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제 3장 참사랑의 예수님 소목차 1. 하늘의 사랑을 세우시려는 예수님 2. 참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 3. 가야 할 예수님의 생애노정 4. 하나님을 위한 예수님의 지정 5.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심장 6.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슬픈 심정 7. 복귀를 위한 예수님의 생애관 8. 예수님이 가신 뜻길 9. 예수님의 참사랑의 길
1. 하늘의 사랑을 세우시려는 예수님 다시 찾아야 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창조된 존재들과 하나님이 영원히 극치의 사랑을 주고받는 사랑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그런 뜻을 알지 못하고 타락함으로써 그러한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 만상과 인간 앞에 소망의 표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 피조만물에게까지도 영원한 이상의 조건으로 찾아 세워주어야 할 섭리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았지만 타락으로 인하여 이 땅 위에 영원한 하나의 중심이 서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고자 하는 사랑도 세워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내적인 사랑을 충족시켜 주고 인간의 전체적인 이상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기준은 아직까지 완전히 세워놓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 수고해 왔으며, 또 앞으로 인간들에게 소망으로 남아진 천적인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고, 지음받은 모든 만물이 그 사랑을 영원한 이상의 사랑이라고 노래할 수 있는 그날이 올 때까지 수고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가 6천년이 경과한 오늘, 어떤 개인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은사를 받았다 할진대 그 사랑의 은사는 그 사람 개체만을 위한 은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만민과 천상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 기뻐할 수 있는 사랑으로 세워야 할 은사입니다. 그래야 내가 기뻐할 때 만민이 함께 기뻐하고 화동할 수 있으며, 천상세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가 함께 화동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사가 하늘땅이 기뻐하는 사랑으로 나타나게 될 때, 다시 말하면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사랑을 찾은 다음에라야 하나님은 비로소 모든 원한과 서러움을 잊어버리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생명이 남아 있는 한, 죽든지 살든지 승리적인 운명의 조건이요, 불변의 사랑의 실체인 하나의 중심존재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즐길 수 있는 한날, 한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인간들이 이 일을 다 이루지 못한다면 인간의 서러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또 인간의 서러움이 계속되고 있는 이상 천상에서도 서러움이 계속될 것이요, 천상에 서러움이 남아 있는 이상 하나님의 서러움도 계속 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땅을 대표하여 영원불변의 사랑의 실체로 세워지는 그 하나의 중심은 우리 인간과 만물이 다같이 만나야 할 소망의 뿌리입니다. 소망의 뿌리로, 영원불변한 사랑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 4천년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이 땅에는 하늘의 사랑을 소개하기 위해 수고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고, 말할 수 없는 수고와 고난과 역경의 신앙길을 통해서 하나님이 찾으려는 사랑의 기준과 연결시키기 위해 수고한 수많은 성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수고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고, 하나님의 뜻속에 살기를 원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중심인 예수님 한 분이 오시기를 바라고 행한 수고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종족과 민족과 국가를 택하여 세웠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대표하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늘의 즐거움이 땅위에 미치고, 땅의 소망이 하늘에 미쳐서 하늘과 땅이 비로소 4천년의 원한을 풀고 같이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59, 57.2.24) 사랑을 중심한 예수님의 사명과 소망 예수님은 먼저 당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 만민 앞에 나타나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4천년만에 비로소 모든 인류 앞에 나타내고, 4천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사랑의 화신으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그대로 연결시켜 줄 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의 모임과 민족을 찾으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불신함으로써 4천년 동안 이루려고 수고했던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예수님은 원한의 십자가의 길을 가고 말았습니다. 만일 유대민족이 예수님을 하나님을 대신한 메시아로,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으로, 4천년 동안 선조들이 피 흘리며 싸워나온 소망의 실체로 알았던들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고 당신은 우리들의 소망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요, 천상의 원한을 풀어 그 기쁨을 우리에게 연결시켜 주실 분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들에게까지 연결시켜 주실 선조로소이다 하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보고 듣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영원히 헐어버릴 수 있는 사랑의 승리적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사명 앞에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 외에는 나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의 애달픔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드리기 위하여 오신 예수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며, 만물세계에서부터 천상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게 하려고 오신 사랑의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당시의 인간들이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유대민족이 믿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오신 예수님은 책임을 다할 수 없는 서러운 사정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서러움은 그의 서러움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심을 품고 나온 역사상 수많은 선지자들의 서러움이요, 창조이상의 뜻을 실현하고자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서러움으로까지 연결됩니다. 영계의 영인들과 선조들의 기쁨, 하나님의 기쁨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도리어 하나님에게 서러움을 더 보태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대민족이 저지른 잘못입니다. 그 한이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던 예수님의 외로운 사정은 예수님만의 사정이 아니요, 30여 평생의 서러운 심정을 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정 역시 예수님만의 사정이 아닙니다. 그의 사정은 우리의 사정이요, 오늘날 전체 인류의 사정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고 서러워하신 것은 당신이 망하고 죽는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서러운 고개를 넘어야 할 운명 때문에 서러워하신 것도 아닙니다. 천적인 애달픈 사랑의 심정을 품고 역사의 목적지까지 가야 할 자신의 책임을 염려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땅 위에서 맞아야 할 인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신이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가 되도록 하겠느냐 하는 것을 염려했고, 만인류가 서러움의 고개를 넘어야 할 운명을 지니게 된 사실을 놓고 염려하셨던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서러움, 자신만을 위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진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2-61, 57.2.24)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한 예수님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과 같이 성품을 다 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우주적인 대표자는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뜻을 품고 나오는 자기 자신을 인정시켜야 되겠기에 사랑하는 제자와 교법사들 앞에 그러한 자신의 입장을 실토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가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7~40절) 하신 말씀을 실천해야 됩니다. 그 말씀에는 우주의 핵심적인 이치와 우주의 이상적인 이념과 우주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사랑의 이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과 같이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을 대하여 자기의 지성을 다한 분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한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혈혈단신 천륜의 큰 사명을 붙들고 하늘 대하여 충성하던 예수님의 그 충성심, 마음을 다하던 그 마음, 뜻을 대신하던 그 뜻, 또 사랑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던 그 성품을 본받아야 됩니다. 성품은 무엇을 대하여 움직이느냐? 천륜을 대하여 움직입니다. 또 마음은 무엇을 대하여 움직이느냐? 마음은 역사성을 지닌 인륜을 대하여 움직이며, 뜻은 생활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천륜과 인륜에 합당한 생활을 하셨고, 그러한 생애노정을 거치셨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 가운데 처음으로 천륜적인 사랑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역사성을 띤 인륜의 노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생활권내로 하나님의 사랑을 끌어내리기 위해 수고하셨습니다. 즉 천륜적인 사랑을 인륜적인 사랑에까지 끌어내리려고 있는 성품을 다했고 뜻을 다했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상징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성품을 대신한 분, 즉 천성의 중심인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 계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의 본바탕을 중심삼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인간의 양심이고, 그 양심을 중심삼고 나타나야 하는 것이 인간의 행동입니다. 이것은 천적인 전체의 섭리를 총괄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품이라는 것은 양심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품의 본바탕은 양심의 뿌리이므로 성품의 본바탕이 양심보다 겉으로 드러나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품은 쉬지 않고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가 얼핏 보면 돌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태양을 중심삼고 돌고 있고, 또 달이 지구를 돌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성의 본 바탕과 양심과는 이와 똑 같은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무형의 하나님을 대신한 말씀이요, 천륜적인 인격과 인륜적인 인격, 혹은 천주적인 인격과 생활적인 인격을 나타내는 천륜의 전체 섭리를 대신한 말씀입니다. 4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선지자들이 천륜을 세우려고 수고의 노정을 걸어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나타내신 분이었습니다. (2-65, 57.2.24) 예수님의 인격과 제물 되신 생활 예수님은 역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나타내지 못한 하나님의 성품을 처음으로 나타내신 숫것의 첫 열매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수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 인륜도덕을 세우기 위하여 양심을 기준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하늘이 원하는 최고의 양심의 표준을 세우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4천년만에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숫제물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가운데 나타난 뜻은 하나님이 이상하는 뜻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왔다 간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혈통을 이어받아 태어나신 분입니다. 기독교인들, 하늘을 향해 도의 길을 가려고 하는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헤아려 전체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의 생활 가운데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본질이 나타나 있으며, 그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 할지라도 큰 것을 대신할 수 있는 불변의 결정체와 같은 형태를 갖추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30여 생애를 회고해 보게 될 때, 예수님은 전체의 생애를 바쳐서 무엇을 하고 가신 분인가?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찾아 세워야 할 성품이나 마음이나 뜻이나 행함에 있어서 역사를 대신하여 하나님에게 바칠 전무후무한 숫것 제물로 오신 분입니다. 30여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신 예수님은 우주적인 사랑의 표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본성의 인륜의 법도를 세워 천륜을 향하여 나가려 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서도 만민을 대표하여 전체적인 선의 기준과 의의 기준을 세워 사탄과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땅에 와서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하는 생활을 통하여 몸 마음이 선의 실체로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예수님의 상대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의 힘이 우리에게 연결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성품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30여 평생 하나님을 중심삼은 정성의 생활에서 쉴 새가 없었던 예수님의 생활, 역사와 우주를 대표하여 숫제물의 실체로 살아가신 그 예수님의 생활을 본받아야 합니다. (2-67, 57.2.24) 숫제물로 바쳐져야 할 기독교 신자 예수님이 4천년 역사와 만민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즐겨 받을 수 있는 산제물로, 생축의 제물로, 숫것으로 바쳐진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께 숫제물로 바쳐져야 합니다. 생애에 인륜과 천륜의 도리를 다해야 하며,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왔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늘의 아픔을 대신 느낄 수 있고, 예수님이 느끼시던 천적인 사랑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준비한 교단으로부터 배척받아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찾아가야 했던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드리는 신부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하나님의 원한을 풀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원한을 비로소 풀 수 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은 이 땅에, 패역하고 배반하는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자신의 이상을 의논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반한 선조들을 가진 우리는 하늘을 배반해 온 노정을 거슬러 올라가서 아버지의 뜻이 이런 것이 아니옵니까? 이 몸을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를 대표하고 나설 숫제물, 어느 누구도 만지지 않고 보지 않았던 숫제물로 드려질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성품을 다한다 하더라도 현재의 성품은 사탄 세상으로부터 용납 받던 성품이요, 마음을 다한다 하더라도 사탄과 속삭이던 마음이요, 뜻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우리는 반드시 사탄적인 성품과 마음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인생관과 우주관도 바꿔야 합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신앙관으로는 사탄을 이길 수 없고, 사탄의 참소조건에 걸려 있는 무대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숫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처음인 동시에 마지막이며,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품과 마음과 뜻을 이 땅의 인간들에게 소개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성을 대표하고 만물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귀하게 볼 수 있고, 하나님이 참되다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고 사랑할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의 참소를 받을 수 없는, 사탄의 소유가 될 수 없는 성품을 느낄 때가 있고 예수님의 천적인 인격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런 마음을 느꼈다면 예수님의 내적 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내적 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찾아야 할 놀라운 역사적인 우주의 초점, 넘어야 할 우주적인 관문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숫것으로 드려지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소망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소망을 어떻게 찾아 이룰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소망을 찾으려면 과거의 자신의 부족했음을 깨달아야 하고, 그 부족함을 하나님에게 통회해야 합니다. 회개하더라도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야 합니다. 30여 평생 흘렸던 예수님의 눈물을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이 없어 가지고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30여 평생 자나깨나 먹으나 굶으나 일편단심 그 한 뜻을 세우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던 그 소망의 성품을 본받아야 하고, 죽음의 길을 가야 되었던 예수님의 비참한 심정을 느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 위의 믿지 않는 인간들을 위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시는 생활을 하셨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저나라에 가서까지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통하고, 내적인 천성의 이념을 알고, 내적인 예수님의 생활적인 모습을 알아 가지고 눈물을 흘려 하늘땅에 채워도 부족함을 느껴야 합니다. 눈물이 어리고 뼈살이 녹는 애달픈 심정을 이어받고, 성품을 통하고 마음과 뜻을 통한 예수님의 그 모든 사랑과 인격을 나를 통하여 표현할 수 있게 될 때 거기에서부터 천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예수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그런 심정을 느낀다면 죽음의 구렁에서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 앞에 감사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 감사의 마음을 마음 몸에 채우고 온 땅과 하늘에 채워도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를 잃어버릴 때 하나님이 느꼈던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은 서러움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또 인간을 찾으려는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오셨지만, 자신을 보내신 그 뜻을 이루어드릴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릴 때 느끼던 서러움을 느끼셨습니다. 오늘날 역사적인 원한을 해원해야 될 인간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도 서러워 할 줄 모르게 되었으며, 신랑인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서러워 할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또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서러움을 위로해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그러한 입장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 나서서 아무리 아버지를 불러도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라고 하신 것과 같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땅이 감동할 것입니다. (2-69, 57.2.24)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우리는 역사를 넘어서 예수님과 성신의 심정을 체휼함과 동시에 6천년전 안타까웠던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을 체휼하여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예수님께서 소망하시던 사랑을 하늘땅에 이루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개인적인 가치관과 편벽된 인생관을 가지고 하늘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내가 되면 아버지를 부르지 않아도 아버지가 찾아올 것이며, 주를 부르지 않아도 주께서 찾아오셔서 나를 포옹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 마음 몸 전체가 그 사랑에 취하여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심정을 통하고 나서야 강철이 지남철에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을 중심한 인연에 의해, 이 땅의 만민 앞에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던 천국이념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 셋만 있었다면 예수님 당시 인류의 완전부활의 역사는 출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라고 하셨던 말씀을 붙들고, 4천년 동안 예수님을 세우기 위해 수고한 하나님을 대신하고, 예수님과 성신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셋이라도 합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갔던들 사탄은 자연굴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불러 세우셨고, 어려운 때나 기쁠 때나 이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삼위신의 역사를 대신한 이런 천륜적인 종교를 인간 세상에 세우시기 위한 뜻이 있었던 것을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혜와 지식을 갖추어 천적인 내용을 밝히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예수님의 깊은 뜻을 몰랐던 사도들과 같은 입장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부르시고 택해 주신 교회와 뜻 앞에 일생을 바쳐 하늘의 면목을 세워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의 소망이었던 천국이 땅 위에 나타날 수 있으며, 땅 위에서 원수 사탄을 자연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독점하는 아들딸이 나타나 사탄으로부터도 경배받게 되기를 바라면서 삼위신은 역사해 왔고,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수고의 노정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천천만 성도와 천군천사, 땅 위에 있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늘 대한 성품을 중심삼고 사탄을 자연굴복시켜 하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하며, 복귀섭리를 위해 땅 위에 이들을 모두 동원시킬 수 있는 한 인격의 실체가 땅 위에 나타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했던 예수님의 소망과 사랑을 이 땅에 실현하고, 아니 즐거우려야 아니 즐거울 수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권내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2-71, 57.2.24) 2. 참사랑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 인류역사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 우리의 본심은 사탄과 인연을 맺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인연 맺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몸이 이것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몸은 사탄과 짝을 맺게 되었고, 마음은 하나님과 짝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이 두 갈래 길에 놓여 있습니다. 삼팔선, 즉 경계선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에서 작용하는 힘의 3분의 2가 몸이고, 3분의 1이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과 몸이 싸우면 몸이 번번이 이깁니다. 왜 그러냐? 마음은 아직까지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을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상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몸이 마음보다 더 강하냐?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을 맺으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먼저 몸의 사랑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마음보다 강합니다. 아직까지 마음의 사랑은 맺지 못했습니다. 마음의 사랑을 맺기 위하여 찾아 나온 것이 하나님의 섭리역사요, 종교의 역사입니다.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새로운 신랑 신부의 마음의 사랑 기원을 역사에 제시해 놓기 위해서 종교가 그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자리잡은 남자가 나오지 않고는 완전한 여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런 남자를 찾아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하나님과 마음의 사랑, 즉 본심이 지향하는 사랑의 인연을 찾아 그것과 완전히 관계를 맺어 절대적 기준에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을 찾아 나온 역사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대망사상(待望思想)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재림주님이 온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온다고 하고, 유교에서는 진인이 온다고 하는 등 고차원적인 종교에는 재림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내용을 중심으로 섭리해 나옵니다. 이렇게 이론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인류역사는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의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62, 69.11.23) 하나님이 찾아 나오는 남자 세계의 모든 문화권은 이상적인 하나의 남성에 의한 이상적인 사상권을 목표로 하고 형성돼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절대적인 사상권을 중심삼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상은 하나의 절대적인 이념권을 중심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상은 하나의 남자로부터 나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남자가 이어 나왔습니다. 여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한 남자를 찾아 나오는 역사입니다. 그 남자는 본심의 사랑을 중심삼고 최초로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못 이루었기 때문에, 몸의 사랑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마음의 사랑을 갖지 못합니다. 아담 해와가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중심하고 사탄에게 끌려감으로써 마음의 사랑이 몸의 사랑에 눌렸습니다. 마음의 사랑을 통하여 몸이 사랑을 받아야 할 것인데, 오히려 몸의 사랑을 중심삼고 마음의 사랑이 눌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은 3분의 2는 사탄세계에, 3분의 1은 하늘세계에 속해 있는데, 마음의 힘을 가하여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는 몸을 끌어내야 합니다. 마음이 몸을 반드시 때려잡아야 합니다. 원수를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 싸움을 하며 6천년 역사를 이어나왔습니다. 마음의 사랑의 중심이 나오지 않고는 이 싸움은 끝날 수 없습니다. 몸적 사랑이 마음적 사랑보다 강합니다. 몸적 사랑의 상대가 마음적 사랑의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사랑의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의 소원이나 바람보다 몸의 소원이나 바람이 더 강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마음적 사랑의 상대를 확실히 알게 되면 몸적 사랑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확실히 제시할 수 있는 마음의 사랑을 중심삼고 재창조하고 계십니다. 아담 해와를 창조했지만 타락했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시 만들어 수습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적 사랑의 주체를 대표한 남성을 찾아 나옵니다. 역사적인 대표자가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생명을 중심한 마음의 사랑과, 생명을 중심한 최고 인격의 표준이 되는 분입니다. 이분을 하나의 모델로 하여 지금까지 사탄세계에서 이어받은 신념이나 사랑의 감성을 모두 매장하여 무(無)의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본래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몸과 같은, 본성의 사랑을 중심삼고 백 퍼센트 화합할 수 있는 몸의 상대를 찾아야 됩니다. 본연의 마음 사랑을 실체와 결부시켜 타락의 인연을 벗어난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몸, 즉 내적인 성전을 이루어 하나님과 하나되어 등장할 수 있는 하나의 남성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남성이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난 사랑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본연의 마음을 중심삼은 사랑의 세계의 아버지, 우주의 사랑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몸은 마음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된 입장에 있지 못한 인간은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 하는 조건을 세워 하나님으로부터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접붙임을 받되 줄기를 잘라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메시아와 타락한 인간은 씨가 다르기 때문에 줄기를 잘라서 접붙임을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복귀섭리의 경로입니다. (27-63, 69.11.23) 원수를 용서해 주고 사랑하라 하나님은 한 남성을 찾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왔습니다. 인간의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려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 노정입니다. 하나님은 칼을 들어야 하느냐, 용서를 해야 하느냐? 용서하기가 쉬운 일입니까? 철천지 원수를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만일에 여러분이 그런 원수를 대한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가슴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딸을 전부 잡아죽이고, 안팎의 세상을 전부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녀석입니다. 이런 원수를 대해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것같이 대해야 할 입장에 계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대하지 않고는 복귀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진 일이 없는 것같이 생각하지 않고는 구원역사를 못 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아닌 것같이 대하지 않고는 용서했다 하는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비로소 역사에 없었던 새로운 법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수진 일이 없는 것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구세주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는 길은 천리원칙이요, 이 원칙이 아니면 내가 몽땅 바치고 싶어해도 받을 수 없는 당신이며, 이 원칙을 따라가지 않으면 풀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사정이기 때문에, 나는 그 원칙에 따라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당신의 천리원칙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나를 바치겠습니다… 이런 조건하에서 복귀역사가 출발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연의 세계로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원수를 용서해 주는데 칼 가지고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위 원수라고 하는 그 원수를, 하나님은 창조과정을 파고들어 우주 전체의 수천만 존재들을 일시에 파탄시킨 사탄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원수인데도 용서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원수가 되지 않았을 때 사랑하던 것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마음, 옛날에 아담 해와를 대하던 그 사랑의 마음 정도 가지고는 복귀할 수 없습니다. 원수의 자식이 되었는데, 타락하기 전에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마음 가지고는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를 사랑하던 그 이상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의 자식을 자기 자식 이상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동기를 갖추어야 합니다. 역사상의 그 누구도 그런 내용을 중심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어떤 성인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 세계의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승리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27-65, 69.11.23) 복귀노정의 철칙 하나의 남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 하나의 여자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남자는 있었으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한 여자는 없었습니다. 천성의 인연을 본심으로 알아서 모실 수 있는 한 여성을 고대했지만 그러한 여성이 없었습니다. 전부 자기를 중심삼은, 자기의 소원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천륜을 중심삼은 천국 이념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뜻, 자기 소원, 자기 욕망을 중심삼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욕망은 세속과 더불어 이미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하나님과 인연 맺을 수 없었습니다. 본연의 법칙에 의해 재출발해야 합니다. 마리아부터 재출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가 여쭙기를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했을 때,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 뜻대로 못 했다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원수들을 구원하는 길을 닦아야 할 예수님 앞에,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넘어갈 수 있는 신앙을 갖고 그런 결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을 품은 자가 되어 예수님을 도운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겠다고 몸부림친 남자나 여자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뜻을 소홀히 하여 그 뜻을 품고 왔던 사나이를 쫓아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몰아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선생님에게는 원수가 많습니다. 가인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못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세 사람 이상 굴복시켜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제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열두 제자, 그 중에서도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예수님이 죽기 전에 먼저 생명선을 넘어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죽기 전에 먼저 아들이 죽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초조한 하나님 앞에 아담 해와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뜻을 세우려고 했더라면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입장이고, 제자들은 아들의 입장입니다. 아들 입장인 아담이 부모인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타락입니다. 이것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반대의 경로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부모가 죽을 수밖에 없는 길을 자식이 먼저 죽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이것이 복귀노정의 철칙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내어놓고 세 제자는 자기들의 살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자를 때도, 예수님은 원수를 갚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비참하고 추하고 억울한 자리에서 가라지 같은 추한 악당들과 부딪쳤으니 천지가 아득해지는 사연이 많았지만, 그런 사연보다도 하나님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하여 본연의 아들딸로 복귀시키느냐 하는 사연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런 사연에 입각하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상대적 관계를 갖추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새로운 이념의 역사가 출발되었습니다. (27-67, 69.11.23)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신 실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내적인 성품을 대신해 모든 어려움과 슬픔을 참으면서 사랑하던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느 자리 어느 곳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실체로서 사탄과 싸워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사탄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탄이 자기를 위한 목적을 중심삼고 공격하게 될 때 그 영향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어떤 수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참으신 것같이, 만민을 위하여 참으신 것같이, 당시까지의 섭리노정에서 사탄을 대해 하나님이 싸워 나온 것과 마찬가지로 30여년을 홀로 참으시면서 사탄을 대해 싸우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는 그 절정의 순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실체로서 줄곧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생애입니다. 그의 생애노정, 곧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신 노정은 사탄과 싸우면서 걸어온 시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탄 앞에 내주어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했느냐?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실상 죽음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대신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개도 넘을 수 있다는 절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사탄은 굴복합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 홀로 전체의 세계를 바라보며 슬퍼하고 걱정하고 수고했는데, 예수님 한분이 지상에 세워짐으로써 그를 중심삼은 사탄과의 새로운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을 잊고 하나님을 위해 싸워나갔을 뿐만 아니라, 죽는 자리에서도 자기를 위한 욕망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승리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죄악의 인간들을 위해 자기 일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사탄이 반대하는 것까지도 잊을 정도의 간곡한 심정으로 인류를 위해 손을 들어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사탄세계에서 나타낼 수 없는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나타냈기 때문에, 사탄이 그의 사랑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탄은 자기 나름대로 찾으려하는 뜻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인하여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이 서러워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도 서러워하기 시작하였고, 사탄도 서러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놓고 하나님과 인간만이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놓고 사탄도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탄의 슬픔이 커지면 커질수록 예수님의 사랑의 결실은 더 많아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을 실증하는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과 불변의 인연을 맺었고, 불변의 승리, 불변의 사랑의 실체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 또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4천년 동안 영광을 나타내려고 하였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예수님 한 분을 세워 비로소 그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통하여, 그 뜻을 이 땅 위에 나타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4천년 섭리를 증거하는 실체로 나타나야 했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뜻이 사탄에게 짓밟힌 바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실체로서, 4천년 동안 섭리해 온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부활의 영광이었습니다. (1-81, 56.5.27) 3. 가야 할 예수님의 생애노정 예수님이 주장한 교리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외아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첫번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사랑 전체를 받을 수 있는 대표자입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누구보다도 사랑 받는 대표적 자리에 섰다는 입장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는 역사시대에 어느 누구도 발언하지 못한 것인데, 예수님은 천정(天情)과 인정(人情)을 대표해 발언하는 데 제일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해 신랑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신봉하던 모든 신자들은 신부의 인연을 맺기 위해서 예수님과 같은 공적 생활을 거쳐갔습니다. 그 신랑 신부라는 것은 인정과 인륜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천정과 천륜을 중심삼은 신랑 신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종이 되지 않고 친구가 된다 더 나아가서는 형제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이 주장한 교리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 서는 것이요, 그런 아들로서 하나님이 바라는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형제지권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인륜과 인정을 중심삼은 것이 아니라 천륜과 천정을 플러스시켜서 천주가 공인할 수 있는 세계관을 중심삼고, 하나의 섭리관을 중심삼고 일치된 노정에서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가정적으로는 가정의 주인이요, 생활적인 면에서는 형제적 인연을 갖추는 것이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바랐던 소원이요,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실천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50-39, 71.10.31) 예수님이 가야 했던 길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독생자의 길을 지키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소년시대, 청년시대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쳐 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은 물론, 저 세계에 가서도 영원히 하나님의 독생자 입장에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나야 되는 것이요, 자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야 되는 것이요, 철이 들어 생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환경에서 해야 됩니다. 청년시대에도 그래야 되고, 장년시대에도 그래야 되고, 노년시대에도 그래야 됩니다. 인간으로서 생애노정을 다 마치고 난 후에도 역시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날 때부터 전 생애노정까지 사랑하였지만, 예수님을 사랑했던 인간을 대표한 개인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요셉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어머니 입장에서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지만, 인간을 중심삼은 입장에서 사랑하기가 쉬웠지 천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나면서부터 생애노정을 하나님과 같은 입장에서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칫집에서 그 어머니를 대해서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누구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슬픔을 품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한 단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늘날 세상의 가정적 배경을 두고 보면 요셉은 의붓아버지입니다. 당시 예수님은 의붓아버지 품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를 두고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기쁜 존재이기보다는 도리어 의심받는 존재요, 마음과 심정세계를 엇갈리게 하는 존재로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와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맞지 못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사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트러블이 생기고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천정의 인연을 대표한 아들로 태어났으면 그 천정을 예수님 자신에게만 미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받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자신에게만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횡적으로 아버지면 아버지에게 연결시켜야 되고, 어머니면 어머니에게 완전히 연결시켜야 합니다. 부모에게 사랑을 연결시키고, 형제에게 연결시키고, 친척 교회 이스라엘 나라에까지 그 사랑을 횡적으로 연결시켰더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50-40, 71.10.31) 사랑을 하지도 받지도 못한 예수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과연 전면적으로 인간을 대해 내사랑이 이렇다 해서 그 사랑을 전부 퍼부었던 사람이 있었느냐? 30세에 공생애노정을 나서서 제자들을 찾아다닌 예수님 입장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혹은 열두 제자들이 과연 예수님이 사랑하고 싶은 그리움의 대상이었느냐? 그 제자들은 그 시대에 어떠한 권위를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외적 환경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공생애노정을 거칠 때, 세리의 친구요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더불어 동거하기를 즐겨하고 같이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님이 대하던 무리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에 멸시받던 세리와 어부들이 예수님의 친구 입장이었습니다. 그 일파들은 전부가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12사도들이 존경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이것은 역사적인 과정에서 기독교의 발전과 더불어 기독교 문화권이 발전함에 따라 그 비례적인 가치로 세워진 기준이지 예수님 당시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쳐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 예수님이 지극히 사랑했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저버렸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예수님이 죽어가는 자리에서 함께 죽기를 다짐하는 참다운 제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죽기를 맹세했던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어도 선생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맹세했던 베드로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그런 것을 아는 예수님이 과연 천정의 일념을 다짐하는 자리에서 수제자 베드로 이하 열두 제자들을 사랑할 수 있었겠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되어 있는 참아들로서,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자리에서 인간을 진정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저버린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얼마나 고독했을 것인가? 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사랑을 받기 위함인 동시에 사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랑을 하려니 사랑할 사람이 없고, 사랑을 받으려니 사랑해 줄 사람이 없는 입장에서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고독한 심정은 누구도 몰랐습니다. 그 누구도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산정을 거쳐 죽음의 자리에 임할 그때까지, 어려움을 극복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예수님을 위해서 애절한 심정을 가지고 당신이 가는 길을 나도 가야 되겠다고 몸부림치는 하나의 사랑의 대상이 있었던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그렇게 고독한 길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50-42, 71.10.31) 예수님이 바라시던 사랑의 심정 예수님은 좌우의 강도들과 같이 죽음의 길을 가는 고독에 극한 자리에서 오른편 강도의 몇 마디로 위로를 받고 너는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가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인간을 찾아왔다가 떠나가야 할 지극히 고독한 자리에서 이 땅 위에 인정의 일면을 남기고 가지 않으면 안 될 예수님으로서는 오른편 강도에게라도 그러한 심정적인 내연을 남겨 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시 인간세계를 찾아와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오른편 강도를 중심삼고 동정하는 자리에 섰던 사실을 생각하면 얼마나 비참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 인연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강도,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 오른편 강도에 대해 동정의 마음을 남기고 가려 했던 예수님의 사정은 참으로 비통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찾아온 것은, 4천년 동안 수고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던 것은 오른편 강도 하나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4천년 동안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보내 죽음길을 가려가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고이 품어 키우고,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유대교를 만든 것은 유대교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남아짐으로써 그 나라가 남고, 예수님이 남아짐으로써 그 교단이 남게끔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세워진 것이지, 예수님 이외에 남아질 수 있는 교단이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는 반기를 들고, 그 교단은 죽음길로 내모는 입장이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는 길을 동정하지 않는 외로운 자리에서, 제자마저도 배척하는 심각한 죽음길에서 동정의 한마디를 남긴 사람이 오른편 강도였습니다. 그 오른편 강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심중의 사랑을 대표한 예수님은, 그 나라 전체를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자기가 받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가지고 지금까지 수난길을 가려 나오면서 참고 남아진 무리들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요셉 일족과 사가랴 일족, 자기의 친척 전부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아들로서의 권위를 대신하고, 또 같은 사랑을 받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은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 부모는 물론이요, 자기의 사랑하는 형제들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던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내 형제, 내 부모라고 붙안고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사랑하고 싶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언제 어느 때 예수님이 그러한 사랑을 해봤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못 해본 예수님이었습니다. (50-43, 71.10.31) 부활 직후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더냐 십자가에 돌아가신 3일 후에 부활해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찾아간 예수님의 그 길은 기쁜 길이 아니었습니다. 생전에 이 땅 위에서 심정적 인연을 맺어야 했는데, 그 누구도 하나님이 준비한 자리에서 맺지 못하고, 이 터전을 다 쓸어 버리고 난 이후에 인연을 맺었는데, 그때가 부활 직후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부활한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야 주님인 것을 알고 반가워 예수님을 붙들려 할 때, 예수님이 그리 말라고 거부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데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나서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나서 친척을 사랑하고, 친척을 사랑하고 나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나서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부활한 자리에 그 누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찾아와야 할 사람은 예수님과 지극히 가까운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여야 하고, 제자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활한 예수님 앞에 한 여인만 나타났을 때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간 배반하였던 제자들을 다시 수습하는 자리에 나섰다가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다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게 될 때,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하고 막연하게 대답했습니다. 첫번에는 얼굴을 들고 반겨 대답했지만, 다시 예수님이 심각한 자리에서 쏘아보며 묻게 될 때, 베드로의 마음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당한 자신을 갖고 그 무엇이 맞부딪쳐 오더라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천지가 요동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꺾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베드로가 대답한 것이 아니라, 엇갈린 입장에서 왜 이렇게 물을까 하며, 며칠 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던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즉각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물음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을 때는 얼굴을 들고 대답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세 번씩이나 배반한 녀석이 그렇게 묻는 장본인 앞에서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당신이 알지 않소. 그 무엇이 반대하더라도 다 제거해 버려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고 도리어 스승에 대해서 반문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 묻고 세 번 묻게 될 때, 점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묻는 그 말 속에는 지극히 고독했던 예수님의 생애를 종결짓기 위한 최후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입장으로 와서 그 사랑을 인간에게 몽땅 부어 놓고 가야 할 예수님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비참한 자리에 서게 되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을 내가 안다고 칭찬하는 말로 부활 이후 찬양할 수 있는 사도를 못 가진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라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제자를 가지지 못한 예수님, 제자마저 사랑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50-45, 71.10.31) 십자가란 구원의 도리가 아닌 기독교의 수난의 도리 예수님의 공생애노정은 거룩한 노정이 아니라 비참한 노정이었습니다. 4천년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집히는 노정이요, 유대교의 역사가 깨져 나가는 노정이요, 요셉 가정의 축복의 터전이 폭파되는 노정입니다. 제자들과의 인연이 전부 다 갈래갈래 찢겨져 소망이 없는 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과 연결시켜 놓고 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고 난 후에도 배반했던 제자들을 찾아가 사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배반했던 무리들인 열두 제자를 중심삼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것을 수습했던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찾아왔던 예수님을 죽음길로 몰아냈기 때문에 그런 무리는 벌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남기기 위해서 가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해서 찾아가는 무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가 생겨난 것은 구원의 도리가 아니라 기독교의 수난의 도리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수난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갔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가지 않고는 사랑의 자리를 찾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 사랑의 약속이라도 받겠다고 찾아 나온 것이 지금까지 2천년 기독교 역사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신랑이요, 자신들을 신부라고 믿고 나왔습니다. 사지사판에서 시련의 순교 역사를 거쳐온 선지선열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내 사랑하는 신랑이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퍼부어 주시옵소서 할 수 없습니다. 살아서 못 한 사랑을 죽어서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비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적으로 한번 만나려면 7년 이상의 수난길을 가야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죽을 힘을 다하고 나서 부활의 권한을 찾아 가지고 거기에 동참자가 돼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사랑의 인연을 거쳐서 오른편 강도 이상의 자리에 서지 않고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기 전 자리로 끌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됩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가서 베드로와 같은 자리에 서야만 사랑의 약속을 받고 돌아올 수 있는 것이지 그전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50-49, 71.10.31) 사랑의 도리를 펴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 예수님은 사랑할 수 있는 나라와 교회와 종족과 부모, 형제의 권(圈)을 거느려 제자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루어 놓은 나라의 중심은 교회요, 교회의 중심은 요셉 족속이요, 요셉 족속의 중심은 요셉 가정이요, 요셉 가정의 대표자는 마리아요, 마리아 앞에 나올 수 있는 중심존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으로부터, 마리아로부터, 요셉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동시에 사탄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동생을 낳는 그런 어머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막절이 되어 모두 예루살렘으로 갈 때 예수님도 가지 않으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이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한복음 7장 4절) 하고 비소(鼻笑)했습니다. 이런 껄렁껄렁한 동생들을 낳은 마리아가 잘못입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 나라요, 이스라엘 나라의 중심은 유대교요, 유대교의 중심은 요셉지파입니다. 하늘의 족속을 대표할 수 있는 지파가 요셉 가정입니다. 그 가정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도리를 펴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의 사랑을 받았으니 인간세계 만민에게 횡적으로 적응시킬 수 있는 그 사랑의 진액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의 길을 헤쳐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남길 수 있는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이 그냥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냥 가져가면 예수님은 망합니다. 그 사랑을 남겨야 할 사명을 갖고 이 땅 위에 왔다가 못 남기고 갔으니 다시 와서 남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땅 위에 다시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온다고 합니다. 한을 풀려면 원수들 앞에 실체로 다 풀어 놓아야 원한이 풀립니다. 이 땅 위에 사랑의 인연을 중심삼은 예수님의 신부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부인입니다. 부인이 되기 전에 먼저 상대가 되고 그다음에 부인이 되는 것입니다. (50-54, 71.10.31) 유대교는 신부를 마련해 가지고, 오시는 메시아 앞에 신부 족속, 신부 민족, 신부 교회, 신부 나라를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신부의 가정, 신부의 족속, 신부의 교회, 신부의 나라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부를 위한 나라, 신부를 위한 교회, 신부를 위한 족속, 신부를 위한 가정이기 때문에 신부가 시집가는 날 모두 함께 신랑 앞으로 가야 합니다. 나라의 중심은 교회요, 교회의 중심은 요셉의 씨족이요. 요셉 씨족의 중심은 요셉 가정이요, 요셉 가정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신부를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나라와 교회와 종족과 가정은 전부 신부가 시집가는 날 같이 가야 합니다. 시집가는 날 같이 가야 할 운명에 있는 신부가 아이고 우리집은 이렇게 부자집이고, 우리집은 이러이러한 법을 갖고 살았는데, 신랑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 하고 불평하다가는 쫓겨납니다. 우리가 살던 법은 이런데 이 집 법은 왜 이래 하고 반대하다간 쫓겨나는 것입니다. 신랑이 세우려는 도(道), 신랑이 생활 무대를 갖추려는 환경을 부정하다가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기 전, 재봉춘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 나라는 망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을 죽인 죄로 2천년 동안 나라없이 유리고객하는 민족으로 수많은 민족의 발굽아래 희생당하는 민족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민족이 자주적인 국가 형태를 갖추었다는 것은 때가 된 것을 말합니다. (50-59, 71.10.31) 인간이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목적점 타락한 인간들은 사랑을 잃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인간들 앞에 사랑의 주인공으로서 지상에 다시 천적인 사랑을 복귀하려고 왔던 예수님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영계로 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적인 사랑의 기준을 세워 놓고 육적인 사랑을 복귀해 나가는 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상하가 있고 전후가 있고, 좌우가 있습니다. 그 상(上)을 대신함이 부모요, 하(下)를 대신한 것이 자녀요, 전후를 대신한 것이 부부요, 좌우를 대신한 것이 형제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원칙입니다. 인간은 이 길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전후 관계에 있는 부부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신랑 신부를 제일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신한 신부, 자녀를 대신한 신부, 형제를 대신한 신부를 찾으려 하십니다. 신랑 신부를 보내어 땅 위에 하나의 기준을 세우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은 신부를 중심삼고 상(上)으로는 하나님, 하(下)로는 자녀, 좌우로는 형제가 있어 그 전체가 사위기대의 형태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대표한 상대존재인 신부를 찾아 나온 역사가 2천년 섭리노정입니다. 남자된 자는 여성을 존중해야 하고 여자된 자는 남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여자는 남자를 대할 수 있고, 남자는 여자를 대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아버지의 분체(分體)요, 여자는 어머니의 분체입니다. 분신(分身)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귀과정에서 남녀가 서로를 대할 때 그 얼굴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은 깨어집니다. 상대를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일성(一性)이라 생각하고 남자면 여자, 여자면 남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상호 존중심을 가지고 개개인의 상대적인 성품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들이 걸어야 할 노정입니다. 자식을 대할 때에도 그들이 아무리 자기의 아들이라도 그를 아버지의 분신으로, 딸은 어머니의 분신으로 생각하고, 그 성(性)을 존중할 줄 아는 심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상을 전개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그것을 총합시켜 만물의 주인공으로 인간을 창조했던 그 이념을 마음에 품고서 자식을 붙안고 사랑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타락세계에 있는 그 자식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6천년 동안 슬퍼하던 그 감정에 오냐 너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인류가 고대하고, 만물이 고대하던 본연의 사람이 되라 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참다운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찾는 신부는 하나님의 대신이요, 인류의 대신이요, 천추 만대 후손의 대신 존재라는 감정을 가지고 신부를 찾으셨습니다. 이것이 신랑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신부를 찾는 날에는 하늘과 땅을 품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를 대해서도 마찬가지요, 자녀를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를 대신하고 자녀를 대신할 수 있는 일체이상(一體理想)의 감정을 가지고 실체형(實體形)을 갖춘 신랑 신부로서 상봉하는 날이 와야 합니다. 그날이 와야 천지, 즉 피조세계의 비극적인 모든 것, 또는 하늘과 땅에 막혔던 모든 것이 전후 좌우 상하로 화동(和動)할 수 있습니다. 그 날이 우리 인류가 바라는 날입니다. 그런 사랑의 심정을 갖추고 하늘 땅 앞에 나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4천년을 역사하여 예수님과 성신을 세운 것처럼, 실체신랑의 입장에서 실체신부를 상봉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요, 이러한 실체적인 상대를 찾는 것이 인간이 걸어가는 목적(目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몸에 하나님이 들어와 일체(一體)로 화(和)할 수 있는 이상동산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인간이 찾아 나아가는 최후의 목적점이요, 인간이 찾아야 할 필연적인 운명의 표준점입니다. (5-81, 58.12.21) 4. 하나님을 위한 예수님의 지정 인간 본연의 길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인생의 근본목적을 확실히 모르는 채 자기들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왜 이 땅에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정확히 모르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합니다. 인간은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위하여 태어나, 위하여 살다가, 위하여 죽는 것이 인간 본연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조상 아담 해와는 이러한 인간 본연의 길을 갔어야 했는데, 서로 위하여 사는 상대적인 길을 갔어야 했는데, 그런 길을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러한 타락의 근원을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위하는 생활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은 자기를 중심삼은 생활이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위해 태어나고 자기를 위해 살다가 자기를 위해 죽은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인간은 모를지라도 창조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주적인 생애의 가치, 우주적인 생명의 가치를 찾아세워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천륜을 대하여 인간의 절개를 지켜 천상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고, 인륜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으며, 우주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아 세워야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대해 영원히 변치 않을 수 있는 여러분의 입장을 회복하여, 영원히 위하여 사는 그 한분의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여러분 자체가 전체와 인연을 맺어 그 인연의 실천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미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생의 가치를 찾아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하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러한 우주적인 인간 본연의 절개심을 찾아 세워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고 만인간 앞에 자랑할 수 있으며 피조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한날을 찾아세워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죽어서라도 그 한날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우주적인 운명길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불변의 절개의 기준을 세워 하늘을 대하든, 인류를 대하든, 혹은 피조만물을 대하든 그 가치와 영광을 홀로 나타낼 수 있는 사람, 또 변하려야 변할 수 없고 어기려야 어길 수 없으며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충절을 갖춘 참된 인격자는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역사상에는 하늘이 보내 주고 증거해 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있었지만 이와 같은 참된 인격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이 하나의 인격자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2-336, 57.8.4)
오늘날 인간들은 이제까지 왔다 간 모든 선지선열들의 사명과 믿음을 인계받아 천륜과 인륜 앞에 불변의 모습으로 서겠다는 맹세와 각오를 하고 나선 그 한분을 만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바라는 책임을 수행할 수 없고, 인류역사는 천륜이 바라는 그 하나의 목적지에 가까이 나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을 대신할 수 있고, 온 피조만물을 대신할 수 있는 영원한 절개의 기준을 갖추어 나선 그 하나의 인격자, 우리 인간들이 닮아야 할 인격의 실체, 인류역사를 이끌어 가는 책임자가 인간들 앞에 나타나지 않으면 천륜의 뜻은 완성될 수 없고 이 악한 세상을 복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륜의 원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중심존재가 이 땅에 기필코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종결시대에 나타나겠다고 하신 분이 이 땅에 현현하실 수 없고 하나님을 중심한 이상세계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그 나타나야 할 중심존재는 온 피조만물의 가치와 영광을 대신하여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천적인 이념의 가치를 나타내고 전체와 화동할 수 있는 하나의 핵심적인 힘의 작용체가 되어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섭리해 온 하나님은 섭리역사의 시대시대마다 그러한 중심인물을 이 땅에 보내주었습니다. 인류역사가 이러한 연관적인 역사로 즉, 중심인물들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오늘날 우리가 인계받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최후의 목적은 하나의 세계관을 통하여 귀일의 이념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할것없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336, 57.8.4) 복귀섭리의 귀일점과 참종교 그러면 그러한 섭리역사의 귀일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들이 천륜앞에 영원히 세워질 수 있는, 천륜과 인륜과 우주를 대신한 하나의 인격을 갖추어 불변의 충효의 자세로서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역사의 목적이 그 하나의 귀일점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역사가 어떠한 이념과 어떠한 주의를 중심삼고 어떠한 건설적인 활동을 추진하고 나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표준은 역사적인 표준이요, 인간 본연의 표준이요, 지금까지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소망해 왔던 하나의 표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또한 이제까지 그 하나의 표준을 완성한 중심인물이 자기들의 목전에 나타나기를 소망해왔습니다. 즉 과거나 미래에 그 중심인물이 나타나지 않고 자기들 당대에 나타나서 자기들과 관계를 맺어 자기들도 천륜의 표준을 완성한 존재, 영원 불변의 시조의 영광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 만물만상 앞에 자랑할 수 있기를 바라온 것입니다. 실제로 그 한 존재가 여러분의 목전에 나타나게 될 때, 여러분은 그분을 중심존재로 모실 수 있고 그분의 절개를 본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까지 수천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그 시대를 대표하고 그 시대에 적합한 하나의 중심인물로서 그 시대를 책임지고 그 시대 인물들이 지켜야 할 천륜을 계승시킬 수 있는 충절과 지조의 인격자들을 보냈으나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인류역사는 많은 주의가 하나의 이념으로 통합되면서 귀일의 목표를 향하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은 주의가 하나로 통합되어 나오는 이유와 천륜의 섭리가 출발에서부터 과정을 거쳐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귀일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섭리의 목표가 시대 시대마다 변경되면 섭리의 귀일의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섭리가 영원한 축을 중심삼고 일관되게 하나의 표준을 향하여 전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이념을 통하여 나타나는 주의가 아니요, 이념을 통하여 나타나는 법도도 아니며, 이념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륜 도덕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륜을 초월한 천륜의 법도를 중심으로 역사적인 모든 것과 홀로 투쟁해 나온 하나님의 섭리의 노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륜의 뜻을 대신하여 불변의 지조를 세울 수 있는 천륜의 인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하나님의 섭리의 출발점에서부터 목적지까지 불변의 행로를 거쳐 하나의 귀일의 가치를 찾아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찾아진 그 귀일의 가치가 전체 복귀의 조건으로 세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천륜의 이념을 대표한 인격자로 세워 섭리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사 과정을 살펴보면 민족과 지역을 중심하여 거기에 알맞는 종교가 형성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랜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불변의 인격을 주장하며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가치의 인연을 결부시킬 수 있는 하나의 종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종교는 시대와 환경은 변할지라도 이 일을 위하여 절대적인 기준을 세워 끝날까지 나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종교는 인간이 태어난 목적, 살아야 할 목적 등을 제시하고, 또는 역사와 문화 등의 어떤 면에 있어서도 공헌할 수 있는 역사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종교를 찾으려면, 그 종교가 신앙적인 이념을 실천하기 위하여 땅 위에서 무한히 투쟁해 나온 종교인가를 헤아려 보아야 되겠고,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일관된 하나님의 이념과 사랑을 인간 앞에 나타내기 위하여 시대와 주의는 변할지라도 불변의 모습으로 역경 속에서도 오히려 그것을 수습하는 데 공헌하는 종교인가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종교라면 그 종교를 중심삼고 움직이는 근본 목적은 천륜을 대신하는 것이요, 인륜을 대신하는 것이요, 온 땅 위의 이념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불변의 절개를 갖춘 하나의 실천적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나오기까지에는 예수님을 중심한 이념이 있었고, 그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생활이 있었으며, 또 그 이념을 이루어 놓기 위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에서 부르짖고 있는 이념은 예수님이 출발하던 이념과 맞아야 하고 기독교인들의 실천적인 생활도 예수님이 행하신 실천적인 생활과 맞아야 하며, 기독교인들의 욕망도 예수님의 욕망과 동일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불변의 지조를 대신하고, 그 허락하신 천륜의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되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겠다는 기독교의 이념과 인류를 하나로 귀일시켜야 할 이념을, 불변의 절개를 갖춘 하나의 이념으로서 하나의 주의로서, 하나의 실천적인 대상체로서 천륜 앞에 나타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338, 57.8.4) 예수님의 인격과 지조를 지키신 생활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30여 평생의 인격을 살펴보게 될 때, 예수님은 그 당시에 국한된 일개인의 인격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격은 자기 일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4천년 역사를 대신한 천적인 가치의 인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장하시던 이념은 어떠한 이념이었느냐 하면,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역사적으로 바라왔던 소망의 이념인 동시에 섭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창조주의 이념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피눈물 나는 길을 걸었던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불변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념과 생애를 통하여서 그의 지조와 인격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천륜의 지조를 세우기 위하여 무한한 투쟁도 개의치 않고 싸워 나오신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 예수님이 남기신 사명을 이어받아 2천년을 첨부한 6천년의 역사를 대신하여 불변의 절개심을 갖춘 인격자로서 하늘앞에 나타나야 합니다. 만일 그러한 여러분이 되지 못한다면 천륜을 대신한 이념,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하신 이념, 오늘날 우리가 찾고 있는 이념과는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생애의 목적으로 삼았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전체를 책임지겠다고 천륜 앞에 맹세하고 나선 이후 자신의 안락을 생각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예수님을 만민의 구주로 세울 수 있었던가? 4천년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예수님 한분만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전체의 생애를 바쳤고, 창세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절과 절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영원한 메시아로 세워질 수 있었으며, 모세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온 섭리역사가 예수님의 이념을 통하여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앞두고 무한한 공포의 골고다의 고개를 넘어야 할 끝날에 처한 오늘날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러분의 호소를 무엇으로 그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이 땅에 있는 이념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막혀져 있는 우리의 갈 길을 헤쳐 주는 하나의 중심존재가 필요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나님도 당시의 이념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를 지향하는 수많은 종교를 통하여 섭리의 중심인물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해 왔습니다. 이것이 곧 재림이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하여, 혹은 피조만물을 대하여 상대적인 가치기준에 서 있으면 안 되겠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격과 절대적인 하나님의 불변의 이념과 천적인 생활의 이념을 대신한 중심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처음과 끝이 영원히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입장에 서서, 만물만상 앞에 자신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있게 인도해 주는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한 진리를 찾기 위해 나선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소망, 예수님이 바라던 이념, 예수님의 생활의 표준을 이어받고 거기에 새로운 이념을 가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또한 스스로 그러한 활동무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념적인 기준과 실천적인 기준을 갖추어 모든 면에 통솔할 수 있는 절대적인 위치를 여러분 자신들이 찾아 끝날에 하늘이 찾고자 원하는 인격자, 천상의 전체목적을 대신할 수 있는 참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심정이라도 지닐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이지만 개인으로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도 민족과 국가를 위한 종교로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세계와 인류를 위하는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또 인류역사를 대신할 수 있고 인류의 역사적인 소망을 책임질 수 있는 동시에 인륜과 천륜의 이념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역사와 역사적인 소망과 인륜과 천륜의 이념이 여러분이 생활하는 환경과 인연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불변의 인격자로 소망의 실체로 2천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 앞에 부끄럼 없이 나타나 주여 당신의 소원이 이것이 아니옵니까? 제가 이루어 드리겠나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륜의 원칙을 대신하여 변치 않는 절개를 가지고 하늘 뜻을 위해 책임을 다한 후 하늘이여 받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회고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2-340, 57.8.4) 외로운 환경을 극복하신 예수님의 마음자세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켜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자세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개척해 나오셨는가? 예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인륜을 회복하게 해주고 천륜과 관계를 맺게 해주며, 인류의 역사적인 소망을 이루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어느 누가 느끼려야 느낄 수 없는 비장한 심정을 품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어려운 사정에 처하셨던가? 예수님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당대의 인간들에게 침범해 들어오는 보이지 않는 억만 사탄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그 당시의 인간들이 가로막고, 역사적인 모든 습관성과 시대적인 사조가 가로막는 길을 홀로 개척해 나가야 할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외로운 입장에 처해 있었던 예수님을 위해 누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탄과 싸웠으며, 누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용기를 내어 그 어려운 길을 개척해 나왔던가! 오늘날 여러분은 이러한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대신하여 어느 한 때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 땅위에서 인간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예수님이 바라신 이상을 이 땅 위에서 이루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인격을 대신한 존재로서 타락한 인간을 구해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은 몰라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극히 외롭고 고독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적인 소망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지신 소망은 오직 타락한 인간을 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때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러한 외로운 사정과, 또 외로운 가운데서도 자기 일신을 생각지 않고 인류를 구해내는데 전체적인 소망을 걸었던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까지도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슬픈 고독자의 대왕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 일신만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 예수님이 보고 듣고 느끼고 행한 모든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역사를 대신하고, 인류를 대신하고, 천륜을 대신하여 영원 불변의 하나님의 실존적인 가치를 나타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남모르는 가운데 눈물 흘리며 서글픈 생활을 하셨지만 위대한 뜻을 품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그런 어려운 환경을 다 잊으며 창조주의 이념과 신념을 잃지 않고 사탄과 싸워 나가야 했던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있었음을 감히 헤아리지 못했던 것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또 스스로 탄식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일신을 이한 이념을 세우지 않았고, 천륜을 위한 이념을 세우셨습니다. 그의 이념은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표한 불변의 이념이요, 역사상에 나타났던 수많은 주의나 사상 등의 근본이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이념을 갖고 나선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던가? 예수님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환경을 극복하고 하늘과 인연을 맺었던가?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의 선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는 본연의 인간,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실체요, 무한한 가치적 존재였지만 타락한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어려운 환경을 제압하고 나서야 했습니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슬픔의 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또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하고 사망의 세계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슬픔과 고통과 사망의 원한에 사무쳐 있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원한을 밟고 서서 그 마음에 천륜의 중심을 세워 이것을 붙들고 싸우신 주인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슬픔을 자신의 슬픔으로 느끼기 위해 슬픔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가 안타까워한 것은 자기 일신을 위해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 일신을 통하여 역사적인 민족의 서러움을 탕감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를 대신해서, 섭리를 대신해서, 민족을 대신해서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2-342, 57.8.4)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충성․인내 예수님은 아무리 피흘리는 자리,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리, 공포에 사로잡히는 자리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중심만은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하늘의 이념을 인계받아 지상에 하나의 불변의 길을 개척하는 전체적인 사명을 담당해야 할 예수님이 그러한 환경에서 중심이 변하였던들 승리적인 천륜의 역사는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환경, 소망이 끊어진 입장, 사탄이 참소를 받는 자리에서도 그 모든 것을 이기고 넘어서서 승리적인 천륜의 길을 개척해 나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길을 개척하기 위해 역사상에 없었던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그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죄인들이 악을 대하여 충성하는 이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신의 아홉 가지 열매의 근본입니다.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면 희락과 화평이 나오고, 인내를 통해서는 자비와 양선(良善)이 나오며, 충성의 생활을 하면 온유와 겸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타락권내에 있는 인간들의 모든 악의 요소를 제거시켜 주기 위해서 천적인 사랑과 천적인 인내, 천적인 충성을 강조했습니다. 이것들이 천국의 이념을 달성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이념인데 오늘날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까? 또 인내와 충성심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현현하신 사랑의 화신체였으며, 서러운 골고다의 길에서도 만민의 고통을 염려하신 인내의 주인공이었으며, 역사상의 어느 누구보다 하늘 대해 충성했던 충성의 대표자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 인내심, 충성심은 어디로부터 기원한 것인가? 이것들은 예수님 자신에서 기원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연결시키는 중보의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무지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요, 하나님적인 가치의 실체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역사상에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었던가? 그는 하나님과 뜻을 위하여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자기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수 있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친히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실 때 논리적인 면을 앞세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랑에 대한 정의와 사랑에 대한 논리를 말하지 않았지만 사랑의 실천적인 면에서 역사를 대표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느끼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것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실천적인 사랑은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더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런 내적 심적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인간들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인가? 오늘날 이땅 위의 인간들은 천만번 배반하고, 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불변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인간들이 몰랐기 때문에 인간들은 서로 배반하고 불신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심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이 싸움의 역사를 해온 것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악을 대하여 무한히 참아 나온 것은 선의 생활이념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인간 하나를 세워 놓기 위한 변할 수 없는 천리법도의 기준을 세워 놓고 6천년을 참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참뜻을 이루기 위하여 당신과 같은 사람,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인간이 하나님 대해 충성하기 전에 하나님이 인간 대하여 먼저 충성하셨으며, 무한히 인내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륜을 중심삼고 운행하는 하나님과 그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무한히 인간 대하여 충성했던 그 사정을 체휼해야 하겠고, 이 뜻을 세우기 위해 무한히 희생해 온 하나님의 심정, 또 미래의 이념을 세우기 위해 무한히 당신을 초월한 하나님의 심정, 무한히 주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체휼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여러분은 자기의 어떠한 주의 주장, 자기의 어떠한 관념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한한 사랑을 주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참아 나온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는 누구였던가? 그런 자는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외로울 때도 그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4천년 동안 슬퍼하고, 4천년 동안 싸우며 참아 나오던 하나님인 것을 알고 그 인내심의 가치의 결과를 나타냄으로써 사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인격자는 어디 있었던가? 역시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통해 인간의 갈 길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소망을 짊어지고, 하나님의 인내를 대신하여 홀로 천륜의 길을 가야 하는 예수님은 비탄에 사무쳤습니다. (2-344, 57.8.4)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끝날의 성도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든 충절의 심정을 느낀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하나님의 충절의 심정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탕자의 입장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창조의 이념으로 세워 놓았던 하나님의 천륜의 전체적인 가치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고, 천주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가치가 자신 하나의 가치와 비교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인내심과 하나님의 충성을 느꼈던 예수님,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며 참아서 찾아진 소망의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던 예수님을 본받아, 그의 사랑과 충성과 인내심을 인계받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한 사람을 찾기 원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하늘의 사랑을 대표한 분이요, 하늘의 충성을 대표한 역사적인 분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즉, 천륜의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천상의 모든 싸움이 땅 위로 옮겨졌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가신 그 남겨진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예수님은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려야 오실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땅과 인연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믿어 주지 않는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죽음의 길을 넘어야 할 입장에서 자기 하나를 찾기 위해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하나님을 생각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서러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여기에 가중된 하나님의 서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신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비웃는 사탄과 원수들을 대하여 오히려 그들을 비웃을 수 있었고, 죽음을 초월함으로써 사탄이 할 수 없는 우주적인 주인의 길을 개척하였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탄세계에 없는 인내와 사랑과 충성심을 계승하여, 사탄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즉 자기를 죽인 원수를 대해 복빌어 주는 일을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중생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하나님이 세운 천륜의 원칙을 아는 이상, 천만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천만번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나가신 예수님의 이런 심정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충절과 인내심을 본받아 그의 계승자가 되고 이 땅에 남겨진 그의 유업을 계승하여 실천하는 부활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나님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변함 없는 심정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사랑을 같이 번식해 나가며, 사탄과의 싸움에서 예수님을 대신해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예수님의 형제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애달프게 찾고자 하였던 사람입니다. 또 끝날에 처한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과 인내심과 충성심을 본받아 예수님의 대신자로서, 예수님의 이념을 평면적으로 완성할 뿐만 아니라 입체적으로도 완성해야 하며 역사적인 모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끝날에 처한 성도들의 사명입니다. (2-347, 57.8.4) 5.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과 심장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아담과 해와가 타락한 그날부터 하나님의 소망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성전으로 완성한 사람, 하나님과 일치되는 심정과 심장을 가진 사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대신한 하나님의 실체 성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한 역사적인 섭리노정을 대신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성전인 동시에, 4천년 동안 섭리했던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대신한 분으로서 실체적인 산 가슴을 갖고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줄 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었고, 하나님의 사정을 느낄 줄 아는 예수님의 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하늘을 동맥삼고 인간들을 정맥삼아 하늘이 동하면 예수님도 동하고 인간이 정하면 예수님도 정하는 일체의 관계를 맺어야 했고, 그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는 예수 그리스도의 내적 심정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예수님의 외적 심장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년의 준비기간에 남이 모르는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창조의 이념을 이루어 영광을 누리려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피조만물은 주인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으므로 이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아시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예수님도 쓸쓸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30년 준비기간을 거치신 예수님이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여 택해 세운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뜻을 받들고 나타나 새로운 복음을 전하게 될 때, 그 가슴은 말할 수 없는 사명감에 벅찼을 것입니다. 30년 동안의 슬픈 생애를 청산하고 하늘의 서러움과 하늘의 슬픔을 가로막아 잃어버린 에덴의 주인공을 다시 회복시켜야 할 사명을 짊어진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뛰는 심장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택함받은 선민 앞에 나타나 하나님 대신 새로운 말씀을 전하게 될 때, 뜻을 따라나오던 이스라엘, 섭리의 뜻을 대신하여 부름받은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이념의 전체를 대신한 분으로, 자기들의 소망의 실체로서, 자기들의 영광 자체로 모셔드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벅찬 가슴을 갖고 나타난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대신하여 세웠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써 서러움을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선민이 예수님 앞에 뜻을 대하여 나타나지 못하게 될 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고 서러워하던 심정을 다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한히 슬프셨을 것입니다. 분개심도 컸을 것입니다. 하늘 앞에 호소하고 저주하며 그들을 치라고 명령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심정을 다 떨쳐버리고 뛰는 가슴을, 뛰는 심장을 억눌러 가면서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참던 그 심정을 생각하시며 서러운 심정을 품었던 것입니다.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소망을 두시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단을 쌓아 놓아야 할 세례 요한이나 아브라함 이후 40여대 동안 선민의 혈족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인도되어 온 요셉 가정도 사라지고, 뜻을 받들어 자기를 잉태하고, 낳은 후에 30년동안 길러오던 마리아와 형제들과 종족들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 )고 하신 예수님의 심정, 하늘의 뜻을 붙들고 외로운 신세로써 싸워나가야 했던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뛰는 심장 속에 하나님의 수고가 컸던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의 안타까움과 분개심은 컸을 것이고, 택한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크면 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은 찢어지는 듯한 원한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3-299, 58.1.26) 예수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자 누구였나 때는 지나갔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뛰는 심장의 맥박이 오늘날 여러분의 심장과 혈관, 동맥과 정맥을 통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적인 심장의 맥박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책임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예수님은 2천년 동안 고대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기다려 왔습니다. 발 붙일 곳이 없는 사정에 처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을 뒤에 두고, 하늘을 신봉한다는 유대교를 뒤에 두고, 30여 생애를 걸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천신만고 수고를 하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도 뒤에 두고, 택함받은 아브라함의 혈족으로 내려오던 요셉 가정도 뒤에 두고, 하늘을 등지고 가정을 등지고 교단을 등지고 돌아서 광야로 나가실 때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어떠했을 것인가? 돌아서서 가시는 그 발걸음에 원한이 있었다면 하늘을 대신하여 사무친 심정을 가지고 민족을 원망하고, 분풀이를 한다면 저주의 불길을 내려 달라고 심판의 호소를 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민족의 갈 길을 염려하고, 배반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염려하면서 그들을 다시 품기 위하여 광야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민족을 뒤에 두고 광야에 나가 40일간 금식했습니다. 이처럼 광야에 나가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40일간 외로이 헤매게 된 것을 생각하면 분함이 사무칠 수 있었으나 4천년 동안 참아 나온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고, 그래도 이 민족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신 예수님은 이들에게 제2의 생의 기대(基臺)를 조성해 주기 위하여 광야에서 먹을 것을 먹지 않고 40일간 하나님 앞에 민족적인 제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간 중에 먹을 것을 먹지 못해 몸이 마를대로 말랐습니다. 40일간 금식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조여들었고 심장은 쇠하여 들어갔지만, 40일 금식 고개를 넘은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하고, 먹지 못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심장이 죽어 들어가는 예수님을 염려하여 울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힘없는 몸이었지만 천륜의 새로운 이념이 막혀버린 것을 터치기 위한 싸움의 노정에서 끓어오르는 마음을 품고 계셨던 예수님, 하나님의 외로운 심정을 생각하며 사무치는 마음을 품으셨던 예수님에게 친구는 나타나지 않고 사탄이 나타나 시험했습니다. 이런 사정에 처하면서도 자신의 사명을 완수해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탄이 나타나 예수님의 마음과 몸까지 파괴시키기 위해 3대시험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선조들을 대신하여 새로이 결심하고 나선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우리는 느껴야 합니다. 결국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자신을 배척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또 자신을 반대하고 몰아낸 유대교를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광야에 나가 하나님과 담판지은 후에 이 죄악의 도성을 복귀시키기 위한 싸움에 불타는 충성심을 갖고 결연히 나섰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예수님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섰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을 대신하여 죽을지라도 자기 일신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각하고 자기를 시험하던 사탄을 대하여, 자기를 배척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제2의 공세를 펴고 나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뛰는 심장을 느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니까 그런 사정을 참을 수 있었고, 그런 고난과 비난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니까 더 참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남보다 더 예민하고, 남보다 더 극한 심정에 사무치셨기 때문에 누구도 갖지 못한 비장한 심정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가 잃어버린 도성을 다시 찾기 위해 나섰을 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슬픈 생활과 헐벗는 생활과 굶주리는 생활을 다 거쳐나온 입장에 섰을지라도 땅 위에서는 예수님의 사정에 동참하는 동지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나의 친구요, 하나님만이 나의 아버지라는 심정을 가지셨습니다. (3-301, 58.1.26)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민족이 배반하고 교단이 비난하고, 친척과 혈족이 외면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없어질지라도 오직 예수님의 안위와 소망과 심정을 채워주는 것은 하나님은 나와 같이 계시다는 사실, 하나님은 내 것이라는 하나의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다시 하늘을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일으키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심정을 만 인류에게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광야에 나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자신을 길러주고 무한한 기쁨으로 찾아오는 분인 줄 알았는데,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자 언제나 자신을 키워주고 자신을 품어주고, 자신을 위로해 주던 하나님의 어려운 사정과 슬픈 심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상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 자신과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로 원수들 앞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40일 금식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싸움의 노정을 출발한 예수님, 민족을 대신하여 4천년의 하나님의 원한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물리치기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예수님은 예수님 일신만으로 나선 것이 아니고, 4천년 동안 그리던 모습,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었고, 예수님의 행동도 예수님 자신만의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한 것이었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도 하나님의 행동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기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어 자신의 심장을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스라엘 동리를 찾아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민족이 반대할 때에는 외로운 심정을 갖고 광야에 나갔지만 이제는 몰려오는 시련과 핍박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부딪쳐 승부를 짓겠다는 각오와 결심을 갖고 나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다시 찾아드리기 위해 나선 예수님, 몸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후회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에 불타면 불탈수록 더욱 뛰는 심장을 억누를 수 없었던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사정을 알아 주셨습니다. (3-303, 58.1.26) 3년 공생애노정을 걷던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예수님이 3년 공생애노정을 걷기 시작하신 초기는 제자들로 사도들을 택해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하게 될 때에도, 4천년 동안 아담을 잃어버리고 서러워한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실체성전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체성전이 되게 인도하겠다는 마음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반대하는 이스라엘 민족도 사탄의 종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체로 나타나야 할 하나님의 아들딸인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반대하는 그들을 보며 서러워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자기를 위해 사신 노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셨으며, 제자들과 인류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뛰는 심장은 하나님을 대신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서러움이 예수님의 서러움이요, 이스라엘 민족의 서러움이 예수님의 서러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사도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민족과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심정에 사무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을 자기의 친자식 이상으로 소중히 여겼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노정은 자녀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심정을 갖고 참사랑의 생활을 하신 노정입니다. 죄악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였고, 민족과 사도들의 심정을 대신하였던 예수님인 것을 안 사람이 없었고, 예수님의 사정을 안 사람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3-304, 58.1.26)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하신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애달펐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따르는 세 제자들은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하지 못하고 각자 따로따로 행동했습니다. 예수님만을 통해서 가야 하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호소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위하는 심정으로 호소했고, 제자들을 염려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음을 모르고 피곤에 지쳐 잠들었던 것입니다. 생사의 결판을 짓는 마당에서 예수님의 심정은 하늘과 땅이 녹아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친아들딸같이 길러준 사랑하는 세 제자는 예수님의 심정을 모르고 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불같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세 번씩이나 나와 제자들을 깨우시던 예수님의 딱한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며 느끼던 서러움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앞에 제2 민족으로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고 유대교가 반대하여 다시 3년 공생애노정을 거쳤지만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한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느낀 하나님의 서러움과 예수님이 30년 사생애기간과 3년 공생애기간에 느끼셨던 서러움, 나아가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시던 그 애달픈 심정을 느끼면서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이 없었고, 하나님의 심정을 느낀 사람이 없었습니다. 3년 공생애노정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하던 제자들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걸어가신 일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목적이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33년의 생애를 걷고 보니 남은 것은 예수님 혼자였습니다. 40일 금식을 끝마칠 때도 안타까운 심정과 서러운 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님에게 원수 사탄이 나타났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인간 세상을 대해 모든 것을 믿을 수 없고, 어느 곳에도 의지할 수 없고, 거처를 정할 수 없는 안타까운 사정에 처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수 사탄이 나타나 시험하니 예수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대민족과 인류를 염려하시기에 초조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역사적인 사명을 대신하여 탕감의 노정을 다시 걸어야 할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대신할 수 있고, 대신 싸워 드릴 수 있으며, 예수님의 뛰는 심장을 대신하여 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참아들딸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3-306, 58.1.26)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심정과 심장 소망의 조건을 전부 끊고 나선 광야 노정에서 예수님은 사탄과 싸워 승리하셨지만, 예수님에게는 실체 제물을 드려야 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으나, 택함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교단을 잃어버리시고 혈혈단신 불쌍하게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또 이 사정에서 원망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요, 저주하여야 할 12사도였으나, 채찍으로 몰아내고, 고함치고 아우성치는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며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필사적으로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감정이 있었다면 억울했을 것입니다. 저주와 원망이 사무치고 통분한 마음이 가슴에 꽉 찼지만 이 민족을, 이 세상을 다시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저주의 입을 막고 서러운 심정을 돌이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을 대신하여 이 민족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하면, 후대의 인간에 대한 구원섭리가 다 파괴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구원의 한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억울함으로 나타내고, 하나님 대신한 자체로서 저주하고 원망하는 입장이었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다 끊어졌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 시간으로 마지막이 되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고개를 넘고서라도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저주하고 원망해야 할 민족을 대하여, 복수해야 할 원수들을 대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장 34절) 하고 애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2 구원섭리의 뜻을 인계받아 출발한 안타깝고 심각한 순간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제2 구원의 실천자로 세울 수 있었고, 인간들에게 부활의 은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처한 예수님은 원수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염려하시고, 후대의 자손들을 염려하시며 자기의 피살이 찢어지는 것을 잊어버리고, 하늘의 역사적인 서러운 심정을 대신 짊어지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원한과 역사적인 구원을 위한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하늘이여! 탕감하시옵소서!라고 호소하셨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하나의 위안의 장소도 찾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만민을 위하여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외로운 고아와 같이, 몰리는 방랑아와 같이 외로운 길을 걷던 예수님의 생활이 종국에는 갈보리 산상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하늘땅을 뒤집어 엎는 듯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세 시간 동안 천지가 어두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잃어버린 아담을 찾기 위해 후아담으로 세웠던 예수님이었으나 골고다의 죽음길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막힌 심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서러움이 내 서러움보다 크고 하나님의 분함이 내 분함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아픔이 나의 아픔보다도 크다는 것과, 반대하는 민족이지만 다시 찾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리어 내 죽음은 경하나이다 하며 순종의 제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이런 순종과 효성의 심정에 벅찬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위로하는 사람, 예수님의 시체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셔 드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제멋대로 취급하던 로마병정들은 나중에는 창을 들고 예수님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이렇게 심장을 찔린 예수님의 괴로움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의 피가 다 빠진 심장이로되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겠다는 잔인한 원수들 앞에 선 예수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합니다. (3-307, 58.1.26)
끝날의 성도에 대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소원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증거해 나오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자기의 심장과 같이 느끼고 예수님의 뜻을 대신 인계받을 자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죽은지 3일만에 무덤을 헤치고 부활하여 택한 제1 이스라엘을 잃어버리고, 제2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복음 운동을 전개하여 찾은 사람들이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신자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신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를 복귀하기 위한 제2 이스라엘이요, 제2의 선민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 앞에, 인류 앞에 이 하나의 소망과 구원의 뜻이 남아 있으므로 이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예수님도 하나님도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4천년 역사를 대신하여 나타나야 했는데 깨진 이스라엘을 오늘날 우리는 복귀한 이스라엘로, 예수님을 반대하던 이스라엘을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스라엘로 복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해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은 깨졌으나 오늘날 제2 이스라엘인 우리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억울함을 해원해 드릴 수 있어야 다시 주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끝날의 성도들에게 바라는 최대의 요구는 다시 오시는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애달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그 심장의 내정을 체휼하는 아들딸입니다. 그러한 아들딸들이 이 땅 위에 나와야만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한을 풀 수 있고, 하나님의 한도 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한까지 풀어드려야 인간들은 기쁨의 한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도 배척하던 제자들을 만났지만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한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붙들려 할 때에도 붙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기쁨의 한 날이요, 기쁨의 한 순간이었으나 역사적인 슬픔을 이어온 그 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예수님 앞에 기쁨의 한 조건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부활한 후에 예수님을 붙들던 마리아의 심정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통찰하고 그의 심정까지 알아서, 하나의 주인공의 자격을 갖추고 하늘과 땅을 어깨에 짊어진 승리자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떠한 인간 세상의 사탄이라도 밟고 하늘 앞에 나설 수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벨의 피가 역사를 대신하여 호소한다 했기 때문에 이것을 탕감해야 할 예수님은 피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린 것으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이 피를 거두어 다시 우리 몸 마음에 지녀 그 산 피로 사람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천적인 심정과 심장을 소유한 자격자들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배척하던 자들을 대하여 다시 한 번 용서의 마음을 품으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하며, 죽든지 살든지 하나가 되어 죽음과 삶의 길을 가겠다고 각오하고 나섰던 제자들이 배척하고 나설 때, 거기에서 예수님이 다시 아량으로 그들을 대하여 당신이 대신 죽음의 고비를 당할지라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하였던 그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또 배척했던 제자들을 다 뒤에 두고 부활하여 기쁜 마음을 갖고 홀로 승천하여야 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반대했던 사도들을 찾았던 심정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3-309, 58.1.26) 역사적인 해원의 출발점 역사적인 해원은 예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하여 기쁜 심정이 되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날 땅 위에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붙들고 슬퍼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택한 제2 이스라엘적 입장에 있는, 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게 될 때, 택한 이스라엘을 다시 수습하여 하나님의 제단을 쌓고 산 제물을 드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애달픈 사정이 역사적인 원한으로 맺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널려 있는 제2 이스라엘을 동원하여 이들의 보호자가 되고, 이들을 대신하여 싸우는 대표자가 되고, 이들을 대신하여 사탄 대해 싸우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정을 체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심정을 체휼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나섰던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시던 것과 같은 사탄의 시험이나 가이사의 심판이나 로마 병정의 창질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책임을 완수하는 하나의 동지가 있어야 하며,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나의 가정과 종족․사회․국가․세계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교단을 밟고 올라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단결해야 될 때가 왔습니다. 말씀을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소유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소유해야 했었는데, 예수님이 실체 통과의 문이었는데도 이 문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고, 나아가 신․구약 말씀으로 통과할 시대가 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실체 통과시대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 에덴의 원한의 조건이 되었지만 실체를 잃어버린 것이 더 큰 원한이었습니다. 누가 말씀을 딛고 올라가 실체 통과의 문을 개방시킬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이런 문이 없으니 오늘날 우리들이 이 문의 재료인 돌이 되어 이 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즉 수억의 사람이 읽고 있는 성경말씀보다도 이 말씀을 통과한 한 아들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 아들은 말씀을 머리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심장과 몸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머리로 아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말씀을 가슴으로 알고 몸으로 알아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 혼자서도 사탄 대해서 싸울 수 있는 실체제물을 요구하는 때가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30여 생애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풀기 위해 구약의 말씀을 박차더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되어, 어느 누구도 갈라 놓을 수 없는 이 하나의 문을 이 땅 위에 만들어 놓기 위해 수고한 생애였고, 또 그런 자격을 갖춘 한사람을 찾기 위한 싸움의 노정이었습니다. 이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되자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라는 원한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이 원한을, 하나님의 한을 풀기 위해 예수님이 몸부림치시며 수고하셨지만 이 일을 성취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6천년 역사의 종말에 처한 오늘, 그 섭리를 인계받아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하나님과 예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이 땅 위의 신부는 누구일 것인가? 그 신부는 신․구약을 알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0여년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숨은 슬픔을 품고 남모르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40일 동안 먹지도 않고 사탄과 싸운 예수님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고 맹세하고도 배반한 제자들을 다시 품기 위해 나섰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꿈에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것이로되 예수님은 부활 후에 제자들을 다시 찾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이거늘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대신해 교단을 조성해 나오던 사두개교인과 바리새교인들이 전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았는데, 오늘날 여러분은 그런 교단을 밟고 올라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311, 58.1.26)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리는 참아들딸이 되자 여러분은 아버지의 말씀을 대신해 그런 교단을 밟고 올라선 실체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심장과 심장이 연한 예수님의 제물을 하나님이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된 산 실체의 제물이 이 민족을 대신한 교단 위에 나타나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민족과 인류는 잠자고 있습니다. 세계가 하나의 심장의 움직임에 의해 하나의 형태를 갖추어 나왔고, 하늘의 심정과 예수님의 피살을 통하여 역사가 흘러나왔는데 이제 열매 맺을 수 있는 하나의 실체가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안타까운 심정과 뛰는 심장을 소유하는 상대자가 되어야만 제3 이스라엘로 남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심정을 품고 제물되셨고, 제2 이스라엘을 만들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각오를 가져야만 제3 이스라엘의 선조가 될 수 있으며 지상천국 즉, 에덴 동산의 본연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실체를 갖추어 역사적인 모든 고통을 거치고, 시대적인 원한을 벗어난 모습으로 하늘을 찾아 나서야 하나님의 아들딸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가 하나님의 4천년 역사의 심정을 대신하여 실체의 제물로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6천년 동안 복귀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이 동하면 같이 동하고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 6천년 역사를 회고하며 서러워하고, 불신했던 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서러워하고, 미래에 제3 이스라엘의 안식의 동산을 세워야 할 사명을 품고 염려하면서 누가 가든 아니 가든 나 홀로 이 책임을 지겠나이다 하고 하늘 앞에 맹세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사수할 수 있는, 후계자의 책임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제 신․구약의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신․구약 말씀보다도 예수님의 심정이 무엇이고, 예수님의 심장이 어떠한가, 즉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알고 외적인 심장의 동함을 알아서 하늘이 동하면 여러분도 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 하늘의 동과 정에 같이 움직이고, 천륜을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승리의 제물로 여러분을 바쳐드려야만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한을 푸실 것이요, 하나님도 이 땅 위에서 한을 풀 수 있고, 만민 만상 모두가 하나님 앞에 그를 따라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연히 이런 입장에 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인 운명을 대신하여 필연적인 노정의 제단을 인계받았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여러분 자신이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쌓고 넘어가던 서러움의 장벽을 밟고 올라서서 겟세마네동산으로부터 골고다의 산정까지 올라가 열두 사도를 한데 묶는 승리의 제단을 쌓고, 사탄을 굴복시켜 아버지여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승리의 아들딸들이 되어야만 주님 앞에 신부의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다. (3-313, 58.1.26) 6. 산을 찾아가시는 예수님의 슬픈 심정 예수님과 산 예수님께서 중대한 일에 봉착할 때마다 발걸음을 옮겨 찾아가신 곳은 높은 산이었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광야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올라갔던 한 산이 있었고, 유대백성들의 불신으로 최후의 십자가를 지는 문제를 하늘 앞에 결정짓기 위하여 찾아간 변화산상이 있었으며, 죽음의 골고다의 길을 넘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기도를 했던 겟세마네동산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산을 찾아가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어떻게 움직였으며, 그가 느끼던 슬픔과 서러움의 심정이 어떠했으며,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났던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2천년 전 광야로 나가던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가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을 대하여 싸움의 노정을 가던 예수님의 애타던 심정을 알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굶주리고 난 후 사탄의 3대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하늘에 대한 염려와 인류에 대한 염려와 피조 만물에 대한 염려를 그 일신에 지니고 전후 좌우를 명백히 갈라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책임을 진 예수님에게 그 장면은 하늘과 사탄, 하늘 일과 사탄의 일을 판가리해내야 할 중대하고도 비장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역시 예수님은 사탄에게 이끌려 산상봉에서 시험을 당했습니다. 광야노정의 3대 시험에서 예수님이 사탄을 굴복시키고 최후의 승리를 한 곳도 높은 산 꼭대기였습니다. 택함받은 세례 요한과 그 일당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민족에게 배반을 당하고 찾아가는 광야노정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 위에 어느 누구도 체휼하지 못한 슬픈 심정을 지닌 노정이었습니다. (5-193, 59.1.25) 산을 찾은 선조들의 충절을 회상하며 각오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늘의 독생자요, 4천년 역사를 해결할 자요, 그 시대와 천추만대의 후대 앞에 하늘이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표적으로 나타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백성도 뒤로 하고, 교단도 저버리고, 택한 세례 요한도 요셉 가정도 남겨 두고 친구도 없이 홀로 광야로 나가던 서글픈 심정을 우리는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광야를 걷던 예수님은 옛날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쫓겨난 후 에덴동산을 잃어버림으로써 그들의 후손 역시 그 동산을 찾아 헤매던 장면을 그 마음에 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당한 아담 이후 슬픔의 동산에서 살아온 역사적인 선조들을 회상하게 될 때, 예수님은 산이라는 명사와 함께 산에 대해서 심각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김을 받았던 것을 쫓김 받지 않았던 입장으로 원상복귀하기 위하여 1천6백년 이후에 나타난 노아가 12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아라랏산 기슭에서 모든 역경을 참으면서 방주를 만들던 절개에 찬 모습을, 그의 절개심을 회상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가 그와 같은 생애를 보낸 것은, 오늘의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노아가 이와 같이 산정에 올라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수고했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이 제물헌제에 실수한 이후 이삭 번제의 명령을 받고 산상을 향하던 모습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라의 만득자(晩得子)인 이삭을 속여서 모리아 산상으로 데리고 가던 아브라함의 비장한 심정을 회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도 물론 하나님을 위함이요, 오실 메시아를 위함이었습니다. 또 모세는 바로 궁중 40년과 미디안 광야 40년의 수고의 노정을 거쳤습니다. 이렇게 서글픈 심정을 품고 나오던 모세 앞에 호렙산 기슭의 불붙은 가시덤불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서 새로운 약속을 하던 장면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을 호렙산에서 만나 불변의 인연을 맺는 장면, 원수인 사탄을 이 우주에서 기필코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을 대하는 모세의 충절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모세가 인연 맺는 그 장면을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 땅에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은 모세는 80노객이요, 광야에서 시달린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심정에 사무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표준을 갖고 있던 모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60만 대중을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황무지인 광야로 끌고 나온 입장에서, 끝까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야 할 책임을 짊어진 모세가 그들이 잘못되거나 그릇된 길로 가지 않을까 염려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시내산이었습니다. 시내산정에서 모세는 40주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내려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그러한 모세의 사정을 연상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위함이요,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기 위함이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선민을 세워 찾고자 하는 복귀된 나라를 찾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사탄편인 바알의 제사장들과 대결하던 장면은 모두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회상을 하며 걷던 예수님은 선조들이 산정에 올라가서 판가리할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찾기 위하여 하늘 앞에 기도한 사실이 모두가 하나님을 위함이요, 나아가서는 자기를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인 인연을 회상하며 비장한 심정을 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심중의 세계를 회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5-194, 59.1.25)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 역사적인 탕감조건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심을 하고 나선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하면서 옛날 선조들이 걸어나온 슬픔의 노정을 자기 일신으로 탕감복귀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꼈습니다. 40일 금식 후 3대 시험 과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가던 예수님은 4천년 역사 전체의 노정을 마음으로 염려하면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사탄을 굴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 하는 비장한 심정을 갖고 높은 산꼭대기를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노정에서 사탄에게 이끌려가던 발걸음은 자기를 위한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개인 복귀와 환경 복귀와 세계 복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그 심중에 품고 이러한 상징적인 조건의 과정을 거쳐서 산정(山頂)에 오르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일대 시험이 벌어질 것을 각오하고 역사적인 새로운 선조로서 전통을 세우고 하늘의 심정을 상속받겠다는 마음을 품고, 사탄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렇게 뜻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장한 심정을 품고 나선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떠한 역사적인 선조보다도 확고한 각오를 하고서 사탄을 그 장중에 쥐고 굴복시키고야 말겠다는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광야로 나가셨고 산정에 홀로 섰던 예수님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노정을 회상할 때 자기 일신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함을 느낀 동시에, 그 당시 택한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게 될 때도 역사적인 책임을 느끼며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5-194, 59.1.25) 사탄을 대한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세례 요한을 세워서 하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닦게 하였습니다.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터를 닦게 하기 위해 미리 세례 요한을 보냈는데, 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축복하고 4천년 동안 끌고 나온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나타날 수 있는 백성과 택한 자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예수님은 낙망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과 세워진 무리를 생각하게 될 때는 슬픔에 북받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자리를 만든 동기와 기원을 더듬어 살피고, 그 당시까지의 역사적인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이런 곡절을 있게 한 존재가 바로 사탄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기필코 사탄에게 승리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갖고 사탄의 시험을 대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태복음 4장 8~9절)고 말했으나,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사탄을 배척했습니다. 그리하여 사탄 앞에 하나의 승리의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슬픔과 시대적인 슬픔에 연결시킬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획득해서 역사적인 인연의 발판이 되어 있는 택함받은 이스라엘과 세워졌던 유대교를 향하여 다시 찾아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님의 사정을 생각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광야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찾아갔으나 그들은 모두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는 길과 머무는 곳곳마다 환영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핍박과 반대와 조롱으로 대했습니다. 첫 번에 배척을 받고 광야노정에 나간 것도 섭섭하고 분한데, 사탄을 대하여 승리한 조건을 갖고 다시 백성을 찾아 나선 예수님 앞에 반기를 들고 나서는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비통하고 서러운 심정에 사무쳤습니다. (5-197, 59.1.25) 또다시 산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외로운 처지 예수님은 오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홀로 외로운 자리를 찾아 들어가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외로울 때 찾아가신 곳은 고요한 산중이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날부터 예수님은 하고 싶은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계획과 실천 방법까지 다 갖고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을 실천할 수가 없었습니다. 민족을 장중(掌中)에 넣고, 민족을 앞장세워 세계 개척을 위하여 새로운 행군을 해야 할 하늘이 보낸 메시아가 그렇게도 불쌍하였습니다. (10-59, 60.7.3) 핍박받는 어지러운 환경에서도 민족과 교단을 돌이키기 위하여 산정에서 기도하였고, 3년 공생애노정을 통하여 사탄과 싸웠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끝에 가서는 자기가 죽어서라도 기필코 무지한 백성을 각성시켜야 되겠다는 심정으로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는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해도 성과가 거두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난 후에는, 자기가 죽어 제물로 피와 살을 뿌려서라도 역사적인 인연과 시대적인 인연을 맺고 있는 그들, 하늘의 심정에 연하여 있는 그 무리를 구하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품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품고 찾아간 곳은 훌륭한 궁전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받아줄 제자의 집도 아니고, 그 나라의 백성의 집도 아니요, 당시 유대교인들의 집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간 곳이 어디였느냐 하면 변화산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 나간 것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겠다는 기준을 가지고 민족을 붙안기 위함이었지만, 변화산상으로 찾아간 것은 가졌던 결심을 다 버리고 자신의 몸을 민족 앞에 나누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시간 그렇게 산을 오르던 예수님의 심정과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을 자신의 애달픔으로 체휼할 수 있고, 또 그런 심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하늘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과 민족을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 그리고 교단을 대한 예수님의 서러움까지도 체휼할 수 있을 것입니다. (5-198, 59.1.25) 변화산상에 오르게 된 전후 사정과 예수님의 비장한 심정 변화산에 올라갈 때에는 세 제자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기에 민족을 대표해서 택한 제자 입장이었으나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 앞에 아무런 도움의 조건도 세워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광야를 찾아나갈 때는 그래도 천사가 와서 수종을 들어주었는데, 민족을 위하여 싸우고 민족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며 변화산을 오를 때는 민족을 대표하여 따르던 세 제자마저 예수님의 수종을 들지 못했습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슬픔으로 시작되어 슬픔으로 끝난 예수님의 생애는 비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내게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들여 원하시는 뜻을 따라나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역사적인 어떠한 선조들보다 굳은 지조와 충의와 성심과 노력을 기울여 3년 공생애노정을 걸었으나 민족에게 몰리고 교단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친척과 제자들 어느 누구 한 사람 자신의 편이 되어 주지 않는 가운데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외로운 자리에서 슬픔을 느끼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4천년 동안 수고해 나온 역사의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하여,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심정을 고하기에 민망스러운 심정이었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있는 예수님에게 민족에 대한 원망이나 교단에 대한 원망, 혹은 타락된 아담 해와에 대한 원망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여지가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옛날 선조들은 슬플 때 하늘의 위로를 받았으나 예수님은 슬픈 자리에서도 슬프다고 기도할 수 없는 자신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눈물이 먼저 예수님의 무릎을 적셨을 것입니다. 그 모습은 하늘땅 위에 죄인 중의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4천년 동안 수고의 역사를 거듭하여 섭리한 하나님 앞에, 승리의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패배의 일로에서 서글픈 사정을 품고 변화산상에 홀로 나타나 하늘을 대해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된 예수님은 차마 입을 열어 기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과 사정이 딱하였기에 하나님은 엘리야와 모세를 보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의논하게 했습니다. 제자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슬픔에 잠길 것을 안 예수님은 백성을 위하여, 또 후대를 위하여 하늘이 염려할 것을 아시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놓고 슬퍼하셨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서라도 소망이 없고 앞길이 가로막힌 환경에 처해 있는 유대백성들을 살려야 할 것을 느낀 예수님은 엘리야가 아바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라고 호소하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참으로 비통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선조들이 하늘을 대하여 나오는 데 있어서 그 행한 일들이 이렇듯 슬픈 역사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이 자기들이 죄의 종족임을 알고 예수님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 대신 민족의 서러움을 염려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고 예수님 대신 기도해 주기를 원하였으나 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걸어나온 역사노정의 실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을 예고 받은 예수님은 그 죽음의 한날을 남몰래 준비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날이 점점 촉박해지고 사태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자신이 십자가에 나가기 전에 먼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종결지어야겠다는 심각한 심정을 가졌습니다. 그러한 심정이 그의 몸마음에 어리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최후의 길을 가야 할 구세주의 사명을 짊어진 자신임을 예수님은 알았기 때문에 죽음의 길을 거친 후의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죽음으로 역사적인 서러움과 시대적인 서러움, 미래의 서러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를 넘고 난 후에까지도 저끄러진 채 남아 있을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은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예수님을 알아준 사람은 땅 위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사정을 알아주는 제자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아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신만이 아는 서글픈 심정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비운의 장벽과 검은 구름이 앞을 가로막는 환경, 죽음 앞에 몰리는 비참한 환경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이 슬프다면 이 땅 위의 어느 누구보다 슬펐을 것이요, 분하고 억울하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했을 것입니다. (5-199, 59.1.25)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비장한 기도 예수님은 역사를 대신하고 시대를 대신하여, 민족과 교단을 위하여 왔으나 그가 나아가는 길은 너무도 슬펐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슬픔이 자신의 슬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슬픔이 역사적인 슬픔으로 시대적인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또 미래의 슬픔으로 연결될 것을 알았기에 몸둘 바를 모르고 초조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찾아가신 곳이 겟세마네동산이었습니다. 만민의 구세주요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최후의 슬픔을 토로한 곳은 제자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믿고 있는 유대교단도 아니요, 유대나라의 궁중도 아니었습니다. 깊은 밤에 하나님과 의논하여 모든 것을 결정짓기 위하여 올라가신 곳은 아무도 가지 않는 겟세마네동산이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이 새도록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고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분하다면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서럽다면 말할 수 없이 서러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4천년 역사가 하루에 넘어가고, 수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루 아침에 망하고, 4천년 섭리의 터전이 한 시간에 무너지고, 세워졌던 유대교단이 한 시간에 무너질 것을 생각하게 되면, 그가 흘린 피땀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땀이요, 그가 흘린 피눈물은 역사의 거리를 연결시킨 피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백성들은 이러한 내용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선생님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따르겠다고 맹세는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그 비통한 심정을 인계받고, 그 피눈물나는 비통한 사정과 인연을 맺지 못했습니다. 땅 위에는 그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일들은 오직 예수님이 홀로 행하고 가셨지, 이 땅 위의 인간 중에는 그러한 심정을 인계받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놓고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하늘을 대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장 36절)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호소는 하늘땅이 터져나가는 한마디요, 사망세계가 권세를 갖고 들어서려는 것을 저지하려는 비장한 한마디였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가 기독교 신자들에게 죽은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시대나 어느 세기를 지나도 이 애달프고 피어린 최후의 호소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오! 하늘이여 하고 부르짖던 예수님의 심정에 여러분의 심정이 같이 동하는 한날을 소망하여 하늘은 다시 섭리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끝날의 성도들은 갈보리산상과 겟세마네동산에서 호소하시던 예수님의 그 역사적이고 비장한 심정을 이어받아야겠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잠을 자던 예수님의 세 제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각성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던 것과 같은 심정을 품고 아바 아버지시여!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내어 주지 마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무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 그와 같은 심정으로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 대신 제가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하나의 신자가 없었고 하나의 민족이 없었습니다. (5-201, 59.1.25) 예수님의 피와 눈물의 터전이 되었던 산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애노정은 산꼭대기에서 벌어진 그러한 일과 같은 비장한 일의 연속이었지 기쁜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울 적마다 감람산 골짜기를 찾아들었고, 슬픈 적마다 고요한 삼림을 동무삼아 무언의 설교를 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를 붙들고 그의 깊은 심중의 내용을 호소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자리를 갖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대할 적마다 슬픔과 서러움을 갖고 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소원은, 보이는 모든 산천이 하나님의 눈물과 인연 맺어져 있고 선조들의 애달픈 심정과 인연지어진 터라는 것을 회상하면서 이 모든 산천이 슬픔과 눈물의 산천이 되지 말고, 기쁨과 영광의 제단을 꾸며 승리의 송영을 드리는 산천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산을 바라보며 우리의 선조들이 과거에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모든 슬픔의 역사를 이 산에서 종결지으려 한 것을 알고, 그 산들이 선조들이 사탄세계를 대해 승리해 줄 것을 바랐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산들은 예수님이 비장한 장면 장면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기도한 곳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산에서 승리와 영광의 제단을 쌓고 아바 아버지여,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누리시옵소서라고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산을 바라보게 될 때, 예수님의 피와 눈물의 터가 되었던 산임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의 풀포기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이며, 하나의 바위를 붙들고도 호소하셨을 것입니다. 그 바위 그 풀은 밤새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연하여 그 심정 가운데 잠길 수 있었으나 그 당시 인간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슬픔의 인류가 된 것을 자탄하고, 만물을 보기가 부끄럽고 산을 보기가 부끄러운 자신들임을 깨달아 끝날에 이 땅 위에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는 예수님을 산으로 쫓아버리던 유대민족들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가정에서부터 모시고, 사회에서 모시고, 국가에서 모셔야 합니다. 들이나 산 어디서든지, 심지어는 산꼭대기에서까지도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늘 앞에 기쁨의 존재로, 영광의 존재로 주님을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한마디는 슬픔의 말이 아니고 기쁨과 사랑이 어린 말씀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해 드릴 책임이 있습니다. 산아! 산천아! 하며 슬픔의 역사를 탄식하던 하나님의 눈물을 받은 산들, 혹은 이 땅에 대해서, 피조 만물에 대해서, 역사노정에 대해서, 이 시대에 대해서 어느 하나의 존재물도 하늘은 서글픈 눈물을 통하여 바라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존재물에게도 슬픈 심정으로 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산정에서부터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고 생활환경에서도 승리의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날을 소망하신 예수님입니다. 산을 찾아가셔서 승리의 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역사적인 심정이요, 예수님의 시대적인 걸음이요, 또한 예수님의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오늘의 광야노정에서 예수님 대신 사탄과 싸워야 되겠고, 변화산상에서 싸우시던 예수님 대신 민족과 국가와 세계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줄 알아야 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죽음을 앞에 놓고 역사적인 인연을 맺으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갖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슴 터지는 벅찬 심정을 가지고 이 땅과의 인연을 맺고자 하는 하늘의 심정을 인계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존재를 세워 놓지 않으면 예수님이 걸으신 산정(山頂)의 수고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5-203, 59.1.25) 7. 복귀를 위한 예수님의 생애관 한 인간의 생의 가치 타락한 인류는 아직까지 세계가 입증해 줄 수 있고, 땅이 입증해 줄 수 있으며, 하늘이 입증해 줄 수 있는 영원한 생(生)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에게는 개인의 생의 가치를 찾고, 개인을 거쳐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찾고, 세계를 넘어 천적인 영원한 생의 가치를 찾아야 할 복귀의 사명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섭리의 뜻을 세워놓고 전체의 생의 가치를 찾아 나온 목적은 여러분 자체나 세계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되어 하나님이 기쁠 수 있는 동시에 세계가 기쁠 수 있고, 세계가 기쁠 수 있는 동시에 개인이 기쁠 수 있는 생애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늘의 구원섭리도 끝날 것이요, 사탄을 중심한 세계적인 인륜도 끝날 것이며, 개인적인 도덕관념도 끝나게 됩니다. 타락한 인류에게는 이러한 생애노정을 개척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개체적인 자기로만 보기 쉽지만 자체 가운데는 창조의 전체이념(全體理念)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먼저 세계적인 생의 가치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개인적인 생의 가치가 성립됩니다. 이러한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생활해 나가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자체를 분석하여 자신이 요구하는 천성의 생명을 대신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야 되고, 역사적인 모든 이념을 하나로 귀일시켜 세계적인 생을 완결지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의 생활적인 면에서 영원한 생이나 세계적인 생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생의 발판을 세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지금의 생이 세계적인 생을 거쳐 영원한 생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주적인 생을 세워야 할 인간조상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6천년간 수고해 왔는데, 하나님의 이런 수고의 역사를 복귀섭리역사라고 합니다. 이런 천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은 4천년 수고의 노정을 거친 후에 그 전체적인 생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한 분을 보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9, 57.1.6)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을 품으려 한 하나님 예수님의 섭리적 생애라 하면 여기에는 전체성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내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는 4천년 역사를 경과했고,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새로운 섭리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지상의 인간들과 자유롭게 대할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천사들을 심부름시켜 섭리해 나오던 구약시대를 지나 땅 위에 직접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실체를 가진 그리스도를 세워 놓으심으로써,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품으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왔다 가신 후 지금까지 2천년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그로 인해 오늘날 여러분이 아버지의 은사권내에 들어옴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실 수 있고 성신의 보호를 입어 은사를 받을 수 있는 시간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4천년 동안 인간을 직접 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천사를 심부름시켜 인간을 찾아온 아버지의 수고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영계와 육계를 갈라놓고 섭리하던 하나님이 인간 앞에 직접적이고 평면적인 섭리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왔다 간지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 그 은사 앞에 택함을 받으려면, 예수님 오기 전 4천년 동안 영적인 면에서 인간을 찾아온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셔서 자신의 생활과 생애와 영생의 목표를 걸어놓고, 여러분 하나를 그의 생활에 동반시켰고, 그의 생애에 동반시켰고, 그의 영생에 동반시켜 이끌어 나가려고 하시는 섭리의 뜻을 대하고 있는 역사적인 과정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뜻을 30여 평생의 생활목적으로 또 전체적인 생애의 목적으로 세워서 이것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2천년 역사를 거쳐 여러분의 선조들을 이끌어 나왔습니다. 또 앞으로도 여러분의 후손을 이끌고 나가야 할 섭리적인 책임이 예수님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 섭리의 뜻을 대할 때, 예수님 자신만이 기뻐하는 생활, 예수님 자신만이 기뻐할 수 있는 생애, 예수 자신만이 영생을 걸어 놓고 안일의 한날을 맞으실 수 없습니다. (3-183, 57.10.27) 예수님의 생활의 표준 예수 그리스도는 한 몸이로되 그 몸은 영원하고 무한한 세계적인 생을 대신하였고, 영원한 개인의 생을 대신하셨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갖고 오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현실을 토대로 영원한 소망을 나타내야 했으며, 하늘땅 위에 영원히 실존할 수 있는 생의 가치를 증거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띠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개인의 생을 위하여 생활하시지 않았고, 세계의 생을 위하여 생활하셨으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을 위하여 한날 한날을 싸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활의 표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바라보고 느끼고, 생활하신 모두는 자기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개인적인 동시에 세계를 대표했고, 세계를 대표한 동시에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예수님 일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세계를 위한 말씀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대신한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을 느끼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의 내용을 깨달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을 성취해 드리지 못합니다. (2-11, 57.1.6) 예수님이 세우신 사랑의 기준 예수님은 이런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랑을 내세웠습니다. 즉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하늘땅에 완결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복음을 전하셨는데 그 복음의 중심이 바로 사랑입니다. 개인이 자기 일신의 생을 영원한 가치의 기준에 결부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남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남을 자기 이상 사랑하는 것으로 생의 가치기준을 세우셨습니다. 천적인 전체의 생의 가치를 대표해 나타나신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 개체의 구원을 위해서는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을 소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나를 위한 사랑보다도 동료를 위한 사랑, 동료를 위한 사랑보다도 세계를 위한 사랑, 세계를 위한 사랑보다도 하나님과 영계에 있는 천천만 성도들까지 위하는 사랑을 갖고 나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개체의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한 개체적인 관념을 가지고, 혹은 개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사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친구를 사랑하실 때도 단지 그 친구관계에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이면에는 세계를 대신해 사랑한다는 관념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랑한다는 마음을 갖고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일대일 관계에서의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개인을 사랑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돼 있고, 우주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으며, 개인적인 사랑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체험해야만 예수님의 생의 가치를 올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를 위하여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애의 표준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면서 친구를 사랑할 때도 그 이면에는 세계를 위하여 사랑한다는 관념을 지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세계적인 구원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동시에 전체를 위해서도 죽을 수 있는 희생과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단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때 하늘을 향하여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의 고개를 넘어서 아버지의 뜻대로만 살기를 원하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들에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노정에는 놀라운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주적인 생명을 복귀하기 위한 사명을 지니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해 내세운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인간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위하고, 영원한 세계 즉 영계에 있는 영인들까지도 위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전체 복귀의 생을 감당해야 할 우리가 한날 한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예수님의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에 부딪치든지 그날 그 시간에 느끼는 감정으로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우주적인 전체의 성품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대신하겠다는 각오와 결심으로 모든 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러한 한날 한날의 생활을 거쳐야만 세계적인 생을 완결지을 수 있고, 영원한 생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의 하루하루의 생활이 여러분 자체에만 미치는 순간적인 생명의 가치를 갖고 있다면 영원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생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려 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계속 이루어져 나왔습니다. (2-11, 57.1.6) 하나님과 인간의 거리를 좁히시려던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땅 위에 태어나기 전까지는 인간과 하나님은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있는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사탄 세상의 모든 조건을 밟고, 즉 공중권세를 잡은 어두운 사탄의 세력을 뚫고 하나님에게 찾아 올라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야만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대할 수 있었던 것이 구약시대의 섭리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과 수고만 가지고는 도저히 당신을 찾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안 하나님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입체적인 입장에서 공중권세를 뚫고 올라가야만 할 입장에 있던 인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며 서러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타락한 인간에게 평면적인 입장에서 상대적인 가치를 갖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한 중심을 대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4천년 섭리역사에서 사탄에 대한 일대 승리의 조건이요, 자랑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불신함으로써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신 목적을 다 성취하지 못한 연고로 아직까지 우리는 하늘을 향해 기도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원래 인간의 시선을 평면으로 보고 움직일 수 있게 창조되었는데 마음은 하늘을 향해야 될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평면권내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성취해야 하나님이 기뻐하고 예수님과 성신이 기뻐할 수 있고, 땅 위에 있는 만민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때가 이루어져야만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으나 인간의 불신으로 인해 돌아가셨으므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맞아들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오셔서 그 섭리적인 생애의 첫출발로서 하늘이 섭리의 뜻을 따라 생활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 생활의 중심은 사람들을 끌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동시에 인간을 참소하는 사탄과 대결하여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양면적인 입장에서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계에서는 사탄으로부터 참소받고 보이는 육계에서는 모든 불신의 도배들로부터 반대받는 입장에서 예수님 홀로 4천년 동안 섭리한 하나님의 서러움을 대신하여 서러워하고, 천륜의 슬픔을 대신하여 슬퍼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갖은 그분의 시선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였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에 따라 택함받은 유대교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 완수를 위해 협조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유대교단은 예수님 앞에 일체 나타나지 않고 전부가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필연적인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진정한 심정을 헤아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사탄의 세력을 막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육적으로 날아오는 모든 불신의 화살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싸움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 크고 더 먼 하나님의 뜻과 소망을 바라보고 거기에 자신의 몸 마음을 맞추어야 할 입장에 있던 그리스도의 생애의 출발을 여러분이 같은 입장에서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출발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 어떻게 해야 사탄을 굴복시키며, 어떻게 해야 타락성을 갖고 있는 만민을 복귀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는데, 예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것입니다. (3-185, 57.10.27) 예수님이 순종의 도리를 가르치신 목적 이 땅 위에서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이 누려왔고, 하나님이 주관해야 할 인간들을 자기들이 주관해 왔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사탄의 압박 밑에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먼저 반대하는 사람보다도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반대케 하는 영적인 사탄과 대결해야 했습니다. 이런 싸움에서부터 기독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의 본질과 대결하기 위하여 나타난 예수님은 그의 생활권내에서 먼저 사탄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그의 생활권내에서 실천적인 행동을 제시한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말씀도 그렇거니와 그의 마음도 그렇고 그의 생활도 그렇고 그의 생애도 그렇고 그의 죽음까지도 사탄이 하지 못하는 조건을 찾아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천리 법도가 엄연히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법도를 중심삼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천리 법도에 의해 사탄을 분립하셨던 것입니다. 사탄의 본질은 교만과 혈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으로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못나서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로 높을 수 있고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나, 예수님은 이것을 다 버리고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사탄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와 대결하여 싸우려 했으나 사탄에게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할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끝까지 온유겸손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본질인 교만과 혈기에 반대되는 온유겸손을 갖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엄연히 천리법도가 있는 것을 아는 사탄이기 때문에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온유와 겸손을 들고 나서게 되면 사탄세계도 자연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아시는 예수님은 사탄이 하지 못한, 사탄이 할 수 없는 온유겸손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온유겸손한 입장에 서야 중심을 통해 역사하는 하나님에게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순종(順從)과 복종(服從)을 보여 주셨습니다. 순종은 응할 수 있는 환경에서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복종은 응할 수 없는 환경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신하는 인간들에게 이런 순종과 복종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사탄의 본질, 사탄의 모든 생활적인 요소를 가로막기 위한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중심삼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사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뒤를 좇으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이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순종하여 하늘을 따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뜻을 모르고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하나님 뜻 앞에 불의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은 순종의 길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기실 하늘의 영광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만민과 만물, 사탄까지도 주관하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받아야 할 입장이었으나 그 반대의 입장에 서셨습니다. 사탄이 당신 앞에 순종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도록 만들기 위해, 즉 이런 사탄의 모든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무한한 희생과 봉사의 제물을 드리는 노정을 걸으셨습니다. 사탄세계는 사람을 대하든지 혹은 피조물을 대하든지 무한히 이용하고 착취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그 반대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탄이 하지 못하는 생활을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하셨기 때문에, 즉 온유겸손하고 순종하고 복종하며, 희생과 봉사의 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사탄도 그러한 면에서는 굴복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온유와 겸손, 순종과 복종, 희생과 봉사에 비추어 보고 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권내에서 실천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아직까지 사탄의 종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187, 57.10.27)
사탄과 동반하여 갈 수 없는 하늘 길 지금까지 여러분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자기를 중심삼은 혈기와 교만으로 사는 사람이 아직도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루빨리 그런 입장에서 벗어나야 하겠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놓은 기준,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준인 온유와 겸손, 순종과 복종, 희생과 봉사로 혈기에 의해 하늘을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싸워나가겠다는 내적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뜻에 대립하여 뜻을 반역하는 입장에 선 것이 사탄이요, 이런 것이 사탄의 생활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뜻에 반발하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이 환경에 꽉 차 있고, 그 환경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사탄의 세력이 자기를 중심삼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끝날에는 사탄이 가는 길과 하늘이 가는 길, 두 갈래의 길이 남아 있습니다. 사탄이 가는 길과 하늘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하늘이 가는 길은 사탄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즉 사탄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대하여 순종복종하고, 뜻을 온유겸손하게 실천하고, 섭리의 뜻 앞에서 전인류를 대신하여 희생봉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한과 슬픔이 사탄세계에 맺혀져 있으나 희생과 봉사를 각오하고서 이 길을 해결하려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선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요, 온유겸손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요, 순종과 복종함에 있어서 왕 중의 왕이며, 희생봉사하는데 있어서 왕 중의 왕이었습니다. 땅 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온유할 줄 모르고, 순종할 줄 모르며, 희생 봉사하는 제물의 길을 걸을 줄 모릅니다. 예수님은 4천년 역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고, 수많은 성현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하지 못하던 것, 즉 하늘 앞에 최고의 온유의 기준, 최고의 순종의 기준, 최고의 제물의 기준을 세워놓았던 연고로 사탄세계의 모든 것을 밟고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같이 사탄을 굴복시키는 피나는 노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오셔서 온유겸손하고 순종굴복하고 희생봉사하는 생활을 하셨는데, 하나님이 이땅을 대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오며 수고한 그 마음과 동일한 심정을 지니고 그러한 생활을 해 나왔기 때문에 사탄이 근본적으로 굴복해야 했고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역사적인 출발점이 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 하는 길을 가로막고 도리어 자기에게로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고, 스스로 대항하려고 하며, 스스로 인간들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런 사탄이지만 하나님과 예수님께 나아가면 감히 머리를 들려야 들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조건이 예수님의 생활권내에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에게서 사탄이 분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이런 역사적인 출발을 이룩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생하면 나도 영생하고 하나님이 불변하면 나도 불변하고 하나님이 무한 자비하면 나도 무한 자비하겠다는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하나될 수 있었기에 사탄 대한 싸움의 노정에서 승리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 오늘까지 이 사탄세계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내적 심정이 연결되는 말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어떠한 곡절, 어떤 사무친 내용이 있는가를 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3-189, 57.10.27) 예수님의 사명을 상속받아 뜻을 완결해야 할 우리 예수님은 우주적인 생을 복귀해야 할 사명을 지니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봉사와 개인적인 희생과 개인적인 고난의 노정을 거치셨습니다.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도 당대에만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복귀의 사명이 끝날 때까지 전 인류의 생명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갖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역사가 경과한 오늘날까지 우주적인 생의 복귀의 사명을 책임져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만으로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하자, 성신을 보내 역사하셨으며, 영계에 있는 수많은 영인들까지 동원해서 그 사명을 완결시켜 나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복귀하기 위해 오셨지만 그 일을 완결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 일을 이루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날까지도 이 땅 위에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다. 그 책임은 예수님 자체만으로는 완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 그 사명을 완결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그 사명을 책임지고 나서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일대(一代)에 그 사명을 종결해야 할 책임을 느낀다면, 일생을 통하여 기필코 그 사명을 이루겠다는 굳은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한날 한날의 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세우기 위하여 섭리역사과정에서 수고하고 계신 사실을 체휼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세워 나왔던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자로서 수고해 오신 그리스도의 뜻이 여러분을 통하여 완결되지 못합니다. 먼저 여러분 자체를 하늘 앞에 맹세의 조건물로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계를 위하여, 하늘땅을 위하여,혹은 뭇 백성을 위하여 단 한번 세운 맹세의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통하여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생을 바쳐 수고해 나온 기준을 일시에 넘어섰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앞으로 어느 한때 하늘 앞에나 세계 앞에, 또는 개인 앞에 드려지는 하나의 맹세의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확실히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느 곳에 가든지, 어떠한 곳에 처하여 어떤 일을 하든지 그날 그 시간에 처한 환경에서 언제나 맹세의 조건물로 서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는 하나님 앞에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찾아 드려야 할 사명이 남아 있으니, 여러분은 자신을 맹세의 조건물로 세워 예수님의 생과 관계맺을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체를 세계적인 조건물로 세우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수고해 온 수많은 선지자들을 대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맹세의 제물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개체 개체가 그러한 맹세의 조건을 조성해야 여러분은 하나에서부터 둘이 되고, 넷이 되고 세계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이 이루어질 때 생의 가치를 찾기 위한 세계적인 고난이 종결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찾기 위한 세계적인 고난을 종결시킬 수 있는 기준이 여러분 개체에서 형성되어 교회․사회․국가․세계에까지 확대돼야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워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려는 섭리의 뜻이 종결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러한 섭리의 뜻을 대하여 나온 여러분 자체를 생각해 볼 때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생각해 볼 때,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대신하는 개인과 가정이 나와서 사회․국가․세계까지 연결시킨 기준이 조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에서부터 전체, 즉 세계 인류 전체가 그 권내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기준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은 종결되지 않습니다. (2-15, 57.1.6) 끝날의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적 참된 개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웠으나 하나님의 뜻이 지금까지 가정․사회․국가․세계로 확대되어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서러움이 우주적인 서러움으로 남고, 또 하나님의 서러움, 천주적인 서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들은 그러한 서러움을 풀고, 영원한 하늘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신을 통해서 하늘과 땅의 전체의 섭리의 가치를 증거하고, 하늘땅의 전체의 사랑을 나타내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은 천륜을 표준한 생애노정을 거쳐 개인적인 생활에서도 세계적인 생활과 우주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갖춰 나가야 됩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갖춰져 나간다면 그 뜻을 다 실천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적인 면에서는 계속해서 전체와 관계를 맺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천국은 너희 마음속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주적인 생의 가치를 지니고 우주적인 사랑과 진리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간 개개인에게 부여한 모든 가치를 완결시켜서 그것이 그들 각자의 근본이 되어야 천국이 이뤄진다는 뜻에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권에 속한 개인들이 단합해 세계적인 생명운동을 일으키고, 영계에 있는 수많은 선영인들까지 전체와 관계를 맺게 해줄 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시려던 뜻이 종결됩니다. 우주적인 복귀의 사명을 띠고 오신 예수님을 따르던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의 사명을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義)보다도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더 소망하고 그것을 생의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끝날에 처한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떠한 외적인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개인의 안일을 위하거나 개인이 잘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잘사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이 바뀔 때는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일이 막혀버리게 됩니다. 반면 인간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세계를 위하여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문제는 여러분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개인을 위해 희생하면 개인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요, 세계를 위하여 희생하면 세계적인 주인공이 될 것이요, 하늘땅을 위하여 희생하여 승리적인 생애 기준을 세운다면 하늘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들이 당신의 인격을 닮아 생명적인 가치를 찾아 세우도록 지금까지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개체를 찾아 세워 이런 생의 복귀운동을 일으키는 것은 인류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 또 현실의 세계적인 면에서 볼 때, 혹은 미래의 영원한 소망적인 면에서 볼 때,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책임도 말할 수 없이 큽니다. 여러분이 먹고 사는 모든 생활의 표준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체적인 생을 복귀하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하겠고, 하나님이 찾으려는 전체 생명의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셨던 사랑을 중심하여 실천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나서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우주적인 생을 복귀하려는 뜻이 여러분을 통하여 완결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한 개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고, 더욱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2-17, 57.1.6) 8. 예수님이 가신 뜻길 예수님은 어떤 분으로 오셨나 하나님의 소망의 실존체로 이 땅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은 4천년 동안의 기나긴 세월을 간곡한 심정과 애절한 심정으로 수많은 선지와 수많은 선조들을 세워 역사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섭리해 온 단 하나의 목적은 소망의 실체인 예수님을 세워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의 기점에서 하늘의 소원과 역사적인 선조들의 바람과 전인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한순간을 바라 하늘은 역사해 왔고 우리의 선조들은 싸워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볼 때 그는 둘도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요, 이 세계 만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날 때 하나님이 나타날 수 있고, 예수님이 기뻐할 때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으며, 예수님이 영광을 누릴 때 하늘의 영광으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가 아니면 하늘의 보좌도, 영계도, 지상의 어떤 만물도 그 가치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체의 중심되는 가치적 존재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러한 천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보게 될 때도,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들의 선조를 자랑하고 자기들의 역사를 자랑하고 자기들이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그는 그때까지 이스라엘의 역사상에 나타났던 어떠한 의인보다도 귀한 존재였습니다. 그를 버리고는 자기 생명도 취할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교단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자기 민족도 세울 수 없고, 그를 버리고는 이스라엘이 소망하던 나라도 세울 수 없는, 없어서는 안 될 하늘과 땅의 중심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분을 인간들에게 보낸 것은 탄식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이 분을 맞이하여 낙망하고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이 분을 통하여 기뻐하기 위하여 보냈고, 땅의 인간들이 이 분을 맞이하여 기뻐하도록 하기 위한 중심존재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거일동은 하늘의 영광을 그릴 수 있어야 했고, 그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은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영광의 감정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애는 그러한 생애가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맞이한 그날부터 누구보다도 그를 영광스러운 자리에 모시고, 누구보다도 그를 위하고, 누구보다도 그를 칭송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은 민족대로 떠나버리니 예수님은 민족을 잃어버린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민족을 붙들기 위해 예수님을 보냈지만 그 예수님을 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나니 하늘의 기쁨도 잃어버리게 되었고 천국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6-165, 59.4.26) 뜻을 염려하는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개척의 노정을 출발할 때 간곡한 심정으로 외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민족이 누구보다도 간곡한 마음으로 메시아의 실체를 구해야 할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구할 줄 모르고, 누구보다도 애달픈 심정으로 찾아야 할 유대교단들이 찾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문이 열리기를 바라며 두드려야 할 유대교인들이 두드릴 줄 모르고 있는 실정을 바라보시며 사셨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면서도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실체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민족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머지않아 하늘의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민족과 관계를 맺어 천적인 뜻을 이루어야만 하는 사정을 알기에 한 날, 한 시간, 한 초도 뜻을 생각하지 않은 때가 없었습니다. 뜻의 실천자로 오신 예수님의 심정은 마리아가 뜻에 대해 염려하던 심정 이상의 심정이었습니다. 요셉 가정에서 생계를 위해 요셉의 일을 묵묵히 협조하던 예수님의 심정은 민족을 바라보면 볼수록, 민족에 대한 신망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뜻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새로이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러한 30여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뜻을 염려하는 간곡한 심정을 품고 남이 알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늘을 위하여 민족을 대신하여 책임을 다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의 생활이었습니다. 민족을 대신하여 누구보다도 간곡한 심정으로 구하기에 수고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6-170, 59.4.26)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철이 든 후부터는 먹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먹었고, 사는 것도 민족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가 무엇보다도 고심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신 예수님의 30여년의 생애를 알아 예수님을 붙들고 구한 자가 없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자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붙들고 그의 심중을 두드린 자가 그 당시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불쌍한 예수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늘을 위하여 민족 대신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찾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고, 민족을 대신하여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위로는 하늘을 대신하여,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선 반면, 아래로는 땅을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여 간곡히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간곡한 심정을 품고 찾으면서 민족의 심정을 두드려 민족의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위하여 30여년을 준비하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늘이시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시여!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요, 나를 보내신 것은 민족의 생명을 아버지와 인연맺기 위함임을 아오니, 민족의 실수와 민족의 부족함을 용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불신하고 배반하는 민족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그 민족이 자고 있을 때에도 향락을 누리고 있을 때에도 편히 자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즐거워하시지 못하고 민족을 붙들고 하늘과 인연 맺어주기 위해 싸우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 자신만이 알고 계셨습니다. 민족 중의 어느 한 사람 예수님의 심정을 위안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환경과는 동떨어졌던 예수님의 심정은 뜻의 때를 고대함에 반하여 말할 수 없이 초조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30여년이 지나 뜻의 실천노정을 각오하고 나서던 예수님의 심정은 비장하다면 말할 수 없이 비장할 것이요, 형용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며, 인간으로서는 체휼할 수 없는 애달픈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뜻을 실천하려는 공생애노정을 염려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6-171, 59.4.26) 40일 금식과 사탄 시험을 당해야만 했던 예수님의 슬픈 심정 예수님은 이렇게 하늘을 대신하여 만민의 구세주로서 만민을 구원하러 오셨으나 구원을 받아야 할 민족 가운데에 예수님의 심중을 헤아려 나타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의 심중은커녕 그의 30년 수고의 노정도 알지 못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고 민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던 세례 요한 일당마저도 반대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슬픈 심정으로 민족을 바라보면서 세례 요한에 대해 한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세례 요한마저 예수님을 외면하고 나서게 될 때 예수님에게는 더 큰 슬픔이 가중되었습니다. 민족 앞에 하늘의 복음을 갖고 나타나야 할 때가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민족이 간 곳 없고, 민족 앞에 하늘이 세운 세례 요한도 간 곳 없어져, 예수님은 인간 앞에 나타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노정을 거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있었던 40일 금식기간이 영광스러운 기간이요, 예수님께 반드시 있어야 할 기간으로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기간을 거치게 된 것은 예수님 앞에 민족이 사라진 연고요, 세례 요한 일파가 사라진 연고였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동방의 세 박사와 안나, 시몬, 그리고 뜻을 품고 예수님을 잉태하였던 요셉가정의 마리아가 예수님이 실천노정을 나설 때 그를 알아 주지 못하였던 연고이기도 했습니다. 땅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이요, 만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오신 하늘의 황태자이신 예수님이요, 또한 만민의 구주이신 예수님이 이처럼 불쌍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4천년 역사를 종결짓고 예수님이 새로 꾸며야 할 하늘 제단은 영광의 제단이요, 기쁨의 제단이요, 승리의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제단을 꾸미기 위해 나선 예수님은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굶주리는 예수님이 되었고, 사탄의 시험을 받는 예수님이 되었습니다. 사탄에게 시험받는 그 장면은 온 인류가 가장 비통하게 여겨야 할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주리신 후 사탄에게 농락당하고, 그 사탄이 제시한 여러 조건의 시험을 당하는 슬픔의 시간은 원래 민족이 겪어야 할 시련기간이 되어야 했는데, 도리어 예수님의 슬픔으로 인계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택함받은 선민임을 자랑하는 그 민족을 끊어버리고, 그 민족을 원망하고 저주하여야 할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굶주린 몸을 일으켜 하늘의 심정을 붙들고 민족을 위해 사탄과 싸우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처한 자리는 이스라엘 민족도 모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각오하고 하늘 앞에 나타나실 때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떤 슬픔의 자리를 거쳐서라도 자신이 온 목적과 자신이 품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편단심이 변할 수 없었습니다. 본래 아버지의 뜻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구하려는 것임을 아시는 예수님이고 그 뜻을 존중하는 예수님이었던 연고로 굶주림과 헐벗음도, 부딪쳐오는 어떠한 핍박과 시험도, 그가 30여년 동안 뜻을 고대하고 바라던 마음을 깨뜨리려야 깨뜨릴 수 없었습니다. 뜻을 품고 나타날 적마다 예수님은 하늘을 대신하여 자기가 겪게 되는 서글픔과 하늘이 당하는 서글픔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뜻을 대하여 더 한층 굳은 결심을 했기에 배반한 민족과 배반한 무리를 다시 찾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찾아주기를 바라셨으나 그렇게 해주지 않음으로써 반대로 죽고 난 후에 그들을 찾아주어야 했습니다. 민족이 예수님을 모셔 주지 못해 살아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야 할 예수님이 죽어서 구원의 역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실체 예수님의 심정을 통하여 두드려야 하고 구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데, 죽고 난 뒤에 두드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세요, 전세계 인류의 신세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잘못 때문입니다. (6-172, 59.4.26) 하나님의 슬픔과 분함과 원통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슬픔과 원통함은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리에서 구해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이요, 살아 있는 자리에서 찾아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이요, 또 살아 있는 자리에서 두드려야 할 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자리에서 하늘의 비밀을 밝힐 수 있게 그 문을 개봉해야 할 환경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고 보니 구세주 되시는 예수님은 이미 영계에 가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예수님을 보낸 인간은 가신 예수님을 대하여 구해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할 신세가 되었고, 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시 두드려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처한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가시기 전에 구할 줄 알고, 가시기 전에 찾을 줄 알고, 가시기 전에 두드릴 줄 아는 인간들을 찾아 세우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요, 인류의 슬픔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이러한 비운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천노정에서 뜻을 품고 나설 때,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이 그런 걸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의 내용은 예수님 생애의 전반적인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구하는 자리, 찾는 자리, 두드리는 자리를 거쳐 뜻을 찾아 나선 예수님의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험산준령이었고, 영광스럽고 큰 승리의 궁전이 아니라 좁은 십자가의 문이었습니다. 민족이 믿지 않고, 민족이 따르지 않고, 민족이 바라보지도 않는 입장, 민족이 싫다 하는 입장에 서신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7장 13~15절)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사정이 그렇다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의 사회환경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있는 자신을 예로 하여 자신과 그 사회환경의 중간 입장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민족 앞에 나타나 실천노정을 걸으실 때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습니다. 유대교단이 가로막고, 민족이 가로막고, 세례 요한이 가로막았습니다. 그에게 갈 길이 있다 할진대 그 길은 모든 사람이 가기 싫어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도 문이 있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닦아야 했고 가로막힌 담에 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걸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6-174, 59.4.26) 선민의 불신으로 초래된 고난의 길 4천년 섭리역사노정에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을 세워 하늘과 만민이 연결될 수 있는 길을 닦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이스라엘민족이 믿고 받들었던들 평화의 길은 열렸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워 놓은 유대교단은 하나님이 왕래할 수 있는 대로(大路)가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를 찾아가는 백성들의 출입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민족이 반대하니 민족의 갈 길이 막히고 민족의 문이 막혔으며, 교단이 반대하니 교단의 갈 길이 막히고 교단의 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유대민족에게 몰리고, 유대교단에게 몰리고, 자신의 증거자들한테 몰리고, 나중에는 제자들에게까지 불신당하신 예수님이셨기에 인간으로서 갈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의 길을 아니 가시려야 아니 가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성을 찾아가는 4천년 역사노정에는 문이 많은 것 같고 6천년 역사를 통합해 보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더욱 많은 것 같지만 예수님이 열고 가신 문은 단 하나요, 그 문이 아직까지 이 땅 위에서 열리지 않았습니다. 끝날에 처해 있는 오늘날 기독교 신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고취하고 교파를 세워 소개하고 주장하며 가는 길이 하늘로 가는 길처럼 보이고 이들이 안내하는 문이 하늘로 안내하는 천국문 같이 보이지만,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개척하시던 그 길,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열던 그런 좁은 문이 아니고서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6-175, 59.4.26) 탄식과 절망에서도 아버지의 뜻대로 살다간 예수님 예수님은 불쌍하게 태어나 불쌍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몰려 비참한 운명과 불쌍한 자리에서 탄식과 더불어 사라져 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보면, 예수님은 일생 동안 자기 뜻대로 살다 간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았으니 그는 부자유스럽게 행동한 사람입니다. 원수가 나타나면 그 원수를 대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자기의 소신은 있을망정 그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것이 효의 길이요 충의 길입니다. 세상에서의 효자도 자기 개인의 몸과 자유의사는 갖고 있지만 일체의 생활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를 위해서 일생을 희생하면서 부모의 뜻대로 가려고 하는 사람을 효자라고 합니다. 하나의 군왕을 중심삼고 볼 때, 군왕의 뜻대로, 자기의 뜻을 완전히 무시해 놓고, 주권자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충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도 자기 뜻대로 나지 않았고, 살면서도 자기 뜻대로 살지 않았고, 최후에 죽을 때까지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간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남의 뜻대로 태어났고, 사는 것도 남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남은 남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절망으로 갔느냐 희망으로 갔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비록 몰려서 죽고 비참하게 죽더라도 내 소원만은 절망이 아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비록 탄식의 자리요, 낙망의 자리요 절망의 자리지만, 내 희망만은 승리를 표방하는 데 있어서 당당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은 절망에 부딪치는 것이요 낙망에 부딪치는 것이지만, 아버지의 뜻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요 승리이기 때문에, 그 승리를 표방하는 자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넘나드는 순간이나마 불충 불효의 위치를 넘을 수 있다는 데 희망을 가지고 담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64-215, 72.11.12) 십자가상에서도 충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몸부림친 예수님 예수님이야말로 역사 이래의 비참과 절망의 첨단인 비운의 길을 앞에 놓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자리에서 붙들고 넘어간 사람입니다. 자신이 죽는 자리에 나가는 딱한 사정보다도 하나님의 심정 가운데는 자신을 죽여야만 하는 더 비참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도량을 가졌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을 박히게 되었을 때, 아이고 아야! 했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뼛골에 스며드는 아픔이 아무리 절망을 촉구하더라도 참아라! 생명이 다하더라도 참아라! 하면서 견뎠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가슴엔 그 이상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도리어 눈물을 흘리는 자리, 피 흘리는 곤경의 자리에 떨어져 자기 몸이 시들어 가는 입장에 서더라도 하나님을 다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품은 효자였습니다. 내가 살아서 아들딸과 씨족, 민족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한을 세계적으로 대신 짊어지겠다는 효성스런 뜻을 나타내지 못한 한을 품고 간 예수님, 그 묵묵한 예수님의 사상과 신념에 동행한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 그것을 보는 하나님도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고 그 몸이 말라가는 고통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를 부르는 예수님의 한마디 한마디는 하나님의 심정을 뚫고 나가는 화살 이상의 예리한 창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을 찔렀을 것입니다. 최후에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말을 들을 때, 기가 막힌 노릇이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그 이면에는 마음을 다해 당신 앞에 효도를 다하려고 했습니다 하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불효의 채찍을 남길 수 있는 한 순간이요, 하늘 앞에 6천년 원한의 조건을 남길 수 있는 무서운 자리를 넘어가는 그 순간, 불효자는 될 수 없다고 각오했지만,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찰라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늘 대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일신에 사무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렵게 생각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한 싸움에서도 지지 않고 하늘만을 위하여 충의 도리와 효자의 도리를 심어 놓고 생명이 다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자기 소신을 끝까지 관철했다는 의미에서 다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중심으로 불효의 자리를 이어받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세계의 공포가 휘몰아쳐 오고, 자기 일생 일대의 모든 것이 하향선으로 엇갈리는 아찔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개인의 사정도 생각했을 것이고, 어머니 아버지도 생각했을 것이고, 종족도 생각했을 것이고, 앞으로 올 나라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결국 내 나라를 위하는 자세도 필요하지만, 나 하나가 효의 도리와 충의 도리를 남기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내적으로 다짐하며 스스로를 제어하는 마음에 사무쳤습니다. 그 마음을 어기지 않는 입장에서 자기 스스로를 이김으로써, 스스로의 소원을 이루는 동시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려면 예수님의 불충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과 불충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이 안팎으로 들어맞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자리에서 갔기 때문에 그의 무덤에는 부활의 서광이 비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세계가 전부 뒤넘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역사로 말미암아 기독교는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리며 로마박해 4백년 기간을 거치는 피의 종교로 출발했습니다. 죽음길로 개척한 길이니 그를 따라가는 후손도 죽음길을 가지 않고는 갈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살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대로 정도의 길을 밟아서 세계적인 발전을 이룩해 나왔습니다. (64-222, 72.11.12) 예수님이 가신 길 예수님은 3년 공생애 실천노정에서 생명을 걸어놓고 싸우다 가셨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피를 뿌리며 원수를 대하여 복을 빌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지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민족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교단이 배반한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부모 형제,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제자들, 더 나아가서는 세 제자까지 배반하던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따라 수많은 인류들이 가야 할 길인데, 그 길을 따르는 데는 목적이 뚜렷해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이러하다는 목적이 뚜렷해야 되는 동시에 내용도 뚜렷해야 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신 뜻의 길이었습니다. 이 뜻에 대한 내용과 목적은 예수님이 3년 동안 수고하여 찾은 내용이요, 수고하여 세운 목적이었습니다. 그 내용과 목적은 30여년의 생애를 희생하여 찾은 내용이요 목적이었기에, 어떤 환란이 일시에 예수님을 친다 할지라도, 죽음의 장벽이 휩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뜻으로 남습니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고비에 부딪쳐서 사망의 물결이 휩쓴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하나님은 내게 부활의 권한을 일으켜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며 모든 것을 박차고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죽음을 박차고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될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부활의 권한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가지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좁은 길, 험한 길을 가셨으니, 오늘날 우리들도 그의 뒤를 따라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자들은 예수님이 슬픈 세상을 바라보시며 구하던 마음을 느끼는 자, 사망의 땅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이 찾던 마음을 품은 자, 멸망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세계를 바라보며 가슴을 두드리면서 인간에게 새생명을 주입해야겠다는 간곡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하늘이 바라는 목적을 심중에 지니고 이 땅을 대하여 싸우겠다는 각오를 갖고 나서기 전에는 하늘이 우리를 예수님이 가신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거쳐 가신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6-176, 59.4.26) 천국문을 통과하려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생전에 제2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지 못한 것이 탄식의 내용인 연고로 예수님은 2천년 동안 성신과 더불어 만민을 동원하여 제2 이스라엘 선민권을 조성해 나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선민권이 조성되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끝날의 성도들은 12사도들의 문을 거쳐 예수님이 들어가신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끝날의 성도들 앞에 열려 있는 천국문은 12사도형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의 성도들이 천국에 가려면 이 12사도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인에게는 수많은 문이 열려 있습니다. 수많은 교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개하는 문이 사명을 하고 있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칙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12사도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니 끝날 성도들은 그 12사도의 문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6천년 종말에 찾아야 하는 선민은 예수님 당시의 제1 이스라엘형인 제2 이스라엘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교파에 속하여 어떤 문을 거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먼저 12사도의 한 이념의 표지를 이마에 받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앞에, 예수님 당시의 사명을 대신하여 그 시대의 사명을 실체로써 종결지어야 할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12사도형의 문을 찾아야 할 때가 옵니다. 무수히 갈라졌던 종파는 천지운세에 따라 자기들도 모르게 통일이념 형태를 갖춘 환경권내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기독교인들, 그리고 그 외의 각 교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가를 알아 예수님의 12사도의 반열을 찾아 들어가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60만 대중을 거느리고 12지파와 70장로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선민인 이스라엘을 수습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도 역시 12제자와 70문도를 세우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이념을 세계적인 이념으로 세우고자 하셨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제2 이스라엘권내에 있습니다. 제2 이스라엘권내에 있으되 그들은 자신이 제2 이스라엘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 지파 반열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세계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12사도로 말미암아 택한 민족을 수습하고 12지파의 반열을 재수습하려다가 실패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계 기독교인들 앞에 다시금 12지파, 70문도, 120문도의 형을 땅 위에 세워 천적인 섭리와 맞춰야 할 사명을 갖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지금은 사도의 문을 거치고 나서 예수님의 문을 거친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 땅 위에 참다운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잘 믿는 성도가 있다 할지라도 너는 어느 지파냐? 하고 물으면 나는 어느 지파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하나의 지파, 하나의 지도자를 못 가졌다 할진대 천국을 건설하는 시대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는 이념이나 하나의 민족 앞에 있어서 자기의 위치가 뚜렷하지 않으면 애매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됩니다. 오늘 끝날의 성도들이 역사적인 원한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2천년 전에 택함받은 제1 이스라엘이 택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그들은 선민권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포하신 진리로써 민족을 초월한 전세계 크리스천들은 제2 이스라엘의 선민권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이 제2 이스라엘 선민의 권한을 갖고 있는 끝날에 처한 기독교 성도들은 하늘을 배반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 되지 말고, 재림하시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제1 이스라엘을 대신할 수 있는 제2 이스라엘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때는 교파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 끼리끼리 모아야 할 때입니다. 끝날은 6천년 역사노정에서 선한 사람을 거두어들이는 인류역사 종말시대의 수확기입니다. (6-178, 59.4.26) 9. 예수님의 참사랑의 길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용서법만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재창조해 나왔습니다. 인간의 창조이상이 완성되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미완성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시 수습하자니 그래야 되는 것입니다. 미완성 단계에 있으니 완성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창조원칙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재창조과정을 밟아 올라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입니다. (27-65, 69.11.23) 하나님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한 남자를 찾았다고 할 수 있으려면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국가적이어서는 안 되고 세계적이어야 합니다. 사탄도 미치지 못하는 아들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 해와가 타락하였던 이상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이렇게 침범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이런 입장에서 이렇게 나오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고생시킨 네가 죄인이 아니냐? 하고 사탄에게 항의할 수 있는 아들이 되기 전에는 처리할 법이 없습니다. 사탄은 네가 뭐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계를 이겨야 될 것이 아니냐? 이렇게 참소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탄인 나도 숭배하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자리에 나가야 될 것이 아니냐고 사탄이 참소합니다.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무기는 사탄보다 나아야 합니다. 너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려면 결국 사탄이 침범 못하는 하나님과 같은 마찬가지의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니 사탄을 용서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용서법(容恕法)이 나옵니다. 사탄에 대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사탄도 꼼짝 못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지금 사탄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데, 이 땅 위에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해 주십시오라고 한 사람이 역사상에 있었느냐?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도 놀라는 것입니다. 야 저녀석 봐라! 나보다 낫다 하고 말입니다. 그 용서법, 그런 사랑의 법은 사탄이 목을 졸라 죽이는 자리에서도 세계적으로 전체적으로 실효를 낼 수 있고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나를 살려 주소. 저놈을 쳐서 벌을 주소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용서해 주고 사랑해 주소 할 수 있다면 그 자리가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이 끊어지는 자리에서도 원수를 대해 용서하고 사랑을 빌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역사적인 혁명의 기원이요, 역사를 뒤집어 놓고, 하나님이 새로운 터전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기원이 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66-133, 73.4.22) 십자가상에서도 하늘을 염려하고 원수를 사랑한 예수님 예수님은 교단으로부터 몰림받고 민족으로부터 몰림받았습니다. 교단의 이단자로, 율법의 파괴분자로 보인 그는 자기 종족에게 몰리고,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세례 요한 일당한테도 몰렸습니다. 광야에 나갔으나 거기서도 사탄에게 몰렸습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전체가 동원하여 십자가의 길로, 골고다의 길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반역자로 내모는 민족을 위하여 오히려 눈물을 흘린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단으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어떤 제사장보다 그들을 위해 더 피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그 시대의 어느 한 사람도 자기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으되 예수님은 그 시대의 친구였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로 몰림받았으되 민족의 충신이었고, 교단의 이단자로 몰림받았으되 교단의 충신이었습니다. 그의 걸음은 찢기고 몰리고 쓰러지는, 십자가를 진 처참한 걸음이었습니다. 무모한 악당들이 채찍을 들어 내모는 자리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만일 예수님이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아버지여, 나만 남았나이다 하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겟세마네동산에서 세 제자를 뒤에 놓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자기의 사정도 딱 하나 자기 일신은 민족의 제물이요, 인류의 제물이요, 천륜의 제물인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슬픔도 슬픔이거니와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민족을 위해 나타났으나 민족 앞에 배반받는 자신을 바라보는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황태자요, 만우주의 주인공이요,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처참한 십자가의 운명을 탄식하려면 이 우주를 동원하여 탄식할 수도 있었으나 탄식할 수 없는 자신임을 느끼셨기 때문에 몰리는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면목없게 생각하셨습니다. 교단을 규합하고 민족을 규합하여 하늘의 왕국을 건설하고 세계를 아버지 품에 안겨 드려야 할 책임을 짊어졌던 예수님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될 때에 원망할 어떤 무엇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 잔을 피하게 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도 자기 일신이 죽는 것이 서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일신이 죽음으로써 민족의 서러움과 하늘의 서러움이 가중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쓰러지면 후대의 세계 인류 앞에 가중될 십자가가 남아지고, 그로 인해 슬픔의 역사가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고, 골고다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으며, 죽음의 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골고다의 길을 가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도 골고다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뿐만 아니라 더 어려운 길이 남아질 것을 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가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자리, 가시 면류관을 쓰는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이것이 자기에게서 그치지 않을 것을 아시고도 예수님은 하늘을 향하여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 십자가의 길이 다 끝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울며 염려하는 마음의 호소가 하늘과 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하늘 앞에 저지른 모든 잘못을 짊어지고 하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산 제물로 하늘 앞에 바쳐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죽어가는 예수님, 하늘을 염려하며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가는 예수님을 대하던 하나님의 분함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이요, 4천년 역사노정에 하나님의 분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이상의 분함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장 노아 때 이상의 심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민족을 붙들고 죽고, 교단을 붙들고 죽고, 십자가를 붙들고 죽었기 때문에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이런 심적인 인연이 후대의 인간, 남아진 이스라엘 민족과 맺어져 있었기 때문에 배반하는 후대의 인간들을 버리지 못하시고 붙들고 계십니다. 배반하는 후대의 교단을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6-27, 59.3.15) 원수를 위해 복을 빌 수 있었던 예수님 아무리 찾아보아도 역사적으로 대표되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로마 병정들이 자기의 양손과 발에 못 박은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원수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원수를 대해서 말하기를 아버지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하오니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복귀섭리, 혹은 구원섭리의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이 반대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마저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대를 받으면서도 참아 나온 것은 원수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의로운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망령된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이상으로 찾던 의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습니다. 의인을 찾아오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역사의 미래 노정을 바라보고, 앞일을 아는 예수님을 당당히 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전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맏아들로서 그 이상 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이래 없었습니다. 야곱은 아무리 승리하여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간교한 사람입니다. 모세가 아무리 훌륭했지만 무뚝뚝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급 사람이 싸울 때 애급 사람을 당장 돌로 때려죽였습니다. 의리 있고 영웅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걸 볼 때 모세는 울뚝불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최후의 결단을 짓기 위해서 밤을 새워 가면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이 따라와서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는 자기 앞에서 세 번씩이나 졸고 있는 심각한 심판의 자리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복수심을 갖지 않고 결연한 마음으로 죽음의 자리까지 밀고 나간 예수님, 이분이야말로 역사 이래 둘도 없는 단 한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 가운데 야! 너만은 내가 기억하겠다. 역사상에 너만은 내가 기억하겠다는 내적인 결의를 자극시킬 수 있는 예수님의 행로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무리 타락한 세상이라도, 자기 아들딸이 죄를 짓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이놈의 자식아! 잘 죽어라! 시원하다. 아이구 나는 죄인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었다. 허허허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그런 부모가 있다면 그 부모는 미치광이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그 눈에서 6천년의 역사적인 눈물이 솟구칠 것이고, 자신이 대신 죽고 싶은 마음이 심정 깊이 스며들 것입니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주고라도, 헌법이 있으면 헌법을 뜯어고쳐서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살리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전체를 부정하고 아들의 행복을 긍정하겠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천지의 대주재요 심정의 최고 원인이 되는 부모의 자리에 계신 하나님이 아들딸이 망하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을 보고 좋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보다도 더 급박한 일이기 때문에, 쳤다 하면 그 상황이 될 것입니다. (64-217, 72.11.12)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계를 만들려고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님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이 원수를 공인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책임을 맡기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는가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수고와 고난이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모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비록 고통받다 이슬같이 사라지지만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거룩한 공적의 터전만은 상속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고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1-196, 61.7.17) 예수님이 하나님을 무조건 믿으면 로마제국, 이스라엘 나라가 전부 내 것 된다 이렇게 믿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안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입장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입장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아, 하나님 은혜를 믿습니다. 로마나 세계가 내 것이니 무조건 믿습니다 하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안 통했는데 여러분에게는 통한다는 말이 이론적이요, 가당한 말입니까? 이상세계로 가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하는 게 가능한 일이냐?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도를 뭣 하러 했겠습니까? 12제자가 무엇이고, 70문도가 무엇이고, 120문도가 무엇입니까? 왜 핍박을 받고, 왜 십자가를 지고 다녔느냐? 가만히 믿고 앉아 있으면 되었는데, 예수님이 간 길이 옳은 길이라면 그런 핍박의 길을 가지 않고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가지 않고는 뜻이 이루어 질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나라와 환경이 안 되었으니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책임져야 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이처럼 사랑할 수 있게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사 그랬으니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124-296, 83.3.1)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빈 것은 지극히 지혜로운 행동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 준 사실은 역사시대에 없는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수많은 원수와 원수 사이의 칸막이가 터져 나갔고, 이것은 고립된 역사시대에 서로서로 자기를 중심삼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일수록 그가 가는 길이 복잡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수많은 원수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한 노정을 거치지 않고는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뜻을 품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는 작은 원수, 큰 원수, 여러 종류의 원수들이 많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방법을 몰라서는 그 크나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당하는 환경에는 원수가 많기 때문에 그 모든 원수를 원수로 갚으려는 사상을 가지고는 미래에 참된 길을 남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원수를 위하여 복을 빈다는 사실을 원수가 알게 될 때는 저절로 원수가 갚아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앞으로 먼 길을 가는 도상에서 수많은 원수가 있을지라도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칠 수 있는 동기가 됩니다. 응당 원수를 갚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갚지 않고 도리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었다 하는 말을 원수가 듣고 저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아야 할 일이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어리석은 일 같지만, 지극히 지혜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42-189, 71.3.7)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의 길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타락한 천사장이 하나님을 참소하더라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세운 법도를 준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장이 이미 타락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피조물을 그가 세운 법칙 또는 규칙에 따라서 주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타락 이전의 천사장에게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천사장은 하나님에게 하나님, 당신은 저를 완성기까지, 완성기 이후까지라도 사랑하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천사장은 장성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는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내가 사탄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사장이 참해야 할 바를 완수할 때까지, 천사장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사장이라는 존재입니다. 천사장은 하나님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아들 아담과 딸 해와도 역시 나를 완성기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원칙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천사장을 몰아내려면, 먼저 여러분의 책임분담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럴 때까지는 여러분이 천사장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그 자녀가 천사장을 충분히 사랑했다는 조건을 세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때 성사되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사탄을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보다 천사장을 더 사랑했다는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에 의해서 살해되었지만 그는 사탄을 사랑했고, 사탄을 위해서 기도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고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복을 빌어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천사장을 사랑해야 하는 책임분담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지점으로부터 사탄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편에 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편에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복귀되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52-87, 71.12.22)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말씀의 참 의미 예수님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했으면 사탄을 사랑하라는 것이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사랑하라고 한 것이, 사탄을 사랑하라는 말이냐?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리이까 할 때, 예수님이 말하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님이라면 사탄까지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죄 지은 사람을 자꾸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용서해 주고 나서 나중에 전부 죽여 버린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용서해서 구해야 하지만 사탄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용서해 줄 수 있으되 사탄 마귀는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용서를 거듭하는 것도 원수를 추방하기 위한 작전입니다. 이 원수들이 인간을 유린하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는 것은 원수를 갚기 위한 작전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수를 위해 기도한 것은 사탄이 붙은 그 사람을 원수시한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사탄인데, 사탄편에 있는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탄편에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지 사탄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몸이었습니다. 그것을 안 찾으면 하나님이 완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완성하는 데는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을 완성시킬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파탄시켰으니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파탄시킨 사탄인데 이를 용서한다면, 이 우주의 이상이라는 것은 완전히 깨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이상이고 뭣이고 완전히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제일 좋아하는 것, 제일 이상으로 찾아가는 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완성하는 데서만 하나님의 전체 목적, 인간의 전체 목적이 성사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완성해야만 모든 부활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으로만 사탄도 분립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타락한 세계에서는 완성한 사랑이 아니라 미완성적 사랑에서 사탄이 뿌리를 박고 들어옵니다. 사탄이 혈통적 관계를 맺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완성한 사랑은 하나님의 직접주관권 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원리적입니다. 어차피 여기로 올라가야 됩니다. 이것이 직접주관권입니다. 부활의 목적이나 예수님이 온 목적은 사랑권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직접 사랑권 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외는 없습니다. (92-187, 77.4.10)
원수를 사랑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그와 같은 고비를 넘고, 그 마음의 세계에 동행자가 되고, 그 마음은 하나님을 대신한 대변자가 되어 진리와 뜻을 중심삼고 싸워서 실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27-65, 69.11.23) 원수까지 사랑하자는 운동을 제시해 나온 기독교 어떤 성인 현철도 원수를 용서하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단 한 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운명하면서 저들이 지은 죄를 알지 못하나니 아버지여 용서 하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자기의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소원이 완전히 막히는 자리에 들어갔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만민을 구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앞서서 죽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과 원수를 사랑해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화가 출발되었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7-65, 69.11.23)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제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메시아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나라의 방향을 제시하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와 이스라엘이 피압박 국가와 압박 국가, 피지배 국가와 지배 국가라는 것, 이 두 사이에는 담벽이, 원수라는 높은 담벽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담벽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의 담벽이 그 시대에 제일 높은 담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는 힘으로써 나를 정복하지만 나는 반대로 너를 사랑으로써 정복하겠다는 표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로마 병정에 대해서 하나님이여, 저들이 행하는 죄를 알지 못하고 저런 일을 하니 용서해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이 미워하는, 원수시하는 국경을 넘어 본향을 찾아가는 길을 추구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는 개인 원수가 있는 동시에 가정 원수가 있습니다. 세계 사람을 모두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개인 원수가 있고, 가정 원수가 있고, 종족 원수가 있고, 민족 원수가 있고, 국가 원수가 있고, 세계 원수가 있고, 수많은 원수가 사방에 얽매여 있습니다. 그 말은 나를 따르고 내 주장을 따라가는 사람 중에는 개인 원수 앞에 희생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희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 원수에게 희생당하고, 종족 원수에게 희생당하고, 민족 원수에게 희생당하는 일이 있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타이틀로 언젠가 승리할 수 있는 한 날이 있을 것이며 그 날을 고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하나님이 사탄처럼 복수한다면 이 세상은 다 없어지고 맙니다. 기독교를 중심삼은 하나님의 조국 광복은 이러한 사상을 가진 개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랑으로 품고 국경을 허물고 모든 환경과 문화를 넘어 소화해 나가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운동을 제시해 나오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하나님이 있는 한 세계적 종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빨간 꽃 종자를 심으면 빨간 꽃이 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한 원수, 원수를 갚는 놀음의 씨를 뿌려 사탄 악마의 씨가 번성했지만, 원수를 사랑하는 씨를 뿌리면 그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나무로 번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 이치입니다. (107-18, 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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