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 (사랑이야기 - 제 5권 구원 역사편 - 제 4장 구원섭리와 나)

철장왕 | 20181016073644

4. 시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나
  
우리는 원리를 통해서 소생시대․장성시대․완성시대라는 3단계를 배웠습니다. 3수가 중요합니다. 자연계도 보면 광물세계․식물세계․동물세계 이렇게 나눠집니다. 사람도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얼굴도 눈․코․입, 3단계입니다. 손으로 잡는 것도 3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손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잡히는 뭐가 있다 이겁니다. 눈도 초점이 세 점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코도 두 콧구멍으로 들어가서 하나됩니다. 입도 보면 3수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3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는 우주를 천․지․인(天地人)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 세상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원형을 그리더라도 반드시 세 점을 연결시켜야 됩니다. 
시간도 과거․현재․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시간은 현재이지만 벌써 과거가 되는 것입니다. 끝나면 벌써 과거가 됩니다. 모든 것이 3수로 연결됩니다. 아침을 먹더라도 세 가지 이상을 놓고 먹어야 됩니다. 그거 생각해 보라구요. 무엇을 먹느냐? 물을 먹고, 그 다음엔 식물과 동물을 먹습니다. 물을 먹고, 그 다음엔 육지 것을 먹고, 공중 것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기가 필요하고 태양 빛이 필요합니다. 바다 것을 먹고, 육지 것을 먹고, 공기를 먹습니다. 
구원섭리, 하나님의 뜻도 3시대를 거쳐옵니다. 구약시대가 있고, 신약시대가 있고, 성약시대가 있습니다. 이러한 원칙에서 구약시대를 소생시대라고 하고, 신약시대는 장성시대라고 하고, 성약시대는 완성시대라고 합니다. 완성의 성약시대라고 합니다.
우리의 일생을 보더라도 결혼 전까지를 소생시대, 결혼하고 나서는 장성시대, 그 다음에는 가정을 거느리는 완성시대가 됩니다. 근본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섭리도 자연이치와 환경에 맞는 단계적 과정을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할 때 나는 현재의 입장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는 똑 떼어놓은 현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연결된 관계에 있습니다. 나를 두고 볼 때, 나에게는 과거가 따라옵니다. 과거에는 부모가 따라오고, 미래에는 여러분의 자식이 따라옵니다. (125-158, 83.3.20)
  
  
과거․현재․미래는 한 점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 순간을 두고 보더라도, 순간은 현재로서만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를 잘라 보면 반드시 과거가 현재의 첨단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순간, 여기에는 반드시 과거가 연결됩니다. 또 이 순간에는 미래,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가 연결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 선으로 표시할 수 있는 현재와 선으로 표시할 수 없는 관념적인 경지까지의 현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현재, 없다면 없는 것 같고 있다면 있는 것 같은 현재의 한 점이, 현재의 한 선이 오늘 우리 일상생활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은 두렵고도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루를 두고 보면, 거기에는 어젯날이 있고 내일이 있습니다. 한 달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달이 있고 내달이 올 것입니다. 일년을 중심삼고 보면, 지난해가 있고 내년이 오는 것입니다. 청년시대를 두고 보면, 소년시대가 있고 미래의 장년시대가 있습니다. 이렇게 현시대를 중심삼고 보면 과거가 있음과 동시에 미래가 연결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위치라는 것은 지나가는 과정에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동시에 미래를 맞는 순간점에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은 한 점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는 과거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고,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가 될 수 없습니다. (68-204, 73.8.1)
  
  
과거․현재․미래는 한 목적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현재의 빛나는 가치 기준은 어떤 것이냐? 빛나는 과거를 이어받은 자리요, 빛나는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그 방향을 올바로 지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가 되지 않고는 빛나는 현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쉬는 것을 보더라도 숨쉬는 그 자체에서 벌써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찾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생도 그러한 운명의 노정을 현재의 첨단에 연결시킨 것이요, 역사도 그러한 일생들을 합한 인연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현재라든가 미래, 혹은 과거라든가 현실, 현세계, 현세대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 순간, 역사를 대표하는 때는 과거의 어떤 때가 되기도 하고 현재의 때가 되기도 합니다. 또 미래의 어떤 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미래는 미래대로 동강나 제멋대로 움직여 가지고는 하나의 목적 하는 방향을 올바로 가려 갈 수 없습니다. 
내가 행렬 가운데 한 일원으로 줄을 맞추게 될 때는, 반드시 앞을 맞추고 뒤를 맞출 수 있게끔 자세를 취해야 됩니다. '우로 나란히!' 하게 되면, 반드시 좌우관계를 봐서 오른쪽이나 왼쪽의 방향을 맞추지 않고는 표준하는 직선의 한 열을 그려낼 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의 패턴을 이어받더라도 그것이 제멋대로의 방향을 취해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인간이 바라는 목적, 또는 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가 있다면 그 창조주가 바라는 목적과 우리가 일생을 통해서 바라는 목적과 우리 후손이 바라는 목적이 제멋대로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68-205, 73.8.1)
  
  
현재는 삼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중심점
  
현재는 엄숙한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아야 됩니다. 자기 멋대로 오른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왼쪽에 치우쳐도 안 됩니다. 좌우와 전후관계, 더 나아가서는 상하관계를 가리면서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는 엄숙한 자리로서의 현재는 용인할 수 있으되, 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이것을 중요시하지 않는 자리에서 과거를 이어받았댔자 그 현재는 중요한 가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현재뿐만이 아니라 미래도 현재를 보다 빛낼 수 있는 미래와 연결시키는 현재의 위치를 설정하지 않고는, 우리의 희망이라든가 혹은 소망이라든가 더 빛나는 내일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의 자리가 귀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언제나 현재의 위치에서 '나' 하나를 생각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나' 하게 되면, 여기에는 반드시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좌우가 있고 상하가 있습니다. 전후․좌우․상하로서 연결되어야 한다 이겁니다. 그 전후․좌우․상하가 제멋대로가 아니라 동서남북(東西南北)이면 동서남북, 고저(高低)면 고저에 있어서 같은 천주(天宙)의 방위(方位)와 평행선에 놓일 수 있는, 언제나 일치할 수 있는 입장을 취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와 아래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오늘의 '나'라는 것이 중심이 됩니다. '나'라는 것이 마음대로 섰다 해서 '과거의 위에다 맞춰주소. 아래에다 맞춰주소' 그러게 돼 있지 않습니다.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위와 아래의 중간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틀어지면 전부 틀어지고 맙니다. 그런 상하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점은 현실입니다. 좌우를 조정할 수 있는 중심점도 결국 현재입니다. 전후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현재의 입장이라는 것은 3시대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입니다. 혹은 3단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점입니다. 과거와 현재가 일치되지 않는 데서는 통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목적이 있고, 누구에게나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현재가 아닌 미래의 것일수록 방향성이 뚜렷해야 합니다. 그 목적이 크면 클수록 일년 만에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일생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세기, 혹은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그 방향을 맞춰 수많은 세대, 수많은 인간상을 거치고 나서야 달성되는 것입니다. 역사성을 두고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 일생이라는 것은 지극히 짧은 것입니다. 영원한 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을 향해서 우리는 언제나 일치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이 방향을 설정했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이 방향을 향해서 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는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도 이 방향을 향해 나갈 것입니다. 민족의 역사도 이 방향을 통해서 역사를 엮어내려고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섭리적 역사의 방향을 생각하게 될 때, 현재로 연결되는 자리를 거쳐 미래가 있고, 현재가 연결되는 자리에 과거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현재 섭리상에 처해 있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그 개인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개인은 개인만이 아닙니다. 그 개인은 어디까지나 뚜렷한 하나의 기원으로부터 어떠한 선을 그려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된 그 한 점은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8-206, 73.8.1)
  
    
똑딱 하는 현재의 한 순간에 역사의 방향이 왔다갔다한다
  
기나긴 역사의 방향을 거쳐 어떻게 하든지 이만큼 연결시켜 온 한 점이 현재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간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가운데 하나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에 이 방향이 연결되느냐, 못 되느냐에 따라 생애노정이 엇바뀐다는 사실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방향이 어떻게 틀어져 나가느냐? 한 순간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달라지고, 한 순간에 대하는 어떠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방향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순간의 한마디 말로 말미암아 방향이 거꾸로 될 수도 있고, 어떠한 순간에 부딪힌 하나의 문제로 말미암아 방향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또 오관으로 느끼는 모든 감정을 통해 가지고 그 방향의 첨단이 예민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동쪽을 향해 섰는데 진짜 동쪽을 향해 섰느냐 할 때, 동쪽을 향해 섰다고는 하지만 진짜 동쪽에 서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쪽을 중심삼고 동서남북을 그린 그 선의 중심을 향해서 서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동쪽 편에 섰다. 동편에 섰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나는 동쪽 방향에 완전히 일치된 자리에 있으니 '나를 본받아라' 할 수 있는 자리에 섰는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적 방향이 반드시 목적을 향해 간다면 그 역사가 흘러가는 방향에 제일 가까운 지름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 인간이 몰라서 그렇지, 절대자가 계시다면 그분은 그 하나의 방향을 알아 가지고 꼬박꼬박 그 방향에 전후 좌우의 도수를 맞춰서 그곳으로 전진시킬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기 미터기 같은 것을 볼 때, 그것을 진짜 영점에 맞게끔 조정해 가지고 좌로 몇 도가 됐는가, 우로 몇도가 됐는가, 상하관계가 어떻게 됐는가 하는 것을 측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행로도 그와 같은 운명길에 서 있습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나, 그러한 입장에 선 오늘, 그러한 입장에 선 이 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것입니다. 
역사가 흥하고 망하는 운명길에 접어드는 것도 오늘에 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 가운데 어느 점에서 출발됩니다. 그 점은 오늘의 어떤 시간도 아니요, 어떤 분도 아니요, 어떤 초입니다. 순간입니다. 똑딱하는 그 순간에 역사적 방향이 왔다갔다합니다.
여러분의 몸에 병이 났다면, 병이 한꺼번에 와락 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의 한 점에서부터 원인이 되어 마이너스 방향으로, 혹은 왼쪽 방향으로, 혹은 내리닫이 방향으로 출발한 그 순간이 병이 나는 시초입니다. 그 점에서부터 병이 날 수 있는 환경이 가해지면 그것은 점점점점 내려가게 되어 그것을 다시 추어올리려면 우리 인간이 모든 생명을 기울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느냐? 살기 위해서 태어났다, 요렇게 생각하면 너무나 단순합니다. 내가 사는 데는 뭘 하며 사느냐? 그저 밥이나 먹고, 아들딸 낳고, 그저 일상적 습관적인 행로를 더듬어 간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왔다 간 인간들과 마찬가지의 회전운동을 남기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은 역사시대에 한 점을 잘라 놓은 존재, 모래가루와 같이 허공을 떠돌아 어떠한 인연도 갖지 못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그는 고독한 자요, 전체의 연합체로 되어 있는 조직사회에 불필요한 존재입니다. 만일 제멋대로 자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디 가서 붙었댔자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향이 기울어질 수도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장애도 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방해도 될 수 있습니다. (68-208, 73.8.1)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표한 선봉에 선 나와 그 책임
  
'나'라는 존재는 어떤 체제 내의 연관적인 생명권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수천 수만 대 선조들의 모든 생명의 요인을 연관시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많은 생명들의 모든 방향을 대표할 수 있는 현재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선조들이 거쳐온 전체의 방향을 총합한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인 선조들을 대표하여 선봉에 선 '나'가 잘하면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의 방향을 연장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하게 되면 아무리 좋은 조상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간 길을 몽땅 꺾어 버릴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와 선한 선조들의 공적을 완전히 영점으로 화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신중하고도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 보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생각하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고, 행동하는 데도 과거․현재․미래가 있습니다. 전부가 그러한 관계성을 지니고 생애의 노정을 가려 가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입니다. 여기에서 선하고 악한 사람이 결정됩니다. 과거에 선한 사람이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과거에 결정된 것이 아니요,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결정되느냐? 오늘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겁니다. 요 순간에 선한 사람이 결정되고, 악한 사람도 결정됩니다. 오늘 이 엄연한 현실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입니다. 현실을 중심삼고 내가 책임진 입장에서 행동을 했기 때문에, 현재는 역사적 관계에 등장하는 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미래의 역사노정에 등장하는 순간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보편타당한 운명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 현재입니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봐도 그렇고, 대한민국 역사를 봐도 그렇고, 세계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렇고, 역사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섭리사를 중심삼고 봐도 그와 같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과거가 잘 나왔다 해도 방향이 1도만 틀어져서 그것이 영원히 가게 되면 목적과 틀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조정해야 됩니다. 매일같이 조정할 뿐만 아니라, 모든 승패는 순간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순간마다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언제 어느 때 악한 자리에, 혹은 실패의 자리에 부딪혀 파산할지 모릅니다. 이런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제 못 했으면 내일 하지' 하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어제 못 했으면 반드시 과거는 그만큼 구덩이가 파이는 것입니다. 그걸 남기고 '내일 잘하면 되지' 몇 번 그렇게 해보라구요. '내일 잘할 수 있으니까 오늘은 괜찮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선을 그리면서 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68-210, 73.8.1)
  
  
세계 인류는 삼시대가 연결된 하나의 직선길을 가야 한다
  
현실의 한 순간이라는 것은 엄청나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위협보다도 더 무서운 내용이 있습니다. 천년을 망하게 할 수도 있고 만년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오늘 현실 가운데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이렇게 가야 되겠다. 방향을 잘 맞추고 금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 하루의 선을 그어 놓고 가야 되겠다' 해야 됩니다. 혹은 한 달을 생활하게 될 때 반드시 '요렇게 가야 되겠다' 하며 금을 그어 놓고 살아야 됩니다. 그 금이 철저하고 틀림없고 완전한 금일수록 순간 순간을 연결하는 선이 완전하고 확실합니다. 그런 금을 그어 나가지 않고는 완전한 하루와 한 달을 남길 수 없습니다. 완전한 한 달을 남기지 못하면 거기에서 완전한 일년은 허사가 되는 것이요, 완전한 일년이 허사가 되는 날에는 영원한 이념도 허사로 귀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마다 책임 없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책임을 져야 됩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단체의 책임을 진다 하면 그 단체의 방향을 제시해야 됩니다. 어떤 가정을 책임졌다 하면 반드시 방향을 중심삼고 책임이 벌어지는 것이지, 방향도 없이 그저 함부로 하는데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책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관을 통해 그 방향에 일치될 수 있는 책임적 내용을 지니고 나서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그는 책임자로서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책임자에게 책임추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시대적으로 추궁하는 것이요, 미래적으로 추궁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순간이 얼마나 엄청난 순간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공이 다른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대적인 물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삼은 시간권내에서 좌우됩니다. 그때의 방향 설정 여하에 따라 천태만상의 변형이, 변한 상태가 전개되게 마련입니다. (68-212, 73.8.1)
  
  
역사와 현재와 미래와 하나님이 원하는 길은 하나
  
'지금 통일교회 식구들의 방향이 전부 하나다' 이렇게 돼 있어요?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게 될 때 '나는 저기 이층에 올라갈래. 사다리 가지고 뭘 해? 나는 그냥 올라갈래' 하면 안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그냥 그대로 밟고 올라가야 됩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데 '내 마음대로 가면 돼' 하면 안 됩니다. 외나무다리를 건널 때 조금만 치우치면 넘어집니다. 그럴 때에는 방향을 맞추고 한 발짝이라도 전후 좌우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면도날에 하나의 판자를 딱 올려 놓고 그 판자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한발짝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대번에 뒤뚱거립니다. 또 한 발짝 잘못 디뎌도 곤드라집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걸어가는 행로가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과거를 무시한 현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성현의 가르침이 여기까지 왔다. 요렇게 왔으니까, 지금 오는 중이니까, 이분이 가려고 하던 것이 요것이니까, 거기에 나는 맞춰야 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과거를 살펴야 합니다. 또 언제나 미래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역사와 더불어 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현재와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를 막론하고 중심이 되려고 합니다. 잘났든 못났든 누구든지 '성공해서 내가 중심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를 통합한 하나의 중심선상에 서고 싶다는 말입니다. 각자에게는 그런 하나의 선이 있는데, 그 선이 어떤 사람은 길고 어떤 사람은 짧아서 세계 인구가 60억이면 60억 전부가 다릅니다. 그런 차이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제멋대로 이러한 하나의 선을 중심삼고 '아, 나는 내 인생관대로 간다' 해서 별의별 각도의 금을 다 긋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 역사가 원하는 길, 현재가 원하는 길, 미래가 원하는 길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보면, 사정이나 인연에 얽매여 살고 있고, 또 관계를 지어 가지고 모든 것이 이루어져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필요로 하는 사정이나 인연의 내용을 통틀어 보게 될 때, 이것을 어디에 맞춰야 되겠느냐? '아, 나는 오늘 무슨 일이 있어. 그 일에다 맞춰야 돼. 뜻이고 뭣이고, 일에다 맞춰야 돼'라고 하면 그것은 벌써 펑크가 납니다. 어디 가서 한 대 들이맞게 됩니다. 역사시대의 방향과 반대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반대에 해당하는 보응이 즉각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분 나쁘다고 말을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자기 나름의 방향입니다. 자기 나름의 삶입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말을 하게 될 때는 반드시 역사와 맞춰 해야 됩니다. 과거와 맞춰 해야 하고, 미래와 맞춰 해야 합니다. (68-214, 73.8.1)
  
  
끝날의 목적을 향해 오늘의 방향을 맞추어 나가야
  
개인의 미래보다도 가정의 미래가 멉니다. 개인의 완성시대, 이상시대가 온 다음에 가정의 이상시대가 오게 돼 있습니다. 가정의 이상보다도 종족의 이상시대는 더 멉니다. 종족보다도 민족, 민족보다도 국가, 국가보다도 세계, 세계보다도 하나님의 이상세계가 멀리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맨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클수록 나중에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끝날을 표방해 거기에 맞추려고 합니다. 종교의 모든 내용을 가만히 보면, 전부 말세에 적합한 완성을 표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불신자(不信者)들이 종교를 보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종교인들은 그것을 참 멋지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끝에다 방향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끝점과 맞추려고 합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 자기 멋대로 가는 사람들, 혹은 가정적 목적을 중심삼고 가는 사람들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들은 가정적 목적이나 국가적 목적을 가지고 뺑뺑 돌고 있지만, 종교인들은 비록 틀린 길일지라도 종착점을 바라보고, 나중을 바라보며 갑니다. 
그러한 역사성을 지닌 종교는 역사가 깁니다. 민족의 역사보다 깁니다. 우리 가정의 살림살이보다도 긴 역사의 내용과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개인들이 가는 것보다 긴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도 그러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다리를 놓아 가려 할 때, 이런 길이 있으면 이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섭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대목적을 향해서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인물이 있으면 그 인물은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것이요, 그런 사상이 있으면 역사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상이 될 것입니다. 그 사상권내에서 나라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개인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가정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국가가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요, 세계가 움직일 수 있는 권도 거기서 벌어집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거기에 세계가 움직일 것 같습니까? 우리 가정 속에 세계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먼 거리의 목표를 향해서 오늘의 방향을 맞추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역사를 사랑하고, 미래를 사랑하고, 현재를 승리로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끝날을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성공을 바라더라도 당장에, 젊은 시절에 성공해 가지고 좋아하겠다는 사람은 소인이 됩니다. 일생을 거쳐, 일대를 다 투입해서 성공했다면 그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뜻이 있는 사람은 일대가 아니라 몇십 대를 거쳐서 내 일대에 안 되면 후대 몇십 대, 혹은 몇천 대를 통해서라도 이 뜻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몇천 대가 틀림없이 그 방향을 통해 나간 종족이 있다면, 또 그런 민족이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집약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추천해서라도 그런 종족과 민족을 통해서 세계사적인 완성의 뜻을 세울 것입니다. (68-216, 73.8.1)
  
  
인과응보의 역사에 따라 섭리의 계대가 이루어진다
  
오늘 현재라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기분 좋게 출발했다가 나가자마자 돌변지사를 만날 수도 있고, 생각지도 않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알던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다가 만나서 인연된 사람과 주고받고 행동한 것이 자기 일대에 치명적인 비운을 가져다줄 수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약속 때문에 어느 누구를 만날 경우 그 길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지사가 아닙니다. 
장구한 역사를 두고 보면 오늘 현재에는 관계가 없지만 역사시대의 조상으로부터 관계가 있어, 내 시대에 탕감의 결과를 맺으려는 인과응보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 앞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그를 순간으로 만나 내 일생을 파탄시킨다 하더라도, 나를 죽인다 하더라도죽는 그 시간에 내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칼침을 맞아서 죽는 최후의 운명길에 서더라도 내가 죽는 순간에 어떤 방향을 가지고 죽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욕심을 가지고 죽는 날에는 함정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인류를 위하는 공적인 욕심을 가지고 죽으면, 그의 대를 이어 그 방향을 따라갈 사람이 기필코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한 선조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후손이 반드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런 선조를 통해 이 시대에 태어난 현재의 씨족은 그들이 관계맺을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이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향을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배턴을 이어받아 방향을 가려가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했으면 그 사람을 중심삼고 대를 이어야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그러한 사명을 책임져 대를 이어가다가 그 아들딸이 다시 그 대를 이어갈 수 있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 아들딸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에게 아들딸이 없고, 있다고 해도 대를 이을 수 있는 아들딸이 안 됐을 때는 할 수 없이 그 친척 가운데서 대를 이을 사람을 찾는 것이며, 만약 친척 가운데도 없을 때는 그 동네의 일족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돈의 팔촌까지 연결시킬 것입니다. 문씨네 가문이면 박씨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고, 김씨 할머니가 있을 수도 있고, 허씨 아주머니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관계되어 있는 혈족이 그것을 이어받지 못하게 될 때는 그 친척 가운데서, 친척 가운데도 없을 때는 그 동네 사람 가운데서 그것을 이어받을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네 사람이 복받는 것입니다.
통일교회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통일교회를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가 다 망하고 통일교회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어 '통일교회가 다 망했는데 어디 떨거지라도 있는가 헤쳐 보자' 했을 때, 반대하던 사람을 보고 좋다고 할 수 있게 되면 그 사람이 대를 잇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얄궂은 것입니다. (68-217, 73.8.1)
  
  
현재의 위치를 확정짓지 않고는 안심하고 갈 수 없다
  
우리 일생을 함부로 보낼 수 없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 하는 각도를 측정해야 됩니다. 탐색반이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탐색하러 갈 때는 반드시 경도 몇 도, 위도 몇 도 이렇게 각도를 재면서 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납니다. 그 방향을 몰랐다간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생도 각도를 측정해 가지고 몇 도 올라가고, 몇 도 내려가고, 몇 도 좌우로 간다는 것을 가릴 수 있는 현재의 위치를 확정짓지 앉고는 안심하고 갈 수 없습니다. 나는 좋다고 가더라도 즉각적으로 눈앞에 파탄될 운명이 다가오는데 안심이 됩니까?
사람들은 인생은 무엇이냐, 인생은 어떻게 태어났느냐, 인생이 가는 행로가 어디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결론지어서 '인생행로는 고해다'라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해지만 알고 가는 고해면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가는 고해일 때는 안심하고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안심하고 시집 장가를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일체의 내용을 다시 규탄․규명해야 되겠습니다. 규탄․규명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의의 인생행로로 적응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깜깜한 밤중에 방향도 모르고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가면 갈수록 가망이 없는 자리에서 가만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 누구를 부르는가, 죽음을 향해서 비약을 하든가 초월을 하든가 해야 할 것입니다. 가망이 없으면 돌이켜 뒤로 돌아오든가, 출발을 다시 하든가 하는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 인생행로이기 때문에 과거의 수많은 뜻 있는 사람들, 성현현철들은 그런 일을 하기에 생애를 바치고 죽음의 경계선을 왕래하면서 싸웠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싸울 사람들이 나타날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행로를 지나가는 것이 인생살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마음껏 앉아 가지고 이러고저러할 여유가 없습니다. 심각한 일입니다. 
내가 통일교회의 선생님이지만, 선생님이 가는 길에 무슨 금을 그어 놨습니까? 그 길을 전부 더듬어 가야 합니다. 한번 '이렇게 간다!' 생각하고 갔다간 엄청난 결과가 벌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반드시 과거와 조정을 하고 현재와 조정을 해서 미래에 직선 방향을 그려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역사적인 모든 위험이 동반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복귀섭리역사 노정에 비참상이 있었다면 그 비참상이 재현되어 가지고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극복해 넘어가지 않고는 미래의 목적점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험천만한 개척의 행로를 더듬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언제 한 가정을 책임졌다고 생각해 봤습니까? '내 가정은 틀림없이 이 세계의 인류가 갈 수 있는 표본적인 가정으로 가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무렇게나 흘러가고 되는 대로 살지' 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분을 찾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담판을 하고 그분과 더불어 해결점을 지어, 오늘의 내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가, 현실을 확정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현실을 떠난 자리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미래의 행복이 아닙니다. 현실의 보장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현실이 과거의 결실로서 등장하는 행복의 기점이 되어야지, 과거의 결실이 아닌 현실은 이상적인 기점이었던 과거까지 부정할 수 있는 내용에 부딪히게 합니다. (68-219, 73.8.1)
  
  
조정은 역사적 표준점인 현실에서만 가능
  
역사의 결실을 현재에서 타진해야 합니다. 미래의 새로운 기원과 출발을 다짐해야 할 자리, 그러한 내용을 결정지어서 전진해야 할 자리가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현실은 역사적 표준점입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바랐던 역사적인 표준점이 돼야 합니다. 거기에는 직선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부터 사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미래와 과거는 연관성이 없습니다. 과거는 미래의 사회를 횡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습니다. 또 미래는 과거의 모든 때가 횡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부 다 점입니다. 나에게 전부 그 목적점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로부터 목적점을 지향해 확대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내일의 희망이 더더욱 크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조정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가능합니다. 미래에 가서는 조정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조정했다는 것도 안 됩니다. 언제나 현실입니다.과거와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거기서 한 발짝만 틀리게 되면, 자기 개인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족이 망합니다.
예수님이 4천년의 유대교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해 왔을 때, 4천년 역사의 방향은 예수님에게 집약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초점이 틀려졌기 때문에 4천년 역사는 완전히 나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직행해야 할 텐데 난데없이 영적으로 갔습니다. 영육이 갈라졌으니까 영계에 올라가서 다시 내려와서 그것을 묶어 놔야 됩니다. 거기에는 탕감이 벌어집니다. 너무 올라가서 그걸 끌어내리니 공연한 소모가 벌어지고 탕감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68-221, 73.8.1)
  
  
역사와 인류를 대표한 나는 역사적 결실을 이루어야
  
내가 기쁘다고 '허허허' 웃는다고 해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우리는 행복하다' 해도 그 웃음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 행복이 미래와 관계를 지을 수 있는지, 내일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는지를 모르면 그건 행복이 아닙니다. 더 큰 화가 벌어집니다. 혼자 같으면 단축이나 하지요. 만약 혼자 망하게 되면 자기 혼자 망하겠다고 결심해서 혼자 망하면 되지만, 가정이 망하게 되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자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고, 아내 혹은 남편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걸 보아야 되니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통일교회의 탕감복귀라는 말이 참 고마운 말입니다. 탕감복귀하려면 과거에 실패했던 것을 그대로 현재에 전개하되 그보다 나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방향이 설정 안 됩니다. 그보다 못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조금 나으면 조금 나은 것만큼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역사상의 위인들의 업적을 현재의 우리는 이어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4대 성인이 남긴 공적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이 갈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을 인류를 대표해서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표준이 멀었습니다. 개인이 가고, 종족이 가고, 국가가 가고, 세계가 가야 한다는 그 표준이 막연하지만 동쪽 방향이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동쪽 방향으로 영점조정은 안 됐지만, 조금 기울어지든가, 조금 오른쪽으로 가든가 해서 치우치긴 치우쳤지만 동쪽으로 가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인들은 다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자기 혼자 간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적 관과 일치될 수 있는 목적을 그려 갔기 때문에, 거기에는 역사적인 인류가 동원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면 기독교의 나날이 있습니다. 혹은 기독교로서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왼쪽으로 치우쳤느냐 오른쪽으로 치우쳤느냐 하는 걸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을 그냥 따라가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맞추려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예수님이 바라던 소원 기준과 일치되지 않으면 기독교는 몰락해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터전을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할 수 없이 몰락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일치점을 확정지을 수 있는 현실에서 미래의 일치점이 출발할 수 있는 오늘의 현실적 기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동강나 내 마음과 몸뚱이처럼 엇갈리면 안 됩니다. 직선을 그어야 하는 운명권내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이 이러한 점에 놓여 있는데 '나'라는 현실적 중심존재를 들고 나서서 한 시대만 보고 사는 사람은 가장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방으로 가더라도 깨져 나갑니다.
오늘 '나'라는 것을 들고 나오려면 역사를 대표한 내가 돼야 합니다. '나'라는 현실의 기반은 역사의 표준점이기 때문에, 역사의 초점을 대표했기 때문에, 역사의 대표의 결실입니다. 따라서 내 개인을 중심삼고도 그러하지만, 우리 나라와 우리 민족은 물론이요, 인류를 대표한 자리에서 내가 역사적 결실의 자리에 섰다고 할 수 있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대표의 자리에 섰다 할 수 있다면 그는 역사적 첨단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계사적인 첨단에 선 대표적인 '나'다 하는 자각을 하는 것이 가치 설정의 한 기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함부로 되어서는 가치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역사시대를 대표한 '나'라 할 때, 과거의 역사보다도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빛나는 가치를 플러스시킬 수 있는 '나'일 때는 나를 통해서 발전적인 미래가 계승되지만, 역사시대보다 못한 '나'일 때는 그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던 이상을 현실적인 이상관으로 가져라!' 하는 것은 타당한 결론입니다. 통일교회를 믿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선생이 갖고 있는 관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책임질 수 있는 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죽더라도 통일교회는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선생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끊어지고 맙니다.
그런 입장을 조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푸줏간에 가면 평저울로 고기 무게를 잽니다. 평저울을 보면 가운데 왔다갔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물건을 놓으면 무게에 따라 움직입니다. 거기에 평점, 조정점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실은 조정점입니다. 딴 데서 맞추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와 같이 돼 있는 것이 인생의 노정을 걸어가는 현재의 입장이요, 현실의 입장이요, 순간의 입장입니다. 이 순간에 잘못하면 사탄편이 될 수 있고, 잘하면 하늘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역사시대를 거쳐 나오면서도 완성의 한 때를 맞지 못한 것은 현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조상들이 실패한 것은 그 어떤 현실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순간에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68-222, 73.8.1)
  
  
현재란 역사의 결실점, 시대의 중심점, 미래의 출발점이다
  
오늘 우리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한 시대의 자리가 아닙니다. 3시대를 연결하고 있습니다. 과거를 대표한 자리요, 미래를 연결하는 자리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자리는 과거를 대표하고, 현재에는 이 세계가 들어가 있습니다. 
현재는 인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라는 것은 과거의 세계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요, 이 세계를 대표한 중심점입니다. 여기에 가정을 대표한 중심점을 맞추었으면, 또 국가 중심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국가의 중심점을 맞추었으면, 또 세계의 중심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애당초 세계를 위한 중심점을 맞추어 놓으면 딴 것은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개인도 맞았고, 가정도 맞았고, 국가도 맞았고, 다 맞았기 때문에 그대로 가면 됩니다.
현재라는 것은 세계의 중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고 무엇이고 내 가정의 중심점이어야지' 이러면 안 됩니다. 통일교회의 중심점에 맞추어야지 그러지 않으면 통일교회는 망합니다. 통일교회 중심점은 못 되더라도 세계 인류를 대표한 세계적인 중심점에 맞추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게 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고생을 하고 매일같이 희생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희생이나 고생이 아니라 죽는 일이 있더라도 가야 합니다. 그렇게 내모는 것이 정당한 지도방법입니다. 빠르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당한 지도방법입니다. 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또 현실은 역사의 결실점이요, 시대의 중심점이요,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현실은 미래에 대한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암만 잘했더라도 여기서 내가 한마디 잘못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무서운 것입니다. 3시대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입니다. 실패의 원흉이 도사리고 있는 자리요, 3시대의 사탄의 화살이 집중된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이런 점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네가 역사적인 대표의 자리에 섰느냐 할 때 못 섰다 하면 '야, 이놈아!' 합니다. 지옥 뚜껑을 열고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현실적인 중심존재로 섰느냐 할 때, 못 섰다면 지옥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들어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은 복귀될 수 없습니다. 복귀완성의 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완성의 인을 찍는 자리는 한 자리입니다. 미래의 출발점이 없게 되면, 천국이상이고 무엇이고 없습니다. (68-225, 73.8.1)
  
  
현실이란 삼시대를 위한 책임을 해야 할 중심점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아, 선조들이 나를 맞추고 있구나!' 이러면서 잘 맞춰 나가면 선조들의 길이 고속도로처럼 열립니다. 굴을 뚫으려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곳에 고속도로가 있으면 전부 고속도로로 가지요? 그러니까 그곳이 현실의 중심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미래의 출발점입니다. 거기서부터 희망의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는 가도 가도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시대를 위한 책임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에 있습니다. 내가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쉬고 손을 올리고 다리로 걷고 할 때는 눈과 손과 발을 주시해야 합니다. 반드시 역사의 방향에 맞추어서 눈을 깜박거리고 숨을 쉬고 손을 올리고 다리로 걸어야 합니다. 이처럼 역사관을 갖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통일교회 목적관은 뚜렷합니다. 개인복귀 완성, 가정복귀 완성, 종족복귀 완성, 민족복귀 완성, 국가복귀 완성, 세계복귀 완성, 천주복귀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해방은 물론 사랑문제까지 딱 결론지어 놓았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무정한 길입니다. 동정도 없고 의리도 없는 길입니다. 틀리면 용서가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공법에 어긋나게 되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그 나라의 암적인 존재로 남습니다. 역사적 규탄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 잘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역사를 두고 미래를 두고 3시대를 거쳐서 평가하게 돼 있습니다. 성인이나 의인도 지나고 나야 안다는 말도 그런 뜻입니다. 그때는 모릅니다.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밥 먹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요, 활동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인데, 지나고 보니까 역사적 방향에 맞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성인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범인(凡人)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에 대조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역사를 대표한 자리에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인류가 가야 할 중심적인 자리를 올바로 깨끗이 닦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느냐? 미래의 후손들 앞에 십자가라든가 수난길을 안 남기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느냐? 자식들은 다 곱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 우리 아들딸!' 하는데, 그럴 거 없습니다. 우리 아들딸도 울타리 밖의 호랑이 앞에 집어던져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못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이나 낮이나 역사의 방향에 맞추어 가야 합니다. 통일교회도 잘못 맞추는 날에는 깨지게 됩니다. 국가 기준을 넘어설 때까지 잘못 맞추어 가게 되면 비운에 사라집니다. 여러분을 지도하는 선생님도 현재의 입장보다도 내일의 개척자의 입장에서, 현재의 자리에서 기준을 맞추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앞선 자리에서 현재의 기준을 조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자리에 속해 있는 여러분은 조정하지 않더라도 과거를 보장할 수 있고, 현재를 보장할 수 있고, 미래에 치우치지 않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앞서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내린 방향 설정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맞춰 오라고 타이어를 바꾸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이게 뭐야, 이게?' 하는 것은 망조입니다. 그건 망할 종자밖에 안 됩니다. 망해야 됩니다. 안 망한다고 보장하더라도 그때는 하늘이 뭉텅 길을 막아 버리게 됩니다. 그러한 길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운명에도 엄연히 현실과 관계를 맺고 뒤넘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잘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라! 현실이라는 것은 3시대를 결정지어야 할 중심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밥 숟가락 한 번 드는 것이 패자의 서러운 길을 가게 할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는 거기에서 망운의 징조가 싹틀 수도 있고, 하루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일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자기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도 용서 못 합니다. 자기가 풀고 시정하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68-226, 7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