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쁨이 차고 넘치는 하나님 가정(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2 장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무지... | 20180414061155

8. 기쁨이 차고 넘치는 하나님 가정


하나님도 홀로는 기쁠 수 없다


하나님이 기쁜 것을 좋아하겠어요, 슬픈 것을 좋아하겠어요? 기쁜 것을 좋아하는 하나님입니다. 인간도 슬픈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누구를 닮았느냐? 주인을 닮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소성을, 작가의 성격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가 우리 인간을 지었다면 우리 인간은 절대자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절대자를 닮았으니까 그 절대자인 하나님과 친구 될 수 있는 소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최고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좋아하겠다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닮습니다.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 앞에 우리 인간은 대상이니까 절대적인 대상이 됩니다. 이만하면 사람이 만물 중에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기쁜 것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기쁜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나,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다 같습니다. 슬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기쁜 것을 좋아합니다.


기쁘다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없이는 기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상대가 없이 혼자서 웃고 기뻐한다면 하나님이라고 하겠어요? 정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쁨을 느끼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상대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노벨상 열댓 개를 탔고, 세계 대통령이 되어 한번 손을 들어 호령하면 천하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암행어사 출동은 문제가 아닐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데 혼자 앉아서 허허허 웃는다면 미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깨알 같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손에 딱 붙여 놓고 웃는다면 정상적입니다. 이 말은 지극히 작은 대상 하나가 전체 가치를 인정시키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슬퍼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상의 세계를 지은 것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지에는 별의별 만물이 다 있는데, 이 가운데 최고의 보물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도 제일 가는 보물이 있습니다. 국가의 보물 중에는 국보가 있습니다. 그 국보 가운데서도 제일 가는 국보가 있습니다. 전부 일등 가는 국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국보 제1, 2, 3호 이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남대문이 국보 제1호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좋아서 국보 제1호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용과 가치면에서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절대적인 가치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제일 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무엇이냐? 거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 즉 하나밖에 없는 제일 가는 국보를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의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은 피조만물 가운데 중심이 되는 최고 걸작품이 있다면 그 걸작품에 대하여 관심을 갖겠어요, 갖지 않겠어요? 관심을 갖습니다. 관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까이합니다. 관심사의 내용이 거기에 집중돼 있을 때는 가까이하지 말라고 해도 가까이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관심사다 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대상이 필요합니다. 대상이 없으면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담 하와를 놓고 미치도록 기뻐하신 하나님


어떠한 물건에 관심이 있다면 그 물건을 그냥 두고 보겠어요, 만져 보고 싶겠어요? 우리 앞에 관심 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보기만 하지 않습니다.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만져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관심 있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하겠어요?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만져본다는 것입니다. 만져보는데 어떻게 만져보겠느냐? 관심이 크면 클수록 주무르고 만지고 할 것입니다. 때가 묻었으면 싹싹 닦고 불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자기 품에다 품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걸작품을 지었는데 잘못됐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버리고 다시 만들거나 다른 데 가서 찾으려고 하겠어요? 아기들은 태어나서 몇 달만 지나면 방긋방긋 웃습니다. 한 석달만 지나면 웃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을 때 여자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반드시 남편한테 이야기합니다.  '여보, 우리 아기가 웃었어요'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 말은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남편도 좋아합니다. 그러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아담과 해와를 보면 볼수록 귀여워서 좋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목석같이 가만히 있더라도 하나님은 좋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라도 그것이 더 감칠맛 났습니다. 자식에 대한 정이 그렇습니다. 아담 해와가 울면서 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좋아합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다 못 해 '얼씨구 절씨구'  합니다. 왜 그러냐?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좋고 귀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까닥까닥 하면 되받아서 같이 까닥까닥 하고, 손에 무엇인가를 주면 받기도 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은 미치도록 기뻤습니다.


어떤 조각가의 작품이 대통령상을 받았다 하면, 그 작품을 걸어 놓고 이것이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라며 그 조각가의 친척이나 문중 사람들이 모여 야단합니다. 이렇게 돌덩이로 만든 작품을 놓고도 떠들썩한데, 자기가 만든 작품이 말을 하고 자기 소원까지 얘기한다면 이런 작품을 놔 두고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놓고는 못 갑니다. 얼마나 보고 싶고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자기가 낳은 아기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신기하지 않다면 어머니 노릇 못 합니다. 아기가 잠을 자고 나서 밥 달라고 '빽'  하니 울어대면 엄마는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기분 나빠서 달려갑니까, 아기가 보고 싶어서 달려갑니까? 보고 싶어서 달려갑니다. 달려가서는 아기를 부여안고 가슴을 헤치고 생명의 호스를 들이댑니다. 아기가 그걸 잘 빨아먹는 것을 보면 엄마는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데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보고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기를 키울 때 좋아하던 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몇만 배, 몇억 배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면서 한번 웃으면 천지가 다 웃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춤을 추면 천지가 다 춤을 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울겠습니까, 따라서 좋아하겠습니까? 좋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춤을 추고 뭘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인간을 빼놓고는 상대할 대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빼놓고는 재미를 보려야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인간은 상대적인 절대자입니다.


사람을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어하신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감히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는 부족하더라도 고차원적인 것을 바라고 생활하며 최고의 자리를 표준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꾸 내려가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은 부족하더라도 최고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자꾸 내려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높고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감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말씀 한마디로 도깨비가 요술 부리듯이 지은 게 아닙니다. 자기 전체를 투입하고, 해산의 수고 이상으로 수고를 했습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전통으로 이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어머니가 자식 낳는 것의 몇백 배 힘을 들여서 지었습니다.


그렇게 지어놓은 아담 해와의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귀가 이렇게 생겨나고, 볼 수 있는 눈이 이렇게 생겨나고, 만질 수 있는 손이 이렇게 생겨났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생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얼마나 바랐겠느냐? 얼마나 보고 싶었겠느냐? 숨쉴 수 있는 코가 얼마나 보고 싶고, 귀가 얼마나 보고 싶고,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이 몸 어디 한 부분도 보고 싶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보고 싶고, 또 갖고 싶었습니다. 아담 해와의 눈을 갖고 싶고, 코를 갖고 싶고. 모든 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갖고 싶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었습니다. 너와 나와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같이 살고 싶은데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상대적 존재로 지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사랑에서만 영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사랑에서 영생의 논리가 나옵니다.


돈도 순환법도에 따라 돕니다. 돌아야 합니다. 도는 데서는 사랑만이 핵입니다. 핵은 천년 돌아도 그 자리입니다. 핵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었으면 핵 자체는 어디나 수직입니다. 아무데나 갖다 놔도 수직을 이룹니다. 그러니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척 멎으면 수직이 벌어집니다. 천지 도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수직이 잡혀집니까? 천지 도수가 척 맞습니까? 남자가 동반구라면 여자는 서반구인데, 둘이 만나서 굴러가다가 언제든지 수직을 갖춥니까? 사랑을 가지면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아빠'  소리를 듣고 싶어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자라나는 아담 해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답은 간단합니다.  '누가 먼저 아버지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 쌍둥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부모는 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누가 엄마 아빠 소리를 먼저 하나?'  하고 궁금해합니다. 엄마 아빠가  ', 엄마 아빠 먼저 부르는 아이에게 천만금을 주고 싶다'  하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되겠습니까, 안 지켜야 되겠습니까? 아기의 부모에게 제일 기쁜 것이 뭐냐 하면 '아빠!'  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빠 소리를 듣고 싶었겠습니까, 안 듣고 싶었겠습니까? 아담 해와는 하나님 대해서 아빠라고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아, 아담아!' 하며 찾을 때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그 소리를 들었겠습니까, 못 들었겠습니까? 들었다면  '아빠'라고 해야 됩니다. 무슨 아빠냐? 사랑할 줄 아는 아빠, 나를 사랑해야 되는 아빠입니다. 그걸 알려면 성숙해야 합니다.


세상을 다 알고 나서 아빠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 아빠가 이런 분이구나. 천지를 창조했구나. 위대하신 분이구나'  이래야 합니다. 또 여자는  '아이고, 우리 남편을 만드신 아빠로구나'  그래야 합니다. 남자에게 여자가 없으면 큰일납니다. 여자에게 남자가 없어도 큰일입니다. 데모를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문제가 있다면 그게 뭐겠느냐? 여자 앞에 남자가 없을 때 남자 찾아내라고 하는 데모가 최고의 데모입니다. 노동자가 데모할 때 요구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밥이 문제가 아니고, 집이 문제가 아니고, 월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 앞에는 여자가, 여자 앞에는 남자가 문제입니다.


내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여자를 준비해 두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아버지입니까? 아담이 그걸 느꼈겠습니까, 못 느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이들이 아버지라고 불러줄 것을 바랐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데는 천지의 이치를 알고서 '나는 아버지 앞에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 앞에 사랑을 돌려야 할 책임이 있다'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하는 것입니다. 아기 때  '아빠, 아빠' 할 때는 웃으며  '오냐'  했지만, 이때는 심각하게 눈을 부릅뜨고 '오냐!'  하는 것입니다. 무섭다면 그 이상 무서운 자리가 없고, 엄숙하다면 그 이상 엄숙한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사랑을 알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 기쁘다면 그 이상 기쁠 수 없고 엄숙하다면 그 이상 엄숙할 수 없는, 양 세계를 다 관리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날을 고대했습니다.


내 사랑을 받은 완숙한 남자, 내 사랑을 받은 완숙한 여자, 그 완숙한 남자 여자가 만나서 남자의 이름 여자 이름으로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나님은 듣고 싶었습니다. 또 그런 배필로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부부가 돼서 아들딸을 낳았을 때, 그 손자를 보고  '내 사랑하는 아무개야'  하고 싶고, 그 손자로부터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천하에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천지를 창조한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돈을 좋아하겠느냐?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권력? 전지전능한 하나님인데 권력이 있으면 뭘합니까? 지식? 천지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왕이요, 권력의 대왕이요, 돈의 대왕인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돈을 보고  '- 좋다!'  하고, 권력을 가지고  ', 좋구나!'  하겠습니까? 지식을 가지고  '아이고 좋아라! 내가 천하제일이지!'  이러고 좋아할 것 같습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인데 모든 면에서 갖춘 세계에 이름난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정부 각료회의에 참석해서 '내가 천하를 요리하는데, 이러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할 터이니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오'  할 때, 모두가  ', 그렇게 하십시오'  한다고 해서 그 대통령이 '아이 좋아라!'  그럽니까? 거기에서는 변화무쌍한 모습이 안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각료회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피곤한 몸으로 자기 집에 들어갔을 때, 아장아장 걷는 귀여운 아들이 와서 '아빠!'  하면  '어이!'  하면서 권력을 씁니까? 거기에는 지식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없고, 권력도 필요없습니다.  '아빠!'  하면  '그래, 그래'  할 뿐입니다. 아들이  '아빠!'  하는데  '에헴!'  하지 않습니다. 눈이 다 쭈그러지고 얼굴이 주름이 많이 졌어도 '그래, 그래!'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내가 대통령인데, 야 이놈아…'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허리를 구부리고 '아이고, 내 아들아!'  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데리고 놀고, 데리고 놀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것도 보여주고, 아들딸인 인간에게 아버지가 잘났다는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서 창조했습니다. 아버지가 잘하는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아들딸은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머리도 제일 좋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어서 이렇게 되어라 하면 그렇게 되고, 천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아버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아들딸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도 '아이고, 그렇지 그렇지!'  하며 좋아할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라 하더라도 자기가 옛날 초등학교 때 일등상을 받은 그림이 있으면 그것을 유물로 남겨놓고 싶어합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칭찬받은 그림이 있으면 그것을 두었다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또 목청이 좋은 사람은 노래를 하고 싶은데,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느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하고 싶지,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 잘하는 사람은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서 자기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괜히 신이 나서 노래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조금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상대적 관계에서 주고받고 싶어서 그럽니다. 주고받더라도 돈을 주고받는 것보다, 권력을 주고받는 것보다, 지식을 주고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제일 귀합니다.


부자의 관계는 영원한 것으로 누가 혁명하지 못해


부자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는 영원한 것으로 누가 혁명을 하지 못합니다. 진짜 사랑하는 부자의 관계를 누가 혁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의 천만 대군을 동원하여 포를 들이대면서 '지금까지 사랑해 왔던 것과 같이 자식을 사랑하면 안 돼!'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됩니까?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그 마음 전부 없애 버려라. 사랑하면 안 된다'  하면서 포를 들이대면, 겉으로 그렇게 하는 체하기는 하겠지만 마음으로는 더 불이 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세상의 어떠한 힘으로도 혁명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내적인 강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면 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도 역시 사람과 닮았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무엇을 좋아하느냐?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음에 틀림없고, 잘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잘사는 것은 무엇이냐?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서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서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같이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야 합니다. 남자가 가는 데 여자도 가고, 여자가 가는 데 남자도 가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녀인 아담 해와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대해 좋아서 '-'  웃고 있는 그 사랑판을 막을 존재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한 그분이 지금 좋아서 얼굴에 꽃이 피어 벙그러지고 있는데 '그거 안 돼요!'  하며 막을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  좋아하면 그 아들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빠가 좀 이상하다고 하겠습니까? 아들딸도  '-'  합니다. 아이들도 좋으면  '-'  웃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희색이 만면해서 웃으면 아담 해와는 찡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웃습니다.


사람이 웃을 때는 어디서부터 웃느냐? 눈부터 웃습니다. 왜 눈부터 웃느냐? 창조가 눈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눈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눈부터 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을 때의 감정은 입을 보고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눈을 보면 웃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웃을 때는 무엇부터 웃어야 되느냐 하면 눈부터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눈은 둘입니다. 왜 둘이냐? 하나님이 두 눈과 같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플러스 눈, 하나는 마이너스 눈입니다. 이런 성품이 있기 때문에 둘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웃을 때 한 눈은 웃는데 다른 눈은 안 웃는다고 버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플러스 성상은 웃는데 마이너스 성상은 버티고 있을 수 있어요? 플러스 성상이 웃으면 마이너스 성상은 자동입니다. 하나가  '─'  하면 같이  '─'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 조화는 일방적으로는 안 이루어진다


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코는 아담 해와를 상징합니다. 왜 코가 아담 해와를 상징하느냐? 코는 들어가면 하나됩니다. 또 우주의 길잡이가 코입니다. 얼굴에서 제일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 제일의 길잡이는 아담 해와입니다. 코 꿴다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코 꿰었다는 말은 몽땅 주관당했다는 뜻입니다. 주관할 수 있다 할 때 코 꿸 수 있다고 합니다. 다 통하는 말입니다.


이 두 구멍은 고개를 넘어가서 하나되게 돼 있습니다. 둘이 하나됩니다. 그런데 감기가 들어서 한쪽 코가 막혔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막혀 있는 것이 뚫려야 '기분 좋다!  그럽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음악도 계속 높기만 하면 재미없습니다. 높았다 낮았다 해야 합니다. 들어갔다 나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갔다가 왔다가 그래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이 좋아라! , 봄날이니 봄 노래 한번 불러보자!'  하고 노래 부르면 누가 알아줍니까? 하나님이 기분 좋겠습니까? 봄이 되어 노래를 부르려 할 때, 그 상대 되는 사람도 싱숭생숭해서 '아이고, 하나님!…'  해야 기분 좋은 것입니다. 노래할 때 자기 스스로 나와서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까,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누가 하라고 해서 해야 기분 좋습니다. 그거 누구를 닮아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혼자 노래하고 싶어서 하는 것보다는 누가 하나님의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 노래 한번 해보십시오!'  할 때  '-'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또 여자들이 웃는 것을 보면 '헤헤헤!'  하면서 대개 고개를 옆으로 돌립니다. 남자들은 웃을 때에 고개를 위로 쳐들면서 '허허허!'  하고 웃습니다. 왜 그렇게 웃느냐? 천지이치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횡적이기 때문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웃고, 남자는 종적이기 때문에 위로 쳐들면서 웃습니다.


천지 조화는 일방적으로는 안 이루어집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높았다 낮았다 이래야 조화가 벌어집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와 같이 일방통행식 사랑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조화가 벌어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을 그 아들딸이 보고 '내 엄마인데 이 영감이 왜 이렇게 사랑을 해?'  그럽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빠가 엄마 사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자리에 가서  '아빠 엄마, 나만 사랑해!'  그러지 않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41-260, 197-9, 75-17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