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최후의 한 때와 나
섭리의 때와 나
흔히 세상에서 말하기를 아무리 영웅이라도 때를 맞이하지 못하면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때가 준비된 터전 위에 인재가 나타나면 그 인재와 때가 합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때가 문제가 됩니다.
아침이 되면 일어나서 아침밥을 먹고 일을 시작합니다. 점심때가 되면 점심을 먹어야 됩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오후의 일을 시작합니다. 또 저녁이 되면 저녁식사를 하고 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규칙적인 어떠한 때를 중심삼고 새로이 변천하는 환경을 맞이해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을 보더라도 소년시대가 있는가 하면 청년시대가 있고, 청년시대가 지나가면 장년시대, 장년시대가 지나가면 노년시대가 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 일생이라는 것이 언제나 일정하지 않습니다. 소년시대나 청년시대나 장년시대나 노년시대나 때를 잘못 맞이하게 될 때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맙니다.
그러나 소년시대나 청년시대나 장년시대나 노년시대의 때를 잘 맞이하여 의의 있게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가장 귀한 일생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를 잘못 맞이하면 거기에서 실패의 동기가 시작되는 것이요, 때를 잘 맞이하면 성공이 출발된다는 사실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57-287, 72.6.5)
소망의 한 때와 비운의 한 때
복귀섭리를 회상해 볼 때, 복귀라는 말은 본래 창조본연의 인간이 소망하던 명사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필요하게 된 명사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뿐만 아니라 하늘땅도 비통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복귀가 필요 없는 본연의 세계가 있었음이 사실이라면 타락한 세계를 복귀해야 할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복귀섭리를 완성하는 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에는 복귀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본연의 세계에서 아담을 중심삼고 소망한 것은 오늘날 복귀해야 할 세상에서 고대하고 소망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한 전적인 소망은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현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인 요소를 외적 실체로 전개시켜 하나님이 소망하는 원대한 희망과 인간의 소망이 일치된 한 때를 맞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소망의 한 때를 연결하기 위해 지음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아담이 타락하기 직전까지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고,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있었지만, 타락한 그날부터는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하나님의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도 갖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타락한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본연의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불우한 환경에 보냈다가 그 자식을 잃어버리고 나서, 당하는 아픈 마음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런 일을 체험할 수 있는 경지를 모색해 보는 것도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슬퍼했던 내용을 아는 데 도움이 되리라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식은 부모가 자기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가를 모릅니다. 자기가 부모를 따르고 부모를 좋아하는 기준으로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식의 차원과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차원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모의 입장에서 다시는 창조할 수 없다는 절대적 기준을 세워 놓고 지었던 아담 해와이기 때문에, 그들이 타락한 순간부터는 인간 스스로 출발할 수 없다는 것을 절대적인 철칙으로 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상의 한 때를 바랐지만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비운의 한 때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비운의 역사를 엮어 온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으로 인한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마음속에서 빼 버리느냐 하는 것이 문제요, 인류도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어떻게 청산하여 본연의 위치를 다시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들은 영원한 쇠사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을 해방하는 것이 문제요,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통함을 어떻게 빼 버릴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29-292, 70.3.12)
비통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한 때는 언제인가
인간은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고, 자녀가 있고, 친지가 있기에 슬픈 환경에 부딪히게 될 때 위로 받을수 있고, 그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그럴 수 있는 어떤 환경도,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더 분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위로하면 위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더 비통함을 겪고 계시기 때문에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님 자신이요, 끝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 마음 가운데 맺혀 있는 원한을 어떻게 풀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정을 품고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영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 때문에 6천년 전의 슬픔도 역사시대권내에 영원히 남습니다. 만약 스스로를 제물로 드렸다는 체험으로 기쁨을 느꼈다면, 그것은 시간권의 내용이든지 생활권의 내용이든지 간에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폭과 넓이가 커져 추앙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무한한 근원과 인연이 맺어집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하여 그런 내용을 갖고 실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지금까지 당하신 슬픔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 마음을 품은 채로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타락한 환경 가운데서 헤매며,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도리어 자신을 잊고 부모의 입장에서 수고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잊을 수 없는 최후의 한 때, 타락의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최후의 한 때를 가져야만 합니다. 또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러한 한 때와 환경을 갖지 못한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심정적인 곡절을 가진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현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위로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타락한 것을 해원성사하기 위해서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소망하던 이상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타락한 아들이라 생각하지 않고 본연의 심정으로 직행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무엇에든지 직접 부딪칠 수 있는, 둘이 아닌 하나가 된 소망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기준 이상의 자리를 넘어가지 않고는 하나님을 위로할 최후의 한 때를 마련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쫓겨났던 비운의 근원을 뽑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9-294, 70.3.12)
아담 가정과 노아 가정을 중심한 복귀섭리
복귀역사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흘러 나왔습니다. 그 복귀역사 과정에는 수많은 곡절이 있어 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중심삼고 아담이 실수한 것을 복귀해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순간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암담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만도 슬픈 일인데 희망을 가지고 잃어버린 자녀의 기준을 찾기 위해 소망의 터를 닦고 키워 복귀의 한 때를 바라본 하나님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게 되니 하나님은 2차의 복귀의 소망마저 이룰 수 없게 되었고, 가인은 하나님의 내심에 거듭 못자국을 남기게 됐습니다. 인간 조상이 하나님 앞에 슬픔의 기원자인 것만도 복통할 일인데, 아벨이 처참한 형상으로 살해당함으로써 또다시 하나님께 못자국을 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중된 원한을 품고 나왔습니다.
노아를 중심삼고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120년 동안 수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환경적으로 어떤 사람도 자기를 따라올 수 없는 외로운 자리로 내몰렸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든 특정한 사람이든 타락한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까지 몰린 것입니다.
노아는 그렇게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둘이 있는 자리로 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혼자만의 자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않고는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아벨도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고, 노아도 혼자만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아담 해와 두 사람을 창조했지만 섭리는 남자를 중심삼고 하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남자가 이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복귀해 나오는 과정에서 노아가 찾아가는 자리도 역시 하나님과 노아 둘만이 대할 수 있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 경지를 어떻게 끌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노아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지시하는 목표와 일체 될 수 있는 인연을 세워 절대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앙심을 갖고 하나님이 현현된 실체와 같은 입장에서 주체인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120년 동안 절대적인 신앙 기준을 세워주기를 바라고 노아를 몰아냈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도 아니요 10년도 아닌 120년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이 노아에게 찾아와 참고 극복하라고 언제나 말씀해준 것도 아닙니다. 한번 믿었으면 그 절개를 영원히 지킬 줄 알아야 했고, 한번 믿었으면 아무리 환경이 요동하더라도 그 환경을 넘어갈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노아는 120년 기간을 지난 후에 홍수심판을 맞았습니다. 노아는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개인만으로는 하나님의 소원인 복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담이 복귀되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인 아벨이 필요했듯이, 노아의 아들이 아버지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지 않고는 타락한 부자의 인연을 복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본연의 세계로 들어갈 자세를 갖추지 못합니다. 자식이 구원섭리의 출발을 행하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 일을 아버지가 해야 되는데 타락했기 때문에 자식이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 가정에서 부자가 일치될 수 있는 기준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노아로 하여금 모든 역경을 거치게 하여 40일 홍수심판을 했던 것입니다. 심판 이후 이 땅에는 아버지와 그의 가족만 있고 노아를 반대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버지인 노아의 말을 들어야 하는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함이 불신함으로써 제2차적인 복귀도상에서 또다시 하나님께 슬픔을 가중시켜드리게 되었습니다. (29-295, 70.3.12)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
아브라함을 중심삼은 섭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세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생활환경에서 자라 많은 체험을 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과정의 내정적 슬픔을 전부 품고 와서 그 품은 한을 풀기 위해 아브라함을 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의 수중에 있는 사랑하는 아들을 빼내 고향 산천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명해 애급노정을 걷게 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순간은 아담이 타락한 후 2천년 기간의 역경을 거쳐온 하나님에게 있어서 복귀할 수 있는 소망의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제물을 드리는 데 실수함으로써 제3차적인 복귀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하나님께 다시 못을 박는 원한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수습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 모세를 세웠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오면서 반석을 2타 하여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실 때 먼저 세례 요한을 보내 터를 닦게 하셨고, 요셉 가정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때 동방박사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동방박사를 보낸 것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한 나라의 대표자로 오시는 메시아 앞에 이방의 대표자로서 굴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물을 드린 것은 3대 천사장이 하나님과 아담에게 굴복하지 못한 것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그들이 국경을 넘어 이런 원칙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국가 기준이 세계적 판도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예물을 드렸지만 예수님께 필요한 것은 예물이 아니었습니다. 조건물로서의 예물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의 실체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그때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뜻이 일치되어 유대나라를 중심삼고 해롯 왕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입장에 섰더라면 일차적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선정하여 국경을 넘게 한 동방박사들이 의인이 태어난 것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알리고 그들을 인도해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세상적인 소원에 따라 한 때의 중간적인 사명자로서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불행입니다.
만일 여기에서 세 사람의 동방박사가 예수님과 일치되었더라면 국가를 넘어 천국을 이루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사명을 다하실 수 있도록 준비된 환경을 갖추어 나갔더라면 예수님은 복귀의 한 때를 맞았을 것인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수난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방박사는 예수님으로부터 떠났고 요셉 가정은 그를 불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그도 책임 못 함으로써 예수님에게 교회적인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국가적 수난의 길이 전개되었습니다. 이때 요셉 가정에서 가정적인 기준이 일치되었더라면 세례 요한은 자동적으로 복귀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종족기준을 대표한 것과 마찬가지 입장이기 때문에 요셉 가정이 일치되어 나왔다면 세례 요한은 자연히 환경을 넘어 수습되었을 것입니다. 혈통적으로도 세례 요한은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29-297, 70.3.12)
예수님의 죽음으로 승리의 한 때를 맞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
가정적 기준을 잃어버린 예수님이 교회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 나선 것이 공생애의 첫걸음이었으며, 40일 금식 직후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가정적인 기준을 수습하기 위해 이런 제1차적인 노정이 필요했습니다. 거기서 교회적인 기반이 무너지더라도 대제사장 가야바 같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기반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례 요한적 사명을 대신하여 그 기대를 갖추고 나갔다면, 예수님이 국가적인 기준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가정적 기준을 상실하고 교회적 기준을 상실해 버린 예수님은 국가적 기준을 갖출 수 없었습니다. 국가적 기준을 중심삼고 4천년 역사를 섭리해 나온 하나님의 뜻이 진전될 수 없는 입장이 되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4천년 만에 승리의 한 때를 맞이하여 가슴에 박혀 있던 원한의 못을 뽑아내기 위해 소망의 아들을 세우셨으나 인간들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위해서 유대나라를 준비하셨고, 유대교를 준비하셨습니다. 또 그를 위해서 요셉 가정을 준비하셨고, 이방에서 세 동방박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같이 모든 환경이 준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환경의 대표자들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비통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이상의 슬픔을 느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아담을 복귀하기 위한 터전을 모색하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온 하나님이 예수님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제2의 복귀를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하니, 그 하나님의 입장이 얼마나 비참하셨던가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말만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슬프고 비통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세계적인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넘어 세계로 향하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국가를 넘지 못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가를 넘어 세계로 가야 하는 기독교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교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순교를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천당이란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어 온 신앙자들이나, 혹은 시대 시대마다 기독교를 지도하며 복귀섭리를 책임져 나온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소원이었지, 믿고 뜻을 이루어드리겠다고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개인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구원의 목적을 세워 나오는 배후에는 예수님이 국가적인 혹은 세계적인 판도를 연결시키며 책임지고 나왔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을 외국에 파송하여 자신들이 개인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보다도, 하나님 앞에 특별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이방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복귀섭리를 담당한 특별한 나라면 나라일수록 수난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복귀섭리 도상에서 귀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국가로부터 세계를 넘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땅 위에 맺힌 실체적인 탕감의 기준을 세계적으로 벌여 놓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뜻을 전통적으로 상속할 수 있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난의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후를 남겨야만 섭리의 중심민족이 되는 것이기에, 그러한 민족이 국가로 가는 과정에 어떤 종파적인 입장에서 몰려 희생당하는 것도, 국가적으로 수난을 당하는 비참한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29-299, 70.3.12)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하는 방법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시대시대마다 최후의 비장한 한 때를 맞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아벨이란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슬픈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안 되겠고, 하나님의 맥박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노아면 노아에 대한 역사가 지나간 역사가 아니라 현실에 현현된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계는 시간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몇천 년 전도 오늘과 같은 것입니다. 오랜 역사과정을 거친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입니다.
아브라함을 중심한 내용이라든가, 모세를 중심한 내용이라든가, 예수님을 중심한 내용 등이 시대적으로 볼 때 역사적인 거리가 있지만, 그것을 환경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느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역사의 한계권내에 있는 우리에게는 몇천년 전이지만 하늘에서는 하루와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한 순간이 우리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원한의 순간입니다. 그들의 타락으로 복귀라는 한 맺힌 명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복귀라는 원한의 명사가 필요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찾아나온 것이 제1차적 복귀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인은 하나님께 한의 못자국을 남겼습니다. 함도 그랬고, 헌제에 실수한 아브라함도 그랬고, 반석 2타 한 모세도 그랬습니다. 또 동방박사와 요셉 가정이 그랬고, 세례 요한과 유대나라의 제사장들이 그랬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은 어느 나라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어떤 종교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어떠한 가정, 어떠한 개인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졌겠습니까? 아무리 힘을 내고 아무리 소망을 다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무엇 하나 믿으려야 믿을 수 없는 입장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불신을 해소해 버리고 스스로 해결짓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에 조건을 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높은 단계에 희망의 조건을 세워 놓은 것이 아니라 낮은 단계로부터 희망의 조건을 세워 복귀섭리를 추진해 나가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끝날이 되어 뜻을 대하는 특별한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나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믿기까지는 지금까지 6천년 동안 맺힌 사연, 즉 6천년 동안 불신한 환경의 내용을 전부다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끝날이 되면 될수록 외적으로 종교적인 기반이 넓어져 하나님을 모시는 기반이 넓어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뜻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개인이 믿던 신앙의 기준을 중심삼고 본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을 세우기 위한 시련을 거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아버지의 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끝날에는 기독교가 세계적인 판도를 갖춘 환경일 텐데도 불구하고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배후에는 그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자리는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뜻을 대해 충성하는 모습을 붙안고 당신의 사연을 통고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더 큰 슬픔을 남기는 입장에 서기 때문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낮은 자리에서 복귀의 심정을 넓혀 나오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심정적으로 지금까지 저끄러졌던 6천년의 원한을 풀고 다시금 심정적인 기반에서 아벨을 지도할 수 있는 이상의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택한 사람을 시련도상에 내놓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로소 '너는 믿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조건, 즉 '너는 이제 떨어지더라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을 남겨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끝날이 되면 될수록 그러한 입장에서 특별한 자녀들을 대해 나오십니다. (29-301, 70.3.12)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
선생님도 일신의 기준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졌으면 예수님이 태어날 때 동방박사를 보내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도 보내져야 할 게 아닙니까? 요셉과 같은 가정에 보내져야 되고,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이 역시 왔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배신했던 역사적인 후손들을 통한 환경에서 복귀섭리를 하실 수 없습니다. 그보다 더 비참한 환경에서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가시는 길은 예수님보다 더 비참한 운명에 처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그 누구로부터도 협조를 받지 않고 이런 길을 고독단신으로 걸어왔습니다. 일대일의 입장을 갖추지 않고는 복귀의 중심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중심이 결정되어야 비로소 지상에 상대적 여건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이 결정되지 않고는 상대적 환경이라든가 혹은 국가라든가 세계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에서 배우고 있는 복귀원리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샘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와 물줄기가 합하여 큰 강을 이루어 대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흐름이 아니라 강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대해로부터 거꾸로 올라가서 샘줄기를 찾아가는 것이 복귀의 길입니다.
오시는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포부와 희망이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입장에 서고 누구보다도 비참한 자리에 서서 최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절망의 자리에까지 가야 합니다. 크다면 최고로 큰 자리요, 작다면 지극히 작은 자리까지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통틀어 뒤집어 놓을 수 없습니다. 원리의 배후에는 이런 곡절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슬픔을 풀 수 있는 한 때, 복귀의 한을 풀 수 있는 한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아벨을 찾아왔지만 그 소망을 저버렸고, 3차에 있어서 노아를 중심삼고, 아브라함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중심삼고 전체를 수습하기 위해 섭리했지만 하나님은 복귀의 그 한 때를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죽음길을 가리지 않고 수난길에서 피의 대가를 치르고 영계에 가서까지 해원성사의 한 날을 향하여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리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대할 수 없는 비통한 입장에서 2천년의 역사를 지내 오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복귀의 종교는 재림사상을 중심삼고 어느 특정한 나라나 민족을 세울 때까지 그 배후에 그 누구도 모르는 수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29-303, 70.3.12)
재림주의 자격과 그 사명
이러한 사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크고 엄청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하지 못한 비참한 통곡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을 붙들고 같이 몸부림치면서 통곡할 수 있는 자리를 갖추지 않으면 아담이 하나님께 박은 한의 못을 아담과 더불어 뺄 수 없습니다. 아벨이 못을 박았으면 그 아벨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통곡할 수 있어야 그 못을 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 복귀가 원칙이라 할진대, 아벨의 입장에서 가인을 부둥켜안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같이 눈물 흘리지 않으면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가인 아벨이 가야 할 복귀의 길입니다.
노아가 실패한 것을 해원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노아 대신 하늘의 전체적인 책임을 진 아벨의 입장이 되어 실수한 노아를 가인적 자리에 세워 놓고 그를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소연할 수 있는 한 때를 갖지 않고는 노아의 슬픔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실수한 함을 붙들고 통곡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면 아브라함이 실수한 한 때를 중심삼고 아브라함을 붙들고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는 한 길을 모색하지 않고는 탕감복귀를 못 하는 것입니다. 모세면 모세가 실패한 것을 중심삼고 아벨적인 입장에서 모세를 붙들고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제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을 가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세례 요한이면 세례 요한, 예수님이면 예수님이 실패했던 내용을 중심삼고 그들 대신자 입장에서 그들을 붙들고 통곡하며 하늘의 사조를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들이 나오지 않고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가슴속에 못박혀 있던 서글픔을 뽑아드릴 도리가 없습니다.
또 기독교단의 희생한 무리들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회개하여 그 사연을 통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지 않고는 기독교를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오셔야 할 분이 재림주입니다.
그가 아담과 더불어, 아벨과 더불어, 노아, 아브라함, 모세와 더불어, 나아가 예수님과 더불어, 또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역사과정에서 희생한 수많은 순교의 역사와 더불어 눈물 흘리게 될 때, 그 눈물은 타락의 눈물이 아니라 희망의 눈물입니다. 이 희망의 눈물로써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를 붙들고 대신 울어줄 수 있는 아들이 되지 않고는 복귀의 사연은 결정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을 더듬어 온 것이 지금까지 통일교회가 있게 된 배후의 역사인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한 때를 잃어버렸던 것을 탕감하기 위해 걸어간 예수님의 일생은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역사의 전체적인 한 때를 몽땅 대신할 수 있는 생애를 거치는 것이 오신 그분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가진 분은 지금까지 실수했던 하늘땅의 모든 사연을 얽어매서 해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영계에 있는 모든 영인들과 예수님 앞에서 지금까지의 종교 전체를 대신하여 판가리를 지어 승리의 결정권을 갖고 와야만 지상에 현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지상에 현현하는 것이 아담의 실체이기 때문에다시 오시는 제3 아담은 하나님의 내정적인 슬픔을 품고 오셔야만 됩니다. 그분은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 두 세계의 마음을 몽땅 가져서 그 중 서글픈 마음을 뽑아 버리고 기쁜 마음을 재현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래 아담을 창조한 것이 하나님의 내성적인 표현이라면,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을 바라보던 한스러운 지금까지의 역사를 전부 잊고 다시 아담을 창조할 수 있는 소망의 한 때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바로 지상천국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은 두 세계, 즉 슬픈 세계와 소망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오시는 주님 앞에 목숨을 내놓고 그분의 운명에 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시는 주님은 역대의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과 땅의 인연을 모두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눈물로써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을 갖추고 오시고, 천상의 인연이 아닌 지상의 인연을 갖고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이상 슬퍼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슬픔이 몽땅 재현될 수 있는 곳은 그분이 계시는 지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내성적인 뜻을 몽땅 성취할 곳도 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오시는 주님은 슬픔과 기쁨의 두 세계에서 사명을 다해야 되고, 영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되고, 지금까지 역사를 대신할 수 없었던 입장에서 이제는 역사를 대신하는 입장이 되어 현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오시는 주님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니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자리는 편안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복귀의 노정을 담당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통일교회에 있는 것이요, 여러분을 지도하고 있는 스승에게 있습니다. (29-305, 70.3.12)
최후의 한 때에 문제가 되는 것
여러분이 나를 선생님으로 대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아담도 그럴 것이고, 노아도 모세도 예수님도 그럴 것이며, 지금까지 왔다 간 역대의 수많은 선인들도 그럴 것입니다.
선생님으로 인해 선조들이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영계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생님과 인연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영인들도 마찬가지고 타락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생님과의 인연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한 때에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하나님이 품은 슬픔이 무엇이고 역사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선조들이 품었던 소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을 중심삼고 국가를 대하고 세계를 대해서 탕감할 수 있는 한 때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탕감할 수 있는 한 때를 맞이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분 가정이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고, 여러분 개인은 선생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인 아벨 탕감복귀는 실체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개인은 가인 입장에서 선생님을 중심삼고 실체를 복귀해야 되고, 여러분 가정은 선생님 가정을 중심삼고 실체를 복귀해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반드시 중심가정인 아벨 가정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자녀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2천년간의 이스라엘 민족의 탕감역사노정을 회고해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한을 품은 비참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 후손은 창끝에 찔리고 말발굽에 밟혀 쓰러졌습니다. 또 수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실패자들의 경우를 볼 때, 여러분은 일신의 평화를 구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잘살려 하고 일신의 향락을 구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최후의 한 때는 왔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볼 때, 문제는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지면 망합니다. 하나 못 되면 망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를 담당한 책임자는 하나님과 하나되어 복귀섭리를 담당한 절대적인 자리에 나가야 합니다. 거기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습니다. 홀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선생님의 명령이 절대적입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부모가 반대하고 어느 누가 반대하더라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선생님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법도입니다.
명령을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길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16절)' 하는 시시한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뜻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과 내 뜻이 같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말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곧 내 뜻입니다.
자식을 죽을 자리에 내세울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나를 죽을 자리에 내세우는 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몇천 배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여러분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경지에 들어가서 활동해야 합니다.
이런 기점에 놓여 있는 이 최후의 한 때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절대적인 신앙입니다. 절대적인 심정을 가져야 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은 절대적인 신앙을 갖지 못하고, 절대적인 실체가 되지 못하고, 절대적인 심정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29-309, 70.3.12)
지금의 때는 타락권내(墮落圈內)가 아니고 완성권입니다. 원리결과주관권(原理結果主管圈)에서 절대로 필요한 것은 신앙과 실체와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되어 같이 넘어가게 되면 대번에 완성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 원칙적 기반 위에서 전부 하늘에 귀결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하는 데 있어서 내가 빚을 많이 졌다는 것을 알고, 일시에 한 곳에 투입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일시에 완성권으로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74-344, 7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