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이 택한 선민 이스라엘 (사랑이야기 - 제 5권 구원 역사편 - 제 2장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철장왕 | 20180919064456

2. 하나님이 택한 선민 이스라엘
  
  
야곱을 고생시킨 하나님의 뜻
  
창세기에는 야곱이 하늘을 대신하여 모진 수고의 노정을 거치며 시험을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그 시험과정에서 자기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선민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고, 그 뜻을 막으려는 천사와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래서 승리하였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선민권내에 들어갔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온갖 역경과 싸워 승리하였다고 하여서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명사로 남아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역사적인 생명을 대신하였던 명사요, 하늘과 땅을 복귀하기 위한, 아담부터 야곱까지의 2천년 역사를 종결지어줄 수 있는 승리의 명사입니다. 또 하나님이 야곱을 세워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하게 될 때, 하나님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반면 슬픔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 수천년 동안 수고하며 섭리한 것은 야곱의 조상인 아담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내려준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다시 찾아야 했는데, 잃어버린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 찾는 역사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서러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축복해주는 하나님에게는 이런 서러운 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란 축복의 말씀을 내려준 것은, 야곱 일대에만 허락한 말씀이 아니었고, 전 창조의 이념과 이상을 대신하였던 말씀이었으며, 하나님의 전체 심정이 이 한마디에 어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반의 집에 가서 수십년 동안 수고하기에 지친 야곱, 하나님이 허락한 가나안 땅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생애노정을 거쳐온 야곱은 이삭의 손을 들어 축복해주신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마당에서 재물을 포함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 에돔 땅의 에서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찾아간 고향은 자기 일대에 행복을 안겨주는 본향이 못 되었고, 기쁨의 자리가 못 되었습니다. 정든 고향과 형을 찾아가면서도 염려하고 근심해야 할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는 야곱 일신만이 겪어야 했던 사정이 아니라 온 인류가 걸어야 할 노정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향을 찾아드는 그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놓여 있고 얍복강이 가로놓여 있어, 허락한 축복의 땅을 앞에 놓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했던 사정은 선조들이 남겨놓은 사정이요, 천륜의 섭리를 경영하는 아버지의 사정이었다는 것을 야곱은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야곱 일대에만 겪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이 걸어나온 역사노정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 나타났던 모든 우리의 선지 선열들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어둠의 장벽을 앞에 놓고 싸움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삭의 손길을 통해 축복해준 하나님,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권고하던 하나님이 어찌하여 야곱이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해주지 못하고, 또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천륜의 뜻을 품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늘 앞에 호소하는 야곱에게 권고의 말씀은 해주지 못할망정 오히려 천사를 보내어 야곱을 치게 하는 이러한 비정한 환경이 벌어지게 하였던가! 
말할 수 없는 사정,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애달픈 곡절의 심정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허락한 고향산천을 찾아가는 야곱의 길에는 광야의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가는 노정에도 이러한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야곱이 걸은 노정을 통해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하늘은 이러한 환경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 사람 하나를 택해 세우는 것도 물론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지만, 배후의 사탄을 밀어낼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중요한 섭리의 뜻이기에, 인간이 모르는, 하나님과 사탄만이 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곡절의 담을 인간을 통해서 헐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헐 수 있는 조건을 세우기 위하여 야곱에게 무리한 행동을 하늘은 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3-333, 58.2.9)
  
  
야곱이 받은 '이스라엘'의 내용
  
야곱에게는 축복받은 그 날부터 에서가 있는 고향 땅에 돌아갈 때까지 기쁨의 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가 있다면, 그는 하늘과 땅을 걸어놓고 하나의 제물의 입장에서 이것을 판결지을 때까지 수심의 생애노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역사노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책임지고 나아갈 때에는, 야곱과 같이 원수의 세계에도 찾아가야 하고, 어려운 환경과 홀로 싸우는 싸움의 노정도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의 노정에 선 야곱이 지쳐서 쓰러졌던들 그에게는 이스라엘이란 명사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통한 축복의 은사가 야곱과는 관계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늘이 이삭의 손길을 통해 내리신 축복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고난과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이것을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불붙는 심정을 갖고 하늘을 대해 충성했기에, 얍복강가에 나타난 천사와의 씨름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야곱은 하늘이 허락한 말씀을 중심삼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모진 싸움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인 하늘의 정병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예고하는가? 우리의 선조인 아담 해와가 소망의 한 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끝까지 그 말씀을 지켜 나가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담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바로 그런 인물로 하늘 앞에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된 야곱, 하늘의 시련을 받는 입장에 있었던 야곱은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굳게 믿고 싸움이 끝나기 전에는 팔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싸워 승리한 후에야 이스라엘이란 축복이 임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민의 승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런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은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말씀을 중심삼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이런 입장에서 말씀을 중심삼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사탄의 모든 참소조건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얍복강가에서 철야를 하고 있던 야곱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천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야곱은 사탄의 시험을 받아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이 참소하지 못할 정도로 믿을 수 있고, 그 말씀을 중심삼고 싸울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을 드러내기 위해 야곱에게 천사를 보내어 밤새도록 씨름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한 인간으로서 천사를 문제없이 물리치기 위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에게 부여된 그 뜻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품고 싸웠습니다. 이러한 야곱 앞에 사탄은 감히 참소의 조건을 제시할 수 없었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승리가 얍복강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늘은 제2 시험의 대상인 에서를 감동시켜 야곱 앞에 굴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야곱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스라엘이란 이름과, 야곱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이스라엘의 터전은 야곱 일대만 축복의 대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통해 개인적인 이스라엘이 시작되고 야곱을 통해서 가정적인 이스라엘이 시작되어, 민족․국가․세계적인 이스라엘을 형성하기 위한 이스라엘 이름이요, 이스라엘의 터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야곱의 후손들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느끼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후손들은 야곱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까지 미쳐진 축복을 오로지 자기들 것으로만 믿고 행동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택함을 입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오늘날 이 땅 위에 그 종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3-336, 58.2.9)
  
  
모세가 걸은 고난의 노정
  
야곱은 하란에서 가정을 형성하여 승리해 나왔지만, 또 넘어야 할 고개, 즉 얍복강가에서의 천사와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야곱의 후손들은 몰랐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애급에 들어가 4백년간 바로의 품에서 민족적인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때 모세가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수습하여 옛날 야곱으로부터 약속받은 가나안 땅을 회복해야 하는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 일대에 조성한 승리적 이스라엘의 발판과 같은 민족적인 승리의 발판을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갖추어야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애급에서 지칠 대로 지쳐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싸워 승리한 발판을 원수의 나라에서 세워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민족은 단결하여 민족적인 하늘의 시험과정을 통과하여야 할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 있던 민족을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하늘은 모세를 세워 민족을 대표하여 바로 궁중에서 40년 동안 준비시켰고, 미디안 목자생활 40년의 노정을 거치게 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옛날 얍복강가에서 이루었던 그 축복을 애급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재수습하기 위하여 모세는 야곱과 같은 민족적인 노정을 걷기 위해 광야로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대신 받고 하란광야를 찾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다시 세워야 할 책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모세는 동족끼리 하나되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보고 분개하였으며, 또 민족이 이방사람 앞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자 그 이방민족에 대항하여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세의 뒤를 따라 애급 민족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오히려 모세를 몰아내는 입장에 섰는데, 이것은 마치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자기의 고향을 떠났던 것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또 야곱이 축복받아야 할 가정을 떠나 사탄 가정으로 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모세도 축복받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남겨놓고 미디안 광야생활 40년노정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세가 광야를 향해 떠났던 사실은 모세 일신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런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닦아놓은 승리의 발판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발판을 민족적으로 다시 닦아야 할 책임감을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낀 모세였던 것입니다. 원수의 품에서 고역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간절히 기도하던 모세, 하루 한 날 한 시간이라도 고역의 노정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어 본 적이 없는 모세의 심정을 여러분은 뼈저리게 느껴야 할 것입니다. 
목자로서 광야에서 외로운 생활을 하는 자기의 사정이 비참했지만, 자기의 비참함을 잊어버리고 애급땅에서 원수에게 시달리면서 수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렸던 모세였습니다. 이런 모세의 외로운 사정과 심정이 하늘에 사무쳤고, 모세가 하늘을 위하여 염려하고 선민을 위하는 대표적인 형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다시 불러 바로의 궁중으로 파송시켰습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이 에서를 무서워하여 21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수고하고 난 후 자기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 에서가 있는 곳을 찾아가는 노정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도 야곱과 같이 어려운 노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3대 이적을 보여주면서 말씀을 대신하는 아론과 미리암을 세워 하늘이 가라 하는 바로 궁중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세의 가는 길은 하나님이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잠자리에 든 모세를 죽이려 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것도 역시 야곱이 걸어간 것과 같은 노정이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환도뼈가 부러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싸웠던 그 사정을 통하여야 할 모세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모세도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입장에 세워졌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시험을 무난히 넘은 후에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만나 하나님과 민족을 대신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제단을 쌓게 되었습니다. (3-338, 58.2.9)
  
  
민족에 대한 모세의 사랑
  
이스라엘 민족이 포악한 바로의 마수(魔手)에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4백년, 마음대로 농락하며 피살을 빨아먹기에 급급했던 바로의 학정 아래 비참한 제물로 사라져 갔던 이스라엘 민족의 애급고역 4백년 기간은 지쳐 쓰러지는 기간이요, 낙망하여 하늘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요, 민족성을 잃어버릴 수 있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시련이 심하면 심할수록, 부딪치는 역경이 크면 클수록 그들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축복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음만은 어떠한 시련과 어떠한 역경이 휘몰아치더라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민족적인 싸움에서도 지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며, 축복받은 나라 이스라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애국심이 우러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지도할 수 있는 모세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40년 바로 궁중 생활 속에서 뜻을 세우려던 1차 계획에 실패한 후 가나안 복귀를 생각하면서 몇천만 번이고 기도하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축복받은 민족인 것을 알았고, 아브라함․이삭․야곱의 혈족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원수 사탄에게 농락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는 호화스러운 바로의 궁중에서도 가나안 복귀의 한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했습니다. 그는 멀리 본토의 자기 나라를 그리워하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궁중의 호화로운 생활 속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큰 고초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과 자기의 호화스러운 생활과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에 사무쳤던 모세였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 양떼를 몰 적에도 그는 바로 치하의 애급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잊지 않았습니다. 양떼를 불러 모아 우리로 몰아넣게 될 적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마음의 신념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모세는 그런 경지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여! 이스라엘을 버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몰랐으나 그는 미디안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모세는 40년의 기나긴 시련 속에서도 지치지 않았고, 어떤 억센 환경 속에서도 낙오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하나님이 소원하는 뜻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마침내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입니다. 
모세는 숱한 싸움의 노정에서도 하나님이 민족과 같이하는 한 하나님의 뜻이 내 뜻이요, 내 뜻이 이스라엘 민족의 뜻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꿈에도 하나님을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배신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지가 변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마음만은 변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모세가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는 길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바로와 수차례의 싸움을 거듭한 후에 애급 민족을 굴복시키고 민족적인 승리의 기반을 닦아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하였습니다. 
애급을 떠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죽든지 살든지 그들의 소원이 곧 모세의 소원이요, 모세의 소원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알고, 그들이 가는 길에 모진 핍박과 갖은 시련이 있다 하더라도 모세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 또한 자기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었습니다. (13-178, 64.3.15)
  
  
모세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책임
  
이스라엘 민족을 찾아 나선 모세,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천지는 변할지언정 당신의 약속은 변할 수 없다고 한 말씀을 믿고 나선 모세는 굳은 각오와 결심을 갖고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던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시험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야곱이 에서에게서 받은 반대와 같은 바로 궁중의 반대가 있었습니다. 원리를 통해서 잘 알고 있겠지만, 야곱이 열 번 속은 것을 탕감하는 10재앙을 애급에 내려서 바로를 굴복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제2차로 민족적인 제단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서러움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수로 인해서 느낀 서러움이 아니요, 또 하나님에게 슬픔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수들이 악하여서 느낀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고의 길을 따랐던 이스라엘 민족의 제단이 무너진 데 대해 느낀 하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60만 대중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모세에게는 또 다른 시련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홍해노정과 광야노정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개인적으로 걷던 시련의 광야노정을 민족적으로 거쳐야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몰아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가 손을 들면 자기들도 손을 들어야 하고, 모세가 앉으면 자기들도 앉아야 하고, 모세가 가면 그들도 가야 했습니다. 즉 60만 대중이 전부 제2의 모세가 되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대신해야 했는데, 그들은 이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바로의 궁중에서 끌어내줄 때는 감사하며 자신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알았고, 철석같은 약속이 남아 있으니 자신들을 가나안 땅까지 무사히 인도해줄 줄 알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3-340, 58.2.9)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쓰러진 이유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이 어찌하여 광야에서 쓰러지게 되었던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목자의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선민을 위하여 절개심을 갖고 싸워 나오던 모세의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던들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민족을 걸어놓고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축복을 세우려는 하나님의 소원은 민족을 대표한 모세와 그 민족이 하나되는 것이었는데, 둘이 갈라지니 민족을 대표한 모세도 깨졌고, 민족을 지도하던 모세가 깨짐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도 깨졌습니다. 
그러면 광야에 나와서 배가 고프다 할 때는 메추라기를 먹이고 만나를 내려 먹이던 하나님이 어찌하여 아말렉 족속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게 하였던가? 천륜의 뜻을 반역한 인간이었기에 인간들이 천륜의 뜻을 찾아 나가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도 반대의 입장에서 쳐야 할 섭리적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말렉 족속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안타까운 심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할 모세가 죽었고, 죽지 않아야 할 민족도 망해 버린 것입니다. 이때에 모세에게는 민족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모세 자신의 잘못은 없었지만 불신한 민족을 대표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면서 쓰러져 가는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40일 동안 속죄의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의 자격이 있다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애달파하고 있을 때에 60만 대중이 그 산을 둘러싸고 잠을 자지 않고 먹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이여, 우리의 지도자 모세를 내려 보내주시옵소서.....'라고 기도에 힘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세가 굶주리고 기도하여야 할 사정은 자기 일신 때문이 아니라 민족 때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은 꿈도 안 꾸고 있었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기도하던 것과 같은 어려운 고비를 당하였는데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선도할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와서 민족을 이끌었던들, 그들은 어려운 입장에 처하지 않았을 것이고 편안한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사탄이 민족을 농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노정을 우리의 선조들이 걸었습니다. (3-341, 58.2.9)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4백년 동안 애급에서 시련을 거치게 한 것은 새로운 가나안 천국을 건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급노정에서도 쓰러지지 않았는데, 광야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쓰러지게 된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인도를 받는 그날부터 만사가 형통하여 세계가 자기들 뜻대로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복귀의 길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을 찾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가정을 찾기 위해서는 가정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민족을 찾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국가를 찾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싸움을 거쳐야 되고, 하늘땅을 찾기 위해서는 천적인 싸움의 노정을 거쳐야 된다는 것을 이스라엘 민족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편에 서서 10재앙을 내릴 때 이스라엘 민족은 당당히 천하를 호령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운 것인데 그들은 해야 할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한 자리에 서기만을 원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사명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리에서 그들의 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게 될 때 불평하였고, 가는 걸음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른 뜻과 모세를 세워서 인도하는 뜻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민족은 장도(壯途)에서 부딪치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광야에서 독수리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13-177, 64.3.15)
  
  
시험과 시련의 의미
  
이리하여 하나님은 다시금 모세를 대신할 수 있는 지도자 여호수아와 갈렙을 세워서 2세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는 성전이념을 실현해 놓고 성전과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중심삼고 하나되지 못하는 민족은 때가 오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민족적인 승리를 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7족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야 할 노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을 세운 목적도 하나의 주권국가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민족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애급에서 장자를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쳐서 정복하라는 것이 사울 왕에게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사울 왕에게는 민족적인 크나큰 사명과 이루어야 할 책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기준, 사적인 기준에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연고로 사울 왕 때 세우려 했던 성전 이상은 다윗 왕, 솔로몬 왕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이 성전이상은 본래 모세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아니하고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통일왕국시대 말기에는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즉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남조 유대 2지파로 갈라져서 서로 싸웠습니다. (13-177, 64.3.15)
애초에 피조만물은 말씀을 중심삼고 여섯 기간을 통하여 지음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복귀의 민족적인 고개를 넘고 세계적인 고개를 넘어가게 될 때에도 반드시 6수의 과정을 걸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느냐 못 세우느냐 하는 시험, 즉 천사장 대신 아담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6세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말씀을 잘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즉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이 뜻을 세계적으로 전파해야 할 때에 이르자 민족을 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잡혀가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이 민족이 다시 말씀을 배반하느냐 배반하지 않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배반했던 민족이기에 하늘을 대신하여 이 민족이 새로운 6수의 출발고개를 넘게 될 때는, 사탄의 공격과 내리침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을 시켜 이스라엘 민족을 점령하게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준 말씀을 붙들고 모세가 광야를 헤매면서도 하나님을 위하고 민족을 사랑하던 그 심정을 품고 원수의 나라인 바벨론에 가서 끝까지 싸워 말씀을 사수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민족이 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깨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중심삼고 제2차 민족적인 말씀의 기준을 복귀하여야 할 역사적인 노정에 선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 된 절개를 품고 있었다면 비록 바벨론에 잡혀갔을지라도 모세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와 그들을 이끌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가 지난 후에 어떠한 형태가 벌어졌습니까? 뜻이 있어 야곱이 에서의 직계를 무시하고, 모세가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무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뜻이 있어서 에서 입장의 말씀인 구약을 무시하고 나서게 되었을 때, 환영하여야 할 에서의 입장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사망권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시험하던 천사장 형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5백년 전에는 신약성경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즉 인본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문예부흥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기독교를 중심삼은 봉건사회가 근본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교황청의 주권이 깨져 나가고, 프랑스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아비뇽의 포로기간을 거쳐야 하는 운명에 놓였습니다. 이것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이런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당시에 형성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제2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새로운 사명을 짊어진 기독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게 되자 기독교를 세계적으로 치는 일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교황은 하늘 앞에 회개해야 했고, 하나님이 세운 절개심을 품어야 했으며, 끝날까지 이런 뜻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끝날에 이르러서는 그때에 남아진 기성의 말씀과 기성의 교단은 에서의 입장에 있고,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됩니다. (3-342, 58.2.9)
  
  
기독교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에게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이 세계 인류를 대신하여 찾아진 선민 이스라엘을 복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복귀하고자 하는 하늘의 섭리의 뜻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야곱을 통하여, 모세를 통하여 세웠던 이스라엘 민족은 2천년 전에 예수님 앞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나라를 세계복귀의 발판으로 세우고 이 발판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복귀의 진격전을 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노정이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사정에 처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기독교는 광야시대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민족과 마찬가지로 광야노정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택함받은 제2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유대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가나안 땅을 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예수님 앞에 세워진 택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는 어디 갔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없어지고, 유대교단이 없어지고, 이스라엘의 가정이 없어지고, 야곱이나 모세와 같은 개인적인 이스라엘도 없어짐으로써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죽어 갔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기성 신학자들은 죽어야 되는 줄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민족과 교단 앞에 몰리고, 가정에서 몰리고, 12제자한테 배반당하고, 최후로 3제자에게까지 배반당하고 나니 갈 데는 죽을 곳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30여 생애를 불쌍히 사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의 황태자요, 홀로 창조이상을 대신할 수 있는 천상천하의 주인공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자 예수님이 땅에 와서 고난당한 것은 예수님이 잘못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민족과 교단이 몰라서 그랬고, 사회와 가정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택한 제1 이스라엘이 반대함으로써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는 기독교인들을 잃어버린 제1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제2 이스라엘로 세워 세계에 널리 퍼뜨려 놓고 다시금 재수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무슨 사명이 있는가? 예수님을 배반하여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제일 먼저 택해 세운 이스라엘을 잃어버렸으니 이것을 대신하는 제2 이스라엘을 건설해야 할 노정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에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12사도, 또는 예수님의 3제자와 같은 인물을 중심삼고 하나의 교파로 단결하여야 할 때인데, 이런 조직을 잃어버렸으니 큰일났습니다. 모세 앞의 60만 대중은 12지파장과 70장로를 중심삼은 반열형태의 조직 속에서 각각 자기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광야노정을 거쳐 나갈 수 있었는데, 오늘날 제2 이스라엘이 되어야 할 사명을 짊어진 세계 기독교인들은 반열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12반열을 대신하여 나타났던 12사도와 3제자가 책임 못 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므로, 전세계 기독교는 세계의 대표적인 교파를 중심삼고 12교파의 형태를 갖추어 결속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슨 생활을 하고 있느냐? 예수님이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못다 이루었으므로, 야곱과 모세가 목자생활을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예수님도 저나라에 가서 목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영계에 가서 쉬지 못하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이것이 목자생활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지금까지 2천년 역사노정에서 예수님을 믿고 간 사람들, 즉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영계에서 잃어버린 제2 이스라엘 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낙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던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렸으므로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찾아 나왔던 성도들을 모아서 예수님이 부활한 후 영적으로 제1 이스라엘을 복귀한 형이 낙원세계입니다. (3-344, 58.2.9)
  
  
지상천국 주인공의 자격
  
낙원세계에 간 영인들도 제1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예수님을 환영하는 발판을 지상에 세워 놓아야 할 조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천상에 있는 모든 영인들은 지상에 재림하여 현재 살아 있는 기독교인들을 제2 이스라엘의 축복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 세워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과 하나되어 제1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반대했던 것을 탕감복귀하기 위해 활동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끝날은 어떤 때냐? 구약말씀을 믿고 있던 유대민족을 이방민족들이 치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약말씀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사상을 중심삼은 유물사상이 기독교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약말씀을 믿는 기독교가 얻어맞는 가운데서도 말씀을 붙들고 나설 수 있는 하나의 교파가 나와야 하는데, 그 교파는 개혁교파라야 됩니다.
그런데 모세노정에 있어서 성막을 받들던 시대가 지나고 성전을 받들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민족이 결속하여 싸워야 할 시련이 남아 있다는 것을 유대민족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받들던 시대에서 실체 성전을 완성해야 할 시대로 바뀔 때에도 우주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이 싸움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싸움이 세계적으로 벌어졌습니다. 
끝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이제 실체 성전을 갖추어야 됩니다. 그리고 실체 성전을 이룬 다음에는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말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신․구약말씀이 나와서 인간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했고, 이제 새로운 말씀이 나와서 그 말씀과 하나된 사람들을 실체적으로 복귀시킬 것입니다. 봉건주의시대는 신만을 위주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그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신만을 위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결합할 수 있는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왔는데 이제 실체 성전을 복귀하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약을 중심삼은 이런 때에 세계적인 성약의 이념이 나타나면 그 성약이념을 중심하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대신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지상천국의주인공이 되려면 실체 성전이 이루어진 후에는 환경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존재가 되려면 이념적인 혁명과정을 넘겨야 가능합니다. 
그러면 그 과정은 어떠한 형으로 될 것인가? 역사는 뿌린 대로, 또는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니, 오늘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도 기성관념에 빠져 있는 신앙자들과 기성주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은 전부 하늘을 배반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는 자들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천사장이 아담 해와를 유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끝날 이 시대에 있어서 천사장과 같은 영적인 교단들이 나타나 하나님 뜻을 대하여 반대할 수 있는 때가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원칙을 통하여 복귀섭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끝날 어떻게 해야 선민 된 이스라엘 민족이 될 수 있겠는가? 여러분은 결심하여야 되겠습니다. 각오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야곱의 후계자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20여 성상을 거치고 얍복강가에서 하늘을 믿고 싸워 나가던 야곱의 대신자가 되어야 되겠고, 광야노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붙들고 애원하며 걸어가던 모세를, 혹은 세계 인류를 대표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염려하며 기도하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3-346, 5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