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우리가 가야 할 야곱의 본보기노정 (사랑이야기 - 제 5권 구원 역사편 - 제 2장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철장왕 | 20180923105725

4. 우리가 가야 할 야곱의 본보기노정
  
  
삼단계 과정을 거쳐야 하는 복귀노정
  
우리 신앙노정은 반드시 탕감해 가지고 복귀한다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리고 탕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 제물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내 전체를 대신해서 드리는 조건물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적이라면 제물은 외적인 것으로서 그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해 나가는 데는, 우리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한꺼번에 떨어졌지만 한꺼번에 완성단계까지 넘어가게 돼 있지 않습니다. 완성기준을 넘어갈 때까지는 반드시 소생․장성․완성단계를 거쳐 가지고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완성단계까지 넘어가는 데 있어서 탕감조건물을 드리는 데는 소생적 탕감조건물, 장성적 탕감조건물, 완성적 탕감조건물을 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야곱이 소생․장성․완성과정을 어떻게 거쳐갔느냐?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직접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 노정이 모세 노정이 되고, 모세 노정이 예수님 노정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야곱 노정은 한 개인이 간 노정이지만 복귀섭리의 전체적 과정 형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가 전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면, 구약시대가 있고 신약시대가 있고 성약시대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시대는 제물, 다시 말하면 만물을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 신약시대는 사람을 통해서, 즉 아들을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 성약시대는 뭐냐 하면 부모를 통해서 드리는 제물시대입니다. 그건 물질과 자녀와 부모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을 중심삼고 본다면, 야곱의 소유와, 자녀와, 부모가 된 자기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섭리 앞에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책임자가 될 때까지는 여러분이 배운 거와 마찬가지로 에서를 굴복시키는 싸움의 노정을 거쳐갔던 것입니다. 
에서는 사탄세계를 대표한 입장입니다. 야곱은 하늘편을 대신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인 아벨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 이들이 완전히 하나되어 가지고 사탄을 굴복시키고 넘어갔느냐 하면 그런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본래는 야곱이 하란에 가지 아니하고 고향에서 에서와 더불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데, 에서가 반대하여 죽이려고 하니 도망가서 생활했기 때문에 탕감이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반대함으로써 이삭과 자기 어머니, 즉 자기 부모 앞에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란에 가 가지고 생활한 것입니다. 거기에 가 가지고 야곱이 생활을 시작했는데, 야곱이 제물 드릴 수 있는 물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라반의 물건이지 야곱의 물건이 아닙니다. 결국 에서를 피해서 갔지만, 더 외적인 면에서 에서와 같은 입장에 선 것이 라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가는 길을 언제나 라반이 방해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이 가는 입장과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부모하고 하나되었느냐 하면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된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하나 못 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은 라반의 집에 간 야곱과 같은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 물건을 찾아 가지고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공인을 받고 자기 고향에 돌아와서 결국 에서를 굴복시켜 가지고 자기 부모와 하나되어야 했던 야곱과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은 복귀의 노정과 방불(彷彿)한 것입니다. (67-113, 73.5.27)
  
  
고향에 돌아가야겠다는 일념 속에 살았던 야곱
  
야곱이 제물로 드려야 할 물건은 야곱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찾아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협조를 받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보다 먼저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 앞에 축복받을 수 있는,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그 사상적인 전통을 어디에 세워야 했느냐? '제물하고 나' 이것으로 끝나면 간단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서 제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스라엘 민족과 나라가 필요로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제물을 드려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물을 드리는 데 있어서 나라라든가 가정이라든가 하는 보다 공적인 것을 하나님과 인연맺기 위해 드린다는 그 사상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야곱이 하나님의 협조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됩니다. 
야곱이 하란 생활에서 라반의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마음에 추구했던 것은 고향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는 축복이 있다면 그것을 받고 그 땅에서 잘살겠다는 것보다도 우리 집과 더불어, 우리 형제와 더불어 잘살겠다는 관념이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란 땅에서 자기 처자와 잘살겠다는 것보다는 고향에 돌아가 가지고 부모를 모시고 형제와 더불어 하나되어 잘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기초적인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부모와 하나되는 동시에 형제와 하나되느냐 하는 것이 야곱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잊을 수 없는 주류사상이었습니다. 양치는 목자생활을 하면서, 외로운 생활을 하면 할수록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통해서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님이 축복한 자기 부모 이삭의 가정, 자기 부모와 아브라함으부터 이어받은 그 축복을 존중하는 마음이 언제나 사무쳤던 것입니다. 형님을 대해서도 장자의 기업을 몽땅 빼앗았으니까 형님이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형님을 동정하는 마음도 가졌던 것입니다. 
야곱이 생활하는 데 있어서 제일 필요로 했던 것은, 환경이 어렵고 고독한 생활 가운데로, 핍박의 생활 가운데로 말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자리에서 형님을 원망한다든가 부모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환경을 통해서 그런 형님을 위하고 부모를 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야곱은 언제나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기가 일생 동안 수고해서 취한 모든 것을 전부 다 그들에게 나눠주고도 감사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거기서 자기를 중심삼아 가지고, 내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야곱의 신앙노정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축복한 것은 야곱 개인을 잘살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잘살게 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사상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67-115, 73.5.27)
  
  
하나님과 일체 된 가정을 이룬 야곱 가정
  
이리하여 하나님은 야곱에게 21년 동안을 갖추게 해서 여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축복해주었습니다. 7년이 연장되어 가지고 21년이 된 내용에 대해서는 잘 알 것입니다. 이래서 21년 동안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라반도 두려워할 수 있는, 라반 자신도 야곱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축복을 해준 것입니다. 이리하여 3일노정을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훔쳐 나오게 된 것입니다. 훔쳐 가지고 나오는데 라반이 야곱을 찾아와서 우상을 가지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만약 레아가 자기 아버지를 동정하여 그 우상이 있는 곳을 가르쳐주었다면, 야곱의 21년노정은 몽땅 수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레아는 자기 아버지 라반을 속였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야곱이 자기 아버지를 속이고 야곱의 처 레아도 자기 아버지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그 속인 목적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였다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서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복귀노정에 있어서 필요한 조건이 된 것입니다. 
야곱을 중심삼고 레아가 자기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나왔다는 것은 레아가 야곱과 완전히 하나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 부부는, 야곱 가정의 형성은 역사시대에 없었던 것으로, 새로운 가정의 출발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라반의 딸이 아버지 라반과 하나 안 되고 야곱과 하나됨으로써 야곱이 가진 모든 물건을 비로소 그냥 그대로 소유할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담 가정에 있어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을 속인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 즉 자기 부모를 속였는데, 복귀노정에 있어서 아버지를 속인 딸과 아들이 만났다는 그 기준이 야곱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레아가 반대해 가지고 라반과 하나됐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갖고 있는 물건도 그렇지만 딸려 있는 아들딸까지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둘이 갈라졌다면 아들을 대해 가지고 '야 가자' 하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아들딸이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둘이 갈라지게 되면 아들딸도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가인 아벨을 중심삼은 복귀의 길이 완결 안 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으면 물질 또한 하늘 것만이 될 수 없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제물로 드릴 수 없는 물건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아와 야곱이 하나될 수 있었다는 이 사실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둘이 하나됨으로써 새로 어머니 아버지도 결정되었고, 그 다음에는 자기 아들딸도 하나될 수 있었고, 만물도 완전히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이 셋이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67-117, 73.5.27)
  
  
합당한 제물을 드리려면 영육으로 사탄을 굴복시켜야
  
그래서 야곱은 부모와 자식과 물질이 하나되어 가지고, 그 물질을 하나님 앞에 한꺼번에 바치게 될 때 하나님이 완전히 받아주실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바치는 데는 그냥 그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야곱만 있기 때문에 그냥 바칠 수 없고 가인보다도 나은 자리에서 바쳐야 됩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가인 자리보다도 나은 자리에서만이 아벨이 제물을 바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탄이 참소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바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바칠 때는 반드시 아벨 제물이 가인 제물보다 나아야 됩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그 가인이 에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평면적인 입장에 있지만 하나님과 사탄은 입체적인 입장에서 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내 갖고 있는 소유나, 내 갖고 있는 아들이나, 내 갖고 있는 아내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니 내 것이 아니다'라는 관념을 가져야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을 뜻 하나 이루는 데 제시하겠다는 주류사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고향을 찾아가지만 문제의 해결점은 에서입니다. 에서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과 하나되고 사탄은 에서와 하나되어 야곱이라는 인물을 놓고, 야곱이 어떻게 하늘편의 뜻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일치될 수 있는 사상적 관을 갖추느냐, 제물을 드릴 수 있는 당당한 아벨의 자리에 서느냐, 그렇지 않으면 조건에 걸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과 사탄이 주시하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에서보다 나아야 됩니다. 에서보다 나아야 된다는 말은 실체적인 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에서까지도 이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야곱은 고향을 찾아가 최후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에서를 놓고 담판기도를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만약 고향에 가는 날에는 에서가 죽이려고 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이 틀어지겠으니까 에서가 반대하지 않고 환영할 수 있기를 바라 가지고 얍복강가에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가 가는 길은 자기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담이 실수한 것을 탕감하기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실수한 것은 뭐냐?첫번 실수한 것은 천사장한테 굴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으로 천사장을 이겨야 됩니다. 실체 에서를 굴복시키기 전에 영적인 에서와 같은 천사장을 굴복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천사장한테 굴복한 것을 실체 에서를 중심삼고 탕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으로 천사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67-118, 73.5.27)
  
  
생명을 걸고 천사와 싸워 승리한 야곱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천사장을 굴복시키는 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 얍복강가에서 천사하고 씨름한 것입니다. 모든 소유와 가정 전부를 걸고 씨름한 것입니다. 야곱이 만약 이 씨름에서 지면 아내와 하나됐고, 자식과 하나됐고, 물건과 하나된 것을 전부 다 사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다 깨뜨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그렇게 밤새껏 기진맥진할 정도로 싸웠어도 승패가 나지 않았습니다. 천사하고 씨름하면서 그냥 그대로 붙들고만 있었겠어요, 아니면 지기도 했겠어요? 야곱이 많이 넘어갔겠어요, 천사가 많이 넘어갔겠어요? 야곱이 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아직 안 졌다면서 또 하자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생각하기를 '계속이다. 나 죽을 때까지 계속이다. 너와 나의 씨름은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나를 이기려면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한 것입니다. 아직까지 죽지 않았으니 안 졌다는 게 멋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훌륭한 점입니다. 
이것은 신앙노정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노정에서 사탄한테 번번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졌지만 또 하는 것입니다. 밤새껏, 일주일이든 몇 달이든 생명이 끝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천사도 곤란한 것이, 씨름에서 이기려고 그랬지 야곱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죽이게 되면 천사도 걸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천사는 야단났습니다. 놓질 않으니까 야단났다는 것입니다. 죽일 수도 없고, 아주 곤란한 입장에 몰려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밤을 새워 싸우다가 날이 밝아 오니까, 할 수 없이 천사가 떠나야 되겠기 때문에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천사가 어떻게 야곱을 칠 수 있느냐? 야곱이 지지 않았으면 절대 못 치는데 졌기 때문에 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나는 끝까지 너를 이겨야 되겠다. 다리가 잘라지겠으면 잘라져라. 나는 죽을 때까지 너를 이기겠다' 하는 그런 각오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멀었다' 이렇게 나온 것입니다. 천사가 가만 보니까 야곱의 환도뼈를 쳤어도 야곱이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더 붙들고 '나 모르겠다. 너 죽어라' 하면서 사생결단할 수 있는 이런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젠 내가 졌다' 하는 조건을 안 들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천사는 할 수 없이 '내가 졌다. 네가 승리했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축복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역사시대에 천사와 싸워서 이긴 단 하나의 조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걸고 싸워 승리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명내기였습니다. 이래 가지고 영적으로 천사를 굴복시킨 것은, 에덴동산에서 우리 인류 조상이 천사한테 굴복했던 것을 다시 타고 넘은 자리에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67-120, 73.5.27)
  
  
전체의 소유물을 걸고 형 에서를 굴복시킨 야곱
  
그 다음에는 에서라는 존재가 남아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해 가지고 천사장에게 굴복한 것은 아담 자신이 실체 천사장이 된 것과 같은 입장인데, 이것을 탕감하기 위한 입장에 있는 야곱은 실체 천사와 같은 에서를 굴복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자기 생명과 자기 욕망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해야 될 것이었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곱이 아담 대신 아담이 실패한 실체적 기준을 넘으려면 자기에게 축복해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은 절대 변치 않는다는 이 신념을 가지고 에서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이 자리를 막아내야 한다는 그런 신앙의 기질이 강하게 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여기를 침범할 수 없다는 그러한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서를 찾아가지 않고 딴 데 가서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 형님이면 다인가? 형님이면 형님이지 뭐야?' 하면서 딴 곳에 가 가지고 살 수도 있지만, 과거에 맺혔던 모든 것을 풀겠다는 입장에서 에서를 찾아간 것입니다. 찾아가는 데는 순서대로, 그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종이나 아내나 전부 다 에서 앞에 내놓고 '이거 전부 다 형님 것이오' 한 것입니다. 이걸 다 당신이 갖더라도 한 가지 하나님의 뜻만을 내가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한 아담은 자기 아내와 자식과 만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중요시해서 모든 만물을 잃어버리더라도 뜻을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가정적으로 전체 소유를 가지고 에서와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그때 '이 물건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보다 나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는 못 갖는다. 하나님 앞에 반대되는 사람은 못 갖는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건을 갖는 날에는 나와 하나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된다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서는 야곱이 주는 그 예물을 받고 나서 비로소 마음이 풀렸습니다. 마음이 풀렸다는 것은 그런 조건에 일치되어 가지고 그 물건을 받음으로써 사탄이, 영적 천사가 굴복했고, 실체 천사형의 입장에 있는 에서가 그러한 조건이 제시되는 기반에 굴복함으로써 야곱이 환영받아 하나님이 세우려 하던 탕감의 내용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야곱이 혼자 가서 영적 천사하고 싸움을 하지 않고, 야곱의 가족하고 야곱하고 에서하고 같은 자리에서 천사장까지 합해 가지고 싸웠으면 그 판국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야곱과 천사 둘이 밤새껏 씨름하며 싸웠다면 그 종들과 그 아들딸도 싸웠을 것입니다. 이걸 보면, 이렇게 갈라 가지고 작전한 것이 얼마나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원수의 입장에서, 죽이려고 했던 형과 동생이 하나되어서 서로 붙안고 눈물을 흘리며 복을 빌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설정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야곱이 걸어온 이 노정을 보면 간단하지만 역사적인 섭리노정의 전면을 보여준 것입니다. (67-121, 73.5.27)
  
  
야곱이 21년노정에서 승리한 비결
  
야곱 노정과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야곱 노정은 우리가 가는 길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야곱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에게 있다' 하는 입장에서 부모 형제의 반대를 받고 집에서 나왔습니다. 부모들이 반대하고, 형제들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어서 하란에 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다른 곳에 갔습니다. 거기서 의붓자식, 다시 말하면 머슴살이 생활을 했습니다. 밤에도 '야 뭘 해라' 하면 '예' 해야 되고, '야 일어나, 이 녀석아' 해도, '예' 해야 되는 것입니다. 21년 동안 별의별 일을 다 했을 것입니다. 잠자는 것도 눈치 봐야 되고, 깨서도 눈치를 봐야 되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조는 것을 라반이 보면 '야, 너 고단하니까 졸아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먹다가도 '야! 뭘 해라' 하면 '예' 하고 나가서 일했습니다. 그것이 7년노정이 될 것인데 21년노정이 돼 버렸습니다. 거기서부터 2천년의 역사가 생겨났습니다.
이래서 이것을 이어받을 수 있는 높은 차원으로 2천년을 올라가서 메시아 예수님이 오게 된 것입니다. 2천년 떨어진 것을, 아담이 떨어진 것을 야곱을 통해서 2천년 올라가 가지고 아담이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년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비참사를 야곱의 20년 과정에서 다 탕감을 지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2천년 동안 떨어져 내려오던 모든 것이 야곱에게 와서 재현되어 가지고 부딪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번씩이나 라반이 약속을 깨뜨리고 속였습니다. 그것은 소생․장성․완성의 삼 삼은 구(3×3=9), 9수를 넘어 10수, 이 원리결과주관권내를 거치는 그 과정에서 전체 역사를 대표해서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원리결과주관권을 넘어선 것이 됩니다. 거기에서 라반을 공격하면 안 됩니다. 라반 앞에 끝까지 한 때를 바라보고 참고 나가야 됩니다. 혈기를 냈다면 다 깨집니다. 한 가지 그런 일이 진행되고 그런 일을 당하면 당할수록 라반은 점점점 후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축복해준 '하나님이 나하고 같이 있다' 하는 이것 가지고 이겼습니다. 딴 것 없습니다. 이긴 비결은 '너는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지만 나는 하나님이 같이하고 있다' 하는 자신감입니다. 이것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야곱은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생명이요, 야곱이 21년 동안 극복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사상입니다. '아무리 반대해도 너는 굴복하는 것이다. 내가 승리하는 것이다' 하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67-123, 73.5.27)
  
  
야곱노정이 곧 우리들의 노정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로 가야 되느냐?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야곱과 같이 이 세상 축복을, '통일교회 앞에는 세계를, 하늘땅을 전부 다 허락한다' 하는 축복을 이미 받았습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서가 먼저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 것은 내 것이다. 장자의 기업을 빼앗을 수 있다' 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야곱과 같이 그걸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네 것이니까 네가 가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네 것으로 축복해주었으니까 사탄세계에 가서 찾아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이 없습니다. 또 부모나 형제도 없습니다. 야곱과 같이 쫓겨나서 하란으로 가야 할 것인데 무슨 부모나 형제가 있어요? 야곱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야 되겠소!' 하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 가지고는 복귀의 책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다 잃어버린 거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 것도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사탄한테 가서 싸워 가지고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래, 가야 할 곳은 어디예요? 하란입니다. 그곳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물건을 갖고 싶지요? 아내를 갖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들이 어디 있어요? 그러면 아들을 갖고 있어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만 따라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두면 죽으라는 것이고, '가서 찾아오라'고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7년노정을 두고 나아가야 한다는 공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연장되면 21년 걸리고, 그것이 또 연장되면 2천년이 걸려 버립니다. 그건 영원히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제일 무서운 게 전도 나가지 말라는 말이 됩니다.
복귀노정이 무엇이냐 하면, 종에서부터 양자, 양자에서 아들, 아들에서 부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4단계입니다. 이것을 한 단계 한 단계 나누어서 하고 싶어요, 4단계를 한꺼번에 하고 싶어요? 한꺼번에 하려면 4배의 희생을 해야 됩니다. 야곱이 하란에 가 가지고 그렇게 천대받고, 죽도록 천사하고 싸우고, 에서하고 싸우고 이렇게 하는 데서 생명을 걸고서야 이겼습니다. 
야곱 노정에 있어서 라반을 대하던 시대는 육적 고통 시대고, 그 다음에 하란에서 고향을 찾아가 에서하고 싸울 때까지는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라반 집에서는 육적 고통 시대고, 하란에서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천사하고 싸우고 걱정을 하는 그런 마음적 고통 시대입니다. 그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육도 죽을 각오를 하고 마음도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이래 가지고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움으로써 육과 영이 둘 다 고통을 받아 비로소 하나되어 가지고 상극관계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하란에서 그렇게 끈기 있게 21년 동안 참는 훈련을 안 했으면 얍복강가에서 천사한테 졌을 것입니다. 21년 동안 싸웠던 모든 것이 오늘 이 시간에 승패가 결정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야곱은 끈기 있게 최후까지 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를 굴복시키고 부모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입니다. 
그러면 부모 앞에 돌아가서는 무엇을 내놓아야 되느냐? '당신이 잃어버렸던 에서도 있고 야곱도 있소!'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이 있습니다. 아벨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 잃어버리게 했던 그 모든 만물도 있습니다. 아담 가정이 잃어버린 가정도 있습니다' 해야 됩니다. 이걸 내놔야 복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가인이 여기 있소. 아벨이 여기 있소' 하고 둘이 싸워서 갈라졌던 것을 하나 만들어 전부 다 바쳐야 됩니다. 그 다음엔 '아담이 잃어버린 아내도 여기 있소. 내가 대신 전부 다 드립니다' 해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다 맞추는 것입니다. 그것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것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도 그 노정을 가고, 예수님도 국가적인 그 노정을 가는 것입니다. 야곱 노정이 모세 노정이 되고, 모세 노정이 예수님 노정이 되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 노정은 야곱 노정과 맞먹는 것입니다. (67-125, 73.5.27)
  
  
통일교인이 가야 할 축복노정
  
여러분 자신들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됩니다. 국가면 국가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되고, 세계도 야곱이 간 길을 가야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종족적으로도, 민족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딱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란에 가 가지고 전도하는 것은 내가 사랑할 아내와 내가 사랑할 아들과 내가 사랑할 물질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반대한다고 했다간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 21년을 참는 게 어려워요? 그걸 못 참으면 살았어도 죽은 목숨입니다. 죽으면 아무 것도 안 남습니다. 그걸 알고 나면 결사적으로 하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3년이 되면 축복해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물질을 복귀하고, 그 다음엔 가인 아벨을 복귀하고 나서야 잃어버린 아담을 복귀하고 해와를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걸 하고 나서 가인 아벨이 하나돼 가지고야 아담의 자리, 해와의 자리에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자기 피땀을 흘려서 자기가 상대할 수 있는 물질을 가져야 되고, 자기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아들딸을 가져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가인 아벨과 같은 형제를 가져야 됩니다. 그래야 부모를 복귀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축복받을 수 있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원칙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 안에 있는 처녀 총각을 중심삼고 상대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자기가 혜택받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는 그게 안 됩니다. 자기가 세 사람 이상 전도를 해 놓고야 가능합니다. 자기가 먹고 살고 있는 것의 3배를 하나님 앞에 드려 놓고야 하나님의 복을, 혜택을 입습니다. 교회에 들어와 신세지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3시대를 복귀해야 되기 때문인데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안 가지고 들어와서 통일교회에 들어오자마자 󰡐통일교회 처녀, 통일교회 총각들 좋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혜택받는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상이 틀렸습니다. 그것은 원칙에 위배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교회에 들어와서 전도도 안 하고 이렇게 하겠다면 도둑놈입니다. 기생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축복해줄 때는 '네가 데려온 네 아들딸은 네 것 삼아주마. 네가 가져온 물건은 네 것 삼아주마' 하는 것입니다. 3배를 가져와야 아들딸한테 다 나누어줍니다. 그래야 세 아들이 되고, 세 아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물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아들을 찾으면 세 아들에게 축복을 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축복은 전부 다 하나님이 해주는 것입니다. 세 아들이 있어야 되고 물질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밥은 어떻게 먹고 사나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먹고 살 물질의 3배를 해놓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다 해야 됩니다. (67-129, 73.5.27)
  
  
어려운 신앙길을 가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한 것
  
그것은 누구 때문에 하느냐?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선생님이 하라고 해서 하니까, 선생님 얘기를 들어서 하니까 선생님을 위해 하지' 하겠지만 천만에! 또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하지' 하겠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일입니다. 선생님이 닦아 놓은 기반을 여러분이 이용해 가지고 덕보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수고한 것을 여러분이 공짜로 신세를 지는 것입니다. 그 혜택권내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선생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까? 
6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신세를 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그런 걸 알았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하는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협조 안 해주고 어떻게 뜻을 이루느냐?' 하며 불평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가서 일하게 된다면 '아이쿠, 힘들어! 선생님이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고생을 시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수십년 싸워 나온 걸 그냥 그대로 갖다가 뿌리를 삼아 가지고 거기에 접붙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불평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전도는 결국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또 나라를 찾는 것도 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넘어가야 할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세계를 넘어가야 할 길도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민이 가야 할 길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러한 단계를 차차 밟아 올라가야 될 텐데, 선생님이 국가면 국가기반을 닦아주어서 그 국가기반에서부터 세계기반으로 한 단계 넘어갈 수 있는 은사를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금년에 자란 나뭇가지는 수십년짜리 뿌리로부터 줄기의 혜택을 입어야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 혜택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 혜택을 입어 가지고 현재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감사해야 됩니다. 어디까지나 신세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계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되고, 선생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지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7-132, 73.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