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이야기 -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 2장 인간의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무지... | 20180105182653

사랑이야기


제 1권 하나님 사랑편


제 2 장 인간 창조와 하나님의 사랑
  
1.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것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뜻을 따라 생활해나가는 것이 종교인의 생활입니다.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자는 것이 종교인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 하면 개인을 위한 뜻, 가정을 위한 뜻, 종족․민족․국가․세계․우주를 위한 뜻, 그다음에 하나님도 사랑을 좋아하니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뜻까지 전부 알아야 합니다. 종교 중에서 모든 종교를 통일하겠다는 중심된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먼저 이런 것부터 정의(定義)를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나님이 피조 만물을 창조할 때,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창조목적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양이나 돼지를 창조한 목적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또 나무를 지은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공통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은 창조목적 완성입니다.


그러면 창조목적 완성은 무엇을 말하느냐? 창조목적을 완성하면 창조이상이 실현됩니다. 창조목적이 이루어져야 이상실현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이상실현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이상 실현은 창조목적이 완성되는 데서부터 이루어집니다. 단계가 그렇습니다.
 
창조이상 실현의 핵심

하나님의 뜻은 첫째 창조목적을 완성하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창조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상실현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이냐? 남자 여자, 부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만나 사랑으로 하나되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끝나느냐? 그다음에는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냐? 모든 것은 상하관계가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제가 있으면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면 내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연결돼야 합니다.


그래서 천지이치는 상하가 있어야 되고, 그다음에 좌우가 있어야 합니다. 남자 여자는 좌우를 말합니다. 그러니 부부만으로는 상하관계가 안 되기 때문에 상하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상하관계가 뭐냐? 부부가 위가 되려면 아래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입니다. 좌우관계와 상하관계가 합해야만 이상이 벌어집니다. 좌우관계는 남편과 아내가 합한 것이지만 상하관계는 부모와 자녀가 합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종횡이 연결되어 이 우주의 이상적 구형세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실현은 뭐냐? 횡적으로 연결되고 종적으로 연결되어 십자적 원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이상실현권(理想實現圈)을 남자와 여자가 이루게 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자리에서 내가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사위기대(四位基臺)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이상은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이상 실현은 먼저 남자 여자가 횡적인 기준에서 사랑으로 하나되고, 그다음에 종적인 기준인 부모의 자리에서 아들딸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딸이 없으면 창조이상 실현이 안 됩니다. 종횡관계를 거칠 수 있는 원형을 그리게 될 때에, 영원히 돌아가게 됩니다. 좌우만 있으면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영원히 구르지 못합니다. 종횡으로 관계를 맺게 될 때 원형을 그릴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영원히 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창조이상 실현인데, 창조이상 실현의 핵심이 무엇이냐? 가정입니다. 창조이상 실현의 그 핵심은 하나의 인물이 아닙니다. 남자 인격자가 아니고 여자 인격자가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 아들딸을 중심으로 하나님과 한 뭉치가 되어 떼려야 뗄 수 없게끔 서로가 하나, 통일을 이룰 때 창조이상이 실현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곧 사위기대 완성

하나님의 뜻은 창조 때문에 나왔습니다. 창조가 없었다면 뜻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창조이상 완성입니다. 간단합니다. 창조이상은 무엇이냐? 완전한 남자와 완전한 여자가 하나되어 완전한 아들딸을 키워서 하나님 앞에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라고 합니다. 사위기대는 무엇이냐? 참된 부모를 중심으로 참된 부부와 참된 자녀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면, 아담 해와 그리고 자녀가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사위기대입니다.


사위기대가 완성되면 어떻게 되느냐? 삼대상(三對相)목적이 완성됩니다. 그러면 삼대상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아담에게 가는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해와에게 가는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에게 가는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곧 삼대상의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에게도 삼대상의 사랑의 길이 있고, 해와에게도 삼대상의 사랑의 길이 있고, 자녀에게도 삼대상의 사랑의 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결실을 맺는 것이 곧 삼대상목적의 완성이요, 사위기대 완성입니다.


자녀는 무엇이냐? 자녀는 부모, 즉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결실이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참된 자녀를 가졌다는 것은 우주 전체의 사랑을 대할 수 있는 자리에 비로소 서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에 대한 사랑을 분석해 보면,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어머니의 사랑도 들어가 있고, 아버지의 사랑도 들어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도 들어가 있습니다. 어떠한 것도 이것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의 관계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종횡으로 넓어지는 것이 천년 만년 계속되어 그 권내에서 태어난 후손이 나라를 이루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세계를 이루면 그 세계는 지상천국세계입니다.


그러한 지상천국에서 살다가 영계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디든지 제한받지 않고 갈 수 있고,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적인 무대가 천상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실현은 가정 완성에서부터

오늘날 수많은 종교들은 막연하나마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완성과 더불어 보다 차원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을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신과 화합하는 것을 대다수의 종교가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계적으로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막연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종주들이 가르쳐주는 교리대로 살아가면 인간이 바라는 목적도 달성하고 신이 바라는 목적도 달성한다고 막연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 귀일점이 어디냐? 대다수 사람들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볼 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물론 있겠지만 남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여자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다음에 하나된 남자 여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횡적인 면에 일치될 수 있는 가정의 기준을 제시한 종교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가정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종교의 가르침대로 남자면 남자의 완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자면 여자의 완성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개체가 공히 완성해 하나의 가정기준을 중심으로 새로운 차원에서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완전한 통일점이 벌어지게 될 때, 하나님의 이상이 지상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기성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을 통일교회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입니다.


하나님의 이상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관념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생활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생활이라는 것은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 개인의 일상생활이 아닙니다. 가정적 생활기반에서의 이상실현을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그 이상실현이 완성될 때, 거기에서 참된 이상적 자녀가 형성되고, 그 자녀를 중심으로 씨족이 편성되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이상세계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 출발점이 어디냐? 어디까지나 󰡐나󰡑라는 개인이 아니고 가정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뜻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하고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뜻은 단 하나이지 둘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정하고 뜻하신 것은 반드시 성사하고야 맙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완성을 향해 자랐을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섰더라면 인류역사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참된 형제의 전통이 성립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형제의 전통 위에서 이들이 성숙하면 하나님이 불러다가 친히 축복하여서 결혼식을 올려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됐더라면 참된 부부의 전통이 남아졌을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참된 부부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남으로써 참된 부모가 성립되었을 것이고, 이 참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은 죄 없는 선한 아들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인류는 하나님이 보증하는 사랑 가운데 참된 부모의 죄 없는 자녀로서 시작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참된 가정이 생겨났다면 그 가정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벌어져 참된 종족이 형성되고, 그 종족은 참된 국가로 발전하고, 그 국가는 참된 세계로 발전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되었다면 하나님을 부모로 모심과 동시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주권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섰다면 오늘날 우리 인류는 단일민족, 즉 아담의 전통을 이어받은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서 아담이 하던 말과 아담이 이룬 생활방식을 전통으로 해서 이상적 문화세계를 창조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을 영원히 주권자로 모시고 그 주권자 앞에 통치받는, 하나님의 주관을 받는 나라가 되기 때문에 이 땅은 지상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치리받던 사람들이 지상에서 살다가 가는 곳이 영계의 천국입니다. 그 영계의 천국에 어머니 아버지가 감과 동시에 그 가족이 가고, 그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세계가 몽땅 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런 세계는 구주가 필요없습니다. 거기에는 종교도 필요없고, 기도니 하나님을 믿는다느니 하는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신앙이니 종교니 구주니 지옥이니 하는 것이 생겨나게 된 동기는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타락으로 초래된 결과입니다.

참사랑을 중심한 창조이상세계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중심으로 지상에 임재했습니다. 이것이 본래의 창조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인간을 중심으로 한 기쁨과 행복의 천국은 천사세계에 미쳐지고, 그뿐만 아니라 만물세계에까지 미쳐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 천사세계와 만물세계가 간격 없이 하나로 통일된 이상천국이 되었습니다. 이상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오늘날 인간이 하나님을 몰라서 하나님을 배울 필요가 없고, 천사세계가 있다 없다 할 필요가 없으며, 만물세계까지 통하고 살 수 있게 됐을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우리가 새들의 속삭임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고, 나비와 벌들이 무슨 곡조에 맞추어 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이나 부는 바람이나 흔들리는 나무 등 모든 만상(萬象)이 기쁨과 춤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그런 모든 만상의 동작이나 율동은 전부 하나님의 사랑에 화하여 사랑의 율동으로 표현되고 사랑의 음률을 노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인간이 웃는다면, 얼굴만 웃는 것이 아니고 발도 웃고 털도 웃고 몸 전체가 웃습니다. 그리고 그런 외면의 사람만 웃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도 웃습니다. 또 몸은 만물의 공명체고 마음은 영계의 공명체이므로 내가 웃으면 천지가 웃게 됩니다. 그리고 내 움직임은 곧 우주의, 천지의 움직임이 됩니다.


사랑은 신경과 같습니다. 우리가 머리카락 하나를 당기면 몸 전체가 끌려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만 당기면 우주가 끌려오고, 사랑만 움직이면 우주가 다 화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있으면 춤도 추게 됩니다. 춤은 혼자 추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춥니다.


춤은 왜 생났느냐? 사랑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또 노래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고, 웃음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사랑을 빼게 되면 전부 다 굳어집니다.


아담 해와가 사랑으로 하나된 부부로서 자녀를 낳아 그 자녀와 부모가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을 이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뜻이 이루어졌더라면 아담문화권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과 같이 이 세계에 수많은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고, 수많은 문화의 배경을 거쳐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단일민족이요 단일문화권이 형성됐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하나님의 사랑권 내의 가정을 중심으로 번식된 그 가정에서부터 종족이 형성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민족과 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일족을 중심으로 이상국가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세계로 확산되어 인류가 형성되었다면 아담 이상을 실현한, 완성한 하나의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만민을 형제와 같이 사랑하며 사는 인류대가족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마치 한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같이 하나의 사랑의 생명체로 화한 영원한 이상세계입니다. 이것이 뜻으로 본 개략적인 세계관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85-141, 82-270, 101-84, 74-137, 89-89, 110-212, 118-131, 120-202, 119-188, 115-237


 2. 하나님이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뜻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이요, 주인이요, 인간의 아버지


오늘날 수많은 종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신을 중심한 하나의 세계, 하나의 뜻의 세계를 바라며 나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이냐? 신학자들은 그것을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이요, 모든 피조세계를 지은 주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존재요, 피조세계의 주인이요,우리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책상 같은 물건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그것을 구상한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존재세계가 있다는 사실은 반드시 어떤 중심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집을 보면, 그 집안에는 가정 집물(家庭什物)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의 주인인 가장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마련했느냐? 살림하기 위해, 살기 좋게 하기 위해 마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가장인 자기만을 위해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딸과 아내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마련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녀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은 물건을 사는 데도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인 내용입니다.


우주는 누구를 위해 지었는가


우리 자체를 두고 볼 때, 자기 자신이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재미있느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더라도 자기가 누구에게 보여줘서그가 좋아한다면 더 열심히, 더 정성껏 그리게 됩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결과적 존재입니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닮기 때문에 결과가 그렇다는 것은 곧 그 원인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을 때, 누구를 위해 지었느냐? 하나님이 자기 능력이나 자기 자체를 위해 지었느냐,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지었느냐? 하나님 자신보다도 자녀를 위해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 자신이 되겠다는 것보다 사랑하는 자기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추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냐? 사람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물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지은 것도 되지만 결국 사람을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중심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중심이요, 만물의 주인이요, 우리 인간의 아버지다 하는 입장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 모든 하늘땅이 󰡐나를 위한 것, 내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 지으신 것


하나님이 이 우주를 지을 때,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이 󰡐! 만물아, 생겨나라󰡑 해서 그냥 생겨났겠느냐? 그렇다면 사랑의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어렵게 짓고, 정성껏 지으면 지을수록 사랑하는 사람의 깊은 심정과 유대가 맺어지게 됩니다. 남편이나 사랑하는 부모가 어디 가서 물건을 사더라도 기다리고 기다리고, 찾고 찾는 정성을 다해서 사다준 것하고, 아무 정성 없이 싸구려를 사다준 것하고는 가치가 다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에 있는 어떤 하찮은 존재도 쉽게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두뇌가 좋고, 세계를 소화하고도 남을 수 있는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의 물건을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모래 한 알을 설명한다고 할 때, 대체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어도 내면의 깊은 내용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모래를 연구하는 박사가 몇 백만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내면의 깊은 내용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모래 하나도 그 내면의 깊은 내용을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세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는 신비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장난거리나 놀음거리로 지은 것이 아니라 정성들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면 과연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겠느냐? 그러니 우리는 이 우주를 바라볼 때,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지었다는 지극히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동산을 거닐고, 초목과 꽃을 바라보고, 새를 바라보고,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부는 이런 모든 것을 보면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최고의 걸작품


자연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길가에 값없이 서 있는 나무 하나도 유명한 화가가 그린 어떤 그림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비교할 수 있느냐? 아무리 유명한 화가가 최고의 걸작품으로 꽃을 그렸다 하더라도 그 그린 화폭에서는 아무리 쳐다보아도 꽃이 피지 않습니다. 향기도 나지 않습니다. 또 씨도 맺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값없이 길가에 서 있는 나무에서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씨를 남깁니다. 그리고 그 씨를 심으면 그 나무보다도 더 좋은 나무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과도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볼 때, 자연의 어떤 하나라도 영원을 기약합니다. 󰡐영원히 나는 인류와 더불어 살아 남아야 된다󰡑 하는 그런 기약 밑에서 꾸준히 우리 인류를 위하여, 피조세계를 위하여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풀 한 포기를 붙들고도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짓고, 지을 때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했는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풀 한 포기라도 세계의 어떤 명화보다도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은 만지기에, 보기에 놀랄 만합니다. 그런 그림 한 폭만 있어도 벽에 걸어놓고 󰡐-󰡑 하면서 감상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림이 한 폭뿐 아니라 온 우주에 꽉 차고, 내 주위에 차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유명한 화가의 그림 가운데서도 오래 될수록 명화가 되고,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먼저 그린 것이 더 가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무나 풀의 역사를 말한다면, 나무나 풀이 󰡐우리 종족은 창조역사 이래 세계 어느 곳이나 없는 곳이 없고, 천하에 없는 곳이 없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지금 바람이 안 불어서 가만히 있지만 나는 언제나 춤을 추고 있다. 나는 지금 조금 쉬고 있지만 온 세계의 우리 친구들은 다 춤을 추고 있다󰡑 할 것입니다.


또 나무들은 누가 봐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누가 봐주느냐? 날아가는 새가 보고, 지나가던 동물이 보고, 기어다니는 개미가 보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봐줍니다. 땅에 기어다니는 조그마한, 잘 보이지 않는 벌레도 바람이 불면 나무가 춤추는 것을 보고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것이 다 어울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들이 춤추고 자연이 전부 다 춤추게 되니 그 춤추는 세계를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춤을 추면서 구경하게 됩니다.


자연 가운데는 멋진 춤이 있고, 멋진 음악이 있다


사람은 벌보다는 나비를 좋아합니다. 왜 나비를 좋아하느냐? 나비가 춤을 추며 날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는 것은 박자에, 가락에 맞추어서 납니다. 빨리 나는 놈도 박자에 맞추어서 날고, 느리게 나는 놈도 박자에 맞추어서 납니다. 나는 형은 여러 가지지만 어쨌든 전부 박자에 맞춰서 납니다.


또 산에서 사슴이 뛰어다니고 토끼가 노는 것도 음악적입니다.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것이 하나의 리듬이 있습니다. 무엇을 먹는 것도 음악적입니다. 사람도 무엇을 먹을 때 아주 음악적입니다. 그게 다 음악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그런 이 우주를 영원히 나를 위해서 만들고, 나를 위해서 장치했다면 그분에 대해서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경꾼처럼, 이웃 동네 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산도 높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산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 좋으냐, 밋밋하고 평평한 것이 좋으냐?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한 것이 좋습니다. 그거 왜 그러느냐? 그 모양이 춤추려고 하는 어떤 형을 갖기 때문입니다. 별의별 모양의 곡선을 그리면서,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면서 가지각색의 형태를 나타내면서 형성되어 있어야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춤입니다.


자연 가운데는 멋진 춤이 있고, 멋진 음악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멋진 예술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자연 가운데는 참 많습니다. 세계에서 아무리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있다 하더라도 자연의 오케스트라보다는 못합니다. 맑은 가을날 해가 잘 드는 숲속에 가서 가만히 들어보면, 벌레 소리 등 온갖 소리들이 그야말로 어떤 오케스트라의 합주곡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또 바람이 쑤욱 불고, 햇빛이 비치고, 나비가 훨훨 날고,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야말로 환상적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어떤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통해서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전부 다 음악적이고 예술적입니다.


노래하고 춤을 춘다 할 때 혼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게 좋으냐, 아니면 둘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게 좋으냐? 둘이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에 대한 노래를 좋아합니다. 여자가 여자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여자에게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고 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남자는 어떠냐? 남자도 남자에 대한 노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자 필요없어. 내가 이만한 남자니 어디에 가든지 부족한 게 없다. 머리가 좋고 실력이 있는데 여자가 왜 필요해. 나 혼자 살지󰡑 그런 남자가 없습니다.


노래와 춤이라는 것은 상대가 없으면 재미 없습니다. 새들이 짹짹짹 하는 데도 혼자서 그냥 짹짹짹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친구를 찾든가, 함께 살 대상을 찾든가, 그다음에 밥을 먹으러 가자든가, 날이 밝았다든가 하는 여러 가지의 의사소통입니다.


우리 눈은 보기를 좋아하고, 귀는 듣기를 좋아하고, 코는 냄새 맡기를 좋아하고, 손은 만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면 여자는 여자를 만지는 것이 좋으냐, 남자를 만지는 것이 좋으냐? 남자를 만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이 화장을 하는 것은 왜 하느냐? 자기 보기에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 보기에 좋으라고 합니다. 꽃도 마찬가지입니다. 꽃이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를 가진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누구를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은 춤추고 노래하면서 살기 때문에 혼자서는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적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박물관


우리가 하는 말은 왜 생겨났느냐?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자기만 위하려면 말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면 말 중에 좋은 말은 무슨 말이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 제일 좋은 말입니다. 세상이 반대하고, 세상이 틀렸다고 손가락질하는 통일교회 선생님은 무슨 말을 하느냐? 사랑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가 환영하고 하나님이 환영합니다. 세상은, 사탄세계는 선생님을 반대하지만 그 반대하는 사람은 이 우주와 하나님이 자체력을 통해서 추방합니다. 그래서 망합니다. 우주의 힘과 하나님의 힘은 선생님을 환영합니다. 미국 사람이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우주의 힘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 광물세계도 사랑의 노래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물세계도 사랑의 말을 하고, 사랑의 노래를 한다󰡑고 하면 얼마나 멋지냐? 사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바위가 얘기를 하고 노래를 합니다. 땅이 얘기를 하고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냐? 하나님이 지은 사랑의 이상을 찾아가기 위해서, 사랑 이상의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낮은 급이지만 사랑이 그리워서 노래하고, 사랑을 찾아서 영원히 운동합니다.


이렇게 볼 때, 자연은 인간에게 이상적 사랑을 가르쳐주는 사랑의 표본물들이요, 사랑을 교시하는 교재입니다. 그러한 자연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가르쳐주기 위한 박물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사람을 완성시키 위한 교재입니다. 사람의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광물계도 󰡐어서 사랑을 완성하소󰡑 하고, 식물계도 󰡐사랑을 완성하소󰡑 하고, 동물계도 그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을 중심으로 주인 된 사람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이 충만한 가운데서 사랑을 갖고 살고, 하나될 수 있는 세계가 되기 때문에 그걸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완성과 동시에 인간의 사랑 완성, 우주의 사랑 완성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모두가 󰡐, 행복하다󰡑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전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곤충도 쌍쌍으로 되어 있는데, 소리를 내고 노래를 합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냐? 노래를 자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짝을 위해서 합니다. 짝을 위해서 전부가 노래합니다. 새들도 쌍쌍입니다. 새들이 노래하는 것도 배가 고파서 먹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합니다. 모든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빼면, 짝을 빼면 노래도 없어지고 춤도 없어집니다. 예술이 없어집니다. 미술같은 것이나 문학은 전부 자연에서 배운 것입니다. 전부 그렇습니다.


우주는 사랑을 중심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 조화의 매개체가 되어야 하는데, 깨져 나갔으므로 우주도 슬퍼하고 하나님도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벌레도 쌍쌍으로 되어 있어서 서로 말도 하고 노래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은 자기들이 희생되어서, 자기들이 잡아먹혀서 더 높은 존재의 세포가 되어 사랑의 감촉을 전할 수 있는 하나의 존재물로 발전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사랑에는 죽음을 극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을 바쳐라󰡑고 합니다.


봄이 되어 새가 노래를 하면, 그 새의 노래를 듣자마자 자기 아내를 생각하고 자기 자식을 생각하고 자기 나라를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하고 하나님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 됩니다. 새는 새들끼리만 생각하지만 인간은 관계성을 갖습니다. 동물세계, 식물세계, 천상세계의 중간 매개체로서의 관계성을 가진 것이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전부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권입니다.


만물의 소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장식품이 되는 것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데, 그 말을 왜 하느냐? 변치 않는 사랑의 왕좌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의 왕자가 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인간 세계에서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하고, 또한 모든 존재세계의 어느것도 가보지 못한 단 하나의 길인데,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멋집니다. 모든 존재의 바람은 하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간의 조상이 그 길을 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물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간다면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담 해와에게 󰡐, 따라와라󰡑고 해서 같이 갑니다. 사랑의 왕좌를 향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 뒤를 사람이 따라가고, 그다음에는 사람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만물아, 따라와라󰡑고 해서 만물도 같이 따라갑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그 왕좌에 앉으면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앉게 되고, 만물은 아담 해와를 둘러쌉니다. 그렇게 되어서 하나님이 아들딸을 사랑하게 될 때, 모든 만물도 그 아들딸의 사랑을 받고 귀여움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할 수 있는 첫날은 봄철이 되겠느냐, 여름철이 되겠느냐, 가을철이 되겠느냐, 겨울철이 되겠느냐? 그 첫날은 봄철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봄철은 모든 것이 변화무쌍하고, 피어나고, 아름다움이 번성하고, 향기를 풍기는 때입니다. 모든 장식이 완전히 갖추어지는 때가 봄철이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첫날이 봄철입니다.


그런 왕좌에 하나님이 군림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아담 해와가 받는 순간 만물은 얼마나 좋아하겠느냐?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아담 해와가 첫사랑의 키스를 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런 자리를 우리 조상들이 구경했고, 만물이 구경했으며, 하나님이 구경했느냐? 못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아담 해와가 사랑했다면, 그때에 있었던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만물에 대해서 󰡐, 너는 어떠한 역사를 가졌느냐?󰡑 하고 물어보면, 󰡐나는 하나님이 부모로서 아들딸을 사랑할 때, 그 사랑 가운데 향기를 품은 장식품이었다󰡑고 한다면, 그 만물이 얼마나 영광스럽겠느냐? 그렇게 되었다면 이 세계 만물은 하나님이 사랑했던 옛날의 박물품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자연박물관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원한 사랑의 장식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비록 길가의 밟히는 풀 포기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장식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어준 하나님 동산의 산 박물관


이 우주는 인간인 󰡐󰡑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를 위해서 이 우주를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뭐라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하나님에게 󰡐이 우주는 누구를 위해 지었소?󰡑 하고 물으면, 󰡐레버런 문 너를 위해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선생님 하나님이요, 우주도 선생님 것입니다. 말뿐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꽃이 피어 향기가 나는 아름다운 꽃동산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비가 날아들고, 벌이 찾아옵니다. 그 꽃동산은 우주의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고귀함과 천사세계가 화동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전부가 나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그만 새가 짹짹거리는 것도 나를 보고 그러고, 전부 나와 인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나비가 쌍쌍이 나는 것보다도 더 아름답게 살아야 되고, 새들이 좋아하는 것보다도 더 아름답게 살아야 되고, 모든 동물들이 사는 것 이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되어 참새가 짹짹거리면 󰡐참새야, 금년 봄에는 네가 나보다 짹짹거리고 좋아하지만, 내년 봄에는 내가 너보다 더 즐거워할 것이다󰡑 그래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노래하고 향취를 풍기는 것은 누구 때문이냐?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따라와 자극받고 즐길 수 있도록, 내가 동물이나 만물을 통해 느끼는 거와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입을 것이 없고 나그네 신세가 되었더라도 뜰에 척 누우면 하늘이 내 이불이요, 옆에 흐르는 물이 내 식수요, 동산에 피어 있는 모든 만물이 내 음식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한 방울의 물을 보고도 󰡐너는 대해(大海)의 물과 인연을 가진 그런 위대한 물이구나󰡑 그렇게 찬양해야 합니다. 조그만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그렇게 찬양해야 합니다.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있으면 그 그림을 박물관에 보관하고 세계에 자랑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그린 그림밖에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만든 조그만 풀 포기에도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이 우주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어준 산 박물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주인이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임을 알기 때문에 전부 그 주인한테 관심을 갖고 따라다니려고 합니다. 거기에는 국경도 없고, 어떤 벽도 없습니다.


인간은 전부 다 자연 가운데서 배워야


태풍이 불어오는데, 태풍에게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힘이 있고 큰 나라이기 때문에 여기는 누구도 못 들어오게 되어 있다. 태풍 너도 못 들어온다󰡑고 해서 그게 통하느냐? 통하지 않습니다. 조그만 개미도 마음대로 넘나들고, 벌레도 마음대로 넘나듭니다. 전부 다 이러는데 인간은 왜 마음대로 못 넘나드느냐?


또 멕시코에 있던 참새가 미국으로 넘어와서 미국에 있던 참새하고 쌍쌍이 되어 마음대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릅니다. 모든 동물들이 마음대로 넘나들면서 살고 있는데, 사람은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연을 바라볼 때, 참 신기합니다.


미국에 있는 물과 한국에 있는 물의 맛이 다릅니다. 공기의 맛도 미국 공기와 한국 공기가 다릅니다. 태양빛도 한국 태양빛과 미국 태양빛이 다릅니다. 다르지만 서로 통합니다. 사람도 그렇게 다 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느냐? 얼마나 풍류적이고, 얼마나 시적이겠습니까? 만사에 다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밑창에서부터 저 꼭대기까지, 하나님까지 통할 수 있는 길이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줄이 네 줄입니다. 네 줄이지만, 한 줄이 󰡐󰡑 하고 울리면 다른 줄도 따라서 울립니다. 소리는 안 나지만 울립니다. 전부 화동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주의 한 가지가 󰡐󰡑 하게 되면, 우주 전부가 울립니다. 내가 바이올린 줄을 퉁기면 우주가 그 곡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공기입니다. 공기에 의해서 울립니다. 이렇게 공기가 매개작용을 하는 것처럼 영계에서도 매개작용을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줄을 치면 󰡐-󰡑 하고 영계 전체가 울립니다. 그런 세계에 앉아서 사랑의 줄을 치면 천사가 와서 춤을 추는 그런 황홀경이 벌어집니다. 거기에서 내가 시를 읊으면 천사들이 그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춥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기분 좋아서 󰡐, 내 아들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느끼면서, 학교에 가서 공부하더라도 나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은 모든 자연의 묘미를 깊이 알아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공부하자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지냐? 하나님을 앎으로써 더 깊은 사랑을 하고, 더 높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내게 엄격한 교육을 하더라도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자연의 사랑을 흡수하게 하고, 나를 사랑의 주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런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사회에 나가 일하는 데 모진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사랑을 펴기 위해서, 사랑의 진가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만물을 지었는데, 사람이 모든 만물들에게 폭행을 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배우려고 하고, 만물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입장에 있어야 할 텐데, 도리어 무식하고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도리어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러니 만물이 기가 막힌 입장입니다.


위대한 화가나 위대한 음악가, 즉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연의 깊은 곳에 들어가 자연에 도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으로부터 자극을 강하게 받을수록 예술분야에서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전부 자연 가운데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책상 다리 같은 것을 보면, 닭 다리나 개 다리처럼 생겼습니다. 전부 유선형입니다. 또 비행기 같은 것을 보더라도 유선형입니다. 전부 잘 흘러갈 수 있게끔 자연에서 배워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냇가에 있는 돌도 유선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자연을 산 박물관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니 만큼 나도 아버지를 사랑해야 합니다.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연에 부끄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땅 앞에 그 도수를 맞춰 춘하추동을 음미하면서 나날을 행복하게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인간인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87-316, 131-102, 104-231, 106-128


3. 하나님의 창조와 피조세계


우주 창조의 기원


하나님은 무형의 중심자입니다. 그래서 유형의 중심자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 중심자가 없다고 말하면 하나님에게 실례입니다. 그래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실체를 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선생님이 밝혀서 선언하니까 하나님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 것을 말해주어서 기분 좋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체의 상대자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상대는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나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해서 우주 창조라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주 창조의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거기에 일치되는 계열로, 위상은 다르더라도 주체와 대상의 배열이 나란히 되게끔 짜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피조세계는 모두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 쌍, 두 쌍, 이렇게 전부가 쌍쌍인 주체 대상의 상대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물은 주체 대상의 관념을 절대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물을 지을 때, 가장 작은 것부터 만들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의 주체이므로 실체 상대권, 절대적인 유형의 실체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무형의 성상을 유형의 실체로 전개하는 창조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피조세계는 광물세계까지도 전부 다 주체와 대상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이루는 분자도 플러스 이온과 마이너스 이온의 주체 대상 관계이고, 원자도 양자와 전자의 주체 대상 관계입니다.


모든 것이 왜 이렇게 되어 있느냐? 그것을 알려면 먼저 우주가 사랑으로 시작되었다는 그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주는 사랑을 위해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단번에 생겨났느냐? 이것을 학교 선생님에게 물어보든지 기성교회 목사에게 물으면 󰡐그런 무례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목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것은 말하는 게 아니야. 이 지옥에 갈 녀석!󰡑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는 그런 방식으로는 통하지 않습니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이론적으로 맞아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컴퓨터로 성격 분석을 하고 이론 분석을 하는 무서운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무지했기 때문에 기적도 통했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는 미래를 향해서 약동하는 젊은이들의 심정권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근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다󰡑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한 존재의 기원, 존재의 과정을 동기로 해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우주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동기는 사랑


오늘날 과학자들은 우주가 힘으로 형성돼 있고, 이 힘에 의해서 우주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는 전기라는 힘이 먼저 있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을 통해서 전기가 생깁니다. 작용을 해야 전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작용이 있기 전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즉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작용은 혼자서는 할 수 없으므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어야 작용을 하고, 그 작용을 통해서 전기가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힘도 주체와 대상이 작용을 해야 생깁니다. 그러니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힘으로부터 우주가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힘이 먼저가 아니라 작용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먼저겠느냐, 생명이 먼저겠느냐? 사랑이 먼저입니다. 지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다고 생명이 제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어디서부터 했느냐? 생명에서부터 했다고 하더라도 그 생명의 발원지, 동기는 사랑입니다. 생명이 생겨난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남자가 생겨난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도 여자를 만나 사랑하기 위해서 삽니다. 여자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고, 사랑을 위해서 삽니다. 여자가 남자한테 눈을 깜박깜박 하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생명󰡑 하면 그것은 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세계 앞에 나타날 때, 사랑의 본질로 나타납니다.


우주창조의 원칙


하나님은 지혜의 왕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왕, 이상의 왕, 평화와 행복과 자유의 왕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참된 사랑의 기원을 어디에 두었느냐? 참된 이상의 근본을 어디에 두었느냐? 참된 행복과 참된 평화의 근본을 어디에 두었느냐? 그 근원을 확실히 알아야 나도 참된 사랑행복이상평화를 하나님과 같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만 생각했다면 천지창조를 했겠어요? 창조는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예술가는 최고의 걸작품을 만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예술가는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 투입합니다. 다 투입하는 데서만이 완전한 걸작품이 나옵니다. 그 이상 할 수 없다 했을 때, 비로소 걸작품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생각할 때, 기성교인들은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말씀으로 지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술 부리듯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있는 지성을 다하고 자기 일신을 전부 투입해서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우리도 정성을 안 들이고, 피와 살을 투입하지 않은 것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내 사상 중의 사상, 내 전체 중의 전체를 투입했기 때문에 희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자체가 투입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힘을 투입해야 창조가 가능합니다. 힘을 투입하지 않고는 무슨 물건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투입을 하는 데서 완전한 대상이 성립한다는 원칙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주체로서 대상을 만들기 위해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상을 위해서 있겠다고 운동을 시작한 것이 창조입니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가 이상적 출발점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 나한테 와서 달라붙어라󰡑 하는 흡수가 아닙니다. 투입입니다. 󰡐달라붙어라󰡑가 아니라 투입입니다. 그 말을 돌이켜 하면, 󰡐위해 존재하는 원칙󰡑에 이상적 출발점을 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투입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완전 투입으로 사랑의 대상을 창조한 하나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어떻게 했느냐? 만물을 짓는다는 것은 자기의 본질을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이고, 에너지를 투입했다는 것은 자기 본질의 감소를 말합니다. 손해보는 자리입니다. 대상세계 창조는 사랑으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투입했습니다. 투입한 그것이 자기에게 열매 맺히게 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열매 맺히게 했습니다. 투입함으로써 하나님이 소원(疎遠)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원칙으로 돼 있기 때문에 오늘날 사랑의 전통에서 부모의 사랑에 그 본질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도 창조한 사람을 위하는 입장에 서겠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창조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투입해서 사랑의 대상을 창조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도 사랑의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서는 못 합니다. 아무리 절대자라도 그 절대자 앞에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지을 때 아무렇게나 지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말씀으로 지었다고 했는데, 아무렇게가 아닙니다. 천신만고끝에 자신의 120퍼센트, 몇백 배를 투입해서 지었습니다.


창조는 투입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하나님이 아무리 훌륭하고, 아무리 절대자이고, 전지전능한 분이라 하더라도 혼자서는 좋을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명사, 혹은 좋다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갖춘 자리에 있어야 좋고 행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으면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느냐?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혼자 있어서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잘 부르는 성악가가 아무도 없이 혼자 노래를 불렀다고 합시다. 그래서 행복하겠느냐?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좋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었다는 것은 힘을 투입했다는 말입니다. 힘의 투입입니다. 힘의 투입은 자체의 소모를 말합니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힘을 뽑아내면 반드시 힘을 보충해야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밥을 먹고 힘든 노동을 하게 되면 빨리 배가 고픕니다. 그리고 빨리 피곤해집니다. 왜 그러냐? 힘을 투입하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사에 손해 보아 가면서 좋아할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플러스되어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지은 것은 울기 위해서, 슬프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좋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플러스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플러스될 수 있는 것을 언제 찾을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피조물의 완성이라는 표준이 있습니다. 󰡐이때까지 투입하면 그때부터 돌아온다󰡑는 것이 있습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습니다. 󰡐이만큼 노력하면 그때에 이익이 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데도 󰡐한계점까지 열심히 해서 그것만 완전히 통과하면 이익이 돌아온다󰡑는 표준이 있습니다. 무슨 고시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노력하여 그 한계점을 밀고 넘어가게 될 때에, 반드시 이익이 돌아옵니다. 이것이 우주의 법칙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힘을 투입한 것입니다. 힘을 투입했습니다. 자기 자체를 소모했습니다. 그렇지만 투입할 수 있는 것을 완전히 투입해서 사람을 창조했으면 그 완성된 사람은 어디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되면 어떻게 되느냐? 그다음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데 있어서 1백을 투입했는데 1백보다 적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은 창조를 계속할 수 없습니다. 1백을 투입했으면 돌아오는 데는 110, 2, 3백 이렇게 보다 큰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무한한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투입하면서도 기뻐합니다. 따라서 돌아오는 데 어떻게 돌아와야 하느냐? 보다 차원 높은 가치의 것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 가치의 것으로 돌아올 때, 기쁠 수 있는 것이 뭐냐? 사랑입니다.


사랑을 자극시키기 위해 상징적 형상적으로 전개된 만물


우리가 보는 모든 만물은 무엇 때문에 지어졌느냐? 존재하는 모든 광물이나 식물, 동물세계는 무엇을 근원으로 해서 지었느냐?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 자체를 보고 좋아하기 위해서 짓지 않았습니다. 그 근원은 어디까지나 참된 사랑입니다. 상하 전후 좌우에서 사랑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형상적인 실체로 만물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연결하면 모든 것이 통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서로 느낄 수 있고, 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름다운 꽃이라든가, 해와 달과 별과 물과 공기라든가 이런 것들도 사랑을 대표한 실체로 전개되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떴다󰡑 할 때, 그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해가 생겨난 것은 누구를 위해서냐? 또 물과 공기와 흙은 생명의 요소인데, 이것들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느냐? 이런 것들은 자기 계열이 상징적 단계에 있느냐, 형상적 단계에 있느냐, 실체적 단계에 있느냐 하는 위치만 다르지, 사랑의 표시체로서 사랑을 자극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것은 같습니다. 동서남북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랑을 미화할 수 있는 자극을 줘서 주인 된 그분이 사랑의 인격을 완성하는 데 도와주기 위한 소재입니다.


태양을 보게 되면, 태양은 내가 완성할 수 있는 사랑 이상세계의 소재입니다. 󰡐태양과 같이 빛나야 되고, 태양과 같이 열이 있어야 되겠구나. 태양에 의해서 생명이 자라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상대적 세계에 생명력을 발발시킬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야 되겠구나. 사랑의 내적 자신을 촉구하기 위해 태양은 뜨는구나󰡑 하고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우리 사지백체의 혈관을 통해서 피가 흐르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몸은 4분의 3이 물로 되어 있습니다. 물은 깨끗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빛깔이 없고 투명합니다. 동에서 보나, 서에서 보나, 남에서 보나 그림자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에 동화된 투명체가 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물이 내 몸에서 돌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먹고 사는 모든 것을 보고도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스를 마실 때는 주스가 나에게 올 때까지 얼마나 수고롭게 찾아왔겠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수입품이라면, 미국이라든가 브라질에서 나에게까지 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그것을 재배해 거두어 어찌어찌 해서 나에게까지 찾아왔는데, 그 온 목적은 무엇이냐? 마시고 설사하라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설사하라고 먼 데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마신 사람은 나보다 가치 있는 인격을 갖추어서 최고의 중심존재인 하나님 앞에 생명의 인연을 연결하고, 그와 동시에 사랑의 길을 두꺼운 파이프로 연결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히는 주스 자체는 그러한 사랑의 자극적인 인연을 하나님 앞에 전달할 수 있는 주스가 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무관심했습니다. 이 옷은 나에게 어떻게 해서 왔느냐? 요즘에는 화학섬유가 생겨서 간편해졌습니다. 공장에서 옷감을 만들 때 색깔이라든가 무늬 같은 것이 한꺼번에 찍혀 나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 내가 입는 옷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면 왜 옷을 입느냐? 옷이 인간의 몸에 입혀지는 것은 최고의 사랑이상 완성체가 되어 하늘땅이 동할 수 있는 제일 가는 골수의 자리에 서 주기를 바라서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사랑이상의 완성체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랑으로 동화될 때에, 거기에는 번창이 벌어지고 화합이 벌어집니다. 힘을 가지고, 외적인 자기 미모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무리 미모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미모를 끌고 갈 수 있는 보다 큰 사랑의 힘이 없다면 그 자신은 불행할 것이고, 자리를 못 잡고 방황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보다 큰 주체성을 지닐 때만 안정권이 벌어지고, 행복한 생활이 전개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우주는 하나님의 모양을 실체화시킨 것


지구를 보면 사람을 닮았습니다. 지구가 사람을 닮았다면 지구의 머리는 어디냐? 머리가 어딘지 모르지만 북극이라는 것이 있고, 남극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지구도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 숨결이 뭐냐? 지구에는 자력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자력선이 지구의 숨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구 표면에 있는 나무는 뭐냐? 우리 머리카락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지표는 피부와 같고, 지층은 근육과 같고, 암층은 뼈와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자기 모양을 펼쳐 놓아 실체화한 것이 우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것을 그냥 그대로 실현화한 것이 만물 창조이기 때문에 자신을 닮게끔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어떤 부분을 닮게끔 빚어놓은 것이 만물입니다. 그러니 어떤 물건에도 하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주는 뭐냐? 하나님이 지은 창조물이지만 전체를 두고 볼 때는 하나님의 한 대상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우주를 하나님의 대상 존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사랑에 취해 살고 싶어서


사랑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절대자인 하나님이라도 상대가 없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상대가 없으면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인간도 혼자 사는 홀아비나 과부를 불쌍하다고 하고, 부모가 없는 고아를 불쌍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고 지식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또 권력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에게 다 있습니다. 사랑에 취해 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공론(空論)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기도를 통해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오늘날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의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참된 사람을 만나 참된 사랑에 취하게 되면, 󰡐어허 둥둥 내 사랑󰡑이라고 하면서 춤을 출 것입니다. 그리고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노래도 할 것입니다. 이 우주 만상의 존재물들은 하나님과 정서적인 면을 관계로 해서 태어났으므로 하나님이 사랑에 취해 󰡐어허 둥둥 내 사랑󰡑이라고 하면서 춤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고, 듣고 싶어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웃음소리도 듣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고독한 것은 싫기 때문에 사랑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만물을 지은 것이 사랑의 이상을 이루기 위함인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냐? 원숭이가 아닙니다. 고릴라 같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전 투입체로서의 인간


하나님이 대상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천지 만물의 창조입니다. 결국 자기 상대 존재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 자체를 투입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전개했습니다.


창조를 한다는 것은 힘의 투입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란 힘의 소모입니다. 그러면 투입했는데, 얼마나 투입했느냐?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장난식으로 창조한 것처럼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참된 생명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사랑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된 이상을 완전히 투입했습니다.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가 다릅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자기를 생각했지만 창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상을 위했습니다. 내가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다, 아들딸을 위해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이상이라는 말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므로 이상적인 존재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1백퍼센트 투입했는데 90퍼센트만 돌아온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1백퍼센트 투입해서 돌아올 때 90퍼센트만 돌아오고 10퍼센트 손해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상으로 돌아올 것이 있기 때문에 창조를 했습니다.


1백퍼센트를 투입함으로써 없던 것이 생겨났습니다. 대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대상이 내가 바라던 사랑을 갖고 오고, 생명을 자극시키는 이상적 대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도 사랑에는 끌려갑니다. 그 대상이 끌면 끌려갑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곳에 하나님도 갑니다.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 투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화가는 장난으로 쓱쓱 그린 그림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밥도 먹지 않고 정신을 집중해서 그린 작품을 보고 걸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작품을 보관하고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완전히 투입함으로써 보다 가치 있고 이상적인 완전형으로 전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그들을 위해 있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에서 상대를 위하는 때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자기를 위주하지 않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에, 대상을 위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원칙이 우주의 근본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228-123, 86-55, 60-37, 65-9, 178-234, 85-141, 85-69, 69-71


4. 아담 해와의 창조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는가


하나님은 만물을 짓고, 그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 시조를 에덴 동산에 지었습니다. 인간을 지을 때 하나님의 어떠한 노리개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취미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지어 만물을 대표하는 중심으로 세울 때까지 하나님의 수고와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온갖 정성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사랑을 몽땅 퍼부어서 지었습니다. 어떠한 힘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고,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인연 가운데서 지었습니다. 이렇게 지은 인간이기에 그 인간을 통하여서만이 평화가 깃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하나님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 골수 중의 골수를 몽땅 퍼부어 지은 인간이기에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끌면 끌려오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끌면 끌려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연 가운데서 내용과 목적이 일치하게끔 인간을 지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지어놓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이 시를 읊는다면 세상의 어떤 시인이나 소설가도 표현하지 못하는 최고의 걸작품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은 하나님도 아니요, 만물도 아니요, 오직 만물을 대표한 인간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흉하고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넘칠 수 있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싹틀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가 읊어질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한 가치를 지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습을 전 우주를 대표한 모습으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온갖 정성을 들여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류 시조의 모습이었습니다.


주위에 지어진 모든 만물은 인간에게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들려오는 새 소리는 아담의 심정을 울려 파동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나비나 벌, 그외의 모든 만물은 아담 해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자극적인 상징체였습니다. 불어오는 바람도, 흘러가는 물도, 들에 있는 풀 한 포기도 모두가 아담 해와를 사랑한다는 그 실체의 표상체로 지었습니다.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두고 지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냐? 하나님이 보기에 자랑스러운 인간이었고, 하나님이 품에 품고 영원히 영원히 놓지 않고 싶었던 인류 시조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담의 손길을 붙들고 󰡐! 아담아, 너와 나는 그 누구도 영원히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이야󰡑 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하고, 새로운 약속을 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있기를 고대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영원 불변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 지음받은 인간은 평화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자신을 가지고 천하 만상을 다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딸이 손에 손을 맞잡고 사무치는 심정으로 󰡐아담아!󰡑 󰡐, 아버지!󰡑 하면서 천지의 모든 기업을 상속해주고, 그것을 받을 수 있는 한 시간을 하나님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리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은 우리가 영계에 가더라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데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힘은 있는데 그 힘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가 뭐냐? 하나님은 혼자서는 기쁠 수 없고 대상이 있어야 기쁠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으로 우리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실체의 몸을 가진 인간의 아버지가 되려면 하나님도 체()가 있어야 합니다. 체가 없고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첫째는 체를 갖기 위해, 둘째는 대상으로 취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장성하여 하나님을 중심하고 성례식을 올리면 하나님과 한 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고 우리 인간은 실체를 쓴 하나님의 몸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3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어서 구원받는 사람도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데, 본연의 인류의 참된 조상 자리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내적인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외적인 아버지는 아담입니다. 그러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핏줄을 타고난 틀림없는 아들딸입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아담 해와의 손자는 하나님의 손자요,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후손이요, 그 후손을 통한 모든 민족과 국가와 세계는 하나님의 민족이요, 국가요, 세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혼자서도 사랑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혼자서도 사랑이 이루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여자면 여자 혼자서 아무리 󰡐내게 사랑이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하더라도 혼자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무리 절대자라 하더라도 혼자서 󰡐아이구,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내 사랑아󰡑 해도 안 됩니다.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없으면 찾아서라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종교는 하나님이 사랑을 찾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하나님이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관계가 성립되지 않고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만 사랑의 힘이 활동할 수 있습니다. 주체 대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곳에는 사랑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피조만물을 지었는데, 그 피조만물은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서 전개해 지었습니다. 그중에서 자신의 인격을 대신할 수 있는 중심존재로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소성을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정(內情)을 체득하고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더라도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서로가 기뻐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절대자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 절대자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인간의 구조와 가치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존재로 지음받았느냐? 물질적인 모든 요소를 갖춘 존재, 하나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형상으로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흙과 물과 공기로 지었습니다. 이러한 창조주의 이념을 통하여 지음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 하나님의 신성에 화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가 없다면 인간 자체에는 어떠한 이상도 희망도 소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창조원칙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모든 물질과 통할 수 있는 물질적인 요소의 결합체로서 육신을 빚어놓고 그 육신에 육신을 주관하는 영을 불어넣어 인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의 주관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해야 합니다. 천사장이나 여러 형체를 가진 실체, 그리고 무형의 실체까지도 주관하려면 그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形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물질적인 요소로 빚어놓고 무형적인 요소인 영을 불어넣어 창조하였습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으로 하여 영육(靈肉) 양면의 세계를, 즉 무형실체세계와 유형실체세계를 주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목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의 인격적인 실체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아담 해와 완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이, 곧 형()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그의 형태, 인상(人相), 인격 등이 무형세계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습니다. 하나님도 형()이 없으면 형()의 세계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냐? 물질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육신)와 신령적인 모든 인연을 대신한 실체()가 결합된 하나의 실체로 빚어진 자체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러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기 때문에 창조주 앞에서 즐거워할 수 있고, 창조주에게 경배할 수 있으며, 창조주에게 송영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 자체는 지극히 작은 한 개체지만, 우주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우주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러한 가치를 지닌 완성된 인간을 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하나님의 실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필요로 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이상을 성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무형의 하나님이 형상을 쓰고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형의 하나님이 유형의 형상을 쓰고 유형세계와 관계맺을 수 있는 그 기초, 그 핵심이 아담 해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체를 가진 피조세계를 전부 다 쌍쌍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 성품 속에 있는 마음 그 자체를 하나님도 보고 싶어서 그걸 전개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사람처럼 체를 입고 싶어합니다. 그 체를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같이…󰡑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집입니다.


아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서 무형의 아버지가 되고, 아담은 유형의 아버지가 됩니다. 고로 아담은 실체를 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실체를 필요로 하느냐? 자신이 지은 실체세계를 무형으로는 주관할 수 없으므로 실체를 쓴 하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체의 하나님으로 아담과 해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해와는 뭐냐?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하나님의 몸입니다. 하나님의 몸이 되는데, 남자는 플러스쪽 몸이고 여자는 마이너스쪽 몸입니다. 그런 아담 해와가 무엇을 중심으로 묶어지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생식기를 중심으로 묶어집니다.


아담이 장가를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담이 장가가서 하나님과 하나되고, 해와도 하나님과 하나되고, 또 아담과 해와가 하나되면 어떻게 되느냐? 해와는 아담의 아내이고, 아담은 하나님의 실체이므로 결국 해와는 하나님의 외적인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내적인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실체인데, 그들이 생식기를 중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사랑하느냐? 마음은 무엇을 통해서 사랑하느냐? 마음은 몸을 통해서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완성한 아담 해와에게, 하나님의 집과 같이 된 아담 해와에게 들어가서 하나님이 주인이 된 가운데 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요, 그다음에는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실체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후손을 중심으로 만물세계와 연결해 하나님의 가정으로부터 하나님의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영원히 만우주의 주관자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의 문화권에서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후손이요, 하나님의 문화권입니다.


인간과 영원히 같이 살려고 만든 하나님


하나님은 사람과 영원히 같이 살려고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좋은 것 중에는 봐서 좋은 것이 있고, 먹어서 좋은 것이 있고, 만져서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먹어서 좋고, 보아서 좋고, 만져서 좋은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진짜 좋은 것은 영원히 가지고 살면서 좋아해야 합니다.


상점에는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기분이 좋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지고 살면서 좋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도 사람을 닮았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가지고 살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어디에 갖다 놓고 싶으냐? 안방에 갖다 놓고 싶으냐, 창고에 갖다 놓고 싶으냐? 제일 좋은 것은 틀림없이 안방에 갖다 놓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제일 좋은 분이기 때문에 누구나 자기 집 안방에 갖다 놓으려 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것을 안방에 갖다 놓았는데, 누가 훔쳐갈까봐 안심이 안 되면 또 어디에 숨기느냐? 허리춤에 숨깁니다. 보물을 가진 사람은 자물쇠가 열 개씩이나 있는 장롱에 숨겨 놓고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결국 그것을 허리춤에 달고 다녀야 안심합니다. 그렇게 해도 훔쳐갈까 걱정이 되면 그 보물을 뱃속에 집어넣을 수 있으면 집어넣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왜 그러냐? 제일 귀한 것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어디에 갖다 두려고 하겠느냐? 자신의 품속입니다. 품속 중에서도 마음의 품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천국은 네 마음에 있고, 하나님이 네 마음에 있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보물 중의 보물이니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내 마음에 갖다 놓으면 내 마음을 누가 주관하느냐? 본래 사람은 마음이 몸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으면 하나님이 내 마음을 주관하게 됩니다. 인간의 소원은 󰡐하나님, 제 육신을 하나님의 소원대로 써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육신의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주인의 명령을 받드는 몸이 되면 하나님이자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자 나요, 내 육신이자 내 마음의 상대요, 내 마음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상대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천지 통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되는 것을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인 아담 해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했느냐? 아담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고, 해와 속에 하나님이 들어가 󰡐천정으로 하나되자󰡑해서 하나됐어야 합니다. 아담의 마음에 무형의 하나님이 완전히 보물 주인으로 강림하여 아담이 표시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은 무한한 가치를 형성하게 되면, 몸은 마음의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같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의 소원은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몸과 하나된 가운데서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주고도 또 주고 싶어하게 됩니다. 주고 또 주고 싶어하면 돌아가게 됩니다. 발동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돌고 또 돌아 완전히 통일됩니다. 그러한 종자를 뿌렸더라면 그러한 종자의 열매가 맺히게 되므로 그 씨는 아무리 쪼개도 그러한 내용을 갖춘 종자밖에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참사랑을 갖고 살고 싶어한다

아담 해와는 자기들 스스로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종교적인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신이 있다면 절대적인 신, 즉 하나님에 의해 우리 인간은 지음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어디에 사용하기 위한 물건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또 종이라든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지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상의 실체로 지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 실체의 내용은 뭐냐? 사랑을 중심으로 인간은 자녀의 입장에서 오직 한 남성과 한 여성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상을 중심한 사랑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기 때문에 그 사랑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이 감각이 있다면, 보고 듣고 느끼고 혹은 말하고 하는 이런 감각기관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말을 하더라도 그냥 그대로의 말은 필요없습니다. 사정의 말보다도 사랑의 말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보는 것도 보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자극할 수 있는 시각(視覺)으로 보고 싶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듣더라도 보통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내용을 가진 그런 것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느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지식도 물론 필요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모든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권능을, 힘을 갖고 있되 한계선을 넘은 권능을, 힘을 갖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지은 분이므로 갖지 않은 물질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단 하나 부족한 것, 단 하나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대상자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을 제일 갖고 살고 싶어하겠느냐?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게 될 때,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지식도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대부분 할아버지 할머니가 양로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잘 먹여주고 그러면서 잘 돌봐줍니다. 거기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춤추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지만 눈을 보게 되면 아들딸을 보고 싶어하는 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가 보고 싶어 항상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리운 것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둘의 다정한 애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동서남북과 화합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아들딸, 손자 손녀들과 같이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자기 아들딸 부부가 그립고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또 손자 손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던 것을 생각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사랑받던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합니다. 그럴 수 있는 마음은 사랑의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으로 가도 사랑이요, 서로 가도 사랑이요, 남으로 가도 사랑이요, 북으로 가도 사랑입니다. 위로 가도 사랑이요, 아래로 가도 사랑이요, 중앙에 가도 사랑입니다.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사는 것이 이상적 형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갖고 싶어합니다. 그게 무슨 사랑이냐? 참사랑입니다. 하나님도 사랑을 놓고는 못 삽니다.


하나님도 사랑에 취해 󰡐어허둥둥 내 사랑, 춘향이가 내 옆에 올 수 없으랴!󰡑 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어허둥둥 내 사랑󰡑 하면서 좋아하는 것을 춘향이도 보고 침을 질질 흘리게끔 좋아한다면 어떻겠느냐? 하나님이 좋다고 하겠느냐, 나쁘다고 하겠느냐? 좋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허둥둥 내 사랑아󰡑 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때가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사랑을 좋아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어머니 아버지도, 어린아이도 사랑을 좋아합니다.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20-196, 54-131, 39-7, 4-91, 81-274, 197-9, 92-145, 38-139, 197-120


5. 하나님의 영광의 새아침


한 개인에게 영광스러운 날이란


우리 개인에게 영광스러운 날은 언제냐? 자기가 난 날이 영광스러운 날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태어날 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웁니다. 󰡐응아󰡑 하고 웁니다. 그 시간이 영광스러운 시간이냐? 그날이 기쁜 날이냐? 나오자마자 우는 것이 기쁨에 사무쳐서 운다고 하면 참 멋진 해석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어머니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하며 󰡐어머니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을까? 바깥 세상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고 그리워하다가 그 그리움이 활짝 터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리고 배꼽으로 먹던 것을 입으로 먹을 수 있게 되니 그렇습니다. 아주 급속한 변화입니다.


이렇듯 아기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이 기쁨에 사무쳐서 운다고 생각하면 근사합니다. 진짜 반가운 사람끼리 만나면 눈물이 납니다. 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태어날 때 울었던 그 이상 기뻐서 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그야말로 영광의 새아침입니다.


아담 해와의 탄생에 대한 하나님과 우주의 관심


내가 어떤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다면, 그 나라의 모든 백성이 나를 바라볼 것이고, 그 나라의 모든 만물까지도 바라볼 것입니다. 전체가 내가 태어나는 그 순간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가 우는 시간에도 소식은 전국에 퍼지고, 그 퍼지는 소식과 더불어 환희의 함성은 계속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조상 아담 해와가 태어날 때 태어나는 아기 아담 해와를 바라보는 만물이 있다면, 만물이 관심을 가졌겠느냐, 안 가졌겠느냐? 가졌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상세계는 물론이고 하나님이나 그 누구를 막론하고 전부 신경을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 얼마나 긴장했으며, 얼마나 흥미진진했겠느냐? 아담 해와가 태어남으로써 어떤 변화가 벌어졌겠느냐?


하나님은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 부모의 사랑을 비로소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아내가 아기를 뱄을 때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부모의 사랑이 이렇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더 강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불과 몇 분 전과 태어난 후는 천지 차이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걸 볼 때,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태어난 아담 해와를, 아들딸을 보고 하나님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를 지은 창조주다. 주인이다󰡑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을 상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부터입니다.


그러면 천지 만물을 왜 지었느냐?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하는데, 사랑의 기쁨을 위해 지었습니다. 기쁨의 자극제로 지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그에게 필요한 모든 걸 준비해 둡니다.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마련해 둔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의 물건들이 만물입니다. 그 만물을 대해 아들딸이 기뻐하면 모든 존재의 가치는 비로소 거기에서 발휘됩니다. 그러므로 아들딸이 그 부모가 만들어준 모든 것을, 혹은 준비한 모든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될 때 그 부모도 󰡐참 좋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담 해와를 어떻게 키웠을까


그러면 아담 해와가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났느냐?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어른으로 지었겠느냐, 아기로 지었겠느냐? 아기로 지었다면, 그들이 어떻게 먹고 자랐겠느냐? 나자마자 스스로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서 따먹고 그랬겠느냐? 어머니 아버지가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그런 입장에서 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에 에덴 동산에 아담 해와 말고 천사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지금까지 수수께끼입니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인데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천사와 인간이 사랑관계를 맺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영적인 존재와 인간이 사랑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냐?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의 부모와 마찬가지의 형태로 나타나서 아기 아담 해와를 키웠습니다. 그런 인격을 갖춘 분이 하나님임을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교회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계에 가도 하나님의 형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누구를 닮게끔 나타나느냐? 아들딸은 부모를 닮는다는 것이 자연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형상을 갖고 나타나는 데는, 󰡐내가 이런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아담 해와를 보고 결정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의 아버지처럼 나타나려니 틀림없이 󰡐아담 해와와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에게는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지극히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그날이 제일 기쁜 날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하나님에게 이 우주를 창조한 역사 가운데 어느 때가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겠느냐? 아담과 같이 나타나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를 닮았느냐? 아담 해와를 닮았습니다. 아담의 형상과 해와의 형상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은 것은 체()를 입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자람과 동시에 영계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 자라게 됩니다. 그래야 영계에서 우리도 자랄 수 있는 길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웃으면 하나님도 웃고, 아담 해와가 슬퍼하면 하나님도 슬퍼하고, 아담 해와가 가면 하나님도 가고, 아담 해와가 있으면 하나님도 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럼으로써 하나님도 완성이 벌어지고 인간도 완성이 벌어집니다. 완성을 위해서 모든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완성은 언제 되느냐? 지금까지 맛이 없는 것을 먹다가 맛이 있는 것을 먹는 것이 완성이냐? 걸어가던 사람이 뛸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완성이냐? 어떤 것이 완성이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인간 완성을 위해서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완성이 뭐냐? 원만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최고의 영광이 되는 날은 어떤 날이냐


세계에서 제일이 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욕망입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왜 그러냐? 360도의 원형을 그릴 수 있는 힘의 모체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사랑으로만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세계 누구나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위대합니다.


내가 종이 된다면 누구의 종이 되겠느냐? 돈의 종도 아니요, 권력의 종도 아니요, 지식의 종도 아니라 사랑의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또 아들이 되는데도 돈의 아들, 권력의 아들, 지식의 아들이 아니라 사랑의 아들이 되겠다고 합니다. 왕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로마제국의 네로 같은 권력을 가진 왕이 아니라, 지식을 가진 왕이 아니라, 돈을 가진 왕이 아니라 사랑을 가진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새아침이 무엇이냐? 체를 입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아들딸을 결혼시키는 것이요, 손자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영광의 아침은 같은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20절에 예수님이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도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영광의 날은 아버지가 아들 닮고, 아들이 아버지 닮고, 손자가 아버지 닮고, 할아버지 닮는 날입니다. 그렇게 됐으면 하나님이 춤을 췄을 것이고, 노래를 했을 것입니다.


맨 처음 결혼식 주례는 누가 했겠는가


아담이 참된 아들이 되고, 해와가 참된 딸이 되었다면 하나님이 그 둘의 결혼식을 해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결혼시켜 달라고 하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며 결혼시켜줍니다. 그 결혼식은 시시하게 자기 집안에서 인정하는 그런 결혼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결혼식은 맨처음 있는 결혼식입니다. 그러면 맨처음 결혼식 주례를 누가 했겠는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례를 서면 기분이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주례를 서는데 아들 결혼식 주례를 서고 싶겠느냐, 종 결혼식 주례를 서고 싶겠느냐? 아니면 양자 결혼식 주례를 서고 싶겠느냐? 그것은 물어 볼 것도 없이 아들딸 결혼식 주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직까지 아들딸의 결혼식 주례를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아들딸은 누가 결혼시켜주어야 되느냐? 아담 해와가 결혼시켜주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아담 해와가 해주게 됩니다. 그 이유는 결혼식이 바로 부모의 사랑을 전수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은 부모의 사랑의 전수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이렇게 살듯이 너희도 하나님의 사랑 대신 부모의 사랑을 본받아 살아라󰡑 하며 사랑을 전수하는 것이 결혼식입니다.


결혼이란 남자 여자로 갈라져 있는 것이 완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남자 여자는 남자 중에 제일의 남자요, 여자 중에 제일의 여자가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절대적인 관계를 맺어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 중의 사랑이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할 수 있는 아들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면 볼수록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아들딸이 되어 장성하게 되면 그들이 결혼시켜 달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줍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들을 결혼시켜주고 어디로 가겠느냐? 둘만 재미있게 살라고 하겠느냐, 아니면 그들과 같이 살려고 하겠느냐? 같이 산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려면 인간이 기뻐함과 동시에 하나님도 기뻐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3대를 사랑하고 가야


그러면 아담 해와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합니다. 그게 영광의 날입니다. 그다음에 그 후손은 아담 해와를 닮아야 합니다. 이게 우리의 소원입니다. 닮게 되면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듯 자동적으로 손자를 사랑하게 마련입니다. 여기서는 아담 혼자서만 못 돌아갑니다. 반드시 3대를 거쳐야 돌아갑니다. 왜냐? 천지이치가 3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랑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야 된다 하는 말을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 이것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사위기대라고 합니다. 3대가 완성돼야 합니다.


우리 인간을 볼 때 할아버지 할머니를 60대에서 80대로 잡는다면, 40대에서 60대까지를 중년, 20대에서 40대까지를 청년으로 잡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3대 격입니다. 노년, 장년, 청년의 3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언제 죽어야 되느냐? 아들딸을 다 시집 장가 보내고, 그다음에는 손자 손녀까지 시집 장가 보내고 가는 사람이 영광을 받고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대를 사랑해야 합니다. 3대를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아버지 어머니의 자리에도 서보고, 아들딸의 자리에도 서보고, 하나님의 자리에도 서봐야 합니다. 하나님 자리에 서려면 손자가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종적인 관계라면, 아담 해와에게서 태어난 아들딸은 횡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횡이 되려면 3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손자 때부터 사방으로 보내집니다. 3대에서부터 사방으로 보내집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미국 가정들은 하나님 앞에 불합격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는데, 그렇게 하게 안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젊은 사람들에게 늙으면 양로원에 가서 살고 싶으냐, 자기 집에서 아들 손자하고 같이 살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아들 손자하고 같이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양로원에 보내고 있습니다.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밥만 먹으면 아들 손자가 찾아오지나 않나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니 미국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불쌍합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96-206~252, 41-9~48


6.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내려주신 3대축복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창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3대축복이라고 말합니다. 1 축복인 󰡐생육하라󰡑는 것은 아담 해와가 장성하여 개성완성을 이루어 신성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난 실체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이 되고 무형의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는 제2 축복은 완성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부부를 이루어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해와가 있었고 해와에게는 아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둘이로되 하나를 표준한 하늘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 부부를 이루고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이 주관하는 선주권의 이상세계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해와는 몸의 상징이요 땅의 상징이며, 아담은 마음의 상징이요 하늘의 상징이니 거기에는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둘은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지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몸은 둘이로되 하나, 일체라고 했습니다. 둘이 일체가 되어 무엇을 하라고 했느냐? 자녀를 번식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게 온 피조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이 제3 축복입니다. 주관하라 하신 목적은 무엇이냐? 만상과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창조주는 개인의 창조주가 아니라 온 천주의 창조주이기 때문에 온 천주와 인연맺기 위해 인간에게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까지 허락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인간이 온 세계를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몸 마음이 화하듯이 이 세계는 마음과 화하고 몸과 화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서 축복받은 인간의 가치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귀한 아버지입니다. 영계에 가더라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존재하고 있는 물건은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보이지 않는 거와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한 분밖에 없는 귀한 그 아버지를 어디에 모셔야 하느냐? 내가 사랑하는 귀한 분을 하늘 꼭대기에, 혹은 땅 구석에 갖다 놓을 수 없습니다. 제일 사랑하는 그분이 기쁘면 나도 기쁘기 때문에 매일같이 보고, 어디를 가더라도 함께 가고,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가 자식을 언제나 곁에 두고 있고자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쓰고 있는 분으로 존재한다면 큰일날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주의 중심 되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몸을 쓰고 있다면 하나님을 빼앗기 위해서 싸움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하기 위해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여야 합니다. 안 보이는 하나님을 나만이 볼 수 있고 나만이 대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됩니다. 인간은 이런 자리, 이런 곳에 하나님을 모시고 만나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귀하고 큰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어디에 감춰야 되느냐 하면서 야단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곳에 감추더라도 도둑 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면 인간은 자기만 보고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곳에 감추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 곳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곳에다 감춥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면 어디에 모실 것이냐? 나만이 아는 곳에, 다른 사람이 모르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틀림없이 그런 곳에 갖다 감추려고 합니다. 그런 곳이 어디냐 하면, 우리의 양심입니다. 양심을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지만 양심은 있습니다. 양심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면 나만이 자랑할 수 있고, 나만이 하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누구에게나 보이는 곳에서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고 사랑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하는데 그것을 자랑하고 선포하고서 사랑하는 것은 위험천만입니다. 사람이 그러한 것을 요구할 것을 미리 알고 하나님도 하나의 보좌에 있기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의 중심이 되고, 우리는 그 마음과 하나된 인간이 됩니다.


결국 마음은 주체요, 몸은 상대입니다. 영원히 같이 있습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원한 평등의 자리를 인간에게 부여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허락한 최고의 가치기준입니다. 영원히 같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 󰡐너희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이 됐습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최고 가치의 자리요,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축복의 내용


그러면 영육을 중심삼고 볼 때,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아담과 몸 마음이 완전히 하나된 해와는 종적으로 완전히 성숙하여 신랑 신부로서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대상권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가정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본래 에덴에서 타락하지 않고 이루어야 할 완성권입니다.


그 완성권에 나타날 수 있는 아담 해와가 되었다면 그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결국 그 자리는 축복받는 자리입니다. 복을 받는 자리, 하나님이 복을 빌어주는 자리입니다.


그 복 중에서 제일 귀한 복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의 복을 받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하였다면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결국 완성은 결혼을 말하고, 결혼은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을 말합니다.


결혼이 없다면 인류 세계에서 사랑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봅니다. 결국 사랑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가운데 나타나게 될 때, 그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또 인간 가운데 그 천적인 참된 사랑이 비로소 이루어지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자랑이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또 무슨 축복을 받았느냐? 하나님의 창조의 권한을 인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했던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평면적인, 횡적인 기준에서 창조의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기뻐했고,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소망을 가진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에게도 창조의 권한이 부여됐다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 자녀입니다.


자녀를 왜 사랑하느냐? 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을 우리가 횡적인 실체권에서 이어받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하나님이 기뻐하던 그 기쁨을 우리도 느끼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인간에게 무엇을 부여했느냐? 주관권을 부여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횡적인 입장에 있지만 우리에게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이름을 짓는 대로 됐습니다. 아담이 원하는 대로 모든 천하는 이루어진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관권을 아담에게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혼하는 그 시간이 무슨 시간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상속받는 시간입니다. 그다음에는 재창조의 권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기뻐하던 그 기쁨이 이 결혼을 통해서 벌어집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주관권이 벌어집니다. 완성권에 서서 축복받음으로써 비로소 제일 귀한 것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식이라는 것은 사랑의 현현을 말하는 것이요, 이상적인 창조권을 부여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그다음에 주체자로서 혹은 대상자로서 서로서로 주관권을 부여받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장 귀한 것은 뭐냐? 하나님이 가장 귀하지만, 하나님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다음에 창조의 권한이요, 그다음에 주관의 권한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간에게 상속해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상속받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성립되지 않으면 상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창조의 위업과 기쁨까지도 부여해주신 하나님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다 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까지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한 자리에 세웠지만 인간의 욕망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로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였고, 동시에 이 우주 만물을 지배할 수 있는 걸작품인 인간까지 창조한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도 전능한 하나님의 그 능력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여 지은 걸작품이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그 창조의 능력까지도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런 욕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딸이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것까지도 보태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까지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틀림없이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물 중에 최고의 창조물로 아담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아담 해와를 지은 창조의 능력까지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성상 마이너스 성상, 즉 남성 성상과 여성 성상이 완전히 하나되어 인간을 지었다고 할 때 인간이 완전한 능력을 행사한 하나님의 성상을 닮지 않고는 아들딸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본연의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의 영원한 본체의 형상을 닮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실체로 아담 해와를 지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고서는 창조의 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체와 대상인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중심으로 횡적으로 완전히 하나되게 될 때, 본연의 주체 앞에 완전한 대상이 되어 거기에서 창조의 능력인 생명의 부활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곧 아담 해와가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한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아들딸을 왜 낳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지극히 선한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한 권능을 행사해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슬퍼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였음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뻐하는 것까지도 인간에게 상속시켜 준 것이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녀를 낳으면 기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 나온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상속받아 나오신 예수님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래 인간을 대표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느냐? 예수님뿐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는 동급이다󰡑라고 주장한 사람도 예수님뿐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봤다󰡑라고 했습니다. 당당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무엇을 받았느냐? 천지 만물을 창조하던 창조주의 권능을 받았습니다. 그럼 창조주의 권능권을 향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주체와 대상 관계, 즉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장가가지 않아야 되느냐, 장가가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원칙을 두고 볼 때, 인간의 본연의 가치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은 장가가야 합니다.


장가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완전한 신부를 맞아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아들딸을 낳아야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들딸을 낳았느냐? 이것이 인간의 중요한 책임인데도 그것을 못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필생의 소원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세계적인 광고를 붙여 하나의 신부를 찾아 창조위업을 계승하여 지상에서 하나님 대신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라,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싸워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날을 위해서 세계적인 판도를 넓혀 예수님이 찾고 희망하였던 신랑 신부의 권을 만들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신랑 신부로서 완전히 하나되어 하나님의 창조의 위업, 창조의 능력을 계승받는, 선의 아들딸을 낳는 그러한 터전이 벌어지면 이 땅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이상 하던 하나의 가정 형태가 복귀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사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나라에 대한 관도 불확실하고, 가정에 대한 관도 불확실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을 중심한 신랑 신부로서 하나되어 새로운 아들딸을 낳아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가정 건설을 표준해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모든 피조세계는 누구 것이냐


인류 시조가 하나님의 외아들이 되고 외딸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면, 부모인 하나님과 자식인 인간과는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혈연적인 관계가 맺어졌을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아들딸이 되면 부모의 것이 곧 아들딸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어머니 아버지가 지었더라도 자기 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집을 짓는 것을 보지도 못한 유치원에 다니는 꼬마도 󰡐이 집은 우리 집이야. 이 집은 내 집이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그런 말을 들은 때 기분이 나쁘겠느냐? 오히려 󰡐이 집은 내 집이다󰡑라고 하는 자식을 귀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집이자 자식의 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을 보지도 못하고, 혹은 그 관계를 모르더라도 그것을 지은 하나님이 아버지고 우리가 그의 아들딸이라면 그 천지 만물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것이자 우리의 것입니다. 아들딸인 인간이 그 천지 만물을 󰡐내 것이다󰡑라고 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기분 나빠하겠느냐? 아버지가 주관하는 것보다도 자기가 맡아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아들딸이 말한다면 󰡐, 요 녀석 봐라. 재수없어󰡑라고 하겠느냐? 부모는 그러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의 경우를 봅시다. 요셉이 형제에게 󰡐꿈에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말하였을 때, 형제들은 요셉이 건방지다고 하여 시기하였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어디 두고 보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부모가 되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 즉 하나님이 주관하는 모든 피조세계는 누구 것이 되느냐? 그것은 하나님 것이자 인간의 것입니다. 내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엄청나겠느냐? 하나님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있고, 내 몸속에 있고, 생활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은 관념적으로 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느끼는 하나님, 생활속에서 맞추어 갈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어서 무엇을 하겠느냐 이겁니다. 하나님만 내 것으로 만들면, 하나님만 내 소유로 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추구하는 욕망, 추구하는 마음의 작용은 필요없습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을 차지한 터전 위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태어난 자리는 불행한 자리가 아니고 행복한 자리입니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영원한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생활 가운데에서 조그마한 시련도 받지 않는 자유스러운 환경을 가진 아들딸은 행복한 아들딸입니다. 인간이 처음부터 이와 같은 환경에서 출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출세를 바란다든가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든가 하는 생각은 안 해도 다 이루어집니다. 세계보다 더 높은 것과 관계를 맺겠다는 생각을 안 해도 이미 다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은 누구를 위해서였느냐


내가 무엇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면 그 물건을 자신이 갖겠다는 마음보다도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위하여 만든다는 것에 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누군가를 위하여 물건을 정성스럽게 만든다고 할 때, 그 누구는 어떠한 사람이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만든다면 사랑하는 그 가치 이상의 것을 만들고 싶고, 그 가치 이상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물건을 만들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도 천지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사랑하는 아들딸을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일 이 땅의 만물을 자신만을 위해서 창조했다면, 그런 입장에 있는 하나님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자신의 것으로만 영원히 보관하고자 했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는 인간을 어떤 자리에 세워 놓고 주고 싶어하겠느냐? 그 자리는 아들의 자리요, 딸의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모든 창조물을 고스란히 넘겨줌과 동시에 자신의 사랑하는 마음까지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작은 손수건 하나 주고받았을 때, 그 하나의 손수건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손수건을 통하여 전달되는 사랑이 귀합니다. 그 손수건에 전체 가치를 대신한 사랑이 연결되어 있기에 그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이 기쁨 가운데에서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해도 그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지 못한다면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세워 그들에게 당신의 생명 전체와 사랑을 첨부해 창조한 만물을 몽땅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한 인간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수 있는 한때가 있었느냐?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정성들여 지어준 만물을 받았느냐? 하나님의 품격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 즉 하나님이 바라는 실체 기준이 이루어졌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였던 사랑을 받았느냐? 타락한 우리 인간은 이 세 가지를 전부 받지 못한 자리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의 중심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이 소원하던 완성의 기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완전한 남자가 되고 하나의 완전한 여자가 되면, 그 인격 앞에 서로를 상대적인 존재로 세워주려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원히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첨부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 모든 것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한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은 탕감의 조건을 세워나왔습니다. 만물을 받지 못한 인간이기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여 받으려니 제물적인 조건으로 물질을 세워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인격적인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피조세계를 완전히 상속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담을 대신한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상속받는 데는 그냥 받을 수 없습니다. 탕감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인류를 대표하여 탕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참부모로 오는 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만물을 상속받고, 실체를 상속받고, 상대적인 인격을 갖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상속받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서러움이요, 원통함입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8-7, 54-81, 53-280, 76-38, 56-131, 41-9, 29-151, 126-219


7. 자녀를 자랑하고 싶었던 하나님


무엇이 자랑 가운데 제일 귀한 자랑이냐


하나님은 고독을 좋아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습니까, 능력이 없습니까, 사랑이 없습니까? 하나님은 사랑도 있고, 생명도 있고, 능력도 있고, 지식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인데 왜 만물을 창조했느냐? 무엇 때문에 창조했느냐? 이것을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구경하기 위해서 창조했겠느냐? 무엇 때문에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겠느냐?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돈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생명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사랑을 자랑하기 위해서 창조했습니다. 이거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자랑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랑 가운데 무슨 자랑이 제일 귀한 자랑이냐? 지식 자랑은 일대(一代)면 끝납니다. 권력 자랑은 어떻습니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도 있지만, 권력은 십년을 못 갑니다. 그건 십년도 못 가서 󰡐아이쿠!󰡑 하게 됩니다. 또 황금덩이 자랑? 그것도 몇 대() 못 갑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자랑하는 것은 억천만 년 갑니다.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이 󰡐나는 자랑할 것이 있다면 사랑밖에 없다. 내가 자식을 이렇게 사랑했고, 아내를 이렇게 사랑했고,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했고, 만물을 이렇게 사랑했다󰡑 하고 자랑하는 것은 억천만 년 갑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랑하지 않아도 모든 만물이 자랑하고 선전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곳에 참된 주인이 나오기 때문에 사랑하는 존재를 모든 것이 따라가려고 합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주인이 여러 명이더라도 자기를 더 사랑하는 주인을 따라다닙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보다 사랑하는 주인에게 소속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도 그렇습니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갑니다. 얼굴도 비슷하고 모든 것이 비슷한 두 신랑감이 있을 때, 아가씨는 자기를 더 사랑하는 남자를 골라 시집을 갑니다. 영원한 참사랑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참사랑에서 주인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고독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 인간도 고독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태어난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도 고독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좋아하느냐? 사랑을 좋아합니다.


사랑평화행복이 성립되려면


사랑이나 평화나 행복은 상대적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혼자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나는 혼자 사랑한다󰡑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나는 혼자 평화를 이루지󰡑 하거나 󰡐나 혼자 행복하다󰡑 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입니다. 혼자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상대적 여건에서 생깁니다. 사랑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찾으면 행복은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요, 사랑을 찾으면 평화도 자연히 생깁니다. 그건 부산물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왜 했느냐? 사랑을 자랑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한번 그 사랑을 자랑하면 그걸 막을 자가 없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자랑스러운 사랑으로 영원무궁토록 계속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인간은 얼마나 행복했겠느냐? 이 눈은 술에 취한 것 이상, 아편에 취한 것 이상으로 사랑에 취한 눈이 되었을 것입니다. 몸 전체의 세포는 물론 머리카락까지도 사랑의 젓갈이 되었을 것입니다. 소금에 절여져 삭은 젓갈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잠겨서 사랑의 맛에 저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숨결은 사랑의 박자에 맞춰진 숨결이고, 내 느낌은 그 사랑의 느낌입니다.


그렇게 됐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본래 인간이 하나님이 자랑하는 사랑 앞에 동반자가 되어서 하나님과 동등한 가치와 동등한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그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거기에는 권위라든가 상하관계가 없습니다. 평등이요, 일체요, 통일입니다. 통일, 일체, 평등은 사랑 없이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피조만물을 통해 자랑하고 싶었던 하나님


하나님은 엿새 동안 지은 만물을 바라보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바라볼 때 무한히 기뻤습니다. 그 기쁜 마음을 가지고 거듭 󰡐선한지라󰡑 한 이 말씀은 누구에게 한 말씀이었느냐? 천사장에게 한 말씀이 아닙니다. 만물에게 한 말씀이었습니다. 만물을 대해 그렇듯 간절한 마음을 품고 말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피조물이, 에덴 동산에서 󰡐선한지라󰡑라고 찬양을 받았던 그 피조물이 선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자랑하려던 그 뜻이 만물 가운데 실체적으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서러운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선한지라󰡑 한 그 말씀이 슬픔의 말씀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선한지라󰡑 한 그 말씀이 슬픔의 말씀이 되어 버렸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알아주는 참된 본연의 사람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지극한 수고의 손길을 거쳐서 지어진 만물을 바라보며 더욱더 큰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지라󰡑 한 그 말씀의 가치를 알고 그 말씀을 대해준 존재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피조만물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심정에는 서글픔이 잠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선하게 지어진 그 피조만물보다 그 만물을 지은 하나님 자신을 더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그들이 자라 만물을 주관하고 선의 이념권에서 말씀의 가치를 실현하기를 바랐습니다. 또 아담 해와로 말미암아 온 피조만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하면서 아담 해와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아담 해와를 바라보는 하나님은 그들이 완성하여 만물을 주관하고 자신의 대신 존재로 나타나는 그 한날을 그리워하고 고대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오랜 기간을 거쳐 만물을 지었던 사실을 자랑할 수 있는 역사적인 한 순간을 갖고 싶었습니다. 또한 아담 해와를 세워놓고 󰡐너희는 나의 내적 성상과 외적 형상을 닮은 실체로서 너희 마음이 곧 내 마음이요, 너희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너희가 응하면 나도 응하는, 둘이 아닌 하나의 모습이다󰡑 할 수 있는 그 한날을 소망하고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 인간 조상이 알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은 인간 조상을 통하여 자랑할 수 있는 사람, 자랑할 수 있는 가정이 나타나는 한날을 고대했었는데, 타락함으로써 이러한 자랑의 조건들이 전부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랑의 조건이 슬픔의 조건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본연의 아버지의 내적 성상에 사무쳐 있는 자랑의 심정을 파고들어가 이것을 들추어내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한날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인 책임이 남아 있습니다.


인간이 조금만 잘해도 자랑하고 싶어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 하나님은 자랑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세상에 그렇게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랑은 끝이 없습니다. 창조까지 한 분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로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분입니다.


만일 누구에게 자랑하려거든, 자랑하고 싶은 내용을 안팎으로 갖추어 그것으로 그들을 감동시켜 놓고 자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호박처럼 생기고 멍텅구리같이 생겼어도 사람들이 복덩이로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못난 사람을 제일 잘난 사람 이상으로 만들어서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자랑을 하려면 아버지를 내세우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괜찮습니다. 자랑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에게 󰡐저 자랑 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도 자신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갖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랑하면 실수를 해도 아버지는 좋아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 나오면서 느낀 것은 하나님은 자랑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심정을 가지면 자연히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크고 넓고 높고 깊은 사랑을 가지면 가질수록 자랑하고 싶은 것이 본연의 심정입니다. 부모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빈민굴의 거지도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그저 자기 아들딸이 좋아서 죽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랑에서 흘러나온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은 인간이 조금만 잘하면 󰡐, 우리 아들딸 보아라󰡑 하며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어떤 가정이 조금만 잘해도 󰡐, 내 사랑하는 가정 보아라󰡑 하며 사탄까지 공인하게 합니다. 그렇게 한바탕 자랑했다가도 인간이 그대로 못 하면 꽝 하고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개인을 자랑했다가 그대로 못 해서 꽝, 가정을 자랑했다가 꽝, 이스라엘 민족을 자랑했다가 꽝, 또 예수님을 한바탕 자랑했다가 꽝,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이렇듯 조금만 잘해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부모의 심정이 그런 것같이 하나님의 심정도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기쁘게 해주고 잘하면 사랑을 몽땅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랑거리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업가가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랑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자랑거리를 많이 가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천하의 모든 사람 앞에, 천상세계 앞에 자랑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러한 것을 알고 하나님이 자랑해줄 자랑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만물을 통해 자신을 자랑하고 싶었던 하나님


오늘날 이 땅 위에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가 있습니다. 어떤 한 민족을 보더라도 민족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그 민족의 바람일 것입니다. 또한 한 국가를 다스리는 주권자가 있다면 그 주권자는 국가의 위세를 만방에 떨칠 수 있는 자랑스런 주권자가 되는 것이 소원일 것입니다. 한 국가도 그렇지만, 작게는 우리 개인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기 환경을 움직여 국가 세계와 인연맺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인간의 본심이 그러하고, 인간의 생활환경이 그러하고, 인류 역사의 흐름 또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연은 어디서부터 출발했느냐? 이렇게 된 동기는 무엇이냐?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 자신이 그러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연맺어진 모든 존재는 자기 스스로를 높이고자 하는 마음, 자기 스스로를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창조주가 그렇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한 창조물을 바라보고 기뻐하던 그 시대를 우리가 회상해 볼 때, 하나님도 지어진 모든 만물을 통하여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음받은 어떠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이 피조세계, 또는 이 자연에는 각양각색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만상(萬象)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창조되었느냐? 창조주의 정성어린 심정의 과정을 통하여 지어졌습니다.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음받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작게는 지극히 미미한 존재로부터, 크게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광대한 우주까지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자랑하고 싶었던 자랑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또한 천사세계를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요, 인류 시조인 아담 해와, 다시 말하면 만물의 주인공이 될 사람을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랑의 심정을 느끼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이 땅 위에 남아진 피조만물을 이용하여 살아왔습니다. 즉 싫든 좋든 만물을 사용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사랑하고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었는데, 과연 그것을 알고 그 가치대로 대해주었느냐? 우리의 본심에게 물어볼 때,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밖을 바라보면 광명한 아침 햇빛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그 태양 빛이 뜻하는 것은 무엇이냐? 즉 자연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 빛을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은사라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대해주었느냐? 그렇지 못한 생활을 했다면 그러한 내용으로 지어진 만물 앞에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이 하나님의 자랑의 일면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만물을 지었기 때문에 지어진 만물을 그렇게 알아주고 자랑할 수 있는 상대적인 존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담 해와를 지을 때, 하나님은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었던 만물을 하나님 대신 자랑하고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중심 존재로 세우려던 아담과 해와가 만우주 앞에 중심존재로서 서는 날 하나님은 이 아담 해와를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겠습니까? 지어진 만물의 어떤 부분부분만 자랑하고 싶었겠느냐? 온 피조만물을 내세워 자랑하고 싶은 한날을 바랐습니다.


인간이 찾아가야 할 궁극의 자리


에덴 동산에서 모든 만물을 지어놓은 후 그것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자랑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입장, 다시 말하면 창조주의 입장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자랑의 존재물로 창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심정을 동반한 자리에 서서 하나님이 이 피조세계를 창조한 뒤 느꼈던 기쁨을 체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물을 대해 나를 위해 지어진 자랑의 존재물이라고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체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본성의 마음에 연결될 수 있는, 하나님이 찾고 자랑하고 싶었던 자식의 인연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물은 사랑의 존재요 기쁨의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어진 만물을 보고 지극히 선하다고 했듯이 우리도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 지극히 선하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을 당시의 심정세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물인 풀 한 포기를 보더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정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모두 하나님이 우주적인 가치를 자랑하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나가면서 하나님이 지은 모든 만물에 대해서 그 가치를 평가할 줄 아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리를 찾아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리를 찾아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비경을 탐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타락해서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대해 주인으로서 기쁨을 표시하면 그 기쁨을 만물이 모르게 돼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면 만물도 기뻐할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권에 있으므로 육적인 오관을 통하여 감지할 수 있는 자극밖에는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지은 주인이기에 하나님이 상대적 입장에 있는 만물에 대해 기쁨을 표시하면, 그 만물들은 기쁨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 느끼고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본연의 사랑, 본연의 심정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의 육신은 타락했으나 인간의 심성에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기준, 출발의 기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출발의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공명체(共鳴體)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공명된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만물을 짓고 기뻐하던 기준을 회복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에 바울은 만물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막연한 관념을 가지고 그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자리를 탐구해 들어가보니 만물이 탄식하는 소리가 이 세계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무엇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세계의 사람으로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지니고 있는 본연의 심성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되는 자리에 들어가서 이 우주만상을 바라보면 피조물은 물론 오늘 이 사회 전부가 탄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던 본래의 그 기준으로 만물과 일치되어 인간의 가치를 회복하는 자리가 우리가 찾아들어가야 할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신비스러운 경지를 찾기 위해 자기의 모든 육정(肉情)을 제압하고 현실의 모든 조건을 포기하면서 깊은 마음의 세계를 더듬어 들어가는 산중수도를 합니다. 이 모두가 그러한 뜻과 기준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접근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연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자연은 우리와 상관없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즉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본래 인간의 완성을 위해 만물을 지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깨달아 만유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그 목적의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설 수 없습니다. 도의 세계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랑의 심정을 통하여 만유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자리에 서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개인도 없었으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그럴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85-9, 5-236, 11-179, 20-240


8. 기쁨이 차고 넘치는 하나님가정


하나님도 홀로는 기쁠 수 없다


하나님이 기쁜 것을 좋아하겠어요, 슬픈 것을 좋아하겠어요? 기쁜 것을 좋아하는 하나님입니다. 인간도 슬픈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누구를 닮았느냐? 주인을 닮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소성을, 작가의 성격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가 우리 인간을 지었다면 우리 인간은 절대자를 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절대자를 닮았으니까 그 절대자인 하나님과 친구 될 수 있는 소성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최고를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좋아하겠다는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을 닮습니다. 주체로 계시는 절대자 앞에 우리 인간은 대상이니까 절대적인 대상이 됩니다. 이만하면 사람이 만물 중에 최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기쁜 것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기쁜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어린애나,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다 같습니다. 슬픈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도 기쁜 것을 좋아합니다.


기쁘다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상대가 없이는 기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상대가 없이 혼자서 웃고 기뻐한다면 하나님이라고 하겠어요? 정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쁨을 느끼려면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상대가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노벨상 열댓 개를 탔고, 세계 대통령이 되어 한번 손을 들어 호령하면 천하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암행어사 출동은 문제가 아닐 만큼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데 혼자 앉아서 허허허 웃는다면 미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깨알 같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손에 딱 붙여 놓고 웃는다면 정상적입니다. 이 말은 지극히 작은 대상 하나가 전체 가치를 인정시키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슬퍼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대상의 세계를 지은 것은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천지에는 별의별 만물이 다 있는데, 이 가운데 최고의 보물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도 제일 가는 보물이 있습니다. 국가의 보물 중에는 국보가 있습니다. 그 국보 가운데서도 제일 가는 국보가 있습니다. 전부 일등 가는 국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국보 제1, 2, 3호 이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남대문이 국보 제1호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제일 좋아서 국보 제1호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용과 가치면에서 다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절대적인 가치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제일 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무엇이냐? 거기에서 중심이 되는 것, 즉 하나밖에 없는 제일 가는 국보를 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의 목적에서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하겠느냐? 하나님은 피조만물 가운데 중심이 되는 최고 걸작품이 있다면 그 걸작품에 대하여 관심을 갖겠어요, 갖지 않겠어요? 관심을 갖습니다. 관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까이합니다. 관심사의 내용이 거기에 집중돼 있을 때는 가까이하지 말라고 해도 가까이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관심사다 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도 대상이 필요합니다. 대상이 없으면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담 하와를 놓고 미치도록 기뻐하신 하나님


어떠한 물건에 관심이 있다면 그 물건을 그냥 두고 보겠어요, 만져 보고 싶겠어요? 우리 앞에 관심 있는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을 보기만 하지 않습니다.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만져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관심 있는 대상에 대해 어떻게 하겠어요?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만져본다는 것입니다. 만져보는데 어떻게 만져보겠느냐? 관심이 크면 클수록 주무르고 만지고 할 것입니다. 때가 묻었으면 싹싹 닦고 불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밖에 나갈 때는 자기 품에다 품고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이라는 걸작품을 지었는데 잘못됐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버리고 다시 만들거나 다른 데 가서 찾으려고 하겠어요? 아기들은 태어나서 몇 달만 지나면 방긋방긋 웃습니다. 한 석달만 지나면 웃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아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웃을 때 여자는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반드시 남편한테 이야기합니다. 󰡐여보, 우리 아기가 웃었어요󰡑 하면서 좋아합니다. 그런 말은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남편도 좋아합니다. 그러니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아담과 해와를 보면 볼수록 귀여워서 좋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목석같이 가만히 있더라도 하나님은 좋았습니다. 아담 해와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라도 그것이 더 감칠맛 났습니다. 자식에 대한 정이 그렇습니다. 아담 해와가 울면서 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좋아합니다. 덩실덩실 춤을 추다 못 해 󰡐얼씨구 절씨구󰡑 합니다. 왜 그러냐?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이 그냥 좋고 귀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까닥까닥 하면 되받아서 같이 까닥까닥 하고, 손에 무엇인가를 주면 받기도 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은 미치도록 기뻤습니다.


어떤 조각가의 작품이 대통령상을 받았다 하면, 그 작품을 걸어 놓고 이것이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라며 그 조각가의 친척이나 문중 사람들이 모여 야단합니다. 이렇게 돌덩이로 만든 작품을 놓고도 떠들썩한데, 자기가 만든 작품이 말을 하고 자기 소원까지 얘기한다면 이런 작품을 놔 두고 어디를 갈 수 있겠습니까? 놓고는 못 갑니다. 얼마나 보고 싶고 얼마나 신기하겠습니까?


자기가 낳은 아기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신기합니다. 신기하지 않다면 어머니 노릇 못 합니다. 아기가 잠을 자고 나서 밥 달라고 󰡐󰡑 하니 울어대면 엄마는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기분 나빠서 달려갑니까, 아기가 보고 싶어서 달려갑니까? 보고 싶어서 달려갑니다. 달려가서는 아기를 부여안고 가슴을 헤치고 생명의 호스를 들이댑니다. 아기가 그걸 잘 빨아먹는 것을 보면 엄마는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러한데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보고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아기를 키울 때 좋아하던 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몇만 배, 몇억 배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좋아하면서 한번 웃으면 천지가 다 웃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번 춤을 추면 천지가 다 춤을 출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울겠습니까, 따라서 좋아하겠습니까? 좋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춤을 추고 뭘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은 인간을 빼놓고는 상대할 대상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빼놓고는 재미를 보려야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인간은 상대적인 절대자입니다.


사람을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어하신 하나님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감히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는 부족하더라도 고차원적인 것을 바라고 생활하며 최고의 자리를 표준하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꾸 내려가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은 부족하더라도 최고의 자리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자꾸 내려가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높고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감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말씀 한마디로 도깨비가 요술 부리듯이 지은 게 아닙니다. 자기 전체를 투입하고, 해산의 수고 이상으로 수고를 했습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짓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했습니다. 해산의 수고를 전통으로 이어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어머니가 자식 낳는 것의 몇백 배 힘을 들여서 지었습니다.


그렇게 지어놓은 아담 해와의 모습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귀가 이렇게 생겨나고, 볼 수 있는 눈이 이렇게 생겨나고, 만질 수 있는 손이 이렇게 생겨났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생긴 사람을 바라보는 것을 얼마나 바랐겠느냐? 얼마나 보고 싶었겠느냐? 숨쉴 수 있는 코가 얼마나 보고 싶고, 귀가 얼마나 보고 싶고,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이 몸 어디 한 부분도 보고 싶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보고 싶고, 또 갖고 싶었습니다. 아담 해와의 눈을 갖고 싶고, 코를 갖고 싶고. 모든 것을 갖고 싶었습니다. 갖고 싶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었습니다. 너와 나와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같이 살고 싶은데 무엇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상대적 존재로 지었기 때문에 영원히 사랑을 중심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사랑에서만 영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사랑에서 영생의 논리가 나옵니다.


돈도 순환법도에 따라 돕니다. 돌아야 합니다. 도는 데서는 사랑만이 핵입니다. 핵은 천년 돌아도 그 자리입니다. 핵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었으면 핵 자체는 어디나 수직입니다. 아무데나 갖다 놔도 수직을 이룹니다. 그러니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척 멎으면 수직이 벌어집니다. 천지 도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부부는 어떻습니까? 수직이 잡혀집니까? 천지 도수가 척 맞습니까? 남자가 동반구라면 여자는 서반구인데, 둘이 만나서 굴러가다가 언제든지 수직을 갖춥니까? 사랑을 가지면 보고 싶고, 갖고 싶고, 살고 싶은 것입니다.


󰡐아빠󰡑 소리를 듣고 싶어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자라나는 아담 해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답은 간단합니다. 󰡐누가 먼저 아버지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남자와 여자 쌍둥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부모는 이들이 자라는 걸 보면서 󰡐누가 엄마 아빠 소리를 먼저 하나?󰡑 하고 궁금해합니다. 엄마 아빠가 󰡐, 엄마 아빠 먼저 부르는 아이에게 천만금을 주고 싶다󰡑 하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을 지켜야 되겠습니까, 안 지켜야 되겠습니까? 아기의 부모에게 제일 기쁜 것이 뭐냐 하면 󰡐아빠!󰡑 하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빠 소리를 듣고 싶었겠습니까, 안 듣고 싶었겠습니까? 아담 해와는 하나님 대해서 아빠라고 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아, 아담아!󰡑 하며 찾을 때 무화과나무 그늘에서 그 소리를 들었겠습니까, 못 들었겠습니까? 들었다면 󰡐아빠󰡑라고 해야 됩니다. 무슨 아빠냐? 사랑할 줄 아는 아빠, 나를 사랑해야 되는 아빠입니다. 그걸 알려면 성숙해야 합니다.


세상을 다 알고 나서 아빠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 아빠가 이런 분이구나. 천지를 창조했구나. 위대하신 분이구나󰡑 이래야 합니다. 또 여자는 󰡐아이고, 우리 남편을 만드신 아빠로구나󰡑 그래야 합니다. 남자에게 여자가 없으면 큰일납니다. 여자에게 남자가 없어도 큰일입니다. 데모를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문제가 있다면 그게 뭐겠느냐? 여자 앞에 남자가 없을 때 남자 찾아내라고 하는 데모가 최고의 데모입니다. 노동자가 데모할 때 요구하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밥이 문제가 아니고, 집이 문제가 아니고, 월급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자 앞에는 여자가, 여자 앞에는 남자가 문제입니다.


내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여자를 준비해 두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아버지입니까? 아담이 그걸 느꼈겠습니까, 못 느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놓고 이들이 아버지라고 불러줄 것을 바랐습니다. 아버지를 부르는 데는 천지의 이치를 알고서 󰡐나는 아버지 앞에 사랑받는 아들로서 아버지 앞에 사랑을 돌려야 할 책임이 있다󰡑 하는 자리에서 󰡐아버지!󰡑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하는 것입니다. 아기 때 󰡐아빠, 아빠󰡑 할 때는 웃으며 󰡐오냐󰡑 했지만, 이때는 심각하게 눈을 부릅뜨고 󰡐오냐!󰡑 하는 것입니다. 무섭다면 그 이상 무서운 자리가 없고, 엄숙하다면 그 이상 엄숙한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가 사랑을 알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리, 기쁘다면 그 이상 기쁠 수 없고 엄숙하다면 그 이상 엄숙할 수 없는, 양 세계를 다 관리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환경에서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날을 고대했습니다.


내 사랑을 받은 완숙한 남자, 내 사랑을 받은 완숙한 여자, 그 완숙한 남자 여자가 만나서 남자의 이름 여자 이름으로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는 말을 하나님은 듣고 싶었습니다. 또 그런 배필로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부부가 돼서 아들딸을 낳았을 때, 그 손자를 보고 󰡐내 사랑하는 아무개야󰡑 하고 싶고, 그 손자로부터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천하에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천지를 창조한 천지의 대주재 되시는 거룩한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겠느냐? 돈을 좋아하겠느냐? 돈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권력? 전지전능한 하나님인데 권력이 있으면 뭘합니까? 지식? 천지의 모든 이치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지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식의 왕이요, 권력의 대왕이요, 돈의 대왕인데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돈을 보고 󰡐- 좋다!󰡑 하고, 권력을 가지고 󰡐, 좋구나!󰡑 하겠습니까? 지식을 가지고 󰡐아이고 좋아라! 내가 천하제일이지!󰡑 이러고 좋아할 것 같습니까?


예를 들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인데 모든 면에서 갖춘 세계에 이름난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그 대통령이 정부 각료회의에 참석해서 󰡐내가 천하를 요리하는데, 이러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할 터이니 여러분은 이렇게 하시오󰡑 할 때, 모두가 󰡐, 그렇게 하십시오󰡑 한다고 해서 그 대통령이 󰡐아이 좋아라!󰡑 그럽니까? 거기에서는 변화무쌍한 모습이 안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각료회의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피곤한 몸으로 자기 집에 들어갔을 때, 아장아장 걷는 귀여운 아들이 와서 󰡐아빠!󰡑 하면 󰡐어이!󰡑 하면서 권력을 씁니까? 거기에는 지식도 필요없고, 돈도 필요없고, 권력도 필요없습니다. 󰡐아빠!󰡑 하면 󰡐그래, 그래󰡑 할 뿐입니다. 아들이 󰡐아빠!󰡑 하는데 󰡐에헴!󰡑 하지 않습니다. 눈이 다 쭈그러지고 얼굴이 주름이 많이 졌어도 󰡐그래, 그래!󰡑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내가 대통령인데, 야 이놈아…󰡑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허리를 구부리고 󰡐아이고, 내 아들아!󰡑 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데리고 놀고, 데리고 놀 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것도 보여주고, 아들딸인 인간에게 아버지가 잘났다는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서 창조했습니다. 아버지가 잘하는 것을 다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아들딸은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머리도 제일 좋고, 돈도 많고, 권력도 있어서 이렇게 되어라 하면 그렇게 되고, 천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아버지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아들딸은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제일이다󰡑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도 󰡐아이고, 그렇지 그렇지!󰡑 하며 좋아할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화가라 하더라도 자기가 옛날 초등학교 때 일등상을 받은 그림이 있으면 그것을 유물로 남겨놓고 싶어합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한테 칭찬받은 그림이 있으면 그것을 두었다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또 목청이 좋은 사람은 노래를 하고 싶은데, 누구 앞에서 노래를 하려고 하느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하고 싶지,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래 잘하는 사람은 노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서 자기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면 괜히 신이 나서 노래하려고 합니다. 이렇듯 사람은 조금만 좋은 것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상대적 관계에서 주고받고 싶어서 그럽니다. 주고받더라도 돈을 주고받는 것보다, 권력을 주고받는 것보다, 지식을 주고받는 것보다 사랑을 주고받아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제일 귀합니다.


부자의 관계는 영원한 것으로 누가 혁명하지 못해


부자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는 영원한 것으로 누가 혁명을 하지 못합니다. 진짜 사랑하는 부자의 관계를 누가 혁명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의 천만 대군을 동원하여 포를 들이대면서 󰡐지금까지 사랑해 왔던 것과 같이 자식을 사랑하면 안 돼!󰡑 한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됩니까? 사랑하는 남편,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그 마음 전부 없애 버려라. 사랑하면 안 된다󰡑 하면서 포를 들이대면, 겉으로 그렇게 하는 체하기는 하겠지만 마음으로는 더 불이 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세상의 어떠한 힘으로도 혁명할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내적인 강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면 할수록 더 좋습니다. 그런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도 역시 사람과 닮았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무엇을 좋아하느냐?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들딸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아들딸이 되었음에 틀림없고, 잘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잘사는 것은 무엇이냐? 남편과 아내가 떨어져서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다른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서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냐? 같이 사는 것이 잘사는 것입니다.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가고, 서로 가면 서로 가야 합니다. 남자가 가는 데 여자도 가고, 여자가 가는 데 남자도 가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자녀인 아담 해와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대해 좋아서 󰡐-󰡑 웃고 있는 그 사랑판을 막을 존재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한 그분이 지금 좋아서 얼굴에 꽃이 피어 벙그러지고 있는데 󰡐그거 안 돼요!󰡑 하며 막을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 좋아하면 그 아들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빠가 좀 이상하다고 하겠습니까? 아들딸도 󰡐-󰡑 합니다. 아이들도 좋으면 󰡐-󰡑 웃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희색이 만면해서 웃으면 아담 해와는 찡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웃습니다.


사람이 웃을 때는 어디서부터 웃느냐? 눈부터 웃습니다. 왜 눈부터 웃느냐? 창조가 눈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눈부터 생겨났기 때문에 눈부터 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웃을 때의 감정은 입을 보고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눈을 보면 웃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웃을 때는 무엇부터 웃어야 되느냐 하면 눈부터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눈은 둘입니다. 왜 둘이냐? 하나님이 두 눈과 같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플러스 눈, 하나는 마이너스 눈입니다. 이런 성품이 있기 때문에 둘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웃을 때 한 눈은 웃는데 다른 눈은 안 웃는다고 버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플러스 성상은 웃는데 마이너스 성상은 버티고 있을 수 있어요? 플러스 성상이 웃으면 마이너스 성상은 자동입니다. 하나가 󰡐─󰡑 하면 같이 󰡐─󰡑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천지 조화는 일방적으로는 안 이루어진다


눈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코는 아담 해와를 상징합니다. 왜 코가 아담 해와를 상징하느냐? 코는 들어가면 하나됩니다. 또 우주의 길잡이가 코입니다. 얼굴에서 제일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 제일의 길잡이는 아담 해와입니다. 코 꿴다는 말이 참 재미있습니다. 코 꿰었다는 말은 몽땅 주관당했다는 뜻입니다. 주관할 수 있다 할 때 코 꿸 수 있다고 합니다. 다 통하는 말입니다.


이 두 구멍은 고개를 넘어가서 하나되게 돼 있습니다. 둘이 하나됩니다. 그런데 감기가 들어서 한쪽 코가 막혔을 때 기분이 좋습니까? 막혀 있는 것이 뚫려야 󰡐기분 좋다!󰡑 그럽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음악도 계속 높기만 하면 재미없습니다. 높았다 낮았다 해야 합니다. 들어갔다 나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갔다가 왔다가 그래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도 별수 없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아이 좋아라! , 봄날이니 봄 노래 한번 불러보자!󰡑 하고 노래 부르면 누가 알아줍니까? 하나님이 기분 좋겠습니까? 봄이 되어 노래를 부르려 할 때, 그 상대 되는 사람도 싱숭생숭해서 󰡐아이고, 하나님!…󰡑 해야 기분 좋은 것입니다. 노래할 때 자기 스스로 나와서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까,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누가 하라고 해서 해야 기분 좋습니다. 그거 누구를 닮아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혼자 노래하고 싶어서 하는 것보다는 누가 하나님의 노래하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 노래 한번 해보십시오!󰡑 할 때 󰡐-󰡑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재미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또 여자들이 웃는 것을 보면 󰡐헤헤헤!󰡑 하면서 대개 고개를 옆으로 돌립니다. 남자들은 웃을 때에 고개를 위로 쳐들면서 󰡐허허허!󰡑 하고 웃습니다. 왜 그렇게 웃느냐? 천지이치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횡적이기 때문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웃고, 남자는 종적이기 때문에 위로 쳐들면서 웃습니다.


천지 조화는 일방적으로는 안 이루어집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높았다 낮았다 이래야 조화가 벌어집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물론 부부관계와 같이 일방통행식 사랑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조화가 벌어져야 합니다. 아이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을 그 아들딸이 보고 󰡐내 엄마인데 이 영감이 왜 이렇게 사랑을 해?󰡑 그럽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엄마가 아빠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고, 아빠가 엄마 사랑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자리에 가서 󰡐아빠 엄마, 나만 사랑해!󰡑 그러지 않습니다.


* 말씀출처(말씀선집 권-) : 41-260, 197-9, 7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