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사랑이야기 - 제 5권 구원 역사편 - 제 4장 구원섭리와 나)

철장왕 | 20181012103003

2. 나와 하나되시려는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죽인 죄인
  
타락 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비극의 역사를 엮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비극입니다. 희극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극의 프로가 연속되어 온 역사, 비극의 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비극의 자리에서 누가 쓰러지고 누가 통곡했는가? 하나님입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고,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대신 쓰러졌습니다. 이것이 모두 '나'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영화를 본다 할진대 통곡 안 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만민의 아버지로 이 땅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잡아죽였습니다. 우리는 살인강도보다 더한 악당들의 후손입니다.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오셨습니다. 첫아담이 타락했으니 다시 완성한 아담격으로, 인류의 참아버지로 오셨습니다. 첫아담이 거짓아버지가 되었으니 후아담이 참아버지로 오셔서 만민을 다시 낳아주어야 합니다. 다시 살려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니 구원이니 하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잡아죽였으니 우리는 살인강도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오, 아버지! 저에게는 양심적으로 가책될 일이 없습니다' 하는 수작은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죽인 살인강도란 말입니다. 아무리 목석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알면 그 순간에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만 죽인 것이 아니라 아들도, 종도, 하나님의 모든 사람을 때려잡은 황마적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알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는 옥중에 있을 때 사형수들과 여러 번 같이 있어 보았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자기가 살길이라면 천 사람 만 사람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어요. 그런 것을 바라볼 적마다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역사적으로 헤아려 볼 때, 응당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를 범한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을 구하겠다고 교수대에 나가신 하나님의 황태자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존귀한 분을 반역자로 몰아 잡아죽였으니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심정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세상의 죄인 중에 내가 제일 가는 죄인이라는 자각을 하는 자리에 서야만 하나님의 심정,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범죄자입니다. 찾아오신 아버지를 환영하지 못하고 박대했습니다. 창을 들고 옆구리를 찔렀고,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씌웠고,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버지를 죽인 죄를 뉘우치는 것이 기독교의 도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재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왔다가 죽임당한 일을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합니까? 우리는 그 분함을 잊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 분함을 잊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심정뿐입니다.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심정 외에는 없습니다. 
'너 하나를 찾기 위하여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았으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천만사의 고통도 잊을 수 있다. 너 하나를 찾아온 길이니 너 하나를 찾는 날에는 몇 번의 고비, 몇 번의 억울한 고비도 잊을 수 있다' 하시는 아버지, 얼마나 사무친 심정이기에 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하시겠습니까? 
이에 여러분은 황공하여 눈물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간절하기에 잊을 수 없는 범죄의 사실을 잊어주겠다 하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런 아들딸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목적입니다. (9-208, 60.5.22)
  
  
하나님을 새로이 인식해야 할 때
  
하나님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떨어져 나간 인간들을 붙들고 계십니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천만번 죽여 버리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죽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휘발유를 끼얹고 흔적도 없이 불살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시는 목적은 죄인 된 인간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한 입장에서 지극히 악한 자를 대하여 '심정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환경으로 이념으로 하나가 되어주려므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물을 지어 놓고 잘못했다고 해서 덮어놓고 벌만 주고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심판하기에 앞서 간절한 심정을 지닌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심판한다면 항의한다는 겁니다. 죄만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천만 배 넘고 넘을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심판하기 때문에 인간은 심판을 받아도 항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찾되 의식(儀式)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말씀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동기의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고 타락 이후에 나타난 관계의 하나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선조들을 어떻게 대했고 타락한 후손은 어떻게 대했다 하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하는 것을 막지 못한 하나님의 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 해와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동기를 몰랐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해결지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 일도 그렇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다 할 때 그 동기부터 알아 가지고 해결지어야 후환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다 능통해도 성경 가운데 숨어 있는 동기의 하나님과 과정의 하나님과 결과의 하나님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정의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4천년 동안 천신만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오면서 메시아의 발판을 세우기 위해 얼마나 애썼습니까?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의 하나님을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기를 모르니 확실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기뻐하겠다구요? 안 됩니다. 동기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동기를 거치고 과정을 거쳐서 결과가 나옵니다. 이것은 자연과학의 현상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천리 원칙이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돌연변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질서적입니다. 동기를 중심삼고 원리 원칙적인 과정을 거쳐서 실체적인 목적체가 형성되는 세계가 창조이상세계입니다. 마음의 굳은 각오 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까? 마음의 동기를 중심삼고 환경을 개척하고 변함없이 그것을 밀고 나가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개인이 성공하는 데도 그렇거늘 대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목적을 이루는 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적인 하나님 말고 창조적인 하나님을 찾아보았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 말고 창조의 동기를 가졌던 하나님, 심판 받아야 할 세계를 놓고 섭리하는 하나님 말고 심판한 후에 모든 인류를 품고 영광 가운데 만민과 더불어 기쁨과 행복으로 사셔야 할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한 사람이 성공하는 데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과거도 천리 원칙과 그 원천이 같아야만 그것이 역사적인 전통으로 세워지고, 또 그 사람의 행적을 역사와 더불어 미래까지 자랑할 수 있지, 그 동기에서 탈선할 때는 어느 시기에 가서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바로 동기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역사과정에서 타락되어 있는 우리를 동기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주셨고, 미래의 심정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랐으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6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간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은 창조 당시부터 인간을 아들딸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천리법도를 세웠기에, 이 피조세계를 깨뜨려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깨진 것을 다시 붙이고자 하는 것이 구원섭리입니다. 구멍이 뚫어지고 깨진 것을 땜 때워야 된다는 말입니다. 때우는 데는 동기로부터 과정을 거쳐 목적하던 바의 완결체로서 인연을 맺어 때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온 우주 피조만상 앞에 완성품이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치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재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재각성해야 되겠습니다. 더욱이 청년들은 단단한 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역사노정에서 우리는 싸워서 승리해야 합니다. 종교의 길을 가고 있는 여러분은 '무엇인가에 이용당하고 있구나' 하고 느껴 보았습니까? 그것을 절절히 느껴 보았습니까? 내가 오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교파에게 이용당하고 있느냐, 역사 앞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세워진 어떠한 신학체계에 이용당하고 있느냐? 어느 것이냐? 해명해야 됩니다. 이것을 해명해 놓은 책자를 못 보았습니다. 이것을 해명하기 위하여 울부짖는 어떠한 학자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민족은 세상적으로는 세계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소망의 조건이 하나도 없는 처량하고 불쌍한 민족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계가 몰각(沒覺)된 자리에서 잠들어 있는 이때 우리 민족이 재각성하는 것입니다. 역사를 재감정하고, 시대를 재감정하고, 신앙을 재감정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사람이나 어떠한 기관이나 교파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할 수 있으되 하나님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은 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세계의 어떤 욕망을 걸고 나오는 것에 이용당하면 망하지만, 세상에서 몰리고 땅에서 배척받아도 하늘에게 이용당하면 망하는 것 같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뜻있는 청년들이라면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냉철히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한 때에는 자기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도 비판해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9-226, 60.5.29)
  
  
인간의 타락으로 부자유하게 되신 하나님
  
예수님 이후에 움직여 나온 하나님을 알기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왔습니다. 예수님을 보내게 될 때 예수님과 더불어 오시던 하나님, 예수님은 갔을망정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계시던 하나님,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을망정 그 인간을 버리지 못하고 후손까지도 붙들고 나오는 하나님을 여러분은 생각해 봤습니까? 이것을 해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 할진대 신부 될 꿈도 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의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의 말도 무조건 믿으라는 게 아닙니다. 이치에 타당하고 마음에 혁신적이고 극단적인 무엇이 닿아, 지금의 나를 깨뜨려 버리고 새로운 무엇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 그것을 잡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런 경지를 통과해야 됩니다. 
우리는 빚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붙들고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노력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보답하려면 세계 인류를 한꺼번에 제물로 드려도 갚을 수 없습니다. 심정에 못이 박히면서도 수고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지한 인간들을 대해 섭리해 나오는데 동기와 과정과 목적을 가지고 대해주셨습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이 의인을 대하여 명령하신 내용의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은 그 일의 몇천 배 과정을 지내고 나서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차마 성경을 보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을 대하여 이렇게 하라 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몇백 번 통과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쯤 해보고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몇백 번 몇천 번 해보고 나서 하라는 것입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면 이러이러한 것을 보장하겠다는 기준을 세워 놓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대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 죽으라 한 것도 하나님이 죽음의 고충을 거치고 난 후에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만인이 고통 가운데 있는데도 영광이나 받고 보좌에 앉아서 호령하는 하나님이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이 참소 못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정적인 애달픔이 사탄세계의 모든 것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천리 원칙과 영원한 심정을 가졌기에 사탄이 참소 못 하는 것입니다. 원리는 깨뜨리지 못합니다. 불가침입니다. 하나님은 원리적인 심정으로 타락한 인간을 오늘날까지 품고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타락한 종족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타락한 종족의 아버지입니다. 만유의 아버지입니다. 한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감옥에 끌려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오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로운 하나님으로 알고 있지만, 그 마음에는 어찌하려야 어찌할 수 없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하루와 같이 아들의 죽음과 아들의 쓰라림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따라나오신 하나님입니다.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타락한 조상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당신이 불쌍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자식 된 마음이 복받쳐 올라 이렇게 호소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창에 갇히어 찢기고 꺾인 아버지를 붙들고 '아버지,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 되신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하고 통곡하는 아들딸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모든 사람은 멋대로 가고 시대는 흘러가도 하나님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일편단심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사태가 복잡하고 환경이 복잡할수록 하나님은 더 걱정하십니다. 6천년 전에는 우리의 선조 개인을 대해서 애달파했으나, 세계 인류가 사망의 늪에서 허덕이는 이때는 제일 처량한 심정을 갖고 애달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불효 막심한 자들입니다. (9-229, 60.5.29)
  
  
구원섭리를 해 나오시는 하나님의 심정
  
한 나라의 군왕을 반대하면 역적이라고 하였고, 한 부모를 반대하면 불효자라고 하였는데, 만주(萬主)의 주(主)요 온 우주의 아버지를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의 역적이 되었고 몇 번의 불효자가 되었습니까? 각자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기에 도의 길을 가면 갈수록 옷을 벗어 치우고, 그래도 부족하여 칼로 몸을 찢고, 목을 교수대에 내어놓아도 부족하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빚진 아들이 가져야 할 심정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딴 사람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만민 앞에 나타날 때는 늠름한 모습이었지만, 홀로 있을 때는 역사적인 깊은 눈물을 흘리신 분입니다. 슬픈 눈물을 흘리신 주인공입니다. 눈물 흘리는 데도 왕자입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을 누가 알았습니까?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통일교회 신도들에게 원하는 것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 말고, 삼위신으로 지칭된 하나님 말고 그 이전 동기의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 기쁨의 자리를 피했습니다. 스스로 자기의 집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아버지를 대하여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환경이요, 아버지를 알아드리고 싶어도 알아드릴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싫어서 예수님이 산중 적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한 줄 압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붙안고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며 같이 울고 싶은 심정에 사무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아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선조의 혈육을 받았다면, 이 세포 하나 하나까지에도 저끄러진 죄상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신이 뭐 어떻고 어떻다 해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역사적인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우리들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네 아버지이고 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 하는 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죄인 된 자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엔 소망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이것을 믿음․소망․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良善),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아홉 가지 열매의 골자는 사랑과 인내와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들춰보면 뜻을 두고 인간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을 구하여 아들을 만들어 가지고 그 아들에게 하늘땅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옵니다.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주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다시 그 자리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을 갖고 찾아왔고, 그런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야 이놈아, 왜 죄를 지었느냐?'라고만 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지은 사정을 잘 아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사정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사정을 알아주려는 하나님입니다. 슬픈 자에게는 슬픈 사정을 갖고 찾아왔고, 고통받는 자에게는 고통의 사정을 갖고 찾아왔고, 억울하고 분통한 자에게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어느 정도 사정을 통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환경 가운데도 그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너는 나를 배반해도 나는 네 아버지다' 하는 마음이 있기에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은 '너자 나요, 나자 너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 하셨습니다. 목적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되느냐? 심정으로 하나되고 사정으로 하나되고 소망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은 찾아오는 것입니다. (9-231, 60.5.29)
  
  
하나님의 최후의 목적
  
현재 수십억의 인간들이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소원입니까? 천만부당한 생각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죄악에 썩은 몸뚱이를 천당 보내는 하나님이라면 모순된 하나님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천당 보내는 그런 천리 원칙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천당에 간 사람은 없습니다. 기껏 낙원밖에는 못 가 있습니다. 
하나된 자와 행복하게 살고 하나된 자와 더불어 영원무궁토록 천상천하를 움직이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된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교를 잘하고 무엇을 어떻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하나되지 않으면 모두가 가짜입니다. 사실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가짜들보다 못하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성경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분의 사정과 내 사정이 하나되고, 그분의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내 마음도 향하고, 그분이 품은 심정을 내가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된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의 싸움은 인간끼리 하나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 하나되기 위한 싸움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수없이 비참한 혈투극을 빚어 나왔지만,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기 위한 싸움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공의의 심판주로 나타나게 될 때,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이냐? '나는 너를 위하여 심정을 다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얼마나 심정을 다했느냐? 나는 너의 사정을 다 알아주었는데 너는 내 사정을 얼마나 알았느냐? 나는 너를 위하여 죽자 살자 했는데 너는 내 뜻을 얼마나 생각했느냐?' 하실 것입니다. 이것으로 문제를 해결짓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이러이러한 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한 조각 먹었으니 지옥 간다' 하는 식으로 안 되어 있습니다. 심정의 세계는 법도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공의의 심판대에 서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법정에 한번 가보십시오. 세상 법정에도 판사가 있고, 검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죄수가 있습니다. 공의의 심판대도 그와 같은 모양입니다. 검사와 같은 사탄이 여러분을 참소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변호사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 그것을 변명해주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6천년의 죄악사를 가져온 인간이기에 변명하려야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지른 죄상이 너무나 큽니다. 사탄한테 걸릴 조건뿐입니다. 
이것을 청산해주기 위한 한 사람이 나와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나라에 가서 그걸 놓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까짓 땅에서 몇몇이 쓰러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륜의 대도(大道)를 세우는 것을 걱정하시는 주님입니다. 여러분 하나쯤 지옥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망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개인의 것이요 천륜의 대도는 만인간의 것이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대도는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나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정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이냐를 알아 가지고 하나님이 제일 슬펐던 하나를 붙들고 일생 동안 울어 보십시오. 그러면 천당 갑니다. 다른 무엇이 어떻고 어떻고 해도 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억울한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슬픈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기쁜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니 기쁜 일이 없습니다. 슬픔뿐입니다. 배척받고 몰림받았으니 기쁜 때가 있었겠습니까? 아버지의 일 가운데 제일 슬펐던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해결하면 되는 것입니다. 친구도 상대방의 슬픔을 알아 가지고 심정을 통해야만 진짜 친구입니다. 효자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입장에서 될 수 없습니다. 충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걸어나온 골수가 어떤지 알아야 합니다. (9-233, 60.5.29)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시는 재림주님
  
하나님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품고 인간을 대해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심정을 1백 퍼센트 알았고, 사정을 1 백퍼센트 알았고, 소망을 1백 퍼센트 알았지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정입니다. 왜 할 수 없었느냐? 그것을 말해 버리면 사탄이 먼저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가 아직 미숙한 어린아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아들에게 무슨 보물이 여기 있고 무슨 보물은 저기 있다고 하면서, 주인을 배반한 종이나 그의 원수가 있는 데서 상속해준다면 그들이 아들이 가지도록 가만 두겠습니까? 사탄이 그런 입장입니다. 하나님이 다 말해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하기 전에 사탄이 먼저 알고 다 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과 떨어져 있습니다. 이 땅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이 땅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는 원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아들딸에게 명령한 일을 아들딸이 하기 전에 원수들이 알아 가지고 먼저 해 버린 후 그것을 가지고 요구하면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공의의 법도를 가졌기에 할 수 없습니다. 원수가 했더라도 그것이 하라는 명령에 부합되면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비사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난문제를 붙들고 '아버지여,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고 기도하게 될 때 선생님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여, 당신은 어찌하여 만민을 구원해야 할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하고 호소하면, 하나님은 '네 사정보다 더 딱한 나의 사정이 있노라'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뻔뻔합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구요? 뻔뻔합니다. 여러분과 하나되려는 아버지를 모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와 하나되기 위하여 싸운 적이 있습니까? 한 번도 없다 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뜻으로 하나되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러면 4천년 동안 준비한 너희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기를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 시대에는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세계의 중심, 즉 제사장 왕국이 된다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소망을 갖고 나가는 이들 앞에 하나님은 또 사정을 갖고 찾아왔습니다. 사정은 예수님이 갖고 오셨습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변호해주러 오신 것입니다. 사정을 변호하는 일이 끝나면 심정을 규합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재림주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 표준은 사랑입니다. 맨 나중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은 심정과 사정과 소망, 이 모든 것을 모르는 자리에 있습니다. 백판 천치입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정을 갖고 하나에서부터 세계까지 전 역사를 이끌고 나와 맨 나중에는 아버지로서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때를 만들어 놓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종을 보내서 소망을 품게 하고, 신약시대에는 아들을 보내서 사정을 통하게 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아버지의 심정을 갖고 오십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셔서 심정의 기준을 세우게 되는 때가 끝날입니다. 심정의 조건을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에까지 세운 다음에는 그것을 만우주 앞에 공포해야 됩니다. '너는 나의 영원불변의 아들딸이다' 하는 식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어린양 잔치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끝날에 소망을 품고 인내하라고 했습니다. 천상의 대도(大道)를 깨뜨릴까봐 참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스데반 혹은 12사도를 보십시오. 찢기고 별의별 짓을 다 당했지만 참았습니다. 소망의 한 날을 바라보며 참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선조였습니다.
'소망을 갖고 참아라. 내일을 걸어 놓고 참아라. 사정을 알려면 충성을 다하라. 너를 위하여 주께서 이렇게 죽었으니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이 기독교정신입니다. 충성이 무엇입니까? '충(忠)' 자는 중심의 마음입니다. '가운데 중(中)' 자에 '마음 심(心)' 자이고, '성(誠)' 자는 말씀(言)을 이루었다(成)는 뜻입니다. 하늘 앞에는 변명이 없습니다. 죽으라면 죽어야 됩니다. 솜을 한 짐 지고 불에 들어가라면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9-235, 60.5.29)
  
  
혼돈된 세상을 사랑으로 수습하시려는 하나님
  
'사랑하라. 충성하라. 간절하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내 심정의 임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줄 자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그분이 안 왔으니, 올 때까지 예수님과 성신은 눈물지으면서 '아버님, 참는 아들딸을 긍휼히 보시옵소서. 충성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심정을 기울여 사모하는 아들딸을 기억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 인연을 역사적으로 수습할 때까지 심정의 짐을 지고 나오는 분이 예수님과 성신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때가 오면 하나되기 위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야곱의 가정, 모세의 민족, 예수님의 세계, 온 천주까지 하나 만들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 피조세계를 하나 만들기 위하여 찾아오는 하나님이기에 역사도 하나의 세계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견지에서 오늘날을 이구동성으로 끝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금방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습니다. 판결은 선과 악, 최고의 둘이 서로 상반되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건 역사적인 싸움입니다. 보십시오. 역사를 들추어보면,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 가인 아벨을 세워 타락한 아담 해와의 가정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수습하는 데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한 심정, 사랑을 통한 사정, 사랑을 통한 이념이라는 겁니다. 즉 심정을 통한 사랑이요, 심정을 통한 사정이요, 심정을 통한 이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아담 해와 대신 가인 아벨을 찾았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사랑하라는 겁니다. 접붙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접붙이는 놀음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로 귀결되어야 할 텐데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전쟁역사는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9-237, 60.5.29)
  
  
중심인물들을 통한 섭리역사
  
지금까지의 역사는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하는 역사였습니다. 악이 먼저 선을 치는 역사였습니다. 보편적으로 두 사람이 서로 잘났다고 주장할 때 먼저 주장한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80퍼센트는 그렇습니다. 선이 먼저 악을 치는 법이 없습니다. 한국 역사를 봐도 간신이 충신을 쳤지 충신이 간신을 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싸움은 아담 가정에서부터 벌어졌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한테 접붙여야 했습니다. 절대복종하라 이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배반한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온 우주를 주관하라는 축복을 해주었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핏줄이 다른 두 인연이 생겼기에 이 법도를 따라 세계는 두 각도로 벌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을 찾아 세운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벨을 세웠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아벨이 죽었기 때문에 그 대(代)를 이어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실체로서 한 사람을 찾아 세운 것이 심정과 사정과 소망을 대신할 수 있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만천하의 인류는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아브라함한테 전부 복종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 굴복하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세워 놓고 아브라함 가정부터 아브라함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하나 안 되면 원수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했는데, 안 받는 사람은 전부 원수인 것입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의 말에 절대복종해야 됩니다. 잘났든 못났든 모세에게 모두 접붙여야 되는 것입니다. 접붙이려면 심정이 같아야 되고, 사정이 같아야 되고, 본질적인 소망이 같아야 됩니다. 모세가 죽자 하면 죽겠다는 마음, 살자 하면 살겠다는 마음, 무엇을 하자 하면 하겠다는 마음, 또는 그런 심정을 가지고 사정을 거쳐 소망의 터전까지 뻗어 나갔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4천년 동안 수고하여 택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 심정으로 접붙이려고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망적인 기준까지는 접붙여 놓았으니 사정을 통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정 깊숙이 접붙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정도 못 통하고 갔습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다른 피를 받았으니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골수와 같이 응할 수 있고 화할 수 있고, 너는 나의 피살이라고 할 수 있는 직계의 인연을 맺은 하나의 아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을 세워 놓고 모든 인류는 그 앞에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려면 돌감람나무는 베임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나무가 되려면 세 가지 이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의 예수님을 중심삼은 세 제자, 그 중 어느 누가 못나서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때를 보아 심정 깊은 하늘의 비극을 얘기하려고 했으나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까봐 얘기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장 12절)'고 하였습니다. 불쌍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전체 이념을 세 제자를 통해 나타내려고 했는데 그들이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주권 없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잡아죽인 죄 때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절대 순종하였다면 세계는 벌써 하나님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후계자가 가나안 7족을 쳐서 항복시킨 것과 같이 정복했을 것입니다.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2천년 동안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는 후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했겠습니까? 천만부당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죽였으니 보응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선조의 죄가 3, 4대까지 간다고 했으니 보응을 받아야 됩니다. 그것을 4천년 이내에 탕감해야 됩니다. 모세도 애급에서 4대 만에 나왔습니다. 모든 것은 천지의 법도를 중심삼고 움직여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나왔지만 심정적으로 사정적으로 소망적으로 하나님과 접붙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역사를 걸어 놓고 대번에 아들로 대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하여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래 창조이념에 하나님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종들을 시켜서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종의 자리에 떨어졌으니, 거기에서 싸워 이기면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아들의 입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역사해 나오십니다. 꺾어서 접을 붙여야 되는데, 이 심정을 접붙이기 위한 것이 재림역사입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하는 간절한 심정이 천상과 지상을 꿰뚫어야 됩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늘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한 때를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하는 것입니다. (9-238, 60.5.29)
  
  
끝날에 아버지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
  
끝날은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정력을 기울여 온 이 땅을 향하여 일격을 가하는 때입니다. 최대의 정성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합하는 때입니다. 아들과 종이 같은 자리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합세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종이 한꺼번에 나오는 그때가 끝날입니다. 아버지도 나왔고 아들도 나왔고 종도 나왔으니 천국 살림을 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담 해와를 자녀로, 천사장을 종으로 지었습니다. 아버지를 중심삼고 아들딸과 종이 평면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세계적인 완결의 때를 향하여 하늘은 지금까지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날에는 '나는 아브라함이다' 하는 사람도 나옵니다. 여러분이 서울 탑골 공원 같은 데 가서 살펴보십시오. 거기서 무슨 말을 하는가. 다 동기가 있는 말입니다.
'나는 바울이다', '나는 예수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무엇이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것은 종과 아들과 아버지가 상봉할 수 있는 세기말적인 때, 총청산을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잎사귀와 가지와 줄기가 한꺼번에 접붙여져서 살아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줄기인 아버지, 가지인 아들, 잎사귀인 종이 한꺼번에 나타납니다. 세계의 사조는 그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심정을 중심삼고 접붙인 사람들을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 끝날의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세계를 맡을 자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민주주의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에 일치하여 접붙여 살아남는 무리들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골자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는 그런 것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오늘날까지는 도인들이 밟혔습니다. 한 때는 상류계급이 출세했고 군벌시대에는 중류계급이 출세했습니다. 지금은 노동자와 농민의 때입니다. 회사 같은 데도 노조가 있어서 노동자들이 행세하고 있습니다. 다 출세하고 다 성공해 봤지만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지지리 못나서 상류계급 사람에게나 중류계급 사람에게나 하류계급 사람에게나 그저 예수쟁이라고 몰림만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망에 접붙인 아들딸이 있게 되면 여기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들이 하늘과 땅을 지배할 것입니다. 도인들이 지배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한 하나님입니다. 그 한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긴 세월을 준비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은 종을 세우고, 아들딸을 세워 아버지로서 그들을 품에 품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역사적인 눈물을 흘리고, 벅찬 소망의 마음, 애달픈 사정의 마음, 처량한 심정을 다 풀어 놓으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품고 딸을 품고 종을 세우는 그 순간 비로소 역사를 돌아보고 '허허!' 웃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사탄아, 네 권세가 어디 있느냐? 악당들아 네 권한이 어디 있느냐? 공의의 심판주 앞에서 물러갈지어다!' 이래야 됩니다.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하여 수고하신 하나님을 끝날에는 한번 알아드려야 합니다. 6천년만에 한 번이라도 알아달라는 하나님입니다. '당신은 저의 아버지요, 저는 당신의 아들딸이옵니다. 이렇게 수고하신 아버지, 황공 망극하옵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신 것을 아옵니다. 옛날에 돌아가신 선조들,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이 수고하신 것도 저 때문이옵니다' 하며 눈물지을 수 있고 몸둘 바를 몰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에게는 심정의 주인공을 모실 수 있는 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립소이다. 사정을 가지고 있는 그 주인의 사정을 모르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당신은 이것을 좋아하십니까? 당신이 좋아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해 보았습니까? '아버지,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 이것 잡수십시오' 하는 마음이 어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이 한국 백성을 구하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소원입니까? 그러면 제가 죽더라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하더라도 이 민족을 구해서 아버지 앞에 바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 인류뿐만 아니라 천상에 가 있는 수천만의 영인(靈人)들까지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참아도 무한히 참아야 되겠고, 사정을 품어도 무한히 품어야 되겠고, 심정을 가져도 무한히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다하면서 이 세계를 향하여 갈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찾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눈물지으며 죄책감과 황공 망극하다는 마음에 사무쳐야 심판의 고개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회개로 시작한 기독교지만 최고의 죄인입니다. 사정을 몰랐고 뜻을 몰랐고 심정을 몰랐던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승리의 그 한 날을 위해서 6천년 동안 하나되기 위해 싸워 나오신 아버지와 아들딸의 인연을 맺고 혹은 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6천년 동안 쌓아온 섭리역사를 이제는 내 대신 너희들이 맡아라. 모든 것을 한꺼번에 청산해 버려라. 목을 자르겠으면 자르고 배를 째겠으면 째라' 하십니다. 하나님이 쳐야 할 것을 우리들이 대신 치고 모든 것을 대신해서 청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심정을 준비하는 기독교인,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는 성도들, 한 날의 소망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하는 기독교입니다. 이제는 심정을 다하고 사정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무엇이 있어야 하나되기 위해 찾아오신 아버지 앞에 나아가서 아들의 인정을 받고 딸의 인정을 받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9-240, 6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