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자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과 하나님
우리가 창조본연의 동산, 즉 에덴 동산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연상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필하고 축복하였던 아담 해와가 연상됩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으로 죄 없는 본연의 우리 조상들이 연상되는 동시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됩니다.
그러한 본연의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만물과 더불어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는 동산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롭게 찾아가서 의논할 수 있는 동산입니다. 그리고 이 동산은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을 위하여 지은 모든 피조만물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영광의 동산이요,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할 수 있는 기쁨의 동산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길이길이 같이 거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창조하였습니다. 그래서 피조 만물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모든 피조 만물은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기쁨을 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동산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동산이요, 창조주를 모셔놓고 그 창조주의 기쁨을 내가 같이 느낄 수 있는 동산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기쁨을 우리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까지 전달해줄 수 있는 동산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모셔놓고 살아야 할 인간이요, 하나님을 모시고 즐거워해야 할 만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심정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였는가? 하나님은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만물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 무한히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지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이란 명사가 필요없는 일체적인 이념권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이 불가분의 일체성을 갖추어서 수많은 세월이 지나가도 하늘을 대해 변함없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일체적인 입장에서 영원히 믿어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또 인간에게 영원한 당신의 생명을 주입시켜 영생불사의 모습으로 이 땅 위에 세워놓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하나가 되어 온 피조만상이 화동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터, 에덴 동산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이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의 흔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어릴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동산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인간은 우리를 지은 아버지를, 우리를 주관해야 할 주인공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아와 같은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를 느낄 수 있는 자
천지 창조의 과정을 보면, 하나님은 참된 자기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본연의 인간, 참된 선의 부모로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해 닷새 동안 모든 만물을 지어놓았습니다. 이 주인공을 지어놓고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느냐?
우리는 삼라만상을 매일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매일 같은 심정, 혹은 같은 감정으로 삼라만상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자라고 있는 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무한한 내적 심정의 인연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초목뿐만 아니라 들에서 뛰놀고 있는 짐승이나 곤충들도 무심하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풀 한 포기를 대하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는 것을 알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짓던 하나님의 은사에 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한 포기의 풀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체휼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타락한 인간이지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세계에서 하나님과 친구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풀 가운데서도 어떠한 풀을 제일 좋아할까, 꽃 가운데서도 어떤 꽃을 사랑할까, 나무 가운데서도 어떤 나무를 더욱 사랑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어진 존재들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제일 사랑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흠모하고, 하나님의 이념을 고대하고, 하나님의 복귀의 동산을 바라보는 참된 마음을 가졌다는 사람 중에는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의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은 많을지 모르나,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고등동물에까지 미쳐지는 하나님의 내적 심정의 인연을 통해서 기쁨을 체득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정력을 기울여 곤충을 만들었다 할 때, 하나님이 기울인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그 곤충을 사랑한다면 곤충을 만든 하나님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세계를 찾아들어갈 수 있는 길
그러면 타락 인간은 어떻게 해야 이 대우주 이념권에 잠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들어갈 수 있느냐? 그 방법은 간단합니다. 어떤 시인이 자연을 보고 시 한 구절을 지었다고 할 때, 독자가 그 한 구절의 시 속에서 시인이 바라보던 자연환경을 그릴 수 있고, 그 시인의 감정까지도 공감하게 된다면 그 시인은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화가가 찍어 놓은 점 하나에서 그 작가의 사람됨과 심정과 감정의 세계와 그의 이념을 헤아리게 되면 그 작품을 훌륭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평면적으로 보이는 어떤 상(像)이 문제가 아니라, 그 형상 가운데 담겨 있는 내적인 상(相)이 모든 가치의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하만상을 무심코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대 창조이상세계의 존재물은 모두 하나의 사랑을 목적으로 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미한 존재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온 정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엿새 동안에 지었지만 그 하나 하나의 존재물, 예를 들면 첫째 날이나 둘째 날에 지음받은 존재물에도 엿새 이후에 벌어질 대우주의 창조이상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어느 것이든 하나님의 심정을 뿌리로 하여 지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옛날 사람들이 남긴 유물을 소중히 여깁니다. 그들이 지니고 살던 것들을 골동품이라고 하여 소중히 여깁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모래알이 떨어져 있다 할 때, 그 모래알 하나에도 하나님의 심정이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귀한 사람이나 훌륭한 사람보다 더 높은 창조주의 손길을 거쳐서 생긴 심정의 결실체입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존재물인 것을 알고 모래알 하나라도 우주와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만물이 그렇게 인연되어 있습니다. 인연이란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맺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대우주의 모든 존재물은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의 심정 밖에서 생겨난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이는 위대한 시인입니다.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천주적인 심정을 느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면 그는 우주적인 시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것을 대해 너무나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천하만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조그만 모래알 하나에도 우주의 이치가 들어 있고, 하나의 원자에도 무궁무진한 우주의 조화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잘 알 수는 없지만 어떤 복합적인 힘을 통하여 나타난 결과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분자를 지나 원자, 원자를 지나 소립자에 이르기까지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의식과 목적을 갖추고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거쳐 나왔고, 반드시 하나님과 심정적인 관계를 맺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도인은 어떤 사람이냐?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하나님!' 할 수 있는 심정으로 자기의 가치와 동등하게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도인입니다. 그렇게 그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예술가입니다. 각양각색으로 존재하는 천지 만상을 보고 하나님의 각양각색의 사랑과 심정의 묘미를 발견하고, 그것들과 친구가 되어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만우주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만물의 영장입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을 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어놓고 '보기에 선한지라' 하였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언제 느끼느냐? 어떤 목적을 이루었을 때 느낍니다. 지은 만물에 하나님의 목적의식이 내재되어 있기에 창조된 만물을 놓고 하나님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요구하는 도의 표준
마음의 문을 열고 다시 한 번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회상해 봅시다. 본래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부자의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것을 모르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우고 소망하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감정이 스며들고, 만물을 지은 하나님의 창조의 감정이 스며들기를 바랐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만물을 대할 때마다 신비감을 느낍니다. 그때 정열이 최고조로 불타 올라 시를 쓰면 놀라운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대우주의 심정을 지닌 인간으로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 목표대로 성숙하기를 고대하고 고대하였습니다.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성숙하면 할수록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대할 때 각각 서로를 대우주 전체의 실체로 감각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의 감정세계에 하나님도 들어가고 만물도 들어갈 수 있는 정도까지 인간이 성숙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러한 자리에 들어간 부부가 되어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화하고 만우주와 심정적으로 화하여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들을 지음으로써 모든 소망의 목적이 완결되었다' 하는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날 천지는 이 꼴이 안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신비스러운 경지, 도의 길을 찾아들어가면 그런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호흡하는 공기 속에서도, 뛰는 맥박에서도 천주의 감정이 넘쳐 흐르는 것을 느끼고, 자기의 손을 보고도 웃을 수 있고 무한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입니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그런 경지에 갔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만물과 더불어 아름답게 살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그런 사실을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기도하라. 도(道)의 길을 가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나서라. 나서서 올라오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올라가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지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세계에 요구하는 도의 표준입니다.
우리는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과 심정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그러고 있느냐? '하나님!' 하고 부르는 순간 하나님과 더불어 화하여 사랑할 수 있고,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 존재가치를 1백퍼센트 인정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져 있느냐? 그 세계가 심정의 세계요, 사랑의 세계입니다. 설명이 필요한 세계는 이치의 세계입니다.
최후에는 어떤 이치로도 해명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의 심정세계, 설명은 못 하지만 절대적인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해명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해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논리로써 해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도 창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탄식하고 허덕이며 죽느니 사느니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길을 거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다가 인간은 도의 길을 갑니다. 세상에 믿을 것 없고 의지할 것 없어서 가는 길이 도의 길입니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행로의 낙오자들입니다. 사회생활에서 낙오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입니다. 버림받은 무리지만 버림받은 무리들에 의해 역사는 지금까지 수습되어나왔습니다. 오늘날의 문명 또한 배척받은 무리들로 말미암아 발전되어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깃들어 있는 만물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줄 손수건을 만든다면, 어떻게 만드느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손수건이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으로 옮겨질 때, 부모의 사랑과 심정도 함께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지어주었는데도 그 아들딸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고 하면 그들은 부모와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천지 만물을 지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지어준 손수건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불변의 가치를 지닌 실존물로, 당시뿐만 아니라 후손만대에까지 영원히 당신의 심정의 인연을 노래할 수 있는 존재물로 하나님은 이 만물을 지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꽃을 보며 무슨 요소로 되어 있는가 하며 성분을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보다 꽃을 보며 웃고 즐기는 사람을 더 귀하게 봅니다. 과학은 분석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무엇에 대해 보고 느낀 감정을 표현합니다. 느낌입니다. 그러기에 예술은 과학보다 앞섭니다.
산이나 들에 가서 풀 한 포기를 보았을 때, '아, 이것은 무슨 풀인데 무슨 씨로 생겨났고, 무슨 원소가 부합되어 이렇게 되었다' 하는 것과 '야, 아름답구나' 하고 감탄하며 심정으로 대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귀하겠느냐? 심정을 갖고 대할 때는 일대 일로 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체를 대하는 것입니다. 분석적으로 대하는 것과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입장,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곤충이나 새, 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에도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맺어지는 그런 내적인 감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어떤 공식과 정의로써, 즉 과학적인 논리로 그것을 해명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는 못할지라도, 혹은 예술적으로 그 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힘이 없을지라도 이는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하늘을 주관할 수 있고 땅을 주관할 수 있는 온 천주의 주인공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것이 인간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훌륭하게 되었다고 저주하겠느냐? 그 이상 더 좋아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입장에 놓인 인간이기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결정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인간은 이 사랑의 감정을 무한세계까지 인연지을 수 있는 중심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중에 들어가고,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는 것보다도 풀 한 포기를 보고도 그것을 지을 때의 아버지의 손길과 지은 다음에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을 아버지의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더 그리워서 눈물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천주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리는 감각이 예민한 사람을 보고 이상주의자니 하면서 돌았다고 합니다. 육감을 갖고 이상세계를 느끼는 사람을 보고 돌았다고 합니다. 돌아도 목적을 위해서 돌면 됩니다. 춤추는 것은 도는 것입니다. 그런데 춤추는 것을 보고는 돌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는 것이라면 그 이상 도는 것이 없는데도 좋다고 합니다. 기쁠 수 있는 환경을 중심삼고는 돌았다는 비난을 받고 쫓겨나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면 어떠해도 좋습니다.
지어진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고 있기 때문에 그 만물에 대해서 아버지의 그림자와 같이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만물은 아버지의 심정의 그림자입니다. 아버지가 있는 정력을 다 기울여 지은 것이요, 아버지의 손길에 의해 지어진 것이니 아버지의 대신자와 같이 귀하고 가치있게 여기며 사랑해주기를 만물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오늘날까지 어느 누구도 그렇게 대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만물이 탄식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는 자연을 바라보고 '세상의 왕, 혹은 어떤 유명한 사람이 갖고 있는 훌륭하다는 물건에 비할소냐. 골동품에 비할소냐. 어떤 유명한 부인이 입고 있는 호화로운 옷에 비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연세계 앞에 자신도 모르게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명체를 볼 때, '인간이 만든 어떤 물건에 비할소냐.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보다 훌륭하겠느냐' 하며, 하나님이 심정을 기울여 지은 만물을 붙들고 무엇보다도 귀하게 느끼는 자가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러한 자리까지 내몹니다.
탄식하는 만물의 한을 해원해주어야 할 인간
인간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것은 무엇이든지 좋아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제일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 지은 만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서도 6천년 전 그것들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심정과 창조의 손길을 체휼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풀 한 포기를 보고도 눈물을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붙들고도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인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외로웠느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지에서 우리는 만물을 대하여 '면목이 없구나. 본연의 인간 조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심정을 노래하면서 영원히 그 품에 안겨 살기를 얼마나 고대했느냐? 고대하던 일차적인 소망은 깨지고 한스러운 타락의 후손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탄식권내에서 다시 제2의 인간조상을 맞기 위한 역사노정을 거쳐오기에 얼마나 수고했느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만물을 놓고 대대로 내려오는 자기 가문의 보물보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보석이라고 하는 다이아몬드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었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것을 심정적으로 알아주고, 그것을 붙들고 눈물짓는 사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면 갈수록 만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풍부해집니다. 도통(道通)이란 그런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심정을 통해서 보면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오늘날 사람이 만든 물건은 1백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길을 거쳐 지어진 순수한 이 풀 한 포기를 무엇보다도 가치있게 느낄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어떠한 향기보다도 공기의 맛이 더 좋습니다. 사람이 공기의 맛을 알고, 햇빛의 맛을 알고, 물의 맛을 알면 병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심정으로 살면 누구나 건강체가 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심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심정과 더불어 영원한 존재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러니 밥 한술을 먹을 때도 '감사합니다. 황공합니다. 타락의 후손 앞에 이것이 웬일입니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맛이 있다, 없다, 잘 입었다, 못 입었다, 좋다, 나쁘다, 지위가 높다, 낮다'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는 길
하나님의 심정권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달라면 무한히 줄 수 있고, 놀자면 무한히 놀아줄 수 있고, 가자면 무한히 가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원수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런 견지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잃은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없는 것 같지만 나는 부자다' 하는 우주관적인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천적인 이념세계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생활환경에서 하나님과 인연맺어야 할 입장에 있는 우리의 생활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살자.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하여 사는 자가 되자'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결혼하면 어떤 아들딸이 나오겠느냐? 그런 심정의 아들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조상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무엇을 바랐느냐? 그들이 서로 사모하여 심정적인 인연을 맺어 만물을 대신한 아담 해와, 하나님을 대신한 아담 해와, 천상천하를 대신한 아담 해와로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담 해와가 우주 전체 이상의 가치를 완성한 모습으로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나서면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여 결혼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오늘날까지도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독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천리(天理)의 원칙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도의 세계는 혼자 가야 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상대적인 관계는 원수였습니다. 예수님도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말씀만 남기고 갔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올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아야 할 신부 된 입장에 서 있는 우리는 어떤 내적인 심정적 가치를 갖추며, 어디서부터 심정의 문제를 수습해야 하느냐? 기도만 하면 되느냐?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됩니다. 생활에서부터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세계에 있어야 할 것인데 인간으로 말미암아 슬픈 세계, 탄식권에 있게 된 만물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에 무한한 슬픔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라야 하나님의 심정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농사를 짓더라도 풀 한 포기를 자기 부인이나 아들딸과 같이 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이 향하는 곳에 생명이 따르게 되고, 사랑이 움직이는 곳에는 자연히 생명이 뻗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는 생명의 요소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렇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비료를 주지 않아도 농사가 잘될 때가 옵니다.
호미에 파인 흙덩이로부터 손에 쥐어지는 곡식의 한 알까지도 눈물이 어리어 친구와 같이 대하고 귀여워하고 잘 자라거라 하는 마음으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에 있는 모든 생명의 움직임이 왕성하게 되어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게 됩니다.
한 나라에 쇠운(衰運)이 들려면 그 나라의 만물에서부터 쇠운이 듭니다. 한 집안에 쇠운이 드는가 안 드는가 하는 것은 그 집의 아들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정의 양, 심정에 어리고 느껴지는 양이 점점 작아지는 집은 얼마 못 갑니다. 몇 대 못가겠구나 하는 감이 옵니다.
그러면 앞으로 복받을 수 있는 민족은 어떠한 민족이냐? 심정의 인연을 생활의 감정으로 삼는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한국이 그렇습니다. 대우주의 이념과 관계를 맺고 눈물짓는 날에는 이 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풀 한 포기를 대하더라 심정으로 대하고 친구로 삼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의 인연을 통한 구원의 길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록 죄악의 후손이지만, 타락하기 전 본연의 하나님의 손길을 통하여 지음받을 당시에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으니 분하고 원통하다는 심정으로 우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반드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타락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분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왜 타락한 아담 해와의 아들딸로 태어났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타락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저를 인간의 조상으로 지으셨더라면 아담처럼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요, 해와처럼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심정을 저에게 허락하실 수 없겠습니까? 아담 해와를 소망의 심정으로 바라보시던 내용이 있다 할진대, 그 심정의 내용을 저에게 나타내주실 수 없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타락의 후손 중에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도 문을 두드려야 열리고 찾아야 찾아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먼저 땅을 주관하는 만왕의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슬픈 자의 왕이 되려 하였고, 우는 자와 고통받고 죽어가는 자의 왕이 되려 하였고, 지상에서 사탄세계를 정복하는 개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요, 우리의 신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결과적인 명사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되려는 사람은 예수님의 심정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정의 승리자요, 심정을 갖고 슬픈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우신 분이요, 고통받는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고통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정을 갖고 죽은 자의 왕이 되기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정적인 인연을 맺지 않으면 구원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천지의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일편단심 이 대우주에 심정세계를 다시 세우려는 것이 구원역사이니, 그 구원역사의 노정에서 내가 어느 정도의 재료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것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만물을 재료로 삼고, 인류를 재료로 삼고, 영계의 천천만 성도를 재료로 삼아 내가 움직이면 만물이 어느 정도 움직이고, 인류가 어느 정도 움직이고, 천상의 천천만 성도가 어느 정도 움직이느냐에 따라, 내가 땅 위에서 부르짖는 것이 이 우주에 어느 범위까지 심정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느냐에 따라 천상에서 나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예수님이 죽는 순간의 슬픔은 하늘에 반영되었고 만우주에 반영되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어떤 구주냐? 심정의 구주입니다.
천국을 찾아가는 길
우리는 이 대우주권에 숨겨져 있는 사랑의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이 심정이 자리를 잡는 날에는 만물도 안식하고, 하나님도 안식합니다. 그러한 심정을 어디서부터 찾을 것이냐? 일상생활에서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좋은 데 구경하고 오는 사람은 죽을 상이 되어 집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벙실벙실 웃으며 옵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생활한다면 아무리 힘든 일을 한다 할지라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붙들고 슬퍼했지만, 오냐, 나는 이와 같은 일을 얼마나 그리워했더냐' 하면서 일을 하면 싫증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음악가는 예술적으로 살다가 예술적으로 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데는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외적인 형태는 아무리 잘 갖추었다 할지라도 속이 썩은 자는 사람 취급을 못받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움직여낼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사람은 어디를 가도, 물가에 가거나 산에 가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친구가 있습니다. 찬 바위 위에 누워 잠자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냐!' 해야 합니다. 노동판에 가서 일한다 하더라도 옛날에는 어땠는데 오늘은 이렇게 되었다고 하며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은 내 심정은 아무도 못 빼앗아간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땅 위의 악하다는 요소, 슬프다는 요소, 어떠한 사탄의 요소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백성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심정을 찾아 헤매는 개척의 선봉자로 섰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냐? 타락한 세계입니다. 그래서 반대 역사가 벌어집니다. 한 발짝 나가면 찌릅니다. 두 발짝 나가도 찌릅니다. 우리는 이 찔림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인생행로입니다.
타락권에 있는 한 우리는 이 심정을 중심삼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 승리했다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 자라야만 민족 앞에 설 수 있고, 세계 앞에 설 수 있고, 또 천주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철칙입니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서기 전에는 안 됩니다. 빨갛게 화장하고 반질반질하게 해서 돌아다녀도 안 됩니다. 좋은 것 먹고 고운 것 입어도 안 됩니다.
자신은 먹지 못했지만 먹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하고, 자신은 입지 못했으면서도 못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은 집이 없으면서도 고루거각(高樓巨閣)에 사는 사람을 보고 눈물지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야 승리했다는 기준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천국은 지옥을 정복한 후에 갈 수 있습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지옥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세속적인 만족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세상이 즐기지 않는 곳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간단합니다. 지옥 가기를 원한다면 이 세상의 행복한 자리를 찾아가고, 천국 가기를 원하거든 이 세상의 불행한 자리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위인들은 전부 그 시대로부터 배척받은 분들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4-64, 6-327, 9-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