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나온 하나님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나온 목적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줍니다. 그 관계는 무엇으로 맺느냐? 사랑으로 맺습니다. 그 사랑은 무슨 인연으로 맺느냐? 주인과 종의 인연으로 맺는 것도 아니고, 나라와 백성의 인연으로 맺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인연으로 맺느냐?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으로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하나님은 죽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신앙은 멋진 신앙입니다. '내 목을 자르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이 불한당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갈 입장에 있다면, 그 부모는 천법이 있고 인간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 자식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의 인간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의 그 심정이 가는 길 앞에는 수난과 고난과 어떠한 비참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 가운데서 수고하면서 복귀섭리를 해나온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내심에 언제나 뼈와 살이 합하여도 영원히 싫다고 하지 않을 아들딸의 인연을 찾는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자식의 살이 닿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이 있는 부모 되는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자식 몸에 손을 대고 뺨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가 있느냐? 만약 그게 싫다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부모는 돼지보다도 못합니다. 한번 대면 또 대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뽀뽀할 때에는 복잡한 자연현상이 입체적으로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리란
하나님은 사랑을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인간의 주체자이니만큼 인간보다 천만 배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놓고 사랑하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저기 가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와!' 하면서 그 땀 흘리는 것을 보고 '아이고 좋구만' 하는 그런 종의 자리에 세워 놓고 사랑하고 싶어하겠느냐? 그런 하나님이라면 필요없습니다. 만약 인간을 종의 자리에 두고 사랑하고 싶어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일 위대한 분이고, 천주에 한 분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영원히 절대자로 계실 분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그 이상 잘난 사람이 없으며,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능력 있다고 했던 어떠한 군왕보다도 위대한 군왕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분과 관계를 맺는다고 했을 때, 그분과 무슨 관계를 맺고 싶으냐? 여자라면,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분의 며느리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몸종이 되는 길입니다. 그분의 몸종이 되겠습니까, 며느리가 되겠습니까? 몸종이 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며느리가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며느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보다 더 가까운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가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며느리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딸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딸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왜 딸이 되겠다는 것이냐? 딸은 시집가면 며느리만 못합니다. 그렇지만 유사시에는 며느리는 쫓겨나도 딸은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하면 그렇습니다. 딸은 시집을 갔다가 이혼을 당해도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즉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영원히 보장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며느리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위가 되는 길과 아들이 되는 길이 있다면,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 되는 길을 원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 할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인연을 귀히 여길 수 있는 철두철미한 내용을 갖춘 종교라야 역사를 지배하고, 세계 종말시대까지 남아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남자들 가운데서 제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택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을 택할 것이냐? 종을 택하겠습니까, 사위를 택하겠습니까, 아들을 택하겠습니까? 사위는 들락날락하는 도둑놈입니다. 딸하고 속닥속닥해서 장인의 감투까지 도둑질해 가려고 합니다. 장인의 상투끈도 자기 것보다 좋으면 가져가려 합니다. 그러니 물어볼 것도 없이 아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느냐? 인간이 행복해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본래의 소원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천지가 화동하는 영광의 자리에서 우주를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여 하나님과 인연이 끊겨 버린 우리 인간은 어디서부터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하느냐? 영광의 자리에서는 절대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 눈물로 헤어졌기 때문에 눈물로 상봉해야 합니다. 그 자리는 눈물로 헤어지는 자리요, 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날 때도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던 것과 같이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회개하는 마음으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죄상을 폭로하고, 그 이상의 죽음길로 달려가겠다는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죽게 되었지만 후손인 우리는 아담 해와의 십배 백배 이상의 죽음길도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인연을 남겼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랬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는 아들을 대할 때 어떠했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바라보면서 '오냐! 내 뜻을 몰랐던 에덴의 아담에게 본이 되는구나. 처음도 아버지요, 중간도 아버지요, 끝도 아버지라고 하는 너, 오직 아버지밖에 모르는 너는 타락권과 인연이 끊어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사탄세계의 침범을 받아서는 안 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가룟 유다 일당을 하나님이 칠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과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에 거리가 있었다면 복귀할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보다도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부잣집 자식이 불효해서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다면, 그 부모는 '네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너에게 상속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더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너보다 더 나은 아들이 나오면 그 아들에게 더 멋지게 상속해주겠다' 하는 마음이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하나님이 슬퍼하기 전에 내가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라면 내가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서면, 하나님이 비록 타락으로 인한 원한에 사무쳐 있을지라도,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면 그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나는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렸던 인간 세상에 주고받을 수 있는 제2의 터전이 마련됨으로써 여기서부터 새로운 천국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에게 자율적인 법도를 통해서, 순리적 법도권에서 모든 것을 주려고 했는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보다 더 심각한 자리에서, 더 빛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불효자식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릴 수 있는 효자를 지금까지 찾아나왔습니다. 그 아들을 맞기 위해 모든 역사과정에서 억센 사탄의 시련도, 하늘에 대한 반대도 개의치 않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왔던 것입니다.
끝없는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해온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과 가까운 편에 있는 사람들과 종족, 나라에까지 사랑을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준 것보다 적거나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냥 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냐, 네가 적다면 더 많이 주마' 하면서 주었습니다. 맨 나중에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독생자까지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주려고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도 맺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작다고 받지 않을까봐 보태고 또 보태어 이스라엘의 개인과 종족과 나라를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사 축복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래도 받지 않자 그 아들의 생명까지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고 나서도 또다시 사랑을 보태주려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돌아오는 날에는 천지가 몽땅 이상적인 천국으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은 사랑을 받기만 하는 독재자냐? 아닙니다. 사랑을 받으면 더 많이 갚아주는 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백의 사랑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천의 사랑, 만의 사랑으로 돌려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기원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생명의 기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한 생명의 인연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된 이유
종교 중에서도 유독 기독교만 사랑을 가르쳐왔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첫째는 아들의 사랑, 둘째는 신랑 신부의 사랑, 셋째는 형제의 사랑을 표준으로 해서 사랑을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를 하나님이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이 종말시대까지 남아질 수 있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나오던 내정적인 모든 여건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반을 떠난 하나님의 섭리는 있을 수 없고, 그 기반을 떠나서는 세계를 구하고 세계를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그런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세계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누가 부정하더라도 내 아버지다' 하는 것을 떳떳하게 말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과는 얼굴도 틀리고 역사적으로나 시대적 관계를 놓고 봐도 하나될 수 없는 존재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내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라!' 했던 것입니다. 악한 사탄마저도 부정할 내용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기에 이것을 원칙으로 이 사탄세계에 새로운 판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도 심부름이나 잘 하고 일이나 잘 하는 그런 외적인 입장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아들이냐? 독생자는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랑을 독차지해서 받고 나온 아들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도주 중에서도 세계적인 도주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찢기고, 피를 흘리고, 수많은 희생을 당해나오면서도 사탄 앞에 꺾이지 않았습니다. 천륜이 그것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가지가 잘리더라도 봄절기만 되면 또 싹을 틔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좋아했던 나라가 있습니까? 기독교를 좋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든 전부 다 선교사를 죽였습니다. 전부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남아졌느냐?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지를 잘라도 또 나옵니다. 천운이 가는 길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했는데, 이 자리가 효자의 자리입니다. 자기의 뜻을 초월하여 아버지의 뜻을 위주로 아버지와 심정적인 유대를 맺고 갔습니다. 그래야 충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요, 효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기독교가 계승하여 나왔기 때문에 비로소 기독교를 중심한 구도의 역사가 번식되었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그 사랑의 뿌리와 가지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인류는 기독교권으로 흡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신랑 신부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대신한 주체적인 입장에서 상대 인연을 중심으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볼 때, 그 이상 가까운 자리가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앞으로 믿는 사람들은 전부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심정의 보금자리는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고차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의 이념을 표준해서 섭리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나오신 아버지 하나님
지금까지 우리는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종교의 주체로만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념의 주체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생활 속에서 분석되고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생활에서 체험되는 그 이념의 가치를 세상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인류의 조상을 세운 뒤 거기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이상을 중심한 소망의 실체로서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성장한 후에 그들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찾아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심정 깊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정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그것은 도상에서 꺾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다면 어느 정도까지 찾아오느냐?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 마음의 작은 부분까지도 남겨놓지 않고 마음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의 몸을 찾아옵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찾아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을 찾아옵니다. 마음과 몸, 즉 우리 개체를 찾아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생활의 지극히 세밀한 부분에까지 찾아오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연맺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깊은 데까지 인연맺고자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한마디라도 자기와 반대되거나 하나라도 자기의 소원과 배치되는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근본적인 심정을 가진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 마음의 밑창까지도 흠이 없는 선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고, 우리의 몸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고, 우리의 생활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준 것입니다. 이 이상 가치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여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이 인류를 대하여 친히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품고 찾아온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오는 하나님을 기필코 모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면 그 지도자는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어떠한 이념을 주장하는 대표자가 있다면 그 대표자도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주권자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 사장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선의 이념을 통하여 천지 만물을 친히 지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고, 그 창조주가 우리를 아들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상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냐?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것을 인간에게 약속하고 인간을 인도해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내용을 체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늘에 있는 참아버지, 만우주를 지은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모셨느냐 하면 못 모셨습니다. 이름으로 만족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체의 중심으로서 부자의 인연을 그리워해 나온 하나님입니다. 구원은 이름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연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인연되어야 합니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인연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과연 절대자를 대하여 이름 아닌 실체로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가 타락이라는 서러운 운명에 봉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행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은 사람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반드시 창조주를 위주로 하여 행복을 주장하고 선의 이념을 주장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에도 몸에도 창조주가 함께합니다. 우리 생활에도, 일생의 노정에도 함께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감각까지도 창조주와 더불어 인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 타락하여 생활도, 생애노정도 그러하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땅에서 주장하는 어떤 주의나 국가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진정한 참된 효자 효녀는 이 땅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온 천주를 창조한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참아버지입니다.
그 참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여' 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끝날 인류 가운데에서 그러한 길을 달려가서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들이 나올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시작될 것입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121-189, 114-9, 32-237, 29-151, 38-139, 37-7, 11-84, 41-9,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