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
복귀의 노정이란
원래는 구주라는 명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상담할 수 있는 형제의 입장에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요, 복귀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복귀의 길을 가야 하느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한 번으로 그만일 텐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3시대를 거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생인 구약시대를 거쳤고, 장성인 신약시대를 거쳤습니다. 앞으로는 새로이 오시는 주님을 표본으로 하여 완성시대인 성약시대를 거쳐가야 합니다. 이 역사적인 거리를 두고 아담 한 사람을 재창조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복귀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뜻이 아벨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연고로, 아담 가정에서 노아 가정으로 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시 노아 시대에서 아브라함 시대로, 아브라함 시대에서 모세 시대로, 모세 시대에서 예수님 시대로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프로에 의해서 전개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복귀의 길을 하나님이 더듬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 복귀의 기준을 세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1600년을 수고하여 아담 가정 대신 노아 가정을 불러 세웠습니다. 노아에게 120년 후에 홍수심판을 하겠다는 것을 예고할 때, 노아 자신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명령뿐이었습니다. 이제부터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난 후 '기필코 이 세상을 심판한다'는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억울한 내적인 슬픔과 한을 풀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찾아오셨다는 것을 노아는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하나님과 약속한 내용을 일편단심으로, 촌시라도 잊지 않는 신념 가운데서 지켜 나왔습니다.
노아가 복귀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여 제2의 인간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120년 동안 악한 세계에서 모진 바람과 모진 시련과 모진 환경에 부딪혀도 그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떠한 시련에 부딪히더라도 노아는 아담과 같이 천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의 기반 위에 서야 합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배를 만드는 그 기간은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덧없이 세월이 흘러갈 적마다 그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은 노아를 미친 노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주위의 '뭐 120년 후에 인류를 심판해?' 하는 조롱과 비소를 받아 억울함과 분함이 휘몰아치는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그 약속만은 버리지 않고, 일념의 신앙심으로 그 환경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 즉 노아의 아내와 자식까지도 노아를 부인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내용이 없습니다. 120년 동안 그 일만 하고 다녔으니 그의 아내와 자식이 뭐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노아의 아내, 노아의 자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120년 동안 그러한 일들을 하고 다녔으니 그 모습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도 노아를 원망했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노아를 원망했습니다. 원래는 믿어주기를 바라서 그 가정을 세웠고, 믿어주기를 바라서 그 사명을 맡긴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일치단결하여 노아의 뜻을 받들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 가정이 하나님의 뜻을 믿지 못하고 반기를 들고 반대하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노아는 그러한 자기 가정을 이끌고 자유와 소망의 한 날, 하나님과 약속한 그 날을 위해서 참고 참으면서 120년을 지내 온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분했는가 하는 그 내정적인 심정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믿고 나왔습니다. 자신보다도 불쌍한 자리에 계신 분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몰아침을 받고, 시달림을 받는 노아를 바라볼 적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비통함이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통할 수 없는 종의 입장인 노아였기에, 하나님은 그 내적인 사정을 말하지 못하고 그를 대했습니다. (15-329, 65.12.7)
중심인물들을 통해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
노아는 40일 홍수심판에서 승리의 터전을 마련했지만, 그 후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노아 가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는 깨져 나갔습니다.
온 세계를 심판해 버리고 남긴 노아 가정이 다시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뒤넘이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에 분함과 원통함이 얼마나 사무쳤겠습니까? 그로 말미암아 다시 가야 할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이었던 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또 노아 가정에서 섭리의 뜻이 저끄러짐으로 말미암아 노아 대신 아브라함을 세우기 위해 4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일구월심, 한 마음으로 다시 복귀의 길을 더듬어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오늘날 그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을 세워서 뜻을 해결지으려고 했지만 그의 제물 실수로 말미암아 다시 그 뜻은 연장되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3대 하나님이라는 슬픈 명사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세워 뜻을 이루려던 하나님이 결과적으로 벌어진 슬픈 사정을 바라볼 때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당장에 아브라함 일족을 때려부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소망의 천국을 이루어 나아가야 할 하나님의 애절한 심정이 남아 있는 연고로 또 참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아브라함 자신은 몰랐습니다. 야곱이 에서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일로를 개척하고, 하란 땅 라반의 집에서 21년 동안 고역의 노정을 거쳐 나올 때, 이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을 야곱은 몰랐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억울하고 분한 사정에 몰리고 천대를 받고 밟힘을 당하고 원수의 시험을 받더라도, 또다시 가야 할 하나님의 복귀의 노정이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야곱은 하나님과의 약속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약속한 그 뜻을 위해 하나의 믿음을 가지고 라반의 가정 환경 속에서 전부를 승리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여러 가지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발붙일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애급 400년 고역기간을 거쳐 60만 대중을 이끌고 지상천국을 이루고자 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다 쓰러짐으로 말미암아 다시 2세를 수습하여 가나안 7족과 대결하도록 함으로써 승리한 터 위에 천국이념을 세우려 했습니다. 이것이 지지부진하여 가나안 땅을 거치고, 역대의 처량하고 비참한 역사노정을 거쳐서 예수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개인․가정․종족․민족이 한꺼번에 복귀하기를 원했지만 그것을 책임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적인 복귀의 책임과 가정적인 복귀의 책임은 야곱이 졌고, 민족적인 복귀의 책임은 모세가 졌고, 국가적인 복귀의 책임과 세계적인 복귀의 책임은 예수님이 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전체적인 책임을 맡기려고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점쟁이인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서 예물을 줄 때, 온 예루살렘의 성민들이 소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사람으로 태어날 줄 몰랐습니다. 교법사나 서기관, 어느 누가 버선 한 켤레라도 마련해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태어났다 해서 옷 한 가지 마련해서 찾아간 사람이 있었습니까? 불쌍한 자리에 오시면 안 되겠다고 초막 대신 거룩한 장소를 예비하고, 예물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한 사람이 있었느냐 말입니다.
하늘의 때는 지나가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4천년 동안의 긴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한을 풀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약속의 주인공으로 보낸 메시아를 이스라엘 민족은 한 사람도 몰랐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다. 어찌하여 그렇게 한 사람도 몰랐느냐는 말입니다. (15-331, 65.12.7)
예수님의 소망과 원통함
이스라엘의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은 선민권을 자랑할 줄만 알았을 뿐, 저들을 세우신 것이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함이요,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본연의 책임이요, 사명인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에 이 국가, 이 민족이 반대했습니다. 사귀 들렸다고 하고, 바알세불의 괴수라고 했으니, 이 얼마나 엄청난 역사적인 비운입니까?
그들은 빌라도와 짝하여 '유대의 나사렛 예수, 그는 가짜이니 그를 잡아다가 죽이시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진해서 죽었습니까? 온 이스라엘인이 죽였습니다. 예수님은 피살당한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지상에 천국을 완성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그를 믿지 않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음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나를 세우신 본연의 목적은 천국을 완성하는 것인데, 이제 이것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세(事勢)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상에 올라가 기도할 때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이 죽을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미 사태는 틀렸다,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된 것이니 할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고 죽음을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왔습니까? 기도해 보십시오. 내가 영계를 통하고, 하나님 앞에 담판기도를 해서 안 사실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는 현세의 기독교 앞에 폭탄선언을 했습니다. 교회 교회마다 십자가를 걸어 놓은 것을 보면, 선생님 마음속에서는 불이 납니다. 원통하고 원통한 십자가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죽지 않고 살았다면 예수님이 구주가 못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어찌하여 예수님을 비참하게 죽여 구주로 만들겠습니까? 살아 있을 때 군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구주의 과정을 다 거친 다음에 만왕의 왕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성도들은 구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군왕이 필요합니다. 즉 만왕의 왕이 필요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 주권 밑에서 하늘나라의 치리를 받지 못한 것이 분하고 원통합니다.
예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최후의 운명 시간에 오른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왼편 강도가 웬 말입니까? 왜 사도들이 오른편 강도처럼, 왼편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 달렸습니까? 원통 중의 원통한 일입니다.
낙원의 선봉자는 누구입니까? 오른편 강도입니다. 사도들이 아닙니다. 내가 사도들을 우습게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생님이 베드로를 만나서 물어 보니 꼼짝달싹 못 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 만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홀로 보내다니! 같이 죽어야지. 그랬다면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제자들도 부활했을 것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부활했다면 기독교는 피 흘리는 종교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적 구원만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본래 사명은 영육 아울러 구원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완결짓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와야 합니다. 그래서 재림이라는 명사는 억울하고 분한 명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하나님은 천국이념을 품고 당신이 소원했던 본래의 천국권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에 끝날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복귀된 천국이 어디 있느뇨?' 하며 찾아오십니다.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이 이 천국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지지리 고생을 했고, 2차대전 중에는 히틀러에게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15-333, 65.12.7)
실체천국을 이루어야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어느누구든지 그 민족을 잘못 건드렸다가는 대번에 망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은 이후 2천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유리고객이 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시달리고 여러 민족에게 쫓김받는 처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으면 생명을 걸고 기도해 보십시오.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잡아죽였으니,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든지 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참부모요, 인류의 참조상으로 오신 분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자기 부모를 죽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죄악 된 부모를 죽였어도 목을 잘라야 할 텐데, 천륜을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인류의 소망을 대표하여 오신 참부모를 잡아 죽였으니, 하늘의 법도에 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지상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뜻이 연장되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2천년간 영적으로나마 구원섭리를 통하여 말세의 한 때를 대비해서 나오고 있나니, 오늘 이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천국은 네 마음에 있느니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천국만 가지고 되겠습니까? '천국'이라면 나라를 두고 하는 말인데, '나라'가 성립되려면 주권이 있어야 하고 백성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는 말은 우선 네 마음에서부터 소망의 천국을 품으라는 뜻입니다. 소망 천국의 내용을 품고 실체 천국을 이루기 위해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소망 가운데 천국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사도들도 소망의 천국을 품고, 치리자(治理者)의 대표인 예수님을 통하여 실체 천국을 이루어야 할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4천년간 준비한 소원성사의 한 날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 흘리는 복귀의 길을 걸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불벼락을 내려 쓸어 버려도 시원찮을 것이었지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하고 간곡하게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의 조건을 생각했기에, 그 민족을 쓸어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죽어 가면서까지 애절하고 간곡한 기도를 드린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지상천국의 이념을 잃어버리게 되면, 하나님이 소원하고 정성들여 놓은 4천년 역사의 공적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런 역사적인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기도한 예수님의 기준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또다시 복귀의 길을 개척해 나오십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후 기독교는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과 종족․민족․국가를 다시 세워야 되는 비참한 역사를 이루어 나왔습니다.
제1 이스라엘이 준비한 4천년 역사 가운데 예수님을 보내서 한 주권과 국가를 이룸으로써 이것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복귀의 천국을 이룰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여 이것이 깨졌기 때문에 제2차적으로 개인적인 기독교, 가정적인 기독교, 종족․민족․국가적인 기독교권을 거쳐서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독교권으로 복귀시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 종말시대에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고대해야 됩니다.
주님이 오면 모두 천국에 데려갈 줄 압니까? 그냥은 못 데려갑니다. 천국을 이루어 놓고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천국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에 천번 만번 저버릴 수 있는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참고 나오셨습니다. 한 동네를 찾아갔다가 박대를 당한 하나님이요, 소망의 한을 풀고자 개인의 어려운 투쟁을 통하여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을 바라다가 그때를 맞이하여 개인으로부터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가정을 찾아 나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요,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 나라를 찾아왔다가 배척받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로마로부터 배척받고 피 흘려서, 그 피값으로 섭리해 나온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2천년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일국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무대를 갖춰서, 오늘날 전세계를 민주세계로 만들 수 있는 터전인 기독교권을 만들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기독교권은 그 방향을 알지 못하고 최후의 절벽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15-335, 65.12.7)
기독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
이제 기독교인들은 지상천국을 이루려 했던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피 흘린 한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또 신랑 신부의 자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자 한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예수님이 찾지 못했기에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그 개인을 찾지 못하면 한 가정을 찾지 못하고, 그 가정을 찾지 못하면 한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고, 종족․민족․국가를 찾지 못하면 한 신랑 신부를 택하지 못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 하시며 한탄하셨으니, 하나님이 보낸 황태자가 그런 처량한 사정에 처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워서 찾고자 한 참된 개인이 없었습니다. 가정은 많았으나 참된 가정은 없었습니다. 참된 종족과 참된 민족과 참된 나라가 없었습니다. 감람산 골짜기에서 하늘의 소망을 품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참담해하던 예수님의 심정에는 참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한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하늘땅을 치리(治理)하고 천지를 주관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의 제자들이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메시아의 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베드로가 메시아의 수제자라니 이것이 웬 말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잘 믿던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은 어디에 갔습니까? 12제자 가운데는 교법사나 서기관이나 제사장 출신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잘 믿던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지옥행 열차를 탔습니다. 그들이 천국 갈 수 있었겠습니까? 바알신의 직속 제자가 되었기에 그렇게는 안 됩니다. 그래도 제일 하층인 어부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낙원에 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믿고 있던 그 주님이 신랑입니까? 분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그러니 2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예수님은 다시 이 땅에 오셔야 합니다. 오는 데는 한을 풀 수 있는 터전을 닦아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사도의 자리에 서야 했던 것같이, 세계에 널려 있는 대학자들이 오시는 주님을 '주여 오시옵소서' 하고 먼저 맞이해야 합니다.
교법사나 제사장 등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의 권력을 행사하던 입장에서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오셨다면, 그 예수님을 얼마나 잘 모셨겠습니까?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목수 조수 노릇이나 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목수의 조수 노릇을 해야 했던 예수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나는 그 목수 말만 들어도 창자가 뒤틀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책임을 하지 못한 연고입니다. 30여 평생을 가슴에 한을 품고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며 4천년의 역사를 탕감짓고 넘어가는 그 길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마저 책임을 못 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라고 했으며, 또 무리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있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면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50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잘 알아야 합니다. (15-337, 65.12.7)
예수님의 한
한이 사무치고 사무쳤던 예수님이 몇 살 때 집을 나간 줄 아십니까? 그는 요셉 가정에서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일을 하면서도 요셉의 직계 아들딸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명절 때가 되어도 새 옷 한번 입어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입장에 있었습니까? 요셉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기르고는 있었지만, 예수님이 의붓자식이었기 때문에 싫증이 났습니다. 명절이 되더라도 마음놓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심정의 자리를 갖지 못한 서글픔과 억울함에, 예수님은 부모야 있든 말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제사장이 머물고 있는 성전 가까이에서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한 많았던 예수님,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요, 만민의 구세주, 황태자로 오셨던 메시아에게 십자가가 웬 말입니까?
나는 통일교회의 책임을 지고 나오면서 그 누구보다 핍박을 당하고 이 민족 앞에 저주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통일교회를 이단이라며 핍박하고 밟고 천대해 보라는 것입니다. 뿌리는 밑으로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참이고, 누가 허위인가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참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온갖 욕설을 다 들어 왔기에 민족을 저주하고 교회를 저주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알고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과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을 알았기 때문에 참고 나왔습니다. 죽으라고 감옥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쉽게 죽어 버리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 통일의 용사들은 남은 복귀의 노정을 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 태어났지만, 만약 이 스승이 미국에 태어났다면 이런 지긋지긋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세주요 메시아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 민족 중 어느 누가 밥 한 그릇을 주었습니까? 어느 누가 옷 한 벌을 주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려던 예수님의 사정을 누가 알았겠느냐 말입니다. 서글프고 원통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면 비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제자 중에서도 참된 제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용사들은 곡절 많은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고, 하나님이 소망했던 천국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참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참된 가정이 되어야 하고, 참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복귀의 길을 더듬어서 개인과 가정을 찾아왔지만 그 개인과 가정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또다시 세계를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시니 나도 가야겠습니다. 그 길이 험준하다고, 그 길에 죽음이 있고 슬픈 곡절이 있다 해서 멈출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가신 길을 나도 가야 되겠으니, 아버지가 어려우면 나도 어렵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슬프면 나도 슬프기를 바라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의 이념입니다. 우리 나라 이 조그마한 삼천리반도를 기반으로 하여, 이 민족 앞에 이색적인 운동을 일으켜 세계에 새로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우리의 이념권내에 흡수되게 새로운 깃발을 들고 나서자는 것입니다.
이 민족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이 스승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이 뜻이 정녕 아버지께서 세우신 뜻임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극복해야 합니다. 또 아무리 어려운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내 아버지요 내 사정이 되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세우신 전통을 상속받고 그 아버지의 역사와 심정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그 아버지가 고통받으면 나도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쉬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가운데는 안식의 한 날을 노래해 온 교단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통일교인들은 쉬지 말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예수님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도하며 전도한 것처럼, 통일교회 여러분은 사망의 어둠이 휩쓰는 이 천지 가운데서도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지옥에 가더라도 그 속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을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15-339, 65.12.7)
통일용사의 발걸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기 위해 애쓴 수고에 비하면, 우리가 한 자녀를 세우기 위해서 흘린 눈물과 피와 땀의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6천년의 한을 풀기 위해서 복귀의 역사를 재창조의 섭리로서 이끄시며 한 많은 곡절의 노정을 더듬어 온 것을 생각하며 가고 또 가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하고, 선생님을 위하는 마음은 좋습니다. 그 정성은 고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민족을 사랑해야 합니다. 민족 앞에 주지 못해 눈물 흘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죽어 가는 자기의 생명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불쌍한 처지에 놓인 민족에게 가서,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도리에 맞습니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마음이 편안합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위해 꽁보리밥을 지어 가지고 오는데, 그런 정성이 있거든 삼천만을 위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하늘땅 전체를 위해서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사상입니다.
선생님은 굶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 더 많이 굶었고, 욕을 먹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더 많이 먹었고, 매를 맞는 데도 선생님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또 노동 현장에 가서도 선생님은 일등 노동자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좋은 자리에서 잘먹는 것만이 잘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잘못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실제적인 환경에서 천국을 건설하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통일신도들이 지녀야 할 사상이요, 통일역사가 지금까지 남겨 놓은 전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역사를 책임져야 합니다. 이 역사를 책임지지 못하고 소모만 시키는 사람은 하늘의 역적이 되고, 이 역사를 빛내는 사람은 하늘의 충신이 됩니다.
우리는 천국을 이루고 즐거워하는 웃음소리가 삼천리반도와 온 지구상에 드높이 울려퍼질 그날을 위해서 행진하고 또 투쟁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들인데 쉴 새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쉴 새가 없습니다. 가고 또 가고, 자다가도 눈만 뜨면 깜짝 놀라 일어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통일신도입니다. 밥을 먹다가도 눈물 흘리면서 통곡하는 통일신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소망하신 천국을 이루어드리고, 예수님과 성신이 못 다 푼 한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물의 과정을 거쳐 나간 천천만 성도들이 지상천국을 못 이룬 복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내용을 알고, 이 엄청난 사명을 짊어진 우리가 쉴 새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리가 부러지더라도, 죽더라도 전력을 다하여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3년노정을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길을 가는 데는 누구나 죽음을 각오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별의별 힘든 일이 많습니다. 수많은 시험에 견뎌야 하며, 여비 없이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걸어가야 합니다. 나이 어린 처녀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욕(羞辱)을 당하더라도 자기가 세운 일편단심, 뜻을 이루기 위해선 자지 않고 배를 곯으며 모험을 무릅쓰고 가야 합니다.
이런 사정을 전개시킨 이 스승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그러한 자리에서도 누구를 대해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서 쓰러지고 희생하더라도 한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 발판을 닦는 용사에게 어찌 원수의 화살이 없겠으며, 어찌 원수가 자신을 포위하지 않는다고 보겠습니까? 그러나 스승을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이 민족을 위함이요, 세계를 위함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거룩한 자리입니다. 비록 그 길이 멀다 할지라도 지름길을 찾아 즐거이 가야 하는 것이 통일용사들의 발걸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벽을 넘고 경계선을 넘어, 삼천리반도와 이 민족 앞에 나서야 합니다. 지금 한국 실정을 보면, 길거리의 청년들이라도 잡아다가 통일이념을 교육시켜야 됩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대번에 느낄 것입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부모의 심정을 지니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땀은 땅을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눈물과 땀과 피의 가치를 인류와 땅과 하늘이 알아줍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발판을 타고 오십니다. 개인적인 제물시대, 가정적인 제물시대, 종족적인 제물시대, 민족적인 제물시대, 세계적인 제물시대를 거쳐서 섭리해 오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통일신도들은 개인적인 제물시대를 거치고 민족적인 제물의 책임을 다하여 세계적인 제물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될 수 있으면 제일 말단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남들은 오뉴월 삼복 더위에 피서를 가고, 또 학생들은 모두 방학이 되어 놀러 가더라도, 여러분은 고향에 가서 손발이 부르트는 한이 있더라도 농사를 배워야 합니다. 농사꾼이 되어야 합니다. 혹은 달구지를 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은 이 민족의 친구가 되고, 이 나라의 애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여러분이 점점 섭리의 발전도상 위에 설 수 있습니다.
3년노정 가운데 한이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3년노정이 지나면 세계가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그대로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이 우리 손아귀에 의해 결정되는 때가 왔습니다. 그런데 3년노정의 고비를 넘어가다 지치는 식구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친 자들을 바라보고 자기도 지칠까봐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지치지 말고 끝까지 증거하며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탄과의 승부를 놓고 싸우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기로에서 싸우고 계시는데,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할 우리가 지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폭탄과 마찬가지입니다. 터져서 내 자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없어지더라도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15-341, 65.12.7)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길
우리에게는 안 가려야 안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이 길은 이 나라의 장관과, 이 나라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하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방에서 불쌍한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을 피해 가는 추한 무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활동무대에서 이러한 사상과 신념을 갖고 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후손을 위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지 못하면 우리 조상과 우리 후손들이 참소합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수천만 대의 후손들은 아담을 많이 비판해 왔습니다. 천륜의 법도를 유린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천사장인 사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와 환경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하나님의 주관을 받겠다는 신념으로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선 용사들입니다.
이 강산에 공산당이 웬 말입니까? 우리의 통일이념으로 수십만 정병이 무장만 하면 공산주의는 순식간에 깨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에게 지워진 사명과, 우리들이 가야 할 이 노정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흘러가도 우리의 책임은 흘러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은 안식하더라도 우리는 안식할 수 없습니다. 필승의 한 날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바라는 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후손 앞에 참소를 받는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후손과 민족을 걸어놓고, 세계를 걸어놓고 기도하고 정성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복귀의 길을 가는데, 여러분은 그 앞 단계의 기준까지 닦아 놓고서야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법도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죽는 것이 하늘의 필연적인 법도입니다.
최후에 하늘을 빛내어, 민족과 세계가 우리를 따라와서 하나님 앞에 머리 숙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은 모든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불을 질러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는 선각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렇듯 여러분에게는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나니,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가야 할 복귀의 노정에서 많은 고충을 느낄 것입니다. 공적인 책임자의 자리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날 선생님이 직접 뛰던 전통을 상속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몸소 민족을 위해 선생님이 생명을 걸고 뛰고 싶지만, 여러분을 대신 세워 분부하니 선생님 대신자로서 열심히 움직여주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책임자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선 공분하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더라도 뜻을 위해 나선 이념의 형제를 위해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밥을 먹고 배가 부를 적마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배불리 먹지만, 우리 형제들은 밥 한 그릇을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구나' 하며 반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을 잘 때도 어떻게 잠을 자고 있는지 염려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민족적인 골고다를 넘어 승리하지 않는 한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갈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계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천주적인 골고다를 향해서 가야 할 복귀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 복귀의 노정을 거쳐서 천국을 이루는 것이므로, 우리는 오늘도 가고 내일도 또 가야 합니다. 이 길을 가는 데는 어떠한 사정이 있더라도, 혹은 부모가 반대하고 형제가 반대하고 동기가 반대하더라도 가야 합니다.
가야 할 복귀의 노정이 남아 있는 한 계속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억천만세가 걸리더라도 가야 하고, 우리의 후손 수천만 대를 통해서라도 이 길을 가야 합니다. (15-344, 65.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