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참된 도의 길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 흔히 말하기를 자아완성이라고 합니다. 즉 인생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을 완성해서 뭘 할 것이냐? 완성한 사랑에 접해야 됩니다. 완성한 사랑에 접한 다음에는 뭘 할 것이냐? 자신이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가질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무한한 행복의 요인을 나 자신이 갖는다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끊을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자식은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복잡한 환경의 자리에 가고 아무리 극한 기쁨의 자리에 가더라도 그 사랑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부모의 사랑이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그 자식의 마음은 딴 데로 가려야 갈 수 없습니다. 항상 그 부모의 품에 있고, 그 부모의 자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어떠한 자리에 가더라도 단 하나밖에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모체로 삼고 일생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기쁘나 슬프나, 어려운 환경에 있더라도 그 사랑을 생각하고 그 사랑을 중심으로 내일의 희망을 자극시켜가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가면, 부모와 자식간의 그 사랑의 인연은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적인 사랑의 인연을 맺었으면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그 사랑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느끼고, 그 인연을 중심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연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내정과 통합니다. 그런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세계에서 인격완성의 표준이란 어디에서 나오느냐?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고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인격완성이 됩니다. 이 사랑의 인연이 어느때에 맺어져야 되느냐? 사춘기와 같은 때에 맺어져야 합니다. 도의 생활에서 사춘기적인 감정이 떠나면 무미건조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한때에 도의 생활이 끝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길 앞에는 반드시 한계선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한계선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무한한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고 확고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동기가 바로 사랑입니다.
사춘기 소녀들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웁니다. 왜 웁니까? 거기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자기 나름대로 흠뻑 젖어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무한한 새로운 인연이 개재되어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이고 형상적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그 가운데 무한한 사랑의 인연이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파도치는 바다를 볼 때도 그 파도가 나를 치는 것 같고, 자연을 바라볼 때도 자연이 호흡하면서 나에게 환희를 가져다 주는 것같이 느끼게 됩니다. 기쁠 때 바라보면 최고의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슬플 때 바라보면 그 슬픔을 자극시켜서 도리어 슬픔 가운데에서 다른 새로운 각도의 희망을 자극시켜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사는 사람, 그런 심정으로 무한한 인연을 추구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외로운 자리에 나가면 외롭지 않는 무한한 인연이 봄절기같이 나타납니다. 이런 경지의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입니다.
정서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우리는 영적으로 봄철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동산에서 사방에 두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과 밝게 핀 꽃에 싸인 분위기에 품겨 무한한 가치를 음미하며 스스로 취하는 그런 경지에 들어가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틀림없이 우주의 동적이고 정적인,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는 듯한 무한한 힘에 접하는 그런 기분을 느낍니다. 한계지어진 몸이라도 그 한계지어진 경지에서 무한한 경지에 접해갈 때, 거기에서 생명과 인연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스스로 삶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스스로 행하는 것에 대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독자적인 감정을 느끼는 그 자리가 완성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러한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완성의 자리를 절대적인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굳은 신념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이다' 하고 나아가게 될 때, 제2의 주체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장 보람된 것입니다.
그 자리는 지식이나 인식을 통해서, 혹은 외적인 관념을 가지고 찾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랑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못 찾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의 눈은 다릅니다. 그리워하는 눈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입니다. 그런 눈을 보게 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요인이 맞아떨어지는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느끼는 감각권에서 자기 스스로의 인식을 초월할 수 있는 동기의 밑바탕이 되는 것은 정서적인 것입니다.
이런 정서적인 것을 중심으로 한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 손이 움직이면 힘이 소모된다고 생각하기보다 내 손이 움직이는 것도 하나의 심정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내가 사는 것은 보다 가치있는 심정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에서 혼자라고 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또 많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들이 전부 친구가 아닙니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찾아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갈 길은 하나밖에 없는데 전체와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전체에게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의 대상을 찾았다 할 때는 그것을 무한히 드러내고 싶습니다. 어디까지 드러내느냐? 하늘 끝까지, 무한정의 세계에까지 영원히 드러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의 바탕은 사랑을 갖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만 사랑하면 그 사랑은 일방적이요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하지만 서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세계에서 통일이 이뤄집니다. 그러지 않고는 통일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 가정을 보더라도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자기 나름대로 사랑의 대상을 찾을 때까지는 일방적인 입장입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입장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일방적인 입장에서 하나되었다 할 때는 전체를 대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단순한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또 모래로 말하면 한 알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전체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무한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입장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랑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 가장 고귀한 봄절기와 같은 사랑의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떠나려야 떠날 수 없도록 끌어당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져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없다면 거기에는 변혁이 일어납니다. 무한한 분립이 벌어집니다. 원래 분립은 발전하기 위해서 일어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로 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가야 할 생애의 추구점
우리가 생애를 거쳐가는 데 있어서 추구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그물의 벼리와 같은 것이 뭐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닻을 내리게 되면 무한한 세계까지 들락날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심정을 느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경지에 도달하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어떤 사람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는지 압니다. 알려고만 하면 그것이 전파같이 전해져 들어옵니다. 이것은 내적인 조건이 갖춰져야만 가능합니다. 상대적인 인연을 통하여 오는 것은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주체적인 내용을 통해서 들어와야 영속적입니다. 그 주체적인 내용을 결정지어주는 것은 상대적인 내용이 아니라 주체적 본연의 인연인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가면서 지금까지 추구해나오는 하나님의 인격의 중심이 무엇이냐?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 중심은 심정입니다. 그 심정의 극을 초월할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내가 죽음을 맞는 순간이라 해도 죽음의 고통이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의 고통을 잊고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겨서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최후를 마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에 왔다 간 사람으로서 그 누구보다도 최고의 선물을 안고 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기도할 수 있었던 그 경지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모든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경지입니다. 이 땅의 사망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에 접하는 그런 자리를 어떻게 모색할 것이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밥을 먹을 때나 잠을 잘 때나 일을 할 때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일생 동안 봄날을 노래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나이가 많아도 나이 많다는 인식을 안 하고 삽니다. 물론 어느누구나 마음은 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1백 살까지 살기가 힘들긴 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마음은 청춘입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처녀 총각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쪼그랑 할머니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꽃 피웠던 시절을 표준으로 생각합니다. 부부로 맺어졌던 그날을 생각하며 죽을 때까지 그대와 나는 하나라는 그런 마음으로 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늙었다고 해서 상대를 밉게 보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그 인연을 중심으로 일생 동안 그 느낌을 간직하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서로의 생애를 감싸주고자 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부부는 행복한 부부입니다. 쭈그러졌더라도 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그 부부는 적막한 부부입니다. 있으나마나한 부부입니다. 꽃으로 예를 들면, 동백꽃이면 동백꽃은 변할 수 없습니다. 동백꽃으로서 변할 수 없는 본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다는 것은 뭐냐?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봄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육체는 비록 늙었지만 그 내심에 피어오르는 근본적인 사랑, 그 사랑은 외적인 것보다 더 멋있습니다. 인간은 그런 사랑을 가져야만 행복합니다.
부자지간의 인연도 그렇습니다. 아들딸이 어렸을 때에는 무릎에 앉혀 놓고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기르지만 그 자식이 나이가 많아지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부모의 사랑은 자식이 나이가 많다고 해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더욱더 입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생애와도 바꿀 수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정성을 들이면 그 가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한 부모의 사랑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아들이라면 누가 효자라고 하지 않더라도 효자입니다. 부모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선을 추구하고, 자신이 젊었을 때 이상으로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될 때는 그 자식이 곧 효자가 되는 것입니다.
심정의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일생을 포괄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심정의 요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그렇게 되면 영어의 몸이 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죽음의 교차로가 나타나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심정의 요인, 즉 사랑을 그리워하며 찾아갈 때는 그냥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주고받는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게 되면 번식이 이뤄집니다. 거기에 절대적인 능력의 영이 개재하지 않고서는 번식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여자와 남자, 즉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식이 생겨납니다. 자식은 어떤 때에 생겨나야 되느냐? 생리적인 모든 감정뿐만 아니라 심정적으로도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서 생겨나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선하고 좋은 아들딸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세계는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라와 세계를 사랑하는 심정이 내면적으로 일치된 자리에서 자식을 낳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와 같이 생리적인 일치점과 내면적인 심정의 일치점을 중심으로 태어나는 아들딸들은 천운을 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보면 그 부모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사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딸이 증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효자 효녀가 되고 충신이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열남 열녀가 되어야겠습니다.
충신이 되기 위해서는 충신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또 효자가 되기 위해서는 효자 이상의 심정적인 인연을 세워야 합니다. 은연중에 자기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런 인연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선조들의 선한 천품을 받고 나와야 합니다. 충신과 효자는 자기 일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십 수백 대의 선조들과 인연된 내용을 중심으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심정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맺을 수 있는 길
이 우주는 무한한 힘으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힘이 있기 때문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람이 안 부는 것 같아도 바람은 항상 불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대기가 이동하지 않고 딱 정지해 있는 날이 없습니다. 각각의 분야 분야에 보충하는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 없는 고요한 날이라도 문을 열면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지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곳이든 공기가 채워져 있으면 거기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작용합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조그만 모양들이 자꾸자꾸 모여 우주적인 큰 태풍권을 형성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우주도 어떤 한 방향을 갖추어서 움직입니다. 이렇게 우주가 움직여나가는 것도 하나의 작은 끝을 중심하고 움직여 나갑니다. 이런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리적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의 한계선을 넘어서 무한한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한계선이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생리작용에 의한 힘보다 더 강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을 가지면 역사(役事)가 벌어집니다.
이런 세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상처럼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영속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한 사랑의 대상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어 연결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진리의 길도 아니요, 소망의 길도 아닙니다. 그 길은 심정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는 자리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차지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나님의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아들딸 자리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사위나 며느리보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싶어합니다. 며느리는 쫓겨나면 갈 데가 없습니다. 쫓겨나면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해와는 딸로서 쫓겨났는데 갈 데가 없었습니다. 갈 데가 없는 딸이었습니다. 그러나 갈 데가 없어도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며느리가 쫓겨났다면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갑니다. 또 사위가 타락해서 쫓겨났다면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가겠습니까? 안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사위를 찾아오는 법이 있다면 사탄은 하나님이 사위를 찾아갈 때 '나에게도 오십시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딸을 찾아갈 때는 사탄이 그렇게 주장할 도리가 없습니다.
나라의 역적이 되어 죽게 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의 어머니는 국법을 어겨서라도 아들을 살리려고 합니다. 나라에 반역을 해서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살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가능한 권이 어디냐? 그럴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곳은 세상의 법이 치지 못합니다. 그것이 뭐냐? 부자 관계의 사랑의 법도입니다. 부자 관계의 사랑, 본래 사랑을 하는 그 내연의 사연은 국법이라든가 세상의 법으로는 통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어한다고 했는데, 아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가겠느냐?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가 나자빠지면 어떡하느냐? 또 가겠느냐? 또 가다가 또 나자빠지면? 백번 천번 나자빠지면 어떡하느냐? 그래도 가겠다고 해야 합니다. 6천년을 통과하더라도 갈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자리는 대관절 어떤 자리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상속받을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예수님이 다 가르쳐줬습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가르쳐줬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세상에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죽는 데는 왜 죽느냐? 죽는 목적이 뭐냐? 살기 위해서냐? 사는 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지금 저 밑창에 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 가서 죽어야 되느냐? 최고의 자리에서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리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사랑 완성의 경지
지금까지 우리는 진짜 사랑하는 마음을 얼마나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느껴봤느냐? 그 사랑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성적인 사랑은 그림자 같은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 말고 주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워하다가도 또 그리운 사랑, 죽자 살자 좋아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또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무한히 주는 사랑입니다. 부딪치고 또 부딪쳐도 끝이 없습니다. 부딪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아 죽겠다고 계속 파고들어가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경지가 있습니다.
우주의 본원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인간 개개인에게 찾아들어가 절충되었다면 영원한 한날을 중심으로 올라가도 사랑이요, 떨어져도 사랑이요, 자빠져도 사랑이다 할 수 있는 경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지에서는 인격의 귀함이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사람은 말을 잘해서 좋다거나, 그 사람의 눈이 비둘기 눈 같아서 좋다거나 하는 감정을 초월합니다. 어디를 보아도 싫은 것이 없습니다. 그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은 향기가 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님의 분신이요,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보면 전부 다 친구입니다.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중심으로 자녀 입장에서 기도하면 대번에 압니다. 이 모든 느낌이 영적인 안테나를 통해서 들어옵니다.
우리가 잠을 잘 때 아버지가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감촉을 느껴봤습니까? 아들딸을 사랑하며 그렇게 고이 키워준다는 느낌을 느껴보았습니까? 그런 것을 느끼는 자리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인연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입체성과 신비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을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좋다는 것입니다. 꽃을 바라보면 꽃을 따라 아름다워지는 것 같고, 꽃 향기를 맡으면 모든 생리적인 감정이 동요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언제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연을 중심삼고 인연을 맺어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도의 세계에서의 느낌은 이렇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아름답게 보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느냐? 빛과 같이 보입니다. 그러기에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가 그렇게 빛을 발하면 잘나지 않은 사람, 즉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부를 보면, 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런 미남이 어떻게 저렇게 못생긴 여자와 같이 살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남자 눈에는 그 여자가 최고의 미인으로 보입니다. 첫사랑의 인연을 가진 사람, 첫사랑을 자기에게 1백퍼센트 부어준 그 사람 이상의 상대를 못 찾았기 때문에, 그 남자는 그 이상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기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통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인 사랑의 감정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조건적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권을 넘어서서 내가 태어난 것도 그분을 위해서 태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자랐다는 인식이 들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연된 근본 뿌리를 뽑아 버리고 다른 어디로 갈 수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뭐냐? 어떻게 완성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지내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도를 하려고 원리를 중심으로 글을 적어놓고 보면 틀림없이 잘 씌어 있지만, 이것을 해서 뭘 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원리는 전도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주체 입장에 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전도하기 위해 입을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그렇습니다. 제일 수준 높은 것을 체험할 때 제일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봄절기면 봄절기 기분이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기분을 느끼려면 체험 단계에 들어가야 합니다.
심정의 세계는 시간권을 초월합니다. 6․25동란 때 진짜 고생했던 사람은 지금 그때 얘기를 하더라도 눈물을 줄줄 흘립니다. 진짜 억울한 사람이라면 그럴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늙어 죽을 때까지도 자기 자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옵니다. 그 경지는 겸손을 초월한 경지입니다. 인간의 한계적인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는 길
심정은 모든 것의 모체입니다. 그 심정의 기원이 무엇이냐? 심정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절대적이고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내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갖추게 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비출 수 있는 반사경이 됩니다. 제2의 주체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반사경에 반사된 빛은 직접 비치는 빛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면서 그리워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하나님도 그리워할 수 있는 그런 내 모습이 되었느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아들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신세입니다. 부모를 찾아가려야 찾아갈 수 없는 황막한 천지 가운데 있는, 몸을 둘 곳이 없는 인간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어디엔가 부딪쳐 죽어 버려야 할 입장에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6천년 전 잃어버렸던 아들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나온 종교가 통일교회입니다. 이것은 적당히 해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백날 천날 해도 안 됩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식을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린 자식이 낯선 넓은 시장 같은 데 가서 부모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돈을 갖고 있다면 그 돈을 생각하겠습니까? 엄마가 사준 것에 대한 생각이나 하고 있으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관심을 다른 데에 두면 부모를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장이 떠들썩하도록 소리를 질러대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정 급하면 사람을 다치게 하여 소문을 내서 찾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머니를 찾다 찾다 못 찾고 화가 나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는 소문이 나게 해서 부모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나쁜 길을 통해서라도 부모를 찾으려는 마음으로 인해 죄를 범할 때는 용서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안팎을 보완할 수 있는 그런 경지가 벌어집니다.
정말 부모를 잃어버렸다면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부모를 찾기 위해 소리 중에 제일 큰소리로 불러도 보고, 또 몸으로 바위를 들이받아 만신창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한번 해보십시오. 세상을 전부 공(空)으로 돌려 버릴 수 있는 자신이 한번 되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을 찾을 길이 있다면 한번 부딪쳐보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자리
인간은 종교를 통해서 정서적인 행복을 찾습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 있을 때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리느냐?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서 제일 기쁘게 춤출 수 있고, 제일 기쁘게 노래할 수 있고, 제일 즐거워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돈이 많은 자리도,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자리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천년 만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자리, 사랑하는 부부가 원수로 인하여 부부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을 격파하고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 가정이 원수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완전히 해방되어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 이상 기쁜 자리는 없습니다.
따라서 복귀된 심정의 세계는 아들이 6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 환호하는, 아버지가 그 아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 이상 기쁜 세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전인류의 이상적인 터전이 되고 누룩과 같은 기반이 되는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고자 하느냐? 임금과 백성 사이와 같은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일 가까운 자리. 아버지와 아들딸의 자리에서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 원칙에서 벗어나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의 심정 기준이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과 상대관계를 맺고 있느냐, 종적으로 어느 정도 일치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기준을 중심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지 않고는 안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개인완성, 그다음에 부부완성, 그리고 선의 자녀 번식을 통한 사위기대 완성을 목표로 하고 나아갑니다.
우리는 종적 기준을 중심으로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사랑, 딸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인연으로 완전한 종적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요, 또 그것을 중심으로 완전한 횡적 기준이 세워집니다. 90도를 중심으로 3백60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심정적 관계를 중심으로 상하 관계, 전후 관계, 좌우 관계가 설정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3-71, 34-151, 33-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