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3 장 인간의 타락과 구원섭리 2

무지... | 20180106124443

사랑이야기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제 3 장 인간의 타락과 구원섭리 2



5. 타락으로 인한 하나님의 슬픔

    

 

인간은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로 몰아낸 장본인

 

우리 인간은 언제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하냐? 자기가 믿고 바라고 있던 일이 깨질 때, 또는 다른 사람과 맺어진 혈연관계가 부정될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그때가 가장 비참하고 원통합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그렇게 믿고 있는데도 그 자식이 배반할 때, 그 믿음에 비례해서 부모가 받는 충격과 고충, 그리고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생명을 걸고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배반하고 배척하며 불신할 때도 역시 말할 수 없이 비참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몸부림치며 겪는 그 고통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릅니다.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상 일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어서 비참해졌느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닌 구체적인 하나님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과는 최고의 관계를 가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더불어 기쁨으로 출발해서 끝이 없는 영원을 향해 계속 나갈 수 있는 그런 출발의 기점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출발의 기점을 인간으로 인해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기뻐할 수 있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자리는 인간이 하나님을 모시는 자리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자녀로 맺어질 인연이었는데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모든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비참한 자리로 몰아낸 장본인입니다. 이런 사실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되 나하고는 상관없는 자리에서 슬퍼하고, 수고하되 제삼자의 입장에서 수고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수고와 고통과 모든 슬픔이 인간 때문에 생겨났고, 그 인간을 대표한 나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몰랐습니다. 즉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게 된 것이 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얼마나 비참하였고 오늘날에도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고, 또한 나를 위해 그런 절망에 부닥쳤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그런 하나님을 염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늘편으로 돌아가지 않으려야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하는 자녀가 죽는 것을 보고 저주로 돌이켜야 할 입장에 있는 하나님,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고 자녀의 인연으로 지었던 인간이 일시에 저주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이런 비참한 입장에 있는 하나님, 아들을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딸을 딸이라 할 수 없으며, 사랑의 인연 가운데 몽땅 내 손으로 품을 수 있었으나 영원히 품으려야 품을 수 없게 된 그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한 것이 인간 시조의 타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참함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하냐? 또 악마가 얼마나 악하냐? 옛날에는 전쟁에 지면 왕이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대개 패배국의 운명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악마는 어느 정도로 악하냐 하면, 왕의 할머니, 어머니, 왕비, 그리고 딸을 그 왕 목전에서 전부 유린합니다. 그리고는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합니다.


그걸 보고서도 그런 악마를 처단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불쌍함을 하나님 자신이 잘 압니다. 󰡐저 녀석을 손대지 못하는 나의 안타까움을 누가 알아!󰡑 그러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손댈 수 없습니다. 그 악마한테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왕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가족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왕권을 악마가 빼앗아 가서 유린해 버렸습니다. 하늘의 선한 도리의 길을 먼저 칼질하고 유린해서 종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걸 바라보는 하나님은 그렇게 당하고 죽는 사람 이상, 그것을 보고 분해하는 사람 이상 분해하고 원통해했습니다. 󰡐내가 만들지 않았으면 저렇게 안 되었을걸. 사랑을 찾아 영광의 천국을 이루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이럴 수가!󰡑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악마의 피살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사랑이 뿌려졌고, 악마의 생명, 악마의 핏줄이 박혀 있으니 이걸 빼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걸 빼 버리면 죽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서서히 새로운 핏줄과 생명과 사랑을 주입하여 제2의 창조물, 구성물, 구원물로 하나님과 같은 대신자를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그 원수까지도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의 심정으로도 비유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심정

 

자식을 낳아 길러본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애지중지해서 키운 아들딸을 통하여 복을 받고 싶고 행복도 느끼고 싶어합니다. 또한 기쁘고 복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으면 그 아들딸에게 영원히 남겨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마음을 갖고 그런 아들딸이 되기를 타락한 인간도 바라고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들딸이 고이 자라 만국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만세에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아들딸이 상처를 입을까 보호하고 애달픈 심정으로 초조하게 지켜보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품 안에서 젖을 먹여 키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자식이 똥 싸고 오줌을 싸서 냄새가 나더라도 사랑으로 그 냄새를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타락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랑의 주체 되는 하나님이 본연의 심정으로 아담과 해와를 사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애기를 키울 때에 잠자리에서도 노래를 불러주고 혼잣말로 얘기도 해주며 잘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나고 부족한 자식이라도 그 자식에게 결함이 있으면 부모의 마음은 그 가슴이 몽땅 젖도록 최고의 고통을 겪는 것이요, 이것이 풀어지면 그 고통에 비례한 만큼 기쁨이 동반됩니다. 타락한 부모의 마음도 그러한데, 하나님의 마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타락의 순간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비참한 심정

 

어떤 문학가가 표현하려 해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고차적인 사랑과 고차적인 가치의 권한이 타락으로 인해 변질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을 목격한 분이 누구냐 하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아버지인 하나님입니다.


축구를 두고 볼 때, 자기편이 공을 가지고 중앙선을 넘어 상대편 골문으로 가면 좋아서 󰡐!󰡑 하고 소리치지만, 상대편이 공을 가지고 중앙선을 넘어 자기편으로 넘어오면 마음이 얼마나 초조해집니까? 구경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월드컵처럼 그 경기가 크면 클수록 그 배후의 인연이 크고, 내용이 넓으면 넓을수록 초조감은 거기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국가끼리 대결할 때는 그 순간이 아주 심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은 경기를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한 번만 잘못하면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남자들은 축구를 하면서 그런 경험을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골은 단번에 넣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상대편 선수가 슛을 해서 골인되려는 찰나 골키퍼는 있는 힘을 다하여 공을 따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하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나 축구에서는 그까짓 한 골 먹어서 지더라도 다음에 이기면 됩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 앞에 놓인 책임분담은 한번 잘못하면 억천만세 동안 인간에게 암이 될 수 있는 무서운 구렁텅이가 됩니다. 이런 책임을 해야 할 입장인 아담 해와이기에 하나님은 사탄의 공박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그걸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본래 저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지. 잘한다, 잘한다󰡑 하고 응원했겠습니까? 아담 해와가 잘못되는 경각에도 하나님은 󰡐너만은 그러지 않으리󰡑라고 믿고 싶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히 병이 나서 죽었다면 그래도 괜찮겠는데 󰡐따먹으면 죽는다󰡑고 경고를 했는데도 경망스럽게 따먹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볼 때,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을 따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귀에 불어넣어주었는데도 그것이 좋다고 따먹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염려하는 마음이 두 갈래 길에서 얼마나 갈등을 겪었겠습니까? 타락 직전에 가기까지 인간의 권위를 얼마나 주장하고 싶었겠습니까? 그 권위를 세워서 사탄을 굴복시키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이렇게 애달픈 자리에서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이것은 천년의 한으로 탕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억천만세 수많은 억조창생을 전부 죽음으로 이끌 함정이 될 것을 아는 하나님이었으니 분하고 분했습니다. 그러한 비참한 상처를 입힌 인간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볼 때 인간은 할 말 없는 존재입니다.


세상에서도 부모가 환갑이 넘어서 낳은, 즉 만득자인 7대 독자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절망 중에 절망일 것입니다. 젊으면 또 낳을 수 있지만 만득자로 태어난 그 7대 독자가 잘 자라지 못하고 죽는다면 7대권을 계승하려던 조상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타겠습니까?


조상들은 자기의 후손, 자기의 핏줄을 통해서 세계에 없는 만복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는다면 그 부모는 따라 죽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7대 독자가 아니라 영원한 독자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담을 가정을 이루게 하여 창조의 대업을 이룬 자리에 세우려 하였는데, 그 아담이 죽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일이 틀어졌을 때 어떠했겠습니까? 내가 결혼하고 싶은데도 결혼 못 할 때의 그 안타까움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부모는 천년 만년 같이 살고 싶은데 7대 독자가 지금 몹쓸 병에 걸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슬플 것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다고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부모가 소리치겠습니까, 안 치겠습니까? 그 부모는 죽어가는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체면과 위신을 다 버리고 그 방법을 쓸 것입니다. 원수의 영원한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아들딸을 살릴 수 있다면 부모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자식을 살릴 수만 있다면 부모는 원수의 종이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한날의 뜻을 세울 수 있는 그 한 실체인 아들을 찾기 위해서는 부모는 천만년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나님이야 오죽 했겠느냐? 그런 아들딸이 접경을 넘어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비참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검은 구름이 끼는 환경으로 접촉해 들어가는 자식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왔다 갔으나 지금까지 그러한 상처를 입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 고개를 넘어갔지만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곳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부모 되신 하나님의 한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 천지는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도 젊은 부부가 살다가 한 쪽이 갈라져 나가든지 죽든지 하면 얼마나 몸부림칩니까? 자기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세계에서 제일 가는 권세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고빗길에서는 장사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고, 아무리 뚱뚱하고, 아무리 말라깽이고, 아무리 죽을 순간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되고, 숨이 막히게 되고, 가슴이 터질 것 같고, 기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너 그만두어라. 또 창조하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단하다면 이렇게 복귀섭리역사가 6천년이나 걸리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들딸이 태어났다가 죽고 나면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자식이 살아 있을 때 먹고 싶다는 걸 왜 못 사주었나? 입고 싶다는 옷을 왜 못 사주었나󰡑 생각하며 이렇게 먹고 싶다는 것 못 사주고, 입고 싶다는 옷 못 입혀준 그 모든 사연이 걸려 한이 됩니다. 하나님도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복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복귀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자랄 때에 하고 싶어하고 바라던 모든 것을 다 해주지 못한 것이 부모인 하나님의 한입니다. 그 마음이 있기에 복귀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식으로서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를 세우고 천륜의 법도를 세워 정착점을 마련해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태어난 오늘의 인간이기 때문에 탄식과 저주와 불만의 비탄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비참한 하나님을 더더욱 비참하게 했던 인간

 

타락이라는 말은 지극히 비참한 말입니다. 타락이라는 그 말 자체가, 미급하고 미완성했다는 그 말 자체가, 목적성사를 하지 못했다는 그 말 자체가 비참한 것입니다. 누구에게 비참한 것이냐? 우리 인간 앞에 비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비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반 신앙자들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요,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고 찬양을 하고 행복을 구하고 있지만,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이 되었느냐?


우리는 불행해지면 짜증을 냅니다. 짜증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도 짜증을 내고, 눈도 짜증을 내고, 사지백체가 짜증을 냅니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볼 때, 최고의 이상적인 상대권을 상실하여 이런 입장에 있는 하나님 앞에 온갖 죄의 누더기를 쓰고 찾아가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의 죄를 맡아주시옵소서. 하나님, 저는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습니다. 저의 죄를 맡아주시옵소서󰡑 할 때, 󰡐오냐󰡑 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불쌍한 하나님이요, 비참한 하나님입니다.


지금 죽을 지경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여보, 나도 이렇게 죽을 지경에 있는데, 이왕지사 죽으니 내 죽을 것도 맡아주소󰡑 하면 󰡐그럽시다󰡑 할 사람이 있습니까? 고통스러운 자리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친구가 󰡐여보게, 임자는 나하고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닌가? 그러니 고생은 되겠지만 내 고통까지 맡아주소󰡑 할 때, 󰡐그러고 말고. 네 말대로 하지󰡑 그럽니까? 󰡐에이 원수놈아! 네가 내 친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녀석󰡑 하는 것이 아니라 󰡐이놈아󰡑 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박고 다리를 꺾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인간들은 번번이 잘못하고 나서는 󰡐하나님, 저 이렇게 됐습니다󰡑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하고 죽자살자할 수 있는 인연이 되어 있습니까? 이런 것을 생각하면 기도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기도하겠다고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을 부르다가도 자라가 목을 내밀다가 위험을 느끼고 다시 집어넣는 것과 같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한의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있는 길

 

하나님은 억울한 자리에 처하여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느냐? 타락이라는 슬픈 한 장면이 벌어짐으로써 이렇게 되었습니다. 타락! 이 타락이 새로운 만물도 하나님이 세운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천지도 그 법도에서 끊어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이념도 끊어놓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슬프고 또 슬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타락의 인연을 맺고 나온 역사, 타락의 혈통을 받은 나입니다. 이것을 본연의 새로운 동산의 아담으로, 새로운 동산의 만물로, 새로운 동산의 하나님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고충이요, 인류의 고충이요, 역사의 고충이요, 만물의 고충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공적인 터전을 중심하여 하늘편에 서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오늘의 내 위신과 권세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뼛골에서 스며나오는 타락 전의 본연의 정(), 즉 본성의 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조상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때문에 타락한 부모들은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도 당연히 고생해야 합니다. 비참해져야 합니다. 죽어 나자빠져야 하고, 쓰러져야 하고, 억울한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것은 당연지사입니다. 내 뼛골 깊이 숨어 있는 타락하지 않은 본성의 정을 가지고 타락 전 즐거워하던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에 준 그 상처를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과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타락권에 떨어진, 하나님의 저주권에서 태어난 인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뼛골 사이에 있는 본성의 심정을 유발시켜서 인간을 사랑하고 싶었던 그 아버지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겠는가를 아는 자리, 그러한 심정을 체휼하는 자리가 바로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 몸부림칠 때 하나님과 나와의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동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종교들은 죽을 때까지 정성을 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12:30)고 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뭐냐? 󰡐오늘은 바쁜데, 어디 가야 할 텐데󰡑 하면서 󰡐마음을 다했습니다󰡑 하는 것이 다한 것이냐? 그리고 장가가려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시집가려 했는데 그만둬야겠다 하며 돌아선다고 해서 그것이 다한 것이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라는 것은 무엇이냐? 이럭저럭 사는 것이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때의 심정 기준을 능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무책임한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아담 이상 심각한 마음으로 생명을 걸고 내 모든 것을 투입해야 합니다. 폭발하기 위해서 날아가는 폭탄같이 목적지를 향해서 달려가려는 마음이 간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망선을 넘어 정성을 들이는 그 기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서 천하 만민이 몽땅 하나님을 중심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그 기준을 넘어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신을 세워 드려야 할 우리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신을 세울 수 있느냐? 타락할 때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 세워드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도 그때의 아담 해와보다 높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심정과 인격도 아담 해와 이상이어야 합니다. 사탄이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던? 그것을 따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꼬일 때, 거기에 빠져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믿음도 아담 해와보다 더 나아야 되고, 인격도 사탄에게 󰡐넌 뭐야, 이 자식아? 넌 종이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심정도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믿음에 있어서 그 이상의 사람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감사한다 해도 모자랍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면 돌에 맞아 죽어도 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감사해야 합니다. 죽어서 부활할 때까지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던 부활의 아침을 맞는 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부활한 예수님을 만날 때 󰡐때가 이르기 전에는 나를 만지지 말라󰡑 해서 가까이 못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버지 앞에 가지 못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믿지 못한 역사의 굴레를 가진 인류이기 때문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에 다닌다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넘어가더라도 󰡐나는 부활한다!󰡑 하고 믿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옛날 사탄은 경계선을 그냥 넘어 들어와서 아담 해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권한과 인격을 갖추어 사탄이 우리에게 오기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천사장이 오기를 무서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사탄권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없게끔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심정은 어디에서부터 출발하느냐? 심정의 주인공이 누구냐? 시집간 여자는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남편은 부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심정의 뿌리, 심정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인격이 아담 해와를 넘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불의(不義)의 결과를 가져다드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상처를 입힌 그 죄도 용서받을 수 없는 데, 어떻게 또다시 비참을 안겨드릴 수 있겠느냐? 󰡐나는 죽어도 그 길을 못 가겠다󰡑 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심정의 기준을 가져야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고 하나님편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서 영광받겠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류를 대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애쓰며 나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통곡하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인류를 이끌어오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비참한 분입니다. 비참한 가운데 떨어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잠든 인류를 깨워서 󰡐와라! 와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이렇듯 슬픔의 짐을 짊어지고, 심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섭리해 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옛날의 어떤 할아버지도 아니요, 의붓아버지도 아닙니다. 억천만세 길이길이 영화를 누리고, 사랑을 받고, 행복 가운데서 영원무궁토록 자녀와 동고동락해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러한 아버지가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는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리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불러야 합니다.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 나로 인하여 수많은 곡절과 한을 품어온 아버지, 수많은 상처와 억울함을 당하고 원수들 앞에 수없이 농락을 받으면서도 참고 나온 아버지입니다. 그런 엉클어진 사연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서라도 그 아버지의 가슴을 녹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는 우리인 것을 생각할 때, 무엇으로 그 아버지를 위로해드릴 것이냐? 밤을 새워 몸부림치며 통곡하여도 원통함을 풀어드리지 못할 우리입니다.


하나님은 숱한 역사를 거쳐오면서 통일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수많은 억울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무수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 문전에서 박대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몇십 배 이상의 처량한 사정에 부딪힌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한의 터전을 상속받고 있는 우리이기에 먹고 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자고 나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통일교회 신도들의 생활철학이고 생활태도입니다. 밥을 먹어도 기쁠 수 없고, 옷을 보고도 기뻐할 수 없으며, 주위의 환경을 보고도 웃음으로 대할 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비참했고, 굶주렸고, 밟혔고, 유린당하고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6천년 동안 한이 맺혔던 아버지의 가슴을 풀어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자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6천년 동안 간직했던 아버지의 참된 사랑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을 이러쿵저러쿵 평하기에 급급하였던 이 저주받을 입술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을 모르는 우리 자신이 되었다는 데 대해 이제라도 저주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 몸부림치고 통곡하면서 하나님의 한의 흔적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런 방법이 있다면 천번 만번 죽어서라도 하겠다고 몸부림쳐야 할 나입니다. 그럴 수 있는 하나의 아들 하나의 딸이 되어야 하고, 그럴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아들과 딸로 이루어진 가정, 그런 가정으로 이루어진 종족, 그런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 그런 국가로 이루어진 세계가 되어야 하나님나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짊어져야 할 심정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져야 합니다. 몸이 찢겨 독수리 밥이 된다 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는 입장인데도 그 위신과 처지를 망각한 채 인류를 구하기 위해 지금까지 몸부림쳐 왔습니다.

우리는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을 불러보고,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해보고, 하늘편에 서서 그런 하나님을 대신하여 원수와 대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지금까지 찾아나왔습니다. 그런 아들이 있으면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고, 그런 딸이 있으면 밤을 지새워가면서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가슴에 맺힌 한을 땅에서 우리가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행복의 한날을 보았고, 너희 가정으로 말미암아 한을 풀었고, 너로 말미암아 소원의 한날을 맞이하였노라!󰡑고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런 날을 맞이해야 비로소 이 땅 위에 천국이 개문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20-196, 212-14, 59-292

 

6.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나온 하나님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나온 목적

 

종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맺어줍니다. 그 관계는 무엇으로 맺느냐? 사랑으로 맺습니다. 그 사랑은 무슨 인연으로 맺느냐? 주인과 종의 인연으로 맺는 것도 아니고, 나라와 백성의 인연으로 맺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인연으로 맺느냐?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부자의 인연으로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하나님은 죽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는 신앙은 멋진 신앙입니다. 󰡐내 목을 자르더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아들이 불한당이 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갈 입장에 있다면, 그 부모는 천법이 있고 인간의 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 자식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타락한 세계의 인간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의 그 심정이 가는 길 앞에는 수난과 고난과 어떠한 비참함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고난 가운데서 수고하면서 복귀섭리를 해나온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내심에 언제나 뼈와 살이 합하여도 영원히 싫다고 하지 않을 아들딸의 인연을 찾는 데 있습니다.

우리 인간도 자식의 살이 닿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식이 있는 부모 되는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자식 몸에 손을 대고 뺨을 대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가 있느냐? 만약 그게 싫다는 부모가 있다면 그런 부모는 돼지보다도 못합니다. 한번 대면 또 대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뽀뽀할 때에는 복잡한 자연현상이 입체적으로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리란

 

하나님은 사랑을 좋아합니다. 얼마나 좋아하느냐? 인간의 주체자이니만큼 인간보다 천만 배는 더 좋아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놓고 사랑하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저기 가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와!󰡑 하면서 그 땀 흘리는 것을 보고 󰡐아이고 좋구만󰡑 하는 그런 종의 자리에 세워 놓고 사랑하고 싶어하겠느냐? 그런 하나님이라면 필요없습니다. 만약 인간을 종의 자리에 두고 사랑하고 싶어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제일 위대한 분이고, 천주에 한 분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영원히 절대자로 계실 분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해도 그 이상 잘난 사람이 없으며,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능력 있다고 했던 어떠한 군왕보다도 위대한 군왕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분과 관계를 맺는다고 했을 때, 그분과 무슨 관계를 맺고 싶으냐? 여자라면,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그분의 며느리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몸종이 되는 길입니다. 그분의 몸종이 되겠습니까, 며느리가 되겠습니까? 몸종이 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며느리가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며느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보다 더 가까운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가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며느리보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딸이 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 딸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왜 딸이 되겠다는 것이냐? 딸은 시집가면 며느리만 못합니다. 그렇지만 유사시에는 며느리는 쫓겨나도 딸은 쫓겨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하면 그렇습니다. 딸은 시집을 갔다가 이혼을 당해도 아버지의 품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즉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영원히 보장받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며느리보다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위가 되는 길과 아들이 되는 길이 있다면,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 되는 길을 원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겠다󰡑 할 것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도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인연을 맺고 하나님과의 사랑의 인연을 귀히 여길 수 있는 철두철미한 내용을 갖춘 종교라야 역사를 지배하고, 세계 종말시대까지 남아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남자들 가운데서 제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택한다면 과연 어떤 사람을 택할 것이냐? 종을 택하겠습니까, 사위를 택하겠습니까, 아들을 택하겠습니까? 사위는 들락날락하는 도둑놈입니다. 딸하고 속닥속닥해서 장인의 감투까지 도둑질해 가려고 합니다. 장인의 상투끈도 자기 것보다 좋으면 가져가려 합니다. 그러니 물어볼 것도 없이 아들을 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인간에게 주고 싶어하느냐? 인간이 행복해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본래의 소원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천지가 화동하는 영광의 자리에서 우주를 상속받았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하여 하나님과 인연이 끊겨 버린 우리 인간은 어디서부터 하나님과 인연을 맺어야 하느냐? 영광의 자리에서는 절대 인연맺을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 눈물로 헤어졌기 때문에 눈물로 상봉해야 합니다. 그 자리는 눈물로 헤어지는 자리요, 또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므로 만날 때도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자리에서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던 것과 같이 피땀을 흘리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회개하는 마음으로 과거에 있었던 모든 죄상을 폭로하고, 그 이상의 죽음길로 달려가겠다는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 해와는 타락함으로써 죽게 되었지만 후손인 우리는 아담 해와의 십배 백배 이상의 죽음길도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동정할 수 있는 인연을 남겼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랬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런 입장에 있는 아들을 대할 때 어떠했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바라보면서 󰡐오냐! 내 뜻을 몰랐던 에덴의 아담에게 본이 되는구나. 처음도 아버지요, 중간도 아버지요, 끝도 아버지라고 하는 너, 오직 아버지밖에 모르는 너는 타락권과 인연이 끊어진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사탄세계의 침범을 받아서는 안 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가룟 유다 일당을 하나님이 칠 수 있었을 것이 아니냐? 우리는 그것까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과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에 거리가 있었다면 복귀할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에 주고 싶었던 그 마음보다도 타락하고 난 후에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인간도 그렇습니다. 부잣집 자식이 불효해서 상속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다면, 그 부모는 󰡐네가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너에게 상속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더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너보다 더 나은 아들이 나오면 그 아들에게 더 멋지게 상속해주겠다󰡑 하는 마음이 솟구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섭리해 나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내정적인 심정을 알고 하나님이 슬퍼하기 전에 내가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라면 내가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서면, 하나님이 비록 타락으로 인한 원한에 사무쳐 있을지라도,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면 그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또 나는 하나님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터전을 잃어버렸던 인간 세상에 주고받을 수 있는 제2의 터전이 마련됨으로써 여기서부터 새로운 천국이 인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자리에서 주고 싶어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에게 자율적인 법도를 통해서, 순리적 법도권에서 모든 것을 주려고 했는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보다 더 심각한 자리에서, 더 빛나는 자리에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불효자식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릴 수 있는 효자를 지금까지 찾아나왔습니다. 그 아들을 맞기 위해 모든 역사과정에서 억센 사탄의 시련도, 하늘에 대한 반대도 개의치 않고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나왔던 것입니다.

 

 

끝없는 사랑으로 인류를 구원해온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과 가까운 편에 있는 사람들과 종족, 나라에까지 사랑을 주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이 준 것보다 적거나 돌아오지 않더라도 그냥 차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냐, 네가 적다면 더 많이 주마󰡑 하면서 주었습니다. 맨 나중에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독생자까지도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주려고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도 맺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고 원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작다고 받지 않을까봐 보태고 또 보태어 이스라엘의 개인과 종족과 나라를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사 축복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래도 받지 않자 그 아들의 생명까지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고 나서도 또다시 사랑을 보태주려고 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돌아오는 날에는 천지가 몽땅 이상적인 천국으로 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은 사랑을 받기만 하는 독재자냐? 아닙니다. 사랑을 받으면 더 많이 갚아주는 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백의 사랑을 드린다면 하나님은 천의 사랑, 만의 사랑으로 돌려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정성을 다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기원으로 하지 않은 사랑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생명의 기원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려고 하는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을 통한 생명의 인연입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된 이유

 

종교 중에서도 유독 기독교만 사랑을 가르쳐왔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첫째는 아들의 사랑, 둘째는 신랑 신부의 사랑, 셋째는 형제의 사랑을 표준으로 해서 사랑을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를 하나님이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세계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이 종말시대까지 남아질 수 있었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찾아나오던 내정적인 모든 여건을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반을 떠난 하나님의 섭리는 있을 수 없고, 그 기반을 떠나서는 세계를 구하고 세계를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그런 내용을 가졌기 때문에 세계적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누가 부정하더라도 내 아버지다󰡑 하는 것을 떳떳하게 말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하나님과는 얼굴도 틀리고 역사적으로나 시대적 관계를 놓고 봐도 하나될 수 없는 존재라고 아무리 부정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다. 내 아버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라!󰡑 했던 것입니다. 악한 사탄마저도 부정할 내용을 가지고 나올 수 없었기에 이것을 원칙으로 이 사탄세계에 새로운 판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중에서도 심부름이나 잘 하고 일이나 잘 하는 그런 외적인 입장의 아들이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입니다. 독생자는 어떤 아들이냐? 독생자는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던 사랑을 독차지해서 받고 나온 아들입니다. 그래서 종교의 도주 중에서도 세계적인 도주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찢기고, 피를 흘리고, 수많은 희생을 당해나오면서도 사탄 앞에 꺾이지 않았습니다. 천륜이 그것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무리 가지가 잘리더라도 봄절기만 되면 또 싹을 틔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가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기독교를 좋아했던 나라가 있습니까? 기독교를 좋아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든 전부 다 선교사를 죽였습니다. 전부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기독교가 지금까지 남아졌느냐? 뿌리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지를 잘라도 또 나옵니다. 천운이 가는 길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에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했는데, 이 자리가 효자의 자리입니다. 자기의 뜻을 초월하여 아버지의 뜻을 위주로 아버지와 심정적인 유대를 맺고 갔습니다. 그래야 충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요, 효자의 도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리를 기독교가 계승하여 나왔기 때문에 비로소 기독교를 중심한 구도의 역사가 번식되었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그 사랑의 뿌리와 가지를 통해서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인류는 기독교권으로 흡수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신랑 신부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대신한 주체적인 입장에서 상대 인연을 중심으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했습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볼 때, 그 이상 가까운 자리가 없습니다.

그다음에는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앞으로 믿는 사람들은 전부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심정의 보금자리는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고차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가정의 이념을 표준해서 섭리해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나오신 아버지 하나님

 

지금까지 우리는 관념적으로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종교의 주체로만 하나님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인 동시에 생활의 주체요, 생활의 주체인 동시에 이념의 주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이념의 주체가 넓고 크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그것이 생활 속에서 분석되고 체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생활에서 체험되는 그 이념의 가치를 세상 어떠한 것과도 바꿀 수 없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인류의 조상을 세운 뒤 거기에 소망을 두었습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이상을 중심한 소망의 실체로서 바라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성장한 후에 그들을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찾아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마음뿐만 아니라 심정 깊은 곳에 자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 깊은 곳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정이 심어지기를 바라고 나왔지만 그것은 도상에서 꺾여 버렸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온다면 어느 정도까지 찾아오느냐? 인간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 마음의 작은 부분까지도 남겨놓지 않고 마음을 다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오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의 몸을 찾아옵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찾아옵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을 찾아옵니다. 마음과 몸, 즉 우리 개체를 찾아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생활의 지극히 세밀한 부분에까지 찾아오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인연맺고자 하는 목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의 깊은 데까지 인연맺고자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한마디라도 자기와 반대되거나 하나라도 자기의 소원과 배치되는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근본적인 심정을 가진 그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올 때 우리 마음의 밑창까지도 흠이 없는 선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고, 우리의 몸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하고, 우리의 생활과도 그러한 자리에서 인연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고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연을 맺어준 것입니다. 이 이상 가치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수습하여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하는데, 그것은 이 인류를 대하여 친히 아들이라 하고 딸이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품고 찾아온다는 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찾아오는 하나님을 기필코 모셔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면 그 지도자는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어떠한 이념을 주장하는 대표자가 있다면 그 대표자도 영원히 모실 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히 모시고 영원히 같이 살아야 할 분은 누구냐? 바로 영원무궁토록 존재하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모시고 생활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어떠한 주권자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 사장의 아들딸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진짜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선의 이념을 통하여 천지 만물을 친히 지은 창조주 하나님을 대하여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고, 그 창조주가 우리를 아들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이상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왜 사랑의 하나님이냐? 인간이 찾고 있는 최고의 것을 인간에게 약속하고 인간을 인도해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내용을 체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늘에 있는 참아버지, 만우주를 지은 창조주를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모셨느냐 하면 못 모셨습니다. 이름으로 만족할 하나님이 아닙니다. 실체의 중심으로서 부자의 인연을 그리워해 나온 하나님입니다. 구원은 이름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실체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연되는 것이 아니라 실체와 인연되어야 합니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인연은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과연 절대자를 대하여 이름 아닌 실체로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느냐?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인류가 타락이라는 서러운 운명에 봉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행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은 사람을 중심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를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반드시 창조주를 위주로 하여 행복을 주장하고 선의 이념을 주장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음에도 몸에도 창조주가 함께합니다. 우리 생활에도, 일생의 노정에도 함께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감각까지도 창조주와 더불어 인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할 인간이 타락하여 생활도, 생애노정도 그러하지 못하고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이 땅에서 주장하는 어떤 주의나 국가적인 이념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충성을 하고 효도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절대자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진정한 참된 효자 효녀는 이 땅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온 천주를 창조한 창조주인 동시에 우리의 참아버지입니다.

그 참아버지가 우리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운명의 곡절에 처하더라도 그 곡절을 넘어 그 참아버지의 손길을 붙들고, 역사적인 소원과 자기 생애의 소원의 심정을 품고서 󰡐나의 아버지여󰡑 하고 최후의 한마디를 남길 때까지 가야 합니다.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끝날 인류 가운데에서 그러한 길을 달려가서 창조주이자 절대자인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무리들이 나올 때, 그때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이 시작될 것입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121-189, 114-9, 32-237, 29-151, 38-139, 37-7, 11-84, 41-9, 39-7

 


7.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의 소원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의 소원은 아들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딸만 찾으면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소원은 먼저 하나님의 참된 아들딸을 찾고, 그 아들딸로 이루어지는 참된 가정을 찾고, 참된 나라를 찾고, 참된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인간이 본래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출발했다면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가정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종족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땅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또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종족이 점점 많아지면 민족이 됩니다. 민족은 국가를 이룹니다. 국가를 이루면 주권이 있어야 되는데, 그 주권은 누구의 주권이냐?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또 백성은 누구의 백성이냐? 또 땅은 누구 땅이냐? 전부 하나님 것입니다. 그렇게 커지면 땅 위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됩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주권을 이루는 하나의 백성이 되어 하나의 주인에게 지배받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그렇게 막연하게 대답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타락한 인간에게 스승 중의 제일 큰 스승입니다. 선생님 중의 대왕 선생님입니다. 왜냐?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부모로 말하면 하나님은 부모 중에서도 첫째 부모입니다. 즉 참된 부모입니다. 왕이라면 만왕의 왕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참부모가 되지 못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기도를 마칠 때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맨 처음 참부모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면서 빌 때 아버지 이름으로 빕니다. 무엇을 할 때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물에 빠졌을 때 누가 구해주기를 원하느냐? 이웃 동네의 할아버지가 구주가 되어 구해주기를 원하느냐, 자기 동생이 구주가 되어 구해주기를 원하느냐? 자기를 구해주는 구주가 형님이면 좋겠느냐, 동생이면 좋겠느냐? 누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라느냐? 자기 부모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랍니다. 구주 중에서도 일등 구주인 부모가 와서 구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식의 고통을 자기 뼛골에 사무치는 고통으로 아는 분이기 때문에 자식은 아버지 어머니 되는 구주를 찾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신은 어머니 신입니다. 죄를 여자가 지었기 때문에 여자를 대신해서 어머니 신으로서 죄를 씻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성신입니다. 아버지는 낳아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신은 예수님을 사모하기를 세상의 남편 이상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갖지 않고는 예수님을 못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승인을 못 받습니다. 성신이 어떤 성신인지를 몰라서는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고는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승 중의 참스승이요, 부모 중의 참부모요, 대왕 중의 참대왕이기 때문에 효도하는 것이 결국 나라를 위하는 길입니다. 본래 인간은 부모에게 효도만 하면 천국 가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부모의 말을 잘 듣고 부모를 따라 가르침대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천국에 가기 마련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인륜도덕으로 볼 때도 부모에게 효도하고 군왕에 대하여 충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본연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 앞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충신과 효자의 도리를 다하면 천국은 내 것이요, 그 주권도 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충의 사상을 가르치는 동양사상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가르침 중에 누구의 가르침이 제일 위대하냐? 스승의 가르침보다 부모로서 스승의 가르침을 대신할 수 있고, 부모로서 나랏님을 대신할 수 있는 부모라면 그 부모의 자식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러면 그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자기 것이 됩니다. 이런 부모와 같은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한 분으로 계시는 하나님에게 나라가 이 땅 위에 있습니까, 주권이 이 땅 위에 있습니까, 백성이 이 땅 위에 있습니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전부 다 하나님 것이 되었을 텐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 것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민을 세워서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으니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상대를 찾아야 했습니다. 신랑 신부가 되어서 가정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부부를 이루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딸은 하나님의 뭐가 되느냐? 손자가 됩니다. 하나님에게 손자가 많으면 좋겠습니까, 적으면 좋겠습니까? 손자가 많으면 하나의 족속을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이루게 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땅에 주권을 세우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일을 하려다가 못 한 것이 한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소망하는가

 

하나님은 어떠한 입장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 과연 어떠한 입장이냐? 다시 말해서 종의 입장이냐, 양자의 입장이냐, 혹은 아들의 입장이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떠한 자리에서 인간을 대해주고 싶을 것이냐? 인간의 욕망을 중심으로 볼 때 종의 입장으로 대해주면 싫다고 할 것이요, 양자의 입장으로 대해줘도 싫다고 할 것입니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당신은 내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또한 여자들은 󰡐당신은 내 아버지요, 나는 당신의 딸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인간으로서는 그 이상 바랄 자리가 없습니다.

만일 한 나라 대통령의 사위 아니면 아들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너는 대통령의 사위가 될래, 아들이 될래?󰡑 하고 물어보면 어느 누구든지 대통령의 아들이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를 지도하는 대통령이 있다면 그와 관계를 맺어 심정적으로 가까이함으로써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얼마만큼 심정적으로 가까이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만큼 영광의 자리에 가느냐 하는 것이 좌우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이 우주의 절대적인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느냐? 단 하나의 자리를 소망합니다. 종의 자리도 아니요, 양자의 자리도 아닙니다. 아들딸의 자리를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바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부모 앞에 불효를 하고,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아 부모의 책망을 받는 아들딸이 되어야 되겠느냐? 그래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 효의 도리를 다하여 부모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바라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참사랑으로 호흡해야

 

우리 인간은 숨을 쉬고 사는데, 하나님이 숨을 쉰다면 어디로 쉬겠느냐? 코로 쉬겠느냐, 마음을 통해서 쉬겠느냐? 하나님에게 공기가 필요합니까? 또 물이 필요합니까? 그런 것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한 게 뭐냐? 다이아몬드냐, 금덩어리냐? 그런 것은 얼마든지 하나님이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필요한 게 뭐냐?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통한 눈을 좋아합니다. 또 코는 어떠냐? 코도 마찬가지입니다. 입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중심으로 한 느낌과 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호흡하는 데 필요한 공기처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것이 뭐냐? 사랑이 틀림없다 하는 개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영계는 도대체 어떤 세계냐? 물로 꽉차 있는 세계냐, 공기로 꽉차 있는 세계냐, 생명으로 꽉찬 세계냐? 사랑으로 꽉찬 세계입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숨을 쉽니다. 하나님도 편안히 쉴 수 있고, 󰡐, 너무 좋다. 모든 것이 다 찼다. 눈도 차고, 입도 차고, 코도 차고, 오관이 다 찼다!󰡑 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은 사랑으로써 모든 것을 호흡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코로 숨을 쉬고 있지만 머리에 숨구멍이 나 있습니다. 갓난아이들은 머리의 정수리가 불룩거립니다.

인간은 아기로 태어났다가 아기로 가는 것입니다. 늙으면 아기가 됩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어머니 아버지는 사랑으로 품어줍니다. 영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데도 다 질서가 있습니다.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아기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리고 세상에 나왔을 때 부모가 얼마나 사랑합니까? 또 우리가 제3 세계에 가면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겠느냐? 모든 것은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눈도 3단계로 되어 있고, 코도 그렇고, 입도 그렇고, 귀도 3단계입니다. 사랑의 공기로 충만한 그 세계를 향해 가기 위해서 준비해야 합니다.

복중에 있을 때 귀가 필요하고, 눈이 필요하고, 입이 필요하며, 코가 필요하냐? 다 필요없습니다. 그런데 그 눈입이 복중시대를 위해서 있습니까, 이 지상시대를 위해서 있습니까? 지상시대를 위해서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사랑의 세계로 가기 위한 내적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눈이 빠져 나가고, 귀가 막혀 버리고, 입이 다 붙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거 죽기 전에 고치고 나와야 할 텐데, 복중에서 저것이 고장이 안 난 상태로 나와야 할 텐데󰡑 하고 걱정한다는 것입니다. 낳은 뒤에 고칠 수 있습니까?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 준비가 자동적으로 되었을 것입니다. 자동적으로 그것이 다 들어맞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해서 망가졌기 때문에 지상에 수술공장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

 

역사를 거쳐오면서 보다 나은 세계,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죽어가면서도 몰리는 싸움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온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라던 소원의 때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가치있는 것, 보다 빛나는 인생길, 보다 가치있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최종 목적은 세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까지 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최고 소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이 사탄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옥 세상에서 신음하며 고통받고 있는 인간을 보기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민과 부자의 관계를 맺어 사랑할 수 있고, 만민과 더불어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우리를 구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소원은 인간의 소원과 일치되어 있습니다. 소원이 일치돼 있다는 것은 곧 부자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입장에서 바라는 것은 뭐냐? 인간의 최후 소원은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소원이 인간의 소원이요 인간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사랑이요 내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치화될 수 있는 관계를 맺으면 인간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고장난 라디오와 같이 이미 병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인간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있지 못하고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내 한 개체 가운데에서 몸과 마음이 서로 다른 두 목적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두 목적을 향해서 가는 인간으로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하나의 사상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가는 존재로 창조했다면, 인간은 두 목적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이 모순된 결과에 처해 있는 사실을 두고 볼 때, 인간은 좋은 의미에서 정상적으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체가 고장난 입장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이 없어서 본래부터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든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은 인간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고장났으니 고장난 것을 수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노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고장난 인간을 수리할 수 있는 수리공장을 세워나왔습니다. 그 수리공장이 종교입니다. 수리공장은 기술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기술자가 바로 종교의 도주들입니다.

인간은 고장난 라디오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 되도록 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리공장을 거쳐나와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종교를 세워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세계 문화권은 종교문화권으로 흡수되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민주세계를 중심한 기독교 문화권, 극동 아시아를 중심한 유선 문화권, 인도를 중심한 힌두교 문화권, 이슬람의 회회교 문화권 등 문화권이 형성된 것을 두고 볼 때에, 수천년 동안 사람들이 종교문화권으로 몰려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리공장이 세워지면 거기에 필요한 모든 부속 재료들이 수리공장 주변에 모여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완성은 하나님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자리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더라면, 즉 인류 시조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된 자리에서 출발했더라면, 그 출발은 개인의 출발이자 우주적인 존재의 출발이 되었습니다. 또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최고의 소원인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장성하여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고 살게 되었다면, 인간은 그 이상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자리에 있는 자체는 개인이지만 우주적인 개인입니다.

천지 만물이 창조한 절대자의 것이라면 인간은 그분의 아들딸이기 때문에 인간의 것도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자리에 섰더라면 개인이 완성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의 완성이자 하나님이 창조한 천지 만물의 완성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면 하나님은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이 완성된 것을 보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가 온갖 정성을 들여서 작품을 완성했다면 작가는 그 작품을 귀하게 여기고 후세에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 작품을 영원히 보관하고 싶어합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하나님이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 동안만 사랑해주다가 집어던지고 말겠습니까? 인간이 백년쯤 산다면 백년을 좋아하다가 그 이후에는 필요없다며 집어던지겠어요? 인간도 자기가 정성들여 완성한 작품을 자손만대에 남기고 싶고, 자기와 더불어 같이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딸로 지은 인간을 잠깐 사랑하다가 말겠습니까? 영원히 사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받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곁에 두고 싶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대자가 그렇게 기뻐할 수 있으려면 인간도 영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영원히 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해와가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담 해와의 완성은 물론 하나님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완성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중심이 되는 인간에 대한 소원이 전부 다 완결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한다면 어느 정도로 기뻐했겠느냐? 625동란 때 헤어졌던 부자가 수십년 만에 만나서 󰡐아버지!󰡑 󰡐내 아들아!󰡑 하며 목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그 이상일 것입니다. 비교할 수도 없는 최고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점령할 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부부완성은 가정완성의 출발입니다. 즉 가정완성은 아들딸완성이자 부부완성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재미있게 잘사는데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들딸은 울고불고 하면서 못살겠습니까? 잘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완성은 가정완성입니다.

이렇게 완성한 가정에서 또 완성한 가정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이 종족을 이루어 종족완성이 되는 것이요, 그다음엔 민족완성이 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국가완성과 세계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에서 일등이 되기를 바라기보다 완전히 이루어서 소화해야 합니다.

 

 

종교는 고장난 인간을 고치는 수리공장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아닙니다. 어떤 국가를 보더라도 우리가 바라는 국가가 아닙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시정하고 해결해야 할 여건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회는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본래 인간 조상이 절대자인 하나님과 하나되었다면 거기서부터 부부완성이자 가정완성, 국가완성, 세계완성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세계완성뿐만 아니라 우주완성까지도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잃어버렸으니 인간 본연의 마음은 그것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고장난 라디오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흐르는 전파를 받으면 󰡐󰡑 하는 소리라도 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본심이 있어 그 작용으로 인하여 어디론가 가려고 합니다. 틀림없이 그럽니다. 그 자리가 바로 최고의 자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고장났습니다. 고장난 우리 인간입니다. 고장난 인간이 아무리 잘났다고 떠들면 뭘합니까? 분해를 해서 다시 한 번 손질을 해야 합니다. 고장난 기계가 수리공장에 들어가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놔둡니까? 수리하려면 전부 다 분해해야 합니다.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입장이 그와 같습니다.

이 고장난 인간을 고치는 수리공장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수리공장이 끝날에는 부속품만 갈아끼워 수리하는 공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종합 수리공장을 만들어서 종합적으로 수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리고 종합 수리공장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종합 수리공장의 기술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기술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주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세계의 모든 종교의 사명이 끝날 수 있는 때가 왔으니, 통일교회가 종합 수리공장으로서의 내용을 갖추고 나왔다면 통일종교를 바라는 세계 만민들은 통일교회를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통일교회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을 한국 백성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설사 통일교회가 그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그 방향만이라도 제시한다면 이 민족이 좋아하고 환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통일교회는 반대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 수리공장에서는 고장난 것을 수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수리공장들은 어디가 고장났는지도 모르고 수리하다가 더 고장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수리공장의 주인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들이 망하게 되었으니 안 망하려고 통일교회를 반대합니다. 나라도 반대하고 세계까지 반대합니다. 그러나 나라와 세계가 반대한다 해도 우리 수리공장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고쳐져야 할 인간

 

고장난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어느 곳이 고장났는지 아는 사람이 고치면 한 번만 고치면 됩니다. 그러면 방송국에서 보내는 방송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백대라고 해서 내용이 다른 게 아니고 천대라고 해서 다른 게 아닙니다. 억만대가 있다 해도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와 기뻐하는 그 자체를 비쳐주는 텔레비전이 있다면, 그 기쁜 마음을 느낄 수 있게끔 되어 있다면 만민이 모두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 기쁜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슬퍼하면 슬픈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만민이 전부 다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은 멋진 세상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되어 있으니 수리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수리공장에 들어와서 천천히 수리되기를 바라겠느냐, 아니면 빨리 수리되기를 바라겠느냐? 그것은 우리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년 만에 수리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십년 걸려야 수리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수리공장에 들어와서 일생 동안 수리되다가 버려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 시조가 하나님과 하나되었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개인완성이자 세계완성이며, 개인의 기쁨이자 세계의 기쁨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꺼번에 천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는 자연히 완성됩니다. 가정완성만 되면 자연적으로 다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된 소나무 씨를 뿌렸다 하면 참된 소나무 싹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참된 소나무로 남아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참된 소나무 씨가 되어야 할 텐데 다른 씨가 됐습니다. 그러니 참된 소나무 씨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비사로 말하면 돌감람나무가 되었으니 참감람나무로 바뀌어야 합니다. 본래 우리 인간이 참감람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돌감람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런 나무의 열매는 까마귀 밥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참감람나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접붙여야 합니다. 돌감람나무를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를 접붙여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 인간은 재생창에 들어가서 접을 붙여야 합니다.

참감람나무가 되지 못한 인간은 이상적인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있는 나라들은 이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악이 우세한 나라입니다. 이 세계도 악이 우세한 세계입니다. 선과 악이 얼룩덜룩 섞인 입장에 있습니다. 이렇게 돼 있는 것을 해부하여 잘라 버려야 합니다. 선과 악이 서로 싸우는 입장에 있으면 이상적인 나라나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무엇을 찾아나왔는가

 

우리 인간이 바라는 이상적인 세계나 이상적인 국가민족씨족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상적인 가정이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왜냐? 완성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수리공장이요 잃어버린 본향길을 찾아가게끔 안내하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무엇을 찾아나왔느냐? 이상적인 한 남자와 이상적인 한 여자를 찾아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은 몽땅 내 사랑이다󰡑 할 수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찾아나왔습니다. 기독교에서 예수님은 신랑이요 신도들은 신부라고 하는 것은 곧 세계를 총망라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독생자와 독생녀를 찾기 위한 내용을 말한 것입니다. 완성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이 땅 위에서 만나 혼인잔치를 치러야만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래서 재림주님을 신랑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 신랑이 한 신부를 찾아서 둘이 합하여 어린양잔치를 해야 합니다. 어린양잔치가 뭐냐? 본래 인간 시조는 선한 부모로 출발해야 했는데 악한 부모로 출발했기 때문에 인간은 모두 악한 부모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하나님의 직계 사랑을 통한 혈족으로 남아지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아들딸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래의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 신부를 맞이하는 어린양잔치입니다. 주님이 이 땅 위에 신랑으로 와서 한 신부를 찾아 한 기준 위에 접붙여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종교 가운데 대표적인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그 기준을 설정하여 확고한 목적을 세운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운 종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민주세계가 기독교 문화권에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참된 부모를 맞이하려면 그렇게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종교는 무엇을 해왔느냐? 참된 아들 하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아들 하나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도주들 가운데는 여자가 없고 전부 남자입니다. 이건 참된 아들 하나를 만들기 위해 연결시켜나왔다는 걸 뜻합니다. 일 단계, 이 단계 …… 백 단계, 이렇게 올라가 최후의 배턴을 이어받아 승패를 결정지을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 아들을 찾아나왔습니다. 이게 지금까지의 역사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41-260, 41-9, 111-36

 

 

8. 참된 행복의 길

    

 

불행에 처한 인간들

 

오늘날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올해보다 내년, 한 생애를 넘어 영원히 행복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이 땅에 태어나 살다 가는 모든 인간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이 어떠하길 바라느냐? 하나님이 있는 곳에 지음받은 것들도 같이 있기를 바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면 그 지음받은 것도 역시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었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연을 가졌는지는 모르나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종교에서 쓰는 명사를 빌려 말하면, 󰡐지음받은 우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이를 창조한 절대자가 있어야 할 것이니, 그를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그 하나님에게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오늘날 인간이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불완전하게 우리를 지은 것인가, 아니면 지은 하나님이 불완전한 것인가?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이라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 우리 생애의 이상적인 모든 요소가 다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지(知情意)의 감정을 충만히 충당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적인 주체자요 절대목적의 중심으로 있을 수 있고, 나아가서는 실체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지고지선의 존재, 최고의 절대 기준에 계신 존재와 인연되지 못하는 어떤 조건이 개재되었는데 그 조건을 악이라고 하고, 그 조건이 생긴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은 천지 만물 중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미물(微物)인 세균 하나도 어떤 목적을 위해 그 생을 영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그 시간부터 자신은 모른다 할지라도 나를 살려주고 나를 가르쳐온 대천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존재해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한 재료와 어떠한 목적의 실체와 하나된다면,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1백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할 것이고,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자기의 요구조건과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그런 때가 와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헤쳐놓고, 심정을 헤쳐놓고, 생활의 어떠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볼 때, 행복이란 명사는 있을망정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했습니다.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귀한 그 무엇도 갖지 못한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대우주의 목적을 세우고 피조 만물을 지었는데, 지음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슬픔이 다시 연속된다면 그런 창조는 누구나 싫어할 것입니다. 고통이 개재되는 창조목적 달성이라면 모두 싫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후에 비록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슬픔과 고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자극할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될지언정 생명을 지배하고 행복과 기쁨을 유린하는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불행하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세워진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긴 해도 자랑할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내 생명이 있다 해도 그 생명이 대우주의 이념, 혹은 대우주의 행복한 세계 앞에 어떤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갖춘 인격과 내가 갖춘 이념과 내가 자랑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대우주의 이념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인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지간에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찾아 나아가는 우리의 최고 소망은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우리 마음에 선() 같은 것은 있지만 최고의 선은 없습니다. 사랑 같은 것은 있지만 최고의 사랑은 없습니다. 참 같은 것은 있지만 최고의 참은 없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고의 참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곳 어떤 환경에 머물더라도 우리를 환영하고 우리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볼 때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지만 선의 본체가 되어 있지 못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볼 때 다 잃어버렸느냐? 영원한 최고의 행복을 중심으로 볼 때 다 잃어버렸습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응당 알아야 할 피조물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지의를 받아 태어난 인간이라면 그 창조주와 정을 통하고, 뜻을 통하고, 마음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무엇이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습니까? 이 고깃덩이가? 아닙니다. 만일 이 고깃덩이가 행복의 주체인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다면 이 고깃덩이는 만족스러워해야 할 것인데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정도 만족해하지 않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알맹이를 다 잃어버리고 빈 껍데기만 갖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써온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요, 성현 현철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맨 처음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천지를 찾아온 주인이 있는데 인간이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시간부터 그 주인 앞에 역적이 됩니다. 인간은 심정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본연의 주인을 모셔야 하는데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모시지 못하는 것은 천륜 앞에 용납받지 못할 역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의 세포, 우리의 감정 어디엔가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관념적으로는 인식할는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해서 󰡐하나님은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내재(內在)한다󰡑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이 땅 위에 슬픈 일이 있다면 무엇이 제일 슬픈 일이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또 무엇이 제일 괴로운 일이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천대를 받는 것이 제일 괴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분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것이 괴로운 일입니다. 슬픔도 그것이요, 고통도 그것이요, 억울함도 그것입니다. 만날 수 있는데도 못 만나는 것 이상 원통한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생활 속에서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인간이 슬펐다, 고통받았다, 억울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억울함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체를 잃어버린,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상속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통과 슬픔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따지고 보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에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은 잘 모르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과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인연되어 있습니다. 그 인연이 내 육체를 넘고 환경을 넘어서 어떤 전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우리를 수습해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분열되었는데, 이제는 점점점 마음이 기쁠 수 있는 한 곳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도 하나의 이념세계로 수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이념세계가 나와 접촉될 때에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음이 자리를 잡는 동시에 마음이 무한히 기쁘다고 외치는 소리가 우리 속에서 폭발되어 올라와 이 만천하에 울려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아무리 철창에 갇혀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고통스런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나는 행복하다󰡑 하는 환성이 터져나올 것입니다. 이런 일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고통을 즐겨 받으라고 말합니다. 어느 종교나 그렇습니다. 슬픔을 달게 받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세계를 들고 나옵니다.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세계에 굴복시켜나왔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습하고 수습하여 본연의 마음세계를 향하여 정면으로 돌진해야 합니다. 그때가 끝날입니다. 하나님과 합하여 하나되어야 하는 때가 끝날입니다.

 

 

하나님의 소망인 3대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

 

우리는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그 자리가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그곳을 향해 달음질쳐 가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또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나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은 후 거기에 만물의 주재(主宰)로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는데, 인간이 이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이 이 축복(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하는 날에는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아버지가 되고, 아담 해와는 그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 이 말은 가공적(架空的)인 명사가 아닙니다. 이 말이 가공적인 명사라면 기독교의 모든 것은 거짓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사랑으로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의 심정으로 대하기를 바랐습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는 철모르는 누이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지 않고, 이는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한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며 아담을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때를 바라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입니다󰡑,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할 수 있는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아버지 어머니로서 이 대자연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지었습니다.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사람이 타락함으로 인해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탄식이 생겼습니다. 모든 만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된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 하나님의 심정은 이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소원하신 심정이 이러이러하지요?󰡑 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된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참된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이지,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위치를 밝히는 동시에 하나님의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를 밝혀나왔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하기 위하여 싸워오신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신앙자들은 의의 면류관이니 무슨 면류관이니 하는데, 선생님은 그거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던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하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전 역사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은 어디 갔는가? 타락 이전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과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의 세계는 어디 갔는가?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의 명령에 순응하는 자리, 만천하를 주관하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 섰어야 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딸로서의 위치와 권위를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사탄은 무엇이냐?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쥐어져 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참으로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을 밟아치우고, 이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에게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이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고 단지 믿는다고 구원을 받겠습니까? 구원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백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 위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도의 길,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인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다음엔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나를 지은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생애의 아버지, 땅 위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땅 위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냐? 아버지를 다 갖고 있는데 왜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느냐?󰡑 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누구냐?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참아버지 참어머니입니다. 몸을 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이 되어 버렸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필요없습니다. 왜 필요없느냐? 본연의 아버지와의 심정적 인연에 의해 태어난 아들딸은 이 땅 위의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을 대해서는 사탄의 사랑은 물론 그 무슨 사랑으로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충신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고, 효자 효녀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고, 열녀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야만 천륜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과 통하여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운데 선남 선녀로서 성혼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거이 그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시고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표본이 되는 참부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는 참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 주인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한때 󰡐아버지여, 제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저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본래는 그래야 합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행복한 세상이요, 천국입니다. 알고 보니 이런 역사의 곡절이 그 옛날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의 부자의 인연을 잃어버린 자들인 동시에 참된 육신을 갖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된 영과 육을 가진 부모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중생해야 할 인간

 

예수님은 어떤 분이냐? 그는 후아담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절에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 텐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은 바로 어머니신입니다. 즉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신인 성신을 보낸 것입니다. 구멍이 뚫렸으면 뚫린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해와로 인해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다 사망세계에 있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됩니다.

성경에 여인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딤전 2:15). 이것은 오늘날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을 낳았을 텐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은 이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납니다. 알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이 무엇이냐?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중생은 무엇이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아버지요 신랑이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요 신부입니다. 인류가 신부의 인연을 받아 신랑 되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 없이는 못 살고 성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적으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인간에게 주입되면 중생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을 낳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멍이 생겼으면 땜질을 해야 합니다.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구주인 동시에 인간으로 아버지입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입니다. 인류가 잃어버린 그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놓아야만 천지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원리원칙을 중심으로 법도를 세우고, 인간은 그 법도를 통할 수 있는 기준을 갖추어야만 모든 일을 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살고 있지만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참부모가 없습니다.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 같은 너희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가 없습니까? 부모가 없습니까? 신랑이 없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고아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고아입니다. 왜 과부냐? 참된 신랑 되는 예수님과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과부입니다.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합니다. 세상 일도 그렇습니다. 끄트머리에서 아무리 해봐야 수습되지 않습니다. 모든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 아담 해와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합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후의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애달펐던 심정의 관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을 찾아서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만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됩니다. 한 나라도 그렇습니다. 근원 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합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원래 예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 조상이 타락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아담이 중심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아느니 모르느니,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논란이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못나고 미흡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해 󰡐!󰡑 하면 그 피조물이 󰡐!󰡑 할 수 있게끔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끝날에 인간이 찾아가야 할 분은 누구인가

 

앞으로 종교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 사회관과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옵니다. 내 아들딸만 아들딸입니까? 내 가정만 가정입니까? 내 나라만 나라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때는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인 이때는 내 생활 감정을 넘어서고, 내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서 천주관(天宙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면 그 부모가 좋아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 하나님이 󰡐오냐!󰡑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인간으로서 이 땅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를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때, 참된 행복을 바라고 나아가는 이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을 넘어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하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박힌 사람이면,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할 것입니다.

오늘의 그 무엇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합니다. 자랑할 것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찾을 것을 찾지 못했고, 가질 것을 갖지 못했고, 자랑할 것을 갖지 못했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어 보세요. 󰡐아이고,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 싸 놓고 죽자 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 나에게 오라󰡑 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한 국가나 민족권으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짓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가 있지만,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세계인 영계를 가르쳐주는 도도 있지만, 윤리 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놓는 종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또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참부모가 깨지니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부부가 안 나왔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이뤄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냐? 천만부당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주님이 오실 때에는 세상의 부부들이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를 체험한 사람은 대번에 압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라 할지라도 남편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 갈 곳이 따로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 본래의 창조이상이라면 항의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하여 축복받은 참된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하나님을 모셔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놓고 이렇게 살라고 했겠습니까?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이냐?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새워지지 않았는데 그 후손될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느냐?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나아가는 복귀역사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하는 아들딸의 입장은 됐지만 천지 만물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은 못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참된 주인공을 세워 그를 중심으로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일남 일녀가 성숙하여 그들이 만물과 화동하는 웃음이 터져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맺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을 거쳐, 자라고 또 자라서 참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하나님은 영원한 내 아버지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아들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다가 잃어버린 모든 심정적인 것을 싸매서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를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이 바랄 것은 무엇이냐?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가 의붓자식입니다. 우리는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성신을 잃고는 못 산다. 내 몸과 피살이 그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자녀의 인연을 맺어 양육받고, 성신의 도움을 받아서 성신이 신랑인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귀하냐? 무슨 보물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둘이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기쁜 것이 못 됩니다.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둘이 소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혼자만 소유하고 혼자만 지배할 수 있는 제일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냐? 모든 존재물이 자기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것을 가져 보았느냐? 금은 보화가 귀하다고 하지만, 자기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자기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 가치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천상천하에 어떤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음받은 상대적 존재이지만 하나님만은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내 것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이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 것. 그러므로 그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사람이 왔다 갔지만 󰡐너만은 내 아들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은 최대의 성공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라는, 아들이라는 명분을 받았습니다.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는 참된 효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떻게 나온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자기를 대하여 어떠한 심정을 갖고 있는 아버지인가를 알았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자기를 세워 어떠한 축복을 해주고자 하는가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입니다. 무슨 구주냐?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모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부를 찾아주는 구주, 참자녀를 찾아주는 구주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생명만 구원해주는 구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서 온 분이요, 잃어버린 참부모로 온 분이요, 참부부의 신랑으로 온 분이요, 하나님 앞에 참된 효자로 온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참부모를 사랑하는 자요, 참부부가 될 수 있는 자요, 참자녀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심정세계를 찾아나온 하나님

 

앞으로 만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울부짖을 때가 올 것입니다. 바라고 의지하는 주권도 믿을 수 없고, 믿고 있는 종교도 믿을 수 없고, 어떠한 학문이나 철학도 믿을 수 없다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냐? 심정으로 시작된 인간이요, 심정을 거쳐서 심정으로 종결되는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기원은 말이 아닙니다. 심정을 기원으로 태어난 인간이니 심정의 인연을 거쳐 심정으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로부터 󰡐, 할렐루야!󰡑 하는 송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송영의 가치를 1백퍼센트 구비하려면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역사는 처리의 역사입니다. 어떠한 국가, 어떠한 주권을 본으로 세워서 나가다가 그 국가나 주권이 떨어지면 처리하여 그보다 더 본이 되고 더 좋은 새로운 국가를 세워 나옵니다. 그렇게 국가나 주권은 처리할 수 있지만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생활이나 사정은 처리할 수 있어도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이 심정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인류역사 노정에 나타나지 않는 한 평화와 행복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심정의 세계를 찾아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천적인 심정의 세계가 나오는 날에는 인간적인 모든 윤리 도덕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깨집니다. 헌 것이 깨져야 새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혼란해집니다. 윤리 도덕관이 깨져나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 칼질을 합니다. 다 깨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깨져서 천지가 종결된다면 미리 그런 자리를 찾아가서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은 자살 구멍을 찾아 들어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선생님은 󰡐아버지, 자살 구멍을 찾아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보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계의 종말을 예감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좋다 해도 마음이 즐겁지 않구나. 아무리 행동은 즐거워도 마음은 안식하지 못하는구나!󰡑 이렇게 느끼는 사람은 선각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정의 세계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환경을 수습해나가는 선각자입니다.

안식의 터전은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요, 사정과 형편 때문에 일시 휴식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심정이 영원무궁토록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입니다. 󰡐욕을 먹어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그 무엇이 내 생애를 빼앗아가도 좋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천적인 심정의 인연이 끊어진 인간은 생명이 없는 인간입니다. 이것을 안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원()은 심정의 원입니다. 󰡐심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전세계 인류는 찾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때 기필코 해결지어야 할 문제를 앞에 놓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밥 잘 먹는 일이 아니요, 주권을 잘 세워서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고 즐거워하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은 동서양의 문제가 아닙니다. 피부 빛깔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이념이 이 땅 위에 나온다면 평화와 행복의 세계, 천국은 자연히 올 것입니다. 그런 일을 영영 못 한다면 하나님도 인류의 역적입니다. 왜냐? 무엇을 하지 말라, 무엇을 버리라고만 했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의 선물을 준비했기에 네가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이나 받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 고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말라,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마운 것입니다. 알고 보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에서 사도들이 수고해왔지만, 수고하여 무엇을 얻으면 또 잃어버리고 눈물지어야 할 것을 알기에 다 버리고 한때만을 소망하며 참고 고대해나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진정 행복한 사람

 

사람은 누구나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냐? 남이 알지 못하는 학문을 많이 한다고 행복합니까? 보물을 많이 가졌다고 행복합니까? 권세를 가졌다고 행복합니까? 그런 것을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망합니다.

그래서 제일 귀한 것은 무엇이냐? 만우주의 대주재이며 주인공인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면 이 천지는 그의 것이 됩니다. 인간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자기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입니다. 타락해서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됩시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우리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우리는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짓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아들딸이 되지 못하여 피의 곡절이 벌어졌으니, 우리는 그 자리를 통과하여 본연의 아들딸, 타락으로 인해 뒤죽박죽이 된 한의 심정을 풀기 위하여 6천년 동안 수고한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꾸로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알파와 오메가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만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인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입니다. 또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있다고 보면 아들격입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의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왔고, 지금까지 왔다 간 수많은 우리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는 분을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우리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이뤄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리 반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귀한 것을 알려면 귀한 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끝날에는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참 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 잘났다고 하고 서로가 다 옳다고 하니 어떤 것을 믿어야 되느냐? 그러기에 하나님과 담판해야 합니다. 이 끝날에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문제를 걸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판국입니까?󰡑 하고 담판하여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으려면 천신만고의 고통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서 인간이 잘 믿기 위해 고생하던 그 죽음의 고비도 늠름히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슬픔의 곡절도 많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당하고 당하여도 내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는 각오 아래 천신만고 끝에 그 문제를 해결할 때에 그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귀한 것을 찾기 위하여 무엇을 해보았느냐? 생명을 한번 걸어봤습니까?

옛날 사도들은 이 귀한 것을 다리놓기 위하여 목이 잘려 죽어갔습니다. 이 귀한 것을 친히 찾아 가져야 할 끝날의 성도인 우리는 무엇을 해봤습니까? 누가 때리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안 맞으려 하고, 그저 싸우려고만 하고, 한마디 억울한 말만 들어도 잠을 못 자고 보복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천 번 맞고도 돌아서서 염려합니다. 만 번 배척받고, 만사에 비운의 곡절이 깃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고통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창조 당시에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가졌던 소망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애쓰는 하나님입니다. 타락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이 한을 잊어버리고, 본연의 아들딸로 축복해주어 내일의 행복의 동산에서 즐거워하겠다는 심정을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 하나님입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9-126~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