인가
    
오늘 우리는 어떤 곳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천적인 인연을 갖고 있으면서 사탄권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직계 자녀의 인연을 갖고 있으면서 사탄과도 타락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책임을 완수하여 영원한 선, 천륜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직계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가 침범하여 타락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하여 죄악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구원해주기 위해 이 땅에 오는 분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인간을 대표하는 입장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나타나는 주인공입니다. 이런 인연과 사명을 띠고 이 땅에 강림했던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을 중심으로 혈통의 인연을 갖고 나타난 그리스도였기 때문에 역사에 없는 중심으로서 새로운 변천의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피와 살은 아버지의 피와 살이요,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런 분이어야 했던가? 타락한 인간은 죄악의 혈통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의 피살을 대신하여 접붙여줄 수 있는 한 분을 하나님은 이 땅에 보내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섭리적인 필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왔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를 지게 되었는데, 그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들면서 󰡐너희는 내 피와 살을 먹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이냐? 인간의 마음과 몸, 피와 살은 하나님이 동하고 정하는 대로 함께 동하고 정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야 하고 혈통적인 인연을 맺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매개로 하여 그 일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생활권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탄은 여지없이 참소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친구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녔던 피와 살과 뼈, 몸과 마음을 우리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인간이 일체 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것같이 우리도 몸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되어 동하고 정해야 됩니다. 실제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누가 빼앗아가려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다음에 우리는 하나님을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참아들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과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을 지녀야 합니다. 즉 하나님과 우리는 참부자의 인연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혈통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악한 세상에 와서 외친 말씀은 땅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까지 없었던 참진리의 말씀이었고, 땅에 있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른 새로운 이념이었으며, 혁신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참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갖고 있는 말씀을 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떨어지는 곳곳마다 선의 실적을 나타내고, 부활의 역사,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청산하고, 부활의 역사를 일으키며, 재창조의 능권을 행사할 수 있는 말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씀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참아들딸이란
    
이 땅에는 많은 종류의 말이 있습니다. 말 같은 말도 있고 말 같지 않은 말도 있으며, 말씀도 있고 말도 있습니다. 이제 인간들이 가져야 할 최후의 말씀, 천륜의 말씀과 인연을 맺은 우리도 모든 피조만물과 일체 될 수 있는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만물을 주관하려야 주관할 수 없습니다.
타락은 우리가 알아야 할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찾아야 합니다.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인류는 이 말씀을 복귀하기 위해 수고해왔습니다. 인륜을 통하는 동시에 천륜을 대변할 수 있는 그 말씀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생활에서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활을 대신할 수 있는 참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은 현단계의 환경에서 시작하고 끝나야 하는 생명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생명체들은 역사를 따라 내려온 타락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의 환경과 인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주의 은사를 대신할 수 있고, 과거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으며, 미래의 이념을 입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영광과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가면서까지라도 찾고자 했던, 모든 인간들을 대표하는 장자의 유업을 계승시키고자 안타까운 심정을 품고 찾아온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야 땅과 사탄 앞에 하나님의 아들딸로 입증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아들딸로 살려고 해도 이 악한 세상은 우리를 전부 걸고 넘어지려 합니다. 이것은 복잡했던 6천년 복귀역사를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종말기인 지금까지 움직여나온 복귀섭리역사라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동반된 생활이념을 최후로 세워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찾아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뜻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피조세계를 창조하던 하나님의 심정, 더 깊이 들어가면 풀 한 포기를 짓던 심정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느끼면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여 지닌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대하여 품고 있는 심정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느낀 후에는 또 어때야 하느냐?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의 인간들을 염려해주고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서러움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고, 또 인간이 수많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고난에 시달려왔던 것을 동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역사를 책임졌던 수많은 선지 선열들의 생애의 전면을 한 순간이라도 느껴 동정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 옛날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느낀 하나님의 서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서러워한 것과 하늘과 땅을 잃어버리고 서러워한 하나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참아들딸로서 갖춰야 할 승리의 조건
    
아직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이 못 돼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뻗쳐올 수 있도록 해야 아버지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구원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만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참아들딸로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일이나 혈통적인 일 등 땅 위의 인륜적인 생활이 모두 천륜에 의해 이루어져왔으므로, 우리는 이런 이념을 통하여 모든 것을 비판해낼 수 있는 중심적인 가치를 우리 자체 내에 세워놓고 만민 앞에 그 가치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지금까지 싸워온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싸움이었는데, 이제는 하늘을 대신하여 땅을 중심으로 사람끼리의 싸움으로 끌어내 그 싸움을 책임질 수 있는 주인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 싸움의 노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승리의 조건으로 세울 것인가? 본연의 하늘에 속해 있는지 땅에 속해 있는지, 혹은 악에 속해 있는지 선에 속해 있는지를 알고 천적인 혈통의 인연을 가진 우리는 실제로 천적인 진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승리의 조건입니다.
천적인 생활, 진리의 생활을 통한 인격을 가졌다면 자신의 일을 예고할 수 있고, 천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들과 화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하나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세워놓으면 그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숭배할 자는 누구냐? 오늘 끝날에 처해 있는 성도들입니다. 또 하나님을 안식시켜드릴 자는 누구냐? 보잘것없는 우리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해원이 우리 두 어깨에, 몸 마음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역사의 중추적인 조건을 앞에 놓고 놀라운 천지간의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두려야 둘 곳이 없는데도 땅 위의 문제로 허덕이는 입장에 있으면 안 됩니다. 아직은 자신을 위한 안일한 생활이념을 세울 수 있는 과정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 위에 하늘 법도를 제시하여 승리한 후부터는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 처해 있는 우리입니다.
오늘날 민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선진국가들이 있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러운 것은 민족이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민족이다󰡑, 󰡐나는 하늘의 백성이다󰡑, 󰡐나는 하늘의 자녀다󰡑 하는 자각을 하고 살면 반드시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요, 악의 역사를 지닌 사회인 연고로,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고이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물과 불같이 하나되기 힘든 것을 하나되게 할 수 있는 긍휼의 정, 즉 자기 육신을 움직일 수 있는 천적인 내용을 갖추고, 진리를 갖추고, 그다음엔 생활환경과 인격을 갖추고, 그리고 이념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을 갖추어서 악의 세상을 뚫고 나가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우주의 끝날에 천륜을 대신한 우주의 심판 조건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책임을 다하고 직계적인 사명을 완수한 내가 되었느냐?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할 수 있는 진리, 생활이념을 통할 수 있는 인격, 하나님의 이념을 통한 사랑을 갖추어 만우주에 생명력을 주장할 수 있는 우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가 동하면 만물도 동하고, 그가 서러워하면 만물도 서러워하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갖고 우리가 하늘 앞에 서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시여, 6천년의 원한을 이 한날에 저를 보고 푸시옵소서. 6천년 동안 대적해나온 사탄을 나를 통하여 굴복시키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가야 할 길
    
우리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만물 앞에 사람을 지어놓고 󰡐만물을 주관하라󰡑 한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이뤄진 한날을 아직까지 맞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이뤄지면 모든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이념을 통한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생활을 통한 새로운 인격, 그리고 새로운 말씀과 진리를 갖고 또 새로운 혈통을 지닌 자녀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 한 사람을 걸어놓고 소망의 이념이 나에게 찾아들어오고 있고, 역사적인 이념이 나에게 찾아들어 오고 있으며, 현실의 이념이 나에게 찾아들어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한 사람을 세워 하늘과 땅 위의 직계 아들딸의 영광을 증거할 수 있는 한날을 앞에 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망각한 채 자기가 처신해야 할 입장을 모르고 자기가 머물러야 할 환경, 자기가 싸워나가야 할 소망의 환경을 지나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든지 이 땅에 하나님의 전체 이념을 실현하고,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천적인 영광의 터전을 조성하는 동시에, 지상의 모든 싸움을 종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을 갖고 싸워야 합니다.
이런 이념을 갖추기 위하여 나아가는 우리는 우주를 대신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또 실천적인 생활이념과 실천력을 갖추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과 실천력을 갖추고 나서게 될 때는 지금까지 하늘을 대적해오던 사탄은 자연히 굴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진 자녀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장한 슬픔과 억울함과 분함을 먼저 느껴서 이를 해원해드리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소망의 한 뜻을 향해 전진할 수 있어야 하겠고, 가나안 복지를 향해 나가던 이스라엘의 60만 대중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평탄한 생활환경, 자유로운 생활환경이 이루어지지 않은고로 싸우고 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 나가서 불신하는 가나안 7족과 싸워야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놓고 역사의 범죄자인가, 신앙의 변절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혹은 역사와 현실과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실체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을 걸어놓고 우리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늘 앞에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물은 갈라놓아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른 것도 있고 안 가른 것도 있었으나, 안 가른 것은 제물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앞으로는 국가적인 제물도 있고 세계적인 제물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제물의 이념을 갖고 나가는 사람은 자기 개인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회와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제물 되는 자리에서 패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갈라지는 자리, 싸움의 자리에서도 󰡐오! 할렐루야! 영광받으시옵소서. 6천년 동안 맺힌 하나님의 원한을 해원할 수 있는 영광의 한날을 이루어 드리겠나이다.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날 여호수아와 갈렙을 대신하여 담대하게 나서야 하겠고,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광야에 나가 신앙의 기준을 잃지 않고 승리하는 하늘의 선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뜻 가운데서 견디어 가나안복지에 들어가, 천륜을 대하고 다시 책임을 다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입장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승리한 입장에서 아버지를 영원히 모시는 참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2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