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휼
우리는 절대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이상적이다' 하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잠깐 있는 것을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 사랑을 빼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혼자 놓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상태가 되려면 보호의 환경이 있어야 합니다. 그건 자동적인 말입니다. 보호할 수 있는 환경도 있어야 되지만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또 평화스럽고 안식할 수 있는 자리에서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갖추지 않으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자체가 그럴 수 있느냐?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절대자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는 그러한 이상경을 바라면서 더듬어 나오고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참된 형제의 인연을 찾고, 참된 부자의 인연을 찾고, 참된 상대 인연을 찾자는 곳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런 절대자가 있으면 우리는 그 절대자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믿고 따라가고 싶으냐, 절대자와 직접 관계를 맺고 싶으냐? 우리는 절대자의 상대가 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주체가 필요합니다. 가는 길은 종의 길이라도 결국 주체를 바라기 때문에 신을 안 바라는 종교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전부 신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으냐? 제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주체로 모시고 싶다, 그 하나님을 내 친구로 갖고 싶다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내 형님, 내 동생과 같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느냐?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냐? 사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고, 남편이 아내의 자리에 가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리가 바뀌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좋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뭐냐? 그것은 아버지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최고의 이상적인 요인으로 삼습니다. 사랑 앞에는 아무리 권력 있는 사람도 순응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더라도 사랑 앞에는 전부 굴복합니다. 그걸 반대하고, 그걸 배척하고, 그걸 밟고 올라서겠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랑에 지배를 받겠다고 하지 사랑을 지배하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사랑에 지배를 받고, 사람도 사랑에 지배를 받고, 모든 존재가 사랑에 지배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이 위대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가치를 가졌느냐?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가치적인 관을 중심하고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적절한 말입니다. 절대적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 절대적이라는 말을 존속시킬 수 있는 내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 뭐냐 할 때, 그것은 아무리 봐도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절대적이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여건에서 나타납니다. 상대적인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혼자서는 절대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혼자서 사랑이 이뤄지느냐? 상대를 부정해서는 사랑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가슴에 나타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만물에 나타납니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자식에게 나타납니다. 또 남편이 있는 곳에는 아내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남편이 입은 옷에서도 아내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요즈음 여자들은 참 편합니다. 옷을 만드는 데 재봉틀을 사용하고, 남의 힘을 빌립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를 봐도 저고리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일일이 바늘로 한땀 한땀 떠서 온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사랑입니다.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은 그만두고라도 생활에서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자식을 보아 부모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남편의 옷 끝을 보아 아내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 나타난 사실을 보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느냐? 알고 보니 전부 다 싸움을 하고 복잡해져 있는데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입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 자신에게만 나타나서는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천년 왕국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참 조화롭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 모두 그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쁜 모습과 슬픈 모습은 다릅니다. 기쁘면 얼굴이 붉어집니다. 사람이 슬픔을 주관하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바뀝니다.
슬픈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고통입니다. 고통을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돈을 주관해야 합니다. 돈을 종이쪽지로 생각하고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슬플 때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어떻게 나타나느냐? 사랑의 순서에 따라 나타납니다. 먼저 부모의 사랑, 다음에는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하나 플러스할 것이 있으니 그것이 형제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만 가지면 하나님과도 친구같이 지낼 수 있고, 아버지같이 지낼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부모 중의 부모입니다. 왜냐? 세상의 모든 부모를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을 대표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형제의 사랑도 들어가고, 이걸 확대하면 국가나 세계의 사랑도 들어갑니다. 이것이 요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이요, 부부의 사랑이요, 자녀의 사랑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최고 멋진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 마음에 나타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야 하느냐?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나라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만우주, 모든 존재세계 앞에 나타나고, 인간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어디에 나타나느냐? 자식에게 나타납니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게 나타나고, 아내의 사랑은 남편에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사랑의 공약이요, 사랑이 움직이는 방향이요, 사랑이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지 않고서는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나타나는데, 그 인간을 믿을 수 있느냐? 인간 중에는 도둑도 있고, 강도도 있고,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나타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사랑이 미국 사람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한국 사람한테 나타나고, 한국 사람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우리 집에 나타나고, 우리 집 가운데서도 아내한테 나타나는 것보다 남편인 나한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나타나는데, 나의 어디에 나타나느냐? 마음에 나타납니다. 마음 가장자리가 아니라 마음 깊은 데에 나타납니다. 그것이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나타나면 영원히 갑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영원히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게 나타나는 것이야. 영원히 변치 않아. 천지가 변할지라도 이 공약은 변치 않아' 이렇게 자리가 잡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곳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기 때문에 나에게 나타난다면 내 자체의 변하지 않는 마음 터전 위에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 동안 먹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먹고, 자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자고, 활동하는 것도 그 사랑을 위해서 활동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그 사랑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 완전한 기준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우주의 공약 전부가 헛된 것입니다. 헛되고 사(邪)된 것입니다. 종교고 뭣이고 다 사된 것입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디에 나타나느냐? 보이지 않는 마음에 나타납니다. 그 사랑은 영원한 것이요, 불변․유일․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는 그 마음, 불변하는 내 인격 기준에 나타납니다. 그 마음, 심정을 포괄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이 변하지 않는 기준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납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요,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어도 완전한 플러스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주의 공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소' 그런 말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땅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사랑할 대상이 뭐냐? 4대 조건인데, 하나님과 천사와 만물과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사세계의 천사를 사랑하고, 그다음에는 이 땅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변하지 않게 될 때는 반드시 하나님도 찾아오고, 천사도 찾아오고, 만물이 웃습니다. 땅보고도 얘기하고, 산보고도 얘기하고, 나무보고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 하늘땅이 품어주는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이냐?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이냐? '인심은 조석변이요 산색은 고금동(人心朝夕變 山色古今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심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천심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해가 떠서 낮이 되고, 해가 지면 밤이 되는 천지이치가 변하냐?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일년을 365일로 책정해서 계수(計數)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계수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변하면 큰일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높고 넓은 최고 가치의 주인으로서 인간을 관리하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바탕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점령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은 아들딸이 되면 하나님의 것이 다 내 것이 됩니다. 어디를 가도 하나님 것이 다 내 것입니다.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학교에 다니는 대통령의 아들이 있으면 그 학교의 아이들이나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 그에게 속닥거려서 그와 사귀려고 합니다. 그런데 천지에 제일 좋은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누가 싫다고 하겠습니까? 생명을 걸고 따르려고 할 것이고, 생명을 걸고 그에게 주관받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주한 통일이 자연히 벌어집니다. 이것은 강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었다면 사랑이 어떻다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사랑을 해보지 못한 총각 처녀들한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해서 그들이 아느냐? 고아에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니 어떻더라고 아무리 몇천 번 설명한다 해도 모릅니다. 또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 하는 것은 자식을 낳아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모릅니다. '그저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더라'가 '그렇다'와 같으냐? '그렇다더라'는 '그렇다'와 극과 극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은 이렇다' 할 수 있으려면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사랑권, 즉 본연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못했습니다. 천사장급 사랑의 자리에서 출발했습니다. 천사장급 사랑도 자기 사랑의 상대를 위해 생명을 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버립니다. 그런데 그보다 차원 높은 본연의 인간의 가치를 알고, 주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당당히 사랑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말이 통하겠느냐? 그걸 체험했다면 하나님이 있느니 없느니 논하는 무골충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고도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봤는데, 사랑은 이렇다 하는 것을 느껴봤는데, 내 세포의 신경이 그 이상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없는 자리에서 사랑을 받아봤는데, 그래도 없다고 하겠느냐? 의식기관이 그 무엇보다 강한 의식을 느껴봤는데 그것을 부정하겠느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몸은 맥박이 뛰고 있지만 그 횟수를 세지 않습니다.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듯 두들기고 있는데, 그 소리가 들리느냐? 파리가 머리카락을 살짝만 스쳐도 느끼는데, 가슴에서 망치로 두들기는 것같이 두들기고 있는데 느끼지 못합니다. 파리가 슬쩍 스치는 것은 느끼면서도 망치로 두들기듯 심장이 고동치는 것은 못 느낍니다. 청진기로 들어보면 쿵딱쿵딱 합니다. 힘의 세기로 보면 그것은 파리가 살짝 스치는 것보다 몇십 배 몇백 배 강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은 느끼지 못하면서도 파리가 스쳐가는 것은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조화통입니다.
그 쿵딱쿵딱 하는 맥박의 횟수를 세었다가는 모두 신경병에 걸릴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의식하고 산다면 큰일납니다. 오늘은 이렇게 움직이다가 내일은 살짝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는 병이 날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기를 잘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있는 신경이 안 보이기를 잘했지, 거미줄같이 널려 있는 신경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몸은 기계로 말하면 최고의 정밀기계입니다. 수억 개가 되는 부속품이 있는데, 이것이 고장 안 난다고 볼 수 있느냐? 그것이 다 안 보이길 잘했지, 그것이 보인다면 큰일날 것입니다. 심장이 뛰는 것을 모르길 잘했지, 알면 큰일납니다.
그것은 왜 모르느냐? 너무 가깝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있는 그 이상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내가 존속하는 생명 감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벽이 되어 있어서 영화 스크린과 같이 반사되어야만 비쳐지는데, 그것을 타고 넘어가 있기 때문에, 그 벽을 돌아가서야 느끼게 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너무 가깝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도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안 보입니다. 가까워도 안 보이고 멀어도 안 보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을 느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안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면
천사장급 사랑을 가지고도 죽자살자하는데, 아담급 사랑이라면 어느 정도이겠느냐? 아담급 사랑은 어느 만큼일 것이냐? 물이 펄펄 끓는 데에 찬물을 퍼붓거나 얼음을 집어 넣으면 어떻습니까? 팍 소리가 납니다. 뜨거운 데 찬물이 들어오니 좋다고 합니다. 폭발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접하면 어떻게 되느냐? 머리카락도 춤추고 세포도 춤춘다는 것입니다. 1백퍼센트 그 사랑에 취하면 나가자빠지는 것이 아니라 천년 만년 살고지고가 됩니다. 누가 깨우려고 하면 깨우지 말라고 합니다. 요지경 판이 벌어집니다.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고차적인 사랑에 취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은 취해서 살아야 합니다. 취해서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술가들은 예술에 취해 삽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구상하는 책을 쓴다든가, 어떤 명작에 취해 삽니다. 그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지백체는 입체적인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에 취해서 살아야 하고 그분만 따라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외적으로 술 먹고 취하자, 아편 먹고 취하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편보다 못하냐? 하나님의 사랑이 술보다 못하냐? 하나님의 사랑이 꿀단지만 못하냐? 세상의 똥개 같은 짓을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것 가지고도 죽느니 사느니 하고, 사랑은 영원하다느니 어떠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가 춤을 가르쳐주기 전에 자연히 춤을 추게 되어 있습니다. 주파수만 맞춰서 조종하면 무인 비행기가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놀아나는 대로 놀아나지, '나 싫소' 하고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맛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맛이겠느냐? 모든 것을 종합한 최고의 맛입니다. 이 말은 좋아서 쥐면 끝이 없이 쥘 수 있고, 펴면 끝이 없이 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는 어디든지 채울 수 있고, 사랑으로는 어디든지 미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껴안으면 어떻습니까, 손을 잡고 '아, 사랑한다'이럽니까? 아마 눈알이 다 튀어나오고 콧물 입물이 나오도록 껴안아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껴안고는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빙빙빙 돕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우주가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한번 취하게 되면, 모든 신경이 하나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데 갈 데가 없습니다. 눈의 세포도, 코의 세포도, 귀의 세포도 거기에 집중되고, 몸의 세포라는 세포는 전부 다 거기에 집중됩니다.
만일 절대적인 하나님이 사랑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온 힘을 다 기울여 사랑을 할 것입니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하겠느냐? 아무리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도 이 사랑의 힘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게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참사랑'하면 온 신경과 힘을 여기에 집중합니다. 하나님도 거기에는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하는 데도 죽자살자 하며 사랑하는데, 하나님도 그 사랑을 맛보면 '죽더라도 요 사랑만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그런 사랑을 할 상대를 찾았다면, 하나님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야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춘다면 천지가 다 쩌렁쩌렁 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러면 미국도 쾅, 한국도 쾅, 지구가 울탕굴탕 할 것입니다. 이 지구성의 기쁜 날이 어떤 날이냐? 지구의 소원이 뭐겠느냐? 그 사랑의 날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손끝이 닿고 발끝이 닿는 데서 좋아해보고 웃어보는 것이 지구의 소원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통령이라든가 유명한 사람들이 베푸는 만찬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맛을 보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 한번 참석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미 초청장을 우리가 다 받아 놓고 있습니다. 초청장은 이미 역사시대 이전에 다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초청장을 받은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만찬에 참석하라고 보낸 초청장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게 되면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모래알 하나를 놓고 천년을 들여다봐도 싫증이 안 납니다. 그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자기 손을 들여다보면 손에서 빛이 납니다. 밤에도 혼자 잘 때는 자기가 황금판에 누워 있고, 황금빛을 발하고 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꿈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디 가서 동산에 올라가면 만물이 노래하며 환영합니다.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靈人)들이 따라다니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있으면 그 아들딸을 어머니 아버지가 따라가지요? 어머니 아버지가 자기 위신을 버리고 그 아들딸을 따라가고 찾아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권세가 많은 하나님이라도 찾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자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자리입니다. 거기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눈을 깜박깜박 하는 것이 귀찮을 정도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에 취해서 억천만세를 살 수 있도록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는 게 원수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에서 시작해서 사랑을 갖고 생활하다가 사랑의 열매로 거두어집니다. 죽는 것이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의 사랑을 받았고, 자녀의 사랑을 받았고, 부부의 사랑을 가지고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며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내적인 사랑의 세계에 뿌린 모든 것을 일생을 거쳐 열매를 맺어서 이것을 거두어 가지고 저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느냐? 이 실체를 쓴 몸으로는 제한된 사랑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한대의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실권을 갖고 나타나려면 제한된 육신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형(無形)의 영(靈)으로 화(化)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상을 온 천지에 동일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고통 길이 아니요, 행복한 우주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첫 개문(開門)입니다. 죽어가는 시간은 개문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오면 모든 것에 기쁨이 충만해
우리가 누구를 만나서 기뻐할 때 무엇을 갖고 기뻐해야 하느냐? 얼굴을 보고 기뻐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 지금까지 없었던 위대한 사랑을 가지고 기뻐해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은 못 하지만 사랑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주체가 이 우주에 없으면 우주가 빈 것 같고, 집에 없으면 집이 빈 것 같고, 내 속에 없으면 속이 빈 것 같고, 다 빈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들어오면 모든 것이 꽉 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합니다. 전부가 충만하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기쁨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심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런 심정을 느꼈다가 없어지면 못 삽니다. 그러니 그 사랑의 주체를 다시 만나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가정을 봐도 그렇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어머니를 제일 좋아하는데, 학교에 갔다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막 뛰어 집에 들어가 보니 다른 형제들만 있고 어머니가 없으면 '아무도 없네'이럽니다.
이렇듯 사랑의 주체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가 있으면 모든 것이 찹니다. 그 사랑이 꽉차야 모든 것이 차기 때문에 무한히 줄 수 있고 참되게 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주고받는 것은 이상의 실현이요, 이상의 번식입니다. 사랑의 세계는 거리를 초월합니다. 사랑이 얼마나 빠르냐 하면 빛도 못 따라갑니다. 제일 빠른 것이 사랑입니다. 제일 밝은 것도 사랑입니다. 제일 완전한 것도 사랑입니다. 제일 완전히 차는 것도 사랑입니다.
어디서 엉뚱한 짓을 하던 사람도 진짜 사랑하는 상대가 나타나면 얼굴에 꽃이 핍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드느냐? 사랑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총이 아닙니다. 위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우주의 주인 되는 사랑, 우주의 중심 되는 사랑, 우주의 원천 되는 사랑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67-166, 20-7, 83-154, 39-220, 59-292, 81-9, 95-23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