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참을 찾아 역사하는 하나님 (사랑이야기 - 제 5권 구원 역사편 - 제 1장 하나님의 구원섭리 역사)

철장왕 | 20180911084227

5. 참을 찾아 역사하는 하나님
    
이 땅에 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섭리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참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참된 연고로 그분의 손을 거쳐 지음받은 모든 것은 참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참이기에 이 우주가 존재하는 목적도 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존재세계를 창조한 참된 주인인 창조주 앞에 모든 피조물은 참된 것으로서 영원히 존재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는 참된 분으로 남아 있지만,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물은 참의 가치를 상실하였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참에서 시작하였으니 영원히 그 참의 가치를 노래하는 천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지가 되었던들, 오늘날 우리 인생의 어느 일면을 들춰보아도 참과 인연맺지 않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이 그러하지 못하니 이 이상 슬픈 일이 없고 이 이상 근심된 일이 없습니다.
참의 주체 앞에 참의 가치를 중심삼고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자기 존재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전체와 개체라고 하는 차이는 있을망정 그 가치에 있어서는 차이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가 되었던들, 오늘날 모든 존재물은 행복한 자리에 머물지 않으려야 머물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참된 분, 지극히 참된 주인이 계신 그 세상은 우리의 소망으로만 남아 있으니, 다시 그러한 세상을 찾아 나아가 지극히 참된 그분 앞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우리의 인생행로입니다. 
그러면 참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참이란 시작한 그날부터 끝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참이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영원무궁토록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가치가 빛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러한 가치를 지닌 참을 만나 본 적도 없고 느껴 본 적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계시다면 그분은 인간이 생활환경에서 참의 가치와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참된 선의 세계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 역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섭리요, 구주를 보내 이 억조창생(億兆蒼生)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10-122, 60.9.18)
  
  
참을 찾아 나온 인간
  
인간은 타락이라는 명사를 남긴 이후 알 수 없는 곡절의 노정을 거쳐왔습니다. 시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하는 곡절의 역사과정을 피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인간들은 이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들이 해결하려 하고 찾고 있는 내 몸과 마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념과 심정까지도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로구나' 할 수 있는 그 하나의 기점은 아직까지 찾지 못한 채 살아 나왔습니다.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도 그렇게 나왔고,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도 참된 그 무엇을 찾고 있는데, 그 참이 무엇인지 해명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의 기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피눈물의 길도 개의치 않고, 죽음의 고개도 개의치 않고, 추방당하고 몰리는 불쌍한 자리도 개의치 않고 허덕이며 나왔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바라보는 목적지, 심중으로 찾던 안식처는 아직까지 인류가 살고 있는 이 지상에, 그리고 지상을 섭리하는 천륜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심정이 있다 할진대 과거에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그 심정이 사무치게 바라는 것은 참의 주체가 되는 실존체가 해명되는 일일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라는 명사를 빌려 말한다면,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으면 내가 그 하나님을 모시고 내 몸과 내 생활, 내 생명, 혹은 내 심정에 인연되어 있는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 그 중에서도 종교인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더라도 참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을 찾으려 할 때에도 참에 귀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왔다 갔던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였고,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고, 미래의 사람들도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움직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할진대,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된 주인공을 대하여 노래할 수 있고, 그 주인공과 더불어 즐거워하면서 살 수 있으며, 그와 더불어 화락(和樂)하면서 심정에 취해서 살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런 한 날이 온다 할진대, 같은 마음, 같은 심정, 같은 생명의 움직임을 갖고 있는 그 자체나 그 실체에 대해서 '나는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입장에 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민족과 주의(主義)와 사조(思潮)를 넘어서서 어느 누가 참에 귀의하여 이 참과 더불어 살며, 이 참과 더불어 행하며, 이 참과 더불어 죽음의 고개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신을 가졌다 할진대, 그 사람이야말로 인류역사가 바라던 참의 근원적인 실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참된 실체를 찾아 인류는 헤매 나왔습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수십억의 인류가 살고 있지만 그 참의 실체를 찾아 그와 더불어 산 사람, 그와 더불어 싸운 사람, 그와 더불어 즐긴 사람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막연합니다. 어떠한 철학 논리를 들추어 봐도, 어떠한 종교의 경서를 들추어 봐도 명확한 해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내 몸을 통하고, 마음을 통하고, 심정을 통하고, 모든 이념을 다 동원해 보아도 나를 새로이 일으킬 수 있는 참을 찾아서 거기에 화하였다고 자인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이 다 공론이냐, 혹은 망상이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인류가 해명해야 할 최후의 문제입니다. 해명되어야 할 참과 해명해 나아가야 할 내 자체와의 관계는 '그가 나요 내가 그다' 할 수 있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이 하늘이라 할진대, 그 하늘은 나와 같이, 나는 하늘과 같이 화할 수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참이라 할진대 그 예수님과 나, 나와 예수님은 하나로 화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감정적인 모든 것, 인식적인 모든 것까지도 같이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참의 감촉이라 할까 촉감이라 할까, 그런 것이 내 개체에서부터 창조적인 존재세계, 즉 만물은 물론이거니와 전세계의 인간에게까지 느껴져 같이 움직이고 감촉하면 온 우주와 더불어 노래할 수 있는 자체, 그러한 자체가 천국에 살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혹은 하늘이 찾고 있는 참된 아들딸의 모습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76, 59.7.19)
  
  
타락인간의 실상과 예수님
  
오늘날 우리가 참을 찾고 있으되 참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까닭입니다. 타락의 한을 가진 인류, 타락된 혈통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 타락한 선조의 후예인 내 자체요 우리요 인류임을 공인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타락이 무엇이냐? 떨어진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바라는 이념의 요소와 대치되는 경지에 머무르는 것이 타락입니다. 
싫은 것을 피하고 좋은 것, 슬픈 것을 피하고 기쁜 것, 어려운 것을 피하고 행복스러운 것을 바라는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을 피하려야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역사와 더불어 엉클어지고 엉클어져서 오늘의 나까지 얽매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한스러운 처지에 있는 나와 여러분에게 참된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제2의 나의 모습이 있다 할진대, 그 모습을 불러 세워 나를 냉정히 비판해야 할 한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에 왔다 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은 이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하여, 미래의 역사에 대하여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넓게 가지라, 네 마음의 바른 목적인 선을 지향하라, 본성의 마음에 응할 수 있는 몸을 가지는 동시에 그런 행동을 하라고 권고해 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말하기를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 하였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늘의 심정을 통해라. 그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어라. 그리하면 천국의 중심을 대신한 신랑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문제에 부딪히게 될 때, 뚜렷한 양심의 기준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용자가 없었음을, 천륜(天倫)과 천정(天情)에 동하여 나는 물론 인간의 모든 심정을 주관할 수 있는 용자가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하며 천국에 가려면 '먼저 나 예수를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갖고 있는 것을 다 버려라',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였습니다. 또 '갖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리고 잃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갖는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내용을 가지고 오셨던 구주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마음과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마음 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몸이 몸 된 자리에 있지 못하고, 내 심정이 심정 된 자리에 있지 못한 것이 한탄스런 일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 땅에 와서 양심의 기준을 세워 이 몸, 즉 육신(肉身)을 정복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인류역사가 6천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경과하였으나 아직까지 어느 누구 한 사람 마음을 중심삼고 몸을 완전히 정복하였다는 그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 한스러움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천정에 사무친 심정을 통해 마음이 몸을 지배하고 나설 수 있는 확고한 중심을 갖지 못한 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천륜의 심정을 가진 하늘이 있다 할진대, 어떻게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여 영원히 하늘의 심정 앞에 둘 것이냐? 이것이 인간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다' 하였습니다. 신부가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은 인습에 젖은 땅 위의 양심기준이 아니요, 시대 변천에 따라 변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땅 위의 인륜도덕에 화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양심기준도 아닙니다. 또 땅 위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그런 신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랑이라 하는 이 한 분의 용자 앞에 신부의 모습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신랑의 심정을 사모하고 체휼한 자는 영원한 양심기준을 세울 수 있고, 영원한 몸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방향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님은 인류의 참된 신랑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7-78, 59.7.19)
  
  
오늘날 인류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인류 문화는 발전해 왔고, 발전해 나온 그 문화는 20세기의 이 문화세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의 문제, 우리의 심정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내용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내적 외적으로 복잡한 환경과 복잡한 조직형태가 나타났으나,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에 들고 심정을 통할 수 있어서, 하나에 전체가 응함과 동시에 전체가 거기에 화할 수 있으며, 하늘땅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심적 기준이 되지 못하고 하늘땅이 한데 엉클어질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 시대는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 심정이 찾고 있는 방향과는 판이한 방향으로 흘러나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내 한 자체는 이제 외적으로는 끝에 도달하였고 내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공허한데, 나를 세울 수 있는 중심은 어디 있는가? 이것을 찾아 오늘날의 인류는 허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마음과 이념이 상통할 수 있는 심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마음을 주관할 수 있는 심정과 외적인 생활을 주관할 수 있는 육과 실제 생활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을 세우지 않는 한 인류는 어느 시대에나 허덕이는 입장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7-80, 59.7.19)
그러면 오늘 우리 자신들이 사회 환경에서 참을 찾는다 할진대 어떠한 참을 찾고 있는가? 몸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마음의 참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더 큰 우주적인 이념과 통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의 몸과 마음은 참된 인연을 찾고 있습니다. 참된 환경과 참된 우주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참되기 전에는 참된 것을 감정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참된 가치를 지니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참될 수 있는 조그만 본질이라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을 찾아 나가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세워 인륜과 도덕의 방향과 일치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현실입니다. 
내 마음이 참을 헤아릴 수 있는 참된 입장에 서고 내 몸과 생활환경에서 참을 중심삼고 살 때, 거기에서부터 참은 나와 내 몸이 인연을 맺고, 나를 통하여 환경과 인연을 맺고, 환경을 거쳐 이 땅과 천상까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123, 60.9.18)
진정 하나님이 계신다 할진대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현재 우리가 보는 이러한 문화의 세계가 아니요, 문명의 세계가 아닙니다. 문명을 바른 방향으로 지도할 수 있는 마음의 기준, 심정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 하늘이 원하는 중심 되는 뜻이요, 우리 선조들이 후대 만민 앞에 세우고자 했던 기준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7-80, 59.7.19)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내 몸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이 떠나 버렸고, 내 마음을 통할 수 있는 말씀도, 내 심정과 더불어 영원히 지닐 수 있는 말씀도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말씀, 즉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는 곧 말씀이라 했습니다. 또한 진리는 조직의 원칙이며 천륜의 근거입니다. 
지금까지 세계는 진리를 찾아 나왔으나 이제는 참된 말씀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나 참된 말씀이 나오지 않았으니 참된 생명의 실체가 나오지 못했습니다. 참된 생명의 실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참된 사랑의 실체가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사랑의 실체가 나오지 않았으니 참된 우주관이 하늘땅과 더불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9-236, 68.1.15)
  
  
모험과 개척정신에 의해 섭리는 진전된다
  
하나님은 오늘도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싸워 나오고 계십니다. 개인을 정복하고, 가정을 정복하고, 민족․국가․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지금도 싸워 나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자기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 싸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0년 후에 이 땅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일년이 지났으니 이제 119년 남았구나' 하며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뜻을 품고 큰 뜻을 대하고 나오는 사람 앞에 한 번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 하나님에 대해 변치 않는 충절의 심정을 가지고 가정의 핍박, 사회의 핍박, 혹은 자신의 육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욕망, 즉 정욕이나 식욕, 또는 탐욕 같은 이런 복잡한 모든 것을 정복하여 승리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은 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노정에 있어서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를 정복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정복이 무엇이냐? 말로 해서 안 되겠으면 때려서라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쟁사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6천년 역사의 종말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전체를 하나님 앞에 세워 놓고 하나님 뜻 앞에 귀일시켜, 나로부터 전체를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갖춘 승리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은 자기 일신을 정복하기 위하여 모험을 하였고, 어떠한 어려운 길이나 어떠한 개척자의 길도 개의치 않고 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이 땅에 살고 있는 인류는 옛날 선조들이 걸어 나왔던 그 환경과는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시대는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대해 나온 섭리시대였으나, 오늘 이 시대는 세계를 넘어서 천주를 대하여 섭리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떠한 모험이 있다 할진대, 6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 이상 모험할 사람이 없다' 할 수 있는 각오를 가져야 됩 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자신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가정을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가정을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사회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국가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국가를 붙들고 우는 자는 하늘 세계를 건설하지 못할 것이고, 세계를 붙들고 우는 자는 천주를 건설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개인의 심정을 세계로 끌어올려 역사적인 모든 내용을 해명하고 하나의 세계적인 실체를 갖추었다고 장담하고 나설 수 있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신비스런 경지에 들어가 보면 그 세계는 모험에 의해서 교체되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 단계의 범위를 넓혀 가는 데에는 반드시 모험을 해야 됩니다. 목숨을 걸어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노아는 가정의 기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쳤습니다. 몸을 정복하기 위해 몸을 치기를 120년, 별의별 비난과 조소를 당하고 억울한 환경에 처해서도 노아는 하나님이 세워준 심적 기준, '하나님이 이끌던 그 심정에 사무친 것이 변할소냐?' 하며 그 기준을 중심삼고 120년 동안 몸을 쳐 나왔던 것입니다. 
노아 가정이 끝까지 세상적인 욕구와 모든 조건을 치면서 민족을 흠모하고 나왔던들 하나님은 그 노아 가정을 중심삼고 민족을 통하여 뜻을 이루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 가정은 수고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모든 곡절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세운 심적 기준을 붙들고 그의 후손들이 민족을 바라보고 나갔던들, 그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을 텐데 노아 가정이 가정적인 뜻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민족을 통하여 이루려던 하나님의 뜻이 깨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뜻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개인이 깨졌다고 개인을 붙들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천륜이요, 가정이 깨졌다고 해서 천륜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은 깨졌어도 천륜은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이 깨져 나가더라도 때는 가정을 세워 섭리하여야 할 때이기에 하나님은 개인과 가정까지 복귀하는 섭리를 하는 것입니다. 또 그 가정이 깨졌다고 해서 거기에서 섭리를 지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회를 복귀하기 위한 때로 움직여 나갑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환경을 넓혀 가면서 섭리의 때를 맞추어 나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19-237, 68.1.15)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안다면
  
개인으로서의 노아와 그 가정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4백년 후에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또한 뜻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또다시 4백년 후에 모세를 세워 역사하면서 아브라함을 세워 역사할 때와 같이 환경적인 조건을 맞춰 나가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의 법도를 세워서 이방 사람까지 끌어넣는 섭리를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실수로 인해, 민족적인 시대가 다가옴으로써 이스라엘 60만 대중을 애급에 때려 몰아넣고 연단시킨 것입니다. 때려 넣은 것은 무엇 때문에 그랬느냐? 그것은 합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하나되게 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대하고 있는 바로궁중은 원수다. 애급 사람들은 철천지 원수야' 이렇게 연단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살 수 있는 한 곳이 있다 할진대, 전부 다 '옳소이다' 할 수 있는 한 때를 바라보면서 몰아넣었습니다. 몰아넣는 그 시기가 민족적인 섭리 시기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민족을 대표하여 모세를 모험의 선봉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는 미지의 가나안 땅을 향하는 정탐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결의를 가진 탐험의 용자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바로 궁중을 반대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끌고 나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미지의 노정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어떠한 어려움이 가로막혀 있더라도 그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조로부터 약속한 가나안 땅, 그 본향을 찾아가는 그의 마음이 어찌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비록 바로의 땅에서 살고 있었으나 그 심정에는 가나안 땅에서 행복을 노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에게까지 백절불굴(百折不掘)의 심정을 갖게 하고 전진의 일로를 개척해 나가는 것이 모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출발하였으나 광야의 40년노정에서 다 잃어버렸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같은 심정으로 모험할 줄 알았던들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 그 땅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어떠한 생활적인 의식과 감정보다도 강했던들 이스라엘 민족은 절대로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구, 배고파 죽겠다. 아이고, 우리는 죽는구나' 하고 아우성쳤던 그들이었기에 광야에서 쓰러진 것입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어떤 위인, 혹은 선각자들은 그 시대에서 즐기고 만족을 느끼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 높은 이념의 한 곳을 향하여, 약속된 한 곳을 목적지로 삼아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고 탐험의 길을 갔던 사람들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나안 땅을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홍해가 웬말이며, 또한 광야에서의 아말렉 족속의 공격이 웬말입니까? 40년 동안 유리방황하다가 바로의 속박에서 풀려 나온 장정들은 모두 지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고 그들을 인도했느냐? 12지파를 대신한 열두 사람을 세워서 가나안 땅을 정탐시켰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은 자기들 힘으로는 가나안 7족을 당하지 못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열두 사람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시대에 있어서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미욱박이며 고집쟁이고,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뛰어드는 모험 기질이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반기를 들고 있을 때 당당코 나타나서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바로의 목을 쳐누르던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을 가로막고 있던 홍해를 갈라 쳐서 탄탄대로 길 만들어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광야에서 굶주림에 허덕일 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가는 길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라고 외쳤던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개척의 복귀노정을 찾아가야 할 이스라엘이었던 연고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고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던 것입니다. (19-239, 68.1.15)
  
  
참의 세계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민족시대를 거쳐 국가시대를 맞음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지만, 때는 이미 국가적인 섭리시대였기 때문에 국가를 걸어 놓고 싸워야 했습니다. 국가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사회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가정의 형태도 갖추어야 하고, 개인의 형태까지 모두 다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형태는 갖추었으나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하나님이 바라는 완전 승리의 발판은 되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품고 역사해 나온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개인을 찾기 위해 허덕였습니다. 가정을 찾아 헤맸지만 가정도 잃어버렸습니다. 민족을 이끌고 나오던 하나님은 민족도 잃어버렸습니다. 즉 축복하였던 이스라엘 민족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이 세계에서 유리방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적인 복귀의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이 땅에 대표자로 오셨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움직인 지역은 갈릴리 해변가나 예루살렘성 근처의 몇몇 도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대신하고 세계를 대신한 내용을 가지고 움직인 사실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길에서 허덕이다 가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하나의 중심을 세워 이스라엘 국가를 회복하려던 그 뜻을 세계적인 기준으로 맞추기 위해 나온 것이 하나님의 2천년 역사요, 예수님을 중심한 2천년 역사였습니다.
오늘날의 이 시대는 끝날입니다. 무슨 끝날이냐? 개인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가정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민족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국가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세계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이요, 더 나아가서 천주 완성을 완결시켜야 할 끝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류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과업을 이끌어 온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6천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왔던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념권내로 인류를 몰아냈으나 인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세계는 세계적인 형(型)은 갖추었으나 실질적이고 내용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이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세계를 향해 외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던 역사적인 사람은 어디 있으며, 애급에서 고역당했던 하나님이 품고 사랑한 그 민족은 어디 갔는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그 백성은 어디 갔는가? 살아 생전 손에 손을 붙잡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심정에 심정을 노래할 수 있는, 하나님이 찾고 있던 하나의 기준이 없어졌으니 이 이상 한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꼭 찾을 것입니다. 참의 하나님이요, 참의 내용을 가진 하나님이라 할진대 그 하나님은 무엇을 찾겠습니까? 참의 개인, 참의 가정, 참의 사회, 참의 국가, 참의 세계, 그리고 참의 주권을 통하여 천상과 지상에 하나의 심정이 움직일 수 있는 그 세계를 찾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개인이면 개인으로서, 또 가정이면 가정으로서, 민족이면 민족으로서, 국가 세계 전체가 혈통적 인연이라든가 전통적으로 내려온 모든 인연을 다 끊어 버리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런 심정의 기준을 찾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세계는 어떤 세계였습니까? 그 세계는 참의 세계, 참의 부모가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타락한 혈통의 부모는 가졌으나 하나님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본연의 참부모는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소리쳐도 타락한 부모의 종족밖에 될 수 없습니다. 자랑할 아무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참된 부모라고 손을 들어 축복하고 천지 만상이 영원히 노래할 수 있는 본연의 부모는 어디에 있는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사라진 것도 역사과정에 있어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역사의 시초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을 누가 풀어주어야겠느냐? 
그렇다면 본연의 부모는 어떤 부모입니까? 영원무궁토록 계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자녀로 살 수 있는 분이 참부모입니다. 그런 참부모가 없어졌으니 인류는 그 참부모를 꼭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19-241, 68.1.15)
  
 
참된 심정을 가져야 할 통일교인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이념의 땅이 아닙니다. 우리와 참부모와의 인연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 교인들은 통일의 심정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간판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 사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참을 찾아 헤매는 양심의 소리가 내 마음에 안 들려 온다 할진대 그 참에 호소하는 내용을 표어로 지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참의 부모, 참의 부부, 참의 자녀, 참의 백성, 참의 만물, 참의 주권, 참의 우주가 참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할 수 있는 그 한 때를 한꺼번에 맞추는 그 날이 앞으로 인간세계에 있어서 끝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이들이 바라고 있는 재림시대는 어떤 시대일 것인가?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나서 사람의 몸이 공중에 둥둥 떠 올라가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망상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과거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내용을 상대로 해서 싸워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는 어떤 때인가? 
엉클어진 곡절의 비운의 역사를 탕감하여 개인으로부터 가정․사회․국가를 거쳐 세계를 통할 수 있는 때입니다. 전체는 개인을 세워서 종적으로 묶어진 전체의 형을 횡적으로 연결시켜서 역사적인 개체, 역사적인 가정, 역사적인 사회, 역사적인 국가, 역사적인 세계를 이루는 때입니다. 거기에서 살 수 있는 날, 그 날을 찾는 것이 우리가 선을 바라고 참을 바라고 나오는 목적입니다. 
그 날은 무슨 날이냐? 하나님과 상봉하는 날이며, 참부모와 상봉하는 날입니다. 참자녀․참부부․참백성․참세계․참하늘땅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프로를 일시에 맞추어 종결짓고자 섭리해 나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외적인 형은 그럴 듯하게 바탕이 되어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주의나 사상은 그럴 듯하지만 기준이 안 서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끝날에 서 있는 인류는 6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참을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참을 찾고 찾고 또 찾아 나왔지만, 참된 개인을 찾아 세우기 위해 개인적인 입장에서 싸우던 그들은 다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가정, 참된 민족, 참된 국가, 참된 세계, 참된 우주가 다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한 때를 다시 맞아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그 한 때는 어떠한 때이냐? 개인과 개인이 통하니 가정이 통하고, 가정이 통하니 사회가 통하고, 사회가 통하니 국가가 통하고, 국가가 통하니 세계가 통하고, 세계가 통하니 하늘땅이 통할 수 있는 그런 때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있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 그것이 개인이 지향하는 최고 목표의 정수라 할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날 외적으로는 섭리를 대할 수 있는 모양은 갖추었지만 내용은 그렇지 못합니다. 6천년의 돌고 도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시일이 가면 갈수록 여러분의 가슴이 답답하고 전기관(全器官)이 답답해진다는 것입니다. 허우대가 잘나고 돈이 많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무엇인지 모르게 허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체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6천년 전으로 뛰어나가려고 하나 몸이 6천년 후로 얽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말하기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라고 했습니다. (19-243, 68.1.15)
  
  
인간 타락 이후 지금까지 참을 찾아 나온 하나님
  
오늘날 통일교회가 나와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면 교인을 많이 거느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천 사람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삼천만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계 인류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진짜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견본이 될 수 있는 진짜 한 사람이 문제입니다. 그런 주인을 만나면 천 사람이 만 사람을 만드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하늘이 지금까지 참을 찾고 있는데 그 참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님이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수많은 선지자들을 세워 가지고 시대와 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을 품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나오며 '네가 내 심정에 얽어맬 수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느냐?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딸이 되었느냐? 단 하나밖에 없는 백성이 되었느냐?' 하며 택해 나온 것이 이스라엘이요, 아브라함이요, 야곱이요,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개인을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민족을 세워도 전부 다 믿을 수 없으니 전세계를 주고도 바꾸지 않을 한 분을 세우기 위해 수고해 나오는 것입니다. '민족을 버리면 버렸지 넌 못 버린다. 가정을 버리면 버렸지 넌 못 버리고, 이 사탄세계를 일시에 버리면 버렸지 넌 못 버린다' 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세우기 위해 믿을 수 없는 이 땅 위에 세우면 또 쓰러지고, 매어 놓으면 또 풀어 버리고, 인연맺으면 또 끊어 버리기를 일삼는 이 타락의 종족들을 대하여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것입니다. 
복귀섭리 노정에 있어서 전체 대표, 하늘과 땅, 혹은 민족의 대표, 혹은 수많은 선지자 대표, 혹은 4천년의 결실로서 하나님이 세운 그분이 누구냐?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얽매여 있고, 몸에서부터, 심정에서부터, 생활에서부터, 이념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얽어맬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보냈던 그분이 구주입니다. 구주는 무슨 구주냐? 우리 생활의 구주요, 우리 이념의 구주요, 우리 마음의 구주요, 우리 생명의 구주입니다. 
하나님이 찾아 나오는 참은 하나입니다. 이 하나를 모방하여 이 땅 위에 예수님, 즉 주님이 와 가지고 참된 사랑의 실체로서의 그 가치를 땅 위의 인간 앞에 공개하고 가야 되었을 터인데 공개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왔다 갔지만 그 이후에는 예수님 같은 그림자도 안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왔던 목적은 이 땅에 믿는 성도들 가운데서 자기와 같은 하늘의 마음을 대신하고 메시아를 대신할 수 있는 신부 한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거지 떼거리 같은 것들은 억천만이라도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가 문제입니다. 
사람도 반드시 심정을 갖고 있고 하나님도 반드시 심정을 갖고 있으니까 이 마음이 자리를 잡고 기쁘려면, 그 한 분을 모신 가운데 더불어 통할 수 있는 기준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편안히 안식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노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북한에 있는 김일성의 아들이 남한에 왔다고 합시다. 남한 국민들 가운데 김일성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한 방송에서 '김일성이 죽었다' 하게 될 때, 남한 국민들은 '아이쿠, 좋구나' 하고 춤을 추고 다 좋아하더라도 그 가운데 단 한 사람 우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김일성의 아들입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이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인간들이 도의 길을 가고 신앙의 길을 지켜 가고 있지만, 복 받겠다는 사람은 수두룩해도 하나님의 슬프고 억울하고 분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수고롭게 해서라도 자기만 편안하기를 바라지 하나님이 수고한 것을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은 어디서부터 붙들어 매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어 매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사랑만 받으려고 붙들어 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에서 슬픔을 당하였으니 그 슬픔의 자리에도 같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할 수 있게 하려면 편안한 자리에서가 아니라 고통받는 자리에서 눈물짓고 사랑할 수 있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있어서 '당신이 슬퍼하시는 자리에 나를 빼지 말고 가게 해주십시오' 해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붙들어 매야 됩니다. '당신이 눈물 흘리는 자리에 날 빼지 말고 붙들어 매주십시오. 당신이 매맞는 자리에 있으면 나도 거기에서 매를 맞게 해주십시오. 당신은 뼈가 되고 나는 살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붙들어 매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 주위에 내 몸을 얽어매 가지고 내가 맞고 당신은 맞지 말게 해주십시오'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150-188, 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