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메시아를 통한 구원섭리
1.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원
메시아란 몸과 마음이 하나된 인류의 참된 조상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타락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면 그야말로 개인적인 지상천국을 이루고, 그 개인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이루어지고, 그 가정으로 말미암아 국가, 세계가 이루어져 지상천국, 즉 하나님만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반역함으로 말미암아 본래 하나님이 의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고, 사탄을 중심삼은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가 이루어졌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던 세계와 반대가 되었기 때문에 반대의 중심존재인 사탄이 생겨났고, 사탄이 주관하는 개인과 가정과 세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세상을 그냥 둔다면 이 사람들을 사탄이 놔 둘 리 만무하고, 그렇게 되면 이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이것을 돌이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세계는 사탄을 중심삼은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정이 되었고, 민족이 되었고, 국가가 되었고, 세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가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개인으로부터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반대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위에 계셔야 하고 사탄이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반대가 되어 사탄이 위에 있고 하나님이 아래에 계시게 됐습니다. 그래서 두 세계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늘 싸우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반대로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 개인이 되었기 때문에 가정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몸과 마음의 싸움이 없는 개인을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섭리입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된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그런 개인이 안 나왔기 때문에 그런 가정이 나올 수 없고, 그런 종족이 나올 수 없고, 그런 민족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는 것은 결국 전체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가정도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고, 종족도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고, 민족도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고, 전세계가 타락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사탄이 주관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31절에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공중 권세, 하늘의 보좌 밑까지 전부 사탄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로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할 수 있는 대표자가 있어야 됩니다. 세계를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하고, 민족을 대표하고, 종족을 대표하고, 가정을 대표하고, 개인을 대표할 수 있는 하나님편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완성할 수 있는 대표적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나와 그 한 사람만 붙들고 완전히 하나되면, 개인도 완성할 수 있고, 국가도 완성할 수 있고, 세계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이 한 사람만 붙들고 완전히 하나되면, 개인이 하나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가정과 국가와 세계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고, 하늘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 아담이 인류의 선한 조상이 됩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어 완성했다면 가정도 완성하고, 종족도 완성하고, 다 완성했을 것입니다. 시간만 지나면 전부 완성할 것이었는데,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사탄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참부모님이 조상으로 와야 됩니다. 거짓 조상으로 말미암아 사탄권이 생겼으니 참된 조상이 와서 이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이 개인을 길러 나가고 가정을 길러 나가는 운동을 해야 됩니다.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종교요, 그것을 대표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대표적 중심국가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이 사탄세계권내에서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즉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인을 만들고, 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자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세계까지 확대된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72-74, 74.5.19)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 참감람나무로 오신 예수님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 사탄세계는 사탄이 주관하는 돌감람나무요, 종교는 하나님이 주관하는 돌감람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다릅니다. 종교라는 것은 참감람나무가 아니라 돌감람나무는 돌감람나무인데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돌감람나무입니다. 세계는 사탄이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감람나무를 한꺼번에 자르고 전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도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는 권이 종교권입니다.
그래 가지고 하나님이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고, 하나님 마음대로 오라 하면 오고, 가라면 갈 수 있는 종교권의 패가 이스라엘 선민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돌감람나무밭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사탄의 밭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탄이 죽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돌감람나무밭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 돌감람나무밭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참감람나무를 하나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입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개인이 참감람나무로 오신 예수님에게 접붙이면 개인으로서 하나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개인을 중심삼고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에서부터 가정으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그걸 맞추어 나가야 됩니다. 그것을 국가기준까지 하나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의 말만 완전히 들으면 개인이 완성되고, 가정이 완성됩니다. 접붙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려면 완전히 잘라야 됩니다. 돌감람나무를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하고 접붙여야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생활이 하나되고, 마음이 하나되고, 행동이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되었더라면 틀림없이 나라를 이루고 세계까지도 하나 만들어 복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완전히 하나될 수 있는 어떤 개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개인으로 섭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하나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개인 입장에서 하나될 수 있는 남자와 여자가 없었기 때문에 가정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개인으로 완전히 하나되지 않으면 가정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될 수 있는 개인이 없으니 하나된 가정이 나올 수 없고, 하나된 가정이 없으니 하나된 종족이 나올 수 없고, 하나된 종족이 없으니 하나된 민족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참감람나무로 왔지만, 영과 육을 접붙여 나라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이루려고 하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이스라엘 나라를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다시 이루어야 합니다. 영육을 중심삼고 이루어야 할 텐데 육을 사탄에게 내주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만 발전시켜 나온 것이 세계적 기독교입니다.
영육으로 타락한 사탄세계에서는 아무리 영적인 세계의 기준이 되었다 하더라도 영육으로 타락한 사탄세계가 남아 있는 한, 육적인 기준이 아직까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이 땅에 와서 육적인 기준을 세워 이 세계 형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오시는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72-77, 74.5.19)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원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함으로써 그 민족 앞에 몰리고 쫓김받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으로 가게 된 예수님은 그의 소망을, 그의 사정을, 그의 심정을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도 상속하지 못했습니다. 땅 위에서 이루려던 소원이요, 땅 위에 세우려던 심정이었으나 그냥 그대로 십자가와 더불어 지고 갔다는 것을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종말시대를 맞이한 우리들은 2천년 전 예수님 당시를 다시 한번 회고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책임을 다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기반으로 세계적인 종교의 이념을 가지고 세계적인 복귀노정을 출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책임을 못 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영적 복귀, 즉 영적 구원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민족적인 발판을 연결시켜서 세계 형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천년 전 하나님이 슬픈 자리에 세우고자 땅 위에 예수님을 보냈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음 가운데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새로운 한 날을 준비하였습니다. 새로운 시대적․민족적․국가적인 지도자로서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하나의 구세주를 보내기 위하여 긴 역사노정을 통하여 선지자를 보내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환난노정을 거치면서도 택해 놓은 이스라엘 민족, 야곱을 중심한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나왔고, 한 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을 끌고 몰면서 나오신 것이 예수님 때까지의 4천년 역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슬픈 자리에 세우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겠습니까?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으며, 어떠한 생활을 했어야 하는가? 예수님은 목수의 가정에서 목수의 조수로 생활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날 분이 아닙니다.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이스라엘 민족은 어디로 갔길래 오신 메시아를 그토록 천대해야 했느냐? 그토록 몰라보고 박대해야만 했느냐? 만왕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그토록 처량한 자리에서 맞이해야 했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4천년 동안 준비하여 예수님을 보낸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를 그 나라의 왕궁에 모시고, 제사장들과 교법사들이 중심이 되어 수많은 교직자들이 자기들 이상의 영광의 자리에서 왕으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자리가 이스라엘 민족의 소망이던 메시아가 머물러야 할 자리요,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낸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에게 메시아 탄생을 예고한 하나님이 메시아가 그러한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기를 원하였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된 것은 다 인간들이 책임 못 한 연고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만민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터를 닦아 나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교법사들을 다스리고 제사장들과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 나라의 군왕을 대신해서 만민에게 명령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낸 목적이요, 이 땅 위에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지고 온 예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최고로 권위 있는 사람들과 의논하고, 그들에게 명령하여 세계적인 발판을 잡고 악한 세계를 무찌르는 심판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습니다. (14-49, 64.5.3)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어떻게 살았느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욕을 먹으며 쫓겨다녔습니다. 이 마을에서 몰아내면 저 마을로 피하고, 저 마을에서 몰아내면 이 마을로 피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생활은 4천년 동안 준비한 터 위에 오신 메시아가 해야 할 생활이 아니었습니다. 이 땅에 와서 그렇게 생활하기를 원하셔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런 자리로 보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서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자신을 메시아로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고 나와 가나안 7족을 전부 쳐부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던 모세의 심정보다도 더 간절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세계의 사탄 국가들을 쳐서 하나님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를 갚고, 만민을 하나님의 아들딸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온 예수님의 본래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활무대는 비참했습니다. 유대민족의 어떤 대제사장이나 교직자, 혹은 그 시대의 어떠한 사람만도 못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있을 곳이 없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 부모가 누구뇨? 내 형제와 내 누이가 누구뇨? 아버지 뜻대로 하는 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요 부모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뜻대로 하는 부모를 찾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형을 찾고, 아버지 뜻대로 하는 동생을 찾기 위해 헤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가정이 있었느냐? 그런 종족과 민족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있을 때 동생들로부터 반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또 마리아에게도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 하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심상치 않은 말씀입니다.
요셉 가정에 태어난 예수님은 그렇듯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지나감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천사를 보내 예수님의 잉태를 예고해주던 그때의 심정과는 판이하게 변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을 가만히 보니, 성신으로 잉태되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긴 들었지만, 의붓아들이란 말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그렇게 변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느 때나 뜻을 위하는 충절의 마음을 갖고 예수님의 30여 평생의 노정에서 예수님을 모셔 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입장에 서야 했지만, 그는 인간적인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예수님을 구박했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의 명절이 되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동생들에게는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주고 싶어했으나,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택해 세운 아들이라 하여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유난히 후하게 주려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서글프고 분한 생애 노정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에게 까뀌가 웬말이며, 톱이 웬말이며, 대패가 웬말입니까? 메시아가 목수의 조수라니, 하나님과 더불어 만민의 운명을 책임지고 개척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준비 기간에 목수 생활이 웬말입니까? (14-51, 64.5.3)
유대민족이 고난의 길을 걸은 이유
암흑 천지가 되어서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 멋대로 틀어진 방향으로 나가니, 그들을 수습해야 할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깝고 애달팠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 위에 메시아를 보냈으니 예수님은 사탄과 싸워 승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드려야 하는데, 설 발판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기에 면목없어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일국의 사신으로서 나라의 특명을 받고 나간 사람이 해야 할 책임과 임무를 모두 실패하고 국왕 앞에 다시 돌아갈 면목이 있겠습니까? 일국의 사신도 그렇거늘, 하물며 메시아로 오셨던 예수님은 어떠했겠습니까?
4천년 동안이나 피땀 흘리며 수고해서 천신만고 끝에 준비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 예수님을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생활은 비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밥을 굶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벌거벗어서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온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할 면목이 없으니 비참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준비해 온 피눈물 어린 역사적인 제단을 연결시켜 예수님 앞에 상속해주고, 예수님이 그것을 수습하여 하나님이 세워 놓은 민족을 위주로 주권국가를 세워서 만왕의 왕의 권한을 갖고 만민을 통치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위에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주권자의 입장에 서 보지도 못했습니다. 내적으로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내용을 갖고 있었지만 그럴 수 없는 분한 입장에 있었고, 역적과 간신에게서 쫓기는 이상의 슬픔을 당한 예수님의 사정을 오늘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황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습니까?
4천년 동안 고대해 온 메시아를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은 벌을 받았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 2천년 동안 주권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유랑하는 민족이 되었겠습니까? 어찌하여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이 벌어졌겠습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반한 죄값입니다.
예수님을 유랑하게 만들었으니 유랑하는 민족이 되어 보고, 예수님을 고아의 신세로 만들었으니 고아와 같은 생활을 해 보고, 예수님을 쫓기고 몰리는 신세로 만들었으니 쫓기고 몰려 보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몰림받고 쫓김받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중심국가가 책임을 못 한 것은 한 국가에 국한된 평면권내에서 벌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절대로 평면적이고 제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를 대표한 메시아를 죽임으로써 세계적인 탕감노정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이 하나님의 한이 되었으니, 그 한이 이 땅에서 모두 탕감되고 이 땅에 다시 새로운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수 있는 때가 뜻으로 보면 말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이 되어 보지 못했지만, 천지가 생겨난 이후 이 땅에 왔던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장의 인격을 갖추고 오신 분이요, 족장의 책임은 못 해 보았지만 이 땅의 어느 족장보다도 훌륭한 책임자로 오신 분이요, 군왕이나 제왕의 자리에 앉아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군왕이나 제왕보다 크나큰 책임을 짊어지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 책임을 이 땅에서 완수하여 소원하던 나라, 하나님의 창조 당시에 세우려 한 나라, 사랑의 나라, 희망의 나라, 자유와 해방의 나라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런 나라를 세계적으로 한꺼번에 이루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죽여 놓고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믿게 하여 세상을 수습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 비록 30여년의 생애노정을 걸어갔지만, 하나님이 4천년 역사노정에서 느끼신 슬픈 심정을 체휼했고, 이 땅에서의 패배의 쓴잔을 다 마셔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내가 헐벗고 굶주렸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얼마나 모함하고 배반하였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자신보다도 자기가 그렇게 해서 죽으면 후대의 신약 신자들 앞에 엄청난 고난의 길이 남게 된다는 사실을 더 슬퍼하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여 주옵소서 (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3차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아버지가 가는 길을 그 아들딸은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니 그 자식들도 그 나라까지 따라가야 합니다. 그 나라까지 순종하면서 가다가 도중에 쓰러지면서도 죽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계사적인 최후의 전장(戰場)을 향하여 한 분 메시아를 세웠습니다.
메시아를 세운 하나님의 소원은 선한 이스라엘의 건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1 이스라엘이 멸망했지만 제2 이스라엘로 기독교를 세워서 전세계 이스라엘 국가 형을 형성하였는데, 그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에서 유대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14-53, 64.5.3)
예수님의 소원과 기독교의 사명
2천년 전 유대 땅에 오셨던 주님, 민족적인 메시아를 맞이하여 국가적인 주권을 세움으로써 세계적인 출발을 하려 했던 역사는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중단될 수 없습니다. 하늘적인 기준에서 외형적으로라도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서 그것을 제2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민주진영과 제2 유대교로서의 기독교에 상속해서 일으켜 나가야 됩니다. 그러려면 기독교는 통일되어야 합니다. 통일되지 않으면 망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려 한 책임,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야 할 책임을 기독교가 하지 못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명과 책임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회가 나왔습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은 당대에 세계적인 복귀를 완성해서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을 품고 돌아가셨으니 다시 제2 이스라엘을 세워서 민족적인 기반을 연결하는 세계적인 무대에서 만나야 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제2 유대교를 세워서 민족적인 출발을 하는 지점에서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예수님 당대에 못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책임에 대해서 한마디 말도 못 해 보았지만, 그 예수님이 마음으로 '내가 그런 나라에서 같이 살고 싶고 그 나라에서 거느리고 싶은 참된 효자는 어디 갔느뇨?' 하고 찾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인류의 소망이 완성되는 날, 예수님을 중심삼고 온 천지를 거느리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참된 자녀를 고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상을 가지고 온 예수님이었지만 한 번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말도 한번 못 해 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집안 식구가 원수라 하였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가 원수고, 내가 사는 나라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내 자체에서는 이 몸이 원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원수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와 이 세계가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혈혈단신 고아와 같은 신세로 이 땅에 와서 언제 자신의 소원을 말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장 49절)'라고 했습니다. 불을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의 답답함이 오죽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중을 바라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장 37절)' 하시던 예수님의 그 서글펐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분한 마음에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판국은 그때 비틀어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29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던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30여 평생 고이고이 지녔던 마음, 그 내적인 소신을 예수님은 전혀 피력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철석같은 결의는 갖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에게도 그것을 말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멍텅구리 같은 제자들이 사도요, 불리하면 내빼는 녀석들이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한 나라만을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 앞에 부름 받았던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만을 대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세계를 대표하고 만민을 대표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명으로 만민을 대표해 나타난 특전대였습니다. 그런데 칼이 무서워 도망을 가요? 목이 달아날까봐 도망을 가요? 그런데도 사도라고요?
예수님이 부활 후 40일 동안 다시 찾아가서 수습했기 때문에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이 다 죽더라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철석같이 맹세한 자들이 뒷걸음을 쳐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 처참한 자리에서 죽어 간 예수님이 사흘 후에 다시 그들을 찾아갈 때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이구, 내가 부활해서 왔다' 하며 기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참으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낙원엔 누가 먼저 들어갔습니까? 강도가 먼저 들어갔습니다. (14-55, 64.5.3)
말 못 할 예수님의 사정
끝날에 처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당하신 억울함을 알아야 합니다. 억울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억울하고 분했으며, 땅 위에서 자기의 소원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하지 못했으니 억울하고 분했던 것입니다. 매를 맞고도 아프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하여 사탄세계로부터 몰리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던가?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눈물 흘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충신답게, 하나님의 효자답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매를 맞고 쫓기더라도 원통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답게 늠름하게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책임을 못 하고 간 예수님의 사정, 이 땅 위에 책임과 소원을 품고 와서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고 간 예수님의 사정, 당대에 세계의 만민을 구원해서 복귀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4천년 역사와 함께 죽어 가야 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분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눈물을 흘려도 천주사적인 입장에서 흘렸고, 천주사적인 비참한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도 절망하지 않고 늠름하게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땅의 역사적인 모든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을 저주하면 인류 구원섭리는 다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하나님, 제 원수를 갚아주시옵소서!' 했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지옥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원을 유린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유린했으니 심판하려면 모두 다 쓸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이 4천년 동안이나 수고하여 세우신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고대하고 자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준비하기까지 하나님이 얼마나 수고하셨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저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망하면 수습하여 다시 세우고 몇천만 번 수고하여 세운 이스라엘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할 입장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들에게 소망을 가지시고 나를 이스라엘 땅에 보내셨고, 나는 30여 년 동안 이들을 위해 살았고 이들을 위해 싸웠다. 이들을 위해 싸운 목적은 이들을 구하려는 것이었지 벌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내가 여기서 이들을 저주하면 이들은 물론 이들의 후손들까지도 전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세워 나온 복귀역사가 다 무너질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차 기도를 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피맺힌 호소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가? 오늘날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서 신부 되겠다는 사람들이 아는가? 신부, 말이야 좋습니다. 그 명사야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그 명사를 성립시키기 위해 필요한 공의 노정과 고난과 슬픔과 비참의 과정은 어떻게 합니까? 대가를 치러야 됩니다. 빚진 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4-57, 64.5.3)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할 우리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 수 없었고, 땅을 바라볼 때는 배반의 아우성 때문에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왕의 왕으로서 그들을 붙들고 가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여,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를 죽이는 한이 있을지라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애원하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죄과에 대한 사죄를 호소한 것이요, 자신에게 한을 맺히게 한 원수들을 용서한 것이요, 미래의 후손들이 맞이할 탄식권을 놓고 해방시키기 위해 갈구한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책임지고 꿋꿋이 넘어갔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승리권을 세울 수 있었고, 시대적인 주도권을 세울 수 있었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따라오면 부활할 수 있다는 조건이 성립되었기 때문에, 사도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하기 때문에 못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반한 자를 용서했다는 조건이라도 세워서 세계적인 결판을 지은 기준에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사탄의 공인을 받은 터 위에서 사도들을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습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의 주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를 지고 간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나 처량한 사나이입니까? 여러분, 역사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권한을 갖춘 예수님을 마주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당시의 예수님을 볼 면목이 있겠어요? 구약성서를 믿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쫓겨다니고 유대교인들에게 쫓겨다니고 몰림받는 몰림뱅이, 바알세불이 들린 미치광이라고 놀림받던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더벅머리 총각이 과부를 데리고 다니니 별의별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향유를 발에 부어서 머리카락으로 씻어주고…. 여러분, 이런 예수님을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무슨 신학박사들, '아, 나는 주님의 일등 신부다' 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런 예수님을 믿겠어요? 아마도 돌을 던지는 선봉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예수님이 훌륭하다고 인정받게 되고, 또 예수님의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니 믿는 것입니다.
고아와 같은 예수님, 방랑자 예수님,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던 예수님, 십자가를 지고 처량하고 비참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 억울하고 분한 예수님, 남모르는 분함을 품고 속죄의 제물로 가셨던 예수님, '내 피가 죽지 않는 한 내 기도가 죽지 않을 것이요, 내 기도가 죽지 않는 한 내 소원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소원이 죽지 않는 한 내 사정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사정이 죽지 않는 한 내 심정이 죽지 않을 것이요, 내 심정이 죽지 않는 한 다시 찾아올 날이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재림을 약속하고 가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먹고 싶은 것이 많았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뭐 하나님이 다 주셨겠지'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은 소변도 안 보고 뒤도 안 보는 줄 알고 있습니다. 물도 안 마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겠습니까? '오! 능치 못함이 없는 예수님' 하는데, 그렇습니까?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탄권세를 굴복시키는 데 있어서 전능하신 예수님이에요?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4-59, 64.5.3)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이유
예수님은 30여 평생 동안 어떤 기도를 하였느냐?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살더라도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이렇게 사는 것이 왕궁에서 사는 것보다도 더 좋습니다. 이렇게 까뀌질하고 대패질하고 사는 것이 왕궁에서 호강하면서 사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소원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낙망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고 하나님을 위로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 앞에 부모가 자기의 위업 등 모든 것을 상속해주었는데, 그것을 상속받은 아들이 자기는 하나도 갖지 않고 자기 형제에게 나누어주었다면, 부모가 그것을 보고 상속해준 자식을 불러다가 '이 자식아, 내가 너에게 다 주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비참하게 살고 형제들에게 전부 나누어주었느냐?' 하며 벌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당신의 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고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당신의 심정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행복을 노래하며 살아야 할 환경에서 비참한 자리에 들어가 살더라도 선한 자리에 서게 될 때에는 그 반대적인 가치로 하늘 앞에 거두어지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입니다. 낮은 자리에 들어갈수록 그 가치는 커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잘먹고 잘살아야 할 입장에서 못먹고 비참하게 살았던 것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만민이 그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여년의 생애 동안 그런 조건을 세워 나오면서도 슬퍼하는 하나님을 위로하던 예수님! 한 때를 바라보고, 말할 수 없이 혼란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로마의 압제 하에서 성전을 유린할 대로 유린하는 세력 앞에 안 나서려야 안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30년 동안 메시아로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만민이여, 나를 따라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길을 출발할 당시에는 죽더라도 싸워야 되겠다고 몇백 번이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내니 그들이 아니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고 다짐하며 하류층의 사람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어부와 세리와 창기와 같은, 그 시대의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꼴이었으니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원통했습니다. 또 답답하고 불쌍한 그들을 모아 놓고 세계를 수습하고 책임지라는 명령을 하고 분부를 해야 했던 예수님의 가슴이 얼마나 탔겠으며,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렇게 왔다 간 예수님은 지금까지 이 땅을 위해서 구원섭리를 해 나오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한다고 했는데, 편안하면 기도할까요? 만사가 형통한데 기도할까요? 예수님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4-60, 64.5.3)
예수님은 왜 재림해야 하나
하나님의 복귀역사의 목적은 전세계를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영육 안팎으로 완전복귀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냈고, 그것을 완결짓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에게 복을 달라고 합니다. 가진 복을 빼앗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세계 앞에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복을 준다면 모를까. 예수님이 기도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거기에 동참시켜서 성과를 거두게 되면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축복의 기반은 닦아 나올 수 있지만, 그 민족이 축복받는 민족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또한 축복받는 사도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잘난 사도요, 수제자요, 세 제자라 해도 그들은 신부의 자리에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는 종입니다. 신부의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복귀의 한을 남기고 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늘 앞에, 이스라엘 앞에 역사적으로 책임 못 한 모든 것을 다시 수습해 나오면서, 한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한 가정이 고통을 받으면 대신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대신 탕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천년 동안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불쌍하신 분입니다. 역사 이래 제일 불쌍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천만 가지 고통과 비통한 사연을 예수님과 인연맺어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성도들은 고통을 받게 될 때 반드시 하나님 앞에 기도의 조건을 세워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소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수습하여 실패하기 전의 입장에서 세계적인 이스라엘을 복귀하기 위해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깨져 버렸기 때문에, 영육이 아니라, 영적으로만 개인을 수습하고, 가정을 수습하고, 종족․민족․국가․세계를 수습해야 했던 것입니다.
4천년 준비하여 메시아를 맞았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영육 아울러 메시아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죄악에서 해방을 받아 지상에서 죄 없는 아들딸들을 번식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적으로만 이루어 놓았으니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생활이 무엇입니까? 육신을 치는 생활입니다. 먹고 싶은 것 먹지 않고 금식하고 몸을 치는 것입니다. 몸을 사탄으로부터 갈라놓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날은 잔칫날인데 잔칫날엔 그냥 먹고 노는 것입니다. 슬프게 살기 위해서 신랑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러한 신랑을 죽였으니 슬프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사명으로 보아 불쌍하신 분이고, 시대적인 한을 품고 갔으니 불쌍하신 분입니다. 그는 또 역사적인 사명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갔으니 불쌍하신 분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는 한스러운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영육 아울러 주님과 상봉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이스라엘 민족의 터전이 아직까지 지상에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은 평면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갈라져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대적인 환경은 종교의 자유를 주고 또 국가적으로 국교화를 실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낙원세계와 맞먹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외적 기준이 영적인 기반에 화할 수 있는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기준에 화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이스라엘권을 다시 세우고 세계적인 유대교회를 세워, 오실 주님이 만민과 상봉할 수 있는 환경적 터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의 주권국가를 중심으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 입장에서 영육 아우른 통치의 기반을 세워야 합니다. 이러한 목적이 세계적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의 날입니다. (14-62, 64.5.3)
예수님을 해방해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입장에서 책임과 사명을 해야 할 예수님, 이 땅에 왔다 간 이후 지금까지 2천년사를 짊어지고 속죄의 사명을 하고 있는 예수님은 불쌍한 분입니다. 언제 한 번 하나님과 함께 살아 본 적이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산다고 나와 있어요? 기도하고 있다고 했지요. 언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여! 이제 당신의 아들딸이 있사옵고, 만국이 있사옵고, 만민이 있사옵고, 천하가 있사옵니다. 이는 본래의 사탄의 침범을 받지 않은 선의 세계와 같사오니, 아담 해와의 승리의 기반 위에서 받아야 했던 영광을 나로 말미암아 받으시옵소서' 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님은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보내기 위해 수고하신 하나님이 목적의 한 날을 맞지 못하고 슬픔의 한 날을 맞이했으니 불쌍하시구나! 이스라엘이 불쌍한 민족이 되었구나! 제1 이스라엘이 망하여 하나님의 축복권내로 다시 부활해야 하니 불쌍하구나!' 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자신이 십자가에 죽어 가면 이스라엘 후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런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육 아울러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예수님이 원한을 품고 가니 후손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 후손들의 원한을 지상에서 탕감복귀해야 할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땅 위의 골고다 산정에 하나님의 한이 맺혀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이 맺혀 있고, 그 후손과 인류의 한이 맺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리적인 골고다의 길이 기독교에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가 개인적인 골고다, 가정적인 골고다, 종족적인 골고다의 길을 거쳐서 이제 세계적인 골고다의 산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2천년사를 바라보시며 우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예수님은 역사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님이요, 시대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님이요, 미래적인 슬픔을 품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억울한 심정을 품고 간 예수님이었습니다. 골고다 산상에서 십자가를 때려부수고 원수들을 심판하고 총진격해야 할 예수님이 억울한 심정을 품고 죽어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고 살아서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여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몰리는 골고다를 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감당치 않으면 안 됩니다.
신랑이 굶고 통곡하는 자리에 있는데 신부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습니까? 신랑이 하늘 앞에 무릎을 꿇고 속죄의 제물을 드리는데 신부가 편안히 먹고 잘 수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는 어떠한 입장에 있습니까? 어느 한 날 편안한 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민족적인 기준에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민족적인 기준을 넘어갈 때까지 기독교 역사는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2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여 세계적인 무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출발할 때 3대 시험을 받아 승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3대 시험에서 승리의 조건을 세워 놓고 나가야 합니다.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렇듯 불쌍하신 예수님을 신랑으로 모시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이 슬퍼하신 것보다도 더 슬퍼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실 때는 4천년 역사의 한을 풀기 위해서였지만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하나님에게는 4천년의 한에다가 예수님이 죽은 이후 2천년의 한까지 플러스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보다 더 슬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먼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영계에 있는 천사들과 영계에 있는 조상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해방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편안한 자리에 계신 줄 압니까?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세상의 운세가 어떻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면서 '오 주님, 천국 보내주소서'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불쌍하신 예수님을 해방해드리기 위해서는 역사로부터 '불쌍하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역사의 선조들로부터 '너 하나만은 우리의 후손으로서 당당하구나. 전체 역사를 네가 일으켰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또한 거기에 더하여 '시대적인 사명과 민족적인 사명을 책임지고 아들의 사명과 부모의 사명, 효자와 충신의 사명을 다했구나' 하는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14-64, 64.5.3)
참된 신부로서의 자격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오, 신랑 되신 예수님을 내가 40년 동안이나 믿고 기도하였는데…' 하며 자신들이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신부가 되는 특정 기준은 무엇이냐? 첫째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한을 품고 몸부림쳐 개인적인 승리의 증명서를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가정적인 한을 품고 세계사적인 시련노정에서 승리한 가정으로 등장하여야 하며, 종족적, 민족적인 기준에서도 승리해야 합니다. 국가․세계․하늘땅․사탄까지도 '옳소이다. 그는 천지의 역사상 처음으로 승리한 아들입니다'. 혹은 '딸입니다' 하며 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이 알고 있는 신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며느리가 되겠다고요? 하나님의 사위가 되겠다고요? 황태자의 신부가 되겠다고요? 세상에서는 대통령의 아들딸만 되어도 으스댑니다. 돈 몇 푼에 사람이 팔려다니는 세상입니다. 몇백 원만 주어도 사탄의 심부름을 하는 세상입니다. 얼마나 더럽습니까? 돈을 몇백만 원, 몇천만 원, 몇억 원만 가지고 있으면 '아이구 좋다. 아이구 좋다' 하며 따라다니는 판국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개인을 수습하여 만민을 호령할 수 있고, 가정을 수습하여 수많은 가정을 호령할 수 있고, 흩어진 종족을 수습하여 수많은 종족을 호령할 수 있고, 수많은 국가와 세계 인류를 호령할 수 있는 승리적인 권한을 갖고 하나님 앞에 공인받고 사탄 앞에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적인 모든 인연을 거치는 자리에서 하나님 입회하에 사탄으로부터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신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처해 있으되, 하나님께서 섭리해 오신 6천년 눈물의 역사를 청산하고 그 방향을 바꾸려는 사람이요, 6천년 역사의 십자가의 기대를 연결시켜 밟아 나오려는 사람이요, 6천년간 인류를 농락한 사탄을 대하여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야만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14-67, 6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