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사랑 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제 1장 하나님)

무지... | 20180331092258

3.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닮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은 하늘과 상대 되는 것으로 땅을 지었고, 자신을 대신한 실체대상으로 우리 인류의 조상을 지었습니다. 자기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 인간을 지을 것을 계획하고 그 인간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본떠서 먼저 만물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은 크게 보면 한덩어리요, 작게 보면 모두 하나님의 대신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모르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만든 사람의 성격을 닮습니다. 그 사람의 성격이 우락부락하면 그 작품도 우락부락하고, 그 사람의 성격이 차분하면 작품도 차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이러이러하므로 하나님의 성격도 이러이러하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편에서 볼 때 󰡐나󰡑는 하나님을 닮았고, 내 편에서 보면 하나님은 󰡐나󰡑를 닮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편에서 보면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아들편에서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닮고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욕심은 누구의 욕심을 닮았느냐? 하나님의 욕심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욕심을 닮았으니 그 욕심은 최고의 것을 갖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분이고 절대자이기 때문에 시시한 것을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며 우리 인간은 상대적 절대자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못 올라가면 영원한 세계에 가서라도 올라갑니다. 사람은 절대자 앞에 상대적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이 영원한 분이므로 그 상대자인 인간도 영원한 존재입니다.
 
남자 하나님과 여자 하나님의 중화체로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몇 분이 필요하냐? 좋은 것이 있을 때,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은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많더라도 한 분만 필요합니다. 전체를 관리하고 체계를 세워서 적용하려니 많은 하나님이 필요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자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남자도 하나님이 필요한데, 여자 하나님과 남자 하나님이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자 하나님과 여자 하나님이 같아야 되는데, 남자는 우락부락하고 여자는 아기자기하니 어떤 하나님이어야 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좋으냐,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좋으냐? 남자는 하나님의 오른팔을 잡아당기고 여자는 왼팔을 잡아당기면 하나님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렇게 보면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할지,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할지 처신 방법이 복잡합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사정은 모르지만 인간의 사정으로 볼 때, 하나님은 두 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여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있고 남자가 좋아하는 하나님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여자와 남자가 싸울 때 하나님끼리도 싸우게 되므로 하나님은 한 분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중화체로 계시며 격위는 남성격 주체로 계십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결론을 참 잘 내려 놨습니다. 선생님이 생각 없이 쓱쓱 해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겼느냐?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는데 일남일녀를 창조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납적으로 보면 하나님 가운데는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되어서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는 이런 성품을 닮아 났습니다.


콩을 보더라도 두 조각이 하나의 껍질에 싸여 하나의 콩을 이루고있습니다. 그 속의 두 조각 사이에는 배아가 있는데, 거기에서 줄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조각 가운데서 한 쪽만 없어져도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어느 한 쪽이 없어지면 생명이 존속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되어 있으므로 그 둘이 싸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둘을 꽁꽁 묶어서 절대 떨어질 수 없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 있게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싸우면 안 됩니다. 여자는 자기에게서 제일 좋은 것을 자기 주머니에 두지 않고 남자의 주머니에 갖다 넣겠다고 하고, 남자도 자기에게 있는 제일 좋은 것을 여자의 주머니에 갖다 넣겠다고 하면서 서로 주겠다고 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가 󰡐하나님을 당신 것으로 하소󰡑 한다는 말입니다. 아내가 󰡐당신의 하나님이오󰡑 하면, 남편은 󰡐아니오, 당신의 하나님이오󰡑 하면서 서로 위하게 되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우게 되면 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망하지 않을 방법으로 여자와 남자가 서로 없으면 죽고 못 살게끔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의 하나님인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보면 남자는 주체요, 여자는 상대적 주체입니다. 여자가 상대적 주체라는 것은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지만 여자도 남자를 주관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잘살자는 것입니다.


원래 사람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못 만났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한 나라의 일등 가는 미인이라 해도 이 미인 앞에 남자가 없다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미인은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지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자도 혼자 있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절대자인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절대자라고 해서 혼자 가만히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 재미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우리 인간을 만들어서 재미있게 같이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대통령이고 박사 학위를 한 1백 개쯤 가지고 있고, 책도 도서관에 있는 책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거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혼자 중얼중얼하며 󰡐내 자리가 참 좋구나. 오늘은 밥도 맛있었지. 아이고 좋아! 아이고 좋아!󰡑 이런다면 격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안 어울립니다. 그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상대가 없는데 혼자 좋아하면 미친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그린 세계지도를 보고서 󰡐태평양이 조금 작아졌는데? 아시아가 조금 작아졌는데? 고것 참!󰡑 이런다면 정상입니다. 왜 정상이냐? 상대가 있으니까 정상입니다. 또 세계 대통령이 떡 앉아서 법관을 향해 󰡐여봐라, 아무개 대감 대령하라󰡑고 했다고 합시다. 사람이 있을 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여봐라!󰡑 한다면 그것은 미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면 허사입니다. 자기 혼자서 아무리 웃거나 울어도 허사입니다. 울어도 상대가 있을 때 진짜 울 수 있는 것이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울려고 해도 울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없는 세상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혼자 살림살이를 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사랑할 대상을 찾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도 말할 상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별수 없이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국 누구의 하나님이냐? 인간의 하나님입니다. 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도 살림도 인간과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이 정도의 자격자라면 명문집안 출신입니다. 이만하면 사람의 자격이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이다
 
본래 이 우주의 중심은 절대자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었으니 지은 분이 중심으로, 주인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아버지가 되니까 자기 아들딸에게는 중심이 됩니다. 그분이 인간을 지었다 하더라도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을 대하는 자리에서는 자식을 위해 있게 마련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있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자식이 침해를 받을까봐 걱정하고, 자식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까봐 보호해주고, 또 어떤 반대의 요건이 나타날까봐 방어해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 부모의 본질을 찾아나가는 길, 부모의 본질에 연결해나가는 길이 선의 길, 즉 사랑의 길입니다. 이런 부자관계의 사랑의 인연을 연결할 수 있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그런 선의 자리를 통해서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로되 중심적인 사랑이 임재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지상에 사랑의 중심이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중심적인 사랑은 어떠한 사랑이냐? 맨 처음 사랑이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사랑이 먼저 나타났느냐? 부부의 사랑이 먼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중심삼고 내 아들딸의 사랑이 먼저 나타났느냐? 아닙니다. 그러면 사랑의 뿌리는 어디냐? 인간은 그 어떠한 중심 앞에 아들딸의 입장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뿌리는 바로 부모의 사랑이며, 그 사랑이 맨 먼저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적 신으로서 인간을 자신의 아들딸로 지었다면, 그 아들딸을 지어 놓고 어떻게 했겠느냐? 물론 좋아했겠지만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면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게 마련인데, 아들딸로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런 분이 아들딸을 사랑하는 데 한 50퍼센트만큼 사랑해서 되겠느냐? 1백퍼센트 사랑해야 합니다. 1백퍼센트 사랑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을 거쳐가야 합니다. 일생 동안 사랑해야 그의 아들 된 인간이 행복하지, 소년시기에만 사랑하고 장년시기에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사랑을 중심하고 한 이상을 향해 나가는 한 소년시기에는 행복했을지 모르지만 그 후로는 불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하느냐? 인간이 태어나 자라서 완성해가는 일생 동안 쭈욱 사랑해야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모체입니다. 여기에서 부모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자녀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형제의 사랑이 우러나왔고, 친척의 사랑, 민족의 사랑이 우러나왔습니다.


좋은 것을 무한히 주고 싶어하는 하나님
 
부모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가 갖기보다는 앞으로 자기를 대신할 수 있고, 자기가 맡길 수 있고, 자기가 믿을 수 있고,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에게 상속해주려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가 있다 할 때, 그 군주 역시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그것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합니다. 귀한 것이 있으면 그 귀한 것을 자기 개인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나라 전체의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 진정한 군주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귀하고 좋은 것을 자기만의 것으로 하지 않고 전체의 것으로 하며, 또한 그 가치를 전체의 가치로 연결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을 참으로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천리의 원칙이며, 인간 본연의 마음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냐? 지극히 선한 분이요, 모든 만물의 근본이 되는 분이요, 사랑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후 온 우주의 귀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참으로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귀한 것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어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갈라지느냐? 마음대로 주고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갈라집니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받을 대상이 없고, 받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줄 주체가 없을 때는 불행합니다. 줄 때는 자기의 제일 귀한 것을 서슴지않고 줄 수 있어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행복한 자리에 서 있느냐? 하나님의 가장 귀한 것을 사랑하는 개인이나 가정․사회․국가․세계 혹은 주권자라면 주권자, 백성이면 백성에게 고스란히 주고 싶은데도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안심하고 기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한날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그것은 참되게 줄 수 있는 세계적인 발판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참소할 수 없고, 받는 데 있어서도 어느 누가 조건을 제시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자리를 소원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세계적으로 넓혀서 온 만민을 거기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거두려는 소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그런 자리를 갖지 못한 하나님은 주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슬픔과 고통도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과정에서 개인을 통하여 천주에까지 주고자 하는 하나님은 주기 위한 그 거리를 단축하고자 합니다. 주는 데는 어떠한 환경의 제재나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주고 싶어합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주고 싶을 때에도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주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주고자 합니다. 명령하고 가르침받는 자리에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심정이 통하는 자리, 하나님의 영광과 만우주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자리에서 주고받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이시다
 
하나님은 심정의 주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무한히 슬픈 감정을 갖고 있으며 무한히 기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해서 기쁘고 좋은 감정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슬프다면 인간들이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슬픈 심정을 갖고 있는 분입니다.


사람이 웃는 모양은 우는 모양과 비슷합니다. 웃는 모양과 우는 모양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웃는 모양이 꼭 우는 것 같습니다. 얼굴의 변화를 보면 웃을 때도 눈이 작아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잡히고, 울 때도 그렇습니다. 웃을 때는 공적인 것을 드러내고, 울 때는 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웃을 때에는 공적인 것을 드러냅니다.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웃는 사람에게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는 말이요, 웃음을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를 못 받는다는 뜻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는 것은 무한히 공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웃고 있느냐, 울고 있느냐? 하나님은 공적인 분이기 때문에 울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웃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충만한 웃음을 웃고 있어야 하는데, 까딱하면 폭소를 터뜨리고 까딱하면 폭소의 반대되는 폭비(爆悲)를 드러내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슬픈 면을 알게 되면, 그 슬픔 앞에서는 내 슬픔은 사라져 기쁨이 나옵니다.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는 눈물 콧물을 흘리고, 창자가 끊어지고 숨이 끊어지는 듯한 경지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에 충만해 있는 반면 무한한 슬픔이 폭발될 수 있는, 안팎으로 두루 충만함을 갖춘 분입니다. 그래서 그 슬픈 일면을 찾아들어가 끝에 가면 기쁨으로 화합니다. 또 기쁜 일면을 찾아들어가게 되면 슬픔의 경계선이 점차 드러납니다. 이것이 교차되어 하나를 이룰 때 폭발적인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부딪치면 어떻게 되느냐? 폭발합니다. 그러나 뜨거운 것끼리 부딪치면 폭발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인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순수한 울음은 어떠한 것이냐? 세포와 모든 신경기관이 일치되는 자리에서 나오는 울음이 순수한 울음입니다. 일치되었다는 것은 충만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울음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는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또 기쁨을 느끼면 그 기쁨으로만 충만할 것이 아니라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픔도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쁨만 자극시켜 주면 나중에는 기쁨을 못 느끼게 됩니다. 기쁨이 있는 반면 그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슬픈 일면도 내재돼 있어야 합니다. 그 슬픈 일면이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에 우리 의식기관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절대적인 선 자체, 기쁨 앞에서는 슬픈 일면은 넘어갈 수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쁨만을 느낄 수 있는 경지는 기쁜 경지가 아닙니다. 그런 경지가 방향이 바뀌어서 반대의 경지가 될 때에는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친구를 원할 때 눈물이 있는 친구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질질 짜는 그런 친구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물이 있는 반면 웃음이 충만한 사람을 원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찡그린 얼굴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넘치는 희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남이 울 때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복 받는 사람입니다. 복은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찾아옵니다.


그 복받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에 복은 찾아오기 때문에 복받을 수 있는 자리는 부자의 관계와 같은 자리일 것입니다. 자식이 슬퍼하는데 자기와는 관계없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아무리 그렇게 다짐하여도 다짐하는 그 의식을 넘어서 먼저 눈물이 앞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부모의 심정이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나는 사랑이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밤에도 좋아하고, 낮에도 좋아하고, 일하면서도 좋아하고, 쉬면서도 좋아하고, 춤추면서도 좋아하고, 울면서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에게는 사랑이 있다. 몽땅 있다󰡑고 한 것입니다. 󰡐몽땅󰡑이라는 말은 그 속에 전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제일 좋아하는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만하면 근사합니다. 그런 사랑을 몽땅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기에 인간이 그 사랑을 몰랐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사랑을 맛보면 죽더라도 놓을 수 없습니다.


삼십이 되도록 장가를 못 간 더벅머리 총각이 그 동네에 있는 미녀를 사랑해서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할 때에는 마음으로만 끙끙 해서는 장가가지 못합니다. 삼십이 되도록 끙끙 앓았다고 사랑을 알 수 있느냐? 모릅니다. 왜 모르느냐? 혼자이기 때문에 모릅니다. 만약 둘이 사랑을 했다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혼자서는 못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몽땅 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혼자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게 될 때 혼자 받는 것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니까 몽땅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느냐, 몽땅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느냐? 하나님이 몽땅 사랑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받기만 한다면 인간에게 줄 사랑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몽땅 사랑인데, 그 몽땅 사랑을 창고에 쌓아 두고 깍쟁이 장사꾼처럼 하나하나 주는 것이 아니라 와르르 꽝 퍼부어줍니다. 몽땅 퍼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몽땅 퍼붓는 그 사랑을 받아 지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몽땅 퍼부어 주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크겠느냐? 거기에는 하늘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땅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지금까지 왔다가 간 수많은 선조들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현재 살고 있는 인류도 몽땅 빠져들어가고, 앞으로 올 후손들도 몽땅 빠져들어가야 되니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받자면 우리 가슴이 얼마나 커야 되느냐? 우리 가슴이 크면 사랑을 몽땅 받을 것이고, 가슴이 작으면 그 사랑을 몽땅 못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몽땅 사랑한다고 하면서 다 주지도 않고 몽땅 사랑이라고 한다면 기분 좋겠어요? 우리 가슴이 사랑보다 작아 그 사랑을 몽땅 다 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절반쯤만 받고 싶어하느냐, 아니면 넘치도록 받고 싶어하느냐? 우리 인간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다 받고도 감출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은 그렇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사랑이 있으면 그것을 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는데, 감당할 만한 여력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최고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는 사람은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갑니다. 사람이라면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몽땅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조금만 남겨 놓아도 안 된다고 합니다.


몽땅 사랑은 하나님 사랑인데, 하나님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몽땅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이 아닌 것은 싫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자관계는 사랑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도 사랑이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형제지관계도 사랑 아니면 성립되지 않고, 동포의 관계도 동포애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종족을 넘고 민족을 넘는 세계 인류 박애사상도 역시 넓은 사랑이 아니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보편화되고 우리 생활권의 환경이 될 수 있는 인연과 터전을 마련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몽땅 사랑을 받는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환경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몽땅 사랑이냐? 사랑이 아니고서는 모든 것이 틀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랑을 말했고, 석가모니가 자비를 말했습니다. 자비도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좋아하는 분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살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살고 싶어합니다. 어디서 일하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일하고 싶어합니다. 어디서 자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자고 싶어합니다. 어디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싶어하느냐? 사랑 가운데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39-289, 39-149, 127-232, 36-91, 44-179, 111-70


출처: http://cafe.daum.net/THEKINGDOMofGOD/TpQM/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