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세계
우주 창조의 기원
하나님은 무형의 중심자입니다. 그래서 유형의 중심자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중심자가 없다고 말하면 하나님에게 실례입니다. 그래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실체를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생님이 밝혀서 선언하니까 하나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것을 말해주어서 기분 좋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체의 상대자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상대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서 우주 창조라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주 창조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거기에 일치되는 계열로, 위상은 다르더라도 주체와 대상의 배열이 나란히 되게끔 짜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피조세계는 모두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쌍, 두 쌍, 이렇게 전부가 쌍쌍인 주체 대상의 상대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물은 주체 대상의 관념을 절대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지을 때, 가장 작은 것부터 만들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주체이므로 실체 상대권, 절대적인 유형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형의 성상을 유형의 실체로 전개하는 창조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는 광물세계까지도 전부 다 주체와 대상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도 플러스 이온과 마이너스 이온의 주체 대상 관계이고, 원자도 양자와 전자의 주체 대상 관계입니다.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느냐? 그것을 알려면 먼저 우주가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는 그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주는 사랑을 위해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단번에 생겨났느냐? 이것을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보든지 기성교회 목사에게 물으면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목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것은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지옥에 갈 녀석!'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그런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이론적으로 맞아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컴퓨터로 성격 분석을 하고 이론 분석을 하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기적도 통했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는 미래를 향해서 약동하는 젊은이들의 심정권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근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한 존재의 기원, 존재의 과정을 동기로 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우주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동기는 사랑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주가 힘으로 형성돼 있고, 이 힘에 의해서 우주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는 전기라는 힘이 먼저 있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을 통해서 전기가 생깁니다. 작용을 해야 전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작용이 있기 전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즉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작용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어야 작용을 하고, 그 작용을 통해서 전기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힘도 주체와 대상이 작용을 해야 생깁니다. 그러니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힘으로부터 우주가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힘이 먼저가 아니라 작용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먼저겠느냐, 생명이 먼저겠느냐? 사랑이 먼저입니다. 지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다고 생명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사랑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어디서부터 했느냐? 생명에서부터 했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발원지, 동기는 사랑입니다. 생명이 생겨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남자가 생겨난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도 여자를 만나 사랑하기 위해서 삽니다. 여자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고, 사랑을 위해서 삽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눈을 깜박깜박 하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생명' 하면 그것은 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세계 앞에 나타날 때, 사랑의 본질로 나타납니다.
우주창조의 원칙
하나님은 지혜의 왕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왕, 이상의 왕, 평화와 행복과 자유의 왕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기원을 어디에 두었느냐? 참된 이상의 근본을 어디에 두었느냐? 참된 행복과 참된 평화의 근본을 어디에 두었느냐? 그 근원을 확실히 알아야 나도 참된 사랑․행복․이상․평화를 하나님과 같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만 생각했다면 천지창조를 했겠어요? 창조는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예술가는 최고의 걸작품을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투입합니다. 다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옵니다. 그 이상 할 수 없다 했을 때,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생각할 때, 기성교인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말씀으로 지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술 부리듯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지성을 다하고 자기 일신을 전부 투입해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우리도 정성을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내 사상 중의 사상, 내 전체 중의 전체를 투입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자체가 투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힘을 투입해야 창조가 가능합니다. 힘을 투입하지 않고는 무슨 물건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투입을 하는 데서 완전한 대상이 성립한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주체로서 대상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위해서 있겠다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 창조입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가 이상적 출발점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너, 나한테 와서 달라붙어라' 하는 흡수가 아닙니다. 투입입니다. '달라붙어라'가 아니라 투입입니다. 그 말을 돌이켜 하면, '위해 존재하는 원칙'에 이상적 출발점을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투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완전 투입으로 사랑의 대상을 창조한 하나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어떻게 했느냐? 만물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의 본질을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이고,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은 자기 본질의 감소를 말합니다. 손해보는 자리입니다. 대상세계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투입했습니다. 투입한 그것이 자기에게 열매 맺히게 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열매 맺히게 했습니다. 투입함으로써 하나님이 소원(疎遠)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원칙으로 돼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랑의 전통에서 부모의 사랑에 그 본질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창조한 사람을 위하는 입장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입해서 사랑의 대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도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는 못 합니다. 아무리 절대자라도 그 절대자 앞에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지을 때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아무렇게가 아닙니다. 천신만고끝에 자신의 1백20퍼센트, 몇백 배를 투입해서 지었습니다.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절대자이고, 전지전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좋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명사, 혹은 좋다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갖춘 자리에 있어야 좋고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혼자 있어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성악가가 아무도 없이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합시다. 그래서 행복하겠느냐?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좋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었다는 것은 힘을 투입했다는 말입니다. 힘의 투입입니다. 힘의 투입은 자체의 소모를 말합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힘을 뽑아내면 반드시 힘을 보충해야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밥을 먹고 힘든 노동을 하게 되면 빨리 배가 고픕니다. 그리고 빨리 피곤해집니다. 왜 그러냐? 힘을 투입하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에 손해 보아 가면서 좋아할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플러스되어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지은 것은 울기 위해서, 슬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좋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플러스될 수 있는 것을 언제 찾을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표준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투입하면 그때부터 돌아온다'는 것이 있습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습니다. '이만큼 노력하면 그때에 이익이 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데도 '한계점까지 열심히 해서 그것만 완전히 통과하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표준이 있습니다. 무슨 고시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여 그 한계점을 밀고 넘어가게 될 때에, 반드시 이익이 돌아옵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힘을 투입한 것입니다. 힘을 투입했습니다. 자기 자체를 소모했습니다. 그렇지만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투입해서 사람을 창조했으면 그 완성된 사람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다음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데 있어서 1백을 투입했는데 1백보다 적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1백을 투입했으면 돌아오는 데는 1백10, 2백, 3백 이렇게 보다 큰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무한한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투입하면서도 기뻐합니다. 따라서 돌아오는 데 어떻게 돌아와야 하느냐? 보다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 가치의 것으로 돌아올 때, 기쁠 수 있는 것이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을 자극시키기 위해 상징적 형상적으로 전개된 만물
우리가 보는 모든 만물은 무엇 때문에 지어졌느냐? 존재하는 모든 광물이나 식물, 동물세계는 무엇을 근원으로 해서 지었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 자체를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짓지 않았습니다. 그 근원은 어디까지나 참된 사랑입니다. 상하 전후 좌우에서 사랑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형상적인 실체로 만물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연결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서로 느낄 수 있고, 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운 꽃이라든가, 해와 달과 별과 물과 공기라든가 이런 것들도 사랑을 대표한 실체로 전개되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떴다' 할 때,그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해가 생겨난 것은 누구를 위해서냐? 또 물과 공기와 흙은 생명의 요소인데, 이것들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느냐? 이런 것들은 자기 계열이 상징적 단계에 있느냐, 형상적 단계에 있느냐, 실체적 단계에 있느냐 하는 위치만 다르지, 사랑의 표시체로서 사랑을 자극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은 같습니다.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을 미화할 수 있는 자극을 줘서 주인 된 그분이 사랑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도와주기 위한 소재입니다.
태양을 보게 되면, 태양은 내가 완성할 수 있는 사랑 이상세계의 소재입니다. '태양과 같이 빛나야 되고, 태양과 같이 열이 있어야 되겠구나. 태양에 의해서 생명이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상대적 세계에 생명력을 발발시킬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되겠구나. 사랑의 내적 자신을 촉구하기 위해 태양은 뜨는구나' 하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우리 사지백체의 혈관을 통해서 피가 흐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4분의 3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은 깨끗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빛깔이 없고 투명합니다. 동에서 보나, 서에서 보나, 남에서 보나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에 동화된 투명체가 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이 내 몸에서 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먹고 사는 모든 것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스를 마실 때는 주스가 나에게 올 때까지 얼마나 수고롭게 찾아왔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입품이라면, 미국이라든가 브라질에서 나에게까지 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것을 재배해 거두어 어찌어찌 해서 나에게까지 찾아왔는데, 그 온 목적은 무엇이냐? 마시고 설사하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설사하라고 먼 데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이것을 마신 사람은 나보다 가치 있는 인격을 갖추어서 최고의 중심존재인 하나님 앞에 생명의 인연을 연결하고, 그와 동시에 사랑의 길을 두꺼운 파이프로 연결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히는 주스 자체는 그러한 사랑의 자극적인 인연을 하나님 앞에 전달할 수 있는 주스가 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이 옷은 나에게 어떻게 해서 왔느냐? 요즘에는 화학섬유가 생겨서 간편해졌습니다. 공장에서 옷감을 만들 때 색깔이라든가 무늬 같은 것이 한꺼번에 찍혀 나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 내가 입는 옷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옷을 입느냐? 옷이 인간의 몸에 입혀지는 것은 최고의 사랑이상 완성체가 되어 하늘땅이 동할 수 있는 제일 가는 골수의 자리에 서 주기를 바라서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사랑이상의 완성체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랑으로 동화될 때에, 거기에는 번창이 벌어지고 화합이 벌어집니다. 힘을 가지고, 외적인 자기 미모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무리 미모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미모를 끌고 갈 수 있는 보다 큰 사랑의 힘이 없다면 그 자신은 불행할 것이고,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보다 큰 주체성을 지닐 때만 안정권이 벌어지고, 행복한 생활이 전개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모양을 실체화시킨 것
지구를 보면 사람을 닮았습니다. 지구가 사람을 닮았다면 지구의 머리는 어디냐? 머리가 어딘지 모르지만 북극이라는 것이 있고, 남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지구도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 숨결이 뭐냐? 지구에는 자력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력선이 지구의 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구 표면에 있는 나무는 뭐냐? 우리 머리카락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지표는 피부와 같고, 지층은 근육과 같고, 암층은 뼈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모양을 펼쳐 놓아 실체화한 것이 우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것을 그냥 그대로 실현화한 것이 만물 창조이기 때문에 자신을 닮게끔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닮게끔 빚어놓은 것이 만물입니다. 그러니 어떤 물건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주는 뭐냐? 하나님이 지은 창조물이지만 전체를 두고 볼 때는 하나님의 한 대상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를 하나님의 대상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에 취해 살고 싶어서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절대자인 하나님이라도 상대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상대가 없으면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인간도 혼자 사는 홀아비나 과부를 불쌍하다고 하고, 부모가 없는 고아를 불쌍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고 지식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또 권력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에게 다 있습니다. 사랑에 취해 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공론(空論)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기도를 통해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참된 사람을 만나 참된 사랑에 취하게 되면, '어허 둥둥 내 사랑'이라고 하면서 춤을 출 것입니다. 그리고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노래도 할 것입니다. 이 우주 만상의 존재물들은 하나님과 정서적인 면을 관계로 해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이 사랑에 취해 '어허 둥둥 내 사랑'이라고 하면서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웃음소리도 듣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고독한 것은 싫기 때문에 사랑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물을 지은 것이 사랑의 이상을 이루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원숭이가 아닙니다. 고릴라 같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 투입체로서의 인간
하나님이 대상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천지 만물의 창조입니다. 결국 자기 상대 존재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 자체를 투입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전개했습니다.
창조를 한다는 것은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란 힘의 소모입니다. 그러면 투입했는데, 얼마나 투입했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장난식으로 창조한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참된 생명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사랑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이상을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가 다릅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자기를 생각했지만 창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상을 위했습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다, 아들딸을 위해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이상이라는 말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므로 이상적인 존재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 있습니다.하나님이 1백퍼센트 투입했는데 90퍼센트만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1백퍼센트 투입해서 돌아올 때 90퍼센트만 돌아오고 10퍼센트 손해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돌아올 것이 있기 때문에 창조를 했습니다.
1백퍼센트를 투입함으로써 없던 것이 생겨났습니다. 대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내가 바라던 사랑을 갖고 오고, 생명을 자극시키는 이상적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도 사랑에는 끌려갑니다. 그 대상이 끌면 끌려갑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곳에 하나님도 갑니다.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 투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화가는 장난으로 쓱쓱 그린 그림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그린 작품을 보고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작품을 보관하고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완전히 투입함으로써 보다 가치 있고 이상적인 완전형으로 전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그들을 위해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에서 상대를 위하는 때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자기를 위주하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에, 대상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원칙이 우주의 근본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228-123, 86-55, 60-37, 65-9, 178-234, 85-141, 85-69, 6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