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제 4장 참부모님 사랑편 제 2장 재림주님은 인류의 참부모 소목차 1.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 2. 복귀역사의 기점 3.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4.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세주 5.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 6. 인류의 참부모로 오시는 재림주 7. 타락 인간의 최고의 소망 1.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소망과 타락의 슬픔 천지만물을 지은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인간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 하나가 성장하여 소망을 성취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평화의 가정을 만들어 함께 살기를 하나님은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창조해 놓고 기뻐하였지만, 타락한 연고로 애절한 심정과 간곡한 심정을 지니고 하나의 승리를 완결할 수 있는 그때를 소망해 나왔습니다. 아담 해와를 위해 지어 놓은 피조세계를 바라보는 것도 좋거니와, 만물을 주관할 아담 해와의 자라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더 좋아하던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과 행복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아담 해와였고, 만유세계에 있어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안 될 중심존재인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해서는 안 될 아담 해와였고, 슬픈 날이 있어서도 안 될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나 한 날의 실수로 타락이라는 명사가 붙여졌고, 이로 인해 슬픔이라는 명사가 초래되었으며, 하나님이 소망하던 세계에 있어서는 안 될 흑암의 권세가 출현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원통하고 비통하다는 것입니다. 인류시조가 타락함으로써 인류가 슬픔을 당하는 것은 마땅하나, 인류시조를 바라보고 소망의 마음을 갖고 나오던 하나님이 이들로 인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비통한 사실입니까? 인간이 슬퍼하는 자리에 떨어짐으로써 하나님도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늘땅에 있어서는 안 될 일,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사건이 인류시조의 실수로 벌어진 인간 타락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모든 심정을 알고,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전체 소망을 아는 자리에서 타락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모든 것을 완비하고 완성된 자리에서, 전부 다 깨달은 자리에서 타락했다면 하나님의 창조이상, 즉 하나님의 창조위업은 완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창조한 그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전체 내용을 다 상속받은 가치적인 존재로서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자라던 성장 과정에서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창조위업과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념 속에서 살지 못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하여 형성된 세계가 오늘날까지 타락한 후손이 살고 있는 이 세계요, 이로 인해 이 세계가 악한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바라던 소망은 소망대로 남아졌습니다. 그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그 소망이 크면 클수록 그 큰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슬픔도 크게 되고, 그 하나님의 소망을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내적인 고충이 크게 초래되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일반 성도들은 하나님이 슬픈 분인 줄을 몰랐고, 인간 지음을 탄식한 하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렇듯 오늘날까지 천지를 지은 창조주가 인간의 실수로 슬픔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을 몰랐습니다. (15-321, 65.12.07)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그러면 천국은 누구를 위해 지었느냐? 천국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지었습니다. 그러기에 천국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인간을 중심삼고 천국이념을 세웠으나 인간이 깨어져 나갔기 때문에 천국이념은 이념대로 남았고, 천국은 내용이 없는 천국, 즉 천국이라는 명사만이 남게 되어 하나님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노래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영광의 하나님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지금까지 비어 있고 하나님은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타락한 아담으로 인해 이 땅이 사탄권내로 들어감으로써 사탄권세는 천국의 문까지 밀어젖히고 하나님의 보좌 단상까지 휩쓸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세계에 대해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본연의 소망을 어떻게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복귀의 한 날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나온 하나님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것은 물에 빠지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이요, 병이 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병이 나기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구주가 된 후에는 형님도 될 수 있고, 오빠도 될 수 있고, 우리의 그 무엇도 다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세계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상한 본연의 세계가 되었더라면 구주로서의 예수님이 필요 없을 것인데, 아직도 이 땅이 죄악 세계에 빠져 신음하고 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주로서가 아니라 형이요, 오빠로서 환영받을 수 있는 세계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이 세우고자 하는 그 세계는 타락전 본연의 세계요, 하나님이 이상 가운데서 추구하고 그리던 세계, 완성의 뜻을 이루어 천하를 그 품에 품고 좋아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의 독생자요, 공주로 태어났던 아담 해와가 타락으로 깨져 나갔으니 다시 그 자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하늘땅이 내 것이다 하면서 다시 찾아 세워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연의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내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의 천국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인류에게 소망의 천국을 찾아주기 위해서 오늘날까지 수고해 나왔으며, 인류는 오랜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면서 소망의 천국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중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제일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타락으로 모두 죽은 자식이 되어 버렸고, 사탄의 죄악된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 인간 가운데서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사랑하며 붙들고 살 혈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인류를 복귀하기 위하여 섭리해 나왔습니다. 복귀하는 데는 어디까지 복귀시켜야 되느냐? 직계 아들딸의 자리까지 복귀시켜야 합니다. (15-323, 65.12.07) 복귀섭리역사와 복귀노정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종의 종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종의 종이 무엇이냐? 종의 종은 주인을 가질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있으되 종의 종은 주인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사탄세계에서 종의 종을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해 있는 종의 종을 빼앗아다가 하나님 앞에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하늘편의 종의 종으로 만들어서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시대는 무슨 시대였느냐? 종의 시대였습니다. 종의 종 자리에 있는 인간을 종의 자리로 복귀시켜 나온 시대였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도 종이었지 아들이 못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의 종을 세워 충성의 도리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이 역사적인 세계 인류를 끌어다가 규합시켜, 세계적인 악한 무대를 하늘편으로 점령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종의 종으로부터 종의 위치로 복귀시키고, 종의 위치에서 양자의 자리로 복귀시키면서 섭리해 오셨습니다. 신약시대는 종을 양자로 복귀하는 시대였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을 고대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양자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양자는 혈통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양자의 자리에 세운 다음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이 와서, 돌감람나무에 참감람나무를 접붙이듯이 접을 붙여서 양자의 인연을 해방시켜 직계 자녀의 인연을 맺어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죽지 않고 이루어야 할 소망이었습니다. 종의 종에서 종으로, 종에서 양자로, 양자에서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념은 지상천국을 완성하는 동시에 천상천국을 완성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심정적인 발판을 세우고 그것을 천상에까지 닦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지상천국의 이념과 천상천국의 이념을 다 가르쳐 주지 못하고 영적 구원만을 성사시킨 입장에서 독생자로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뜻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은 2천년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소원의 한 날을 찾아왔고, 지상에서부터 천상으로 통할 수 있는 지상의 행로를 개척해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어서 어디에 갔느냐? 낙원에 갔습니다. 낙원은 어떤 곳이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합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느냐? 그것은 책임완수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예수님은 만민의 참부모로 오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민에 대해 참부모의 인연을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상재림을 해야 됩니다. 천상재림이 아닌 지상재림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오셨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종의 입장에 세우고 양자의 도리와 직계 자녀의 자리를 찾아 세워 예수님과 하나되게 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하여, 이제 너희가 낳은 아들딸들은 타락한 세계와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세우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의 천국을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본연의 아담 해와, 지성과 정성을 다하여 당신의 모든 소망을 걸고 지으신 아담 해와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할 존재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본연의 아담을 대신할 후아담격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타락과 상관없는 복귀된 아담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이고 다시 오시는 재림주님은 3차 아담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해야 할 일은 소망의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부터 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15-325, 65.12.07) 6천년 역사는 잃어버린 참부모를 복귀하는 역사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에서 섭리해 나온 전반적인 내용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복귀도상에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찾아 나왔습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혈통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악한 후손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인간이 예수님을 믿고 타락 이전의 자리로 올라가기를 소망하며 내일을 희망삼아 나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고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간 수고를 통해 비로소 타락하지 않은 복귀된 소망의 아담형인 예수님을 찾아 세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들 앞에 누구인가? 참된 조상입니다. 만약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완성했더라면 그들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을 것인데,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이상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인류의 참된 조상의 자리를 아담 해와는 잃어버렸습니다. 제아무리 잘나고 천하를 호령하여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은 너나할것없이 타락한 조상의 혈통을 받고 태어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원통한 사실입니다. 타락한 시조를 가진 인류는 지옥으로 맹주(猛走)하고 있나니, 여기에 하나의 표준을 세워 놓고, 참자녀를 품어 줄 수 있는 본연의 부모를 찾아 헤맨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4천년간의 복귀노정을 통해 아담 해와가 잃어버린 본연의 자리를 찾아 나오셨습니다. 그러면 메시아란 무엇이며, 어디에서부터 구주가 되어야 하느냐? 인류가 타락으로 참부모의 자리를 잃어버렸으니, 먼저 참부모로서의 구주가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 잔치는 본래 아담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선남선녀요, 천지 대주재의 직계 아들딸로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핏줄이 이 땅에 생겨나니 기쁘도다 하며 주는 축복을 받는 것, 즉 하나님의 모든 대유업을 상속받고 성혼의 축복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전권을 대행해서 나타나야 할 것이 타락 전의 아담 해와였는데, 이들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전부 깨지고 말았습니다. 6천년 전 이들을 중심삼고 소망의 천국을 이룩해야 할 것이 타락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인간을 종의 종에서 종으로, 종에서 양자를 거쳐 직계의 아들딸로 복귀시켜 사탄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승리권을 찾아 승리의 왕자로서 하나님의 성혼 축복을 받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거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가 타락으로 잃어버린 참부모를 구원 완성하여 복귀시키는 날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이 날이 있어야 만사가 이루어집니다. 선한 인간은 선한 부모 밑에서만 태어납니다. 거기서 올바른 가정이 형성되고, 올바른 가정이 생겨나야 올바른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복귀의 과정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 하나님의 소망은 아담 해와가 본연의 참부모를 중심삼은 참혈족으로서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세계를 이루는 것이 본래 하나님의 창조이상인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부모가 깨져 나가고 자녀가 깨져 나가니 결국 오늘날과 같은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차 아담은 타락을 하였고 2차 아담은 땅 위에서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들을 대신하여 3차 아담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 인류가 하나같이 참부모의 혈통적 인연을 거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세의 이런 상태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의 인연을 갖고 오시는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6천년 역사는 잃어버린 참부모, 즉 아담 해와의 완성한 기준을 복귀하는 역사였습니다. (15-327, 65.12.07) 이스라엘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복귀섭리 노정 원래는 구주라는 명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상담할 수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요, 복귀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치에 맞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한번으로 그만일 텐데 타락함으로써 3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인 구약시대를 거쳤고, 장성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새로 오시는 주님을 표본으로 하여 완성시대인 성약시대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아담 한 사람을 재창조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하였던 하나님의 뜻이 아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해 아담 가정에서 노아 가정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노아 시대에서 아브라함 시대로, 아브라함 시대에서 모세 시대로, 모세 시대에서 예수님 시대로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 전개되어 나왔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해 1,600년을 수고하여 아담 가정 대신 노아 가정을 불러 세웠습니다. 노아에게 홍수심판을 하겠다는 것을 예고할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기필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억울한 내적인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노아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을 일편단심으로, 촌시(寸時)라도 잊지 않는 신념 가운데서 지켜 나왔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40일 홍수심판 위에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그 후 둘째 아들 함의 실수로 노아 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는 깨져 나갔습니다. 온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겨진 노아 가정에서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뒤넘이쳤던 그 가정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에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온 하나님이었던 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또 노아 가정에서 섭리의 뜻이 저끄러짐으로써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우기 위해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마음으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온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오늘날 그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해결지으려고 했지만 그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연장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이라는 슬픈 명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이루려던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그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당장에 아브라함 일족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망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또 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브라함 자신은 몰랐습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고 하란 땅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올 때, 이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고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원수의 시험을 받더라도 또다시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이 있었음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라반의 가정 환경 속에서 전부를 복귀시켜 승리함으로써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발붙일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애급고역 400년 기간을 거쳐 모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써 다시 제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과 대결해 승리한 터 위에 천국이념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가나안 땅을 거치고, 역대의 처량하고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 예수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15-329, 65.12.07)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복귀섭리 하나님은 복귀섭리노정에서 언제나 개인, 가정, 종족, 민족 시대를 한꺼번에 복귀시키기를 원하였지만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점장이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예물을 줄 때, 온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소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시는 메시아가 사람으로 태어날 줄 몰랐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어느 누가 버선 한 켤레라도 마련해 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다 해서 옷 한 가지 마련해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쌍한 자리에 오시면 안 되겠다고 초막 대신 거룩한 장소를 예비하고, 예물을 준비해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늘의 때는 지나가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찌하여 4천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한을 풀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를 알지 못했던고! 하나님이 4천년 약속의 주인공으로 보낸 메시아를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람도 몰랐느냐 하는 것이 억울하고 분한 사실입니다.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은 어디에 갔던고! 그들은 선민권을 자랑할 줄만 알았을 뿐, 저들을 세운 것이 오시는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책임이요, 사명인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마귀 들렸다 바알세불의 괴수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의 비운입니까? 그들은 빌라도와 짝하여 유대의 나사렛 예수, 그는 가짜니 그를 잡아다가 죽여 주시오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 민족이 죽였습니다. 예수는 피살당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상에 천국을 완성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습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선생님이 영계를 통하고,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해서 안 사실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세의 기독교 앞에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선생님 마음속에서는 불이 납니다. 원통하고 원통한 십자가이기에 그렇습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민의 구세주요, 황태자로 오셨던 그 메시아에게 십자가가 웬말입니까? 하나님은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영적인 구주로 만들었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지내 만왕의 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성도들은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왕이 필요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 주권 밑에서 하늘나라의 치리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 시간에 오른편 강도, 왼편 강도가 웬말입니까? 사도들이 오른편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달린 것이 원통 중의 원통한 일입니다. 낙원의 선봉자가 누구였습니까? 오른편 강도였습니다.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냈습니다. 사도들이 같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15-332, 65.12.07) 이스라엘 민족이 유리고객이 된 이유 지상에 끝날이 찾아옴으로써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이냐?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품고 당신이 소원하였던 그 본래의 천국권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된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하며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왔다간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지지리 고생했고, 2차대전 중에는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느냐?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오기 전에는 어느 누구든지 그 민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대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유리고객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시달리고 여러 민족에게 쫓김받는 처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느냐? 모두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든지 다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냐? 인류의 참부모요,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부모를 죽인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죄악된 부모를 죽여도 목을 잘라야 할 텐데, 천륜을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인류의 소망을 대표하여 오셨던 참부모를 잡아 죽였으니,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가나안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이 뜻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년간 기독교를 통해서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함으로써 말세의 한때를 대비해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 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15-334, 65.12.07)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복귀노정 그러면 끝날에는 무엇이 오느냐?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천국 하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그 뜻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소망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체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치리자(治理者)의 대표인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원성사의 한날을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년간 준비했던 것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는 복귀의 길을 걸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 불벼락을 내려 쓸어버려도 시원찮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하시며 간곡하게 기도했던 예수님의 그 기도의 조건 때문에 쓸어버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왜 그랬느냐? 예수님의 죽음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고 정성들여 놓은 4천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아 하나님은 또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죽고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는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제1 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 주권과 국가를 이루어 이것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룰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함으로써 깨졌기 때문에 제2차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 민족, 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무슨 생각을 가져야 되느냐? 천국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메시아가 오면 무조건 모두 천국에 데려가느냐? 천국에는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천번 만번 저버릴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하신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하는 그 한날을 바라다가 그때를 맞이하여 개인을 찾아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 앞에서 배척받고 피 흘려,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년 역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이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이 뭐냐? 지상천국을 이루지 못한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했던 한 개인과 가정, 종족, 민족, 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합니다. (15-335, 65.12.07) 2. 복귀역사의 기점 참부모는 복귀섭리의 기점 하나님의 복귀역사의 중심은 세계도 아니요, 어떠한 나라도 아니요, 어떠한 특정한 종족이나 민족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즉 하나님이 세워 줄 수 있는 나라가 있기 전에 그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종족이 있어야 되고, 종족이 있기 위해서는 가정이 있어야 되고, 그 가정이 있기 위해서는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이 부모를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개인 복귀섭리역사를 해 나왔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종결되는 귀결점이 어디냐 하면 부모입니다. 지금까지 흘러 온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면 크고 작은 나라도 많았고, 군소 민족도 많았습니다. 또한 종교인들의 가정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나라가 하나님이 찾고 있는 나라가 되지 못하였고, 그 민족이 하나님이 찾는 민족이 되지 못하였고, 그 가정이 하나님이 찾는 가정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과 민족과 나라는 전부 다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그 가정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하나의 종족과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 수습해 나온 복귀섭리 역사입니다. 이렇게 수습해서 하나의 가정을 전체 대신으로 사랑할 수 있는 한날을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해 나온 역사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나라를 세우고, 민족을 세우고, 종족을 세우고, 가정을 세웠다 하더라도 나라와 민족과 가정까지 수습해 나온 그 모든 수고를 잊어버리게 하는 하나의 기준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정도 아니요, 어떠한 형제도 아니요, 바로 부모입니다. 인류의 참된 조상의 기준이 여기에서 결정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실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지금까지 싸워 나온 싸움을 종결짓고 최고의 승리도 다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까지 바란 소원의 기점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가정을 세우는 데 있어서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기점이 참부모입니다. 본래 이런 자리에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가 서야 합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의 소원은 아담 개인에게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원한 것은 그 둘을 중심삼고 하나의 부모의 자리를 결정짓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입니다. 그러면 사위기대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담 해와가 하나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자라 나오던 아담 해와가 하나의 사랑으로 묶여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출발의 기점을 이루는 그 자리는 인류의 조상이 갖추어야 할 최초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누구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체적인 사랑을 이루었더라면, 여기에서부터 인류의 참부모는 틀림없이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소원하는 그 기준과 일치되지 못하고 어긋남으로써, 즉 우리 인류 조상이 실수함으로써 그 길이 여지없이 파탄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외부 사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 즉 사랑을 중심삼고 걸려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역사에 없는 수고를 하여도 지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으로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국가가 서로 등을 지고 갈라진 것을 묶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묶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한꺼번에 전부 묶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종족, 그 종족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그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참된 남자와 참된 여자를 세워 외적으로 갈라졌던 것을 본래의 것으로 전부 묶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해와 대신 인류의 본래 부모가 되는 기준을 대표할 수 있는 참된 남자 여자 두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본래 기준을 향해 거꾸로 묶어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사실입니다. (25-12, 69.09.21) 탕감복귀 섭리역사의 어려움 지금까지 역사는 탕감복귀역사입니다. 탕감복귀역사 가운데에는 수많은 가정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종족이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나라가 동원되어 거쳐갔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어떤 가정이나 어떤 종족이나 어떤 민족이나 어떤 국가도 하나님의 뜻과 더불어 일치되었던 때는 한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세웠고, 언제나 하나님이 낙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가정과 종족, 민족, 국가를 대해 나오던 하나님의 슬픔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슬픈 사연들을 어느 때 해소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복귀도상에서 지극히 난문제입니다. 그러면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국가를 두고 볼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는 어떠한 나라일 것이냐? 또 그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민족은 어떤 민족일 것이며, 그 민족을 편성할 수 있는 종족은 어떤 종족일 것이며, 그 종족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어떤 가정일 것이냐?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될 때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사탄과 일체가 되어 사탄과 헤어지려야 헤어질 수 없는 혈연관계를 맺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인연이요, 끊어 놓아도 다시 맺어 버리게 되는 인연입니다. 이러한 운명 가운데 인류는 처해 있습니다. 이런 사망권내에 있는 인류를 수습하여 하나님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가정 기준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의 국가 기준을 만들었다 해도 그 가운데 하나님이 세울 수 있는 종족을, 종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세울 수 있는 가정을, 가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의 기준을 이 타락한 세계에서 찾아 세운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는 기독교의 이름을 갖고 기독교권내에 있는 국가들이 많습니다. 혹은 수많은 종족과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가 설정해 나오던 그런 가정과 나라가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기준과는 너무나 먼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습관화된 생활을 놓고 보면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이 하늘 앞에 축복받을 수 있는 권내에 섰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축복받을 나라라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국가가 있지만 한 국가를 표준하여 찾아 나온 하나님의 심정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높고 귀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위업과 악한 현실적인 세계 무대와는 그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먼 거리를 누가 메울 것인가? 이것을 누가 탕감해 낼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언제나 하나님편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고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냥 메워지지 않습니다. 여기는 반드시 수많은 민족과 국가를 대신해서 탕감의 제물을 제시하지 않고는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국가 민족이 이 탕감의 조건을 알아서 모든 것을 탕감시킬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누가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에 탕감조건을 제시해 이 거리를 단축시켜 메워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싸워 나온 것이 6천년의 복귀섭리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는 특정한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의 역사적인 탕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탕감 내용을 갖춘 나라가 있다 하더라도 세울 때의 기준과 그 나라가 가는 기간이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혹은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언제나 하나되어 나갈 수 있겠느냐 할 때,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인간이 번번이 그랬듯이 민족이면 그 민족 역시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역사적인 거리를 메워 나오는 데 협조하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 민족이 몇 해 몇 달 기간은 어떤 인연 가운데서 하나되었는지 모르지만, 수십년 동안 하나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운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기간을 같이 맞추어 나가지 못하면 그 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25-14, 69.09.21) 참부모를 찾으려는 뜻 이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의 운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 왔느냐? 하나의 특정한 민족을 중심삼아 그 국가의 거리를 메우게 했습니다. 또 그 민족이 메우지 못하면, 그 민족 중에서도 특정한 종족, 예를 들면 김씨면 김씨, 박씨면 박씨로 하여금 민족이 메우지 못한 그 거리를 메우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종족이 하나님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국가와 당시의 국가와의 거리를 메우는 데 있어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 종족 가운데서 특정한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이 메우지 못한 거리를 보충토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족의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특정한 가정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세운 그 가정이 책임 못하게 될 때는 그것을 연장시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을 남겨야 됩니다. 그러면 그 남겨야 할 기준이 무엇이냐? 부모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복귀역사를 해 나오는 데 있어서 최종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참된 부모에 있습니다. 참된 부모를 요구하는 것은 참된 가정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요, 참된 가정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종족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요, 참된 종족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민족, 참된 국가, 참된 세계를 대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발전되어 나갑니다. 이것을 거꾸로 보면 세계를 대표해서는 국가가 제물 되어야 하고, 국가를 대표해서는 민족이 제물 되어야 하고, 민족을 대표해서는 어떤 특정한 종족이 제물 되어야 하고, 그 종족을 대표해서는 어떤 특정한 가정이 제물 되어야 하고, 그 가정을 중심삼고는 어떤 특정한 대표적인 자리에 선 사람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어디에 귀결되느냐 하면, 부모에 귀결됩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역사의 동기가 될 수 있고, 모든 국가 형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모든 민족 편성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모를 중심삼고 복귀섭리역사를 엮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나라와 민족을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참된 부모의 기준을 중심삼은 가정이 완전한 터전 위에 서 있으면, 그 가정을 중심삼고 종족 민족 국가를 새로이 편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전체를 잃어버렸다 해도 그런 내용을 재편성할 수 있는 기원이 되는 기준, 다시 말하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한 기점이 될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바로 참부모의 자리입니다. 본래 아담 해와는 영원히 변치 않는 가정의 부모가 되어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형성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찾아 내려와 새로운 각도에서 편성하려는 것이 지금까지의 6천년 역사입니다. 이런 뜻 가운데서 그러한 사명을 종결짓기 위해 오셨던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대표해서 오셨느냐? 탕감이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세계를 대표해서 오셨고, 국가를 대표해서 오셨고, 또한 민족과 종족을 대표하고 가정을 대표해서 오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의 중심으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분으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국가의 대표로 믿지 못했고, 민족의 대표로도, 종족의 대표로도, 더 나아가서는 한 가정의 대표로까지도 믿어 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은 전체의 대표로서 전체의 중심으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25-16, 69.09.21)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이 소원하신 것은 하나의 나라였고, 하나의 민족이었고, 하나의 종족과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참부모가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참부모를 결정하는 데에는 하나의 여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여성을 찾아오는 데는 그냥 끌어 올 수 없습니다. 보통 한 남성이 한 여성을 맞는 것이라면 언제든지 맞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 한 여성을 맞는 데는 종적인 환경이나 횡적인 환경에서 자유롭게 맞이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 여성을 맞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국가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되고, 민족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되고, 종족적인, 가정적인 대표의 기준을 세워야 됩니다. 당시까지의 4천년 역사의 섭리 내용과 일치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걸고, 이것을 완전히 탕감시켰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고는 예수님이 하나의 신부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서도 예수님은 신랑으로 왔으니 그 예수님 앞에는 신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는 평면적이며 횡적인 기준에서 그저 하나의 남성 앞에 하나의 여성으로 등장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의 국가를 대표하고, 하나의 민족을 대표하고, 하나의 종족을 대표하고, 그 종족을 중심삼은 수많은 가정들을 대표하는 기준에 선 여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대표적인 여성은 어떠해야 되느냐? 딸의 입장에서는 딸 중의 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내의 입장에서는 열녀 중의 열녀가 되어야 하고, 수많은 어머니 가운데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엮어 나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그러한 여성은 반드시 역사적 배경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여성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 혹은 이스라엘 나라 앞에 없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배경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스스로 나라를 대표할 수 있고, 민족을 대표할 수 있고, 수많은 가정을 대표할 수 있고, 수많은 여성을 대표할 수 있는 특정한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을 결정짓지 않고는 탕감복귀의 기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체의 중심이 되는 부모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탕감복귀역사이기 때문에 기쁜 역사가 아니라 슬픈 역사였습니다. 이 슬픈 역사 가운데는 수많은 국가들이 말려들고,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종족들이 말려들고, 수많은 가정들이 말려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슬픔으로 엮어져 온 역사의 결과로 남아진 세계의 수많은 국가와 민족, 수많은 종족과 가정이기 때문에 이 모두를 대표해 나설 수 있는 그 여성은 그저 단조로운 여성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특정한 내용을 갖추고, 그것을 책임질 수 있다는 결의를 한 여성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가운데에 수많은 나라를, 수많은 종족을, 수많은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특정한 내용을 갖춘 여성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성은 그러한 결의와 자신을 가지고 역사적인 모든 남성을 대표해 오시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남성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국가면 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민족이면 민족을 대표할 수 있고, 종족이면 종족을 대표할 수 있고, 가정이면 가정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으로 믿고 그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지 않고는 복귀된 가정을 중심한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25-18, 69.09.21) 기독교의 사명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예수님이 택한 12제자와 70문도가 내정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반이 못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동원해서 민족을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적인 울타리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기반 위에 하나의 결실체로 자신을 연결시키려 했습니다. 이를 위해 역사적으로 책임 못했던 많은 남성들을 재현시켜 그 시대에 평면적으로 벌여놓은 대표적인 형이 12제자와 70문도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그 12제자와 70문도가 완전히 하나되면 역사 과정에서 실패했던, 그 시대 시대마다 탕감하지 못하였던 모든 남성들의 실수가 탕감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과 완전히 하나되어 역사적인 실패를 수습할 수 있는 실체적인 권을 횡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완전하게 철옹성 같은 울타리를 만들어 사탄이 공격하려야 공격할 수 없는 하나의 남성으로서의 승리 기반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 울타리의 사명을 해야 할 사람이 12제자요, 70문도입니다. 이러한 터전, 즉 이러한 배경 위에 공고히 서서 앞에서 말한 여성을 찾아 어머니의 기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노정에서 싸워 나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대의 싸움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내적인 사정이 예수님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그 시대의 12제자나 70문도는 몰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러한 환경의 터전을 한번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상대도 찾지 못하고, 그런 내정을 통고할 수 있는 하나의 제자도 찾지 못하신 채 30여 년의 생애를 지내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기에 한이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한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역사를 엮어 오면서 수고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보내 한 때를 맞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소원하던 모든 내용이 근본적으로 파탄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남성의 역사로 엮어 왔던 4천년 역사에 하나의 승리적인 기반을 세우기 위해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세우지 못하고 가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었으니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하였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하나 죽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하나 죽음으로써 4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남자를 통하여 역사해 나오던 하나님의 섭리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더 슬퍼하셨습니다. 자기가 죽는 그 설움보다도 하나님의 섭리가 실패로 돌아가는 설움을 더 크게 느껴 내정적으로 깊이 슬퍼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는 죽더라도 역사적인 모든 터전을 다시 한번 수습하겠다는 신념과 결의와 각오 밑에서 십자가의 길을 당당코 돌파해 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점을 마련할 수 있었고 영적으로 제자들을 다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제2의 울타리를 만들어 오늘날 남성을 중심삼은 기독교 역사를 재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2천년간 수많은 순교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발전시켜 나온 것이 기독교 역사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역사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는 막연한 국가의 이념권 내에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민족을 다시 세워 예수님 당시에 해결짓지 못하였던 모든 내적인 문제를 재현시켜 완전히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런 탕감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25-20, 69.09.21) 새 역사는 참부모로부터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새로운 기반을 닦음으로써 시작됩니다. 그 부모로 인해 새로운 자녀, 새로운 종족, 새로운 민족,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천주가 편성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다시 와서 섭리해야 할 소망의 목적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날이 한꺼번에 와서는 안 됩니다. 종의 종의 길을 전부 수습해야 되고, 종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양자의 길을 수습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의 길을 수습해야 됩니다. 그러나 6천년 역사과정에서 모두 저끄러졌으니 오시는 주님은 이것을 일대에 걸어서 역사적인 6천년사를 수습했다는 승리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역사를 심판할 수 있는 참다운 기준을 세우기 전에는 이 땅 위에 참부모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 신랑되신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라고 말하는 도둑들입니다. 그런 신앙하려고 했으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이런 길을 걸어 나왔겠습니까? 선생님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 흘리는데 있어서도 누구한테 지지 않았고, 회개하는데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했습니다. 또한 열의를 내라면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의 열의를 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반대하는 길을 왜 가느냐? 이 길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들춰보고 맞춰봐도 틀림없습니다. 역사는 이러한 원칙에 의해서 정비될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원리 원칙에 부합될 수 있는 사람, 천리 공법 앞에 완전히 순응하고 상응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들의 역사적인 소원이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도를 닦아 나온 사람들의 소원입니다. 양심의 기준을 중심삼고 투쟁하면서도 승리의 한날을 갖지 못한 것이 역사적인 한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때려 몰아서라도 통일교인들을 그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 앞에 공헌하는 것이요, 현시대 앞에 승리의 권한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에 천번 만번이라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산중에서 도닦는 사람들이 정도령을 기다리며 선천시대니 후천시대니 하면서 새로운 천지 부모가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데, 천지 부모가 무엇입니까? 바로 참부모입니다. 역사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느냐? 새로운 부모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 천지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당신은 천지 부모요라고 공인받은 참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그 부모가 나오기 전에는 천지개벽은 되지 않습니다. 천지개벽이 되어야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의 출발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심정을 중심삼고 자라난 아들딸들이 하나님이 창조 당시에 아담과 해와에 대하여 소망하였던 그 심정을 지니고 일체의 생활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 대해 소망하였던 것을 대신 이루어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 대신 그러한 자녀들을 불러서 만세의 축복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 심정의 혈통이 너희와 더불어 길이 같이 할지어다라고 축복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축복받은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와야 합니다. (17-127, 66.12.11) 하나님의 뜻을 품은 지도자의 고충 본래 역사는 남성과 여성을 중심삼고 접촉시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는 하나의 기점에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 연결은 참부모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되어야 하며, 그 참부모는 역사의 기원으로 출발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역사가 출발되었더라면 영원한 결과의 세계까지 뻗어나갈 것인데, 이것이 틀어졌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을 다시 만들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기원을 다시 만들기 위해 벌여 놓은 역사를 수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참부모의 인연을 중심삼고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을 반드시 맺어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역사시대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통일교회가 현실적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선생님의 책임은 무엇이냐? 참부모의 인연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중요한 사명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결정짓기 위해 여자는 어떠한 여성이 되어야 하고, 남자는 어떠한 남성이 되어야 하느냐? 즉 선생님 자신은 어떠한 아버지가 되어야 하며 어머니는 어떠한 어머니가 되어야 하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문제도, 세계의 문제도, 하늘땅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완전한 승리를 결정짓지 않고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섭리는 다시 연장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196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적인 싸움을 해 나오는 데에 있어 기준이 되어 왔습니다. 두 분이 하나된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만나서 하나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중심삼고 볼 때, 두 나라 사이에는 합하려야 합할 수 없는 수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즉 문화가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다릅니다. 이 다른 환경이 그냥 그대로 하나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탕감내용이 걸려 있는 문제, 바로 이 하나의 남성과 하나의 여성이 하나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구렁텅이가 있다면 그 구렁텅이는 어떠한 구렁텅이보다도 더 깊은 구렁텅이일 것이요, 산이 있다면 그 산은 어떠한 산보다 더 높은 산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평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정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산정과 깊은 골짜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평지가 될 수 있는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그 기준이 세워지는 때가 참부모가 이 땅에 인연을 갖추고 등장할 때고, 그때까지의 역사는 슬픔의 역사입니다. 인류사에 이러한 탕감노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내정 가운데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이루려 하였던 소원의 뜻을 아담 해와가 몰랐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담 해와 타락 이후 슬픔의 역사를 4천년 동안 엮어 나왔지만, 그 역사과정의 수많은 인간들도 몰랐습니다. 4천년이 지난 후 예수님이 오셔서 하늘을 대신하여 하나의 남성으로서 하나의 여성을 취해 역사적인 모든 해원성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품고 나아감에 있어서 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내적인 고충을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몰랐으니, 예수님이 다른 누구에게 그 일을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탄식했습니다. 그것은 그러한 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어느 누구도 몰랐습니다. (25-24, 69.09.21) 참부모가 가야 할 길 그러면 참부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어 사탄의 참소권을 벗어난 자리입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남기지 않고 완성기준을 넘어선 자리에 올라가야만 비로소 참부모의 기원이 생깁니다. 이것이 원리적 견해로 본 참부모의 기원입니다. 그러나 그 견해에 합당한 자리는 간단하게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5-30, 69.09.21) 하나님은 때가 되기 전에 반드시 준비시킵니다. 군대가 위험한 때를 대비해서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국가가 국민을 총동원해서 긴급사태에 대비한 훈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결정적인 큰 때가 오기 전에 반드시 훈련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은 하나님이 앞장서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간에는 하나님은 완전히 떠납니다. 왜냐하면 타락의 결정을 아담 해와가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이 같이하고 언제 동정하느냐? 완전히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자리입니다. 둘이 아니고 혼자 남는 자리입니다. 그 누구한테도 형언할 수 없는 지극히 외로운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빠져나갈 구멍도 없는 그런 입장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한 고개를 넘을 적마다 반드시 그런 자리가 있습니다. (25-36, 69.09.21) 오늘날 통일교회 선생님이면 선생님 자신이 내정을 몰라서는 탕감역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내정을 통일교인에게 털어놓고 의논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모의 책임입니다. 부모가 잘못했기 때문에 부모될 수 있는 사람만이 해결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것은 난문제로서 첩첩이 가로놓여 있지만 외적으로 보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엇갈린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으니 여기에 깃들어 있는 모든 사연을 탕감하고 나와야 할 길이 참부모가 가야 할 길입니다. 지금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뜻을 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뜻을 펼 수 없는 실정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선고를 받게 될 때도 그것을 무난히 넘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환경에서는 뜻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음의 길로 내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사연이 오늘날 통일교회에 깃들어 있습니다. (25-26, 69.09.21) 참부모가 가야 할 길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됩니다. 이것이 참부모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또한 그 길은 하나님이 협조해서 넘는 길이 아니라 홀로 넘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넘을 때 하나님이 협조하여 같이 넘었다면 탕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외면하는 입장에서 홀로 넘어야 합니다. (25-36, 69.09.21) 참부모의 기준 참부모의 기준점은 특정한 하나의 남성입니다. 그 남성은 6천년의 복귀섭리역사 과정에서 모든 국가면 국가, 민족이면 민족을 중심삼고 그 과정에서 실수했던 수많은 남성을 대표하여 승리의 결정권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운 터 위에 하나의 상대적인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해와가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잃어버렸던 것을 전부 다시 찾는 역사를 해야 됩니다. 아담을 통해 해와가 빚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성의 상대가 재차 빚어져야 됩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싸움을 지금까지 해 나왔습니다. 통일교인들도 축복받으려면 반드시 그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그 기준을 넘는 데에 있어 7년노정은 불가피합니다. 이 7년 고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싸운 것은 그 고개를 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4천년 역사에 해당합니다. 원래 예수님 때에 이것을 연결해 7년노정을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지 못함으로써 2천년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재현해서 그 4천년 역사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탕감노정을 걸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복귀원리를 통해 예수님에 대한 내용과 성경 가운데 미지의 사실을 전부 해명했습니다. 그리고 아담 가정에서부터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그리고 모세 시대를 거쳐 예수님 시대까지 제일 깊은 곳을 파고 들어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펼치면 크지만 손에 쥐면 한줌에 쥘 수 있는 그물과 마찬가지로 심정적 기준 앞에 한줌에 쥘 수 있는 내용을 가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려서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건으로 제시해 사탄세계에서 승리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통일교회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으며, 수많은 영통인들에게도 선생님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4천년 역사 속의 많고 높은 고지를 전부 평지로 만들어 심정적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승리적 관계로 세워야 합니다. 이것을 선생님이 세워 아무런 지장이 없는 내적 결정을 지어 놓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사적인 탕감노정을 결정지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어떠한 일에 결단을 내리면 그 결단은 세상뿐만 아니라 영계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 것은 영통한 사람들에게 알아보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외적 세계만이 아니라 영적 세계까지도 들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년 역사 속의 모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높은 산정을 깎아 평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많은 우리 조상을 대해 슬퍼했습니다. 수많은 우리 조상한테 배반당하고 배척받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모든 사연들의 깊은 골짜기보다 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습니다. 조상들이 가지 못한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선생님의 한마디 위로가 6천년 동안 지상에 왔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위로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일교인들은 그런 사실들을 너무나 막연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원리는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멀다는 것입니다. 심정적으로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 기준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 기준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하며, 영적 체험에 들어가려면 기도를 해야 됩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원수세계에 들어가서 반드시 싸워야 합니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중심삼고 옳은 것을 찾아서 생명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통일교회를 볼 때, 지금까지 믿고 있는 통일교인들이 알고 있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장막을 헤치고 들어간 깊은 골짜기가 있고, 역사 과정에서 느끼지 못하는 깊은 내용이 있습니다. (25-32, 69.09.21) 3.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아담 해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어린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말로써 주관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사랑으로써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와를 대하기를 바랐습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는 철모르는 누이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지 않고, 이는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한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며 아담을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 때를 바라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이요,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할 수 있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아버지 어머니로서 이 대자연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사람이 타락함으로써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된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기를 소망하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소원하신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명사적인 아버지,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 왔습니다. 인간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는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를 밝혀 나왔습니다. 인간이 당신과 부자 관계라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하기 위하여 싸워온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의의 면류관이니 하는데, 선생님은 그거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던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 하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인간이 바랄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은 어디 갔는고? 타락 이전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과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의 세계는 어디 갔는고?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의 명령에 순응하는 자리, 만천하를 주관하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아들의 위치와 아들의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사탄이 무엇이냐?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쥐어져 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놈의 세상을 밟아치우고, 이놈의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에게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님이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 뜻입니다. (9-134, 60.05.01)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10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 위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도의 길,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하고 둘입니다.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나를 지은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생애의 아버지, 땅 위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땅 위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다 갖고 있는데 저 사람이 무슨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큰소리 치느냐! 하겠지만 보십시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누구냐?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참아버지 참어머니입니다. 몸을 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은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 없느냐? 본연의 아버지와의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 태어난 아들딸은 땅 위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을 대해서는 사탄의 사랑은 물론 그 어떤 사랑을 가지고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운데 선남 선녀로서 성례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거이 그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해와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표본적인 참부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는 참다운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한때 아버지여, 제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저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저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본래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행복한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천국입니다. (9-136, 60.05.01) 중생해야 할 인간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냐? 후아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텐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이 바로 어머니신입니다.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신인 성신을 보낸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여인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디모데전서 2장 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을 낳았을 텐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이 이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이 무엇이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아버지요 신랑이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요 신부입니다. 인간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신랑되신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 없이는 못 살고 성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다시 인간에게 주입되면 중생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을 낳는 법이 천지 이치 가운데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멍이 생겼으면 땜질을 해야 합니다.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주이신 동시에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입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 놓아야만 천지 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 살고 있으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참부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같은 너희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없습니까, 부모가 없습니까, 신랑이 없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고아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고아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신랑되신 예수님과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과부입니다.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됩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끄트머리에서 아무리 해봐야 수습이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 아담 해와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종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신학은 망합니다. 하늘의 역적이 됩니다. 그 신학은 하늘의 역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늘 앞에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됩니다. 타락전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팠는가 하는 심정의 관문을 우리가 통과해야 됩니다. 어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을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됩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근원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9-138, 60.05.01) 끝날에 처한 성도들이 취할 자세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날 때 어떠했던가? 그들은 쫓겨나는 자신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눈물의 기원(起源)이 되었고, 고통과 질고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는 그런 아담 해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쫓아내면서 쫓겨나는 그들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픈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난 종족이요, 그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슬퍼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쫓겨나 있는 인간을 보고 오늘도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자신을 중심삼고 하늘을 배반하여 쫓겨났던 인간은 어떻게 해야 복귀되는가? 내 슬픔이야 있거나 말거나, 내 억울함이나 내 사망이야 있거나 말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붙들고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즉 울음으로 출발한 역사의 기원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사망선에 떨어진 인간을 6천년 동안 품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울고 고통으로 슬퍼해 온 하나님을 붙들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은 오냐. 네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이 반겨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하나님이 인간 때문에 슬퍼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고통당하였던 모든 것을 탕감하고 해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4천년만에 하나님 대신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땅 위에 오신 분입니다. 4천년 동안 불쌍하게 허덕인 인류와 상봉하여 하나님 대신 그들을 붙안고 사랑하기 위하여 오셨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인간은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죽이고 보니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죽이고 나서야 자기의 참아버지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4천년 동안 고생한 부모의 서글픈 심정을 모르는 인간들로 하여금 통곡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만난 자는 통곡하여야 됩니다. 통곡하더라도 예수님이 하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참부모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죽인 것을 놓고 먼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통곡하고, 그 다음에는 오셨던 참부모를 위하여 통곡하고, 나아가 땅의 인류를 위하여 통곡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처한 성도들은 어떠한 통곡을 해야 할 것인가? 나를 위하여 통곡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통곡할 때도 지났습니다. 이제 세계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성부․성자․성신을 위하여 통곡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한 전체 세계를 주관하는 이념권내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참부모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참부모를 잃어버린 서러움과 원통함을 느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본성이 인간에게 있었던 연고로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재림주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재림주님을 맞이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도 같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즉 역사적인 눈물을 대신 흘리고, 시대를 대표하여 대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동안에 이러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슬픔의 눈물은 흘렸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한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이고,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는 날입니다. (5-75, 58.12.21)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중심이 아닙니다. 아담이 중심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아느니 모르느니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논란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못나고 미흡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해 야! 하면 그 피조물이 예! 할 수 있게끔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이제 종교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오고,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 사회관과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때는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는 내 생활 감정을 넘어서고, 내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서 천주관(天宙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부모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 하나님이 오냐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때, 참다운 행복을 바라고 나가는 이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갈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을 넘어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 박힌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 무엇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됩니다. 자랑할 것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찾을 것을 찾지 못했고, 가질 것을 갖지 못했으며, 자랑할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못 가졌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어 보십시오. 아이고,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를 싸고 죽자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개의 국가나 민족권내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사람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道)가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 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영계를 가르쳐 주는 도도 있지만, 윤리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놓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참부모가 깨지니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부부가 안 나왔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이뤄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부들이 주님 오실 때에는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일지라도 남편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 갈 곳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이념이라면 항의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축복받은 참다운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당신을 모셔주기를 바라는데,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놓고 이렇게 살라고 했겠습니까?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을 하느냐?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세워지지 않았는데 그 후손된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9-140, 60.05.01)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는 섰지만 천지만물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는 못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참다운 주인공을 세워 그를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일남일녀가 성숙하여 그들이 만물과 화동하여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된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 자라고 또 자라서 참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靈)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肉)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하나님을 영원한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다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이 인간이 바랄 것은 무엇이냐?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됩니다.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가 의붓자식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성신을 잃고는 못산다. 내 몸과 피살이 그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맺어 양육받고, 성신의 감동과 더불어 성신의 도움을 받아 성신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대해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귀합니까? 무슨 보물입니까? 둘이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기쁜 것이 못 됩니다.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둘이 소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 행복이라는 명사는 없습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제일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모든 존재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 가치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천상천하에 어떤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음받은 상대적 존재로되 하나님만은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내 것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하여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이 왔다 갔지만 너만은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은 최대의 성공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라는, 아들이라는 명분을 받았습니다.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는 참다운 효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부터 어떻게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오늘의 자기를 대하여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자기를 세워 어떠한 축복을 해주시고자 하는가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무슨 구주냐?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모를 찾아 주는 구주, 참부부를 찾아 주는 구주, 참자녀를 찾아 주는 구주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생명만 구원해 주시는 구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오신 분이요, 잃어버린 참부모로 오신 분이요, 참부부의 신랑으로 오신 분이요,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참부모를 사랑하는 자요, 참부부가 될 수 있는 자요, 참자녀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9-143, 60.05.01)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은 참부모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실체(육신)를 가진 참부모는 새로운 이념과 비전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인간이 그 참부모를 모시고 사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재림이라는 명사가 성립되었습니다. (5-74, 58.12.21) 종교활동이란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일 오늘날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아담 가정의 혈족에서 벌어진 가인 아벨의 싸움으로 인해 찌그러진 죄악 역사가 오늘 세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악을 청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청산해 주어야 하느냐? 타락한 아담 해와로서는 청산할 수 없습니다. 죄악 역사의 청산은 타락하지 않은 조상이어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어야 합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백성들이 6천년만에 부모를 찾는 것입니다.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그러므로 종교를 갖는 것은 그러한 부모를 찾는 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가 영원히 죽은 줄 알았는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습니다. 부모를 찾는데 재산이 문제입니까? 친척이 문제입니까? 나라가, 세계가 문제입니까?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부모를 찾는 일에 온갖 충성을 다해야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부모가 죽어 가는데 땅이나 돈을 붙들고 희희낙락거리는 자식은 없습니다. 본성의 인연을 중심삼은 본연의 부모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 부모가 다시 회생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내가 개척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또한 누구보다도 하늘의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하며, 그 억울함과 분함을 느낀 그 자리에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며, 효자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때문에 생사를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과, 세상의 핍박과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충효의 인연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을 바치는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 흘린 제단을 이어받아 개인의 제단, 가정의 제단, 민족의 제단, 세계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물로서 하늘에 바칠 수 있는 그 민족이 복받는 권(圈)과 보호받는 권을 세워 오늘날 기독교의 이념을 발전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20-122, 68.05.01)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우리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학문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땅 위의 어떤 보물을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권세를 가진 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면 망합니다. 제일 귀한 것이 만우주의 대주재며 주인공인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 할진대 이 천지가 그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자기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우리는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야,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하나님이 불쌍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띠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없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고 소원하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인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입니다. 또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있다고 보면 아들격입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의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왔고, 지금까지 왔다간 수많은 우리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는 분을 우리가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나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이뤄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리 반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귀한 것을 알려면 귀한 그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끝날에는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참 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 잘났다고 하고 서로가 다 옳다고 하니, 어떤 것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과 담판해야 됩니다. 끝날에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문제를 걸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판국입니까? 하고 담판하여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으려면 천신만고의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인간이 잘 믿기 위해 고생하던 그 죽음의 고비도 늠름히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슬픔의 곡절도 많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당하고 당하여도 내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는 각오로 천신만고 끝에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 그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사도들은 귀한 것을 다리 놓기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귀한 것을 친히 찾아 가져야 할 끝날의 성도인 우리는 무엇을 해봤습니까? 어느 누가 때리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안 맞으려 하고, 그저 싸우려고만 하고, 한마디 억울한 말만 들어도 잠을 못 자고 보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 번 맞고도 돌아서서 염려해 줍니다. 만 번 배척받고, 만사에 비운의 곡절이 깃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고통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창조 당시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바라보던 소망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타락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이 한을 잊어버리고, 본연의 아들딸로 축복해 주어 내일의 행복의 동산에서 즐거워하겠다는 심정을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 하나님입니다. (9-148, 60.05.01) 4.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세주 인간 타락으로 참된 부모가 돼 보지 못한 하나님 지금까지는 타락의 역사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부모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지상에 타락한 부모만 있었기 때문에 천상에도 참부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류의 부모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어떤 입장에 있느냐? 하나님도 참된 부모가 되려면 참된 자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참된 자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참된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의 입장을 보더라도 우리 인류를 창조하기는 했지만 창조한 그런 입장에서의 참된 부모, 참된 하나님으로서의 자리를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완성과 더불어 참된 부모를 중심한 참된 가정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참된 가정과 더불어 참된 종족, 참된 민족,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됐더라면 참된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은 참된 하나님의 혈족이 되었을 것이고, 참된 하나님의 혈족으로 말미암아 참된 하나님의 민족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 민족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직접 지배하는 하나의 나라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 세계에는 수많은 민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민족도 하나요, 국가도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인류를 배경으로 한 역사를 보면, 수많은 문화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다르고, 일본이 다르고, 중국이 다르고, 수백 국가의, 혹은 수백 민족들이 지니고 온 방향에 따라 역사적 배후가 전부 다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이상하던 본래의 국가형태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하지 않았으면 완성한 아담이 완성한 부모가 될 것이고, 그 완성한 부모를 중심삼은 생활적 무대를 확대한 것이 하나의 민족형성의 문화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요, 혹은 국가형성의 기반은 물론이요, 세계문화권, 이상적 문화세계의 형성이 환경적으로 벌어졌을 것입니다. 아담문화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따지고 들어가면 그 전통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발전적인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변하려야 변할 수 없는 전통적 문화가 형성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그 문화 사조를 중심삼고 인류를 인도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단 하나만이지, 둘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다른 주장이 있을 수 없고, 생활 전체도 전부 다 하나됐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는 참된 부모로부터, 참된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가 형성됐을 것입니다. 그러한 세계가 됐더라면 거기에는 악한 사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부산물입니다. 타락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직접 지배받는 세계권 내에는 사탄이라는 파괴적이요, 불순적이요, 불응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세계가 되었더라면, 그 세계가 바로 하나님이 치리하는 세계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엉클어진 세계요, 오늘날 타락한 인간세계에서 볼 수 없는 고차원적인세계요, 사랑의 인연으로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고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세계로서 하나님이 가는 방향으로 국가 주권자가 가는 것이요, 그 주권자가 가는 방향으로 그 나라 사람, 백성이 가는 것입니다. 그 백성 가운데 수많은 가정들은 그러한 방향으로 전부 다 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그 세계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 사랑으로 말미암아 충만한 세계인 동시에, 오늘날 인간들이 미래에 바라고 있는 초연한 세계,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이러한 세계가 아닙니다. 또 연구해 보고, 뭐 가르침 받아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과 더불어 하나님의 지배를 받을 수 있는 그러한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초영적(超靈的)입니다. 나면서부터 천지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어떻게 가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알게 돼 있습니다. 마치 플러스가 있으면 마이너스 입장의 지남철은 반드시 플러스를 향하듯이,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적인 양심의 힘에 의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초영적인 인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83-38, 76.02.05) 타락으로 슬픈 천지가 된 이 세상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 세계에서도 사랑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죽느니 사느니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약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화한 그런 세계는 어떻겠느냐?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는 생명이 문제가 아닙니다. 초연한 이상적인 환경 천국의 형성을 보아 입체적인 천상세계, 영원한 세계로 연결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갖출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행복의 천상천국이요, 지상천국의 환경입니다. 그것은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사실이어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참된 하나님을 이 피조세계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은 슬픈 하나님입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류를 대하는 그 시간부터 영원히 기뻐할 수 있는 부모로서의 하나님이요, 스승으로서의 하나님이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하나님은 비참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인류가 고통스러워하면 고통스러워하는 그 인류를 대해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슬픔의 피해자였습니다. 희생의 대가를 치러 자식 대신, 인류 대신 맞으면서 해방의 수난길, 탕감의 역사를 치러 오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그런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영광 가운데 있는 기쁜 하나님인 줄로 알고 있지, 슬프고 수난길을 가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모든 존재물들이 원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들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권 내에서 참소받고, 핍박받고, 몰리고, 쫓기고 하는 사람의 종류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권위를 갖춘 하나님의 아들을 보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자연이라든가,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존재물은 한없이 보기 싫은 원수의 아들딸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슬프고, 인류도 슬프고, 만물도 슬픈, 이 슬픈 천지가 타락한 세상입니다. 이것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것을 회복하기 위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섭리역사입니다. (83-40, 76.02.05) 재창조역사를 담당해야 할 종교 인류가 본연의 세계를 회복하는 데는 어떻게 회복하느냐? 주먹구구식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탕감이라는 과정을 거쳐 본래에 하나님이 창조하던 그 법을, 우리 통일교회의 술어로 말하면 창조원리를 재차 적용하는 원리를 통해, 다시 말하면 재창조 원칙을 통해 가지고 수리해 나가는 과정에 오늘날 인류역사는 머물러 있습니다. 수리 공장의 처리를 받아야 됩니다. 이게 오늘날 비운의 운명에 처해 있는 인류역사입니다. 이 수리 공장을 누가 담당하느냐? 이것은 종교가 담당해야 합니다. 그런 종교가 생겨나려면 모든 고장난 것을, 악의 힘을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이 세상 사탄권 내에서 승리한 민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민족이 역사과정에 있어야 되겠기 때문에 그러한 민족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말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무엇에서 승리했느냐? 사탄세계의 환경에서 승리했고, 사탄과 대결하여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류가 가야 할 길은 두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환경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는 타락하게 한 사탄한테 승리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승리하지 못하고는 재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로 말미암아 확실히 이 인류세계에 제시됐습니다. 복귀하는 데는 반드시 탕감해야 됩니다. 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오늘날 타락 인간들이 원하는 욕구에 해당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환경이라든가, 우리 타락한 인간이 요구하는 희망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전부 다 부수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길을 통해, 개인 재창조역사를 통해 가정 재창조역사가 남아졌습니다. (83-42, 76.02.05) 인간이 바라는 구주는 어떤 분인가 지금까지 종교를 믿고 나오는 사람들은 메시아나 구주라고 하는, 자기의 생명과 재산 그밖의 모든 인연을 구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중심존재를 앙모해 왔습니다. 그러한 분을 우리는 심정의 중심되는 절대적인 가치의 중심존재로 믿고 신봉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봉하고 싶은 그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는 어떤 분이냐? 우리가 원하는 그분과 나의 관계를 따져 볼 때, 나는 타락한 입장에 있고 그분은 타락하지 않은 정상적인 입장에 있기에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구주냐? 아닙니다. 우리는 이보다 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입장에 선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일가친척과 같은 구주보다도, 자기 혈족의 어떤 형님보다도 더 가까운 입장에서 자기를 위해 줄 수 있는 구주를 요구할 것입니다. 이런 구주를 찾고 싶은 심정을 가진 우리 인간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가치의 내용을 상실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원하는 구주의 모습은 어떠한 가치의 중심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이 찾아 들어가는 최후의 종착점은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 이상 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친척이나 형제,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귀한 것은 부모입니다. 부모는 어머니 아버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31-69, 70.04.19) 옛날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아담 해와는 타락한 부모지만 앞으로 인류를 다시 낳아 주어야 할 그 부모는 타락하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을 수 있는 본래의 부모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뜻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품에서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어 선의 자녀를 번식할 수 있는, 그런 본래의 기준에 설 수 있는 부모입니다. 그 부모는 타락과는 상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은 타락한 아담 해와의 후손된 부모의 혈육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관계없는 부모의 혈육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죄의 근본 뿌리는 아담 해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밟고 넘어서서, 즉 원죄와 인연이 없는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자격을 갖추지 않고는 하나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타락한 인간이 요구하는 구주는 타락한 부모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체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참된 부모의 자리에서 인류를 낳아 줄 구주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원죄와 상관 없는 자리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타락권 이하에서는 아무리 구원하려 해봤자 구원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 이상의 참된 부모를 이 땅에 다시 보내서 그 부모를 통해 인류가 다시 해산되는 과정을 거치게 해 사탄과 영원히 관계없게 하고 사탄이 참소하려야 참소할 수 없게 하여 하나님만이 주관하고 하나님만이 간섭하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인류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원죄를 가진 인간이 원죄가 없는 자리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22-239, 69.05.04) 메시아는 참부모로 와야 된다 우리의 소원이 뭐냐? 하나님은 종적인 부모요 아담 해와는 횡적인 부모인데, 종횡의 부모가 하나되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된 것이 한입니다. 그런 사랑을 한 번 받아 보았으면 하는 열망을 다 갖고 있습니다. 종교니 무엇이니 하는 것도 전부 다 그런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적인 하나님과 횡적인 면에서 하나되어 사랑할 수 있는 부모가 이 땅 위에 있었느냐? 타락했기 때문에 거짓 부모가 되었습니다. 거짓 부모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부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참부모가 역사상에 나와야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 사명을 대행하는 하나의 명사를 씌워 가지고 부르는 그 존재가 누구냐? 이것이 왈 구주라는 존재요, 메시아라는 존재입니다. 구해 주는 데는 무얼 구해 주느냐? 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사랑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구하는 것을 이루어 주려면 메시아는 어떤 존재로 와야 되느냐? 틀림없이 참된 부모로 와야 됩니다. 메시아는 참부모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독교에서는 메시아로 믿습니다. 구주로 믿습니다. 참부모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혼자는 안 됩니다. 참된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남자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는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남자 중에서도 생활을 잘하는 남자를 찾아 나온 것이 유교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고, 영계를 위주한 남자를 찾아 나온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기독교는 뭐냐?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사랑하는 가정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독생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독생자가 나왔는데 독생자 혼자 살다가는 큰일나는 것입니다. 독생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독생녀를 찾아 하나님을 중심삼고 독생자와 독생녀가 서로서로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결혼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 하나님이 종적인 부모로서 기뻐하고 독생자와 독생녀는 횡적인 부모로서 기뻐할 수 있는 신랑 신부가 되어 지상에서 아들딸을 낳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종자가 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나라를 저버리더라도, 유대교를 저버리더라도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다시 찾을 수 있는 주체적 동기가 뭐냐? 여자입니다. 남자 앞에 여자가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죽어 가면서도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래서 기독교에서는 2천년 동안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기독교 신자들이 신부되겠다고 허덕이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뭐냐? 이것이 메시아인데 참된 부모의 자리를 갖다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6천년 전에 인간이 횡적인 부모로서 하나님을 종적인 부모로 삼고 종횡의 부모의 사랑을 중심삼아 기쁨의 출발을 볼 수 있었던 기원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침범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빼서 붙여 가지고 참부모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돌감람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참감람나무의 가지를 받아 접붙여야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는 접붙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사상입니다. 그래서 신랑 신부의 혼인 잔치가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58-218, 72.06.11) 구세주는 참아버지, 참스승, 참된 왕의 자격을 갖춘 분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참부모가 나오기 전에 먼저 참아버지가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참아버지가 도대체 어떤 존재냐? 오늘날 수많은 종교에서는 믿고 있는 자기들의 교주가 참아버지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아버지란 존재는 종교 중의 종교 가운데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참아버지는 어떤 자격을 가진 사람이냐? 참자녀를 만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 참자녀를 낳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참자녀를 낳을 수 있는 자격자가 참아버지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하기를 구세주 하는데, 그 구세주가 뭐냐? 구세주란 도대체 어떤 명사냐? 구세주의 내용을 말하게 될 때, 진짜 구세주는 어떤 구세주겠느냐? 왕으로 오시는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냐, 스승으로 오시는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냐, 그 다음에 아버지로 오시는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냐? 아버지로 오시는 구세주가 진짜 구세주입니다. 그 아버지는 참된 아버지이기 때문에 참된 스승의 자격부터 갖추었습니다. 참된 스승의 자격을 갖출 뿐만이 아니라 참된 왕의 자격도 갖추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 구세주는 참된 아버지로서 오시는 구세주, 참된 스승으로 오시는 구세주, 오늘날 타락된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그런 스승으로 오시는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에 혼란상을 이루는 모든 각 시대의 왕들을 전부 다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오는 분입니다. 그런 자격자는 과거의 역사시대에서도 하나님 앞에 서더라도 이는 만점이다 하고 승인받을 수 있는 구세주, 오늘날 타락한 세계에 나타나더라도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다시 살 수 없다 하는 입장에 설 수 있는 구세주일 것입니다. 그 가치에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에 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내용을 지닌 그러한 하나의 주인적 존재가, 하나의 어버이적 존재가, 하나의 왕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러한 존재를 왈(曰) 구세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구세주, 그 구세주를 바라는 것이 지금까지 종교세계에서 바라 나온 재림사상입니다. 그러면 그 구세주를 만난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겠느냐? 그를 만나 그와 더불어 인연을 맺게 된다면 무슨 인연을 맺고 싶을 것이냐?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싶을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세계에 단 하나의 스승으로서 세계 역사에 없는 제일 가는 제자의 인연을 맺고 싶을 것입니다. 또 그가 하나밖에 없는 군왕의 자격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상에 없는 충신으로서의 인연을 맺고 싶을 것입니다. (83-43, 76.02.05) 종교 중에서 제일 중심 종교인 기독교의 사상 그러면 종교 중에 제일 중심 종교가 뭐냐? 기독교입니다. 선생님은 기독교라는 말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基) 자가 무슨 기자입니까? 터 기(基)입니다. 그 다음에 독(督) 자는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교(敎) 자는 밑을 다스린다는 교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제일 가는 교입니다. 근원 중에 제일 밑이 뭐냐 하면, 제일 깊은 곳이고 제일 귀한 곳입니다. 기독교는 왜 제일 밑 되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밑의 근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교(敎)라고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전체 골자사상을 따져 보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내가 이제 갔다 다시 올 때는 신랑으로 와 너희들을 신부로 맞아들일 것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의 골자사상이 신랑사상입니다. 그 다음에 기독교가 믿는 사상은 신부사상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고, 신부가 신랑을 찾는 사상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뭐냐? 신랑 신부가 찾아지면 뭘 할 것이냐? 신랑 신부가 찾아지면 결혼합니다. 그리고 결혼하게 되면 자녀를 낳습니다. 그러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데는 뭘 하면서 사느냐? 사랑하면서 삽니다. 무슨 사랑이냐? 참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분석해 보면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그 3대 사랑을 전부 통합해서 영원히 제정된 것입니다. 그 어떠한 원칙에 의해 결정된 둘 사이의 사랑은 누구도 옮길 수 없습니다. 살다가 싫으면 전부 떼고 파헤쳐 버리고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걸 떼려면 내 모가지가 떨어지고, 내 사지가 다 갈라져야 됩니다. (83-45, 76.02.05)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다른 종교가 구주의 내용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구주에 대한 내용이 다릅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 종의 사명을 가지고 온 종교도 있고, 하나님 앞에 양자의 사명을 갖고 온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타락과 상관없는 인류를 다시 낳아 줄 수 있는 부모를 모신 종교입니다. 그런 종교가 종교 중의 최후의 종교요,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보낸 수많은 종교 가운데 마지막 종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갖지 못한 종교는 세계의 수많은 인류를 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그러한 입장에 선 종교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많은 인류가 있지만, 그 인류는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번식된 인류이기 때문에 모두 원죄의 뿌리에서 뻗어 나왔습니다. 원죄를 넘어서서 타락의 침해를 받지 않은 자리에 선 참된 부모를 통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병이 났으면 병을 고쳐야 합니다. 만일 약한 사람이 병이 났다면 병나기 전의 약한 상태만큼만 고쳐서는 안 됩니다. 그 상태 이상으로 건강하게 고쳐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타락이란 인간이 고장이 난 것이요, 악의 세계로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고장난 것을 고쳐야 하고 떨어지기 이전의 자리로 끌어올리지 않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구원이란 곧 복귀입니다. 복귀하는 데는 옛날 타락하기 전의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을 넘어선 자리까지 복귀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 원죄를 가진 거짓 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인류는 원죄를 넘어선 참된 부모를 통하여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다시 낳아 줄 참된 부모의 자리에 설 수 있는 한 분이 오셔야 합니다. 오시는 그분은 아담이 실수했던 그 기준 이하의 자리에 오셔서는 안 됩니다. 그 이상의 자리에 오셔야 됩니다. 원리를 중심삼고 볼 때, 반드시 원죄와 상관없는 자리에서, 탕감의 과정을 거친 터전 위에서 참부모는 탄생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일반 종교에는 없는, 기독교만이 지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구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떤 입장에 서 있느냐? 나라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 자신은 타락한 부모의 자리가 아닌 타락하지 아니한 부모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예수님 자신이 서야 됩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22-239, 69.05.04) 메시아는 신랑으로 와서 신부를 찾아야 에덴에서 아담이 해와를 책임지지 못함으로써 해와를 사탄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시는 메시아는 재창조원칙에 의해 하늘의 아내를 이 땅 위에서 잃어버렸으니 땅에서, 사탄세계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본래 아내라는 존재를 가져올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두 번 창조할 수 없습니다. 이게 천리법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로서 어머니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머니를 찾아서 뭘 할 것이냐?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이 표어를 내세워서 너는 내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만대 우리의 가계(家系)를 이어받아 재출발하는 조상이 되느니라 하는 입장에서 결혼식을 해줘야 됩니다. (83-56, 76.02.05) 결국 참부모가 나오기 전에 참된 아버지가 먼저 나와야 됩니다. 그 아버지란 존재가 누구냐? 인류 역사과정에 참된 아버지는 둘일 수 없으니 한 아버지로 오는 그 중심 존재가 메시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는 신랑의 자격을 갖고 와서 신부를 찾아야 됩니다. 신부를 찾지 않고는 아버지 노릇을 못합니다. 아버지 입장에 선 분이 메시아기 때문에 그분은 어머니를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누구를 먼저 창조했느냐 하면 남자를 먼저 창조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를 잃어버린 땅 위에서 다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천리의 법도를 재차 수습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수습의 중심존재로 온 분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인 동시에 아버지로 오려니 아버지는 혼자서는 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야 합니다. 반드시 어머니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필요합니다. (83-55, 76.02.05)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어린양 잔치는 무엇이냐? 우리 인류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참부모를 잃어버리고 타락한 거짓 부모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종말시대에 참부모를 찾아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간 조상으로서 결혼식을 해주는 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창세기는 알파입니다. 인간이 알파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오메가에 가서 맞추는 것입니다. (53-300, 72.03.04) 5.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 구원섭리는 재창조의 원칙을 따라 하게 돼 있어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두고 볼 때, 창조한 모든 원리적인 내용은 하나의 공적인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그 기준에 일치가 안 될 때는 그것을 시정하든가 제거당해야 할 것이 창조 이후의 피조세계 존재물들에게 적용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원리원칙 기반에 서지 못하고 탈원리권 내에 섬으로써 아담 해와는 반드시 다시 시정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간 자체로서는 분리됐지만 하나님의 본연의 창조이상으로 보게 될 때는, 그 분리된 아담 해와가 본래 하나님의 직계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이 이것을 구원복귀, 재창조라는 뜻 가운데에서 다시 수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길이 구원섭리역사입니다. 이렇게 구원섭리를 하는 데는 원칙을 따라야 하는데, 아담 해와가 그 원칙의 노정을 몰랐습니다. 아는 입장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모르는 입장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모르는 입장에서 인류가 번식되어 세계적인 발전을 해 나오는 가운데 그 배후에 종교권을 세워 아담 해와 이상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정성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종교권에 한해서는 타락했던 이상의 심정권이 연결될 적마다 하늘이 영계에서 가르쳐 줌으로써 종교권 배후와 하나님의 섭리는 발전적 인연을 묶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교를 중심삼고 종의 종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로 탕감의 길을 걸어 나오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하나님이 택해 세웠습니다. 그 선민이라는 것은 그냥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실수한 모든 것을 탕감해야 합니다. 본연적 혈통을 맑게 해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인 아벨 시대에서부터 그 이후의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전부 피를 맑게 해 주어야 합니다. 피를 교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씨를 변경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212-65, 91.01.02)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를 중심한 혈통정화 섭리 그래서 하나님은 피를 교체하는 섭리를 하셨습니다. 피를 교체하는 섭리로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섭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은 동생한테 굴복을 해야 하고 동생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역리적인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급시대에도 장자를 쳤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의 역사는 차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개인적인 섭리기대를 세웠고,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섭리기대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쌍둥이 형제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들은 뱃속에서도 싸웠고 나와서도 서로 싸웠습니다. 아담 가정의 가인과 아벨은 따로따로 나왔는데 태어난 후에 싸웠고, 에서와 야곱은 한 뱃속에서 한 핏줄을 받은 쌍둥이로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점점 핏줄을 따라 뱃속을 통해 복귀해 가는 것입니다. (17-188, 66.12.18) 에서와 야곱대에 야곱이 어머니와 합해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아 왔습니다. 이때 리브가는 하나님을 속이고 남편을 속이고 아들을 속인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이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륜 도덕적으로 볼 때에는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비법적인 기사로 남아 있지만, 이 비법적인 기사가 사탄세계로 향해 가던 인류역사의 방향을 180도 돌이킬 수 있는 하나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돌이킨 것은 40세 때였습니다. 이것은 복중에서부터 40세까지는 돌이키지 못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복중에서부터 다시 돌이켜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역사시대를 거쳐 야곱과 야곱의 아들인 유다, 유다 아들, 이렇게 3대 만에 다말을 중심삼고 다시 돌이키려고 했습니다. 다말이 잉태한 것도 비법적입니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거기에서 시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기를 밴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성은 축복받은 혈족을 무엇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자기 생명보다도, 자기 일신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축복받은 혈대를 남겨야 된다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혈통을 이어받는 상징적 조건을 통해 아기를 잉태해서 낳은 것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리브가의 복중에 잉태한 야곱과 에서, 또 다말의 복중에 잉태한 베레스와 세라는 똑같이 복중에서부터 둘이 싸웠습니다. 복중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 다말이나 리브가가 기도하는 내용도 똑같습니다. 하늘 앞에 이 복중의 두 아이가 왜 싸웁니까? 할 때 네 복중에는 두 나라가 있으며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 또한 똑같습니다. 그것은 섭리적 입장에서 외적으로 점점점 축소시켜 쌍태로부터 복중까지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먼저 나온 형님인 베레스의 팔에 산모가 빨간 실로 표시를 하고 난 후에 먼저 나오려고 하는 형을 밀치고 동생인 세라를 먼저 나오게 함으로써 복중에서 장자를 복귀하여 나왔습니다. 복중을 청소해서 비로소 하늘편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212-66, 91.01.02)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이유 이렇듯 세라를 중심삼고 야곱이 승리한 외적인 기준을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연결시켜 내적으로 청산지었기 때문에 유다지파를 통해 메시아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온 시대는 사탄이 세계적 판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나라가 그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편성할 수 있는 국가시대를 맞아서 메시아를 보낼 것을 약속했는데, 섭리사를 중심삼고 4천년만에 메시아가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꾸로 복귀해 나옵니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섭리를 시작하여 점점점 내적으로 들어가 복중에서 승리의 결정을 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기준을 닦았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핏줄기를 정화하고 탕감해야 할 내용을 모두 탕감한 승리의 복귀의 터전을 통하여 나온 분은 한분밖에 없었으니, 그분이 이와 같은 터전 위에서 섭리적인 책임을 지고 요셉 가정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 (17-189, 66.12.18) 예수님을 복중에 잉태하게 될 때에는 이미 그러한 역사적인 혈통적 승리권을 갖춘 기반을 이어 나옴으로써, 사탄이 너는 나와 혈연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비로소 역사이래 사탄편의 핏줄을 하늘편으로 전환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는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생자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역사를 볼 때, 어떠한 성자나 성인도 이런 배후를 중심삼고 과거의 피를 맑게 해서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피를 맑게 할 수 있는 첫번 사람이요, 하늘의 혈통을 지상에 옮겨 다시 새로운 접붙임을 통해서 돌감람나무 세계를 참감람나무 세계로 만들 수 있는 장본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세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세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나 회교의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은 그런 혈통적 성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는 특정적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섭리를 통해서 지금까지 쭈욱 나왔습니다. (212-67, 91.01.02) 원죄없는 제2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 해와는 부모인 하나님을 배반하고 남편과 오빠되는 아담을 배반하고 타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보면, 마리아가 자기 아버지를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배반했습니다. 그게 오빠의 자리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족을 다 배반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 생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 하니까 난 남자를 알지 못하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알고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중심삼고 비로소 혈통을 맑혀 나왔습니다. (219-64, 91.08.25) 다말이 복중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통해 청산한 그 전통을 마리아가 국가적 대표 자리에서 이어 다말 이상 생명을 각오하고 축복받은 혈통을 존중시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늘이 택해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다말이 복중에서 다 청산지었기 때문에, 형제권을 복귀한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적 기준에 선 마리아, 그와 같은 심정적 기반 위에 선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사탄이 관계를 맺어 아들딸을 참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독생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독생자라는 것은 타락하지 않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지은 것이요, 마리아 몸을 통해 천신만고 돌고 돌아 독생자의 이름을 얻은 것입니다. (219-65, 91.01.02)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창조를 하셨습니다. 5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6일째 되는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그 아담과 같은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제2의 아담, 즉 후아담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창조하였으니, 이 후아담을 중심삼아 후해와를 세워야 했는데 세우지 못했습니다. 해와는 누가 세워야 하느냐? 아담이 세워야 합니다.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이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해와를 아담이 찾아 세워야 합니다. 탕감원칙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며 왜 오셨느냐? 인류의 참부모요,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오신 분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류의 참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해와는 참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그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준비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보냈습니다.(17-190,66.12.18) 신부를 찾아야 했던 예수님 예수님은 오셔서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12제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부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인류를 다시 낳기 위해 예수님은 신부를 반드시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성신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장 3절)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한복음 3장 4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장 10절) 하고 한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하고 인류는 거듭나야 합니다. 인류를 사탄이 다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혈연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서 심정적인 기반을 닦지 않고는 천륜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칙적인 기반, 즉 부모의 터전을 닦아야 했습니다. 부모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신부를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12제자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짓고 나서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찾고 난 후에는 아담이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이게 창조원칙입니다. 재창조라는 것은 이 땅 위에 신랑 되는, 메시아 되는 주님이 와서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아담 대신 온 후아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인 후해와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하겠으니 하나님을 위하여 함께 일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늘을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남자를 대신하여 신랑으로 오셨기에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제자들 역시 이 뜻을 몰랐기 때문에 협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원래는 요셉 가정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참부모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 가정은 하나님이 4천년의 역사를 두고 섭리하신 끝에 자신의 가정을 축복하였다는 사실을 알아 가지고 시대적인 총책임을 지고서 그 책임을 완수해야만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요셉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차례나 그의 부모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알지 못하는 부모는 끝내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정으로부터 배반당하고 가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예수님은 다시 가정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민족마저 예수님을 불신하자 예수님은 요셉 가정과 유대 나라에 뜻을 펼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몰리고 쫓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신부를 찾아 참다운 부모의 인연을 세움으로써 세상과 하나님 앞에 참부모의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6-180, 66.03.22) 가정을 이루셔야 했던 예수님 2천년 전 예수님은 처음으로 원죄와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거짓 부모의 피를 받아서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해야 했던 일은 무엇이었느냐? 참부모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참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 혼자서 부모가 될 수 있습니까?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부모가 되려면 예수님이 신랑으로 오셨으니 신부를 맞이해야 합니다. (22-265, 69.05.04) 신랑이신 예수 앞에 신부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으니 그 신부가 누구냐? 예수는 아버지요, 그의 신부는 어머니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과 그 신부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보내시느냐? 우리가 거짓된 부모의 인연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된 부모를 갖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때에 참부모를 찾아서 참부모의 사랑을 받고 참부모가 인도하는 나라에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국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신랑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장가를 가야 되겠어요, 시집을 오게 해야 되겠어요? 장가를 가는 것도 좋고 시집을 오게 하는 것도 좋지요. 어쨌든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성교인들은 `아이고 거룩한 우리 주님이 장가를 가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를 안 가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가가는 것을 반대하는 패들은 악당들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장가를 갔다고 합시다. 기성교회에서 이 자리에 처음 온 사람들, 예수님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았다면 예수님의 핏줄을 타고 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사랑 안 하시겠습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의 아들은 뭡니까? 하나님의 손자지요. 그래 하나님이 손자가 있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없는 것을 좋아하시겠어요? 물어볼 게 뭐 있어요. 노인들이 손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손자를 원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가정은 원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면 그 가정이 누구의 가정입니까? 예수님의 가정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가정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족도 원하시는 것이요, 그 예수님의 종족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전부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보아서도 어긋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오늘 통일교회에 갔더니 통일교회 선생님이 땀을 흘려가면서 예수님이 장가가야 한다고 하더라면서 기분 나빠할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쁘게 생각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옛날에 그런 내용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알고 나서 그것을 의심해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 노릇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무릎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도 기도해 보았습니다. 영계에 대해서 보고 듣고 분석도 해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하면, 예수님의 결혼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인 무리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잔치를 한다면 얼마나 큰 잔치를 하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고 아직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어린아이까지도 구경하고 싶어서 뛰쳐 나오려 할 정도로록 크나큰 잔치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뱃속에서 팔삭동이가 뛰쳐 나와서 벌떡 일어나 예수님 혼인 잔치에 구경하러 가겠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싫어하겠습니까?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하느라고 합동결혼식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은 왜 죽게 되었느냐? 예수님 자신의 가정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기 전에, 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의 수중에 넣기 전에, 유대교 앞에 제사장의 입장에 서기 전에 맨 먼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느냐?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가정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먼저 가정을 찾아 세우지 않고서는 제사장이 된다 해도 헛된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된다 하더라도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2-273, 69.05.04)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예수님은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어떤 일을 해야 했느냐? 종의 입장으로서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거쳐 민족, 종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 복귀해야 했습니다. 자녀의 입장으로서 개인에서부터 세계까지 복귀해야 했습니다. 또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세계까지 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뭘 했느냐? 종의 몸을 쓰고 아들을 대신하여 부모를 찾아가는 일을 했습니다. 3년 공생애 노정, 3년 준비기간에는 종으로 뛰었습니다. 종으로서 사탄과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이 하늘의 법, 즉 천법을 어겼으니 천사를 굴복시켜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습니다. 천사장이 종으로 하나님을 배반했으니 배반한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 3년 공생애 노정이었습니다. 이 3년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쳐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한 실체로 서서 아들의 책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했느냐? 승리한 천사장의 입장에서 하늘편 해와, 즉 신부를 세워 복귀의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의 입장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면, 딸도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남자, 즉 아담격 신랑인 예수님은 여자인 해와격 신부를 바라보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적인 천사장의 사명을 3년 준비기간 동안에 완결짓고 자녀의 사명을 완결지어야 했습니다. 자녀의 사명을 완결짓는 데는 형제와 인연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형제의 발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발판을 중심으로 부모의 자리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모의 자리에 나가는 데는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합니다. 그 신랑 신부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 조상으로서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참아버지 격이 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 땅에서 인류의 참아버지로 서려면 참어머니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사명을 완결지었으나 참어머니가 될 신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만 부모의 인연을 남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 하늘을 대신하고 성신은 신부로 땅을 대신하여 영적 부모의 기준만을 세운 것입니다. 본래 부부란 실체를 쓰고 평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본래 이루어야 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계와 육계가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신랑 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고 신부 되신 성신은 땅에 내려와서 다시 영계와 육계를 하나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의 모든 인류는 영계와 육계권내에서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12-226, 63.05.15)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은 영적 구원 예수님은 참감람나무로 이 땅에 왔지만 영과 육을 접붙여 나라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이루려고 하던 것을 전부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준비하였던 이스라엘 나라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다시 이루어야 됩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텐데 육을 사탄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만 그와 같은 일을 해서 발전시켜 나온 것이 오늘날 세계적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지만, 십자가에서 이스라엘 나라도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세례 요한도 잃어버리고, 열두 제자도 잃어버렸고,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출발은 십자가가 아니라 잃어버린 제자들이 전부 부활의 혜택권에 들어와 다시 모인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기간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구원은 육적 구원 완성이 아닙니다. 영적 구원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를 중심삼고 영적인 구원의 싸움을 또 해야 됩니다. 영적 개인을 세우는 싸움을 해야 되고, 영적 가정을 찾는 싸움을 해야 되고, 영적 민족을 찾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이렇게 싸우면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으려면 피를 흘려야 됩니다. 지금까지 기독교가 발전하는 데는 피를 흘려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 외에는 부활권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72-78, 74.05.19) 예수님은 영적 구도자입니다. 영적 구세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적 구세주는 못 되었지만 영적 구세주의 입장입니다. 영적 기준으로 볼 때, 승천하여 아버지적 영을 지니고 천상에 올라간 예수님 앞에 어머니적 영을 이어받아야 할 해와가 하나되어 일체가 되었더라면 어머니적 실체를 쓴 영이 있을 것인데,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실체 없는 성신이 지상에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신은 물과 같고 기름과 같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212-68, 91.01.02) 성신이 오는 이유와 해야 할 역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아담해와는 창조이상 기준에서 완성하여 이루어지는 실체적 하나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 아담 해와가 사랑이라는 기준에 일체화했더라면 그들은 체를 입은 영원한 지상세계의 부모요, 영원한 천상세계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조상이 되고 왕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그 기준을 잃어버림으로써 본래 이상하였던 사랑 이상을 이룰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 편에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루어야 할 본연의 이상적 영적 완성실체를 이루지 못한 존재로서 추방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사랑을 중심삼고 아버지적 아담 영을 완전히 체득해 형성할 수 있는 기준에 있지만, 사랑을 통해 아담과 해와가 하나될 수 있는 기준에는 못 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 기준의 아버지를 중심삼고 천상세계에 올라갔지만, 해와적 영은 실체를 못 이룸으로써 형태 없는 어머니로 지상에 오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사랑은 수직적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아들의 자리에서 이루려고 했던 수직적 사랑을 못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 대신 영적으로 완성된 예수님은 천상세계에 올라가고 성신은 지상에 내려와 수직적으로 서로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자들은 반드시 정성을 들여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수직의 자리까지 가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인연, 세상의 부모라든가 친척이라든가 하는 세상적 인연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세상에서 인연된 것은 사탄세계에서 사탄에 의해 더럽혀진 물건이 돼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사탄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사탄세계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을 가지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타락된 사랑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천사장급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전부 생명을 부정할 수 있는 기준, 그 이상에 서는 자만이 수직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정성들이는 것을 보면, 기도는 산상에 가서 많이 들입니다. 골짜기에 가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하러 바닷가에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산꼭대기 같은 높은 자리에서 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다 수직의 자리와 가까운 데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정성을 들이는 자리에서만 신랑 신부가 만나는 것입니다. 신랑 신부가 정성을 들임으로써 완전히 하나되어 하늘 뜻에 의한 하나의 실체로서 성신을 받아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을 받아야만 거듭난다고 했습니다. 그 성신이 뭐냐? 어머니 신입니다. 성신을 받아 20대까지는, 그가 자라서 자립할 때까지는 예수님과 성신이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보호하듯이 영계와 육계를 연결시켜 신앙하는, 영계만을 생각하는 기준에서 전통적 인연을 이어받게 될 때 영적 구원을 받는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중생은 홀로 생겨날 수 없습니다. 영적 부모의 사랑권 내에서 화신체와 같은 입장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태어나긴 다른 데서 태어났지만 부모님 사랑권 내의 화신체와 같은 대신자가 된 그 사람들의 영은 예수님과 성신을 영계에 가서 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창조이상에는 일치가 안 됩니다. 2천년 역사 동안 그렇게 개인시대로부터 가정시대․종족․민족․국가․세계 판도까지 복귀해 나왔습니다. 로마가 전세계를 장악해서 움직이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문화권이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판도까지 발전해 나가지 않고는 안 됩니다. 세계 판도를 움직이는 자리에서 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몸적 기반을 찾기 위해서는 세계 판도까지 이 내적, 영적 기독교문화권은 발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212-70, 91.01.02) 그러나 영적인 세계의 기준이 아무리 되었다 하더라도 영육으로 타락한 사탄세계가 남아 있는 한, 육적인 기준이 아직까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이 땅에 와서 육적인 기준을 세워 이 세계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오시는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72-78, 74.05.19) 6. 인류의 참부모로 오시는 재림주 모든 역사는 부모로부터 시작된다 본래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인류의 역사는 부모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부모의 말이 그 후손의 말이 되는 것이요, 그 부모가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그 후손들의 생활방식이 되는 것이요, 부모가 느꼈던 환경적인 요건들을 그 후손들이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돼야 했고, 그런 다음에는 인류의 참부모가 돼야 했습니다. 그런 아담 해와에게 온 만물이 주관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만물도 이런 영광의 한 날을 맞아야 했습니다. 만물 주관은 혼자 못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부모가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루어 사위기대가 형성된 기반 위에서 만물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주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 땅에 와서 만물을 주관하고 이 세계를 주관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게 축복을 해준 것이지 아담에게만 축복해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부부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부만으로도 안 됩니다. 부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종적인 중심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내적 외적 중심이었습니다. 영적인 이성성상이 실체적인 이성성상으로 나타나서 개인적인 이성성상을 갖추어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하나의 남자가 되고, 하나의 여자가 된 것이 아담 해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되어야 비로소 평면적인 사위기대의 중심이 되어 중심기대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중심이로되 종적 기준을 대표한 횡적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러면서 주체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게 되자면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상이 자녀입니다. 그래서 사위기대가 세워졌을 때, 비로소 하늘땅이 연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한 입장입니다. 가정을 두고 보면, 부모는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26-280, 69.11.10) 타락 인간이 복귀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부모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자녀를 잃어버렸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림과 동시에 만물을 잃어버렸고, 만물을 잃어버림과 동시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전부 잃어버렸으므로 이것을 모두 복귀시켜야 합니다. 타락 인간이 복귀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 6천년이란 세월을 거치면서 복귀해 나왔는데, 그것은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리에 돌아가서 뭘 하자는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일체가 된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부터 새로운 문화역사를 창조하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이 생겨나는 것이요, 종족이 생겨나는 것이요, 민족, 국가, 세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역사가 출발하였다면 그들은 정치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의 기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루어지지 않고 사탄을 중심삼고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 세계를 보면, 모든 것이 불완전한 세계입니다. 하늘도 땅도 전부다 사탄세계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왔으니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으면 하나님도 인간을 찾아오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우리는 싸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 나가고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과정을 거쳐 오늘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26-280, 69.11.10) 복귀역사는 선악이 분립되어 가는 탕감의 역사 복귀역사는 탕감해 나가는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이 분립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올라가고 사탄은 내려오는 와중에서 선과 악이 서로 다투어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는 싸움의 역사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뭘 위해서 그러느냐? 복귀를 위해서 그렇게 싸워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의 경계선은 어디냐? 본래 선과 악은 한 점에서 출발되었습니다. 그 한 점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을 혼자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둘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방향이 악한 쪽으로 틀어져 나간 것이 악한 부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한 부모의 때를 맞기 위해 역사하시는데 어떻게 역사하시느냐? 이제까지 강력히 세워 나왔던 부모와 자식간의 인륜도덕을 때가 되면 모두 희미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자식들이 자기 부모를 등한시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선이 악한 세계의 한계권에서 떨어져 나와야 되기 때문에 하늘이 그렇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귀가 되어 가면 되어 갈수록 부모와 자식간의 윤리도덕은 더욱 희미해집니다. 그 대신 다른 한쪽, 즉 하늘편에서는 재림주가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참부모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거기서부터 참의 세계가 출발되고 새로운 주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심은 어디냐? 악한 부모와 선한 부모가 각각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26-282, 69.11.10) 아들의 사명과 부모의 사명을 해야 했던 예수님 지금까지 6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도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렀던 그 아버지는 진짜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양자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 앞에 양부모의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이제까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양자의 입장에서 양부모를 부른 것입니다. 양부모는 친부모가 있고 나서 있는 것입니다. 양부모는 친부모보다 먼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오면서 기독교가 부르던 아버지는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추구하는 아버지와 그 입장이 다릅니다. 그들이 부르던 아버지는 양부모권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것도 오늘날에 와서야 양부모와 양자의 입장이 된 것이지 그전에는 양부모와 양자의 관계도 못 되고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아들이 종의 자리에 있는 천사의 주관을 받고 타락했기 때문에 종의 종 입장으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종의 시대요, 그 가운데서도 야곱 이전까지는 종의 종 시대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귀기대섭리시대는 종의 종 시대입니다. 그 다음에 선민사상을 중심삼은 종의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으로는 아들딸로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종들을 아들딸로 인연맺게 하기 위해 그들 앞에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민족을 한 단계 끌어올려 양자의 입장에 세워 놓게 된 것입니다. 양자는 가인의 입장입니다. 가인 아벨이라는 입장을 두고 볼 때, 아벨형은 하나님편 아들딸이요, 가인형은 사탄편 아들딸입니다. 이들은 서로 핏줄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양자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직계 아들로 왔는데, 그 직계 아들의 입장을 결정짓지 않고는 양자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중심한 기독교가 나왔기에 양자라는 말도 나온 것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나오지 않았다면 인간은 계속해서 종의 입장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아들의 사명과 더불어 부모의 사명까지 해야 했습니다. 처음에 아담이 하나님 앞에는 아들이고 인류 앞에는 부모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입장을 거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 부모의 자리에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두 사명을 짊어지고 오셨기 때문에 아들의 입장으로서 탕감해야 할 사명과 부모의 입장으로서 탕감해야 할 사명, 이 두 사명을 겸하여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26-283, 69.11.10) 예수님과 성신은 영적인 양부모의 입장 양자의 기준이 성립되려면 양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인한 양자의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혼자서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양자의 부모 입장에 영적으로 섰던 분들이 예수님과 성신입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종의 자식들을 모아서 영적인 조건을 세워 다시 낳았다는 입장이 되었을 때 인간들은 양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자는 하나님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간접적인 입장에 있는 천사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직계의 아들딸은 실체를 통해서 낳게 되어 있지 영적인 기준을 통해서 낳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세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양자의 세계권을 만들었습니다. 양자가 나오기 위해서는 양자의 아버지 어머니가 있어야 되는데, 영적으로 그러한 양부모의 사명을 해 나온 것이 기독교입니다. 영적인 세계란 천사형의 세계입니다. 원래는 이 영적 세계의 천사장인 사탄까지도 하나님 앞에 충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충신이 되어야 할 천사장의 입장을 대신해서 예수님과 성신이 영계에서 육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의 관계를 중심삼고 충신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오늘날 선생님이 왔기 때문에 예수님도 하나님의 장자라고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지만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예수님은 맏아들의 도리를 다 못 했습니다. 실체적인 사랑의 결실을 이루어야 진정한 맏아들이 되지 영적인 사랑만 이루어서는 진정한 맏아들이 못 되는 것입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실체로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그 실체 사랑을 중심삼고 아들딸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참된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므로 그를 믿는 신도들은 직계의 아들딸이 못 되고 양자가 된 것입니다. 부모의 역사를 중심삼고 보면, 오늘날 기독교는 양자의 입장입니다. 양자는 핏줄이 다르니 양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땐 직계 자녀가 아무리 못났더라도 그 다음에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정성들여 키워준 양아버지가 있어도 친아버지가 어디엔가 있다면 어느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부모가 참된 부모의 입장이 되려면 자기가 그 아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입히면서 정성을 다하여 길러 준 사연을 그 자식에게 일일이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식은 언젠가는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종의 자식이 나오려면 종의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역사노정에서 도(道)를 통해서 나타난 선한 아들딸이 그러한 종의 부모입니다. 종교와 관계없는 애국지사니 뭐니 하는 사람들도 종의 부모입니다. 역사상에 왔다 갔던 공자나 석가와 같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종의 부모입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만이 양자의 부모입니다. 그러니 많은 부모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다른 부모들보다 조금은 낫다는 것입니다. 종의 부모가 하늘나라에 가려면 양자의 부모를 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부모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못 갑니다. 그러니 부모의 입장을 두고 보았을 때, 예수님은 공자나 석가 등 많은 다른 성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나 석가나 예수님이 다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의 다른 성인들은 종의 부모요, 예수님은 양자의 부모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오셔야 할 분은 누구겠습니까? 참부모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내려오는 것입니다. (26-284, 69.11.10) 어린양잔치를 해야 할 재림주님 본래 예수님은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창조원칙에 따라 여자를 창조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담 입장이므로 잃어버린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그래야 결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해와를 못 찾았습니다. 찾다가 죽었으니 예수님은 다시 와야 됩니다. 다시 와서 장가를 가야 됩니다. 장가가려다 죽었으니 장가가려고 다시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가간다는 사상이 기독교의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주님이 오실 때에는 혼인잔치를 해야 합니다. 혼인잔치가 뭡니까? 혼인잔치는 시집 장가간다는 뜻입니다. 혼인잔치는 결혼잔치입니다. 혼인잔치, 즉 어린양잔치를 하려면 예수님을 중심삼은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신부를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신부가 누구냐 하면 해와입니다. 타락하기 전 아담 앞에 있었던 그 해와입니다. 재림주님은 3차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2차 아담이고, 앞으로 오시는 주님은 3차 아담입니다. 그래서 3차 아담이 타락하기 전 아담처럼 와 가지고 타락하기 전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해와를 찾아 어린양잔치를 해야 됩니다. 결혼함으로써 인류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부모가 되어야 할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악한 부모가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타락하기 전의 선한 부모를 가지면 복귀됩니다. 인류에게는 선한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어린양잔치를 하는 것은 선한 부모로 등극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사상의 골자입니다. (36-264, 70.12.06) 오시는 참부모는 영적인 부모의 인연을 상속받아야 지금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양부모를 받들어서 참된 부모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 전개해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고 나온 것도 참부모를 맞기 위해서였습니다. 참부모는 곧 재림주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시는 재림주는 아버지요, 신랑 신부는 참부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오시는 참부모는 영적인 부모의 인연을 상속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을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받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횡적인 기반을 지상에 연결시켜 주기 위해서는 축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으면 예수님과 성신에게서 부모의 권한을 상속받은 입장이 되기 때문에, 지상의 기독교인이나 영계의 영인들이 모두 지상에 오신 참부모와 축복가정들의 주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육계에서나 영계에서나 예수님의 주관을 받는 것보다도 참부모의 주관을 받는 것을 더 영광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참부모가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으로 하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권한을 재림주에게 상속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재림주에게 상속해 주면서 기뻐하겠습니까, 슬퍼하겠습니까? 세상 같으면 야당과 여당이 싸우듯이 서로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가인과 아벨이 가야 할 본연의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천지를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여 아벨 앞에 가인이 굴복하는 기준을 결정짓고 나와야 사탄세계를 때려부술 수 있는 것입니다. 상속받는 데는 그냥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축복을 받게 되면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력 대결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당시에 복귀섭리의 책임자로 온 것을 알았는가 몰랐는가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실력대결입니다. 복귀역사를 해야 할 텐데 예수님이 그것을 알았다면 이 땅에 왔을 때, 왜 인간시조가 음란으로 타락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한마디만 남겼으면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렇게 고생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원리적 견해에서 문답을 해야 합니다. 알았는가, 몰랐는가? 해서 만일 모르고 있었다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런 실력대결을 해서 그 터전 위에 상속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문제가 벌어집니다.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예수님의 통솔을 받고 있는데, 난데없이 지상에 한 존재가 나와서 예수님을 휘어잡겠다고 한다 해서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실력대결을 해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실력대결을 하는 데는 천리의 원칙을 중심삼고 법을 따져 가면서, 이것은 이렇게 되었고 저것은 저렇게 된 것이 아니냐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네 말이 옳다 하고 인정하는 정당한 판결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그런 절차를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엄청난 곳입니다. (26-285, 69.11.10) 재림주가 참부모의 자격을 갖추려면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를 보면 그것은 되풀이해 나온 역사였습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되면서 점점점 커져 하나의 형태를 구축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수습하는 책임을 누가 해야 하느냐? 부모가 타락함으로서 이렇게 되었으니 부모가 전부 책임지고 수습해야 합니다. 어떤 나라의 왕이 있다고 할 때, 그 왕이 태어나면서부터 왕권을 갖고 출발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왕권을 걸어 놓고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한 나라의 주권자가 출현하는 데는 어떤 조건을 중심삼고 출현하느냐 하면, 그 국가의 비상시를 맞이하여 최후의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지 않고는 나라의 주권자가 탄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싸움을 판결지어 최후의 승자가 결정되기 전까지는 다른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오히려 횡적으로 보면 그보다 더 잘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싸움을 중심삼고 선도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지고 그 나라를 구해낸 사람이 그 나라의 주권자 자리에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대로 해서 태어난 왕자가 왕의 자격이 있는가, 또 왕이 될 만큼 잘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왕자는 선조가 승리한 업적의 기반 위에서 승리자의 이름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왕조 역사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그 승리의 권한은 계승되는 것입니다. 그 국가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후손은 그때까지 남겨주는 것이 천법이기 때문에 그러한 기반 위에 태어난 왕자에게 그 나라를 지휘할 수 있는 왕의 권한을 주는 것이요, 그때의 권한은 천지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인 것입니다. 그러나 끝날이 되면 그들도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승리하지 못한 백성은 어떻게 되느냐? 그 백성 역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 참부모가 참부모의 입장으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력전을 해야 됩니다. 참부모로서 자격을 갖추어 승리해야 됩니다. 먼저 사탄을 굴복시키고 나서 그 다음에는 영계에 가서 양자의 부모를 굴복시켜야 됩니다. 이렇게 해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부모의 3대 역사를 거쳐 나가는 것입니다. 먼저 타락인간의 부모인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사탄을 굴복시키는 데도 천륜을 중심삼고 완전히 굴복시켜야 합니다. 타락한 인류의 부모인 사탄을 굴복시킨 다음에는 양자의 부모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 땅 위에 자녀의 입장으로 태어난 인간들을 구할 수 있는 모든 심정적 내용이라든가 살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전반적인 조건을 갖추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부모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부모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부모에게는 죽은 자식을 살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살릴 수 있는 방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부모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리입니다. 역사과정은 3시대의 부모의 역사를 거쳐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최후에 남아질 부모는 육계나 영계나 사탄세계에서 승리의 결정권을 가지고 나오는 부모입니다. (26-288, 69.11.10) 인류의 참부모로 오시는 재림주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 타락한 남자이 이 세상은 타락한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 타락한 남자요, 타락한 여자요, 타락한 천사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대할 수 있는 남자가 있느냐 할 때, 없기 때문에 타락한 세계를 구해 줄 남자가 와야 됩니다. 그가 메시아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주님입니다. 이분은 세계를 대표한 남자입니다. 타락한 세계의 남편은 천사장의 후손이기 때문에 천사장의 실체입니다. 본래의 남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지금까지 독신생활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남자가 와야 합니다. 그 남자가 누구냐? 재림주님입니다. 그 재림주는 인류의 참된 부모입니다. 타락이란 거짓부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타락함으로써 거짓부모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인류는 거짓부모의 아들딸입니다. 그러므로 참부모의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창조원리에 의하면 남자를 먼저 지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남자를 먼저 보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 위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와서 이 땅에서 해와를 찾아 신부로 맞이해야 됩니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로 오시는 것입니다. 참아버지는 참어머니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참어머니는 참아버지를 중심삼고 해산해야 합니다. (34-202, 70.09.06) 재림주님이 이 땅 위에 와서 구해 준다는 하는 그것은 개인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개인적인 구세주가 와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참된 부부의 인연을 맺지 않고는 부부들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종교는 개체 구원을 논하고 있지만 가정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타락으로 부모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자녀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부부의 사랑을 잃어버렸고, 형제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전부다 복귀해야 됩니다. 앞으로 주님이 와 가지고 참된 남편으로서 참된 부인을 맞이한 다음에는 부부를 구원할 수 있는 시대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참된 아들딸을 낳아 참된 가정이 생겨나면 그 가정을 본떠서 이 땅 위의 가정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종족이 이루어지면 이 땅 위의 종족들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참된 나라가 벌어지면 세계의 나라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은 참된 부모의 기원을 못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타락된 부모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핏줄이 다릅니다. 이 참된 부모와 이 거짓된 부모는 핏줄이 다릅니다. 거짓된 부모는 본래 생겨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이 참된 부모가 생겨나도록 창조 하려고 했는데, 타락해서 거짓 부모가 된 것입니다. 6천년 전에 인간시조에 의해 참된 부모가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재생창에 넣어 재생해서 참된 부모의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참된 부모의 기준을 모체로 해서 다시 재생했다는 자리에 세움으로써 타락하지 않은 참되고 선한 개인과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이루어 선한 천국에서 살 수 있게 만들어야 됩니다. 이 땅 위의 선한 천국에서 살면 우리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속사람은, 이 마음은 옷과 같은 몸을 벗어버리고 영원한 천국에,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종교의 사명입니다. (159-297, 68.05.19) 7. 타락 인간의 최고의 소망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 천지만물을 지은 하나님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로 지었습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인간 하나를 하나님의 영광과 소망의 대상으로 세우기 위해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자녀로 지었습니다.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신이 사랑의 주인공이라면 사랑의 주인공인 그 신이 절대적인 사랑을 가지고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다면, 그 사랑의 대상이 절대자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혼자서는 사랑할 수 있는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명사는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성립되는 말이기 때문에 아무리 절대자라 하더라도 사랑을 하는 데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도 혼자서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대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대상으로 지은 피조만물은 자신의 형상을 그대로 본떠 전개시켜 지었고, 그중에서 자신의 인격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로서 창조적인 입장에 세워 놓기 위해 지은 것이 인간입니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할 수 있고, 슬퍼할 때 같이 슬퍼할 수 있는 소성을 지녀야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정(內情)을 체득하고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화되고 하나되는 입장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서로가 기뻐할 수 있고 또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끔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절대자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우기 위해 절대자와 같은 가치를 지닐 수 있게끔 지었습니다. (39-8, 71.01.09) 참부모는 타락한 인류의 절대적인 소망의 중심 참부모란 어떠한 존재이냐? 참부모는 전체의 소망의 상징입니다. 타락한 인류 앞에 절대적인 소망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결실체요, 시대적인 중심이요, 60억 인류가 살고 있는 오늘날 이 세계 국가권의 중심입니다. 참부모는 앞으로의 이상세계로 연결될 수 있는 미래선상에 있어서의 출발점입니다. 역사시대의 선조들은 무엇을 바라겠느냐? 참부모 찾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부모와 영원히 상봉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만민이 소원하는 것도 세계 국가를 맞기 전에 참부모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후손들도 참부모의 핏줄을 통해 태어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는 새로운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참부모는 역사적인 결실의 중심이 되는 존재로서 주위의 전체가 하나의 가정에 귀결되고, 엉크러졌던 모든 것이 다시 하나의 기점에 직결될 수 있는 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소원은 참부모를 만나는 것입니다. 죽음길을 가더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 참부모입니다. 역사를 다 잃어버리고, 시대를 다 잃어버리고, 자기의 후손을 다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참부모를 만난다면 역사를 찾는 것이요, 시대를 찾는 것이요, 미래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부모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역사를 완전히 사랑하겠다고 하며 나설 수 있는 자요, 참부모를 완전히 사랑하려는 자는 세계를 참되게 사랑하겠다는 자요, 참부모를 완전히 사랑할 줄 아는 자는 미래세계의 후손들까지 사랑할 줄 아는 가치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런 참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희생하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참부모의 사랑을 상속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35-237, 70.10.19) 메시아에게 접붙여야 하는 타락 인간 첫아담이 실패했기 때문에 후아담으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후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복귀섭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또다시 완성한 아담이 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가 이 땅 위에 와서 무엇을 할 것이냐? 인류의 참된 아버지로 와서 참된 어머니를 찾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천사장을 세워 놓고 찾아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타락할 때, 아담과 해와 두 사람과 천사장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들이 우주적인 내용을 결정짓고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 있는 승리적 기반을 닦지 않고는 인류가 바라는 소원의 기점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이 역사적인 소원의 기점은 나라도 아니요, 세계도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참부모입니다. 거짓부모가 씨를 뿌려 사망권내에서 신음하고 허덕이던 인간에게 소망의 기점이 되는 참부모가 오시는 것은 곧 돌감람나무 밭에 참감람나무가 하나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접붙일 줄 아는 주인이 있어 돌감람나무를 전부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의 눈을 따다가 돌감람나무에 접을 붙이면 그 밭은 참감람나무의 밭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전부 다 돌감람나무이므로 밑동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사상과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는 완전한 참은 출발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부모를 사랑하던 그런 사랑 가지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욕망을 전부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새롭게 접붙일 수 없습니다. 과거를 긍정하면서 출발하는 종교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자기의 아내나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자기의 아내나 남편을 버리고라도 예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며, 자식을 버리고라도 하나님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걸어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요, 하늘나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천리원칙입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로부터 일시적인 지탄과 온갖 모함을 당했지만 그것이 하늘나라로 가는 데 있어서는 원칙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안 나왔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나타나 있는 세계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개인으로부터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청산지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오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이 세계를 부정하고 심판하더라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심판날이며, 그날에는 자기가 세상을 중심삼고 사랑하던 모든 것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현실 가운데에 벌어지는 일을 비판할 것이 아니라 썩어진 세계를 밑거름으로 하여 소망의 뿌리를 박아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되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봄날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자라나서 완전한 뿌리를 내릴 때에는 그 싹을 뽑을 자가 없습니다. 윤리가 파탄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며, 낡은 세대에게 비판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이 망해야 할 세상이 되었는데 그냥 망하도록 내버려두면 둘 다 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갈라놓아서라도 살 수 있는 길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이 섭리해 나온 내용입니다. (42-287, 70.03.27) 최후의 목적지 하늘이 우리를 세워 놓고 오라 하시는 목적과 천지의 대주재가 소망하시는 귀결점은 참부모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부모와 한번 혈연적인 인연을 맺으면 하나님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실존세계를 꿈에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아버지가 계시고 내 생활에 아버지가 계시는 권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심정적인 그 세계로 옮겨 주는 부모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늘이 우리를 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도(道)니, 하나님의 섭리니 해도 최후의 목적은 부모를 모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하나님이 부모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부모를 잃은 인간, 고아와 같은 인간, 과부와 같은 인간이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세계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곳이 인생 최후의 목적지입니다. 우리에게는 어차피 넘어야 할 삼팔선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넘어야 할 입장에 처해 있거든 넘자! 가야 되겠다. 가자! 할 수 있는 무리가 이 땅위에 나와야 합니다. 넘자! 세계를 위해서 나선 걸음이니 가정이 반대해도 넘자! 사회와 국가가 반대해도 넘자! 이 세계의 주의가 반대해도 넘자! 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못 되어 있다면 패잔병이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이념에 젖어 있어야 되겠습니까? 아직까지 내 아들딸, 내 아들딸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다 지나갑니다. 모든 인류가 다 그러한 기준을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처자를 죽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냐? 다 끊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천지의 운세는 몰아칩니다. 인간적인 정을 전부 믿을 수 없게 몰아넣는 것입니다. 하늘은 깨뜨려 버리기 위해 내모는 것이 아니라 깨뜨리지 않으면 수습이 안 되겠기에 내모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나왔습니다. 민주주의가 제국주의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악당들이 주권을 갖고 있으면 온 세상이 악당의 세계가 되겠으니, 혁명을 일으켜 깨뜨려서 민주주의를 세우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대통령으로 세워 거꾸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세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 무엇이냐?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는 부모의 존재, 충신의 존재, 열녀의 존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는 단결해야 됩니다. 우리는 각오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먼저 하늘이 세워 주시는 세계의 부모 앞에 나서야 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나온 이념이 통일이념입니다. 사정으로 통일하지 말고 심정으로 통일하자, 부모의 심정을 본받아 너도 나도 형제가 되어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 부모를 따라갈 수 있는 표본의 인격은 어떠한 것이냐? 누구를 터전삼아 부모의 그 심정을 증거할 것이냐? 예수님은 이 땅을 소유하고 주관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배반당했습니다. 선민으로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사랑하는 열두 제자, 나중에는 세 제자까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땅 위의 소망은 다 끊겼습니다. 땅에 와서 이루려던 소원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 가지 붙들고 간 것은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버지여, 당신이 찾아 세우려는 세계적인 부모의 심정만은 제가 붙들고 가겠나이다. 창에 찔리고 못에 박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당신이 찾으시는 부모의 절개만은 제가 갖고 가겠습니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가진 예수님이였기에 사망의 구렁텅이로 휩쓸려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일지라도 복을 빌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영적인 부모의 위치를 세우고 가신 예수님이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의 영적인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은 때려잡히고 영적으로만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육신까지 이루어야 됩니다. 이제 이 몸은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부모의 피살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인연이 찾아질 때까지 한스런 노정에서 탄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모가 그립기 때문에 그 부모가 올 날을 위해 세계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주인공, 하나의 부모,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6천년 동안 수고한 열매며 바라는 목표물입니다. 여기에 그 부모를 대신하여 설 수 있는 심정적인 후계자가 나와야 됩니다, 심정적인 후계자. 말만 하는 후계자 말고, 모양만 같은 후계자 말고, 좋아만 하는 후계자 말고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의 소유로 삼아 아버지 대신 고통하고 아버지 대신 슬퍼하면서 심정적으로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세우려고 허덕이는 후계자입니다. 그런 무리만이 하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9-30, 60.04.03) 인류의 소망은 참부모를 모시는 것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영적 아버지의 사명을 다하고 사탄을 영적으로 막아냈습니다. 사탄을 이기고 갔습니다. 남편은 하늘을 상징하기 때문에 하늘로 가야 되고 여자는 땅을 상징하기 때문에 땅에서 사탄과 싸워 남편처럼 이기지 않으면 신부의 자리에 나가지 못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남자 여자를 유린한 것을 탕감하고 승리하여 재출발해야 합니다. 성신을 중심삼고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한계선을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의 힘인 부활의 능력, 부활된 생명의 힘을 받아 사탄과 싸워 이겨야 됩니다. 이렇게 일생 살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간단합니다. 어린양 잔치날은 6천년 전에 잃어버렸던 참부모를 모셔 놓고 잔치하는 날입니다. 본래 타락하지 아니한 인간은 자식된 자리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잔치하는 것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나중에 왔기 때문에 거꾸로 된 것입니다. 참부모를 모시고 참자녀를 낳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할 텐데 타락한 인간이 번식되다 보니 거꾸로 된 것입니다. 타락 인간의 소원은 참부모를 만나는 것입니다. 거꿀잡이로 된 것을 반대로 다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탕감복귀입니다. 따라서 거꾸로 태어난 인간은 전부다 반대로 가야 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반대의 길로 가야 됩니다. 이렇게 가면 갈수록 타락세계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인연을 전부 끊어 버리고 가는 길이 종교의 길입니다. 이 길을 통해서 비로소 본연의 세상, 즉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이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이라도 전부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인류가 소망하는 것은 무엇이냐? 참부모를 모시는 것입니다. 6천년 전에 아담 해와의 성혼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의 후손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써 인간들은 사탄의 후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6천년 전에 잃어버린 하늘편인 참부모를 다시 이 땅 위에 찾아 세워 참부모의 사랑의 인연을 통하여 중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태어난 사람들은 양자입니다. 직계자녀와는 핏줄이 다른 양자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직접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마음에 탄식하여 양자 되기를 고대하고 있으나 그 양자된 자리에서는 복귀가 되지 않습니다. 양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핏줄이 아니고 사탄의 핏줄입니다. 그러나 이제 참부모를 찾아 세움으로써 참다운 직계의 아들딸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직계의 아들딸을 포도나무라 비유한다면 타락한 인간들은 이 포도나무의 순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복귀역사는 접붙이는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 :5)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타락한 인간을 돌감람나무라고 말씀하시면서 돌감람나무를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의 가지에 접붙임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 과정에 나타난 모든 철학과 모든 생활들을 전부 일소해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철학, 새로운 생활,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우주관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사랑에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이렇게 이끌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섭리하는 중심 내용입니다. 남자 복귀의 한계점은 신부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아버지가 돼야 합니다. 이러한 참아버지 앞에 참어머니가 나와야 됩니다. 이러한 가치적인 내용을 갖춰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를 이루고 나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참다운 가정을 이루고 참다운 세계를 찾는 것입니다. 남자 복귀의 한계점은 개성완성하여 사탄을 분별한 승리의 터전 위에서 상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자리에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여자 역시 개성완성하여 상대인 남성을 대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가야 됩니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로서 하나님의 축복의 은사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분이 바로 참부모입니다. (19-202, 68.01.07) 참부모에 대한 참된 모심 우리가 품어야 할 소망이 무엇이냐? 하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오시는 참부모님을 진정으로 모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모시는 데는 승리의 터전이 이루어진 후에, 만민이 우러러보고 만민이 공경하게 된 자리에서 모시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슬픈 역사를 거치시는 참부모를 모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슬픈 역사를 거치시는 참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것을 선조들은 한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참부모를 진정으로 모시는 것은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자리에서 모시려고 하기보다 비참한 자리에서 모시는 참효자 참효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참효자 참효녀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자리, 낙망할 수 있는 자리, 비참하여 비명을 지를 수 있는 자리에 서더라도 `하늘이여, 저를 인도하시는 하늘이여, 참부모님은 예수님보다도 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가시니, 부모님을 모시는 저로서는 어떤 가중된 십자가를 지게 되더라도 당연합니다. 저는 그것을 찬양하오니 하늘은 저로 말미암아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미쳐지는 근심과 고통과 슬픔을 하늘 앞에 짊어지우지 말고 스스로 탕감하고 나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적인 기준에서 개인이 부모의 승리의 인연에 접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이 마련된 사람들이 축복을 받아 가정을 이루는 것인데, 그들이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닦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들이 아무리 가정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어느 한때 그들이 참부모를 모셔 보았느냐 할 때 모셔 보지 못했다면 역사적인 한이요, 하늘의 한이요, 천주의 한이요, 인류의 한이 되는 연고로 가정적으로 부모를 모시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거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후회하고 슬퍼할 일이 있더라도, 그 슬픔을 하늘로 돌려버리는 부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직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시고, 참부모가 아직까지 더 큰 십자가를 짊어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고 있는 이 십자가는 응당히 져야 할 것이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슬픈 자리에서 부모를 모시고, 어려운 자리에서 부모를 모시더라도 부모를 박대하고, 부모를 슬프게 해드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가정적으로 부모를 모셨다는 기준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13-291, 64.04.12) 모든 존재가 소망하는 가치 기준 우리가6천년 역사의 열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부모 앞에 참 자녀의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부모의 인연을 통할 수 있는 자녀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열매요, 역사적인 결실이요, 미래의 출발 기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부모에게 있습니다. 그 참부모와 완전히 하나되는 날에는 세계가 하나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참부모와 완전히 하나될 때 국가도 있는 것이요, 종족도 있는 것이요, 민족도 있는 것이요, 가정도 있는 것입니다. 천지의 모든 영광의 가치를 종합한 실체 기준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를 세상의 돈과 바꾸겠습니까? 자기 생명을 주고 바꿀 수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옛날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참부모를 모시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아와야 됩니다. 우리의 아들딸도, 천세만세의 후손들도 그래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다릅니다. 천지에 운동하는 수많은 존재물들의 가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핵심이며 중심이 참부모입니다. 모든 존재의 소망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참부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늘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결실을 추구하는 원리의 원인이 되는 것이요, 시대의 중심이요, 미래의 주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참부모는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중심 본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성도 참부모를 통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한다 해도 참부모를 중심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참부모의 인연을 통해야 합니다. 참부모의 인연을 통해서 수고하고 노력하여 결실을 거두어야 하늘 것으로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늘 것으로 거둘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약시대에는 모심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그리워하기 전에 먼저 부모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자기 색시부터 그리워하는 사람은 자식의 자격이 없습니다. 부모의 품에서 자라 부모가 제일 좋다고 하는 입장에서 성장하는 것이 자식입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앞으로 축복을 받아도 상대와의 인연은 나중에 맺어야 됩니다. 먼저 부모를 그리워해야 됩니다. 부모가 없으면 밤이나 낮이나 세상이 없고 자기 존재 가치가 없는 것 같은 마음을 느낄 수 있어야 됩니다. 부모를 향한 사모의 심정과 흠모의 심정이 우리의 모든 생활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래야 하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생활과정을 통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상대, 즉 아내면 아내, 남편이면 남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어떻게 남편을 맞이하고 아내를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부모를 진심으로 그리워해야 됩니다. 내 생명의 동기도 부모요, 내 소망의 일체도 부모요, 내 모든 이상과 행복의 근원도 부모라고 하는 기준을 중심삼고 부모를 모시지 않고는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30-237, 70.03.23)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무엇을 제시하고 있느냐?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함과 더불어 참부모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절대적인 가치의 그 기준이 어디냐? 어디가 종착점이냐? 참부모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지닐 수 있고 영원한 사랑을 지닐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68-139, 73.07.29)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 희망의 귀착점 인류가 역사과정을 통해 소망해 나온 최후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상적인 나라가 있기 전에 이상적인 민족이 있어야 하고, 이상적인 민족이 있기 전에 이상적인 종족이 있어야 합니다. 또 이상적인 종족이 있기 전에 이상적인 가정이 있어야 하고, 이상적인 가정이 있기 전에 이상적인 부부가 있어야 하며, 이상적인 부부가 있으려면 이상적인 아들딸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이상적인 자유로운 존재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전지전능하고 영광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왜 아들딸이 사지에 들어가도록 두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도 자유로운 하나님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종이 가야 할 길과 양자가 가야 할 길을 닦아 왔으며 앞으로 참부모가 와서 가야 할 길까지도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될 수난의 길을 걸어온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앞에 동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그런 내적 사연을 알게 될 때, 완전히 하나님 앞에 굴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로이 운행하면서 내 아들아, 내 딸아 사탄의 공포가 어디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 아들딸을 사랑하게 되면 만물도 기뻐하며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때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을 가져 보았습니까? 이런 일이 오늘날까지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유롭게 해방되는 날을 갖기 전에는 인류도 해방될 수 없습니다. 해방된 국가가 되려면 해방된 민족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해방된 세계가 되려면 해방된 국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과 인류의 희망의 귀착점이 되고, 신앙자가 승리할 수 있는 기점이 되는 하나의 터전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한의 기원은 인류가 거짓부모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참부모의 거룩한 인연을 중심삼고 그 앞에 순응하는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천지가 해방될 수 있고, 천국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을 해원성사할 수 있는 중심이 무엇이냐? 통일교회에서 말하는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를 맞이할 수 있는 그날이 나오지 않고는 역사적이고 엄청난 한을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선한 가운데 나타나야 할 참된 부모의 혈연이 이 땅 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고아와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사탄의 아들과 딸이자 원수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법도를 보아서 인간은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을 쇠사슬로 묶어 못 가게 유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정상(情狀)입니다. 그러나 그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최후의 생사결단을 지을 수 있는 인류의 소망의 기점이 참부모입니다. 참부모는 하나님도 지금까지 바랐던 최후의 소망의 귀착점입니다. 통일교회는 기독교와 같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억천만세 죽음의 피로써 호소하고 소망하면서 남아지기를 갈구하여 산 모습으로 세워진 터전이 통일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조리한 이 세상을 부정하고, 어서 속히 하나님이 소망하는 선한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의 위업을 계승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42-289, 71.03.27)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이상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종족적으로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하나를 이루어 가지고, 사탄이 참소할 수 없고 사탄의 흔적이 없는 세계가 되어야 지상이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완전히 주체와 대상으로 부자의 관계로서, 완전히 죄 없이 성별된 부자의 관계로서, 완전히 죄 없이 성별된 거룩한 뜻 가운데 일치돼 참부모와 더불어 참자녀․참종족․참민족을 중심삼고 지상천국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최고의 소망입니다. (69-92, 73.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