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러웠던 하늘의 심정과 우리 인간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은 사람 하나를 짓기 위해서 먼저 만물을 지었습니다. 첫날부터 닷새날까지 지은 만물을 바라보며 무한한 희망을 갖고 즐거워 하였습니다. 이 만물의 주인공으로, 하나님 대신 만물을 주관하는 주인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한히 기쁜 심정으로 그들을 위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장 28절)고 축복하였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의 말씀을 우리 인간에게 준 것은, 하나님이 기쁘기 위해 우리 인간을 지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축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아담과 해와는 이루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그 축복의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서러운 역사가 흘러오고 있습니다. 아담이 자라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했습니다. 만물도 아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기쁨을 돌려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담이 천륜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하늘의 말씀을 받들지 못함으로써 타락이라는 서러운 굴레에 매이게 되었습니다. 천지의 법도를 세우고 천륜을 세워 나온 하나님이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이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에서 내놓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만물은 알고 있고, 천사세계의 선령(善靈)들은 알고 있으되, 타락한 인간의 후손된 우리만이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5-90, 59.1.3) 아무도 알지 못한 하나님의 슬픔 오늘날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태어날 때까지 하나님의 슬퍼했던 심정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을 추방할 때 슬펐던 심정, 둘도 없는 독생자로 세운 아담이 원수 사탄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슬프고 처참했던 정경을 회상해야 합니다. 그 슬픔을 해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섭리해 나오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 이 슬픈 사정을 만민 앞에 통고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슬픔을 알지 못하고, 하늘이 보낸 선지자의 슬픔을 알지 못해 이스라엘 민족은 하늘을 배반하는 역사노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기필코 뜻을 이루어야 하기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수고하였습니다. 결국 4천년 역사가 경과한 후 비로소 잃어버렸던 아담을 복귀할 수 있었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찾아 세운 존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과 동시에 하나님의 가슴속에서 4천년 동안 사무친 슬픔을 체휼하여 예수님을 붙들고 대신 울어 줄 수 있고, 예수님을 붙들고 대신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야 할 것이었는데, 예수님을 붙들고 기뻐해 주고, 예수님을 붙들고 하나님 대신 울어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슬픔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연고로, 하나님의 슬픔은 하나님 홀로 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깊이 사무친 슬픔이 풀어지려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야 됩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런 슬픔이 맺혀진 연고로, 사람이 하나님 대신 슬퍼해 주지 못한다면 하나님 속에 맺혀진 슬픔은 풀어질 수 없습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하나님 대신 울어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이렇게 슬프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말구유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진정한 마음으로 하늘 대신 슬퍼할 줄 몰랐습니다.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 양치는 목자와 안나 등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기뻐하기 전에 하나님 속에 슬픔이 사무쳐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슬픔을 체휼하는 동시에 예수님이 탄생한 사실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중에 사무쳐 있는 슬픈 심정을 풀어 드리기 위해서는 인간 조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죄악의 세상을 탕감복귀해야 합니다. 죄 많은 세상을 탕감복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대신 울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예수님을 붙들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이런 사람이 되었던들 예수님의 뜻을 받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러한 마음을 가진 동방박사가 되었던들 그들 역시 예수님의 뜻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뜻을 받들고 나서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님을 대하지 못했고, 동방박사 세 사람 역시 하늘이 슬픈 심정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5-91, 59.1.3) 마리아와 요셉의 소망 약혼단계의 요셉과 마리아는 타락한 아담과 해와와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이후 요셉과 마리아를 택해 세울 때까지는 4천년이나 걸렸습니다. 마리아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된 동기는 비록 어린 몸이었지만 하나님이 이 민족을 통하여 섭리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땅 위에 메시아가 오시기를 누구보다도 간곡히 바랐습니다. 요셉도 역시 자기 민족을 구해줄 수 있으며 택함받은 이스라엘 선민을 하늘왕국의 백성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누구보다도 간곡히 바랐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성심을 다하여 메시아가 오시기를 고대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정성을 들이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을 예고해 주시리라 믿었고, 또 예고해 주실 것을 바라며 정성들였던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믿지 못함으로써 타락했지만 그들은 민족을 대표하는 믿는 마음,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 정성을 다하는 마음, 충성을 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메시아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메시아를 잉태할 것을 예고했을 때 마리아는 당황했습니다. 마리아는 아직까지 남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대한 간곡한 마음을 가진 마리아는 천사의 분부에 대답하기를 주의 계집종이오니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마디는 유대민족이 4천년 동안 지켜온 이스라엘의 율법에 배치되는 대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녀가 잉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잉태한 처녀는 당장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해야 할 정도로 모세의 율법이 엄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약혼한 처녀의 몸으로 하늘 앞에 택함받은 마리아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또 자기의 혈족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5-92, 59.1.3) 메시아를 잉태할 수 있게 한 마리아의 위대한 결심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아버지 뜻 하나만은 포기할 수 없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데는 어떠한 일이라도 감사히 받겠다는 마리아의 심정은 확고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가 전인류를 대신하여 자기의 모든 위신과 체면, 자기의 일생, 자기의 생명까지도 제물로 내놓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 비로소 메시아가 탄생할 수 있는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메시아를 잉태한 하늘 앞에 맡겨진 몸으로서 메시아 탄생 후 자기의 나아갈 길을 무한히 염려해야 하는 마리아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 사정은 하나님의 딱한 사정을 방불케하고, 악한 땅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방불케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마리아를 보호할 것을 명령하였던 것입니다. 요셉 역시 천사를 통하여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는 이를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크나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세우고 그 인간을 통해서 섭리한다는 것을 아는 요셉은 천사의 명령에 따라 마리아를 맞아들였습니다. 이렇듯 마리아와 요셉의 협력이 에덴에서 잃어버린 아담을 다시 회생시키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의 시대로 돌아가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와 간곡한 사정을 전하고 여러분과 인연맺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어떠한 심정을 갖고 하나님을 대할 것인가? 여러분이 마리아와 같은 심정, 요셉과 같은 심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하늘을 염려하는 심정으로 탄생시킨 예수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오늘의 우리는 하늘 앞에 합당한 입장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마음을 돌이켜 내가 과연 요셉의 입장에 있는지, 혹은 마리아의 입장에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느 때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더라도 그 뜻을 따르고, 그 뜻을 믿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적인 인습이라든가 풍습, 자기가 믿고 따라나온 윤리관까지도 부정하던 요셉과 마리아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걸어놓고 이러한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놓고 요셉과 마리아가 염려하지 못하는 염려를 하였고, 요셉과 마리아가 생각하지 못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탄생하신 예수님을 품고 고이고이 보호하여 성장시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이 원수의 세계 앞에 싸움의 책임자로 나설 때까지 지성을 다하여 양육하고, 지성을 다하여 받들어 주기를 바랐습니다. 지성을 다하여 예수님의 생활적인 제물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는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소원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예수님이 탄생한 이후에는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염려하지 못했고, 자기를 염려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자기들의 생활 조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양육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고, 예수님의 울타리가 되고, 예수님의 방패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받들어야 하는 요셉과 마리아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난 예수님을 죽으나 사나 받들어야 했습니다. 자라고 있는 예수님은 자기가 낳은 아들이로되, 자기에게 속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5-94, 59.1.3) 메시아로 대접받지 못한 예수님의 서러움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 가졌던 결심을 예수님이 자라는 동안에도 가졌던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자가 협조해야 할 내적인 사정과 외적인 사정을 완결짓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가정을 버리고 제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지방 가나의 혼인 잔치집에서 마리아로부터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는 말을 듣고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이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마리아가 몰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도 몰랐고 그의 사랑하는 형제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염려했고, 그 몸으로는 생활 환경을 염려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염려한 것은 당연한 일이로되 생활 환경을 염려한 것은 서러운 일이었습니다. 서럽게 났고 서럽게 자란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염려하면서 살아야 할 예수님은 생활 환경을 잃어버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염려하고 몸으로는 생계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였습니다. 예수님이 가정을 떠나게 된 것은 곧 형제를 떠나게 된 것이요, 4천년 동안 지나온 요셉의 종족을 떠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믿어주지 않는 모든 무리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서글픈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픈 것은 그의 환경이 슬프고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친척들이 자신을 몰라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예수님에게는 슬픔 중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마리아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요셉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예수님의 형제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예수님의 종족의 입장을 회복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입장까지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탄생하여 이 땅에 왔다가 십자가를 지고 간 30여년의 생애를 마음 깊이 느끼고, 예수님이 슬퍼했던 사실, 혹은 마음으로나 몸으로 고통당했던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태어나신 예수님만을 축하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셨다가 그렇게 슬프게 가신 예수님을 알아야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품고 바라보는 그 장면은 하늘 앞에 기쁨의 조건이 되었는지 몰라도, 예수님의 전 생애를 품어 주지 못하고 축하해 주지 못한 연고로, 하나님 앞에 기쁨의 조건을 세우지 못한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는 반면 가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의 탄신을 붙들고 축하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이러하게 가신 예수님이었으니, 이러이러하게 싸우신 예수님이었으니, 그 생애에서 느꼈던 모든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계승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일신의 슬픔을 진정한 내 슬픔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일생의 고통을 진정한 내 고통으로 여기며, 예수님이 지금까지 2천년 동안 역사하신 전체의 뜻을 내 뜻으로 심중에 품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랄 때의 예수님의 심정과 자라서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만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할 수 있으며, 예수님과 우리가 인연을 맺을 수 있고, 예수님을 조건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인연이 맺어질 수 있습니다. (5-96, 59.1.3)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소원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간 동방박사도 대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가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갖다 드리고 경배하던 세 동방박사가 준비한 예물도 준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찾아가 경배하던 길 가던 목자의 기준이라도 갖추어야 합니다. 하늘의 천천만 성도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여 부르는 노래가 하늘에 퍼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알지 못하고 있으되 메시아 한 분을 중심삼고 온 만물까지 화답했던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 자신들이 전체를 대신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세 동방박사를 대신해서, 목자를 대신해서, 만물을 대신하여 축하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난 다음에 기쁨으로 축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인류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이제 우리가 땅 위에서 30여년의 생애를 거치면서 지녔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요, 2천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수많은 성도들을 학살당하고 죽는 자리로 내보내셨지만 참으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놓는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을 대신 탕감복귀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붉은 마음을 붙들고, 우리의 몸은 피흘리던 예수님의 실체를 붙들고, 하늘땅을 위하여 만민을 위하여 눈물짓고, 원수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던 예수님의 심정을 찾아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껴야 되겠고, 몸으로는 피곤함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고 하늘의 서글픔을 이 시간 저희를 통하여 해원하시옵고, 예수님의 역사적인 슬픔을 저희를 통하여 해원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마음이 심중으로부터 우러나야만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인연을 맺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영적 구원의 터전은 개척하셨으나, 이도 평탄한 길을 거쳐서 개척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길도 불사하는 외로운 길을 거쳐서 개척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었기에 오늘날까지 하루도 쉴 사이없이 눈물의 역사를 닦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붙들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할 공동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예수님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분함과 억울함이 곧 나의 분함과 억울함이라는 것을 느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뼈에 사무치는 분함과 억울한 심정이 아직까지 땅 위에 남아 있는데, 이 분함을 풀어야 할 사람은 예수님 자신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우리들이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축하의 의미를 갖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할진대, 이제 예수님이 남기고 간 원한의 도성을 향하여, 원한의 땅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겠습니다. 이걸 붙들고 먼저 싸우고 책임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축하하게 될 때에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어야 할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뜻은 이루어야 할 뜻으로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까지 수많은 후손들에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5-98, 59.1.3) 예수님의 화신체가 되어야 할 우리 예수님이 남기신 뜻은 십자가에 죽어가면서라도 이루어야 할 뜻이요, 예수님이 남기신 뜻은 하나님이 모른다 하는 자리에 설지라도 이루어야 할 뜻이며, 예수님이 남기신 뜻은 민족이 배반하고 이 땅의 어떤 가까운 사람이 배반한다 할지라도 버릴 수 없는 뜻이라는 것을 알고, 여러분 자신이 그 뜻을 이루겠다고 예수님을 대신해 하늘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뜻을 품고 나서는 데는 어떠한 것이 나를 배반하고 어떠한 무엇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옛날 예수님이 남기신 뜻을 내가 맡았다는 입장에서 그것을 당연한 일로 알고 싸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 할진대 예수님이 남기신 뜻을 성사할 수 없고, 예수님이 남기신 한을 풀어드릴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뜻을 이루어드리고 남기신 한을 해원해 드리지 않으면 2천년 동안 우리를 찾아왔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원한을 해원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나는 개인이로되 개인적인 나가 아닌 것을 알고, 나는 일분자로되 온 우주와 인연되어 있는 나라는 것을 알아서 역사적인 전체의 심정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예수님의 전체의 뜻을 대신해 주기를 바라고, 더 나아가서는 미래의 소원까지 가하여 우리에게 책임을 맡기고자 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어마어마한 위치에 처해 있는 나 자체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4천년 하나님의 심정과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이 인연이 되어 탄생하신 예수님이 30여년의 생애를 사시며 인간에게 바라신 간절한 심정이 있고, 다시 이것이 2천년이라는 기나긴 역사가 흐른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한 요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구원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몸을 굽혀 하늘을 향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지를 움직여 하늘을 향하여 달릴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까? 내 모든 마음의 준비와 몸의 준비를 갖추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싸우던 예수님의 장엄한 싸움을 책임질 수 있는 심정이 있습니까? 어떤 심정을 갖고 있는가 스스로 분별하여 남겨진 역사적인 원한을 해원하는 운동을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감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땅 위에서 진정으로 그의 심정을 토로하고 하늘의 사정을 권고할 수 있는 참다운 아들딸을 찾아오셨으나, 예수님은 그런 아들딸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30여년 동안 허덕이며 찾아 다니셨으나 생사를 같이할 수 있는 사람, 하늘의 유업을 상속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상속해 주지 못하고 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알고 여러분 자신도 그와 같은 책임을 지고 그와 같은 입장에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불러봐야 되겠고, 땅의 만민을 바라보고 회개하고 외쳐봐야 되겠고, 만물을 바라보고 하늘을 축하하라고 부르짖을 수 있는 간곡한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심적인 충동이 없다 할진대 여러분은 오셨던 예수님, 가신 예수님, 가셔서도 수고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 2천년이 지난 이 세월을 거쳐오면서 죽음의 자리에서 싸워 나온 수많은 선지선열들 앞에 면목을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 앞에 손을 들어 간구하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시여! 이 시간 원컨대는 부디 저희가 2천년 전에 이땅에 오셨던 예수님의 몸을 대신하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 제단 앞에 내놓은 이 몸이 2천년 전에 왔다 가신 예수님을 대신하게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하고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심정을 걸어 놓고 하늘을 향하여 맹세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품은 심정과 뜻이 예수님의 심정과 뜻을 대신할 수 있고, 우리의 사지백체가 예수님의 몸을 대신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심정으로는 하늘을 붙들고, 몸으로는 땅과 만민을 붙들고자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을 우리가 일대에 대신 해원해 드릴 수 있는 예수님의 화신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으로는 하늘을 붙들고 몸으로는 이 땅 위의 인류를 붙들고 싸울 수 있는 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5-100, 59.1.3) 예수님의 진정한 소원 예수님이 먹은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사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슬퍼하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안타까워하신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슬플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보다 먼저 슬퍼하시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면목없음을 느꼈고, 고통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머리 숙여 더 강하게 책임감을 느꼈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었습니다. 불신하는 만민을 구하기 위한 책임을 갖고 나타났던 예수님이었기에 30여년의 생애에 고난의 길, 수고의 길,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길이 많았지만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버지 앞에 서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며 꿈에서까지도 원통해 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의 길을 가면서도, 피흘리는 자리에서도, 피살이 녹는 자리에서도 하늘을 붙들고 위로했고, 만민을 붙들고 염려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부모를 가졌으되 진정한 부모를 가지지 못했고, 형제를 가졌으되 진정한 형제를 가지지 못했고, 제자를 가졌으되 진정한 제자를 가지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일을 회복하여 예수님의 진정한 부모가 될 수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의 진정한 형제가 될 수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어야 하겠으며, 예수님의 진정한 교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은 나이 많은 분을 바라볼 때 참다운 부모로 모시고 받들고 싶은 마음이 넘쳐야 합니다. 또 나이 많은 분은 나이 어린 사람들을 바라보게 될 때, 자기의 모친과 부친처럼 그를 붙안고 심정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제물 될 수 있는 간곡한 마음이 여러분 자신에게서 우러나야 합니다. 진정한 형제를 갖고 하늘 앞에 나아가고 싶은 간곡한 마음을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번도 풀지 못하고 이루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한입니다. 이것을 해원해 드리고자 할진대 우리는 진정한 형제의 입장에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원이 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영원히 둘이 아닌 하나가 될 수 있는 진정한 제자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가 없었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제자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한이 되었습니다. 이 한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고 예수님의 피를 통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 교인은 많았으되 진정한 교인을 갖지 못한 예수님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교인을 갖지 못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진정한 종족이 없었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이 없었고, 사랑할 수 있는 나라가 없었고, 사랑할 수 있는 세계가 없었음을 깨달아 오늘날 우리는 손에 손을 잡고, 마음에 마음을 합하고, 사정에 사정을 합하여 예수님의 민족, 예수님의 국가, 예수님의 세계를 찾아드려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이 일을 성취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5-102, 59.1.3) 예수님의 소원을 이뤄 드려야 할 우리 이 땅 위에 있는 만물이나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은 예수님의 원(怨)을 풀어주기를 호소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은 땅 위에 와서 참부모를 못 가졌고, 참된 형제들을 못 가졌고, 참된 제자를 못 가졌고, 참된 민족과 참된 국가를 못 가졌고, 참된 세계를 못 가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원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쉬지 못하시고 싸우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입장이거늘, 오늘날 우리 한 개체가 하나님의 참다운 아들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부모도 될 줄 알고, 예수님의 참다운 형제도 될 줄 알고, 예수님의 참다운 대신자도 될 줄 알고, 예수님의 참다운 세계를 이루는 용사도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님의 원은 비로소 해원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심정을 갖고 예수님 편에 서는 무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왔으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심정을 갖추어 벅찬 마음을 갖고,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찾아가 만남의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을 만나서 축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앞으로 다시 오시는 재림주도 축하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하늘은 우리를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하늘의 기쁨은 우리로 말미암아 느끼는 것이요, 하늘의 해원도 우리로 말미암아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 개체는 이제 이러한 역사적인 중요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말은 예수님의 말을 대신해야 하고, 우리의 행동은 예수님의 행동을 대신해야 합니다. 핍박을 받으며 걷는 걸음도 예수님이 배척받으며 걸어야 할 발걸음을 대신하는 것으로 알고 친구가 없어 외롭고, 형제를 잃거나, 부모를 잃거나, 제자를 잃더라도 예수님의 사정을 여러분이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서야 옛날 예수님께서 감람산 기슭을 헤매시던 사정과 통할 것이요, 겟세마네 동산에 돌라가서 기도하던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과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찾던 참다운 하나의 가정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의 부모를 모시고 형제들이 하나의 종족을 이루고 번식하여 하나의 민족․국가․세계를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우리도 각기 가정에 들어가면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참질서를 세워 참다운 형제와 부모와 친척과 교단과 민족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여러분이 이 땅 위에 태어나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다 할진대,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웠을 망정 기뻐할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갖고 예수님을 대하고 그리워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104, 59.1.3) 2. 성탄일을 맞는 우리의 자세 성탄일의 의의 기독교의 수많은 교인들이 축하하는 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날은 12월 25일인 크리스마스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12월 25일을 지키지 않고 1월 3일을 크리스마스로 지켜 왔습니다. 이 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역사가들도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대략 추측해서 25일을 전후로 하여 일주일 혹은 이주일 이내의 어느 날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확실히는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어째서 1월 3일을 지키느냐? 이것은 영계에 들어가 예수님과 대면해서 문답한 그 결과로 그날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 통일교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래의 크리스마스는 1월 3일, 틀림없는 1월 3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지금까지 이 날을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사회의 풍조라든가 세습적인 인연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지방교회는 자의에 따라 이날을 기념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2천년 전, 성경에 나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베들레헴 성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비록 그 순간이 예수님에게는 한 개인으로서 태어나는 시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류에게나 하나님에게는 둘도 없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이 있음으로써 타락한 인류에게는 새로운 광명의 날이 찾아질 수 있는 것이요, 이 날이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지상에서 이뤄지는 한 터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날을 세우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세우고 수많은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을, 즉 구세주를 보낸다는 것을 수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해 나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그 날에 표준하게 하고 온갖 소원을 그 날에, 온갖 희망을 그 날에,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그 날을 중심으로 연결되게끔 몰아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편안한 환경에 들어가 그 환경으로 말미암아 그 날을 잊어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이방 사람을 동원하여 쳐서라도, 외로운 자리를 거치게 해서라도 그 날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고 생각할 수 있게끔 몰아왔습니다. 또 성경 여러 곳에도 메시아가 이 땅 위에 나타날 것을 예언해 놓았기 때문에 성경을 신봉하던 그때의 서기관 바리세인들은 메시아가 어느 곳에서 태어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더욱이 자기들이 소망하던 메시아요, 이스라엘 나라를 세계적인 국가 형태로 전개시킬 수 있는 책임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 소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맞이할 스스로의 준비는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그 소망의 기준 앞에 일치될 수 있는 내적 심정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156-293, 66.12.25) 예수님의 탄생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지 못한 이스라엘민족 베들레헴 도성에는 수많은 집이 있었을 것이며, 거처할 곳이 많았을 것이지만 갈 곳이 없어 외양간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그 입장과 환경을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탄생한 그 장면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내적인 사정은 말할 수 없이 서글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하늘의 황태자께서 이와 같이 비참한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 누구보다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호화찬란한 환경을 지니고 만민이 환영하는 가운데서 탄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그래야 할 그날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환경을 갖추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라던 소망의 실체가 탄생하여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소망한 바는 간절하였으나 직접적으로 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준비와 태도는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메시아가 틀림없이 온다는 것은 민족 전체가 알고 있었으되 그 민족이 오시는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는 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가정, 이스라엘 민족 전체, 더욱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아는 그 민족이요 교단이었다면, 책임진 교법사들은 남이야 어떻든간에 메시아를 맞기 위한 거국적인 행사를 위해 준비라도 해 놨던들 메시아는 그와 같이 말구유에 눕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어느 누가 오실 메시아를 위해서 방을 한 칸 마련한다든가, 그가 계실 수 있는 생활적인 환경을 마련하는 이스라엘 민족이었던들 사정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헤롯왕 앞에 동방박사를 통해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이 보고될 때, 온 예루살렘 성전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이 소문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들었을 것인데도 그 메시아를 찾아 모시겠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소원의 기준이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스스로 해야 할 준비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환경을 바라보면서도 약속한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 지상의 이스라엘을 구할 메시아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때를 맞추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냈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몽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가르쳐 준 모든 사실을 진정 그 마음에 품고, 태어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할 구주요 만민의 메시아로 온다는 것을 생활과정에서 절절히 체험하고 느꼈다면, 성경 말씀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방박사의 증거함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마음에 예수님 탄생을 명심했지만, 요셉은 여기에 대해 모른다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하늘의 명령을 받고 직접적인 사명을 짊어진 부모마저 하늘의 기준 앞에 합당한 부모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만삭이 되어 해산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마리아와 요셉은 거기에 대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 성을 찾아가기로 했다면, 거기에 사람을 보내서라도 여관을 준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준비도 없이 베들레헴을 찾아가 호적 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로 여관마다 다 찼기 때문에 갈 곳이 없어 마굿간에서 하룻밤을 새우는 기간에 예수님이 탄생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요셉가정 자체가 하나님이 당신의 황태자, 독생자를 보내는 심정에 합당한 자세가 되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책임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자신도 그랬고, 요셉 자신도 역시 그랬고, 그 환경에 처해 있는 친척도 역시 그랬다는 것입니다. (156-294, 66.12.25)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로부터 외면당한 예수님 예수님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 부부만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종족 전체가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런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의 소원에 있어서 부모가 책임 못 한 사실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 위에 찾아왔지만 복중에서부터 외면당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연 가운데 복중에서부터 낳을 때까지 10개월 동안 남에게 얘기할 수 없는 근심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복중기간에 하늘과 땅이 그를 맞이하여 환희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도 서글프지만, 하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만민 앞에 스스로 이 일에 대해 확고하게 사실로서 증거할 수 있는 외적인 준비를 못했다는 사실 또한 하나님이 볼 때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요셉가정에서 그러했기 때문에 유대교인이나 이스라엘 민족은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하늘땅의 사명을 짊어지고 오는 분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환경에 태어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품에서 하나의 섭리의 목적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갖은 서러움과 역경에 부딪히더라도 하나님이 작정한 목적을 위해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태어나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자랄 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요셉에게는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은 꿈에 마리아가 잉태했으나 그를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천사의 명령을 듣고 얼결에 데려왔지만 시일이 가면 갈수록 인간적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의 약속과 더불어 보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염려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더더욱 의붓자식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자라게 될 때 그는 가정에 심정을 붙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했고 자라고 있는 동생들도 역시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말없이 요셉가정의 생계를 돕기 위해 목수의 보조역할을 할 뿐, 협조하는 생활을 연속할 뿐이지 자기 스스로의 소원이라든가 자기 스스로의 천척인 크나큰 사명에 대한 것을 부모 앞에 제시해서 권고할 입장에 서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형님이 나타나길 바란다면 어찌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비난하는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와 있겠습니까? 이것을 보게 될 때 동생들까지도 그를 하늘이 보낸 메시아로 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이라든가 그 가정에 좋은 날이 있으면 예수님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한 서글픔이 예수님에게는 한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라 뜻을 증거하고 하늘의 사명을 실행하기 위하여 나선 도상에서부터 3년여 생애를 지나면서 그가 간 최후의 길까지 더듬어 볼 때 예수님은 가정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교회로부터, 혹은 그 사회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평화의 나라를 창건하겠다는 소망을 이 땅 위에 발 붙이고 펼 수가 없는 환경에서 사신 예수님의 생애를 다시 한 번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156-296, 66.12.25) 아담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여러분이 예수님이 탄생한 날을 기념하는 데 있어서, 태어난 것만이 기쁜 것이 아니고 그가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가 온 것은 자기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내서 왔기 때문에, 개인으로 왔다 간 것이 아니라 위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온 것이요, 아래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민족에 대한 책임, 더 나아가서는 세계 인류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의 제한된 책임만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적인 책임까지 짊어졌으니, 예수님의 생애가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어려웠었던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심정적인 기준에서 그를 동경하고 그의 편이 되어서 그가 그리워했을 형님 대신이 되고, 동생 대신이 되고, 부모 대신이 되고, 혹은 친척, 삼촌, 사돈 등 그 모든 종족적인 환경을 대신 하는 일원으로서 그때의 외로움을 위로해 주어서 풀지 못한 한을 풀어 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지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날을 맞이하는 것이 하늘과 역사시대에 왔다 갔던 예수님과 지금까지 믿는 성도들이 요구하고 바라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그 순간은 하나님에게는 말할 수 없이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역시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도 역시 기뻐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쁨과 예수님의 기쁨과 이스라엘의 기쁨이 서로 따로따로 갈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하늘의 기쁨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간 곳이 없고, 역경의 복귀노정을 개척해 나오는 과정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더불어 슬픈 길을 걸어 나오는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그날부터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있으되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국가와 민족이 아닙니다. 복귀섭리의 뜻을 대신해 나왔다는 선조들을 두고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아벨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를 거쳐서 예수님 당시까지의 그 역사과정에 있어서 하늘이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기쁨의 날을 맞이하기 위한 싸움의 노정은 거쳐왔지만, 기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비로소 기쁠 수 있는 한 날이 찾아왔다면 그날이 예수님이 탄생하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날은 하나님의 기쁨의 날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함으로써 천상세계가 기뻐하고, 천상세계가 기뻐함으로써 도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추앙하는 모든 백성이 기뻐해야 할 날입니다. 그러한 날을 맞기 위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였으니, 아버지가 기뻐함으로써 자식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뜻을 이루어 드리려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을 예수님만이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뽑아내어 이스라엘 민족을 편성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놓은 목적이 예수님이 탄생한 날을 국가적인 기쁨의 날로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이 예수님이 탄생하는 날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아담 한 자체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소원, 아담을 통하여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기쁨, 이 전부가 깨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이 실수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재현하여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이스라엘 나라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와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날이 예고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승리의 나라로 등장하느냐, 그러한 나라를 갖춰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과 더불어 기쁜 날을 맞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예수님이 탄생하는 그날부터 제기된다는 것입니다. (156-298, 66.12.25)
예수님이 태어난 비참한 환경을 생각하면 분해 메시아를 복중시대부터 정성을 다하여 모시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자기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은 소망의 한 날로 기다려야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나님이 이 땅 위에 메시아를 보내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승리한 후 사탄세계가 나라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한 국가 형태로까지 길러 가지고 그곳에 메시아를 보냈으니, 그날을 기다리기에 얼마나 지루했겠습니까? 하나님이 4천년 동안 막혔던 가슴속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이 메시아가 탄생하는 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내가 되어서 그가 태어나는 날을 하나님과 같은 심정으로 지성을 다하여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준비했다가 그가 태어나면 이렇게 키우겠다고, 어렸을 때는 어떠한 옷을 입히고 어떻게 키우겠다고, 어떻게 모셔야 되겠다고 마음의 단장을 하면서 그날을 고대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리아가 다윗성 베들레헴을 찾아갈 때 혼자 가게 했겠습니까? 그가 가는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옹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삭이 되어 하루하루가 염려스러운 판국인데 그냥 가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주위에는 수많은 군중이 따라가고, 며칠 전부터 다리를 놓아 베들레헴에서 제일 좋은 여관을 마련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사람을 갖지 못한 마리아와 예수님의 환경이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온 모든 사람의 수보다 그를 옹위하고 그가 머무는 환경을 지키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탄생하는 메시아를 동방박사가 맞이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슬픔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이 그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증거하는 것과 같이 증거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사태는 일시에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일시에 국가적인 문제가 됩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해서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은 역사적인 선조들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는 앞으로 역사시대를 탕감하고 새 시대를 창건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역사시대를 탕감하려면 역사시대를 심판해야 됩니다. 잘했고 못했고를 심판해야 됩니다. 그런 후에야 시대에 대한 사명과 책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기원을 밝혀 놓지 못하고는 시대적인 사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그것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내려온 역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밝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복중으로부터 모셔야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강보에 쌌다고 했습니다. 그 보자기가 어느 누가 만든 보자기입니까? 그런 상황에서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외양간에서 해산하는 형편이니, 그 상황에 어디 손 가까운 데에서 찾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이 비천한 어떤 아낙네의 손을 통해서 만든 보자기인지도 모릅니다. 이게 될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어디 갔습니까? 메시아가 처음 입는 옷이 하늘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늘이 꿈도 꾸지 않았던 그런 사람들의 손을 거쳐서 만든 강보라니, 4천년 동안 하늘이 준비한 이스라엘은 어디 갔느냐는 것입니다. 또 그가 태어나서 목욕을 했다면 어디서 했을까요? 목욕은 누가 시켰을 것인가?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으니 동네 부인들이 달려왔을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사태가 벌어졌으니, 아기를 낳아 본 부인들은 그 사정을 알기 때문에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 아기 예수님을 씻어 주었을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그릇에 물을 떠 가지고 와서 씻어 주었을 것인가? 소 여물을 퍼주던 뚝배기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죄짓고 당장 형벌을 받을 사람이 쓰던 세숫대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 신자들이, 하늘 앞에 정성을 다하여 그 아기가 탄생하는 그 시간을 맞아 가지고 목욕시킨 조상을 가졌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메시아의 몸을 사탄들이 드나들 그런 손길로써 씻어 주다니 이 불경을 무엇으로 하늘 앞에 사죄하겠습니까? 선생님은 궁금했습니다. 그때 그가 젖을 먹을 때 어디에서 먹기 시작했을까? 보통 24시간은 지나고 젖을 먹이는데 처음 어디에서 먹였을까? 외양간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젖을 먹는데 소 오줌 똥 냄새가 진동하는 자리에서 먹다니,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다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런데 뭐 예수님이 탄생할 때 말구유에서 탄생해서 강보로 쌌다고, 그 강보를 무슨 하나님의 옷자락같이 생각하고, 그 말구유를 하늘의 보좌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서글픔이 어려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이 한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그 한을 탕감하기 위하여 시대적인, 역사적인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윗성을 찾아갈 때 그를 부축해 주는 우리의 조상이 못 되었다는 것이 한입니다. 그가 해산하는 수고와 역경 가운데 있을 때 밤을 새워 가며 시중들지 못한 것을 염려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잠만 자고 꿈에도 그걸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벌을 받아야 됩니다. (156-309, 66.12.25) 예수님이 태어난 순간은 하나님에게는 서러웠던 순간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이 기뻤겠습니까? 아닙니다. 만일 헤롯왕의 아들이라면 만조백관이 옹위하는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이 찬양하는 가운데서 태어났을 것입니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온갖 정성을 다 하하여 거족적으로 그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을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그날을 축하의 날로 정하여 경축행사를 거행했을 것입니다. 더욱이나 로마 황제의 아들이 태어났다면, 지중해 일대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판도를 가지고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로마의 왕자가 태어났다면, 얼마나 수많은 민족이 찬양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물을 보냈겠습니까? 한때 왕의 아들로 태어나도 그러하거늘, 천추만대의 창조주요 만우주의 주인 되는 하나님의 왕자로 태어난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맞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라보는 표준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만이 예수님을 맞아 주기를 바랐겠어요? 아닙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민족이 거족적으로 그의 탄생을 축하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을 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딱했으면 이방의 점장이를 통해 이스라엘에 온 구세주를 증거했겠는가? 이것이 원통한 일입니다. 유대의 모든 교법사들은 어디 가고 점성술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기쁜 일로 알고 있는데 이 사실이 불경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면 교회, 이스라엘 나라면 나라, 하늘을 위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시대적인 선각자로서 지도자적인 책임을 짊어진 제사장, 서기관, 교법사들이 일체가 되어 찾아와 수천년 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가보를 예물로 갖추어 메시아 앞에 봉헌하여도 부족할텐데 그들은 어디가고 관계도 없는 이방의 점성술객들이 찾아와 예물을 드렸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모독이요, 하늘나라의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이 받들지 못하고 교단이 받들지 못하니, 하나님은 탄생한 메시아를 땅 위에 드러내고 인간 세상에 찾아왔다는 조건적인 인연이라도 남겨 놓아야 할 뜻이 있기 때문에, 하늘을 숭상하고 세계적인 위대한 인물이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관찰하면서 그를 찾고 고대하던 점성술객들을 통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서러움과 분함이 얼마나 컸겠나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방박사가 찾아온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어찌하여 우리 민족은 동방박사 이상으로 하늘 앞에 충성을 다짐하고 스스로 제물된 생애노정을 거치면서 메시아 한 분을 모시기 위해 정성들이지 못했느냐? 그 이상의 사람이 왜 없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것을 볼 때, 메시아가 태어난 날이 기쁜 날이었으나, 하나님에게는 유대교단을 잃어버리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과 멀다는 것이 증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4천년 동안 그렇게 수고하면서 길러 나온 이스라엘이었지만 외적인 중거자가 나와 메시아를 모셨다는 자리에 세워 놓지 않으면 안 될 하늘의 사연이 여기에 엮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얼마나 괴로웠던 시간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4천년 하늘의 역사를 총탕감하기 위한 책임을 짊어지고 이 땅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운명과 세계사적인 운명을 책임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세계에 새로운 주권국가를 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고 세계를 통일해야 할, 하늘나라를 창건해야 할 책임자입니다. 그런 책임자가 태어나는 그 자리가 마굿간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기독교에서는 마굿간에서 태어난 그 자체를 신성시합니다. (156-301, 66.12.25) 하나님의 입장에서 성탄절을 축하해야 그러면 오늘 우리는 그날을 어떠한 입장에서 축하해야 되느냐? 이스라엘의 실수를 시정하여 이스라엘의 인연을 되찾을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맞을 수 있었던 동방박사 이상의 성의를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가 태어날 수 있는 자리, 그가 태어날 수 있는 환경을 다 알아 가지고 태어나기 전에 복중의 메시아를 모실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태어난 메시아를 모시는 것만이 아니라 복중에서부터 모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며, 주님이 복중에서 자랄 때 그 어머니의 괴로움을 제거해 주지 못했으며, 그 어머니의 생활이 편안하도록 책임지고 돌봐 주겠다는 아낙네가, 사내가 없었던가! 주님을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시고 정성들이는 무리가 4천년 동안 키워 온 이스라엘 나라에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사명을 망각해 버린 이스라엘을 제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의 이름을 가지고 복중에 있을 때부터 그를 하늘의 왕자로 모실 수 있는 충신 열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의 메시아를 위하고 모시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부터 모신 사람이 하늘 앞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사도들을 택할 때 그가 병신이라 하더라도 그를 먼저 택하여야 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제자들을 사랑하기 전에 그를 사랑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아들딸이 있었던들, 그러한 사람이 있었던들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기독교는 이방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인연을, 충성의 인연을 밟고 옮겨 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던들 예수님이 몰려 죽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터전을 지켜 역사적인 인연을 상속받을 준비를 한 터전 위에서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역사는 옮겨 갈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못 옮겨 가니 이스라엘 민족 또한 옮겨 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못 옮겨 가니 예수님을 중심삼은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로마에 가서 4백년 동안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 핍박을 받으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에서 어느 기간을 거쳐 승리했습니다. 기독교의 승리의 터전이 로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서글픈 일입니다.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 앞에 정성을 들이고 마리아를 모셔 가면서 그의 손으로 하늘의 왕자를 받겠다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 인류가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뻗어나갈 수 있는 자세를 갖추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격을 갖출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고 분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중으로부터 태어난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됐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도 복중으로 태어나는 메시아를 맞을 수 없는 기독교의 역사가 예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라는 메시아를 맞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지녔기 때문에 앞으로 주님이 이 땅에 와도 자라는 주님을 맞이할 수 없는 기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지녔기 때문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도 뜻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고 다시 부활적인 승리의 터전을 맞고 난 연후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의 후계, 즉 제2 이스라엘 기독교가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인연이 되는 것입니다. 탕감복귀를 하는 데는 인류 역사의 고비를 그냥 그대로 재현시켜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책임을 못 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죄지은 것을 회개하는 것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이 메시아를 맞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복중시대부터 오냐, 네 민족을 위하여 네 나라를 위하여 보내는 하늘의 왕자를 맞을 수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로구나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기억될 수 있는 이스라엘의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 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이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데는 흘러가는 역사시대의 사람들이 축하하던 것처럼 축하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밟고 올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낼 때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간곡한 심정을 대신하여 마리아를 모실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메시아를 대할 줄 아는 주인공이 되어 이날을 축하해야 됩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이날을 축하한다면 여러분은 세계사적으로 역사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보다 하늘 앞에 가까운 심정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156-303, 66.12.25) 3. 예수님의 참된 식구가 되자 예수님이 죽게 된 제일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가 우리가 부르는 식구라는 말은 그렇게 허술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통일교회의 선생님은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웠던고? 거기에는 역사적인 곡절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은 첫째는 요셉 가정이, 둘째는 세례 요한이, 셋째는 유대교가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억울하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천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키워온 이스라엘 민족을 믿고 하나님이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을 죽여 놓고, 죽으러 왔다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 하려고 4천년 동안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하고 섭리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죽이려고 섭리하셨겠습니까? 죽어도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인데 무엇 때문에 30살이나 되어 다 자란 후에 시끄럽게 요란을 피우다가 몰려서 죽게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죽게 된 제일 원인은 요셉 가정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찾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태평한 가운데 있더라도 요셉 가정만은 예수님을 중심하고 하늘나라를 세워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을 수 있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남편은 천국으로 가고 부인은 지옥으로 가도록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창조 당시의 이상의 주인공들, 즉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과 딸이 종족을 이루고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지옥이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천륜의 뜻에 따라 오셨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참다운 가정을 이 땅에서 가져야지 영계에 가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면 수많은 제자들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그처럼 피를 흘리고 죽은 제자들을 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자기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피흘리게 해서 구원하는 것이 본래의 구원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부터 그러한 일을 해야 했던 예수님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고, 하나님이 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소망의 세계, 소망의 나라, 소망의 종족과 가정과 개인이 소망의 사람이 없었기에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십자가 대속의 길을 가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성전에 비유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자기만은 깨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몰리고 쫓기면서 억울한 심정으로 몸부림쳐야 했습니다. 그분이 걸어가신 그 길은 아직까지 눈물의 길로 남아 있고, 그분이 걸어가신 그 피의 노정이 아직까지 역사노정에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16-33, 65.12.26)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할 수도 없었던 예수님 예수님은 나라없는 백성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족이 있었어도, 주권국가가 있었어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 태어나셨던 예수님, 그분에게는 친척도 있었고 가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부모의 사랑이 그리웠고, 6촌 형제, 아저씨, 할아버지, 동네 사람 등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 그리웠습니다. 사랑을 받으려야 받을 수 없었고, 사랑을 하려야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은 참으로 불행한 분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예수님, 사랑을 할 수 없었던 예수님, 이 천지간에 부모는 수없이 많은데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부모는 어디에 있었던가? 이 땅 위에 수많은 형제들이 있지만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가족은 어디에 있었던가!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친척들은 어디에 있었던가?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민족은 어디 있었으며, 국가는 어디 있었으며, 세계는 어디에 있었던가? 쫓기고 몰림을 받은 예수님, 그러나 하늘은 이처럼 안팎으로 몰리는 예수님의 서러운 사정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을 다하여 노력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과는 비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진정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부모도 진정한 부모가 아니었고. 그분의 친척들도 진정한 친척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살던 세계도 진정한 그분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갖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려야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한이 맺혀져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이 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통일교회의 식구라고 하는 명사는 여기서부터 인연된 것입니다. 인류를 모아 하나님이 바라는 식구의 인연을 갖추기 위해 천륜을 가르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식구라는 명사를 내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구된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비참하고, 억울하고 분했던 예수님의 한을 책임지고 해원해 드려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고빗길을 갔던 예수님의 고생길을 대신 책임지고 가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내일을 기대하면서 한을 남기고 가신 예수님, 그 한을 풀어드려야 하는 것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 뜻길을 개척하겠다고 나선 무리가 통일교회 식구들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여러분을 모아 놓고 식구라는 명사를 가르쳐 주게 된 처절한 사정을 알아야 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이 깃들어 있는 식구라는 이름을 걸어 놓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나온 것입니다. (16-42, 65.12.26) 예수님의 사랑을 대신 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오늘날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사랑받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사랑을 하지 못하셨던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만 오늘의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동생이 될 수 있고, 누나가 될 수 있고, 한 가정의 가족이 될 수 있고, 종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가정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민족을, 예수님이 사랑하시지 못했던 그 세계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한 자리를 넘어설 수 있어야만 땅 위에서 골고다의 고난을 피해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생명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래야만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언제 주로서의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당신은 나그네의 길을 걸으셨지요? 옥에 갇히셨지요? 하고 예수님의 슬프셨던 사정을 풀어드릴 수 있어야만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으로 오셨던 예수님과 식구의 인연을 맺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울 수 있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적용되는 것이지, 종과 같은 입장이라면 그런 말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병에 걸린 자식, 또는 사형장으로 가는 자식을 보고 통곡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를 위로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인연을 세워야 할 사명, 즉 천도를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내 몸이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인류를 자녀의 입장에 놓고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위해 서러워하고, 그들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이 당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이러한 심정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그 자식을 천번 만번 찾아가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기 동생이 그런 길을 가고 있다면 대신 가 주고 싶은 것이 형제의 마음입니다. 자기 가족 가운데 그런 식구가 있을 때는 찾아가 보는 것이 식구된 도리입니다. 이 민족과 세계를 이와 같이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자녀가 못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식구라는 명사가 이렇게 엄청나고 두려운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싸움의 노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곡한 마음으로 걸어온 노정에 이어서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이 남은 노정을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되어야 식구라는 명사를 지닐 수 있습니다. 이 식구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땅 위에서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에게 맺혀 있는 한, 죽음길을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을 민족과 세계를 붙들고 우리가 해원해 드려야 합니다. (16-45, 65.12.26) 예수님의 심정과 인격을 본받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요셉 가정에서 30년 동안이나 사랑하는 동생들과 함께 살았지만 그 가족이 하늘의 심정을 지닌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는 못 되었습니다. 가정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원하는 가정이 못 되었고, 예수님이 원하는 식구가 못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쫓기고, 저 마을에서 쫓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인에게 핍박받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핍박받고, 지금까지의 역사 과정에서도 핍박을 받아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 와서 아버지의 심정을 품고, 아버지의 아들딸을 위하여 살며,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식구로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또 예수님은 사랑하는 식구들을 품고 아버지를 위로할 뿐만 아니라, 그 식구들까지도 아버지를 위로할 수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식구를 갖지 못함으로써 유대교단․이스라엘 민족이 전부 그를 불신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어디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의 그러한 사정을 동정할 줄 알아야 되겠고, 머리 둘 곳 없었던 예수님의 안식처를 만들어 드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나의 가정이 없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에라도 예수님을 모셔야 하겠고, 예수님을 모시어 눕게 해 드릴 자리가 없으면 자신의 무릎에라도 뉘어드리겠다는 심정을 지닌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심정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이 하늘길을 가는 데는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식구와 같이 대하고, 식구와 같이 기르시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예수님의 뜻을 아무도 몰랐고, 믿고 의지하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님과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은 그것을 조건삼아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모는 놀음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인류의 생명나무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신의 사정을 대신해 줄 수 있는 참다운 하나의 식구를 얼마나 원했던가를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이 예수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식구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환경, 어떤 처소에서든지 하늘 대하여 변치 않고 충성을 다하셨던 예수님의 그 심정과 인격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평안히 쉬시며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이루어 드리는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다라고 하셨는데, 그 원수는 누구였습니까? 예수님께서 슬퍼할 때 슬퍼할 줄 모르는 자가 원수였으며, 하늘의 심정을 증거하기에 애달파할 때 함께 애달파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던 자들이 원수였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나아가는 길에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지 못하고 원수가 되었던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있는 정성을 다하고 심정을 다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가르쳐 주던 제자, 즉 3년 공생애노정을 같이 걷던 사도들까지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못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고개, 십자가의 고개를 찾아나가고자 할 때,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정과 하나된 참다운 식구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들은 이와 같이 우리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섭리의 때를 맞추어 드리는 하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지 못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139, 57.10.18) 예수님의 참된 식구가 되려면 오늘날 여러분이 식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말은 실로 두려운 말입니다. 여러분이 신앙노정에서 잘못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던 그 입장을 가로막는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이 사탄과 싸우시던 입장을 가로막는 원수가 되고, 십자가에 나가 인류를 대속하시려던 뜻을 가로막는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구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싶어하시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일 것이며, 예수님이 사탄과 싸우실 때 수고하시면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탄식하던 모든 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그저 따라만 가는 사람은 예수님의 식구가 아니요, 십자가의 길로 나아갈 때까지의 심정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예수님의 식구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어 30여 생애의 노정에서 참다운 증거자의 사명을 띠고 나타나실 때, 당신을 대신하여 증거하는 참다운 식구를 갖지 못했고, 사탄과 싸우는데 있어서 같이 싸워줄 수 있는 식구, 골고다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는 길에 같이 나가줄 수 있는 참다운 식구, 나아가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를 갖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예수님의 애달픔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하여 애달파하시던 것과 같이, 오늘날 여러분도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 하나님의 뜻을 증거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의 반대를 무릅쓰 고 비장한 심정과 각오를 갖고, 사탄과 싸우시던 예수님의 사정, 하나님의 뜻 성사를 위하여 염려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대신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 뜻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생명도 바치겠다는 각오를 하셨던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스스로 민족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겠다는 제물의 정신도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산 제물이 될 뿐만 아니라 2천년 전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인격을 지닐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사탄 앞에 굴복하는 죽은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쳐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다가 낙망해서는 안 되고, 사탄과 싸우다가 패배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은 죽음의 고개를 밟고 올라서서, 원수를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이끌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심정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만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크나큰 뜻을 대행하고 나아가실 때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예비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요, 유대교 교인들이 반대하는 것이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따랐던 제자, 그 사랑하는 제자들이 믿어야 할 때 믿지 못하고, 증거해야 할 때 증거하지 못하고, 싸워야 할 때 싸우지 못하고,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한 것이 예수님에게 가장 큰 서러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해야 하늘의 참다운 식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먼저 여러분 각자 각자의 마음이 하나의 마음으로 화합하여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하나의 목표(뜻)를 향하여 싸울 줄 알아야 되겠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지 못하고 돌아가심으로써 맺힌 그 원한을 풀어드리고 위로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룰 때 여러분을 하늘의 참다운 식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141, 57.10.18) 참된 식구의 할 일 여러분은 참다운 식구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에 돌아가면 그 가정에서 참다운 식구를 가져야 하고, 교회에 가면 그 교회에서도 참다운 식구를 가져야 하고, 사회에 나가면 그 사회에서도 참다운 식구를 가져야 합니다. 또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증거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탄과 싸웠으며, 하나님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위하여 증거해야 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싸워야 하며,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후에 자신을 증거해 주는 또 하나의 식구를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증거하던 사도들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자신을 증거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여러분을 변치않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고 증거할 수 있는 하나의 식구를 가져야 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싸워 줄 수 있는 식구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의 길을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희생의 싸움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성도가 되기 전에는 여러분을 대신하여 증거하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여러분 대신 죽어줄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저버리면서 희생의 길을 갔기 때문에, 그가 증거하는 것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며, 그가 싸우는 것도 역시 자신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싸운 것입니다. 또 십자가를 지심도 자기를 위하여 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체 섭리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위하여 증거했고, 예수님을 위해 싸웠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복귀의 뜻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분을 증거할 수 있고, 여러분을 위해 싸워 줄 수 있고, 죽어 줄 수 있는 식구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식구를 갖지 못한다면, 하늘 땅 앞에 혹은 예수님 앞에 원수 입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게 된 원인은 자기를 위하여 죽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싸우시게 된 원인은 자기를 위하여 싸워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스스로를 증거한 원인은 자기를 위하여 증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한 예수님의 식구가 되어야 하고, 자신을 위하여 증거해 주고, 싸워줄 수 있으며, 죽어줄 수 있는 하나의 식구를 가져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30평생의 생애노정을 여러분이 탕감하여 산 제물로 아버지 앞에 드리지 못한 원한이 여러분에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다운 식구를 찾아 나선 여러분은 예수님이 염려하시던 염려의 심정을 지니고, 또 하나님이 염려하던 그 염려의 심정을 지녀야 하며, 식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줄 아는 마음이 지녀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 사랑하는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 주셨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들과 이스라엘민족이 오히려 예수님을 불신하여 맺힌 모든 원한을 풀어드리고 위로해 드리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예수님을 중심삼은 교회와 민족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남들이 놀 때 하나님을 사탄 앞에 증거하는 일을 해야 하며, 남이 모르는 사이에 사탄과 싸워 나가기 위해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참다운 식구를 찾아 세워야 합니다. (3-143, 57.10.18) 예수님과 일심동체가 되는 가정 형성의 중요성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까지 나가신 것은 물론 사랑하는 식구들을 위해서였고, 나아가서 수많은 민족과 인류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에도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고,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증거한 것도 역시 그러했고, 그가 싸운 것도 역시 그러했고, 그가 사신 것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그러한 예수님의 식구가 되기 위해 있는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즉 여러분은 증거의 길을 통하여, 싸움의 길을 통하여, 죽음의 길을 통하여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여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또는 사탄 앞에서 자신을 위해 증거해 줄 증거자를 가졌습니까? 여러분 대신 사탄과 싸워줄 수 있는 하나의 친구를 가졌습니까? 또한 여러분을 대신하여 죽어줄 수 있는 하나의 식구를 가졌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이 끝날에 여러분의 가치를 결정지을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세워 나가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원수를 맞이하게 됩니다. 먼저 가정에서 자신의 가는 길을 막는 원수가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 부인이 교회에 나오면 남편이 원수가 되고 남편이 나오면 부인이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나오면 부모가 원수가 되고, 부모가 나오면 자식이 원수가 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가정을 잃어버리고, 남편과 부인을 잃어버려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부모를 잃어버려야 할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가정의 부모와 함께 참다운 부모를 찾아야 하고, 여러분이 참다운 신랑이 되고, 참다운 신부가 되어 신랑 또는 신부가 함께 하늘의 참다운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여러분이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부모가 슬퍼하면 자식도 슬퍼해야 할 것이요, 자식이 슬퍼하면 부모도 슬퍼해야 할 것이요, 남편이 슬퍼하면 부인도 슬퍼해야 할 것이요, 부인이 슬퍼하면 남편도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서 한 집안의 모든 식구가 일심동체가 되어 하늘의 뜻을 받들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나가지 못한다면, 여러분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가정에서 몰리고, 사회에서 몰리고, 국가로부터 몰리게 됩니다. 그 때 여러분은 하늘의 뜻을 중심삼은 식구가 필요하게 됩니다. 세상의 부모에게 몰리는 대신 참부모를 가져야 되겠고, 부부끼리 불신하는 입장에서 참부부를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식구를 가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고, 깨뜨리려 해도 깨뜨릴 수 없으며, 죽음의 자리까지도 함께 나갈 수 있는 식구의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세상의 부모도 자식이 죽을 입장이면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랑의 정을 지니고 있거든 하물며 하늘의 사랑으로 인연맺은 여러분이 세상 가정 이상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이 머무는 곳에 예수님께서 임하려야 임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임해서 안식하려야 안식할 수 없습니다. (1-145, 57.10.18) 그리스도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사람의 마음 자세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나타난 참다운 개인이며 독생자, 즉 하늘가정에 처음 나타난 하늘의 아들된 예수님을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모시고 살 수 있는 예수님의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가정권에서 제1인자로 세움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즉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살 수 있는 기준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이 바로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불신의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금 하늘의 품에 안겨주기 위한 사명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증거하셨으며, 나는 하늘의 식구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가 반대할지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전파하고 증거하셨으며, 혈혈단신 죽음을 각오하고 생명을 바쳐 싸우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자신의 모든 생애를 바쳐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였던 것과 같이, 그 예수님의 심정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사탄과 싸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어두운 사탄의 세력이 여러분을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여러분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여러분이 뜻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만민 앞에 선포하는 예수님을 핍박하였고, 예수님의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예수님 한 분을 죽이기 위하여 사탄들이 역사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모든 것을 이땅에서 추방하고 섬멸하기 위하여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해 가면서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노정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 자기 일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싸움의 봉화를 들고 나섰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위해 죽음을 개의치 않고 싸움의 길에 나서서 십자가의 길까지 나가시던 일을 상고하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예수님을 모시고 살 수 있는 예수님의 식구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러분이 먼저 하늘의 심정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즉 여러분 각자 각자가 아버지 앞에 머리숙여 하나의 사정권(事情圈)을 이루어 예수님이 편안히 쉴 수 있는 하나의 울타리를 만들어드리는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당시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지만, 편히 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드리는 참다운 식구를 갖지 못했던 것이 역사적인 원한이었기에, 오늘날 여러분이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위로해 드리고 풀어드릴 수 있는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내 형님과 같이, 예수님을 내 오빠와 같이 내 가정에 모시고 살면서, 그분의 서글픔이 내 서글픔이요, 그분의 애달픔을 내 애달픔으로 느껴 그를 위로할 수 있고, 그분의 염려를 내 염려로 여겨 대신 염려해 드릴 수 있는 심정을 지녀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심정을 지니지 못하면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없습니다. (3-137, 57.10.18) 예수님의 참된 식구 여러분은 같은 교회 안에서도 서로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서로서로의 사정과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와 같이 서로의 사정과 심정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원수입니다. 여러분은 이웃 형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 그의 사정이 내 사정이요, 그의 애달픔이 내 애달픔이라 할 수 있는 영원하고 참다운 식구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서로서로가 하나의 식구라는 마음으로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의 입장에서 서로 위하며 살 수 있는 참다운 식구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관계를 맺어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을 안식시켜 드리려 할 때 반드시 이를 가로막는 원수가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인연맺고 알았던 것이 원수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원수는 여러분의 가정에, 사회에, 국가에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가정과 사회․민족․국가․세계에 있는 원수를 제거하면서 천상까지 나아가야 할 중대한 책임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정과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의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이루어 사회․국가․세계까지 연해 나가야 할 중대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식구의 입장에서 서로서로 증거해줄 수 있고, 싸워줄 수 있고, 죽어줄 수 있는 관계를 맺어 나가야 합니다. 진실로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여러분은 예수님의 참다운 식구가 될 수 있습니다. (5-147, 57.10.18) 4. 예수님의 한과 우리의 사명 예수님의 원한이 생긴 이유 우리 인류의 조상이 타락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리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그들에게 원한이 있겠습니까? 원한을 품지 않고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도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살다가 죽어서 가는 곳이 하나님이 지은 천국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원한을 가진 사람이 그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까? 원한을 품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오지 않고는 천국 갈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은 천국에 가서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도 천국에 못 가고 낙원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총각 귀신을 무엇이라 합니까? 총각이 억울하게 죽으면 몽달귀신이라고 합니다. 그런 남자는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다시 와서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원한을 남긴 것은 신부를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신부를 못 찾았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낙원에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만왕의 왕으로서 만왕의 왕비를 찾지 못했습니다. 만왕의 왕권을 갖기 위해서는 만왕의 왕비의 기준을 갖춘 신부를 맞이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래의 왕권의 자리에 못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타락하지 않은 입장에서 부부의 인연을 갖추어서 만물을 주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남녀 평등권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이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의 종지조상(宗之祖上)이었습니다. 주관하는 데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주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만 주관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본래의 기준에 합당한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만왕의 왕으로 왔기 때문에 인류는 만왕의 왕후를 받들어 모셔야 됩니다. 인류의 아버지로 오셨다면 인류의 어머님을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또 인류의 스승으로 오셨다면 사모님을 모셔야 됩니다. 자식으로서 어머니 아버지 두 분을 정성을 다하여 모셔야 완전한 효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효자입니다. 아버지 혼자에게만 효도하고, 어머니 혼자에게만 효도하는 사람은 효자라 할 수 없습니다. 백성이 나랏님을 위해 충성하는데 나랏님만을 위하여 충성해서는 안 됩니다. 나랏님 부인까지를 위하여 충성해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한 충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선생님과 그 사모님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천법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천리원칙 앞에 합당한 만왕의 왕권을 갖추는 데는 혼자서는 안 됩니다.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영광된 자리에는 누굴 데리고 가고 싶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아들보다도 색시가 낫다는 것입니다. 기쁜 후에 자랑할 수 있는 대상이 없으면 그 기쁨도 허수아비입니다. 한바탕 기뻤으면 그 다음엔 자랑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부끼리 좋아할 수 있는 일을 자랑하려니 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부부끼리 자랑하게 되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아들딸 앞에서 야야 이렇게 한다고 하면서 자랑해야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지는 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1-227, 71.2.16) 예수님의 최고의 소원 인류의 아버지가 예수님이라면 예수님 혼자서 아버지가 될 수 없습니다. 혼자서는 아버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부모라면 짝이 있어야 합니다. 부인을 맞아 부모의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못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최고의 소원은 나라를 갖기 전에, 자식을 갖기 전에 부인을 먼저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인을 맞지 못했기 때문에 전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을 아들딸로 만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부모의 자격으로 왔으면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와는 다릅니다. 신부가 없는, 외짝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에서는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말은 참 대왕마마, 중전마마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선생님을 놓고 볼 때 선생님 부부가 좋아요, 외짝이 좋아요? 쌍이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되고 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어야 됩니다. 남자가 태어날 때 여자가 있을지 없을지 걱정하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 벌써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꿈도 안 꾸어 보고 그걸 알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한을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한이 맺혔느냐? 신부를 찾아야 하는데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찾기 전에 교회를 찾아야 하고, 교회를 찾기 전에 종족을 찾아야 하고, 종족을 찾기 전에 가정을 찾아야 하고, 가정을 찾기 전에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부를 찾지 못하면 가정도 없는 것이요, 종족도, 민족도, 나라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본 중의 근본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천명에 의한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나라가 배반하고, 교회가 배반하고, 씨족이 배반하니 모두가 한결같이 돌팔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은 몰리고 쫓기면서도 생애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3년 공생애노정을 가신 것입니다. 나라를 대신할 수 있는 패를 만들고, 민족을 대신할 수 있는 패를 만들고, 종족을 대신할 수 있는 패를 만들고, 예수님의 부모를 대신할 수 있는 패를 만들고, 종교를 대신할 수 있는 패를 만들기 위해서 공생애노정을 가신 것입니다. 로마의 앞잡이가 된 이스라엘 민족과 대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을 신부로 세워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민족을 세우기 위해 나선 것이 3년 공생애노정입니다. 그것은 처량한 노정이었습니다. 계획했던 코스대로 가지 못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반대하는 무리들에게 안팎으로 에워싸여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세와 엘리야를 변화산에 보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죽을 것을 의논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한은 신부를 맞이하지 못한 것입니다. 처녀들이 시집 못 가 보고 죽으면 한이 맺히겠어요, 안 맺히겠어요? 또 남자가 그러면 한이 맺히겠어요, 안 맺히겠어요? 여자가 한 맺힌 것에 대하면 남자가 한 맺힌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는 나이 80이 되어서도 장가들겠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연의 천리 원칙이 그렇습니다. 천국은 본래의 선한 부모로부터 태어나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고 우주의 모든 피조물이 그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는 자리에서 부부의 인연으로 아들딸을 낳아 사랑하고, 그 아들딸들에게 모든 것을 다 상속해 주고 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아버지는 가고 어머니는 못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딸 모두 다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41-229, 71.2.16) 열두 제자의 입장과 그들의 불충 기독교에서는 예수 믿고 천국가자고 합니다. 천국은 믿어야만 가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천국은 자동적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신부를 찾았더라면 죽긴 왜 죽습니까? 예수님이 신부를 찾았다면 가만히 있어도 뜻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막에 가서 구덩이를 파며 농사짓는 농부가 되더라도 뜻은 이루어집니다. 전도는 무슨 전도예요?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 어부들을 전도해 놨지만 그들이 무엇을 하느냐 이겁니다. 신부를 맞이하여 아들딸 낳아 훌륭하게 키워서 장가 보내고 시집 보내 친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철옹성 같은 인연의 터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지에서 도망가는 그따위 패들은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식민지권내에 있더라도 누구도 모르게 감쪽같이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이종 사촌 형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유대나라에서 천재라는 명성이 붙어 모두가 우러러보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그러한 형을 내세우면 유대나라가 한꺼번에 다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로마제국이 이스라엘 나라를 점령한 입장, 아랍권 전체가 로마의 속국이었으므로, 유대교회가 돌아가게 되면 나라가 돌아가게 되고, 유대나라와 유대교회가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 이스라엘이 봉기(蜂起)만 하게 되면 일시에 아랍권은 이스라엘을 중심삼고 하나됩니다. 그렇게 되면 편싸움이 벌어져 중동지역에 로마를 대신한 새로운 국가권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제국을 잡았더라면 예수님의 기독교가 왜 순교의 종교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죽긴 왜 죽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워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딸 만들고 싶겠습니까, 자기의 혈육을 낳아서 하나님의 아들딸 만들고 싶겠습니까? 물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직계 아들딸을 찾을 방도가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대표적인 인물을 세워 가지고 교회와 나라를 얽어매기 위한 외적인 일을 준비하려니 제자들을 안 세울 수 없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나라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충신들을 모아 놓아야 되고, 교회를 잃어버렸으니 교회를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세워 놓아야 하나님 앞에 위신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위하고 교회가 위하고 종족이 위할 수 있는 패들을 전부 잃어버리고, 나라도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모두 다 잃어버리고 무슨 면목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충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적어도 열두 사람은 세워야 하고,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을 못해도 열두 사람은 세워야 합니다. 또 지파가 열두 지파이니까 열두 지파를 대표할 수 있는 열두 사람을 세워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12사도는 한 나라의 충신 대신자요, 교회의 제사장 대신자요, 가정의 12지파 중 열두 아들 대신자입니다. 이러한 3단계적 가중된 책임을 위하여 예수님은 오로지 정성을 다했는데도, 그들은 가정의 부모된 입장도 버리고, 교회의 제사장된 입장도 버리고, 나라의 군왕된 입장도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국가의 애국자 대표요, 교회의 제사장 대표요, 종족․씨족․가정의 아들 대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에도 그들을 세웠고, 교회에도 그들을 세웠고, 씨족에도 그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부 대표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뿌리를 박아 씨족과 연결시키고, 교회와 연결시키고, 나라와 연결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41-231, 71.2.16) 예수님의 한 그런데 대표적인 중요 인물들이 그 꼴이 되어 버렸으니 예수님이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었으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원수가 되어 버렸으니 사돈 맺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누구와도 사돈을 맺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좋은 자리에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 같이 가야 합니다. 안팎을 다 갖추어 4천년의 역사적 인연을 계승할 수 있는 틀거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곡절이 엉클어져 있는 하나의 딸, 하나의 신부를 맞이할 수 있는 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몰려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은 것은 나라 때문도, 교회 때문도, 친척 때문도 아닙니다. 신부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신부를 못 찾은 것이 한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종 떼거리 같으니 그런 백성을 두고 뭘 하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구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전체가 낙원에 가서 무릎 꿇고 기다려야 됩니다. 지금 그런 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지어내서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알아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나타나서 내가 다시 오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는 데는 신랑으로 신부를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신부를 찾으러 오겠다는 말은 지금 선생님이 얘기한 말과 맞는 말입니다. 신부를 찾기 위해서, 어린양 잔치를 하기 위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어린양 잔치를 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은 만왕의 왕의 왕후를 책정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요, 만민의 어머니를 책정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요, 만민의 사모님을 책정하기 위해 오신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아버지로 책정하고, 사부로 책정하고, 만왕의 왕으로 책정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안팎의 핵심을 결정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신랑된 남자로서 모든 핵심을 대신해 줄 수 있는 만왕의 왕이요, 만인의 아버지요, 만인의 스승 입장이기 때문에 신부되는 사람은 만왕의 왕비요, 만인의 어머니요, 만인의 사모님인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되어야 비로소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늘땅이 복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이 땅 위에 오셔서 나라보다도 먼저 신부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시는 재림주님은 신부를 찾아야 됩니다. (41-233, 71.2.16) 예수님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신 뜻 하나님이 보낸 왕자를 모시고 하나님의 아들딸들로 공인을 받아서 본연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고, 본연의 부모와 본연의 형제를 중심삼고 본연의 가정, 본연의 민족, 본연의 국가, 본연의 세계, 즉 지상천국을 이룬 다음에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가신 곳은 낙원이라는 사실입니다. 낙원이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대합실과 같은 곳입니다. 본래 하나님이 천국을 창조한 목적은 참다운 부모로부터 참다운 자녀가 태어나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참다운 가정과 종족, 참다운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고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늘나라를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천국을 창조한 본연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이 낙원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까? 그 처량한 운명과 곡절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여러분은 신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랑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신랑으로서 신부와의 인연을 거친 아버지로서 아들딸을 찾아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의 이름으로 아들딸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온 세계에 널려 있는 신자들을 신랑되신 예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참다운 하늘 식구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본연의 부부가 되고 본연의 부모가 되어 인간들을 본연의 자식으로 품으실 수 있는 본연의 세계를 이 땅 위에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예수님이 가지고 오셨던 인연이었습니다. 이것을 당시의 사람들이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가 죄인의 몸으로 죽어가는 억울한 입장에 서게 되셨던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는 목적은 자녀를 번식하자는 것입니다. 신부가 없으면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신부를 찾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신랑이라고 하신 것은 인륜의 도리를 거쳐야만 천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인륜의 도리를 거친 천도를 세우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땅 위의 인간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들 앞에 참부모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자녀를 이 땅 위에 번식시켜 만물을 주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 놓은 후 기쁨 가운데에서 그들을 보고 이제는 너희들이 생육하였으니 축복해 주겠다고 하면서 결혼식을 해준 일이 있었습니까?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과연 아담과 해와를 결혼시켜 보았습니까? 아담과 해와는 결혼을 잘못 했습니다. 아담 해와는 사탄을 중심삼고 결혼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 그렇게 소원하던 결혼식을 못해 주었기 때문에, 거꾸로 탕감복귀의 구멍을 뚫어서 맞추어야 합니다. 참다운 아들, 참다운 딸을 세워 신랑 신부의 이름으로 어린양 잔치를 해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16-34, 65.12.26) 예수님은 다시 와 세계적인 판도에서 신부를 맞이해야 하늘땅을 대표해서 하늘의 왕자로 오셨던 예수님이 나라에서 제일 가는 신부를 맞이해야 했지만 그런 신부를 맞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 한을 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넓고 높은 세계적인 무대에서 신부를 찾아야 되겠기 때문에 기독교를 발전시켜 세계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위치에서,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에서보다 세계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하나의 신부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한을 풀 수 있지 그보다 낮은 자리에서 신부를 찾았다가는 예수님의 한을 풀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역사 이래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여성을 세워 인류의 어머니로 삼고, 만국의 황후로 삼고, 만교회의 사모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끝날에는 신부를 찾아야 합니다. 신부를 찾게 되면 예수님의 한은 해원성사되고, 여기에서 비로소 이 땅 위에 새로운 판도가 전개됩니다. 여기에서 신부를 맞아 아들딸을 낳아서 내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아들딸만 가지고 해원하겠어요? 본래 천지를 지을 때 땅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어머니 아버지의 땅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천지가 다 풀리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땅이 되어야 되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되어야 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교인이 되어야 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민족이 되어야 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어머니 아버지가 사랑하는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만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죽지 않고 나왔더라면 뜻은 다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이러한 내용을 갖춘 세계적인 판도에서 하나의 신부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왕자가 왕권을 잡기 위해서 왕궁을 세우고 황족권을 만들고 세계를 지휘하기 위해 오신다는 사상이 바로 재림사상입니다. (41-235, 71.2.16) 5. 예수님의 사정과 심정에 하나되자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뜻을 종결지어야 했던 예수님 오랜동안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받들어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택함을 받은 유대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택한 하나님의 바람이었고, 또 그들 자신의 소망이었습니다. 이러한 뜻이 이루어지는 한때를 바라서 하나님은 당신이 믿을 수 있고 창조이상을 실현하는 전체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외아들인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간 앞에 주인으로 나타내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려던 축복을 이루어야 했고, 또 역사적인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뜻을 종결지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 땅에서 섭리의 뜻을 성취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이상동산을 이루시지 못하고 가셨는가?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슬픔을 자아내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고 자기 자체를 희생해서라도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피조세계의 중심존재로 세워졌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4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나왔고,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시조의 과오를 책임지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이념, 자신의 목표로 삼고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유대민족은 예수님이 역사적인 소망을 대신한 동시에 당시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대신한 분이라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고고(孤高)한 한 개인이로되 그 자체는 역사를 대신할 수 있고, 현실을 대신할 수 있는 동시에 천륜의 뜻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이상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은 예수님이 그러한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협조하기는커녕 공공연히 방해하고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느누구 한 사람을 친구로 세워놓고 자신의 슬픔을 토로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 성사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쁨이 되고, 유대교단과 세계 인류의 기쁨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주인공으로 나타나셔야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굶주림과 슬픔을 당하는 불쌍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2-206, 57.5.26) 예수님의 서러움은 어느 정도였던가 이스라엘 민족과 인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슬픔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예수님은 당시의 환경만을 보고 슬퍼하시고 서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은 아담의 타락 이후 4천년 동안 복귀섭리를 해 온 하나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한 서러움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4천년 기나긴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수고한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서러움을 대신한 서러움이었습니다. 4천년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선지선열들의 서러움을 대신 지니고 오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서러움을 하나님과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들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은 당신을 위한 서러움이 아니라 당신을 죽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서러움이요, 유대교단을 염려한 서러움이었으며, 세계적인 뜻길을 염려한 서러움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이해한 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예수님의 서러움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역사적인 한의 심정과 지상의 인간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품고 오신 예수님을 유대교단이 메시아로서 모셔드리지 못하였으니, 예수님의 슬픔은 한층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예수님을 배신하는 입장이 되었으니, 예수님은 30여평생 하나님의 눈물을 대신하여 한없이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생활을 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욕에 찬 소망을 품고 아버지의 사정과 심정을 소개하는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3년 공생애기간 동안 서러움이 북받침을 참으시며,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골고다의 산정까지 몰리며 쫓김을 당하시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하고도 처참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곡한 기도를 드리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천만 성도들의 서러움과 만 인간의 서러움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하는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요, 당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도 죽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러운 심정이 북받쳐 하늘 앞에 호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과 인간의 서러움을 대신하고, 후대 억조창생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애달피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여러분은 그런 예수님을 역사적인 예수님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서 또 다시 그때와 같은 사정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찾아 이 세계에 드러낼 수 있는 예수님의 후계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 속에 맺힌 예수님의 한과 서러움은 풀 수 없습니다. (2-208, 57.5.26) 역사적인 서러움을 책임져야 할 끝날의 성도들 지금 이 시대는 누구나 말하고 있고, 또 많은 선지자들이 예고했던 끝날이며, 예수님께서 민족과 교단으로부터 버림받아 돌아가신 후 다시 오실 것으로 말씀하셨던 재림의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맞아서 여러분은 찾아오실 예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단과 유대민족보다도 더 간절하게 하늘 뜻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올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책임지셨던 4천년 역사의 서러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성신까지 오셔서 애달파 했던 2천년 기간을 가한 6천년의 역사적 서러움을 대신하고 책임짐으로써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 인해 끊어진 천륜의 대유업을 인계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는 역사적인 인연을 벗어나 자체만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를 책임지고, 미래를 책임지고, 6천년 하나님의 서러움과 천군천사의 서러움을 대신하고, 이 땅의 만민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날을 바라보며 타락권내에 머물러 있는 것을 서러워하고 염려할 줄 아는 심정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서러움과 당신이 돌아가시게 된 사연을 알겠나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간곡한 심정으로 뭇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안타까워했던 그 사정과 심정을 체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지 않는 한 역사의 주인공이요, 우주의 주인공이시며, 미래의 이상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모시고자 해도 모실 수 없으며, 그러한 예수님의 서러움을 풀어드리고자 해도 풀어드릴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4천년의 서러움에 갇혀 있었고 30여 평생 만민과 후손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정을 걸어놓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으며 이것을 타고 넘어가 창조이상권(創造理想圈)에까지 도달하기 위해 새로운 신앙기준을 세워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실증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중심 사명을 맡은 유대교단이 있었던 것같이 오늘날 그리스도를 중심한 세계적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에도 대표적인 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역사는 동시성을 띠고 전개되어 나오므로 하나님은 끝날의 사명을 담당하는 하나의 종교를 세워 섭리역사를 귀결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끝날을 맞이한 우리로서는 그러한 대표적인 종교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종교를 찾으려 할진대 역사적인 교훈으로서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범한 역사적 과오를 더듬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지나친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고, 지나치게 의식과 규례에 얽매임으로써 천륜의 법도에 어긋난 생활을 하였습니다. 끝날에 처한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종말시대에 처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밟아 오시게 되기 때문에 세계적인 서러운 고개를 넘어 이 땅에 다시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의 반대에 의해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끝내는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갈보리산정까지 쫓겨가셨던 것과 같이, 다시 오시는 주님도 세계적인 이스라엘과 유대교적인 교단의 반대를 거쳐 세계적인 골고다의 길을 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바라보고 느끼던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고, 역사를 바라보고 느끼던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고, 미래를 염려하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체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서러움에 맺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찾아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은 예수님 이후 2천년 역사를 가한 6천년의 역사적인 전체의 서러움을 풀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골고다의 길을 넘어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2-210, 57.5.26) 체휼해야 할 예수님의 심정과 사정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님을 향해 호소할 때,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졸고 있던 세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천적인 가치를 알고서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림으로써 부활하실 주의 영광을 확인해 드릴 때, 그 행위를 비웃고 막아선 제자들의 무지한 행동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음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시면서 서러운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만은 그런 예수님을 위로하고 염려하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신한 예수님의 천적인 내적 심정을 체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녀에게 축복을 내리셨고, 환희의 은사로 그녀를 하나님의 뜻 앞에 세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럽고 고달픈 수고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자기의 위신과 체면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찾기 위해 안타까운 심정을 갖고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올 수 있는 영광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 이상으로 간절하고 애달픈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비록 주를 찾았다 하더라도 영원히 주님을 모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 주님의 충만한 사랑의 품에 안기고 사랑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6천년 서러운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서러움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고, 또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해야 됩니다. 그런 여러분이 될 때에 하나님과 천상의 성도들이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고, 예수님과 만민도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며, 여러분은 막달라 마리아의 입장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권내에서 이상적인 생활무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6천년 슬픔의 역사를 회복하여야 할 여러분의 육신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초월해서 섭리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과거와 현실과 미래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분 한 개체는 전후 좌우 상하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를 초월한 영원한 가치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을 여러분 개체에서 성취해야 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예수님이 고통과 서러움을 당하셨던 한을 품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온 인류가 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당하신 고통과 서러움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 그리고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가정까지 예수님을 저버렸기 때문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사무친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는 당시 예수님을 저버리던 중심 교단인 유대교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모시는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으로 배반당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혼자서라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 있고, 유대 교법사들에게 배반을 당하신 예수님을 위하여 어떠한 배반도 나홀로 가로막겠다고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길이 복귀의 길입니다. 승리의 한날을 예고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시켰던 요셉의 가정과 요셉의 종족까지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 전체적인 불신의 조건들을 여러분 일대에서 홀로 탕감하여 승리의 조건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여러분이 되지 않는다면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 이상적인 민족과 교단과 가정을 가지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서러움의 길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무한히 외로운 길을 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전체의 뜻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지만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알려주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으므로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 성(城)에서 반대하면 저 성으로, 이 고을에서 반대하면 저 고을로,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면서 자신의 외로움을 풀지 못하여 안타까워하신 예수님, 자신의 서러운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들을 찾기 위하여 감람산 기슭을 찾아 헤매시던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늘의 사랑과 천륜의 인연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역사적인 노정에서 전무후무한 서러움과 고독한 심정을 지니셨던 그 사정을 오늘날 여러분만이라도 알아드리고 위로해 드려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고 그러한 예수님의 사정과 하나된 입장에서 생활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 주여, 아버지! 하는 이 한마디로써 예수님과 심정으로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역사를 초월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고독한 심정을 체휼할 수 있어야 합니다. (2-212, 57.5.26)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아야 할 끝날의 성도 예수님은 외로우신 분이며, 서러움의 주인공이요, 서러움의 왕자이셨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불쌍한 분이셨습니다. 이 땅 위에 어떤 불쌍한 사람, 어떤 외로운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보다 더 불쌍하고 어떤 외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대신 서러워할 수 있고, 예수님 대신 애달파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없어 안타까웠으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천심을 통하고 본성의 인연을 맺어서 하늘 앞에 승리의 영광을 돌려드릴 인간들을 찾으려고 초초한 모습으로 오셨다가 그 뜻을 이루시지 못한 예수님의 한 맺힌 심정을 체휼하고 천심을 대신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수고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헤아리며, 불쌍하신 예수님을 동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의 주님으로만 계시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예수님은 땅 위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계에 가셔서도 만민의 죄를 감당하는 속죄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불쌍한 분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실생활에서 믿고 따르고 모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적인 서러움, 천주적인 서러움, 세계적인 외로움, 천주적인 외로움을 겪으신 불쌍한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하며,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러한 자신이 되었는가를 자문자답하고 분별해야 할 때입니다. (2-214, 57.5.26)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성취해 드리기 위한 필수 조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이룩하시고자 하던 영원한 뜻을 유업으로 계승받아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성취해 드려야 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여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불신과 죄악으로 물든 6천년 역사를 종결짓기 위해 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교단과 사도와 가정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위한다 할진대는 지금까지의 교단적인 인연을 초월해서 오늘의 현실에서 역사적인 신앙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교단의 기준을 갖추어야 하고, 미래의 복음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도와 가정의 기준을 조성하여 영원한 승리의 발판을 이룩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상동산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와 세계를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당시에는 세계와 민족, 교단과 가정이 배반하였으며 심지어는 택함받은 제자들까지 불신했지만, 오늘날 여러분만큼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 그의 사정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반하는 세계와 교단과 종족을 바라보며 서러워하신 예수님에게는 그 심정과 통할 수 있는 부모가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 말씀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나이다 하니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예수님에게는 진심으로 당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부모와 형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부모와 참다운 형제가 없어서 이와 같이 슬프고 외롭고 불쌍한 처지에 있었으며, 종족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주의 길을 곧게 해 드려야 할 세례 요한에게까지 배신을 당하여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한을 품으시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예수님의 사정을 통하고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모든 이념을 계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정과 종족이 예수님 탄생과 관련된 이적과 기사를 보고 놀랐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무지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지 못했습니다. 본시 그들은 예수님의 천적으로서의 사명을 깨달아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고 환경을 준비하여, 섭리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예수님의 발판이 되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후에 예수님이 따로 사도를 찾아세울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 이후 요셉까지 60여대를 거쳐 나오면서 혈통적인 인연을 통해 세워진 예수님이었으므로 그의 가정과 종족이 그를 옹위하여 불신하는 교단과 민족과 세계에 대립하여 싸울 수 있는 하나의 종족권을 형성했더라면 예수님은 결코 서러운 입장에 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2-215, 57.5.26) 끝날에 처한 성도들의 사명 자신과 함께 사탄세계를 대하여 싸울 수 있는 가정적인 환경을 잃어버리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에 다시 오시게 되면 예수님은 우선 당신의 서러움과 고통을 막아줄 수 있는 가정적 터전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심정일체를 이루어 그러한 가정적 울타리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가정적인 울타리가 없었던 것이 예수님의 원한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시에 예수님의 가정적인 울타리가 되어 예수님은 참다운 나의 주님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참다운 자녀들이 나타났다면 예수님의 원한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시 오시는 주님의 가정적인 울타리가 돼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서러움을 위안해 드릴 수 있는 형제가 있었더라면 그 형제를 통해 예수님의 한이 해원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종족을 중심삼고 유대민족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협력자가 되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당시에 유대교단을 넘어 세계로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던들 예수님의 복음이 이방에서부터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종족과 민족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목숨을 걸고 그분의 가정적인 발판과 종족적인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끝날에 처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성도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늘이여, 6천년의 원한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예수님의 서러움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천상에 있는 서러움을 나에게 맡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서러움과 예수님의 외로운 심정과 사정을 체휼할 수 있는 사람을 하늘은 이 시간도 찾고 계시며, 어제도 그저께도 일년전에도 천년 전에도 2천년 전에도 소망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을 거쳐 민족을 대신한 제물의 길, 골고다의 죽음길을 가시면서도 그러한 길을 가게 했던 불신의 민족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으신 것과 같이, 부모의 심정을 소유하고 부모의 처지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신랑 신부의 입장도 느껴 보아야 되겠고, 하늘가족과 하늘종족의 입장도 느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은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여러분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가정과 종족을 건설하실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끝날입니다. 창세 이후 하나님이 바라는 소망의 가정, 창조이상으로 바라던 이상적인 가정은 아직까지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백 퍼센트 체휼하는 존재가 이 땅 위에 나타나야만 하나님과 예수님의 원한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2천년 전 주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교법사․제사장․세례 요한 가정이 불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던 그 입장에서 벗어나 믿고 모시는 사명을 여러분이 담당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예수님은 불쌍하신 분이었고 서러우신 분이었습니다. 6천년 역사의 종말기에 처한 우리는 예수님의 그러한 심정과 통할 줄 알아야만 오시는 주님을 바르게 모실 수 있습니다. (2-216, 57.5.26) 천륜의 뜻을 책임지고 나가야 할 우리 여러분! 핍박이 있다고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울더라도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하고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 앞에 예수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고 세계적인 서러움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어떠한 고통의 자리도 개의치 않고 나가겠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세계적으로 불쌍한 자리, 죽음도 개의치 않겠나이다! 이 일을 위하여 나의 모든 욕망도 버리겠나이다! 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이렇게 인륜의 고개를 넘어 천륜의 법도를 통할 수 있는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즉 부활의 영광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을 그대로 몸 마음에 나타내어 행동하는 자신이 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인간, 본성을 갖춘 본연의 인간으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관념으로 영원한 천륜을 헤아리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영원한 천륜을 대신하여 나타나는 메시아를 그처럼 간절히 기대했던 유대민족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유대교적인 신앙과 모세 오경을 중심한 교리적인 관점을 가지고 영원한 이상의 기준을 세워 고질화시킨다면 유대민족처럼 자신도 모르게 사망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불신한 유대교 신자나 유대민족과 같은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 순간도 사탄에게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생사의 판가리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상하 전후 좌우의 사탄이 공격해 들어올 수 있는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서러운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 부모 형제의 입장에서 함께 눈물흘리고 서로 위로할 수 있어야 하며, 뼈살이 녹는 하늘의 은사에 함께 감격할 수 있는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내 것으로, 기쁨이 있으면 부모의 것, 형제의 것, 친구의 것으로 돌려야 하겠고,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 알아줘야 합니다. 크게 용서해 주는 것도 그 사람의 사정을 백 퍼센트 알게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인간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형제의 사정뿐만 아니고 예수님의 사정을 잘 알아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위해 주는 하늘가정을 만들고 종족을 이루어서 예수님께서 복귀하시려던 선의 세계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택함받은 지상의 성도들이 뭉쳐 하늘가정으로부터 하늘종족, 하늘민족을 이루어서 예수님께서 민족과 4천년 역사를 대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차원을 넘어 세계와 6천년 역사를 대표해 나타나게 된다면 하나님의 심판 행사는 거두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종족과 전체가 하나될 때, 가신 예수님은 영광 가운데 현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기준을 성취하기 위하여 우리는 통일교회라는 간판을 걸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식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는 식구입니다. 우리는 형제 아닌 형제로서, 종족 아닌 종족으로서 하나의 형제와 종족이 되어 천륜의 뜻을 책임지는 이스라엘을 형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의 서러움을 체휼하며 개척의 길을 가야 하고, 사탄과의 싸움의 노정을 거쳐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자리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럽게 가셨던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219, 57.5.26) 6. 믿음 소망 사랑의 왕자
절대자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인간 우리는 자기의 가치가 무한한 줄 알고 있습니다. 가치의 내용은 알지 못하면서 가치를 지닌 존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완전한 가치를 찾아 세워 완전히 남을 수 있는 역사적이며 우주적인 대실존 앞에 멋지고 늠름하게 자랑할 수 있는 모습이 못 되어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그 가치의 존재들, 가치의 모습을, 가치의 인연을, 가치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곳을 찾아 나가야 할 모습들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면서 만상을 바라보고 대우주를 바라보게 될 때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할 그 무엇을 추구하고 추구해야 할 운명에 처하여 있는 것을 항시 양심의 작용을 통하여 체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하나님이 없다 할지라도 가상적인 절대자를 세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나, 그러한 위치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느끼고 즐기고 노래하는 어떠한 행동이 있다 할진대, 그것과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 느끼며 즐거워할 수 있는 모습인가를 생각해 볼 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내가 지적하지 않더라도 여러분이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쌍한 사정에 엉클어져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여기에 어떠한 인연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가치의 주체요 가치의 본체라 할진대 하늘이 그 가치의 인연을 찾아 세우기 위해 수고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에게는 사랑이니 무엇이니 하는 말이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 이러한 우리는 이 전체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이 있다 할진대 하나님이여 하고 울부짖어야 되겠고, 절대자가 있다 할진대 절대자여하고 울부짖어야 되겠고, 선의 형체를 갖춘 그 무엇이 있다 할진대 그것이 실체적인 것으로 나타나 주기를 간구해야 되겠고, 그러한 절대자나 하나님 혹은 선한 존재를 간곡한 마음으로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관계,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인간임을 아는 연고로 우리를 찾아오기에 온갖 수고와 노력과 자기 희생도 개의치 아니하고, 인류를 붙들기 위해 자신이 소모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전체의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고 계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할진대, 우리는 공손한 마음을 갖고 쌍수를 합하여 그 앞에 경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전체의 움직임을 헤아려보고, 역사의 움직임을 헤아려 보고, 심정의 움직임을 더듬어 보게 될 때, 나 자신은 알지 못하나 역사의 배후, 내 심정의 깊은 배후에서는 그 무엇이 나를 이끌고 있고, 나를 재촉하고 있습니다. 내 심정 깊이에는 나로 하여금 가치를 추구케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연한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나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맺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인연을 풀어 그 가치를 논하게 될 때, 최대의 선인 하나님이 여기에 개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7-152, 59.8.30)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왕자가 되어야 할 인간 하나님이 배후에서 자기의 고통을 감수하면서 절대적인 가치를 인간 앞에 부여하기 위하여 오늘날까지 수고해 오셨고, 이후에도 그 수고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생각만 하여도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대하여 그들이 내용도 모르고 뜻도 모르는 말씀을 선포해 왔습니다. 종교를 세워 놓고 간곡한 인연을 맺기 위한 내정의 뜻이 있으면서도 인연을 맺어야 할 우리 앞에는 막연하게 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선포한 내용은 막연한 것이었습니다. 또 나를 바라보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를 사랑하라고 외쳐 나왔습니다. 그것이 무슨 인연과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는지는 모르나 듣고 겪어 보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심적인 인연의 세계의 그 무엇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막연한 말씀에 의지하여 믿고 나왔고, 바라고 나왔고, 사랑하고 나왔습니다. 또 신앙자들은 믿는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소망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고 사랑한다는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신앙노정에서 쓰러진 자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죽은 자가 어느 일개국의 충신 열사보다 몇 천만 배 많습니다. 소망하다 죽은 자가 많고 사랑하다 죽은 자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믿음의 왕자라고, 소망의 왕자라고, 사랑의 왕자라고 칭송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해야 합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믿는다는 말, 소망한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야 합니다. 6천년의 섭리를 들춰 보게 될 때, 믿음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다가 쓰러진 자는 있으나 믿음의 대왕자가 되어 인류 앞에 받듦을 받은 자가 없었고, 소망의 한 터전을 찾기 위해 헤맨 자는 많았으나 그 소망의 터전 위에서 하늘의 칭송을 받은 자, 인류의 칭송을 받은 자가 없었으며, 사랑을 말한 자는 많으나 그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찾아 헤매던 믿음의 실체요,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한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민족은 몰랐습니다. 세계 인류 가운데 아무도 안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7-154, 59.8.30)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그러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오셨으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세계를 뒤로 하고 알아주는 분을 찾아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믿음을 상속받고 인류의 소망이 되는 하나님의 소망을 상속받아 그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적인 믿음의 주체, 실체적인 소망의 주체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상대적인 믿음의 주체가 아니고 절대적인 믿음의 주체로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나타나신 분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은 믿지 않더라도 예수님은 믿어야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소망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실체를 쓴 인간 앞에는 실체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류는 예수님을 실체의 모습으로 세워준 하나님의 수고의 공덕 앞에 머리 숙이고 천만 번 울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터전을 세우고, 소망의 환경을 개척하고, 사랑의 울타리를 세우려 했던 예수님의 이념은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4천년 역사는 믿음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요, 예수님과 성신 이후의 2천년 역사는 소망의 실체를 세우기 위한 역사입니다. 주의나 사상기준도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소망하는 세계관과 그 반대의 세계관이 오늘날 민주(民主)와 공산(公産)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처럼 소망이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이 때를 끝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끝날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조상이냐? 믿음의 조상이기보다는 소망의 조상입니다. 소망 중에서도 실체로서 소망할 수 있는 조상입니다. 우리는 몸 가운데 마음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마음 가운데 심정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마음의 실체대상과 심정의 실체대상이 되는 분 이상의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류를 대하여 너희는 신부요 나는 신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계는 아무리 나갔댔자 소망하는 그 이상의 한계를 못 넘어갑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말씀을 지나 실체를 고대해야 할 때입니다. 천만가지의 믿음의 명사보다도, 훌륭한 믿음의 역사보다도 한 사람의 실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실체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씀적인 소망의 세계관은 막혀 버립니다. 실체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그 세계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리고 맙니다. (7-155, 59.8.30)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목적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 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민주진영의 세계노선도 기독교 이념의 한 부분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나, 이제 그것도 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말씀만 가지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실체로서 영원한 생활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는 회오리 바람과 같이 돌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오늘의 사조 밑에 모여 있는 우리는 과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 이후 역대 선지들의 모습을 추앙합니다. 그 이후 2천년의 소망의 왕자였던 예수님을 바라보고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회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루려했던 것은 말씀을 위주한 약속의 소망이었지 실체적인 생활로 나타날 수 있는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바란 소망의 한날이 실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때가 끝날입니다. 그것을 이루려는 것이 재림이상이요, 그 뜻을 성사시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재림주입니다. 이제 믿음을 위주로 하던 시대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실체이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예수님 이전 4천년 동안 믿어 왔던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백성 앞에 믿음을 세워야 했고, 소망없는 백성 앞에 소망을 세워야 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후의 예언을 보십시오. 믿음을 기반으로 한 소망은 메시아 한 분을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상징적인 약속권내에서 신랑 신부라고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이해하는 때가 있을 것입니다. 실체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면 그래야 이치가 맞습니다. 소망의 실체요 믿음의 실체이신 그 분이 이루려고 하는 소망과 믿음의 목적은 인간들이 자기를 찾아 사랑을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주의 사랑의 품에서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대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소망을 세운 목적, 하나님이 사랑을 세운 목적, 그 목적은 예수님만도 아니고, 아브라함만도 아니고, 우리 선조 중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6천년 동안 믿어 주고 찾아온 그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천지가 뒤집히는 곡절이 있습니다. (7-156, 59.8.30)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을 통한 중생 믿던 아버지, 소망하던 아버지, 사랑하던 아버지, 그 아버지를 여러분이 붙들 때, 예수님도 지금까지 너를 만나기 위해 허덕여 왔고 , 너 때문에 수고하였다고 말할 수 있고, 하나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이시여! 같이 삽시다. 예수님이여! 같이 삽시다 할 때, 오냐, 너와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자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망상적인 천국, 가공적인 천국은 인류에게 필요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체적인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면서 내가 못다 이루고 가니, 나를 믿는 대신 성신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받는 줄 아십니까? 성신을 믿어도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게 하려는 것이 성신이니 성신도 믿어야 합니다. 성신은 무슨 신이냐? 어머니신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성신은 어머신이요,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참아버지는 완성한 아담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여 인류의 조상이 못되었으니 우리는 전부 참조상이 아닌 거짓조상의 후손들입니다. 여기에 참조상으로 오신 분이 메시아입니다. 참아버지란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삼위신이 어쩌고 저쩌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아버지이고 성신은 어머니이므로 이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중생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 없이 태어날 수 있습니까? 묵시록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22장 17절)고 했습니다. 그런 날은 성신이 실체를 쓰는 날입니다. 그때가 재림시대입니다. 신부 단장을 마치는 날입니다. 어린양 잔치가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참부모를 거꾸로 모셔들이는 날입니다. 그렇게 되면 명사적인 하나님, 신앙적인 대상으로 필요했던 하나님은 지나갑니다. 이름만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외형적으로만 믿는 신앙생활은 필요 없습니다. 실체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체와 소망의 실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사랑의 실체, 사랑의 주체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냈는데 인간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불신함으로써 그는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다시 올 것이냐? 한 신랑이 오셨던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다시 오실 수 없습니다. 와봐야 또 다시 푸대접 받겠기에 오시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한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나를 찾아오시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신자가 기독교를 망치고, 하나님의 뜻을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체, 소망의 실체, 사랑의 실체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한, 믿음을 세운 목적과 소망을 세운 목적과 사랑을 세운 목적이 해결되지 못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아니면 하나님도 이 세계를 움직이지 못하신다는 그런 신념으로 사셨습니다.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7-157, 59.8.30) 끝날의 성도의 믿음과 책임 지금은 증거시대입니다. 과학적인 시대라고 합니다. 과학은 논리적인 것입니다. 논리적이라면 원인과 결과가 체계적으로 부합되어야 합니다. 논리적 사실을 생활적인 면에서 실증하고 실행할 수 있을 때, 그것을 과학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생활적이고 실증적인 입장을 떠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걸 떠나서 민족이니 무어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체를 가지고 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끝날은 믿음을 세우기 위한 4천년 역사와 소망을 세우기 위한 2천년 역사가 끝나는 때요, 믿음의 왕자요 소망의 왕자요 사랑의 왕자가 나타나는 때입니다. 주님이 둥둥 떠서 구름을 타고 온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해가 나고 하늘이 청명하게 맑은 날엔 구름이 없으니 주님이 못 오실 것 아닙니까? 선생님도 그런 신앙생활을 해 보았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하여 땅을 치면서 하늘을 대하여 항의도 해 보았습니다. 결국 헤치고 들어가 보니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다 보니 욕먹는 자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이단자의 명패를 달고 다니고 있습니다. 지난날 바울도 이단자의 괴수였고, 참을 갖고 오셨던 메시아도 바알세불의 신이 들린 괴수라는 빈정거림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서러움입니다. 서러움으로 시작된 역사이니 서러움으로 끝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 믿는 신도들이 있다 할진대 교회의 마루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는 신도를 귀중하게 보십시오. 교역자들이 몰아낼 때 눈물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면서 나가는 양떼들을 따라가 보십시오. 거기에는 새로운 꽃동산이 가까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냉랭한 찬바람이 불어오는 한 순간이 지나가면 봄절기가 올 줄 누가 알았던고. 그 몸은 역경 속에 있으나 그 심중은 봄절기를 맞이할 수 있는 늠름한 신부의 모습을 한 사람, 주님은 그러한 자를 찾아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만인 앞에서 웅변을 토하는 말씀의 왕자는 많으나 실체의 주인공은 없습니다. 믿음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소망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사랑의 실체인 교역자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교단, 이 신도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끝날의 성도들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 한국 천지에 문(文)이라는 한 존재는 이단자의 괴수로 몰리고,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민족이 복받게 된다면 그 길을 가겠습니다. (7-159, 59.8.30)
말씀보다 더 중한 실체 사실적이고 증거적인 제단이 없어졌으니 실체적인 제단을 꾸밀 수 있는 하늘의 믿음의 왕자는 어디 있는가? 지금은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군중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장병을 거느리고 호령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만 장병을 위해 잠못 이루는 장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간을 대해 추울세라, 더울세라, 배고플세라 염려하면서 역사해 왔습니다. 선두에 나서서 나를 보라고 외치는 바리새 교인들이었지만, 예수님은 뒤로 돌아서서 눈물지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선두에서 외치는 사람이 인류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와 더불어 사조와 더불어 쓰러지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들은 어떻게 합니까? 하고 눈물 흘린 사람들 때문에 역사가 이 모양으로라도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맞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통일교회의 말씀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말씀의 내용보다는 실체가 문제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대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 너는 무엇 갖고 있느냐? 신앙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소망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고, 사랑의 자체가 될 수 있는 그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만 갖추고 있으면 주님이 천년 후에 오시더라도 나를 버리지 못합니다. 믿음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소망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내가 있다 할 수 있는 자신이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제 역사를 실체적으로 해명해야 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한날은 실체를 만나는 날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망상이거나 가공적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주의 신부될 자격자가 있습니까? 그렇게 됐다는 사람 봤습니까? 된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됐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인 믿음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소망의 내용을 갖추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의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모든 내용을 갖춘 실체, 그 자체로 말미암아 6천년 역사를 섭리해 온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이 놈의 죄악세상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합니다. 실체를 찾기 위해 수고한 6천년의 역사, 인간들로부터 수없이 배반당해 나온 지긋지긋한 역사입니다. 꿈에도 다시 보고 싶지 않고, 꿈도 꾸기 싫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붙들고 다시 생각하고 서러워하고 되풀이하며 이루어야 할 것이 실체입니다. 그 하나가 문제입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 자신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믿음도 내것이요, 소망도 내것이요, 사랑도 내것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을 갖고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천년 만년 믿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믿음 소망 사랑의 실체입니다 하고 6천년을 섭리해 나온 하나님을 믿는 것 이상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을 믿고 여러분 마음을 믿고 여러분 심정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고자 6천년 동안 믿고 나온 전부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대신, 예수님 대신, 성신 대신, 만민 대신 죄악과 맞서 싸워야 되겠고, 그릇된 모든 것을 부수는 심판자를 대행할 수 있는 자격자로서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까지 나가야 합니다. (7-160, 59.8.30)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을 해방시켜 드려야 할 우리 예수님 믿고 천당 가겠다고 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가겠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천국 좀 보내 주십시오. 천국 가서 예수님 만나 보겠다고 하지 말고 이 땅 위에 천국을 만들어 예수님을 모셔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겠다고? 죄악에 물든 여러분이 예수님의 사랑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황태자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게 믿어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겠다면 예수님이 죽던 그 이상의 심정으로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는 마음이 사무쳐야 됩니다. 그런데 전부 강도의 심보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 자기들 뜻대로 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영계를 들춰 봐도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틀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해방시켜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인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하나님이 구속을 받고 있구나. 나라는 한 개체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의 참소를 받고 있구나. 나 때문에 예수님도 죽었구나. 나 때문에 성신이 피어린 투쟁의 역사를 뒤넘이쳐 나오는구나.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아버지를 안식시켜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예수님도 성신도 해방의 자리에 옮겨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신앙에 주린 자, 소망에 주린 자, 사랑에 불타는 자를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찾아왔습니다.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까?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다고 해야 하나님이 내 아버님이십니다. 그런 경지에서는 산을 바라보아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책임 못하는 우리로서는 역사를 들춰 봐도 가슴을 쳐야 하고, 활개를 치며 발걸음을 옮길지라도 탄식의 왕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편안히 앉아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옥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는 하나님은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는 분이라는 것을 인류는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지옥 이상의 고통을 당하지 않고 지옥이 있도록 했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역사노정에서 지상지옥의 고통을 어느 한 부분도 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은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런 허무맹랑한 말이 어디 있느냐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념에서 하나님을 믿고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인류의 참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찾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다 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음부(陰府) 3일 기간이라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는 지상 구주가 되어야 했고 영적 구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지옥에 들어가서도 전도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상 지옥의 밑창을 뚫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역사노정에서 밟히고 역사노정에서 밀려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걸음을 걸었으니 우리도 그런 사정의 동반자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자에게 천국이라는 영광의 동산을 상속해 주겠다는 것이 복귀섭리요, 구원섭리입니다. 하나님, 제가 지옥에 가서 하나님의 고통을 체휼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심정을 갖고 기도하는 자는 지옥 가지 않습니다. 오, 하나님, 지옥이 싫사오니 천국만 보내 주시옵소서 하는 자는 지옥 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바 아버지여, 내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 것은 4천년 동안 이 민족 이 백성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심정과 내정을 살펴보게 될 때,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7-162, 59.8.30) 예수님의 이념과 정신을 맡을 수 있는 자 이러한 정의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할 기독교가 그 기반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우리의 손으로 건설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말없이 싸우고, 말없이 행진해야 합니다. 그 길, 복귀의 길은 영화의 길이 아닙니다. 영화를 원하게 되면 우리에게 소망의 한 때가 오지 못합니다. 거기에 정력을 기울이고 거기에 소모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이야 이러든지 저러든지 갈 길을 가자고 나선 우리입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통일교회를 찾아오거나 말씀을 들으러 온 자가 있습니까? 통일교회의 길은 가기가 힘듭니다. 고통의 담벽에 머리를 받히고 몸을 부딪히며 피살이 에어지는 자리를 거쳐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주님도 그렇게 갔고 선지자들도 늘 그렇게 갔습니다. 역사를 맡았던 자들은 역사의 정기를 품고 피를 머금은 채 싸움의 용자로 나선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역사를 이끌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천정을 붙안고 왔던 예수님의 이념과 예수님의 정신을 맡을 자도 바로 그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에게 맹목적인 신앙의 시대는 지나갔고 허구적이고 가공적인 논리의 기반은 무지에 의한 것이며, 이 기반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을 단정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기해야 할 문제는 내가 나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이 성신을 믿고 성신이 예수님을 믿듯이, 내가 나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천륜의 이치가 변할지언정 나는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예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나는 변함이 없다 할 수 있는 단계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천국에 가겠다고 날뛰는 여러분, 자신을 믿습니까? 말로만 믿는, 내용이 없는 믿음은 쓸데없습니다. 내용이 없는 껍데기, 쭉정이는 쓸데없습니다. 그래서 알곡과 쭉정이 비유의 성경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알맹이의 믿음, 알맹이의 소망, 알맹이의 사랑의 화신체들이 되어 움직인다면, 이 세계가 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미국천지가 아무리 광활하고 선진국 입장에 있더라도 문제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어느 한날 굴복할 것이다 하는 자신을 갖고 하나님을 대신한 사람은 영원한 소망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라 하였으니 여러분이 그 사랑을 품고 주기 위해 노력하고 주기 위해 허덕이고 주다가 죽을 자리를 찾지 못해서 허덕여 보십시오. 그래도 이 나라가 망하겠습니까? 영원히 내가 나를 믿고, 내가 나 자신을 소망으로 삼고,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하나님, 저의 사랑을 받으시옵소서. 하나님, 저의 소망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하나님, 저의 믿음을 보고 즐거워하소서 할 때 하나님이 오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세운 목적이 그것이요, 소망을 찾는 목적이 그것이요, 사랑을 그리워한 목적이 그것이니, 그렇게 되면 거기에서 주님과 상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과 같이 사는 것입니다. 소망과 믿음의 목적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살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의 명사를 다 떨쳐 버리고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사는 새로운 이상세계가 지상천국입니다. 그 세계는 가공적(架空的)인 세계가 아닙니다. 논리적 견지에서 필연적인 사실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을 수준이 높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남을 민족은 믿음에 불타는 민족,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는 민족입니다. 역사의 모든 장(場)을 들추고 국가의 흥망사(興亡史)를 헤아려 믿음의 절개를 붙들고 싸워 나온 민족이 어디 있나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소망에 불타는 민족, 정열에 불타서 하나님의 일이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움직이려고 하는 민족, 그 민족은 하늘 앞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7-164, 59.8.30) 하나님의 아들딸의 책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는 내용을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을 친구로 삼겠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으니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 소망이 있는 사람, 맛이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살면서, 환경이 어떠하든 처지가 어떠하든 오늘의 생활에서 맛을 느끼고 사는 사람이 지상천국에 살 수 있는 사람이요, 맛을 느끼며 살라고 가르치는 것이 성경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음에 있나니 그 마음의 천국을 중심삼고 죄악된 세계 속에서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외적 세계를 코웃음치며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천국 백성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문제는 어디에 귀결되겠느냐? 외적 세계도 좋고, 국내의 모든 것 다 좋다는 것입니다. 세계는 될대로 다 되어 끝이 되었으니 오늘 문제 해결의 시점은 어디냐? 문제 해결의 초점은 나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을 모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상적 위치에서 그의 대상적인 가치를 세워 아버지, 제가 왔습니다. 6천년 동안 얼마나 기다리셨습니까? 해야 합니다. 얼마나 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바라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얼마나 그리우셨습니까? 제가 왔습니다 하는 그 한마디를 하나님은 듣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아들딸을 만나서 하늘과 지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축복한 후 6천년의 한을 잊어버리고 오늘이 내 생일이요, 내 환희의 날이로구나 하고 싶어합니다. 6천년의 한을 기억하지 않고 새로운 천지에서 새 아들딸과 정적인 노래를 하며 살고자 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요, 그 아버지의 아들딸들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입니다. (7-170, 59.8.30) 7. 하나님을 모시는 자들이 되자 인간과 만물과 하나님의 소망의 중심 오늘날 이 땅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비전과 의견을 갖고 있고, 어떠한 주의 주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마음 몸으로 하나님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늘 땅 앞에 자신있게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비전과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그들의 행동이 천륜의 뜻과 천륜의 섭리와 부합되지 않으면 어느 땐가는 기어이 전복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역사과정을 통해서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주의 주장과 자기의 어떤 주관적인 행동을 다 포기하고, 자기의 마음과 몸은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자기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한다고 주장하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 나오기를, 오늘날까지 역사상에 왔다 간 많은 사람들은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이러한 대신자가 나오기를 바라며 무한한 수고와 인내를 하며 오랜동안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땅 위의 서러움이 무엇인가 하면, 어떤 주의가 없어서 서럽거나 행동하는 사람이 없어서 서러운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주장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서러움이요 슬픔입니다. 오늘날 이 땅과 인간 세상에 널려 있는 탄식과 고통과 사무친 모든 원한을 제거하는 일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주의 주장과 하나님을 대신하는 한 사람이 나타나야 됩니다. 그러므로 섭리의 목적도 이 한 사람이요, 역사의 목적도 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중심삼고 온 천지 만물과 동거하면서 누리려던 창조이상은 우리의 시조인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인해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6일 동안 지은 모든 존재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대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말씀을 통해서 실체대상으로 나타난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동(動)하면 만물들도 동하고 하나님이 정(靜)하면 만물들도 정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중보(中保), 하나의 중심(中心)을 소원했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그런 중심이 되었던들 오늘날 이 땅 위에 벌어진 혼돈된 역사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망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동할 수 있는 한 존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인간의 타락 이후 섭리역사의 과정에서 바란 것이 아니고 창조 당시부터 지금까지 바란 소망의 중심입니다. (3-317, 58.2.2) 말씀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 소망의 중심이란 말씀을 대신한 존재요, 말씀의 실체입니다. 그 소망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실체가 되는 그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의 주장을 갖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복음 14장 6절)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 인간들 앞에 무엇을 예시한 것인가. 이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 말씀이 그대로 하나님의 심령에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도 역시 이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이 말씀을 인간들에게 주신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창조 당시 하나님이 한 그 말씀과 인연맺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이 그 말씀을 변치 않는 하나의 목표, 하나의 소망으로 지금까지 바라고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말씀의 실체가 오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이 실체를 찾아 헤매는 노정이 하나님이 6천년 수고한 섭리의 노정입니다. 닷새 동안에 지은 만물은 말씀의 실체를 갖고 있으되, 엿새날 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말씀의 실체를 갖추고 서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실체를 찾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운명의 노정이요, 복귀의 노정이며, 역사적인 노정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말씀)요, 생명이니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소망하던 말씀의 실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4천년 동안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이 인간들을 대하여 말씀하고 싶었던 간절한 심정을 대신하는 하나의 결실로 나타나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과 만물 앞에 발표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 말씀의 주인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찾아 온 말씀의 실체로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 있던 말씀이 피조세계를 통해 나타나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써 하나님 마음 속에 있던 말씀이 예수님의 심정에 다시 옮겨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인간들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희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이 역사적인 섭리의 뜻을 대신한 말씀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당신의 말씀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던 말씀을 대신한다는 심정을 느꼈으며, 영원을 걸어놓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실체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질 때까지 대신 재창조의 역사를 거듭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간단하게 30년의 생애를 거쳐가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시대의 생애노정을 변명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4천년 역사를 대표할 수 있고, 그 당시의 세계를 대신할 수 있고, 지금까지 인류역사를 대신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아드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지어진 만물이 말씀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탄식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말씀의 실체로 오셔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기 위해 말씀을 전하셨으나, 그 말씀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 예수님의 서러움이었습니다. (3-319, 58.2.2)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된 실체 여러분은 지금도 여러분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간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천륜이 통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참진리가 무엇이며, 참다운 말씀이 무엇인가 하고 끊임없이 반문하면서 진리를 개척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역사가 바로 진리의 개척노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심정, 즉 서러움을 대신한 말씀이 이 땅에 나타날 때에는 사람들이 재창조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그 말씀을 땅 위의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30여년 간, 그리고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2천년간 수고하신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제1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 제2의 말씀의 실체인 예수님을 통하여 제3의 말씀의 실체, 말씀의 성전을 찾는 것이 섭리의 목적인데, 이 제3의 말씀의 실체가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서러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하셨는데 진리의 실체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길의 목적은 무엇인가? 4천년 역사의 길의 목적은 예수님의 실체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길의 목적은 인간들이 예수님과 같은 말씀의 실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써 골고다에서 예수님의 실체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고 하나님이 찾으려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뜻을 인계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뜻을 맡길 수 있는 하나의 실체였는데,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된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섭리하고 찾아나온 전역사의 목적체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을 성전삼아 비로소 뜻을 땅에 인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이 운행할 수 있는 성전으로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운행할 일이 있으면 자신을 제외하고는 운행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느끼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찾아온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이 운행할 수 있는 발판이요 이 하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수고해 나온 수많은 선지선열들의 대신 실체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이상 변할 수 없고,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아무리 예수님을 밀어내려 해도 밀려나지 않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이 하나님이 운행할 수 있는 길이 되지 못한 것을 복귀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아담 대신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재창조의 말씀이라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운행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대신 걷는 사람을 통해 예수님이 운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한 시대의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적인 하나님이고, 시대적인 하나님인 동시에 미래적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운행할 수 있는 실체 성전이기 때문에 인류가 예수님과 하나될 때에는 하나님의 전체의 섭리가 이뤄지고, 인류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타락하여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말씀을 먼저 찾고 난 다음에 실체를 갖추어야 합니다. 실체를 갖춘 하나님의 생명이 움직입니다. 말씀을 먼저 찾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된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은 후에 싹트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생명의 실체가 될 수 있습니다. (3-321, 58.2.2) 예수님의 강림 목적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보여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실체를 보여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친히 보여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30여년의 생애를 거친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해 오며 인간을 사랑한 그 사랑의 심정을 닮아 나타나신 생명의 실체였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것은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린 말씀을 대신 세우기 위해서였고, 말씀의 실체로 제2 아담인 예수님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실체를 갖춘 후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들과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셨습니다. 그 영원하고도 참된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될 수 있었으나 인간들은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말씀을 중심삼고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실체인 예수님이 나타났으나 말씀만 남고 실체 예수님은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만 중심삼고 사는 서러운 세계에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다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말씀만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실체를 모셔야 합니다. 말씀 대신 모실 수 있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실체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되는 사람을 찾아세워 그를 통해서 이 땅을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실체를 찾기 위해 역사는 흘러왔습니다. 말씀을 발표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끝날에 열매 맺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재창조과정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에 하신 말씀의 중심이,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신랑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불변의 말씀의 소유자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예수님이 다만 이 땅에 왔다 가는 것이 아니었고, 예수님이 이 땅 위에 말씀을 전파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신부의 자격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대신할 하나의 실체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셔 또 하나님의 생명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의 동산을 성취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실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듯 예수님을 중심삼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뜻을 품고 오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믿는 성도들을 위해 당신의 신부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의 신랑이요, 인간들은 예수님의 신부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해 간절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들도 예수님을 향해 간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찾아야 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에덴동산에서 말씀을 잃어버렸고, 실체도 잃어버렸습니다.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말씀과 실체를 찾아야 할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말씀만 받을 수 있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에 의지하여 타락하지 아니하였던 아담의 형상을 다시 빚어 만들 수 있는 권내에 처해 있는 것이 복입니다. (3-323, 58.2.2) 말씀을 소유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 말씀의 실체로 오실 분이 재림주님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칙이기 때문에 재림주님은 구름타고 오실 수 없습니다. 천리원칙은 뒤바뀔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까지 인간들은 말씀의 실체를 소망하고 나왔는데 이것이 재림이상이요, 2천년 기독교역사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붙들려고 할 때 예수님은 붙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붙들 수 없습니다. 말씀밖에 남길 수 없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러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제2 그리스도의 화신체가 되어서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이 느낀 책임감과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간과 기독교인들은 그런 심정을 대신하여 말씀을 찾고, 그 말씀에 의해 실체를 찾을 수 있는데도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죽든지 살든지 나아가야 합니다. 에덴 동산에서 법도를 어겨 타락의 혈통을 받은 이후 오늘날까지 죄악 속에 살았는데, 이제 새 말씀에 의해 기쁨에 넘쳐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 인류가 영원한 생의 가치를 느끼며 살 수 있는 그 세계를 향해 이제 이 말씀을 붙들고 주장하며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런 일을 해야 할 때에 여러분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길을 나중에 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역사적인 운명의 순간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4천년 섭리역사의 전체적인 심정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사랑의 심정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의 중심으로 하면서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었던 연고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어도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고, 하나님의 생명도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과 실체가 하나되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생명을 대신하는 분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사망과 고난도 예수님을 영원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권한을 이미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주의가 있고, 따라갈 수 있는 행동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요,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증거적인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고,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말씀의 소유자가 되었는가 스스로 반문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자신이 지상과 천상에서 인정될 수 있는 말씀의 소유자가 되었는가 반문해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연고로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 말씀으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약(舊約), 신약(新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 이것이 이루어진 말씀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이것이 세계 인류의 중대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을 찾아나가는 성도들이 총단결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 즉 기독교의 문제요, 범종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는 분열과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계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이 세계가 분열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분열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인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주지 않음으로써 이 분쟁과 분열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 분열과 분쟁으로 혼돈되어 가는 이 세계를 수습하고 모든 주의와 사상을 통합할 수 있는 완성의 말씀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참진리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이 세계의 역사과정을 보면 수많은 민족과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모두 귀일점을 향해, 통일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통일의 목표는 어떤 말씀을 통해 달성될 것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통일될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세워놓은 그 토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중심삼고 세계 역사가 전개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로 통일시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는 새말씀이 온갖 지혜를 갖추어 나타날 것입니다. (3-325, 58.2.2) 예수님의 심정 예수님이 얼마나 외로웠는지 아십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이 외로우셨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유와 상징으로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나타내신 것인데, 이 말씀의 뜻을 알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는 안식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하고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이 천지 만물을 맡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합할 수 있고, 약속하신 주를 만날 수 있습니다. 또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언제나 있을 것이나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들을 붙안고 사랑하던 말씀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실제로 나타나면 그 말씀을 모두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 말씀을 어기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끝날에 나타난다면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소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그의 생명과 이념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진리를 표방하는 많은 종교의 교리, 주의가 있지만 그대로 실천해서 우리의 마음과 몸이 편하고 영원히 그 말씀에 젖어들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주의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 몸을 움직여 왔을진대, 하나님의 참말씀이 나오면 모든 주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는 약속의 말씀으로 약속의 실체를 찾고, 약속의 사랑을 찾고, 약속의 생명을 찾게 되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 약속의 말씀 위에 사실의 말씀을 가하여 사실의 실체를 찾고, 사실적인 사랑을 찾고, 사실적인 생명을 찾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낙원에 가셔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오셔서 하셔야 할 사명을 완결하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예수님이 가실 곳은 낙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하나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는 말씀의 주인공, 창조이념을 대신한 생명의 실체가 나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기 전에는 예수님은 쉴 수 없고 하나님도 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우리의 마음 몸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오지 못하는 것을 탄식해야 하고,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내 몸을 움직여 행동한 것이 자기의 행동이 되지 못한 것을 탄식해야 하며, 나도 모르게 불쌍한 마음이 들어 눈물 흘리지 못한 것을 탄식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안식시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한몸을 이룬 하나의 세포가 되어야 합니다. 원래는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 당시의 세계 인류가 예수님의 지체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늘땅까지도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 보좌에 앉아 계신 줄 알고 있지만 예수님은 불쌍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의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천주적인 사명을 갖고 오셨지만, 세계를 지도해서 땅끝까지 움직이고 천상까지 통할 수 있는 소망의 말씀을 갖고 오셨지만,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믿어 주지 않음으로써 땅 위에서는 하고 싶은 말씀을 다 하지 못하셨고, 하고 싶은 행동을 다 하지 못하셨습니다. 이런 안타까웠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이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이 고을 저 고을로 다니시면서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이었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한 사람을 놓고 하나님이 서러워하였고, 천사들이 서러워했으며, 만 우주가 서러워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역사적인 범죄를 저지른 조상의 후손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 땅 어디에 서 있는지, 이 민족 이 세계가 어디로 갈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오늘날 우리는 2천년 전 예수님이 오셔서 망해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서러워하시던 것과 같이 서러워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최후의 소원인 말씀의 실체가 되고 천륜의 심정을 통하여 전체의 역사적인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6천년 동안 섭리하셨던 하나님이시여! 저를 보시고 이곳에 주님을 보내 주소서!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어디로 재림하게 하실 것인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땅을 대한 염려의 조건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327, 58.2.2) 제3 이스라엘의 기준 우리가 가진 것 없고, 남들로부터 욕을 먹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지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고, 우리의 몸은 하늘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나님이 6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거쳐오며 찾은 것은 여러분 한 개체가 아닙니다. 한 민족, 인류 전체를 찾기 위해 수고해 왔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서러워하던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고, 예수님의 슬픔과 선조들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받들어야 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받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를 찾아 가셨습니다. 즉 교회를 발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반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을 찾아나섰는데 가정에서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제자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소망의 터, 세계의 갈길이 민족이 받들지 않아 끊어졌고, 민족의 갈길이 교단이 받들지 않아 끊어졌으며, 교단의 갈길이 가정이 받들지 않아 끊어졌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서러움을 누가 아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서 아브라함의 직계 혈통으로 세웠던 요셉 가정은 어디 갔으며, 요셉과 마리아는 어디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터로하는 안식의 기대가 무너지고, 유대교를 터로하는 안식의 기대가 무너지고, 가정을 터로하는 안식의 기대가 무너지자 예수님은 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12제자까지도 배척하였고, 심지어는 12제자 가운데서 뽑힌 3제자까지도 배반하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과 같이 몰리고, 쫓기고, 버림받고, 배척당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서러운 사정과 예수님의 슬픈 심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민족으로부터 꺾임을 당하고, 교단으로부터 쫓김을 당하고, 가정으로부터 몰림을 당하고, 부모로부터 버림당하고, 제자들 앞에 배척당하는 자리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선조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 앞에 불쌍한 무리요 외로운 무리이지만, 민족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같이하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싸우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대신하여 뜻을 위해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렵다고 낙망하지 말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진대 말씀이 같이하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움직일 것이고, 생명이 싹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 사랑을 갖고, 인간 세상을 사랑해야 되겠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로해 드려야 되겠으며, 제2 이스라엘의 사명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제3 이스라엘의 선조들로 남아지려면 제2 이스라엘의 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제2 이스라엘을 불러 가게 하신 길, 예수님의 제자들이 넘어가던 십자가의 길, 성도들이 걷던 말씀의 고개를 안 넘어갈 수 없는 공동 운명길에 처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다 발표하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의 심정을 발판으로 하여 어떤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어떤 험한 길이 우리 앞에 가로놓이더라도 감사하면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제3 이스라엘의 선조가 되어야 할 끝날에 처한 여러분은 최후의 말씀은 하늘의 사랑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있고,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보이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내적 심정이 여러분의 내적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즉 본심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번식시킬 수 있는 제2 창조주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즉 말씀의 번식체가 되어야 하겠고, 생명의 번식체가 되어야 하겠으며, 실체의 번식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만 하나님을 영원히 모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기준이 제3 이스라엘의 기준입니다. 이래야만 말씀을 심어줄 수 있고, 실체를 심어줄 수 있으며, 생명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실 줄 알고, 말씀을 보고 느낄 줄 아는 말씀의 실체, 생명의 실체, 6천년의 심정을 대신한 실체가 되어 제2 이스라엘을 재창조하는 사명을 완수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완전히 통한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참자녀가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한 영광 가운데 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3-331, 5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