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
인간은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로 몰아낸 장본인
우리 인간은 언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냐? 자기가 믿고 바라고 있던 일이 깨질 때, 또는 다른 사람과 맺어진 혈연관계가 부정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그때가 가장 비참하고 원통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그 자식이 배반할 때, 그 믿음에 비례해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며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며 겪는 그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 일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어서 비참해졌느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자녀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로 몰아낸 장본인입니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되 나하고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슬퍼하고, 수고하되 제삼자의 입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고통과 모든 슬픔이 인간 때문에 생겨났고, 그 인간을 대표한 나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몰랐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게 된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얼마나 비참하였고 오늘날에도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또한 나를 위해 그런 절망에 부닥쳤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런 하나님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편으로 돌아가지 않으려야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녀가 죽는 것을 보고 저주로 돌이켜야 할 입장에 있는 하나님,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녀의 인연으로 지었던 인간이 일시에 저주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이런 비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아들을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딸을 딸이라 할 수 없으며, 사랑의 인연 가운데 몽땅 내 손으로 품을 수 있었으나 영원히 품으려야 품을 수 없게 된 그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한 것이 인간 시조의 타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참함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하냐? 또 악마가 얼마나 악하냐? 옛날에는 전쟁에 지면 왕이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대개 패배국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어느 정도로 악하냐 하면, 왕의 할머니, 어머니, 왕비, 그리고 딸을 그 왕 목전에서 전부 유린합니다. 그리고는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합니다.
그걸 보고서도 그런 악마를 처단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쌍함을 하나님 자신이 잘 압니다. '저 녀석을 손대지 못하는 나의 안타까움을 누가 알아!' 그러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손댈 수 없습니다. 그 악마한테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왕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가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권을 악마가 빼앗아 가서 유린해 버렸습니다. 하늘의 선한 도리의 길을 먼저 칼질하고 유린해서 종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걸 바라보는 하나님은 그렇게 당하고 죽는 사람 이상, 그것을 보고 분해하는 사람 이상 분해하고 원통해했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저렇게 안 되었을걸. 사랑을 찾아 영광의 천국을 이루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이럴 수가!'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악마의 피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사랑이 뿌려졌고, 악마의 생명, 악마의 핏줄이 박혀 있으니 이걸 빼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빼 버리면 죽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서서히 새로운 핏줄과 생명과 사랑을 주입하여 제2의 창조물, 구성물, 구원물로 하나님과 같은 대신자를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그 원수까지도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도 비유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
자식을 낳아 길러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해서 키운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어합니다. 또한 기쁘고 복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갖고 그런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냄새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는 하나님이 본연의 심정으로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애기를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이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됩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타락의 순간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비참한 심정
어떤 문학가가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차적인 사랑과 고차적인 가치의 권한이 타락으로 인해 변질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을 목격한 분이 누구냐 하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버지인 하나님입니다.
축구를 두고 볼 때, 자기편이 공을 가지고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골문으로 가면 좋아서 '야!'하고 소리치지만, 상대편이 공을 가지고 중앙선을 넘어 자기편으로 넘어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해집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월드컵처럼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그 배후의 인연이 크고, 내용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국가끼리 대결할 때는 그 순간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경기를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한 번만 잘못하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남자들은 축구를 하면서 그런 경험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골은 단번에 넣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상대편 선수가 슛을 해서 골인되려는 찰나 골키퍼는 있는 힘을 다하여 공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골 먹어서 지더라도 다음에 이기면 됩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인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됩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인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은 사탄의 공박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본래 저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하고 응원했겠습니까? 아담 해와가 잘못되는 경각에도 하나님은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히 병이 나서 죽었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경망스럽게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을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귀에 불어넣어주었는데도 그것이 좋다고 따먹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갈등을 겪었겠습니까?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습니까? 그 권위를 세워서 사탄을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이렇게 애달픈 자리에서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천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 수많은 억조창생을 전부 죽음으로 이끌 함정이 될 것을 아는 하나님이었으니 분하고 분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볼 때 인간은 할 말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부모가 환갑이 넘어서 낳은, 즉 만득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라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창조의 대업을 이룬 자리에 세우려 하였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도 결혼 못 할 때의 그 안타까움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부모는 천년 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슬플 것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습니까, 안 치겠습니까? 그 부모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원수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부모는 원수의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부모는 천만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 했겠느냐?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검은 구름이 끼는 환경으로 접촉해 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으나 지금까지 그러한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고개를 넘어갔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부모 되신 하나님의 한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는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젊은 부부가 살다가 한 쪽이 갈라져 나가든지 죽든지 하면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자기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빗길에서는 장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뚱뚱하고, 아무리 말라깽이고, 아무리 죽을 순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되고, 숨이 막히게 되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 그만두어라. 또 창조하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이렇게 복귀섭리역사가 6천년이나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딸이 태어났다가 죽고 나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먹고 싶다는 걸 왜 못 사주었나? 입고 싶다는 옷을 왜 못 사주었나 생각'하며 이렇게 먹고 싶다는 것 못 사주고, 입고 싶다는 옷 못 입혀준 그 모든 사연이 걸려 한이 됩니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복귀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어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주지 못한 것이 부모인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에 복귀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식으로서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고 천륜의 법도를 세워 정착점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태어난 오늘의 인간이기 때문에 탄식과 저주와 불만의 비탄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하나님을 더더욱 비참하게 했던 인간
타락이라는 말은 지극히 비참한 말입니다. 타락이라는 그 말 자체가, 미급하고 미완성했다는 그 말 자체가, 목적성사를 하지 못했다는 그 말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비참한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반 신앙자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하고 행복을 구하고 있지만,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었느냐?
우리는 불행해지면 짜증을 냅니다. 짜증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도 짜증을 내고, 눈도 짜증을 내고, 사지백체가 짜증을 냅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최고의 이상적인 상대권을 상실하여 이런 입장에 있는 하나님 앞에 온갖 죄의 누더기를 쓰고 찾아가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의 죄를 맡아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저의 죄를 맡아주시옵소서' 할 때, '오냐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불쌍한 하나님이요, 비참한 하나님입니다.
지금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여보, 나도 이렇게 죽을 지경에 있는데, 이왕지사 죽으니 내 죽을 것도 맡아주소' 하면 '그럽시다' 할 사람이 있습니까?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친구가 '여보게, 임자는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고생은 되겠지만 내 고통까지 맡아주소' 할 때, '그러고 말고. 네 말대로 하지'그럽니까? '에이 원수놈아! 네가 내 친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녀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놈아' 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박고 다리를 꺾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인간들은 번번이 잘못하고 나서는 '하나님, 저 이렇게 됐습니다'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하고 죽자살자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기도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기도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자라가 목을 내밀다가 위험을 느끼고 다시 집어넣는 것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한의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있는 길
하나님은 억울한 자리에 처하여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 타락이라는 슬픈 한 장면이 벌어짐으로써 이렇게 되었습니다. 타락! 이 타락이 새로운 만물도 하나님이 세운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천지도 그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이념도 끊어놓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슬프고 또 슬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타락의 인연을 맺고 나온 역사, 타락의 혈통을 받은 나입니다. 이것을 본연의 새로운 동산의 아담으로, 새로운 동산의 만물로, 새로운 동산의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고충이요, 인류의 고충이요, 역사의 고충이요, 만물의 고충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적인 터전을 중심하여 하늘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오늘의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뼛골에서 스며나오는 타락 전의 본연의 정(情), 즉 본성의 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조상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타락한 부모들은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당연히 고생해야 합니다. 비참해져야 합니다. 죽어 나자빠져야 하고, 쓰러져야 하고, 억울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내 뼛골 깊이 숨어 있는 타락하지 않은 본성의 정을 가지고 타락 전 즐거워하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준 그 상처를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타락권에 떨어진, 하나님의 저주권에서 태어난 인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뼛골 사이에 있는 본성의 심정을 유발시켜서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던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겠는가를 아는 자리, 그러한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가 바로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과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동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들은 죽을 때까지 정성을 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뭐냐? '오늘은 바쁜데, 어디 가야 할 텐데' 하면서 '마음을 다했습니다'하는 것이 다한 것이냐? 그리고 장가가려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시집가려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하며 돌아선다고 해서 그것이 다한 것이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럭저럭 사는 것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때의 심정 기준을 능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무책임한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아담 이상 심각한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내 모든 것을 투입해야 합니다. 폭발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폭탄같이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선을 넘어 정성을 들이는 그 기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서 천하 만민이 몽땅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기준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려야 할 우리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느냐? 타락할 때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도 그때의 아담 해와보다 높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과 인격도 아담 해와 이상이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던?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꼬일 때, 거기에 빠져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믿음도 아담 해와보다 더 나아야 되고, 인격도 사탄에게 '넌 뭐야, 이 자식아? 넌 종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도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믿음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다 해도 모자랍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돌에 맞아 죽어도 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감사해야 합니다. 죽어서 부활할 때까지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던 부활의 아침을 맞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때 '때가 이르기 전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해서 가까이 못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버지 앞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가진 인류이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넘어가더라도 '나는 부활한다!' 하고 믿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옛날 사탄은 경계선을 그냥 넘어 들어와서 아담 해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권한과 인격을 갖추어 사탄이 우리에게 오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장이 오기를 무서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사탄권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게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심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심정의 주인공이 누구냐? 시집간 여자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은 부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심정의 뿌리, 심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인격이 아담 해와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불의(不義)의 결과를 가져다드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없는 데, 어떻게 또다시 비참을 안겨드릴 수 있겠느냐? '나는 죽어도 그 길을 못 가겠다'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의 기준을 가져야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편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영광받겠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며 나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오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한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슬픔의 짐을 짊어지고, 심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섭리해 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옛날의 어떤 할아버지도 아니요, 의붓아버지도 아닙니다. 억천만세 길이길이 영화를 누리고, 사랑을 받고, 행복 가운데서 영원무궁토록 자녀와 동고동락해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리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 나로 인하여 수많은 곡절과 한을 품어온 아버지, 수많은 상처와 억울함을 당하고 원수들 앞에 수없이 농락을 받으면서도 참고 나온 아버지입니다. 그런 엉클어진 사연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서라도 그 아버지의 가슴을 녹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우리인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그 아버지를 위로해드릴 것이냐? 밤을 새워 몸부림치며 통곡하여도 원통함을 풀어드리지 못할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숱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억울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수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문전에서 박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몇십 배 이상의 처량한 사정에 부딪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의 터전을 상속받고 있는 우리이기에 먹고 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자고 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통일교회 신도들의 생활철학이고 생활태도입니다. 밥을 먹어도 기쁠 수 없고, 옷을 보고도 기뻐할 수 없으며, 주위의 환경을 보고도 웃음으로 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비참했고, 굶주렸고, 밟혔고, 유린당하고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6천년 동안 한이 맺혔던 아버지의 가슴을 풀어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6천년 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 급급하였던 이 저주받을 입술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자신이 되었다는 데 대해 이제라도 저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한의 흔적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천번 만번 죽어서라도 하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나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 하나의 딸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정,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진 종족, 그런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그런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가 되어야 하나님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짊어져야 할 심정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야 합니다. 몸이 찢겨 독수리 밥이 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는 입장인데도 그 위신과 처지를 망각한 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몸부림쳐 왔습니다.
우리는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을 불러보고,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해보고,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을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까지 찾아나왔습니다. 그런 아들이 있으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고, 그런 딸이 있으면 밤을 지새워가면서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가슴에 맺힌 한을 땅에서 우리가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의 한날을 보았고,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한을 풀었고, 너로 말미암아 소원의 한날을 맞이하였노라!'고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을 맞이해야 비로소 이 땅 위에 천국이 개문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20-196, 212-14, 59-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