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 해와의 생활(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3 장 인간의 타락과 구원섭리 1)

무지... | 20180417085001

2. 하나님을 중심한 아담 해와의 생활

       

하나님은 어떠한 한날을 고대하고 그리워했던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짓던 그 순간은 새로운 순간이었습니다. 지어지는 만물도 새로운 만물이었습니다. 짓는 순간도 그러하거니와 지어진 물건도 새로운 것인 동시에 새 것을 대하고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도 새로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지어놓은 그 새로운 만물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향유해야 할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새로운 심정적인 이념을 품고 바라보던 하나님에게는, 어느 한 순간 어느 한 시간 귀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거동하는 그 순간 순간은 말할 수 없이 심각한 순간이요, 말할 수 없이 귀한 인연의 시간이었습니다.


자라나고 있는 아담 해와는 날이 감에 따라 이지와 지능이 밝아져 하나님의 본성을 대신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지음받은 새로운 세계를 대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서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으며, 만질 수 있는 자격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님 자신의 움직임이고,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말이 되고, 또한 그들이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 듣고 보고 느끼는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관계와 인연권에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심중으로 그리던, 하나님의 전체를 대신한 존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하여 지은 만물을 품고 있는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어떠한 한날을 고대하고 그리워하였느냐? 여섯째 날까지 천지창조를 필하였으나, 아담 해와를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지 않은 데에는 아담 해와와 하나님 사이에는 필시 무엇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지어놓은 상태의 아담 해와도 아니요,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아니요, 아담 해와를 통하여 찾아 이루려고 했던 축복의 한날이었습니다. 이 한날을 맞이하는 그 순간 하나님도 기뻐하고, 아담 해와도 기뻐하고, 만물도 기뻐할 것이기에 만물도 그날을 고대하고, 인간도 그날을 고대하고, 하나님도 그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날이야말로 만상(萬象)이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요, 그날이야말로 하나님이 창조역사를 끝내놓고 기뻐할 수 있고 최고의 웃음을 웃을 수 있는 날이요, 최고의 춤을 출 수 있는 날이요, 천지가 생겨난 이래 비로소 최고의 자유와 행복에 잠겨 만상이 화동(和動)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한날, 그러한 한 시간, 그러한 한 순간은 하나님의 심중에 소망의 날과 소망의 시간과 소원의 순간으로 묻힌 채 오늘날까지 미완(未完)의 이상(理想)으로 남아져 있습니다. (8-267)

       


천지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어, 내외간에 하나되어 서로 사랑이 넘치게 될 때에 아담은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제일 좋아합니다. 얼마만큼 좋아하느냐? 생명을 걸고 좋아합니다. 그러면 갈라져 있으면서 좋아하겠다는 것이냐? 딱 붙어서 좋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입니다. 어디까지 딱 붙느냐? 사랑하는 아담 마음속에까지 파고들어가서 같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속에도 들어갈 수 있고, 해와 속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대관절 아담 해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뭘 하려고 지었습니까? 그냥 바라보려고 지었습니까? 바라만 보면 재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주를 지은 것은 결국 무엇이냐? 보고 놀겠다는 것이냐?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시집 장가를 가서 아들딸을 낳고 사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입니다. 살림살이를 시작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자기의 족속을 중심으로 사랑의 동산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하나님이 살림살이할 이용물로서 정원이고 비품입니다. 이것을 사탄에게 주기 위해서 만들었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어떻게 만들었겠습니까? 정성에 정성을 다해서 만들었습니다.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들었는데, 그 걸작품을 전부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만들었겠습니까? 정성을 들여 만들었기 때문에 행여나 다칠세라, 흠이 갈세라 염려했습니다.


정말 예쁜 아기를 보면 만지고 싶습니다.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목석입니다. 아기가 예쁘면 만지고 싶습니다. 또 예쁜 아기를 보면 뽀뽀해주고 싶습니다. 예쁜 아기에게 뽀뽀해봤을 것입니다. 뽀뽀를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줘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좋으냐? 전부 달라붙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보고 쓰다듬어주었을 것입니다. 쓰다듬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뽀뽀도 했을 것입니다. (48-200)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보고 얼마나 좋고 기뻤는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 둘만 있는데, 해와는 누굴 따라다녔겠느냐? 틀림없이 아담 궁둥이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또 그 둔한 아담은 누구를 따라다녔겠느냐? 털석털석 하면서 해와를 따라다녔습니다. 해와가 '아담, 여기 와요' 하면, '그래, 갈게' 하게 되어 있지 다른 데 가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둘이 졸졸 붙어다녔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고 사방으로 보면서 빨리 클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빨리 크기를 간절히 바랐겠느냐? 어린 아담 해와를 보는 하나님은 속에서 사랑이 폭발되었습니다. '! 이렇게 자식이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완성한 기준을 알고 모든 것을 창조했지만 사랑의 체휼이 그렇게 아기자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한살 두살 자라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말려들어가고, 몸이 말려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신이 있다면 그 정신까지도 전부 말려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서로를 대하면서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담 해와는 서로를 대해 ', 나하고 아무관계 없는 줄 알았더니 그 무엇인가 있구나' 하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두서너 살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들은 걸을 때도 살살살 걷고, 눈만 깜박거리면서 땅만 보고 다녔습니다. 더벅머리 총각, 멀쑥한 녀석이 지나가면 안 본 것같이 하면서 언제 봤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감지가 빠릅니다. 그거 누가 가르쳐줬느냐?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됩니다. 그런 청소년시대의 아담 해와를 보고 하나님은 굉장히 좋고 기뻤습니다. 그래서 '자꾸 커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만들어놓고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130-25)

       


태초에 아담 해와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얼굴은 어떠했을까요? 요즘처럼 머리를 깨끗이 하고 색깔을 맞춰 옷을 입고 그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은 수염이 났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수염이 났습니다. 또 머리는 여자같이 길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날 면도를 하고 화장을 하고 나서는 우리가 외면적으로는 그들보다 더 낫습니다. 옷을 입고 치장을 하면 근사합니다. 그때 치약으로 이를 닦았겠습니까?


집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그 외모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주인이 없으면 그 모든 외적인 물건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때 아담 해와는 아무리 못났어도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는 악기(惡氣)가 없었고, 사람을 사기하기 위한 저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순수한 하나님의 기쁨을 표상할 수 있는 얼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 그들은 보는 것도 자기들의 눈을 통해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봤을 것이고, 그들이 듣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가 노래를 했다면 무슨 노래를 했겠느냐? 하나님과 통할 수 있었던 그 아담 해와 시대에는 하나님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노래를 했을 것입니다.


또 웃기 시작했다면 그 웃는 것은 누구로 인해 시작됐을까요? 누구를 대해서 웃기 시작했을까요? 아담이 해와 대해서? 해와가 아담 대해서? 아닙니다. 틀림없이 그 웃는 것도 아버지 되는 하나님을 대해서 웃기 시작했습니다.


좋아서 춤을 추었다면 그 춤도 하나님을 위해서 추었고, 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실과(實果)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잠을 잘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자고, 깰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깨고 싶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였습니다. (95-246)

      


본연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

 

만약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었다면 그때부터 개인이라도 그 개인은 개인이 아니고 우주를 대표한 개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그 가정과 피조세계가 연결되어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와 육계에 하나님의 사랑의 축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축을 중심으로 센터가 생기는데, 하나님은 이 센터에 계십니다. 이 축을 중심으로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나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돕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체로 해서 하나됨과 동시에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키는 대표입니다.


남자 여자가 만나서 둘이 하나되어 붙들고 돌아가는데, 하나님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갑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들은 주체와 대상이 전부 이상상대가 됩니다.


남자는 뭐냐? 우주의 사랑은 한계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사랑의 중심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남자입니다. 남자는 그 사랑과 연결되는 주체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뭐냐?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 남자 여자의 소망은 뭐냐? 이들의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축에 서는 것이 이들의 소망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90도가 되어야 합니다. (134-193)

       


자연은 아담 해와를 교육할 수 있는 산 교과서

 

모든 만물은 서로 사랑을 합니다. 동물을 보나, 곤충을 보나, 식물을 보나, 광물세계를 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상대를 중심으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날고, 기고 합니다. 아담과 해와는 이런 만물세계를 바라보면서 '저들이 뭘하나?' 하고 배웁니다. 그래서 자연은 아담 해와를 교육할 수 있는 박물관입니다. 아담 해와를 교육할 수 있는 산 교과서입니다.


아담 해와는 자연과 벗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남자이기 때문에 해와보다 활동 범위가 넓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동물들이 사는 것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암컷 수컷이 서로 하나되고, 하나가 배가 불러서 새끼를 낳는 것 등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교육의 재료였습니다. 동산에서 갖가지 동물들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제각기 소리치는데, 그것은 상대와 주고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음악, 창조이상적인 오케스트라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철없이 그것을 보고 좋아만 했는데, 철이 들면서 알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큼으로써 달라진 환경을 스스로 느낄 수 있는 그때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랄 때까지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건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런데 동산의 동물들은 전부 아담이 가면 아담을 따릅니다. 사람이 중앙이 되어서 모든 걸 연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조직에 연결된 체를 만들려니 사람을 중심하고 따르게 돼 있습니다. 이런 동산이었습니다.


해와는 아담을 따라다니다가 나이가 열 살이 넘으니까 가슴이 커지는데, 그걸 아담한테 '아담, 이거 이상하다. 내 가슴이 이렇게 볼록 나온다'고 얘기했겠습니까? 해와는 동물들이 젖을 먹이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에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점 커가면 남자 여자가 서로 인력이 강해집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자꾸 갖다 대고 싶고, 갖다 대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담 해와는 인력이 강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동물의 수놈 암놈이 만나서 둘이 입맞추는 것을 다 봤습니다. 전부 동물세계를 보고 배웁니다. 자연이 교육하게 되어 있습니다. 피조세계는 아담 해와가 이상적 자극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소재입니다. 이건 굉장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담 해와는 중앙입니다. 아담 해와의 소질을 보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여자하고 남자는 다릅니다. 사람은 같은 뱃속에서 나왔더라도 남자하고 여자가 다릅니다. 여자는 나면서부터 고운 것, 귀고리 목걸이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기관총 같은 소리가 나고 요란스러운 것을 생각합니다. 성격이 반대입니다. 이런 이들을 가까워지게 할 수 있는 힘, 그들을 하나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해와는 아담을 졸졸졸 따라다니다가 놀랄 장면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깜짝깜짝 놀라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해와는 아담의 행동이 자기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지만 아담이 참 재미있고, 아담과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해와는 놀랄 적마다 '아이쿠!' 하면서 아담을 붙들었습니다. 그럴 때 전기가 통합니다.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습니다. 가서 부딪치고 붙들어도 싫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여자들이 놀라는 순간에는 붙들고 숨습니다. 그런 행동을 누가 했느냐?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했습니다. (134-194)

       


아담 해와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하는 것

 

그렇게 자라던 아담 해와가 성숙해서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때까지 아담 해와가 해왔던 생활의 모든 전통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결혼해서 제2의 전통이 되는 부부생활로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일입니다.


그럴 때 아담 해와 마음대로 했겠느냐, 하나님 아버지한테 문의하고 했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가 승낙을 안 하는데도 '우리 마음대로 해야 되겠다' 그랬을 것이냐? 그때 아담 해와가 결혼이라는 걸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곤충이나 새, 이런 모든 동물들이 짝을 이뤄 사는 걸 보고 틀림없이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은 그때까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알았을지 몰라도 사랑의 맛은 몰랐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새로운 상대를 맺어주지 않고서는 참된 그 원칙을 통할 수 있는 사랑의 출발을 보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 관해서도 결국 하나님에게 어떻게 어떻게 해야 된다는 교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아담 해와를 결혼시켜주는 석상에서 무슨 교시를 했을 것이냐? '너희들 이렇게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이랬을까요? 무슨 교시를 했겠느냐? 그때는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 교육하려면 교과서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표준으로 삼아 서로 사랑하라고 했을 것이냐? 그때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해와를 사랑해라', 또 '해와야,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아담을 사랑해라' 했을 것입니다. 이건 딱 떨어지는 말입니다.


아담 해와에게 사랑하라고 할 때, '너희들 서로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하던 것보다 조금 덜 사랑해라' 그랬을까요, '더 사랑해라' 그랬을까요?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자기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그때부터 자기보다 해와를 더 사랑하고 아담을 더 사랑한다면 섭섭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있는데, 아담과 해와가 둘이 하나되면 하나님은 마음이 어떻겠느냐?


예를 들어 말하면, 혼자 사는 아줌마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보다 더 사랑해서 쭈욱 키워 가지고 장가를 보냈습니다. 장가를 보냈는데 첫날밤에 색시방에 들어가는 아들을 보고 그 어머니 마음은 물론 좋기야 좋겠지만 섭섭할까요, 안 섭섭할까요? 섭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물론 섭섭하지 않습니다. 왜 섭섭하지 않느냐? 사랑의 중심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 둘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하나님은 자꾸 거기에 흡수되어 들어갑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영원히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해와를 사랑할 때 하나님 대신 사랑하고, 해와는 아담을 사랑하되 하나님 대신 사랑한다는 개념이 여기서 형성됩니다. 따라서 아담 해와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하는 것이 됩니다. 아담 해와가 좋아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좋아하고, 아담 해와가 슬퍼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그 슬픔을 같이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사랑은 하나님 것이요, 아담 것이요, 해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95-248)

      


가정을 통한 사랑의 완성

 

우리는 모두 부모가 있습니다. 그 부모에게도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해와까지 갑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부모는 누구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라면 자녀인 아담 해와는 그 부모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살아 있는 한 유년시대,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성장하면 부부를 이루어 횡적인 부부의 사랑을 하게 마련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류 시조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서 부부가 되는데, 2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의 자녀가 없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상인 자녀가 있어야만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형제끼리는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자라지만, 성장해서 결혼하여 자녀를 가지면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로 시작해서 한바퀴 돌아 부모로 돌아가봐야 그 사랑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를 낳아봐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고 완성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부모 자신이 성숙한 자리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부모가 횡적으로 종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완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숙하여 하나님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하나되면, 즉 이성관계에서 서로 상대로서 하나되면 하나님이 목적으로 했던 사랑의 완성이 실현됩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되면 하나의 형()이 갖추어집니다. 그러나 평면적인 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합니다. 이 평면적인 형은 횡적 관계는 되지만 종적 관계는 될 수 없습니다. 부부의 사랑은 횡적으로 하나이며, 부모의 사랑은 종적으로 둘 이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중요하냐? 부부의 사랑은 상대적인 관계를 가졌지만 하나이기 때문에 종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종적 관계는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입니다. 즉 부모부부자녀가 종적 관계의 원칙입니다. 그것이 완전히 합하면 하나의 가정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넓히면 부모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부부의 관계를 거쳐 부모가 되면 자녀들도 부모의 사랑과 크기도 같고 길이도 같습니다. 그러면 자녀, 즉 형제의 사랑은 어떠해야 하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해야 하느냐? 아버지 어머니가 사랑하듯이 형제들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누구로부터 배워야 하느냐? 부모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 왜 파탄이 벌어지느냐? 사랑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계속하려면 부모를 중심으로 부부의 사랑을 밟아야 하고, 그 부모와 부부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는 형제를 통해서입니다. 여동생이 있다면 그 동생 사랑하기를 자기 어머니 사랑하듯이 해야 합니다. 또 여동생은 오빠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이 해야 합니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는 서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즉 형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남동생을 사랑하고, 언니는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듯이 여동생을 사랑해야 합니다.


만일 형제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상대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위하는 실체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형제는 아버지 어머니의 몸을 통해서 나왔으므로 아버지 어머니 대신입니다. 우리 각자는 아버지 어머니의 반쪽씩을 합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묶어야 하느냐? 사랑으로 묶어야 합니다. (66-119)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