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심인물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
인간을 찾아 세우기 위해 섭리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그분이 계획한 모든 것은 성사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성사되어야만 되고, 또 성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섭리를 추진해 나오는 데도 하나님 혼자 해 나온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시작했다 하면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시작한 것은 모두가 성공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이 섭리를 추진시킨다면 문제가 없지만,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 혼자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섭리에 있어서 인간이 저지른 죄는 인간 스스로 탕감해야 하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대신 탕감해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은 장본인이 죄의 대가를 치러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식이 죄를 지었는데 부모가 대신 복역하여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스스로가 타락을 했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을 구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님 자신이 선두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오는 데 있어서도 어디까지나 인간을 앞에 내세워 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섭리의 뜻에 협조할 수 있는 면을 가려 나오도록 하면서 역사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면에 계시면서 외적인 면에 언제나 인간을 세워서 역사하였습니다. 사람을 세워 역사하는 데도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떠한 계획 밑에서 한 때를 예정해 놓고 거기에 알맞는 인간을 찾아 세우기 위해 역사노정을 섭리해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57-287, 72.6.5)
탕감복귀를 하기 위해서는 믿지 못할 자리에서 믿어야
예를 들면, 아담이 타락한 이후 노아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1600년 기간을 준비했습니다. 1600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했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성사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것을 결정짓기 위해서는 한 사람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라는 한 사람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수고한 그 기간 전체의 공적을 그냥 그대로 노아 자신이 이어받아 가지고 영광된 자리에 서면 좋았겠지만, 하나님은 때를 맞이하여 노아를 세웠어도 노아 앞에 영광의 생활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택해 가지고 도리어 이해할 수 없는 자리에 내몰았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야 할 텐데 얼토당토않게 산꼭대기에 지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더욱이나 세계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노아마저도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출발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믿지 못할 그 말씀을 믿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면서 120년 동안 방주를 짓기에 온갖 충성을 다했습니다. 노아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그 기간에는 즐거운 때가 없었습니다. 또 방주를 짓는 일도 물론 귀하겠지만, 그 방주를 지어 나가는 매일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노아의 심적인 태도가 더더욱 문제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일 삼천만 민족이 살고 있는 한국 땅에 그런 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배를 짓는 데 충청도나 강원도 어디든지 좋지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배를 짓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여러분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건 미친 녀석이야! 말도 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까지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텐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은 더욱이나 미친 사람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정상적으로 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게 한 때를 마련하기 위하여 160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준비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한 사람을 세워 그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하게 해야 할 하나님이지만, 여기에는 정상적인 입장에서 명령을 하지 못하는 연유가 개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서 섭리적인 뜻을 이루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뜻을 이루어 놓기를 무엇보다도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리에 내세우지 못하느냐?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것을 할 수 있는데 왜 못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면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본래 인간을 타락하라고 지은 것이 아닙니다. 타락해서는 안 되게끔 지은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이렇게 하겠다'는 말씀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에 못 한 것이 아니라 사람 때문에 못 했습니다. 사람의 불신 때문에 못 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못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정상적인 자리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자연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자리에서 믿어야 했던 아담 해와가 믿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상적인 자리에서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믿지 못할 자리에서 믿어야 됩니다. 정상적인 자리에서 죄를 지었지만 그것을 탕감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탕감해야 됩니다.
여러분도 만일 죄를 짓게 되면, 5년이면 5년, 10년이면 10년 형을 받아 교도소에 들어가서 복역해야 됩니다. 복역하는 것은 정상적이 아니라 비정상적입니다. 거기는 모든 체제가 자유를 허락지 않습니다. 제재권내에서 자기 스스로의 입장을 바라보면서 그 형기가 찰 때까지 그 환경을 정상으로 여기며 돌파해 넘어가야만 해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노아에게 하나님이 방주를 산꼭대기에 지으라고 명한 것은 노아가 미워서가 아니라, 타락하였던 근본, 그 원칙이 어긋난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던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내적인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였겠느냐 하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57-289, 72.6.5)
노아의 절대적인 믿음과 각오
노아에게는 외로울 때, 어려울 때, 슬플 때, 고독이 극심할 때 등 여러 가지 사정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나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그것을 극복해 냈습니다. 내적인 승리의 심정적 터전을 갖지 못하였다면 노아도 역사시대에 실패한 인물로 흘러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그런 어려움이 부딪쳐 올 때마다 내적으로 새로이 결심하고 다짐하였던 것은 '하나님은 틀림없는 분이다. 나에게 이렇게 명령하고 나를 이런 자리에 세워준 것은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세상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하는 내정적인 심정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부딪치는 그 환경에 있어서 하루하루 개척자의 사명을 연이어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한 10년쯤 지나서는 노아를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20년쯤 지나가면 바라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일 문제는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자기 어머니라든가 아내, 아들딸이 있다면 그 가정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노아의 어머니가 있었다면 노아를 칭찬했겠어요?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아내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또 그의 아들딸들도 반대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우리 아버지는 돌았다'고 했을 것입니다.
만일 노아가 이와 같은 가정의 반대에 타격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뜻은 여기서 좌절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반대하더라도 이것을 극복하고 밀고 나갈 수 있는, 그러한 신념을 다짐할 수 있는 노아가 안 되었다면 그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이 반대하더라도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고 자각된 자기를 갖고 있지 못할 때는 그 환경에 꺾이는 것입니다.
노아의 아내가 말을 듣지 않고 반대하기 시작했으면 노아에게 옷을 제대로 해줬겠어요, 밥을 제대로 해줬겠어요? 노아가 아랫방에서 자면 아내는 웃방에서 자려 하고, 번번이 상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환경에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이렇게 몇 해가 지나 반대해 봐야 끝장이 안 날 것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반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를 해 가지고 꺾을 가망성이 있을 때는 반대하지만, 아예 가망성이 없게 될 때는 여편네나 자식들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만성이 되어서 반대하지 않는 자리를 지나서야 하나님의 뜻과 소망이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동네방네 사람들이 반대하다가 전부 지쳐 떨어졌고, 자기 아들딸이 반대하다가 지쳐 떨어졌고, 자기 아내마저 반대하다가 지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 것이냐? 가까운 데 있는 사람은 다 지쳐 떨어지고 더 이상 반대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나라일 것입니다. '이놈의 영감, 영감이 하는 행동은 우리 국민과 민족을 망하게 하는 행동이다' 하며, 나라의 군왕이 있다면 왕권을 가지고 반대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노아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때는 환경이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을 일시에 투입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선다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노아를 세워 가지고 큰 섭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노아가 뜻을 따라 승리하는 날에는 사탄세계가 왕창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아는 사탄은 여러 가지 계교를 세워 가지고 '하나님, 저 노아가 마을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을 안 들었소. 자기의 아들딸이 반대하는 것을 안 들었소.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가 반대하는 것도 안 들었소. 그러나 나랏님이 권력을 휘둘러 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 뜻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렇게까지 참소하게 마련입니다.
노아의 뜻은 한 가정만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정도 구해야 하겠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요, 사탄세계를 몽땅 빼앗아 가지고 하늘세계를 이루기 위한 뜻이기 때문에, 사탄도 그렇게 큰 조건을 가지고 노아를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랬으면 노아는 어찌했을까요? '노아가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120년 동안 수고하여 배를 다 짓게 되어 이제 내일 모레가 낙성식하는 날이다. 만 120년 기간이 차는 날이다' 할 때 그 전전날 나라가 동원되어 노아의 목을 자르려고 한다면 어찌했을 것인가? 홍수심판은커녕 도리어 자신이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때가 됐다면 어떻게 했을 것이냐? 노아 할아버지가 보통사람이라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했을 것입니다. 120년 동안 그렇게 죽을 고생을 다 하여 이제 남은 밑천이라고는 늙어빠진 몸 하나밖에 없고, 기력도 쇠진한 이 할아버지, 동정도 안 해주던 하나님이 이제는 동정을 해줄 줄 알고 희망을 가지고 내일 모레를 기다리고 있는 판인데 목을 자르겠다고 하는 악한 왕이 있다 하게 될 때, 노아는 어땠을 것이냐? 그거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노아가 승리하게 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노아의 목을 졸라매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탄의 참소에 응해서 하나님이 '너 할 대로 한번 해봐라' 해 가지고 사탄이 자기 휘하에 있는 악한 왕을 시켜 '네가 하는 일은 나라를 망치는 것이고, 네가 해온 모든 것은 이 나라 이 민족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다'며 목을 자르려 할 때, 노아는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밀고 나가야 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믿는데 어떤 사람은 '나 10년 믿었소', 어떤 사람은 '나 20년 됐소' 합니다. 20년 된 사람들은 이제 전도를 안 해도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뭐 그만큼 전도했으니 나는 좀 쉬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이 또다시 명령하면 '그 명령이야 뭐 그저 그렇지'라고 했다가는 큰일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대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 설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가 문제입니다. 비록 하루밖에 안 남았더라도 완성되는 그 시간까지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노아는 이미 일을 시작할 때에 '성공은커녕 가다 죽더라도 나는 깨끗이 죽겠다'고 각오했을 것입니다. '내가 죽어도, 나 혼자 짓다가 못 지어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지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면 노아는 신이 났을 것입니다. '야, 이 배를 짓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120년 동안 지어도 완성할 가망이 없게 될 때 있는 정성을 다해서 배를 짓다가 중도에서 죽음으로써 이것을 완성할 수 있는 동지들이 빨리 생겨나기만 한다면, 노아는 죽을 시간을 목표로 해서 열심히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진 노아였다면, 내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 벌어진다는 신앙을 노아가 갖고 있었다면, '이 죽음의 자리가 일대의 수난길을 가는 것보다 도리어 간단하고 행복한 길이 아니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한 이틀쯤 남기고 배는 다 지어놨는데 죽으라고 하면 하나님도 무심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배를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나 20년 후에 죽으라고 했으면 모르지만, 이제는 다 해놓고 한 이틀쯤 남기고 죽으라고 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꽁무니를 빼고 원망할 것입니다. 내심으로 이제 상을 받고, 하나님 앞에 무슨 좋은 수가 나고, 세상은 다 망하더라도 나만은 살아 남을 줄로 알고 있는데 죽을 자리에 내놓는다고 하게 되면,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솔직히 원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망하고 반대하는 날에는 뜻이고 뭣이고 모두 제로(zero)가 됩니다. 틀림없이 제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하지 않은 것이 낫지, 그게 뭐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57-291, 72.6.5)
아브라함의 위대성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의 자기 고향 집에서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끌어내어 이방으로 데리고 다니다가 제물 드리라고 해서 제물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제물도 아브라함이 드리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제물을 드릴 제단을 다 준비했으니 당신께서 받아주시겠습니까, 안 받아주시겠습니까?' 하고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라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와서 '네가 그만큼 수고했으니 내가 너를 축복해주겠다.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보다 땅 위의 모래보다 더 번창하게끔 축복해줄 테니 3대 제물을 드려라' 했기 때문에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또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쪼개는데, 조그마한 비둘기 한 마리쯤이야 쪼개지 않는다고 그게 뭐 큰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조그마한 비둘기를 쪼개려니 칼이나 댈 데가 있었겟습니까? 그런데 축복해주겠다는 하나님은 비둘기 한 마리를 안 쪼갰다고 '너의 후손이 4백년 동안 종 노릇을 하게 되리라!'고 하였으니 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겠어요? '이거 사탄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훌륭한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벌을 내리게 될 때, 그것을 자기가 죽는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수를 저질러 놓고 무엇보다도 큰 충격을 받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받드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아들을 잡아죽이라는 명령을 받게 될 때, 자기 아들을 잡아죽여 가지고 충격받았던 그것이 해소될 수 있다면 당장 실천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한 결심을 하기까지 내적으로 하나님이 분부한 말씀을 얼마나 신중히 생각했겠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1백세에 얻은 독자, 그것도 하나님이 축복해서 기적적으로 얻은 아들을 잡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는 주더니 이제는 또 잡아 제사드리라고 하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부가 모순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아버지도 그렇게 복을 빌어주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해야 되느냐? 여기에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곡절이 있습니다. 대개 인간은 자기 이상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이상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자기를 빼놓고는 사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를 플러스시켜 가지고 사랑하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 가지고는 무엇이든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사랑의 길을 택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 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씨족을 부정하고, 자기의 친족을 부정하고 어떤 가정과 씨족을 찾았느냐?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정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씨족을 그려 나왔던 대표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자기 자식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즐거워할 수 있는 하나의 씨족을, 하나의 나라를 그는 마음속 깊이 바랐던 것입니다. 그 바람이 어떠한 어려운 환경보다도 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숱한 집시의 행로도 무난히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컸기 때문에, 또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언제나 강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자신이 확실하게 서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을 다 제쳐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이 지시한 길만을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애급에 가서 자기 아내까지 빼앗기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집에서 끌어내더니 나중에는 아내까지 바로한테 빼앗기게 되었으니 '될대로 다 되었구나!' 하고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긴 것을 원망하지 않고 '하늘이여!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당신이 저를 사랑하심이 틀림없거늘 저를 세워 가지고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손해보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사라를 빼앗기고 나서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언제는 집을 떠나게 해 가지고 수십년 나그네 생활을 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아내까지 빼앗기게 하고 이국 땅에서 완전히 몰려 죽게 됐구만. 원망스러운 하나님이여!'라고 참소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사랑이고 뜻이고 난 다 모르겠소. 하나님이고 뭐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소.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구만' 하고 참소를 했다면 믿을 수 있는 아무런 조건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이 훌륭했다는 것은 조건 없이 믿었다는 점입니다. 만일 아내를 잃어버리고 '하나님, 제 마누라 찾아주소'라고 항의하는 투로 기도했다면 그 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찾아줬을까요? 사탄이 틀림없이 사라의 목을 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라를 바로의 품안에서 빼앗아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감복하고 하나님 앞에 참소하던 사탄까지도 감복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던 사탄의 입장이 무색할 수 있는 자리에서 축복을 해주어야만, 참소의 축복이 되지 않고 자랑의 축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대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뜻을 위해서 내 가족을 끌고 나오게 될 때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각오를 했사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도 감사합니다. 당신을 위하는 마음만을 가지고 있사오니 당신이 쓰고 싶은 목적이 있거들랑 마음대로 처리하시옵소서. 당신의 깊으신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라를 제물삼아 가지고 하늘의 뜻을 이룰 수 있으면 그 이상의 축복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아브라함은 기도했을 것입니다. 반대하는 입장에서 기도를 했다면 어림도 없습니다. 사라는 틀림없이 바로 궁중에서 귀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체 되는 아브라함의 뜻을 대하는 태도, 어려운 환경이면 어려운 환경에서 그때를 수습하는 태도야말로 원수가 참소의 조건을 세울 수 없는 태도였고, 인간의 사정을 잘 알지만 눈물어린 심정을 가지고 어려운 자리로 명령하는 하나님이 도리어 내정적으로 더 격한 자리에서 붙안고 싶고,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심정의 자극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불신의 후손 된 아브라함을 통해 가지고 신의의 새로운 심정적, 동정적 기원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요, 그럼으로써 하늘의 역사가 땅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그냥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와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나오던 아브라함이 그런 위대한 심정을 가지고 모든 시련기간의 때를 넘김으로써 비로소 그 이상의 축복을 받기에 당당한 아브라함이 됐습니다. (57-295, 72.6.5)
하늘이 택한 선민을 누구보다도 존중시했던 모세
또 모세를 두고 봅시다. 바로 궁중의 왕자처럼 호화찬란한 영광을 누리고 있는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생하는 것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면 싸웠지 모른 체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하늘이 택한 선민을 어떠한 나라나 국민보다 더 숭배하고 존중시했습니다. 거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하늘이 택해 세운 그 선민 한 사람을 어떤 주권 국가의 왕자나 왕보다도, 주권 국가 전체보다도 더 가치 있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늘이 모세를 훌륭하게 본 동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는 매일같이 애급 민족으로부터 채찍을 맞고 애급 민족의 호령에 움직이고 있는 비참한 이스라엘의 한 개인을 동정할 때 한 개인으로 안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가는 길에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싹틀 것이다. 그 개인이 억울한 자리에 설 때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들을 위하고 옹호하는 자에게는 기필코 하늘이 같이하게 될 것이다. 저들을 위해서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게 되면 기필코 하늘이 같이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책임지고 나서는 모세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기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편이 되어 애급 사람을 때려죽였습니다. 그것을 자기의 감정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미래에 하나님이 가는 길이 평탄한 노정이기를 바라고, 하늘이 승리한 터전을 바라고, 하늘이 하나의 승리적 주권을 가지고 애급까지도 지배할 수 있기를 소원하고, 그 나라의 충신과 그 나라의 애국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땅은 비록 사탄세계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요, 그 국가의 치리를 받는 국토이지만, 하늘을 위하는 충성의 심정을 가지고 오직 하늘을 세우고자 행동하고, 그 나라의 주권을 위하여 생명을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으로 싸우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고역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애국자의 고역의 길입니다. 그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주권이 있다면 그를 옹호해주고 보호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곳까지는 모세가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모세를 대하는 하늘은 모세의 충절과 절개와 지조를 바라보고 모세의 행동이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미래의 축복의 나라를 그리는 애국심의 발로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홀로 목자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모세를 보호해준 것입니다.
때 아닌 때에 하늘의 동정을 받을 수 있는 근원과 동기를 지닌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40년 생활 가운데서도 언제나 애급 사람을 때려죽인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애급 사람을 때려죽임으로써 내가 광야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내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생명이 끝나더라도 나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어버릴 수 없다' 이것이 틀림없이 모세의 전통적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은 궁핍했을 것이고, 부딪치는 환경은 위험하고 부자유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 몰리면 몰릴수록 과거를 회상하는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의 영광스러운 생활에서 비참한 이스라엘 민족의 편이 되어 가지고 애급 사람을 죽이기까지에는 '내가 여기서 쫓겨나더라도,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버릴 수 없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난 후에 그런 일을 단행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늘을 위한 것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그 애국자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40년 광야생활 중에 쓰라린 환경에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모세의 생활에 고독이 깃들고 눈물어린 환경이 찾아와 그 환경이 억세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배후에는 하늘의 동정의 마음이 가중되어 들어가는 내적인 인연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밤이면 홀로 외로이 누워 자는 잠결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잊어버릴 수 없는 그 심정, 하루하루 고달픈 생활권내에서도 그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애급을 원망하는 그 마음, 자기에게 부딪쳐 오는 모든 자극을 자기 일신의 고통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역 가운데로 몰아넣는 악의 주권자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생활을 해 나갔기 때문에,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도 하나님은 또다시 모세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있어서 모세 이상의 신념을 가지고 모세 이상으로 이스라엘의 나라와 주권을 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비록 초라한 목동의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님은 모세를 일깨워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는 책임자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자로서의 40년 생활은 이스라엘 선민을 거느리기 위한 준비생활이니, 40년 이상의 수난길이 앞으로 부닥쳐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르는 연단(鍊鍛)과 시련기간으로 하나님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다시 내세워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냐?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 환경을 넘어 내일의 희망의 돛과 같이 그 마음속에 추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려운 40년 미디안 광야생활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만일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지난 일을 생각했다면 바로 궁중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꿈꾸었을 것이니, 그 환경이 그리워졌을 것이고, 자기의 환경과 비교하여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서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은 모세였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의 자리에 불릴 수 있는 인연이 엮어졌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세는 완전히 때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때를 잃어버렸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늘 앞에 때를 갖지 못한 사나이처럼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에게는 때를 고대하고, 하늘이 약속한 그 날을 고대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주고자 하는 마음과 잃어버린 때와 환경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충열의 지조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다시 묶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남모르는 내정적 심정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심정을 따라서 동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숱한 심정적 내연이 배후에 묶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사람은 기필코 하늘을 대표한 하나의 때를 맞게끔 해줘야 되는 것이 하늘의 책임이요, 또 맞게끔 한 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57-299, 72.6.5)
복된 자리에 처한 우리
역사상의 우리 선조를 보면 이와 같이 역사적 인연의 뜻을 계승해 나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섭리적 역사시대에 있어서 우리 조상들의 대표자가 이러한 축복의 터전을 이어받은 것은 평탄한 자리에서가 아닙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선 그 날부터 '내가 이 길을 알았으니 틀림없이 간다' 하는 결심과 더불어 축복의 때를 맞이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축복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난길을 거쳐야 됩니다. 역사상의 선조들도 탕감조건을 다 제시해 놓고 사탄의 모든 참소의 조건을 넘어선 후에, 참소에 걸리지 않고 그것을 무난히 돌파한 충절을 갖고 있는 데서만이 축복의 때를 맞았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고을과 동네를 소란스럽게 하며 태어났습니다. '저 아이가 커서 앞으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이냐?' 하는 동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환경에서 세례 요한은 자랐습니다. 더구나 대제사장인 사가랴 가정에서 태어나 아무 걱정 없이 잘 자랐습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사랑을 받았겠어요?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집을 나왔습니다. 광야에 나가 30년 동안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청년 남녀들도 동네 사람들로부터 '저 녀석 대학을 간다고 하더니 저렇게 됐구만!' 하든가, 또 '아무개 딸이 잘났다고 소문 나더니 겨우 저렇게 됐구만! 기껏해야 저 꼬라지로구만! 자기 아버지 어머니 주제가 그렇기 때문에 별수 없어. 종자가 종자 따라가지' 하는 별의별 비난을 듣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 녀석 그저 그러다 말지 뭐 별수 있어? 뭐 통일교회에 들어간 지 10년이 됐다는데, 고향에 돌아온 꼴을 보니 얼굴은 쪽 빠지고 눈은 똥그랗게 돼 가지고…' 하는 많은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그래도 눈을 보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 눈마저도 흐려져 가지고 기운 없는 신세가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고생을 얼마나 했습니까? 통일교회 들어온 지 10년 이상 된 사람 가운데 '나는 통일교회 들어와서 고생을 했어'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일본 압제하에서 만주라든가 시베리아 벌판을 누비고 다니던 애국자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리 꼭대기에 총칼이 따라다닌 것도 아니요, 잡히는 날에는 죽는다 하는 경지를 거친 것도 아닙니다. '내가 싫으면 말고 내가 좋으면 하겠다'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뜻을 절대 이루지 못합니다. 못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여러분과 같았다면 20년인들 나갔겠습니까? 20년은 그만두고라도 3년도 못 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통일교회 원리와 같이 '이렇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세밀히 알고 노아가 나갔습니까? 노아는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노아야, 앞으로 120년 후에 너를 주인으로 만들어 놓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심판해 버릴 테니 방주를 지어라' 하고 말씀하니, '예!' 하고 대답한 그날부터 120년 동안 방주를 지은 것입니다. 뭐 일년이 지나고 난 후에는 '앞으로 119년 남았다'고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10년이 지났으면 '110년 남았으니, 이 녀석아! 기운을 내라'고 가르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큰일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절대적인 하나님이면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매일같이 참견하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믿는 자리가 아닌 것입니다. 매일같이 가서 '야! 네가 어제는 그랬지만 오늘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못 믿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주체가 되고 그 주체 앞에 절대적으로 믿는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두 번도 아닌 딱 한 번 명령하면 그것으로 절대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120년 동안 매일 찾아와 가지고 노아를 격려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120년 동안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에 노아가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여러분은 선생님이 섭리적으로 뭐가 어떻고 어떻다고 얘기를 해주지만, 그때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몰랐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현재의 여러분과 옛날 역사시대에 그 터전을 넓혀 온 우리 조상들과 비교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원리를 너무 세밀히 가르쳐줬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을 한꺼번에 쓰라고 했기 때문에 손가락 발가락이 전부 다 마비되어 가지고 한 가지밖에 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급하니까 한꺼번에 세계복귀 천주복귀까지 가르쳐줬는데, 밤낮 쉬지 않고 한꺼번에 다 해 가지고 빠른 길을 가라고 가르쳐줬는데, 마비가 되어 가지고 전부 다 못 쓰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차라리 조금씩, 타락론도 머리만 조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또 조금 가르쳐주고, 그 다음에 코만큼 가르쳐주었으면 지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꺼번에 냅다 먹으라고 했더니, 체하고 설사가 나고 별의별 요지경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병이 난 사람도 있고, 앓다가 병신 된 사람도 많습니다. 약이 좋기는 좋지만 보자기로 싸놓았던 것을 한꺼번에 들이 삼켜 가지고 소화를 못 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정당한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지금 통일교회 여러분과 옛날 노아나 아브라함 혹은 세례 요한을 비교할 때, 통일교회 여러분은 비교도 안 될 만큼 복되다는 것입니다. (57-302, 72.6.5)
세례 요한의 입장
귀하게 자란 세례 요한은 매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메뚜기가 입으로 슬슬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논두렁 같은 데로 마구 잡으러 다녀야 됩니다. 이런 모습을 그의 어머니 아버지 친척들이 보게 될 때,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석청을 얻겠다고 돌바위 틈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겠습니까? 말을 들어 보니 근사해 보이지만 사실 하는 모양을 보면 미친 녀석입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가 보면 알겠지만, 석청이 그렇게 많고 메뚜기가 많은 곳이 아닙니다. 반 사막지대입니다. 9월부터 이듬해 4월을 지나 5월만 되면 마르기 시작합니다. 기가 막힌 곳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저 녀석이 용이 될 줄 알았더니 번데기가 됐다'는 말처럼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 자신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다는데 언제 올지, 구세주를 맞기 위해서 보따리를 싸 들고 광야를 돌아다니며 동네방네에 소문을 뿌렸는데, 언제 메시아를 만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꿈도 꾸지 않았는데 자기의 이종사촌 동생 예수가 떠억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꿈에도 상상치 않았던 그 사나이에게 성신이 비둘기처럼 내려와서 동생인 이 예수가 메시아라고 가르쳐주며 증거를 하는데, 동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났고 자기 동네에서 보잘것없는 마사거리의 한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이 메시아라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거기에 기가 막힌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 쓴 맛을 본 사람은 조금만 달아도 기가 막히게 아는 것입니다. 극과 극은 통하게 마련입니다. 얼마 전에 누가 고멸을 갖다 줘서 '이게 얼마나 쓰나?' 해 가지고 콩알만한 것을 입에 쓱 넣어 봤습니다. 사나이 체면에 집어넣은 것을 뱉을 수는 없고 쓰지만 할 수 없이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얼마나 쓴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눈물이 날 만큼 쓴데 물로 양치질을 하고 문을 열고 찬바람을 쐬며 공기를 들이마셔 보니까 이번에는 신비스럽게도 달콤한 맛이 나는 것입니다. 별스럽습니다. '아하!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약이 되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저 쓰기만 하면 사람이 배척하고 달라붙지 않을 텐데 달라붙을 수 있는 어떤 요인이 있기 때문에, 흡수될 수 있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약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과 극은 통합니다. 망할 자리에 들어가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망하지 않으면 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이 계산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타락해서 망할 무리를 망할 자리에 들여보내 가지고 흥할 수도 있는 길이 있다면, 거기에 처넣겠어요, 안 처넣겠어요? 요행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하다가도 안 망하는 입장이 되면 흥할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귀역사를 사실상 그러한 각오 밑에서 해 나오고 있습니다. (57-304, 72.6.5)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자리란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증거했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장사를 지내는데, 그때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하는 노래입니다. 도대체 요단강이 얼마나 신나고 훌륭하기에 '요단강 건너가 만나자' 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초원과 꽃밭이 있고, 물이 맑아 가지고 지나가던 모든 새들이 날아와서 목욕하고 싶을 만큼 훌륭한 강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요단강이라기보다는 요란한 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정물, 사막지대의 기나긴 모래속을 흘러나오니, 물이 될 대로 다 됐습니다. 요단강을 처음 가 보니 기쁜 마음이 있어 가지고 그 강물에 세수라도 한번 해 볼까 해서 손을 넣었는데 씻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 요단강이 대단히 큰 줄 알았는데 큰 아이들이 수영하여 건너기에 딱 좋을 정도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신이 비둘기같이 임해 가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으니 요단강이 훌륭하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또 사막지대인데 예수님이 왕자처럼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났겠습니까? 예수님은 틀림없이 요셉의 아들로 형편없이 살았으니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판국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어정어정 걸어 나오는 것을 볼 때, 세례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의 아들이 아닌 사생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 사생아 녀석이 기분 나쁘게 뭐 때문에 나타나나!'라고 생각했는데도 하나님이 가르쳐주니 할 수 없이 세례를 주었지만, 주고 난 후에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맞이해야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상이 엇갈려도 이만저만 엇갈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눈이 떠지기도 전에 획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기분이 잡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으니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세례를 해주었지만 이게 수수께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에게 두 제자를 보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당신이 오실 그이입니까?'라고 물어 보는 수작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세례 요한도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30년 동안 생애를 바쳐 준비한 것이 겨우 예수 하나를 세례하기 위해서였던가를 생각하면, 세례 요한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집안은 다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는 이런 사연을 통해 가지고 연결되어 발전해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두고 볼 때 '그럴 성싶다' 하는 곳에서 뜻이 이루어진 역사적 전례가 없습니다. 그럴 성싶다' '그럴 뻔하다. 그럴 수 있겠다' 하는 자리에서 뜻이 이루어진 역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가 부정, 전부가 비참, 전부가 몰이해, 전부가 사실이 아닌 것 같은 자리에서 역사는 연결되어 나왔습니다. 이러니 번번이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57-307, 72.6.5)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
오늘날 통일교회가 책임져야 할 사명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예, 떠납니다' 하며 틀림없는 결심을 하고 고향산천을 떠났는데, 이것은 믿는 자리가 아니라 믿고 알고 행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또 노아를 두고 보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 '그럴까 말까?' 하는 자리에서 행동했던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확실히 몰라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안 자리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 믿고 안 그 기준을 사탄은 그저 뭉개 버리려고 백방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고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자가 될 수 있느냐, 불신한 조상의 후손인 인간이 영원히 틀림없는 믿음의 조상으로 설 수 있느냐 없느냐를 시험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반대의 세계로 처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죽고자 하는 자리에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나는 뜻을 위해 죽습니다' 그런 자리에 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섭리적 시대의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못합니다. '나는 이 뜻과 더불어 이미 죽었다' 하지 않고는 사탄의 참소를 받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가다가 꺾이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늙어서 죽는 것보다 젊어서 죽으면 더 보람 있겠소'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나서게 될 때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서른 살이면 꽤 젊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선포했습니다. 또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집안 식구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니 그 나라의 백성도 원수요, 그 나라의 주권도 원수요, 전부가 원수라는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요, 원수의 주권이요, 원수의 백성이요, 원수의 땅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뜻을 이룰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컨대 북한의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뜻을 가졌다면 자기가 살겠다고 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겠다고, 죽음의 길을 빨리 찾아 나서겠다고 하면 할수록 행동개시가 빨리 벌어지는 것이요, 길이 개척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살아야 돼'라고 생각한다면 행동 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장한 예수님의 입장을 우리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지. 하나님이 언제나 사랑하고 보호해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지. 편안한 자리에 가야지…' 언제나 이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나라의 유대교도 원수요, 이스라엘의 모든 위정자들도 원수요, 로마도 원수요, 전부 다 원수인 판국에 홀로 나타나 가지고 나라의 주권자를 돌이켜야 되고, 국민을 돌이켜야 되고, 국권과 국토를 돌이켜야 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살겠다고 하는 예수님이 되어 가지고는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 묻혀진 사연을 헤쳐놓고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이요, 알기는 확실히 알고 있지만 결론만을 내려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하늘을 걸어 가지고 하늘을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막연한 결론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디 젊은 예수님이 말한 것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서 행동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는 실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말과 사정과 환경이 전부 다 그런 고독단신의 입장에 세워졌던 예수님이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 자리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으면 뜻의 길이 생겨났을 것 같아요? 엇갈리고 역설적인 방법을 통하지 않고는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습니다. 악의 세계에 몰려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되돌아 올라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끝날이 되면 끝까지 참고 이기는 자가 복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끝까지 참고 이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개인을 구원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의 최대의 소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드는 것이 소원입니다. 나라가 없이는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기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2차적, 3차적, 4차적, 5차적, 6차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어 가지고 그 나라가 만일에 피해를 입을 위험한 자리에 있거든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57-309, 7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