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애절한 뜻길 (사랑이야기 - 제 4 권 참부모의 사랑편 - 제 3 장 참부모님 사랑)

무지... | 20180815152155
6. 애절한 뜻길
     
     
애절한 뜻길이란 슬픈 하나님의 뜻길 
     
'애절' 하면, 일반적으로 '사랑 애(愛)' 자와 '끊을 절(絶)'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사랑 애(愛)' 자가 아니고 '슬플 애(哀)'자입니다. 그래서 '애절한 뜻길'이란 슬픈 하나님의 뜻길입니다.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뜻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 외적인 세계의 사람들은 뜻길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뜻길 하게 되면 그것이 무슨 길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가 많습니다. 신을 섬기는 종교들이 많지만, 거기에는 그 종주(宗主)를 중심삼은 뜻길이 있습니다. 그 뜻길 가운데서 특별히 하나님을 중심삼고 심정적이며 내적 인연을 연결시켜 나오는 종교가 있는데, 유대교, 기독교가 그런 전통을 지녀 왔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종주들 가운데서, 물론 일반적으로 신을 중심삼고 나오는 것이 종교이지만 그 종교 가운데서 그래도 중심적 종교의 입장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적 길은 예수님의 뜻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나온 길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일반 종주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불교나 유교, 이런 종교들은 하나님의 애절한 것을 확실히 모릅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기독교의 전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뜻길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삼은 뜻의 길, 혹은 선생님을 중심삼은 뜻의 길을 넘어서 하나님을 중심삼은 길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의 길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가 가야 할 창조본연의 길입니다. 존재 세계나 어떤 물건이나 이 뜻길에 속해 있어야 되고 뜻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렇지 않고 뜻길과 배치될 때, 그것은 뜻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175-231, 88.04.24)
     
     
모든 존재는 하나님을 중심한 뜻의 길을 가야
     
우리는 각자 생애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각자가 가는 생애의 길은 다방면의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보면 여러 부처가 있고 부처에 속한 국이 있고 무슨 과가 있지만, 거기에 처하여 있는 입장 그 자체에서 차이는 있을망정 그들이 가야 할 길은 전부 뜻을 위하는 길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쭉 널려 있다면, 사방에 널려 있는 사람들이 뜻의 길을 가는 데는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중심한 뜻의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뜻의 길이 하나의 중심이라면, 그 중심점을 연장시키며 종적으로 모든 역사시대를 거쳐 이어받아 나오면서 그 길을 맞춰 가야 합니다. 내가 동쪽에 있으면 동쪽에서 보는 뜻길은 중앙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도, 서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중앙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향에 처할 수 있는 생활환경의 뜻길을 가려 가야 됩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뜻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가야 할 뜻길이 있고, 세계가 가야 할 뜻길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주가 가야 할 뜻길이 있습니다. (175-232, 88.04.24)
     
     
인생이 가야 할 뜻길
     
오늘날 인간 세상에 왜 뜻의 길이 필요하냐? 왜 뜻길을 가야 하느냐? 하나의 표준을 중심삼고 방향감각과 상하의 질서 기준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종횡의 개념이 있어야 합니다. 그 개념을 떠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뜻의 길에서 종적인 뜻의 길, 횡적인 뜻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 자체를 종적 기준과 횡적 기준의 중심자리에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우리 인생이 가야 할 뜻길입니다. 
본래 인간은 뜻의 중앙선에서 태어났습니다. 뜻의 중앙선에서 횡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태어났으니 오른쪽을 알아야 하고 왼쪽을 알아야 합니다. 철이 듦에 따라서, 성숙함에 따라서 점점점 원형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남자 여자는 나라를 중심삼고, 가정을 중심삼고, 부모를 중심삼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할 때, 사람을 먼저 지은 것이 아닙니다. 천사를 짓고 만물을 지었습니다. 해와 달을 중심삼고 물이라든가 공기 같은 환경을 지어 놓고 우리 생명체가 기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환경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 여건 앞에 대상이 되고 싶으냐, 주체가 되고 싶으냐?󰡑 하고 남자나 여자에게 묻게 될 때, 󰡐나 대상이 되고 싶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체가 되고 싶어합니다.
중앙선을 중심삼은 개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본심의 작용에 의해 어디 가든지 중심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종횡을 중심삼은 핵심자리에 내가 서게 되면, 모든 전부는 위도 나를 통해야 되고, 아래도 나를 통해야 되고, 오른쪽도 왼쪽도 나를 통해야 되고, 전후도 나를 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본래 그래야 될 입장입니다. 
참된 여자나 남자는 본래 그래야 합니다. 그것이 본연의 기준인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써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타락했을망정 본연의 기준은 남아 있기 때문에, 본연의 양심작용이 내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그런 개념이 우리 생활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걸 떼어버릴 수 없습니다. 
나침반의 본성을 떼어버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살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백 살, 천 살까지도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본심의 작용은 영원히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175-235, 88.04.24)
     
     
종횡의 핵의 자리에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는 힘이란
     
영원히 종적인 핵으로 정착시킬 수 있는 힘, 핵을 이동 안 하게 만드는 힘이 무엇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핵이 왔다갔다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우주의 핵이 왔다갔다하면 우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일납니다. 그러니 꽉 잡아매 요지부동하게 할 수 있는 작용이 있어야 될 텐데,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175-238, 88.04.24)
핵의 자리를 영원히 정착시킬 수 있는 힘은 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의 힘입니다. (175-240, 88.04.24) 
역사는 종적으로 흘러갑니다. 역사적 전통은 종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종적으로 흘러가는 사랑을 어떻게 횡적으로 연결시키느냐?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남자 여자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가정에 있어서 부부의 사랑의 힘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연장하면 가정에 대한 사랑과 그 다음엔 나라에 대한 사랑인 애국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사랑, 우주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그 사랑은 어디로부터 오느냐? 횡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종적으로 연결되어 그 연결된 길이만큼 횡적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횡적 기반이 되게 될 때는, 그 횡적 기반만큼 구형권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구형권 내의 국가와 민족을 지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국심을 통한 승리의 판도를 얼마만큼 영향권으로 확대시켜 나가느냐의 여하에 따라 종적인 전통역사와 횡적인 현실의 시대적 역사성이 생활무대에 연결되어 나갑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어디를 중심삼고 나가느냐? 횡적인 누구를 중심삼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우리 아버지를 믿고 내가 출발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횡적인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초월해 종적 기준에 설 수 있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했습니다. 
지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불교는 법(法)의 종교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교는 인격적 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성지강(人性之綱)이다'라고 공자님이 말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을 인격적 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신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아 준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인데 어떤 아버지냐? 중앙에 있을 수 있는 아버지입니다. (175-242, 88.04.24)
     
     
사랑을 중심삼은 수수작용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대하기 위해서는 천년 만년 종적 기준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십니다. 이성성상의 주체이니만큼, 그 사랑은 남자에게도 가서 붙을 수 있고 여자에게도 가서 붙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랑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가겠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서 그래라' 하겠습니까, '아니야' 하겠습니까? 어서 그러라고 밀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를 위해 내 것 만들고 나서 '자, 이제 돌아가고 싶소' 하면 하나님이 쑥 당겨 준다는 것입니다. 밀어 주고 당겨 줄 수 있는 이 작용이 사랑을 중심삼은 수수작용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수수작용을 할 때, 종적 기준이 밀어 주기 시작하겠습니까, 횡적 기준이 밀어 주기 시작하겠습니까? 종적 기준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내려오기 마련입니다. 밀어 주러 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내려오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평선상에 있지만, 있는 것 같지 않고 없는 것 같지도 않는 자리에서 '이마를 맞대고 너희들이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폭발되어라' 하는 것입니다. 폭발될 때, 비로소 아담 해와의 사랑이 폭발됨과 동시에 하나님도 폭발하는 것입니다. '꽝' 터져 핑 돌아가게 될 때, 남자도 여자도 다 사방으로 다 뻗어 나가지만 하나님은 틀림없이 중앙에 자리를 딱 잡고 잡아당겨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하고 나면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출발합니다. 그러면서 큽니다. 그러면서 종적인 사랑의 힘을 본받아 남자 여자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가정 사랑으로 품고, 민족 사랑으로 품고, 세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 간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같은 동참권과 동위권을 가질 수 있음과 동시에 상속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위대합니다. 
이러한 이상적 기준이었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잃어버렸습니다. 이걸 다시 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합니다. 되찾으려면 어떤 생각을 해야 되느냐? 자기를 생각해서는 되찾을 길이 없습니다. 남자가 남자만을 중심삼고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하나님도 찾을 수 없고 여자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수수작용의 원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수수작용에서 '받을 수(受)' 자가 먼저입니까, '줄 수(授)' 자가 먼저입니까? '줄 수(授)' 자가 먼저입니다. 이걸 잘 알아야 됩니다. 수수작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 주체인데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주는 입장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주체니만큼 영원히 주려고 하고, 영원히 주려고 하니 영원한 주체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남자로서 이상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됩니다. 수수작용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더라도 드리려고 하게 되면 그 힘은 자동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수작용이 '줄 수(授)'자가 아니고 '받을 수(受)' 자가 되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타락이 뭐냐? 받고 싶어하는 패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복귀의 길을 가는 우리는 받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받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꾸 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175-249, 88.04.24)
     
     
애절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길
     
종적 사랑의 기준이 최초로 이 우주간에 확정되는 시간이요, 남자 여자들이 비로소 이 땅 위에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으로 상봉할 수 있는 시간이 하나님이 바라는 뜻길 완성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할 때, 사위기대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사위기대란 무엇을 말하느냐? 완전한 남자와 완전한 여자가 하나되어 완전한 아들딸을 키워서 하나님 앞에 가정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175-248, 88.04.24)
그런 하나님의 뜻을 성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절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슬픈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애절하다는 것은 마디마디에 슬픔이 잠겨 있다는 뜻입니다. 그 마디가 뭐냐? 하루라면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그게 한 마디입니다. 참대나무에 마디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마디마디에 슬픔이 잠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복귀의 길을 걸어오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셔 드려야 되느냐? 무한히, 영원히 나를 위해 주려고 하던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이니, 하나님이 나에게 주든 말든 나는 하나님 앞에 무한히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분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분입니다. 세계적인 주체, 우주의 중심입니다. 영원한 중심입니다. 인간은 40년 혹은 1백년 살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사는 주체입니다. 그러니 일생 기준은 영원히 사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됩니다. 거기에 연결시켜야 1백년 이상의 힘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 그렇게 안 되었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밀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종(縱)을 중심삼고 원형이 되고, 사방으로 쭉 퍼져 하나의 구형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그것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반대로 하나님을 밀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밀기 위해서는 먼저 어머니 아버지를 밀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밀려니까 효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라를 밀어야 되고, 세계를 밀어야 됩니다. 세계를 밀어야 하나님을 밀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타락한 세계에 효자가 있는 것이고, 충신이 있는 것이고, 성인이 있는 것이고, 성자가 있는 것입니다. 성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늘나라에 돌아가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하늘나라 왕궁법까지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복귀과정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으면 본래 왕자로 태어났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왕궁법을 중심삼고 치리하는 그 법이 국가의 법이 됐을 것이고, 국가의 법이 세계의 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게 하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종족은 민족을 위해서, 민족은 국가를 위해서, 국가는 세계를 위해서,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은 사랑을 위해서 밀어 줘야 됩니다. 사랑을 위해 밀어 줄 수 있는 단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계를 극복해야 됩니다. 타락한 세계를 극복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아들딸의 권위가 퍼져 나가기 때문에 거꾸로 갖다 붙이는 놀음을 하려니, 그것을 모르는 인간을 거기까지 끌어올리려니 하나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모든 복귀섭리 도상에 왔다갔던 우리 조상들을 보게 되면, 뜻의 길을 가겠다 하던 모든 시대의 지도자를 보게 되면, 그들 가운데 자기를 위해 산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산 사람은 중심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도 민족을 위하든가 국가를 위했습니다. 그래서 애국자와 위인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많지 않습니다. 성인은 세계를 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세계를 위하지만 성자는 하나님을 위한 사람입니다. 
종교의 종주들 가운데 세계적인 대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나는 독생자라고 한 말이 참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고 나는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만민을 대해 남편의 자리에 섰습니다. 남자로 왔으니 참된 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남녀를 중심삼고, 이상적 가정을 중심삼고 이상적인 천국이 현현합니다. 이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를 지도하는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175-251, 88.04.24)
     
     
통일교회의 목적은 인류의 해방과 하나님의 해방
     
통일교회는 종교 전체를 합한 종교입니다. 전체를 합한 종교의 목적이 뭐냐? 인류의 해방과 하나님의 해방입니다. 인류와 하나님을 해방해서 하나님을 모셔들이고 인류를 전부 한 자리에 모아 핵의 자리에 서야 됩니다. 종횡의 기점을 마련해야 됩니다. 역사 이래에 비로소 핵의 자리에서 상으로 가는 길, 하로 가는 길, 수직으로 통할 수 있는 길, 횡으로 90도에 통할 수 있는 남자 여자의 길, 그 다음에 전후를 중심삼고 자기 형제와 나라와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길을 꽁꽁 묶어 놓을 수 있는 기점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다 깨져 나갑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종적인 부모가 하나님이라 할 때, 횡적인 90도를 갖출 수 있는 지상에, 본연의 핵의 자리에, 사랑을 중심삼고 엉클어질 수 있는 기점에 서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된 하나님, 참된 부모, 참된 사랑의 논리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모의 뜻이 뭐냐? 인류를 사랑으로 다시 품어 낳아 줘야 합니다.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사탄의 자식이 되어 버렸으니 이걸 품어서 다시 해산해야 됩니다. 그러니 내 복중에 그 사람이 안기게 하기 위해서는 정성을 들여야 하고, 낳아 가지고 잘 자라게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이 3시대의 수난길을 거치면서 가야 할 것이 부모의 길이니만큼, 선생님이 참부모의 자리에 섰다면 그런 길을 가야 됩니다. 세계가 아무리 반대하더라도 세계를 대표한 통일교회를 품고, 국가 이상의 자리에서 해산할 수 있는 나라를 품고 보호하면서 가는 길이 부모가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무엇을 해 나왔느냐? 이 통일교회의 못난 누더기 짜박지들을 품고 보호해 나왔습니다. 어려운 것이 있으면 선생님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가면서 보호해 나왔습니다. 그래 가지고 대한민국을 지배할 수 있는 아들딸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고 하나님을 해방하고 인류를 지배할 수 있는 아들딸로 해산해 나왔습니다. (175-255, 88.04.24)
     
     
선생님의 가는 길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외로운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역사시대에 개인적으로 외로운 자리에서 비통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그곳을 저주하면서 자기에게 복을 빌어 달라고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했습니다. 선생님은 개인적인 시련 때문에 후퇴할 사나이가 아닙니다. 세계의 시련을 넘고 하나님을 해방하고 죽겠다는 사나이가 개인적인 과정에서 항서를 쓸 수 없습니다. 비겁할 수 없습니다. 아내가 반대하고 자식이 반대하고, 부모가 반대해도 잘라 버리고 나라가 반대하는 길을 간 사람입니다. (175-257, 88.04.24)
그렇게 외로운 길을 가면서 선생님은 감옥에도 여러 번 갔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감옥에 갔다 나올 적마다 도약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선생님을 감옥살이 시켰지만 망하지 않았고, 남한에서도 이화여대 연세대 학생들이 통일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퇴학시킨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때 5대 장관이 협력해 선생님의 모가지를 자르려고 했지만 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미국에서도 탈세라는 명분으로 미국의 2억4천만의 함성과 더불어 댄버리에 보내 거기서 꺼져 갈 줄 알았지만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망하지 않았느냐? 하나님을 해방하고 인류를 해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원천적인 핵의 입장을 설정해 하나님을 해방하려고 했기 때문에 망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참된 부모의 해방과 인류의 참된 가정의 해방을 위해 참된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의 기지를 만들어 만국에 적용하고 만세에 적용했습니다. 해방의 만년 왕국 기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선생님의 가는 길을 누구도 막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사랑이라는 걸 떼버리면 모르지만, 그것이 남아 있는 한 그 종착점까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선생님을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통일교회는 핍박받으면서 후퇴한 것이 아니라 발전했습니다. 왜 발전했느냐? 통일교회가 나온 길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을, 역사시대에 그 누구도 몰랐던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에 묻혀 있는 사랑을 자극시켰기 때문에 그 힘의 보호를 받아 발전한 것입니다. (175-259, 88.04.24)
     
     
 원리의 길은 벗어날 수 없는 무서운 길
     
우리는 어떠한 핍박의 자리에서도 살아 남아야 합니다. 살아 남지 못하면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애절한 뜻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을 해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대에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든 영계에 가서라도 '나는 땅에 다시 가서 후손을 통하여 이 일을 종결짓겠다'는 신념에 사무쳐야 합니다. 그러니 바쁩니다. 영계에 갔다가 다시 올 수 없습니다. 영계에 가서 하나님을 모시고 효자 효녀 충신의 도리를 해야 할 터인데, 땅에 와서 다시 싸우는 사람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죽음길을 개의치 않고, 수욕을 개의치 않고 뜻길을 직행할 수 있는 무리를 원합니다. (175-267, 88.04.24)
우리는 누구나 다 원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 원리의 길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타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무서운 길입니다.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아버지가 그래야 되고, 아버지가 그랬듯이 또 수천 만대 후손이 그래야 됩니다. 원리의 길은 밟아 가야 됩니다. 타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선생님도 타고 못 넘어갑니다. 밟아 가야 됩니다. 수난길을 밟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175-284, 88.04.24)
하나님이 지금까지 선생님을 믿고 나온 것은 개인시대의 극복과 가정시대의 극복과 종족시대의 극복, 나아가 세계시대의 극복에 있어서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입니다.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문을 받고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그 일념은 변함없었습니다. '하나님 걱정 마십시오. 저 살아 있습니다' 했습니다. 선생님은 미국 댄버리에 들어가서도 '하나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일생 동안 고통을 받으면서도 선생님을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저 대신 대한민국을, 남북에 사는 6천만을 보호하시고 아시아인 40억을 보호하시고 60억 인류를 보호하여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남북통일을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위해서는 한마디의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 슬펐던 하나님의 뜻이 환희로, '슬플 애(哀)' 자가 아닌 ‘사랑 애(愛)’ 자의 애절한 뜻으로 되어 온 하늘땅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안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류는 자동적인 해방권에서 만국을 넘나들면서 살 수 있는 본연의 인간성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종적인 하나님을 모시고 참된 횡적인 참부모를 모시어 종횡(縱橫)을 연결하는 사랑의 승리적 자녀권을 중심삼은 가정이 완성되면 그 가정은 우주적이 되는 것입니다. (175-268, 88.04.24)
통일교회에는 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봄이 조금 멀 뿐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고개를 넘고 가정․종족․민족․국가․세계를 향해서 구도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세계적 판도를 무난히 넘고 저 영계의 지옥세계도 무난히 넘어 하나님을 해방하겠다고, 끝까지 최후의 전선을 수호할 수 있는 길을 닦아 죽음길을 스스로 택해 하나님을 보호하고 총탄을 막을 방패가 되겠다고 자진해 나가면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입니다. (175-261, 88.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