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사랑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2 장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무지... | 20180411062744

6.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내려주신 3대축복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3대축복이라고 말합니다. 1 축복인  '생육하라'는 것은 아담 해와가 장성하여 개성완성을 이루어 신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난 실체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이 되고 무형의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는 제2 축복은 완성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부부를 이루어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해와가 있었고 해와에게는 아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이로되 하나를 표준한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이 주관하는 선주권의 이상세계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해와는 몸의 상징이요 땅의 상징이며, 아담은 마음의 상징이요 하늘의 상징이니 거기에는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지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몸은 둘이로되 하나, 일체라고 했습니다. 둘이 일체가 되어 무엇을 하라고 했느냐? 자녀를 번식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게 온 피조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이 제3 축복입니다. 주관하라 하신 목적은 무엇이냐? 만상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는 개인의 창조주가 아니라 온 천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온 천주와 인연맺기 위해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까지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인간이 온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몸 마음이 화하듯이 이 세계는 마음과 화하고 몸과 화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축복받은 인간의 가치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귀한 아버지입니다. 영계에 가더라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재하고 있는 물건은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한 분밖에 없는 귀한 그 아버지를 어디에 모셔야 하느냐? 내가 사랑하는 귀한 분을 하늘 꼭대기에, 혹은 땅 구석에 갖다 놓을 수 없습니다. 제일 사랑하는 그분이 기쁘면 나도 기쁘기 때문에 매일같이 보고, 어디를 가더라도 함께 가고,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자식을 언제나 곁에 두고 있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쓰고 있는 분으로 존재한다면 큰일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주의 중심 되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쓰고 있다면 하나님을 빼앗기 위해서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하기 위해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야 합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대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됩니다. 인간은 이런 자리, 이런 곳에 하나님을 모시고 만나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하고 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어디에 감춰야 되느냐 하면서 야단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곳에 감추더라도 도둑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기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곳에 감추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곳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곳에다 감춥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어디에 모실 것이냐? 나만이 아는 곳에, 다른 사람이 모르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틀림없이 그런 곳에 갖다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 곳이 어디냐 하면, 우리의 양심입니다. 양심을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양심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면 나만이 자랑할 수 있고, 나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누구에게나 보이는 곳에서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랑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하는데 그것을 자랑하고 선포하고서 사랑하는 것은 위험천만입니다. 사람이 그러한 것을 요구할 것을 미리 알고 하나님도 하나의 보좌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그 마음과 하나된 인간이 됩니다.


결국 마음은 주체요, 몸은 상대입니다. 영원히 같이 있습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평등의 자리를 인간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한 최고의 가치기준입니다. 영원히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 '너희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됐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 가치의 자리요,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축복의 내용


그러면 영육을 중심삼고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아담과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해와는 종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여 신랑 신부로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대상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가정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에덴에서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할 완성권입니다.


그 완성권에 나타날 수 있는 아담 해와가 되었다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결국 그 자리는 축복받는 자리입니다. 복을 받는 자리, 하나님이 복을 빌어주는 자리입니다.


그 복 중에서 제일 귀한 복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의 복을 받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였다면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완성은 결혼을 말하고,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을 말합니다.


결혼이 없다면 인류 세계에서 사랑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결국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그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또 인간 가운데 그 천적인 참된 사랑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또 무슨 축복을 받았느냐? 하나님의 창조의 권한을 인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평면적인, 횡적인 기준에서 창조의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기뻐했고,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소망을 가진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창조의 권한이 부여됐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 자녀입니다.


자녀를 왜 사랑하느냐? 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을 우리가 횡적인 실체권에서 이어받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하나님이 기뻐하던 그 기쁨을 우리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간에게 무엇을 부여했느냐? 주관권을 부여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횡적인 입장에 있지만 우리에게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짓는 대로 됐습니다. 아담이 원하는 대로 모든 천하는 이루어진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권을 아담에게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하는 그 시간이 무슨 시간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받는 시간입니다. 그다음에는 재창조의 권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기뻐하던 그 기쁨이 이 결혼을 통해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주관권이 벌어집니다. 완성권에 서서 축복받음으로써 비로소 제일 귀한 것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식이라는 것은 사랑의 현현을 말하는 것이요, 이상적인 창조권을 부여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그다음에 주체자로서 혹은 대상자로서 서로서로 주관권을 부여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장 귀한 것은 뭐냐? 하나님이 가장 귀하지만, 하나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창조의 권한이요, 그다음에 주관의 권한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상속해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상속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성립되지 않으면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창조의 위업과 기쁨까지도 부여해주신 하나님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까지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한 자리에 세웠지만 인간의 욕망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고, 동시에 이 우주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걸작품인 인간까지 창조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전능한 하나님의 그 능력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여 지은 걸작품이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 욕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딸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것까지도 보태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까지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틀림없이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 중에 최고의 창조물로 아담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담 해와를 지은 창조의 능력까지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성상 마이너스 성상, 즉 남성 성상과 여성 성상이 완전히 하나되어 인간을 지었다고 할 때 인간이 완전한 능력을 행사한 하나님의 성상을 닮지 않고는 아들딸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본연의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의 형상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실체로 아담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서는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인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 본연의 주체 앞에 완전한 대상이 되어 거기에서 창조의 능력인 생명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곧 아담 해와가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아들딸을 왜 낳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지극히 선한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한 권능을 행사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슬퍼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뻐하는 것까지도 인간에게 상속시켜 준 것이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녀를 낳으면 기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 나온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상속받아 나오신 예수님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래 인간을 대표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느냐?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는 동급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도 예수님뿐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봤다'라고 했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무엇을 받았느냐? 천지 만물을 창조하던 창조주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럼 창조주의 권능권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체와 대상 관계, 즉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장가가지 않아야 되느냐, 장가가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인간의 본연의 가치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은 장가가야 합니다.


장가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완전한 신부를 맞아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아들딸을 낳아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들딸을 낳았느냐? 이것이 인간의 중요한 책임인데도 그것을 못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필생의 소원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세계적인 광고를 붙여 하나의 신부를 찾아 창조위업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하나님 대신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날을 위해서 세계적인 판도를 넓혀 예수님이 찾고 희망하였던 신랑 신부의 권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신랑 신부로서 완전히 하나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 창조의 능력을 계승받는, 선의 아들딸을 낳는 그러한 터전이 벌어지면 이 땅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이상 하던 하나의 가정 형태가 복귀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사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나라에 대한 관도 불확실하고, 가정에 대한 관도 불확실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을 중심한 신랑 신부로서 하나되어 새로운 아들딸을 낳아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가정 건설을 표준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모든 피조세계는 누구 것이냐


인류 시조가 하나님의 외아들이 되고 외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면, 부모인 하나님과 자식인 인간과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혈연적인 관계가 맺어졌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면 부모의 것이 곧 아들딸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어머니 아버지가 지었더라도 자기 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집을 짓는 것을 보지도 못한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도 '이 집은 우리 집이야. 이 집은 내 집이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그런 말을 들은 때 기분이 나쁘겠느냐? 오히려  '이 집은 내 집이다'라고 하는 자식을 귀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자 자식의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을 보지도 못하고, 혹은 그 관계를 모르더라도 그것을 지은 하나님이 아버지고 우리가 그의 아들딸이라면 그 천지 만물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것이자 우리의 것입니다. 아들딸인 인간이 그 천지 만물을 '내 것이다'라고 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기분 나빠하겠느냐? 아버지가 주관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맡아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아들딸이 말한다면 ', 요 녀석 봐라. 재수없어'라고 하겠느냐? 부모는 그러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요셉이 형제에게  '꿈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말하였을 때, 형제들은 요셉이 건방지다고 하여 시기하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디 두고 보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가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 즉 하나님이 주관하는 모든 피조세계는 누구 것이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 것이자 인간의 것입니다. 내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나겠느냐? 하나님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있고, 내 몸속에 있고, 생활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은 관념적으로 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느끼는 하나님, 생활속에서 맞추어 갈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느냐 이겁니다. 하나님만 내 것으로 만들면, 하나님만 내 소유로 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 추구하는 마음의 작용은 필요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차지한 터전 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태어난 자리는 불행한 자리가 아니고 행복한 자리입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생활 가운데에서 조그마한 시련도 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환경을 가진 아들딸은 행복한 아들딸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이와 같은 환경에서 출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출세를 바란다든가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 해도 다 이루어집니다. 세계보다 더 높은 것과 관계를 맺겠다는 생각을 안 해도 이미 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느냐


내가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면 그 물건을 자신이 갖겠다는 마음보다도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만든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위하여 물건을 정성스럽게 만든다고 할 때, 그 누구는 어떠한 사람이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만든다면 사랑하는 그 가치 이상의 것을 만들고 싶고, 그 가치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물건을 만들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 땅의 만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창조했다면, 그런 입장에 있는 하나님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자신의 것으로만 영원히 보관하고자 했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는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고 주고 싶어하겠느냐? 그 자리는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모든 창조물을 고스란히 넘겨줌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까지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작은 손수건 하나 주고받았을 때, 그 하나의 손수건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손수건을 통하여 전달되는 사랑이 귀합니다. 그 손수건에 전체 가치를 대신한 사랑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이 기쁨 가운데에서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해도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지 못한다면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세워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 전체와 사랑을 첨부해 창조한 만물을 몽땅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한 인간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수 있는 한때가 있었느냐?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정성들여 지어준 만물을 받았느냐? 하나님의 품격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즉 하나님이 바라는 실체 기준이 이루어졌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였던 사랑을 받았느냐? 타락한 우리 인간은 이 세 가지를 전부 받지 못한 자리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이 소원하던 완성의 기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완전한 남자가 되고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되면, 그 인격 앞에 서로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워주려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원히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첨부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탕감의 조건을 세워나왔습니다. 만물을 받지 못한 인간이기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여 받으려니 제물적인 조건으로 물질을 세워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인격적인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피조세계를 완전히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한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속받는 데는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류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참부모로 오는 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상속받고, 실체를 상속받고, 상대적인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상속받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서러움이요, 원통함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8-7, 54-81, 53-280, 76-38, 56-131, 41-9, 29-151, 126-219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