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담 해와의 창조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는가
하나님은 만물을 짓고, 그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 시조를 에덴 동산에 지었습니다. 인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어떠한 노리개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취미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지어 만물을 대표하는 중심으로 세울 때까지 하나님의 수고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온갖 정성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사랑을 몽땅 퍼부어서 지었습니다. 어떠한 힘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고,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었습니다. 이렇게 지은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평화가 깃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이기에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끌려오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끌면 끌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연 가운데서 내용과 목적이 일치하게끔 인간을 지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지어놓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시를 읊는다면 세상의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도 표현하지 못하는 최고의 걸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도 아니요, 만물도 아니요, 오직 만물을 대표한 인간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흉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싹틀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가 읊어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습을 전 우주를 대표한 모습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온갖 정성을 들여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류 시조의 모습이었습니다.
주위에 지어진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들려오는 새 소리는 아담의 심정을 울려 파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나비나 벌, 그외의 모든 만물은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가는 물도,들에 있는 풀 한 포기도 모두가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는 그 실체의 표상체로 지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두고 지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냐? 하나님이 보기에 자랑스러운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품에 품고 영원히 영원히 놓지 않고 싶었던 인류 시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의 손길을 붙들고 '야! 아담아,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영원히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이야' 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하고,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기를 고대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영원 불변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 지음받은 인간은 평화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자신을 가지고 천하 만상을 다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 손에 손을 맞잡고 사무치는 심정으로 '아담아!' '네, 아버지!' 하면서 천지의 모든 기업을 상속해주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한 시간을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은 우리가 영계에 가더라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힘은 있는데 그 힘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혼자서는 기쁠 수 없고 대상이 있어야 기쁠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체의 몸을 가진 인간의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도 체(體)가 있어야 합니다. 체가 없고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첫째는 체를 갖기 위해, 둘째는 대상으로 취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장성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성례식을 올리면 하나님과 한 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고 우리 인간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어서 구원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데, 본연의 인류의 참된 조상 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적인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외적인 아버지는 아담입니다. 그러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핏줄을 타고난 틀림없는 아들딸입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아담 해와의 손자는 하나님의 손자요,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후손이요, 그 후손을 통한 모든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하나님의 민족이요, 국가요, 세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사랑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도 사랑이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여자면 여자 혼자서 아무리 '내게 사랑이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하더라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무리 절대자라 하더라도 혼자서 '아이구,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하나님이 사랑을 찾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관계가 성립되지 않고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만 사랑의 힘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주체 대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곳에는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피조만물을 지었는데, 그 피조만물은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전개해 지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의 인격을 대신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소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정(內情)을 체득하고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더라도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서로가 기뻐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절대자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 절대자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인간의 구조와 가치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느냐? 물질적인 모든 요소를 갖춘 존재,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형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흙과 물과 공기로 지었습니다. 이러한 창조주의 이념을 통하여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 하나님의 신성에 화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가 없다면 인간 자체에는 어떠한 이상도 희망도 소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모든 물질과 통할 수 있는 물질적인 요소의 결합체로서 육신을 빚어놓고 그 육신에 육신을 주관하는 영을 불어넣어 인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의 주관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해야 합니다. 천사장이나 여러 형체를 가진 실체, 그리고 무형의 실체까지도 주관하려면 그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形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물질적인 요소로 빚어놓고 무형적인 요소인 영을 불어넣어 창조하였습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하여 영육(靈肉) 양면의 세계를, 즉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적인 실체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 완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이, 곧 형(形)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그의 형태, 인상(人相), 인격 등이 무형세계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하나님도 형(形)이 없으면 형(形)의 세계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냐? 물질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육신)와 신령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영)가 결합된 하나의 실체로 빚어진 자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창조주 앞에서 즐거워할 수 있고, 창조주에게 경배할 수 있으며, 창조주에게 송영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자체는 지극히 작은 한 개체지만, 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러한 가치를 지닌 완성된 인간을 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필요로 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이상을 성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형의 하나님이 형상을 쓰고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형의 하나님이 유형의 형상을 쓰고 유형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그 기초, 그 핵심이 아담 해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체를 가진 피조세계를 전부 다 쌍쌍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 성품 속에 있는 마음 그 자체를 하나님도 보고 싶어서 그걸 전개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체를 입고 싶어합니다. 그 체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같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아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서 무형의 아버지가 되고, 아담은 유형의 아버지가 됩니다. 고로 아담은 실체를 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실체를 필요로 하느냐? 자신이 지은 실체세계를 무형으로는 주관할 수 없으므로 실체를 쓴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체의 하나님으로 아담과 해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해와는 뭐냐?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는데, 남자는 플러스쪽 몸이고 여자는 마이너스쪽 몸입니다. 그런 아담 해와가 무엇을 중심으로 묶어지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생식기를 중심으로 묶어집니다.
아담이 장가를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담이 장가가서 하나님과 하나되고, 해와도 하나님과 하나되고, 또 아담과 해와가 하나되면 어떻게 되느냐? 해와는 아담의 아내이고, 아담은 하나님의 실체이므로 결국 해와는 하나님의 외적인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적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실체인데, 그들이 생식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사랑하느냐? 마음은 무엇을 통해서 사랑하느냐? 마음은 몸을 통해서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완성한 아담 해와에게, 하나님의 집과 같이 된 아담 해와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인이 된 가운데 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요, 그다음에는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실체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후손을 중심으로 만물세계와 연결해 하나님의 가정으로부터 하나님의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영원히 만우주의 주관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의 문화권에서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문화권입니다.
인간과 영원히 같이 살려고 만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과 영원히 같이 살려고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것 중에는 봐서 좋은 것이 있고, 먹어서 좋은 것이 있고, 만져서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먹어서 좋고, 보아서 좋고, 만져서 좋은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진짜 좋은 것은 영원히 가지고 살면서 좋아해야 합니다.
상점에는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지고 살면서 좋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닮았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어디에 갖다 놓고 싶으냐? 안방에 갖다 놓고 싶으냐, 창고에 갖다 놓고 싶으냐? 제일 좋은 것은 틀림없이 안방에 갖다 놓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일 좋은 분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 집 안방에 갖다 놓으려 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을 안방에 갖다 놓았는데, 누가 훔쳐갈까봐 안심이 안 되면 또 어디에 숨기느냐? 허리춤에 숨깁니다. 보물을 가진 사람은 자물쇠가 열 개씩이나 있는 장롱에 숨겨 놓고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것을 허리춤에 달고 다녀야 안심합니다. 그렇게 해도 훔쳐갈까 걱정이 되면 그 보물을 뱃속에 집어넣을 수 있으면 집어넣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왜 그러냐? 제일 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어디에 갖다 두려고 하겠느냐? 자신의 품속입니다. 품속 중에서도 마음의 품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하나님이 네 마음에 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물 중의 보물이니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갖다 놓으면 내 마음을 누가 주관하느냐? 본래 사람은 마음이 몸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주관하게 됩니다. 인간의 소원은 '하나님, 제 육신을 하나님의 소원대로 써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육신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주인의 명령을 받드는 몸이 되면 하나님이자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자 나요, 내 육신이자 내 마음의 상대요, 내 마음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상대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천지 통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되는 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인 아담 해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했느냐? 아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고, 해와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 '천정으로 하나되자'해서 하나됐어야 합니다. 아담의 마음에 무형의 하나님이 완전히 보물 주인으로 강림하여 아담이 표시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은 무한한 가치를 형성하게 되면, 몸은 마음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의 소원은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몸과 하나된 가운데서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주고도 또 주고 싶어하게 됩니다. 주고 또 주고 싶어하면 돌아가게 됩니다. 발동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돌고 또 돌아 완전히 통일됩니다. 그러한 종자를 뿌렸더라면 그러한 종자의 열매가 맺히게 되므로 그 씨는 아무리 쪼개도 그러한 내용을 갖춘 종자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참사랑을 갖고 살고 싶어한다
아담 해와는 자기들 스스로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신이 있다면 절대적인 신, 즉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은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디에 사용하기 위한 물건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또 종이라든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지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상의 실체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 실체의 내용은 뭐냐? 사랑을 중심으로 인간은 자녀의 입장에서 오직 한 남성과 한 여성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을 중심한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그 사랑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감각이 있다면, 보고 듣고 느끼고 혹은 말하고 하는 이런 감각기관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말을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의 말은 필요없습니다. 사정의 말보다도 사랑의 말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보는 것도 보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자극할 수 있는 시각(視覺)으로 보고 싶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듣더라도 보통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내용을 가진 그런 것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식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권능을, 힘을 갖고 있되 한계선을 넘은 권능을, 힘을 갖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지은 분이므로 갖지 않은 물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단 하나 부족한 것, 단 하나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자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제일 갖고 살고 싶어하겠느냐?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게 될 때,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지식도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로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잘 먹여주고 그러면서 잘 돌봐줍니다. 거기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춤추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지만 눈을 보게 되면 아들딸을 보고 싶어하는 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가 보고 싶어 항상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리운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둘의 다정한 애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동서남북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들딸, 손자 손녀들과 같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딸 부부가 그립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또 손자 손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던 것을 생각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사랑받던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합니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으로 가도 사랑이요, 서로 가도 사랑이요, 남으로 가도 사랑이요, 북으로 가도 사랑입니다. 위로 가도 사랑이요, 아래로 가도 사랑이요, 중앙에 가도 사랑입니다.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 이상적 형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 참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놓고는 못 삽니다.
하나님도 사랑에 취해 '어허둥둥 내 사랑, 춘향이가 내 옆에 올 수 없으랴!' 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어허둥둥 내 사랑'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춘향이도 보고 침을 질질 흘리게끔 좋아한다면 어떻겠느냐? 하나님이 좋다고 하겠느냐, 나쁘다고 하겠느냐?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허둥둥 내 사랑아' 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때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사랑을 좋아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어머니 아버지도, 어린아이도 사랑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20-196, 54-131, 39-7, 4-91, 81-274, 197-9, 92-145, 38-139, 197-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