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길(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4 장 참된 자녀의 도리)

무지... | 20180428072854

5.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길
             
하나님과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리란
     
우리는 고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고아입니다. 땅 위에서 아무리 잘사는 가정환경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볼 때는 고아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잃어버린 자요, 참형제를 잃어버린 자요, 참부부, 참자녀를 잃어버린 자입니다. 고아와 같은 우리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이니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으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이 지구를 돌고 또 돌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보고 싶은 마음이 사무쳐 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연의 부모, 본연의 형제, 본연의 처자를 찾을 수 있다면 어떠한 죽음의 길도, 어떠한 험산준령도 개의치 않고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찾다가 안 되니 죽음 길을 갔습니다. 본연의 부모와 상봉하는 한날을 고대하는 우리는 그것이 그리워서 몇 시간이나 울어보았느냐?
이제 전세계 기독교인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내가 낳은 아들딸보다도,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이 그립다, 하나님의 옷자락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다, 손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이 사무쳐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만나 몸 마음을 다 드리고 품에 안기어 지난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고, 괴로움과 수고로움을 위로받을 수 있는 그 한 시간을 맞는 것이 우리의 최고 소망입니다.
상봉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느냐? 말씀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잘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워하는 자리, 오직 그리워하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리워서 미쳐보았느냐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눈이 물커질이만큼 그리워해봤느냐? 선생님은 하나님이 그리워서 일주일 이상 밤을 새우면서 기도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아침이 되어 햇빛이 비쳐오면 눈을 뜰 수 없었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리움에 사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죽을 수 없습니다. 가치 없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해결하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담판짓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높은 분이요, 모든 것의 주체 되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면 사랑의 주체요, 이상으로 말하면 이상의 주체요, 모든 존재의 기원이 되는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체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해야 할 존재가 우리 인간입니다. 막연하나마 그런 생각을 갖고 그분을 보고 싶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다, 그분과 더불어 같이 먹고 같이 살고 싶다는 그리움에 꽉 차 미쳐야 합니다.
그래야 되는데 눈은 눈대로, 손은 손대로 전부 다 따로따로 갈라져서 '아,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일체가 돼야 합니다.
심정적인 인연으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은 입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타락할 때보다도 고차적인 심정적인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못 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런 힘을 갖기 위해서는 눈이 뭉그러지고, 목이 메이도록 울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사람이 너무 울면 머리가 아픕니다. 그만큼 사무치게 그리워해야 합니다. '아버지' 하고 부르는 데도 사형장에 끌려가는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다른 먼 나라로 떠나는 아들의 입장에서 애절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때는 그런 기준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연맺기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였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재산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싶어 울어봐야
     
인간의 욕망이 무엇이냐?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보석이 있으면 마음이 갑니다. 남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여자들은 보석을 좋아합니다. 여자들이 보석을 좋아하는데, 얼마나 좋아하느냐? 남편보다 더 좋아하느냐? 보석을 좋아하지만 남편보다는 덜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보물보다 낫습니다. 사람이 보물보다 낫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하냐? 사람보다 못하겠느냐?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밖에 없는 분이라는 뜻이므로 사람보다 낫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인들은 사람을 무시하고, 물질을 무시하고 하나님만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 목까지도 내놓습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을 내놓고 죽을 길을 거쳐 찾아온 사람이 있다면, 찾아온 그 사람도 고생했겠지만 그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기다린 사람도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하하' 하고 웃느냐, 와락 붙들고 '엉엉엉' 우느냐? 와락 붙들고 '엉엉엉' 웁니다. 울 때는 흐린 날 구름 사이로 햇빛이 나오듯 반짝 우는 것이 아니라 콧물이 나오고, 눈물이 나오고, 침이 나오도록 웁니다. 울다 보면 눈물, 콧물, 침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서너 방울 똑똑 흘리며 '아이고 당신을 사랑해요' 하면 좋겠느냐, 사랑한다는 말보다도 '엉엉엉' 울면서 눈물, 콧물, 침이 국수발 늘어지듯 축 늘어질 때까지 우는 것이 좋겠느냐? 어떤 것을 원하느냐? 눈물이 그치지 않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그렇게 교회에 와서나 집에서나 하나님이 보고 싶어서 '엉엉엉' 울어봐야 합니다. 눈물, 콧물, 침을 흘리면서 목이 메이도록 울어봐야 합니다.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처럼 그저 아들 친구만 와도 눈물을 주루룩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부모를 가진 아들은 죽었지만 행복합니다. 그렇게 가슴 아파하는 부모가 있는 것을 볼 때, 죽었지만 행복한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행복한 자리에서 죽은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불행합니다.
     
     
역사를 초월해서 상봉할 수 있는 자리
     
타락한 세상에서 인간 끼리끼리, 부자지간에 어떠한 연유로 인해 서로 갈라졌다가 장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는 것을 영화 같은 데서 봤을 것입니다. 그렇게 헤어졌다가 50세가 넘어서 아들을 만났다 하게 되면, 그 부모는 아들을 만남과 동시에 '야, 이 녀석아! 지금까지 내 생각 한 번도 안 했어?' 이러느냐, 아니면 '야, 너하고 나하고 어디 한번 역사를 말해보자' 이러느냐? 역사를 초월합니다.
역사를 초월하게 하는 것이 뭐냐? 심정입니다. 자기 사정을 초월하게 하는 것이 심정입니다. 아버지인 줄 알게 되면 과거야 어쨌든 체면불구하고 자식은 '아버지'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야, 아무개야!' 하며 와락 부둥켜안습니다. '야, 조금 생각해보자. 내가 너를 찾기 위해서 눈물을 이렇게 흘렸기 때문에 너도 한번 흘리고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을 다 초월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지식도 아니요, 사연도 아니요, 사정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힘만이 역사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자, 토론해보자. 사연을 이야기해보자' 이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초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내 아버지다'라고 생각하는 여기서부터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의 인연이 지상의 기대에서 재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았다면, '제 자신이 이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인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아들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 또한 망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세계 또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20대의 젊은 청년 앞에 역사적 섭리를 통한 부모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일생 동안 자기 때문에 있는 정성을 다 들이고 희생했다는 사실을 몰랐다가 그런 사연을 알게 될 때는, 그 뻔뻔스럽던 얼굴은 땅을 향하여 숙이고, 눈물을 흘릴 줄 모르던 목석 같은 그 자식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집니다. 그 심정을 알고 부모의 무덤을 찾아가는 그 길은 천년사의 인연을 회생시킬 수 있는 심정부활의 길입니다. 무덤을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는 그 자리는 천지에 효의 도리와 충신의 도리를 싹틔울 수 있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심정이 교차되는 자리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심정의 친구가 되어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사람은 생활환경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다 하더라도 절대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외로운 것은 그러한 내정적인 사정과 심정을 누구와도 논할 수 없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무리 외롭더라도 그런 아들을 만나게 되면 그 외로운 환경을 잊어버립니다.
천지창조는 불안과 공포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쁨과 희열과 만족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심정적인 유대를 맺게 되면, 그곳이 아무리 사탄의 소굴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대해 기뻐하게 되면 거기에서부터 재창조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 시간이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마음에 솟구쳐 오르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는 사람, 세포를 통해 은혜의 흥취를 느끼는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혹은 사탄의 총칼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평화를 느낍니다.
심정이 교차되는 자리는 죽음을 넘어 희열이 창조되는 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자리는 사망권을 넘어 승리와 행복의 터전이 시작되므로 기쁨으로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기쁨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그는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이요, 그의 권한은 반드시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면서까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내정적 깊은 심정의 인연을 느꼈기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의 심정적 기반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 소망의 역사가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와 상봉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
     
그러면 하나님을 상봉하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을 대해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 죄를 지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만나게 되면, 아버지를 부르고 참부모님을 부르면서 '저는 이러이렇게 싸워나왔고, 이러이러한 예물을 가졌왔나이다. 저를 찾기 위하여 6천년 기나긴 세월 동안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며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이 땅 위에 오면 나를 중심으로 천국이 이루어져서 세상이 전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고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없어져야 합니다. 내 소원, 내 기대, 내 소망은 다 버려야 합니다. 만난 그날부터 주님이 명하는 대로, 분부하는 대로 나서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제가 이 길을 찾아나오는 데도 이렇게 힘이 들었는데, 6천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시면서 자녀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는 마음을 뼈살에 사무치게 갖고 위로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6천년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신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셨습니까? 그 마음을 이 자식은 아나이다' 해야 합니다.
먼저 칭찬받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찾아갈 때는 묵묵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 직후에 예수님 앞에 나타날 때 예수님은 묵묵했습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붙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간이 청산해야 할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역사적인 허물입니다. 그것을 청산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사를 걸어 '아담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노아가정은 이러이러했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가정은 이러이러했고, 모세를 거쳐 역대 선지선열들이 이러 이러했고, 예수님은 이렇게 가셨습니다. 이것은 다 저의 죄 때문이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사죄해야 합니다.
만나는 그날에 역사에 있었던 허물을 다시 한 번 알아야 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버리지 않고 찾아주시고 불러주시니 그 은사 황공 망극하옵니다' 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내 아들아!' 하면서 맞아줍니다. 이렇게 되어야 아버지와 아들이 상봉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자가 선의 가정을 향하여, 천국 가정을 향하여 가는 길입니다.
아버지와 상봉하게 되면 그 순간에 무엇을 바랄 것이냐? 예수님 혹은 하나님에게는 역대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6천년 동안 혈투전을 거쳐온 역사의 피어린 자국은 나 때문이요, 우리 민족 때문이요, 내 식구 때문이오니, 아버지, 황공하옵니다' 하고 용서를 빌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어떻게 했고, 타락은 어떻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 중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왜 안 받았느냐? 무엇 때문에 노아의 여덟 식구를 택하였으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호칭은 왜 나왔느냐? 야곱은 어찌하여 간교한 행동으로 에서의 장자기업을 빼앗았으며, 왜 야곱의 열두 아들을 중심으로 한 70식구가 애급으로 들어갔느냐? 왜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4백년 동안 고생했으며, 모세를 세워 왜 가나안 복귀를 했느냐? 왜 이스라엘 선민권을, 주권을 세우기 위하여 싸웠느냐? 왜 예수님은 와서 죽으셨고, 왜 다시 오셔야 되느냐? 앞으로의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와 시대적인 범죄, 그리고 미래적인 범죄상을 낱낱이 직고해야 합니다. 끝날은 직고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자기 죄만 직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죄만을 직고해서는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역사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시대적인 죄를 직고해야 되겠고, 미래의 죄상을 직고하면서 이것들과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를 청산한 연후에 미래 새 나라의 새 주인공으로 천주 앞에 내세우려는 것이 하나님이 지금까지 인간을 찾아나온 목적입니다. 또 하나님이 세우려는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 식구의 일원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고 있는 아버지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는 역사적인 아버지요 시대적인 아버지요 미래적인 아버지이므로 그 아버지는 이렇다'고 만민이 마음으로 심정으로 몸으로 자각해야 합니다.
끝날에 심판은 무엇을 갖고 하느냐?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기반으로 한 탕감복귀의 조건을 가지고 심판합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그것을 몰랐기에 그가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은 붙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말씀의 실체인 예수님과는 상관없습니다. 말씀을 접하여 아무리 실천해도 안 됩니다. 아무리 행동하여도 실체와는 관계맺을 수 없습니다. 왜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와 더불어 잘못된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회개는 무슨 회개냐? 아담가정으로부터 6천년 동안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오면서 그 시대시대에 하나님이 바라신 섭리의 뜻을 이루어드리지 못한 그 모든 죄상을 오늘 내가 책임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래적인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입니다. 역사적인 죄상을 청산하려는 하나님이 나를 찾는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과 인연맺어 자신의 죄상을 청산지어야 합니다.
또 시대적인 하나님이니 시대적인 죄상을 청산지어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의 죄를 모두 청산하고 미래의 새로운 하나의 기준을 세워 아버지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그곳이 우리가 영원무궁토록 살 수 있는 천국입니다. 
그렇게 된 연후에야 아들딸을 중심으로 하늘 가정을 형성하고 싶어하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하늘 가정의 아들딸로서 인정되어 영원무궁토록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필요없습니다. 그냥 살다 가면 천국입니다.
     
     
앞으로는 새 것만을 추구해야
     
지금 시대는 골동품을 찾는 시대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것을 찾아들어가기 때문입니다. 6천년 전에 인간 조상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하나님과 관계될 수 있는 그 맨 처음의 골동품과 같은 것을 찾아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에 골동품시대를 끊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할 시대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새 것이 나오면 때려잡아먹고 삼켜 버리니 망할 세상입니다. 소망의 시대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상 하는 세계는 새 것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새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러한 시대를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때가 되면, 6천년 묵은 역사를 다시 바라보지 않습니다. 서글픈 역사의 장을 뒤적뒤적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이상세계와 새로운 소망에 취해 살아야 합니다.
로마문명은 희랍문명의 재판(再版)이었습니다. 고대문명을 연구하여 고대정신을 다시 끌어냄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현실과 부합시켜 나왔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물론 역사를 연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소망의 기준이 못 됩니다. 지금까지는 옛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고 하나님 것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 있으니 그랬습니다. 앞으로는 새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과거를 붙드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이상적인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맙니다. 과거 유대교가 과거를 붙들다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자기가 믿고 있는 신앙도 좋고 교회도 좋지만 그것만 붙들고 있다가는 또 새로운 것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가늠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현실을 청산하고 미래의 보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의 하나님의 가정에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인 예수님을 세워놓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대해 형님이라 하는 말도 듣기 싫어했습니다. 왜 요셉의 아들들이 예수님에게 형님이라 하느냐는 것입니다. 신앙노정을 거친 후에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심정, 마음, 몸, 행동, 말을 통한 후에야 형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하는 말도 하나님은 싫어했습니다. 마리아도 그런 과정을 다 통한 후에라야 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타락한 혈족의 모든 것을 생각만 해도 하나님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인연맺은 것만을 요구합니다.
     
     
하늘 가족이 될 수 있는 자격자
     
역사적인 하나님, 시대적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슬픈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는 자는 심판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자기의 슬픔과 고통이 있을 때, 이것을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역사적인 슬픔과 고통을 맡아서 지금까지 나온 것만도 황송하고 고마운데, 이것을 모르고 자기의 슬픔과 자기의 고통까지 다 나타내는 자들은 전부 심판받아야 합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의 하나님에게 차마 자기의 고통을 놓고 기도할 수 없어 혼자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알아주십니다. '저의 고통보다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크십니까?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수고를 감당하겠사오니 제게 맡겨주시옵소서' 하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복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은사가 많은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입니다. 천상에 가보면 선생님 말이 허언망언(虛言妄言)이 아닙니다. 저나라는 그렇게 안 돼 있습니다. 천적인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높여주겠다고 해도 '황공하옵니다. 못 가겠습니다' 하고 세 번 네 번 거절하는 세계입니다. 치켜세워 달라고 하기 전에 '저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는 세계입니다.
세계는 잠들어 있습니다. 권력 다툼, 세력 다툼 하는 그런 신자, 그런 교역자, 그런 교단은 망합니다. 이제는 높아져도 도망가려고 하고, 위해주려 해도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외부의 핍박을 받고 몰림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서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그렇고, 아버지가 걸으신 길이 그런 길이었습니다. 하물며 불충한 죄인은 어떻겠습니까? 당연지사입니다. '이 몸에 고통과 서러움이 가해져서 민족의 고통과 서러움을 감할 수 있고, 세계의 고통과 서러움을 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서러움을 감할 수 있다면 고맙습니다' 하는 마음이 앞서는 사람은 사탄이 데려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정을 동경하면서, 하나님의 식구의 인연을 동경하면서 나를 잊어버리고 하늘 부모를 흠모하는 마음을 가진 무리를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러한 무리가 있다면 아무리 핍박이 가중된다 할지라도, 어떤 비참한 일이 닥쳐오더라도 그 무리는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땅을 붙들고 피눈물로 호소해야 되겠습니다. 역사적인 죄에 대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60억 인류를 위해 통곡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청년 남녀, 그러한 식구, 그러한 종족을 그리워합니다. 대한민국에 그러한 움직임이 나타난다면 대한민국은 소망이 있고, 영원히 남아질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7-259, 50-258, 49-255, 61-9, 2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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