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뿌리된 자의 책임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
성경 이사야 6장 11절 이하를 보게 되면 '그 중에 10분의 1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남아 있는 뿌리가 있다면 그 뿌리로 말미암아 다시 새로운 순을 돋게 하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것을 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조상인 아담 해와는 하늘땅에서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의 뿌리로서 인간 전체의 희망과 이상을 이루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만 타락함으로써 그 근본 뿌리가 찍힘을 당하고 뽑힘을 당하여 사탄세계로 옮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경륜해 나온 하나님 섭리의 중심점은 에덴동산에서 인간 행복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이상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생명의 뿌리도 될 수 있고, 사랑의 뿌리도 될 수 있었던 그 근본의 뿌리, 곧 아담 해와를 통하여 세우려 하였던 그 근본의 뿌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섭리의 뜻을 받들어 온 역사과정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비록 천륜의 사정은 잘 몰랐지만, 그들이 뜻을 대하여 수고해 나온 것은 섭리의 목적으로서 이루어드려야 할 그 잃어버린 뿌리를 불변의 실체로 맞이하기 위한 토대를 닦아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섭리역사를 시작한 이후 4천년이 경과하는 가운데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그 뿌리를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았던 분이 바로 여러분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은 영원히 남아질 뿌리로서 하나님이 취하여 이 뿌리를 근거로 삼아 마음대로 경영하실 수 있는 하나의 포도원과 같은 형태를 타락한 지상에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늘의 섭리가 출발한 이래 4천년이 경과하여 예수님이 나타나기까지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뜻을 중심으로 하여 피눈물을 뿌리는 수고의 길이 있었음을 알아야 됩니다.
즉 종족을 대표한 섭리의 뜻도 있었고, 민족과 국가, 세계를 대신한 섭리의 뜻도 있었으며, 역사를 대신한 섭리의 뜻도 있었는데, 그 종족과 역사를 중심한 섭리의 뜻을 대신한 그 한 지역이면 지역, 환경이면 환경을 거쳐 나올 때까지 뿌리의 요소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개인으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를 완결시켜 민족으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로 완결시키고, 나아가서 세계로서 세워질 수 있는 뿌리까지 완결시키는 실체로 보내심을 받았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30여년 평생의 그 수고와 돌아가신 이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의 모든 수고는 세계를 대표해서 한 수고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완성한 하나의 뿌리로서 하나님 앞에 세워질 때까지, 그 배후에 숨겨진 뿌리로서 역사의 어려운 고비 고비를 대행하여 원수와 싸워 나온 선지선열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1-137, 56.7.1)
숨은 수고의 생애를 산 아브라함
예수님이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서 세움을 받을 수 있었던 역사적인 배후의 존재가 누구였느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남이 알아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즉 사탄권내인 원수의 나라에 사로잡혀 천륜의 뜻을 배반할 수 있는 입장에서도 하늘을 배반하지 아니한 숨은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와 같이 숨겨진 뿌리와 같은 아브라함은 시대가 악하고, 역사가 혼란되고, 환경이 어지러울지라도 그러한 모든 처지를 피하지 아니하고 극복해 나갔으며, 오히려 몰락해 가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나쁘고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좋은 그 무엇을 가졌다면 그것을 자랑하려는 것이 인간들의 속성인데,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 위해 마음에 약속된 그 크나큰 섭리의 뜻을 갖고 있으면서,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소망 가운데서 오직 세움받은 하나의 뿌리로서, 어느 누가 건드려도, 뽑으려 해도 끄떡없이 확고부동한 기준을 닦기 위해 온갖 핍박과 수모도 참고 극복해 온 숨은 수고의 생애를 살다 갔습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자기 일신의 불변의 기대를 세우는 것은 물론 자기 일신의 희생적인 생활이 뿌려진 씨가 되어, 온 지상 만민을 위함과 동시에, 악한 민족까지도 하늘 앞으로 돌이킬 수 있는 하나의 불변의 기대를 세움으로써 이 기준을 붙들고 변치 않겠다는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곳이었고 아브라함이 있는 곳과는 상관도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하늘의 뜻을 알든 모르든, 그 민족이야 당하게 되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늘 앞에 섭리적인 사명감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을 느꼈기 때문에 낮이나 밤이나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하여 안타까워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성 중에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가 천상에 사무쳐 하나님과 일문일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무리가 있었다면, 또 그 무리 가운데 아브라함을 알아보는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늘 앞에 간절히 호소하여 소돔과 고모라에 내릴 심판을 면케 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을 것입니다. 의인 몇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의인이 있다는 것을 조건삼아 하나님에게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아버지시여, 의인과 악인을 함께 불로 심판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호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이, 자기 혼자만이 소돔과 고모라를 대표하여 기도하게 되는 것을 느꼈을 때 아브라함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일신의 행복, 자기 일신의 안위를 돌보는 것보다도 종족을 위하여 생명을 걸어 놓고 호소했던 숨은 기준이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138, 56.7.1)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예수님이 믿음의 열매로서 나타나실 수 있었던 것도 아브라함과 같은 분이 하늘의 섭리 앞에 세워져서 땅 위에 나타나지 아니한 숨은 뿌리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섭리역사과정에 다른 모든 것이 다 꺾였을지라도 천상을 대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불변의 믿음을 실증할 수 있는 아브라함 같은 분이 있어서 신앙의 뿌리 역할을 한 그 터전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 입장의 아브람('큰 아버지'라는 뜻)에서 믿음의 조상이 될 것을 결정받은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 된 이 한 자체보다도 그가 남이 모르는 크나큰 수고의 경로를 거쳤다 할진대, 우리는 오늘의 역사를 바라보며 나와 아브라함을 1대 1의 입장에 세워놓고 비교하고 나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입장을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하여 숨은 뿌리의 제단을 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사는 지방과 그곳 주민들을 향해 간절히 호소하고 기도하던 아브라함의 불타는 심정을 여러분 자신들도 가져야 되겠으며, 아브라함의 수고의 노정으로 세워졌던 믿음의 기대, 숨은 뿌리와 같은 기준을 여러분 자신들이 인계받아야 한다는 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의 기관의 약속을 받았는데, 이것이 이삭과 야곱을 거쳐서 모세를 통하여 민족적인 형태를 이루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계적인 범위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늘 앞에 사무치는 충성심과 믿음이 없었다면 이 땅 위에는 하늘과 접속할 수 있는 한 인연이 나올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은 오직 하늘을 향하여 사모하는 마음과 땅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와의 넓고 깊은 인연의 발판을 가질 수 있었고,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1-140, 56.7.1)
민족의 지도자가 된 모세
모세 역시 그렇습니다. 모세 자신이 민족 앞에 세움을 받기까지에는 하나의 숨은 뿌리로서 지낸 바로 궁중에서의 40년 수고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에 머무는 동안 영화롭게 입고 먹고 환희에 넘치는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궁중에 머무는 동안, 시종일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 생활의 어느 한 순간도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 모세 혼자서만 그 민족이야 알든 모르든 하늘을 향한 충성심이 변치 않았던 것입니다.
원수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불변의 핵심체로서, 어떠한 환경이 자신을 압박하고 천륜의 뜻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가로막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변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모세였습니다. 모세에게 이러한 하늘에 대한 불변의 심정과 정성 들이는 40년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후에 민족에 대한 사랑의 힘이 폭발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혈기당당한 사람으로 알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급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때려죽인 모세의 의분심은 그 순간에 충격받아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광경을 보게 될 때, 모세는 40년 동안 하늘을 향하여 애달픈 마음으로 민족을 위해 호소하였던 내적 슬픔의 심정이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선민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을 보고 억제할 수 없는 의분심이 솟아나 애급인을 때려죽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애급에 대한 의분심이 그러한 모세의 행동의 내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세의 행동에는 섭리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모세가 울분에 못 이겨 애급인을 쳐죽인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고 책임진 입장에서 죽인 것이고, 그것은 애급인이 이스라엘 민족을 박해한 죄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민족을 위해 염려하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오해하고 애급인을 쳐죽인 것을 폭로함으로써 모세는 자기의 행동이 탄로난 것을 알고 할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하던 모세는 바로 궁중에서 호화롭게 살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바로왕의 딸이 자기를 위하여 모든 청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살았던 지난날의 부귀영화를 다 잊었습니다. 그리고 양치기 옷을 입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무명의 목동의 신세였지만 그 양떼를 바라보며 옛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던 가나안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양떼를 몰고 다니지만 언젠가는 양떼를 몰고 가듯이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겠다는 사무친 마음으로 하늘 앞에 호소했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먹으나 굶으나 자나깨나 노심초사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애급의 박해와 도탄 중에서 고역을 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뼈가 녹는 듯한 슬픔을 느꼈으며, 하늘을 향하여 '여호와여! 저를 보셔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호소의 정성이 지극한 모세를 60만 대중을 애급 땅에서 이끌어내는 지도자로 세웠고, 남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 목동의 생활을 하던 모세를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숨은 뿌리의 절개를 계승받게 했고, 민족의 대표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러한 모세와 하나가 되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1-141, 56.7.1)
모세의 숨은 정성의 발판을 몰랐던 유대민족
모세가 하늘로부터 허락의 약속을 받고 애급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는 기쁨에 사무쳤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그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생애를 바치겠다고 하늘 앞에 호소하던 그 뜻이 이루어져 민족의 살길을 개척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기쁨에만 만족해 있지 않고, 이제부터 제2의 책임을 충실히 감당하겠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세는 자기를 중심삼고 행동하지 않았고, 조그만 일이나 큰일이나 어느 한 가지 일이라도 하나님과 인연을 맺지 않고 수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모세가 포악한 바로 궁중에 들어가 그들의 신 앞에 10회 이상의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험난한 광야로 이끌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즉 험난한 광야이지만 자유로운 환경으로 탈출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데 있어서 모세의 마음이 곧 자기들의 마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바로 궁중으로부터 구출해준 모세와 마음이 달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하나되지 못하여 천륜에 어긋나는 길을 감으로써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에서 하늘 앞에 호소했던 숨은 정성의 발판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이끌고 애급을 탈출한 그 날로부터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자기들을 위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세의 수고와 고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모세는 광야에서 갈라졌고, 결국 그들은 광야에서 엎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또 이스라엘 민족과 자신이 하나되지 못하는 사실에 직면하게 될 때 불신하는 민족을 책망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부족을 하늘 앞에 호소했습니다. 즉 그는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면서 '아버지여, 이 민족이 어찌하여 허락하신 땅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그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제가 책임을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를 제물삼아 민족의 멸망의 길을 막아주시옵소서'라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의 숨은 정성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가 남 모르는 애달픈 마음을 가지고 금식하는 것이 모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던들, 그들은 모세의 40일 금식 기간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불신의 놀음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들이 민족의 축복을 대신한 모세가 하나의 숨은 제물로서 하늘 앞에 바쳐지게 될 때 모세의 마음을 동정하고 그의 수고를 염려해서 시내산에 있는 모세와 같이 눈물 흘리며 하늘 앞에 호소할 수 있었던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품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홀로 민족을 대표하여 외로운 길을 갔던 것과 같이 예수님도 그러한 길을 가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희생과 모세의 민족을 대표한 제물의 노정을 통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세워진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이 가정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고 모세가 민족을 대표하여 사탄의 참소조건을 막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 인류를 대신해서 홀로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막아야 했고 승리적인 탕감의 발판을 닦아야 했습니다. (1-143, 56.7.1)
예수님은 승리의 중심이자 만민의 구세주
여러분은 예수님에게 이러한 책임이 있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으로 승리하여 불변의 터전을 갖출 때까지 예수님의 일신은 자신의 일신으로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4천년 역사과정에서 하늘 앞에 충성했던 어떠한 믿음의 중심인물보다도 더 충실했으며, 전체를 위해서 자신의 일신을 희생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30여 평생을 통하여 자신의 사명 분야에서 역사상 어느 누구도 갖추지 못하였던 전체를 대신한 중심의 형태를 이루었습니다. 만일 그러한 중심인물이 되지 못했다면, 예수님은 세계적인 섭리의 책임을 진 선봉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이 일대의 십자가를 지신 분으로 믿고 있는데, 여러분은 그러한 예수님으로만 믿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까지에는 아브라함이 쌓았던 수고의 제단이 있었고, 모세가 수고한 제물의 노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과 도탄 중에 있는 민족과 세계 인류의 고통을 느껴 '저들의 고통의 짐을 나에게 지워주시고 저들에게는 자기들이 요구하는 영원한 이상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하늘 앞에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 그들의 고통을 책임지기 위해 하루도 편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원수의 품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염려해주었고 자신의 기쁨보다도 전체의 뜻을 책임진 입장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사탄세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중심존재로, 만민의 구세주로 세움받았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처한 우리 믿는 성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뭐냐?이제까지 악인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염려하고 기도해주는 생활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끝날에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염려하며 기도해주시는 예수님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망각하고 불신한다면 우리는 끝날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1-145, 56.7.1)
뿌리의 사명을 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
만약 옛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이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서 예고해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악행을 반성하고 회개하였던들 그들은 심판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실증적으로 가르쳐주는 것이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 우리도 지난날의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불신하는 유대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지금 이 시간도 영적 시내산상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2천년 동안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마음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불신하는 유대민족을 붙들고 기도하던 애달픈 마음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서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아브라함이 의인 10인이 있으면 그들을 보아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면케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했지만, 그 소돔 고모라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이후 오늘날까지 천상에 계시면서 인간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것과 같이, 또 모세가 시내산정에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그 애달픈 심정을 체휼하여 이 시대를 붙들고 예수님 대신 염려하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의 세계적인 뜻을 대신할 수 있고 역사상의 선지선열들을 대신할 수 있는 하늘이 세운 자가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깨어 기도하고 정성들이며 찾는 일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끝날 이 땅 위에 이처럼 뿌리로서 남아지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없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도 세계적인 종말기를 맞이하게 될 때 두려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숨은 떨기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역사노정을 거쳐나오면서 하나의 중심 뿌리를 고대해 온 선조들의 바람에 응하는 존재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2천년을 하루와 같이 재림의 한 날을 고대하며 수고해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통감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역사적 중심인물들의 상대적인 입장에 세워놓고 검토하고 분석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즉 여러분 자신을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님의 상대 입장에 세워놓고 그들의 마음이자 여러분의 마음이요, 그들의 소원이자 여러분의 소원이며, 그들의 원한이자 여러분의 원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분석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하늘 앞에 나서서 담판하는 호소의 제적단을 높이 쌓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늘 앞에 호소하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기도한 것은 자기 아들딸이나 조카 롯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모든 것을 잊고 숨은 정성의 제단을 쌓았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관계되어 있던 롯은 심판을 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제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때는 내가 고대하던 뜻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있는 정성을 다하여 '아바 아버지여, 저를 세우셨사오니, 저를 부르셨사오니 소자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여러분이 이어받은 유업은 여러분 일대만의 유업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와 예수님을 거쳐 내려온 유업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러분은 모세 이래의 모든 지파를 대신해야 되고, 예수님이 필요로 했던 지파를 대신해서 하늘이 요구하는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땅은 악할지라도, 이 땅은 어두울지라도, 이 땅은 망할지라도 여러분은 하늘이 세운 숨은 뿌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1-146, 56.7.1)
하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하는것
하늘은 오늘 이때에 개인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종교의 사명을 이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요구는 아브라함이 했던 것 같은 책임을 다했느냐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애달픈 심정을 가지고 애쓰던 것과 같이 여러분이 한국 삼천만 민족이 도탄 중에 있게 될 때 모세처럼 여러분의 뜻과 마음을 다해서 애달파하고 애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창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수고하시던 것처럼 같은 뜻과 심정을 가지고 만민을 위해 예수님 대신 수고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아브라함, 모세,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았느냐고 반문을 받게 될 때에, '옳소이다, 당신이 저희들을 아시지 않나이까? 감추어진 바의 뿌리는 저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도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될 때에, 아브라함이 자기 일신을 통하여 믿음의 절개를 새운 뜻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결실될 것이고, 모세가 민족을 통하여 애원하던 뜻이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해원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세계를 대해 품었던 모든 슬픔의 요소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해원될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이 땅 위에 있다 할진대는, 아브라함이 일대에 애달파하던 마음, 모세가 일대에 애달파하던 마음, 예수님이 지금까지 애달파하신 마음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정성을 다해서 모셔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그러한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을 아브라함 대신, 모세 대신, 예수님 대신 높이고 모실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을 위해 더욱 기도하시옵소서. 더욱 활동하시옵소서'라고 해야 되겠고, 나아가 여러분이 하늘 앞에 바쳐질 수 있는 제물은 못 될망정 제단이라도 쌓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여!'라고 불러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천지창조 이래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주인의 행세를 하지 못한 그 아버지를 실감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일대에 해원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대신하여 아브라함이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가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기도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의 제단을 쌓아야 되겠습니다. (1-148, 5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