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아담 해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어린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말로써 주관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한 사랑으로써 주관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며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해와를 대하기를 바랐습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는 철모르는 누이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지 않고, 이는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한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며 아담을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 때를 바라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이요,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할 수 있는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아버지 어머니로서 이 대자연을 주관하게 하기 위하여 지었다는 것입니다.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사람이 타락함으로써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가 된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기를 소망하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대해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의 아담 해와 이상의 자리에 나아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소원하신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 부른 사람이 이 땅 위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봤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봤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명사적인 아버지,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 왔습니다. 인간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는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의 관계를 밝혀 나왔습니다. 인간이 당신과 부자 관계라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하기 위하여 싸워온 것이 6천년 역사입니다.
의의 면류관이니 하는데, 선생님은 그거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던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나의 아버지! 하고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인간이 바랄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 66권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은 어디 갔는고? 타락 이전의 높은 위치에서 하나님과 즐기고 기뻐할 수 있는 인연의 세계는 어디 갔는고?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의 명령에 순응하는 자리, 만천하를 주관하라고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는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아들의 위치와 아들의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사탄이 무엇이냐?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쥐어져 있기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놈의 세상을 밟아치우고, 이놈의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에게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님이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중심 뜻입니다. (9-134, 60.05.01)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10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그가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그것이 땅 위에서 결판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 위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자리에서 도의 길,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엔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하고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하고 둘입니다.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나를 지은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생애의 아버지, 땅 위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땅 위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아버지를 다 갖고 있는데 저 사람이 무슨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큰소리 치느냐! 하겠지만 보십시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누구냐? 인류의 참조상입니다. 참아버지 참어머니입니다. 몸을 쓴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이 된 것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은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종교도 필요 없습니다. 왜 필요 없느냐? 본연의 아버지와의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 태어난 아들딸은 땅 위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을 대해서는 사탄의 사랑은 물론 그 어떤 사랑을 가지고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는 가운데 선남 선녀로서 성례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거이 그 가정에 필요한 물건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과 해와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인류의 표본적인 참부부가 되고, 하나님 앞에는 참다운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한때 아버지여, 제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저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저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본래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행복한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천국입니다. (9-136, 60.05.01)
중생해야 할 인간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냐? 후아담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면,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텐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선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성신이 바로 어머니신입니다.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신인 성신을 보낸 것입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여인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디모데전서 2장 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을 낳았을 텐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이 이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이 무엇이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리고 중생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아버지요 신랑이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요 신부입니다. 인간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신랑되신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 없이는 못 살고 성신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다시 인간에게 주입되면 중생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을 낳는 법이 천지 이치 가운데 있습니까? 없습니다. 구멍이 생겼으면 땜질을 해야 합니다. 갖다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주이신 동시에 인간의 아버지입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입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 놓아야만 천지 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땅 위에 살고 있으되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참부모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같은 너희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없습니까, 부모가 없습니까, 신랑이 없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느냐?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고아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렸으니 고아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신랑되신 예수님과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과부입니다.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됩니다. 세상일도 그렇습니다. 끄트머리에서 아무리 해봐야 수습이 안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 아담 해와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여기서부터 종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신학은 망합니다. 하늘의 역적이 됩니다. 그 신학은 하늘의 역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늘 앞에 심판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됩니다. 타락전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과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팠는가 하는 심정의 관문을 우리가 통과해야 됩니다.
어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을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됩니다. 대한민국도 그렇습니다. 근원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9-138, 60.05.01)
끝날에 처한 성도들이 취할 자세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날 때 어떠했던가? 그들은 쫓겨나는 자신을 두고 슬퍼하였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눈물의 기원(起源)이 되었고, 고통과 질고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는 그런 아담 해와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쫓아내면서 쫓겨나는 그들의 슬픔보다 더 큰 슬픈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권에서 쫓겨난 종족이요, 그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슬퍼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쫓겨나 있는 인간을 보고 오늘도 슬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자신을 중심삼고 하늘을 배반하여 쫓겨났던 인간은 어떻게 해야 복귀되는가? 내 슬픔이야 있거나 말거나, 내 억울함이나 내 사망이야 있거나 말거나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붙들고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복귀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을 뜻하는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즉 울음으로 출발한 역사의 기원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울어서는 안 됩니다. 사망선에 떨어진 인간을 6천년 동안 품고 인간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울고 고통으로 슬퍼해 온 하나님을 붙들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은 오냐. 네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이 반겨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면 하나님이 인간 때문에 슬퍼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고통당하였던 모든 것을 탕감하고 해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참아버지입니다. 4천년만에 하나님 대신 참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땅 위에 오신 분입니다. 4천년 동안 불쌍하게 허덕인 인류와 상봉하여 하나님 대신 그들을 붙안고 사랑하기 위하여 오셨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인간은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죽이고 보니 자기 아버지였습니다. 죽이고 나서야 자기의 참아버지인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4천년 동안 고생한 부모의 서글픈 심정을 모르는 인간들로 하여금 통곡하게 하는 하나의 자극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만난 자는 통곡하여야 됩니다. 통곡하더라도 예수님이 하늘을 대신하여 이 땅에 참부모로 오셨는데, 그 예수님을 죽인 것을 놓고 먼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통곡하고, 그 다음에는 오셨던 참부모를 위하여 통곡하고, 나아가 땅의 인류를 위하여 통곡해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끝날에 처한 성도들은 어떠한 통곡을 해야 할 것인가? 나를 위하여 통곡할 때는 지나갔습니다. 가정을 위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통곡할 때도 지났습니다. 이제 세계를 위하여, 하늘을 위하여, 성부․성자․성신을 위하여 통곡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랑을 중심삼고 창조한 전체 세계를 주관하는 이념권내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인간들이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참부모였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참부모를 잃어버린 서러움과 원통함을 느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한 본성이 인간에게 있었던 연고로 하나님은 그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재림주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 재림주님을 맞이해야 할 끝날의 성도들도 같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즉 역사적인 눈물을 대신 흘리고, 시대를 대표하여 대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살고 있는 동안에 이러한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다. 인간들은 오늘날까지 슬픔의 눈물은 흘렸지만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한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바로 재림의 날이고,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는 날입니다. (5-75, 58.12.21)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성경은 타락한 이후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중심이 아닙니다. 아담이 중심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을 아느니 모르느니 무신론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논란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못나고 미흡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해 야! 하면 그 피조물이 예! 할 수 있게끔 지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무슨 하나님입니까?
이제 종교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오고,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 사회관과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때는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계주의시대는 내 생활 감정을 넘어서고, 내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세계관을 넘어서 천주관(天宙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부모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 하나님이 오냐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이 땅의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라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때, 참다운 행복을 바라고 나가는 이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갈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을 넘어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 박힌 자가 있다 할진대,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그 무엇을 붙들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됩니다. 자랑할 것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찾을 것을 찾지 못했고, 가질 것을 갖지 못했으며, 자랑할 것을 갖지 못했습니다. 못 가졌으니 불쌍한 사람입니다.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어 보십시오. 아이고,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를 싸고 죽자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개의 국가나 민족권내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의 사람에게로 가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道)가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안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 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영계를 가르쳐 주는 도도 있지만, 윤리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놓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참부모가 깨지니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참부부가 안 나왔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이뤄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부들이 주님 오실 때에는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일지라도 남편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 갈 곳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이념이라면 항의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축복받은 참다운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당신을 모셔주기를 바라는데, 하나님이 공인할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남 일녀를 지어놓고 이렇게 살라고 했겠습니까?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을 하느냐?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세워지지 않았는데 그 후손된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있습니까?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9-140, 60.05.01)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복귀역사
우리 인류의 조상은 사랑하는 아들의 입장에는 섰지만 천지만물을 유업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의 자리에는 못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 대신 만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영원한 하나의 참다운 주인공을 세워 그를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맺으려 하였습니다. 일남일녀가 성숙하여 그들이 만물과 화동하여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된 것입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 자라고 또 자라서 참된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靈)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肉)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 하나님을 영원한 내 아버지라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다가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이 인간이 바랄 것은 무엇이냐?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됩니다.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가 의붓자식입니다. 그리고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성신을 잃고는 못산다. 내 몸과 피살이 그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맺어 양육받고, 성신의 감동과 더불어 성신의 도움을 받아 성신이 신랑되신 예수님을 대해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 귀합니까? 무슨 보물입니까? 둘이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기쁜 것이 못 됩니다.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둘이 소유하고 있는 그 자리에 행복이라는 명사는 없습니다. 천지간에 제일 귀한 분이 하나님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제일 귀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천지간에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모든 존재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금은보화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갖고 싶어하는 분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 가치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아들딸 되는 것은 문제없습니다. 천상천하에 어떤 귀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 지음받은 상대적 존재로되 하나님만은 주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내 것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러므로 그분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이 되고 딸이 되고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대하여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 수많은 인간이 왔다 갔지만 너만은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은 최대의 성공자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라는, 아들이라는 명분을 받았습니다. 심정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는 참다운 효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부터 어떻게 나오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고, 오늘의 자기를 대하여 어떠한 심정을 갖고 계신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그 아버지가 자기를 세워 어떠한 축복을 해주시고자 하는가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주이십니다. 무슨 구주냐?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주는 구주, 참부모를 찾아 주는 구주, 참부부를 찾아 주는 구주, 참자녀를 찾아 주는 구주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생명만 구원해 주시는 구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잃어버린 하나님을 찾아 가지고 오신 분이요, 잃어버린 참부모로 오신 분이요, 참부부의 신랑으로 오신 분이요, 하나님 앞에 참다운 효자로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 참부모를 사랑하는 자요, 참부부가 될 수 있는 자요, 참자녀가 될 수 있는 자입니다. (9-143, 60.05.01)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은 참부모를 찾아 헤매야 합니다. 실체(육신)를 가진 참부모는 새로운 이념과 비전을 가지고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인간이 그 참부모를 모시고 사는 세계가 바로 이상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재림이라는 명사가 성립되었습니다. (5-74, 58.12.21)
종교활동이란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일
오늘날 이 땅 위의 인간들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아담 가정의 혈족에서 벌어진 가인 아벨의 싸움으로 인해 찌그러진 죄악 역사가 오늘 세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죄악을 청산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청산해 주어야 하느냐? 타락한 아담 해와로서는 청산할 수 없습니다. 죄악 역사의 청산은 타락하지 않은 조상이어야 됩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어야 합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백성들이 6천년만에 부모를 찾는 것입니다. 이 이상 기쁜 일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그러므로 종교를 갖는 것은 그러한 부모를 찾는 일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죽은 부모가 영원히 죽은 줄 알았는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습니다. 부모를 찾는데 재산이 문제입니까? 친척이 문제입니까? 나라가, 세계가 문제입니까?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부모를 찾는 일에 온갖 충성을 다해야 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부모가 죽어 가는데 땅이나 돈을 붙들고 희희낙락거리는 자식은 없습니다.
본성의 인연을 중심삼은 본연의 부모가 죽은 줄 알았는데, 그 부모가 다시 회생할 수 있다면 그 길을 내가 개척하기 위해 말할 수 없는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또한 누구보다도 하늘의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하며, 그 억울함과 분함을 느낀 그 자리에서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모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식의 도리며, 효자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때문에 생사를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세상의 좋은 것과, 세상의 핍박과 죽음의 길도 개의치 않고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충효의 인연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생명을 바치는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피 흘린 제단을 이어받아 개인의 제단, 가정의 제단, 민족의 제단, 세계의 제단을 쌓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물로서 하늘에 바칠 수 있는 그 민족이 복받는 권(圈)과 보호받는 권을 세워 오늘날 기독교의 이념을 발전시켜 나오는 것입니다. (20-122, 68.05.01)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우리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학문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땅 위의 어떤 보물을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권세를 가진 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면 망합니다.
제일 귀한 것이 만우주의 대주재며 주인공인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 할진대 이 천지가 그의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자기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마음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나님은 6천년 동안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우리는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야,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하나님이 불쌍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띠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없었습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고 소원하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귀한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인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입니다. 또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있다고 보면 아들격입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의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입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왔고, 지금까지 왔다간 수많은 우리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는 분을 우리가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나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한 일이 이뤄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문제가 아닙니다. 삼천리 반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귀한 것을 알려면 귀한 그 내용을 알아야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도 귀하기 때문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귀한 것을 감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안 됩니다. 가짜가 많기 때문에 끝날에는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했습니다. 참 것이 거짓 것 같고 거짓 것이 참 것 같습니다. 서로가 다 잘났다고 하고 서로가 다 옳다고 하니, 어떤 것을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과 담판해야 됩니다. 끝날에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가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문제를 걸고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판국입니까? 하고 담판하여 해결지어야 합니다.
그것을 해결지으려면 천신만고의 고통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인간이 잘 믿기 위해 고생하던 그 죽음의 고비도 늠름히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는 슬픔의 곡절도 많이 당하게 될 것입니다. 당하고 당하여도 내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는 각오로 천신만고 끝에 그 문제를 해결하게 될 때, 그 가치가 귀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사도들은 귀한 것을 다리 놓기 위하여 목 베임을 당하며 죽어갔습니다. 귀한 것을 친히 찾아 가져야 할 끝날의 성도인 우리는 무엇을 해봤습니까? 어느 누가 때리려고 하면 눈을 부릅뜨고 안 맞으려 하고, 그저 싸우려고만 하고, 한마디 억울한 말만 들어도 잠을 못 자고 보복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 번 맞고도 돌아서서 염려해 줍니다. 만 번 배척받고, 만사에 비운의 곡절이 깃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고, 고통의 역사를 잊어버리고, 창조 당시에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 바라보던 소망의 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애써 나오는 하나님입니다. 타락으로 한이 생겨났지만 이 한을 잊어버리고, 본연의 아들딸로 축복해 주어 내일의 행복의 동산에서 즐거워하겠다는 심정을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 하나님입니다. (9-148, 60.05.01)