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
제 5권 구원 역사편
제 2장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소목차
1.분립섭리와 장자복귀섭리역사
2. 하나님이 택한 선민 이스라엘
3. 중심인물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
4. 우리가 가야 할 야곱의 본보기노정
5. 뿌리된 자의 책임
6. 혈통복귀와 예수님의 탄생
1.분립섭리와 장자복귀섭리역사
타락의 결과와 가인 아벨을 중심한 분립섭리
우리는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만약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죄 없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자녀가 되어 버렸습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에게만 주관(主管)을 받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인간의 주관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가 사탄과 불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사탄이 인간세계의 주관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탄이 타락한 세계에 대하여 그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본래의 주인이므로, 결국 하나님과 사탄은 함께 인간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담을 둘로 갈라서 하나님편과 사탄편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리적 관점에서 인간을 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과 외적 존재로서의 피조물(被造物)로 분립하는 역사(役事)를 하였습니다. 즉 타락한 아담과 해와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을 통하여 분립한 것입니다.
장자인 가인을 천사장의 입장에 세우고, 차자인 아벨을 타락 전의 죄 없는 아담의 입장에 세운 것입니다.
장자인 가인은 해와가 비원리적 상대인 천사장과 관계를 맺은 첫째 번 타락의 표시체입니다. 해와와 천사장과의 관계는 비원리적인 관계입니다. 해와와 아담과의 관계는 원리적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번 타락의 표시체인 아벨을 하나님편에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차자인 아벨은 아담과 해와 사이에 맺어진 둘째 번 타락의 표시체입니다.
본래의 명령 계통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천사장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아벨에게로, 아벨로부터 가인에게로 명령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섭리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 위치를 복귀함으로써 잃어버린 원리를 되찾으려 하였습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의 혈통이 바뀌었습니다. 사탄의 피가 인류의 혈통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복귀는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차자인 아벨이 가인으로부터 장자권(長子權)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타락은 원점이 되는 곳인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비롯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귀도 또한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곳이 악의 원점이 되고 출발점이 되었으므로, 복귀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 두 형제에 의하여 장자권을 복귀하는 섭리를 하엿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아벨의 위치로 내려가야 하며, 아벨은 가인의 위치, 즉 장남의 위치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 행위는 아담과 해와 때의 타락행위를 반복한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복귀된 입장은커녕 다시 천사가 아담을 주관한 입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55-109, 72.4.1)
분립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뜻
아들딸의 소유권을 사탄에게 빼앗기게 된 하나님은 어디에서 어떤 방법을 통해 아들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냥은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립역사(分立役事)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과의 소유권 결정을 위한 분립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제물(祭物)의 역사입니다. 사탄과 인간의 혈연관계로 소유권을 사탄이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소유권을 빼앗아오기 위해 조건물로 제시한 것이 제물입니다. 이것이 창조본연의 아들딸을 찾기 위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사연이었고, 하나님은 이제까지 그러한 섭리를 전개해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타락행위로 제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인데, 비록 타락으로 인해서 아담 해와가 사탄의 소유가 되었지만, 원리적인 입장에서 본래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하여 사탄이 소유하게 된 아담 해와지만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으로서 그들을 소유할 수 있는 부모의 입장에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도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주인 것을 알기 때문에 전적으로 자기의 것이라고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첫째 아들은 사탄편에 세우는 대신 둘째 아들을 하나님편으로 세워 놓고, 인간 스스로 조건물을 세움으로써 소유권을 결정짓게 하는 분립의 역사, 곧 제물의 역사를 펼쳐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째 아들인 가인을 사탄편으로, 둘째인 아벨은 하나님편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이는 해와의 타락 경로에 의하여 비원리적 상대(非原理的相對)였던 천사장과 원리적 상대였던 아담과의 관계를 구분하는 것으로, 가인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표시체이므로 사탄편에, 아벨은 원리적인 사랑의 표시체이므로 하늘편에 세우고 분립의 섭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110-215, 80.11.18)
하나님이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느냐?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처럼 분립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내용에서부터 불확실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출발한 기독교로서는 절대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립역사의 근본적이고 원칙적인 섭리내용과 일치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복귀섭리(復歸攝理)해 온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켜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아벨의 제물만 받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던가?
사탄에게 자식의 소유권을 빼앗겨 아들이 없는 입장에서 아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아벨을 하나님편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연히 아벨의 제물은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았느냐?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받기는 받겠다. 그러나 너는 아벨을 통해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됐을까요?
본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인 천사장의 주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주인인 아담과 종인 천사장의 자리가 전도(顚倒)되고 말았습니다.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었으니 아담이 그 본연의 위치와 권위를 되찾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는 본래의 위치와 상태로 복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탕감복귀(蕩減復歸)란 술어가 있습니다. 본연의 위치와 상태로 복귀하려면 반드시 거기에 필요한 조건을 세워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蕩減)이라고 하며, 이처럼 타락한 인간이 탕감조건을 세워서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 곧 타락하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통일교회에서는 탕감복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본래 주인이던 아담이 종인 천사장의 종의 자리로 떨어진 것이 타락이었으니, 타락하기 전의 본래 상태와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뜻맞는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천사장편에 세웠던 가인이 하나님편에 세웠던 아벨을 중심으로 모시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야 했던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통해서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당시에 가인이 정말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뜻맞게 제물을 드렸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다시 연장되지 않아도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비참한 역사가 확대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중심삼고 제물을 드려, 3대(三代) 이내로 가정적인 탕감조건을 세워 나갔더라면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그 당시에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110-217, 80.11.18)
장자의 권위를 회복해야 했던 아벨의 입장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기 때문에 부모인 그들 스스로가 복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하나되어 부모인 아담과 해와를 구원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놓아야 했던 것인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자식들인 장자와 차자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담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에서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왜 하나가 되어야 하느냐? 해와의 타락경로에 의해서 볼 때 가인은 비원리적 사랑의 표시체요 아벨은 원리적 사랑의 표시체이므로, 태어날 때부터 장자인 가인은 사탄편이고 차자인 아벨은 하늘편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원리적인 입장에서는 장자가 차자를 주관할 수 있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서 장자가 천사장의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가인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벨을 통해서 가야 합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주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탄편에 서 있는 장자를 하늘편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차자를 세워서 장자를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이 하나된 이후에야 비로소 그 하나된 것을 기반으로 부모인 아담과 해와가 하나되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섭리에서 메시아사상이 발원(發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그러한 분립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전개되어 나왔으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말할 수 없는 곡절과 사연이 뒤엉킨 한(恨)의 길이 되었고, 기독교가 걸어온 길도 애달픈 곡절의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장자의 기업(基業)을 차자가 강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자연굴복시켜 가지고 본래의 장자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는 자리가 성립되지 않고서는 하늘길로 갈 수 없고, 복귀섭리를 완성할 수 없다는 하늘의 숨겨진 비밀을 아직까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 가정을 복귀시키기 위해서 하나님편인 아벨을 통해 사탄편인 가인을 자연굴복시켜 사탄에게 빼앗긴 장자의 권위를 회복시키고자 했으나,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천적인 복귀역사가 연장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노아 가정에서는 셈과 함, 이삭 가정에서는 에서와 야곱을 통한 분립역사를 펴 나오게 되었습니다. (110-218, 80.11.18)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야곱
하나님은 아담 가정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펴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중에서 차자인 이삭이 하나님편에 서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삭을 중심삼고 분립역사가 전개되는데, 이삭의 부인인 리브가는 해와가 남편과 하늘을 속였던 것처럼 남편인 이삭과 장자인 에서를 속이고 야곱의 편을 들게 됩니다. 리브가가 남편과 에서를 속이고 야곱을 도와주게 된 이 섭리적인 사연 역시 기독교 역사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왜 리브가가 그런 일을 행했을까요? 하나님의 계대(繼代)를 사탄으로부터 빼앗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 섭리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의 한(恨)을 해원성사시켜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계대를 이어받을 수 있는 기대(基臺)를 닦도록 택함받은 자리가 바로 리브가의 자리였습니다. 리브가는 그런 자기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편의 야곱이 사탄편인 에서를 자연굴복시킴으로써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계대를 이어받게 해야 하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던 리브가였습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배가 고파 돌아왔을 때, 야곱은 형에게 팥죽과 떡을 주면서 장자의 기업(基業)을 인수받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전통을 이어받고 그것을 천추만대에 상속시켜줘야 할 자리가 바로 장자의 위치요 장자의 기업이었습니다. 그러한 장자의 자리를 에서는 배고프다고 동생에게 팔아먹었지만 야곱은 형과는 달리 장자의 기업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잘 알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받은 아브라함 가정의 혈통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생명까지도 내걸어놓고 형으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이어받았습니다. 야곱이 사냥하러 갔다가 돌아온 형에게 팥죽과 떡을 주고는 그 조건으로 장자의 기업을 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내가 형님이 되었다라는 입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차자의 자리에서 장자의 자리로 전환시키지 않고서는 사탄을 굴복시킬 수 없고, 타락한 세계를 복귀시킬 수 없다는 필연적인 하늘의 섭리의 요구에 의해서 야곱은 지혜롭게 형 에서를 자연굴복시켰고, 자기 남편과 하나님을 속여 타락했던 해와의 입장을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리브가도 남편과 아들을 속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야곱과 리브가의 편을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까지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왜 형과 아버지를 속인 야곱을 편들고 사랑하고 그를 축복해주었는지 그 까닭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누구도 풀 수 없었던 미지(未知)의 내용을 만든 기반을 통해서 기독교의 이상완성(理想完成)을 추구해 나온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였습니다. (110-219, 80.11.18)
하나님의 대를 이은 야곱의 21년노정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서 하나님의 대(代)를 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하나님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곱 스스로가 그 기반을 닦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을 때, 야곱은 고향을 떠나 하란 땅으로 피신해 가지고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1년간 수난의 종살이를 하면서 고역을 치르게 됩니다. 야곱은 21년간의 고난을 극복하면서 축복받은 족속을 편성하게 됩니다. 야곱은 레아를 취하고, 라헬을 취하고, 재물을 취할 때까지 그 모진 수난을 당하면서도 본향 땅을 하나님의 것으로 복귀시키겠다는 한 가지 생각만은 결코 변치 않고 계속 갖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 하는 형님을 자연굴복시킬 수 있는 한 날을 고대하면서 에서 이상으로 자신의 실력을 길렀고, 기반을 닦기에 온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왔을 때 야곱은 형 에서에게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내게는 여인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며, 단지 내게 필요한 것은 형님이 나를 환영하여 옛날 장자의 기업을 축복으로써 팔았던 사실을 공인해주는 것뿐이다 하는 것이 야곱의 기도였고, 야곱의 입장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야곱은 모든 재물을 바치고, 또 에서가 그런 야곱을 환영함으로써 결국 야곱을 중심삼고 형 에서도 축복받은 이스라엘 선민권(選民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이렇게 해서 다시 대를 이을 수 있었고, 복귀의 한 때, 영원한 해원과 해방의 한 날을 소망하며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0-220, 80.11.18)
베레스와 세라를 통한 복중 장자복귀섭리
야곱의 아들 유다는 엘, 오난, 셀라 등 3형제를 두었습니다. 유다의 큰아들 엘은 다말과 결혼했습니다. 다말이 큰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큰아들이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 후 다말은 둘째 아들인 오난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그 둘째도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유다 가정은 대(代)가 끊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 3대에 걸쳐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축복의 섭리가 유다 때에 와서 무위로 돌아가게 될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농사터에 가는 유다를 창녀의 모양을 해 가지고 유혹해 관계를 맺고 아기를 낳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부터 유다의 하나님으로까지 하나님의 축복의 대를 잇는 것이 다말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초월하는 입장에서 생사화복(生死禍福)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축복의 대를 잇기 위한 모험을 할 수 있었던 다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쌍둥이를 뱄습니다. 이들을 낳을 때 먼저 손 하나가 나오므로 산파가 이 아이가 먼저 나온 놈이니 형이니라 하고 붉은 실(紅絲)을 손에 매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손을 안으로 다시 끌어들이는 새 그의 아우가 나오자 이 밀치고 나온 놈! 하고 말하였고, 그래서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짓게 되었고, 뒤따라 손에 붉은 실을 맨 형이 나오자 그의 이름을 세라라고 지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장자인 세라를 제쳐 두고 차자인 베레스를 먼저 출생시키는 섭리를 하였겠느냐? 리브가가 복중에서 형제가 싸우기에 하나님에게 하나님이여, 이 두 애가 복중에서 싸우니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대답하길 네 복중에는 두 나라가 있음이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말의 복중에서도 두 형제가 싸웠습니다. 다말이 기도하니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한 말씀처럼 네 복중에 두 나라가 있음이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니라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섭리적인 내용을 통해서 복중에서부터 장자의 기업을 차자가 빼앗아 나오는 역사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무슨 곡절로 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냐?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풀지 못한 역사의 비밀이었습니다. (110-222, 80.11.18)
하나님은 왜 복중섭리를 해야 했는가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빼앗은 섭리역사는 야곱의 나이 30, 40대의 장년시대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두고 볼 때, 복중시절(腹中時節)부터 분립역사(分立役事)를 통해 장자(長子)의 기업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탄의 피가 인간의 핏줄 속에 남아 있다는 조건이 되어 사탄이 참소할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복중에 있을 때부터 분립역사를 해 나왔던 것입니다.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해 복중에서부터 하나님편과 사탄편의 두 세계로 갈라졌던 것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는 혈통을 통해서 당신의 축복의 계대를 이루어 놓기 위해서는 복중에서부터 두 세계의 통일적 기반을 닦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복귀섭리에 있어 탕감조건을 세워 나가는 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중에서부터 섭리를 전개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과부가 아기를 가졌거나 음행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는 돌에 맞아 죽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 속에서도 다말은 하나님의 한 맺힌 장자의 기업을 복귀시켜드려야 하는 것이 자기의 처지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목숨을 내어놓지 않으면 감히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말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면 어떤 기도를 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여, 당신의 축복권(祝福圈)을 흠모하고 또 당신의 축복의 대를 잇기 위해서 제가 이러는 것이오니, 하나님이여! 용서하십시오. 제가 비록 천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이 불륜의 소행을 터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는 기반이 유다가(家)에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저는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하는 기도를 다말은 틀림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절실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다말은 생사를 개의치 않고 오직 하나님의 한 맺힌 뜻을 이뤄드리기 위해 그 죽음의 상황까지도 극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다말의 뜻 대한 충절은 실로 놀라운 것이지만, 바로 이러한 자리에서만이 섭리역사를 펴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사정이었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다말에게 축복을 해주게 되었고, 유다지파의 출발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다말의 혈통을 통해서 비로소 복중에서부터 가인과 아벨이 실패한 노정을 탕감하고, 오랫동안 고대해 온 승리적 기반을 이 땅 위에 다질 수가 있었으며, 하나님이 원하고 예정하였던 본래의 장자권(長子權)을 이 땅 위에서 전환시킴으로써 다말의 혈통에서 만왕의 왕 예수님이 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의 새로운 역사 편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했더라면 예수님이 비록 복중에서 태어나더라도 사탄이 참소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 설명한 대로 복중에서부터 승리했다는 승리적 조건을 세워 놓지 못하고는 예수님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말의 복중에서부터 장자와 차자의 관념을 모두 통합하고 하나님의 장자 차자의 권위를 되찾은 기반 위에서 이스라엘의 출현이 이뤄질 수 있었으며, 또 그런 승리적 기반을 이룬 다말의 혈통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0-221, 80.11.18)
메시아는 언제 오실 수 있나
여러분은 혹시 그런 터전 위에서라면 즉각적으로 메시아가 오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탄세계는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이스라엘은 종족편성권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탄세계는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종족권인 이스라엘이 대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천년 역사를 연장시켜 가면서, 빨리 크고 자라라 하는 축복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런 축복을 바탕으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 편성을 바라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장돼 온 역사가 2천년이었고, 그 역사 속에 유대교를 중심삼은 이스라엘 국가 형성이 벌어지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아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메시아는 어떤 분이냐? 메시아는 하나님의 첫아들로 태어나는 분입니다. 독생자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내용도 모르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독생자라는 의미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첫 번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타락으로 더럽혀진 핏줄을 맑힌 이후에 비로소 독생자의 권위를 갖추어 가지고 오시는 분이며, 사탄이 더럽혀 놓은 것을 탕감조건을 세워 탕감하고 완전히 해방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주고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으니, 이러한 입장에서 독생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기독교 역사 2천년 가운데 그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근본 문제를 명료하게 해결하는 데서부터 기독교의 진로가 결정되는 것인데,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핵심을 바로 알 때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의 기독교가 인류 앞에 모든 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망적인 종교로 나타나려면 우선 기독교의 근본원칙에서부터 바른 해결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전통입니다.
메시아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니만큼 사탄으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피를 맑히는 탕감조건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탄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독생자로서 이 땅 위에 올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당시의 이스라엘에 올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밝혔듯이 이스라엘이 민족 편성을 거친 이후에라야 메시아가 올 수 있었습니다. 곧 국가를 대표해서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아벨권(圈)인 동시에 하나님의 장자권(長子權)을 가지고 오신 분이 메시아였습니다. (110-223, 80.11.18)
2. 하나님이 택한 선민 이스라엘
야곱을 고생시킨 하나님의 뜻
창세기에는 야곱이 하늘을 대신하여 모진 수고의 노정을 거치며 시험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그 시험과정에서 자기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선민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그 뜻을 막으려는 천사와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래서 승리하였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선민권내에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온갖 역경과 싸워 승리하였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명사로 남아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역사적인 생명을 대신하였던 명사요, 하늘과 땅을 복귀하기 위한, 아담부터 야곱까지의 2천년 역사를 종결지어줄 수 있는 승리의 명사입니다. 또 하나님이 야곱을 세워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하게 될 때, 하나님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반면 슬픔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수천년 동안 수고하며 섭리한 것은 야곱의 조상인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내려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다시 찾아야 했는데, 잃어버린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찾는 역사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서러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축복해주는 하나님에게는 이런 서러운 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말씀을 내려준 것은, 야곱 일대에만 허락한 말씀이 아니었고, 전 창조의 이념과 이상을 대신하였던 말씀이었으며, 하나님의 전체 심정이 이 한마디에 어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반의 집에 가서 수십년 동안 수고하기에 지친 야곱, 하나님이 허락한 가나안 땅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생애노정을 거쳐온 야곱은 이삭의 손을 들어 축복해주신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마당에서 재물을 포함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에돔 땅의 에서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간 고향은 자기 일대에 행복을 안겨주는 본향이 못 되었고, 기쁨의 자리가 못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형을 찾아가면서도 염려하고 근심해야 할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는 야곱 일신만이 겪어야 했던 사정이 아니라 온 인류가 걸어야 할 노정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드는 그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놓여 있고 얍복강이 가로놓여 있어, 허락한 축복의 땅을 앞에 놓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했던 사정은 선조들이 남겨놓은 사정이요, 천륜의 섭리를 경영하는 아버지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야곱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야곱 일대에만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나온 역사노정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 나타났던 모든 우리의 선지 선열들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둠의 장벽을 앞에 놓고 싸움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손길을 통해 축복해준 하나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권고하던 하나님이 어찌하여 야곱이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해주지 못하고, 또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천륜의 뜻을 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늘 앞에 호소하는 야곱에게 권고의 말씀은 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천사를 보내어 야곱을 치게 하는 이러한 비정한 환경이 벌어지게 하였던가!
말할 수 없는 사정,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애달픈 곡절의 심정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허락한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야곱의 길에는 광야의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는 노정에도 이러한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야곱이 걸은 노정을 통해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이러한 환경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사람 하나를 택해 세우는 것도 물론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지만, 배후의 사탄을 밀어낼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한 섭리의 뜻이기에,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과 사탄만이 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곡절의 담을 인간을 통해서 헐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헐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에게 무리한 행동을 하늘은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3-333, 58.2.9)
야곱이 받은 이스라엘의 내용
야곱에게는 축복받은 그 날부터 에서가 있는 고향 땅에 돌아갈 때까지 기쁨의 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는 하늘과 땅을 걸어놓고 하나의 제물의 입장에서 이것을 판결지을 때까지 수심의 생애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책임지고 나아갈 때에는, 야곱과 같이 원수의 세계에도 찾아가야 하고, 어려운 환경과 홀로 싸우는 싸움의 노정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노정에 선 야곱이 지쳐서 쓰러졌던들 그에게는 이스라엘이란 명사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통한 축복의 은사가 야곱과는 관계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늘이 이삭의 손길을 통해 내리신 축복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고난과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불붙는 심정을 갖고 하늘을 대해 충성했기에, 얍복강가에 나타난 천사와의 씨름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야곱은 하늘이 허락한 말씀을 중심삼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모진 싸움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인 하늘의 정병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고하는가? 우리의 선조인 아담 해와가 소망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끝까지 그 말씀을 지켜 나가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담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인물로 하늘 앞에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된 야곱, 하늘의 시련을 받는 입장에 있었던 야곱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팔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싸워 승리한 후에야 이스라엘이란 축복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민의 승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은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씀을 중심삼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런 입장에서 말씀을 중심삼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철야를 하고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야곱은 사탄의 시험을 받아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참소하지 못할 정도로 믿을 수 있고, 그 말씀을 중심삼고 싸울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을 드러내기 위해 야곱에게 천사를 보내어 밤새도록 씨름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한 인간으로서 천사를 문제없이 물리치기 위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에게 부여된 그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품고 싸웠습니다. 이러한 야곱 앞에 사탄은 감히 참소의 조건을 제시할 수 없었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승리가 얍복강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늘은 제2 시험의 대상인 에서를 감동시켜 야곱 앞에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스라엘이란 이름과, 야곱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터전은 야곱 일대만 축복의 대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통해 개인적인 이스라엘이 시작되고 야곱을 통해서 가정적인 이스라엘이 시작되어, 민족․국가․세계적인 이스라엘을 형성하기 위한 이스라엘 이름이요, 이스라엘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야곱의 후손들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느끼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후손들은 야곱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까지 미쳐진 축복을 오로지 자기들 것으로만 믿고 행동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택함을 입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 이 땅 위에 그 종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3-336, 58.2.9)
모세가 걸은 고난의 노정
야곱은 하란에서 가정을 형성하여 승리해 나왔지만, 또 넘어야 할 고개, 즉 얍복강가에서의 천사와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야곱의 후손들은 몰랐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애급에 들어가 4백년간 바로의 품에서 민족적인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수습하여 옛날 야곱으로부터 약속받은 가나안 땅을 회복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 일대에 조성한 승리적 이스라엘의 발판과 같은 민족적인 승리의 발판을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갖추어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지칠 대로 지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한 발판을 원수의 나라에서 세워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단결하여 민족적인 하늘의 시험과정을 통과하여야 할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민족을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하늘은 모세를 세워 민족을 대표하여 바로 궁중에서 40년 동안 준비시켰고, 미디안 목자생활 40년의 노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옛날 얍복강가에서 이루었던 그 축복을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재수습하기 위하여 모세는 야곱과 같은 민족적인 노정을 걷기 위해 광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대신 받고 하란광야를 찾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는 동족끼리 하나되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으며, 또 민족이 이방사람 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자 그 이방민족에 대항하여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세의 뒤를 따라 애급 민족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오히려 모세를 몰아내는 입장에 섰는데, 이것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기의 고향을 떠났던 것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또 야곱이 축복받아야 할 가정을 떠나 사탄 가정으로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축복받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남겨놓고 미디안 광야생활 40년노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광야를 향해 떠났던 사실은 모세 일신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런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닦아놓은 승리의 발판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발판을 민족적으로 다시 닦아야 할 책임감을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낀 모세였던 것입니다. 원수의 품에서 고역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도하던 모세, 하루 한 날 한 시간이라도 고역의 노정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어 본 적이 없는 모세의 심정을 여러분은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것입니다.
목자로서 광야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는 자기의 사정이 비참했지만, 자기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고 애급땅에서 원수에게 시달리면서 수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던 모세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외로운 사정과 심정이 하늘에 사무쳤고, 모세가 하늘을 위하여 염려하고 선민을 위하는 대표적인 형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바로의 궁중으로 파송시켰습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에서를 무서워하여 21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수고하고 난 후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에서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노정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도 야곱과 같이 어려운 노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3대 이적을 보여주면서 말씀을 대신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세워 하늘이 가라 하는 바로 궁중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세의 가는 길은 하나님이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잠자리에 든 모세를 죽이려 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것도 역시 야곱이 걸어간 것과 같은 노정이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환도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싸웠던 그 사정을 통하여야 할 모세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세도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입장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시험을 무난히 넘은 후에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만나 하나님과 민족을 대신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제단을 쌓게 되었습니다. (3-338, 58.2.9)
민족에 대한 모세의 사랑
이스라엘 민족이 포악한 바로의 마수(魔手)에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4백년, 마음대로 농락하며 피살을 빨아먹기에 급급했던 바로의 학정 아래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백년 기간은 지쳐 쓰러지는 기간이요, 낙망하여 하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요, 민족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시련이 심하면 심할수록, 부딪치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만은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역경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민족적인 싸움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며, 축복받은 나라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애국심이 우러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모세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바로 궁중 생활 속에서 뜻을 세우려던 1차 계획에 실패한 후 가나안 복귀를 생각하면서 몇천만 번이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인 것을 알았고,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혈족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 사탄에게 농락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화스러운 바로의 궁중에서도 가나안 복귀의 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그는 멀리 본토의 자기 나라를 그리워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고초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자기의 호화스러운 생활과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무쳤던 모세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 양떼를 몰 적에도 그는 바로 치하의 애급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양떼를 불러 모아 우리로 몰아넣게 될 적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마음의 신념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런 경지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스라엘을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몰랐으나 그는 미디안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기나긴 시련 속에서도 지치지 않았고, 어떤 억센 환경 속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소원하는 뜻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마침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모세는 숱한 싸움의 노정에서도 하나님이 민족과 같이하는 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이스라엘 민족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꿈에도 하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배신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지가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마음만은 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모세가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는 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바로와 수차례의 싸움을 거듭한 후에 애급 민족을 굴복시키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죽든지 살든지 그들의 소원이 곧 모세의 소원이요, 모세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가는 길에 모진 핍박과 갖은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모세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 또한 자기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13-178, 64.3.15)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책임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나선 모세,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천지는 변할지언정 당신의 약속은 변할 수 없다고 한 말씀을 믿고 나선 모세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시험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야곱이 에서에게서 받은 반대와 같은 바로 궁중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잘 알고 있겠지만, 야곱이 열 번 속은 것을 탕감하는 10재앙을 애급에 내려서 바로를 굴복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제2차로 민족적인 제단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서러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수로 인해서 느낀 서러움이 아니요, 또 하나님에게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수들이 악하여서 느낀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따랐던 이스라엘 민족의 제단이 무너진 데 대해 느낀 하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60만 대중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모세에게는 또 다른 시련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홍해노정과 광야노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개인적으로 걷던 시련의 광야노정을 민족적으로 거쳐야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손을 들면 자기들도 손을 들어야 하고, 모세가 앉으면 자기들도 앉아야 하고, 모세가 가면 그들도 가야 했습니다. 즉 60만 대중이 전부 제2의 모세가 되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대신해야 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바로의 궁중에서 끌어내줄 때는 감사하며 자신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알았고, 철석같은 약속이 남아 있으니 자신들을 가나안 땅까지 무사히 인도해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3-340, 58.2.9)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진 이유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었던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선민을 위하여 절개심을 갖고 싸워 나오던 모세의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던들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을 걸어놓고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축복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소원은 민족을 대표한 모세와 그 민족이 하나되는 것이었는데, 둘이 갈라지니 민족을 대표한 모세도 깨졌고, 민족을 지도하던 모세가 깨짐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도 깨졌습니다.
그러면 광야에 나와서 배가 고프다 할 때는 메추라기를 먹이고 만나를 내려 먹이던 하나님이 어찌하여 아말렉 족속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게 하였던가? 천륜의 뜻을 반역한 인간이었기에 인간들이 천륜의 뜻을 찾아 나가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도 반대의 입장에서 쳐야 할 섭리적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말렉 족속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할 모세가 죽었고, 죽지 않아야 할 민족도 망해 버린 것입니다. 이때에 모세에게는 민족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모세 자신의 잘못은 없었지만 불신한 민족을 대표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40일 동안 속죄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자격이 있다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애달파하고 있을 때에 60만 대중이 그 산을 둘러싸고 잠을 자지 않고 먹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우리의 지도자 모세를 내려 보내주시옵소서������라고 기도에 힘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굶주리고 기도하여야 할 사정은 자기 일신 때문이 아니라 민족 때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은 꿈도 안 꾸고 있었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던 것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당하였는데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선도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민족을 이끌었던들, 그들은 어려운 입장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고 편안한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이 민족을 농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을 우리의 선조들이 걸었습니다. (3-341, 58.2.9)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4백년 동안 애급에서 시련을 거치게 한 것은 새로운 가나안 천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급노정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는데,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쓰러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는 그날부터 만사가 형통하여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복귀의 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국가를 찾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하늘땅을 찾기 위해서는 천적인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편에 서서 10재앙을 내릴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당당히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인데 그들은 해야 할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한 자리에 서기만을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그들의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게 될 때 불평하였고, 가는 걸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른 뜻과 모세를 세워서 인도하는 뜻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장도(壯途)에서 부딪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13-177, 64.3.15)
시험과 시련의 의미
이리하여 하나님은 다시금 모세를 대신할 수 있는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워서 2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성전이념을 실현해 놓고 성전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되지 못하는 민족은 때가 오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승리를 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7족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세운 목적도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민족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애급에서 장자를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쳐서 정복하라는 것이 사울 왕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민족적인 크나큰 사명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기준, 사적인 기준에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사울 왕 때 세우려 했던 성전 이상은 다윗 왕, 솔로몬 왕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이 성전이상은 본래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통일왕국시대 말기에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즉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남조 유대 2지파로 갈라져서 서로 싸웠습니다. (13-177, 64.3.15)
애초에 피조만물은 말씀을 중심삼고 여섯 기간을 통하여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복귀의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가게 될 때에도 반드시 6수의 과정을 걸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 하는 시험, 즉 천사장 대신 아담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6세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말씀을 잘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즉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이 뜻을 세계적으로 전파해야 할 때에 이르자 민족을 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가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이 민족이 다시 말씀을 배반하느냐 배반하지 않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배반했던 민족이기에 하늘을 대신하여 이 민족이 새로운 6수의 출발고개를 넘게 될 때는, 사탄의 공격과 내리침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시켜 이스라엘 민족을 점령하게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준 말씀을 붙들고 모세가 광야를 헤매면서도 하나님을 위하고 민족을 사랑하던 그 심정을 품고 원수의 나라인 바벨론에 가서 끝까지 싸워 말씀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민족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깨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중심삼고 제2차 민족적인 말씀의 기준을 복귀하여야 할 역사적인 노정에 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 된 절개를 품고 있었다면 비록 바벨론에 잡혀갔을지라도 모세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 그들을 이끌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가 지난 후에 어떠한 형태가 벌어졌습니까? 뜻이 있어 야곱이 에서의 직계를 무시하고, 모세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무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뜻이 있어서 에서 입장의 말씀인 구약을 무시하고 나서게 되었을 때, 환영하여야 할 에서의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사망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시험하던 천사장 형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5백년 전에는 신약성경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즉 인본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문예부흥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삼은 봉건사회가 근본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주권이 깨져 나가고, 프랑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아비뇽의 포로기간을 거쳐야 하는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당시에 형성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제2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새로운 사명을 짊어진 기독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기독교를 세계적으로 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교황은 하늘 앞에 회개해야 했고, 하나님이 세운 절개심을 품어야 했으며, 끝날까지 이런 뜻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이르러서는 그때에 남아진 기성의 말씀과 기성의 교단은 에서의 입장에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됩니다. (3-342, 58.2.9)
기독교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이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찾아진 선민 이스라엘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복귀하고자 하는 하늘의 섭리의 뜻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야곱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세웠던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전에 예수님 앞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나라를 세계복귀의 발판으로 세우고 이 발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의 진격전을 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노정이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사정에 처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광야시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광야노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택함받은 제2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땅을 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예수님 앞에 세워진 택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어디 갔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없어지고, 유대교단이 없어지고, 이스라엘의 가정이 없어지고, 야곱이나 모세와 같은 개인적인 이스라엘도 없어짐으로써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성 신학자들은 죽어야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민족과 교단 앞에 몰리고, 가정에서 몰리고, 12제자한테 배반당하고, 최후로 3제자에게까지 배반당하고 나니 갈 데는 죽을 곳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30여 생애를 불쌍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의 황태자요, 홀로 창조이상을 대신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주인공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이 땅에 와서 고난당한 것은 예수님이 잘못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민족과 교단이 몰라서 그랬고, 사회와 가정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택한 제1 이스라엘이 반대함으로써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잃어버린 제1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제2 이스라엘로 세워 세계에 널리 퍼뜨려 놓고 다시금 재수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무슨 사명이 있는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제일 먼저 택해 세운 이스라엘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대신하는 제2 이스라엘을 건설해야 할 노정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12사도, 또는 예수님의 3제자와 같은 인물을 중심삼고 하나의 교파로 단결하여야 할 때인데, 이런 조직을 잃어버렸으니 큰일났습니다. 모세 앞의 60만 대중은 12지파장과 70장로를 중심삼은 반열형태의 조직 속에서 각각 자기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광야노정을 거쳐 나갈 수 있었는데, 오늘날 제2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세계 기독교인들은 반열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12반열을 대신하여 나타났던 12사도와 3제자가 책임 못 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므로, 전세계 기독교는 세계의 대표적인 교파를 중심삼고 12교파의 형태를 갖추어 결속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슨 생활을 하고 있느냐? 예수님이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못다 이루었으므로, 야곱과 모세가 목자생활을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도 저나라에 가서 목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계에 가서 쉬지 못하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이것이 목자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2천년 역사노정에서 예수님을 믿고 간 사람들, 즉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영계에서 잃어버린 제2 이스라엘 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낙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렸으므로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찾아 나왔던 성도들을 모아서 예수님이 부활한 후 영적으로 제1 이스라엘을 복귀한 형이 낙원세계입니다. (3-344, 58.2.9)
지상천국 주인공의 자격
낙원세계에 간 영인들도 제1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발판을 지상에 세워 놓아야 할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상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지상에 재림하여 현재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을 제2 이스라엘의 축복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과 하나되어 제1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반대했던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활동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끝날은 어떤 때냐? 구약말씀을 믿고 있던 유대민족을 이방민족들이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말씀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유물사상이 기독교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말씀을 믿는 기독교가 얻어맞는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하나의 교파가 나와야 하는데, 그 교파는 개혁교파라야 됩니다.
그런데 모세노정에 있어서 성막을 받들던 시대가 지나고 성전을 받들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민족이 결속하여 싸워야 할 시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유대민족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받들던 시대에서 실체 성전을 완성해야 할 시대로 바뀔 때에도 우주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싸움이 세계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끝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이제 실체 성전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실체 성전을 이룬 다음에는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신․구약말씀이 나와서 인간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했고, 이제 새로운 말씀이 나와서 그 말씀과 하나된 사람들을 실체적으로 복귀시킬 것입니다. 봉건주의시대는 신만을 위주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신만을 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는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왔는데 이제 실체 성전을 복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약을 중심삼은 이런 때에 세계적인 성약의 이념이 나타나면 그 성약이념을 중심하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대신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지상천국의주인공이 되려면 실체 성전이 이루어진 후에는 환경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존재가 되려면 이념적인 혁명과정을 넘겨야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과정은 어떠한 형으로 될 것인가? 역사는 뿌린 대로, 또는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니, 오늘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빠져 있는 신앙자들과 기성주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은 전부 하늘을 배반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는 자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이 아담 해와를 유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끝날 이 시대에 있어서 천사장과 같은 영적인 교단들이 나타나 하나님 뜻을 대하여 반대할 수 있는 때가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원칙을 통하여 복귀섭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끝날 어떻게 해야 선민 된 이스라엘 민족이 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결심하여야 되겠습니다.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20여 성상을 거치고 얍복강가에서 하늘을 믿고 싸워 나가던 야곱의 대신자가 되어야 되겠고, 광야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애원하며 걸어가던 모세를, 혹은 세계 인류를 대표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염려하며 기도하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3-346, 58.2.9)
3. 중심인물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
인간을 찾아 세우기 위해 섭리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그분이 계획한 모든 것은 성사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성사되어야만 되고, 또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추진해 나오는 데도 하나님 혼자 해 나온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시작했다 하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시작한 것은 모두가 성공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섭리를 추진시킨다면 문제가 없지만,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인간 스스로 탕감해야 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대신 탕감해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장본인이 죄의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식이 죄를 지었는데 부모가 대신 복역하여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타락을 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 자신이 선두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오는 데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인간을 앞에 내세워 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섭리의 뜻에 협조할 수 있는 면을 가려 나오도록 하면서 역사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면에 계시면서 외적인 면에 언제나 인간을 세워서 역사하였습니다. 사람을 세워 역사하는 데도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계획 밑에서 한 때를 예정해 놓고 거기에 알맞는 인간을 찾아 세우기 위해 역사노정을 섭리해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57-287, 72.6.5)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믿지 못할 자리에서 믿어야
예를 들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노아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1600년 기간을 준비했습니다. 1600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했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성사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라는 한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수고한 그 기간 전체의 공적을 그냥 그대로 노아 자신이 이어받아 가지고 영광된 자리에 서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은 때를 맞이하여 노아를 세웠어도 노아 앞에 영광의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택해 가지고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 내몰았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야 할 텐데 얼토당토않게 산꼭대기에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더욱이나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노아마저도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출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믿지 못할 그 말씀을 믿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짓기에 온갖 충성을 다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기간에는 즐거운 때가 없었습니다. 또 방주를 짓는 일도 물론 귀하겠지만, 그 방주를 지어 나가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노아의 심적인 태도가 더더욱 문제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삼천만 민족이 살고 있는 한국 땅에 그런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배를 짓는 데 충청도나 강원도 어디든지 좋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배를 짓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건 미친 녀석이야! 말도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까지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텐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이나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상적으로 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한 때를 마련하기 위하여 1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한 사람을 세워 그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하게 해야 할 하나님이지만, 여기에는 정상적인 입장에서 명령을 하지 못하는 연유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서 섭리적인 뜻을 이루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뜻을 이루어 놓기를 무엇보다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리에 내세우지 못하느냐?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왜 못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타락하라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타락해서는 안 되게끔 지은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못 한 것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못 했습니다. 사람의 불신 때문에 못 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정상적인 자리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연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리에서 믿어야 했던 아담 해와가 믿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자리에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믿지 못할 자리에서 믿어야 됩니다. 정상적인 자리에서 죄를 지었지만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탕감해야 됩니다.
여러분도 만일 죄를 짓게 되면, 5년이면 5년, 10년이면 10년 형을 받아 교도소에 들어가서 복역해야 됩니다. 복역하는 것은 정상적이 아니라 비정상적입니다. 거기는 모든 체제가 자유를 허락지 않습니다. 제재권내에서 자기 스스로의 입장을 바라보면서 그 형기가 찰 때까지 그 환경을 정상으로 여기며 돌파해 넘어가야만 해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노아에게 하나님이 방주를 산꼭대기에 지으라고 명한 것은 노아가 미워서가 아니라, 타락하였던 근본, 그 원칙이 어긋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던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겠느냐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57-289, 72.6.5)
노아의 절대적인 믿음과 각오
노아에게는 외로울 때, 어려울 때, 슬플 때, 고독이 극심할 때 등 여러 가지 사정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것을 극복해 냈습니다. 내적인 승리의 심정적 터전을 갖지 못하였다면 노아도 역사시대에 실패한 인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그런 어려움이 부딪쳐 올 때마다 내적으로 새로이 결심하고 다짐하였던 것은 하나님은 틀림없는 분이다. 나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나를 이런 자리에 세워준 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세상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하는 내정적인 심정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부딪치는 그 환경에 있어서 하루하루 개척자의 사명을 연이어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한 10년쯤 지나서는 노아를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20년쯤 지나가면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문제는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라든가 아내, 아들딸이 있다면 그 가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노아의 어머니가 있었다면 노아를 칭찬했겠어요?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아내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또 그의 아들딸들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우리 아버지는 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만일 노아가 이와 같은 가정의 반대에 타격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좌절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반대하더라도 이것을 극복하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신념을 다짐할 수 있는 노아가 안 되었다면 그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반대하더라도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각된 자기를 갖고 있지 못할 때는 그 환경에 꺾이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내가 말을 듣지 않고 반대하기 시작했으면 노아에게 옷을 제대로 해줬겠어요, 밥을 제대로 해줬겠어요? 노아가 아랫방에서 자면 아내는 웃방에서 자려 하고, 번번이 상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이렇게 몇 해가 지나 반대해 봐야 끝장이 안 날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를 해 가지고 꺾을 가망성이 있을 때는 반대하지만, 아예 가망성이 없게 될 때는 여편네나 자식들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만성이 되어서 반대하지 않는 자리를 지나서야 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동네방네 사람들이 반대하다가 전부 지쳐 떨어졌고, 자기 아들딸이 반대하다가 지쳐 떨어졌고, 자기 아내마저 반대하다가 지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 것이냐?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은 다 지쳐 떨어지고 더 이상 반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라일 것입니다. 이놈의 영감, 영감이 하는 행동은 우리 국민과 민족을 망하게 하는 행동이다 하며, 나라의 군왕이 있다면 왕권을 가지고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는 환경이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을 일시에 투입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선다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노아를 세워 가지고 큰 섭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노아가 뜻을 따라 승리하는 날에는 사탄세계가 왕창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는 사탄은 여러 가지 계교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 저 노아가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을 안 들었소. 자기의 아들딸이 반대하는 것을 안 들었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반대하는 것도 안 들었소. 그러나 나랏님이 권력을 휘둘러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 뜻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렇게까지 참소하게 마련입니다.
노아의 뜻은 한 가정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정도 구해야 하겠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요, 사탄세계를 몽땅 빼앗아 가지고 하늘세계를 이루기 위한 뜻이기 때문에, 사탄도 그렇게 큰 조건을 가지고 노아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랬으면 노아는 어찌했을까요? 노아가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120년 동안 수고하여 배를 다 짓게 되어 이제 내일 모레가 낙성식하는 날이다. 만 120년 기간이 차는 날이다 할 때 그 전전날 나라가 동원되어 노아의 목을 자르려고 한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홍수심판은커녕 도리어 자신이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됐다면 어떻게 했을 것이냐? 노아 할아버지가 보통사람이라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했을 것입니다. 120년 동안 그렇게 죽을 고생을 다 하여 이제 남은 밑천이라고는 늙어빠진 몸 하나밖에 없고, 기력도 쇠진한 이 할아버지, 동정도 안 해주던 하나님이 이제는 동정을 해줄 줄 알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 모레를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목을 자르겠다고 하는 악한 왕이 있다 하게 될 때, 노아는 어땠을 것이냐? 그거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노아가 승리하게 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아의 목을 졸라매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에 응해서 하나님이 너 할 대로 한번 해봐라 해 가지고 사탄이 자기 휘하에 있는 악한 왕을 시켜 네가 하는 일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고, 네가 해온 모든 것은 이 나라 이 민족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다며 목을 자르려 할 때, 노아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밀고 나가야 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믿는데 어떤 사람은 나 10년 믿었소, 어떤 사람은 나 20년 됐소 합니다. 20년 된 사람들은 이제 전도를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뭐 그만큼 전도했으니 나는 좀 쉬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또다시 명령하면 그 명령이야 뭐 그저 그렇지라고 했다가는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 설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가 문제입니다. 비록 하루밖에 안 남았더라도 완성되는 그 시간까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노아는 이미 일을 시작할 때에 성공은커녕 가다 죽더라도 나는 깨끗이 죽겠다고 각오했을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나 혼자 짓다가 못 지어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지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노아는 신이 났을 것입니다. 야, 이 배를 짓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120년 동안 지어도 완성할 가망이 없게 될 때 있는 정성을 다해서 배를 짓다가 중도에서 죽음으로써 이것을 완성할 수 있는 동지들이 빨리 생겨나기만 한다면, 노아는 죽을 시간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진 노아였다면, 내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진다는 신앙을 노아가 갖고 있었다면, 이 죽음의 자리가 일대의 수난길을 가는 것보다 도리어 간단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 이틀쯤 남기고 배는 다 지어놨는데 죽으라고 하면 하나님도 무심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배를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20년 후에 죽으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이제는 다 해놓고 한 이틀쯤 남기고 죽으라고 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꽁무니를 빼고 원망할 것입니다. 내심으로 이제 상을 받고, 하나님 앞에 무슨 좋은 수가 나고, 세상은 다 망하더라도 나만은 살아 남을 줄로 알고 있는데 죽을 자리에 내놓는다고 하게 되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솔직히 원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망하고 반대하는 날에는 뜻이고 뭣이고 모두 제로(zero)가 됩니다. 틀림없이 제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이 낫지, 그게 뭐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57-291, 72.6.5)
아브라함의 위대성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의 자기 고향 집에서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끌어내어 이방으로 데리고 다니다가 제물 드리라고 해서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제물도 아브라함이 드리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제물을 드릴 제단을 다 준비했으니 당신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안 받아주시겠습니까? 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와서 네가 그만큼 수고했으니 내가 너를 축복해주겠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보다 땅 위의 모래보다 더 번창하게끔 축복해줄 테니 3대 제물을 드려라 했기 때문에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또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쪼개는데, 조그마한 비둘기 한 마리쯤이야 쪼개지 않는다고 그게 뭐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비둘기를 쪼개려니 칼이나 댈 데가 있었겟습니까? 그런데 축복해주겠다는 하나님은 비둘기 한 마리를 안 쪼갰다고 너의 후손이 4백년 동안 종 노릇을 하게 되리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겠어요? 이거 사탄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훌륭한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벌을 내리게 될 때, 그것을 자기가 죽는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수를 저질러 놓고 무엇보다도 큰 충격을 받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받드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아들을 잡아죽이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자기 아들을 잡아죽여 가지고 충격받았던 그것이 해소될 수 있다면 당장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하기까지 내적으로 하나님이 분부한 말씀을 얼마나 신중히 생각했겠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백세에 얻은 독자, 그것도 하나님이 축복해서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을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는 주더니 이제는 또 잡아 제사드리라고 하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모순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아버지도 그렇게 복을 빌어주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느냐? 여기에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곡절이 있습니다. 대개 인간은 자기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이상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자기를 빼놓고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플러스시켜 가지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 가지고는 무엇이든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사랑의 길을 택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씨족을 부정하고, 자기의 친족을 부정하고 어떤 가정과 씨족을 찾았느냐?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정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씨족을 그려 나왔던 대표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자기 자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을, 하나의 나라를 그는 마음속 깊이 바랐던 것입니다. 그 바람이 어떠한 어려운 환경보다도 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숱한 집시의 행로도 무난히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컸기 때문에, 또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강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신이 확실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다 제쳐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지시한 길만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애급에 가서 자기 아내까지 빼앗기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집에서 끌어내더니 나중에는 아내까지 바로한테 빼앗기게 되었으니 될대로 다 되었구나! 하고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긴 것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이여!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이 저를 사랑하심이 틀림없거늘 저를 세워 가지고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손해보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를 빼앗기고 나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언제는 집을 떠나게 해 가지고 수십년 나그네 생활을 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아내까지 빼앗기게 하고 이국 땅에서 완전히 몰려 죽게 됐구만. 원망스러운 하나님이여!라고 참소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사랑이고 뜻이고 난 다 모르겠소. 하나님이고 뭐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구만 하고 참소를 했다면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훌륭했다는 것은 조건 없이 믿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아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제 마누라 찾아주소라고 항의하는 투로 기도했다면 그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찾아줬을까요? 사탄이 틀림없이 사라의 목을 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를 바로의 품안에서 빼앗아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감복하고 하나님 앞에 참소하던 사탄까지도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던 사탄의 입장이 무색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축복을 해주어야만, 참소의 축복이 되지 않고 자랑의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뜻을 위해서 내 가족을 끌고 나오게 될 때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각오를 했사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사오니 당신이 쓰고 싶은 목적이 있거들랑 마음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당신의 깊으신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라를 제물삼아 가지고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면 그 이상의 축복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아브라함은 기도했을 것입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도를 했다면 어림도 없습니다. 사라는 틀림없이 바로 궁중에서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체 되는 아브라함의 뜻을 대하는 태도, 어려운 환경이면 어려운 환경에서 그때를 수습하는 태도야말로 원수가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태도였고, 인간의 사정을 잘 알지만 눈물어린 심정을 가지고 어려운 자리로 명령하는 하나님이 도리어 내정적으로 더 격한 자리에서 붙안고 싶고,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심정의 자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불신의 후손 된 아브라함을 통해 가지고 신의의 새로운 심정적, 동정적 기원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요, 그럼으로써 하늘의 역사가 땅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그냥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와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나오던 아브라함이 그런 위대한 심정을 가지고 모든 시련기간의 때를 넘김으로써 비로소 그 이상의 축복을 받기에 당당한 아브라함이 됐습니다. (57-295, 72.6.5)
하늘이 택한 선민을 누구보다도 존중시했던 모세
또 모세를 두고 봅시다. 바로 궁중의 왕자처럼 호화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하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면 싸웠지 모른 체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늘이 택한 선민을 어떠한 나라나 국민보다 더 숭배하고 존중시했습니다.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늘이 택해 세운 그 선민 한 사람을 어떤 주권 국가의 왕자나 왕보다도, 주권 국가 전체보다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이 모세를 훌륭하게 본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매일같이 애급 민족으로부터 채찍을 맞고 애급 민족의 호령에 움직이고 있는 비참한 이스라엘의 한 개인을 동정할 때 한 개인으로 안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길에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싹틀 것이다. 그 개인이 억울한 자리에 설 때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을 위하고 옹호하는 자에게는 기필코 하늘이 같이하게 될 것이다. 저들을 위해서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게 되면 기필코 하늘이 같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책임지고 나서는 모세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편이 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죽였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감정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미래에 하나님이 가는 길이 평탄한 노정이기를 바라고, 하늘이 승리한 터전을 바라고, 하늘이 하나의 승리적 주권을 가지고 애급까지도 지배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그 나라의 충신과 그 나라의 애국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땅은 비록 사탄세계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요, 그 국가의 치리를 받는 국토이지만, 하늘을 위하는 충성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하늘을 세우고자 행동하고, 그 나라의 주권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으로 싸우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고역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애국자의 고역의 길입니다. 그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주권이 있다면 그를 옹호해주고 보호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곳까지는 모세가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모세를 대하는 하늘은 모세의 충절과 절개와 지조를 바라보고 모세의 행동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미래의 축복의 나라를 그리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홀로 목자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모세를 보호해준 것입니다.
때 아닌 때에 하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근원과 동기를 지닌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40년 생활 가운데서도 언제나 애급 사람을 때려죽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애급 사람을 때려죽임으로써 내가 광야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끝나더라도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어버릴 수 없다 이것이 틀림없이 모세의 전통적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궁핍했을 것이고, 부딪치는 환경은 위험하고 부자유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과거를 회상하는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의 영광스러운 생활에서 비참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이 되어 가지고 애급 사람을 죽이기까지에는 내가 여기서 쫓겨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난 후에 그런 일을 단행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위한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그 애국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40년 광야생활 중에 쓰라린 환경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모세의 생활에 고독이 깃들고 눈물어린 환경이 찾아와 그 환경이 억세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배후에는 하늘의 동정의 마음이 가중되어 들어가는 내적인 인연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밤이면 홀로 외로이 누워 자는 잠결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잊어버릴 수 없는 그 심정, 하루하루 고달픈 생활권내에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애급을 원망하는 그 마음, 자기에게 부딪쳐 오는 모든 자극을 자기 일신의 고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역 가운데로 몰아넣는 악의 주권자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생활을 해 나갔기 때문에,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또다시 모세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모세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모세 이상으로 이스라엘의 나라와 주권을 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초라한 목동의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일깨워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책임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로서의 40년 생활은 이스라엘 선민을 거느리기 위한 준비생활이니, 40년 이상의 수난길이 앞으로 부닥쳐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르는 연단(鍊鍛)과 시련기간으로 하나님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다시 내세워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 환경을 넘어 내일의 희망의 돛과 같이 그 마음속에 추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려운 40년 미디안 광야생활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만일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지난 일을 생각했다면 바로 궁중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꿈꾸었을 것이니, 그 환경이 그리워졌을 것이고, 자기의 환경과 비교하여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서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은 모세였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의 자리에 불릴 수 있는 인연이 엮어졌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세는 완전히 때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때를 잃어버렸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늘 앞에 때를 갖지 못한 사나이처럼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에게는 때를 고대하고, 하늘이 약속한 그 날을 고대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주고자 하는 마음과 잃어버린 때와 환경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충열의 지조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다시 묶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남모르는 내정적 심정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심정을 따라서 동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숱한 심정적 내연이 배후에 묶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사람은 기필코 하늘을 대표한 하나의 때를 맞게끔 해줘야 되는 것이 하늘의 책임이요, 또 맞게끔 한 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57-299, 72.6.5)
복된 자리에 처한 우리
역사상의 우리 선조를 보면 이와 같이 역사적 인연의 뜻을 계승해 나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섭리적 역사시대에 있어서 우리 조상들의 대표자가 이러한 축복의 터전을 이어받은 것은 평탄한 자리에서가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선 그 날부터 내가 이 길을 알았으니 틀림없이 간다 하는 결심과 더불어 축복의 때를 맞이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난길을 거쳐야 됩니다. 역사상의 선조들도 탕감조건을 다 제시해 놓고 사탄의 모든 참소의 조건을 넘어선 후에, 참소에 걸리지 않고 그것을 무난히 돌파한 충절을 갖고 있는 데서만이 축복의 때를 맞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고을과 동네를 소란스럽게 하며 태어났습니다. 저 아이가 커서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이냐? 하는 동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환경에서 세례 요한은 자랐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인 사가랴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잘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았겠어요?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집을 나왔습니다. 광야에 나가 30년 동안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저 녀석 대학을 간다고 하더니 저렇게 됐구만! 하든가, 또 아무개 딸이 잘났다고 소문 나더니 겨우 저렇게 됐구만! 기껏해야 저 꼬라지로구만! 자기 아버지 어머니 주제가 그렇기 때문에 별수 없어. 종자가 종자 따라가지 하는 별의별 비난을 듣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 녀석 그저 그러다 말지 뭐 별수 있어? 뭐 통일교회에 들어간 지 10년이 됐다는데, 고향에 돌아온 꼴을 보니 얼굴은 쪽 빠지고 눈은 똥그랗게 돼 가지고… 하는 많은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래도 눈을 보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 눈마저도 흐려져 가지고 기운 없는 신세가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고생을 얼마나 했습니까? 통일교회 들어온 지 10년 이상 된 사람 가운데 나는 통일교회 들어와서 고생을 했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일본 압제하에서 만주라든가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고 다니던 애국자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리 꼭대기에 총칼이 따라다닌 것도 아니요, 잡히는 날에는 죽는다 하는 경지를 거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싫으면 말고 내가 좋으면 하겠다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뜻을 절대 이루지 못합니다. 못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여러분과 같았다면 20년인들 나갔겠습니까? 20년은 그만두고라도 3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교회 원리와 같이 이렇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세밀히 알고 노아가 나갔습니까? 노아는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노아야, 앞으로 120년 후에 너를 주인으로 만들어 놓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심판해 버릴 테니 방주를 지어라 하고 말씀하니, 예! 하고 대답한 그날부터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뭐 일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앞으로 119년 남았다고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10년이 지났으면 110년 남았으니, 이 녀석아! 기운을 내라고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절대적인 하나님이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참견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믿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매일같이 가서 야! 네가 어제는 그랬지만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못 믿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주체가 되고 그 주체 앞에 절대적으로 믿는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두 번도 아닌 딱 한 번 명령하면 그것으로 절대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120년 동안 매일 찾아와 가지고 노아를 격려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120년 동안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노아가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여러분은 선생님이 섭리적으로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얘기를 해주지만, 그때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현재의 여러분과 옛날 역사시대에 그 터전을 넓혀 온 우리 조상들과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원리를 너무 세밀히 가르쳐줬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을 한꺼번에 쓰라고 했기 때문에 손가락 발가락이 전부 다 마비되어 가지고 한 가지밖에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급하니까 한꺼번에 세계복귀 천주복귀까지 가르쳐줬는데, 밤낮 쉬지 않고 한꺼번에 다 해 가지고 빠른 길을 가라고 가르쳐줬는데, 마비가 되어 가지고 전부 다 못 쓰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조금씩, 타락론도 머리만 조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또 조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코만큼 가르쳐주었으면 지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꺼번에 냅다 먹으라고 했더니, 체하고 설사가 나고 별의별 요지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병이 난 사람도 있고, 앓다가 병신 된 사람도 많습니다. 약이 좋기는 좋지만 보자기로 싸놓았던 것을 한꺼번에 들이 삼켜 가지고 소화를 못 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정당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통일교회 여러분과 옛날 노아나 아브라함 혹은 세례 요한을 비교할 때, 통일교회 여러분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복되다는 것입니다. (57-302, 72.6.5)
세례 요한의 입장
귀하게 자란 세례 요한은 매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메뚜기가 입으로 슬슬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논두렁 같은 데로 마구 잡으러 다녀야 됩니다. 이런 모습을 그의 어머니 아버지 친척들이 보게 될 때,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석청을 얻겠다고 돌바위 틈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겠습니까? 말을 들어 보니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 하는 모양을 보면 미친 녀석입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가 보면 알겠지만, 석청이 그렇게 많고 메뚜기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반 사막지대입니다. 9월부터 이듬해 4월을 지나 5월만 되면 마르기 시작합니다. 기가 막힌 곳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저 녀석이 용이 될 줄 알았더니 번데기가 됐다는 말처럼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다는데 언제 올지, 구세주를 맞기 위해서 보따리를 싸 들고 광야를 돌아다니며 동네방네에 소문을 뿌렸는데, 언제 메시아를 만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자기의 이종사촌 동생 예수가 떠억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꿈에도 상상치 않았던 그 사나이에게 성신이 비둘기처럼 내려와서 동생인 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가르쳐주며 증거를 하는데, 동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났고 자기 동네에서 보잘것없는 마사거리의 한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이 메시아라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거기에 기가 막힌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쓴 맛을 본 사람은 조금만 달아도 기가 막히게 아는 것입니다. 극과 극은 통하게 마련입니다. 얼마 전에 누가 고멸을 갖다 줘서 이게 얼마나 쓰나? 해 가지고 콩알만한 것을 입에 쓱 넣어 봤습니다. 사나이 체면에 집어넣은 것을 뱉을 수는 없고 쓰지만 할 수 없이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쓴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눈물이 날 만큼 쓴데 물로 양치질을 하고 문을 열고 찬바람을 쐬며 공기를 들이마셔 보니까 이번에는 신비스럽게도 달콤한 맛이 나는 것입니다. 별스럽습니다. 아하!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약이 되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저 쓰기만 하면 사람이 배척하고 달라붙지 않을 텐데 달라붙을 수 있는 어떤 요인이 있기 때문에, 흡수될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과 극은 통합니다. 망할 자리에 들어가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망하지 않으면 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이 계산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타락해서 망할 무리를 망할 자리에 들여보내 가지고 흥할 수도 있는 길이 있다면, 거기에 처넣겠어요, 안 처넣겠어요? 요행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하다가도 안 망하는 입장이 되면 흥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역사를 사실상 그러한 각오 밑에서 해 나오고 있습니다. (57-304, 72.6.5)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자리란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장사를 지내는데, 그때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하는 노래입니다. 도대체 요단강이 얼마나 신나고 훌륭하기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초원과 꽃밭이 있고, 물이 맑아 가지고 지나가던 모든 새들이 날아와서 목욕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이라기보다는 요란한 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정물, 사막지대의 기나긴 모래속을 흘러나오니, 물이 될 대로 다 됐습니다. 요단강을 처음 가 보니 기쁜 마음이 있어 가지고 그 강물에 세수라도 한번 해 볼까 해서 손을 넣었는데 씻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요단강이 대단히 큰 줄 알았는데 큰 아이들이 수영하여 건너기에 딱 좋을 정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이 비둘기같이 임해 가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으니 요단강이 훌륭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또 사막지대인데 예수님이 왕자처럼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났겠습니까? 예수님은 틀림없이 요셉의 아들로 형편없이 살았으니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것을 볼 때, 세례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닌 사생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 사생아 녀석이 기분 나쁘게 뭐 때문에 나타나나!라고 생각했는데도 하나님이 가르쳐주니 할 수 없이 세례를 주었지만, 주고 난 후에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맞이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이 엇갈려도 이만저만 엇갈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눈이 떠지기도 전에 획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분이 잡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니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세례를 해주었지만 이게 수수께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두 제자를 보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물어 보는 수작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세례 요한도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30년 동안 생애를 바쳐 준비한 것이 겨우 예수 하나를 세례하기 위해서였던가를 생각하면, 세례 요한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집안은 다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런 사연을 통해 가지고 연결되어 발전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두고 볼 때 그럴 성싶다 하는 곳에서 뜻이 이루어진 역사적 전례가 없습니다. 그럴 성싶다 그럴 뻔하다.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자리에서 뜻이 이루어진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부정, 전부가 비참, 전부가 몰이해, 전부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자리에서 역사는 연결되어 나왔습니다. 이러니 번번이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57-307, 72.6.5)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
오늘날 통일교회가 책임져야 할 사명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예, 떠납니다 하며 틀림없는 결심을 하고 고향산천을 떠났는데, 이것은 믿는 자리가 아니라 믿고 알고 행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또 노아를 두고 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 그럴까 말까? 하는 자리에서 행동했던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히 몰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 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 믿고 안 그 기준을 사탄은 그저 뭉개 버리려고 백방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자가 될 수 있느냐, 불신한 조상의 후손인 인간이 영원히 틀림없는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시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대의 세계로 처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죽고자 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나는 뜻을 위해 죽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섭리적 시대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뜻과 더불어 이미 죽었다 하지 않고는 사탄의 참소를 받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가다가 꺾이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늙어서 죽는 것보다 젊어서 죽으면 더 보람 있겠소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나서게 될 때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서른 살이면 꽤 젊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니 그 나라의 백성도 원수요, 그 나라의 주권도 원수요, 전부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요, 원수의 주권이요, 원수의 백성이요, 원수의 땅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뜻을 이룰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컨대 북한의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뜻을 가졌다면 자기가 살겠다고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겠다고, 죽음의 길을 빨리 찾아 나서겠다고 하면 할수록 행동개시가 빨리 벌어지는 것이요, 길이 개척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살아야 돼라고 생각한다면 행동 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장한 예수님의 입장을 우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 하나님이 언제나 사랑하고 보호해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지. 편안한 자리에 가야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유대교도 원수요, 이스라엘의 모든 위정자들도 원수요, 로마도 원수요, 전부 다 원수인 판국에 홀로 나타나 가지고 나라의 주권자를 돌이켜야 되고, 국민을 돌이켜야 되고, 국권과 국토를 돌이켜야 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살겠다고 하는 예수님이 되어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묻혀진 사연을 헤쳐놓고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이요, 알기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결론만을 내려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늘을 걸어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막연한 결론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디 젊은 예수님이 말한 것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실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말과 사정과 환경이 전부 다 그런 고독단신의 입장에 세워졌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으면 뜻의 길이 생겨났을 것 같아요? 엇갈리고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습니다. 악의 세계에 몰려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날이 되면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가 복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을 구원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나라가 없이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2차적, 3차적, 4차적, 5차적, 6차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어 가지고 그 나라가 만일에 피해를 입을 위험한 자리에 있거든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57-309, 72.6.5)
4. 우리가 가야 할 야곱의 본보기노정
삼단계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귀노정
우리 신앙노정은 반드시 탕감해 가지고 복귀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탕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내 전체를 대신해서 드리는 조건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적이라면 제물은 외적인 것으로서 그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해 나가는 데는,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한꺼번에 떨어졌지만 한꺼번에 완성단계까지 넘어가게 돼 있지 않습니다. 완성기준을 넘어갈 때까지는 반드시 소생․장성․완성단계를 거쳐 가지고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완성단계까지 넘어가는 데 있어서 탕감조건물을 드리는 데는 소생적 탕감조건물, 장성적 탕감조건물, 완성적 탕감조건물을 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야곱이 소생․장성․완성과정을 어떻게 거쳐갔느냐?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직접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 노정이 모세 노정이 되고, 모세 노정이 예수님 노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야곱 노정은 한 개인이 간 노정이지만 복귀섭리의 전체적 과정 형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 구약시대가 있고 신약시대가 있고 성약시대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제물, 다시 말하면 만물을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 신약시대는 사람을 통해서, 즉 아들을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 성약시대는 뭐냐 하면 부모를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입니다. 그건 물질과 자녀와 부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을 중심삼고 본다면, 야곱의 소유와, 자녀와, 부모가 된 자기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섭리 앞에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책임자가 될 때까지는 여러분이 배운 거와 마찬가지로 에서를 굴복시키는 싸움의 노정을 거쳐갔던 것입니다.
에서는 사탄세계를 대표한 입장입니다. 야곱은 하늘편을 대신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인 아벨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들이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넘어갔느냐 하면 그런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본래는 야곱이 하란에 가지 아니하고 고향에서 에서와 더불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데, 에서가 반대하여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서 생활했기 때문에 탕감이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반대함으로써 이삭과 자기 어머니, 즉 자기 부모 앞에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란에 가 가지고 생활한 것입니다. 거기에 가 가지고 야곱이 생활을 시작했는데, 야곱이 제물 드릴 수 있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라반의 물건이지 야곱의 물건이 아닙니다. 결국 에서를 피해서 갔지만, 더 외적인 면에서 에서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라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가는 길을 언제나 라반이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이 가는 입장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부모하고 하나되었느냐 하면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된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 못 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은 라반의 집에 간 야곱과 같은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물건을 찾아 가지고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결국 에서를 굴복시켜 가지고 자기 부모와 하나되어야 했던 야곱과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은 복귀의 노정과 방불(彷彿)한 것입니다. (67-113, 73.5.27)
고향에 돌아가야겠다는 일념 속에 살았던 야곱
야곱이 제물로 드려야 할 물건은 야곱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찾아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협조를 받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보다 먼저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축복받을 수 있는,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그 사상적인 전통을 어디에 세워야 했느냐? 제물하고 나 이것으로 끝나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서 제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가 필요로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나라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보다 공적인 것을 하나님과 인연맺기 위해 드린다는 그 사상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야곱이 하나님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야곱이 하란 생활에서 라반의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에 추구했던 것은 고향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는 축복이 있다면 그것을 받고 그 땅에서 잘살겠다는 것보다도 우리 집과 더불어, 우리 형제와 더불어 잘살겠다는 관념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란 땅에서 자기 처자와 잘살겠다는 것보다는 고향에 돌아가 가지고 부모를 모시고 형제와 더불어 하나되어 잘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기초적인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부모와 하나되는 동시에 형제와 하나되느냐 하는 것이 야곱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잊을 수 없는 주류사상이었습니다. 양치는 목자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통해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님이 축복한 자기 부모 이삭의 가정, 자기 부모와 아브라함으부터 이어받은 그 축복을 존중하는 마음이 언제나 사무쳤던 것입니다. 형님을 대해서도 장자의 기업을 몽땅 빼앗았으니까 형님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형님을 동정하는 마음도 가졌던 것입니다.
야곱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은, 환경이 어렵고 고독한 생활 가운데로, 핍박의 생활 가운데로 말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자리에서 형님을 원망한다든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환경을 통해서 그런 형님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언제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기가 일생 동안 수고해서 취한 모든 것을 전부 다 그들에게 나눠주고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서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야곱의 신앙노정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축복한 것은 야곱 개인을 잘살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잘살게 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67-115, 73.5.27)
하나님과 일체 된 가정을 이룬 야곱 가정
이리하여 하나님은 야곱에게 21년 동안을 갖추게 해서 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축복해주었습니다. 7년이 연장되어 가지고 21년이 된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 것입니다. 이래서 21년 동안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라반도 두려워할 수 있는, 라반 자신도 야곱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이리하여 3일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훔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훔쳐 가지고 나오는데 라반이 야곱을 찾아와서 우상을 가지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만약 레아가 자기 아버지를 동정하여 그 우상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면, 야곱의 21년노정은 몽땅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레아는 자기 아버지 라반을 속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야곱의 처 레아도 자기 아버지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 속인 목적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필요한 조건이 된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레아가 자기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나왔다는 것은 레아가 야곱과 완전히 하나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 부부는, 야곱 가정의 형성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것으로, 새로운 가정의 출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라반의 딸이 아버지 라반과 하나 안 되고 야곱과 하나됨으로써 야곱이 가진 모든 물건을 비로소 그냥 그대로 소유할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속인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 즉 자기 부모를 속였는데, 복귀노정에 있어서 아버지를 속인 딸과 아들이 만났다는 그 기준이 야곱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레아가 반대해 가지고 라반과 하나됐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갖고 있는 물건도 그렇지만 딸려 있는 아들딸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둘이 갈라졌다면 아들을 대해 가지고 야 가자 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들딸이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둘이 갈라지게 되면 아들딸도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가인 아벨을 중심삼은 복귀의 길이 완결 안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물질 또한 하늘 것만이 될 수 없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물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아와 야곱이 하나될 수 있었다는 이 사실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둘이 하나됨으로써 새로 어머니 아버지도 결정되었고, 그 다음에는 자기 아들딸도 하나될 수 있었고, 만물도 완전히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이 셋이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67-117, 73.5.27)
합당한 제물을 드리려면 영육으로 사탄을 굴복시켜야
그래서 야곱은 부모와 자식과 물질이 하나되어 가지고,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 한꺼번에 바치게 될 때 하나님이 완전히 받아주실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바치는 데는 그냥 그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야곱만 있기 때문에 그냥 바칠 수 없고 가인보다도 나은 자리에서 바쳐야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가인 자리보다도 나은 자리에서만이 아벨이 제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참소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바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칠 때는 반드시 아벨 제물이 가인 제물보다 나아야 됩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그 가인이 에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평면적인 입장에 있지만 하나님과 사탄은 입체적인 입장에서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내 갖고 있는 소유나, 내 갖고 있는 아들이나, 내 갖고 있는 아내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니 내 것이 아니다라는 관념을 가져야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뜻 하나 이루는 데 제시하겠다는 주류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고향을 찾아가지만 문제의 해결점은 에서입니다. 에서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과 하나되고 사탄은 에서와 하나되어 야곱이라는 인물을 놓고, 야곱이 어떻게 하늘편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일치될 수 있는 사상적 관을 갖추느냐, 제물을 드릴 수 있는 당당한 아벨의 자리에 서느냐, 그렇지 않으면 조건에 걸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과 사탄이 주시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에서보다 나아야 됩니다. 에서보다 나아야 된다는 말은 실체적인 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에서까지도 이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야곱은 고향을 찾아가 최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에서를 놓고 담판기도를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 고향에 가는 날에는 에서가 죽이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틀어지겠으니까 에서가 반대하지 않고 환영할 수 있기를 바라 가지고 얍복강가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이 실수한 것을 탕감하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실수한 것은 뭐냐?첫번 실수한 것은 천사장한테 굴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천사장을 이겨야 됩니다. 실체 에서를 굴복시키기 전에 영적인 에서와 같은 천사장을 굴복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천사장한테 굴복한 것을 실체 에서를 중심삼고 탕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천사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67-118, 73.5.27)
생명을 걸고 천사와 싸워 승리한 야곱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천사장을 굴복시키는 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 얍복강가에서 천사하고 씨름한 것입니다. 모든 소유와 가정 전부를 걸고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이 만약 이 씨름에서 지면 아내와 하나됐고, 자식과 하나됐고, 물건과 하나된 것을 전부 다 사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다 깨뜨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밤새껏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어도 승패가 나지 않았습니다. 천사하고 씨름하면서 그냥 그대로 붙들고만 있었겠어요, 아니면 지기도 했겠어요? 야곱이 많이 넘어갔겠어요, 천사가 많이 넘어갔겠어요? 야곱이 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직 안 졌다면서 또 하자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생각하기를 계속이다. 나 죽을 때까지 계속이다. 너와 나의 씨름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나를 이기려면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 안 졌다는 게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훌륭한 점입니다.
이것은 신앙노정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노정에서 사탄한테 번번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졌지만 또 하는 것입니다. 밤새껏, 일주일이든 몇 달이든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천사도 곤란한 것이, 씨름에서 이기려고 그랬지 야곱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이게 되면 천사도 걸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천사는 야단났습니다. 놓질 않으니까 야단났다는 것입니다. 죽일 수도 없고, 아주 곤란한 입장에 몰려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밤을 새워 싸우다가 날이 밝아 오니까, 할 수 없이 천사가 떠나야 되겠기 때문에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천사가 어떻게 야곱을 칠 수 있느냐? 야곱이 지지 않았으면 절대 못 치는데 졌기 때문에 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나는 끝까지 너를 이겨야 되겠다. 다리가 잘라지겠으면 잘라져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이기겠다 하는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멀었다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천사가 가만 보니까 야곱의 환도뼈를 쳤어도 야곱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더 붙들고 나 모르겠다. 너 죽어라 하면서 사생결단할 수 있는 이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젠 내가 졌다 하는 조건을 안 들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내가 졌다. 네가 승리했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역사시대에 천사와 싸워서 이긴 단 하나의 조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명내기였습니다. 이래 가지고 영적으로 천사를 굴복시킨 것은, 에덴동산에서 우리 인류 조상이 천사한테 굴복했던 것을 다시 타고 넘은 자리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7-120, 73.5.27)
전체의 소유물을 걸고 형 에서를 굴복시킨 야곱
그 다음에는 에서라는 존재가 남아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해 가지고 천사장에게 굴복한 것은 아담 자신이 실체 천사장이 된 것과 같은 입장인데,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입장에 있는 야곱은 실체 천사와 같은 에서를 굴복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자기 생명과 자기 욕망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해야 될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아담 대신 아담이 실패한 실체적 기준을 넘으려면 자기에게 축복해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은 절대 변치 않는다는 이 신념을 가지고 에서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이 자리를 막아내야 한다는 그런 신앙의 기질이 강하게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를 침범할 수 없다는 그러한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서를 찾아가지 않고 딴 데 가서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형님이면 다인가? 형님이면 형님이지 뭐야? 하면서 딴 곳에 가 가지고 살 수도 있지만, 과거에 맺혔던 모든 것을 풀겠다는 입장에서 에서를 찾아간 것입니다. 찾아가는 데는 순서대로, 그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종이나 아내나 전부 다 에서 앞에 내놓고 이거 전부 다 형님 것이오 한 것입니다. 이걸 다 당신이 갖더라도 한 가지 하나님의 뜻만을 내가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아담은 자기 아내와 자식과 만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해서 모든 만물을 잃어버리더라도 뜻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가정적으로 전체 소유를 가지고 에서와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그때 이 물건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보다 나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는 못 갖는다. 하나님 앞에 반대되는 사람은 못 갖는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건을 갖는 날에는 나와 하나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된다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주는 그 예물을 받고 나서 비로소 마음이 풀렸습니다. 마음이 풀렸다는 것은 그런 조건에 일치되어 가지고 그 물건을 받음으로써 사탄이, 영적 천사가 굴복했고, 실체 천사형의 입장에 있는 에서가 그러한 조건이 제시되는 기반에 굴복함으로써 야곱이 환영받아 하나님이 세우려 하던 탕감의 내용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혼자 가서 영적 천사하고 싸움을 하지 않고, 야곱의 가족하고 야곱하고 에서하고 같은 자리에서 천사장까지 합해 가지고 싸웠으면 그 판국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야곱과 천사 둘이 밤새껏 씨름하며 싸웠다면 그 종들과 그 아들딸도 싸웠을 것입니다. 이걸 보면, 이렇게 갈라 가지고 작전한 것이 얼마나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원수의 입장에서, 죽이려고 했던 형과 동생이 하나되어서 서로 붙안고 눈물을 흘리며 복을 빌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설정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야곱이 걸어온 이 노정을 보면 간단하지만 역사적인 섭리노정의 전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67-121, 73.5.27)
야곱이 21년노정에서 승리한 비결
야곱 노정과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야곱 노정은 우리가 가는 길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야곱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다 하는 입장에서 부모 형제의 반대를 받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부모들이 반대하고, 형제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어서 하란에 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갔습니다. 거기서 의붓자식, 다시 말하면 머슴살이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도 야 뭘 해라 하면 예 해야 되고, 야 일어나, 이 녀석아 해도, 예 해야 되는 것입니다. 21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했을 것입니다. 잠자는 것도 눈치 봐야 되고, 깨서도 눈치를 봐야 되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조는 것을 라반이 보면 야, 너 고단하니까 졸아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먹다가도 야! 뭘 해라 하면 예 하고 나가서 일했습니다. 그것이 7년노정이 될 것인데 21년노정이 돼 버렸습니다. 거기서부터 2천년의 역사가 생겨났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높은 차원으로 2천년을 올라가서 메시아 예수님이 오게 된 것입니다. 2천년 떨어진 것을, 아담이 떨어진 것을 야곱을 통해서 2천년 올라가 가지고 아담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비참사를 야곱의 20년 과정에서 다 탕감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2천년 동안 떨어져 내려오던 모든 것이 야곱에게 와서 재현되어 가지고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번씩이나 라반이 약속을 깨뜨리고 속였습니다. 그것은 소생․장성․완성의 삼 삼은 구(3×3=9), 9수를 넘어 10수, 이 원리결과주관권내를 거치는 그 과정에서 전체 역사를 대표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원리결과주관권을 넘어선 것이 됩니다. 거기에서 라반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라반 앞에 끝까지 한 때를 바라보고 참고 나가야 됩니다. 혈기를 냈다면 다 깨집니다. 한 가지 그런 일이 진행되고 그런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라반은 점점점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해준 하나님이 나하고 같이 있다 하는 이것 가지고 이겼습니다. 딴 것 없습니다. 이긴 비결은 너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있다 하는 자신감입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생명이요, 야곱이 21년 동안 극복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사상입니다. 아무리 반대해도 너는 굴복하는 것이다. 내가 승리하는 것이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67-123, 73.5.27)
야곱노정이 곧 우리들의 노정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야곱과 같이 이 세상 축복을, 통일교회 앞에는 세계를, 하늘땅을 전부 다 허락한다 하는 축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서가 먼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 것은 내 것이다. 장자의 기업을 빼앗을 수 있다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야곱과 같이 그걸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네 것이니까 네가 가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네 것으로 축복해주었으니까 사탄세계에 가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이 없습니다. 또 부모나 형제도 없습니다. 야곱과 같이 쫓겨나서 하란으로 가야 할 것인데 무슨 부모나 형제가 있어요? 야곱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야 되겠소! 하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 가지고는 복귀의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린 거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것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탄한테 가서 싸워 가지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야 할 곳은 어디예요? 하란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물건을 갖고 싶지요? 아내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아들을 갖고 있어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만 따라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죽으라는 것이고, 가서 찾아오라고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7년노정을 두고 나아가야 한다는 공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장되면 21년 걸리고, 그것이 또 연장되면 2천년이 걸려 버립니다. 그건 영원히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제일 무서운 게 전도 나가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복귀노정이 무엇이냐 하면, 종에서부터 양자, 양자에서 아들, 아들에서 부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4단계입니다. 이것을 한 단계 한 단계 나누어서 하고 싶어요, 4단계를 한꺼번에 하고 싶어요? 한꺼번에 하려면 4배의 희생을 해야 됩니다. 야곱이 하란에 가 가지고 그렇게 천대받고, 죽도록 천사하고 싸우고, 에서하고 싸우고 이렇게 하는 데서 생명을 걸고서야 이겼습니다.
야곱 노정에 있어서 라반을 대하던 시대는 육적 고통 시대고, 그 다음에 하란에서 고향을 찾아가 에서하고 싸울 때까지는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라반 집에서는 육적 고통 시대고, 하란에서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천사하고 싸우고 걱정을 하는 그런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육도 죽을 각오를 하고 마음도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움으로써 육과 영이 둘 다 고통을 받아 비로소 하나되어 가지고 상극관계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하란에서 그렇게 끈기 있게 21년 동안 참는 훈련을 안 했으면 얍복강가에서 천사한테 졌을 것입니다. 21년 동안 싸웠던 모든 것이 오늘 이 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야곱은 끈기 있게 최후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를 굴복시키고 부모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그러면 부모 앞에 돌아가서는 무엇을 내놓아야 되느냐? 당신이 잃어버렸던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소!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이 있습니다. 아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잃어버리게 했던 그 모든 만물도 있습니다. 아담 가정이 잃어버린 가정도 있습니다 해야 됩니다. 이걸 내놔야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가인이 여기 있소. 아벨이 여기 있소 하고 둘이 싸워서 갈라졌던 것을 하나 만들어 전부 다 바쳐야 됩니다. 그 다음엔 아담이 잃어버린 아내도 여기 있소. 내가 대신 전부 다 드립니다 해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다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 노정을 가고, 예수님도 국가적인 그 노정을 가는 것입니다. 야곱 노정이 모세 노정이 되고, 모세 노정이 예수님 노정이 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 노정은 야곱 노정과 맞먹는 것입니다. (67-125, 73.5.27)
통일교인이 가야 할 축복노정
여러분 자신들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됩니다. 국가면 국가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되고, 세계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딱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란에 가 가지고 전도하는 것은 내가 사랑할 아내와 내가 사랑할 아들과 내가 사랑할 물질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반대한다고 했다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 21년을 참는 게 어려워요? 그걸 못 참으면 살았어도 죽은 목숨입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그걸 알고 나면 결사적으로 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3년이 되면 축복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물질을 복귀하고, 그 다음엔 가인 아벨을 복귀하고 나서야 잃어버린 아담을 복귀하고 해와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고 나서 가인 아벨이 하나돼 가지고야 아담의 자리, 해와의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자기 피땀을 흘려서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물질을 가져야 되고, 자기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가져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 아벨과 같은 형제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부모를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안에 있는 처녀 총각을 중심삼고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자기가 혜택받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는 그게 안 됩니다. 자기가 세 사람 이상 전도를 해 놓고야 가능합니다. 자기가 먹고 살고 있는 것의 3배를 하나님 앞에 드려 놓고야 하나님의 복을, 혜택을 입습니다. 교회에 들어와 신세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3시대를 복귀해야 되기 때문인데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안 가지고 들어와서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통일교회 처녀, 통일교회 총각들 좋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혜택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상이 틀렸습니다. 그것은 원칙에 위배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교회에 들어와서 전도도 안 하고 이렇게 하겠다면 도둑놈입니다. 기생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축복해줄 때는 네가 데려온 네 아들딸은 네 것 삼아주마. 네가 가져온 물건은 네 것 삼아주마 하는 것입니다. 3배를 가져와야 아들딸한테 다 나누어줍니다. 그래야 세 아들이 되고, 세 아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아들을 찾으면 세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축복은 전부 다 하나님이 해주는 것입니다. 세 아들이 있어야 되고 물질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은 어떻게 먹고 사나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먹고 살 물질의 3배를 해놓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다 해야 됩니다. (67-129, 73.5.27)
어려운 신앙길을 가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
그것은 누구 때문에 하느냐?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하니까, 선생님 얘기를 들어서 하니까 선생님을 위해 하지 하겠지만 천만에!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지 하겠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선생님이 닦아 놓은 기반을 여러분이 이용해 가지고 덕보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수고한 것을 여러분이 공짜로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 혜택권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선생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까?
6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그런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협조 안 해주고 어떻게 뜻을 이루느냐? 하며 불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일하게 된다면 아이쿠, 힘들어! 선생님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시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수십년 싸워 나온 걸 그냥 그대로 갖다가 뿌리를 삼아 가지고 거기에 접붙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불평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결국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찾는 것도 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넘어가야 할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계를 넘어가야 할 길도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민이 가야 할 길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차차 밟아 올라가야 될 텐데, 선생님이 국가면 국가기반을 닦아주어서 그 국가기반에서부터 세계기반으로 한 단계 넘어갈 수 있는 은사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금년에 자란 나뭇가지는 수십년짜리 뿌리로부터 줄기의 혜택을 입어야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혜택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입어 가지고 현재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감사해야 됩니다. 어디까지나 신세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고, 선생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7-132, 73.5.27)
5. 뿌리된 자의 책임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성경 이사야 6장 11절 이하를 보게 되면 그 중에 10분의 1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남아 있는 뿌리가 있다면 그 뿌리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순을 돋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것을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조상인 아담 해와는 하늘땅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의 뿌리로서 인간 전체의 희망과 이상을 이루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만 타락함으로써 그 근본 뿌리가 찍힘을 당하고 뽑힘을 당하여 사탄세계로 옮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경륜해 나온 하나님 섭리의 중심점은 에덴동산에서 인간 행복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이상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생명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사랑의 뿌리도 될 수 있었던 그 근본의 뿌리, 곧 아담 해와를 통하여 세우려 하였던 그 근본의 뿌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의 뜻을 받들어 온 역사과정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비록 천륜의 사정은 잘 몰랐지만, 그들이 뜻을 대하여 수고해 나온 것은 섭리의 목적으로서 이루어드려야 할 그 잃어버린 뿌리를 불변의 실체로 맞이하기 위한 토대를 닦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섭리역사를 시작한 이후 4천년이 경과하는 가운데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그 뿌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던 분이 바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영원히 남아질 뿌리로서 하나님이 취하여 이 뿌리를 근거로 삼아 마음대로 경영하실 수 있는 하나의 포도원과 같은 형태를 타락한 지상에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늘의 섭리가 출발한 이래 4천년이 경과하여 예수님이 나타나기까지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뜻을 중심으로 하여 피눈물을 뿌리는 수고의 길이 있었음을 알아야 됩니다.
즉 종족을 대표한 섭리의 뜻도 있었고, 민족과 국가, 세계를 대신한 섭리의 뜻도 있었으며, 역사를 대신한 섭리의 뜻도 있었는데, 그 종족과 역사를 중심한 섭리의 뜻을 대신한 그 한 지역이면 지역, 환경이면 환경을 거쳐 나올 때까지 뿌리의 요소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를 완결시켜 민족으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로 완결시키고, 나아가서 세계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까지 완결시키는 실체로 보내심을 받았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30여년 평생의 그 수고와 돌아가신 이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의 모든 수고는 세계를 대표해서 한 수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완성한 하나의 뿌리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질 때까지, 그 배후에 숨겨진 뿌리로서 역사의 어려운 고비 고비를 대행하여 원수와 싸워 나온 선지선열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1-137, 56.7.1)
숨은 수고의 생애를 산 아브라함
예수님이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후의 존재가 누구였느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즉 사탄권내인 원수의 나라에 사로잡혀 천륜의 뜻을 배반할 수 있는 입장에서도 하늘을 배반하지 아니한 숨은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숨겨진 뿌리와 같은 아브라함은 시대가 악하고, 역사가 혼란되고, 환경이 어지러울지라도 그러한 모든 처지를 피하지 아니하고 극복해 나갔으며, 오히려 몰락해 가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나쁘고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좋은 그 무엇을 가졌다면 그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인간들의 속성인데,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마음에 약속된 그 크나큰 섭리의 뜻을 갖고 있으면서,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소망 가운데서 오직 세움받은 하나의 뿌리로서, 어느 누가 건드려도, 뽑으려 해도 끄떡없이 확고부동한 기준을 닦기 위해 온갖 핍박과 수모도 참고 극복해 온 숨은 수고의 생애를 살다 갔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자기 일신의 불변의 기대를 세우는 것은 물론 자기 일신의 희생적인 생활이 뿌려진 씨가 되어, 온 지상 만민을 위함과 동시에, 악한 민족까지도 하늘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하나의 불변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이 기준을 붙들고 변치 않겠다는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곳이었고 아브라함이 있는 곳과는 상관도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늘의 뜻을 알든 모르든, 그 민족이야 당하게 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늘 앞에 섭리적인 사명감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성 중에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가 천상에 사무쳐 하나님과 일문일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무리가 있었다면, 또 그 무리 가운데 아브라함을 알아보는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간절히 호소하여 소돔과 고모라에 내릴 심판을 면케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인이 있다는 것을 조건삼아 하나님에게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아버지시여, 의인과 악인을 함께 불로 심판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이, 자기 혼자만이 소돔과 고모라를 대표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을 느꼈을 때 아브라함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일신의 행복, 자기 일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보다도 종족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호소했던 숨은 기준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138, 56.7.1)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예수님이 믿음의 열매로서 나타나실 수 있었던 것도 아브라함과 같은 분이 하늘의 섭리 앞에 세워져서 땅 위에 나타나지 아니한 숨은 뿌리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섭리역사과정에 다른 모든 것이 다 꺾였을지라도 천상을 대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의 믿음을 실증할 수 있는 아브라함 같은 분이 있어서 신앙의 뿌리 역할을 한 그 터전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 입장의 아브람(큰 아버지라는 뜻)에서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결정받은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 이 한 자체보다도 그가 남이 모르는 크나큰 수고의 경로를 거쳤다 할진대,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바라보며 나와 아브라함을 1대 1의 입장에 세워놓고 비교하고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하여 숨은 뿌리의 제단을 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사는 지방과 그곳 주민들을 향해 간절히 호소하고 기도하던 아브라함의 불타는 심정을 여러분 자신들도 가져야 되겠으며, 아브라함의 수고의 노정으로 세워졌던 믿음의 기대, 숨은 뿌리와 같은 기준을 여러분 자신들이 인계받아야 한다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의 기관의 약속을 받았는데, 이것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모세를 통하여 민족적인 형태를 이루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늘 앞에 사무치는 충성심과 믿음이 없었다면 이 땅 위에는 하늘과 접속할 수 있는 한 인연이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은 오직 하늘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과 땅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와의 넓고 깊은 인연의 발판을 가질 수 있었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1-140, 56.7.1)
민족의 지도자가 된 모세
모세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 자신이 민족 앞에 세움을 받기까지에는 하나의 숨은 뿌리로서 지낸 바로 궁중에서의 40년 수고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 머무는 동안 영화롭게 입고 먹고 환희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시종일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 생활의 어느 한 순간도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 혼자서만 그 민족이야 알든 모르든 하늘을 향한 충성심이 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원수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불변의 핵심체로서, 어떠한 환경이 자신을 압박하고 천륜의 뜻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모세였습니다. 모세에게 이러한 하늘에 대한 불변의 심정과 정성 들이는 40년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후에 민족에 대한 사랑의 힘이 폭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혈기당당한 사람으로 알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때려죽인 모세의 의분심은 그 순간에 충격받아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광경을 보게 될 때, 모세는 40년 동안 하늘을 향하여 애달픈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호소하였던 내적 슬픔의 심정이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선민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의분심이 솟아나 애급인을 때려죽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애급에 대한 의분심이 그러한 모세의 행동의 내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의 행동에는 섭리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울분에 못 이겨 애급인을 쳐죽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고 책임진 입장에서 죽인 것이고, 그것은 애급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한 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염려하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오해하고 애급인을 쳐죽인 것을 폭로함으로써 모세는 자기의 행동이 탄로난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바로 궁중에서 호화롭게 살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바로왕의 딸이 자기를 위하여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았던 지난날의 부귀영화를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양치기 옷을 입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무명의 목동의 신세였지만 그 양떼를 바라보며 옛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던 가나안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양떼를 몰고 다니지만 언젠가는 양떼를 몰고 가듯이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사무친 마음으로 하늘 앞에 호소했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먹으나 굶으나 자나깨나 노심초사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애급의 박해와 도탄 중에서 고역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뼈가 녹는 듯한 슬픔을 느꼈으며, 하늘을 향하여 여호와여! 저를 보셔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호소의 정성이 지극한 모세를 60만 대중을 애급 땅에서 이끌어내는 지도자로 세웠고, 남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 목동의 생활을 하던 모세를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숨은 뿌리의 절개를 계승받게 했고, 민족의 대표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모세와 하나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1-141, 56.7.1)
모세의 숨은 정성의 발판을 몰랐던 유대민족
모세가 하늘로부터 허락의 약속을 받고 애급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기쁨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그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고 하늘 앞에 호소하던 그 뜻이 이루어져 민족의 살길을 개척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고, 이제부터 제2의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기를 중심삼고 행동하지 않았고, 조그만 일이나 큰일이나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하나님과 인연을 맺지 않고 수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모세가 포악한 바로 궁중에 들어가 그들의 신 앞에 10회 이상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험난한 광야로 이끌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즉 험난한 광야이지만 자유로운 환경으로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데 있어서 모세의 마음이 곧 자기들의 마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바로 궁중으로부터 구출해준 모세와 마음이 달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하나되지 못하여 천륜에 어긋나는 길을 감으로써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하늘 앞에 호소했던 숨은 정성의 발판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그 날로부터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기들을 위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모세는 광야에서 갈라졌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엎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또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이 하나되지 못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불신하는 민족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을 하늘 앞에 호소했습니다. 즉 그는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아버지여, 이 민족이 어찌하여 허락하신 땅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제가 책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를 제물삼아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아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숨은 정성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남 모르는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금식하는 것이 모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던들, 그들은 모세의 40일 금식 기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불신의 놀음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민족의 축복을 대신한 모세가 하나의 숨은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쳐지게 될 때 모세의 마음을 동정하고 그의 수고를 염려해서 시내산에 있는 모세와 같이 눈물 흘리며 하늘 앞에 호소할 수 있었던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홀로 민족을 대표하여 외로운 길을 갔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희생과 모세의 민족을 대표한 제물의 노정을 통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가정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고 모세가 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류를 대신해서 홀로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막아야 했고 승리적인 탕감의 발판을 닦아야 했습니다. (1-143, 56.7.1)
예수님은 승리의 중심이자 만민의 구세주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이러한 책임이 있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승리하여 불변의 터전을 갖출 때까지 예수님의 일신은 자신의 일신으로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4천년 역사과정에서 하늘 앞에 충성했던 어떠한 믿음의 중심인물보다도 더 충실했으며,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일신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30여 평생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 분야에서 역사상 어느 누구도 갖추지 못하였던 전체를 대신한 중심의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만일 그러한 중심인물이 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세계적인 섭리의 책임을 진 선봉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일대의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 믿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예수님으로만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까지에는 아브라함이 쌓았던 수고의 제단이 있었고, 모세가 수고한 제물의 노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과 도탄 중에 있는 민족과 세계 인류의 고통을 느껴 저들의 고통의 짐을 나에게 지워주시고 저들에게는 자기들이 요구하는 영원한 이상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하늘 앞에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의 고통을 책임지기 위해 하루도 편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원수의 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염려해주었고 자신의 기쁨보다도 전체의 뜻을 책임진 입장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탄세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중심존재로, 만민의 구세주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한 우리 믿는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뭐냐?이제까지 악인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염려하고 기도해주는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끝날에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염려하며 기도해주시는 예수님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망각하고 불신한다면 우리는 끝날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145, 56.7.1)
뿌리의 사명을 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
만약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서 예고해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악행을 반성하고 회개하였던들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실증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 우리도 지난날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불신하는 유대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도 영적 시내산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동안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마음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불신하는 유대민족을 붙들고 기도하던 애달픈 마음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서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아브라함이 의인 10인이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면케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지만, 그 소돔 고모라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오늘날까지 천상에 계시면서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것과 같이, 또 모세가 시내산정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그 애달픈 심정을 체휼하여 이 시대를 붙들고 예수님 대신 염려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의 세계적인 뜻을 대신할 수 있고 역사상의 선지선열들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이 세운 자가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깨어 기도하고 정성들이며 찾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끝날 이 땅 위에 이처럼 뿌리로서 남아지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없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세계적인 종말기를 맞이하게 될 때 두려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숨은 떨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역사노정을 거쳐나오면서 하나의 중심 뿌리를 고대해 온 선조들의 바람에 응하는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2천년을 하루와 같이 재림의 한 날을 고대하며 수고해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통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역사적 중심인물들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놓고 검토하고 분석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즉 여러분 자신을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의 상대 입장에 세워놓고 그들의 마음이자 여러분의 마음이요, 그들의 소원이자 여러분의 소원이며, 그들의 원한이자 여러분의 원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하늘 앞에 나서서 담판하는 호소의 제적단을 높이 쌓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늘 앞에 호소하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자기 아들딸이나 조카 롯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잊고 숨은 정성의 제단을 쌓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관계되어 있던 롯은 심판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제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내가 고대하던 뜻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있는 정성을 다하여 아바 아버지여, 저를 세우셨사오니, 저를 부르셨사오니 소자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이어받은 유업은 여러분 일대만의 유업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와 예수님을 거쳐 내려온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모세 이래의 모든 지파를 대신해야 되고, 예수님이 필요로 했던 지파를 대신해서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은 악할지라도, 이 땅은 어두울지라도, 이 땅은 망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늘이 세운 숨은 뿌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146, 56.7.1)
하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는것
하늘은 오늘 이때에 개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종교의 사명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구는 아브라함이 했던 것 같은 책임을 다했느냐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애쓰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한국 삼천만 민족이 도탄 중에 있게 될 때 모세처럼 여러분의 뜻과 마음을 다해서 애달파하고 애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창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던 것처럼 같은 뜻과 심정을 가지고 만민을 위해 예수님 대신 수고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았느냐고 반문을 받게 될 때에, 옳소이다, 당신이 저희들을 아시지 않나이까? 감추어진 바의 뿌리는 저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도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될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일신을 통하여 믿음의 절개를 새운 뜻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결실될 것이고, 모세가 민족을 통하여 애원하던 뜻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해원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세계를 대해 품었던 모든 슬픔의 요소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해원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아브라함이 일대에 애달파하던 마음, 모세가 일대에 애달파하던 마음, 예수님이 지금까지 애달파하신 마음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그러한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아브라함 대신, 모세 대신, 예수님 대신 높이고 모실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하시옵소서. 더욱 활동하시옵소서라고 해야 되겠고, 나아가 여러분이 하늘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은 못 될망정 제단이라도 쌓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여!라고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천지창조 이래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주인의 행세를 하지 못한 그 아버지를 실감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일대에 해원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아브라함이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가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의 제단을 쌓아야 되겠습니다. (1-148, 56.7.1)
6. 혈통복귀와 예수님의 탄생
슬픔으로 시작된 인류역사
하나님은 선의 세계를 이룰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들을 중심으로 창조이상을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중도에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노정에 있어서나 인류역사노정에 있어서 중대한 사건 중에 첫째 가는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뜻하지 아니한 비운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적인 실체세계에도 비운의 역사가 출발한 것입니다. 때문에 이 비운의 역사를 어떻게 청산하느냐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 인간에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기쁨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시작하였고, 소망과 희망 가운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낙망과 절망 가운데서 출발하였습니다. 또한 광명한 새 아침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황혼이 짙어가는 가운데 어두운 밤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비운의 역사를 청산지어야 되겠습니다. 이 어둠의 세계를 기필코 청산짓고 하나님이 소원하는 목적의 세계를 향하여, 광명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에게는 구원이라는 명사를 들어 섭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란 뭐냐?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은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남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여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복귀의 제1기준은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 되는 것만이 아니고, 자녀의 자리를 거쳐 부부의 인연을 맺고 참된 부모가 되어서 새로운 혈족의 인연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목적이요, 또한 인류역사의 새로운 출발의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나라가 문제가 아니고, 어떠한 민족이 문제가 아니며, 어떠한 종족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어떠한 아들딸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인류 앞에 필시 있어야 할 참부모, 하나님이 실체로 현현할 수 있는 참부모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어떻게 결정짓느냐 하는 것이 인류의 최고의 문제이자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사위기대 완성은 하나님의 소원 가운데에서 부모를 중심삼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완전한 사위기대를 이루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비통하고 비참한 역사를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차피 비참하고 비통한 역사적인 인연을 가졌으니, 이제 이것을 어떻게 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5-172, 69.10.4)
비운의 역사를 청산지으려면
이러한 역사의 운명은 개인을 지나고 종족․민족․국가를 거쳐 세계까지 뻗어 나왔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이 비운의 역사가 접속되어 발전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척결해야 합니다.
움직이고 있는 물체를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그 움직이는 힘보다도 강한 힘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어떠한 물체를 자기가 목적하는 대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물체의 힘 이상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이 그 목적을 위해서 달리고 있는 것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그 악의 힘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강한 선의 힘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갖추어지면 악은 자동적으로 멎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복귀역사는 비참한 인류역사를 타고 나온 현재의 우리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 가정이 타락한 그때부터 복귀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랬는데 모든 뜻이 본연의 소망대로 성취되지 않음으로써, 2천년 역사를 거친 후 아브라함을 세워 가지고 결사적인 입장에서 소생․장성․완성의 원리 기준을 세우려 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이런 기준이 세워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적 기준이지 전체를 복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전체 세계를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아브라함 가정이 중심가정으로 세워졌지만 전체를 굴복시킬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는 못하였습니다. 굴복시키는 것도 전세계를 한꺼번에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나라면 나라의 대표, 세계면 세계의 대표를 중심삼아 가지고 굴복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역사를 섭리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제물을 드리는 데서 실수한 것이, 즉 비둘기를 쪼개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님과 사탄이 상반된 입장에서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사탄이 굴복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탄도 동참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에 양분된 그 형태가 이 지구상에 남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부터 그 기준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국가가 못 되었습니다. 국가를 중심삼고 재차 슬픔의 조건을 청산하자는 것입니다. 청산하는 데 있어서 제일 기준은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국가 기준은 가정 단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2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그 목적 또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승리의 기준을 중심삼고 민족 편성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덮치고 덮치는 역사를 거쳐나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2천년 역사를 경과해 가지고 예수님 시대에 이르렀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국가적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된 승리의 가정을 이루어서 그 가정을 기반으로 아브라함 가정에서 세우지 못한 승리의 기준을 결정짓고 사탄세계의 외적인 환경을 수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섭리는 또다시 지연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소화시킬 때까지 점진적인 역사에 보조를 맞추면서 국가 형태의 기준까지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민족을 중심삼은 국가 기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일입니다. 국가 기준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 일을 완수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아 가지고 이스라엘 나라를 형성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 나라를 형성했다고 해도 복귀섭리가 나라 단위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와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되어 세계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의 모든 국가를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는 기준까지 나아가야 비운의 역사가 청산될 수 있는 것입니다. (25-173, 69.10.4)
하늘나라 형성과 혈통복귀
예수님도 하나의 가정을 중심삼고 국가를 세워야 됩니다. 사탄 나라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탄 나라의 대표자가 있으니 하나님 나라에도 대표자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탄 나라의 제반 조건 이상의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나라를 형성했느냐? 사탄은 혈통적으로 나라를 형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혈통이 순수해야 하고, 하나님편이다 하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혈통복귀가 되지 않으면 그 외의 모든 복귀도 힘든 것입니다.
지금 타락한 인간은 혈통을 중심삼고 볼 때, 사탄이 아버지로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아버지로 되어 있는 권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준을 능가하는 기준으로 사탄에게 혈통적으로 말려들지 않고 하나님을 중심삼은 후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통을 어떻게 성립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볼 때도 그가 타락한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세계의 저끄러진 열매와 인연을 맺어 가지고는 하늘편에서 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역사상의 성현들, 예를 들면 예수님이나 석가나 공자 같은 사람이 인류역사에 공헌을 했다고 다 똑같은 성현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을 놓고 보면 반드시 한 사람이 앞서든가 뒤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앞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앞서 있는 한 사람이 선택받도록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 외에는 소망의 분기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말을 할 수 있는 기준은 어떻게 결정되었느냐? 사탄세계와 혈통적으로 관계가 없는 부모를 거쳐서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분신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가 사탄의 아들들의 권위보다도 안팎으로 나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출발의 기준을 세울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 태어나기 위해서 4천년 역사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사탄과의 혈통적 관계를 넘어서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한 터전 위에서 태어났다는 조건을 세워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은 형이고 아벨은 동생입니다. 복귀역사는 바꿔치기 역사입니다. 바꿔친다면 무엇을 바꿔치는 것이냐? 옷을 바꾸어 입는 게 아닙니다. 집을 바꾸어 사는 것도 아닙니다. 나라를 바꾸는 것도 아닙니다. 바꾸는 데는 외적인 것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바꿔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에서부터 바꿔쳐야 합니다. 그러면 그 근본은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부터 바꿔친 후에 나를 바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바꿔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부모를 바꿔쳐야 되는 것입니다.
역사상에 있어서 어느 한 때에도 이러한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출발을 못 했습니다. 지금까지 지어 온 모든 죄를 청산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을 하는 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광명하고, 희망에 벅찬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5-175, 69.10.4)
우리가 복귀되는 데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
오늘날 이 타락의 세계는 슬픔 가운데에 있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슬픔의 역사, 낙망의 역사, 죄의 역사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런 행로의 연속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나라가 문제입니다. 나라가 협조 안 하면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를 중심삼은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보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보이는 자신이 어떻게 아버지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사탄세계에 있는 아버지와 신념으로 믿고 추구하는 아버지와 감정의 기준에서 어떤 것이 우위겠습니까? 원칙적인 기준에서 어떤 것이 우위냐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이것을 발견하고 찾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통일교인들은 사랑의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모든 기준을 설파해 가지고 하나님을 실체의 반석으로 모시는 것을 공법으로 하는 사회와 세계를 부모보다도 더 높이 알고, 더 가까이 알고, 더 깊이 인연맺을 수 있는 참된 남자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역사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러한 참된 남자가 없으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관계를 엮지 못하므로 복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절대 불가침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시킬 수도 없습니다. 절대입니다. 또한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권세가 백번 천번 때려부수더라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나된 그 세계는 어떠한 무엇으로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온전하게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사회에 복잡한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됩니까? 우리의 존재 기원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속에 있어야 됩니다. 우리들 전체가 하나님 속에 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자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귀되는 데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분입니다. 완전이라는 것은 상대가 있어야 성립됩니다. 언제나 상대적 관계에 있어서 완전히 성립됩니다. 주체이신 하나님의 상대는 결과세계입니다. 결과의 존재란 주체를 좋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결과적 존재는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원인과 결과를 일치시키는 작용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기때문에 사랑의 결과와 일치하게 되면 사랑의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원섭리를 하는 데에 있어서 왜 여자는 빼놓고 남자만 중심삼고 했겠습니까? 아직까지 여자의 입장을 나타낼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신랑 된 주님이 와야 여자의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시집을 가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시집갈 수 없으므로 남자도 장가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독신생활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히 일치될 때는 절대적이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적인 기준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절대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을 모셔야 합니다. (25-177, 69.10.4)
하나님의 참아들로 오신 예수님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남자가 수고해 나왔지만, 앞으로는 남자만 중심삼고 아! 남자가 제일이다 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여자 대통령도 나오고, 여자 국회의원도 나오고 하지요? 지금까지는 남자들끼리만 거들먹거렸지만 이제부터는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여자들이 `옆을 봐라. 우리가 있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두고 볼 때,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탕감복귀의 한도가 이 세계에 점점 차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라톤에서 챔피언이 된 것이 아니요, 밥 잘 먹기로 세계 제일도 아니요, 팔 힘이 세계 제일도 아니었습니다. 보이는 모양이야 절름발이든 애꾸눈이든 무엇이든 국부(國父)의 사랑만 점령하면 국모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지리 못난 남자요, 뼈 위에 가죽만 씌워 놓은 남자라도 사랑만 점령하면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끊어질 때는 나가자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대로 끊다가는 그 사람의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한번 맺어진 부부끼리 이혼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남편, 한 아내에게 전적으로 매달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데 있어서 일등이었습니다. 일등 중에서도 최고 일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문제 되는 것입니다. 일등이라는 기록은 내놓았으나 그것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코스에서는 이렇게 하고, 저런 코스에서는 저렇게 해야 한다고 후대에 가르쳐줄 수 있는 내용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에서 일등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의 뼛골 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남자라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 전체와 인연맺는 사랑의 상대자로서 하나님의 가슴에 꽉 찰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밖에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두 사람을 놓고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게는 예수밖에 딴 사람은 없다 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모든 것을 의논할 수 있는 자리까지 들어가야 했습니다. (25-186, 69.10.4)
복귀역사는 가인 아벨 복귀의 역사
아들딸이 태어나기 전 부부의 사랑을 거쳐 가지고 뱃속에서부터 떼려야 뗄 수 없고,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문서장을 지니고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문서장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출발되었으니 하나님을 모시고 바꿔쳐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바꿔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귀역사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4천년 역사 속에서 바꿔치기를 해왔고 지금까지 이 일을 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가인과 아벨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가인은 오른편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른편에 있는 가인을 왼편으로 보내고 왼편에 있는 아벨을 오른편으로 바꿔야 됩니다. 이렇듯 바꿔치는 일은 사탄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동기는 하나님입니다. 여기서부터 섭리의 주역이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을 바꿔치는데 가인은 사탄편이고 아벨은 하늘편입니다. 여기서 하늘편이 사탄편을 주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어서 아담은 주인이고 사탄은 종이었습니다. 하늘편에 있는 아벨은 아담 대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대신 주인된 입장에 선 아벨이 사탄편의 가인을 지배해야 됩니다. 바꿔쳐야 돼요. 그런데 지금까지는 그 반대로 가인이 아벨을 주관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거꿀잡이로 바꿔쳐야 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이것을 하기 위한 역사입니다. 이것을 하는 데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가서는 안 됩니다. 타락은 여자가 먼저 했기 때문에 탕감복귀하려면 여자는 뒤로 물러서고 남자가 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전부 다 거꾸로 점령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형제끼리 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거리를 좁혀 들어감으로써 복귀되어 가고 뜻을 이루는 길이 점점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 바꿔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소생․장성․완성의 세 단계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바꿔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있는 방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에서와 야곱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이 형제가 되어 싸우게 된 것입니다. 쌍태로서 복중에서부터 싸웠던 것입니다. 복중에 두 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지배하려면 어렵습니다. 복중에서부터 싸움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중에서부터 싸웠지만 태어나기는 에서가 먼저 태어났으므로 에서는 가인편, 즉 사탄편이 되고 야곱은 하늘편이 된 것입니다.
이 하늘편과 사탄의 싸움은 형제끼리의 싸움이 복중의 싸움으로까지 연장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기기 위해 복중에서 시작된 싸움은 태어나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야곱이 팥죽을 가지고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몽땅 빼앗은 조건을 성립시켰습니다. 간교하게 형님을 속여서 장자권을 야곱이 빼앗았습니다. 그것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에서가 조건에 걸려서 약속대로 한 것뿐입니다. 형님인 에서가 조건에 딱 걸린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이 약속대로 한 것은 천지 공약을 수행한 것입니다. 원칙대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굶주린 가운데 팥죽과 떡에 장자권을 팔았던 에서는 가인이 아벨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야곱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21년 노정을 거치며 사명을 다 했습니다. 결국은 쌍둥이 형제의 싸움에서 야곱이 이긴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가인과 아벨이 외적으로 바꿔지게 된 것입니다. (25-187, 69.10.4)
복중복귀와 다말의 공로
그러나 외적으로는 바꿔쳤는데 내적으로는 바꿔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외적으로 바꿔친 권내에 선 국민이 이스라엘 선민이요, 그 국가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사탄은 내외 안팎으로 바꿔쳤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외적으로만 바꿔쳤으니 아직도 내적 기준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내적인 기준이 바꿔지지 않았기에 안팎으로 완전히 사탄을 막아 놓고 출발할 수 있는 완전한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야곱 때에 외적인 이스라엘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애급 나라가 세워진 때입니다.
애급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사실은 어느 때부터 가느냐?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의 아들이 아내를 맞았는데 죽게 됩니다. 당시에는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으면 그의 동생이 형의 계대를 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법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이스라엘 역사의 섭리적 내용을 중심삼고 보더라도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담당하지 않았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생이 형의 계대를 이어야 했지만 그 동생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다말이 가만히 보니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은 죽었고, 셋째 아들은 나이가 어려 가망이 없었습니다. 다말의 생각은 축복받은 이스라엘, 즉 야곱의 계대가 끊어져서는 안 되겠다는 데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악한 세상의 어떠한 규범이나 윤리보다도 하나님의 혈통을 잇는다는 생각에, 스스로 창녀의 옷차림을 하고 시아버지가 가는 길가에 서 있다가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관계를 맺어서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낳은 것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리하여 창녀의 자식과도 같은 이들이 복귀섭리시대에 있어서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유다 지파로 이어지게 된 것은 다말의 공로 때문입니다. 거기서 사위기대를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도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다말의 쌍태 베레스와 세라도 복중에서 싸웠습니다. 세라의 손이 먼저 잠깐 나왔으나 동생인 베레스가 세라를 밀치고 먼저 나온 것입니다. 세라의 손과 같이 잠깐 나왔다가 들어가는 주의가 공산주의입니다. 오시는 주님이 공산주의를 밀치고 세계를 제패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공산주의를 넘어뜨리기 위해 통일사상을 중심삼고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갖다 붙인 얘기가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근원이 잘못되었으니, 즉 뿌리가 잘못 심어졌으니 이것을 청산해야 됩니다. 형님으로 태어나서 전부를 주관했어야 할 하늘편이 동생으로 태어나 처량한 운명이 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것을 교체해야 됩니다. 교체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복중에서부터 싸워서 교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말 이후에는 어느 섭리요소를 중심삼아 가지고 어느 한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복중에서 굴복당한 사탄은 참소조건을 가질 수 없습니다. 사탄이 참소조건을 갖는 날에는 파탄됩니다. (25-189, 69.10.4)
훌륭한 마리아의 신앙심
그렇게 해서 다말은 씨족을 복귀하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레스가 승리의 간판을 들고 이 땅 위에 탄생함으로써 혈통을 복귀하고, 또 그럼으로써 그는 승리의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가 속한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권은 세계적인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판도가 안 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주님이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천년이 지나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공고한 기반을 갖춘 후에 예수님이 강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마리아에게는 아무런 전통도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다 지파의 여성, 이스라엘 민족의 여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제일 사랑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잉태할 것을 얘기할 때, 마리아는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누가복음 1장 34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다시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하자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니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건 혁명입니다. 당시의 여자에게 있어서 새로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전부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마리아만은 거기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고 나선 것입니다. 사탄을 중심삼고 악의 후손이 번식된 이 땅 위에서 악의 모든 인륜도덕을 저버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자로서의 전부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위해 혁명의 깃발을 들고 나선 단 하나의 여성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 이래 하나님의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선 지상의 여성으로 마리아를 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 아버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를 못 찾았다면 예수님이 영계에 가서 얼굴을 들겠습니까, 못 들겠습니까? 지금까지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기독교를 믿는 사람, 즉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아버지를 찾아줘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도 영계에 있다면 예수님이 그 아버지에게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볼 때, 예수님의 부모가 좋다는 행동을 해서 예수님을 낳았습니까, 나쁘다는 행동을 해서 낳았습니까? 결혼식을 한 후에 예수님을 낳았습니까? 또 예수님의 아버지는 총각이었습니까,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가정을 가진 남자였습니까, 독신이었습니까? 이런 것은 원리를 공부하면 다 알게 됩니다.
원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의 아버지는 총각이어서는 안 됩니다. 다말의 계대를 복귀하지 않고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말이 어떻게 해서 베레스를 낳았습니까? 시아버지 품에 들어갔습니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은 시아버지 품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이런 말을 한다고 진짜 이단 괴수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탄세계의 사랑의 역사 중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멋지다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런 면에서 다말과 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밀히 얘기하면 예수님의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예수님의 아버지를 직접 가르쳐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 중입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잘 믿고 몇 고비만 더 넘어가면 다 가르쳐줄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면 천당에 가서도 예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역사를 모르고 영계에 가서는 예수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모실 수 있는 인연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잘 알아야 됩니다. (25-191, 69.10.4)
하늘편 왕자로 태어나신 예수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기독교가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없다는 것이고,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지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원리를 공부하면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세 시간 이내에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수많은 여성 가운데 사랑의 혁명의 기치를 들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늘 뜻을 위해서 제물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거리에서 돌멩이로 맞아 죽는 처량한 운명이 되더라도 당당히 나가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역사를 가로막고 나셨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더라도 하늘을 위하겠다는 신념을 갖고 역사를 가로막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리아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괜히 마리아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는 하늘의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겠습니까? 그것은 공연 히 식은 밥 먹고 더운 수작 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이만큼 얘기했으면 많이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혈통적인 죄를 청산한 기반 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시집간 다말이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말을 통해 복귀의 길이 완결지어졌습니까, 안 지어졌습니까? 안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처녀인 마리아에 이르러 완결짓는 것입니다. 그중 다말은 타락한 해와의 상징이요, 마리아는 복귀한 해와의 상징입니다. 다말은 타락한 인류의 어머니의 상징이요, 마리아는 복귀해야 할 본연의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그러면 역사를 두고 안팎으로 딱 들어맞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천민(天民)이 못 되었습니다. 선민(選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를 통해 가지고 비로소 제일 천민의 대표자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입니다. 4천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편을 중심삼고 싸움의 역정을 거쳐 사탄이 안팎으로 참소할 수 없는 순수한 자리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천사가 동기가 되어 타락하였으니 반대로 하늘편 천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동기가 되고, 천륜을 배반한 해와가 아니라 천륜을 세우는 데 협조한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은 탄생한 것입니다. 타락한 이후에 이 땅 위의 여자 가운데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늘편 여자를 통해 낳은 남자가 예수님입니다. 모자협조라는 것은 절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 아들은 역사상에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혈통적인 면에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복중에서부터 사탄이 참소할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마리아가 혈통적으로 계대를 이어 가지고 비로소 천주적인 심정을 대표하여 천륜 앞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기반을 결정짓고 예수님을 낳았기 때문에 비로소 천지에 새로운 왕자로서 등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갖다 붙여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성경에 있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25-193, 69.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