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야기 -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무지... | 20180205225954
   사랑이야기 

 제 3권 예수님 사랑편 

제 2장   예수님의 섭리노정

소목차  

   
1. 혈통복귀섭리와 예수님의 탄생
2. 요셉 가정과 예수님의 한

3. 세례 요한과 예수님

4. 예수님과 이스라엘 선민

5. 예수님의 십자가

6. 십자가상에 있는 예수님의 고난


 

1. 혈통복귀섭리와 예수님의 탄생

 
     
인간 타락의 실상은 무엇인가
     
 복귀라는 것은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가는 데는 에덴 동산에서 인류 시조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의 기준을 능가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시조 아담 해와의 타락의 실상은 무엇이냐?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다는 성경의 말씀은 비사(比辭)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나온 것이 참으로 용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타락이라는 그런 맹목적인 신앙 기준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20세기 문명을 창건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배후에서 많이 협조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확실치 못한 것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무지에서는 완성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선악과가 무엇이냐? 선악과가 그냥 과일입니까? 성경에는 알쏭달쏭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왜 하필 하체를 가렸느냐? 부끄러우니까 가렸습니다. 그러면 왜 부끄러우냐? 오늘날 우리가 타락한 사회의 관습적인 관념을 가지고서 󰡐부끄럽다고 생각하니까 부끄럽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부끄럽다면 왜 하체만 부끄러우냐는 것입니다. 부끄럽다면 눈은 부끄럽지 않고, 코는 부끄럽지 않고, 귀는 부끄럽지 않고, 머리는 부끄럽지 않고, 손발은 부끄럽지 않느냐?
또 성경에 보면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말은 잘못 태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무엇을 통해서 태어나느냐? 선악과를 통해서 태어나느냐? 아닙니다. 사랑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을 통해서 태어나기는 태어났는데 하나님이 자랑할 수 있고 만 우주에 자랑하고 선포할 수 있는 기쁨의 사랑을 통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슬퍼하고, 사탄이 지극히 좋아하는 사랑을 통해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도 잘못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사랑을 통해 태어남으로써 돌감람나무가 되었기 때문에 그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고 참감람나무의 참된 사랑의 가지에 접을 붙여야 합니다. 수 천년 자란 돌감람나무 가지를 완전히 잘라 버리고 정성을 들여서 참감람나무를 접붙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22-243, 69.5.4)
     
     
혈통을 바꾸는 섭리를 해 온 하나님
     
인간은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 태어난 것을 전부다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출발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잘못된 출발을 뒤집어 박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 땅에서 다시 참된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잘못 태어난 것은 잘못된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잘못되지 않은 사랑을 했다면 인류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잘 태어났을 것입니다. 타락은 무엇이냐? 잘못된 사랑을 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할례가 무엇이냐? 왜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냐? 그것은 탕감법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고장이 나면 고장난 부분을 수리해야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애들도 순수하고 좋다고 합니다. 왜 그러느냐? 이것을 한마디로 얘기하면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모든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인류의 조상은 처음에 심을 때 잘못 심었습니다. 무엇을 잘못 심었느냐? 선악과나무를 잘못 심은 것이 아닙니다. 열매가 열리는 나무의 씨를 잘못 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릇된 사랑으로 잘못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사랑으로 잘못 심었으니 끝날에는 반드시 그릇된 사랑의 결실이 세계적으로 거두어지게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어느 때 타락했느냐? 청소년기에 타락했습니다. 청소년기에 거짓된 사랑을 심었다는 것입니다. 그 거짓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거두어져야 할 때가 와야 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가장 큰 사회문제가 청소년의 윤리입니다. 왜 젊은 녀석들이 자기들 멋대로 타락의 행동을 하느냐? 그것은 아담 해와가 그렇게 뿌려 놓은 씨가 열매를 맺어서 이제 거둘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담 해와가 그렇게 심어 놓은 것을 인과법칙에 의해 그냥 그대로 결과를 맺어서 해결 짓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법도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류는 거짓 사랑을 통해서 태어났기에 전부 거짓 아들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 아들이 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참된 아들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된 아들을 보내자마자 이 세상을 대번에 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혈통을 통해야 됩니다. 사탄의 혈통을 받아서 번식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것을 끊고, 그것을 밟고,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새로 태어나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 과정에서 그 혈통을 바꿔치는 일을 해 오셨습니다. (22-244, 69.5.4)
     
     
타락으로 사탄의 주관을 받게 된 인간
     
아담 한 사람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한 창조주로서 원리적으로 그를 취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느냐?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해서 끌고 가지 못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아담이 안 끌려가려야 안 끌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본래 창조원칙을 두고 볼 때,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면 반드시 그 상대의 주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주관권내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동네에서 한 총각이 부잣집 맏딸과 사랑으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비록 그 총각이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더벅머리 총각이라 할지라도 그 부잣집 맏딸은 그 총각에게 꼼짝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아무리 부정하고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 총각이 한마디만 선포해 놓으면 아무리 부잣집 맏딸이라고 해도 꼼짝없이 주관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법도는 주관받는 것이 원칙입니다. 창조의 원칙이 그렇습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탄이 먼저 인간과 관계를 맺고 아담 해와가 공식적으로 사탄의 주관권내에 들어감으로써 사탄이 아담 해와는 내 것이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원리적인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은 창조한 주인의 입장으로서 아담 해와를 완전히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는데, 사탄이 옆에서 사랑의 관계를 맺어 아담 해와를 완전히 주관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아담 해와를 놓고 둘이 서로 자기가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이 맺어지면 반드시 주관받게 되어 있는 것이 원리인데, 이 원리를 세워 놓은 하나님 자신이 원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비법적으로 개입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쳐서 없애버린다면 하나님 자신이 세운 사랑의 원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부터 벌어져 나왔습니다. 
사랑을 먼저 한 사람이 상대를 주관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법도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누가 먼저 했느냐? 천사장과 해와가 먼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와와 아담이 인연을 맺었습니다. 창조원리를 중심삼고 볼 때는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만 사랑을 중심삼고는 사탄이 주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22-246, 69.5.4)
     
     
가인 아벨 분립섭리를 한 목적
     
아담이 타락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 입장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는 구원역사, 즉 복귀섭리를 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타락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22-242, 69.5.4)
사랑의 법도가 거꾸로 되었으니 이것을 원리원칙대로 회복해야 됩니다. 그러자면 아담을 하나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놓아야 되는데 아담을 직접 가르면 죽어 버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담의 아들들을 통해서 나누어야 합니다. 아담의 아들들은 사랑의 열매이니만큼 하나님도 주관할 수 있고 사탄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을 각각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번 사랑은 천사장과 해와의 사랑이기 때문에 장자인 가인을 그 사랑의 표시체로 사탄편에 세우고, 둘째 번 사랑은 해와와 아담의 사랑이기 때문에 차자인 아벨을 그 사랑의 표시체로 하나님편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승패는 하나님이나 사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사탄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타락한 장본인은 인간이므로 그 인간 자신에게 싸움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사람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구원섭리가 이루어지느냐 못 이루어지느냐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 가정에서부터 구원섭리를 시작하셨습니다. 
원래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사장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아들 앞에 완전히 순종굴복해야 됩니다. 그런데 종인 천사장이 아들인 아담한테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이 거꿀잡이가 되었습니다. 천사장이 아담 해와를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즉 주관성이 전도(顚倒)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복귀해야 됩니다.  
하나님편에 있던 아담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원리적인 주관권을 가지고 해와와 천사장을 주관하여 천리의 원칙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됨으로써 창조원리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지만 사랑을 중심삼고는 사탄이 아담을 취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하늘편으로 다시 찾아 세우기 위해서는 주관 받아야 할 천사장이 거꾸로 아담을 주관했기 때문에 반대로 주관 받는 자리에 들어가 원래의 기준을 복귀해야 됩니다. 그래서 사탄편에 세워진 가인이 하나님편에 세워진 아벨에게 역으로 굴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굴복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노정에서 첫 번째 섭리의 흔적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일반 기독교에서는 아벨은 피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열납하고, 가인은 곡식의 제물을 드렸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하나님편에 세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대할 수 있었고, 가인은 사탄편에 세워졌기에 직접 대할 수 없었습니다. (22-247, 69.5.4)
     
     
구원섭리란 곧 장자권 혈통복귀섭리다
     
타락하기 전으로 어떻게 돌아가느냐? 근본적으로 입장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고, 천사장은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꿀잡이가 된 그 기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아담 해와로부터 주관을 받아야 했던 천사장이 거꾸로 아담 해와를 주관함으로써 주관성이 전도되었던 것을 바로 찾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난 장자는 사탄편에 세우고 나중에 난 차자는 하늘편에 세워서 잘못 난 것을 바로 고치기 위해 나중에 난 것을 먼저 난 것으로 바꿔치기 하는 일을 해 나온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인간과 예수님을 놓고 보면, 타락한 세상의 인간은 전부 타락한 아담의 후손이니 결국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 입장, 즉 가인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둘째 번 아담, 즉 후아담으로 태어난 아벨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가인과 아벨의 입장을 바꿔치기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먼저 장자의 입장에서 사랑을 중심삼고 주관의 권한을 행사했기 때문에 동생도 자동적으로 주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빼앗아 나오는 역사를 했습니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팥죽으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았는데, 그런 간사한 사기꾼 같은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3대 하나님의 거룩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장본인이 되었느냐? 그래야만 탕감복귀가 되기 때문입니다. 형이 그르쳐 놓았으니 동생이 그렇게 해서 복귀해야 됩니다. 
성경 66권이 전부 이러한 내용으로 얼크러져 있는 것도 모르고 󰡐눈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덮어놓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덮어놓고 믿어서 천국에 갈 것 같으면 선생님이 지금까지 반대와 핍박을 받으면서 이런 놀음을 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못나서 이 놀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헤치고 또 헤치고, 깨치고 또 깨치고, 알아보고 또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과는 사고의 기원부터 다릅니다. 이것을 해명해 가지고 근본을 시정하지 않고는 인류 구원섭리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를 물리치고 차자가 장자의 권한을 빼앗아야 합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삼고 이것을 이루려고 했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써 사탄이 아담을 침범한 내용을 다시 되풀이한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연장된 것입니다. 왜 절대자인 하나님이 지금까지 6천년 동안 구원섭리를 이루지 못해 인간들로부터 󰡐하나님은 무력하다󰡑 󰡐하나님은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는가? 왜 하나님이 꼼짝 못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는가? 하나님도 딱 걸려드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해도 법을 제정해서 국민들 앞에 공포해 놓은 다음에는 그 자신도 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탄편인 가인이 하늘편인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본래는 아벨이 가인을 순종 굴복시켜서 사탄을 사람 앞에 굴복시킨 자리에 세워 놓아야 할 터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사탄편인 가인이 하나님편의 아벨을 죽임으로써 천사장이 아담을 타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해결점을 찾지 못한 채 뜻은 지금까지 연장되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섭리를 해 나오는 것입니다. (22-248, 69.5.4)
     
     
에서와 야곱 쌍둥이를 중심한 복귀섭리
     
하나님은 아담의 두 아들을 중심삼고 복귀섭리를 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되풀이한 것이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을 중심한 복귀섭리입니다. 처음에는 야곱이 에서로부터 장자의 기업을 팥죽을 가지고 약속으로 빼앗고, 그 다음에는 실체로 빼앗아 온 것입니다. 하란에서의 21년간의 생활은 그것을 빼앗기 위한 싸움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생 야곱을 형 에서는 환영해야 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환영을 받는 데는 그냥 환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천사장을 굴복시킴으로써 인류의 조상 아담이 천사장에게 굴복당한 것을 탕감복귀 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천사를 굴복시키지 않고는 천국 못 갑니다. 
이렇게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천사와 싸워 천사를 굴복시켰다는 기준을 세워 놓았기 때문에 인간이 다시 하나님편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탄을 굴복시켰다는 권한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못 돌아갑니다. 사탄뿐만 아니라 영계에 있는 수많은 천사들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탄이 왜 무서우냐? 본래 사탄은 천사장이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천사는 우리의 종입니다. 그런데 종이 왜 무서우냐 하면 원리원칙에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부잣집의 아들이라 해도 죄를 짓고서 쫓겨나게 되면 종보다도 못한 입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사탄에게 굴복당했던 것을 탕감하여 어느 한 때 다시 사탄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런 내용이 성경에 없다면 성경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성경이 못 됩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밤을 새워 가면서 천사와 싸워 이기고 천사로부터 축복을 받음으로써 그러한 조건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왜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까? 하고 많은 뼈 가운데에서 왜 하필이면 환도뼈를 쳤느냐? 그것은 환도뼈를 잘못 써서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랑을 잘못해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맹세를 할 때는 환도뼈에 손을 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인류의 조상이 사랑을 잘못함으로써 타락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였던 것과 같은 입장에 다시는 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아담이 그릇된 사랑을 해서 타락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빨갱이니 좌익이니 하는데, 좌익이란 왼쪽편으로 사탄편을 말합니다. 또 빨갱이라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직고해야 됩니다. 이런 내용을 말하려면 한정이 없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따로 태어나서 싸웠지만 야곱 때에 와서는 쌍둥이로 태어나서 싸웠습니다. 싸움의 형태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가인 아벨 때에는 따로따로 태어난 형제들을 중심으로 복귀하려고 했는데, 에서와 야곱 때에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들을 중심으로 복귀하려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느냐? 아닙니다. 
본래 인간은 쌍둥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태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왜 쌍둥이로 태어났느냐? 사탄편 아들이 하나님편 아들을 쓰러뜨렸는데 결국 먼저 태어난 장자의 자리를 차자가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아담 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은 형과 동생으로 따로 따로 태어났는데 서로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쌍둥이는 단 몇 분간의 차이밖에 안 납니다. 하나님은 형과 동생의 거리를 그만큼 단축시킨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는 데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태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쌍둥이를 통하여 역사하느냐? 가인도 아담의 아들이요, 아벨도 아담의 아들인데 그들이 하늘편과 사탄편으로 갈라져 두 갈래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한 뱃속에 집어넣어 싸우게 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동생이 승리하여 장자의 입장으로 이 땅에 나와서 전부 주관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싸워서 이기려면 결국은 뱃속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한 단계씩 점점 내려가 뱃속까지 찾아 들어가서 거기에서 이겼다는 기준을 찾아 세우지 않고서는 장자 복귀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역사는 뱃속으로 몰아넣는 역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 아벨 때보다 에서 야곱 때는 달라졌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로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래서 사탄편인 형을 하나님편인 동생이 굴복시키면 자동적으로 복귀됩니다. (22-150, 69.2.2)
얍복강가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했을 때 만약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형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천사를 영적으로 굴복시켰기 때문에 영적 세계의 수많은 선조들도 야곱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영적으로 승리한 터전 위에 선 야곱을 에서가 환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나갈 수 있는 기준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에서가 야곱을 환영함으로써 야곱이 에서의 장자 기업을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때려 죽였지만 에서는 그런 원수와 같은 입장의 야곱을 때려 죽이지 않고 환영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역사가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끼리 싸움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근원이 연장되어 나오던 역사에 야곱과 에서가 화목하여 하나됨으로써 새로운 페이지가 장식되었고, 거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입니다. (22-253, 69.5.4)
     
     
베레스와 세라를 중심한 복중복귀섭리의 결과
     
야곱과 에서는 태어나서 자란 뒤에 싸웠고 야곱이 이겼습니다. 그러나 원래는 태어나기 이전에 복중에서부터 싸워 이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보면 다말의 역사가 나옵니다. 다말이 유다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잉태했습니다. 여기서 다말이란 여인은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창부의 행세를 하여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잉태를 했습니다. 다말이라는 여인은 왜 그렇게 해야만 되었는가? 그것은 혈통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음란의 씨가 뿌려졌기 때문에 거기서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서 새로운 씨를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으면 복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러한 유다지파를 통해서 태어나야 했느냐? 유다지파의 조상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다입니다. 이 유다의 장손은 다말을 통해서 태어난 베레스인데, 왜 예수님이 다말을 통해서 낳은 그 장손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나야 했느냐? 󰡐왜 그러긴 왜 그래, 하나님이 그렇게 태어나게 했으니 그렇게 태어났지󰡑 할는지 모르지만 그런 대답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비법적(非法的)인 입장에서 다말을 통하여 베레스와 세라가 태어난 것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그렇게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베레스와 세라가 다말의 복중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성경 창세기 38장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산모가 만삭이 되어 산파가 와서 기다리는데 복중에서 형제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형이 먼저 나오는 것을 밀치고 동생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처럼 밀치고 나왔다고 해서 베레스란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이렇게 복중에서 형 세라를 밀치고 동생 베레스가 먼저 나왔기 때문에 거기서 하늘의 역사는 실체 복귀의 기반을 닦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베레스가 세라를 복중에서 굴복시켜 가지고 태어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는 승리의 터전을 복중에까지 닦아 놓았습니다. 
성경이 참 재미있게 되어 있는데, 선생님이 말하기 좋으라고 그렇게 되어 있겠습니까? 사람이 태어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먼저 이 땅 위에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이 거기에서 닦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혈통은 타락인간들과는 다릅니다. 
아담은 타락한 후 패자의 조상이 되었지만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승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중에서 승리한 기반을 못 가진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가인과 아벨의 입장이 아니라, 복중에서부터 형을 굴복시킨 역사가 벌어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야곱의 아들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야곱과 그 아들들 2대를 중심삼고 복중복귀 역사를 해서 하늘편 아들이 먼저 장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다음에 태어난 동생은 그 형에게 절대 복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복종하고 자동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터전이 닦였으므로,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는 비로소 이 땅에 발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핏줄, 즉 혈통을 바꾸는 역사입니다. (22-253, 69.5.4)
     
     
성경의 비법적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마태복음을 보면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4대 음녀가 나옵니다. 성경상으로 보면 그들은 전부 음녀입니다. 왜 성경에, 그것도 마태복음의 맨 첫머리에 그런 사람들을 기록해 놓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서, 악한 사람도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섭리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데, 말은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 그렇게 빠져 들어갔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다말과 유다의 지파를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어찌하여 그러한 음녀가 어머니의 입장에서 역사를 전개시켜 나왔느냐? 솔로몬왕의 탄생도 그렇습니다. 다윗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서 관계를 맺은 비법적인 행동을 통해서 솔로몬왕이 태어났습니다. 이런 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물어 보면, 목사나 신학박사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인간이 알 수 있느냐고 하면서 화를 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무지를 전부 잘라 버리고 뭉개 버려야 할 것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선생님의 사명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을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학박사 아니라 목사 할아버지라 해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22-255, 69.5.4)
     
원죄와 상관없으신 예수님
     
복중에서부터 승리한 터전 위에 선의 혈통을 중심삼고 선조들의 그러한 전통을 이어 충성을 다한 이스라엘 민족의 여인들의 정성어린 계대를 이어, 2천년 후에 마리아에 이르렀습니다. 마리아가 다말을 중심삼고 복중복귀에 승리한 혈통적인 전통을 이어받아 비로소 예수님을 잉태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복중에 아기가 잉태되면 벌써 사탄이 참소합니다. 그러면서 󰡐이 자리는 나의 자리요, 여기에 잉태되는 사람은 모두 그릇된 사랑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전부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탕감복귀 원칙에 의해 다말의 복중에서 하늘편인 베레스가 승리한 혈통적인 기반 위에서 마리아의 복중을 통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복중에 잉태되었을 적부터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일반 종교 지도자들과 다른 점이 그것입니다. 태어난 근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중에서부터 사탄과 싸워 승리한 기반 위에서 사탄을 굴복시켜 장자의 기준을 세우고 예수님은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도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로소 2천년만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2천년만에 태어나셨는가? 복귀는 가인 아벨의 복귀, 즉 형제 복귀인데, 사탄세계의 국가들이 먼저 태어난 가인형의 나라입니다. 이 가인형의 나라들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아벨 나라가 새로 생겨나야 합니다. 이 아벨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2천년 동안 길러서 하나의 아벨적인 나라를 이루어 사탄세계의 수많은 가인적 국가들을 굴복시키려 하였습니다. 
본래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아도 되는 입장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죽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십자가에 죽게 되었느냐?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다고들 말하지만, 그런 시시한 얘기는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지 않고는 구원을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놓고 볼 때, 그는 마리아의 복중에서 잉태되어 태어났지만,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전부 걷어치운 입장에서 잉태되어 탄생했기 때문에 사탄이 참소할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사탄이 참소할 조건이 없다는 것은 원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 죄라고 하는데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게 죄입니다. 원수가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 원리원칙에, 법도에 어긋나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탄에게 걸려듭니다. 예수님은 태어나기를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자리를 벗어난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없는 분입니다. 사탄의 주관권내에서 사탄과 접하는 것이 원죄인데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 조건뿐만 아니라 모든 조건을 넘어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원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바꿔치는 역사를 해왔습니다. 에서와 야곱 때 바꿔치고 또 야곱의 아들 베레스 때 바꿔치고 안팎으로 바꿔쳐서 승리의 기반을 닦아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승리했다는 뜻인데, 단순히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해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천지에 엉클어진 모든 사연을 풀기 위한 열쇠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 위에 태어나되 원죄와 상관없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22-256, 69.5.4)
     
     
2. 요셉 가정과 예수님의 한
     
     
 요셉 가정은 하나님이 택한 가정
     
하나님이 요셉 가정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냈는데 요셉 가정은 이스라엘 전체의 가정 중에서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요셉 일가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 전체에 연결되게 되어 있었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불행한 요셉 가정을 제일 사랑하였는가? 이는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을 그 가정에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셉 가정은 그 아들을 보호하고, 그 아들의 뜻 전체를 자기들의 뜻으로 알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요셉 가정은 하나님이 택한 가정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요셉의 친척이었습니다. 또 요셉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족의 대표 가정으로 요셉 가정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님 한 분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셉 가정에서 정혼한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16-24, 65.12.26)
이스라엘 나라는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유대교도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요셉 족속도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수님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유대교요, 유대교의 중심은 요셉 족속이요, 요셉 족속의 중심은 마리아요, 마리아의 중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중심이니까 요셉 족속의 중심이 됩니다. 그러니 교회의 중심이요, 나라의 중심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중심된 자리에서 가정을 가졌다면 그 가정은 중심된 가정이 됩니다. 중심 가정이니까 종족의 중심도 되고, 민족의 중심도 되고, 국가의 중심도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가정을 가졌다면 한꺼번에 다 통일됩니다. 가정을 이루었다면 씨족도 통일되고, 교회도 통일이 되고, 나라도 통일됩니다. 한꺼번에 다 통일됩니다. 종적으로 연결된 것을 일시에 횡적으로 탕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까지 종적 역사를 거쳐오면서 생겨난 나라와 교회와 씨족과 가정이 한꺼번에 통일되는데, 그 통일된 가정은 새로운 가정이요, 통일된 씨족은 새로운 씨족입니다. 주권자가 달라지니 모든 것이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 통일된 그 교회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제사장이 달라졌습니다. 국가가 통일되면 그 국가는 새로운 국가가 됩니다. 일시에 다 됩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주권자를 중심한 국가가 하나된다면, 하나님이 소원하던 뜻이 성취됩니다. 교회에 대한 소원이 성취되고, 요셉 족속에 대한 소원이 성취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다 성취됩니다. 소원이 다 성취되었으면 하나님의 한과 예수님의 한이 안 맺힙니다. 그 다음 이스라엘의 한도 맺히지 않고 일시에 다 풀립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를 잃어버리고 고생을 했습니다. 나라가 예수님을 반대해서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반대하니 교회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 요셉 족속도 예수님을 바알세불이 들린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나가 안 되었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심정을 갖지 못했고, 자기의 생명을 바쳐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따라다녀야지, 왜 따라다니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41-241, 71.2.16)
     
     
마리아를 데려온 후 당당하지 못했던 요셉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했을 때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기 어머니 아버지한테 의논하고 데려왔을까요, 살짝 데려왔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또 대낮에 데려왔을까요, 아니면 밤에 아무도 모르게 감쪽같이 데려왔을까요? 감쪽같이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 집에 이틀 사흘, 며칠 동안 있으면 안 됩니다. 보이지 않게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유대 나라에 가 보면 변소 같은 데도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빨리 다녀와야 됩니다. 요즘은 문화시설이 잘 돼 있어서 구석진 방안에 있으면 1년을 가도 모르지만 당시에 그럴 수 있어요? 지금도 유대 나라에는 지붕 없는 집들이 많습니다, 비가 안 오니까. 그러한 집에 총각의 방이 따로 있겠어요? 그런데 방에다 처녀를 떡 데려다 놓았으니 며칠 후에는 그 소문이 났겠어요, 안 났겠어요? 동네 어른들까지도 다 알게 됩니다. 이상하다고 수군수군하고 다녀서 다 알았을 것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아버지가 그러한 소문을 들었겠어요, 못 들었겠어요? 
요셉의 어머니 아버지가 소문을 듣고 와서는 요셉에게 󰡐어찌된 것이냐?󰡑 하고 물을 때, 요셉은 자신만만했어야 됩니다. 마리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며 당당하게 얘기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꾸물꾸물 댔다는 것입니다. 또 친구들이 󰡐이 녀석아, 저 여자를 왜 데리고 왔어?󰡑 할 때 요셉이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꾸물꾸물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처녀가 아기를 배면 돌로 맞아 죽는 시대였습니다.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가르쳐 줘서 마리아를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그도 마리아가 성신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약혼녀가 아기를 뱄을 때 그 신랑 될 사람이 그 아기의 애비가 누구냐 할 때, 󰡐애비가 누군 누구예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신으로 잉태했어요󰡑 하면 그것을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 요셉의 기분이 나빴다는 것입니다. 기분은 나빴지만 데려왔습니다. 
그런 입장이었기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데려다 놓고, 그 아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서 아기를 가졌는지 물어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에게 그렇게 물어 볼 때, 마리아가 󰡐내 복중에 있는 아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신으로 잉태했습니다󰡑 한다고 그 대답을 믿겠어요? 그런 대답을 하니 󰡐내가 너를 구해 주고 살 길을 열어 주었는데 아직까지도 날 속이기 위해 그런 수작을 부리느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문제가 벌어졌습니다. 마리아의 배가 불러 있으니 요셉이 마리아에게 다그쳐서 추궁했는데 대답이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충돌이 생기고 하다 보니 그러한 사실이 온 동네에 다 소문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디에 가서 아기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강한 심장을 가졌더라도 그런 판국에서는 󰡐나 아기를 낳겠어요󰡑 하게 안 됩니다.
마리아가 갈 수 있는 길은 사람이 없는 무인지대, 사막지대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 스스로도 하늘 앞에 눈물지으며 호소하던 때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의 왕자로서, 이스라엘의 왕과 제사장들이 예물을 드리고 경배를 드리는 영광된 자리에서 태어나야 될 텐데도 불구하고, 세상도 모르게 감쪽같이 낳으니 이방에서 계시 받은 동방박사 세 사람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을 인류의 참군왕으로 인간이 맞아들였다는 조건을 세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체면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국경을 넘어 찾아오게 하여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억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41-244, 71.2.16)
     
     
서럽게 자란 예수님
     
예수님은 비참한 환경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 앞에 충성의 법도를 세워서 먼저 하나님을 받들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 터전은 요셉 가정에서부터 마련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부터 그것을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도 하늘의 고운 천사들의 지도를 받아서 자신이 낳은 아들이 장차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자라실 때 하나님이 언제나 마리아에게 같이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마리아는 어찌 하다 보니 예수님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요셉 가정에서 예수님은 자랐습니다. 
한편, 요셉에게는 예수님이 진실로 성령으로 잉태했는지, 아니면 누구에 의하여 잉태했는지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정혼한 처녀가 아기를 배 와서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르쳐 준 그 사실은 믿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바라볼 때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어찌 심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되어 예수님은 의붓아버지의 품에서 서럽게 자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러웠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으로부터 무엇을 하라는 말을 들을 때에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입장에서 듣지 못했습니다. 의붓아버지의 의심을 받는 입장에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학대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16-24, 65.12.26)
그러니 예수님의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집으로 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씨족을 찾아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교회를 찾아가려고 해도 갈 수 없고, 나라를 찾아가려고 해도 갈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니 죽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머무를 데가 없었습니다. 의붓아버지인 요셉의 등살에 뼛골이 녹아났습니다. 
예수님의 사정을 상세히 알아보면 땅을 치고 통곡할 사연이 맺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의붓아버지나 의붓어머니에게서 자란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잘 해주어도 잘 해주지 않는 것 같고 항상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41-243, 71.2.16)
     
     
한 많았던 예수님
     
마리아 역시 요셉에게 기분 나쁜 일이 있거나 요셉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리는 일이 생겨나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의붓자식을 데리고 시집을 간 부인이라면 남편이 조금만 얼굴을 찌푸려도 그 모든 것을 어찌 자기의 의붓자식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입장에서 행복의 터전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한이 많았습니다. 명절날이 가까워 오면 자기 동생들은 엄마 아빠와 함께 기뻐하고 즐기며 준비할 수 있었지만, 생각이 많은 예수님은 옷 한 가지 해 달라고 할 때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처량한 모습으로 명절을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아느냐?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물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날 집에서 떡 같은 것을 해놓았다 하더라도 󰡐어머니, 나도 좀 주십시오!󰡑 하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좋은 것이 있더라도, 동생들이 입고 있는 아름다운 옷을 바라보면서도 󰡐나도 좀 주십시오. 나도 좀 해주십시오󰡑 하고 말할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사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던 예수님!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어깨를 겨누고 환경에 보조를 맞추며 나날을 즐길 수 없었던 예수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런 것을 누가 알아요? 그저 󰡐오오! 만왕의 왕,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 위에 오셨다!󰡑라고만 알고 있지, 명절 때 때때옷 입고 부모와 함께 기뻐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염없는 눈물을 흘린 어린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 천지를 둘러볼 때 그리운 것은 자신을 품어주는 부모의 정이었습니다. 동생이 있어도 동생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예수님! 그 동생들 앞에서 형이라 자처할 수 없는 사정에 놓여 있던 예수님!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냐? 나면서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의 혈육을 대하여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48~50절)󰡓고 하셨느냐?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가신 예수님입니다. (16-25, 65.12.26)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요셉 가정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 때문에 싸움이 많았습니다. 동생들까지도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혼자 있을 때 동생들이 와서 󰡐세상 사람들이 형님만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 많은 데 가서 선전하지 왜 여기 있소󰡑 하며 비난을 했습니다. 이렇게 동생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처량하게 살았습니다. 
통일교회 선생님이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예수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다 들어서 압니다. 선생님이 꾸며서 하는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님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와 동생들은 불평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도 길을 가다가 형제들에게 물을 떠 먹이더라도 그 어머니는 예수님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예수님께 먼저 떠 주고 하니 그 길에서도 트러블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올라갔다가 돌아갈 시간에 기분이 나빠 서로 싸우면서 돌아갔습니다. 싸우는 마리아의 신세를 본 예수님도 어떻게 얘기를 할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요셉도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가자는 얘기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도 안 데리고 마을까지 거의 다 왔을 때,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간 것을 알고 있는데 가만 보니 꼴이 안 되겠으니까, 할 수 없으니까 둘이 만나 얘기해서 사흘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한 예수님의 말이 항거의 말인 줄도 모르고 칭찬의 말로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도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책임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41-246, 71.2.16)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 어머니가 뜻대로 못 했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어야 했습니다. (41-243, 71.2.16)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요셉도 예수님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라야 됩니다. 예수님이 밥을 굶으면 자기는 굶더라도 대신 밥을 얻어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집을 나가게 될 때 요셉과 마리아가 따라 나서면 예수님 동생들도 따라 나서는 것입니다. 요셉 가정이 그 동네에서 중심되는 가정이라면 이종사촌인 세례 요한도 따라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41-247, 71.2.16)
     
     
인류구원의 책임감을 지고 남몰래 정성들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목수인 요셉 밑에서 조수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낫을 들고 나무를 깎고 대패를 들고 나무를 밀 적마다 이스라엘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된 이스라엘 민족이 이래서는 안 되겠으니, 내가 대신 깎고 다듬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언제나 이스라엘을 품고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뒤넘이칠 수 있는 마음으로 일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념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님의 소원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그의 생애를 단장하기에 전심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깊은 밤 부모와 형제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자는 고요한 밤에 밖에 나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서 그 마음을 호소했고,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그것들을 자신의 친구삼아 󰡐너는 내 사정을 알고 내 뜻을 잘 알지󰡑 하면서 마음을 달래곤 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만물과 자연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셨고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할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참다운 인간을 찾지 못하고 참다운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지 못함으로써 자연의 품을, 그리고 하나님의 품을 은근히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래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참다운 아들이요 하나님의 왕자요 만민의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태어난 그날부터 하나님의 왕자로 모셨어야만 됩니다. 매일같이 예수님께 경배해야 됩니다. 만왕의 왕이요, 길이길이 온 천주를 지배할 수 있는 하늘의 주권자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태어난 그날부터 요셉과 마리아는 그에게 정성을 다하고 충효의 도리를 다하여 모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자기 아들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해야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천법으로는 그래야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이 예수님을 요셉 가정에 보낼 때는 예수님을 서럽게 하기 위하여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가르쳐 주어서 마리아의 복중을 통하여 예수님을 탄생시킨 것은 그가 영광을 받고, 보호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지 몰리고 쫓김 받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 가정에서부터 틀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때를 알고 하늘의 사명이 자기 일신에 짊어져 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님은 자중하면서 그 형제들과 부모를 하나님의 뜻 앞에 인도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릅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태복음 23장 37절)󰡓고 하신 말씀도 이스라엘 민족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가정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천륜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지고 오신 예수님께서, 즉 무엇보다도 귀하고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을 하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까운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를 먼저 위해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의 사랑하는 부모한테 먼저 드리고 싶은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또 누구보다도 자기의 사랑하는 동생, 자기의 사랑하는 친척에게 먼저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철이 들면서부터 하나님이 요셉 일가를 찾아온 역사적인 인연을 생각하고, 요셉 일가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몇 번이고 하늘 앞에 다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느냐? 원칙은 식사 때 밥을 담을 때도 예수님 것부터 먼저 담아 드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의 생활 전체를 책임져야 됩니다.  (16-27, 65.12.26)
     
     
본래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크고 엄청나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요셉 가정에서부터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래야 할 원리적인 내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동생들도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놓고 동생들은 󰡐형님이 메시아로 나타나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이 많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왜 안 가느냐󰡑고 비난했습니다. 동생들이 그렇게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괄시했습니다. 정상적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그 집안에서부터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입니다. 친척입니다. 친척들이 다리를 놓아 요셉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되어서 예수님의 뜻을 받들고, 형제들이 제자가 되고 친척들이 모두 사도가 되어서, 즉 형제와 친척들이 12제자, 70문도, 120문도가 되어서 악한 세상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종족, 다른 민족과 대결하여 나갔다면 예수님은 절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부터 형제들을 중심삼고 기틀을 잡음으로써 이루어야했던 예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 엄청난 천도는 그 부모와 형제들부터 받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 일가는 하나님이 찾아온 4천년의 은사를 일시에 잃어버리게 되었고, 하나님을 일시에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쫓아냄으로써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괜히 베드로, 야고보 같은 어부들을 찾아 다니셨겠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이 왜 요셉 가정을 떠나 제자들을 택하기 위하여 돌아다니셔야 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16-29, 65.12.26)
     
     
30세에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요한복음 2장 4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곡절과 사연이 얼마나 많이 맺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배후의 사실들이 일일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말못할 사정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칫집에서 자기 어머니를 보고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신 말씀과,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는데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태복음 12장 50절)󰡓고 하신 말씀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세 번씩이나 간곡히 권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뜻을 받들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륜이 인륜 앞에 흡수될 수는 없습니다. 인륜이 천륜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기를 이 땅 위에 보낸 뜻이 인륜을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정리하고 심판할 수 있는 천륜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륜의 법도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놓고 얼마나 통사정을 했는지 모릅니다. 세 번씩이나 권고하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요셉에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30세가 되었고, 30세가 되자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세에 집을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과 억울함,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괴롭고도 서러웠던 사정을 아는 사람이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가족과 일가, 즉 하늘이 마련해 준 4천년의 터전을 버리고 나와야 했던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서러우셨겠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16-30, 65.12.26)
     
     
3. 세례 요한과 예수님
     
     
종교의 사명
     
타락인간이 복귀하는 데는 결코 그냥 그대로 복귀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창조원칙에 따라서 복귀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복귀역사, 재창조역사를 통해서 섭리해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천사장이 있고 해와가 있고 아담이 있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위((四位)의 형태를 갖춘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타락했기 때문에 복귀하는 데는 재창조원칙을 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를 복귀하기 전에 천사장을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타락하지 않은 종, 다시 말하여 인간 앞에 충성하고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할 천사장이 그러한 종이 못 된 것을 복귀하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수천년 동안 천사장의 터전을 확대시켜 하나님과 인간 앞에 충성을 다해야 할 책임을 못한 종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 앞에 충성을 다할 수 있는 대표자를 선출하기 위한 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나타난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입니다. 
그 종교가 반드시 찾아야 했던 것은 앞으로 올 메시아입니다. 아담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아담을 먼저 짓고 그 다음에 해와를 지었습니다. 순서가 그렇습니다.
천사장의 사명을 할 수 있는 판도를 넓히기 위해서, 천사장을 복귀하기 위한 세계적인 대표자를 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세워 나왔다고 했는데, 그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 곧 종교가 바라는 소망이 무엇이냐?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던 천사장의 입장을 완결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영원히 신임 받을 수 있는 종으로 결정됨과 동시에 아담 앞에 영원히 충성한다는 조건을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종교로서 찾고자 하는 천사장의 입장을 완전히 찾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유대교의 역사과정에서 당대를 책임졌던 제사장들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를 모시기 위한 국가적이요, 세계적인 판도를 넓히기 위한 기초작업을 해 나온 데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기필코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귀원칙, 창조원칙에 어긋납니다. 천사장이 복귀된 기준 밑에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담을 사랑하고, 사람 앞에 영원히 종이 될 수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 앞에 충신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종교적 대표자들이 나와야 됩니다. (46-197, 71.8.15)
     
     
 세례 요한의 입장과 사명
     
성경에 세례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산 것이 잘산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장차 올 메시아를 만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 나갔습니다. 그런 놀음하는 것을 자기 부모가 좋아했겠어요? 그 형제들이 있었으면 좋아했겠어요?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그런 환경을 극복한 대표자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에 가 보면 그곳은 메뚜기와 석청이 많이 나는 곳이 못 됩니다. 언제나 그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메뚜기와 석청이 없을 때는 얻어먹기가 일쑤였을 것입니다. 아이들한테 손가락질 당하고, 이상한 사나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이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절대적이어서 악의 세계에서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분립된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는 자리에서 메시아를 맞게 한 것입니다. (53-274, 72.3.1)
유대교를 두고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례 요한은 수많은 종교권에서 하나님이 세계적으로 선택한 대표적인 천사장형으로서,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그의 생명이 존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요,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은, 에덴에서 천사장이 아담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하나님과 아담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태어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존속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기뻐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빼놓고 기뻐한다면 그 기쁨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없으며, 그가 아무리 가치적인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만나서 가치적인 인연을 맺고 예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가치의 내용과 접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빼놓고서는 그가 아무리 가치적인 생활을 했고, 또 그의 생애가 아무리 거룩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담 때문에 천사장을 지었으므로 세례 요한이 이 땅 위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아담을 위하여 충성하는 실질적인 기반을 갖지 못하면, 하나님은 그 충성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담을 위하여 지었던 종, 즉 세례 요한의 사명은 아담을 통하여 완결을 봐야 합니다. (46-198, 71.8.15)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가인 아벨 관계입니다. 한 아버지의 혈통입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사가랴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잉태한 다음 사가랴의 집에 가 있었습니다. 6개월 동안 있으면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사가랴가 아니라면 원리가 틀립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신으로 잉태했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성신으로 잉태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을 성신으로 잉태했어요? 예수님을 그냥 그대로 동정녀가 낳았어요? 동정녀가 아기를 가지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기독교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리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사생아인 것을 몰랐을 것 같아요? 다 알았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가 싸웠습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어 볼 때 대답을 안 하니까, 그것을 중심하고 싸운 것입니다. 요셉이 물어 볼 때마다 󰡐성신으로 잉태했다!󰡑 하면, 󰡐이 쌍간나, 살려 주었는데 무슨 수작이냐?󰡑 하며 예수님을 놓고 부처끼리 싸우고, 아들딸을 낳은 후에도 계속 싸움을 했다는 것입니다. (235-237, 92.9.20)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원리적 관점에서 보면, 그 6개월은 인간들의 6개월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6천년의 6수를 대표한 기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짓기 전에 만물을 지었고, 만물을 짓기 전에 천사세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 아담을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단계의 기준에서 천사장을 대신하는 입장에 서야 했던 세례 요한을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도록 제반 준비를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모든 전통사상을 일신에 귀결시키고 안팎으로 나라와 교회를 움직여서 충성의 도리를 다하여 유대교단과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순수하게 받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외적인 문제를 책임져야 되고, 내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것도 협조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어떤 문제까지 협조해야 했느냐? 타락을 천사장이 시켰기 때문에 천사장 입장이었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 있는 안팎의 모든 사연을 대신 책임지고 예수님이 복귀의 사명을 하는데 협조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상대를 결정하는 문제에도 예수님 자신이 주도적으로 하면 안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타락을 천사장이 시켰기 때문에 천사장을 복귀한 입장의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안팎을 가려야 할 복귀의 중대한 문제, 다시 말하면 신부를 복귀하는 문제까지도 전폭적인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쓰라림과 고통이 있으면 누가 책임져야 되느냐? 천사장이 잘못하여 그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세례 요한 자신이 그 모든 어려운 문제를 책임지고 예수님이 가는 길 앞에는 환난이나 시련이 일체 없게끔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대의 세례 요한에게 맡겨 준 사명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태어난 사가랴 가정은 마리아 가정과 친인척간입니다. 마리아는 세례 요한의 이모가 되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은 이종사촌이었습니다. 가정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요셉 가정과 사가랴 가정이 하나되고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하나되었다면 예수님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셉 가정에서 목수의 조수를 하기 전에 사가랴와 세례 요한의 협조를 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목수의 조수 생활 30여 년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뜻적인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아를 위해서 준비된 사가랴 가정이나 사가랴 자신에게 있어서나, 또 30여 년의 생애 동안 메시아를 맞기 위해 수고의 노정을 갔던 세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목수생활을 시키고 집을 떠나 외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가까운 입장에서 내적인 사정을 통하고 내적인 사연을 의논해 가면서 이스라엘 나라와 복권을 위해 안팎으로 하나되어야 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세례 요한이 책임지고 재미있고 기쁜 일은 예수님 앞에 재료로 줄 수 있게끔 개인 개인이 안팎으로 갖춰짐과 동시에 가정이 안팎으로 갖추어져야 했습니다. 유대교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 가정이요,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 세례 요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중심삼고 안팎으로 하나될 수 있는 기준을 결정 지었더라면 그것이 핵심이 되어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를 자동적으로 하나로 흡수할 수 있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46-199, 71.8.15)
     
     
세례 요한의 격위와 사명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구름 타고 다시 오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기 전에 이 땅 위에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지을 수 있는 하늘의 충신이 나와야 됩니다.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뜻을 위해서다󰡑라고 선포하는 자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벌어졌습니다. 그 사명의 대표적인 중심 존재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나니! 내가 온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증거하기 위해서다󰡑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종으로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대표하여 타락한 직후의 아담의 자리를 복귀해야 했습니다. 타락 직후의 아담의 자리,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로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복귀해야 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자리를 복귀하여 세상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상속해 주기로 약속해야 할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세례 요한 개인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 이스라엘 역사를 대표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한 말이요, 4천년 역사를 대표하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전 인류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준 그 자리는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상속하는 자리였습니다.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아직까지 하늘의 충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충신이 나오려면 이 땅 위에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천사장은 그 하나님의 아들을 모심으로써 하늘 앞에 충신의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함으로써 충신의 기준이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역사적인 종말시대에 기필코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충신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세운 것은 그때까지 4천년 동안 하나님과 대결해 온 사탄의 괴수 천사장, 하나님을 배반한 그 천사장 말고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고 나서는 천사장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 충성을 다하고, 예수님을 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으로 알고 그것을 헤쳐 나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슬픔은 더욱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 제자 가운데 들어가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환영하던 수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은 신랑 신부의 본연의 이름을 갖춘 하나님의 아들딸 앞에 충성한 천사세계의 대표적 실체로서 천사세계를 이끌고, 실체 사탄세계를 방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올 수 있는 천사장의 실체목적을 완결한 세례 요한이 되어야 하는데, 그가 그 사명을 완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사명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 되는 도리가 생겼습니다.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신랑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영광 가운데 출발해야 했던 예수님은 슬프고 원통한 종의 멍에를 쓰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과정이 남아 있기에 그 고개를 넘기 위해 나온 것이 기독교의 2천년 역사입니다. (15-245, 65.10.17)
     
     
세례 요한의 위대한 점과 그가 가진 메시아관의 한계점
     
성경에 나타난 세례 요한을 살펴보면, 세례 요한은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는 집을 떠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분립해서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 하나님,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보다 앞서 왔던 선지자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온 세계를 통치하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가 기도할 때는 남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눈물 흘렸고, 유대 민족이 사탄세계를 다스릴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며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울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었지만 세례 요한은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그의 갈 길을 곧게 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오실 분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을 위해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요한이 그 자신의 나라의 통치자를 위하여 기도를 했지만, 반면에 예수님은 전세계의 통치자로 오셨습니다. 요한의 관점은 하나님의 심정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메시아관은 자기 나라를 위한 메시아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꿈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규칙이었던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전세계를 구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야는 더 넓었으며,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시야에는 하나의 국가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반대했던 이스라엘 민족편에 서게 되어 예수님의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편에서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과 세례 요한을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던 온 민족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52-54, 71.12.14)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했던 세례 요한
     
예수님 가정이 그를 믿고 철옹성 같은 울타리가 되었다면 베드로 같은 어부나 무식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이나 사촌, 육촌, 팔촌 등 문중에서 열두 제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촌이나 사돈의 팔촌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1장 7~8절)󰡓 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태복음 11장 12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갔던 것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세례를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누가복음 7장 19절)󰡓 하고 수작을 했습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고 했기 때문에 세례 요한 자신이 이루어야 할 천국을 힘쓰는 베드로가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장 11절)󰡓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제일 컸다면 영계에 가서도 커야 되는데 거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예언적인 증거를 했지만, 예수님의 실체를 보고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은 세례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이 제일 큰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시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은 맨 꼴찌입니다. 영계에 간 수많은 선지자들은 먼 미래를 두고 메시아를 증거했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직접 모시는 입장은 아니지만 영계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고 있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모시는 데는 맨 꼴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해석해야 풀리지 거꾸로 들이 맞춰서는 되지 않습니다. 성경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든 그 내용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41-247, 71.2.16)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세례 요한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몰라서 반대했지만, 예수님을 증거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과연 믿었느냐? 마태복음 11장 2절 이하를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나가 전도하는데,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은 예수님한테로 모든 사람이 몰려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례 요한에게 하는 말이 󰡐선생님한테 세례 받은 예수님께로 모든 사람이 가나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요단강가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대하여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더니, 언제는 제자를 보내어 예수님을 의심하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제자를 보내어 묻는 말을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한 말을 듣게 될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세상 천지에 교회와 나라와 백성이 전부 반대하고 누구 하나 지지하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요단강가에서 자기를 증거한 세례 요한 하나만은 자기를 지지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 그러니 기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을 지적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다음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풍자적으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냐. 그런 자들은 궁중에나 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고 들이쳤습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마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이 기가 막혀 세례 요한을 다시 공격하는 말이 󰡐여인이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더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영계에 간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반대적인 현상이 벌어지느냐? 이제 그 뜻을 밝혀 주겠습니다. 모든 선지자의 사명은 오실 메시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과거에 왔다 간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증거하는 데도 먼 역사적 거리를 두고 증거했지만, 세례 요한은 메시아를 직접 증거했습니다. 그러니 증거라는 입장에서 보면 제일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천국에서 제일 작으냐? 천국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은 이 땅 위에서 핍박받는 예수님이 메시아인 줄 알고 믿고 모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만이 천국을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힘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힘썼으면 어떻게 됐을 것이냐? 힘썼더라면 수제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세례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세례 요한이 수제자가 됐더라면, 열두 제자인 사도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70문도, 120문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도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하나됐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아죽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선지자인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고위층과 모든 서기관들을 합하여 예수님과 하나되게끔 했어야 합니다. 그 일을 하도록 준비한 대표자가 세례 요한이 아니었더냐? 그건 틀림없습니다. 
14절까지 보면, 󰡐모든 선지자와 율법에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구약성경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열매되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하나됐더라면 신약이 출발됩니다. 만인의 주님이 되었다면 무식한 사람들을 제자 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으니까 그랬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가 안 그런가 알아봅시다. 요한복음 3장 30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대해서 증거하여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답변한 세례 요한의 말에 대하여,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례 요한이 겸손하고 온유하기 때문에 그런 대답을 했다고 위대한 선지자로 모셔 왔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를 선하고 높은 분으로 봅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아와 행동을 같이했다면, 메시아가 흥하면 세례 요한도 흥하는 것이요, 메시아가 망하면 세례 요한도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두 갈래 길이 생겨날 수 있었느냐?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될 때 충격 받을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끝날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청산하고 안팎의 그릇된 관념을 청산할 때가 되었으므로, 역사적 과정에 숨겨졌던 모든 것을 들춰내어 청산 짓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73-214, 74.9.18)
     
     
세례 요한의 불신의 결과
     
세례 요한이 실수하고 요셉 가정이 책임을 다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이 그 책임을 몽땅 추궁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신임하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배반하는 자리에서 예수님 앞에 책임을 다 갖다 맡기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외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고 내적으로는 가정의 어려움, 즉 심정적인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외적으로는 죽음을 각오하고, 내적으로는 심정적인 비탄을 느끼면서 책임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천사장이 해와를 타락시켰습니다. 거기에 아담도 끌어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뜻에 세례 요한이 협조하여 신부를 맞았더라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가정을 이루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위기대를 이루었더라면 지상의 복귀는 그때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상대가 결정되어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중심삼은 천사장과 아담 해와와 같은 입장이 당시의 유대교를 중심삼은 이스라엘이라는 허락한 터전 위에서 결정되었더라면, 거기서부터 창조원리에 의한 복귀의 형태가 지상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예수님 앞에 비통한 사연이 열매맺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천사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해와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고, 아담의 사명도 실패로 돌아갔으며, 하나님의 섭리도 실패로 돌아가 하나님은 다시 슬퍼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죽었지만 그가 죽은 후에 부활해서 세례 요한을 대신한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입장이 됨으로써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삼고 복귀역사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했지만 부활한 터전 위에서 성신을 중심삼고 영적으로나마 하나님을 중심삼은 천사장 복귀형과 아담 복귀형과 해와 복귀형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계와 육계가 갈라져 어려운 수난을 거치는 타락권을 개재시키긴 했지만 그런 내용을 갖춘 조건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새로운 출발을 했습니다. 
이런 역사가 예수님 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를 중심삼고 영육을 통하여 완결지어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민족과 가정,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사명을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추방 받는 종교가 되어 이 지구성에 발붙이기 위해 모진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46-200, 71.8.15)
     
     
지금까지의 영적 역사의 목적
     
예수님이 돌아가심으로써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해서 영적인 사위기대 형태를 갖추어 역사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타락은 창조원칙에 배치된 것이기 때문에 지상에서 사위기대의 완결을 봐야 됩니다.
육적인 실패를 가져옴으로써 영적인 기반을 중심삼고 기독교가 연결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전세계의 남자나 여자들은 어디까지나 반쪽입니다. 몸이 있으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소망 이외에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는 세상을 끊고 순전히 영적인 구원을 소망해 나온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반쪽이라는 것입니다. 
영이라는 것은 육을 통해서 생겨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영을 통해서 육이 생겨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지상에 있는 신도들을 보게 되면 그 영이 본래는 육을 통하여 생겨나야 하는데 육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세계의 미완성급에 연결되어 다시 완성의 한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나오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이 지상에는 천사세계를 이기고 천사세계를 새로이 수습할 수 있는 한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그 사람은 그냥 상속받아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싸워 이겨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실체를 가진 천사장형이 됩니다. 영적 세계는 곧 천사세계의 연장이기 때문에 실체 사람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육을 중심삼고 육의 완성과 더불어 영의 완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완전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 구원의 기반은 닦았지만 육적 기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의 실체를 쓴 세례 요한과 같은 입장을 결정지을 수 있는 터전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를 중심삼고 영육 아울러 천사장 복귀의 사명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2천년 동안의 기독교는 영육을 중심삼고 사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은 떼어놓고 영적으로만 그 사명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육적 터전을 연결시키는 놀음을 해야 됩니다. 
육적 터전을 연결시키는 놀음을 하는 데도 역시 세계적으로 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천사장이 아담 창조에 협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협조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영계가 협조해 왔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협조하는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성신이 기독교 신자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천사장의 자식들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원리적으로 볼 때, 제2 이스라엘권이 제1 이스라엘권보다 못합니다. 제1 이스라엘권은 육적 기대(肉的基臺)가 있었지만 제2 이스라엘권은 육적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수 천년 동안, 영적 세계의 사명을 담당한 수많은 종교들은 아담을 대신 모실 수 있는 실체적 천사장을 만들기 위한 싸움을 해 왔습니다. 실체적 천사장, 즉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세계가 동원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 전체가 동원되었습니다. 끝날에 성신을 물 붓듯이 부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영적 세계의 영(靈)들이 이 땅에 와서 완전한 영을 주입하여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미완성적 아담, 즉 타락 전 아담과 같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아닙니다. 복귀한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영계는 지금까지 수고해 나왔습니다. (46-202, 71.8.15)
     
     
천사장의 사명을 지닌 사람들이 가야 할 길
     
지금까지 수많은 도인들이 나왔습니다. 도인들은 전부 자기들이 이 세계를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선포한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세례 요한이 선포한 것하고 예수님이 선포한 것이 무엇이 다르냐? 하나는 외적이요, 하나는 내적입니다. 하나는 천사형이요, 하나는 아담형입니다. 
아담은 반드시 천사장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을 때 천사장의 협조를 받아서 지었기 때문입니다. 또 천사장에게 아담을 보호하고 키워야 할 사명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사명을 해야 하는 것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믿는 교인들이고 도를 통한 수많은 도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에 널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계적 사명을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어야 되느냐? 예수님은 천사장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천사장의 사명을 완결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할 수 있는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오려면 그 사람의 가문은 반드시 비참한 역사를 거쳐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 육적인 면에서 잘난 사람이어야 되겠느냐, 못난 사람이어야 되겠느냐? 혹은 모든 면에서 갖춘 사람이 될 것이냐, 병신이 될 것이냐?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놓고 탕감복귀 원칙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천사장이 잘못함으로써 죽어서는 안 될 예수님을 죽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가 실수해서 그렇게 되었지만­물론 천사장의 꼬임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지만­복귀된 입장에 있는 죽어서는 안 되는 예수님이 죽게 된 것은 세례 요한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실체를 쓴, 영육을 대표한 제2의 천사장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죽게 했으니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하기 전에는 절대 다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그런 사명을 짊어진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놀음도 하고, 자진해서 죽음의 길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박게 해 가지고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그 고통을 체험해 보려고 했습니다. 모듬매를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 희생됨으로써 역사과정에서 개인․가정․종족․민족․국가를 중심삼고 개인적인 십자가의 희생이 벌어지고, 가정적인 희생, 종족적인 희생, 민족적인 희생, 국가적인 희생이 벌어졌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3 이스라엘이 될 나라는 결국 맞아야 됩니다. 또 아벨이 될 사람도 맞아야 됩니다. 
아벨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맞기 위해 천사장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천사장 혈통을 부정하기 위해서 아벨을 세워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벨은 맞게 마련입니다. 
예수님 같은 세계적인 아벨이 누구 때문에 죽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잘못해서 죽었습니다. 아벨은 맞게 되어 있습니다. 아벨이 맞게 되니 아벨의 가정도 맞게 마련입니다. 아벨의 씨족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의 종족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의 민족도 맞게 마련입니다. 아벨 국가도 맞게 마련이요, 아벨 세계도 맞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금 공산세계한테 아벨 세계가 맞고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복귀되려면 그래야 됩니다.
맞는 데는 누가 제일 많이 맞아야 되느냐? 종교인들입니다. 종교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어느 한 때 한 번이라도 당당한 때를 맞아 보았어요? 언제 종교가 때를 맞이해 봤어요? 역사적인 종교가 때를 맞아 봤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세운 종교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사장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온 섭리권이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때를 맞지 못했습니다. 지식 있는 사람도 세계를 지배해 봤고, 힘센 사람도 한 지역을 지배해 봤습니다. 상류층도, 노동자 농민까지도 전부 지배해 봤는데 종교인들만 아직까지 그런 때를 가져 보지 못했습니다. 종교인만 때를 못 맞았습니다. 
나중에 전체를 총합해서 청산 짓고 때를 맞아야 할 패들이 종교인들입니다. 종교권을 두고 볼 때, 현재의 기독교나 불교가 맞으려고 하지 않고 서로가 밟으려고만 합니다. 그런 종교는 망합니다. 희생길을 도피하는 종교는 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탕감복귀 해야 할, 천사장의 기반을 닦아야 할 운세권에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인들은 대표적으로 맞아야 할 사명을 지고 있습니다. 선두에서 머리를 맞아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런 종교는 망하는 것입니다. 머리를 드는 종교는 망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발전해 나오면서 죽임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고 순교를 당할 때, 선전하고 데모하면서 죽지 않고 숨어 다니면서 죽었습니다. 언제 한번 기독교가 원수를 대해 복수하자고 데모나 해봤습니까? 지금까지 한번도 힘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발전해 나왔습니다. 밟히고 맞는 가운데 발전해 나왔습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천대받게 한 존재가 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천사장이 복귀하려면, 벌받은 입장에서 복귀해야 합니다. 복귀섭리 자체는 하나님이 세워 놓지만 그냥 복귀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그런 천사장의 입장에서 천사장 복귀권을 감당해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일 미워할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희생시켜 그 희생된 승리의 터전 위에서 당신의 아들딸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끝날까지 죽음길을 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그런 법을 적용한다면 하나님은 무자격자지,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교훈이 어디 있어요? 천사장 입장이기 때문에 아담을 죽인 죄를 탕감 받으려면 죽고자 해야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백 배라도 곱게 죽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종교는 천사장 복귀권이었습니다. (46-204, 71.8.15)
     
     

4. 예수님과 이스라엘 선민
     
     
이스라엘 선민을 세우게 된 배경
     
여러분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라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 물어 봐도 이 세상이 악한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선을 바라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 되지 못하고 악한 세상이 되었는가? 이것이 뜻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고충의 고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본심으로 선을 추구한 사람들은 많았지만 본심으로 악을 그리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지도 않고 그리워하지도 않은 악이 선보다도 많은 것을 보게 될 때 오늘날 이 세상은 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으로 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한 개인으로부터 악한 가정이 생겨났고, 그 가정이 모여서 악한 사회, 악한 민족, 악한 국가를 이루어 오늘날 전세계가 악의 권내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인류가 바라던 소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바라던 소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은 기필코 이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이 세상의 악을 청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섭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악한 세상을 그냥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한 그 세계를 세워 드리기 위한 운동이 벌어져야 됩니다. 이 운동이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벌어져서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확산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하나님이 역사적인 인연을 통해서 새로운 선의 기반을 넓히기 위하여 세웠습니다.
개인을 세워서 악한 개인에 대한 싸움을 전개시켜 이 세계의 악한 개인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였고, 가정을 세워서 이 세계의 악한 가정에 대하여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였으며, 종족․ 민족․국가를 세워서 승리의 기준을 세우게 하여 악한 세상을 제거하고 선한 종족․선한 민족․ 선한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때를 마련하여 하나의 나라를 준비해 놓고, 그 나라 가운데 세계를 대신하여 전체의 뜻을 세울 수 있는, 즉 세계를 하늘편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 전체적인 책임을 짊어진 한 분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그분은 악한 세상에서 선을 중심삼고 악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분이라야만 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6-17, 65.12.26)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
     
예수님의 사명은 악한 세상을 복귀하여 선한 세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제일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독생자의 명분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입장에서 이 땅에 오셔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하여 선한 왕의 왕으로 이 땅 위에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중심삼고 단결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관이나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은 어디까지나 타락권내의 악과 더불어 짝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직까지 이 땅 위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선과 짝할 수 있는 개인생활, 사회생활, 국가생활, 세계생활, 우주생활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셔서 일생 동안 전하고자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모든 희망의 뜻을 종결시켜야 할 사명을 갖고 오셨습니다. 시대적인 악을 퇴치하고, 승리의 한날을 맞아 선한 민족을 중심한 선의 국가를 편성하여 만왕의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던 근본책임과 목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개인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가정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되고, 종족적인 승리의 터전, 민족적인 승리의 터전, 국가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해야 됩니다. 그 터전 위에 예수님의 생활관과 세계관을 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일대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가정적인 싸움에 승리할 수 있고, 종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민족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국가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한날을 바라고 선민을 세워 키워 나왔습니다. (16-18, 65.12.26)
     
     
예수님을 모시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선민은 자기들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을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관과 인생관과 우주관으로 대치시켜야 했습니다.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그러한 입장에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4천년의 역사를 종결지을 수 있는 선의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선의 목적을 연장시켜 다시 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의 2천년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통치해야 할 선의 나라, 선의 민족, 선의 종족, 선의 가정, 선의 개인을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이 찾으시려던 그 나라와 그 민족과 그 종족과 그 가정, 그리고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참다운 식구와 형제들이 있었느냐?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구원섭리를 이 땅 위에서 완결짓고 간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세워 4천년 동안 키워 나올 때, 배반하는 그들을 승리의 터 위에 세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던가!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를 맞는 그날부터 그분과 하나되어 국가적인 악과 세계적인 악을 물리치고 선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그러한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마음속으로 원했겠는가?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낼 때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바랐을 것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입장에 서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소망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써 만민을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선민을 세웠겠습니까? 그렇게도 애써 길러 놓은 이스라엘 민족, 4천년의 역사적인 승리의 터전 위에서 성장해 나온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모시지 않았다니….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주권자들, 누구보다도 그 나라의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교법사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이단자로 몰아 예수님의 앞길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부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16-19, 65.12.26)
     
     
예수님의 소원과 심정을 누가 알았던가
     
예수님의 소망은 불쌍한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학정으로부터 구원하고, 당시에 세계를 선의 세계로 통일시키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어 주고 메시아로 알았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역사적인 배후를 짊어지고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었던가?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와 직결되어야 했느냐? 이스라엘 선민과 유대교가 가야 할 하나의 귀결점은 메시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맡은 바 목적을 놓고 메시아와 화합하여 일체가 되고 절대적인 입장에서 단결된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로마와 부딪쳐야만 했습니다. 다음엔 로마와 전세계를 통합해서 지중해를 중심삼은 세계적인 판도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 했다면 이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는 세상의 악을 따르는 못난 사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들은 그렇지 못했으니 그 당시 예수님이 얼마나 처량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못난 사도들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바라신 사도들이 찾아졌다면 이스라엘은 악의 세계를 넘어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세계를 이루어야 할 역사적인 책임을 안고 계셨기 때문에 악을 물리치는 것을 최대의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이를 물고, 혀를 깨물면서 하루하루 살아나가셨습니다. 이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었지, 십자가에 죽어서 개인을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를 일시에 구원해야 했던 예수님의 목적이 왜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그것은 그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가정과 종족과 세계를 일시에 구원하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천국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예수님이 바라시던 소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로부터 일시에 구원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예수님이 얼마나 초조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조차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누가 예수님의 심정을 알아주었던가? 감람산 골짜기를 거닐 때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호소하던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누가 알았던가?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얼마나 헐어 버리고 싶어하셨던가! 반대하고 알아주지 못하는 유대교의 무리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하나님 앞에 엄숙히 제사드릴 수 있는 참된 유대교와 참된 이스라엘을 예수님은 마음속에 얼마나 그리워하셨던가! 제자들도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꿈도 안 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믿고 천국 가겠다는 제자들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나라의 집권자들과 사상적인 분야를 책임지고 있는 유대교단의 지도자들과 하나되어 로마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가 하나되어서 메시아를 앞세워 나가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반대했으니 그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선민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16-21, 65.12.26)
     
         
예수님은 죽으러 오시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 내 죄를 위해서 신랑 되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려 나 대신 제물로 바쳐짐으로써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이다. 그렇게 피를 흘리심으로써 내 죄를 대속(代贖)해 주셨다󰡑 하며 예수님을 대속의 주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라면 예수님은 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혈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왕 보혈을 흘리면서 죽을 바에는 만민을 위해서 한꺼번에 많이 흘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다. 사람이 죽는 데 비참하게 죽은 사람하고 덜 비참하게 죽은 사람이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 더 동정이 가겠습니까? 비참하게 죽은 사람에게 더 동정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똑같이 죽었다 하더라도 총 한방 맞고 죽은 사람보다 비참하게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은 사람이 더 동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왕지사 우리를 위해서 피를 많이 흘리고 죽으면 그게 더 좋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보혈을 한꺼번에 많이 쏟고 죽기를 원했을까? 진정으로 예수님이 죽기를 원했을까요? 예수님은 신랑이신데, 신랑이신 그 분이 나를 위해 죽겠다고 할 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예수님 시대에 살던 사람들도 신랑이신 예수님이 죽는다는데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랑인 줄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아직까지도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손을 통해서 죽이려 했다면 가롯 유다가 죽이기 전에 예수님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자기가 제물 입장이므로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예수님을 잡아죽여야 됩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이 땅 위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어냈습니까? 그것은 오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 이스라엘 민족이 울타리가 되어 주님에게 총알이 날아오면 대신 맞아 죽고, 주님이 내몰리면 대신 몰리고, 로마 제국이 주님에게 달려들면 대신 대적하여 싸우게 하기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울타리가 되어 주고, 철옹성 같은 궁성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신랑으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만년 공사를 세계적으로 준비시키려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서 이끌어냈지 오실 주님을 죽이라고 데리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41-221, 71.2.16)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죽으러 이 땅 위에 오셨다고 하는 사람과 통일교회 선생 님 중 어느 쪽의 말이 이치에 합당하겠습니까? 선생님 말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죽입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몰아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예수님을 죽이냐는 말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죽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죽이겠습니까? 로마 백성도, 로마 병정도 예수님을 못 죽입니다. 원수 국가인 로마를 타고 앉아 세계를 정복해야 할 사명을 짊어지고 온 예수님이신데 이 원수 나라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민족이 그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2천년 동안 오직 메시아만을 바라고 나온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다음 야곱을 21년 동안 하란 땅에 보냈다가 다시 끌어내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애급에 들여보내 400년 동안 고생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별의별 기적을 다 일으키면서 보호 육성하여 끌고 나온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잡아죽이라고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뭡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냥 독신으로 늙어 죽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뜻에 따라 맞이한 신부와 같이 살다가 죽었을 것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신부는 하나님의 며느리입니다. 그 아들과 며느리의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 손녀입니다. 
하나님은 손자 손녀 보기를 원했겠습니까, 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송장도 끌어안고 전도하면서 똥 묻은 것도 닦아 가지고 아들로 삼기를 원하는데, 깨끗하고 죄 없는 신랑이신 예수님이 신부를 맞아 죄 없는 아들딸을 낳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들 며느리가 낳은 아들딸은 하나님의 손자 손녀입니다. 그 손자 손녀가 낳은 아들딸은 하나님의 증손자 증손녀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손자 손녀의 계대(繼代)가 3대(三代)쯤 가다가 끊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영원히 그 대가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 위에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지파와 족속과 나라가 생겨납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들딸도 예수님을 믿어야 됩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 가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의 아들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천국 가기 때문에 그 아들딸의 아들딸도 예수님을 안 믿어도 그대로 천국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으니 다 틀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신부 자리도 없어졌고, 아들딸의 자리도 없어졌고, 예수님의 손자를 중심삼은 예수 지파의 자리도 없어지고, 족속의 자리도 없어지고, 민족의 자리도 없어지고, 나라의 자리도 없어졌습니다. 예수님 혈통의 씨가 마르고 없으니 다시 로마정권의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사탄 세계에서 그래도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어 미국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전세계를 압도하게 만들었는데, 예수님의 직계 아들딸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을 잘 해주고 세계를 통일시켰겠습니까? 예수님이 망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운명을 가진 기독교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41-222, 71.2.16)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한계
     
예수님의 족속이 남아 있다면 여러분도 그 족속과 사돈 될 가망성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데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도 애급에 들어가, 그 사지에서도 자꾸 번성해서 애급 나라가 불쌍해질 뻔했는데, 만약 예수님의 직계 아들딸을 남겨 놓았다면 하나님이 잘 퍼지게 하겠습니까, 안 퍼지게 하겠습니까? 잘 퍼졌으면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나라가 이루어졌으면, 그 나라는 하나님을 중심삼은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죽일 수 있습니까?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실이 하나님의 내면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속이 있었다면 우리도 친척이 될 수 있고 사돈도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사돈이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사돈님 한다는 것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있다면 비록 타락한 인간이지만 타락한 세계의 아가씨를 보고, 󰡐저 아가씨가 아니면 난 죽는다󰡑고 하면서 예수님께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쓰면 예수님도 별 수 없습니다. 결혼시켜 줘야 됩니다. 그러나 그 식이 다릅니다. 탕감과정을 거치는 식이 되어야 합니다. 
타락한 세계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사돈을 맺는다면 왕궁에 있는 훌륭한 패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척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이 예수님의 권내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기독교가 지금까지 쫓기고 구름떼처럼 몰리며 나라 없는 신세가 되어 억울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해서 죽었습니까, 몰려 가지고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기도는 기성교회의 주장대로라면 잘못한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고 내 뜻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피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도 수작이 됩니다. 
그 기도 내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 이것은 자신이 죽을 것을 아는 입장에서 한 기도입니까, 죽지 않을 입장이었는데 죽게 되니 이게 어찌 된 영문이냐고 놀라서 한 기도입니까? 놀라서 한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했습니다. 󰡐내가 그래야 되겠느냐? 본래는 내가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면 모든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나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만민을 긍휼히 여기는 입장에서 후대에 그렇게 피를 흘리며 따라올 수많은 신도들, 그런 기독교의 비참함을 생각할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잘못하면 둘 다 놓쳐 버립니다. 두 손에 떡을 쥐었다가 다 놓쳐 버리겠으니 한 손만이라도 떡을 쥐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영육 두 세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육적인 세계를 버리고 영적인 세계라도 구해야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인 천국을 모색해 나온 것입니다. (41-224, 71.2.26)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
     
이스라엘 나라와 유대교는 예수님을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와 교단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땅과 백성과 주권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백성을 갖고 주권을 갖고 땅을 갖고 있습니까? 미국이 그렇습니까? 미국의 대통령은 기독교 지도자와는 다릅니다. 그리고 기독교 국가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나라와 땅이 없기 때문에 지상에서 몰리면 쫓기고 죽어가면서 세계적인 판도를 넓혀 나왔습니다. 기막힌 서러움을 겪어 나온 불쌍한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오늘날 기독교인이 탕감해야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속죄를 받지 못합니다. 죽음으로써 속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으로 인한 속죄보다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600만명이나 히틀러에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데 대한 탕감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왕도 되고, 인류의 부모도 되고, 최고의 스승도 됩니다. 3대 명함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천지의 만왕의 왕이요. 인류의 부모입니다. 그리고 스승 중의 스승입니다. 그러한 3대 내용을 갖춘 예수님을 죽였으니 용서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죄인을 용서해 주는 법이 있어요? 하나님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은 피를 흘리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기가 막히는 길을 가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41-226, 71.2.16)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소원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소원해 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이 사랑하고, 교회가 사랑하고, 종족이 사랑하고, 가정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놓고 소원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아들을 위해서 준비했기 때문에 준비해 나온 그 나라와 교회와 씨족과 가정이 일치 단결하여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먼저 준비된 것들은 예수님 앞에 가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장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못 했기 때문에 한이 맺혔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고, 형제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고, 종족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으며, 교회를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전부 반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한입니다. 
예수님은 한이 맺히지 않게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종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왔는데도 사랑할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하지 못한 한을 풀어야 됩니다. 
그 다음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총각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신랑된, 남편된 예수님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할아버지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그리고 씨족의 족장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민족의 중심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국가의 주권자된 예수님을 맞이해 보았습니까? 다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이스라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쫓겨다니는 예수님밖에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한입니다. 이렇게 원한에 사무치게 되었으니 그 백성이 남아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이나 세계에 유리걸식(流離乞食)하면서 가는 곳곳마다 말발굽에 밟혀 죽고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많은 피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1948년 8월 1일 유엔의 결의에 의해 비로소 독립이 되어 재봉춘의 때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그 민족으로서 맞이할 수 있는 때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죄를 세계 앞에 탕감하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특별한 시기를 맞아 이스라엘 민족 600만이 학살됨으로써 역사적인 죄를 다 탕감하게 하였고, 재봉춘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기 위하여 새로운 세계 역사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엄청난 일입니다. (41-250, 71.2.16)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슬픔을 부여안고 우신 예수님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넘어 로마로 가는 길을 똑똑히 바라보셨습니다. 󰡐만일 유대교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된다면 로마는 내 손으로 넘어온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바라보셨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400년 걸려서 로마를 정복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 살아 계셨다면 로마가 문제겠습니까? 이스라엘을 기반으로 로마를 정복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것이 원리이기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20세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점점 피폐해졌습니다. 로마의 압정 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앞날의 소망이 다 막혀 버리고 황혼길로 접어든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볼 때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민족에 대한 사랑에 불타 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을 걸어 놓고 민족에 대한 사랑에 울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호소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일이 가면 갈수록 점점 조급한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움직여야 된다는 소신을 가진 예수님은 유대교를 밟고 올라서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까지도 밟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생관과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새로운 이념을 중심으로 로마를 일시에 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4천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고 준비했던 이스라엘이 가정과 민족과 교단이 하나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 가운데 맺힌 원한이 컸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자신이 설 수 있는 언덕이 없는 것을 한탄했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이 보낸 사람을 기다리고 찾아야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선조들이 희생의 제물로 죽음의 길을 가면서 닦아온 그 터전은 이스라엘을 행복의 터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민족이 메시아인 자신을 몰라보니 그것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외롭고 분했겠습니까? 
예수님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초조함을 느끼는 한편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가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여안고 효성의 도리를 다하려했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 삼면사방 어느 곳에도 그를 붙들어 주는 사람은 없고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도리어 하나님 앞에 슬픔이 되는 것들 뿐이었으니, 그 슬픔을 부여안고 하나님을 위로해 드려야 하는 예수님의 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또 유대 민족 앞에 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서러웠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운명길이 다가온 것을 생각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때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죽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의 이슬로 희생당하는 것이 한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이스라엘 선민을 찾아 세우기 위하여 수고했던 것을 생각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위해 울면서 걸어 나오신 피맺힌 고난의 과정이 이제 자기가 죽으면 전부 산산이 깨져 나가게 될 것을 아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수고한 역사적인 서러운 사정을 부여잡고 우셨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앞에 역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는 예수님은 죽는 순간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하여 세운 민족인데 저들을 버리면 저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염려하셨습니다. 민족을 붙들고 미래의 운명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자기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책임을 다하셨습니다. 배반하는 민족을 염려하면서 그 소망의 한 날을 위해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간곡한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한없는 슬픔과 새로운 소망에 대한 서러움이 어리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아는 하나님의 서러움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누가 이 땅 위에서 이러한 사정을 알아서 해원해 드리며, 또 그 원한을 풀어 드릴 것인가! 이 일은 끝날의 성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통일교회가 나왔습니다. (16-37, 65.12.26)
     
     
5.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곧 복귀다 
     
우리는 이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주인공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거짓 주인인 사탄과 하나가 되어 결국은 사탄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의 󰡐살아있는 죽음󰡑에 대해서 깊이 우려하고 슬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쇠사슬을 스스로 끊을 수 있고 스스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분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 자신의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을 결심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간단하게 말해서 복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 의사는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그는 환자가 정상적인 건강으로 되돌아가게 해줍니다. 그것이 치료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물에서 건져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란 비정상적이며 본 궤도를 벗어난 자리에서부터 선한 본연의 자리로 인간을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복귀와 똑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천국으로 복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의 결심을 분명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사기 46장 11절)󰡓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본래 계획하였던 자리로 복귀하겠다는 결정적인 각오를 드러내어 내가 분명히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복귀하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재창조자로서 이 땅 위에 오셨습니다. 죄 많은 모든 인간들을 그리스도와 같은 인간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는 이 지구상에 천국을 복귀하기 위하여 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17절에 기록된 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3-199, 74.9.18)
     
     
메시아를 위한 준비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복귀하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보낼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국가를 준비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 있는 믿음의 기대(基臺)를 세우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탄의 소유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메시아가 아무런 준비된 터전도 없이 지상에 오시면 이 사탄세계는 그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주관(主管)할 수 있는 한 나라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용의주도하게 역사(役事)하였습니다. 유대 나라가 바로 이 메시아를 위한 준비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메시아가 착륙할 수 있는 기지로 준비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당신의 최후의 중심인물인 메시아를 탄생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독교는 2천년 전의 유대 나라와 같이 메시아의 재림을 위한 착륙기지입니다. 기독성도들은 그의 재림을 위한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여 역사의 최후의 완성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의 이 세계는 문제 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만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메시아의 사명은 타락하여 고통받고 있는 인류를 이 죄악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본연의 완성된 하나님의 선한 세계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 사탄의 악한 지배권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세우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2천년 전에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복귀할 목적을 가지고 오셨던 분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의 재림의 목적도 본연의 하나님 나라를 복귀하려는 것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동일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불변한 목적이요 유일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현대의 선민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구세주의 협조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터전을 예비하여 그가 오실 때 그를 영접하고 지상(地上)에서 사탄을 몰아내는 메시아의 사명에 동참함으로써 전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막연한 천국을 꿈꾸고, 그 천국의 안이한 보금자리를 차지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참된 기독교인들의 자세가 아닙니다. (73-203, 74.9.18)
     
     
하나님의 뜻은 전세계를 구원하는 것
     
하나님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하늘편 챔피언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기 위해서는 희생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저를 당신의 제단 위에 어린 양으로 써 주시옵고, 저를 희생시켜서 이 세계를 구하시옵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20세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부름을 듣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나만의 천국(天國)󰡑, 󰡐나만의 구원(救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세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는 때에 나만의 조그만 천국이 보전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만약 전세계가 구원된다면 여러분 자신의 구원은 이미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기독교가 계속 개인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머지 않아 멸망하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을 바라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성사시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슬픔과 비탄으로부터 해방시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문제를 해결해 드릴 때 모든 인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그런 정신을 갖게 되면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서러운 심정(心情)을 풀어드리기 위하여 불붙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세계를 구하는 것이지, 기독교나 특정 교회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성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이 말씀에는 세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 기독교회나 기독교인만을, 또는 특수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세계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메시아는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에게 󰡐주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구세주이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주님은 대답하기를 󰡐아니다! 나는 전인류를 위한 구세주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에게 󰡐하나님이여, 당신은 기독교인만을 위한 분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전우주의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야󰡑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2천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지만 자기를 중심한 이익을 목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마치 군인정복자처럼 오셔서, 자기들을 위해 원수를 갚아주고 로마 제국을 멸망시켜서, 이스라엘 나라에 영광과 권세를 부여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참뜻을 몰랐습니다. 
그와 반대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도구와 같이 이용하여 세계를 하나님의 품속으로 이끌어 오고자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전세계를 복귀하고 전인류를 완전한 선의 세계로 복귀하고자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실패의 하나님입니다. 사탄에 의하여 패배한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73-204, 74.9.18)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떠한 개인의 뜻에 의해서 탄생되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분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낸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의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타락한 인간을 구하려는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반드시 구세주를 통해서 인간과 관계 맺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인간이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낸 목적은 잃어버렸던 자녀를 찾고, 그 자녀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가정․종족․국가․세계를 다시 찾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목적에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통해서 개인적인 수련 과정을 거치게 하면서 종족․민족․국가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수고했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이 타락하기 전 하나님으로서의 이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타락함으로써그 이상이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을 다시 구원, 복귀해 타락하지 않았던 본연의 이상을 재차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보낸 목적입니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95-310, 77.12.25)
     
     
예수님은 죽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하나의 역사적인 수수께끼가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시기 전 4천년 동안 하나님은 메시아를 위하여 이스라엘 선민을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해야 된다고 선민들에게 미리 예언을 통하여 통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정했던 바대로 준비를 위하여 섭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내에는 사실상 위대한 메시아적인 정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제때에 약속의 말씀(言約)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에 맞추어 하나님이 택했던 선민들 속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 위해 보냈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당초부터 하나님이 예정했던 뜻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할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다시 돌아온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틀림없이 󰡐우리는 그를 받아들이지요. 그를 환영합니다. 그와 하나가 되고 그를 따를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당신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아니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선민들이 만일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뜻은 분명히 선민들이 메시아를 받아들이는 데 있었습니다. (73-218, 74.9.18)
     
     
무지가 예수님을 죽였다 
     
선민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그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보아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무엇인가 크게 잘못된 일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나사렛의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몰랐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였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를 십자가상에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1절에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또 성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장 8절)󰡓 하고 증언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은 무지와 맹목에서였습니다. 
전세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때 현실적으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진정한 내용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낸 유일한 목적이 그를 십자가상에 못박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민을 준비하는데 그렇게도 오랜 기간을 소요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불신자들 속이나 야만인 가운데 보내는 것이 훨씬 손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보다 빨리 예수님을 죽일 수 있어서 구원이 보다 속히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민들에게는 죽기 위해서 오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구약 속에서는 하나님이 되풀이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이스라엘 민족이 영광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온 후로 선민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징벌을 받았고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망했고, 그 민족은 온 세계에 흩어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민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할 때 그들은 그 뜻의 결실체인 메시아를 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랐던 것이 문제입니다. (73-212, 74.9.18)
     
     
구약의 문자에만 묶여 있던 성구의 노예들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첫째의 이유는 구약(舊約)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성서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암호같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한마디 한마디와 한 글자 한 글자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구약(舊約) 성구(聖句)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의 말라기서는 신약성서 안의 계시록(啓示錄)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시간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최후의 기록에는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오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 4장 5절에서부터 6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이 오시기 약 9백년 전에 살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그는 땅에서 살다가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은 구약에 기록된 대로 언젠가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다시 땅으로 돌아와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성취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선민들이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왔습니까? 문제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예기(豫期)하고 있던 그러한 방법으로 엘리야가 돌아오지 않았던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은 엘리야가 기적적인 방법으로 되돌아왔다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참으로 예측할 수 없는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라고 하는 나사렛에서 온 한 청년이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왔다󰡑고 온 세상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성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나사렛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엘리야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들은 일이 없지 않은가! 아직 엘리야가 오지 않았으니 메시아가 올 리가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엘리야가 오리라고 한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완수(使命完遂)에 대한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하려고 온 이스라엘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이스라엘 선민들은 한결같이 󰡐만일 당신들의 선생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엘리야는 어디에 있는가? 구약성서에는 메시아가 나타나기 이전에 엘리야가 온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말을 부인했습니다. (74-148, 74.11.28)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구약성서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하층(下層)에 속하는 갈릴리 지방의 어부들이거나 세리 혹은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질문에 크게 당황하게 된 제자들은 답변을 위해 예수님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광경이 마태복음 17장 10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대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은 사실 제자들에게 큰 쇼크였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예수님의 대답이 성서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선민들에게는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어도단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맞춰 생각해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의 세례 요한은 오늘날의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인 󰡐빌리 그레이엄󰡑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위대한 예언자로서, 전 이스라엘에 명성을 떨치고 비상한 영향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알 수 없는 한 청년이 돌연히 나타나서 전세계를 향하여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선포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은 그에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약속했던 엘리야는 어디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그 젊은이가 󰡐빌리 그레이엄이 엘리야라고 하는 사실을 당신은 모르고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이에 대해 틀림없이 여러분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서 빌리 그레이엄이 엘리야가 될 수가 있습니까? 그는 푸른 하늘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그가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반응할 것입니다. 그들도 역시 그러한 대답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아주 똑같은 불신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고 일어났습니다. 단순히 그가 푸른 하늘로부터 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스라엘 선민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였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의 선민들은 엘리야가 성경에 기록된 예언대로 푸른 하늘로부터 되돌아온다고 하는 신앙을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성서의 문자에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73-210, 74.9.18)
     
     
불신한 세례 요한 
     
당시의 세론(世論)은 아주 무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힘있고 권위있게 전 이스라엘을 향하여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선민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선민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직접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물어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광경을 우리는 요한복음 1장 19절에서 21절에 걸쳐 읽을 수 있습니다. 
󰡒…네가 누구냐 물을 때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또 묻되 그러면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세례 요한은 모든 것을 부인했습니다. 󰡐나는 엘리야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또 그는 예언자(선지자)라고 하는 것조차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하나님에 대한 예언자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본인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정황(情況)을 보고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의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패자(敗者)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편에 서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결국 일대 사기꾼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부인한 후 예수님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73-214, 74.9.18)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게 된 첫째 이유는 구약성서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실패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인당했고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1장 1절부터 3절까지에서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이 그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한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사람의 질문이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일찍이 요단강가에서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한복음 1장 34절)󰡓 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사람입니다. 
똑같은 사람이었고 똑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뒤에 와서는 예수님에게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듣고 예수님은 얼마나 낙담하셨겠습니까? 세례 요한은 얼마나 신앙이 약한 사람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있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선민들로 하여금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특별히 이 땅 위에 보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 와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그 사명을 다해 줄 것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세례 요한이 사람을 시켜 예수님에게로 찾아와서 󰡐진정으로 당신이 메시아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칼로 찔림을 당하는 이상의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느꼈는가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무서운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는 분노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다󰡑, 󰡐그렇지 않다󰡑 하고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1장 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쌍한 요한, 실패한 자, 그대는 이미 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실족했지. 참 안 되었어 요한󰡑 이것이 세례 요한이 실패했을 때 그에게 보여준 예수님의 위안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11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극히 작은 자라 하더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그처럼 작은 자리에 세례 요한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말은 지금까지 불가사의한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 사명에 실패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73-212, 74.9.18)
     
     
진리에 대한 겸허한 마음이 필요한 때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했다는 그의 사명을 놓고서는 여인이 낳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도 똑같은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보다 먼저 있던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과 주님 사이의 시간적인 거리를 놓고 메시아를 위한 증거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으로 나타나신, 살아 있는 그리스도를 위한 증거자로서의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증거하는 사명으로 볼 때 세례 요한은 누구보다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사람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세례 요한은 가장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비참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보다 먼저 태어났던 모든 예언자들은 영계(靈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몰랐습니다. 그는 의심했습니다.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으며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캄캄한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그 자신의 증거를 끝까지 들고 나서는 데 있어 실패했습니다. 그는 실패자가 되었고 천국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 마침내 세례 요한은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선포하고 증거하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목베임을 당하였던들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헤롯왕의 개인적인 사랑의 스캔들에 휘말려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의 사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시봉(侍奉)하는 일만이 그의 유일한 책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이 천적(天的)인 사명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의미없는 고통을 받았고 마침내 의미없는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만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독실한 사람이었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생겼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왕이 되었다면 세례 요한은 총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놓고 예정한 위치였습니다. 
예정대로 되었다면 예수님께서 택하신 12사도와 70문도와 120문도들은 모두가 세례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 가운데서 선발되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선민들과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될 수 있고, 그들을 융합시킬 수 있는 조절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이와 같은 환경에서 누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지금은 이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최소한 그에 대한 판단은 미루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진리가 해같이 빛나는 영계(靈界)로 가게 됩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으며 그때에 가서 우리는 그 전체적인 진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상생활(地上生活)을 할 때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겸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복이 있으며, 이 지상생활에서 여러분이 가진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결국은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73-199, 74.9.18)
     
     
구름 타고 오시는 것으로 예상됐던 예수님 
     
예수님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결정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선민(選民) 이스라엘은 다니엘의 예언(다니엘 7장 13절)대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처럼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현현(現顯)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요셉의 아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예수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느냐? 그는 당신이나 나와 같은 한낱 인간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게 한 또 하나의 중대한 이유였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은 예수님의 사명 수행에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안겨줬습니다. 우리는 요한 2서 1장 7절에서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라고 사도 요한이 경고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2천년 전에 사도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한 말인데, 그것은 단지 예수님이 육신(肉身)을 썼다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구름을 타고 현현하는 존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을 가리켜 󰡐적 그리스도󰡑라고 신랄하게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이 숨겨져 왔으며 오늘날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가 특별히 이 시대에 나타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가 가까웠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명확한 진리의 계시만이 모든 기독교회를 하나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하나되게 하며 우리가 진리를 알 때 그 진리는 우리를 그릇된 신앙이나 분열로부터 구원해 줄 것입니다. (73-217, 74.9.18)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의미 
     
이제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의 참된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태복음 26장 38절)󰡓 하시고,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願)대로 하시옵소서(마태복음 26장 39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만이 아니라 3차에 걸쳐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괴로워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이 그의 사명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실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압정 속에서도 수십만의 기독교인들은 당당하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들은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도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형리(刑吏)들에게 󰡐나는 나의 주님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 가치가 없다. 원컨대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죽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도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의 첫 순교자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 스데반은 평화스럽게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죽어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서를 떠나서도, 미국 독립 때 청년 장교였던 나단 헤일(Narhan Hale)도 체포되어 사형당할 때 말하기를, 󰡐나는 내 조국을 위하여 바칠 내 생명이 하나뿐인 것이 유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잔을 나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그가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전세계를 구원하는 데 있었다면 그런 기도를 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메시아 될 자격이 없는 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어떤 이기적인 입장에서 하신 것도 아니요, 죽음이 두려워서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약 십자가에 달리시는 길이 인류를 구원하는 유일의 길이었다면 언제든지 몇 천번이라도 죽으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는 메시아로서의 사명 때문에 초조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 때문에 번민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십자가에 달린 후의 비참한 결과를 예견하시고 비통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이 천국을 실현하는 대업(大業)을 또 다시 2천년간 연장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고, 그동안 인간들은 심한 고통을 당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수백 만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며 순교를 당하는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버림당하고 황폐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보좌 앞으로 승리와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셨지, 십자가에 처형되어 홀로 가시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습니다. 비참하게 하늘에 돌아가기를 원한 게 아니라 승리의 왕자로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절망적인 때라도 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상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무슨 방도가 없겠습니까?󰡑 하고 하나님께 최후의 담판기도를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슬픔과 고뇌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일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 가롯 유다야말로 영웅으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상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누군가가 하나님의 아들을 원수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말씀하시기를,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태복음 26장 24절)󰡓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장 46절)󰡓 라고 부르짖으셨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때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영예롭습니다󰡑라고 외치셨을 것입니다 (73-199, 74.9.18)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제2차적인 사명 
     
십자가상의 고난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래적인 노정이 아니라 예정된 코스의 변경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그분의 제2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변화산상(變化山上)에서 결정됐습니다. 이 내용에 대한 말씀이 누가복음 9장 30절에서 31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예수님이 󰡐장차 인자(人子)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되리라󰡑고 말씀하실 때, 그의 수제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만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 16장 22절)󰡓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돌이키시며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마태복음 16장 23 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증거로 이 특이한 성구를 곧잘 이용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라. 그 말은 죽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로 나가시려는 당신을 반대한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그를 사탄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을 안 연후에 베드로를 꾸짖은 것이며, 하나님은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아 예수님이 가지고 오셨던 지상천국의 건설이라는 본래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사명의 최종단계에서 하나님은 영적 구원(靈的救援)이라는 제한된 사명이라도 해주기를 예수님에게 당부하셨는데, 가련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감의 변동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언뜻 보아 예수님을 위로하는 듯한 베드로의 말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2차적인 사명을 외면하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을 피하는 것은 예수님의 강림을 완전히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2차적인 사명인 영적인 구원을 생각하시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선민 이스라엘의 몽매와 죄악으로 인해서 필요하게 된 제물의 길을 용납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이 지니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치르는 속량(贖良)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대가로 예수님을 부활케 해 육신은 구원해 주지 못했으나 영적인 구원을 위한 기대는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승리는 십자가상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이룩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져다 준 구원이었습니다. (73-220, 74.9.18)
     
     
예수님을 받아들였더라면 
     
유대 민족으로부터 영접을 받았더라면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제자들을 하나로 묶고, 야곱과 아랍족속들의 12지파를 포함한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합했을 것이며,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의 가정이 됐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택하신 이스라엘 나라를 중심하고 하늘의 주권을 확립하셨을 것이며, 그의 당대에 하늘나라의 법도가 마련됐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주권이 실체(實體)를 이뤄 대적할 자 없는 국가가 수립됐을 것이며, 첫아담을 통하여 이룩하려던 하나님의 통치하의 그 나라는 후 아담 예수 그리스도, 즉 왕을 통해서 이룩됐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제국도 하나님 나라에 굴복했을 것입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 정사(政事)와 평강(平康)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自今)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그의 제자들은 온갖 고난을 받고 피를 흘리면서 맨손으로 로마를 향해 행진했습니다. 결국 4백년이 못 가서 로마제국은 이 맨손의 무리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서 이 신성한 무리들을 거느리셨다면 그 때, 즉 예수님 당대에 전 로마제국은 하나님의 주권 앞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당시의 대 로마제국은 온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전세계의 복귀(復歸)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로마를 만방(萬邦)의 중심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로마에 천국(天國)이 도래(到來)만 한다면 그것은 용이하게 전세계로 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그의 천국을 이룩할 수 있었다면 로마의 힘과 영향으로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예수님 생전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더라면 예수님은 전세계에 걸쳐 실체적인 천국을 건설하셨을 것이며, 오늘날 로마 가톨릭 이니 감리교니 그리스도교니 장로교니 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교파의 그 어느 하나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천국시민이 됐을 것이고, 기독교사는 피를 보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순교자도 없었을 것이고, 교회에 십자가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메시아의 사명이 종결됐기 때문에 물론 재림할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배신을 당하신 것은 슬픈 일입니다. 아담과 해와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의 이상을 이루지 못했고, 택함받은 백성들의 비협조로 예수님은 지상천국을 이룩하지 못하셨습니다. (73-199, 74.9.18)
     
     
오늘의 기독교는 영적 구원만을 이룬 부활의 종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기독교도 역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 곁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으며, 제자들도 배신하고 수제자 베드로마저 그리스도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도 다시 살았으며, 그때 40일 동안 예수님은 함께 기독교의 기반을 굳히셨으니 그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시초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승리적인 부활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이며 여기에는 사탄의 영향력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肉身)은 구속물(救贖物)과 제물로 드려졌으며, 예수님이 그 육신을 제물로 바칠 때 인류의 육신도 제물로 함께 드려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2천년 전 그때 육신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적 구원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세계는 사탄의 귄세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온 세계에 있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세차게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로마서 7장 24~25절)󰡓라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총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이 아직도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즉 그의 육신은 아직도 속량되지 못하여 죄 가운데서 신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때에만 한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영적인 구원만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의 몸을 죄악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실 때까지는 사탄의 주관(主管)에 얽매어 우리의 몸은 죄의 법을 섬겨야 합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만이 우리의 영적, 육적 구원을 완결지으실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오늘날 영적 구원만을 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는 달리 육적(실체적)인 기반을 갖지 못한 기독교를 주관하는 하나님은 영적인 왕국밖에 주관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옛날 예수님을 바라던 유대교인과 같이 지상에 나라와 교회를 중심삼은 아무런 터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미국이 이스라엘 나라와 같이 오시는 메시아의 주권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독교의 대표 국가가 돼 있습니까? 육적으로는 아무런 발판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는 시간은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와 세례 요한 일당과 열두 사도를 전부 다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오른편 강도도 죽는 자리였습니다. 죽어 가지고 영적으로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바로 영적 구원의 길이 열린 시간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십자가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기독교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부활한 후, 40일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이건 십자가와 관계없고 부활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영적 세계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사탄이 이 나라와 이 세계의 주권자가 돼 있으니, 사탄이 주관하는 세계가 돼 있으니 이걸 놔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타파해 가지고 다시 본래의 하나님의 뜻의 세계로 돌이켜야 하니 메시아가 다시 와야 됩니다.
오시는 메시아가 구름 타고 와서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16장 19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할 때 베드로에게 천국문 열쇠를 주면서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두고 보면, 땅에서 타락해서 땅에서 맺혔으니 땅에서 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영계가 문제가 아닙니다. 땅이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땅으로부터  와야 되는 것입니다. (74-73, 74.11.12)
     
     
6. 십자가상에 있는 예수님의 고난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던 예수님의 생애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그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대하여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한복음 7장  3~4절)󰡓 했던 것을 보더라도, 그 가정 전체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환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민족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한 엄청난 뜻을 실현해야 하는 예수님에게 제1의 발판이 되어야 할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깨져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집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명절이 되어 먹을 것이 있으면 그의 형제들은 자기들끼리 숨겨 놓고 예수님을 따돌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을 것을 그리워한 것이 아닙니다. 몰리던 예수님은 그런 것보다도 명절을 맞이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고 부모의 손을 잡고 그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것이 말할 수 없이 그리웠습니다.
크나큰 사명과 크나큰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요셉 가정을 하나의 터전으로 삼아 이 터전 위에 하나님이 소원하는 가정을 세우고, 예수님의 친족을 기반으로 세례 요한을 포섭할 터전을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이 떠나가고 부모가 떠나가고 형제가 떠나가고 친척이 떠나가니, 예수님은 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노정은 예수님의 제2차적인 노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정을 잃어버리고 공생애 노정을 출발할 때 그는 누구보다도 슬픈 마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가정에 대해 크나큰 천륜의 뜻을 두고 바랐는데도 불구하고 그 가정을 버리고 나서야 했던 외로운 그 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러한 어려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에는 오직 승리의 날을 바라보면서 󰡐그날이 오면 알리라󰡑 하며 참고 나왔습니다. 그에게 외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한 결의가 있었던 반면 그 마음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슬픈 마음을 품고 나선 예수님을 향하여 세례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며 그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 일파는 모심의 도리와 충성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예수님과 분립된 입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볼 때 외적인 가정, 즉 가인적인 가정의 입장이었던 세례 요한을 찾아가는 예수님 앞에 그마저 예수님의 내적인 심정을, 품은 뜻을 알지 못하고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툴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예수님은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세례 요한으로부터 증거는 받았으되 그 앞에 마음을 주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을 중심삼고 외적 울타리를 만들어 전체를 수습하시려 했던 소망은 여지없이 깨져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예수님은 유대교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교를 찾아간 것은 세례 요한의 실수까지도 수습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유대교도 역시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기를 배척하는 유대교를 뒤에 두고 교단이 반대하던 민족을 찾아가셨던 것입니다. 만일 그 나라가 하나의 독립국, 하나의 주권 국가가 되어 있었더라면 군왕이나 그 나라의 주권자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고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었고, 그렇다고 로마를 대적하여 나설 수도 없는 입장에 처해 있던 예수님의 가슴에는 말할 수 없는 한이 서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33년 생애 노정에서 슬픔과 고통과 한을 남겼지, 소망과 행복과 뜻을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민족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교단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 세례 요한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했고, 그의 가정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한 예수님은 할 수 없이 이 고을에서 반대하면 저 고을로, 이 거리에서 반대하면 저 거리로, 유대인이 반대하면 이방민족에게로, 이 가정이 반대하면 저 가정으로 방랑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장  20절)󰡓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가려야 갈 곳이 없고 오려야 올 곳도 없는 예수님이었지만, 그는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짊어지고 내적으로 고뇌해야 했습니다. (14-217, 64.12.27)
     
     
예수님은 왜 비참한 무리들을 찾아가게 되었던가
     
이렇게 가정에서 몰리고 친족에게 몰리고 교단에서 몰리고 민족에게 몰린 예수님은 할 수 없이 맨 비참한 자리를 찾아갔습니다. 그 시대에 뭇 사람이 환영하고 뭇 사람이 바라보는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단념하고, 할 수 없이 비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만 되었느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리에 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야 하고, 그 시대의 제사장 교법사들을 전부 그의 휘하에 두고 유대 나라를 재창건해야 할 사명을 가진 주님인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민족적인 기대는 뒤로 하고 비참한 무리들을 찾아가게 되었던가? 이러한 것을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할 수 없이 원통해하고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미천한 자리를 찾아가던 예수님은 최고의 자리에서 민족을 수습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수습하여 만방에 널려 있는 나라들을 장중에 휘어잡고 악을 심판하여 원수의 국가를 전부 항복시킨 후 아버지 앞에 영광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통일의 한 날, 승리의 한 날을 그 마음에 얼마나 고대했겠습니까? 크나큰 소망과 크나큰 책임, 크나큰 사명이 그 가정으로부터, 세례 요한 일파로부터, 유대교로부터, 그 시대의 지도자로부터 배척을 받아 여지없이 일그러진 환경에서 이것을 다시 수습해야 하는 내적 고충은 순탄한 길을 가는 사람의 몇 백배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충을 품고 가야 했던 애절하고도 불쌍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이 감람산 기슭에서 그토록 애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려야 했으며, 어찌하여 이 거리 저 거리로 몰려다녀야 했느냐? 그가 가는 곳곳마다 어찌하여 배반자의 무리를 대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느냐? 이것이 수수께끼라면 수수께끼요, 인간적인 사정으로 보면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하늘편에서 볼 때는 분하고 원통한 사실입니다. 이런 일을 저질러 놓은 유대교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하며, 세례 요한의 책임이 얼마나 크며, 요셉 가정과 마리아의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 
예수님은 어디로 가려야 갈 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등 무식한 어부와 세리를 찾아가던 그 발걸음마저 민족이 곳곳에서 막고 있으니 갈 곳이 없었습니다. 어디를 뚫고 가려야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리고 이방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복귀섭리의 뜻을 중심삼고 4천년 동안 수고한 터전이 이스라엘 민족이기 때문에, 민족적인 모든 것을 판결지어 내적으로라도 이끌고 가야 합니다. 민족은 잘못했지만 책임진 분야에서 그들을 어떤 조건이라도 세워서 하나님 앞에 내적으로라도 상속받아 가면 모르되, 상속을 받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14-219, 64.12.27)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
     
예수님은 세계를 갖기 위해 오신 분이요, 하늘땅을 품기 위해 오신 분이요, 만민을 통치하기 위한 주권자로 오신 분이요, 만세의 영광이 그로 말미암아 지상에 이루어져야 할 중심적인 존재로 오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전부 이땅에 주기 위하여 오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배반했기 때문에 줄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포용해 주어야만 했던 예수님의 억울하고 분한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적인 소망, 천주사적인 소망을 품고 환경을 개척해 나간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신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게 될 때 저주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책임을 짊어진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여 저주해 버리면 4천년 동안 수고한 하나님의 수고가 여지없이 깨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은 분하고 원통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수고가 깨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만일 오른손에 쥐려 했던 것을 쥐지 못하면 왼손으로라도 쥐고 나아가 격돌해서 하나님이 남긴 뜻과 수고한 터전을 상속받아, 그것을 다시 세워 드릴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분하고 원통하게 한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나가야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소원과 역사적인 한을 전부 해원성사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기에 이 민족을 세워 나오기까지 하나님의 수고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의 노정을 갈 적마다 다칠세라 피해를 입을세라 보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길이길이 남겨질 무리로 이끌어 나오며, 유대교단을 중심삼은 메시아 사상에 의하여 전체가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역사적인 터전이 예수님 앞에 모두 반대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은 그 개인적인 서러움도 컸지만,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환경을 다 잃어버리고 겟세마네 동산을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길에 섰을 때, 그를 반대하던 무리들은 좋아했을지 모르지만, 그를 세운 하나님과 그를 따르던 민중의 소망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슬프고 고통받는 것쯤은 당연하고 또 그 어려움은 참을 수 있으되, 그 배후에서 4천년 동안 찾아 나온 하나님의 수고의 전부가 깨어져 나가는 것이 슬펐습니다. 
하나님이 역사노정을 개척해 나오는데 제물이 되었고, 모든 수고의 노정에서 남아졌지만 현실에서 책임 다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단을 바라보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대에 비례하여 그들에 대한 저주와 분함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 저주를 돌려서는 안 될 사정이 있었기에 그는 땅에 왔던 한 조건을 민족과 세계 앞에 남겨야 할 책임을 생각하면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갔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정이 어떠했다는 것을 오늘날 신부 되기를 자처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14-221, 64.12.27)
     
     
제자들과 하나되지 못한 예수님의 슬픔
     
예수님은 3년여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제자들, 즉 󰡐당신이 가시려는 곳은 저희가 소망하던 곳이요, 당신이 계신 곳은 저희가 찾아 나오던 곳이요, 당신이 사시던 그곳은 저희가 행복의 터전으로 바라던 곳인 줄 아오니, 당신과 더불어 살고 당신과 더불어 죽겠다󰡑고 다짐했던 베드로 등 12제자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형용할 수 없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사정할 수 없는 외로운 심정을 품고 하나님 앞에 면목없어 하시던 예수님, 민족에게 쫓겨 감람산 또는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홀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심정을 여러분은 진정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이 땅을 행복의 터전으로 바꾸기 위하여 독생자인 자신을 이 땅에 보냈는데, 도리어 자신이 슬퍼하는 입장에 서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정에 못을 남기고 가게 됨을 생각하게 될 때, 예수님은 하나님 대하여 면목이 없었습니다. 수천년 동안 수고해 온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하기 위해서 오신 이스라엘의 구세주요, 이스라엘의 군왕이 되실 예수님이 민족을 잃어버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담판짓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불쌍한 고아였습니다. 이 땅의 어느 한 곳에도 마음 둘 수 없었던 가장 불쌍한 고아와 같은 예수님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슬픔과 기쁜 감정은 있기 마련인데 예수님은 기쁨의 대상 하나를 찾지 못한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상에서 제일 슬픈 고아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사명과 책임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외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아버지!󰡑 하고 부르기에는 정말 면목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떠나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던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부르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세포가 뛰고 뼛골이 녹아지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3년을 같이한 세 제자들은 잠들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도 참지 못해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 것은, 메시아를 대접해야 할 이 땅의 인간으로서 이 이상 원통한 일이 없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님의 슬픈 심정에 공명하여 그 옷깃을 붙들고 그와 함께 통곡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기독교가 이토록 비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수제자가 되어 죽었으면 그들은 부활했을 것입니다. 전인류를 위하여 찾아온 메시아 앞에, 역사적인 사명을 책임진 예수님 앞에 그들이 해야 할 책임을 못다 함으로써 예수님이 가신 이후의 기독교는 비참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세 제자가 책임 못한 죄 때문입니다. (14-222, 64.12.27)
     
     
예수님의 신부될 사람의 자격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서 메시아를 찾기 원합니까? 여러분들은 어떠한 자리에서 신랑된 예수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어떠한 준비와 어떠한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기를 원합니까? 오늘 이 현실에서 이것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호화찬란하게 갖춘 영광의 등불을 가지고 󰡐그대는 나의 신랑이요󰡑 하며 맞이하는 신부를 예수께서 원할 것이냐?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외로운 자리에서 눈물지으며, 끓어오르는 심정을 붙안고 󰡐우리의 선조들이 책임 못하여…󰡑라고 말하는 비참한 모습의 신부를 원할 것이냐?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주님은 영광의 신부를 만나기 전에 고난의 신부를 찾아가십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신부된 인연을 거쳐 여기에 신부의 자격을 갖추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의 노정입니다. 아버지의 슬픔을 그 자식이 벗으려면 아버지의 슬픔 이상의 슬픈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신부를 맞기 원할진대 어떠한 신부를 원할 것이냐? 예수님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한 전부를 알고 그 가슴속에 맺혀 있는 모든 것을 알아서 위로해 줄 수 있는 신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가슴속에 맺혀 있는 한과 고통을 풀고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신부, 그런 신부를 예수님은 요구할 것입니다. 선민으로 택하여 4천년 동안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수고를 하면서 찾아 나오던 그 이스라엘 민족을 저버려야 하는 하나님, 그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둘도 없는 독생자인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배반하는 민족을 대하여 그래도 복을 주어야 할 하나님,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입장에 계신 하나님의 심정을 위로할 수 있는 신부를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황태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왕자입니다. 황태자로 오시는 메시아, 그 메시아 앞에 신부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자격을 갖추어야 되느냐? 신랑될 그분 앞에 안팎으로 상대될 수 있는 자라야 합니다. 그가 인류를 사랑하듯이 그 신부도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그가 하나님을 대하여 염려하듯 그 신부도 염려해야 되고, 그가 현세로부터 앞으로의 세계를 책임지듯이 그 신부도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러한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복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됩니다. 󰡐화를 저에게 주시옵소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복을 주러 왔던 예수님을 배반해 버렸기 때문에, 그 역사적 죄를 나를 희생하여 탕감하고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받기 전에 󰡐역사적인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해야 됩니다. 아담 해와가 저지른 죄의 뿌리까지 몽땅 뽑아서 뒤넘이치겠다는 결의와 함께 슬픔과 고통, 곡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 모든 것을 탕감하겠다고 하는 사람이라야 신부가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적인 싸움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대신해서도 싸우지만, 수많은 민족을 위해서도 싸우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도 죽음의 고비가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든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을진대 하나님은 그를 위해 슬퍼해 주어야 되고, 그의 갈 길을 개척해 주어야 되고, 그의 방패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루 한 시간도 편안한 잠을 잘 수 없고 하루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또한 그 신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하늘땅에 맺혀 있는 역사적 분함을 풀기 위해 세계를 대표해서 󰡐아버지, 저를 때리시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세상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효자는 자기의 동생이 잘못하여 부모가 채찍을 들면 󰡐아버님, 어머님, 저를 때리시고 동생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의 본질이 변했습니다. 이 한국에서 하나님 앞에 불리울 수 있는 대표적인 신부가 있다 할진대, 󰡐아버지시여 ! 수많은 교단의 슬픔을 전부 저에게 책임지워 주시고 저를 때려 주십시오󰡑 해야 됩니다. 세계를 대신한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저를 채찍해 주시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나 하나 배척받고, 나 하나 버림받고, 나하나 핍박받고 나혼자 책임져서 전세계 인류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 영광이요 소원입니다󰡑 하는 사람과, 󰡐좋은 것은 내 것, 너의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신부로 택하겠습니까? (14-223, 64.12.27)
     
     
예수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 마디에 담긴 뜻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니 그들은 이미 반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당신이 가지고 온 복은 우리가 짊어질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했다면 세계가 돌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이 땅의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수습해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임을 다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 당시 그의 제자들은, 요즘 말로 하면 󰡐너는 좌정승, 나는 우정승󰡑 이런 얘기나 했다는 겁니다. 고난받고 핍박받으며 몰림길에 선 예수님에게 그런 영광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핍박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제자들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으니 천하통일은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과 교단을 잃어버린 예수님에게는 이를 다시 수습해야 할 2차적인 노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2차적인 노정을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4천년 동안 수고한 내적인 인연과, 교단과 민족에게 남은 외적인 인연을 결정지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명이 예수님에게 있는데도 그의 제자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 무식한 자들이 알게 뭡니까?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이 얼마나 처량한 말입니까? 
예수님이 가는 길은 민족 앞에 쫓김받는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핍박의 길이었고, 이스라엘 민족을 재창건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수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고 유대교단을 세우기 위하여 4천년 동안 수고한 그 수고를 단시일에  조건만이라도 갖추어 탕감해야 할 책임이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광만을 바라는 제자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할 수 없이 홀로 하늘과 땅과 역사적인 인연을 책임지고 십자가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땅 위에 세운 민족이 책임 못한 것을, 세운 제자들이 책임 못한 것을 대신 책임지겠다고 나선 걸음이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골고다 산정까지의 걸음입니다. 
십자가상에 매달려 계시던 예수님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운명하기 직전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4천년 동안 그렇게 섭리를 이끌어 나오며 하늘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를 고대하여 보냈던 메시아가 운명하는 그 시간에는 하나님까지도 십자가에서 얼굴을 돌리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왕자로 왔던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비운의 말을 남긴 것은 인류 역사의 오점이요, 역사적인 오점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산정에서 남기신 한을 청산짓기 위해서 눈물과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을 오를 때 그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 눈물은 인류에게 남아진다, 내가 가는 십자가의 길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십자가의 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면 내 책임은 끝나지만, 내가 간 후 너희들의 책임은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책임, 가정적인 책임, 종족적인 책임, 민족적인 책임, 국가적인 책임, 세계적인 책임, 천주적인 책임이 남아 있으니,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눈물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며,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벅찬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던 예수님은 역사를 더듬고 세계를 더듬고 혹은 과거를 뉘우치고 시대를 비판하면서 심판의 한 기점을 남겨야 할 억울한 입장에서도 수고한 하나님을 이 땅에 모실 수 있는 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엄숙히, 묵묵히 골고다 산정까지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한 그 말은 자기 개인만을 중심삼고 얘기한 것이 아니라, 크나큰 사명을 갖고 온 메시아로서 한 말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나와 더불어 같이했던 수많은 사람은 버리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버리지 말고, 열두 제자를 버리지 말고, 이스라엘 나라를 버리지 말고, 앞으로 올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한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적인 최후의 한마디였습니다. (14-227, 64.12.27)
     
     
십자가상에 서신 예수님의 고통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야 할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우리는 아버지 앞에서 민족을 부여안고 몸부림치오니 민족을 버리지 말고, 이 세계를 부여잡고 몸부림치오니 이 세계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땅을 바라보아도 깜깜했고 만민을 바라보아도 깜깜했습니다. 너무도 깜깜했던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상에서도 한줄기 끓어오르는 마음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가운데는 󰡐하나님이여 영원히 버리지 마시옵소서. 아담 해와로 인하여 인류가 버림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역사적인 심정을 붙들고 수고하신 당신의 수고를 버리지 마시옵고, 당신이 공들인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를 버릴지라도 당신이 세우고자 하셨던 소망은 버리지 마시옵소서. 이 민족을 통하여 만민을 통치하고자 하신 당신의 이념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는 벅찬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도 괜찮지만 당신의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신을 위한 충신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충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또한 효자의 도리는 세우지 못했사오나, 효성된 마음만은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에는 이런 사람마저도 없는 상황에 저마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개체를 한탄하여 하신 기도가 아닙니다. 역사성을 띤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고한 아버지를 부여안고 호소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념이 아버지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거기서 재창조, 부활의 권능이 벌어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한 것도 사랑을 가지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노고를 생각한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됩니까? 제가 천번 만번 죽음의 길을 가더라도 저들을 버리면 하나님의 수고의 공적이 깨져 나갑니다󰡑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붙들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4천년만에 왔던 메시아를 우리 선조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대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분노해야 할 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 세 제자들의 행동입니다. 세상의 한 나라를 위해서 가는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없거늘, 자기가 섬기던 스승이 죽음의 길을 가는 데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메시아를 만나려면 죽음 길을 자진해서 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시고자 하는 사람도 십자가의 고개를 넘어서 부활해야만 됩니다. 이것이 천리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면 잃어버린 자리에 가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십자가가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예수님의 한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한의 실체가 제물이 되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개인․가정․종족․민족을 거쳐서 하나님의 주권 국가를 세워 가지고 이 세상을 수습해 나오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제2의 판도를 수습해야 하는 기독교는 예수님과 성신의 이름으로 수습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과 성신은 다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찾아 세우기 위해서 긴긴 세월을 수고해야 합니다. 한 가정을 찾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정을 세우던 이상의 수고를 해야 하고,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난을 당하던 이상의 고역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비참한 환경에 떨어졌던 이스라엘 민족사, 2천년 전의 환경을 재현한 것이 지금까지의 기독교 역사입니다. (14-229, 64.12.27)
     
     
선지자들의 화신체였던 예수님의 각오
     
예수님은 역사적인 소망의 실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옛날 아담이 소망하던 실체요, 노아 앞에 약속했던 소망의 실체요, 노아의 애달픈 사정을 대신한 실체요, 노아의 심정을 대변하는 실체였으며, 아브라함에 대해서도 그렇고,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세례 요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혀를 깨물고 이를 악물며 참아 나아간 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그는 역사를 걸어 놓고 마음속으로 호소했습니다. 󰡐나는 아담과 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습니다. 이 땅에 불신의 씨를 뿌린 아담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사랑해야 할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이는 되지 않겠습니다. 죽일 수 있는 자리에서도 용서해 주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때 노아 할아버지의 친아들로 태어났더라도 노아가 120년 동안 아라랏산에서 방주를 짓던 작업에 대해서 별의별 욕을 다했을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나 바닷가에서 지을 일이지 산중이라니…. 그것은 일부러 세상의 어떤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꿔 놓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내나 아들딸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가정을 복귀하기 위해서는 전도를 해야 됩니다. 민족은 물론이요, 눈뜬 사람 전부, 집안 사람 전부가 배척하면 할수록 뜻 앞에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앞에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노아 할아버지의 아내가 날이 새기 전에 와서 󰡐영감님, 방주 지을 시간이 늦어지니 어서 일어나세요. 새벽기도 해야 되는데 어서 올라가 보세요󰡑 그랬겠어요? 요즘 한국 여자들은 일년만 고생시켜도 바가지 아니라 멱살을 쥐고 그럴텐데…. 그랬겠느냐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이 120년이지….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 세 아들이 󰡐아! 우리 아버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시니 어서 하십시오󰡑 그랬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는지 그들이 알 턱이나 있나요? 그렇다고 하나님이 󰡐야, 노아야 반드시 어려움은 있는 것이다󰡑 했겠어요? 그러나 노아는 한번 받은 명령을 120년 동안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끌고 나갔습니다. 󰡐너희들이 그를 쳐라, 그를 배반해라, 동료들도 반대해라󰡑 해 가지고 그들을 치기에 합당한 조건을 성립시키고서야 심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방주를 짓던 노아의 화신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조소가 내 일신에 부딪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생명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정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충신입니다. 
아브라함도 우상 장사 데라의 아들로 태어나 호화롭게 살던 환경에서 하나님이 불러냈습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 하셨습니다. 나라 없는 백성, 부모 잃은 자식이 되라는 것입니다. 친척이나 가정을 중심으로 애착을 느끼던 전부를 깨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버지가 우상 장사인 것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이것을 다른 무엇으로 뜯어고칠 수 없겠는가 하는 혁명적인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불러낸 것입니다. 불러내 보니 쓸만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려라󰡑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려라󰡑 하니, 󰡐예󰡑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쳤지요? 미쳐도 잘못 미쳤지요? 미쳐도 올바로 미쳐야지, 이것은 잘못 미친 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저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아담 대신자요, 아벨 대신자요, 노아 대신자요, 아브라함 대신자요, 이삭 대신자요, 야곱 대신자니 믿음의 아들딸을 대해서 참다운 어버이가 되겠다는 입장에서, 그는 십자가 상에서도 󰡐내 몸이 제물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겠습니다󰡑 할 수 있었습니다. (14-231, 64.12.27)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의 구원이 아닌 부활의 구원이다
     
앞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와서 󰡐내 신부 될 사람 있으면 목을 내놓고 나와라󰡑할 때 서슴지 않고 나올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아이가 우는데 젖 좀 먹이고 나서…󰡑 그래도 되겠어요? 목숨을 걸고 가야 됩니다. 
하늘을 찾아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승리해야 됩니다. 십자가 도상에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됩니다. 󰡐이놈의 사탄아, 4천년 동안 하나님의 섭리를 파탄시켜 온 사탄아󰡑 하고 참소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부활의 영광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완성의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망하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전부 버리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어미를 버려라! 자식을 버려라! 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노정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구원도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고난의 열매로써 한을 청산짓기 위한 자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를 떠나서 승리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영생의 자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달아 놓았는데,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원통하다고 그럴 것입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어 찾아야 합니다 부활의 도리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그런 길을 밟고 나온 것입니다. 
신부의 도리를 찾아 나가는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예수님의 심정을 배웠습니다. 그러니 이 민족을 부여안고 세계를 부여안고 통곡해야 합니다. 󰡐모든 슬픈 사정이 있다면 나를 제물로 삼아서 내가 비참한 자리에 나가겠습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여, 내가 그런 각오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여! 선조들이 남긴 역사적인 오점을 내가 탕감하고 청산하겠습니다󰡑 하는 부르짖음이라도 있어야만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런 입장에서 󰡐나는 아담같이 안 되겠습니다. 가인같이 안 되겠습니다. 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제물 실수하던 아브라함같이 안 되겠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2타하던 입장에는 서지 않겠습니다. 책임 못한 세례 요한의 자리에는 안 서겠습니다. 책임을 완성하는 자리에 서겠습니다󰡑 했던 것입니다. 아담이 믿지 못하여 실수한 것을 믿고 넘어가야 합니다. 땅을 적신 피의 호소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인 기준에서 싸움이 벌어질 것을 아신 예수님은 󰡐내가 죽더라도 피로써 호소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공적으로 하나님의 분한 역사를 막아야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에 못지 않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물 실수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고역 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역사적인 원통함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했습니다. 이런 기도를 예수님은 했던 것입니다. 
원래 모세가 아버지라면 아론은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 아론이 책임 다하지 못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던 것과 같은 역사적인 모든 실수의 조건을 자기 일신에 걸고 그 반대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여안고 넘어가야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버린다는 것은 역사를 탕감하겠다는 것이요, 부활했다는 사실은 재역사가 출발한다는 것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탕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자리를 통한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4-233, 64.12.27)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적인 심판관
     
아담 가정에 아벨을 세우고, 노아 가정에 함을 세우고, 아브라함 가정에 이삭을 세우고, 야곱 가정에 요셉을 세우고, 모세 앞에 아론을 세우듯이 예수님 앞에도 세례 요한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역사를 망쳤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타락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부자가 역사를 망쳤으니, 이러한 역사를 복귀하기 위한 쇠사슬을 짊어진 예수님은 세계적인 부모의 입장에서 세계 인류의 대표인 세례 요한을 맏아들격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런 후계자가 자빠져 버렸습니다. 그것도 시시한 일로 목을 내놓고…. 그것이 세례 요한의 책임이겠습니까? 그는 유대 관원을 움직일 수 있는 인격자요,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3년여 동안 도의 생활을 겸비한 사람이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선지자로 또는 예언자로 모셨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실수하여 넘어지니 할 수 없이 그 대신으로 베드로를 세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례 요한 대신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힘쓰는 자가 얻나니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결판짓는 마당에 베드로에게 󰡐역사적인 선조들의 모든 잘못은 내가 책임질 수 있으니, 너는 아들의 책임을 다하라󰡑 한 것입니다. 󰡐아담 가정의 참다운 아벨이 되고, 노아 가정의 참다운 함이 되고, 아브라함 가정의 참다운 이삭이 되라. 복귀의 산물인 이 모든 것을 믿는 입장에서 제물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면 베드로는 믿음의 아들입니다. 아들 만들려고 했으니 베드로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서 죽었더라면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비참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을 수습하여 영적 구원의 복귀 역사를 하셨습니다. 육적 복귀는 못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통일교회의 다른 점입니다. 기독교는 영적 구원의 입장에 있지만 통일교회는 영육 구원을 주장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뜻을 이루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들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멘󰡑이고, 신앙생활이고 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믿어야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났든 못났든 예수님의 핏줄로 태어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민족적인 책임자가 되고, 교단적인 책임자가 되고 국가적인 책임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책임자가 못 되고 갔습니다. 
그런 길을 가기까지의 예수님의 생활은 어떠했는가? 이스라엘 민족과의 모든 관계가 다 청산되었느냐? 안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길을 가면서 자기 가정에서 쫓겨나고 친척에게 쫓겨나고 교회와 나라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죽인 연고로 배반받고, 죽음의 길을 간 예수님 이후부터 험한 길을 가는 민족이 됐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적인 심판관(審判觀)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몰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쫓기고 몰리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메시아를 그렇게 대했으니 탕감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쫓겨남으로써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전부 쫓겨났습니다. 세계에서 국가에서 자기 가정에서 전부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집안이 전부 반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배반받던 그 노정을 전부 걸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종결지으려면, 한 나라에서 예수님이 당대에 당하던 모든 고난을 탕감해야 됩니다. 유대 나라는 예수님이 가신 이후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유리고객했습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배척받은 민족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14-234, 64.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