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에 대한 체휼(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4 장 참된 자녀의 도리)

무지... | 20180424091351

1. 하나님에 대한 체휼     
        
얼마나 하늘과 더불어 살려고 했느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그 생활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우리, 또는 내가 얼마만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느냐, 혹은 생활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생애노정에서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갖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타락권에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하루 24시간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도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해서 24시간, 자기가 눈을 뜨고 의식이 있는 한 언제나 생각합니다. 자식을 생각하는 이상의 것이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는 한 언제나 자식을 생각합니다. 타락한 세계에서도 부모의 심정은 그렇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의 주체인 하나님은 인류를 자녀로서 바라보고 있는 한 그 자녀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24시간 우리를 염려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말뿐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나 오나 어떠한 행로에 서 있더라도, 또는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그 자리에는 나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은 나만 인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시선에는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는 시선이 깃들어 있고, 내가 내미는 손길에는 하나님의 동정의 손길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보고 느끼는, 감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주체 대상 관계에서 일체적이다 하는 것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악한 자리에 나가려야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해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그런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하려고 했느냐? 우리의 생활을 분석하면 할수록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참된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찾아온 하나님이 부모의 사랑을 가진 주체적인 분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염려했느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염려할까봐 내 생활을 절제하고, 하나님이 고통을 느낄까봐 내 환경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을 위주한 생활이 되도록 노력했느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혼자 있지만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피해를 보고 가해를 당하는 환경에 있다면 그 자리는 하나님이 가해를 당하는 자리요, 하나님의 슬픔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이 악한 환경일수록 악이 승리하게 하는 것보다도 선한 하나님 앞에 굴복하도록 만들어나가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생활의 터전을 우리 생활에서 확정짓지 않고서 하나님을 체휼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우리 생명의 요인
     
'사랑' 하면 막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부모가 없는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또 부부의 사랑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 봤자 혼자 살고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사랑이 얼마만큼 크다고 설명해도 자녀를 낳아 길러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가 느낄 수 있는 주체나 대상권에서, 그와 나와의 행동의 일치점을 갖출 수 있는 데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데에서, 그의 바람이 내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에서, 그의 일체가 내 일체로 연결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상대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하면 막연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에만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그 기도하는 시간 이상의 환경권을 내 생활권에 연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휼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인데, 세계의 수많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그러한 내정적인 면을 생각뿐만 아니라 실천생활에서 넓혀나가야 비로소 체휼을 하게 됩니다. 막연히 기도한다 해서 체휼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신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의 폐단이 무엇이냐? 기도나 집회를 할 때에는 그런 것을 느끼지만 생활에서는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그 환경에서 하나님이 항상 같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아를 어떻게 확정짓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체휼이 우리 생명의 요인입니다.
     
     
입체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라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닙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를 중심으로 볼 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있어야 된다고 말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은 내가 있기 전에 있었고, 내가 생각하기 전에 있었으며, 내 모든 감각의 일체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입니다. 알고 인식하는 것이 원칙이 아니라 인식하고 아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추우면 춥다 하는 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추우면 추운 것을 느껴서 아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세포로 느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서 체휼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떠한 환경에서 인식되느냐 할 때, 대다수의 사람은 자기가 정성들이는 그 시간에 인연이 맺어진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습화된 죄악의 생활권에서 살기 때문에 선과는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있는 정성을 다 들이면 몸과 마음이 통일될 수 있는 접촉점이 가까워지는 것은 틀림없지만, 아직 죄악권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듣고 말하는 이 모든 것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여보' 하는 데도 그 울리는 음파의 전달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더불어 있다는 입장에서 말을 하고, 듣는 데도 역시 그런 면을 들을 수 있는 체휼적인 입장이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면, 날아가는 새 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고, 불어오는 바람 소리도 그냥 들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빛도 자기에게는 무한한 그 무엇을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것을 자기가 환경에서 체휼해야 합니다.
종교는 생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체휼에서부터 시작합습니다. 종교의 인식은 어떠한 관념적인 지식 논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이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체험을 갖지 못하는 신앙은 장구한 신앙이 될 수 없고, 체험을 갖지 못한 신앙은 자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환경에 따라서 치우치게 됩니다.
내가 외로울 때, 그 외로움이 나만의 외로움이냐? 외로운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외로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내가 외롭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외로워하는 것을 느낀다면 이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쁠 때도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내가 기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그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나 그 느낌이 나를 지배합니다. 산에 가나, 들에 가나, 집에 가나, 도시에 가나, 직장에 가나, 혼자 밀실에 있으나 어떠한 곳에 있더라도 그 느낌은 언제나 자기 마음과 같이합니다.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오늘날 '신학(神學)'은 신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그러나 배워서 아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알아 가지고는 심정을 모릅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저 사람이구만. 내가 보니까 눈은 어떻게 생기고, 코는 어떻게 생기고, 뭐가 어떻게 생겼구만' 하고 봐서 아는 것으로는 선생님을 모릅니다. 선생님을 알기 위해서는 선생님과 같이 살아봐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살아보면 그 가외의 것은 다 드러납니다. 사는데 맹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잘살아야 합니다.
잘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사랑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통해 체휼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슬퍼할 때에 나도 슬퍼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기뻐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식이 천리만리 떨어져 있더라도 부모의 사랑은 언제나 자식과 같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지식적인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 또다시 제2 대상을 상대세계에서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극과 극을 넘어서서 편재(遍在)합니다. 어디든지 자식이 있는 곳이면 같이할 수 있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는 사랑을 통하는 데는 무소부재입니다.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사랑만이 아들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습니다. 전능한 권한은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교육해서 뭘 하고 싶었느냐? 교육해서 머리만 크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알려줘서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이 살려고 한 것입니다. 살면서 뭘 하자는 것이냐? 울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이냐? 좋아하자는 것입니다. 좋아하려니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편재성을 어떻게 느끼느냐? 공기를 하나님의 입김과 같이 느끼고, 불어오는 태풍을 하나님의 콧김과 같이 느끼며, 흐르는 물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위해 수난길을 극복해나오면서 흘린 땀과 같이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태양을 이 우주 전체의 생명의 요인으로 느껴야 합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 자연은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는 데도 하나의 교본이요, 교재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교재로 전개해 놓은 것이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실감하느냐? 이 우주의 만물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화폭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 하는 신념을 갖고 나올 때, 그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내가 백만큼 줬으니 너는 나에게 백 하나만큼 줘야 한다' 이렇게 바라고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면서 부끄러워합니다. 주고 나서 부끄러워하는 사랑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왔다 갔던 수많은 왕자 왕녀가 입던 옷보다 더 좋은 옷을 해주고 싶은데 못 해줘서 미안하다' 하면서 그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따라서 그런 부모는 아들딸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습니다. 거기에 취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습니다. 한바퀴만 돌아서는 취하지 않습니다. 몇 바퀴 돌아가야 중심을 잃고 취합니다. 취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체휼하는 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우리가 '밥' 하게 되면 무엇이 중요하냐? 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됐습니다. 타락이 뭐냐?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된 것입니다. 선후 관계가 거꾸로 된 것이 악입니다.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되고, 먼저 되어야 할 것이 나중 되고 나중 되어야 할 것이 먼저 됐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돼야 할 것이 주체가 되고 주체가 돼야 할 것이 상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이 주체냐 할 때, '하나님이 주체다' 하는 절대적인 관념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 하면 내가 주체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대상으로 선 '나'입니다. 그 대상으로서의 '나'가 주체 앞에 일치화되지 못할 때 대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그것이 원리관입니다. 내 눈도 주체로서의 눈이 아닙니다. 입이나 팔다리도 주체로서의 입과 팔다리가 아닙니다. 내 전체는 대상으로서의 '나'입니다. 주체가 없으면 내 생명도 없습니다.
아내에게 남편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아무리 있다 하더라도 없습니다. 인심 좋은 동네에 들어가 산다 하더라도 혼자 살면 누구든지 와서 건드립니다. 그게 자동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쥐 못 잡는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벌이를 못 하는 남편이라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절대 필요하고,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 합니다.
효의 길은 어떤 길이냐? 자기의 주체의식이 발발하면 효자의 길은 깨집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뭐야?' 이렇게 될 때는 또 다른 주체의식이 발동됩니다. '내가 낳아 달라고 해서 낳았나? 자기들이 좋아서 낳았지' 이렇게 되면 마지막입니다. 그건 둘 다 깨져나갑니다. 효는 주체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나는 대상이다' 이렇게 되어야 효입니다.
충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충신이 '군왕이면 군왕이지, 군왕이면 다야? 알기는 내가 군왕보다 더 많이 알지. 그의 눈과 내 눈이 뭐가 달라? 다 마찬가지야. 그 몸보다 내 몸이 더 나으면 나았지' 이렇게 되면 충신의 길은 다 깨져나갑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엇갈리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체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체휼하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대상이다' 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대상이면 언제나 대상입니다. 좋을 때만 대상이고 나쁠 때는 대상이 아닌 법이 없습니다.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가면 아내도 죽을 운명에 부닥칩니다. 남편이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너 죽을 자리에 잘 들어갔다. 나 보따리 싼다' 하는 아내는 죽어야 합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가 죽을 자리에 들어갔는데 '어, 잘 들어갔다. 장가 한 번 더 가겠구만' 하는 남편은 죽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위하는 대상이나 위하는 주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위하는 주체는 있는데 위하는 대상이 없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위하는 대상이 있는데 그 주체가 없어도 반드시 그 주체는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완전한 대상이 나오면 주체는 자연히 형성된다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완전한 대상은 생겨나는 것이 천지이치입니다. 또 완전한 대상이 나오면 주체는 자연히 형성됩니다. 왜냐? 불완전한 권내일수록 완전한 것이 나오면 가지 말라고 해도 완전한 것을 반드시 따라가게 마련입니다.
어떻게 따라가느냐?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누구든지 따라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쉽게 좋아질 수 있는 그런 주체를 만나게 되면 본심은 압니다.
그건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도 어떤 사람을 보면 공연히 마음이 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반면 뭘 달라는 것도 없는데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선조로부터 자기와는 상충적인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손이면 반드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지남철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지남철의 주체라면 인간은 작은 지남철 가루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니 인간은 끌려갑니다. '나는 끌려간다'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을 나설 때나 시장에 갈 때 자기라는 관념을 벗어나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이다' 하는 관념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나는 조그마한 지남철이므로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면 반드시 하나님과 주고받고 있을 것이다. 주고받고 있기 때문에 강한 지남철이 작용을 할 것이다. 그래서 그 근처로 가면 내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리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 생활태도가 필요합니다.
상점을 가더라도 자기 마음이 끌리는 데에 가서 물건을 삽니다. 자의적이거나 고의적이거나 간에 이러한 생활습관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게 될 때, 말을 배우는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 하느냐, 모르고 '아버지' 하느냐? 습관화되다 보니 '아, 이렇게 되면 아버지구나!'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합니다. 그 추상명사 같은 것도 어떻게 알아서 납득하는지 신기합니다. 그것을 설명해서 알려주려면 백과사전이 모두 동원되어야 할 텐데도 아무것도 없이 그런 말들을 잘 배웁니다.
신앙생활이 바로 그래야 합니다. 그러려면 생활에서 세부적인 분야를 많이 대해 나가야 합니다. 많이 대하면 자연히 습관성에 의해서 알게 마련입니다. 설명에 앞서 자연히 자기 해명권이 벌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언제나 '나는 조그만 지남철과 같은 철분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어떠해야 되느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린아이는 주체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 이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다른 욕망의 대상이 없습니다. 어머니만 생각합니다. 일체의 모든 생명이, 감각기관이라든지 의식기관이 전부 어머니에게 동원되어 있습니다. 젖을 먹기 위해서도 어머니, 젖을 먹고 나서도 어머니, 어머니 외에는 모릅니다. 그런 어린아이의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혼자 잘 때도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 품에서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 자고 일어나서 자기 손을 쓱 보면 손에서 빛이 나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내가 아니다' 하고 느끼는 그런 경지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무한히 깊은 사랑권에 잠기는 것을 느낍니다.
     
     
신앙생활은 체휼적 감정의 체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나님이 전부 해줘야 믿지, 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나?'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전부 해주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이 찾아가야 할 복귀의 행로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귀 행로의 거리를 무엇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행동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마음밖에 없습니다. 행동으로 하려면 6천년을 닦아나와야 합니다.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본성을 통해서 직행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무엇보다도 빠르고 무엇보다도 가깝게 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화하고, 마음으로 기뻐하고,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주체로 모시고 살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랑하는 분의 모든 것을 귀하게 느낍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것이 수습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수건 하나 가지고도 일생을 고독한 자리에서 생활할지라도 그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주도적인 힘을 얻게 됨을 우리는 이 세계 가운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려고 하는 그 사람을 내가 파탄시킬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멸시할 수 있느냐? 환영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어지고, 이것이 발전의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날 신앙하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른다는 것은 뭐냐?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할 때, 그 아버지라는 말은 뼛골이 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뼛골이 울려 골수가 반응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세상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그 아버지가 얼마나 수고했느냐? 수천년 동안 인류를 찾아 헤매면서 수고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결국 나 하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세계를 동원하고, 역사를 동원하고, 우주를 동원해서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딸 하나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자다가도 '아버지' 할 수 있고, 혼잣말로도 '아버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자기 상대를 그리워하는 그 이상의 그리움이 복받쳐야 합니다. 그래서 밥 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잠자는 것을 잊어버리면서 그 생활 이면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아버지' 하게 되면, 아버지의 손이 잡힙니다. 그렇게 됩니다. 꿈 같은 사실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면 아버지 품에 안깁니다. 이러한 표현적 권에서 체휼적 감정을 체득하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귀합니다.
그러한 체휼의 감도가 그 사람의 신앙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무엇을 하게 되면, '하늘이여, 같이해 주시옵소서' 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은 같이합니다. 그런 것을 느끼게 되면 '고마우신 하나님!'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인간을 믿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신의(信義)라는 것은 말로써 '그렇지, 틀림없지' 하고 다짐하면 성립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신의라는 것은 '그렇지' 하고 다짐할 수 없습니다. 다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벌써 그 이상의 자리에 선 하나님의 신의는 이미 결정되어 모든 문제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야!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외면적인 환경과 현재 자기의 입장을 화합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생활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나는 부자관계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라는 심정을 체득해서 그것을 비로소 내면으로부터 외면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전체 앞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생활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58-283, 59-65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