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제 5권 구원역사편
제 4장 구원섭리와 나
소목차
1. 나를 찾아오시는 아버지
2. 나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3. 섭리역사와 나
4. 시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
5.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
6. 최후의 한 때와 나
1. 나를 찾아오시는 아버지
천주의 슬픔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영원히 행복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됩니다. 사회나 가정, 더 좁혀서 나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내 몸과 마음에 탄식이 남아 있는 것을 여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내 생활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리도 저리도 움직일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한 모퉁이에서는 이러한 나를 거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어떠한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수시로 몸을 재촉하는데도 몸은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런 걸음을 걷지 못한다면, 이 이상 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며, 이 이상 더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생애를 지나고 역사를 거쳐도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을 어떻게 해결지어야 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 만민 앞에 공인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다면, 나로부터 새로운 역사, 나로부터 새로운 시대, 나로부터 새로운 행복과 나로부터 새로운 기쁨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나 자신부터 해결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무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고 충격을 가하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넘고 이 세계를 넘어 지으신 피조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으려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한을 느끼며 살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있는 친구에게나 형제, 혹은 처자에게 원망도 하고 분풀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대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대를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픔과 고통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싸워 나가는 인간의 모습과 세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에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습니다. 내 가슴에 터질 듯한 근심이 있고 수심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습니다. (9-193, 60.5.22)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체로 지어진 인간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어떠한 모습으로 지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슬픔과 고통권내로 쓸어넣기 위해서 지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본래는 기쁨을 느끼도록 지었습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심정을 갖춘 모습이 되도록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기쁨이 넘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기쁜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5일간 만물을 지으신 후 6일째 되는 날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지은 우리 인류의 조상은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요, 지극히 귀한 존재요, 지극히 자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기쁜 존재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사랑하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 혹은 여러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하나하나 헤쳐 보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고, 하나님이 만물 앞에 축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더하고 기쁨의 자극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만물을 지었습니다. 순간적인 기쁨을 느끼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대할 적마다 가슴 깊이 스며들어 오는 기쁨의 자극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최고의 심정을 기울여 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 해와를 이토록 귀한 존재로 지었겠습니까? 심부름시키기 위하여? 아닙니다. 심부름시키기 위해서 천사를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아들딸로 만들기 위하여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요 너희들은 내 아들딸이니, 너희가 슬프면 내가 슬프고 너희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할 수 있는 관계로 지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정 전체의 총합체, 만우주 전체의 창조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의 대상체로 지은 인간이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은 창조세계는 한과 슬픔의 세계로 변하고 말았고, 기쁨과 소망의 실체였던 아담 해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추방당한 무리이니 응당 고통을 받고 슬픔을 당해야 됩니다. 천륜을 저버린 배도자의 보응으로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194, 60.5.22)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에게는 찾아갈 수 있는 기쁨의 목적지와 모든 슬픔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여러분과 나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본래의 세계,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야 합니다. 또 내 주위에 엉클어져 있는 흑암의 모든 고통을 헤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 목적지를 찾지 못했고, 그 어둠과 흑암의 탄식을 제거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수천년 역사를 거쳐 나오는 동안 인류는 탄식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허덕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면 고통, 슬픔이면 슬픔, 흑암권세면 흑암권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비까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의 관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이를 밀어 떨치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시대적인 소망이나 역사적인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대들기 전에는 하나님은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다시 붙들어 행복만이 있는 그 세계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수고해 왔습니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천당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땅 위에서는 비록 고통 가운데 살지라도 그 고통을 삼켜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절대 천국에 못 갑니다.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그렇다면 봅시다. 4천년 동안 뜻을 중심삼고 성별시켜 놓았던 이스라엘 민족, 그들이 오죽 잘 믿었습니까? 아브라함 이후 모세를 거쳐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2천년 동안 그들은 모세가 세워 놓은 율법을 오죽 잘 지켰습니까? 그렇게 잘 믿고 나온 무리가 믿음의 왕자로 오신 예수님을 배반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거룩하게 단장하고 속죄소(贖罪所)에 들어갈 때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신한 듯하였고 믿음의 실체인 듯하였으나, 그런 자들이 예수님 앞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잘 믿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절개가 지금 땅 위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도들의 신앙의 절개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준은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에는 강도의 심보를 품고, 도적의 심보를 품고, 살인자의 심보를 품고도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밑창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근본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기 위하여 지도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은 먼저 제자의 마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제자를 인격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왜 구원하시려 하는가? 구원의 목적은 기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짓던 본연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붙안고 나오시면서, 마음의 행로를 지키고 마음의 행로를 보호하고 마음의 행로를 이끌어 가면서 인간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왔습니다. (9-195, 60.5.22)
타락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지어 놓으신 만물과 인간을 보고 실망하고 울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불효하고 살인범이 되어 철창에 갇힌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마음은 철창을 넘어서 그 자식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늘 하물며 본연의 천심 그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어떠한 고통도 이 마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슬픔도 이 마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비통함도 분함도 이 마음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기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저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아버지 앞에 아들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딸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조차 못 했던 패악한 무리였다는 것을 반성하며 스스로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피를 맺히게 한 철천지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암만 억울한 입장에 있다 해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을 천도가 공인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인류는 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 된 입장에 있는 인간이 부모 되는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 본연의 인연,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이 정리(情理)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구원의 역사도 사랑을 가지고 합니다. 믿음도 아니요, 소망도 아닌 사랑입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라고 붙들고 울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끌어가지 못합니다.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면 사탄이 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 부모의 자식임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아버지 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을 해봤습니까?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담아, 내 사랑하는 해와야, 너희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로구나. 천지가 변할지언정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소냐? 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고 고대하였는데, 그때를 맞지 못한 채 인간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9-203, 60.05.22)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온 하나님
하나님은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켜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고, 아버지의 성상을 재창조시킬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구원의 최고 목적은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성상을 이루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를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수고의 복귀노정을 거쳐 나온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인간들,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오기를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완전한 인격자가 못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대하는 형상도 천태만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아버지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을 것인가? 보잘것없는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했습니다. 만일 찾아오신 아버지의 뜻을 내가 완결하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하나님은 또다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심정의 인연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이 한 자리에서 만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갖추어 가지고 그것이 전체의 가치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넘기 전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슬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는 찾아오고 계십니다. 저 사망이 물결치는 죽음의 장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찾아가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본래 인간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은 후에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여 인간을 지었습니다. 심정이 있다면 그 심정의 1백 퍼센트를 다하고,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다하고, 몸이 있다면 그 몸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더불어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몰리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저주받고, 하늘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무리를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을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원인과 결과를 너무도 잘 알기에 죄를 용서해주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시 인간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까지 아시기에 하늘은 죄를 기억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9-202, 60.5.22)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절대자의 각오
절대자가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각오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고 선한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민족․국가․세계, 더 나아가 온 천주를 완결지을 때까지는 어느 누구의 충고에도 변할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사정에도 양보할 수 없는 각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천만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는 각오입니다. 그 각오를 만인에게 제시하는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 죄악 된 인간들 앞에 하나님의 각오를 실제로 보여주는 날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고 수많은 도인들이 살고 있으되, 그들은 하나님의 각오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변치 않는 각오 밑에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10-273, 60.11.6)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한 섭리역사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본래 하나님은 참된 인류의 조상을 중심으로 승리적 주관권을 가지고 천지를 주관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주관의 위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누구 때문에 잃어버렸느냐? 아담 해와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해와 때문에 일이 이렇게 저질러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참된 인류의 조상,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참부모의 혈족으로 우리 인류는 태어나야 했습니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던 인류의 참부모, 그 참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로, 인류 앞에는 승리적인 영원한 실체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담 해와는 승리적인 실체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슬픈 역사를 이루어 나온 원한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늘의 법도를 떠났고, 자기의 실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우리 인간은 말씀에 따라 실체를 찾고, 심정세계를 찾는 복귀의 노정을 더듬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도 더 악한 자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대할 수 없는 슬픈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는 회복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일깨워 재창조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종의 자리를 거치고, 양자의 자리를 거치고, 아들의 자리를 거쳐서 승리적인 주관권을 갖추어 참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소생시대요, 신약시대는 장성시대요, 성약시대는 완성시대입니다. 또 구약시대는 종의 시대요, 신약시대는 양자의 시대였습니다. 이 양자의 시대를 거쳐서 실체 자녀의 시대를 완결짓고 나서야 부모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복귀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실체 자녀의 시대로서 승리적인 기준을 세운 다음에,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할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종이 되어, 여기서부터는 종의 세계이니 사탄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 승리의 팻말을 꽂고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조건을 세운 우리의 선조들이 없었습니다. 또 종의 승리적인 터전을 상속받아 하늘편 전체의 종을 통할하고, 하나님 앞에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양자가 되어 하나님이 찾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자로서의 승리적인 결정권을 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은 사람 하나를 놓고 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으면 번번이 사탄이 침범하여 망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뒤넘이치는 이 역사가 6천년이나 흘러왔지만 어느 한 때 종으로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어느 한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권한을 세울 수 있는 양자를 찾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한스런 복귀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는 입장에서 한 사람의 사명자를 세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갈라 세워 역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준비한 기반 위에 한 사람을 불러 세워서 명령을 실천하게끔 역사하셨는데도, 명령을 받은 사람이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동원시켜서 연이어 나갈 수 있는 후보자를 세워 나오셨습니다.
종의 역사, 양자의 역사, 자녀의 역사, 부모의 역사, 이러한 종적인 역사가 오늘날 횡적으로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 종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양자의 도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하면 내 아들딸아!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4-239, 65.1.1)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처량한 아버지
하나님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찾아 나오되 맨 끝에서부터 찾아 나옵니다. 타락한 자식들이 몰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 선두가 되었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쫓겨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선 것도 모세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서신 것입니다. 모세만 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보다 더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김삿갓과 같습니다. 짊어진 짐을 풀 곳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한테 풀려고 했는데 그 민족이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세계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무치는 마음과 그 끓어오르는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사람이야 잘났든 못났든 괜찮다는 것입니다. 알든 모르든, 유무식(有無識)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누구이며, 하나님을 모셔줄 가정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을 모셔 줄 민족이 어디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구는 넓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많아도 처참한 유랑객이 되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자식을 만들려면 내가 네 아버지이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수고했다고 다 가르쳐주어야 하니 참으로 원통한 사실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만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요, 무한한 사랑으로 자식 앞에 나타나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프고 처량한 모습으로 허덕이는 아버지가 되셨으니,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지극히 작은 고아 하나가 불쌍한 모습으로 자기 앞을 지나갈 때, 저기 아버지가 가시는구나 하며 그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걸인이 있을 때, 자기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로 알고 저와 같이 아버지도 가시는구나 하며 눈물짓는 자도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을 대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9-205, 60.5.22)
진정한 효자 효녀
진정한 효자는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지난날 아버지께서 겪으신 사정을 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입니까? 사랑하는 아들딸이 사형장에 나가면 교수대 앞에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보다 먼저 눈물을 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지극히 선한 아버지로되, 이 땅 위의 불행한 사람이 가는 자리에 동참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시는 이유는 인간과 부자의 인연을 가진 연고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실제의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민족 앞에 몰리고 배반당하는 입장에 설 때, 고요한 산속을 찾아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한 줄 압니까? 아버지여, 나에게 복을 주시어서 편안히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몰리고 쫓길 적마다 아버지, 원통하옵니다.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얼마나 이런 길을 가셨습니까?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은 아버지를 대신한 눈물이로구나!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 진정한 아들딸이라면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남루하고 자기의 몸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상처를 잊고 그 이상 처량한 길을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엉클어져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자라면 말없는 산봉우리를 보고서도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산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피조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좋은 풍경을 대할 때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내시면서 아들딸한테 몰림받고 우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상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손이 여러분 자신의 일부분일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왼손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이요, 바른손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이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가 자기 손을 붙들어주면서 아버지! 아들아! 하는 경지에서 몸부림치는 자 외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는 그러한 경지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몇 시간씩 울다 보면 하늘이 그렇게 우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서 아버지! 하면 실감이 납니다.
아버지란 명사는 많습니다. 내 아버지도 있고 남의 아버지도 있고, 나쁜 아버지도 있고 좋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고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하여 우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206, 60.5.22)
마음에 모시고 위로해드려야 할 아버지
하나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오면서도 인간들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사망세계에서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헤치고 그 마음에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심정을, 자기의 모든 전부를 옮겨주고, 그 다음에 축복을 해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신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터인데 어떠한 자리에 모시겠습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했습니까? 그곳이 어디입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하라고 예비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실 곳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입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 어디도 믿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식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내가 영원불변의 모습이 되어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먼저 마음의 중심에 아버지를 모신 후에 그 아버지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의 사회, 아버지의 가정, 아버지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늘을 잘 믿는다는 어떤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를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모셔야 합니다. 만일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셨다면 그 다음엔 아버지를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수고하신 아버지임을 알고, 나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찾아오셨던 아버지이심을 알고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비극영화의 주인공보다도 더 비극적인 분으로 찾아오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부터 찾아오셨던 아버지는 가인과 아벨을 세워 놓고 천륜의 대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아벨이 죽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 맞은 것입니다. 노아 때는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랬고, 모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그랬고, 예수님 때도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그랬습니다. (9-207, 60.5.22)
아버지의 짐을 대신 지는 아들딸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한마디의 말을 하면서도 몸 둘 곳을 몰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고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늘 앞에 무수한 죄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은 심정 하나를 붙들고 당신의 슬픔은 저의 슬픔이요 당신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이 슬퍼하면 저도 슬퍼하고 당신이 웃으시면 저도 웃겠소이다. 당신이 동(動)하면 저도 동하고 당신이 정(靜)하면 저도 정하겠소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해도 안 됩니다. 사무친 그 심정, 그 하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찾아오던 발걸음을 어느 한 곳에 멈추고 6천년간 유랑하신 보따리를 풀어놓으실 수 없습니다. 집이야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앉을 자리야 바위덩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이 맺어지는데, 그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가 땅 위에 있지만 그 가운데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리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보는 것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라면 눈물이 앞서고 우중이라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행랑보따리를 말없이 벗겨서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왔더라도 서슴없이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라는 것입니다. (9-210, 60.5.22)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아들딸
그런 아들딸이라면 주가 이 땅 위에 와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리어 만민을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될 때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리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그분을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선하다고 해서 얼마나 더 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수십억 인류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무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의 원수라 하더라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찾아오는 아버지를 만난 후 그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고, 그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런 아들딸이 되어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으니 이젠 보따리를 다 풀어놓게 해야 합니다. 이젠 죄수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고 어디로 가시겠나이까? 아버지, 제가 앞장서리다 하며 그 길을 먼저 걷겠다고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곳에 축복을 다 퍼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모인 집단이 있다 할진대 세계의 모든 교단 위에 내렸던 은혜를 다 끌어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날에는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못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세워서 심판하십니다. 내 아들은 이러이러했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들딸을 기준해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먹구구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영광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세워서 심판하는 것입니다. 처참한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쳤으니, 아버지를 배반했으니, 아버지를 모른다 했으니 그 아버지도 응당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겪고 난 다음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공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는 줄 압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겪어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는 하나님이요, 인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 찾아오는 아버지를 모시고 위안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아버지를 모신 기쁨을 심정적으로, 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갖지 않으면 땅 위에 주님이 오실 때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기준까지 여러분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지 같은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 보았습니까? 그런 자리에서도 아이구, 아버지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하며 몸 둘 곳을 모르고, 얼굴을 못 들며, 추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민망스러워 거동을 못 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며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영광스러운 자리, 좋은 자리에서 은혜받으려고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은혜받으려는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모진 광풍이 몰아치는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고생하며 오셔야 하니, 우리가 그곳을 개척하기 위해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모진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일지라도 우리는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야 하니 우리가 죽고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금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리로 찾아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딸, 그 아버지의 고통의 짐을 전부 짊어지고 그 아버지의 고난의 길을 전부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는 지극히 적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세계 가운데 그 분야에 자신 있다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을 지배할 것이요, 천군천사까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의 선물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오신다니 황공한 일입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천지는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동서의 모든 사조는 이 민족과 하등 관계가 없었지만, 점점 이 민족의 일로 부각돼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족이지만 그들이 가슴을 떨면 우리도 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향하여 세계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계는 나 대신 심판의 제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9-211, 60.5.22)
심정의 주인공
이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권세의 주인공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눈물이 많고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많은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최후로 바라는 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도를 원하고 있지만 도가 궁극적인 대상은 아닙니다. 어떤 주권도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복을 제일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전인류가 어떠한 주의를 내세우고, 세계가 모두 그 주의권내(主義圈內)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과연 전부 편안하고 행복스럽겠습니까? 자유를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싸운다고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무리는 자유스럽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개념으로 보면 가상적입니다.
심정, 생명의 원천인 심정, 이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동하면 내가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나도 정하고, 하나님과 같이 바라보고 듣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이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면 그들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고난 가운데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허덕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모시는 효자가 되겠나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행복의 동산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창조주의 권한을 가지고 천지만상 앞에 나타나시게 될 때에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세계에서도 효자 효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효자 효녀는 오늘날 이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 때뿐만 아니라 기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영광의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춤을 춤으로써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얼마든지 춤을 추어서 위로해드리겠다. 내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신다면 얼마든지 노래를 불러서 즐겁게 해드리겠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이라도 그렇게 가져야 합니다.
슬픈 자리로 내몰아야, 그런 길을 가게 해야 빠르겠기에 그런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고개를 넘고 난 후에는 아버지께서 천하만상 온 피조만물 앞에 이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기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기상을 갖추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의 충절을 다하고 나서, 모든 피조세계가 머리 숙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밉게 볼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교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뒤에 두고 자기만 올라가겠다고 하니 다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아버지부터 모셔서 영광의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고난의 아버지를 모셨다고 해서 아버지를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내가 말없이 슬픔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를 눈물짓게 하는 하나의 계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들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도 고생의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전세계에 우리 한민족과 같이 불쌍한 민족은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하나님이 찾아온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정이 두텁다면 그 심정을 터로 해서 이 어려운 환경을 참고 넘어 이 자리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위안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상에 갔을 때 제일 영광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제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야 뒤끓든 사회야 변하든 천심을 향한 일편단심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내 몸이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그 약속만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영광의 때, 영광의 한 ᄂ날을 맞이하면 아버지를 이렇게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기백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내가 영광을 받고 모심을 받겠다는 것보다도 그때에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시는 아버지를 잘 모시어 영광의 아버지로 높여드리고, 아버지 대신 사탄을 향하여 야! 이놈아 하면 사탄이 도망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작은 무엇이라도 있어야 6천년의 한을 제거할 수 있고 자랑스러운 소망의 한 자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9-214, 60.5.22)
2. 나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죽인 죄인
타락 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비극의 역사를 엮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극입니다. 희극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의 프로가 연속되어 온 역사, 비극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비극의 자리에서 누가 쓰러지고 누가 통곡했는가? 하나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모두 나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영 화를 본다 할진대 통곡 안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만민의 아버지로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잡아죽였습니다. 우리는 살인강도보다 더한 악당들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첫아담이 타락했으니 다시 완성한 아담격으로,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첫아담이 거짓아버지가 되었으니 후아담이 참아버지로 오셔서 만민을 다시 낳아주어야 합니다. 다시 살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니 구원이니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잡아죽였으니 우리는 살인강도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 아버지! 저에게는 양심적으로 가책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수작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란 말입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면 그 순간에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만 죽인 것이 아니라 아들도, 종도, 하나님의 모든 사람을 때려잡은 황마적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옥중에 있을 때 사형수들과 여러 번 같이 있어 보았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자기가 살길이라면 천 사람 만 사람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어요. 그런 것을 바라볼 적마다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아려 볼 때, 응당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를 범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교수대에 나가신 하나님의 황태자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존귀한 분을 반역자로 몰아 잡아죽였으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심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세상의 죄인 중에 내가 제일 가는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찾아오신 아버지를 환영하지 못하고 박대했습니다. 창을 들고 옆구리를 찔렀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를 죽인 죄를 뉘우치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왔다가 죽임당한 일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합니까? 우리는 그 분함을 잊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분함을 잊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심정뿐입니다.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정 외에는 없습니다.
너 하나를 찾기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았으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천만사의 고통도 잊을 수 있다. 너 하나를 찾아온 길이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몇 번의 고비, 몇 번의 억울한 고비도 잊을 수 있다 하시는 아버지, 얼마나 사무친 심정이기에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하시겠습니까?
이에 여러분은 황공하여 눈물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기에 잊을 수 없는 범죄의 사실을 잊어주겠다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9-208, 60.5.22)
하나님을 새로이 인식해야 할 때
하나님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천만번 죽여 버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휘발유를 끼얹고 흔적도 없이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목적은 죄인 된 인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입장에서 지극히 악한 자를 대하여 심정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환경으로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주려므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물을 지어 놓고 잘못했다고 해서 덮어놓고 벌만 주고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기에 앞서 간절한 심정을 지닌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면 항의한다는 겁니다. 죄만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천만 배 넘고 넘을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심판하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의식(儀式)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말씀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동기의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타락 이후에 나타난 관계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조들을 어떻게 대했고 타락한 후손은 어떻게 대했다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몰랐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해결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 할 때 그 동기부터 알아 가지고 해결지어야 후환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다 능통해도 성경 가운데 숨어 있는 동기의 하나님과 과정의 하나님과 결과의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정의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천신만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면서 메시아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습니까?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의 하나님을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기뻐하겠다구요? 안 됩니다. 동기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동기를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질서적입니다. 동기를 중심삼고 원리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서 실체적인 목적체가 형성되는 세계가 창조이상세계입니다. 마음의 굳은 각오 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동기를 중심삼고 환경을 개척하고 변함없이 그것을 밀고 나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개인이 성공하는 데도 그렇거늘 대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는 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하나님 말고 창조적인 하나님을 찾아보았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 말고 창조의 동기를 가졌던 하나님, 심판 받아야 할 세계를 놓고 섭리하는 하나님 말고 심판한 후에 모든 인류를 품고 영광 가운데 만민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으로 사셔야 할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한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과거도 천리 원칙과 그 원천이 같아야만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세워지고, 또 그 사람의 행적을 역사와 더불어 미래까지 자랑할 수 있지, 그 동기에서 탈선할 때는 어느 시기에 가서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동기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타락되어 있는 우리를 동기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주셨고, 미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6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은 창조 당시부터 인간을 아들딸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천리법도를 세웠기에, 이 피조세계를 깨뜨려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진 것을 다시 붙이고자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구멍이 뚫어지고 깨진 것을 땜 때워야 된다는 말입니다. 때우는 데는 동기로부터 과정을 거쳐 목적하던 바의 완결체로서 인연을 맺어 때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온 우주 피조만상 앞에 완성품이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재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재각성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청년들은 단단한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우리는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종교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이용당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 보았습니까? 그것을 절절히 느껴 보았습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교파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역사 앞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세워진 어떠한 신학체계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어느 것이냐? 해명해야 됩니다. 이것을 해명해 놓은 책자를 못 보았습니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울부짖는 어떠한 학자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으로는 세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소망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계가 몰각(沒覺)된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이때 우리 민족이 재각성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재감정하고, 시대를 재감정하고, 신앙을 재감정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람이나 어떠한 기관이나 교파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할 수 있으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의 어떤 욕망을 걸고 나오는 것에 이용당하면 망하지만, 세상에서 몰리고 땅에서 배척받아도 하늘에게 이용당하면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뜻있는 청년들이라면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냉철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때에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도 비판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9-226, 60.5.29)
인간의 타락으로 부자유하게 되신 하나님
예수님 이후에 움직여 나온 하나님을 알기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내게 될 때 예수님과 더불어 오시던 하나님, 예수님은 갔을망정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계시던 하나님,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망정 그 인간을 버리지 못하고 후손까지도 붙들고 나오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생각해 봤습니까? 이것을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 신부 될 꿈도 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혁신적이고 극단적인 무엇이 닿아, 지금의 나를 깨뜨려 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 그것을 잡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경지를 통과해야 됩니다.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답하려면 세계 인류를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도 갚을 수 없습니다. 심정에 못이 박히면서도 수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인간들을 대해 섭리해 나오는데 동기와 과정과 목적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의인을 대하여 명령하신 내용의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의 몇천 배 과정을 지내고 나서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차마 성경을 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을 대하여 이렇게 하라 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몇백 번 통과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쯤 해보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백 번 몇천 번 해보고 나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이러이러한 것을 보장하겠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죽으라 한 것도 하나님이 죽음의 고충을 거치고 난 후에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만인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영광이나 받고 보좌에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님이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이 참소 못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적인 애달픔이 사탄세계의 모든 것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리 원칙과 영원한 심정을 가졌기에 사탄이 참소 못 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깨뜨리지 못합니다. 불가침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적인 심정으로 타락한 인간을 오늘날까지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타락한 종족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타락한 종족의 아버지입니다. 만유의 아버지입니다. 한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감옥에 끌려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오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하루와 같이 아들의 죽음과 아들의 쓰라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오신 하나님입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타락한 조상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자식 된 마음이 복받쳐 올라 이렇게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창에 갇히어 찢기고 꺾인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하고 통곡하는 아들딸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은 멋대로 가고 시대는 흘러가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일편단심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사태가 복잡하고 환경이 복잡할수록 하나님은 더 걱정하십니다. 6천년 전에는 우리의 선조 개인을 대해서 애달파했으나, 세계 인류가 사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때는 제일 처량한 심정을 갖고 애달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불효 막심한 자들입니다. (9-229, 60.5.29)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
한 나라의 군왕을 반대하면 역적이라고 하였고, 한 부모를 반대하면 불효자라고 하였는데, 만주(萬主)의 주(主)요 온 우주의 아버지를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의 역적이 되었고 몇 번의 불효자가 되었습니까? 각자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옷을 벗어 치우고, 그래도 부족하여 칼로 몸을 찢고, 목을 교수대에 내어놓아도 부족하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빚진 아들이 가져야 할 심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딴 사람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민 앞에 나타날 때는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는 역사적인 깊은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슬픈 눈물을 흘리신 주인공입니다. 눈물 흘리는 데도 왕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누가 알았습니까?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통일교회 신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 말고, 삼위신으로 지칭된 하나님 말고 그 이전 동기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기쁨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대하여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환경이요, 아버지를 알아드리고 싶어도 알아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싫어서 예수님이 산중 적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한 줄 압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붙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며 같이 울고 싶은 심정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선조의 혈육을 받았다면, 이 세포 하나 하나까지에도 저끄러진 죄상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뭐 어떻고 어떻다 해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역사적인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 하는 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죄인 된 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엔 소망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믿음․소망․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홉 가지 열매의 골자는 사랑과 인내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들춰보면 뜻을 두고 인간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하여 아들을 만들어 가지고 그 아들에게 하늘땅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옵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주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그 자리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고 찾아왔고, 그런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왔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왔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다 하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너자 나요, 나자 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 하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심정으로 하나되고 사정으로 하나되고 소망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9-231, 60.5.29)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
현재 수십억의 인간들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소원입니까?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죄악에 썩은 몸뚱이를 천당 보내는 하나님이라면 모순된 하나님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천당 보내는 그런 천리 원칙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천당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 낙원밖에는 못 가 있습니다.
하나된 자와 행복하게 살고 하나된 자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천상천하를 움직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된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으면 모두가 가짜입니다. 사실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가짜들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분의 사정과 내 사정이 하나되고,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 마음도 향하고, 그분이 품은 심정을 내가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싸움은 인간끼리 하나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되기 위한 싸움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없이 비참한 혈투극을 빚어 나왔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주로 나타나게 될 때,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나는 너를 위하여 심정을 다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심정을 다했느냐? 나는 너의 사정을 다 알아주었는데 너는 내 사정을 얼마나 알았느냐? 나는 너를 위하여 죽자 살자 했는데 너는 내 뜻을 얼마나 생각했느냐? 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문제를 해결짓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러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 조각 먹었으니 지옥 간다 하는 식으로 안 되어 있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법도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공의의 심판대에 서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법정에 한번 가보십시오. 세상 법정에도 판사가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죄수가 있습니다. 공의의 심판대도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검사와 같은 사탄이 여러분을 참소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변호사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그것을 변명해주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6천년의 죄악사를 가져온 인간이기에 변명하려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지른 죄상이 너무나 큽니다. 사탄한테 걸릴 조건뿐입니다.
이것을 청산해주기 위한 한 사람이 나와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나라에 가서 그걸 놓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까짓 땅에서 몇몇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륜의 대도(大道)를 세우는 것을 걱정하시는 주님입니다. 여러분 하나쯤 지옥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요 천륜의 대도는 만인간의 것이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대도는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나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를 알아 가지고 하나님이 제일 슬펐던 하나를 붙들고 일생 동안 울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당 갑니다. 다른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억울한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기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니 기쁜 일이 없습니다. 슬픔뿐입니다. 배척받고 몰림받았으니 기쁜 때가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의 일 가운데 제일 슬펐던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상대방의 슬픔을 알아 가지고 심정을 통해야만 진짜 친구입니다. 효자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될 수 없습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걸어나온 골수가 어떤지 알아야 합니다. (9-233, 60.5.29)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는 재림주님
하나님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품고 인간을 대해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을 1백 퍼센트 알았고, 사정을 1 백퍼센트 알았고, 소망을 1백 퍼센트 알았지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왜 할 수 없었느냐? 그것을 말해 버리면 사탄이 먼저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들에게 무슨 보물이 여기 있고 무슨 보물은 저기 있다고 하면서, 주인을 배반한 종이나 그의 원수가 있는 데서 상속해준다면 그들이 아들이 가지도록 가만 두겠습니까? 사탄이 그런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다 말해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하기 전에 사탄이 먼저 알고 다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떨어져 있습니다. 이 땅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땅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에게 명령한 일을 아들딸이 하기 전에 원수들이 알아 가지고 먼저 해 버린 후 그것을 가지고 요구하면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공의의 법도를 가졌기에 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했더라도 그것이 하라는 명령에 부합되면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비사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난문제를 붙들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기도하게 될 때 선생님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은 어찌하여 만민을 구원해야 할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하고 호소하면, 하나님은 네 사정보다 더 딱한 나의 사정이 있노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뻔뻔합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구요? 뻔뻔합니다. 여러분과 하나되려는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하여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다 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으로 하나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면 4천년 동안 준비한 너희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기를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시대에는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세계의 중심, 즉 제사장 왕국이 된다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나가는 이들 앞에 하나님은 또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사정은 예수님이 갖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변호해주러 오신 것입니다. 사정을 변호하는 일이 끝나면 심정을 규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재림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사랑입니다. 맨 나중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자리에 있습니다. 백판 천치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하나에서부터 세계까지 전 역사를 이끌고 나와 맨 나중에는 아버지로서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때를 만들어 놓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을 보내서 소망을 품게 하고, 신약시대에는 아들을 보내서 사정을 통하게 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오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심정의 기준을 세우게 되는 때가 끝날입니다. 심정의 조건을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에까지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만우주 앞에 공포해야 됩니다. 너는 나의 영원불변의 아들딸이다 하는 식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 소망을 품고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천상의 대도(大道)를 깨뜨릴까봐 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 혹은 12사도를 보십시오. 찢기고 별의별 짓을 다 당했지만 참았습니다.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며 참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조였습니다.
소망을 갖고 참아라. 내일을 걸어 놓고 참아라. 사정을 알려면 충성을 다하라. 너를 위하여 주께서 이렇게 죽었으니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 기독교정신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忠) 자는 중심의 마음입니다. 가운데 중(中) 자에 마음 심(心) 자이고, 성(誠) 자는 말씀(言)을 이루었다(成)는 뜻입니다. 하늘 앞에는 변명이 없습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다. 솜을 한 짐 지고 불에 들어가라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9-235, 60.5.29)
혼돈된 세상을 사랑으로 수습하시려는 하나님
사랑하라. 충성하라. 간절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내 심정의 임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줄 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그분이 안 왔으니, 올 때까지 예수님과 성신은 눈물지으면서 아버님, 참는 아들딸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충성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심정을 기울여 사모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인연을 역사적으로 수습할 때까지 심정의 짐을 지고 나오는 분이 예수님과 성신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때가 오면 하나되기 위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가정, 모세의 민족, 예수님의 세계, 온 천주까지 하나 만들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를 하나 만들기 위하여 찾아오는 하나님이기에 역사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견지에서 오늘날을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금방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습니다. 판결은 선과 악, 최고의 둘이 서로 상반되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역사적인 싸움입니다. 보십시오. 역사를 들추어보면,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가인 아벨을 세워 타락한 아담 해와의 가정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수습하는 데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심정, 사랑을 통한 사정, 사랑을 통한 이념이라는 겁니다. 즉 심정을 통한 사랑이요, 심정을 통한 사정이요, 심정을 통한 이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아담 해와 대신 가인 아벨을 찾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접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접붙이는 놀음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귀결되어야 할 텐데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전쟁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9-237, 60.5.29)
중심인물들을 통한 섭리역사
지금까지의 역사는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역사였습니다. 악이 먼저 선을 치는 역사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잘났다고 주장할 때 먼저 주장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80퍼센트는 그렇습니다. 선이 먼저 악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 역사를 봐도 간신이 충신을 쳤지 충신이 간신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아담 가정에서부터 벌어졌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한테 접붙여야 했습니다. 절대복종하라 이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온 우주를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핏줄이 다른 두 인연이 생겼기에 이 법도를 따라 세계는 두 각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세운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벨을 세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그 대(代)를 이어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체로서 한 사람을 찾아 세운 것이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대신할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만천하의 인류는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아브라함한테 전부 복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굴복하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아브라함 가정부터 아브라함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되면 원수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했는데, 안 받는 사람은 전부 원수인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의 말에 절대복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모세에게 모두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려면 심정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본질적인 소망이 같아야 됩니다. 모세가 죽자 하면 죽겠다는 마음, 살자 하면 살겠다는 마음, 무엇을 하자 하면 하겠다는 마음, 또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사정을 거쳐 소망의 터전까지 뻗어 나갔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 심정으로 접붙이려고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망적인 기준까지는 접붙여 놓았으니 사정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접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도 못 통하고 갔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다른 피를 받았으니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골수와 같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너는 나의 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직계의 인연을 맺은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을 세워 놓고 모든 인류는 그 앞에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려면 돌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이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의 예수님을 중심삼은 세 제자, 그 중 어느 누가 못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때를 보아 심정 깊은 하늘의 비극을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까봐 얘기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장 12절)고 하였습니다. 불쌍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전체 이념을 세 제자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는데 그들이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주권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잡아죽인 죄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종하였다면 세계는 벌써 하나님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가나안 7족을 쳐서 항복시킨 것과 같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2천년 동안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는 후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했겠습니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였으니 보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선조의 죄가 3, 4대까지 간다고 했으니 보응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을 4천년 이내에 탕감해야 됩니다. 모세도 애급에서 4대 만에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천지의 법도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나왔지만 심정적으로 사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하나님과 접붙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역사를 걸어 놓고 대번에 아들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창조이념에 하나님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종들을 시켜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에 떨어졌으니, 거기에서 싸워 이기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의 입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역사해 나오십니다. 꺾어서 접을 붙여야 되는데, 이 심정을 접붙이기 위한 것이 재림역사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심정이 천상과 지상을 꿰뚫어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늘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 때를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하는 것입니다. (9-238, 60.5.29)
끝날에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
끝날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온 이 땅을 향하여 일격을 가하는 때입니다. 최대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합하는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같은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합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종이 한꺼번에 나오는 그때가 끝날입니다. 아버지도 나왔고 아들도 나왔고 종도 나왔으니 천국 살림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담 해와를 자녀로, 천사장을 종으로 지었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아들딸과 종이 평면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세계적인 완결의 때를 향하여 하늘은 지금까지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여러분이 서울 탑골 공원 같은 데 가서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무슨 말을 하는가. 다 동기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바울이다, 나는 예수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무엇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종과 아들과 아버지가 상봉할 수 있는 세기말적인 때, 총청산을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가 한꺼번에 접붙여져서 살아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줄기인 아버지, 가지인 아들, 잎사귀인 종이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세계의 사조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접붙인 사람들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 끝날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맡을 자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민주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에 일치하여 접붙여 살아남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골자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오늘날까지는 도인들이 밟혔습니다. 한 때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군벌시대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습니다. 지금은 노동자와 농민의 때입니다. 회사 같은 데도 노조가 있어서 노동자들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다 출세하고 다 성공해 봤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지리 못나서 상류계급 사람에게나 중류계급 사람에게나 하류계급 사람에게나 그저 예수쟁이라고 몰림만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에 접붙인 아들딸이 있게 되면 여기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할 것입니다. 도인들이 지배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그 한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긴 세월을 준비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은 종을 세우고, 아들딸을 세워 아버지로서 그들을 품에 품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역사적인 눈물을 흘리고, 벅찬 소망의 마음, 애달픈 사정의 마음, 처량한 심정을 다 풀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품고 딸을 품고 종을 세우는 그 순간 비로소 역사를 돌아보고 허허! 웃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사탄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냐? 악당들아 네 권한이 어디 있느냐? 공의의 심판주 앞에서 물러갈지어다! 이래야 됩니다.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을 끝날에는 한번 알아드려야 합니다. 6천년만에 한 번이라도 알아달라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저의 아버지요, 저는 당신의 아들딸이옵니다.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 황공 망극하옵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신 것을 아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선조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이 수고하신 것도 저 때문이옵니다 하며 눈물지을 수 있고 몸둘 바를 몰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에게는 심정의 주인공을 모실 수 있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립소이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그 주인의 사정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아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것 잡수십시오 하는 마음이 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한국 백성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소원입니까? 그러면 제가 죽더라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 민족을 구해서 아버지 앞에 바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 인류뿐만 아니라 천상에 가 있는 수천만의 영인(靈人)들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아도 무한히 참아야 되겠고, 사정을 품어도 무한히 품어야 되겠고, 심정을 가져도 무한히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면서 이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눈물지으며 죄책감과 황공 망극하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심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로 시작한 기독교지만 최고의 죄인입니다. 사정을 몰랐고 뜻을 몰랐고 심정을 몰랐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승리의 그 한 날을 위해서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해 싸워 나오신 아버지와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혹은 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6천년 동안 쌓아온 섭리역사를 이제는 내 대신 너희들이 맡아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청산해 버려라. 목을 자르겠으면 자르고 배를 째겠으면 째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쳐야 할 것을 우리들이 대신 치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청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심정을 준비하는 기독교인,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성도들, 한 날의 소망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기독교입니다. 이제는 심정을 다하고 사정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어야 하나되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아들의 인정을 받고 딸의 인정을 받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9-240, 60.5.29)
3. 섭리역사와 나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기를 바라는 역사적인 나
여러분이 알다시피 역사는 시간성을 따라서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과거․현재․미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이루어진 역사는 반드시 어느 한 때의 사람들과 인연되어 이루어집니다.
만일 내가 미국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나는 한 사람의 미국 국민으로만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나는 미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미국의 운명이 나와 관계되어 좌로도 갈 수 있고 우로도 갈 수 있습니다.
여자들을 두고 보면, 언제 대통령의 부인이 될지 모릅니다. 학교를 안 다녔더라도 어떤 동기로 말미암아 대통령 될 사람이 좋아하면 퍼스트 레이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남자는 조금 다릅니다. 남자들은 대통령이 되려면 싸워 가지고 승리해야 되지만, 여자는 특정 케이스로 대통령 될 사람이 좋아서 지적만 하면 벌써 역사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아무 것도 없는 시시껄렁한 어촌, 농촌의 누구도 돌보지 않는 아가씨였는데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국가를 움직이는 대통령의 일생의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 여자를 누구도 귀하게 보지 않았지만, 일단 그가 대통령의 부인이 되었다 할 때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는 천지의 차이가 벌어집니다. 과거는 나 혼자 가는 길이었지만 현재부터는 미국이면 미국의 국가 운명, 세계정세면 세계정세를 대표한 대통령이 가는 길과 직결되는 운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라고 할 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한번 되어 보자 하고 꿈을 꿉니다. 미국 대통령이라면 4년 임기 동안 미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 우주의 영원한 주권자라고 생각할 때, 그분의 아들이 된다 하는 것은 문제가 좀 다릅니다. 그분 앞에 내가 진정 그분의 아들이 되었다 할 때는 문제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아들이 되기 전과 됐다 할 때는 아까 말한 그 아가씨의 입장과 비교가 안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할 때는 하나님과 공동운명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그 아들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그 아들의 소망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일은 그 아들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게 될 때는 그 아들도 쉴 수 있습니다. 어떤 산을 말하게 된다면 한 편이 하나님이면 한 편은 아들이 될 수 있다, 이런 말이 성립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서는 데는 하나님 혼자 설 수 없습니다. 아들과 같이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성립됩니다. 하나님은 바른 발로 튼튼한데, 아들의 발이 짧아 절름발이가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양 발이 다 같이 완벽해지려면 하나님과 같이 돼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가 역사시대에 얼마든지 있었고, 섭리과정에 얼마든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 하고 물어 보면 다 손을 들 것입니다. 안 되고 싶다는 사람은 머리가 부족하든가 어딘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사람 축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미국 사람, 한국 사람, 까만 사람, 어린 사람, 큰 사람,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어합니다. (79-284, 75.9.21)
역사적인 사람이 되려면 그에 따르는 책임을 수행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는 바랐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대신자가 된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 너 아무개야, 너 이 시간부터 나의 아들이 되었다 할 때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마음대로 했지만, 되고 난 후에는 하나님과 보조를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전까지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교회에 가려면 가고, 안 가려면 안 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된 후에는 교회에 안 갈 수 없습니다. 교회에 가야 됩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동네의 어떤 처녀하고 데이트를 해도 괜찮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그것이 괜찮지 않습니다.
역사시대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든지 갖고 있지만, 역사시대의 한 사람이 되는 날에는 거기에 책임이 가중되고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은 생각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공부도 안 하고, 말도 할 줄 모르고, 사람 대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처녀가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 하면, 매일같이 파티하는 데 나가서 대통령 옆에 서야 되고, 또 박자도 맞춰야 되고, 누가 오면 외교도 해야 할 텐데 그거 죽을 지경이어서 아! 나 그것 못 하겠어 하면 거기서 끝납니다.
화장도 하기 싫지만 해야 되고, 루즈도 바르고, 매니큐어도 바르고, 제일 예쁜 모던 스타일이 되어 어떠한 손님 앞에서도 부족할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 걸 생각할 때, 지금까지 생각지 않은 귀찮은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배우지도 않은 걸 해야 되니 죽을 지경일 것입니다. 그것을 다 집어치우고 아침에 늦도록 잠이나 자고, 침대에서 뒹굴뒹굴 뒹굴면 좋겠어요? 대통령의 부인이 좋을 줄만 알았지, 이럴 줄 알았어요? 전부 대통령 부인, 퍼스트 레이디면 좋다고만 생각했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눈으로 보더라도 그 나라 대통령 부인으로서 보아야 되고, 걸음을 걷더라도 대통령 부인으로서 걸어야 되고, 옷을 입더라도 대통령 부인으로서 입어야 되고, 말을 하더라도 대통령 부인으로서 품위를 갖고 해야 됩니다.
대통령의 부인이 되려면 대통령 부인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그 나라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따라 훈련해야 됩니다. 미리 다 한때 훈련을 하고 준비를 해 가지고 내가 대통령 부인이 되겠다 해서 딱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만 만사가 다 척척 풀리는 것만 아니고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교육이 필요하고, 준비가 필요합니다. 남이 좋아하는 시간, 남이 노는 시간, 남이 쉬는 시간에 남다른 길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통일교회는 하나의 종교단체인데, 통일교회라는 종교단체가 바라는 최고의 표준이 무엇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기성교회나 이단 교회나, 어떤 종교나 다 만민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어머니 아버지의 아들딸이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공통적인 술어와 같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막연한 부모가 아닙니다. 그 부모는 우주의 중심 되는 부모입니다. 그분에게 정의가 있다면 최고를 표준할 것이고, 그분의 모든 것도 최고를 표준하기 때문에 최고의 기준을 중심삼고 우리를 지배하고 최고의 사람을, 최고의 아들딸을 바랄 것은 틀림없습니다. (79-286, 75.9.21)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하나님이 아들을 찾는데 그저 걸어 다니면서 길가에서 야! 너 내 아들이 되어라 그럴 것 같습니까? 싸움이나 하고, 게임이나 하고, 주먹이 세다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 같아요? 주먹이 센 복서라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또 미인이 되고, 일등 배우가 되어 세계의 젊은 사람, 세계의 사람들이 아, 저렇게 예뻤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배우라고 해서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습니까? 눈만 아름답다고 해서, 내 눈이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 그럴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서양 사람 가운데서도 눈동자가 새파랗고 너무 아름다워서 아, 내 눈은 하나님이 바라는 눈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딸이 될 것이다 그럴 수 있습니까? 내 얼굴은 잘생기고 키도 크고 미스 유니버스도 되니 나는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과 같이 대신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을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대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 같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잘난 아들딸이 있으면 하나님이 좋아하겠느냐, 싫어하겠느냐? 하나님이 이 녀석 틀렸다 그러겠습니까?
세상의 어머니 아버지는 자기가 안고 있는 아기가 호박같이 생겼어도 야! 그 아들 당신보다도 몇 배 잘생겼다 하면 그 엄마 아빠는 좋아합니다. 그런데 야 이놈아, 넌 틀렸다 하며 주먹을 들어 믿어라! 하면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잘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보다 못나면 지금까지 자기 정도의 기쁨밖에 느낄 수 없지만, 자기보다 잘났으면 기쁨을 더 느낄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자기보다 노래를 잘하는 아들이 있으면 그것을 보고 울겠습니까? 너 노래해라 하고 더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이 내가 한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겠소 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선언하고 나섰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미국에서 상원의원이 되려면 그 주에서 누구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그 주에서 출마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나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출마해 보겠다는 사람이라면 한번 지원해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면 난 그만이야 그래야겠습니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하나님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한다 그래야겠습니까?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게 결심한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끄러지면 그만 하련다 이러겠습니까, 하고 또 하고 하나님이 죽을 때까지 하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한다면 하나님이 좀 곤란할 것입니다.
실패할 때 작년보다도 금년에는 더 적극적이고, 금년에 실패하면 명년에 더 적극적이고, 명년에 실패하면 그 다음해에 더 적극적이고, 10년 해서 실패하면 10년 후에 더 적극적이고, 1백년 해서 실패하면 1백년 후에 더 적극적이다 할 때는, 하나님도 정신을 차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물러나기 전까지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으면 내 아들딸을 시켜서라도 할 것이다. 그리고 내 아들딸이 죽으면 손자를 시켜서라도 할 것이다 이래야 됩니다. 그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쉬운 것이 아니라 매우 어렵습니다. (79-288, 75.9.21)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져
하나님도 6천년이 걸리도록 해결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돼 있었다면 오늘날 기독교가 망할 단계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면서도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뜻을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 뜻의 길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기독교의 신앙 태도가 틀렸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전세계의 기독교를 지도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들을 안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당이 골치 아픈 것이겠습니까, 기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머리가 아프겠습니까, 안 아프겠습니까? 누가 공산당이 좋다 하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비웃어대고,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전하는데 그걸 좋다고 허허허! 그러겠습니까, 이놈의 자식들!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또 하나님이 사탄 좋다 그러겠습니까? 사탄이 있으니까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하나님이 좋아하겠습니까? 죄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시대에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갖고 왔던 사람이 다 망했고, 또 사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망했고, 예수님까지 죽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좋아하겠습니까? 이놈을 뿌리까지 왕창 뽑아 무자비하게 던져 버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데 왜 못 하느냐? 하나님이 그 방법은 가르쳐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직접 못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사람이 해야 됩니다. 만약 하나님이 할 수 있었으면 벌써 6천년 전에 에덴동산의 아담 해와 가정에서 다 해버렸을 것입니다. 오늘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대들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작전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공동작전을 하지 않으면 이것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하나님 자신이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만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누가 최후의 결정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과 공동으로 결정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담당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대표한 것이 우리들의 조상이요, 우리들과 같은 인간인 것을 여기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노아라는 사람을 통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못 나갑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못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못 나갑니다. 야곱이라는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못 나갑니다. 모세라는 사람을 통하지 않고는 못 나갑니다. 세례 요한을 통하지 않고는 못 나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못 나갑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79-290, 75.9.21)
하나님의 섭리역사란 인간을 통해서 엮어진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님은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세상을 불심판하러 온다고 하는데 이런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오랜 역사 동안 많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 놓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이론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잔인한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 때 심판해 가지고 한두 사람만 남기면 되지 왜 끝날에 한꺼번에 전부 지옥 보냅니까? 그 얼마나 잔인한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다 알면서 모르는 인간들을 전부 망하게 만들어 놓고, 죄짓게 내버려두고, 이제 와서 이러고 저러고 한다면 이론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 종교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이 망하길 바라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길 바라겠어요? 기독교가 요 모양 요 꼴이 되기를 바라겠어요? 앞으로 통일교회가 망하길 바라겠느냐 이겁니다. 유대교도 결국 망했습니다. 아무리 랍비 데이비스가 통일교회를 반대해도 그거 다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무리 반대했댔자 그거 지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그들은 다 망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이스라엘 민족이 저렇게 되었고, 기독교가 저렇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섭리한다는 사실을, 인간을 통해서 섭리의 역사가 엮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모르고 막연하게 세상이 전부 도깨비 춤추는 모양으로 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도 비참하고 냉혹한 이 현실에서 승리해야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고, 기독교도 냉혹한 현실을 중심삼고 싸워서 승리하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뜻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는데,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계의 현실을 주관하여 하나님편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중심적인 유대교가 되고, 세계의 악을 지도해 하나님 앞에 소화시켜 갈 수 있는 중심적인 기독교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 앞에 설 수 없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메시아를 맞을 수 없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수레를 타고 와서 세상을 한꺼번에 때려부수어서 자기들을 좋게 해달라고 한다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말도 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이 세상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내가 영계에 들어가서 알아보니까 그렇게 안 되어 있더라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이겨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끝까지 참아서 이기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끝까지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끝까지 참는다는 것은 싸우는 것입니다. 언제나 일선에서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유대교가 이방인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당한 비참한 사실이 있었고, 기독교가 앞으로 이렇게 나가다가는 공산당 앞에 6천만 이상 학살될 수 있는 위기일발의 현실을 바라볼 때, 현시점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여 이길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을 하나님이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현실 무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세계적인 고난과 세계적인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런 아들딸을 예수님도 찾고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79-292, 75.9.21)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교회는 통일교회뿐
현재 레버런 문과 통일교회 교인들은 아담 해와와 다릅니다. 노아와 다르고, 아브라함과 다르고, 야곱과 다르고, 모세와 다르고, 세례 요한과 다르고, 예수님과도 다릅니다. 예수님보다 나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지 못하고 망하는 길을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제1 이스라엘, 미국은 제2 이스라엘, 한국은 제3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 나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는 세계를 구하기 힘듭니다. 극동에서 한국을 잃어버려도, 중동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려도 미국은 갈 길이 없습니다. 민주세계의 주체 국가인 미국 자체를 잃어버리는 날에는 하나님의 뜻과 미국이 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누가 책임져야 되느냐? 유대교가 하나되고, 기독교가 하나되고, 통일교회가 하나되라! 그러면 해결됩니다. 그게 세계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세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해체되어 도망다니면서 닦은 막대한 경제기반을 잘못하면 공산당에게 다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2천년 동안 수고한 모든 결실을 한때 퍼부어 세계의 중심국가로 만들고 막강한 경제력과 막강한 과학의 힘을 준비시켰던 미국이 산산조각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서구문명은 어차피 아시아 문명을 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시아 문명을 접하려면 한국과 접해야 됩니다. 지금 한국이 그러한 주도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공산당과 접한 한국의 정세는 한국만의 정세가 아니라 세계의 운명이 걸린 정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등등의 문제에 걸려 있는 현세를 책임진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전세계의 기독교가 합하여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장로교회에서 책임질 수 있습니까? 미국 정부가 그 일을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전체의 심정이 합해져서 하나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요, 민족을 초월해 기독교를 중심삼은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카톨릭 자체가 할 수 있습니까? 장로교가 할 수 있습니까? 통일교회는 할 수 있습니다. 통일교회에는 카톨릭,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전부 종합되어 있습니다. 똑똑한 젊은 사람이라면 교파를 초월해서 통일교회에 모여야 합니다. (79-315, 75.9.21)
역사를 책임지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돼
우리는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역사를 책임진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봤습니까? 과거를 책임진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엔 세계 인류를 내가 책임질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내일의 우리 후손을 기필코 잘살게 만들어야 되겠다! 우리 대(代)에 다 해 버리자, 우리대에! 만일 미래까지 그래야 한다면 내가 죽어서라도 미래도 책임지겠다! 그런 남자, 그러한 사람을 만났습니까? 그런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지상에 왔다 갔던 모든 사람들은 내 친구입니다.
내가 만일 영계에 가는 날에는 국경을 넘어 수많은 인종의 영인들이 레버런 문을 찬양할 것입니다. 영계는 혼자 가는 것입니다. 친구도 없고 안내자도 없는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면 예수님과 성자들이 환영 나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면 영계여! 나를 믿어라. 과거 역사는 내가 책임지마 이런 결의를 해야 됩니다. 그들이 못 한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자신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영계가 후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상하지 못한 위대한 일을 생전에 많이 보고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영계가 협조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세계하고 다르다고 할 수 있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현세에도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미래의 후손을 내가 책임질 것이다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원합니다. 우리 인간의 소원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러한 사명을 책임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9-323, 75.9.21)
우리는 이 세계를 내 손아귀에 넣고 역사를 내가 책임져야 되겠다 이래야 됩니다. 역사상에 제일 어려운 문제를 통일교회가 해결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맹세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그것도 가능합니다. 그 다음에는 현실을 책임진다고 해야 됩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만나면 아브라함을 가르쳐야 되겠고, 모세를 만나면 모세를 가르쳐야 되겠고, 세례 요한을 만나면 세례 요한을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이 시대가 이스라엘을 반대하면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런 작전으로 충고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하지 못한 것을 오늘 이 시대에 내가 할 것이다 이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망하면 세계가 망하고, 내가 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세계가 망하고, 내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을 실감해야 됩니다. 내 생명을 걸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백인이 못 하면 황인이 할 것이고, 황인이 못 하면 흑인이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인이 실패하면 백인을 버리고 흑인을 찾아갈 것이고, 흑인이 실패하면 흑인을 버리고 황인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한 답입니다.
현재의 백인 청년들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고, 흑인 청년들도 역시 그럴 것이고, 황인 청년들도 역시 그러겠다는 결의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손에는 흑인, 한 손에는 황인, 그리고 백인 중에서 제일 잘하는 사람을 품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를 하나님은 원합니다. (79-316, 75.9.21)
역사와 시대와 미래를 위해 싸워 승리하는 내가 되자
내가 살아 있으면 역사가 살고, 내가 죽으면 역사가 죽는다 이러한 사상을 누구나 다 가져야 합니다. 그 사상은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를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고, 현세를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고,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 애쓰고 계십니다. 그러한 책임을 하나님이 홀로 지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럴 수 있으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 3일노정에서 지옥으로 간 것은 역사의 책임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어 가면서 시대의 책임을 하려고 했고, 죽어 가면서 다시 오겠다고 하며 미래의 책임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사상이 바로 하나님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의 어떠한 성현한테도 당당하고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의 그 누구한테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미래의 후손들한테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원할 것이고, 이 미국에서도 원할 것이고, 세계 도처에서도 원할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이 합해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양키 스타디움, 워싱턴 대회를 하는 것은 세계의 통일교회 신도들이 현세의 문제를 책임지고 하나의 소망과 더불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양키 스타디움의 싸움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의 이름으로, 인류의 이름으로, 미래의 후손의 이름으로 기필코 승리해야 한다는 표어를 설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싸움입니다. 선생님이 단에 서는 것은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이름으로, 역사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하고 나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건 역사적인 싸움입니다. 역사적인 사명을 짊어지고 하는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자원하여 이걸 책임져야 되겠다고 인식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기에 가담해서 승리하는 날에는 그 승리는 선생님의 승리가 아니고 여러분의 승리요, 여러분 자손들의 승리요, 여러분 친족들의 승리요, 여러분 후손들의 승리와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조상과 여러분의 친족과 여러분 후손들의 승리입니다.
이 싸움은 선생님 생애 최대의 싸움입니다. 선생님의 이름은 점점 유명해질 것입니다. 종교가의 이름으로만이 아니라 학적으로, 철학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유명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조상을 걸고, 여러분의 친족을 걸고, 여러분의 나라를 걸고 하는 이 한 때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가담했다는 하나의 증거물이 현재의 친족을 동원할 수 있고, 그 나라에 선전할 수 있고, 후손을 자극할 수 있는 위대한 자료가 된다고 할 때, 이 싸움은 바로 역사와 내가 관계를 맺는 위대한 싸움임에 틀림없습니다. 실패하면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승리를 홍수와 같이 내밀어 거국적이 아니라 세계적인 승리를 가져오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역사를 지배하는 내가 되자는 것입니다. 역사를 대표하는 내가 되자는 것입니다. 역사에 흘러가지 말고 역사를 지배하고, 역사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한번 그런 책임을 지고, 그런 데 가담해 용기백배하여 생애를 걸고 싸우고 싶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9-325, 75.9.21)
4. 시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나
우리는 원리를 통해서 소생시대․장성시대․완성시대라는 3단계를 배웠습니다. 3수가 중요합니다. 자연계도 보면 광물세계․식물세계․동물세계 이렇게 나눠집니다. 사람도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얼굴도 눈․코․입, 3단계입니다. 손으로 잡는 것도 3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손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잡히는 뭐가 있다 이겁니다. 눈도 초점이 세 점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코도 두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하나됩니다. 입도 보면 3수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3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우주를 천․지․인(天地人)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세상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원형을 그리더라도 반드시 세 점을 연결시켜야 됩니다.
시간도 과거․현재․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시간은 현재이지만 벌써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끝나면 벌써 과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3수로 연결됩니다. 아침을 먹더라도 세 가지 이상을 놓고 먹어야 됩니다. 그거 생각해 보라구요. 무엇을 먹느냐? 물을 먹고, 그 다음엔 식물과 동물을 먹습니다. 물을 먹고, 그 다음엔 육지 것을 먹고, 공중 것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가 필요하고 태양 빛이 필요합니다. 바다 것을 먹고, 육지 것을 먹고, 공기를 먹습니다.
구원섭리, 하나님의 뜻도 3시대를 거쳐옵니다. 구약시대가 있고, 신약시대가 있고, 성약시대가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에서 구약시대를 소생시대라고 하고, 신약시대는 장성시대라고 하고, 성약시대는 완성시대라고 합니다. 완성의 성약시대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을 보더라도 결혼 전까지를 소생시대, 결혼하고 나서는 장성시대, 그 다음에는 가정을 거느리는 완성시대가 됩니다. 근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도 자연이치와 환경에 맞는 단계적 과정을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할 때 나는 현재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똑 떼어놓은 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된 관계에 있습니다. 나를 두고 볼 때, 나에게는 과거가 따라옵니다. 과거에는 부모가 따라오고, 미래에는 여러분의 자식이 따라옵니다. (125-158, 83.3.20)
과거․현재․미래는 한 점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순간을 두고 보더라도, 순간은 현재로서만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를 잘라 보면 반드시 과거가 현재의 첨단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여기에는 반드시 과거가 연결됩니다. 또 이 순간에는 미래,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가 연결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 선으로 표시할 수 있는 현재와 선으로 표시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경지까지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재, 없다면 없는 것 같고 있다면 있는 것 같은 현재의 한 점이, 현재의 한 선이 오늘 우리 일상생활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를 두고 보면, 거기에는 어젯날이 있고 내일이 있습니다. 한 달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달이 있고 내달이 올 것입니다. 일년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해가 있고 내년이 오는 것입니다. 청년시대를 두고 보면, 소년시대가 있고 미래의 장년시대가 있습니다. 이렇게 현시대를 중심삼고 보면 과거가 있음과 동시에 미래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위치라는 것은 지나가는 과정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동시에 미래를 맞는 순간점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은 한 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고,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습니다. (68-204, 73.8.1)
과거․현재․미래는 한 목적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현재의 빛나는 가치 기준은 어떤 것이냐? 빛나는 과거를 이어받은 자리요, 빛나는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그 방향을 올바로 지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되지 않고는 빛나는 현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을 보더라도 숨쉬는 그 자체에서 벌써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생도 그러한 운명의 노정을 현재의 첨단에 연결시킨 것이요, 역사도 그러한 일생들을 합한 인연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라든가 미래, 혹은 과거라든가 현실, 현세계, 현세대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순간, 역사를 대표하는 때는 과거의 어떤 때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때가 되기도 합니다. 또 미래의 어떤 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동강나 제멋대로 움직여 가지고는 하나의 목적 하는 방향을 올바로 가려 갈 수 없습니다.
내가 행렬 가운데 한 일원으로 줄을 맞추게 될 때는, 반드시 앞을 맞추고 뒤를 맞출 수 있게끔 자세를 취해야 됩니다. 우로 나란히!������ 하게 되면, 반드시 좌우관계를 봐서 오른쪽이나 왼쪽의 방향을 맞추지 않고는 표준하는 직선의 한 열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의 패턴을 이어받더라도 그것이 제멋대로의 방향을 취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이 바라는 목적, 또는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가 바라는 목적과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바라는 목적과 우리 후손이 바라는 목적이 제멋대로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68-205, 73.8.1)
현재는 삼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점
현재는 엄숙한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아야 됩니다. 자기 멋대로 오른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왼쪽에 치우쳐도 안 됩니다. 좌우와 전후관계, 더 나아가서는 상하관계를 가리면서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는 엄숙한 자리로서의 현재는 용인할 수 있으되,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았댔자 그 현재는 중요한 가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현재를 보다 빛낼 수 있는 미래와 연결시키는 현재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고는, 우리의 희망이라든가 혹은 소망이라든가 더 빛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자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언제나 현재의 위치에서 나 하나를 생각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나 하게 되면, 여기에는 반드시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좌우가 있고 상하가 있습니다. 전후․좌우․상하로서 연결되어야 한다 이겁니다. 그 전후․좌우․상하가 제멋대로가 아니라 동서남북(東西南北)이면 동서남북, 고저(高低)면 고저에 있어서 같은 천주(天宙)의 방위(方位)와 평행선에 놓일 수 있는, 언제나 일치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와 아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오늘의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됩니다. 나라는 것이 마음대로 섰다 해서 과거의 위에다 맞춰주소. 아래에다 맞춰주소 그러게 돼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위와 아래의 중간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틀어지면 전부 틀어지고 맙니다. 그런 상하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은 현실입니다. 좌우를 조정할 수 있는 중심점도 결국 현재입니다. 전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현재의 입장이라는 것은 3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입니다. 혹은 3단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일치되지 않는 데서는 통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목적이 있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현재가 아닌 미래의 것일수록 방향성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일년 만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일생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 혹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그 방향을 맞춰 수많은 세대, 수많은 인간상을 거치고 나서야 달성되는 것입니다. 역사성을 두고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 일생이라는 것은 지극히 짧은 것입니다. 영원한 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을 향해서 우리는 언제나 일치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향을 설정했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이 방향을 향해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도 이 방향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민족의 역사도 이 방향을 통해서 역사를 엮어내려고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섭리적 역사의 방향을 생각하게 될 때, 현재로 연결되는 자리를 거쳐 미래가 있고, 현재가 연결되는 자리에 과거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현재 섭리상에 처해 있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개인은 개인만이 아닙니다. 그 개인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어떠한 선을 그려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된 그 한 점은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8-206, 73.8.1)
똑딱 하는 현재의 한 순간에 역사의 방향이 왔다갔다한다
기나긴 역사의 방향을 거쳐 어떻게 하든지 이만큼 연결시켜 온 한 점이 현재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하나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에 이 방향이 연결되느냐, 못 되느냐에 따라 생애노정이 엇바뀐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방향이 어떻게 틀어져 나가느냐? 한 순간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달라지고, 한 순간에 대하는 어떠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방향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순간의 한마디 말로 말미암아 방향이 거꾸로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순간에 부딪힌 하나의 문제로 말미암아 방향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또 오관으로 느끼는 모든 감정을 통해 가지고 그 방향의 첨단이 예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동쪽을 향해 섰는데 진짜 동쪽을 향해 섰느냐 할 때, 동쪽을 향해 섰다고는 하지만 진짜 동쪽에 서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쪽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을 그린 그 선의 중심을 향해서 서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동쪽 편에 섰다. 동편에 섰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동쪽 방향에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 있으니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방향이 반드시 목적을 향해 간다면 그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에 제일 가까운 지름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이 몰라서 그렇지,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분은 그 하나의 방향을 알아 가지고 꼬박꼬박 그 방향에 전후 좌우의 도수를 맞춰서 그곳으로 전진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기 미터기 같은 것을 볼 때, 그것을 진짜 영점에 맞게끔 조정해 가지고 좌로 몇 도가 됐는가, 우로 몇도가 됐는가, 상하관계가 어떻게 됐는가 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행로도 그와 같은 운명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나, 그러한 입장에 선 오늘, 그러한 입장에 선 이 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역사가 흥하고 망하는 운명길에 접어드는 것도 오늘에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가운데 어느 점에서 출발됩니다. 그 점은 오늘의 어떤 시간도 아니요, 어떤 분도 아니요, 어떤 초입니다. 순간입니다. 똑딱하는 그 순간에 역사적 방향이 왔다갔다합니다.
여러분의 몸에 병이 났다면, 병이 한꺼번에 와락 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의 한 점에서부터 원인이 되어 마이너스 방향으로, 혹은 왼쪽 방향으로, 혹은 내리닫이 방향으로 출발한 그 순간이 병이 나는 시초입니다. 그 점에서부터 병이 날 수 있는 환경이 가해지면 그것은 점점점점 내려가게 되어 그것을 다시 추어올리려면 우리 인간이 모든 생명을 기울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느냐?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 요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내가 사는 데는 뭘 하며 사느냐? 그저 밥이나 먹고, 아들딸 낳고, 그저 일상적 습관적인 행로를 더듬어 간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왔다 간 인간들과 마찬가지의 회전운동을 남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은 역사시대에 한 점을 잘라 놓은 존재, 모래가루와 같이 허공을 떠돌아 어떠한 인연도 갖지 못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그는 고독한 자요, 전체의 연합체로 되어 있는 조직사회에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만일 제멋대로 자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디 가서 붙었댔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기울어질 수도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장애도 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해도 될 수 있습니다. (68-208, 73.8.1)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표한 선봉에 선 나와 그 책임
나라는 존재는 어떤 체제 내의 연관적인 생명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수천 수만 대 선조들의 모든 생명의 요인을 연관시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많은 생명들의 모든 방향을 대표할 수 있는 현재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선조들이 거쳐온 전체의 방향을 총합한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표하여 선봉에 선 나가 잘하면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의 방향을 연장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조상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간 길을 몽땅 꺾어 버릴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와 선한 선조들의 공적을 완전히 영점으로 화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신중하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 보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생각하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행동하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습니다. 전부가 그러한 관계성을 지니고 생애의 노정을 가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여기에서 선하고 악한 사람이 결정됩니다. 과거에 선한 사람이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과거에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결정되느냐? 오늘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겁니다. 요 순간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고, 악한 사람도 결정됩니다. 오늘 이 엄연한 현실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입니다. 현실을 중심삼고 내가 책임진 입장에서 행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는 역사적 관계에 등장하는 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미래의 역사노정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보편타당한 운명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고, 대한민국 역사를 봐도 그렇고, 세계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렇고, 역사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섭리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와 같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가 잘 나왔다 해도 방향이 1도만 틀어져서 그것이 영원히 가게 되면 목적과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조정해야 됩니다. 매일같이 조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승패는 순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마다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언제 어느 때 악한 자리에, 혹은 실패의 자리에 부딪혀 파산할지 모릅니다. 이런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제 못 했으면 내일 하지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어제 못 했으면 반드시 과거는 그만큼 구덩이가 파이는 것입니다. 그걸 남기고 내일 잘하면 되지 몇 번 그렇게 해보라구요. 내일 잘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괜찮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을 그리면서 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68-210, 73.8.1)
세계 인류는 삼시대가 연결된 하나의 직선길을 가야 한다
현실의 한 순간이라는 것은 엄청나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위협보다도 더 무서운 내용이 있습니다. 천년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만년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오늘 현실 가운데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이렇게 가야 되겠다. 방향을 잘 맞추고 금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 하루의 선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 해야 됩니다. 혹은 한 달을 생활하게 될 때 반드시 요렇게 가야 되겠다 하며 금을 그어 놓고 살아야 됩니다. 그 금이 철저하고 틀림없고 완전한 금일수록 순간 순간을 연결하는 선이 완전하고 확실합니다. 그런 금을 그어 나가지 않고는 완전한 하루와 한 달을 남길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한 달을 남기지 못하면 거기에서 완전한 일년은 허사가 되는 것이요, 완전한 일년이 허사가 되는 날에는 영원한 이념도 허사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마다 책임 없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단체의 책임을 진다 하면 그 단체의 방향을 제시해야 됩니다. 어떤 가정을 책임졌다 하면 반드시 방향을 중심삼고 책임이 벌어지는 것이지, 방향도 없이 그저 함부로 하는데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관을 통해 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책임적 내용을 지니고 나서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책임자에게 책임추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시대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미래적으로 추궁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순간이 얼마나 엄청난 순간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이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대적인 물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은 시간권내에서 좌우됩니다. 그때의 방향 설정 여하에 따라 천태만상의 변형이, 변한 상태가 전개되게 마련입니다. (68-212, 73.8.1)
역사와 현재와 미래와 하나님이 원하는 길은 하나
지금 통일교회 식구들의 방향이 전부 하나다 이렇게 돼 있어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게 될 때 나는 저기 이층에 올라갈래. 사다리 가지고 뭘 해? 나는 그냥 올라갈래 하면 안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그냥 그대로 밟고 올라가야 됩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데 내 마음대로 가면 돼 하면 안 됩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조금만 치우치면 넘어집니다. 그럴 때에는 방향을 맞추고 한 발짝이라도 전후 좌우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면도날에 하나의 판자를 딱 올려 놓고 그 판자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한발짝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대번에 뒤뚱거립니다. 또 한 발짝 잘못 디뎌도 곤드라집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걸어가는 행로가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과거를 무시한 현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성현의 가르침이 여기까지 왔다. 요렇게 왔으니까, 지금 오는 중이니까, 이분이 가려고 하던 것이 요것이니까, 거기에 나는 맞춰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과거를 살펴야 합니다. 또 언제나 미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와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중심이 되려고 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누구든지 성공해서 내가 중심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를 통합한 하나의 중심선상에 서고 싶다는 말입니다. 각자에게는 그런 하나의 선이 있는데, 그 선이 어떤 사람은 길고 어떤 사람은 짧아서 세계 인구가 60억이면 60억 전부가 다릅니다. 그런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제멋대로 이러한 하나의 선을 중심삼고 아, 나는 내 인생관대로 간다 해서 별의별 각도의 금을 다 긋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역사가 원하는 길, 현재가 원하는 길, 미래가 원하는 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보면, 사정이나 인연에 얽매여 살고 있고, 또 관계를 지어 가지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사정이나 인연의 내용을 통틀어 보게 될 때, 이것을 어디에 맞춰야 되겠느냐? 아, 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 그 일에다 맞춰야 돼. 뜻이고 뭣이고, 일에다 맞춰야 돼라고 하면 그것은 벌써 펑크가 납니다. 어디 가서 한 대 들이맞게 됩니다. 역사시대의 방향과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반대에 해당하는 보응이 즉각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말을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나름의 방향입니다. 자기 나름의 삶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말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역사와 맞춰 해야 됩니다. 과거와 맞춰 해야 하고, 미래와 맞춰 해야 합니다. (68-214, 73.8.1)
끝날의 목적을 향해 오늘의 방향을 맞추어 나가야
개인의 미래보다도 가정의 미래가 멉니다. 개인의 완성시대, 이상시대가 온 다음에 가정의 이상시대가 오게 돼 있습니다. 가정의 이상보다도 종족의 이상시대는 더 멉니다. 종족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도 세계, 세계보다도 하나님의 이상세계가 멀리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맨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클수록 나중에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끝날을 표방해 거기에 맞추려고 합니다. 종교의 모든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전부 말세에 적합한 완성을 표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불신자(不信者)들이 종교를 보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종교인들은 그것을 참 멋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에다 방향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끝점과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 자기 멋대로 가는 사람들, 혹은 가정적 목적을 중심삼고 가는 사람들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들은 가정적 목적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뺑뺑 돌고 있지만, 종교인들은 비록 틀린 길일지라도 종착점을 바라보고, 나중을 바라보며 갑니다.
그러한 역사성을 지닌 종교는 역사가 깁니다. 민족의 역사보다 깁니다. 우리 가정의 살림살이보다도 긴 역사의 내용과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가는 것보다 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다리를 놓아 가려 할 때, 이런 길이 있으면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대목적을 향해서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것이요, 그런 사상이 있으면 역사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 될 것입니다. 그 사상권내에서 나라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개인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가정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국가가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세계가 움직일 수 있는 권도 거기서 벌어집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거기에 세계가 움직일 것 같습니까? 우리 가정 속에 세계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먼 거리의 목표를 향해서 오늘의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사랑하고, 미래를 사랑하고, 현재를 승리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끝날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성공을 바라더라도 당장에, 젊은 시절에 성공해 가지고 좋아하겠다는 사람은 소인이 됩니다. 일생을 거쳐, 일대를 다 투입해서 성공했다면 그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뜻이 있는 사람은 일대가 아니라 몇십 대를 거쳐서 내 일대에 안 되면 후대 몇십 대, 혹은 몇천 대를 통해서라도 이 뜻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몇천 대가 틀림없이 그 방향을 통해 나간 종족이 있다면, 또 그런 민족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집약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추천해서라도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적인 완성의 뜻을 세울 것입니다. (68-216, 73.8.1)
인과응보의 역사에 따라 섭리의 계대가 이루어진다
오늘 현재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출발했다가 나가자마자 돌변지사를 만날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다가 만나서 인연된 사람과 주고받고 행동한 것이 자기 일대에 치명적인 비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약속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날 경우 그 길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지사가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를 두고 보면 오늘 현재에는 관계가 없지만 역사시대의 조상으로부터 관계가 있어, 내 시대에 탕감의 결과를 맺으려는 인과응보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를 순간으로 만나 내 일생을 파탄시킨다 하더라도,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죽는 그 시간에 내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칼침을 맞아서 죽는 최후의 운명길에 서더라도 내가 죽는 순간에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죽는 날에는 함정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하는 공적인 욕심을 가지고 죽으면, 그의 대를 이어 그 방향을 따라갈 사람이 기필코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선조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후손이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런 선조를 통해 이 시대에 태어난 현재의 씨족은 그들이 관계맺을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향을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배턴을 이어받아 방향을 가려가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했으면 그 사람을 중심삼고 대를 이어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러한 사명을 책임져 대를 이어가다가 그 아들딸이 다시 그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아들딸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 아들딸이 없고, 있다고 해도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딸이 안 됐을 때는 할 수 없이 그 친척 가운데서 대를 이을 사람을 찾는 것이며, 만약 친척 가운데도 없을 때는 그 동네의 일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돈의 팔촌까지 연결시킬 것입니다. 문씨네 가문이면 박씨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고, 김씨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고, 허씨 아주머니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관계되어 있는 혈족이 그것을 이어받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친척 가운데서, 친척 가운데도 없을 때는 그 동네 사람 가운데서 그것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네 사람이 복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가 다 망하고 통일교회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어 통일교회가 다 망했는데 어디 떨거지라도 있는가 헤쳐 보자 했을 때, 반대하던 사람을 보고 좋다고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이 대를 잇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얄궂은 것입니다. (68-217, 73.8.1)
현재의 위치를 확정짓지 않고는 안심하고 갈 수 없다
우리 일생을 함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각도를 측정해야 됩니다. 탐색반이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러 갈 때는 반드시 경도 몇 도, 위도 몇 도 이렇게 각도를 재면서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그 방향을 몰랐다간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생도 각도를 측정해 가지고 몇 도 올라가고, 몇 도 내려가고, 몇 도 좌우로 간다는 것을 가릴 수 있는 현재의 위치를 확정짓지 앉고는 안심하고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좋다고 가더라도 즉각적으로 눈앞에 파탄될 운명이 다가오는데 안심이 됩니까?
사람들은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인생이 가는 행로가 어디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결론지어서 인생행로는 고해다라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해지만 알고 가는 고해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가는 고해일 때는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안심하고 시집 장가를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일체의 내용을 다시 규탄․규명해야 되겠습니다. 규탄․규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의의 인생행로로 적응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방향도 모르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가면 갈수록 가망이 없는 자리에서 가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 누구를 부르는가, 죽음을 향해서 비약을 하든가 초월을 하든가 해야 할 것입니다. 가망이 없으면 돌이켜 뒤로 돌아오든가, 출발을 다시 하든가 하는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 인생행로이기 때문에 과거의 수많은 뜻 있는 사람들, 성현현철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생애를 바치고 죽음의 경계선을 왕래하면서 싸웠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싸울 사람들이 나타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행로를 지나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마음껏 앉아 가지고 이러고저러할 여유가 없습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내가 통일교회의 선생님이지만, 선생님이 가는 길에 무슨 금을 그어 놨습니까? 그 길을 전부 더듬어 가야 합니다. 한번 이렇게 간다! 생각하고 갔다간 엄청난 결과가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과거와 조정을 하고 현재와 조정을 해서 미래에 직선 방향을 그려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모든 위험이 동반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 노정에 비참상이 있었다면 그 비참상이 재현되어 가지고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넘어가지 않고는 미래의 목적점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험천만한 개척의 행로를 더듬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제 한 가정을 책임졌다고 생각해 봤습니까? 내 가정은 틀림없이 이 세계의 인류가 갈 수 있는 표본적인 가정으로 가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되는 대로 살지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을 찾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담판을 하고 그분과 더불어 해결점을 지어, 오늘의 내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가, 현실을 확정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현실을 떠난 자리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행복이 아닙니다. 현실의 보장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이 과거의 결실로서 등장하는 행복의 기점이 되어야지, 과거의 결실이 아닌 현실은 이상적인 기점이었던 과거까지 부정할 수 있는 내용에 부딪히게 합니다. (68-219, 73.8.1)
조정은 역사적 표준점인 현실에서만 가능
역사의 결실을 현재에서 타진해야 합니다. 미래의 새로운 기원과 출발을 다짐해야 할 자리, 그러한 내용을 결정지어서 전진해야 할 자리가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은 역사적 표준점입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바랐던 역사적인 표준점이 돼야 합니다. 거기에는 직선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부터 사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와 과거는 연관성이 없습니다. 과거는 미래의 사회를 횡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또 미래는 과거의 모든 때가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부 다 점입니다. 나에게 전부 그 목적점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로부터 목적점을 지향해 확대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일의 희망이 더더욱 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정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합니다. 미래에 가서는 조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조정했다는 것도 안 됩니다. 언제나 현실입니다.과거와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거기서 한 발짝만 틀리게 되면, 자기 개인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족이 망합니다.
예수님이 4천년의 유대교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해 왔을 때, 4천년 역사의 방향은 예수님에게 집약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점이 틀려졌기 때문에 4천년 역사는 완전히 나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직행해야 할 텐데 난데없이 영적으로 갔습니다. 영육이 갈라졌으니까 영계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와서 그것을 묶어 놔야 됩니다. 거기에는 탕감이 벌어집니다. 너무 올라가서 그걸 끌어내리니 공연한 소모가 벌어지고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68-221, 73.8.1)
역사와 인류를 대표한 나는 역사적 결실을 이루어야
내가 기쁘다고 허허허 웃는다고 해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행복하다 해도 그 웃음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 행복이 미래와 관계를 지을 수 있는지, 내일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모르면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더 큰 화가 벌어집니다. 혼자 같으면 단축이나 하지요. 만약 혼자 망하게 되면 자기 혼자 망하겠다고 결심해서 혼자 망하면 되지만, 가정이 망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고, 아내 혹은 남편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통일교회의 탕감복귀라는 말이 참 고마운 말입니다. 탕감복귀하려면 과거에 실패했던 것을 그대로 현재에 전개하되 그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방향이 설정 안 됩니다. 그보다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조금 나으면 조금 나은 것만큼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역사상의 위인들의 업적을 현재의 우리는 이어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4대 성인이 남긴 공적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이 갈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을 인류를 대표해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이 멀었습니다. 개인이 가고, 종족이 가고, 국가가 가고, 세계가 가야 한다는 그 표준이 막연하지만 동쪽 방향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동쪽 방향으로 영점조정은 안 됐지만, 조금 기울어지든가, 조금 오른쪽으로 가든가 해서 치우치긴 치우쳤지만 동쪽으로 가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인들은 다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자기 혼자 간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관과 일치될 수 있는 목적을 그려 갔기 때문에, 거기에는 역사적인 인류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면 기독교의 나날이 있습니다. 혹은 기독교로서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왼쪽으로 치우쳤느냐 오른쪽으로 치우쳤느냐 하는 걸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을 그냥 따라가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맞추려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던 소원 기준과 일치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몰락해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할 수 없이 몰락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일치점을 확정지을 수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일치점이 출발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적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동강나 내 마음과 몸뚱이처럼 엇갈리면 안 됩니다. 직선을 그어야 하는 운명권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점에 놓여 있는데 나라는 현실적 중심존재를 들고 나서서 한 시대만 보고 사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방으로 가더라도 깨져 나갑니다.
오늘 나라는 것을 들고 나오려면 역사를 대표한 내가 돼야 합니다. 나라는 현실의 기반은 역사의 표준점이기 때문에, 역사의 초점을 대표했기 때문에, 역사의 대표의 결실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을 중심삼고도 그러하지만,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내가 역사적 결실의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대표의 자리에 섰다 할 수 있다면 그는 역사적 첨단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사적인 첨단에 선 대표적인 나다 하는 자각을 하는 것이 가치 설정의 한 기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함부로 되어서는 가치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를 대표한 나라 할 때, 과거의 역사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빛나는 가치를 플러스시킬 수 있는 나일 때는 나를 통해서 발전적인 미래가 계승되지만, 역사시대보다 못한 나일 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던 이상을 현실적인 이상관으로 가져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갖고 있는 관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책임질 수 있는 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죽더라도 통일교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 입장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푸줏간에 가면 평저울로 고기 무게를 잽니다. 평저울을 보면 가운데 왔다갔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물건을 놓으면 무게에 따라 움직입니다. 거기에 평점, 조정점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조정점입니다. 딴 데서 맞추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이 돼 있는 것이 인생의 노정을 걸어가는 현재의 입장이요, 현실의 입장이요, 순간의 입장입니다. 이 순간에 잘못하면 사탄편이 될 수 있고, 잘하면 하늘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도 완성의 한 때를 맞지 못한 것은 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상들이 실패한 것은 그 어떤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에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68-222, 73.8.1)
현재란 역사의 결실점, 시대의 중심점, 미래의 출발점이다
오늘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한 시대의 자리가 아닙니다. 3시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대표한 자리요, 미래를 연결하는 자리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리는 과거를 대표하고, 현재에는 이 세계가 들어가 있습니다.
현재는 인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세계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요, 이 세계를 대표한 중심점입니다. 여기에 가정을 대표한 중심점을 맞추었으면, 또 국가 중심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국가의 중심점을 맞추었으면, 또 세계의 중심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애당초 세계를 위한 중심점을 맞추어 놓으면 딴 것은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도 맞았고, 가정도 맞았고, 국가도 맞았고, 다 맞았기 때문에 그대로 가면 됩니다.
현재라는 것은 세계의 중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고 무엇이고 내 가정의 중심점이어야지 이러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의 중심점에 맞추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망합니다. 통일교회 중심점은 못 되더라도 세계 인류를 대표한 세계적인 중심점에 맞추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게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고생을 하고 매일같이 희생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생이나 고생이 아니라 죽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그렇게 내모는 것이 정당한 지도방법입니다. 빠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당한 지도방법입니다. 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또 현실은 역사의 결실점이요, 시대의 중심점이요,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현실은 미래에 대한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암만 잘했더라도 여기서 내가 한마디 잘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무서운 것입니다. 3시대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실패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요, 3시대의 사탄의 화살이 집중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이런 점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네가 역사적인 대표의 자리에 섰느냐 할 때 못 섰다 하면 야, 이놈아! 합니다. 지옥 뚜껑을 열고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현실적인 중심존재로 섰느냐 할 때, 못 섰다면 지옥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복귀될 수 없습니다. 복귀완성의 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완성의 인을 찍는 자리는 한 자리입니다. 미래의 출발점이 없게 되면, 천국이상이고 무엇이고 없습니다. (68-225, 73.8.1)
현실이란 삼시대를 위한 책임을 해야 할 중심점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아, 선조들이 나를 맞추고 있구나! 이러면서 잘 맞춰 나가면 선조들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열립니다. 굴을 뚫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곳에 고속도로가 있으면 전부 고속도로로 가지요? 그러니까 그곳이 현실의 중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서부터 희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가도 가도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시대를 위한 책임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있습니다. 내가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쉬고 손을 올리고 다리로 걷고 할 때는 눈과 손과 발을 주시해야 합니다. 반드시 역사의 방향에 맞추어서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쉬고 손을 올리고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통일교회 목적관은 뚜렷합니다. 개인복귀 완성, 가정복귀 완성, 종족복귀 완성, 민족복귀 완성, 국가복귀 완성, 세계복귀 완성, 천주복귀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해방은 물론 사랑문제까지 딱 결론지어 놓았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무정한 길입니다. 동정도 없고 의리도 없는 길입니다. 틀리면 용서가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공법에 어긋나게 되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나라의 암적인 존재로 남습니다. 역사적 규탄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역사를 두고 미래를 두고 3시대를 거쳐서 평가하게 돼 있습니다. 성인이나 의인도 지나고 나야 안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그때는 모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밥 먹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요, 활동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인데, 지나고 보니까 역사적 방향에 맞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인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범인(凡人)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대조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역사를 대표한 자리에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인류가 가야 할 중심적인 자리를 올바로 깨끗이 닦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미래의 후손들 앞에 십자가라든가 수난길을 안 남기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자식들은 다 곱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 우리 아들딸! 하는데, 그럴 거 없습니다. 우리 아들딸도 울타리 밖의 호랑이 앞에 집어던져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역사의 방향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도 잘못 맞추는 날에는 깨지게 됩니다. 국가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잘못 맞추어 가게 되면 비운에 사라집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도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의 개척자의 입장에서, 현재의 자리에서 기준을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앞선 자리에서 현재의 기준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에 속해 있는 여러분은 조정하지 않더라도 과거를 보장할 수 있고, 현재를 보장할 수 있고, 미래에 치우치지 않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앞서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내린 방향 설정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맞춰 오라고 타이어를 바꾸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이게 뭐야, 이게? 하는 것은 망조입니다. 그건 망할 종자밖에 안 됩니다. 망해야 됩니다. 안 망한다고 보장하더라도 그때는 하늘이 뭉텅 길을 막아 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길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운명에도 엄연히 현실과 관계를 맺고 뒤넘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잘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라! 현실이라는 것은 3시대를 결정지어야 할 중심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밥 숟가락 한 번 드는 것이 패자의 서러운 길을 가게 할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거기에서 망운의 징조가 싹틀 수도 있고, 하루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자기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도 용서 못 합니다. 자기가 풀고 시정하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68-226, 73.8.1)
5.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
복귀의 노정이란
원래는 구주라는 명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상담할 수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요, 복귀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한 번으로 그만일 텐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3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인 구약시대를 거쳤고, 장성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앞으로는 새로이 오시는 주님을 표본으로 하여 완성시대인 성약시대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아담 한 사람을 재창조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이 아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아담 가정에서 노아 가정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노아 시대에서 아브라함 시대로, 아브라함 시대에서 모세 시대로, 모세 시대에서 예수님 시대로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서 전개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복귀의 길을 하나님이 더듬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1600년을 수고하여 아담 가정 대신 노아 가정을 불러 세웠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하겠다는 것을 예고할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기필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억울한 내적인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노아는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을 일편단심으로, 촌시라도 잊지 않는 신념 가운데서 지켜 나왔습니다.
노아가 복귀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여 제2의 인간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120년 동안 악한 세계에서 모진 바람과 모진 시련과 모진 환경에 부딪혀도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떠한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노아는 아담과 같이 천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의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배를 만드는 그 기간은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덧없이 세월이 흘러갈 적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노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주위의 뭐 120년 후에 인류를 심판해? 하는 조롱과 비소를 받아 억울함과 분함이 휘몰아치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그 약속만은 버리지 않고, 일념의 신앙심으로 그 환경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즉 노아의 아내와 자식까지도 노아를 부인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120년 동안 그 일만 하고 다녔으니 그의 아내와 자식이 뭐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노아의 아내, 노아의 자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120년 동안 그러한 일들을 하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도 노아를 원망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노아를 원망했습니다. 원래는 믿어주기를 바라서 그 가정을 세웠고, 믿어주기를 바라서 그 사명을 맡긴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일치단결하여 노아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노아는 그러한 자기 가정을 이끌고 자유와 소망의 한 날, 하나님과 약속한 그 날을 위해서 참고 참으면서 120년을 지내 온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했는가 하는 그 내정적인 심정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믿고 나왔습니다. 자신보다도 불쌍한 자리에 계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몰아침을 받고, 시달림을 받는 노아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비통함이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통할 수 없는 종의 입장인 노아였기에, 하나님은 그 내적인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그를 대했습니다. (15-329, 65.12.7)
중심인물들을 통해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
노아는 40일 홍수심판에서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그 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 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는 깨져 나갔습니다.
온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긴 노아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뒤넘이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에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이었던 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또 노아 가정에서 섭리의 뜻이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아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우기 위해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 마음으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오늘날 그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을 세워서 뜻을 해결지으려고 했지만 그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다시 그 뜻은 연장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이라는 슬픈 명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이루려던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당장에 아브라함 일족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망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또 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브라함 자신은 몰랐습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고, 하란 땅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올 때, 이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고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원수의 시험을 받더라도, 또다시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라반의 가정 환경 속에서 전부를 승리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여러 가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발붙일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애급 400년 고역기간을 거쳐 60만 대중을 이끌고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과 대결하도록 함으로써 승리한 터 위에 천국이념을 세우려 했습니다.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가나안 땅을 거치고, 역대의 처량하고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예수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개인․가정․종족․민족이 한꺼번에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점쟁이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예물을 줄 때, 온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소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사람으로 태어날 줄 몰랐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어느 누가 버선 한 켤레라도 마련해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다 해서 옷 한 가지 마련해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쌍한 자리에 오시면 안 되겠다고 초막 대신 거룩한 장소를 예비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늘의 때는 지나가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4천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한을 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약속의 주인공으로 보낸 메시아를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람도 몰랐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한 사람도 몰랐느냐는 말입니다. (15-331, 65.12.7)
예수님의 소망과 원통함
이스라엘의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은 선민권을 자랑할 줄만 알았을 뿐, 저들을 세우신 것이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책임이요, 사명인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에 이 국가, 이 민족이 반대했습니다. 사귀 들렸다고 하고, 바알세불의 괴수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적인 비운입니까?
그들은 빌라도와 짝하여 유대의 나사렛 예수, 그는 가짜이니 그를 잡아다가 죽이시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죽었습니까? 온 이스라엘인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피살당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상에 천국을 완성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나를 세우신 본연의 목적은 천국을 완성하는 것인데, 이제 이것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세(事勢)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죽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미 사태는 틀렸다,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니 할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죽음을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습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내가 영계를 통하고,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해서 안 사실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세의 기독교 앞에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선생님 마음속에서는 불이 납니다. 원통하고 원통한 십자가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죽지 않고 살았다면 예수님이 구주가 못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구주로 만들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거친 다음에 만왕의 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성도들은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왕이 필요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 주권 밑에서 하늘나라의 치리를 받지 못한 것이 분하고 원통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 시간에 오른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왼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왜 사도들이 오른편 강도처럼, 왼편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달렸습니까? 원통 중의 원통한 일입니다.
낙원의 선봉자는 누구입니까? 오른편 강도입니다. 사도들이 아닙니다. 내가 사도들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생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물어 보니 꼼짝달싹 못 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내다니! 같이 죽어야지.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품고 당신이 소원했던 본래의 천국권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에 끝날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복귀된 천국이 어디 있느뇨? 하며 찾아오십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천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지지리 고생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15-333, 65.12.7)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느누구든지 그 민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대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이후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유리고객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시달리고 여러 민족에게 쫓김받는 처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잡아죽였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든지 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참부모요,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부모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죄악 된 부모를 죽였어도 목을 잘라야 할 텐데, 천륜을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인류의 소망을 대표하여 오신 참부모를 잡아 죽였으니,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년간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통하여 말세의 한 때를 대비해서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 되겠습니까? 천국이라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뜻입니다. 소망 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체 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치리자(治理者)의 대표인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 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년간 준비한 소원성사의 한 날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는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벼락을 내려 쓸어 버려도 시원찮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하고 간곡하게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조건을 생각했기에, 그 민족을 쓸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고 정성들여 놓은 4천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또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오십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민족․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는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제1 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한 주권과 국가를 이룸으로써 이것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룰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여 이것이 깨졌기 때문에 제2차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민족․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면 모두 천국에 데려갈 줄 압니까?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천번 만번 저버릴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한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다가 그때를 맞이하여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로부터 배척받고 피 흘려서,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년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서,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15-335, 65.12.7)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
이제 기독교인들은 지상천국을 이루려 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 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한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 하시며 한탄하셨으니, 하나님이 보낸 황태자가 그런 처량한 사정에 처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워서 찾고자 한 참된 개인이 없었습니다. 가정은 많았으나 참된 가정은 없었습니다. 참된 종족과 참된 민족과 참된 나라가 없었습니다. 감람산 골짜기에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참담해하던 예수님의 심정에는 참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한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하늘땅을 치리(治理)하고 천지를 주관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제자들이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메시아의 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베드로가 메시아의 수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잘 믿던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은 어디에 갔습니까? 12제자 가운데는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 출신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잘 믿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지옥행 열차를 탔습니다. 그들이 천국 갈 수 있었겠습니까? 바알신의 직속 제자가 되었기에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래도 제일 하층인 어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낙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던 그 주님이 신랑입니까?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니 2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셔야 합니다. 오는 데는 한을 풀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사도의 자리에 서야 했던 것같이, 세계에 널려 있는 대학자들이 오시는 주님을 주여 오시옵소서 하고 먼저 맞이해야 합니다.
교법사나 제사장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던 입장에서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오셨다면, 그 예수님을 얼마나 잘 모셨겠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목수 조수 노릇이나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목수의 조수 노릇을 해야 했던 예수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나는 그 목수 말만 들어도 창자가 뒤틀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30여 평생을 가슴에 한을 품고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4천년의 역사를 탕감짓고 넘어가는 그 길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마저 책임을 못 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라고 했으며, 또 무리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50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15-337, 65.12.7)
예수님의 한
한이 사무치고 사무쳤던 예수님이 몇 살 때 집을 나간 줄 아십니까? 그는 요셉 가정에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일을 하면서도 요셉의 직계 아들딸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명절 때가 되어도 새 옷 한번 입어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입장에 있었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기르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이 의붓자식이었기 때문에 싫증이 났습니다. 명절이 되더라도 마음놓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심정의 자리를 갖지 못한 서글픔과 억울함에, 예수님은 부모야 있든 말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제사장이 머물고 있는 성전 가까이에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민의 구세주, 황태자로 오셨던 메시아에게 십자가가 웬 말입니까?
나는 통일교회의 책임을 지고 나오면서 그 누구보다 핍박을 당하고 이 민족 앞에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며 핍박하고 밟고 천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밑으로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참이고, 누가 허위인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참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온갖 욕설을 다 들어 왔기에 민족을 저주하고 교회를 저주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알고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과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나왔습니다.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쉽게 죽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통일의 용사들은 남은 복귀의 노정을 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 태어났지만, 만약 이 스승이 미국에 태어났다면 이런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 중 어느 누가 밥 한 그릇을 주었습니까? 어느 누가 옷 한 벌을 주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려던 예수님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느냐 말입니다. 서글프고 원통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면 비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제자 중에서도 참된 제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용사들은 곡절 많은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하나님이 소망했던 천국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참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가정이 되어야 하고, 참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개인과 가정을 찾아왔지만 그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또다시 세계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나도 가야겠습니다. 그 길이 험준하다고, 그 길에 죽음이 있고 슬픈 곡절이 있다 해서 멈출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가야 되겠으니, 아버지가 어려우면 나도 어렵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슬프면 나도 슬프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의 이념입니다. 우리 나라 이 조그마한 삼천리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 민족 앞에 이색적인 운동을 일으켜 세계에 새로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우리의 이념권내에 흡수되게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서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이 스승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이 뜻이 정녕 아버지께서 세우신 뜻임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또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아버지요 내 사정이 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세우신 전통을 상속받고 그 아버지의 역사와 심정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쉬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는 안식의 한 날을 노래해 온 교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쉬지 말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며 전도한 것처럼, 통일교회 여러분은 사망의 어둠이 휩쓰는 이 천지 가운데서도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속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15-339, 65.12.7)
통일용사의 발걸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애쓴 수고에 비하면, 우리가 한 자녀를 세우기 위해서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6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복귀의 역사를 재창조의 섭리로서 이끄시며 한 많은 곡절의 노정을 더듬어 온 것을 생각하며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 앞에 주지 못해 눈물 흘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 가지고 오는데, 그런 정성이 있거든 삼천만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늘땅 전체를 위해서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선생님은 굶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굶었고, 욕을 먹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먹었고, 매를 맞는 데도 선생님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또 노동 현장에 가서도 선생님은 일등 노동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서 잘먹는 것만이 잘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인 환경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이요, 통일역사가 지금까지 남겨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사람은 하늘의 역적이 되고, 이 역사를 빛내는 사람은 하늘의 충신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루고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삼천리반도와 온 지구상에 드높이 울려퍼질 그날을 위해서 행진하고 또 투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인데 쉴 새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쉴 새가 없습니다. 가고 또 가고, 자다가도 눈만 뜨면 깜짝 놀라 일어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통일신도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는 통일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신 천국을 이루어드리고, 예수님과 성신이 못 다 푼 한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간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천국을 못 이룬 복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을 알고, 이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우리가 쉴 새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죽더라도 전력을 다하여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3년노정을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는 누구나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별의별 힘든 일이 많습니다. 수많은 시험에 견뎌야 하며, 여비 없이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걸어가야 합니다. 나이 어린 처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욕(羞辱)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세운 일편단심, 뜻을 이루기 위해선 자지 않고 배를 곯으며 모험을 무릅쓰고 가야 합니다.
이런 사정을 전개시킨 이 스승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서도 누구를 대해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서 쓰러지고 희생하더라도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발판을 닦는 용사에게 어찌 원수의 화살이 없겠으며, 어찌 원수가 자신을 포위하지 않는다고 보겠습니까? 그러나 스승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민족을 위함이요, 세계를 위함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비록 그 길이 멀다 할지라도 지름길을 찾아 즐거이 가야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의 발걸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벽을 넘고 경계선을 넘어, 삼천리반도와 이 민족 앞에 나서야 합니다. 지금 한국 실정을 보면, 길거리의 청년들이라도 잡아다가 통일이념을 교육시켜야 됩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피의 가치를 인류와 땅과 하늘이 알아줍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발판을 타고 오십니다. 개인적인 제물시대, 가정적인 제물시대, 종족적인 제물시대, 민족적인 제물시대, 세계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서 섭리해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통일신도들은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치고 민족적인 제물의 책임을 다하여 세계적인 제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될 수 있으면 제일 말단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남들은 오뉴월 삼복 더위에 피서를 가고, 또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 되어 놀러 가더라도, 여러분은 고향에 가서 손발이 부르트는 한이 있더라도 농사를 배워야 합니다. 농사꾼이 되어야 합니다. 혹은 달구지를 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은 이 민족의 친구가 되고, 이 나라의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점점 섭리의 발전도상 위에 설 수 있습니다.
3년노정 가운데 한이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3년노정이 지나면 세계가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우리 손아귀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3년노정의 고비를 넘어가다 지치는 식구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친 자들을 바라보고 자기도 지칠까봐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지치지 말고 끝까지 증거하며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탄과의 승부를 놓고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로에서 싸우고 계시는데,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할 우리가 지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폭탄과 마찬가지입니다. 터져서 내 자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지더라도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15-341, 65.12.7)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길
우리에게는 안 가려야 안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 길은 이 나라의 장관과, 이 나라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방에서 불쌍한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을 피해 가는 추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활동무대에서 이러한 사상과 신념을 갖고 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우리 조상과 우리 후손들이 참소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수천만 대의 후손들은 아담을 많이 비판해 왔습니다. 천륜의 법도를 유린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천사장인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와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하나님의 주관을 받겠다는 신념으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선 용사들입니다.
이 강산에 공산당이 웬 말입니까? 우리의 통일이념으로 수십만 정병이 무장만 하면 공산주의는 순식간에 깨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에게 지워진 사명과, 우리들이 가야 할 이 노정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흘러가도 우리의 책임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안식하더라도 우리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필승의 한 날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바라는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손 앞에 참소를 받는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후손과 민족을 걸어놓고, 세계를 걸어놓고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데, 여러분은 그 앞 단계의 기준까지 닦아 놓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죽는 것이 하늘의 필연적인 법도입니다.
최후에 하늘을 빛내어, 민족과 세계가 우리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은 모든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불을 질러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선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렇듯 여러분에게는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나니,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가야 할 복귀의 노정에서 많은 고충을 느낄 것입니다. 공적인 책임자의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날 선생님이 직접 뛰던 전통을 상속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몸소 민족을 위해 선생님이 생명을 걸고 뛰고 싶지만, 여러분을 대신 세워 분부하니 선생님 대신자로서 열심히 움직여주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책임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선 공분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뜻을 위해 나선 이념의 형제를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밥을 먹고 배가 부를 적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배불리 먹지만, 우리 형제들은 밥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구나 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을 잘 때도 어떻게 잠을 자고 있는지 염려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인 골고다를 넘어 승리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갈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천주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늘도 가고 내일도 또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혹은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동기가 반대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억천만세가 걸리더라도 가야 하고, 우리의 후손 수천만 대를 통해서라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15-344, 65.12.7)
6. 최후의 한 때와 나
섭리의 때와 나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아무리 영웅이라도 때를 맞이하지 못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때가 준비된 터전 위에 인재가 나타나면 그 인재와 때가 합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때가 문제가 됩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일을 시작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됩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의 일을 시작합니다. 또 저녁이 되면 저녁식사를 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규칙적인 어떠한 때를 중심삼고 새로이 변천하는 환경을 맞이해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을 보더라도 소년시대가 있는가 하면 청년시대가 있고, 청년시대가 지나가면 장년시대, 장년시대가 지나가면 노년시대가 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 일생이라는 것이 언제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소년시대나 청년시대나 장년시대나 노년시대나 때를 잘못 맞이하게 될 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그러나 소년시대나 청년시대나 장년시대나 노년시대의 때를 잘 맞이하여 의의 있게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가장 귀한 일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잘못 맞이하면 거기에서 실패의 동기가 시작되는 것이요, 때를 잘 맞이하면 성공이 출발된다는 사실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57-287, 72.6.5)
소망의 한 때와 비운의 한 때
복귀섭리를 회상해 볼 때, 복귀라는 말은 본래 창조본연의 인간이 소망하던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명사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땅도 비통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가 필요 없는 본연의 세계가 있었음이 사실이라면 타락한 세계를 복귀해야 할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섭리를 완성하는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에는 복귀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본연의 세계에서 아담을 중심삼고 소망한 것은 오늘날 복귀해야 할 세상에서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한 전적인 소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현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요소를 외적 실체로 전개시켜 하나님이 소망하는 원대한 희망과 인간의 소망이 일치된 한 때를 맞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소망의 한 때를 연결하기 위해 지음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아담이 타락하기 직전까지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타락한 그날부터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타락한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불우한 환경에 보냈다가 그 자식을 잃어버리고 나서, 당하는 아픈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일을 체험할 수 있는 경지를 모색해 보는 것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슬퍼했던 내용을 아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가를 모릅니다. 자기가 부모를 따르고 부모를 좋아하는 기준으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식의 차원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차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는 창조할 수 없다는 절대적 기준을 세워 놓고 지었던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한 순간부터는 인간 스스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인 철칙으로 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상의 한 때를 바랐지만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비운의 한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비운의 역사를 엮어 온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으로 인한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마음속에서 빼 버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요, 인류도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어떻게 청산하여 본연의 위치를 다시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영원한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 문제요,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통함을 어떻게 빼 버릴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29-292, 70.3.12)
비통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한 때는 언제인가
인간은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가 있고, 친지가 있기에 슬픈 환경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 받을수 있고, 그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어떤 환경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더 분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위로하면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더 비통함을 겪고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님 자신이요, 끝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 맺혀 있는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정을 품고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6천년 전의 슬픔도 역사시대권내에 영원히 남습니다. 만약 스스로를 제물로 드렸다는 체험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은 시간권의 내용이든지 생활권의 내용이든지 간에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폭과 넓이가 커져 추앙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무한한 근원과 인연이 맺어집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하여 그런 내용을 갖고 실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하신 슬픔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 마음을 품은 채로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타락한 환경 가운데서 헤매며,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도리어 자신을 잊고 부모의 입장에서 수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잊을 수 없는 최후의 한 때, 타락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최후의 한 때를 가져야만 합니다. 또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한 때와 환경을 갖지 못한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심정적인 곡절을 가진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하기 위해서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소망하던 이상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타락한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본연의 심정으로 직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에든지 직접 부딪칠 수 있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 소망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기준 이상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최후의 한 때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쫓겨났던 비운의 근원을 뽑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9-294, 70.3.12)
아담 가정과 노아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역사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흘러 나왔습니다. 그 복귀역사 과정에는 수많은 곡절이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중심삼고 아담이 실수한 것을 복귀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암담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만도 슬픈 일인데 희망을 가지고 잃어버린 자녀의 기준을 찾기 위해 소망의 터를 닦고 키워 복귀의 한 때를 바라본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니 하나님은 2차의 복귀의 소망마저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가인은 하나님의 내심에 거듭 못자국을 남기게 됐습니다. 인간 조상이 하나님 앞에 슬픔의 기원자인 것만도 복통할 일인데, 아벨이 처참한 형상으로 살해당함으로써 또다시 하나님께 못자국을 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중된 원한을 품고 나왔습니다.
노아를 중심삼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환경적으로 어떤 사람도 자기를 따라올 수 없는 외로운 자리로 내몰렸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든 특정한 사람이든 타락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까지 몰린 것입니다.
노아는 그렇게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둘이 있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혼자만의 자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는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벨도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고, 노아도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아담 해와 두 사람을 창조했지만 섭리는 남자를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남자가 이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복귀해 나오는 과정에서 노아가 찾아가는 자리도 역시 하나님과 노아 둘만이 대할 수 있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 경지를 어떻게 끌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노아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지시하는 목표와 일체 될 수 있는 인연을 세워 절대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을 갖고 하나님이 현현된 실체와 같은 입장에서 주체인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120년 동안 절대적인 신앙 기준을 세워주기를 바라고 노아를 몰아냈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도 아니요 10년도 아닌 120년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노아에게 찾아와 참고 극복하라고 언제나 말씀해준 것도 아닙니다. 한번 믿었으면 그 절개를 영원히 지킬 줄 알아야 했고, 한번 믿었으면 아무리 환경이 요동하더라도 그 환경을 넘어갈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노아는 120년 기간을 지난 후에 홍수심판을 맞았습니다. 노아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개인만으로는 하나님의 소원인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복귀되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인 아벨이 필요했듯이, 노아의 아들이 아버지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타락한 부자의 인연을 복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연의 세계로 들어갈 자세를 갖추지 못합니다. 자식이 구원섭리의 출발을 행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 일을 아버지가 해야 되는데 타락했기 때문에 자식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 가정에서 부자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노아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거치게 하여 40일 홍수심판을 했던 것입니다. 심판 이후 이 땅에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만 있고 노아를 반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들어야 하는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함이 불신함으로써 제2차적인 복귀도상에서 또다시 하나님께 슬픔을 가중시켜드리게 되었습니다. (29-295, 70.3.12)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을 중심삼은 섭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세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생활환경에서 자라 많은 체험을 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과정의 내정적 슬픔을 전부 품고 와서 그 품은 한을 풀기 위해 아브라함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수중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을 빼내 고향 산천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해 애급노정을 걷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순간은 아담이 타락한 후 2천년 기간의 역경을 거쳐온 하나님에게 있어서 복귀할 수 있는 소망의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데 실수함으로써 제3차적인 복귀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다시 못을 박는 원한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수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 모세를 세웠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반석을 2타 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실 때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 터를 닦게 하셨고, 요셉 가정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동방박사를 보낸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한 나라의 대표자로 오시는 메시아 앞에 이방의 대표자로서 굴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것은 3대 천사장이 하나님과 아담에게 굴복하지 못한 것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국경을 넘어 이런 원칙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국가 기준이 세계적 판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지만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예물이 아니었습니다. 조건물로서의 예물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의 실체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때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뜻이 일치되어 유대나라를 중심삼고 해롯 왕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장에 섰더라면 일차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정하여 국경을 넘게 한 동방박사들이 의인이 태어난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고 그들을 인도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세상적인 소원에 따라 한 때의 중간적인 사명자로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불행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일치되었더라면 국가를 넘어 천국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사명을 다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환경을 갖추어 나갔더라면 예수님은 복귀의 한 때를 맞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수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으로부터 떠났고 요셉 가정은 그를 불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그도 책임 못 함으로 써 예수님에게 교회적인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국가적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때 요셉 가정에서 가정적인 기준이 일치되었더라면 세례 요한은 자동적으로 복귀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종족기준을 대표한 것과 마찬가지 입장이기 때문에 요셉 가정이 일치되어 나왔다면 세례 요한은 자연히 환경을 넘어 수습되었을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도 세례 요한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29-297, 70.3.12)
예수님의 죽음으로 승리의 한 때를 맞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
가정적 기준을 잃어버린 예수님이 교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나선 것이 공생애의 첫걸음이었으며, 40일 금식 직후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가정적인 기준을 수습하기 위해 이런 제1차적인 노정이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교회적인 기반이 무너지더라도 대제사장 가야바 같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기반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례 요한적 사명을 대신하여 그 기대를 갖추고 나갔다면, 예수님이 국가적인 기준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가정적 기준을 상실하고 교회적 기준을 상실해 버린 예수님은 국가적 기준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국가적 기준을 중심삼고 4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온 하나님의 뜻이 진전될 수 없는 입장이 되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4천년 만에 승리의 한 때를 맞이하여 가슴에 박혀 있던 원한의 못을 뽑아내기 위해 소망의 아들을 세우셨으나 인간들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유대나라를 준비하셨고, 유대교를 준비하셨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 요셉 가정을 준비하셨고, 이방에서 세 동방박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같이 모든 환경이 준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의 대표자들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비통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이상의 슬픔을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복귀하기 위한 터전을 모색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온 하나님이 예수님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제2의 복귀를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하니, 그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비참하셨던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만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국가를 넘지 못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넘어 세계로 가야 하는 기독교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교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천당이란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온 신앙자들이나, 혹은 시대 시대마다 기독교를 지도하며 복귀섭리를 책임져 나온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소원이었지, 믿고 뜻을 이루어드리겠다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구원의 목적을 세워 나오는 배후에는 예수님이 국가적인 혹은 세계적인 판도를 연결시키며 책임지고 나왔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을 외국에 파송하여 자신들이 개인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특별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이방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복귀섭리를 담당한 특별한 나라면 나라일수록 수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복귀섭리 도상에서 귀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국가로부터 세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땅 위에 맺힌 실체적인 탕감의 기준을 세계적으로 벌여 놓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뜻을 전통적으로 상속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난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후를 남겨야만 섭리의 중심민족이 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민족이 국가로 가는 과정에 어떤 종파적인 입장에서 몰려 희생당하는 것도, 국가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비참한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29-299, 70.3.12)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는 방법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시대시대마다 최후의 비장한 한 때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벨이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슬픈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되겠고, 하나님의 맥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아면 노아에 대한 역사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현실에 현현된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계는 시간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몇천 년 전도 오늘과 같은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을 거친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내용이라든가, 모세를 중심한 내용이라든가, 예수님을 중심한 내용 등이 시대적으로 볼 때 역사적인 거리가 있지만, 그것을 환경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역사의 한계권내에 있는 우리에게는 몇천년 전이지만 하늘에서는 하루와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순간이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원한의 순간입니다. 그들의 타락으로 복귀라는 한 맺힌 명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복귀라는 원한의 명사가 필요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찾아나온 것이 제1차적 복귀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인은 하나님께 한의 못자국을 남겼습니다. 함도 그랬고, 헌제에 실수한 아브라함도 그랬고, 반석 2타 한 모세도 그랬습니다. 또 동방박사와 요셉 가정이 그랬고, 세례 요한과 유대나라의 제사장들이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어떤 종교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어떠한 가정, 어떠한 개인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아무리 힘을 내고 아무리 소망을 다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무엇 하나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입장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불신을 해소해 버리고 스스로 해결짓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조건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단계에 희망의 조건을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부터 희망의 조건을 세워 복귀섭리를 추진해 나가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끝날이 되어 뜻을 대하는 특별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나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믿기까지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맺힌 사연, 즉 6천년 동안 불신한 환경의 내용을 전부다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날이 되면 될수록 외적으로 종교적인 기반이 넓어져 하나님을 모시는 기반이 넓어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개인이 믿던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우기 위한 시련을 거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기독교가 세계적인 판도를 갖춘 환경일 텐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배후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자리는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뜻을 대해 충성하는 모습을 붙안고 당신의 사연을 통고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슬픔을 남기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낮은 자리에서 복귀의 심정을 넓혀 나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심정적으로 지금까지 저끄러졌던 6천년의 원한을 풀고 다시금 심정적인 기반에서 아벨을 지도할 수 있는 이상의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택한 사람을 시련도상에 내놓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로소 `너는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조건, 즉 `너는 이제 떨어지더라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남겨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끝날이 되면 될수록 그러한 입장에서 특별한 자녀들을 대해 나오십니다. (29-301, 70.3.12)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
선생님도 일신의 기준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졌으면 예수님이 태어날 때 동방박사를 보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도 보내져야 할 게 아닙니까? 요셉과 같은 가정에 보내져야 되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역시 왔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배신했던 역사적인 후손들을 통한 환경에서 복귀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환경에서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은 예수님보다 더 비참한 운명에 처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협조를 받지 않고 이런 길을 고독단신으로 걸어왔습니다. 일대일의 입장을 갖추지 않고는 복귀의 중심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중심이 결정되어야 비로소 지상에 상대적 여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결정되지 않고는 상대적 환경이라든가 혹은 국가라든가 세계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서 배우고 있는 복귀원리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샘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물줄기가 합하여 큰 강을 이루어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흐름이 아니라 강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대해로부터 거꾸로 올라가서 샘줄기를 찾아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포부와 희망이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입장에 서고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 서서 최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절망의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크다면 최고로 큰 자리요, 작다면 지극히 작은 자리까지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통틀어 뒤집어 놓을 수 없습니다. 원리의 배후에는 이런 곡절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슬픔을 풀 수 있는 한 때, 복귀의 한을 풀 수 있는 한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아벨을 찾아왔지만 그 소망을 저버렸고, 3차에 있어서 노아를 중심삼고,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전체를 수습하기 위해 섭리했지만 하나님은 복귀의 그 한 때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죽음길을 가리지 않고 수난길에서 피의 대가를 치르고 영계에 가서까지 해원성사의 한 날을 향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리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대할 수 없는 비통한 입장에서 2천년의 역사를 지내 오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복귀의 종교는 재림사상을 중심삼고 어느 특정한 나라나 민족을 세울 때까지 그 배후에 그 누구도 모르는 수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9-303, 70.3.12)
재림주의 자격과 그 사명
이러한 사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크고 엄청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비참한 통곡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을 붙들고 같이 몸부림치면서 통곡할 수 있는 자리를 갖추지 않으면 아담이 하나님께 박은 한의 못을 아담과 더불어 뺄 수 없습니다. 아벨이 못을 박았으면 그 아벨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통곡할 수 있어야 그 못을 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 복귀가 원칙이라 할진대, 아벨의 입장에서 가인을 부둥켜안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같이 눈물 흘리지 않으면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인 아벨이 가야 할 복귀의 길입니다.
노아가 실패한 것을 해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노아 대신 하늘의 전체적인 책임을 진 아벨의 입장이 되어 실수한 노아를 가인적 자리에 세워 놓고 그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는 한 때를 갖지 않고는 노아의 슬픔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실수한 함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이 실수한 한 때를 중심삼고 아브라함을 붙들고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는 한 길을 모색하지 않고는 탕감복귀를 못 하는 것입니다. 모세면 모세가 실패한 것을 중심삼고 아벨적인 입장에서 모세를 붙들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제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 예수님이면 예수님이 실패했던 내용을 중심삼고 그들 대신자 입장에서 그들을 붙들고 통곡하며 하늘의 사조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이 나오지 않고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가슴속에 못박혀 있던 서글픔을 뽑아드릴 도리가 없습니다.
또 기독교단의 희생한 무리들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회개하여 그 사연을 통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지 않고는 기독교를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오셔야 할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가 아담과 더불어, 아벨과 더불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나아가 예수님과 더불어, 또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역사과정에서 희생한 수많은 순교의 역사와 더불어 눈물 흘리게 될 때, 그 눈물은 타락의 눈물이 아니라 희망의 눈물입니다. 이 희망의 눈물로써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를 붙들고 대신 울어줄 수 있는 아들이 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더듬어 온 것이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있게 된 배후의 역사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한 때를 잃어버렸던 것을 탕감하기 위해 걸어간 예수님의 일생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역사의 전체적인 한 때를 몽땅 대신할 수 있는 생애를 거치는 것이 오신 그분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진 분은 지금까지 실수했던 하늘땅의 모든 사연을 얽어매서 해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들과 예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종교 전체를 대신하여 판가리를 지어 승리의 결정권을 갖고 와야만 지상에 현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지상에 현현하는 것이 아담의 실체이기 때문에다시 오시는 제3 아담은 하나님의 내정적인 슬픔을 품고 오셔야만 됩니다. 그분은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 두 세계의 마음을 몽땅 가져서 그 중 서글픈 마음을 뽑아 버리고 기쁜 마음을 재현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 아담을 창조한 것이 하나님의 내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바라보던 한스러운 지금까지의 역사를 전부 잊고 다시 아담을 창조할 수 있는 소망의 한 때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바로 지상천국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두 세계, 즉 슬픈 세계와 소망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오시는 주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그분의 운명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시는 주님은 역대의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땅의 인연을 모두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눈물로써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을 갖추고 오시고, 천상의 인연이 아닌 지상의 인연을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이상 슬퍼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몽땅 재현될 수 있는 곳은 그분이 계시는 지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성적인 뜻을 몽땅 성취할 곳도 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기쁨의 두 세계에서 사명을 다해야 되고, 영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되고, 지금까지 역사를 대신할 수 없었던 입장에서 이제는 역사를 대신하는 입장이 되어 현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시는 주님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니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귀의 노정을 담당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통일교회에 있는 것이요,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스승에게 있습니다. (29-305, 70.3.12)
최후의 한 때에 문제가 되는 것
여러분이 나를 선생님으로 대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담도 그럴 것이고, 노아도 모세도 예수님도 그럴 것이며, 지금까지 왔다 간 역대의 수많은 선인들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으로 인해 선조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영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생님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영인들도 마찬가지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한 때에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이 품은 슬픔이 무엇이고 역사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선조들이 품었던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을 중심삼고 국가를 대하고 세계를 대해서 탕감할 수 있는 한 때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탕감할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 가정이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고, 여러분 개인은 선생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인 아벨 탕감복귀는 실체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개인은 가인 입장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실체를 복귀해야 되고, 여러분 가정은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실체를 복귀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반드시 중심가정인 아벨 가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자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2천년간의 이스라엘 민족의 탕감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한을 품은 비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은 창끝에 찔리고 말발굽에 밟혀 쓰러졌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실패자들의 경우를 볼 때, 여러분은 일신의 평화를 구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잘살려 하고 일신의 향락을 구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최후의 한 때는 왔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문제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지면 망합니다. 하나 못 되면 망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를 담당한 책임자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복귀섭리를 담당한 절대적인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거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홀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선생님의 명령이 절대적입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법도입니다.
명령을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길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16절) 하는 시시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뜻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같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곧 내 뜻입니다.
자식을 죽을 자리에 내세울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나를 죽을 자리에 내세우는 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몇천 배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서 활동해야 합니다.
이런 기점에 놓여 있는 이 최후의 한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절대적인 심정을 가져야 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은 절대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인 심정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29-309, 70.3.12)
지금의 때는 타락권내(墮落圈內)가 아니고 완성권입니다.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에서 절대로 필요한 것은 신앙과 실체와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되어 같이 넘어가게 되면 대번에 완성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원칙적 기반 위에서 전부 하늘에 귀결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빚을 많이 졌다는 것을 알고, 일시에 한 곳에 투입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일시에 완성권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4-344, 7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