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부모와 나 현재 우리들이 뜻을 대하는 입장은 어떠한가 우리는 현재 자기가 처해 있는 입장이 뜻을 대하다가 간 역사상의 사람들과 또는 현재 뜻을 찾아 나가는 수많은 신앙자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가를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진실된 신앙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 신자라든가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가 있다면, 이와 같은 혼란된 시대, 불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만일 세계를 구할 수 있고 앞날에 희망적인 세계가 전개되는 하나의 서광이, 여명의 빛이 비쳐올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생명을 투입해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얼마나 빨리 달려가겠습니까? 그때는 시간이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자기 환경이 문제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생명이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과거에 심각했다면 심각한 문제가 부딪쳐 오더라도 감사히 받지만, 과거가 심각하지 않았다면 부딪혀 오는 문제가 심각하면 그것을 비판하고 거기서 주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든가 세계문제라든가 자기 인생문제를 중심삼고 며칠 동안 혹은 몇달 몇해 동안 고민하고 심각하게 생각한 때가 있었느냐고 비판해 봐야 됩니다. 만일 그러한 과거가 없었다면 스스로를 반성하고, 스스로 미급하다는 것을 느끼고, 스스로를 비판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희망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이 오늘 우리들의 입장입니다. (67-224, 73.06.27) 참부모란 말은 새로운 역사의 기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참부모가 와야 됩니다. 타락한 부모가 아니라 참된 부모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은 생각지도 않은 입장에서 찾아지고 만나지는 그러한 말, 그러한 내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처음 나타난 말이요, 혁명적인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에 없는 기적적인 대사건입니다. 참부모라고 할 때, 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왔다갔던 수많은 부모들의 사랑을 능가하는, 단 한번밖에 없는 사랑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 기준을 지녔기 때문에 참부모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비로소 처음 받는 최고의 기준이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갔지만 예수님도 상상하지 못한 최고의 이상적인 자리입니다. 참부모를 중심삼은 거기에서부터 이상적인 역사의 출발, 새로운 문화의 출발, 새로운 사랑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이요, 새로운 인생의 출발, 새로운 가정의 출발, 새로운 국가의 출발, 새로운 세계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이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사랑의 출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참부모라는 말이 그저 말로 할 수 있는, 그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런 내용의 말이 아닙니다. 이런 자리까지 올 때는 역사과정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수많은 희생의 제물의 피가 호소하고 있는 자리입니다. 성경에는 아벨이 피를 흘림으로써, 가인한테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림으로써 하늘에 참소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 역사를 전부 해원성사 할 수 있는 자리가 참부모란 자리입니다. (67-225, 73.06.27) 참부모가 나타난 것은 무섭고도 놀라운 사건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또 나라를 잃어버렸고,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까지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방대하고 엄청난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이 무엇이냐 하면, 참부모라는 놀라운 명사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소원해 온 섭리의 목적이 무엇이냐? 참부모 기준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탕감역사를 해 나온 것은 참부모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지금까지 한날의 소원을 바라고,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것도 이것을 위한 것이요, 수많은 종교가 전부 이 한날을 바라고 있는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참부모가 나타난 것은 무섭고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참부모의 기준이 나오면 자기는 근본적으로 패배할 것을 아는 사탄은 이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이때가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거짓 부모의 자리에서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수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이날이 오기까지 끔찍한 희생이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그런 길을 가려고 하는 모든 신앙자들을 대해 개인적으로 희생시켰고, 가정적으로 희생시켰고, 혹은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희생시켜 나온 사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희생된 우리의 선조들, 선을 추구하며 참 길, 부모의 길을 찾아 나온 선한 우리의 형제들이 얼마나 끔찍한 피의 대가를 치렀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67-226, 73.06.27) 승리적 전통을 상속받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선생님은 이 자리에 올 때까지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렇지 않고 확실한 신념이 없이 그저 따라만 나왔다면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이고 틀림없는 길로 알고, 틀림없는 승리를 다짐하고 출발해서 오늘과 같은 승리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선생님의 신념을 꺾기 위해 수많은 개인에서부터, 가정으로부터, 종족, 민족, 국가가 반대하고, 세계까지 반대했지만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전통을 통일교인들이 이어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걸 몰라 가지고는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놀라운 것을 이어받을 때는 새로운 결심을 하고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세계 끝까지, 하늘 끝까지 달려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놀랍도록 감사하는 자리에서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를 보고 그것을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하늘의 마음이요, 스승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는 것들을 데려다가 가르쳐 주는 이 자체가 처량합니다. 이런 교육을 받는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선생님이 80이 넘도록 수난의 길을 거쳐오는데 그걸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고, 그런 입장에서 선생님을 대해왔다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일년에 그 몇백 배의 수난의 길을 가더라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채워 드리겠다는 결의를 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67-228, 73.06.27)
참부모란 말은 기쁘고 좋으면서도 무섭고 두려운 말 우리는 자기 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통일교인들이 잘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을 여기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수많은 선조들이 몇백 년, 몇천 년을 표준해 이때를 준비해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볼 때,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아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서 이런 자리에 들어오게 되었느냐? 그것은 자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선조들의 공적을 통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못하면 선조들의 앞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받들지 못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운명이 막혀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많은 피를 흘려 탕감의 역사를 치러 왔습니다. 자신이 이러한 축복을 받았는데, 여기서 자신이 잘못하면 자기 후손이 얼마나 큰 탕감을 치러야 할지 모릅니다. 이런 무서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제1 이스라엘이 영육을 중심삼은 승리의 터전을 갖추지 못하고 전부 제2 이스라엘에게 넘겨주고 아무 것도 없는 자리에서, 버려진 백성과 같은 자리에서 어디에 가든지 차이고, 어디에 가든지 몰리는 역사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들어왔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은, 떨어져 나가는 날에는 되는 법이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 통일교회를 정면으로 반대하던 장본인이 탕감받지 않으면 그 아들딸이 전부 탕감을 받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가정, 국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참부모를 생각하게 될 때, 그 참부모라는 말은 무섭고도 두려운 말입니다. 기쁘고 좋은 말이지만 반면에 무섭고 두려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발짝 잘못 디디면 자기 일대는 물론 조상들까지, 후손들까지 왔다갔다한다는 것입니다. (67-229, 73.06.27) 참부모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가 2천년 역사를 거쳐 나오면서, 인류 조상이 타락했다 하면 타락한 부모는 거짓 부모, 나쁜 부모고 타락하지 않은 부모는 선한 부모요, 참부모다 하는 것을 대번에 알 것인데 그것을 지금까지 발표 못 한 것은 발표할 수 있는 이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과거 역사시대에 참부모라는 것을 생각한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그 배후가 어떻다는 것을 풀 도리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의 방대한 원리의 전체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그것을 확실하게 풀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간단히 참부모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원리 말씀 혹은 통일교회의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역사관, 또 인류의 본연적인 근원에 대한 사실을 밝혔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참부모라는 말을 확실히 앎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 우리 인류 시조의 타락이 불륜한 관계로 말미암아 되어졌고, 하나님과 관계 없고 창조이상으로 세우려는 참된 부모와 관계 없는 혈통적 인연을 남겼다, 그릇된 핏줄을 이어받게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부모란 말은 인류 시조로부터 역사적 모든 인간들이 그릇된 혈통 가운데 사는 것을 청산해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본연적인 뿌리를 중심삼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이 이어진다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건 참으로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갖고 있고 생명을 갖고 있고 피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직결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핏줄이 연결된 그 자체가 오늘날 여러분 자신,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입니다. 이것은 몇억만 년 가더라도 그 자체가 부정당할 수 없는 절대적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참부모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핏줄에 연결되어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달고 다니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식, 그러한 개념이 확정되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혈통권이란 것은 하나님과 직결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핏줄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위하는 데에 중심을 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나 여자나 사랑의 상대를 구할 때에 자기보다도 못난 사람을 구하고, 또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 이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높고 더 유명해지고 모든 면에서 더 훌륭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이냐? 우리는 어디까지나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결과적 존재니 원인의 존재를 닮은 것입니다. 원인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 난 나 자신도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 자신도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들딸로 지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보다 못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도 더 낫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못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더 훌륭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그러느냐 하면, 참사랑을 중심삼고 그러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아담 해와를 지을 때 자기의 모든 것, 사랑과 생명과 모든 것을 투입하고 더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영속적인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자기의 목숨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참된 사랑의 대상을 짓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하는 고개를 넘어서까지도 투입하고 더 투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자신도 참사랑의 대상을 짓는 데는 전체를 대상 때문에 살고 대상을 위하는 데서 전폭적으로 자기를 부정하는 자리에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도 하나님 중심삼고 위하라는 것이 아니라 위하기 위한 자리에서 창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201-60, 90.03.01) 경험을 통해 확증을 얻어야 한다 외적 세계의 문제보다도 내적 세계의 문제가 더 복잡합니다. 선생님이 내적 세계의 복잡한 것을 수습해 거기에 이어서 외적 세계의 복잡한 것을 수습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까지 내적 세계의 복잡한 것을 수습해 놓았습니다. 기독교에서 외우고 있는 주기도문 가운데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내적 세계에 이룬 것을 외적 세계에 이룬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문제를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수습해 나왔기 때문에 지금 통일교인들이 선생님을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외형적으로 대할 수 있지,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그냥 대하려야 대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인들은 원리를 배움으로써 그것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배후에서 어떤 길을 거쳤왔는지 모르더라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부터 살고 여기서부터 가고 여기서부터 죽겠다 하는 신념만 가지면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물리학의 공식, 전기라든가 하는 공학 방면의 과학자들이 일생을 걸려 연구해서 만든 공식도 있고,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협동해서 만들어진 공식도 있습니다. 그 공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그 배후에서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몰라도 괜찮습니다. 공식만 외우면 그것을 인계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파고들어가야 됩니다. 그런 것을 올바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안 해도 되지만, 안 배워도 되지만 깊은 자리까지 가려면 그걸 찾아들어 가서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통일교회 내용이 사실이냐, 하나님이 진짜 그렇다고 인정하고, 진짜 역사가 그렇게 되었고, 이 진리가 사실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선 깊은 심정의 세계에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를 경험해야 합니다. 여러 역사적인 위인 성현들을 통해, 또 현재 영계를 통하는 사람을 통해 증거시킬 수 있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이젠 아니 믿으려야 아니 믿을 수 없는 자리에 섰습니다.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더라도 문총재 하게 되면, 벌써 어느 수준에 올라간 영들은 말을 못 하고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67-230, 73.06.27) 참부모의 아들딸로서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세워야 세계적으로 그런 기반이 닦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학문적인 견지에서도 선생님의 사상을 안 받아들일 수 없는 끝날이 되었습니다. 역사와 현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한 선생님의 말씀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실정을 안다면 일국의 왕이 문제가 아니요, 일국의 대통령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굉장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우리들, 그럴 수 있는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이 있습니다. 하나의 어떤 왕족이라도 권위가 있고, 어느 국가의 대통령이라도 권위를 자랑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삼은, 역사이래 처음 나온 참부모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하는 통일교인들이 그런 자세를 못 갖추고 위신을 못 갖추어서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껄렁껄렁해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하버드대학이라든가 권위 있는 대학에 가더라도 학교의 규범에 따라서, 자기 실력에 준하여 어느 누구도 참소할 수 없는 당당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통일교인들이 형편없다면 하나님 위신이 서겠습니까? 머리로 생각을 하는 것도 전부 공적이요, 공식적인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시시하게 개들도 생각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면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인들은 참부모의 아들딸로서,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67-232, 73.06.27) 이래도 좋고 저래도 감사해야 할 우리 그러니 우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감사해야 됩니다. 야, 선조는 나에게 이런 복을 주기 위해서 고생을 했다. 그것을 알았으니 내가 역사를 점령할 수 있는 하나의 기쁜 날을 갖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나고 내가 여기에서 활동함으로써 역사가 나와 더불어 부활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려면 죽은 자리에서부터 부활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죽을 자리에 가서 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통해 거기에서부터 솟구쳐야 됩니다. 그래야 부활됩니다. 이제부터는 불평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감사해야 됩니다. 통일원리를 공부한다고 할 때, 힘들지만 깊이 앎으로써 심정세계에서 내 소유와 내 활동무대가 넓어진다고 생각하면 잠이 문제가 아니고 노는 게 문제가 아니고 먹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한 것 이상 그 몇백 배로 열심히 공부했다는 기록을 남겨야 됩니다. 졸음이 오는 그 시간에 배우는 한마디 한마디가 자기 일생의 성공을 가져오는 문제일 수 있습니다. 졸음이 올 때, 일생을 좌우하는 문제가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년의 한이 맺힐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은 뜻을 대해 정상적인 입장에서 심각해야 됩니다. 부모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심각해야 되고, 자기 아들딸이 죽을 때보다도 더 심각해야 되고, 나라가 망했을 때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그 이상으로 심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미급했었던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한 역사, 그러한 놀라운 뜻을 중심삼고 섭리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불경스러웠던 자신이었던가를 발견해야 됩니다. (67-233, 73.06.27) 역사상의 어떤 조상보다도 나아야 한다 우리가 배우는 한마디 한마디의 원리 말씀에는 선생님의 피눈물이 젖어 있고, 역사적인 피눈물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 선생님이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을 것 같습니까? 이 길을 찾아오면서 솜바지가 다 젖도록 기도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룻밤 안 자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일주일을 뜬눈으로 새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어느 누가 '당신은 이런 사람이지요?'라고 한마디만 하면 목을 놓고 통곡할 수 있는 심정을 지니고 사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불과 80년 정도밖에 안 됐어도 그러는데, 수천 년의 역사시대를 무수한 수난을 당하면서 온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그런 것을 선생님은 알았기 때문에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고, 도리어 위로해 드렸습니다. 피를 토하면서도 '아버지여, 이 아무개의 피는 옛날에 죽어갔던 기독교인의 피와는 다릅니다. 저는 구원 얻겠다는, 당신 앞에 피 흘리니 알아 달라는 그런 졸장부가 아닙니다. 염려 마십시오. 저에게는 당신의 동정이 필요 없습니다' 이런 기도를 하며 나왔습니다. 협조해 달라는 기도를 안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지만,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세계 통일교인들은 선생님과 말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다른데, 마음으로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선생님을 동정하는 마음을 갖게 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님의 책임이 있는 모양입니다. 살아생전에 이렇게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지고 사모하는 역사에 처음 있는 사나이가 선생님입니다. 예수님을 보더라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고, 공자도 석가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으며, 마호메트도 죽은 다음에 그렇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일대에 그런 기반을 닦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을 아무리 고생시키더라도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고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여자라도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역사시대의 우리 조상들보다도 나아야 됩니다. 조상 중의 어떤 할머니보다도 나아야 되고, 어떤 할아버지보다도 나은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자도 역시 그런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67-234, 73.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