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를 찾아오시는 아버지
천주의 슬픔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영원히 행복을 노래하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못 됩니다. 사회나 가정, 더 좁혀서 나 자신을 두고 볼 때도 내 몸과 마음에 탄식이 남아 있는 것을 여실히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내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내 생활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이리도 저리도 움직일 수 없는 환경 가운데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의 마음 한 모퉁이에서는 이러한 나를 거부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어떠한 무엇을 향하여 나아가라고 수시로 몸을 재촉하는데도 몸은 그런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고 그런 걸음을 걷지 못한다면, 이 이상 더 불행한 일이 없을 것이며, 이 이상 더 마음을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하루 이틀이 아니고 생애를 지나고 역사를 거쳐도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을 어떻게 해결지어야 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해 만민 앞에 공인될 수 있는 승리적인 기준을 세웠다면, 나로부터 새로운 역사, 나로부터 새로운 시대, 나로부터 새로운 행복과 나로부터 새로운 기쁨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나 자신부터 해결지어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의무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어떠한 목적지를 향하여 가라고 사람들의 마음을 재촉하고 충격을 가하는 절대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 것인가? 여러분은 자신의 문제만을 해결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넘고 이 세계를 넘어 지으신 피조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으려 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고 한을 느끼며 살고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있는 친구에게나 형제, 혹은 처자에게 원망도 하고 분풀이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대자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대를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픔과 고통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싸워 나가는 인간의 모습과 세계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싸워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에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있습니다. 내 가슴에 터질 듯한 근심이 있고 수심이 있고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개인적인 고통입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고통에 비할 수 없습니다. (9-193, 60.5.22)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체로 지어진 인간
본래 하나님은 인간을 어떠한 모습으로 지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을 때 슬픔과 고통권내로 쓸어넣기 위해서 지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본래는 기쁨을 느끼도록 지었습니다. 기쁜 마음, 즐거운 심정을 갖춘 모습이 되도록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만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기쁨이 넘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기쁜 마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5일간 만물을 지으신 후 6일째 되는 날 기쁜 심정으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 지은 우리 인류의 조상은 지극히 아름다운 존재요, 지극히 귀한 존재요, 지극히 자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기쁜 존재요,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요, 지극히 사랑하고 싶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 혹은 여러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를 하나하나 헤쳐 보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고, 하나님이 만물 앞에 축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을 더하고 기쁨의 자극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만물을 지었습니다. 순간적인 기쁨을 느끼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대할 적마다 가슴 깊이 스며들어 오는 기쁨의 자극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최고의 심정을 기울여 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담 해와를 이토록 귀한 존재로 지었겠습니까? 심부름시키기 위하여? 아닙니다. 심부름시키기 위해서 천사를 지었습니다. 아담 해와는 아들딸로 만들기 위하여 지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요 너희들은 내 아들딸이니, 너희가 슬프면 내가 슬프고 너희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할 수 있는 관계로 지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심정 전체의 총합체, 만우주 전체의 창조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의 대상체로 지은 인간이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깨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지은 창조세계는 한과 슬픔의 세계로 변하고 말았고, 기쁨과 소망의 실체였던 아담 해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추방당한 무리이니 응당 고통을 받고 슬픔을 당해야 됩니다. 천륜을 저버린 배도자의 보응으로 슬픔과 고통을 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9-194, 60.5.22)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에게는 찾아갈 수 있는 기쁨의 목적지와 모든 슬픔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오늘날까지의 인류, 여러분과 나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노래할 수 있는 본래의 세계,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야 합니다. 또 내 주위에 엉클어져 있는 흑암의 모든 고통을 헤쳐 놓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 목적지를 찾지 못했고, 그 어둠과 흑암의 탄식을 제거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수천년 역사를 거쳐 나오는 동안 인류는 탄식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허덕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면 고통, 슬픔이면 슬픔, 흑암권세면 흑암권세의 한계가 어디까지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고비까지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고통의 관문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할지라도, 죽음을 개의치 않고 이를 밀어 떨치고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시대적인 소망이나 역사적인 소망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생명을 걸고 대들기 전에는 하나님은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놓인 인간을 하나님은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다시 붙들어 행복만이 있는 그 세계로 되돌아가게 하려고 수고해 왔습니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구원의 목적입니다. 천당은 제2차적인 문제입니다. 땅 위에서는 비록 고통 가운데 살지라도 그 고통을 삼켜 기쁨으로 소화시킬 수 있어야 천국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는 절대 천국에 못 갑니다.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그렇다면 봅시다. 4천년 동안 뜻을 중심삼고 성별시켜 놓았던 이스라엘 민족, 그들이 오죽 잘 믿었습니까? 아브라함 이후 모세를 거쳐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2천년 동안 그들은 모세가 세워 놓은 율법을 오죽 잘 지켰습니까? 그렇게 잘 믿고 나온 무리가 믿음의 왕자로 오신 예수님을 배반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거룩하게 단장하고 속죄소(贖罪所)에 들어갈 때의 모습은 하나님을 대신한 듯하였고 믿음의 실체인 듯하였으나, 그런 자들이 예수님 앞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잘 믿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의 신앙의 절개가 지금 땅 위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도들의 신앙의 절개보다 높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기준은 얼마나 잘 믿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난 후의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마음에는 강도의 심보를 품고, 도적의 심보를 품고, 살인자의 심보를 품고도 믿으면 천당 간다구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밑창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근본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그 근본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인격자로 만들기 위하여 지도하는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은 먼저 제자의 마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발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제자를 인격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격을 갖추어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왜 구원하시려 하는가? 구원의 목적은 기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짓던 본연의 기쁨을 회복하기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구원받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붙안고 나오시면서, 마음의 행로를 지키고 마음의 행로를 보호하고 마음의 행로를 이끌어 가면서 인간의 마음을 격동시켜 나왔습니다. (9-195, 60.5.22)
타락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지어 놓으신 만물과 인간을 보고 실망하고 울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들은 알 것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불효하고 살인범이 되어 철창에 갇힌 몸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 부모의 마음은 철창을 넘어서 그 자식을 향해 움직이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도 그렇거늘 하물며 본연의 천심 그 자체로 계시는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어떠한 고통도 이 마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슬픔도 이 마음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비통함도 분함도 이 마음을 없앨 수 없습니다. 이런 인연이 있기에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을 저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아버지 앞에 아들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딸의 사명을 다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것을 생각조차 못 했던 패악한 무리였다는 것을 반성하며 스스로 탄식해야 되겠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당장 눈앞에 피를 맺히게 한 철천지원수가 있다 할지라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암만 억울한 입장에 있다 해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원수를 갚는 것을 천도가 공인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인류는 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 된 입장에 있는 인간이 부모 되는 하나님에 대해 근본적으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 본연의 인연, 심정적으로 엉클어진 이 정리(情理)를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한 구원의 역사도 사랑을 가지고 합니다. 믿음도 아니요, 소망도 아닌 사랑입니다. 맨 나중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6천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라고 붙들고 울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사탄이 끌어가지 못합니다.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아들딸이 있다면 사탄이 아무리 원수라 해도 그 부모의 자식임을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아버지 된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버지 노릇을 해봤습니까? 한 번도 못 해봤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담아, 내 사랑하는 해와야, 너희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로구나. 천지가 변할지언정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누가 부정할소냐?' 할 수 있는 자리를 바라고 고대하였는데, 그때를 맞지 못한 채 인간이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복귀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찾자는 것입니다. (9-203, 60.05.22)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온 하나님
하나님은 아버지의 역사를 일으켜 타락한 우리 인간의 마음에 아버지의 마음을 불어넣고, 아버지의 성상을 재창조시킬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형상입니다.
구원의 최고 목적은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성상을 이루어 놓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하나님이 수고를 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수고의 복귀노정을 거쳐 나온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불쌍한 인간들, 천만번 죽어 마땅한 인간들을 찾아오기를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은 완전한 인격자가 못 되어 있습니다. 이 땅 위에는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종교도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대하는 형상도 천태만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아버지께서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셨을 것인가? 보잘것없는 나 하나를 찾기 위하여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수고했습니다. 만일 찾아오신 아버지의 뜻을 내가 완결하지 못하고 영계에 가면 하나님은 또다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나를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한 심정의 인연으로 출발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심정과 인간의 심정이 한 자리에서 만나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을 갖추어 가지고 그것이 전체의 가치에 적용될 수 있는 기준을 넘기 전에는 하나님은 언제나 슬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의 아버지께서 지금도 이 땅에 있는 인간들을 찾아오고 계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는 찾아오고 계십니다. 저 사망이 물결치는 죽음의 장소에도 아버지께서는 찾아가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런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본래 인간과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딸의 관계였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은 후에 최고의 정력을 다 기울여 인간을 지었습니다. 심정이 있다면 그 심정의 1백 퍼센트를 다하고,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다하고, 몸이 있다면 그 몸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더불어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우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몰리는 민족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저주받고, 하늘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무리를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사정을 인간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죄의 원인과 결과를 너무도 잘 알기에 죄를 용서해주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시 인간의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까지 아시기에 하늘은 죄를 기억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9-202, 60.5.22)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절대자의 각오
절대자가 이 악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를 해 나오는 데는 반드시 어느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절대자로서의 각오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고 선한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떻게 대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민족․국가․세계, 더 나아가 온 천주를 완결지을 때까지는 어느 누구의 충고에도 변할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사정에도 양보할 수 없는 각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천만년이 지나도 변할 수 없는 각오입니다. 그 각오를 만인에게 제시하는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심판날입니다. 그 날은 우리 죄악 된 인간들 앞에 하나님의 각오를 실제로 보여주는 날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고 수많은 도인들이 살고 있으되, 그들은 하나님의 각오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변치 않는 각오 밑에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고 계십니다. (10-273, 60.11.6)
잃어버린 자녀를 찾기 위한 섭리역사
하나님이 천지를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것은 누구 때문이냐? 본래 하나님은 참된 인류의 조상을 중심으로 승리적 주관권을 가지고 천지를 주관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주관의 위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누구 때문에 잃어버렸느냐? 아담 해와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인 아담 해와 때문에 일이 이렇게 저질러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는 참된 인류의 조상,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참부모의 혈족으로 우리 인류는 태어나야 했습니다.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던 인류의 참부모, 그 참부모는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로, 인류 앞에는 승리적인 영원한 실체로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담 해와는 승리적인 실체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슬픈 역사를 이루어 나온 원한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늘의 법도를 떠났고, 자기의 실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정을 유린한 우리 인간은 말씀에 따라 실체를 찾고, 심정세계를 찾는 복귀의 노정을 더듬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만물보다도 더 악한 자리에 서게 되었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대할 수 없는 슬픈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는 회복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일깨워 재창조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종의 자리를 거치고, 양자의 자리를 거치고, 아들의 자리를 거쳐서 승리적인 주관권을 갖추어 참부모의 자리까지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구약시대는 소생시대요, 신약시대는 장성시대요, 성약시대는 완성시대입니다. 또 구약시대는 종의 시대요, 신약시대는 양자의 시대였습니다. 이 양자의 시대를 거쳐서 실체 자녀의 시대를 완결짓고 나서야 부모의 시대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이러한 복귀역사노정을 두고 볼 때, 종의 시대와 양자의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실체 자녀의 시대로서 승리적인 기준을 세운 다음에, 부모의 자리까지 나아가야 할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이 바라는 종이 되어, 여기서부터는 종의 세계이니 사탄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는 승리의 팻말을 꽂고 종으로서의 전체적인 조건을 세운 우리의 선조들이 없었습니다. 또 종의 승리적인 터전을 상속받아 하늘편 전체의 종을 통할하고, 하나님 앞에 명령을 받을 수 있는 양자가 되어 하나님이 찾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양자로서의 승리적인 결정권을 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은 사람 하나를 놓고 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으면 번번이 사탄이 침범하여 망쳐 버렸다는 것입니다.
뒤넘이치는 이 역사가 6천년이나 흘러왔지만 어느 한 때 종으로서 사탄을 쳐부술 수 있는 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어느 한 때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탄을 쳐부수고 하나님의 권한을 세울 수 있는 양자를 찾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한스런 복귀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책임지는 입장에서 한 사람의 사명자를 세우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갈라 세워 역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준비한 기반 위에 한 사람을 불러 세워서 명령을 실천하게끔 역사하셨는데도, 명령을 받은 사람이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동원시켜서 연이어 나갈 수 있는 후보자를 세워 나오셨습니다.
종의 역사, 양자의 역사, 자녀의 역사, 부모의 역사, 이러한 종적인 역사가 오늘날 횡적으로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땅 위에는 아직까지 종의 자리에서 신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양자의 도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 하면 '내 아들딸아!'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의 자리를 찾아 나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14-239, 65.1.1)
잃어버린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처량한 아버지
하나님은 이런 기준을 가지고 찾아 나오되 맨 끝에서부터 찾아 나옵니다. 타락한 자식들이 몰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 선두가 되었습니다. 바로 궁중에서 쫓겨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선 것도 모세가 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서신 것입니다. 모세만 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보다 더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김삿갓과 같습니다. 짊어진 짐을 풀 곳이 없어 이스라엘 민족한테 풀려고 했는데 그 민족이 배반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보따리를 짊어지고 세계를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무치는 마음과 그 끓어오르는 심정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사람이야 잘났든 못났든 괜찮다는 것입니다. 알든 모르든, 유무식(有無識)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효자 효녀가 누구이며, 하나님을 모셔줄 가정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을 모셔 줄 민족이 어디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구는 넓고, 그 위에 살고 있는 인류는 많아도 처참한 유랑객이 되신 아버지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 자식을 만들려면 내가 네 아버지이고 내가 이렇게 이렇게 수고했다고 다 가르쳐주어야 하니 참으로 원통한 사실입니다.
본래 하나님은 만우주를 주관하시는 분이요, 무한한 사랑으로 자식 앞에 나타나셔야 할 분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슬프고 처량한 모습으로 허덕이는 아버지가 되셨으니, 얼마나 불쌍하냔 말입니다.
성경 말씀과 같이 지극히 작은 고아 하나가 불쌍한 모습으로 자기 앞을 지나갈 때, '저기 아버지가 가시는구나' 하며 그를 붙들고 눈물짓는 자는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지나가는 걸인이 있을 때, 자기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로 알고 '저와 같이 아버지도 가시는구나' 하며 눈물짓는 자도 아버지를 모시는 자입니다. 지나가던 행인을 대접하는 것이 아버지를 대접하는 것이라는 원칙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9-205, 60.5.22)
진정한 효자 효녀
진정한 효자는 아버지의 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지난날 아버지께서 겪으신 사정을 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어떠한 아버지입니까? 사랑하는 아들딸이 사형장에 나가면 교수대 앞에서 눈물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보다 먼저 눈물을 지으시는 아버지입니다. 지극히 선한 아버지로되, 이 땅 위의 불행한 사람이 가는 자리에 동참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그러한 자리를 찾아가시는 이유는 인간과 부자의 인연을 가진 연고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편안한 자리에서 기도를 하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그 아버지를 대신할 수 있는 실제의 노정을 걸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민족 앞에 몰리고 배반당하는 입장에 설 때, 고요한 산속을 찾아 들어가서 무슨 기도를 한 줄 압니까? '아버지여, 나에게 복을 주시어서 편안히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몰리고 쫓길 적마다 '아버지, 원통하옵니다. 당신은 역사노정에서 얼마나 이런 길을 가셨습니까?' 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내가 흘리는 이 눈물은 아버지를 대신한 눈물이로구나!'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목자, 진정한 아들딸이라면 그는 자기가 입은 옷이 남루하고 자기의 몸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자기의 모습과 자기의 상처를 잊고 그 이상 처량한 길을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심정과 더불어 엉클어져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런 자라야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자라면 말없는 산봉우리를 보고서도 울 줄 알아야 합니다. 저 산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던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피조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좋은 풍경을 대할 때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내시면서 아들딸한테 몰림받고 우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냥 상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손이 여러분 자신의 일부분일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린 채 그 손을 붙들고 울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가기 전에는 아버지를 체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왼손은 사랑하는 아들의 손이요, 바른손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이다' 하는 감정에 사로잡혀 자기가 자기 손을 붙들어주면서 '아버지!' '아들아!' 하는 경지에서 몸부림치는 자 외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는 그러한 경지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기도 모르게 몇 시간씩 울다 보면 하늘이 그렇게 우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경지를 넘어서 '아버지!' 하면 실감이 납니다.
아버지란 명사는 많습니다. 내 아버지도 있고 남의 아버지도 있고, 나쁜 아버지도 있고 좋은 아버지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고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아버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대하여 우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9-206, 60.5.22)
마음에 모시고 위로해드려야 할 아버지
하나님은 죽음의 고비를 넘어오면서도 인간들을 붙들고 나왔습니다. 사망세계에서 썩어 들어가는 몸뚱이를 헤치고 그 마음에다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심정을, 자기의 모든 전부를 옮겨주고, 그 다음에 축복을 해주고 싶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역사과정을 거쳐 나오신 아버지를 기필코 모셔야 할 터인데 어떠한 자리에 모시겠습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했습니까? 그곳이 어디입니까? 모실 장소를 준비하라고 예비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실 곳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집입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입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땅 어디도 믿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안식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선 내 마음을 중심삼고 내가 영원불변의 모습이 되어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먼저 마음의 중심에 아버지를 모신 후에 그 아버지를 중심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의 사회, 아버지의 가정, 아버지의 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오늘날 이 땅에서 하늘을 잘 믿는다는 어떤 나라가 그렇게 되었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아버지를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모셔야 합니다. 만일 내 마음 깊이 아버지를 모셨다면 그 다음엔 아버지를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수고하신 아버지임을 알고, 나를 만나기 위해 6천년 동안 찾아오셨던 아버지이심을 알고 위로해드려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비극영화의 주인공보다도 더 비극적인 분으로 찾아오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부터 찾아오셨던 아버지는 가인과 아벨을 세워 놓고 천륜의 대역사를 종결짓고자 하셨으나 가인이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아벨이 죽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는 곧 하나님이 맞은 것입니다. 노아 때는 함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랬고, 모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그랬고, 예수님 때도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그랬습니다. (9-207, 60.5.22)
아버지의 짐을 대신 지는 아들딸
이제 아버지 앞에 나아가야 할 우리들은 '아버지!'라는 한마디의 말을 하면서도 몸 둘 곳을 몰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죄를 짓고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하늘 앞에 무수한 죄의 역사를 가진 우리들은 심정 하나를 붙들고 '당신의 슬픔은 저의 슬픔이요 당신의 기쁨이 저의 기쁨이오니, 당신이 슬퍼하면 저도 슬퍼하고 당신이 웃으시면 저도 웃겠소이다. 당신이 동(動)하면 저도 동하고 당신이 정(靜)하면 저도 정하겠소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잘 믿고 아무리 성경에 능통하다 해도 안 됩니다. 사무친 그 심정, 그 하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찾아오던 발걸음을 어느 한 곳에 멈추고 6천년간 유랑하신 보따리를 풀어놓으실 수 없습니다. 집이야 크든 작든 상관없습니다. 앉을 자리야 바위덩이라도 괜찮습니다. 마음에서부터 심정의 인연이 맺어지는데, 그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수많은 신도가 땅 위에 있지만 그 가운데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몰리고 몰리고 또 몰리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보는 것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뭐 어떻고 어떻고 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라면 눈물이 앞서고 우중이라도 개의치 않고 아버지의 행랑보따리를 말없이 벗겨서 대신 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왔더라도 서슴없이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고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아들딸이 되라는 것입니다. (9-210, 60.5.22)
심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아들딸
그런 아들딸이라면 주가 이 땅 위에 와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리어 만민을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될 때 결코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자리에서 천국의 심정을 갖고 그분을 모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별 차이 없습니다. 선하다고 해서 얼마나 더 선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종이 한 장의 차이만도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계의 수십억 인류를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아무도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의 원수라 하더라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갖고 찾아오는 아버지를 만난 후 그 아버지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가고, 그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런 아들딸이 되어주기를 아버지는 고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으니 이젠 보따리를 다 풀어놓게 해야 합니다. 이젠 죄수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고 '어디로 가시겠나이까? 아버지, 제가 앞장서리다' 하며 그 길을 먼저 걷겠다고 다투어 나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이 천지간에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들이 있는 곳에 축복을 다 퍼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모인 집단이 있다 할진대 세계의 모든 교단 위에 내렸던 은혜를 다 끌어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날에는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다가 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이제까지의 역사노정에서 못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당신의 아들을 세워서 심판하십니다. 내 아들은 이러이러했다는 조건을 세워 가지고 그 기준에 의해서 심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모실 수 있고, 아버지가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이 세계 인류 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들딸을 기준해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주먹구구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승리의 영광을 대할 수 있는 아들딸들을 세워서 심판하는 것입니다. 처참한 길을 가시는 아버지를 쳤으니, 아버지를 배반했으니, 아버지를 모른다 했으니 그 아버지도 응당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겪고 난 다음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그 심판은 공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무한한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시는 줄 압니까?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겪어 보신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는 하나님이요, 인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은 이처럼 계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 찾아오는 아버지를 모시고 위안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아버지를 모신 기쁨을 심정적으로, 또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을 갖지 않으면 땅 위에 주님이 오실 때 심판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런 기준까지 여러분은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거지 같은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 보았습니까? 그런 자리에서도 '아이구, 아버지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다니 황공하옵니다' 하며 몸 둘 곳을 모르고, 얼굴을 못 들며, 추한 모습을 보여드리기 민망스러워 거동을 못 하는 아들딸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를 붙들고 통곡하며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실 것입니다.
통일교회는 영광스러운 자리, 좋은 자리에서 은혜받으려고 하는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은혜받으려는 무리들과 싸우기 위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모진 광풍이 몰아치는 곳을 향하여 가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고생하며 오셔야 하니, 우리가 그곳을 개척하기 위해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과 모진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일지라도 우리는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찾아오셔야 하니 우리가 죽고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보금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닙니다. 편안한 자리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자리로 찾아오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알고 그 아버지를 모실 줄 아는 아들딸, 그 아버지의 고통의 짐을 전부 짊어지고 그 아버지의 고난의 길을 전부 책임지고 나설 줄 아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는 지극히 적다 하더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리를 통하여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외면하려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세계 가운데 그 분야에 자신 있다 하는 민족이 있다면 그 민족은 세계를 지배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천상을 지배할 것이요, 천군천사까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한 영광의 선물을 가지고 아버지께서 오신다니 황공한 일입니다.
민족을 초월하고, 국경을 초월하고, 동서를 초월하여 아버지를 부르며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많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 천지는 하늘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세계는 그곳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지난날 동서의 모든 사조는 이 민족과 하등 관계가 없었지만, 점점 이 민족의 일로 부각돼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족이지만 그들이 가슴을 떨면 우리도 떨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향하여 세계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이 세계는 나 대신 심판의 제물로 나타난 것입니다. (9-211, 60.5.22)
심정의 주인공
이제 여러분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밟고 올라설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권세의 주인공이 아니라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눈물이 많고 누구보다도 동정심이 많은 심정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최후로 바라는 것은 도(道)가 아닙니다. 도를 원하고 있지만 도가 궁극적인 대상은 아닙니다. 어떤 주권도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행복을 제일 원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전인류가 어떠한 주의를 내세우고, 세계가 모두 그 주의권내(主義圈內)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과연 전부 편안하고 행복스럽겠습니까? 자유를 위하여, 행복을 위하여 싸운다고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과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무리는 자유스럽고 행복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진정한 행복과 자유의 개념으로 보면 가상적입니다.
심정, 생명의 원천인 심정, 이 심정이 천정과 더불어 즐길 수 있으며, 하나님이 동하면 내가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나도 정하고, 하나님과 같이 바라보고 듣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이 세계를 대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면 그들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고난 가운데에서 수고하신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허덕여 왔으나 이제부터는 '영광 가운데 오시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잘 모시는 효자가 되겠나이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행복의 동산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창조주의 권한을 가지고 천지만상 앞에 나타나시게 될 때에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본연의 선의 세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 세계에서도 효자 효녀가 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효자 효녀는 오늘날 이 시대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 때뿐만 아니라 기쁠 때도 그러해야 합니다. 영광의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내가 춤을 춤으로써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얼마든지 춤을 추어서 위로해드리겠다. 내가 노래를 부름으로써 아버지께서 즐거워하신다면 얼마든지 노래를 불러서 즐겁게 해드리겠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마음이라도 그렇게 가져야 합니다.
슬픈 자리로 내몰아야, 그런 길을 가게 해야 빠르겠기에 그런 길을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한 고개를 넘고 난 후에는 아버지께서 천하만상 온 피조만물 앞에 '이는 내 아들이요 내 딸이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아들딸의 기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 기상을 갖추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아버지 앞에 효자 효녀의 충절을 다하고 나서, 모든 피조세계가 머리 숙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누가 밉게 볼 수 있겠습니까? 고난의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시려 하지 않고 처음부터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사탄이 참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치고 나면 교만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뒤에 두고 자기만 올라가겠다고 하니 다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아버지부터 모셔서 영광의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고난의 아버지를 모셨다고 해서 아버지를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다 모신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내가 말없이 슬픔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심정으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 해도 그것은 아버지를 눈물짓게 하는 하나의 계기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자리에서만 아버지를 모실 것이 아니라 영광의 자리에서도 아버지를 모셔야 합니다. 아들의 자격을 모두 갖추어 영광의 자리에서 영원히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그런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도 고생의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동참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전세계에 우리 한민족과 같이 불쌍한 민족은 없습니다. 하지만 절대 낙망하지 마십시오. 이렇듯 불우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여기에 하나님이 찾아온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아버지를 모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정이 두텁다면 그 심정을 터로 해서 이 어려운 환경을 참고 넘어 이 자리를 찾아오시는 아버지를 위안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천상에 갔을 때 제일 영광된 자리에서 아버지를 제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야 뒤끓든 사회야 변하든 천심을 향한 일편단심만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내 몸이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그 약속만은 결코 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내가 영광의 때, 영광의 한 ᄂ날을 맞이하면 아버지를 이렇게 이렇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기백을 가져야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면 내가 영광을 받고 모심을 받겠다는 것보다도 '그때에 나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시는 아버지를 잘 모시어 영광의 아버지로 높여드리고, 아버지 대신 사탄을 향하여 '야! 이놈아' 하면 사탄이 도망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는 작은 무엇이라도 있어야 6천년의 한을 제거할 수 있고 자랑스러운 소망의 한 자체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9-214, 6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